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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8:55 1,264회 0건
-패관윤가 : "뻘"-

- 제 1 부 : 한걸음, 또 한걸음 -

소슬바람이 불어오는 어스름 새벽녘에 난 곁에 잠들어 있어야 할 벽수가 없음으로 잠이 화들짝 깨고 말았다. 언제나 홀로 잠들어 버리는 습관이 있었으나, 이제는 같이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사람의 기척이 의례 있었던 것처럼 흔적을 타는 것이, 아마도 옛말 처럼, 사람이란 들어온 자리보다 나간 자리가 더 크다는 말이 공감되는 지경이었고...

"일어났는가?"

열지도 않은 전방의 한가운데에서 오롯이 앉아 곰방대를 물고, 하릴없이 연기를 흘리는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아니, 밤새 고롭히고도 여적 심이(힘이) 남았는 갑서?"

"이 사람아, 그게 괴롭힌 건가? 운우의 정을 나눈 것이지..."

"운우는 개뿔...얼릉 요기나 허잔께요...감자나 쪄 무급시다요."

그래도 그녀는 먹거리를 책임질 여자는 여자인 게다. 벽수는 얼른 곰방대를 털고 부뚜막을 향해 일어서는 것이었다.

"자네 면을 보아하니, 심사가 번다한가 보네...어쩐일인가?"

"나 가튼 년이, 일이 있스믄 뭐하구 없스믄 또 뭐할겨...사는 입에 곡기나 안 끈키믄 그기 복인거쥬...."

"이래저래 굶기야 하겠소? 길지도 않은 인생....이리 외롭지 않은 것도 다행이니..."

난 독에 길어 놓은 물을 바가지로 솥에 떠다 붓는 벽수의 뒷춤을 와락 껴안았다.

"월래? 여적 심이 남았는가베? 감자 쪄묵다 말고설랑 이기 뭔 일이랴?"

나는 와락 그녀의 치마를 내려 버렸지만, 어려울 일은 애초에 없었다. 역시나 그녀는 속곳도 없이 그러고 있었기에...

"다 말라붙었슈...조식전에 등청이락두 허실 요량이믄, 침이나 쪼까 바르시든가유...낄낄.."

난 그녀의 그 키득대는 웃음소리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방사의 기본은 마음가짐이라 했던가? 음행을 불결하게 치부하지도 않으며, 상대의 심정을 편하게시리 달뜨게 하는 그녀의 추임새를, 내가 진정으로 기꺼워 하는 게다. 이미 바가지는 부뚜막의 열기에 깨지지 않도록 저만치 널부러 뜨렸고,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곧이어 두팔로 지지한 채로 응댕이를 한껏 디미는 걸로 보아, 뭔가 깊숙히 삽입되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아효.....쳐먹진 않코설랑, 뭔 침칠이랴? 그다지도 침 발르다가니 씹살 뿔컷슈...큭큭..."

"허어, 이 사람, 그리도 구성이 걸져서야 원...접통이 원만할까마는..."

"일딴 넣어 보랑께요...접통이구 나발이고 간에, 방맹이가 물 만나야 심을 쓰쥬..."

"이 사람이, 방맹이가 뭔가 방맹이가.....좋은 말 다 놔 두고...."

"아그그극...그기 ....으흐흐흑....방맹이지 뭔감유....시도 때도 업시 구녕이란 구녕은 사정 보덜 안코 패대기 질인디...억억....그기 순라꾼 육방곤이랑 다를끼 뭐 있슈..으흐흑..."

난 방사중에도 쉬지 않고 음란한 토설을 멈추지 않는 그녀의 성정이 좋았다. 입술을 깨물고 신음도 아껴가며, 똥 참듯이 음행을 치뤄대는 양가집 규수들과 다르게, 그녀는 하고 싶은 말과 곡성을 벼락같이 쳐대면서도 거리낌이 없는 걸로 보아, 색행의 끝을 마무리 한 뒤에라도 애저녁에 미련은 없어 보였다.

"아후후...뭘 쫌 쳐 멕이구...윽윽.... 지랄을 떨든가...어후후..나 좋아서 허는 지화자 락두 배창시가 겁나 고프긴 혀네....윽윽윽...아니, 징얼댄다구...빼면 워쩐데유?"

"사람하고는...나도 양심이란 것이 있는데...."

난 벽수에게서 몸을 떼기 무섭게, 선반 위에 장쇠의 눈을 피해 감춰둔, 날계란을 하나 냉큼 집어 들고,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고 번들대는 내 육봉을, 다시금 그녀의 따스한 음곡으로 밀어 넣었다.

"임자, 이거나 받으시게...어여?"

"워어미히....맛난거...먹고 주근 귀신은 배불뚝이 천지란 말도 있는디...워디서 났대?"

그녀가 돌아보며 내가 건넨 계란에 눈이 휘둥그래 지더니만, 곧바로 이빨로 위아래를 톡톡 깨서는, 쭉쭉 빨아 먹으면서도, 나를 향한 요분질은 멈출 줄을 몰랐다.

"쩝쩝....아효, 맛나부러...찝질 헌거이 꼭 좇물 맛이넹...큭큭"

"거 보시게나. 속 튼실하게 하기는, 양물즙이나 계란물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을."

그녀는 한방울 이라도 허투루 흐를까 싶었던지, 전신을 털럭대면서도 입가에 묻은 이물질을 탈탈 털어 입속에 넣고,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댔다.

"언능(얼른) 일루 줘 봐유....기왕지사 쳐무글거 곱으로 묵어볼랑게..큭큭...."

이번엔 그녀가 냉큼 돌아서더니, 내 물건을 입으로 한가득 물어댔다.

"그.ㄹ ㄱ ㅇ ㄷ ㅁ ㄱ ㅆ ㅅ ㅂ ㄹ ㄲ ㅇ?(그러고 있덜말고 쑤셔보랑께요?)"

하긴 커다란 양물을 입안 한가득 물고 있으니, 말이 제대로 나올 리 없었건만, 나는 응응대며 목젖으로 외쳐대는 그녀의 앙탈을 못알아 차릴 리 없었다. 그녀에게 빨리우는 자세에서 천천히 허릿짓을 더해가는 와중에, 그녀의 혓바닥은 그 장단에 맞추어 귀두를 붙들고 난장을 떨었다. 초심과 다르게 나의 심정은, 그게 입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망각하기 시작했고, 목구녕도 아랑곳하질 않은 채, 격한 풀무질에 점점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윽윽...윽윽...척....척...척...척..척척척척.....이리도 찰진 것을....으으윽....."

벽수의 기름진 머리결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녀의 튼실한 골반을 바시러지듯이 쥐어잡는 것처럼, 난 벽수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지화자의 끝을 보고야 만다. 몸은 바르르 떨리다 못해, 두 다리와 허리가 쥐가 나듯이 굳어지고, 눈 앞이 까매지더니만, 그 자리에서 두 무릎이 풀려, 털썩 주저 앉고야 마는데,

"컥컥컥....휴우.....쩝...요것뚜 만만찮쿠먼...왠간시리 기럭지가 장대혀야지 원....."

그제서야 난 두 눈 가득히 눈물을 흘리며, 벌겋게 충혈된 벽수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분별없이 박아댔던 내 양물로 인해, 숨길이 고달펐던 모양 이었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솟구치는 바람에, 난 와락 그녀를 껴 안았다.

"이 사람도....숨이 멕히면 말을 허지...그예 그걸 다 받아 재끼면 어쩌누?"

"쳐먹으라고 찢어진 아가리 아녀유? 꼬챙시가 아닌 담에야, 삼키고 말게 할 거이 뭐 있간디?"

그러면서도 눈물에, 콧물까지 훔쳐대는 것이, 단지 목이 막혀서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내 어깨에 턱을 괴고, 힘을 놓아버리는 그녀의 가슴은 언질이 없어도, 구구절절이 긴 사연을 나에게 전하고 있었다.

"간단히 요기나 하고, 나하고 마실(산책)이나 감세."

"워딜유?"

"옷가지나 좀 사고...그래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인네 살림은 있어야 불편이 덜하질 않겠나? 여기야 전방이지, 사람 사는 거처라고 하기에는....암튼 가 보자니깐?"

"일 없시유...이 년이 둘르고 뻣대봐야 들병이년인거 온 저자거리가 다 아는디, 빨게벗고 다닌들, 민대가리(=대머리)에 상투를 틀던, 그기 그거 아녀유?"

"괜찮다니깐....남들의 시선이 무에 그리 고까울텐가? 정작 살붙여 사는 건 자네와 내가 아니었던가? 내가 내 속에 품고, 아끼어, 은혜함이 누구에게 자랑하기 위함은 아닐세."

벽수는 나와 지내면서 그예 말라붙었다던 눈물을 자주 보인다. 웃음소리도 낭랑하건만, 그녀의 곡성은 남과 다른 것이, 보는 사람을 더욱 구슬프게 하는 구석이 연연했다. 인상을 찌그리는 법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조차 없이, 그 크고 검은 눈자위를 흔들지도 않은 채, 주루륵 흘려대는 낙루.....그저 눈물은 살아가며 그렇게 소리없이 흘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 물건인 것처럼, 그녀의 슬픔도 낙루속에 흔연히 스며들진 못했던가 보다.

"자네는 언제부터 이리 혼자 살았는가?"

"다.... 아시쟈뉴?"

"내가 어디 남 뒤나 캐고 다닐 위인인가?"

"평안도라 했자녀, 본시....... 충청도지만유..."

"뭔일루?"

난 그녀가 평안도를 벗어난 이후부터를 알고 있긴 했다.

"감자나 드시쇼. 들어봐야 귓꿍지에 똥이나 될 야그들.....뭣터러...."

"나중에 허지. 임자, 맘 내키면..."

벽수는 그 임자라는 단어에 화색이 도는 여인이었다. 그녀를 지나친 남정네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가리켜 천하에 몹쓸, 지 애비 물건까지 빨아자실 년 어쩌구 하면서, 음란의 극한을 치달리는 잡년으로 지칭해 왔으니 말이다. 게다가 옛일을 주어 섬길때면, 그녀의 시선은 먼 곳을 흩뿌리는 듯, 촛점을 잃어가는 것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벌커덩...."

장쇠의 전방문 여는 소리는 언제나 조심스러움이 없었다.

"해도 뜨기도 전에 시방....,킁킁... 살냄샌지, 털냄시가, 이기 이기 이기....."

"어허 이 놈이.... 말뻔새 하고는."

발밑에 밟힌 계란 껍질에 또 한번, 장쇠의 지분거림은 이어졌다.

"내 이럴 줄 알았땅게로...내 저 여편네, 삐약거림시롱 둘러댈 때부텀 알아챘다자뇨? 아효, 지져멕일 새도 없시, 까 드셔부렀구먼....지 입도 입인디....커참.."

"오늘 장에 가서 오리알 있거든, 사오니라. 실컷 쪄먹자꾸나."

"하이고, 입깔맛은 저리가고 배창시나 쳐불러라? 달걀이랑 오리알이랑 누가 같대유, 누가?"

"낄낄낄....먹고 똥되믄 거기서 거긴규...."

벽수의 한마디는 장쇠의 불평을 한방에 잠재우는 위력이 있었다. 장쇠는 이리저리 입질도 못하고, 애꿋은 계란 껍질만 발끝으로 지분댈 뿐이었고...

"어쩐 일로 오늘은 이리 늦었나?"

"세상에 젤루 신나는 거이 불구경, 쌈박질..."

"사람 뒈진 거?"

벽수가 거든 한마디에, 장쇠의 콧구녕이 댓평은 넓어진 듯 싶었다.

"엥? 아휴..... 이 눔의 전방, 얼릉 팽게고(=집어치우고) 자리나 깔아야 쓰겄넹.....어이구.....삐이익.."

장쇠는 벽수의 넘겨짚는 언사에, 얼굴이 노래지다 못해, 방구까지 지리는 것이었다.

"월래? 새벽 댓바람부텀 웬 똥바람이랴? 매려우면 싸재끼든가, 이 벼루지(=벼룩) 등짝만한 전빵안에서 당췌 숨이나 쉴 수 있간디, 시방?"

벽수의 호통에 아랫춤을 쥐고 돌아서서, 뒷간으로 내달리는 장쇠의 뒷태에, 누런 얼룩이 남은 것으로 보아, 돌아 오려면 한참을 걸려야 할 듯 싶었다.

"임자는 어찌 그리 눈치가 칼끝인가 말이야."

"심성이 조막돌만한 장쇠야, 낯짝이 호패 아닌감유?"

"허... 이 사람이.."

이미 그녀는 장쇠의 품성마저 꿰차고 있었으며, 전방을 들어설 때부터 슬금슬금 풍겨오던 구린내를 통해, 아침 나절부터 시신을 접하고서, 놀라 자빠지는 마당에, 뒤를 지린 것까지 간파하고 있었던 듯 싶었다.

"니이미...써글...아니, 미중알(=부모들이 변변히 못먹고 성장하는 어린애 들의 탈장을 막고자, 통변시에 강한 힘을 주지 말라고 가르치던 가상의 알로서, 직장안에 있다고 썰을 풀었으며, 설사를 해대는 사람을 가리켜 미중알 빠진 넘이란 말도 했다함.)은 뭣터러 심도 못쓰고 지랄이랴?"

장쇠의 심기가 여간 불편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난 곰방대를 피워 문 채로, 한 손으로 뜨끈한 감자를 주워들고 장쇠에게 건네며, 말을 붙였다.

"자자, 뜨끈허니, 일단 요기나 허게."

"우적우적....쩝쩝.....서린방(瑞麟坊)의 전옥서(典獄署) 근처에서 객줏집 허는 천가 있자녀유? 거 뭐시냐...귀퉁배기에 커다란 떡점 있는 그 치 말여유…"

"옥바라지 하는 이들에게서 점배기로 소문이 자자하긴 하더라만...근데, 그 자가 어찌?"

전옥서에 투옥된 죄인들 중, 옥바라지를 위해, 지방에서 상경한 친지들이, 일정 기간 기거하면서, 숙식이며, 옥바라지 음식들을 대신 해주어, 돈푼 꽤나 모았다고 알려지는 인물 이었다.

"아침나절에 지가 천가를 객줏집 앞에서 떡하니 마주 쳤는디, 면상이 허여케 겁나 질려설랑은 비칠데길래, 한마디 질렀쥬. 술찌끼(=숙성된 탁주를 거르고 남은 찌꺼기) 꽤나 말아드셨냐구유...."

"그런데?..."

"한두 꼽절 가는가 싶드만, 고새 팩 꼬꾸라지는 거 아녀유?"

"그래서는?"

"뭔일인가 싶어설랑은, 일으켜라도 볼상싶게 다가서는디, 월래?, 등짝 허리춤으로 시퍼런 칼이 꼽혀 인는디, 월매나 놀랐는가, 불알이 다 터지는 줄 알았다는 거 아녀유?"

나는 그 길로 부리나케 변사를 고신하고 돌아온 장쇠의 노고를 치하하고, 황급히 말을 맺었다. 그것을 듣고 있던 벽수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쩐일루?"

난 곰방대에 불을 붙여 벽수에게 건넸다.

"원한인겨...면식이 짠한 넘이고, 남정네여....그 간의 비밀을 나누고 있었던 그런..."

"어찌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녀자는 손모가지에 심(=힘)이 딸려 설랑은, 항시 칼을 후두를 때, 지 대가리 위로 흔드는 겨. 허리에 칼침을 맞았다는 야그는 평소 살의를 품기는 허였어도, 기회가 만만치 않았다는 거이고, 동틀 무렵 이어따는 거슨, 은신처가 따로 있는, 여 근방에 기거하는 작자가 아니라는 것이여. 대개는 동업허는 인간이었거나, 아님 서로간의 밀약을 부여잡고 살던 동패가 아닌가 싶소...휴우....."

"자네는 어찌, 한걸음이 아니라, 그리도 멀리보고 내닫는가?"

"미투리(=짚신)로 질러봐야 걸음짝이락두, 대갈빡 심사는 담쟁이(=담장 혹은 외벽, 또는 한계)가 읍서라(=없어요)"

그녀는 나보다 그렇게 앞서가고 있었다.




-제 2 부 : 돌고 돌아서-


그저 사람이 죽어 나자빠진 것처럼 보고 들은, 장쇠의 목격담이 유일한 증험이었음에도, 벽수의 추론은 아주 멀고 깊은 밀부까지 치고 들어가는, 집요함이 돋보였다.

"동패라...그리하다면, 근방에 기거하질 않는다는 것은 또 무엔가?"

"살의를 실행한 시기로 볼짝시면, 그 시각에 근방을 배회현다 혀도, 면식이 될 일이 없다, 그리 믿고 저지른 겨...그 말은 지를 알아볼 작자가 주위에 없다는 야그고, 고로 그 자는 평소 이 도성에 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지유."

"도성에 기거하지도 않으면서 밀약을 주고 받는 동패라니....그 비밀을 그렇듯 원거리를 사이에 두고도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자네는?"

"지도 그건 심이(=셈, 즉 짐작을 의미함) 잘 안되는 구만유."

객주의 점배기 천가를 두고 볼 때에, 원한을 살만한 구석을 억지로 엮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전옥서의 죄인들은 대개 지방에서 추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된 자들이 대부분 이어서, 자신의 연고지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그로인해 옥바라지 라는 요식행위는, 다분히 주변의 객주에서 약간의 수고비로 대행해 주는 것이 통례적 이었기에, 죄인의 친족들 입장으로 본다면 고마웠으면 고마웠지, 원한을 살만한 동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었다.

"옥바라지를 빌미로 무슨 원한이 쌓일만도....."

"하여간 남정네들은 대가리를 하나만 달아 놔야허긴 허는디.....쯧쯧....우쨔쓰까잉...웃대가리를 쳐내믄 아랫거시 말을 안들어 쳐무글 거이고, 아랫거슬 따내믄 아무짝에도 쓸모 업슬 거신디....방도가 없네그랴...."

"그건 또 무슨...."

"아니, 달랑 옥바라지에 전답팔고, 서까래 빼는 일도 아닌 거스로, 모다모아 푼돈일 거인디, 빌미는 무신 얼어주글 빌미....하여간 머리쓰는 일이 오줌빨보다 짧아치니 뭣에다 쓸까나..."

벽수의 나무람 속에는 아직까지 토설치 않고 자신만의 궁리에 빠져있는 면이 다분했으나, 그것이 무엇이냐고 바로대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아침나절에 변사에 대한 증인으로 장쇠가 불려가고, 전방을 나홀로 감당하느라, 여유를 가질 수도 없었으려니와, 홀애비 냄새가 지천이라는 골방을 뒤집어 까며, 먼지를 털어대는 벽수의 분주함에 정신이 없기도 했다.

"자, 여기 있네....어여?...사람 팔 떨어 지겠구만."

"이기 뭐데유?"

"자리를 비울 수는 없고하니, 임자가 알아서 장이나 보고 오지..."

벽수는 휘둥그레지는 얼굴로, 두 손을 치마에 벅벅 닦더니, 두 손으로 내가 건네는 엽전 몇푼을 받는다.

"이 사람아, 나나 자네나 매한가지 인데, 어찌 두 손으로 받고 그러는가?"

"그랴도 그러는 거이 아녀유....월래 노프신 양반 아니신가베...이런 천한 년이랑 어울릴 분이 아닝게라...."

그러나, 그 대답과 다르게, 벽수의 안색은 밝고 환하게 피어서, 꽃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도 일반의 여염집 아낙들은 일상으로 해대는 살림놀음을 처음 해보기에, 그 감격과 깨소금 맛으로 인해, 표정관리가 되질 않는듯이 보였으며, 엽전을 손에 쥐고 전방을 나서는 벽수의 발걸음마저, 허공을 나는 듯 가벼웠다.

"아니, 헌(=했던) 얘기 또 허고, 헌 얘기 또 허고....내참..."

입이 한자나 나온 채로, 전방으로 돌아온 장쇠는 툴툴거리기가 한이 없었다.

"그런 대갈빡 으루다가니 나랏일은 워찌 혀는지...한 댓번은 똑가튼 얘기를 혔다 안혀요? 귓꿍지에 장작이 틀어벡힌 것뚜 아니고설랑...나 원..."

"원래 공초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구설이 필적으로 증험이 되는 과정이니 그럴 법도 있느니...."

"칼침 맞은 자리가 갈비 윈지, 아랜지, 지가 알게 뭐래유....검험을 혔스면 지보다 잘 알 거인디...월매나 멍청헌지, 좌우도 바꿔 놓코는 떡하니 면까고 있는 경우는 또 뭐래유?"

"그건 너무 했구만. 좌우가 바뀌었다면...."

"긍게..나랏노글(=나랏녹, 즉 공무원 월급), 너무 날로 자시는 거 아니냐 이 말이쥬, 내 말은...."

사실 검험의 기록이 공정하다고는 하나, 중형의 경우, 세번에 걸친 공초의 심사가 있기는 해도, 번번히 그 기록의 공정성에 먹물을 튕기는 사례들, 예를 들자면, 세력 있는 치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공초내용을 변조해 주는 대가로 뇌물을 먹인다랄지, 아예 공초일지를 되도 않는 이유로, 분실시키게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발생하여 온 지라, 일반 민초들도, 나랏일을 하는 자들에 대한 불성실과 비전문성, 거기에 더하여 뇌물에 허약할 대로 허약한, 도덕성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감추질 않는 편이었다.

"장쇠야, 그만 툴툴대고 전방 좀 보고 있거라. 내 쫌 다녀 올 데가 있느니...."

"항상 그렇츄...갈 데 많고, 오란 데 지천이고, 쳐 자실 년들 주구장창이고...나 거튼 신세야...바둑이 밖에 더 되겄슈....댕겨 오시쇼..언제가 될랑가는 몰러도..."

"허어, 이 녀석이...."

저자거리로 나서면서도 그렇게 마음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벌써 돌아왔어도 왔어야 할 벽수의 귀가가 늦은 것도 이유의 하나이긴 했으니....

"철썩...철썩...철썩....."

저 멀리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는 와중에 공중으로 흩뿌려지는 소리는 사람들의 탄식과 더불어 누군가를 호되게 갈겨대는 소리였다.

"철썩...이년이 어따대고....철썩....야 이년아, 깝데기 허물 벗는다고 니 년 신세두 탈복할 줄 알았더냐?...철썩....아니, 지 년이 언제쩍부텀 숭내(=흉내)질이여, 숭내는? 철썩.....들병이면 들병이 답게 돈 쩐이나 받아먹고, 가랭이나 벌려 줄 일이지...앙탈은 어디서..."

인파를 헤치고 나아간 그 자리에는 저고리가 다 찢어진 채로, 흠씬 두들겨 맞고 있는 벽수가 있었다. 부르륵 끓어 오른 핏덩이가 머리로 터져 나오는 듯, 나는 몸을 날려 한방에 그 자의 면상을 내질러 버렸다. 나동그라진 그 자는 이미 정신을 잃었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의 서슬에 놀라, 둘러선 사람들은 한마디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앞으로 벽수를 업신여기거나, 들병이로 대하는 자는, 내 가만 두지 않을 터....호된 맛을 보게 될 것이야.... 알았나? 어여들 물러서....얼릉! 지 갈길 가란 말, 안들리는가?"

나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사람들은 스산히 흩어지고, 나와 벽수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흑흑....저 아까운 걸 워찌해야 쓰까...."

벽수의 얼굴은 난타를 당한 듯, 이곳 저곳이 멍 투성이였고, 코피에다 입술까지 터져 선혈이 낭자했건만, 그렇게 뚜드려 맞으면서도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나에게 끓여줄 아욱국 생각 뿐이었는가 보다. 진창길의 바닥에 널부러진 채소 쪼가리를 손으로 긁어 모으면서 흘리는 그녀의 눈물은.... 도저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임자....담부턴 나랑 같이 다님세..."

그녀가 잘 걷질 못하는 것으로 보아, 얼굴 뿐만이 아니라, 죽기로 매춘을 거부한 그녀의 전신을 짓밟고 후드려 친 듯 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그녀를 냉큼 등에 업었다. 전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내 등에서 한참을 꺽꺽대며 울음을 참다가, 이내 혼절해 버렸다. 골방으로 곧장 내질러 들어서는 나의 모습에 장쇠도 놀랐는지, 어느새 마른 천에 물을 적셔 방으로 들이미는 것이었다.

"뭔일 이다요?"

장쇠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피떡이 되어버린 벽수를 품에 안고서, 연신 닦아내기만 하는 나의 모습에다, 말을 흘려 놓고도 대답이 없는 나를, 그러려니 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고, 벽수는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 때문인지, 정신줄을 놓았음에도 울럭대는 목젖을 어쩌질 못했다.

"긍게.... 팰 곳이나 있간디? 어디 심 쓸곳이 없어설랑, 아녀자에게 손찌검이랴..."

장쇠도 그 간의 상황을 짐작했는지, 혼자 소리로 탄식을 쏟았다. 벽수는 한나절이 훨씬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고, 나는 장쇠에게 일러 닭을 한마리 고으라 일렀다. 평소 같으면 혀가 댓자는 빠졌을 테이지만, 그렇듯 피떡이 된 벽수를 대하는 장쇠도, 서글프고 처량한 심정이었던지, 내내 말이 없었다.

"임자, 기진할 때는 이게 그래도 쓸모가 있지."

찹쌀과 함께 고아진 닭살을 쪽쪽 찢어 국물과 함께 죽처럼 떠 먹이니, 그래도 그 정성이 고마운지, 벽수는 벽에 기댄채로 내 수저를 마다않고 받아 삼켰다.

"남정네들의 주먹질에, 이리도 허약한 자네가,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지내 왔는가?"

"......"

벽수는 말이 없었다. 또 다시 주루륵 낙숫물이 흘러도, 그녀는 내가 건네는 수저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받아 삼키고, 십리 밖에서도 들릴만큼 목넘김이 소란했다.

"딱 죽었스믄 싶던 거이.....전가사변(全家徙邊)은 그래도 신선 놀음 이었쥬..."

"아니 그럼, 전 가족이 모두 그렇게?"

벽수의 과거지사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평안도 이후부터 였다. 전가사변은 원래 변방 지역의 부족한 신역자원 해소를 위해 만든 정규 형벌 제도로서, 죄를 지은 향리, 역리, 노비들의 가족 전부를, 강제로 평안도 혹은 함경도로 이주시켜, 군역이나 본역을 시키는 것을 말했다. 죄질이 나쁠 경우에는, 신분을 노비로 강등시키기도 했으며, 이에 항명하며, 강제 이주된 지역을 무단으로 이탈하는 자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추쇄라 일컬었으며, 이른바 인간사냥꾼인 추쇄꾼들이 거들먹 거리던 것에 사람들의 원성을 자아내고 있었고, 누구나 조심하는 사형 다음으로의 무거운 형벌체제 이기도 했다.

"자네 부친은 무슨 일을 하던 인물이셨나?"

"일개 향리 였서라...근디....그 당시는 죄 짓고 튀다 은닉해 줘도 걸리고, 강도나 장물애비 뒤를 봐줘도 걸려대고...암튼 귀에 걸면 귀고리고, 코에 걸면 코걸이 였다 안혀요?...근디.. 이 냥반이 소싯적부텀 주색질이 만장이라, 이 눔도 좋코, 저 눔도 지화자....돈푼만 쥐어줬다 허면, 귀신가치 내빼게 다리를 놓는지라, 솔찬히 해잡쉈지라. 그 덕에 남부럽지 않게 지낸 건 말할 것두 없구유.....그러다 아삼륙이 맞아설랑은, 같이 해먹던 관령(管領)이 암행에 걸려 불어대고...그러다가니 피차 오지게 걸린 거지유."

그녀의 한 시절이 부유했을 것이라는 소문도 틀린 바는 아니었다. 평생을 살아왔던 고향을 등지고, 강제로 삶의 터전이 이전된다는 것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충격이었을 것이고, 그로인해 부친의 악행은 끝을 모르고 터져나왔을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사실 이었다. 주색잡기에서 흘러흘러, 투전판에도 손을 대고, 이제는 범법자의 신세로 전락된 신세한탄도 부족해서, 자신이 책임지고 돌봐야 할 가족들마저, 억장이 막히도록 괴롭히는 입장으로 돌변해 버린 막막한 현실을, 벽수는 그 어린 나이에 맞닥뜨리고 만다.

"하다하다 엄니도, 지도 다 팔아머글 심산으로 다가니, 투전판에 엥기드만유....엄니가 달겨들고....내가 멱살을 쥐어뜯고 실갱이를 허다가니....뒤로 칵 찌었는가 시펐는디....고꾸라져서 맥을 탁 놓아버리는 겨.....참 허망키도 허지....추쇄꾼이 겁나기도 혔지만서도....이대로 추포되었다가니, 전가사변으로 쫓겨 온 것도 모지라서, 전가사민(중죄인만 노비등으로 강등시켜 따로 강제이주 시켜버리는 집중형벌제도)으로 가중 처벌되부러 양계로 또다시 쫓겨가기도 전에, 목이 달아날 지경이니, 워쩌겄슈....엄니는 관가에 가친이 사고로 절명했다 고신하러 가는 척하고, 지는 그 길로 내뻔진 거랑게요."

그 다음부터의 행로는 띠엄띠엄 이기는 해도, 예까지 흘러온 것을 대충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그럼, 어찌하여 추쇄꾼에게 추포되지도 않고, 용케 도성으로 흘러 들어올 수 있었는가?"

그러나, 그녀는 말이 없이 눈물만 주루룩 흘릴 따름 이었다.

"알았으니, 이만 험세....이 죽이나 마저 들게나."

더 이상, 그녀의 뒤를 캔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일가 친척이나 뒷배도 없이, 이 지경까지 흘러온 그녀의 뒤안길은, 구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동가숙 서가식은 기본이었을 것이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가장 훌륭한 무기는, 자신의 몸뚱아리 뿐이었을 것이기에, 들병이라는 운명은 애초에, 이미 그녀의 앞길에 지워져 있는 코뚜레 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이 싫다 하여도 어찌할 수 없이 남자를 통해 모진 삶을 이어나가는 운명을 가리켜, 역술가들은 관살혼잡이라 했던가? 난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할지라도, 그 고통스런 여정이 내 앞에서만은 멈추어지기를 바라는, 우매한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몹쓸 꼬라지를 겁나 봐부렀지라...."

내가 시키지도 않았으나, 그녀의 신세 한탄은 피워 놓은 향처럼 스멀스멀 이어져 갔다.

"기댈 뒷배나 있었간디?...그저 남은 이 몸뚱지가 고작이였서라...."

그러나, 그녀와 살을 섞어 본 나로서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남정네를 많이 겪어 본 아녀자들을 가리켜, 목소리도 메아리 친다하여 동굴보지라고 하는 치들도 있었고, 박아도 박아도 끝이 닿지 않는다 하여 수렁보지라고도 일컬었으나, 그녀의 느낌은 숫처녀를 방불케하는 탄력이 확실히 존재했고, 그 쪼임에서 조차, 색행에 무뎌진 게으름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 이었다.

"목숨을 부지허려면 딱 두가지랑게요. 소매 걷어 부치등가, 아님 맥줄 풀던가...."

벽수는 전자가 자신이 선택한 길이라고 했다. 자신을 덮쳐대는 뭇남정네들을 상대할 때마다, 자신이 이 색질에 천부적으로 미쳐있는 년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짐시켜, 되려 놈들이 혀를 내두르며 지쳐 자빠졌다는 것이 그녀의 변이었다. 유달리 머리가 명민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뻗쳐대면서, 자신에게 닥친 운명의 실타래를 끊어 보려고 발버둥 쳤었더라면, 이내 더욱 얽히고 설켜서, 기어이 험한 세상이라는 거미의 밥이 되었어도 되었을 그녀였건만, 죽음을 무서워 해서가 아니라, 이토록 고통스럽게 살아지게 되더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돌아오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오늘의 그녀를 있게 했다고 봐야 옳았다.

"성님, 쪼매 나와 보셔야 쓰겄는디유...."

방안에서 어느 정도 벽수와 나와의 대화가 들리는 기척에, 전방을 지키고 있던 장쇠가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가 보시게라...이 년은 누워 있을랑게요."

"그럼, 몸조리 잘하시게나."

언간새 나의 높임말에, 벽수는 그 특유의 배시시한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 눕는 것이었고,

"어쩐..... 일루?"

밖에는 한껏 멋을 부리고, 몸종까지 거느린 반가댁 여인이 서 있었다.

"일습으루 다가니, 방짜유기로만 고르실 요량인디...뭘 쫌 여쭌다고 혀서...."

"알았다..... 무슨 연유 이신지요?"

"아, 별거는 아니고, 이미 물건은 보아서 믿음이 가오만, 내 개인적으로 뭘 알아볼 것이 있어놔서..."

"무슨 일이시온지?"

"자리를 좀 물러 주시면..."

나는 장쇠에게 일러, 골라 놓은 유기를 포장하여 몸종과 함께 거처로 날라 드리라 말했다. 이윽고, 전방에 달랑 남겨진, 나와 그 여인을 아니꼬운 눈초리로 뒤로한 채, 등짐을 진 장쇠가 시야에서 멀찌감치 사라진 뒤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소인처럼 천한 자에게 어인 질문이신지..."

"사람을 하나 찾아 주었으면 해서...."

"여기야 유기전이고, 저는 보잘것 없는 장사치에 불과한데, 어찌 이런 부탁을 하시는 것인지요?"

"익히 사람을 풀어, 들어서 알고 있소만...내 먼 일가뻘 되는 이가 한성부에 있는지라..."

나는 외부와 일반에게는, 극비에 부쳐진 와중에, 포청을 도와 해결한 미제 사건들마저 수소문을 통해 알고 있다는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그 여인을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갓 서른을 넘었을까? 단아하고 청초한 모습이, 단순한 양반댁 일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눈에 띄는 다른 점은, 목에 하얀 비단을 목도리처럼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간간히 그 비단으로 감겨 있는 목을, 부자연스런 손짓으로, 자주 가리는 듯이 움직인다는 것이었는데,

"누구를 찾으시는 것인지요?"

"....."

쉽사리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그녀였다.

".....집안에는… 알려져선 안되는 인물 이겠지요?"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의 미천한 식견으로 아룁니다만...., 어린 나이에 시집오셔서, 종손을 생산 하시자마자, 부군께서 일찍 급서(=돌연히 사망함) 하신...."

"아니 그걸 어찌?"

"명문 대가집의 안방 마님들께서는 노리개 조차도 이런 시전 상인들에게 구입하질 않으시지요. 장인들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가문의 필적을 노리개나 은장도에 새겨 넣으시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비밀은 유지하여 드릴 것입니다. 찾으시는 분이.... 혈육은 아니실 것이고......, 저를 은밀히 찾아오신 것으로 짐작컨대, 혹여..... 정인을 찾고 계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얼굴도 들지 못한 채,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제 3 부 : 색행의 독성-


나는 쌈지에서 연초를 꺼내어 곰방대에 여느때보다 꾹꾹 눌러 말아 넣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듯 했기에 말이다. 여인의 흐느낌이 멈추는 데에도 시간이 꽤나 소요되고 있었다.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어찌보면 쉬운 일이기도 하고, 달리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것일 수도 있습지요. 그냥 흘러간 과거지사라는 체념으로...... 일관되게 절연한다쳐도, 그게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긴 하지만...."

"....어려서 열셋에 혼례를 치렀지요..."

다분히 반가의 자손들에게 있어서 그 혼인이란 요식행사는, 정략적이라기 보다, 본능적인 자신들만의 영역표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피가 섞여봐야 누가 누군지 구분도 할 수 없는 지경이기는 했어도, 그들에게는 서로를 감내하며 의지할 수 있는 무형의 울타리로서, 상대를 반강제적으로 선택하는 무모함이 존재했고, 결국에 가서는 이런 저런 이유를 제쳐두고서라도, 그런 식의 피가름이 가져온 장점을 극대화시켜, 자손들에게 누누히 세뇌시키고, 그 자식들이 성장한다 하여도, 선대와 동일한 이유를 들어, 반가끼리의 조약체결 같은 혼례를 당연시 해버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구차한 연유로 사람을 찾아달라는 것도 망연한 지경인데...."

"아닙지요...말씀 편히 하십시오. 찾으시는 특별한 곡절을 여쭈어도 될런지..."

그러자, 그녀는 주변을 한번 살핀 뒤, 조심스런 손길로 목에 두른 흰천을 천천히 풀어 내렸다.

"......보시었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목을 풀었던 천으로 다시 매었다.

"흉터로 보기에는 거리가 있고....원래 태생부터 있었던 상처도 아닌 듯 한데...혹여 정인과 관련이...."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소인이 반가의 자손을 업수이 여긴다거나, 혹여 여인이라 낮추어 보기 때문이라고 오인하실까 저어되어 드리는 말씀 입니다만, 경험으로 미루어 볼때......, 그 흔적은..... 방사의 결과로...... 보이긴 합니다요."

그 여인은 적확한 나의 추측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옷으로 말아 감추고 있던 양손의 소매를 걷어 보였다.

"그렇군요. 제 추측이....그럼 버선을 혹시..."

이미 그녀는 많은 것을 각오한 것처럼, 치마를 걷어내고, 발목이 다 드러나도록 버선마저 까 내렸다. 제 아무리 신분의 고하를 파타하는 좌석이라 해도, 반가의 아녀자가 이렇듯 순순히 발목을 까내린다는 것은 평소의 관습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천우신조로 혼례후, 수삼년이 흘러 종손을 생산하였다고는 하나, 지아비를 조실한 입장이고 보니, 문밖 출입은 커녕, 규방에 감금 되다시피 하여 또 몇년을 보냈지요. 세월이 시어른의 압제를 가엽게 여기었는지, 가내의 살림이 자연스럽게 제 몫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숨통이 트였더랬습니다. 한 눈에 알아보셨다니 짐작하시겠으나, 시어른의 권세가 득의만만한 지절이고, 자식을 앞세워 보낸 부모의 처절한 심정으로 며느리를 대하시느라, 상호간 정이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지요. 그러다 보니, 홀로 지내는 시간은 끝을 보일줄 몰랐고, 혼례를 치른 여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기쁨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일반으로 본다면, 대를 이을 자식을 제외하고, 젊은 나이를 감안하여, 청상과부댁들은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는 대신에, 비밀리에 보쌈을 시켜, 타 지역으로 보내 버리거나, 아예 내어놓고 개가를 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허나, 내노라 하는 반가에서는 죄인과 다름없이 집안에 갇혀 지내기 일 쑤 였고, 유교적 관점에서 절개를 지켜, 먼저 간 지아비를 그리워 하는 척이라도 하며 수절하는 것을, 당연한 미덕인 것처럼, 대내외적으로 떠들며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그러니까....달포 전, 그 사람과 우연히 조우하게 되었지요. 스스로 움직여 내당으로 나가지 않은 다음에야, 조석으로 받들어야 할 안부 인사나, 식음이 이유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저의 처소에는 발걸음이 없었기에, 그 자의 출입을 들키거나, 막아서는 누구도 기실, 가내에는 없었다고 봐야 하지요."

그 여인이 쏟아내는 그 인물과의 방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애초부터 남녀간의 흔한 상열지사로 치부하지도 못하도록, 그 여인의 입막음을 시킨 것은 물론이고, 벌어지는 기행마저도, 몽조리 쾌락의 끝자락으로 이입시켜버린 그 자의 행태는, 불순한 의도가 다분했다라기 보다는, 다년간에 걸쳐 쌓여진 그 자만의 내공이 분명한 지경이었다. 어떤 연유로 그 자를 만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이, 그 여인은 모든 언사의 구석구석, 그 자를 못내 그리워하며, 성적으로 갈급해 하는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는데,

"보셔서 아시겠으나, 교성을 토하지 못하도록 재갈은 기본이었고....그것이 나날을 거듭하면서...., 점차 소지하고 온 포승으로....., 수족을 교묘하게 결박하여 온 전신이 활짝 열려져......, 다시는 다무려지지 못하게 할 것처럼 만든 뒤에, 능욕에 가까운 교합으로 온 밤을 지샜지요."

그녀의 단어는 피해자의 토설같은 어구였으나, 그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음란함은 온 방안을 진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방안에는 교성이 흘러 나가지 못하도록, 병풍을 겹겹이 치고는...."

"마님...그것이 아니었겠지요. 교성은 이미 재갈로 제압되었을 터.....어찌 이 지경이 되셨어도 숨기려 하시옵니까?"

"아니...무엇을...."

"본인 스스로 가학적 교합에 격한 반응을 보이신 것일 터인데, 지금 그것을 그 자의 잘못처럼 언급하시질 않사옵니까?....허면 작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마님의 피학성 본색을 인정해야 하는 시점이 아니겠는지요?.....병풍은 아마도 마님의 살결을 후려치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 이었을 겁니다."

"......"

그 여인의 본성에 내재된 불만과 외로움을 그 자는 묘한 방법으로 끌어내는 재주가 있었으며, 일반으로만 알려진 교접의 행태와 전혀 다른, 그 자의 기이한 방중술에 이미 넋을 빼앗긴 것이 분명했다.

"제발....그 자를...한시라도....이 몸이 견딜 재간이...."

그녀는 부끄러움과 수치심도 망각한 채, 내 앞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쥐어 뜯었다.

"허면,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는지요?"

"......"

여인은 온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수그린 채였고, 나의 질문에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아마도 나와의 대화속에서, 그 자와 지내온 격렬했던 마색의 정염이 다시 타올라, 혼신이 부들거렸던 모양이었고....

"포승에 의한 결박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만, 목에 남겨진 액흔(=목조름 흔적)과도 같은 상처는 무엇이었는지요?"

"끼이이익....."

그 여인의 대답도 듣기 전에, 벽수가 누워있는 골방의 문이 스르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필경, 벽수는 방안에서 이 모든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그 자는 항시, 결박을 통해, 신체의 저항이 완벽히 제압되는 능욕을 좋아 했지요. 결국 저 또한, 그 결박이 이루어지는 과정 사이에, 혼절할 정도로 정염이 끓어올라,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요....구강속에 혹은 홍문(=애널)속으로 양물을, 숨을 쉬기도 난감할 지경으로, 채워 버리는 것은 예사였지만....그러던 중, 마지막으로 그 자가 저에게 저지른 기괴한 색행이 바로 이것 이었기에...."

그녀의 토설은 놀라웠다. 수족은 온 전신이 허공을 향해 내벌린듯 결박된 채로, 그 위로 몸을 실은 그 자의 육봉이, 이미 음수가 풍천하도록 이부자리를 적시고 있는, 그 여인의 음곡을 가차없이 파고들어 찢어 발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그 자의 풀무질은 끝을 낼 줄을 몰랐고, 여인 스스로 그 흥분의 정점을 향해 두 눈이 휘돌아가는 순간, 아랫도리의 박음질도 멈추질 않은 채, 그 여인의 목을 서서히 조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신이 휘뜩 돌아갈만 하면, 숨통을 놓아주고, 정신이 아득해 질라하면, 숨통을 놓아 주며, 그 사이를 파고드는 그 자의 육봉이 음구 속에 불길을 질러대면서, 묘한 장단으로 이어지는 마강의 음란함은 그 여인의 혼줄을 기어이 바셔 놓으면서 숨결이 자지러 드는 듯, 기절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제 더 숨기는 것은 없사옵니까?"

"더 이상은.....그러니 제발....한시라도....."

그 여인의 대답은 역시 한결 같았다. 눈빛으로 봐서는 이미 심중의 결심이 선듯 보였고, 반가의 식구로서 누려오던 부유함과 권세도 다 부질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자의 말 한마디에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단호함마저 엿보이는 지경이라, 역시 세상에서 제일 허약한 듯 해도, 타올랐다 하면 세상을 집어삼킨다는 정염이란 물건의 끔찍한 독성을 눈 앞에서 목도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기괴한 색행은 자칫 상대의 목숨을 해할 수도 있는 극악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나, 만일 사망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복상사로 위장하기도 용이했을 것이고, 제풀에 미쳐서 사내의 아랫도리에 목숨줄을 걸어 놓은 잡년이라는 오명을 걸머질 것이기에, 설사 범행을 저질렀다손 치더라도, 세간의 시선은 범인보다도 피해자에게 더 불리한 것이 민심이기는 했다.

"찾아보기는 하겠으나, 찾게 되더라도 다시는 상종하지 않으심이 옳을 듯 합니다만..."

"저라고 어찌 강상의 법도를 모르겠소? 허나, 이 몸이 이제는 내 심중의 말도 듣질 않으니..."

여인은 수차례 나에게 기약은 없더라도, 그 간의 상황에 대해, 매일 종년을 유기전으로 보낼터이니, 연통이라도 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돌아갔다.

"임자, 일어나셨는가?"

"....."

나는 기척이 있음에도, 대답이 없는 벽수의 상태가 염려되어 골방으로 들어섰다.

"아니, 일어났으면 일어났다 말을 할 것이지, 청승떨고 있기는..."

그러나, 그것은 청승이 아니라, 울고 있는 것이었다.

"찾아봐야 뭐 허것슈.....이미 아궁지에 불 지르고 떠난 넘...."

"그렇게 당하면서도 정인이라 칭하는 그 여인이 불쌍하기만 하구려."

"정인은 정인이쥬...다정(多情)이 아니라, 색정(色情), 그기 문제 아닌갑서?"

"그렇긴 하지....한 두번 저질러 본 솜씨가 아닌 듯 한데....어디서부텀 찾아본다? 마포나루에는 임검이 그래도 있을 터이니, 만일에 도주하려 한다면 뱃길보다는 다른 방도를 택할 것인데...."

"아니, 일이야 저질렀다 쳐두, 남녀간의 호색지산디, 뭐터러 개입허시려구유..."

"그러게...괜시리 맘이 쓰이는 구려....헌데 자네는 어찌 울고 있었는가? 어디 아픈 곳이라도 다시 생기셨는가? 아무래도 약방에 들러 약재라도 몇첩 지어와야 하는가 싶네만.."

"이러다 나을겅게로..., 쳐 마즌 매로 치믄, 이건 암 껏뚜 아녀유..."

벽수는 분명코 전방 안에서의 대화를 듣고 있었으며, 자신이 대화에 끼지는 않았다 치더라도 무언가 들어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듯 싶었다.

"그 여인의 얘기를 귀담아 듣는 듯 했는데...아닌가?"

괜한 질문을 했다 생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난 일이 아삼삼허니 떠올라서...."

"혹여 그 자를 자네가 아는가?"

"지이미...기집 홀림서 굴러 댕기는 오사리잡놈들이 한둘 이간디요? 뜨신 화톳불에 멍청허니 디어부렀다 넘기믄 그만인디....하늘도 겁나 무심한겨....워찌 그런 작자들은 뻔뻔히 면상 까고 댕기게 혀는지......"

그녀가 그 작자와 같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유사한 과거를 서로간에 만들었다면, 지난 일들이 그렇듯 단박에 회상되었을 정도로, 강렬한 마강의 교접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치밀자, 괜시리 부아가 끓어 오르고, 숨이 가빠지는 것이, 나 스스로도 어찌보면 옹졸한 인간이 아니었나 하는 자책이 앞서기 시작했다.

"휴우..."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길게 연기를 허공으로 내뿜었다.

"그 여편네....만일...내 짐작이 맞다면, 분명코 그 작자 땜시 큰 일 한번 낼겨. 저 가튼 년이야 먹고 살아재낄 심산으루 다가니, 그 장단에 지화자 쳐 줬응께, 이자무그믄(=잊어먹으면) 그만인게로....고거시 색정 중에서두 몸띵이에 불을 싸질르는 거 맹키로, 인두질이 가슴패기에 남는다 혀서 염정(炎情)이라 하는 거랑게요."

그녀가 만나 본 자 중에서 가장 극악했던 자는 추쇄꾼 중에 있었다고 했다. 평안도를 빠져나와 산길로만 남하를 시도 했건만, 그 자는 귀신같이 그녀의 뒤를 적당한 거리로 유지하면서, 추격해 왔다고 회상했다.

"그 인간은 거느리고 댕기는 동패도 업서라. 사람들이 불러대는 별명도 가지각색이라, 누가 누굴 가르치는지 첨에는 알아 보지도 못했다는거 아녀유. 밤중에도 잠 한숨 안자고설랑, 산을 몇개나 타 넘는다고 올빼미라고 혀는 사람두 있었고...한번 눈 안에 들어온 먹이감은 놓치는 법이 읍따고 관중(貫中)이라고도 혀고....."

"아니, 관중 이라니..."

"허어 이 냥반이 왜 이러실까? 거 있쟈녀유, 활을 과녁에 탁 쏘고 나서, 명중허면 외치쟈뉴, 관중....이러구유."

그 자의 추격은 무척이나 독특해서, 절대로 상대가 기진해서 제발 잡아가 달라고 무릎을 꿇을때까지 덮치는 법이 없다고 했다. 그 자의 추격을 당하는 남정네들은 여지없이 추포되었건만, 어쩐 일인지 여인네는 기진하여 사망하였다거나, 실종되어 찾을 수 없다고 포기하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그 연유는 그 자를 만나고서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보지털 나고 그런 색질은 첨이었슈....이젠 뒤진 목숨이라 치고, 납죽 엎드려 설랑은, 살려달라 그랬쥬....근디 반대루 다가니, 지 보고 살려 달라나 뭐래나.... 온갖 잡년을 다 만나 봤어두, 지 처럼 징허게 질긴 년은 첨이라고 험시롱, 아무래도 뭐가 통해도 통하는 갑다 허고는, 그 자만 안다허는 산중의 안가에 달포가 넘도록 가두고 설랑은...."

"가두고는...."

"그 담부터야 다 아시쟈뉴."

"그럼 그 자는 목숨을 담보삼아, 그런 짓을 맘껏 자행했다는 거요?"

"그뿐이 아니랑게요. 그 당시 지 목구녕이 포도청인게라, 입 꾹 다물고 있어설랑 그러치, 그 자 손에 죽어 나간 년들이 한두꼽새가 넘지라."

"자네, 변사를 알면서도 불고지 하면, 어떤 죄목인지는 아는가?"

"잘 알지라.....헌디 그 어린 맘에 지 한목숨 부지헐갑스로 다가니, 입 다물고 살아뻔지는 거이 장땡이다 싶어설랑은.…"

벽수의 장황한 얘기속에는 그 자의 천인공노할 범행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추쇄를 빌미로 여인들을 자신의 은거지로 유인하여 간 후에는, 그자만의 능욕술로 여인들의 혼을 빼놓는 것은 물론이고, 발설이 의심되는 사정이 보일 시에는, 가차없이 격살하는 일도 있다고 했다. 벽수는 애초부터 음란의 화신처럼 자신을 단도리질 한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그로인해 그 자로부터 아무런 조건 없이도 방류될 수 있었던 것이라 설명했다.

"진정 그 자는 색행만이 목적이었던가?"

"잘허긴 헙디다….여적도 대가리에 뱅뱅 도는디, 그 여편네야 눈깔에 뵈는 기 없을 꺼구만요. 목적이야 그기 그거쥬…겁나 훌쳐묵고, 맘 상허믄 까 내뻔지는…"

"자네는 어찌 그 자와의 기억을 잊고 살 수 있었나?"

"잊고 사는 거이 아니고, 언뜻언뜻 치받쳐두 멍멍허니 기냥 사는 겁지라…"

그녀가 숨이 꺽꺽 막히도록 내 양물을 삼키고, 빨아대면서도, 아마 그때의 기억으로 더더욱 음란한 성감이 충동했을 거란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절대절명의 순간을 맞이하여,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뻗을 수 없는, 산중의 은거지에 홀로 결박되어, 소리칠수도, 반항할 수도 없이, 그 자로부터 행해진 색욕의 광풍은, 쾌락이 아니라, 생존의 발버둥 이었으며, 고통의 격랑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용케 참아냈네 그려, 임자."

"만일에 찾고자 허시는 그 자가 그 인간이라믄, 지도 힘써 도와볼게라. 아마도 이제는 색욕이 아니라, 더한 것에 매달려 있는지도…"

그 자의 품성상, 여자를 농락하는 것에만 그치질 않고, 격살하는 것 마저도 목격한 벽수로서는, 그 자가 욕정만을 채우는 것에 한계를 두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자네가 기거했다는, 그 자의 은거지를 기억해 낼 수 있겠나?"

"기억이야 허겠지만서도...여적 추쇄질만 허고 댕긴다치면, 팔도가 지척이 아닌디, 워디가서 찾겄슈…."

하긴 벽수의 지적처럼, 전국을 안방 드나들듯이, 추쇄질로 다져진 내공이라면, 쉽사리 그 행로를 추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할 수 있다는 말도 일리는 있었다. 허나, 그 은거지를 통해 그 자가 그간에 벌여온 무차별적인 살인 및 음행에 대한 증험과 여죄를 밝혀낼 수만 있다면, 전국적인 추포령을 기대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나의 섣부른 기대감도 없진 않았다.



-제 4 부 : 또 다른 빌미 -


"우당탕 쿵쾅..."

그건 물건을 배달하러 갔던 장쇠의 기척이 분명했다.

"아니, 등짐 지라고 만들어 놓은 지게에다 어찌하여 심통이더냐?"

"길바닥이, 길바닥이 아닝게라...."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지는 몰렀는디, 그젠가, 그끄젠가, 방이 부텄다 허대요. 나랏님 엄명으루 다가니, 외방의 사신이 왕래헐 시에는 잡인의 출입을 금허고, 거기다가니 땡중들이 대낮으로 민가에 범접허는 거슬 금했다구유. 아니, 탁발도 못혀는디, 뭘루다가 공양은 들이냐구 길바닥에서 땡중들이랑, 포졸들이 얼켜설랑, 겁나 쌈박질이 붙어 뻔지고...괴기도 자시질 못허는 냥반들이 심은 오지게 쓰드만유.…"

"아니 그런 칙령은 어디서 내렸다더냐?"

"지가 알겄슈? 남들이 그렁게로 그런가부다 허지…"

그 뒤를 따라서 낯익은 이가 전방으로 들어섰는데, 바로 포청의 종사관 송가였다.

"어쩐일로 또 발걸음을…"

"자네와 좀 의논할 일이 있어놔서…"

"그럼 방으로.... 벽수가 몸이 성칠않아, 안에 누워있습죠."

"그럼, 내 다음에 오리…"

그러자, 방문이 안에서 열리며, 벽수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나으리, 어여 드시쇼. 지는 없는 심 치랑게요."

그러자, 종사관은 관모를 벗고, 촘촘히 방안으로 들어섰다. 온 얼굴이 팅팅 부어오른 채로, 운신도 못하는 벽수를 보자마자, 저으기 안절부절 못하는 모양새로 보아, 이리도 아녀자를 폭행한 작자를 당장 잡아들일 기세였다.

"별일 이기는 해도, 큰일은 아닙니다. 어서 일 보시지요."

나의 대답에 벽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자신이 당한 폭행을 가리켜, 상대로 하여금 화를 돋우게 하는 것과 달리, 은근한 농으로 받아내는 여유를 좋아하는 그녀였다.

"자네, 한성부 판윤(判尹)에 대해서 들은 바 없는가?"

"저야, 궁을 떠난지 오랜지라...허나, 지금의 판윤께서는 얼마전, 우윤(右尹:판윤의 보좌역)을 거느리시고, 조정을 대표하야 외방사절로 원행도 다녀오시질 않았는지요?"

조정의 삼권이 분리되어 있었기는 했어도 한성부의 판윤이라는 자리는 도성의 실세 중에서도 노른 자위에 해당하는 지라, 영의정 하기보다 한성 판윤을 내기 어렵다고들 입을 모으곤 했을 정도로, 치열한 권력다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리이면서도, 의금부와는 또 다른 권한으로 죄인을 잡아 문초하고 형벌을 가할 수도 있는, 초법적 비중과 역할을 지닌 곳이기도 했다. 내가 패관으로 재직할 시에도, 주상께서는 판윤의 낙점을 위해서 물망에 오른 자를, 외가쪽 3대까지 지체를 살피시는 정도 였고, 초당적 기품과 의기가 있어야 가당하다고 하실 정도 였으니 말이다.

"엊그제, 한성부에서 내려온 칙령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나는 장쇠가 전해준 내용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사실 조정의 외교문제와 더불어, 사신단의 왕래에 대하여 의전을 책임지기는 허나, 이번에 한성부에서 내린 칙령이 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소인도 전해들은 내용으로는 좀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요. 구지 승려들의 도성내 출입을 사신단 왕래와 엮어서 그렇듯 공표한다는 것은 모양새도 좋지 않을 뿐더러, 일부에서는 불교를 업수이 보려 한다는 지탄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만…."

"그래서 나름대로 알아보긴 했는데, 이게 점입가경이란 말일세."

"아니, 점입가경이라니요?"

"한성부내의 소식을 내가 긴히 탐문하여 본 결과, 이번의 칙령은 다분히 판윤대감의 개인적인 의지였다는 게야. 그것도 주상과의 독대 후에 이루어진 전격적인 일이라는 것이지. 그 칙령의 내용에는 빠져 있지만, 승려들을 도성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한 연유에는 판윤의 개인사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고.…"

"개인사라니요?"

"주상과의 독대에서 흘러나온 얘기인 즉슨, 도성에 드나들던 시주승들 중에 탁발을 빌미삼아, 아녀자에게 접근하여 간통을 저지른 자들이 늘고 있다는 직언을 하신 모양이더란 말이지. 기실 한성부에서도 극악무도한 범법행위를 현행으로 목도했다면, 추포하여 심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나도 잘 알지. 허나, 요즈음, 아니 근래에 포청에서조차, 승려들이 도성을 활보하면서 통정에, 화간까지 일삼았다는 보고는 들은바가 없다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아니겠나?"

"혹여, 한성부에서의 문초내용이 포청과 공조되는 적은 없는지요?"

"간간히 있기는 허네만, 이번처럼 칙령으로 내려진 뒷배경을 알 수 없을 때에는 난감하긴 매한가지 일세. 게다가 우리로서는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을 뿐더러, 하루가 멀다하고 들이닥치는 사신단의 무리가 크고 작음을 따지기 이전에, 얼마나 자주인가 말이야? 도대체 주상께 그런 독대를 요청한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그러자,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벽수가 입을 열었다.

"그 여편네… 판윤대감의 식솔이 분명허요."

난 벽수의 지적에, 관자놀이가 울럭거리면서 눈 앞이 화끈거렸다.

"아니, 그 여편네는 또 무엔가?"

나는 그 여인의 노리개를 통해 단박에 알아보았음에도, 혹여 벽수가 듣고 있음을 눈치채고, 그 직함을 발설하지도 않았으나, 종사관의 얘기만 듣고도 그 여인이 판윤대감의 며느리임을 짐작해 버린 것이었다.

"나으리가 오시기두 전에, 판윤댁 며느님이 냉큼 오셨서라. 껄떡쇠 냥반 찾음서...낄낄..화이고 주둥이야...째진 아가리 이서질(=이어질, 혹은 아물 방도가) 길이 읍네(=없네)…"

그럭저럭 기운이 돌았는지, 벽수는 평소처럼 웃어재끼려다, 맞아 터진 입술이 다시 째어져, 오만 인상을 다 찌푸려 버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전방을 방문한 그 며느리, 그리고 그녀와 통정한 자에 대한 얘기며, 그 자를 수소문 해달라는 기이한 부탁등을 전하고서, 아울러 벽수의 추측대로 판윤대감의 며느리가 맞다는 것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호라, 거참….항상 결괘는 벽수가 쥐고 있다니... 이제 그림이 그려지네만, 자식을 앞장세워 보냈으나, 집안의 종손을 생산했으니 내치지도 못하고, 수절을 빌미삼아 규방에 감금하다시피 단속을 하던 며느리가, 어느 날, 시주승과 배가 맞아 통정을 일삼았으나, 직위의 존엄과 체면으로 인해 어쩌질 못하였을 테고…간통범을 내처 추포를 한다해도, 공초사실 중에 며느리와 통정한 사실이 불거질까 저어되어, 있지도 않은 도성내의 풍기문란과 외방사신의 의전상 안전을 빌미삼아, 주상께 독대를 청하여 칙령을 받아냈다?...허허...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추측일 뿐, 그 며느님이 스스로 고신하지 않은 다음에야, 밝혀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닌것인데…"

"따지고보면 그 자의 능욕술이 한 두해에 걸친 내력을 뛰어 넘고 있다는 것에 핵심이 있다 하겠지요. 아직 벽수와 대면을 하질 않아서 확인된 바는 없지만, 그 자가… 제 추측으로는… 오래전 벽수를 음해한 ...바로 그 자인 듯 합니다."

"아니, 음해라니, 벽수가 그 자와 통정을?….아니, 아니 아니지...혼인도 하지 않은 처자에게 통정이란 표식은 붙이기 그렇고….아무튼 어찌하여 관련이 있었다고 믿는가, 자네는?"

벽수도 그 자와 자신을 엮어대는 나의 돌발적인 추측에 할 말을 잊었는지, 고개를 숙인 채, 나의 사설을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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