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꿈꾸는 늑대 109부
수혼은 일부러 아버지를 다른 층에 모셨다. 아직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20년을 넘는 세월동안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지내던 자신이다. 아니 부모란 존재를 잊고 살았던 자신이다. 그런 자신의 앞에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도 들었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다. 자신이 아버지 입장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부인을 죽게 만든 아버지와 장모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원통하고 분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식인들 눈에 보이겠는가?
수혼은 자신의 서재에 들어와 창문을 열고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바람이 불어와 정원에 있는 나무에서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낙엽들은 바람에 날려 정원을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낙엽들은 수혼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수혼의 마음이 심란했다. 법암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심란하던 마음이 그를 만나고 엉망이 되어 버렸다. 자신은 아버지란 존재도, 어머니란 존재도 잃어버리고 살아왔다. 자신을 키워준 사부를 부모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란 존재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이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자신을 키워준 사부가 나쁜 놈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사문의 명예를 위해..........아들의 사랑을 억지로 갈라놓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인자하고 자애롭던 사부님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럼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아버지는 사부가 아버지다. 있지도 않는 사실을 가지고 아버지를 욕하는 아들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다. 수영은 자신과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지고 수영을 출산했다고 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진 기간은 1년 남짓이다. 그 기간에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고 했다. 사실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애까지 낮았다는 것을 믿어야 할까? 그것도 곧 생사의 대결을 눈앞에 둔 상태인데 말이다.
수혼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때 서재에 쌍둥이 자매와 지나가 들어왔다. 그녀들은 수혼의 의사도 뭍지 않고 방에 들어와 바닥에 앉았다.
“수혼씨 우리와 잠깐 이야기 좀 해.”
“지금 복잡한데 내일 이야기하면 안 될까?”
“우리도 조금 전에 들었어. 아버님이 찾아오셨다지. 그런데 우리에게는 말도 없이 수혼씨 혼자 만나고 오는 길이라지. 우리와 잠깐만 이야기해.”
수혼은 한숨을 쉬고 그녀들 앞에 앉았다. 수혼이 바닥에 앉자 지나가 수혼의 어깨를 잡아 자신 무릎으로 끌어당긴다. 수혼은 힘없이 지나의 무릎에 상체를 기대었다. 지나는 수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준다.
“수혼씨 힘들지. 수혼씨 마음 다 알아.”
“그래요. 아버님도 그간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죠?”
“다들 고마워. 하지만 아직도 혼란스러워. 그런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해야 할까?”
“수혼씨. 난 말이야. 이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미웠어.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은 수많은 여자를 집안에 끌어들었어. 심지어는 한달도 못되어 다른 여자가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지. 그런 아버지가 싫었어. 아빠가 너무 미웠어. 또 아빠는 나에게 관심도 없었어. 그냥 돈이나 주면 부모의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분이 아빠였어. 그런데 있지. 그런 아빠라도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미워하던 아빠인데도 말이야. 아빠만 생각하면 너무 슬퍼져. 수혼씨..........부모님께는 날 태어나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니까?”
“지나가 그런 말하니까 어울리지 않는다.”
“뭐야~ 남은 심각하게 말하는데 그런 식으로 말할 거야. 하여튼..........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이나 치고 싶니. 어휴~ 짜증나~ 일어나~”
지나는 수혼의 머리를 잡고 일으켜 세운다. 수혼은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두들 내가 걱정 되서 온 거야. 고마워. 그런데 아버지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다. 내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줄게. 내가 고민하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아버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워. 문제는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아버지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내가 싸워야할 적(敵)이 애매해 진다는 거야. 애매? 말이 이상하다. 적(敵)을 상실했다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이야.”
“들어봐~”
수혼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부인들에게 전해주었다. 비교적 담담하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수혼과는 다르게 부인들은 수혼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안타까움에 탄식을 하기도 했다. 수혼의 이야기가 끝나자 부인들은 다들 말을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그만큼 부인들에게도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수영은 씨다른 남매일 확률이 높고, 수영의 사부는 수혼의 외할머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갈라놓은 것은 할아버지와 외할머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다들 할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복잡하지. 아버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난 그동안 외할머니와 동생에게 검을 거누고 있었어. 또 외할머니는 내가 자신의 외손자이고 수영과 남매인걸 알면서도 수영과 날 싸우게 했어. 웃기지 않아. 더욱 웃기는 건 우리 할아버지 그러니까 사부가 정말 나쁜 놈이란 거야.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맡는다면 이런 결론이 나와. 아버지에게는 한마디 말도 못했어. 그냥 농담만 몇 마디하고 말았지.”
“수........수혼씨. 아버님 말씀이 모두 사실일까?”
“사실일거라 생각해. 20년 만에 만난 아들이게 거짓말하다고 생각진 않아. 다만 아버지의 입장과 외할머니의 입장이 다를 수도 있겠지.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도 당하는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관점이 존재하니 말이야.”
“수혼씨 말은 당사자들의 의견을 모두 들어봐야 진실을 알 수 있다는 거야.”
“맞아. 아버지의 말만 듣고 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해.”
“수혼씨. 어떡하니. 우리 수혼씨 너무 힘들겠다.”
“하하하~ 됐네. 모두들 잠시만 나가죠. 아무래도 생각 좀 정리해야겠어.”
“수혼씨 너무 고민하지 마. 알았지.........이럴 때는 우리가 아무런 도움도 못되는 구나.”
“무슨 소리야. 당신들이 옆에 있으니 이만큼이라도 버티고 있는 거야. 아마 혼자 있었으면 돌아버렸을 거야. 다들 걱정해줘서 고마워.”
“우리는 그만 갈게요. 대신 수혼씨도 적당히 고민하고 주무세요. 요코와 요키에가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무슨 말이야?”
“그동안 지나씨 혼자서 당신을 감당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우리들끼리 순번을 정했어요.”
“이...........이런~................참~ 알았어. 이것도 내 업보지 뭐~”
“호호호~ 요코와 요키에를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그녀들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수혼은 길게 한숨을 쉬고 다시 창가에 서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법암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수혼이 마련해준 방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들에게 20년 동안 가슴속에 감추고 있던 비밀들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아들은 자신의 말에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이성으로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고만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몇 번을 놀래고 분노했을 이야기를 그놈은 그냥 담담하게 듣고만 있었다. 꼭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나중에 간단한 농담을 던지고 자신이 이곳으로 안내하고는 혼자서 올라가 버렸다. 아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줄까?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들에게 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다. 지금 와서 옛날이야기를 속일 이유가 없지 않는가? 법암도 가슴이 답답했다. 아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냥 속없는 놈처럼 잠이나 자고 있을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한숨이 나온다. 아들에게 잔뜩 고민만 안겨주는 못난 아비라고 생각하니 다시금 마음이 미어진다. 아버지 그리고 장모 두 사람의 고집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그들을 용서하고 싶어도 상황이 다시 그들을 증오하게 만든다.
수영은 수혼을 만나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인천에 도착한 그녀는 수혼과의 일을 정리했다. 수혼은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니다. 그도 아버지의 존재를 최근에야 알았다고 했다. 더욱이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은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원수의 아들이란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수혼의 말대로 그건 선대의 원한이다. 선대의 원한 때문에 자신들도 원수가 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선대의 원한은 선대의 원한으로 끝내야 한다.
수영이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연신내에서 수영을 놓친 강기다. 그는 물고 있던 담배를 던져버리고 핸드폰으로 무석에게 연락했다. 무석은 늦은 시간임에도 강기의 전화를 받았다. 강기는 무석과 만날 장소를 약속하고 옆에 있던 녀석에게 수영의 감시를 맡기고는 무석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무석과 강기는 조용한 카페에서 마주앉았다.
“그래 원예님에 대한 조사는 끝났어.”
“오늘 원예가 혼자서 외출했어요. 우리들이 미행했는데 원예가 눈치를 체고 우리 따돌려 버렸어요. 조금만 주위 했으면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있었는데 아쉬워요.”
“뭐야. 원예님이 또 혼자서 외출을 했어. 어디까지 미행한 거야.”
“연신내까지 미행하다가 놓쳤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다른 증거를 잡았어요. 저번에 종로에서 천랑과 원예가 만났다고 했죠.”
“응~ 뭐 특별한 거라도 알아냈어.”
“그들이 종로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아세요. 후후후~ 형님이 들으면 아마 까무러칠 걸요.”
“무슨 말이야. 내가 까무러치다니. 원예님이 천랑과 같이 자기라도 했단 말이야.”
“어~ 형님 어떻게 알았어요. 맞아요. 그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모텔에 함께 있었어요. 아~ 모함 아닙니다. 증인도 있어요.”
“모텔?...........그럼 원예와 천랑이 그렇고 그런 사이란 말이야.”
“맞습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누가 원예가 뒤에서 호박씨 깔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런 고고한 척은 다하는 년이 말이죠.”
“확실 한거야. 괜히 모함하는 거 아니야.”
“절 믿지 못하세요.”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물증이 필요해.”
“좋습니다. 제가 내일 모텔 직원을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좋아~ 만나보고 사실이면 원로원에 보고할게. 이번에는 원예도 힘들겠는데.”
“참~ 오늘 밤에 원예의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할까 합니다.”
“도청장치?..........경비가 삼엄할건데.”
“제가 사무실을 지키는 아이들을 매수해 두었습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대신 걸리면 나는 모르는 일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못돼도 모든 책임은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수영은 수혼과의 일은 보류하고 먼저 조직의 일부터 처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현재 갈치파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자갈치파는 손발이 묶이고 성민파는 괴멸했다. 이제 자신들 갈치파 혼자서 천랑파를 상대해야 한다. 수영의 소집 명령에 병원에 있던 매(梅)를 포함한 사군자와 무석 그리고 중간보스까지 모두 회의에 참석했다. 수영은 갈치파의 앞으로 진로에 대해 논의(論議)하기 위해 중간보스까지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모든 참석자가 회의장에 들어와 착석하고 원예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 갈치파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권력기관에 심어 두었던 조직의 와해로 인해 눈과 귀가 막히고, 우리를 돕던 성민파는 망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 갈치파만의 힘으로 천랑파를 상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천랑파를 상대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우리들 의견보다 먼저 원예님의 의견을 말씀해 주시죠?”
무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답변했다. 수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석을 보다가 무석에게 눈길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본다.
“여러분도 먼저 제 의견을 듣고 싶으세요.”
“예~ 지금까지 원예님은 저희들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원예님의 의견을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먼저 저 의견을 말씀드리죠. 현재 우리 갈치파는 서울의 반을 장악하고 있으면 천랑파가 종로, 신촌, 은평구 일대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지역은 성민파가 괴멸하며 무주공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역이란 의미가 없다고 봐요. 어차피 서울은 우리와 천랑파의 대결로 결판나게 됩니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는 파가 서울을 장악합니다. 해서 우리는 모든 힘을 집중하여 천랑파를 상대했으면 합니다.”
“그럼 원예님은 성민파가 장악하고 있던 나머지 서울지역을 그대로 방치하겠다는 말씀입니까?..............구역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성민파가 차지하고 있던 구역을 천랑파가 흡수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 생각에는 천랑파도 성민파가 가지고 있던 구역에는 관심을 없다고 생각합니다. 관심이 있었다면 성민파의 괴멸과 함께 벌써 흡수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랑파도 저번전투에서 친위대의 반 이상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들도 그런 희생의 대가를 받으려 할 겁니다? 그런데 성민파의 구역을 포기할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랑파도 지금은 우리처럼 숨을 고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무석님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무조건 반대의견만 제시하지 마시고 대안을 제시하세요.”
“제 생각에는 우리가 먼저 성민파 구역을 선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먹는 놈이 임자 아닙니까? 천랑파가 먹기 전에 우리가 먼저 먹어야죠.”
“그렇게 하면 전력을 분산해야 해요. 성민파가 당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천랑파 기동대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그들이 성민파를 상대했던 전술로 나온다면 어떻게 하실 거죠. 전력이 분산된 우리는 각개격파를 당할 확률이 높아요.”
“원예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이, 눈에는 눈입니다. 우린 성민파가 아닙니다. 천랑파가 우리구역을 박살내면 우리도 복수하면 되는 겁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보시지는 않았습니까? 천랑파는 좁은 구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로, 청량리, 은평, 구파발, 일산이 전부 입니다. 그들의 수입원은 이 좁은 구역에서 모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비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들의 구역을 먼저 공격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시진 않았습니까? 구역이 좁은 만큼 그 구역만 부셔버리면 천랑파는 자금이 고갈되어 스스로 망하지 않을 까요?”
“무석님 말씀은 우선은 성민파의 구역을 차지하고 공격에 치중하자는 말씀입니까?”
“예~ 맞습니다.”
“공격이 수비보다 몇 배는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겠죠?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력은 5백 화랑이 전부입니다. 그들까지 당하면 갈치파의 존폐까지 흔들려요.”
“왜 먼저 당할 걸로 생각합니다. 치밀한 작전을 세워야죠. 그리고 제가 알기로 1천 화랑이 현재 훈련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1천 화랑들은 아직 훈련도 끝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전력에서 제외해야 합니다.”
“원예님이야말로 계속 반대의견만 제시하시는데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다. 그냥 이대로 천랑파의 눈치나 보면서 지내자는 말씀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을 비축하고 결정적인 한방을 노려야죠.”
“흥~ 우리가 그렇고 있는 사이에 천랑파는 성민파 구역을 흡수하고 더욱 큰 세력으로 성장할겁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지금이 천랑파를 무너트릴 마지막 기회란 말입니다.”
“계속 무석님과 제 의견이 다른데 다른 분들도 의견을 제시해 보세요.”
장내는 조용했다. 무석과 원예의 의견을 듣고 누구의 의견이 옳다고 단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 특별히 다른 의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간보스 뿐만 아니라 사군자도 입을 다물고 있지 않는가?
“다들 말씀들이 없군요.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원예님 갈치파는 지금까지 원예님이 이끌어 오셨습니다. 원예님 뜻대로 하세요.”
원예가 계속 물어보자 끝내는 사군자(四君子)중 란(蘭)이 입을 열었다.
“란님 갈치파는 원예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원예님 뜻대로 하라니요. 갈치파가 원예님 개인의 것입니까? 갈치파는 우리 모두가 피땀 흘려 만든 조직이란 말입니다. 그런 무책임한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무석님은 계속 삐딱하게 말씀하시는데 제가 무석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하진 않았어요. 다만 두 분의 의견들이 일장일단이 있으니 먼저 원예님의 의견을 따르자는 거죠.”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일장일단이라니요? 원예님의 의견은 천랑파의 눈치나 보며 그들의 처사에 갈치파의 운명을 맞기라는 말하고 뭐가 다릅니까? 제 의견은 우리가 먼저 천랑파를 공격하지는 말입니다. 원예님 한 가지만 물어보죠. 원예님은 천랑파를 괴멸시켜 서울을 장악하고 더 나아기 전국을 제패할 의욕이 있는 분입니까?”
“무슨 말씀이죠?”
“제가 보기에는 원예님은 천랑파와의 전쟁을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혹시 천랑파와 모종의 관계라도 있는 겁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만하죠.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원로원에서 판단하겠죠.”
“원로원? 지금 원로원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예~ 아마 조만간에 원로원에서 원예님을 호출할 겁니다. 그때 원로원에서 이야기 하죠.”
“무슨 말이지 모르겠지만 좋습니다. 오늘 회의로 이것으로 끝내죠.”
원예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무석도 쓰게 웃더니 밖으로 나간다. 회의장은 썰렁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건 회의가 아니라 전쟁터를 방불케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고 하나 둘씩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무석은 어제 강기가 말한 모텔 직원을 만나보았다. 강기의 말은 사실이었다. 모텔직원은 그날 밤 모텔을 찾아왔던 천랑과 원예를 기억하고 있었다. 무석은 그길로 원로원을 찾아갔다. 무석의 방문에 원로들이 모두 집합했다.
“우릴 보자고 했나. 원예의 조사가 벌써 끝난 건가.”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시급을 다투는 사안이 발생해서 찾아왔습니다.”
“시급을 다투다니..........자세히 말해보게.”
“원예와 천랑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를 찾았습니다.”
무석의 말에 말없이 앉아있던 수영사부의 눈빛이 차갑게 번득인다.
“무슨 말이냐. 원예와 천랑이 모종의 관계 맺고 있다니..........”
“제가 확인한 결과 천랑과 원예는 얼마 전에 모텔에 함께 있었습니다. 전번에 전투가 벌어진 날이죠. 그때도 원예님 혼자 천랑파 움직임을 파악했다는 것에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원예님과 천랑이 모텔에 함께 있었다는 겁니다.”
“모........모텔.............그.........그럼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말이냐.”
“젊은 남녀가 모텔에 같이 있었으면 뻔하지 않습니까? 제가 모텔 직원을 만나 확인한 사실입니다. 추호도 거짓은 없습니다.”
“그.........그런 말도 안돼는.........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수영에게 확인해 보았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어.”
“제가 증인으로 모텔직원을 데려왔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죠.”
“증인?...........아니다. 내가 당장 수영에게 가서 확인해 보아야겠다.”
“잠깐만! 대사부님 증인까지 있는 상황입니다. 원예님께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여기서 진지하게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
“원예는 현재 우리파의 수장입니다. 그런 원예가 적(滴)의 수장과 놀아나고 있습니다. 적의 수장과 놀아나는 원예에게 계속해서 갈치파를 맡기실 작정입니까?”
“무슨 소리야~ 원예가 놀아나다니 그런 말도 안돼는 모함은 하지도 마라.”
“모함이 아닙니다. 증인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조금 전에도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때도 원예는 천랑파를 공격하지는 제 의견을 묵살했습니다. 원예는 천랑파를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인 성민파 구역을 흡수하자는 의견에도 반대합니다. 우리가 먹지 않으면 천랑파가 먹습니다. 원예는 천랑파에게 서울의 반을 그냥 내어주자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맞습니다. 원예가 의심스럽습니다. 일단 원예를 갈치파의 수장자리에서 내려오게 해야 합니다.”
“이.......이런 말도 안돼는..........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그래요.”
“허허~ 참! 일단은 원로들의 의견에 따르시죠. 원예에게 죄가 없다면 다시 수장자리를 돌려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원로들 모두의 의견입니까? 갈치파은 내가 만들었어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만든 겁니다. 대 사부님의 심정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다. 조직의 사활이 거린 문제란 말입니다.”
원로들이 모두 무석을 편을 들고 나서자 수영 사부는 얼굴이 붉어져서 말을 못하고 있었다. 이미 증인까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수영사부는 입술을 깨물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좋아요. 여러분 의견에 따르도록 하죠. 새로운 수장은 여러분이 논의해서 결정하세요. 전 이만 나가봐야겠네요.”
수영사부는 바로 문을 박차고 나와 수영에게 달려갔다. 수영은 회의를 끝내고 빈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수영사부는 문을 박차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수영은 깜짝 놀랐다. 사부가 이곳까지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수영이 일어나 인사를 했지만 사부는 본 척도하지 않고 수영의 앞에 앉았다.
“앉아.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앉아.”
사부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수영은 말도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수영사부는 수영의 두 눈을 응시했다. 너무나 강렬한 눈빛에 수영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저번에 내가 너에게 물었다. 넌 수혼이놈과 아무 일 없다고 했다. 사실이냐.”
“예?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전에 무석이 원로원에 왔었다. 무석 말이 얼마 전에 너와 수혼이 놈이 모텔에 같이 있었다는 구나. 사실이냐!”
수영은 사부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무석이 수혼과 자신이 모텔에 들어간 사실을 밝혀낸 모양이다. 수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미 밝혀진 이상 더 이상 숨길수도 없지 않는가? 그리고 수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사부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입니다.”
“뭐..........뭐야. 그...........그게 사실이야. 이걸 어떻게.............이걸 어떻게..........”
“저 수혼씨 좋아해요.”
“짝~~~”
수영의 얼굴에 붉은 손자국이 나며 옆으로 돌아갔다. 수영사부가 수영의 뺨을 때린 것이다. 수영은 자신의 뺨을 만지며 멍해졌다. 사부에게 지금까지 혼나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사부가 손찌검까지 하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수영은 사부에게 대들지도 못했다. 사부은 눈에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 사부가 그렇게 말렸거늘..........그놈과 몸을 섞여..........그놈이 누군지나 알고..........하늘이여 이일을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사부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와의 일로 인해 사문과 조직에 누가되는 일은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맹세할 수 있습니다.”
“허허~ 수영아. 그놈이 누군지 알아. 내가 사랑한다는 놈이 누군지 알기나 알아.”
사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중얼거리는 말투다. 수영은 고개를 들어 사부를 보았다. 사부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놈은 네 오빠란 말이다. 친오빠란 말이다. 이일을 어쩌면 좋아. 모든 게 내 불찰이다. 내가 죄를 지어 벌을 받은 거야. 죽어야해. 이런 꼴을 보며 사느니 죽는 게 났다. 아~ 하늘이여. 이일을 어쩌면 좋단 말 입니까?”
“사.......사부님 뭐라고 하셨죠. 수혼씨가 오빠라고 하셨나요. 사부님..........사부님”
수영이 큰소리로 부르자 사부는 천장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려 수영을 보았다. 사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사부는 울고 있었다. 사부는 애처로운 눈길로 수영을 바라본다.
“그래. 수혼이 놈이 네 친오빠다.”
“그........그럼 법암이라는 분이 제 아버님이란 말씀입니까?”
사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수영은 눈앞이 캄캄해진다. 어머니를 죽인 것이 법암이라고 들었다. 법암이 원수라고 들었다. 그런데 법암이 아버지란다. 수혼이 자신의 친오빠란다. 수영은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만 같았다. 너무나 놀라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수영은 허리를 숙이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수영의 모습을 보며 사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불쌍한 손녀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길 내가 만나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절대 만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부의 울먹이는 소리에 수영은 힘들게 고개를 들었다. 수영의 얼굴을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사부님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법암이 아빠라니요. 수혼씨가 오빠라니요?”
“수영아. 다시 한번 물어보자. 정말이냐. 정말로 수혼이놈과 몸을 섞은 거냐.”
“아니에요. 모텔에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몸을 섞은 건 아닙니다.”
“저........정말이냐.”
“예? 정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된 거죠.”
“감사합니다.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사부님! 제발........제발 말씀해 주세요.”
사부는 수영의 대답을 들고 조금은 안정을 찾을 듯 했다. 자신이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부는 하늘에 감사했다. 만일 수혼과 수영이 몸을 섞었다는 자신은 미쳐버렸을 것이다. 격해졌던 감정이 조금은 진정된다. 사부는 눈을 감았다.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젠 수영에게도 과거의 모든 일을 말해주어야 할 것 같다.
“옛날 그러니까 20년이 조금 지난 이야기다. 나와 음양도의 전인 사이에 펼쳐진 대결에서 우리는 승부를 보지 못했다. 실력도 비슷했지만 음양도 전인도 음양검법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고, 나 또한 원예무를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너도 알겠지만 원예무도 불완전한 무술이다. 대대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계승자들의 자질 문제로 완벽한 원예무가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나는 완벽한 원예무를 내 대에서 다시 완성하고 싶었다. 나는 원예무를 제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전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갈치파를 만들었다. 밤의 세계만큼 실전경험을 쌓기에 적당한 장소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갈치파를 만들고 네 어미에게 갈치파의 수장 자리를 맡겠다. 다음 음양도 계승자와의 대결에서는 내 어미가 대결 상대로 나서야했기 때문이다. 갈치파는 세력은 키워 서울의 성철파를 공격했다. 그런데 음양도 늙은이도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성철파를 돕도록 했다. 갈치파와 성철파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네 어미와 아비는 마주치는 횟수 많아졌다. 그리고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 후 이야기는 법암의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조직과 사문을 버리고 도망쳤다. 원예도와 음양도 사부들은 두 사람을 찾기 시작했고, 끝내는 두 사람을 찾아냈다. 그들 사이에는 이미 자식까지 있었다. 하지만 사부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자들을 사문으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서로 헤어지길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사문보다 사랑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부들은 일단 고집을 부리는 제자들을 두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들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제자들의 사랑보다 사문의 일이 더 중요해기 때문이다.
사부들은 한 가지 음모를 꾸미기에 이른다. 원예를 납치하자는 것이다. 일단 그들을 사문으로 납치를 해서라도 사문으로 끌고 가서 각자 설득하자는 것이다. 사부들은 그렇게 협의하고 원예와 법암을 찾아갔지만 그들은 이미 본래 있던 곳에서 도망친 후였다. 사부들은 다시 그들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찾아냈다. 원예를 납치하기 전날 사부들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원예를 납치한 후 정확히 1년 후에 음양도문과 원예도문이 다시 대결하자는 것이다.
원예를 납치했다. 사부는 원예를 찾아온 법암에게 원예와 자식을 찾고 싶거든 1년 후에 대결해서 승리해야만 처자식을 돌려주겠다고 협박했다. 법암은 힘없이 돌아갔고, 사부는 원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원예는 법암과 대결하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사랑하는 남편과 생사(生死)를 건 대결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덧없이 흘려갔다. 사부의 끈질긴 설득에도 원예는 좀처럼 무술을 수련하려하지 않았다. 원예를 납치하고 3개월이 조금 지났을 때, 사부는 깜짝 놀랄 사실에 직면했다. 원예가 임신을 한 것이다. 원예는 법암과의 마지막 밤에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던 것이다. 사부는 절망했다. 원예가 임신이라니..............이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한참을 고민했다. 원예에게 아기를 지우라고 했다. 하지만 원예는 사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죽어도 아이를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사부는 다시 고민했다. 원예에게 강제로 아기를 지우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럼 대결을 미루어야 한다. 하지만 사문 사이의 약속을 파기하는 한다는 것은 사문의 명예에 누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원예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부는 끝내 사문의 명예도 자존심도 버리고 음양도문을 찾아가 대결을 연기해 줄 것은 요청했다. 하지만 음양도문의 사부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요청을 거절해 버렸다. 사문의 명예도 자존심도 버려가며 사정했는데도 일인지하에 거절당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딸이 네 자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니 대결을 연기하자고 사정해야 하는가?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원예가 딴 놈을 만나 결혼했다는 거짓말을 해 버렸다. 자기 딸이 힘들어하니 내 아들도 힘들어보라는 심보였다. 원예에게 돌아온 사부는 음양도 사부를 만난 이야기해 주었고, 원예는 사부의 처사에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해서 자신의 남편을 힘들게 하는지 사부가 원망스러웠다. 대결 날짜를 2달을 남기고 원예는 수영을 출산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원예는 난산을 했고, 원예는 바로 쓰려져 버렸다. 원예의 병은 깊어만 갔다. 의사는 그녀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원예는 남편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대결의 시간까지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갔다.
그녀는 창이 넓은 모자를 썼다. 남편에게 초추하고 병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을 보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대결이 시작되고 남편의 검이 날아왔다. 그녀는 남편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사랑하는 남편의 손에 죽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영은 길고긴 사부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원예의 뺨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연은 원예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수혼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은 두 분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두 분이 행복하게 사시게 내버려 두시지 그랬어요.......왜~ 끝까지 대결을 말리지 않으셨어요......”
“사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짓인 걸........내 딸을 잡아먹고 내 손녀에게 천륜을 어기게 할 뻔했어. 다 내 잘못이다. 수영아. 이 할미를 용서해 다오.”
“할머니...........”
할머니와 손녀는 서로를 안고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수혼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미우나 고우나 아버지다.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사랑하는 부인을 자신의 손으로 죽었다. 무슨 정신이 있었겠는가? 할아버지가 미웠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미웠을 것이다. 그분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죽은 자는 차라리 행복하다. 산자는 죽은 자의 짐까지 짊어지고 평생을 번뇌하며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고 평생을 번뇌하며 사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버지도 불쌍한 사람이다. 수혼은 길게 한숨을 내쉰다.
수영은 어떻게 되는 건가? 그녀와는 남매지간이다. 씨가 다른 남매라도 남매는 남매 아니가? 그녀는 갈치파의 수장이다. 자신은 동생이 이끄는 갈치파를 상대해야 한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다. 남매끼리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하지만 갈치파와의 싸움을 피할 순 없지 않는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배신할 순 없지 않는가? 수혼은 요코와 요키에가 기다리는 침실로 끝내 가지 못하고 서재에서 밤을 지세우고 말았다.
아침이 되자 수혼은 부인들을 모두 불려 모았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아름답게 치장하라고 했다. 부인들은 수혼이 아침부터 무슨 일로 그런 부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대로 모두 아름답게 치장했다. 요코와 요키에는 기모노를 입었고, 링링은 중국 전통복장을 입었다. 쌍둥이 자매와 지나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다. 수혼은 그녀들을 이끌고 법암이 있는 방으로 갔다.
법암도 밤 세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새벽이 밝아오자 가부좌를 트고 앉아 깊은 명상에 잠기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질 않는다. 아들을 만나고 그에게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부터는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 것이다. 아들이 자신을 받아들일까? 아들이 자신을 이해해 줄까? 아들은 마지막에 웃으며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돌아서는 아들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접니다.”
“들어오게.”
수혼은 부인들과 함께 법암의 방으로 들어왔다. 법암은 수혼과 함께 들어와 6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았다. 기모노를 입을 여인이 2명, 한복을 입은 여인이 3명, 그리고 차이나 복장을 한 여인이 1명이다.
“우리 아버님이야................아버지 며느리 들입니다. 절 받으세요.”
수혼은 간단하게 소개하고 먼저 자신이 허리를 숙였다. 부인들도 모두 법암을 향해 인사를 했다. 법암의 몸은 가늘게 떨린다. 수혼이 자신을 아버지로 인정한 모양이다. 이 못난 아비를 인정한 모양이다. 법암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참았다. 수혼과 6명의 여인들의 인사가 끝났다.
“모두 자리에 앉아. 소개 하겠습니다. 여기는 미나, 미희, 지나입니다. 그리고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은 이쪽이 요코, 이쪽이 요키에 입니다. 마지막으로 링링입니다.”
수혼이 소개하자 여인들은 법암을 향해 다시 고개한번씩 숙였다. 다른 여인들도 쌍둥이 자매와 지나를 통해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지금 눈앞에 있는 스님이 수혼의 아버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고맙다. 고마워. 내가 할말이 없구나. 수혼아.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 주는 거냐.”
“아들이 아버지를 용서하는 법도 있습니다. 밤 세도록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이해했습니다.”
“그래........그래 고맙다.”
“아버님 앞으로 예쁘게 봐주세요.”
“허허허~ 그래요. 처자들이 하나 같이 예쁘구먼.”
“감사합니다.”
“아버지께 부탁이 있어요.”
“그래 뭐냐.”
“할아버지 미워하지 마세요.”
“뭐라고.”
“제가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처럼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외할머니도 미워하지 마세요. 외할머니도 사정이 있었겠죠.”
“휴~~ 20년 수행한 나보다 네가 낮구나. 알았다. 나도 아버지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마. 또한 장모님도 이해하도록 노력하겠다.
“제 말 들어주시는 거죠.”
“그래.”
“그럼~”
수혼은 자리에서 일어나 법암의 품으로 달려갔다. 법암은 자신의 품에 뛰어든 수혼을 안아주었다. 수혼의 눈에서 참고 있었던 눈물이 흐른다. 법암도 수혼의 등을 다독거리며 뺨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른다.
수혼의 여인들은 수혼과 법암의 모습을 보고 환한 미소와 함께 눈물을 흐리고 있었다.
ps : 이야기가 급하게 흘려가죠. 이제 과거지사는 모두 밝혀졌습니다. 다만 똑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어떻게 진행될까요?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ps : 어떤님이 문맥도 맞지 않고 내용도 엉망이니 다시한번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님의 말대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님의 지적이 정확했습니다. 109부 엄청나게 수정했습니다. 내용은 변하지 않았지만 문맥이나 내용은 많이 다듬었습니다. 이미 덧말을 다시 분들이 많아 지우고 다시 올리지 않고 수정했습니다.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수혼은 일부러 아버지를 다른 층에 모셨다. 아직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20년을 넘는 세월동안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지내던 자신이다. 아니 부모란 존재를 잊고 살았던 자신이다. 그런 자신의 앞에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도 들었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다. 자신이 아버지 입장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부인을 죽게 만든 아버지와 장모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원통하고 분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식인들 눈에 보이겠는가?
수혼은 자신의 서재에 들어와 창문을 열고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바람이 불어와 정원에 있는 나무에서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낙엽들은 바람에 날려 정원을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낙엽들은 수혼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수혼의 마음이 심란했다. 법암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심란하던 마음이 그를 만나고 엉망이 되어 버렸다. 자신은 아버지란 존재도, 어머니란 존재도 잃어버리고 살아왔다. 자신을 키워준 사부를 부모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란 존재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이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자신을 키워준 사부가 나쁜 놈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사문의 명예를 위해..........아들의 사랑을 억지로 갈라놓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인자하고 자애롭던 사부님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럼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아버지는 사부가 아버지다. 있지도 않는 사실을 가지고 아버지를 욕하는 아들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다. 수영은 자신과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지고 수영을 출산했다고 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진 기간은 1년 남짓이다. 그 기간에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고 했다. 사실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애까지 낮았다는 것을 믿어야 할까? 그것도 곧 생사의 대결을 눈앞에 둔 상태인데 말이다.
수혼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때 서재에 쌍둥이 자매와 지나가 들어왔다. 그녀들은 수혼의 의사도 뭍지 않고 방에 들어와 바닥에 앉았다.
“수혼씨 우리와 잠깐 이야기 좀 해.”
“지금 복잡한데 내일 이야기하면 안 될까?”
“우리도 조금 전에 들었어. 아버님이 찾아오셨다지. 그런데 우리에게는 말도 없이 수혼씨 혼자 만나고 오는 길이라지. 우리와 잠깐만 이야기해.”
수혼은 한숨을 쉬고 그녀들 앞에 앉았다. 수혼이 바닥에 앉자 지나가 수혼의 어깨를 잡아 자신 무릎으로 끌어당긴다. 수혼은 힘없이 지나의 무릎에 상체를 기대었다. 지나는 수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준다.
“수혼씨 힘들지. 수혼씨 마음 다 알아.”
“그래요. 아버님도 그간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죠?”
“다들 고마워. 하지만 아직도 혼란스러워. 그런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해야 할까?”
“수혼씨. 난 말이야. 이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미웠어.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은 수많은 여자를 집안에 끌어들었어. 심지어는 한달도 못되어 다른 여자가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지. 그런 아버지가 싫었어. 아빠가 너무 미웠어. 또 아빠는 나에게 관심도 없었어. 그냥 돈이나 주면 부모의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분이 아빠였어. 그런데 있지. 그런 아빠라도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미워하던 아빠인데도 말이야. 아빠만 생각하면 너무 슬퍼져. 수혼씨..........부모님께는 날 태어나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니까?”
“지나가 그런 말하니까 어울리지 않는다.”
“뭐야~ 남은 심각하게 말하는데 그런 식으로 말할 거야. 하여튼..........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이나 치고 싶니. 어휴~ 짜증나~ 일어나~”
지나는 수혼의 머리를 잡고 일으켜 세운다. 수혼은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두들 내가 걱정 되서 온 거야. 고마워. 그런데 아버지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다. 내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줄게. 내가 고민하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아버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워. 문제는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아버지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내가 싸워야할 적(敵)이 애매해 진다는 거야. 애매? 말이 이상하다. 적(敵)을 상실했다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이야.”
“들어봐~”
수혼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부인들에게 전해주었다. 비교적 담담하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수혼과는 다르게 부인들은 수혼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안타까움에 탄식을 하기도 했다. 수혼의 이야기가 끝나자 부인들은 다들 말을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그만큼 부인들에게도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수영은 씨다른 남매일 확률이 높고, 수영의 사부는 수혼의 외할머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갈라놓은 것은 할아버지와 외할머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다들 할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복잡하지. 아버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난 그동안 외할머니와 동생에게 검을 거누고 있었어. 또 외할머니는 내가 자신의 외손자이고 수영과 남매인걸 알면서도 수영과 날 싸우게 했어. 웃기지 않아. 더욱 웃기는 건 우리 할아버지 그러니까 사부가 정말 나쁜 놈이란 거야.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맡는다면 이런 결론이 나와. 아버지에게는 한마디 말도 못했어. 그냥 농담만 몇 마디하고 말았지.”
“수........수혼씨. 아버님 말씀이 모두 사실일까?”
“사실일거라 생각해. 20년 만에 만난 아들이게 거짓말하다고 생각진 않아. 다만 아버지의 입장과 외할머니의 입장이 다를 수도 있겠지.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도 당하는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관점이 존재하니 말이야.”
“수혼씨 말은 당사자들의 의견을 모두 들어봐야 진실을 알 수 있다는 거야.”
“맞아. 아버지의 말만 듣고 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해.”
“수혼씨. 어떡하니. 우리 수혼씨 너무 힘들겠다.”
“하하하~ 됐네. 모두들 잠시만 나가죠. 아무래도 생각 좀 정리해야겠어.”
“수혼씨 너무 고민하지 마. 알았지.........이럴 때는 우리가 아무런 도움도 못되는 구나.”
“무슨 소리야. 당신들이 옆에 있으니 이만큼이라도 버티고 있는 거야. 아마 혼자 있었으면 돌아버렸을 거야. 다들 걱정해줘서 고마워.”
“우리는 그만 갈게요. 대신 수혼씨도 적당히 고민하고 주무세요. 요코와 요키에가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무슨 말이야?”
“그동안 지나씨 혼자서 당신을 감당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우리들끼리 순번을 정했어요.”
“이...........이런~................참~ 알았어. 이것도 내 업보지 뭐~”
“호호호~ 요코와 요키에를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그녀들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수혼은 길게 한숨을 쉬고 다시 창가에 서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법암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수혼이 마련해준 방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들에게 20년 동안 가슴속에 감추고 있던 비밀들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아들은 자신의 말에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이성으로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고만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몇 번을 놀래고 분노했을 이야기를 그놈은 그냥 담담하게 듣고만 있었다. 꼭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나중에 간단한 농담을 던지고 자신이 이곳으로 안내하고는 혼자서 올라가 버렸다. 아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줄까?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들에게 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다. 지금 와서 옛날이야기를 속일 이유가 없지 않는가? 법암도 가슴이 답답했다. 아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냥 속없는 놈처럼 잠이나 자고 있을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한숨이 나온다. 아들에게 잔뜩 고민만 안겨주는 못난 아비라고 생각하니 다시금 마음이 미어진다. 아버지 그리고 장모 두 사람의 고집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그들을 용서하고 싶어도 상황이 다시 그들을 증오하게 만든다.
수영은 수혼을 만나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인천에 도착한 그녀는 수혼과의 일을 정리했다. 수혼은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니다. 그도 아버지의 존재를 최근에야 알았다고 했다. 더욱이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은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원수의 아들이란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수혼의 말대로 그건 선대의 원한이다. 선대의 원한 때문에 자신들도 원수가 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선대의 원한은 선대의 원한으로 끝내야 한다.
수영이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연신내에서 수영을 놓친 강기다. 그는 물고 있던 담배를 던져버리고 핸드폰으로 무석에게 연락했다. 무석은 늦은 시간임에도 강기의 전화를 받았다. 강기는 무석과 만날 장소를 약속하고 옆에 있던 녀석에게 수영의 감시를 맡기고는 무석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무석과 강기는 조용한 카페에서 마주앉았다.
“그래 원예님에 대한 조사는 끝났어.”
“오늘 원예가 혼자서 외출했어요. 우리들이 미행했는데 원예가 눈치를 체고 우리 따돌려 버렸어요. 조금만 주위 했으면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있었는데 아쉬워요.”
“뭐야. 원예님이 또 혼자서 외출을 했어. 어디까지 미행한 거야.”
“연신내까지 미행하다가 놓쳤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다른 증거를 잡았어요. 저번에 종로에서 천랑과 원예가 만났다고 했죠.”
“응~ 뭐 특별한 거라도 알아냈어.”
“그들이 종로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아세요. 후후후~ 형님이 들으면 아마 까무러칠 걸요.”
“무슨 말이야. 내가 까무러치다니. 원예님이 천랑과 같이 자기라도 했단 말이야.”
“어~ 형님 어떻게 알았어요. 맞아요. 그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모텔에 함께 있었어요. 아~ 모함 아닙니다. 증인도 있어요.”
“모텔?...........그럼 원예와 천랑이 그렇고 그런 사이란 말이야.”
“맞습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누가 원예가 뒤에서 호박씨 깔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런 고고한 척은 다하는 년이 말이죠.”
“확실 한거야. 괜히 모함하는 거 아니야.”
“절 믿지 못하세요.”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물증이 필요해.”
“좋습니다. 제가 내일 모텔 직원을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좋아~ 만나보고 사실이면 원로원에 보고할게. 이번에는 원예도 힘들겠는데.”
“참~ 오늘 밤에 원예의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할까 합니다.”
“도청장치?..........경비가 삼엄할건데.”
“제가 사무실을 지키는 아이들을 매수해 두었습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대신 걸리면 나는 모르는 일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못돼도 모든 책임은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수영은 수혼과의 일은 보류하고 먼저 조직의 일부터 처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현재 갈치파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자갈치파는 손발이 묶이고 성민파는 괴멸했다. 이제 자신들 갈치파 혼자서 천랑파를 상대해야 한다. 수영의 소집 명령에 병원에 있던 매(梅)를 포함한 사군자와 무석 그리고 중간보스까지 모두 회의에 참석했다. 수영은 갈치파의 앞으로 진로에 대해 논의(論議)하기 위해 중간보스까지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모든 참석자가 회의장에 들어와 착석하고 원예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 갈치파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권력기관에 심어 두었던 조직의 와해로 인해 눈과 귀가 막히고, 우리를 돕던 성민파는 망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 갈치파만의 힘으로 천랑파를 상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천랑파를 상대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우리들 의견보다 먼저 원예님의 의견을 말씀해 주시죠?”
무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답변했다. 수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석을 보다가 무석에게 눈길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본다.
“여러분도 먼저 제 의견을 듣고 싶으세요.”
“예~ 지금까지 원예님은 저희들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원예님의 의견을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먼저 저 의견을 말씀드리죠. 현재 우리 갈치파는 서울의 반을 장악하고 있으면 천랑파가 종로, 신촌, 은평구 일대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지역은 성민파가 괴멸하며 무주공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역이란 의미가 없다고 봐요. 어차피 서울은 우리와 천랑파의 대결로 결판나게 됩니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는 파가 서울을 장악합니다. 해서 우리는 모든 힘을 집중하여 천랑파를 상대했으면 합니다.”
“그럼 원예님은 성민파가 장악하고 있던 나머지 서울지역을 그대로 방치하겠다는 말씀입니까?..............구역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성민파가 차지하고 있던 구역을 천랑파가 흡수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 생각에는 천랑파도 성민파가 가지고 있던 구역에는 관심을 없다고 생각합니다. 관심이 있었다면 성민파의 괴멸과 함께 벌써 흡수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랑파도 저번전투에서 친위대의 반 이상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들도 그런 희생의 대가를 받으려 할 겁니다? 그런데 성민파의 구역을 포기할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랑파도 지금은 우리처럼 숨을 고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무석님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무조건 반대의견만 제시하지 마시고 대안을 제시하세요.”
“제 생각에는 우리가 먼저 성민파 구역을 선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먹는 놈이 임자 아닙니까? 천랑파가 먹기 전에 우리가 먼저 먹어야죠.”
“그렇게 하면 전력을 분산해야 해요. 성민파가 당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천랑파 기동대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그들이 성민파를 상대했던 전술로 나온다면 어떻게 하실 거죠. 전력이 분산된 우리는 각개격파를 당할 확률이 높아요.”
“원예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이, 눈에는 눈입니다. 우린 성민파가 아닙니다. 천랑파가 우리구역을 박살내면 우리도 복수하면 되는 겁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보시지는 않았습니까? 천랑파는 좁은 구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로, 청량리, 은평, 구파발, 일산이 전부 입니다. 그들의 수입원은 이 좁은 구역에서 모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비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들의 구역을 먼저 공격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시진 않았습니까? 구역이 좁은 만큼 그 구역만 부셔버리면 천랑파는 자금이 고갈되어 스스로 망하지 않을 까요?”
“무석님 말씀은 우선은 성민파의 구역을 차지하고 공격에 치중하자는 말씀입니까?”
“예~ 맞습니다.”
“공격이 수비보다 몇 배는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겠죠?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력은 5백 화랑이 전부입니다. 그들까지 당하면 갈치파의 존폐까지 흔들려요.”
“왜 먼저 당할 걸로 생각합니다. 치밀한 작전을 세워야죠. 그리고 제가 알기로 1천 화랑이 현재 훈련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1천 화랑들은 아직 훈련도 끝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전력에서 제외해야 합니다.”
“원예님이야말로 계속 반대의견만 제시하시는데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다. 그냥 이대로 천랑파의 눈치나 보면서 지내자는 말씀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을 비축하고 결정적인 한방을 노려야죠.”
“흥~ 우리가 그렇고 있는 사이에 천랑파는 성민파 구역을 흡수하고 더욱 큰 세력으로 성장할겁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지금이 천랑파를 무너트릴 마지막 기회란 말입니다.”
“계속 무석님과 제 의견이 다른데 다른 분들도 의견을 제시해 보세요.”
장내는 조용했다. 무석과 원예의 의견을 듣고 누구의 의견이 옳다고 단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 특별히 다른 의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간보스 뿐만 아니라 사군자도 입을 다물고 있지 않는가?
“다들 말씀들이 없군요.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원예님 갈치파는 지금까지 원예님이 이끌어 오셨습니다. 원예님 뜻대로 하세요.”
원예가 계속 물어보자 끝내는 사군자(四君子)중 란(蘭)이 입을 열었다.
“란님 갈치파는 원예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원예님 뜻대로 하라니요. 갈치파가 원예님 개인의 것입니까? 갈치파는 우리 모두가 피땀 흘려 만든 조직이란 말입니다. 그런 무책임한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무석님은 계속 삐딱하게 말씀하시는데 제가 무석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하진 않았어요. 다만 두 분의 의견들이 일장일단이 있으니 먼저 원예님의 의견을 따르자는 거죠.”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일장일단이라니요? 원예님의 의견은 천랑파의 눈치나 보며 그들의 처사에 갈치파의 운명을 맞기라는 말하고 뭐가 다릅니까? 제 의견은 우리가 먼저 천랑파를 공격하지는 말입니다. 원예님 한 가지만 물어보죠. 원예님은 천랑파를 괴멸시켜 서울을 장악하고 더 나아기 전국을 제패할 의욕이 있는 분입니까?”
“무슨 말씀이죠?”
“제가 보기에는 원예님은 천랑파와의 전쟁을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혹시 천랑파와 모종의 관계라도 있는 겁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만하죠.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원로원에서 판단하겠죠.”
“원로원? 지금 원로원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예~ 아마 조만간에 원로원에서 원예님을 호출할 겁니다. 그때 원로원에서 이야기 하죠.”
“무슨 말이지 모르겠지만 좋습니다. 오늘 회의로 이것으로 끝내죠.”
원예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무석도 쓰게 웃더니 밖으로 나간다. 회의장은 썰렁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건 회의가 아니라 전쟁터를 방불케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고 하나 둘씩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무석은 어제 강기가 말한 모텔 직원을 만나보았다. 강기의 말은 사실이었다. 모텔직원은 그날 밤 모텔을 찾아왔던 천랑과 원예를 기억하고 있었다. 무석은 그길로 원로원을 찾아갔다. 무석의 방문에 원로들이 모두 집합했다.
“우릴 보자고 했나. 원예의 조사가 벌써 끝난 건가.”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시급을 다투는 사안이 발생해서 찾아왔습니다.”
“시급을 다투다니..........자세히 말해보게.”
“원예와 천랑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를 찾았습니다.”
무석의 말에 말없이 앉아있던 수영사부의 눈빛이 차갑게 번득인다.
“무슨 말이냐. 원예와 천랑이 모종의 관계 맺고 있다니..........”
“제가 확인한 결과 천랑과 원예는 얼마 전에 모텔에 함께 있었습니다. 전번에 전투가 벌어진 날이죠. 그때도 원예님 혼자 천랑파 움직임을 파악했다는 것에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원예님과 천랑이 모텔에 함께 있었다는 겁니다.”
“모........모텔.............그.........그럼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말이냐.”
“젊은 남녀가 모텔에 같이 있었으면 뻔하지 않습니까? 제가 모텔 직원을 만나 확인한 사실입니다. 추호도 거짓은 없습니다.”
“그.........그런 말도 안돼는.........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수영에게 확인해 보았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어.”
“제가 증인으로 모텔직원을 데려왔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죠.”
“증인?...........아니다. 내가 당장 수영에게 가서 확인해 보아야겠다.”
“잠깐만! 대사부님 증인까지 있는 상황입니다. 원예님께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여기서 진지하게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
“원예는 현재 우리파의 수장입니다. 그런 원예가 적(滴)의 수장과 놀아나고 있습니다. 적의 수장과 놀아나는 원예에게 계속해서 갈치파를 맡기실 작정입니까?”
“무슨 소리야~ 원예가 놀아나다니 그런 말도 안돼는 모함은 하지도 마라.”
“모함이 아닙니다. 증인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조금 전에도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때도 원예는 천랑파를 공격하지는 제 의견을 묵살했습니다. 원예는 천랑파를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인 성민파 구역을 흡수하자는 의견에도 반대합니다. 우리가 먹지 않으면 천랑파가 먹습니다. 원예는 천랑파에게 서울의 반을 그냥 내어주자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맞습니다. 원예가 의심스럽습니다. 일단 원예를 갈치파의 수장자리에서 내려오게 해야 합니다.”
“이.......이런 말도 안돼는..........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그래요.”
“허허~ 참! 일단은 원로들의 의견에 따르시죠. 원예에게 죄가 없다면 다시 수장자리를 돌려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원로들 모두의 의견입니까? 갈치파은 내가 만들었어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만든 겁니다. 대 사부님의 심정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다. 조직의 사활이 거린 문제란 말입니다.”
원로들이 모두 무석을 편을 들고 나서자 수영 사부는 얼굴이 붉어져서 말을 못하고 있었다. 이미 증인까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수영사부는 입술을 깨물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좋아요. 여러분 의견에 따르도록 하죠. 새로운 수장은 여러분이 논의해서 결정하세요. 전 이만 나가봐야겠네요.”
수영사부는 바로 문을 박차고 나와 수영에게 달려갔다. 수영은 회의를 끝내고 빈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수영사부는 문을 박차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수영은 깜짝 놀랐다. 사부가 이곳까지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수영이 일어나 인사를 했지만 사부는 본 척도하지 않고 수영의 앞에 앉았다.
“앉아. 너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앉아.”
사부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수영은 말도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수영사부는 수영의 두 눈을 응시했다. 너무나 강렬한 눈빛에 수영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저번에 내가 너에게 물었다. 넌 수혼이놈과 아무 일 없다고 했다. 사실이냐.”
“예?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전에 무석이 원로원에 왔었다. 무석 말이 얼마 전에 너와 수혼이 놈이 모텔에 같이 있었다는 구나. 사실이냐!”
수영은 사부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무석이 수혼과 자신이 모텔에 들어간 사실을 밝혀낸 모양이다. 수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미 밝혀진 이상 더 이상 숨길수도 없지 않는가? 그리고 수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사부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입니다.”
“뭐..........뭐야. 그...........그게 사실이야. 이걸 어떻게.............이걸 어떻게..........”
“저 수혼씨 좋아해요.”
“짝~~~”
수영의 얼굴에 붉은 손자국이 나며 옆으로 돌아갔다. 수영사부가 수영의 뺨을 때린 것이다. 수영은 자신의 뺨을 만지며 멍해졌다. 사부에게 지금까지 혼나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사부가 손찌검까지 하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수영은 사부에게 대들지도 못했다. 사부은 눈에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 사부가 그렇게 말렸거늘..........그놈과 몸을 섞여..........그놈이 누군지나 알고..........하늘이여 이일을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사부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와의 일로 인해 사문과 조직에 누가되는 일은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맹세할 수 있습니다.”
“허허~ 수영아. 그놈이 누군지 알아. 내가 사랑한다는 놈이 누군지 알기나 알아.”
사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중얼거리는 말투다. 수영은 고개를 들어 사부를 보았다. 사부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놈은 네 오빠란 말이다. 친오빠란 말이다. 이일을 어쩌면 좋아. 모든 게 내 불찰이다. 내가 죄를 지어 벌을 받은 거야. 죽어야해. 이런 꼴을 보며 사느니 죽는 게 났다. 아~ 하늘이여. 이일을 어쩌면 좋단 말 입니까?”
“사.......사부님 뭐라고 하셨죠. 수혼씨가 오빠라고 하셨나요. 사부님..........사부님”
수영이 큰소리로 부르자 사부는 천장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려 수영을 보았다. 사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사부는 울고 있었다. 사부는 애처로운 눈길로 수영을 바라본다.
“그래. 수혼이 놈이 네 친오빠다.”
“그........그럼 법암이라는 분이 제 아버님이란 말씀입니까?”
사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수영은 눈앞이 캄캄해진다. 어머니를 죽인 것이 법암이라고 들었다. 법암이 원수라고 들었다. 그런데 법암이 아버지란다. 수혼이 자신의 친오빠란다. 수영은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만 같았다. 너무나 놀라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수영은 허리를 숙이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수영의 모습을 보며 사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불쌍한 손녀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길 내가 만나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절대 만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부의 울먹이는 소리에 수영은 힘들게 고개를 들었다. 수영의 얼굴을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사부님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법암이 아빠라니요. 수혼씨가 오빠라니요?”
“수영아. 다시 한번 물어보자. 정말이냐. 정말로 수혼이놈과 몸을 섞은 거냐.”
“아니에요. 모텔에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몸을 섞은 건 아닙니다.”
“저........정말이냐.”
“예? 정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된 거죠.”
“감사합니다.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사부님! 제발........제발 말씀해 주세요.”
사부는 수영의 대답을 들고 조금은 안정을 찾을 듯 했다. 자신이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부는 하늘에 감사했다. 만일 수혼과 수영이 몸을 섞었다는 자신은 미쳐버렸을 것이다. 격해졌던 감정이 조금은 진정된다. 사부는 눈을 감았다.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젠 수영에게도 과거의 모든 일을 말해주어야 할 것 같다.
“옛날 그러니까 20년이 조금 지난 이야기다. 나와 음양도의 전인 사이에 펼쳐진 대결에서 우리는 승부를 보지 못했다. 실력도 비슷했지만 음양도 전인도 음양검법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고, 나 또한 원예무를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너도 알겠지만 원예무도 불완전한 무술이다. 대대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계승자들의 자질 문제로 완벽한 원예무가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나는 완벽한 원예무를 내 대에서 다시 완성하고 싶었다. 나는 원예무를 제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전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갈치파를 만들었다. 밤의 세계만큼 실전경험을 쌓기에 적당한 장소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갈치파를 만들고 네 어미에게 갈치파의 수장 자리를 맡겠다. 다음 음양도 계승자와의 대결에서는 내 어미가 대결 상대로 나서야했기 때문이다. 갈치파는 세력은 키워 서울의 성철파를 공격했다. 그런데 음양도 늙은이도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성철파를 돕도록 했다. 갈치파와 성철파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네 어미와 아비는 마주치는 횟수 많아졌다. 그리고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 후 이야기는 법암의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조직과 사문을 버리고 도망쳤다. 원예도와 음양도 사부들은 두 사람을 찾기 시작했고, 끝내는 두 사람을 찾아냈다. 그들 사이에는 이미 자식까지 있었다. 하지만 사부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자들을 사문으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서로 헤어지길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사문보다 사랑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부들은 일단 고집을 부리는 제자들을 두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들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제자들의 사랑보다 사문의 일이 더 중요해기 때문이다.
사부들은 한 가지 음모를 꾸미기에 이른다. 원예를 납치하자는 것이다. 일단 그들을 사문으로 납치를 해서라도 사문으로 끌고 가서 각자 설득하자는 것이다. 사부들은 그렇게 협의하고 원예와 법암을 찾아갔지만 그들은 이미 본래 있던 곳에서 도망친 후였다. 사부들은 다시 그들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찾아냈다. 원예를 납치하기 전날 사부들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원예를 납치한 후 정확히 1년 후에 음양도문과 원예도문이 다시 대결하자는 것이다.
원예를 납치했다. 사부는 원예를 찾아온 법암에게 원예와 자식을 찾고 싶거든 1년 후에 대결해서 승리해야만 처자식을 돌려주겠다고 협박했다. 법암은 힘없이 돌아갔고, 사부는 원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원예는 법암과 대결하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사랑하는 남편과 생사(生死)를 건 대결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덧없이 흘려갔다. 사부의 끈질긴 설득에도 원예는 좀처럼 무술을 수련하려하지 않았다. 원예를 납치하고 3개월이 조금 지났을 때, 사부는 깜짝 놀랄 사실에 직면했다. 원예가 임신을 한 것이다. 원예는 법암과의 마지막 밤에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던 것이다. 사부는 절망했다. 원예가 임신이라니..............이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한참을 고민했다. 원예에게 아기를 지우라고 했다. 하지만 원예는 사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죽어도 아이를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사부는 다시 고민했다. 원예에게 강제로 아기를 지우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럼 대결을 미루어야 한다. 하지만 사문 사이의 약속을 파기하는 한다는 것은 사문의 명예에 누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원예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부는 끝내 사문의 명예도 자존심도 버리고 음양도문을 찾아가 대결을 연기해 줄 것은 요청했다. 하지만 음양도문의 사부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요청을 거절해 버렸다. 사문의 명예도 자존심도 버려가며 사정했는데도 일인지하에 거절당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딸이 네 자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니 대결을 연기하자고 사정해야 하는가?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원예가 딴 놈을 만나 결혼했다는 거짓말을 해 버렸다. 자기 딸이 힘들어하니 내 아들도 힘들어보라는 심보였다. 원예에게 돌아온 사부는 음양도 사부를 만난 이야기해 주었고, 원예는 사부의 처사에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해서 자신의 남편을 힘들게 하는지 사부가 원망스러웠다. 대결 날짜를 2달을 남기고 원예는 수영을 출산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원예는 난산을 했고, 원예는 바로 쓰려져 버렸다. 원예의 병은 깊어만 갔다. 의사는 그녀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원예는 남편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대결의 시간까지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갔다.
그녀는 창이 넓은 모자를 썼다. 남편에게 초추하고 병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을 보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대결이 시작되고 남편의 검이 날아왔다. 그녀는 남편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사랑하는 남편의 손에 죽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영은 길고긴 사부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원예의 뺨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연은 원예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수혼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은 두 분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두 분이 행복하게 사시게 내버려 두시지 그랬어요.......왜~ 끝까지 대결을 말리지 않으셨어요......”
“사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짓인 걸........내 딸을 잡아먹고 내 손녀에게 천륜을 어기게 할 뻔했어. 다 내 잘못이다. 수영아. 이 할미를 용서해 다오.”
“할머니...........”
할머니와 손녀는 서로를 안고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수혼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미우나 고우나 아버지다.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사랑하는 부인을 자신의 손으로 죽었다. 무슨 정신이 있었겠는가? 할아버지가 미웠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미웠을 것이다. 그분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죽은 자는 차라리 행복하다. 산자는 죽은 자의 짐까지 짊어지고 평생을 번뇌하며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고 평생을 번뇌하며 사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버지도 불쌍한 사람이다. 수혼은 길게 한숨을 내쉰다.
수영은 어떻게 되는 건가? 그녀와는 남매지간이다. 씨가 다른 남매라도 남매는 남매 아니가? 그녀는 갈치파의 수장이다. 자신은 동생이 이끄는 갈치파를 상대해야 한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다. 남매끼리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하지만 갈치파와의 싸움을 피할 순 없지 않는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배신할 순 없지 않는가? 수혼은 요코와 요키에가 기다리는 침실로 끝내 가지 못하고 서재에서 밤을 지세우고 말았다.
아침이 되자 수혼은 부인들을 모두 불려 모았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아름답게 치장하라고 했다. 부인들은 수혼이 아침부터 무슨 일로 그런 부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대로 모두 아름답게 치장했다. 요코와 요키에는 기모노를 입었고, 링링은 중국 전통복장을 입었다. 쌍둥이 자매와 지나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다. 수혼은 그녀들을 이끌고 법암이 있는 방으로 갔다.
법암도 밤 세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새벽이 밝아오자 가부좌를 트고 앉아 깊은 명상에 잠기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질 않는다. 아들을 만나고 그에게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부터는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 것이다. 아들이 자신을 받아들일까? 아들이 자신을 이해해 줄까? 아들은 마지막에 웃으며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돌아서는 아들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접니다.”
“들어오게.”
수혼은 부인들과 함께 법암의 방으로 들어왔다. 법암은 수혼과 함께 들어와 6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았다. 기모노를 입을 여인이 2명, 한복을 입은 여인이 3명, 그리고 차이나 복장을 한 여인이 1명이다.
“우리 아버님이야................아버지 며느리 들입니다. 절 받으세요.”
수혼은 간단하게 소개하고 먼저 자신이 허리를 숙였다. 부인들도 모두 법암을 향해 인사를 했다. 법암의 몸은 가늘게 떨린다. 수혼이 자신을 아버지로 인정한 모양이다. 이 못난 아비를 인정한 모양이다. 법암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참았다. 수혼과 6명의 여인들의 인사가 끝났다.
“모두 자리에 앉아. 소개 하겠습니다. 여기는 미나, 미희, 지나입니다. 그리고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은 이쪽이 요코, 이쪽이 요키에 입니다. 마지막으로 링링입니다.”
수혼이 소개하자 여인들은 법암을 향해 다시 고개한번씩 숙였다. 다른 여인들도 쌍둥이 자매와 지나를 통해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지금 눈앞에 있는 스님이 수혼의 아버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고맙다. 고마워. 내가 할말이 없구나. 수혼아.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 주는 거냐.”
“아들이 아버지를 용서하는 법도 있습니다. 밤 세도록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이해했습니다.”
“그래........그래 고맙다.”
“아버님 앞으로 예쁘게 봐주세요.”
“허허허~ 그래요. 처자들이 하나 같이 예쁘구먼.”
“감사합니다.”
“아버지께 부탁이 있어요.”
“그래 뭐냐.”
“할아버지 미워하지 마세요.”
“뭐라고.”
“제가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처럼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외할머니도 미워하지 마세요. 외할머니도 사정이 있었겠죠.”
“휴~~ 20년 수행한 나보다 네가 낮구나. 알았다. 나도 아버지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마. 또한 장모님도 이해하도록 노력하겠다.
“제 말 들어주시는 거죠.”
“그래.”
“그럼~”
수혼은 자리에서 일어나 법암의 품으로 달려갔다. 법암은 자신의 품에 뛰어든 수혼을 안아주었다. 수혼의 눈에서 참고 있었던 눈물이 흐른다. 법암도 수혼의 등을 다독거리며 뺨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른다.
수혼의 여인들은 수혼과 법암의 모습을 보고 환한 미소와 함께 눈물을 흐리고 있었다.
ps : 이야기가 급하게 흘려가죠. 이제 과거지사는 모두 밝혀졌습니다. 다만 똑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어떻게 진행될까요?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ps : 어떤님이 문맥도 맞지 않고 내용도 엉망이니 다시한번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님의 말대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님의 지적이 정확했습니다. 109부 엄청나게 수정했습니다. 내용은 변하지 않았지만 문맥이나 내용은 많이 다듬었습니다. 이미 덧말을 다시 분들이 많아 지우고 다시 올리지 않고 수정했습니다.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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