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할 일이 없다. 내 나이 또래의 다른 이들이야 애인을 만나거나 아내, 자식들과 함께 어딘가로 나가고 하겠지만 어느새 10년 째 나에게 주말은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다. 여성 기피증 덕분에 돈은 모을 수 있었다. 퇴근 후에도 따라 데이트할 필요가 없었으니 서른하나라는 나이에 팀장도 달 수 있는 거고, 데이트같은 쓸데 없는 일에 돈 쓸 일이 없으니 이렇게 오피스텔에 살 수도 있는거다.
내 오피스텔 안은 컴퓨터와 각종 전자기기로 가득차 있다. 공대 출신은 아닌 나였지만, 회사의 분야가 분야인데다가 사내의 프로그래머들과도 친하게 지내다보니 어느새 내 취미는 각종 전자기기를 다루는 것이 되었다. 집안엔 퍼스널 컴퓨터가 세 대, 매킨토시가 두 대, 각종 카메라에 MP3, 홈시어터가 가득했다.
집안을 둘러보니 이건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마치 기계가 사는 곳에 사람이 있는 느낌이다.
"오늘은 또 뭘 하나..."
혼자 중얼거리며 나는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틀었다. 티비에선 연예인들이 나와 맛집을 찾아가 호들갑을 떨며 음식을 맛보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배가 고파졌다. 커피포트에 수돗물을 받아 물을 끓여 컵라면을 준비했다. 살짝 덜 익은 컵라면을 들고 의자에 앉아 티비를 보았다.
"오늘은 또 뭘 한다..."
컵라면까지 다 먹고나니 다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인터넷이나 할까 싶지만 어쩐지 오늘은 귀찮다.
의자에 앉아 고개만 요리조리 돌리며 집안을 둘러봤다. 적당히 주말을 때우며 놀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그간 벼르던 맥북 프로 분해를 해 볼까? 카메라 렌즈나 새로 사러 갈까? MP3태그나 정리할까? 하지만 모두 웬지 내키지 않는다.
그렇게 빈둥대며 방안 여기저기를 바라만 보던 내 눈에, 신발장 위의 하얀 상자가 들어왔다. 며칠 전 1공장 사장이 내게 선물이라며 준 아라비아 도자기.
난 의자에서 일어나 신발장 위의 상자를 거실로 가져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 상자가 날 끌어드린 것일 수도 있겠다. 어째든 난 상자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하! 뭐야, 이건?"
상자 뚜껑을 열고 포장지를 뜯어내 내용물을 꺼내든 나는 어이가 없어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상자 안에서 꺼내든 물건은 지니 램프와 똑같게 생겼다. 놋으로 된 램프. 어릴 때 본 월트 디즈니 만화 알라딘에 나오는 그 램프 모양 그대로였다. 내 팔뚝만한 길이, 머그컵 만한 높이, 길게 삐져 나온 주둥이와 뒤에 달린 손잡이, 램프 위에 달린 뚜껑까지. 모든 것이 지니의 램프처럼 보였다.
"뭐야? 이게 바레인 특산품이라도 되는거야? 하하."
그제야 난 왜 1공장 사장이 이걸 나에게 떠넘겼는지 알 수 있었다. 이딴걸 어디에 쓴단 말인가. 대한민국에서 램프에 등불을 밝힐 일이 있겠나. 그렇다고 장식용으로 쓰기엔 너무 조잡한 모양새였다. 크기에 비해 마감처리나 모든 면이 싸구려 티나게 보였다.
"하하하. 비비면 지니라도 나오나?"
나는 온 몸으로 번지는 웃음을 꾹꾹 참으며 무릎 사이에 램프를 끼우고는 오른손으로 램프 옆등을 빠르게 비벼댔다.
그러자...
그러자...
램프가!!!!
어떻게 될 리가 없잖아.
램프를 비벼대던 내 손에서 열만 날 뿐이었다.
"아하하하하하하!"
결국 나는 그런 내 모습과 이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런 선물에 박장대소하며 방바닥을 뒹굴며 웃어댔다.
램프의 요정이라니.
그럴리가 없잖아. 이런 최첨단 과학의 21세기에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따위가 웬 말이냔 말이다.
1공장 사장 다운 악취미였다. 자기가 가지기 싫다고 이따위 물건을 선물이랍시고 후배에게 떠넘기다니. 그 인간다운 발상이었다.
문득, 내 머릿속에 그날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그날 선주씨의 모습도 떠올랐다. 1공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날 보며 깔깔 웃어대던 선주씨의 모습. 그리고 그날 그녀가 입었던 옷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보통은 여성 기피증이라 여자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들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게 대부분이었는데, 그 날은 둘만 차에 타고 있어서 그랬나. 너무 생생하게 기억났다. 검은색 핫팬츠. 그리고 하얀색의 안이 언뜻 언뜻 비치는 블라우스. 블라우스 안의 분홍빛 속옷. 그리고 그 속옷과 블라우스를 도발적으로 밀어내던 가슴의 윤곽. 핫팬츠 아래로 늘씬하게 뻗어내린 다리. 적절하게 살집이 오른 허벅지와 그 허벅지 위에 놓인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여성 기피증만 아니라면 한번쯤 접근해보고 싶은 몸매였다. 한번쯤 그 몸을 여기저기 주무르며 내 손길에 열락의 불꽃을 그녀의 얼굴에 피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난 여성 기피증인걸...
여자 앞에만 서면 아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심지언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스무살의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병이었다.
"씨발!"
난 손을 뻗어 노트북을 바닥 위에 펼쳐 두었다. 노트북 덮개를 열자 대기모드가 해제되며 바로 익숙한 윈도우 바탕화면이 뜬다. 터치패드를 이리저리 조작하자 폴더 가득 사진이 뜬다. 얼마전 봄 회사 체육대회 때 찍은 사진들이다.
폴더 안엔 여자 사원들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날 찍새를 자처한 나는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다. 회사 홉페이지에 올릴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날만큼은 여자 직원들도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도 파인더를 통해선 얼마든지 여자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모습을 마음껏 담아둘 수 있었다.
특히 이 폴더에 있는 사진들처럼 말이다.
폴더엔 여직원들을 노골적으로 도촬한 사진들로 가득했다. 그녀들이 직접 벗은 모습은 없지만, 다리 사이, 반바지 아래의 늘씬한 다리, 뛰어 다닐 때 덜렁이는 가슴, 허리를 숙일 때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가슴골, 엉덩이의 팬티 라인이 드러난 사진들로 가득했다.
난 그 중에서도 유독 한 사진을 골라 노트북 모니터 가득 띄웠다. 선주씨와 고객상담실 남지현씨, 총무부 오은미씨가 긴 다리를 뽐내며 모니터 안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셋 다 계약직으로 올해 입사한 직원들로 남자 사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선주씨 만큼이나 다른 두 사람도 도도하게 구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나마 고객상담실 남지현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붙임성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녀도 업무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없는 편이었다. 늘 셋이서만 어울리고 남자 직원들에겐 눈 인사만 하는 수준이었다.
"세 년 다...!"
난 트레이닝 바지 춤을 내려서 내 물건을 꺼내들었다. 평소 그녀들 앞에선 한껏 풀이 죽어 있는 내 물건도 모니터 안의 그녀들 앞에선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내 물건을 오른손으로 위아래로 훑으며 망상을 펼쳐나갔다.
내 망상 안에서 그녀들은 전라의 몸으로 내게 엉겨붙고 있었다. 선주씨가 내게 키스하며 내 물건을 쥐고는 위아래로 흔들어주었다. 가윤씨는 내 앞에서 혀로 내 젖꼭지를 감지럽히면서 양 손으로 내 허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은미씨는 내 등 뒤에서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켜 자기 가슴의 최첨단부를 비벼대며 한 손을 내 다리 사이로 넣어 구슬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최고의 기분이었다! 상상 속이지만, 회사 내의 최고 영계 인기녀 세 사람이 나에게 엉겨붙어 있는 감각은 짜릿했다. 난 그 감각에 따라 내 불기둥을 쥔 손놀림을 더욱 빠르게 가져갔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꽤 예쁘잖아.
웬 남자의 굵은 목소리에 난 불기둥을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는 눈을 떴다. 집 안에 누가 있는건가?! 숨조차 멈춘채 나는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다.
뭐지?!
-이봐, 왜 그래?
허억!
다시 말소리가 들린다!
화들짝 놀라 불기둥이 어느새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움츠러들었다. 난 후다닥 노트북 덮개를 닫고 바지를 추켜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 누구세요!"
내 목소리가 공포에 와들와들 떨린다.
-뭐야, 불러내고선 누구라고 묻는 건 또 뭐야?
다시 사내의 걸죽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내의 목소리는 탁하기
그지없었다. 어딘가가 갈라지고 쇳소리같은 것이 섞인 사내의 목소리는 그것만으로도 날 떨게 만들 정도로 어딘가 사악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더듬어 되는대로 쇠젓가락을 집어들어 앞으로 내밀고는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며 사내를 찾으려 했다.
-어이, 어딜 보는거야. 여기야, 여기!
"어... 어디요!"
내 물음에 사내는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로 웃어댔다.
-클클클. 뭐야, 아무것도 모르는건가?
"누... 누구세요!"
내 목소리는 이제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상태는 상관없다는 듯, 사내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클클클. 아무리 집안을 둘러봐. 내가 보일리가 있는지.
"하아... 하아... 하아..."
내 입에선 이제 거친 숨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젠장... 아까 그냥 카메라 렌즈나 사러 나갈걸!
-클클. 이봐, 진정해. 해치지 않아.
"나... 나와! 앞으로 나와, 씨발!!"
-클클클. 그러니까 그게 불가능하다니까 그러네.
사내의 목소리는 날 조롱하듯이 말했다.
"나와! 나오라고!"
-나오긴 어딜 자꾸 나오라는거야. 난 네 머릿속에 있는데.
"뭐어?!"
-인사가 늦었군.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내 소개나 하지. 난 지니라고 하지. 그리고... 당신 머릿속에 있어. 클클클.
"뭐... 뭐어?!"
난 사내의 말에 멍해져선 바닥을 뒹굴고 있는 램프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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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이제 좀 이해가 되나?
사내, 아니 지니의 말에 나는 다시 물컵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좋아.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넌 램프의 요정 지니란 말이지."
-허허, 요정이 아니라 램프의 주인이라니까.
내 말에 지니가 혀를 끌끌 차며 대답했다.
"요정이든 주인이든! 어째든 니가 지니란 말이잖아.
-그렇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녀석이랑 비슷한 존재지.
"그리고 넌 실체가 없다는거고."
-그래. 난 네 머릿속에만 존재하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거인 따위는 다 상상일 뿐이야. 난 램프를 문지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지. 오로지 그 사람과만 대화를 나누고, 소원을 들어주는거야.
"좋아. 내가 램프를 문질렀고, 그래서 네가 내 머릿속에 들어왔단거지. 그럼 내가 이제 네 주인이란거야?"
-아니지, 아니야. 난 네 소원을 들어 줄 뿐이지 네가 내 주인이란 건 아냐.
"하하하......"
난 혼자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의자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미치겠군... 아냐, 벌써 미친거야. 아무래도 월요일엔 바로 정신과부터 가봐야 겠어."
도대체 말이 되질 않는다.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21세기에 램프의 요정, 아니 램프의 주인 지니라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아무래도 분명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성 기피증이 정신착란으로 이어지는 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째든 내 정신의 나사 하나가 빠진 것이 분명했다.
-쯧쯧... 이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에게 달라 붙으면 귀찮아 진다니까.
"시끄러!"
-좋아. 어쩔 수 없지. 나도 간만에 세상에 나와서는 램프를 문지른 녀석이 미친 놈 취급 받는 건 싫으니... 한번 서비스를 해 보지. 어디, 원하는 걸 말해봐. 이번 한번은 세 가지 소원에서 빼지도 않을테니.
"하하하... 이젠 미친 정신이 자기가 안 미쳤다고 변호까지 하는구만..."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웃는 것 뿐이었다. 미친다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일인 줄은 나도 몰랐다.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미칠 수도 있구나... 하긴, 여성 기피증도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으니 정신 착란도 어느날 갑자기 찾아올 수 있겠지.
-어이, 시끄러우니까 어서 원하는 거나 말해봐.
지니란 이름의 정신 착란은 내가 귀찮다는 듯이 날 재촉했다. 난 이 상황이 우습기만 했다. 정신 착란 주제에 소원을 말해보라니...
"그래? 좋아, 지니. 그럼 어디... 그래! 저기 테이블 위에 돈다발을 쌓아봐. 빳빳한 만원권으로. 한... 천만원 쯤?"
-고작 그건가? 이봐, 이건 서비스라고. 좀 더 근사한 소원을 말해봐.
"하하하. 그것 봐. 못하잖아. 못 하니까 그런 소리나 하는거지. 그러니까 넌 정신병이란 거야."
역시 정신병이다.
-흐음... 좋아. 그럼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지. 천만원이다!
지니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내 머리를 울리고
난 눈이 휘둥그레져서 테이블 위를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만원권 뭉치가 테이블 위에 갑자기 나타나 쌓였다!
마치 슬라이드를 바꾼 것 처럼, 어느 순간 짠 하고 테이블 위에 만원권이 쌓인 것이다!
"......"
-어때? 이래도 못 믿겠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야? 그럼 은행이라도 가 보던지.
지니의 말에 나는 만원권 한 다발을 떨리는 손으로 쥐어 보았다. 한장 한장 떨리는 손놀림으로 살펴 보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진짜 만원권으로 보였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애애애!!"
난 만원권 한 뭉치를 손에 쥐고는 오피스텔 밖으로 뛰쳐나갔다.
은행! 아니, 주말이니 ATM기를 찾아야 했다. 이건 분명 그냥 종이 뭉치일거야... 내가 그냥 착각한 것 뿐야. 그래! 난 정신병이니까... 난 정신병이니까...
"삑. 입금이 완료 되었습니다."
위이이잉. 찰칵.
..........
진짜다.
진짜 돈이다.
내가 넣은 백만원을 ATM기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명세표엔 선명하게 백만원 입금이 찍혀있다.
-그것 봐. 난 진짜라니까. 왜 멀쩡한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냐고. 클클클. 그보다 이제 어쩌나. 서비스를 한 번 이렇게 날린건가. 이봐, 무슨 소원이든 들어 줄 수 있는데 천만원은 너무 싸다고 생각하지 않아? 클클클.
지니... 지금 싼게 문제가 아니라고...
진짜 지니가...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거라고...
-문제는 무슨... 쉽게 생각해. 세 가지 소원을 말해봐. 그럼 소원이 이뤄지는거야. 그것 뿐이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하여튼 이래서 인간들이란... 쯧쯧...
내 머릿속의 지니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한다.
이건... 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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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는 내 머릿속에 있다. 그의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린다. 그는 램프를 문지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 사람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준다고 한다. 그 소원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 세 가지 소원을 다 들어주면 떠난다고 한다.
믿을 수 없지만, 실제로 그 일이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거다. 그 증거로 내 통장 속에 입금된 백만원, 그리고 장롱 속에 넣어둔 나머지 900만원이 있다. 이젠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소원은 천천히 생각해. 아까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고.
지니는 날 놀리는 듯 그렇게 말하곤 내 머릿속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잘 들리진 않지만, 머릿속에 집중하고 있으면 희미하게 지니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지니가 깨어난 것은 월요일 출근길이었다.
-이봐. 소원은 좀 생각해 봤어?
"내 머릿 속에 있으니 네가 더 잘 알거아냐."
-클클클. 하긴 뭐... 그래도 소원은 스스로 말해야지. 그리고, 혼잣말 하는건 그만두는게 좋을거야. 아니면 미친 놈 취급만 받을 테니까. 난 네 머릿속에 있으니 그냥 생각만 해.
난 지니의 능청스러움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지하철 창문을 바라봤다. 지하철 밖의 풍경은 온통 암흑 뿐이다.
소원이라... 뭐가 좋을까...
돈? 명예? 영원한 삶? 영원한 젊음?
하지만 웬지 그런 것들은 현실적으로 와닿지가 않는다. 하긴... 내 머릿속에 지니가 있다는 것도 아직 제대로 믿기지 않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웬지 지니보다 저것들이 더욱 현실성 없게 느껴졌다.
정신과 전문의 말에 따르면 이것도 성장기에 받은 유교식 교육의 영향일까? 유교에선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과유불급하다. 자연은 무한하지만 그 자연을 담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은 유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무한한 우주를 담은 존재이면서도 땅과 하늘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명이나 재물을 과하게 탐해서는 안 된다.
그런 교육을 어릴 때 부터 받아서인지 웬지 돈이나 생명을 지니에게 비는 것은 죄처럼 느껴졌다.
-클클클. 착하구만. 아주 착해.
지니가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말한다.
시끄러. 일일이 남의 생각을 읽지 말란말야.
-클클클. 어쩔 수 없다구. 내가 어디 있는지 잊지 말라고. 싫어도 네 생각이 내 옆에서 봐달라고 꼬리치고 있다고.
망할 놈의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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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회사에 들어서자 동료 직원들이 인사를 건네온다. 난 그들에게 미소로 답하면서 서로 인사했다. 하지만 나와 인사를 나누는 것은 다들 남자 직원들 뿐이다. 여 직원을 마주치면 나 스스로가 먼저 그녀들의 눈길을 피했고, 그녀들도 애써 날 모르는 체하며 다른 직원들과만 인사를 나눴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테이블 앞에 앉아 조간 신문을 뒤적이는 과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과장은 손만 까딱해 보이곤 조간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대리, 담배?"
앞 자리의 이 대리를 보고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담배를 무는 시늉을 해 보였지만 이 대리는 손을 저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혼자 지니와 소원에 대한 이 끊이질 않는 생각을 담배나 피며 정리해야 겠다.
서류 가방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고 정장 윗도리는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나는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흡연 구역은 건물 옥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 외에도 두 개 회사가 더 들어서 있는 이 건물의 옥상은 건물 내 세 개 회사 직원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금연 열풍 덕분에 점점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있지만 적어도 옥상에 올라와 담배를 피는 이들은 일종의 동료애를 느끼는 사이들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다들 옥상에 옹기종기 모여 눈인사를 건네며 동지애를 다시 느끼는거다.
역시 못 끊으셨군요.
예, 어디 이걸 떠나보내기가 그리 쉽나요.
하는 식의 뜻이 담긴 눈인사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없다. 아무도 없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난 옥상에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여기저기 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뭐... 차라리 잘 된건가. 지금 나에겐 소원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수흡...... 후우우......"
담배를 빨아 당겼다가 한껏 숨을 내뱉으니 뽀얀 연기와 함께 잡념도 사라지는 듯 하다.
도란도란.
다시 한번 담배를 빨아당기는데, 옥상 계단 입구 뒤편에서 사람 소리가 들린다. 역시. 모닝빵을 피할 사람들이 아니지. 난 그들에게 눈인사나 건넬 요량으로 옥상 입구 뒤편으로 돌아갔다.
"푸훗. 진짜? 그 김 팀장이?"
입구 벽을 끼고 뒤로 돌아가려던 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 목소리가 아니라 여자 목소리다. 그것도 내가 잘 아는 목소리. 바로 고객상담실 남지현씨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내 다리를 흘끗 보더라니까. 이런 눈빛으로."
"아하하."
"호호호."
뭐가 그리 우스운지 선주씨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이 웃어댄다. 웃음소리와 목소리로 봐선 세 사람이다. 하나는 고객상담실 남지현씨. 다른 둘은 선주씨와 총무부 은미씨였다.
"뭐야, 김 팀장 고잔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은미씨의 목소리.
"그러니까. 근데 더 웃긴건 내가 남자 좋아하냐고 물었거든. 그러니까 그냥 굳은 얼굴로 아니 라는거 있지."
선주씨의 목소리. 선주씨는 아니 라는 대목에서 굵은 남자 목소리까지 흉내내고 있었다. 누구 얘긴지 뻔 했다. 세 사람은 내 애길 하고 있는거다.
-흐음... 그래.. 저 세 여자가 어제 네가 사진으로 자위하려던 여자들인가? 네 얘길 하는 모양인데? 클클클.
좀 닥치고 있어!
날 비웃듯 말하는 지니에게 마음 속으로 일갈한 나는 세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진짜 남자 좋아하는거 아냐? 아니고서야 여자들을 그렇게 대놓고 싫어할 리는 없잖아."
"에이 설마... 어디 우리나라에서 동성연애자가 그렇기 흔한 것도 아니고..."
은미씨의 비웃는 듯한 말에 지현씨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렇게 쿨하지 못한 게이는 상상이 안 되니까. 아하하."
선주씨가 웃으며 말한다.
내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간다. 이년들이 지금! 멀쩡한 사람을 게이로 만들었다 말았다... 사람 뒤에서 뒷담화도 정도가 있지!
"어째든 김 팀장도 웃긴다니까. 꼭 그렇게 여자 앞에선 아무것도 못하는 놈이 집에선 야동 같은 거나 틀어 놓고 딸딸이 치면서 논다니까. 김팀장 그 새끼, 분명 아직 총각이야."
은미씨의 말이다. 은미씨의 말에 순간 나는 욱 하는 마음에 그녀들 앞으로 뛰쳐나갈 뻔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그저 주먹만 꽉 쥔 채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여성기피증이 내 발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언니 이제 다 폈어? 내려가자."
지현씨가 말했다.
"그래. 내려가자. 좀 있으면 사람들 올라오겠다."
은미씨의 말. 아마도 은미씨가 담배를 피나보다. 나는 그녀들의 소리에 빠른 걸음으로 계단 입구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계단 입구에 서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 갈 때 선주, 은미, 지현 세 여자가 계단 벽 모퉁이를 지나 나타났다.
그녀들은 입구에 선 나를 보곤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난 분노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그녀들을 아는체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지현씨가 인사를 꺼내더니 세 사람은 슬금 슬금 내 눈치를 보며 도망치듯 계단을 타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그녀들의 소란스런 발소리가 밀폐된 계단 벽을 타고 내 귓가에 울려왔다. 마지막엔 그녀들의 웃음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씨발!"
나는 담배를 옥상 바닥에 냅다 집어 던지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분노에 심장마저 덜덜 떨리는 것만 같았다.
복수하고 싶다!
"지니!"
-말 해라.
내 부름에 지니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엄숙하면서도 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첫번째 소원이다. 저 세 년을 내 것으로 만들겠어. 내가 게이가 아니란 걸! 저깟 년들의 무시를 당할 만큼 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어!"
-클클클. 알았다. 첫번째 소원을 받아들인다. 저 셋이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신음하게 해주지.
지니의 가래 끓는 웃음 소리와 지옥불같은 대답으로 내 첫번째 소원 계약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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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프롤로그에 보여주신 성원에 감사드리면서...
다음 화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추천 부탁드립니다.
내 오피스텔 안은 컴퓨터와 각종 전자기기로 가득차 있다. 공대 출신은 아닌 나였지만, 회사의 분야가 분야인데다가 사내의 프로그래머들과도 친하게 지내다보니 어느새 내 취미는 각종 전자기기를 다루는 것이 되었다. 집안엔 퍼스널 컴퓨터가 세 대, 매킨토시가 두 대, 각종 카메라에 MP3, 홈시어터가 가득했다.
집안을 둘러보니 이건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마치 기계가 사는 곳에 사람이 있는 느낌이다.
"오늘은 또 뭘 하나..."
혼자 중얼거리며 나는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틀었다. 티비에선 연예인들이 나와 맛집을 찾아가 호들갑을 떨며 음식을 맛보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배가 고파졌다. 커피포트에 수돗물을 받아 물을 끓여 컵라면을 준비했다. 살짝 덜 익은 컵라면을 들고 의자에 앉아 티비를 보았다.
"오늘은 또 뭘 한다..."
컵라면까지 다 먹고나니 다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인터넷이나 할까 싶지만 어쩐지 오늘은 귀찮다.
의자에 앉아 고개만 요리조리 돌리며 집안을 둘러봤다. 적당히 주말을 때우며 놀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그간 벼르던 맥북 프로 분해를 해 볼까? 카메라 렌즈나 새로 사러 갈까? MP3태그나 정리할까? 하지만 모두 웬지 내키지 않는다.
그렇게 빈둥대며 방안 여기저기를 바라만 보던 내 눈에, 신발장 위의 하얀 상자가 들어왔다. 며칠 전 1공장 사장이 내게 선물이라며 준 아라비아 도자기.
난 의자에서 일어나 신발장 위의 상자를 거실로 가져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 상자가 날 끌어드린 것일 수도 있겠다. 어째든 난 상자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하! 뭐야, 이건?"
상자 뚜껑을 열고 포장지를 뜯어내 내용물을 꺼내든 나는 어이가 없어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상자 안에서 꺼내든 물건은 지니 램프와 똑같게 생겼다. 놋으로 된 램프. 어릴 때 본 월트 디즈니 만화 알라딘에 나오는 그 램프 모양 그대로였다. 내 팔뚝만한 길이, 머그컵 만한 높이, 길게 삐져 나온 주둥이와 뒤에 달린 손잡이, 램프 위에 달린 뚜껑까지. 모든 것이 지니의 램프처럼 보였다.
"뭐야? 이게 바레인 특산품이라도 되는거야? 하하."
그제야 난 왜 1공장 사장이 이걸 나에게 떠넘겼는지 알 수 있었다. 이딴걸 어디에 쓴단 말인가. 대한민국에서 램프에 등불을 밝힐 일이 있겠나. 그렇다고 장식용으로 쓰기엔 너무 조잡한 모양새였다. 크기에 비해 마감처리나 모든 면이 싸구려 티나게 보였다.
"하하하. 비비면 지니라도 나오나?"
나는 온 몸으로 번지는 웃음을 꾹꾹 참으며 무릎 사이에 램프를 끼우고는 오른손으로 램프 옆등을 빠르게 비벼댔다.
그러자...
그러자...
램프가!!!!
어떻게 될 리가 없잖아.
램프를 비벼대던 내 손에서 열만 날 뿐이었다.
"아하하하하하하!"
결국 나는 그런 내 모습과 이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런 선물에 박장대소하며 방바닥을 뒹굴며 웃어댔다.
램프의 요정이라니.
그럴리가 없잖아. 이런 최첨단 과학의 21세기에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따위가 웬 말이냔 말이다.
1공장 사장 다운 악취미였다. 자기가 가지기 싫다고 이따위 물건을 선물이랍시고 후배에게 떠넘기다니. 그 인간다운 발상이었다.
문득, 내 머릿속에 그날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그날 선주씨의 모습도 떠올랐다. 1공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날 보며 깔깔 웃어대던 선주씨의 모습. 그리고 그날 그녀가 입었던 옷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보통은 여성 기피증이라 여자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들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게 대부분이었는데, 그 날은 둘만 차에 타고 있어서 그랬나. 너무 생생하게 기억났다. 검은색 핫팬츠. 그리고 하얀색의 안이 언뜻 언뜻 비치는 블라우스. 블라우스 안의 분홍빛 속옷. 그리고 그 속옷과 블라우스를 도발적으로 밀어내던 가슴의 윤곽. 핫팬츠 아래로 늘씬하게 뻗어내린 다리. 적절하게 살집이 오른 허벅지와 그 허벅지 위에 놓인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여성 기피증만 아니라면 한번쯤 접근해보고 싶은 몸매였다. 한번쯤 그 몸을 여기저기 주무르며 내 손길에 열락의 불꽃을 그녀의 얼굴에 피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난 여성 기피증인걸...
여자 앞에만 서면 아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심지언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스무살의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병이었다.
"씨발!"
난 손을 뻗어 노트북을 바닥 위에 펼쳐 두었다. 노트북 덮개를 열자 대기모드가 해제되며 바로 익숙한 윈도우 바탕화면이 뜬다. 터치패드를 이리저리 조작하자 폴더 가득 사진이 뜬다. 얼마전 봄 회사 체육대회 때 찍은 사진들이다.
폴더 안엔 여자 사원들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날 찍새를 자처한 나는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다. 회사 홉페이지에 올릴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날만큼은 여자 직원들도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나도 파인더를 통해선 얼마든지 여자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모습을 마음껏 담아둘 수 있었다.
특히 이 폴더에 있는 사진들처럼 말이다.
폴더엔 여직원들을 노골적으로 도촬한 사진들로 가득했다. 그녀들이 직접 벗은 모습은 없지만, 다리 사이, 반바지 아래의 늘씬한 다리, 뛰어 다닐 때 덜렁이는 가슴, 허리를 숙일 때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가슴골, 엉덩이의 팬티 라인이 드러난 사진들로 가득했다.
난 그 중에서도 유독 한 사진을 골라 노트북 모니터 가득 띄웠다. 선주씨와 고객상담실 남지현씨, 총무부 오은미씨가 긴 다리를 뽐내며 모니터 안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셋 다 계약직으로 올해 입사한 직원들로 남자 사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선주씨 만큼이나 다른 두 사람도 도도하게 구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나마 고객상담실 남지현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붙임성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녀도 업무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없는 편이었다. 늘 셋이서만 어울리고 남자 직원들에겐 눈 인사만 하는 수준이었다.
"세 년 다...!"
난 트레이닝 바지 춤을 내려서 내 물건을 꺼내들었다. 평소 그녀들 앞에선 한껏 풀이 죽어 있는 내 물건도 모니터 안의 그녀들 앞에선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내 물건을 오른손으로 위아래로 훑으며 망상을 펼쳐나갔다.
내 망상 안에서 그녀들은 전라의 몸으로 내게 엉겨붙고 있었다. 선주씨가 내게 키스하며 내 물건을 쥐고는 위아래로 흔들어주었다. 가윤씨는 내 앞에서 혀로 내 젖꼭지를 감지럽히면서 양 손으로 내 허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은미씨는 내 등 뒤에서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켜 자기 가슴의 최첨단부를 비벼대며 한 손을 내 다리 사이로 넣어 구슬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최고의 기분이었다! 상상 속이지만, 회사 내의 최고 영계 인기녀 세 사람이 나에게 엉겨붙어 있는 감각은 짜릿했다. 난 그 감각에 따라 내 불기둥을 쥔 손놀림을 더욱 빠르게 가져갔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꽤 예쁘잖아.
웬 남자의 굵은 목소리에 난 불기둥을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는 눈을 떴다. 집 안에 누가 있는건가?! 숨조차 멈춘채 나는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다.
뭐지?!
-이봐, 왜 그래?
허억!
다시 말소리가 들린다!
화들짝 놀라 불기둥이 어느새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움츠러들었다. 난 후다닥 노트북 덮개를 닫고 바지를 추켜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 누구세요!"
내 목소리가 공포에 와들와들 떨린다.
-뭐야, 불러내고선 누구라고 묻는 건 또 뭐야?
다시 사내의 걸죽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내의 목소리는 탁하기
그지없었다. 어딘가가 갈라지고 쇳소리같은 것이 섞인 사내의 목소리는 그것만으로도 날 떨게 만들 정도로 어딘가 사악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더듬어 되는대로 쇠젓가락을 집어들어 앞으로 내밀고는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며 사내를 찾으려 했다.
-어이, 어딜 보는거야. 여기야, 여기!
"어... 어디요!"
내 물음에 사내는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로 웃어댔다.
-클클클. 뭐야, 아무것도 모르는건가?
"누... 누구세요!"
내 목소리는 이제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상태는 상관없다는 듯, 사내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클클클. 아무리 집안을 둘러봐. 내가 보일리가 있는지.
"하아... 하아... 하아..."
내 입에선 이제 거친 숨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젠장... 아까 그냥 카메라 렌즈나 사러 나갈걸!
-클클. 이봐, 진정해. 해치지 않아.
"나... 나와! 앞으로 나와, 씨발!!"
-클클클. 그러니까 그게 불가능하다니까 그러네.
사내의 목소리는 날 조롱하듯이 말했다.
"나와! 나오라고!"
-나오긴 어딜 자꾸 나오라는거야. 난 네 머릿속에 있는데.
"뭐어?!"
-인사가 늦었군.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내 소개나 하지. 난 지니라고 하지. 그리고... 당신 머릿속에 있어. 클클클.
"뭐... 뭐어?!"
난 사내의 말에 멍해져선 바닥을 뒹굴고 있는 램프를 바라봤다.
###
-어때? 이제 좀 이해가 되나?
사내, 아니 지니의 말에 나는 다시 물컵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좋아.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넌 램프의 요정 지니란 말이지."
-허허, 요정이 아니라 램프의 주인이라니까.
내 말에 지니가 혀를 끌끌 차며 대답했다.
"요정이든 주인이든! 어째든 니가 지니란 말이잖아.
-그렇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녀석이랑 비슷한 존재지.
"그리고 넌 실체가 없다는거고."
-그래. 난 네 머릿속에만 존재하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거인 따위는 다 상상일 뿐이야. 난 램프를 문지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지. 오로지 그 사람과만 대화를 나누고, 소원을 들어주는거야.
"좋아. 내가 램프를 문질렀고, 그래서 네가 내 머릿속에 들어왔단거지. 그럼 내가 이제 네 주인이란거야?"
-아니지, 아니야. 난 네 소원을 들어 줄 뿐이지 네가 내 주인이란 건 아냐.
"하하하......"
난 혼자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의자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미치겠군... 아냐, 벌써 미친거야. 아무래도 월요일엔 바로 정신과부터 가봐야 겠어."
도대체 말이 되질 않는다.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21세기에 램프의 요정, 아니 램프의 주인 지니라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아무래도 분명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성 기피증이 정신착란으로 이어지는 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째든 내 정신의 나사 하나가 빠진 것이 분명했다.
-쯧쯧... 이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에게 달라 붙으면 귀찮아 진다니까.
"시끄러!"
-좋아. 어쩔 수 없지. 나도 간만에 세상에 나와서는 램프를 문지른 녀석이 미친 놈 취급 받는 건 싫으니... 한번 서비스를 해 보지. 어디, 원하는 걸 말해봐. 이번 한번은 세 가지 소원에서 빼지도 않을테니.
"하하하... 이젠 미친 정신이 자기가 안 미쳤다고 변호까지 하는구만..."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웃는 것 뿐이었다. 미친다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일인 줄은 나도 몰랐다.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미칠 수도 있구나... 하긴, 여성 기피증도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으니 정신 착란도 어느날 갑자기 찾아올 수 있겠지.
-어이, 시끄러우니까 어서 원하는 거나 말해봐.
지니란 이름의 정신 착란은 내가 귀찮다는 듯이 날 재촉했다. 난 이 상황이 우습기만 했다. 정신 착란 주제에 소원을 말해보라니...
"그래? 좋아, 지니. 그럼 어디... 그래! 저기 테이블 위에 돈다발을 쌓아봐. 빳빳한 만원권으로. 한... 천만원 쯤?"
-고작 그건가? 이봐, 이건 서비스라고. 좀 더 근사한 소원을 말해봐.
"하하하. 그것 봐. 못하잖아. 못 하니까 그런 소리나 하는거지. 그러니까 넌 정신병이란 거야."
역시 정신병이다.
-흐음... 좋아. 그럼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지. 천만원이다!
지니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내 머리를 울리고
난 눈이 휘둥그레져서 테이블 위를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만원권 뭉치가 테이블 위에 갑자기 나타나 쌓였다!
마치 슬라이드를 바꾼 것 처럼, 어느 순간 짠 하고 테이블 위에 만원권이 쌓인 것이다!
"......"
-어때? 이래도 못 믿겠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야? 그럼 은행이라도 가 보던지.
지니의 말에 나는 만원권 한 다발을 떨리는 손으로 쥐어 보았다. 한장 한장 떨리는 손놀림으로 살펴 보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진짜 만원권으로 보였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애애애!!"
난 만원권 한 뭉치를 손에 쥐고는 오피스텔 밖으로 뛰쳐나갔다.
은행! 아니, 주말이니 ATM기를 찾아야 했다. 이건 분명 그냥 종이 뭉치일거야... 내가 그냥 착각한 것 뿐야. 그래! 난 정신병이니까... 난 정신병이니까...
"삑. 입금이 완료 되었습니다."
위이이잉. 찰칵.
..........
진짜다.
진짜 돈이다.
내가 넣은 백만원을 ATM기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명세표엔 선명하게 백만원 입금이 찍혀있다.
-그것 봐. 난 진짜라니까. 왜 멀쩡한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냐고. 클클클. 그보다 이제 어쩌나. 서비스를 한 번 이렇게 날린건가. 이봐, 무슨 소원이든 들어 줄 수 있는데 천만원은 너무 싸다고 생각하지 않아? 클클클.
지니... 지금 싼게 문제가 아니라고...
진짜 지니가...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거라고...
-문제는 무슨... 쉽게 생각해. 세 가지 소원을 말해봐. 그럼 소원이 이뤄지는거야. 그것 뿐이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하여튼 이래서 인간들이란... 쯧쯧...
내 머릿속의 지니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한다.
이건... 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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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는 내 머릿속에 있다. 그의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린다. 그는 램프를 문지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 사람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준다고 한다. 그 소원이 무엇이든! 그리고 그 세 가지 소원을 다 들어주면 떠난다고 한다.
믿을 수 없지만, 실제로 그 일이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거다. 그 증거로 내 통장 속에 입금된 백만원, 그리고 장롱 속에 넣어둔 나머지 900만원이 있다. 이젠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소원은 천천히 생각해. 아까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고.
지니는 날 놀리는 듯 그렇게 말하곤 내 머릿속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잘 들리진 않지만, 머릿속에 집중하고 있으면 희미하게 지니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지니가 깨어난 것은 월요일 출근길이었다.
-이봐. 소원은 좀 생각해 봤어?
"내 머릿 속에 있으니 네가 더 잘 알거아냐."
-클클클. 하긴 뭐... 그래도 소원은 스스로 말해야지. 그리고, 혼잣말 하는건 그만두는게 좋을거야. 아니면 미친 놈 취급만 받을 테니까. 난 네 머릿속에 있으니 그냥 생각만 해.
난 지니의 능청스러움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지하철 창문을 바라봤다. 지하철 밖의 풍경은 온통 암흑 뿐이다.
소원이라... 뭐가 좋을까...
돈? 명예? 영원한 삶? 영원한 젊음?
하지만 웬지 그런 것들은 현실적으로 와닿지가 않는다. 하긴... 내 머릿속에 지니가 있다는 것도 아직 제대로 믿기지 않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웬지 지니보다 저것들이 더욱 현실성 없게 느껴졌다.
정신과 전문의 말에 따르면 이것도 성장기에 받은 유교식 교육의 영향일까? 유교에선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과유불급하다. 자연은 무한하지만 그 자연을 담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은 유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무한한 우주를 담은 존재이면서도 땅과 하늘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명이나 재물을 과하게 탐해서는 안 된다.
그런 교육을 어릴 때 부터 받아서인지 웬지 돈이나 생명을 지니에게 비는 것은 죄처럼 느껴졌다.
-클클클. 착하구만. 아주 착해.
지니가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말한다.
시끄러. 일일이 남의 생각을 읽지 말란말야.
-클클클. 어쩔 수 없다구. 내가 어디 있는지 잊지 말라고. 싫어도 네 생각이 내 옆에서 봐달라고 꼬리치고 있다고.
망할 놈의 지니.
###
"안녕하세요."
회사에 들어서자 동료 직원들이 인사를 건네온다. 난 그들에게 미소로 답하면서 서로 인사했다. 하지만 나와 인사를 나누는 것은 다들 남자 직원들 뿐이다. 여 직원을 마주치면 나 스스로가 먼저 그녀들의 눈길을 피했고, 그녀들도 애써 날 모르는 체하며 다른 직원들과만 인사를 나눴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테이블 앞에 앉아 조간 신문을 뒤적이는 과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과장은 손만 까딱해 보이곤 조간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대리, 담배?"
앞 자리의 이 대리를 보고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담배를 무는 시늉을 해 보였지만 이 대리는 손을 저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혼자 지니와 소원에 대한 이 끊이질 않는 생각을 담배나 피며 정리해야 겠다.
서류 가방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고 정장 윗도리는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나는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흡연 구역은 건물 옥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 외에도 두 개 회사가 더 들어서 있는 이 건물의 옥상은 건물 내 세 개 회사 직원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금연 열풍 덕분에 점점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있지만 적어도 옥상에 올라와 담배를 피는 이들은 일종의 동료애를 느끼는 사이들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다들 옥상에 옹기종기 모여 눈인사를 건네며 동지애를 다시 느끼는거다.
역시 못 끊으셨군요.
예, 어디 이걸 떠나보내기가 그리 쉽나요.
하는 식의 뜻이 담긴 눈인사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없다. 아무도 없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난 옥상에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여기저기 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뭐... 차라리 잘 된건가. 지금 나에겐 소원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수흡...... 후우우......"
담배를 빨아 당겼다가 한껏 숨을 내뱉으니 뽀얀 연기와 함께 잡념도 사라지는 듯 하다.
도란도란.
다시 한번 담배를 빨아당기는데, 옥상 계단 입구 뒤편에서 사람 소리가 들린다. 역시. 모닝빵을 피할 사람들이 아니지. 난 그들에게 눈인사나 건넬 요량으로 옥상 입구 뒤편으로 돌아갔다.
"푸훗. 진짜? 그 김 팀장이?"
입구 벽을 끼고 뒤로 돌아가려던 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 목소리가 아니라 여자 목소리다. 그것도 내가 잘 아는 목소리. 바로 고객상담실 남지현씨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내 다리를 흘끗 보더라니까. 이런 눈빛으로."
"아하하."
"호호호."
뭐가 그리 우스운지 선주씨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이 웃어댄다. 웃음소리와 목소리로 봐선 세 사람이다. 하나는 고객상담실 남지현씨. 다른 둘은 선주씨와 총무부 은미씨였다.
"뭐야, 김 팀장 고잔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은미씨의 목소리.
"그러니까. 근데 더 웃긴건 내가 남자 좋아하냐고 물었거든. 그러니까 그냥 굳은 얼굴로 아니 라는거 있지."
선주씨의 목소리. 선주씨는 아니 라는 대목에서 굵은 남자 목소리까지 흉내내고 있었다. 누구 얘긴지 뻔 했다. 세 사람은 내 애길 하고 있는거다.
-흐음... 그래.. 저 세 여자가 어제 네가 사진으로 자위하려던 여자들인가? 네 얘길 하는 모양인데? 클클클.
좀 닥치고 있어!
날 비웃듯 말하는 지니에게 마음 속으로 일갈한 나는 세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진짜 남자 좋아하는거 아냐? 아니고서야 여자들을 그렇게 대놓고 싫어할 리는 없잖아."
"에이 설마... 어디 우리나라에서 동성연애자가 그렇기 흔한 것도 아니고..."
은미씨의 비웃는 듯한 말에 지현씨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렇게 쿨하지 못한 게이는 상상이 안 되니까. 아하하."
선주씨가 웃으며 말한다.
내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간다. 이년들이 지금! 멀쩡한 사람을 게이로 만들었다 말았다... 사람 뒤에서 뒷담화도 정도가 있지!
"어째든 김 팀장도 웃긴다니까. 꼭 그렇게 여자 앞에선 아무것도 못하는 놈이 집에선 야동 같은 거나 틀어 놓고 딸딸이 치면서 논다니까. 김팀장 그 새끼, 분명 아직 총각이야."
은미씨의 말이다. 은미씨의 말에 순간 나는 욱 하는 마음에 그녀들 앞으로 뛰쳐나갈 뻔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그저 주먹만 꽉 쥔 채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여성기피증이 내 발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언니 이제 다 폈어? 내려가자."
지현씨가 말했다.
"그래. 내려가자. 좀 있으면 사람들 올라오겠다."
은미씨의 말. 아마도 은미씨가 담배를 피나보다. 나는 그녀들의 소리에 빠른 걸음으로 계단 입구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계단 입구에 서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 갈 때 선주, 은미, 지현 세 여자가 계단 벽 모퉁이를 지나 나타났다.
그녀들은 입구에 선 나를 보곤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난 분노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그녀들을 아는체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지현씨가 인사를 꺼내더니 세 사람은 슬금 슬금 내 눈치를 보며 도망치듯 계단을 타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그녀들의 소란스런 발소리가 밀폐된 계단 벽을 타고 내 귓가에 울려왔다. 마지막엔 그녀들의 웃음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씨발!"
나는 담배를 옥상 바닥에 냅다 집어 던지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분노에 심장마저 덜덜 떨리는 것만 같았다.
복수하고 싶다!
"지니!"
-말 해라.
내 부름에 지니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엄숙하면서도 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첫번째 소원이다. 저 세 년을 내 것으로 만들겠어. 내가 게이가 아니란 걸! 저깟 년들의 무시를 당할 만큼 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어!"
-클클클. 알았다. 첫번째 소원을 받아들인다. 저 셋이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신음하게 해주지.
지니의 가래 끓는 웃음 소리와 지옥불같은 대답으로 내 첫번째 소원 계약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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