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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정풍운(雷霆風雲) - 6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23:20 6,571회 0건
제 4 장 장강(長江)

구화산을 출발한 이현성은 배를 타고 장강수로연맹의 총단이 있는 동정호를 향해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사희영과 함께 동릉현(銅陵縣)으로 향했다. 뇌온려는 함께 갈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사희영은 뇌정검호각과는 전혀 관계없는 여인이니 그녀까지 두고 갈 수는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진노(眞老)라 자칭한 노인이 따라나섰다. 능벽운이 붙여준다고 한 뇌정검호각의 인물이 그 노인네였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한 노인과 함께 가라는 소리에 이현성은 질겁을 했다. 소일초의 말로는 육십년 전 뇌정검호각의 제자였다가 문파를 나와 세상을 돌아다니던 노인이라 강호의 소문이나 지리에 달통한 인물로 스스로 자원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현성이 보기에는 문파에서 쫓겨나 거지 노릇하던 노인네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뇌정검호각을 나온 것도 육십년 전 일이라니 그게 참인지 거짓인지는 소일초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이현성은 차라리 사희영과 둘이서만 가겠다고 했지만 그 진씨 노인이 하도 간청을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함께하게 되었다.

‘이런 걸 버리는 패라고 하던가….’
동릉현의 선착장에 도착해 배를 찾아보겠다며 부산을 떠는 진노의 뒷모습을 보던 이현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인원이 부족하다고 해도 첩보를 보내면서 이런 노인을 붙여준 다는 건 이번 일이 단지 자신을 쫓아내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흥. 그냥 이 기회에 장강유람이나 하다 가면되지 뭐.’

이현성은 맘 편한 생각을 하며 강둑의 풀밭위에 걸터앉았다. 거대한 장강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현성이 있는 동릉현은 구만리 장강에서는 하류에 속한다. 따라서 강이래 봤자 한강밖에는 보지 못한 이현성에게 반대편 강변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 장강의 넓이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앞에 인간은 한없이 미약해진다. 그는 자리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들이 떠가고 있다. 어디에서나 같은 모양의 하늘, 등을 찌르는 바삭거리는 풀잎사귀, 그것들을 음미하던 이현성은 일순 확연히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래 이건 현실이야.”

이현성은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이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자신은 마치 영화속의 등장인물이 된 것처럼 무협지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장난스럽게 연기를 해왔다. 어설프게나마 무공을 익히고, 그것만으로 엄청난 위력을 발하는 무림인들과 싸우고, 그리고 죽이고, 그것이 정말 자기 자신이었던가. 유람이라고? 자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현성은 두 손으로 양 볼을 찰싹 때렸다.

과거 저쪽세상에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면 이현성은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혹시 이것이 꿈이 아닐까? 현실의 나는 잠을 자면서 이불 위에다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듯이 이 세계에 떨어진 자신이 겪는 지금도 현실이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일어난 이 사태는 어디까지나 "거짓"이고, 진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랬기에 아무런 고민도 없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싸웠다. 물론 공포를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각오는 없었다. 죽더라도 진짜 죽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이 편리한대로 멋대로 왜곡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라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상상 속의 자신을 연기하듯이 뇌온려를 대하고, 사희영을 대하고, 능벽운을 대했던 것이 아닐까? 능천휘에 죽음과 뇌온려에 대해 느꼈던 책임감. 그것이 진실이었을까?

지금까지는 어떻게 보면 그냥 되는대로 생각 없이 끌려온 것에 불과했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 것이 뭐가 있을까? 무공의 수련도 적석산을 떠나 온 뒤로는 힘들다는 이유로 한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그 순간 싫어도 깨닫게 되겠지. 지금 이 세상이 전부 진짜라는 것을, 사람은 가짜로 살고 있지도 않고, 가짜로 죽을 수도 없다. 자신은 정말로 그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성랑(成郞). 왜 그러고 계세요?”
“응?”

어느샌가 머리맡에 다가온 사희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현성은 눈을 올려 떠 그녀를 바라봤다. 길고 짙은 속눈썹 밑으로 유현하게 빛나는 봉목. 미려한 콧날은 날카롭게 이어지다가 단련한 선을 이루며 치솟아 있고 거기에 백옥조차 비견될 수 없는 피부. 그리고 향기…! 그녀의 전신에서는 실로 형언할 수가 없는 그윽한 꽃내음이 풍겨 나오고 있었었으니 사희영의 몸 주위로는 가을임에도 어디선가 날아온 수 마리의 나비들이 휘돌고 있었다. 그렇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받는 일은 결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아니, 그녀는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의 사고방식마저 무협지식으로 바뀌어 버린 것 같다.

이현성은 누운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평범한 사람들. 왜 지금까지 저 사람들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북망산에서부터 구화산까지, 지나오는 길에 부딪쳤던 평범한 사람들을, 저쪽세계에서는 자신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삶은 소설이 아니다. 여기도 하나의 세계. 현성도 이제 진지해져야 할 때였다.

이현성은 몸을 일으켰다. 떨어진 곳에서 진노가 자신들을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배를 구한 모양이다.

“그럼 가지.”
“네.”

이현성은 얼마 전부터 뇌온려와 사희영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뇌온려와 사희영은 이현성에게 공대(供臺)를 한다. 옳던 그르던 그것은 이세계의 생활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누리려 하면서 자신에게 닥쳐오는 현실을 피해나갈 수는 없다.

그는 결심했다. 되던 안 되던 이제부터 진심으로 부딪쳐 나가기로. 꿈에서나 그리던 세계가 자신 앞에 펼쳐져 있고, 자신에게는 아직 활용도 하지 못하는 막대한 힘이 잠자고 있다. 이런 때 뜻을 세우지 않으면 남아가 아니다.

‘좋아! 이왕 하는 거면 천하제일고수를 목표로 하는 거지.’

그는 반은 장난스럽게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느끼며 이현성은 멀리서 손짓하는 진씨 노인을 향해 가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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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노(眞老)를 따라간 이현성은 부풀어 오르던 감정이 한 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뭐에요!”

이 노망난 듯한 노친네가 안내한 배는 아주우~ 자그마한 소선이었다. 그야말로 일엽편주(一葉片舟)라는 말이 어울리는 배였다. 거대한 장강에 띄워진 나뭇잎 같은 배에 타고 동정호까지 수천리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생각에 이현성은 눈앞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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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호(洞定湖).

호남성과 호북성에 걸쳐 펼쳐진 광활한 호수다. 동정호는 마치 바다와도 같이 드넓어 천하제일호(天下第一湖)라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거대했다.

지금 이순간 망망한 동정호에는 낙조가 지고 있었다. 호면을 온통 핏빛으로 물 들이는 저녁 노을은 아름답다 못해 처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핏빛 낙조 위로 시뻘건 화염이 악마의 숨결같이 넘실대고 있었다. 근 이십여 장에 이르는 한 척의 거선(巨船)이 불길에 휩싸여 가 고 있었다.

"크아악…!"
"아악!"

불타는 거선 위에서는 아비규환의 대살육이 전개되고 있는 중이 었다. 똑같은 청색(靑色) 무복을 걸친 장한들이 검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지닌바 무공의 차이가 현격한 탓인지 한쪽 편의 청의인들은 반대편의 도검 아래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있었다.

"크흑!"

마지막 한 명의 장한이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 그의 가슴 은 늑골이 드러나도록 무참하게 베어져 나가 있었다.

"용…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속하는 더 이상… 아가씨를 지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청의 장한은 사력을 다해 고개를 들어 갑판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 본 거선의 막다른 선수에는 한 명의 소녀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

나이는 십 오륙 세 정도 되어 보였으며 인형같이 귀엽고 청순한 용모를 지닌 소녀였다. 소녀는 무릎 위에 한 자루 비수를 올려놓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커다란 두 눈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려다 무참히 죽어가는 청의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의연한 자태를 흐트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소녀가 범상치 않은 명가의 후손임 을 알 수 있었다.

다른 편들을 몰살시킨 남은 청의장한들은 음흉하게 웃으며 선수에 앉아 있는 소녀를 향해 다가섰다. 그들 중에 혈포를 입은 우두머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크크, 귀여운 아가씨! 별로 걱정할 것은 없다. 너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네 오라버니가 순순히 우리에게 굴복하도록 잠시 함께 있어 주면 되니까!"

"가까이 오지 마랏! 더러운 배신자."

문득 소녀가 앙칼지게 외쳤다. 어느덧 그녀는 가녀린 섬섬옥수로 비수를 들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더 이상 다가서면 내 손으로 목숨을 끊고 말 테야!"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암팡지게 외쳤다.

"오라버니에게 누를 끼치느니 차라리 자결해 버리고 말겠다."

소녀의 커다란 눈에는 어린 나이답지 않은 결연함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장한들도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정말 소녀가 자진해 버린다면 만사휴의(萬事休矣)가 되고 마는 것이다.

"자자! 진정해. 아가씨!"

우두머리가 손을 내저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맹세해도 좋아. 결코 아가씨와 아가씨의 오빠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니까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구!"

그 자는 억지로 웃으며 소녀를 설득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소녀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급습하여 제압할 작정이었다.

“대주! 좌측에서 정체불명의 배가 접근해 옵니다.”

그런데, 이 때였다. 돌연 한 명의 장한이 긴장한 목소리로 우두머리에게 보고했다.

"…!"
"…!"

우두머리와 소녀는 동시에 흠칫하며 그 자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야로 동정호의 서쪽 수평선 위로 한 척의 소선(小船)이 쏜살같이 질주해 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 그 배는 조그만 점으로 보였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위에 타고 있는 인물들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거리로 육박해 들어왔다. 그것은 실로 믿어지지 않는 기쾌무비한 속도였다.

우두머리는 바짝 긴장하며 다가드는 소선을 주시했다. 가까이 다가온 소선은 상상 이상으로 작았다. 그리고 그 자그마한 소선 위에는 이남일녀(二男一女)가 타고 있었다.

꾸부정한 늙은 뱃사공 한 명이 노를 젖고 있고 선수에는 눈에 띄는 용모의 남녀 한쌍이 서 있었다.

특히 칠흑같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우고 있는 여인은 마치 얼음으로 조각한 듯이 투명한 피부의 미인으로 우중충한 검은 피풍의(避風衣)를 걸치고 있음에도 전혀 그 아름다움이 바래지 않고 있었다.

"뭐냐 저 코딱지만한 배에 탄 인간들은? 서극(徐極)이 보낸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혈포의 우두머리 눈에 언뜻 안도의 빛이 스쳤다. 만일 예의 소선(小船)이 그가 생각했던 배였다면 이는 심각한 상황 을 의미한다. 즉, 이 주변 수역에 수많은 선단이 몰려들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들에게 다 가서는 소선의 일남일녀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들인지.

그 작은 배는 호수의 수면을 질풍같이 가르고는 순식간에 거선과의 거리가 이십여 장으로 좁혀졌다.

그러자 그 배에 타고 있던 남녀는 일갈을 하며 뱃머리를 박차고 질풍같이 거선을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는 그 한번의 도약으로 단번에 거선의 갑판 위에 내려섰다.

“네…네 놈들은 누구냐?”

그 놀라운 신위에 우두머리는 사색이 되어 외쳤다. 그러자 남자 쪽이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말하면 아냐?”

그 두 사람은 바로 이현성과 사희영이었다.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이현성은 내기를 다스리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흔들거리는 배 위에서 하는 일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그리하여 이제는 비록 어설프지만 뇌정복마심결의 묘리대로 운기를 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마음가짐이 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석산에서 수련을 할 때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속으로 무시하던 구결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한 것이다. 운기를 전혀 모를 때도 몇장씩 뛰어 다닐 수 있었던 그였기에 약간이나마 자신의 힘을 다스릴 수 있게 되니 이십장이 넘는 거리라 해도 간단하게 뛰어 올라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이현성이 진씨 노인에게 품었던 불신은 그가 배를 탄 직후부터 더욱 심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지푸라기 하나 들지 못할 것만 같던 노인이었는데, 놀랍게도 엄청난 힘으로 노를 저어 장강을 거슬러 올라온 것이다.

방금 전 이현성이 탄 소선이 그토록 빨리 살육(殺戮)의 현장에 달려온 것도 진노의 놀라운 솜씨 덕분이었다. 이현성은 그제야 이 진씨노인이 세외고인(世外高人)임을 알아차렸으나, 그는 끝내 이 노인에게 한마디 질문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물어본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현성은 서있는 자들과 시체가 되어 있는 이들, 그리고 뒤쪽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녀를 살펴보았다.

‘저 아이를 인질로 잡기 전에 끝내야 한다.’
이현성은 그렇게 다짐하며 검을 빼들었다. 천뢰신검은 이미 능벽운에게 주어 버렸으니 이형성이 꺼낸 검(劍)은 한 자 남짓 되어 보이는 기이한 검이었다.

빗살무늬가 새겨진 칼자루(劍把), 동그란 구멍이 있는 칼막이(古銅)에 칼날(劍刃)은 거의 세워져 있지 않았다. 검신은 물론 자루까지 검은 빛을 띤 이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형태의 짧은 검이었다.

그리고 이현성은 앞으로 뛰어 나갔다.

"막… 막아랏!"

우두머리는 다급하게 외쳤다.
거선 위에 있던 수십 명의 장한들이 날아드는 이현성을 향해 일제히 덮쳐들었다. 이현성에게 있어서는 이런 싸움이 위험했다. 초절정고수들의 강기를 사용한 무공은 이현성에게 통하지 않지만 실제적으로 쇠와 살이 맞닿으면 당연히 베어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이현성의 속도자체를 따라잡지 못했기에 장한들은 덮쳐드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크아악!"

이현성을 향해 덮쳐들던 청의 장한들은 순식간에 목이 따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사희영의 비취호접차(翡翠胡蝶叉)가 사위를 날아다니자 순식간에 십여 명이 급소를 격중당하고 쓰러졌다.

갑판 위에는 시체들이 나뒹굴었고, 시뻘건 선혈이 나무판을 물들였다.

"으으… 인… 인간도 아니군!"

혈포의 우두머리는 사색이 되어 비실비실 뒤로 물러섰다.

"타인의 목숨을 파리같이 여기면서 그래도 네놈의 목숨은 아까운 모양이지?"

이현성은 짜증을 담은 음성을 내뱉으며 그 자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현재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만큼 살인에 대한 불쾌감은 더욱 큰 상태였다.

"으으…!"

우두머리는 공포에 질려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는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두려움에 전신을 떨었다. 얼마나 떨었던지 자신의 등 뒤에 한 소녀가 비수를 움켜 쥔 채 앉아 있다는 사실조
차 깨닫지 못했다.

"커… 억!"

뒤로 물러서던 그 자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바로 한 자루 비수가 그의 배심혈에 손잡이만 남기고 깊숙이 박혀 든 것이다. 비수를 쥐고 있던 소녀가 이를 악물고 우두머리의 등을 찔러 버린 것이다. 비록 나이는 어리나 소녀의 손에 들린 비수는 간장(干藏) 막사(莫邪)에 못지않은 날카로움을 지닌 보도(寶刀)였다.

그 때문에 우두머리는 저항 한 번 못하고 배심혈이 꿰뚫린 것이다.

"크으… 이… 이런… 빌어먹을…!"

등이 찔린 그 자는 울컥 선혈을 토하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러나, 그 실룩거림은 잠시였고 이내 우두머리의 몸뚱이는 고목이 쓰러지듯 앞으로 넘어갔다.

소녀가 그의 등에 꽂힌 비수를 뽑자 검붉은 선혈이 분수같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비릿한 선혈은 그대로 소녀의 전신에 흩뿌려졌다.

"…!"

소녀는 피에 젖은 채 목석같이 굳어 서 있었다. 비수를 으스러져라 움켜 쥔 소녀의 섬섬옥수가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그 경련은 팔을 따라 이내 전신으로 번 져갔다.

"내… 내가… 살인을… 살인을…!"

소녀는 턱을 덜덜 떨며 잠꼬대같이 중얼거렸다. 충동적으로 혈포의 우두머리를 찌르기는 했으나 그녀는 아직 살인을 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던 것이다.
소녀의 손에서 비수가 굴러 떨어졌고, 소녀의 교구는 갑판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현성은 재빨리 다가가서 그녀를 받아 안았다.

"휴우…!"

이현성은 가녀린 소녀의 몸을 안아들며 한숨을 토했다. 소녀를 갑판 위에 살며시 내려 놓은 그는 소녀의 비수를 집어 들고 배의 난간으로 걸어갔다.

거선의 난간 아래에는 그들을 태우고 온 소선이 조용히 떠 있었다.

스읏! 이현성이 표표히 신형을 날려 소선 위로 내려서는 순간 거선은 불길에 휩싸인 채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진노는 급히 노를 저어 침몰하는 거선으로부터 멀어져갔다.

"…!"

이현성과 사희영은 선수에 나란히 서서 침몰하는 거선을 바라보았다. 거선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치 녹아들듯이 동정호 그 아래로 모습을 감추어갔다.

"클클…! 공자께서는 대단한 횡재를 하셨습니다."

문득, 이현성의 귓전으로 창노한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의 주인은 바로 진노였다. 그의 얼굴은 온통 주름살로 뒤덮여 도무지 나이를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이 아이를 아십니까, 진노?"

이현성은 소녀의 얼굴에 묻은 선혈을 닦아 주며 물었다.

"헤헤, 물론입지요. 그 계집아이는 바로 장강수로연맹(長江水路聯盟)의 맹주였던 장강용왕(長江龍王) 서륭(徐隆)의 막내딸입지요. 서초하(徐楚河)라고 하지요."

진노는 부지런히 노를 저으며 말했다.
이현성은 동릉에서 동정호에 이르는 동안 끝없이 진노가 무림정세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덕분에 그는 본의 아니게 당금의 무림정세에 대해 해박해질 수 있었다.

-장강용왕(長江龍王) 서륭(徐隆).
그는 바로 강남무림 최대의 결사인 장강수로연맹의 총표파자(總飄巴子:맹주)였다. 수공의 능력만으로는 대륙제일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본래 그 장강용왕에게는 일남일녀의 자식이 있었다.

-과해룡(過海龍) 서극(徐極).
-서초하(徐楚河).

바로 이들 남매였다.
과해룡 서극은 당년 이십팔 세의 호한이다. 뛰어난 근골을 지닌 그는 부친 장강용왕의 진전을 이미 오래 전 에 완전히 터득했다고 한다. 오척이 넘는 조룡금강척(釣龍金剛尺) 만 있으면 물속에서는 그 누구도 과해룡을 당하지 못한다고 한다.

뛰어난 자질과 더불어 호방한 성격 덕분에 많은 신진고수들을 친 구로 사귀고 있는 그는 다음 세대 장강수계의 패왕으로 인정받고 있는 젊은 패웅이었다.
서초하는 장강용왕이 말년에 후처의 몸에서 얻은 고명딸이다.

본처를 일찌기 사별한 장강용왕은 십수 년 전에 매부용(梅芙蓉) 이라는 양가규수를 후처로 맞았고, 서초하는 바로 그녀의 몸에서 얻은 딸이었다.

장강용왕은 이 어린 딸을 금지옥엽같이 아끼고 귀여워했었는데, 그 장강용왕의 장중주가 자칫 알수없는 무리에게 인질로 잡혀갈 뻔한 것이다. 과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장강수로연맹의 맹주였었다라…! 장강용왕에게 무슨 일이 라도 일어났단 말입니까?"

이현성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헤헤, 과연 날카로우십니다."

진노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느물느물하게 웃었다.

"장강용왕은… 한 달 전쯤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장강수로연맹은 일대위기에 봉착한 상태입지요."

전노는 다른 세상의 얘기를 하듯이 태평하게 말했다.

"과해룡 서극이란 어린 아해가 제 아비보다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역시 경륜의 일천함은 어쩔 수 없지요. 그래서 장강수로연맹의 열 여덟개 수채를 완전히 장악하기에는 아직 무리이지요."

"흐음! 그럼 장강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자들이 꽤 여럿이겠군요."

이현성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배에서 싸우던 이들의 복장이 같은 것만 보아도 작금의 장강수로연맹은 배신과 모략이 판을 치고 있겠지요!"

진노의 말에 이현성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런 경우라면 뇌정검호각의 흉수는 그 세력들 사이에 껴서 싸움을 부채질하면서 장강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겠군요."

"그렇지요. 공자는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현성은 자신을 추켜세우는 진노를 무시하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엔가 이현성이 타고 있는 소선을 향해서 수많은 배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범선으로부터 날렵한 판옥선(板屋船)들까지 없는 배가 없었고, 그 숫자가 근 천여 척에 이르는 대선단이었다.

그 군선들은 하나같이 수룡이 수놓아진 새카만 깃발을 달고 있었다. 그 검은 깃발이 바로 저 장강수로연맹의 상징이다.

-흑수용왕번(黑水龍王幡).
최소한 장강수계와 강남무림에서는 이 검은 깃발의 위세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수많은 장강수로연맹의 전선들은 멀찍이서 이현성의 소선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수로연맹이라는 건 말은 번지르르 해도 강도집단인데, 강도집단의 세력이 이정도라니 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생겨먹은 구조지? 유지되는 것 자체가 신기하구만’

이현성은 선수에 표표히 서서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 사이에도 동정호의 여러 섬그늘에서 수많은 배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동정호 전체를 배로 뒤덮 어 버릴 듯한 엄청난 기세였다.

"헛허! 드디어 주역들께서 나타나셨군!"

문득 진노가 전면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수십 척의 범선에 호위된 한 척 웅대한 거선(巨船)이 동정호면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색으로 칠해진 세 개의 돛을 단 범선이었다. 그 검은 범선의 돛대 위에는 기폭의 길이가 삼장이나 되는 흑수용왕번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현성은 그 흑선이 바로 장강수로연맹 총수의 전용선임을 알아보았다.

흑선의 선수에는 지금 한 명의 중년미부(中年美婦)가 초조와 불안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 여인은 삼십대 중반의 절세미부였다. 온후하고도 그윽한 기품 이 느껴지는 여인이었는데 풍만한 일신에는 새하얀 상복(喪服)이 걸쳐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치장도 없는 그 소복조차도 여인의 타고난 미모는 결코 감출 수가 없었다.

"저 여인이 서초하의 생모겠군."

이현성은 염두를 굴리며 혼절한 서초하를 안아들었다. 어느새 두 배의 거리는 삼십여 장으로 좁아들고 있었다. 이현성은 즉시 소선의 선수를 딛고 날아올라 흑선의 선상으로 질풍처럼 날아들었다.

"놀라서 잠시 혼절했을 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흑선에 날아오른 이현성은 소복을 걸친 중년미부를 안심시키며 그녀에게 서초하를 안겨 주었다.

"초하야… 흐윽!"

불안에 떨며 이현성을 바라보던 중년미부는 울음을 터뜨리며 서초하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열하는 그 중년미부는 바로 장강용왕 서륭의 미망인인 매부용이었다. 이현성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비로소 시선을 흑선의 갑판 위로 돌렸다.

드넓은 갑판 위에는 모두 열아홉 명의 인물들이 이현성을 에워싸 듯 둘러서 있었다. 남녀가 뒤섞인 열아홉 명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범상치 않아 한눈에 한 지방의 패주(覇主)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사람들이 장강십팔채의 주인들인 수계십팔왕(水界十八王)들이군."

이현성은 내심 염두를 굴렸다. 수계십팔왕으로 불리는 이 흑선 위의 인물들이야말로 장강수로연맹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 중 몇이나 배신자인걸까? 어쩌면 이번 납치미수의 배후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현성은 자신을 찌를 듯한 열아홉 쌍의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태연한 신색으로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

문득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이현성의 시선이 멈추어졌다. 중인들 과 함께 서 있는 당당한 체격의 장한 한 명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정도 되어 보였으며 범의 어깨에 곰의 허리를 지닌 장한이었다. 그는 아주 진중한 눈빛을 토하고 있었다.

"…!"

두 젊은 청년들의 눈빛이 한 순간 허공에서 작렬했다. 강렬한 장한의 눈빛에 비해 이현성의 눈빛은 아무 생각도 없는 듯 덤덤했다.

‘왜 꼴아보고 지랄이야. 꼽냐?’

먼저 시선을 피하고 입을 연 것은 장한 쪽이었다.

"소생의 누이를 구해 주셔서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은공의 성함을 알 수 있겠소?"

이현성을 향해 깊숙이 포권을 해 보이는 장한은 바로 과해룡 서극이었다.

"은공(恩公)이라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소생은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이현성도 불순한(?) 생각을 접고 정중히 마주 포권을 해보였다.

"아, 이형이시군요. 이형의 은혜는 정말 백골난망이외다. 부디 소생 서극이 조금이 라도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있다면 지도해 주시기 바라오."

서극은 어디까지나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별 말씀을…! 날도 이미 늦었으니 하룻밤 편의를 보아 주신다면 그 이상 고마울 데가 없겠습니다."

이현성은 내심 희희낙락하며 말했다. 일단 장강수로연맹의 총단에 잠입하면 뭔가 이유를 알아볼 기회가 생길 것이다.

"하룻밤이 아니라 언제까지라도 좋소이다. 초라하나마 서모의 거처를 이용해 주시오."

과해룡 서극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이 때였다.

"감사합니다, 은공."

느닷없이 매부용이 이현성의 발치에 엎드리며 큰 절을 올리려 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이현성은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매부용의 교구를 부축했다. 그 바람에, 삼베 소복을 통해 더할 수 없이 탄력 있고 야들야들한 여인의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현성은 마치 불덩이를 만진 듯 질겁을 하며 손을 떼었다.

"…!"

이현성의 당황하는 그 모습에 고개 숙인 매부용의 옥용이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

그런 두 남녀의 모습을 서극의 호목(虎目)이 야릇한 빛을 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날아 올라온 사희영의 눈빛도 따갑게 이현성을 쏘아봤다.

-호색한! 바람둥이.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렇게 비난하는 사희영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 같아 이현성은 목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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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岳陽).

호남성 동북부의 상수(湘水)하류에 위치한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고성(古城)이다. 또한 이곳은 동정호(洞庭湖)와 장강(長江)이 교차하는 곳이다.

악양의 옛 이름은 파릉(巴陵)으로 비옥한 토지 덕택에 농업이 발달해 왔고, 여기에 동정호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이 더해져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 불린다. 또한 강남과 강북의 모든 문물 이 이곳 악양을 거쳐 유통되고 있으니 수륙(水陸) 양쪽의 유통로가 집결된 요지 중의 요지가 바로 악양인 것이다.

동정호에 이어진 악양 서남의 호변에는 광활한 동정호를 접하여 하나의 거대한 성보(城堡)가 자리하고 있었다. 높직한 석축으로 에워싸인 수백만평 넓이의 성채였다.

성채 남단의 선착장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상선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수룡보(水龍堡)
이것이 이 성보의 이름이었다.
구만 리 장강수계를 지배하는 장강수로연맹의 총단이며, 명실상부한 강남녹림의 총본영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그 수룡보 내부에 위치한 한 채의 아담한 정자 위에서는 장강수로연맹의 주인들과 이현성이 술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달빛은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고, 때맞추어 불어오는 야풍은 밤공기의 신선함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사희영은 피곤하다며 쉬러 들어가고, 오늘의 주인공으로 술자리의 상좌(上座)를 차지한 이현성에게 옆에 앉은 서극이 직접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형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이 날 뻔 했소.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람이 있는 듯 하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형은 정말 겸손한 분이오.”

그 때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철면노호(鐵面怒虎) 묵자강(墨滋康)이 이현성을 불렀다. 그는 초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철탑처럼 강건한 육체를 가진 그는 장강수로연맹의 십팔채 중에서도 지존삼채(至尊三寨)로 꼽히는 노호채(怒虎寨)의 채주였다.

“이소협, 실례가 안 된다면 소협의 사문을 물어도 되겠소?”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이현성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는

“저는 뇌정검호각의 제자입니다.

그의 대답에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 이들 전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몇몇은 술잔까지 떨어뜨렸다.

잠시간의 침묵, 이현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일이 있어 섬서(陝西)에 가 있느라, 참변을 피할 수 있었지요.”

묵자강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큼큼. 상심이 크시겠소. 늙은 것이 주책없이 괜한 것을 물어 주흥을 깨트렸구려.”
“아니오. 괜찮습니다.”

이현성은 쓸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곳 동정호에는 어쩌다 오시게 되었나요?”

이어서 질문을 던진 것은 흑수채(黑水寨)의 채주인 흑수선(黑水仙) 낙약란(洛若蘭)이었다, 그녀는 더할 수 없이 청순한 소녀처럼 보이는 얼굴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염기를 풍기는 완숙한 몸매를 가지고 있어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사문의 흉수를 찾아다니던 중입니다.”

이현성은 그렇게 말하며 채주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별달리 눈에 띄는 모습은 없었다.

“어라라. 역시 명문의 제자는 다르시네요. 비록 단 한사람이 남더라도 사문의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 멋져요.”

낙약란은 비꼼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로 이현성의 말을 받았다. 채주들 몇몇도 그녀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눈꼬리를 요염하게 떨며 노골적으로 추파를 보내는 모습으로 보아 비꼬는 것은 아닌 듯도 했다.

‘칠색아줌마(?)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군.’
이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으로 답했다.

“명문정파의 제자분이시라 해도, 저 같은 녹림의 계집을 천하다 여기지 않으신다면 제가 따르는 술잔을 받아주시겠지요?”

낙약란(洛若蘭)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직접 의자를 들고 와서는 이현성의 바로 옆에 앉았다.

“낙채주께서, 이형의 풍모에 반해버렸나 보구려.”

조금은 어색한 상황에서 서극이 한마디를 하자 자리에 앉은 모두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는 다시 유연하게 변했다. 낙약란 역시 웃음으로 받으며 이현성이 비운 잔에 술을 따랐다.

‘뭐지?’
그 순간 이현성은 흠칫 놀라 다시 낙약란의 얼굴을 쳐다봤다. 다른 이들은 눈치 채지 못한 듯 하지만 그녀는 술을 따르면서 슬쩍 스치는 손으로 이현성의 허벅지 안쪽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우연은 아니었다. 그러나 낙약란은 당황한 이현성에게 요염한 눈웃음을 짓더니 아예 한쪽 팔을 붙잡고 달라붙어버렸다.

곧 다시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지만 이현성은 한쪽 팔에 팔짱을 끼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낙약란이 신경 쓰여 무슨 말이 오가는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탁자 밑으로 내려온 낙약란의 한쪽 손은 이현성의 허벅지를 직접적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저기…. 낙채주님. 왜 그러세요.”

이현성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낙약란의 미소만 짙어질 뿐이었다. 지금 이현성의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거미줄에 걸린 나비? 아니면 꽃뱀에게 물린 개구리?

조금씩 사타구니 깊은 곳으로 다가오는 야들야들한 손길, 그것도 모르고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채주들. 창피해서 뭐라고 말도 못하고 이현성은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젠장, 이건 성추행이잖아!’

이현성은 왜 지하철에서 치한한테 당하는 여자들이 대놓고 말을 못하는지 절절히 이해가 가고 있었다.

낙약란은 그런 이현성의 모습이 오히려 재미있는지 이번에는 직접 이현성의 바지 위로 솟은 분신을 섬섬옥수로 덥석 붙잡았다.

“어라라, 벌써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낙약란이 이현성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여자 정말 왜 이래!’

이현성은 순간적으로 울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런 미인이 몸을 밀착해 오는데 어떤 남자라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낙약란같은 미녀에게 유혹받는 것은 당연히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장소에서 이런 짓은….

[그만 두세요!]

이현성은 전음을 보냈다. 억지로 떼어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있으면서 맘에 없는 말은 하지 말아요. 이공자님]

낙약란도 전음으로 답하며 하얀 손가락으로 바지위에서 훑어 내리듯이 이현성의 분신을 만졌다.

이현성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낙약란은 계속해서 그의 양물을 감싼 손을 옷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살짝 얼굴을 붉히곤 전음을 보냈다.

[귀엽게 생긴 분이 이렇게 훌륭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아, 이제 그만해요.]

힘없이 그녀를 말리는 이현성, 그러나 어떤 도둑이 멈추란다고 멈추던가. 낙약란은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은 종횡무진(縱橫無盡) 이현성의 양물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면서 낙약란은 얼굴이 달아오른 이현성을 보고 즐겁게 웃었다.

“벌써 취하셨소? 이형은 보기보다 술이 약한가 보오.”

옆에서 서극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 순간 이현성의 육봉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던 낙약란은 싱긋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일순 육봉을 꽈악 움켜쥐었다. 굉장한 압력이 하체를 조여 오며 몰려있던 피가 두근두근 맥박 쳤다.

‘크으윽’
“아, 아닙니다. 아직 괜찮습니다.”

이현성은 최대한 태연한 척 대꾸했다. 지금 상황을 그에게 들켜버린다면 창피해서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

자신의 손에 의해 느끼고 있는 이현성을 청초한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낙약란은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가끔씩 그녀의 손은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가 음낭을 주무르기도 했다.

[어라라, 벌써 숨이 거칠어지시네.]
[아우우우우, 그만두세요]

이현성은 허리에서부터 올라오는 쾌락에 머리가 멍해질 것 같았다.




“아까 보니 소협의 검이 생김새가 특이하던데 한번 보여주지 않겠소?”

그 순간 말 한마디로 이현성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경하채(驚河寨)의 채주인 혈잔(血殘) 금서량(琴西亮)이다.

짜릿짜릿한 쾌락을 주는 부드러운 손에서 해방이 되는 것은 좀 아쉽기는 했지만 이현성은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낙약란의 손을 떨쳐냈다.

“원하신다면 보여드려야죠.”

그리고 품속에서 짧은 검을 꺼내 금서량에게 건넸다. 본래 무인은 자신의 병기를 남에게 함부로 내주지 않는 법이기에 이현성이 서슴없이 검을 내주자 좌중의 인물들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금서량도 단지 이현성이 스스로 뽑아 보여주기를 기대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의 검은 전체 길이 약 한자에 검은 빛을 띤 단검이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검막이에는 동그란 구멍이 있고 손잡이에는 빗살무늬가 있는 특이한 단검으로 짧은데다 날도 서있지 않아 병기로서의 쓰임새는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계에는 단 한나뿐인 검이었다. 심냉처리(深冷處理)된 고탄소강(高炭素鋼) 검날, 내충격 ABS 수지로 된 칼집, 폴리마이드 손잡이의 군용대검(軍容帶劍)이었다. (칼집과 탄띠를 연결하던 것은 이미 잘라내 버린 후다.)

이현성에게서 대검을 받아서 검을 빼내 본 금서량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검은 빛이 도는 검신이라니 설마 현철(玄鐵)로 만든 것이오? 손잡이와 칼집은 무얼로 만들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겠소.”
“뭐 그렇습니다.”

이현성은 대충 대꾸했다. 모두가 천생(天生) 무인들이라 생전 보지 못한 생김새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금서량과 함께 검을 살펴보던 서극이 물었다.

“이런 검이라면 이름도 있을 듯 하오만 검의 이름이 무엇이오?”

이현성은 순간 얼굴을 찡그리더니 대답했다.

“네. 아앗 대검(帶劍)이라고 합니다.”

“대검(大劍)이라….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오.”
“오오오.”

묘한 착각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서극, 그리고 좌중에서는 대단하다는 듯 경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검(大劍)! 언젠가는 온 강호가 알게 될 이현성의 독문병기의 이름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현성은 내심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서극이 이현성에게 대검의 이름을 불어 볼때 할 때 사람들의 시선이 대검에 집중된 틈을 타고 낙약란의 손이 재빠르게 바지 끈을 풀어버린 것이었다.

하얀 손가락이 바지춤으로 들어가, 꾸물꾸물 움직였다. 그리고는 낙약란의 서늘한 섬섬옥수가 이현성의 장대한 육봉을 그대로 잡았다. 낙약란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니 짜릿한 쾌감이 이현성의 등줄기를 내달렸다.

[아아, 굉장해요. 옷 위에서 만졌던 것보다 더 큰 것 같아요.]

점입가경이다. 낙약란은 그렇게 말하며 이현성의 육봉을 붙잡고는 그대로 바지 밖으로 꺼내버렸다.

“안 돼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오늘 처음 만난 여자에 의해 육봉이 밖으로 꺼내진 이현성은 당황의 소리를 질렀다.

“예 옛?”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이현성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때 대검의 검두(劍頭) 끝에 있는 소총과 결합하는 부분을 만지고 있던 금서량이 제풀에 놀라 되물었다.

“아. 여기에 무슨 장치가 있는 것이오?”
“아 그…그렇습니다. 위험한 암기가….”

자신도 모르게 전음이 아니라 실제 음성으로 말해버린 이현성 자신도 당황해서 되는 데로 둘러댔다.

그리고 그 사이 밖으로 꺼내진 육봉을 움켜쥔 낙약란의 손은 더욱 격렬하게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소협의 이것. 너무 근사해요. 뜨겁고, 단단하고]

음란한 말을 전음으로 보내는 낙약란. 이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아아 미치겠다.’

그러나 주위사람들에게는 낙약란이 좀 심하게 이현성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다는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실 낙약란도 몰락한 명문의 제자(?)인 이현성을 놀려주기 위해 장난삼아 시작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지금의 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다.

처음 그녀가 기대했던 이현성의 반응은 불에 덴 것처럼 놀라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현성이 순진하게도 주변의 눈치를 보며 미약한 저항을 하니 왠지 그 모습이 너무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하나의 수채의 주인이 되기까지 그녀가 겪어왔던 인생은 험난함 그 자체였다. 남성우월주의로 가득 차 그녀를 욕정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 거칠고 무식한 수적들이 낙약란의 동료였고, 상관이었다. 그녀는 몇 번씩 강제로 남자의 정액 받이가 되면서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강해지겠다고. 그리하여 드디어 수채의 주인이 되었지만 그녀의 부하들 역시 뒤에서는 그녀를 음담패설의 대상으로 삼고, 군자인 척하는 정파의 사내들은 그녀를 탕녀(宕女)취급했다.

그래서 그녀는 겉으로는 음란한 척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남성들을 지극히 혐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현성의 반응은 너무나 신선했다. 그녀가 강제로 하는 행동을 억지로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녀를 경멸의 눈초리로 보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그의 모습은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이현성처럼 훌륭한(?) 물건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그녀가 부드럽게 쥐고 매만질 때마다 그녀의 손 안에서 그의 육봉이 꿈틀거리며 점점 더 굵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맥동하는 뜨거운 감촉의 불기둥은 어느새 낙약란의 상상 속에서 그녀의 몸 안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놀림에 따라 이현성이 얼굴을 찡그리며 번민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작게 경직되며 그녀의 다리 사이에 숨겨진 매혹적인 균열 속에서는, 진한 애액이 흘러 나왔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더 부드럽고 격렬하게 행위에 열중했다.



“아 잘 보았소. 보여주어서 고맙소.”

금서량이 대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어 이현성에게 돌려주었다. 그 사이에도 술잔이 몇순배 돌아가면서 술자리는 계속 혼란해지고 있었다.

이미 한껏 달아오른 낙약란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미 그녀의 질 안쪽은 뜨겁게 달아오른 속살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언가를 갈구하듯 꿈틀대고 있었다.


그녀는 이현성의 한쪽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다리 사이를 조금 벌리고는 치마의 벌어진 틈 사이로 그의 손을 끌어당기고는 전음을 보냈다.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낙약란의 다리 사이, 까칠까칠한 수림에 뒤덮여 있는 비역은 이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고의 틈을 벌려 이현성의 손가락이 자신의 꽃잎에 닿게 했다. 이미 여자의 육체를 알고 있는 이현성은 그 음란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두 개의 손가락이 낙약란의 균열 속에 삼켜졌다. 뜨겁게 젖어있던 낙약란의 질은 기다렸다는 듯 속살들이 착 휘감고 꽉 물어왔다.

‘아아아아·····’

낙약란은 신음을 참아내며 바르르 경련했다.

이현성과 낙약란 두 사람이 그렇게 자신들의 세계에 빠져있는 사이 이미 취할 대로 취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술이 술을 마시는 경지에 이르러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서로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다.

서극만은 계속해서 이현성에게 술을 권했지만 이현성은 이미 술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낙약란은 여전히 이현성의 육봉과 음낭을 정성껏 애무하면서도 이현성의 중지와 검지가 뜨겁게 달아오른 자신의 질 깊숙한 곳을 찌르고 질퍽하게 젖어있는 그곳의 속살들을 헤집을 때마다 탐스런 엉덩이를 묘하게 꿈틀거렸다. 그녀의 애액은 이미 앉아 있는 의자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간혹 그녀를 보는 다른 채주들은 흑수선이 얼마 마시지도 않고 취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현성 또한 피리를 연주하는 듯한 낙약란의 애무로 인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런 그를 지탱해 온 것은 여기서 싸버렸다간 뒤처리를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계였다.

‘아아아!’

이윽고 이현성은 격렬하게 상하로 왕복하는 낙약란의 손놀림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낙약란은 그 전에 이현성이 한계에 달한 것을 눈치채고는 그의 백탁한 정액을 손바닥 안에 받아냈다.

“하윽

그 순간 낙약란도 질 안에서 온몸으로 퍼져가는 쾌감에 작게 교태스런 신음성을 내뱉으며 절정에 달했다.


이현성의 사정이 끝나고 낙약란은 정액이 흘러내릴 새라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슬그머니 주변의 눈치를 보니 그녀의 그런 행동을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내에 퍼진 술 냄새도 밤꽃 냄새를 숨겨주고 있었다.

손바닥에 가득한 이현성의 정액.

[…정말 많아요.]

-할짝 할짝
낙약란은 자신의 손 안에 모인 이현성의 정액을 바라보다가 소중하게 핥아 먹었다.

오래 전 흑수채의 전(前)채주가 그녀를 범하며 강제로 정액을 먹였을 때 너무나 굴욕적이고 더러운 느낌에 하루종일 구역질을 하고 사흘동안 밥을 먹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이현성의 정액을 맛보며 의외로 맛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강렬한 밤꽃 향을 풍기고 미끌미끌하면서도 끈적한 그것은 신선하면서도 달콤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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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좀 과음했나…!"

이현성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한 채의 전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수룡보 후원에 자리한 아늑한 전각이었다. 그곳으로 말하자 면 과해룡 서극이 특별히 이현성을 위해 마련해 준 객사이기도 했다.

이곳의 술은 생전 처음 입에 대보는 이현성이었지만 불편한 자리에 묘한 상황을 겪고 나니 수십 근의 독주를 마시고도 그리 많이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현성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낙약란은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처음과는 다르게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로 나머지는 다음에 꼭 하자는 말을 남기고 도망가듯 사라져 버렸다.

이현성은 객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한 켠에 널찍한 침상이 놓인 침실이었다. 침상 위에는 이미 사희영이 잠을 자고 있었다.

술 자리 전에 서극은 사희영과 이현성이 어떤 관계인가 물었었다. 난처해진 이현성은 그저 쓴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서극이 사희영과 이현성이 알아서 그렇고 그런 사이라 짐작을 하고서 침실이 하나뿐인 이 전각에 객사를 정해 준 것이었다.

이불 밖으로 얼굴만 내민 채 잠이 든 사희영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평온무사해 보였다. 잠깐 사희영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이현성은 조용히 의자를 빼서 앉았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정리해보기 위해서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현성은 지금까지의 경과를 차근차근 더듬었다. 단지 하룻밤 같이 술을 마신 것만으로 누가 수로연맹의 배신자인지는 알 수 없었고, 알 필요조차 없었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뇌정검호각을 멸문시킨 흉수를 캐는 것 뿐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세 가지 가정을 확인했다. 첫째 흉수에게 협력한 채주는 소수다. 둘째 채주들은 사이가 좋지 않다. 셋째 흉수들은 세외의 인물이다.

장강의 하류에 있는 황산의 위치로 볼 때, 흉수들이 만약 변황에서 온 자들이라고 한다면 장강수계에 연이어 있는 십여개의 수채를 지나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별로 사이도 좋지 않은 수채 사이에 자신의 영역을 다른 수채가 많은 인원을 데리고 이동하는 걸 그냥 보고 넘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따라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바다쪽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동릉현을 기준으로 볼 때 그 하류에 위치한 수채는 둘에 불과했다.

‘흑수채(黑獸寨)와 경하채(驚河寨)인가….’

둘 중에서도 남경(南京)을 거점으로 하는 경하채는 장강십팔채 중에서도 지존삼채(至尊三寨)로 꼽힐 만큼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수채였다. 게다가 흑수채라면 흑수선 낙약란의 수채다.

그러나 세 가정 중에 하나라도 틀렸다면 결코 맞을 수 없는 결론이었다. 술을 마시는 와중에도 이런 저런 시비가 오가는 걸로 보아 확실히 수로연맹의 채주들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은 확실했지만 다른 건 모두 불분명했다. 흉수가 세외의 세력이라는 것도 능벽운의 짐작에 불과하고…. 또 뇌정검호각에서 일이 벌어진 것은 거의 반년 전이니 장강용왕 서륭이 죽기 전의 일이고 따라서 서륭의 주도하에 장강 전체가 협력했을 가능성도 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서륭은 왜 죽은 거야? 또 서초하는 납치해서 뭐하게? 어차피 다를 딴 마음을 품고 있는 마당에 서극 한명 굴복시켜봤자, 다른 채주들이 납득할 리도 없는데. 젠장 머리만 아프다!’

이현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협지의 주인공들은 당연하다는 듯 흉수를 꿰뚫어 보지 않던가. 그는 자신이 아직 주인공이 되기엔 멀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 일단 잠이나 자고 나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해보자."

이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사희영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며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런데, 막 자리에 누우려던 이현성은 질겁했다. 손끝에 야릇하고도 보드라운 물체가 만져진 때문이었다.

"설마…!"

이현성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요를 치켜들어 보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 떠오르는 뽀얀 여인의 나신이 그의 두 눈에 쏘아져 들어왔다. 놀랍게도 사희영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피부는 우유빛을 보듯이 새하얀 그것이었며, 성숙할 대로 성숙해 터질 것 같은 여인의 젖가슴의 봉우리, 그 밑으로는 양지유처럼 매끄럽고 팽팽한 하복부가 수줍게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그 매끄러운 하복부가 끝나는 부눈의 도도록한 둔덕에 덮인 까칠까칠한 수림 사이로는 여인의 신비로운 그 부분이 보일 듯 말 듯 숨겨져 있었다.

"…!"

이현성은 놀라 사희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느새 잠이 깬 건지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이현성이 올 때까지 자지 않고 있었다.

뭔가를 기대하는 듯 한 사희영의 눈빛. 이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조용히 눈만 마주치고 있던 두 사람, 먼저 입을 연 것은 사희영이었다.

“성랑(成郞).”
“으응?”
“아까 저녁때 말이에요. 그…여자 분한테.”

그 여자? 설마 낙약란과 있었던 일을 사희영이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이현성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으…으응?”

그러나 사희영이 꺼낸 이름은 이현성은 생각지도 못한 이였다.

“그 매부용이라는 분한테 마음이 있으신 거에요?”



“에엣? 아니… 뭐……. 예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꼭 마음이 있니 어쩌니 할 것 까지는…. 게다가 그 분은 미망인이잖아.”

사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눈치 보지 말아주세요. 저도 상공께 다른 여자가 생기는 것이 좋지는 않지만, 상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고 나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모든 여자에게 친절하고 우유부단하고….”

이곳 세계는 너무나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라고 할까. 확실히 여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현성이래야 자신이 생각하는 일반인의 상식대로 그녀들을 대하는 것이지만 여인들이 느끼기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사희영은 말을 계속했다.

“삼처사첩을 거느리셔도 괜찮지만 저도 조건이 있어요.”
“뭔데?”

역시 남자라는 동물은 어쩔 수 없다. 반사적으로 조건을 묻는 이현성.

“반드시 영웅대협(英雄大俠)이 되셔야 해요. 상공은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말씀을 하지 않으려 하시니 어떤 비밀을 가슴에 품고 계신지 모르지만 저는 저의 지아비가 되신 분이 아주 큰 사람이시라고 믿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희영의 온화한 시선과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뭔가 이현성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이어지는 다음 말.

“그리고, 두 번째,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 생기시더라도 저를 버리시면 안 돼요.”

왜 이렇게 자신을 믿어주는 것일까?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까.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사희영을 얼싸 안았다.

“내가 희영이를 버릴 리가 없잖아.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현성은 자신의 몸에 밀착되어 있는 벌거벗은 사희영의 감촉을 느꼈다.

이미 낙약란과의 일의 여운이 남아있던 그의 분신은 장대하게 솟구쳐 사희영의 아랫배를 찌르고 있었다. 사희영의 양볼도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사희영의 그윽한 향기는 실로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안겨 있는 알몸의 무르익은 여체! 당장이라도 그녀의 깊고 은밀한 곳에 불덩이 같은 자신의 욕망의 상징을 밀어 넣고픈 충동이 이는 것이다.

“저…는 언제…라도 좋아요….가가가 원하신다면….”

사희영의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 장강수로연맹의 일로 고민하던 것은 어느새 잊어버렸다. 이현성은 와락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사희영을 꽉 껴안고 입술을 요구했다.

"흐읍.”

사희영은 눈을 크게 뜨면서 숨을 가쁘게 쉬었다. 현성의 혀가 그녀의 입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쪼옥쪼옥
이제는 능숙해진 이현성의 혀 놀림을 사희영은 취한 듯 뺨을 붉히며 받아들였다. 음란하게 끈적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리며 두 개의 혀가 마치 별개의 생물처럼 뒤얽혀 서로를 핥기 시작했다.

“으흡 음음 으읍.”
“흐응…으응… 하아아~”

이윽고 긴 타액의 실이 이어지며 현성의 얼굴이 떼어졌다. 머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사희영의 단정했던 눈동자는 선정적인 기대를 품고 젖어 있었다.



현성은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그녀의 비열(秘裂)을 찾아 음모를 밀어 헤치며 손가락을 넣고 꽃잎 사이를 벌렸다. 사희영의 입술 밖으로 가녀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하아… 상공…. 그런 데… 만지면. 이상해져요."
“이상해져도 상관없어. 내 앞에서는"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떨면서 중얼거리는 사희영에게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꽃잎 안을 찔렀다. 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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