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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9:50 1,000회 0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고,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난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주인여자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입구에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잘 못 본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주인여자의 표정이 어느 새 침착해졌고, 손도 더 이상 떨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오른 쪽 발을 샌들에서 빼내 방바닥에 내딛었다. 그리고 왼쪽 발을 샌들에서 빼내고 그 옆에 놓았다. 주인여자의 발등에 돋아 난 힘줄과 발톱에 칠해진 하얀색이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에 반짝이는 것 같았다.

다시 주인여자가 오른 발을 내딛으며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고, 다시 왼발을 들고 또 한 걸음 다가오는데, 그녀의 걸음걸이는 마치 한국 무용을 보는 것처럼 우아해 보였다. 창피함과 수치심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이상하게 주인여자의 맨 발의 움직임을 보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하지만 성욕이 끌어올라 주인여자의 발을 빨고 싶다는 느낌과는 달랐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한번도 느껴 본적이 없는 것이었다. 여자의 신체를 보고 성욕과는 전혀 다른 것을 느낄 수도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주인여자의 맨 발을 보며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새 그녀의 발이 내 바로 앞에서 멈춰서 있었다. 퍼뜩 정신이 들어 위로 올려다보니 주인여자가 인자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통의 인간은 마음 따로, 행동 따로 그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런 급박한 순간에 주인여자는 너무나 부드럽고 태연한 얼굴이었고, 난 그녀의 반응에 점점 진정이 되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침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호랑이에 물려가 날카로운 이빨에 살과 뼈가 상처를 입고 다량의 피를 흘린 상황에서도 정신을 차리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보통의 인간이 그럴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주인여자는 그것을 하고 있었다. 난 두려움 속에서도 이상하게 그런 주인여자의 반응에 호기심을 느끼고 말았다.

내 바로 앞에서 천천히 몸을 낮추는 주인여자의 움직임 또한 우아하면서도 기품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이 여자에 대해 과장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여자는 지금 당황했고, 젊은 남자의 죽음을 목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인 움직임을 하고 있는 것을 내가 멋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일 것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기가 곤란했지만, 방 안이 어두워서 그런지 주인여자의 눈을 볼 수 있었다. 표정에서 들어나는 것을 읽어 낼 수가 없어서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태복씨...”

주인여자의 눈빛은 알 수가 없었다. 모성의 표정이라고 하기도 뭐했고, 자기 집에서 자살하려는 총각을 막기 위한 절박한 것이라고 하기에도 곤란한 것이었다.


“흠...또 저를 분석하려 드는 군요...당신은 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지독한 습관을 지금 또 확인하고 말았다. 천 선생은 오랜 기간 나를 가르치면서도 특별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산 낙지에 소주를 사주면서 딱 한마디를 했었다.

<머리로 살려고 하면 피곤하다, 태복아...이건 그냥 낙지지...잘려져서까지 움직인다고 살았는지, 아니면 그럼에도 죽은 것인지를 따져봐야 뭐 하겠냐...하하하...!>

도통 뭔 소린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천 선생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연자 연예인들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이소라랑 자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고는 술자리를 끝냈는데, 난 아직까지도 천 선생이 자보고 싶다는 연예인이 슈퍼 모델 이소라를 말한 것인지, 아니면 가수 이소라를 말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좋아요...태복씨가 제 변명을 들어주면...저도 태복씨의 변명을 들어줄게요...어때요?...”

주인여자의 뜻밖의 말에 대답을 할 수 가없었다. 변명은 소크라테스처럼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처럼 내가 떳떳하지도 않은 상황에서는 유구무언일 뿐이었다. 그런데 주인여자도 내게 변명할 거리가 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 앞으로 왼 손을 내밀어 나는 주인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시선으로 내 오른 손을 가리켜, 돌아보니 내 손에 칼이 잡혀있었다. 화들짝 놀란 내가 칼을 놓치고 다시, 등을 벽에 바짝 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까지 내가 칼을 잡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여자는 이제 약간의 미소를 보이며 칼을 집어 들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싱크대를 열었다. 주인여자가 잡은 칼은 어둠 속에서도 다시 빛을 뿜어냈고, 그녀는 정확하게 그 칼을 입구에 고정시킨 뒤 천천히 칼집에 꽂아 넣었다. 또 다시 좀 전, 상인의 집에서 벌어졌던 상황이 재현되고 말았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있었고, 내 앞으로 주인여자의 육중한 엉덩이와 튼실한 허벅지, 그리고 종아리와 맨 발이 훤하게 보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주인여자를 잡아 안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 때문인지 얇은 원피스 사이로 주인여자의 팬티가 살짝 들어나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알몸보다도 더욱 야했고, 또 다시 내 자지를 발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고, 주인여자가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또 다시 내 몸에서 성욕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내 자지는 터질 듯이 발기했다. 이런 신체의 반응이 진화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창조에 의해서 처음부터 설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앞에 서있는 이 여자를 안고 싶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주인여자의 입에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이런...!...하하하!~ 또?...”

주인여자는 발기한 채 불룩해진 내 사타구니를 바라보고는 웃어버렸다. 난 좀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가 내 뿜고 있는 여성미에 흥분이 밀려왔고, 알 수 없는 주인여자의 반응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뒤섞여서 무척이나 정신이 없었다.

“후우!~~미안해요, 태복씨...뭐,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상황이라면...우리가 섹스를 하는 것이 맞겠죠. 그러면서 이것저것 끼워다 구색을 맞추면...당신과 나의 섹스에 대한 당위성이 생길 것이고...흐음... 대충, 설득을 시킬 수도 있겠죠...”

“...이 시간에 청소를 하시고...또 제 방에 들어오신 건...저와 같은 생각 때문 아니셨나요?...”

“흐음...저도 현실이 그렇게 단순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광고에서처럼 생각대로 하면 모든 것이 다되고...하지만 그렇게 태복씨가 생각한 대로 모든 것이 딱, 딱 들어맞던가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주인여자의 말에 강한 반발심이 생기면서, 여자의 ‘안돼요’란 말은 ‘돼요’란 말과 같다는 말이 떠올랐다. 내 본능은 주인여자와의 섹스를 갈망하고 있었지만, 반대편에선 강간하려던 내 행동에 대한 꾸짖음과 함께 지금 느끼고 있는 본능까지도 질책하고 있었다.


“다행이네요...성욕을 느끼는 것을 보니... 이제 쓸데없는 짓을 할 것 같진 않고...전 그만 돌아갈게요, 태복씨...”

주인여자가 돌아서서 천천히 샌들에 앙증맞은 발을 넣고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제게 하실 변명이란 게 뭐죠? 어차피 전...변명할 수도 없는 상황인 인데요...”

내 말에 고개를 돌린 그녀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동글동글하면서도 푸근한 인상의 주인여자는 상인처럼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그동안 그림에 대한 얘기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떤 것이 주인여자의 모습인가?

“태복씨가 변명할 거리를 찾으면...그때 얘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요...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대화를 해봐야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이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난 더욱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주인여자는 내 얼굴을 보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조심스럽게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조금 지나자 주인여자가 걸어가는 소리가 엷게 들려오다가 점점 사라져버렸다. 또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나는 답답한 마음에 냉장고문을 열고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 때문인지 주인여자 때문인지 좀체 갈증을 달래기가 어려웠다.

강제로라도 섹스를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핑계거리를 찾을 필요도 없이 저 여자는 내 여자가 됐을 것이었다. 이 큰 자지를 찔러주면 주인여자는 보지 물을 쏟아내며 울부짖었을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를 보고 여보라고 부를 것이었고, 단 한번의 섹스로 그녀는 내 노예가 됐을 것이었다.

[제기랄!...그런 일이 현실에서 가능할리가 없잖아...!]

항상, 어긋났다.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어긋나고 말았다. 난 차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갖고 있던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법조인으로서 누구보다 인정받는 엄마의 능력과 열정을 존경했지만,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그림에 점점 빠져버리자, 아버지와 엄마는 더욱 싸움이 치열해졌고, 난 숨이 막혀서 가출을 했었다. 가출한 청소년들의 모습은 주인에게 버림받은 애완견들의 모습과 비슷했는데, 처음엔 같은 처지라는 것에 안도감과 동질감으로 함께 몰려다니며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철저히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였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었다. 먹을 것이 없으면 훔치거나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서도 엄청난 힘 싸움과 생존경쟁이 벌어졌다.

물리적인 파워게임에 의해서 강자와 약자가 정해졌고, 약자들은 자신들이 당하지 않기 위해 강자들에게 아부를 하며 자신들보다 더 약한 자를 만들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계급은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강자와 약자, 그리고 노예라는 계급은 어느새 익숙해져 버려서 엄청난 불합리한 상황을 겪어도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부모라는 벽에 갇혀 있다가 못 견디고 가출을 했더니, 또 다른 벽을 마주한 나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나는 물리적인 힘을 사용했고, 그로인해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엄마의 힘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미성년이기 때문인지 난 쉽게 풀려났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에 들어가자, 엄마는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보자마자 내 뺨을 때렸다.

이상한 일이지만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부터 두 사람은 내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난 또 다시 범생이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싸우지 않던 아버지와 엄마는 이혼을 했고, 난 어느 곳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 생각을 비웃듯 어긋났다.

인영과는 절대로 헤어진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지만 헤어졌고, 상인을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틈이 없었다. 현실에서는 이렇게 모든 상황이 어긋나고 말았다.



새벽 내내 잠을 못 이루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벌써 오후 2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옷을 모두 벗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3시부터 초희와 수업을 해야 했는데 이렇게 되면 첫 수업부터 지각을 할 것 같았다.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나는 너무나 당황했다. 대충 샤워를 한 뒤 되는대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데 아트 백을 두고 나오고 말았다. 아트 백엔 초희에게 보여 줄 이대 합격생들의 그림이 들어있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뛰어올라가 그것을 챙겨들고 다시 밖으로 뛰어나왔다.

정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 벌어져버렸다. 뭔가에 ?기 듯 움직이는 것을 난 극도로 싫어했고,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한심하게 생각했다.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할 때 들어오는 사람들을 나는 테러분자들보다 더 경멸했었다. 그런데 내가 이젠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주차장에 가보니 내 차가 없었다. 어제 학원에 두고 온 것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달리고 달려서 대로변으로 나갔는데, 그렇게 잘 잡히던 택시가 이상하게 잡히지 않았고, 또 택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똥줄이 탈 지경이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도로를 살피며 핸드폰을 받아보니 상인이었다.

<자기야? 오늘 가게 오픈인데, 안 올 거야?>

오늘이 광호의 새 가게 오픈이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고, 계획도 다 세웠었다. 아침에 테니스를 한 뒤 광호의 가게에 들려 하얀 짬뽕으로 점심을 먹고 초희의 집에 가면 시간이 딱, 맞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늦잠을 자고 말았다. 상인에게 저녁에 들른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 보니 보연에게도 전화가 와 있었다. 아무래도 연락도 없이 나가지 않은 내가 걱정돼서 전화한 모양이었다.

겨우겨우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올라타고 보니 기사가 40대 여자였다. 푸근한 인상의 여기사는 친절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 시간엔 모두들 터미널 쪽에 있어서 그래요, 손님.”

여기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콜비, 천원만 더 주시면 10분 내로 달려갑니다, 꼭 불러주세요.”

넉살좋은 여자였다. 나는 명함을 받아들고 초희의 집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고, 너무나도 교통신호를 잘 지켜서 난 전에 없이 짜증이 밀려왔다. 빨리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내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난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하면서 1초라도 서둘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그녀는 정차를 할 때마다 백미러로 나를 보고 웃었다.


“왜, 웃으시죠?...”

내가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 죄송해요...손님, 옷이 거꾸로 되어서요...”

그녀의 말에 내가 티를 살펴보니 황당하게도 뒤집어서 입고 있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라버렸다. 이 꼴로 초희의 집에 들어갔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옷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남자기사라면 옷을 바꿔 입을 텐데, 여자 기사라 그러기도 뭐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유행인가요?...호호...”

여기사는 내 맘도 모른 채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차를 몰고 달려갔다. 초희의 집은 도청 근처의 산 위에 있는 3층 집이었다. 로미의 집도 그 쪽이었는데 이 지역에서 전통적인 부유층 사람들은 모두 그 근처에 저택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산 중턱에 집이 있어서 전망도 좋았고, 바로 30분만 걸어 올라가면 약수터가 있는 환상적인 곳이었다.

시내를 빠져나간 차는 계천 옆 좁은 도로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10분 정도만 가면 도착할 것이었다. 계천은 청계천처럼은 아니었지만 잘 정리가 되어있었다. 계천 옆에서는 사람들이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초조함을 달래고 있었는데 갑자기 끼이?~ 하는 자극적인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춰 섰고, 난 얼굴을 좌석에 부딪치고 말았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확하고 짜증이 밀려와 앞을 보니, 좌측 골목에서 나온 렉서스가 멈춰선 채 가만히 있었다.


“괜찮으세요?!...”

여기사가 나를 보며 말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를 보다가 창문을 내렸다.

“갑자기 나오시면 어떡해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여기사가 말하자, 골목에서 나온 차가 창문을 열었다. 안을 살펴보니 조수석엔 곱상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고, 운전석엔 선 그라스를 낀 여자가 있었다.

“별 것도 아닌 것 같고 뭘 야단이야...!... 빨리 가 아줌마, 빨리!~”

“아니, 이 사람이, 정말!~”

여기사가 차에서 내려서 렉서스로 다가가 안에다 대고 따지듯 얘기하자, 렉서스에서 젊은 남자가 내려서는 지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정말 짜증나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점점 더 심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여자는 선 그라스를 벗고는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20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베르디움 여자들처럼 고급 옷에 고급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지각을 면하기는 틀려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여기사는 오히려 더욱 난리를 치는 젊은 남자를 보다가 이내, 포기를 하고 돌아서려했다.

“병신 같은 년이 길을 막고 지랄이야!... 하여튼 없이 사는 것들은!~”


젊은 남자는 비웃듯 그렇게 말했고, 여기사가 붉게 물든 얼굴로 돌아서서 다가갔다.

“뭐라고?~ 당신들이 골목에서 튀어나왔으면 사과를 해야지, 지금 어디서 쌍욕이야, 쌍욕이!~”

“아니, 이 미친년이 어디서 지랄이야, 지랄이!!!”

여기사의 말에 남자 놈이 그녀를 밀쳤고,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여기사를 보며 젊은 남자는 계속 욕을 했고, 차 안에 있는 렉서스 여자가 짜증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차에서 내려 여기사를 지나 젊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기선을 제압하려는 듯 내 앞으로 다가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넌?~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니 갈 길이나 가라...괜히 쳐 맞고 병원에 입원하지 말고, 알았냐?”


렉서스 여자가 나를 보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내가 뒤에 타고 있다는 것을 모른 것 같았다. 난 갑자기 두 사람의 사이가 궁금해서 녀석을 보지도 않고, 렉서스가 달려 나온 골목 쪽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곳은 모텔 밀집 지역이었다. 다시 계천 건너편을 살피니 그곳은 주택단지였다. 계천을 경계로 그렇게 주택과 모텔단지가 나뉜 구조였고,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퍽!~ 소리와 함께 젊은 남자는 뒤로 나가 자빠져버렸다. 내 앞차기 한 방에 나가떨어진 녀석은 캑, 캑 거렸고, 렉서스 여자는 놀란 얼굴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사는 벌떡 일어나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내 팔을 잡고 말렸다.


“걱정 마세요, 기사님. 제가 알아서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렉서스 여자는 젊은 남자가 어이없이 당해버리자,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인상을 쓰며 내게 다가왔다. 걸음걸이가 어떻게 저리 도도할 수 있을 까 싶을 정도로 렉서스 여자의 모든 동작은 도도했다.

“좋아요, 이쯤 하죠...!...”

모든 동작이 우아한 여자는 명풍 핸드백을 여는 모습도 우아했다. 그녀는 지갑에서 10만 원짜리 수표 세 장을 꺼내서 내 손에 쥐어주었다.

“됐죠?...”

씨발!...정말 좆같은 날이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느꼈던 모든 분노를 합한 것 보다 더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그런데 젊은 남자 놈이 눈치도 없이 이런 상황에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은 렉서스 여자가 준 돈을 받은 채 가만히 있는 나를 보고는 용기를 얻은 모양인지, 갑자기 내게 달려들며 펀치를 날렸다. 난 놈이 싸움 좀 할 줄 알았더니 이도저도 아닌 펀치를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큰 동작으로 휘두르는 펀치에 맞는 것은 샌드백뿐이었다. 일단, 난 가볍게 녀석의 배를 다시 걷어차서 숨쉬기가 곤란하게 했다. 녀석이 맞은 곳은 고통이 크면서 숨을 쉬기가 곤란한 곳이라 다시 움직이려면 시간이 필요한 곳이었다.

렉서스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상황을 많이 겪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여자의 모습이 정말 싫었다. 자기감정을 숨긴 채 나를 분석하는 듯한 표정이 정말이지 싫었다. 더 이상 렉서스 여자와 남자자식과 얽히고 싶지 않아 돌아서서 여기사에게 다가갔다. 난 수표를 그녀에게 전해주고 다시 뒷좌석에 올랐다.

여기사는 수표를 보다가 쓰러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젊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경멸하는 듯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그녀는 수표를 젊은 남자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다시 돌아서서 택시 안으로 들어왔다. 렉서스 여자는 얼굴이 붉어진 채 신경질 적으로 선 그라스를 끼고는 차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젊은 남자는 우리와 렉서스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손님...제가 참았어야 하는 건데...죄송합니다...”

여기사는 차를 몰고 달려가며 그렇게 말했고, 난 이제 지각에 대한 어떤 걱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늦었다는 것도 있었고, 렉서스 여자와 젊은 남자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걱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참는 게 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후우!~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던데...정말, 손님 말씀대로 참기만 하니까 울화병에 걸려서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아요...!...아무튼 고맙습니다...”

초희의 집에 도착한 여기사는 내가 주는 돈을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 뒷좌석에 돈을 넣고, 얼른 초희의 집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일하는 아줌마가 나를 보고 당황했고, 초희와 그녀의 엄마가 나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했다. 옷을 바로 입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난 티를 거꾸로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 요즘 유행입니다...”

멋쩍은 얼굴로 그렇게 둘러대고는 초희와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정확히 15분 지각이었다. 어차피 오늘 1타임엔 실기 실을 꾸미고, 초희와 대략적인 상담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지하로 내려 가보니 내가 얘기한 보드판과 함께 최신형 컴퓨터와 이젤, 그리고 테이블 형 책상과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가 있었다. 학생의 집에서 수업을 하다보면 가장 곤란한 것이 화장실 사용문제였다. 그런데 이 안에는 측면에 샤워 실이 있었고, 들어가는 입구 앞에는 칸막이까지 되어있어서 나 같이 예민한 성격의 남자라도 부담이 없었다. 그리고 싱크대가 설치되어서 물 사용과 도구를 닦을 때도 문제가 없었다.

이곳은 말이 지하지 넓고 쾌적한 것이 내 원룸과 비교해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다. 돈이 좋은 세상이었다. 이렇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대학에 목을 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난 준비해간 이화여대 합격생들의 그림을 아트 백에서 꺼내들고 책상에 펼쳤다. 이대 회화파트의 실기전형은 전통적인 정물 수채화가 아니라, 제시된 대상을 주고 그것을 이용해 자유롭게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었다. 실제 물체를 주제로 주기도 하지만 ‘마트에서 찬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온 여자가 잘 못해서 그것을 쏟고 말았다. 그것을 상상하여 자유롭게 공간표현을 하라’라는 문장 형의 주제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전형방식을 보면 전통적으로 테이블위에 놓여진 정물을 그리는 수채화와는 차별화되어 학생들의 상상력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나 같은 입시학원의 용병들이 연구 작을 통해 이미, 유형을 시각적으로 구체화 시켜놓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것에 맞게 짜깁기 할 수 있는 기술만 익히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3~5시간의 시험시간 동안 대단한 생각을 할 수 도 없었고, 화면에 제대로 표현하기도 짧은 시간이었다.


초희는 내가 펼친그림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벽에는 내가 부탁한대로 양철 판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핀으로 꼽을 필요가 없었다.

“초희야, 한 장씩 가져와라...”

“예?...”

초희는 생각한 것처럼 답답한 면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림말이야...이 벽에다 붙일 거야...”

“예...”

이제야 이해한 듯 초희가 그림을 한 장 들고 왔고, 난 그것을 받아들고 벽에 댄 뒤, 자석으로 네 귀퉁이를 고정시켰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움직여서 30여장의 그림으로 벽을 도배했다. 그림을 다 붙이고 나자 이제야 지하실이 조금 화실 분위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난 초희와 책상 옆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그림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초희야...앞으로는 네 그림으로 이 벽을 채워야 해...알겠니?”

“...예...”

내 말에 초희가 숙인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더니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내 눈을 쳐다본 것이었다. 반팔 티에 헐렁한 트레이닝을 입고 있는 초희의 모습이 이상하게 초라해 보였다. 한 번도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정말이지 내가 못 할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뭔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묘한 느낌인 것이 마치, 꺾으면 안 되는 꽃을 꺾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흠...좋아, 솔직하게 말할게...지금부터 너는 지금까지 네가 생각한 미술을 모두 버려야 돼. 예를 들면 피카소니, 고흐니, 폴락이니 하는 그런 류의 형체가 불문명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버려 알겠니?”

“...예...”

보통의 학생들은 내게 이유를 물었는데, 초희는 쉽게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난 그런 초희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짜증이 났다. 19살의 나이에 로봇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끔찍한 것도 없었다. 당연히 초희는 왜냐고 내게 따지고 물었어야 했다. 도대체 이런 풍요로운 집에서 태어난 초희가 왜 이렇게 기가 죽어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로미와 비교하면 정말 극과 극이었다. 이곳에는 밖으로 통하는 창문이 만들어져 있었고, 분명히 환풍 시설이 잘 돼있어서 공기가 전혀 탁하지 않았음에도 난 초희를 보면서 숨이 턱턱 막혀왔다. 지금까지 가르쳤던 학생들에게선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초희가 사람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하자.”

난 일어나 화판에 도화지를 끼우고 이젤에 올려놓은 뒤 연필을 하나 빼내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초희를 옆에 두고 연필을 깎는 법부터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연필 깎는 것만 봐도 저 자식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보이니까 유심히 잘 봐둬...”

“예, 선생님...”

초희는 정말로 내 행동 하나 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빈 병, 빈 가방...하얀 도화지...초희는 그렇게 느껴졌다. 어떤 것을 채워주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을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너도 해봐 초희야...”

“네...”

내 말에 초희가 4b 연필을 꺼내들고, 커터 칼을 집었다. 내 모습을 보며 칼 질을 하는 초희는 정말 못 봐줄 정도였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연필 깎기에 익숙한 상황이었고, 모두 정형화된 필기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칼질이 서투를 수밖엔 없었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집중해서 칼질을 하는 초희는 역시, 다른 학생들처럼 질문을 하지 않았다. 보통은 왜 이렇게 깎아야 하느냐? 연필 깎기를 사용하면 안 되느냐는 질문을 하기 마련이었는데, 초희는 그저 연필을 깎는 것에만 집중했다.


“자, 그쯤하고 ...이 쪽으로 와서 앉아 봐...”

나는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이젤 앞에 앉고, 초희를 불렀다. 그러자 초희가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지금부터 선 연습을 할 거야. 이걸 하는 이유는 연필의 각도를 자유롭게 사용하게 할 수 하려는 목적인데, 음...농구로 치면 드리블 연습, 수학으로 치면 구구단이라고 해두자.”

“예...”


대략적인 팔의 움직임과 연필의 각도를 조정해 주고 일단 초희 스스로 화지를 채워나가게 했다. 물론, 나는 초희 앞에서 같은 선 연습을 했고, 초희는 나를 참고하면서 하는 방식이었다. 선 연습은 재미가 없어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요즘은 입시학원에서는 잘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초희 처럼 시작이 늦은 학생들에겐 일부러라도 이런 선 연습을 더욱 가혹할 정도로 시켰다.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오늘 2타임정도로 선 연습을 끝내면 초희는 매일 스스로가 선 연습을 해야 했고, 난 그것을 주말에 검사를 하는 방식이었다.

1단계의 색감을 모두 채운 나는 뒤로 나와 초희의 상황을 살폈다. 녀석은 얼굴이 붉게 물들 정도로 상기된 채 땀까지 흘리며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지금 초희는 죽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날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내가 말한 국산커피 몇 종류가 있었다. 원두커피를 준비해 주겠다고 했지만 난 원두커피는 이상하게 입에 맞지 않았다. 태생이 싼티가 나서 그런지 나는 그냥 뜨거운 물에 국산 커피 한 스푼만 타서 마시는 것이 좋았다. 물론, 이것도 천 선생 때문에 생긴 습관이었다. 그분은 기타도 잘 쳤고, 술을 매우 좋아했고, 음악을 사랑했고, 시를 좋아했다. 어린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 분을 닮고 싶었는지 천 선생의 방식들을 따라했고, 어느 새 몸에 익고 말았다.


나는 1층으로 올라가 초희 엄마에게 오늘은 저녁을 다른 곳에서 먹어야 한다고 미리 말을 전한 뒤, 다시 지하실로 내려왔다. 그리고 5단 계로 나눠서 나는 4b 연필로 하얀 화지를 까맣게 채워 넣었다. 초희는 단계가 진행 될수록 나를 쫓아오지 못한 채로 당황하고 있었다. 항상, 보는 모습이지만 저렇게 초희 처럼 당연한 일에 크게 상심하는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가르치는 내가 힘이 빠져버렸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너무나 힘들어하는 초희와의 1타임 수업은 어쩔 수 없이 30분 일찍 끝을 냈다. 이런 경험이 많은 나였지만 초희같은 학생은 본적이 없었다. 저녁을 먹고 또 다시 시작되는 수업에서 과연 초희가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택시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초희 엄마가 한사코 태어주겠다고 해서 나는 그녀의 차에 올랐다. 운전을 하는 초희엄마의 모습을 보자니 신기하게도 상인과 많이 닮아보였다. 단순하게 안전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능숙해 보였고, 여유가 있어보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그녀가 할 말이 떨어졌는지 음악을 틀었다. 그러자 조금 무거운 느낌의 샹송이 흘러나왔는데, 들어보니 이베뜨 지로의 ‘미라보 다리’였다.


“음악이 좀, 청승맞죠? 제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애들 노래는 손가락이 오그라들어서 못 듣겠더라고요...이건 프랑스에 사는 친구가 구워 준건데...듣기 거북하세요, 장 선생님?”

“아닙니다...이베트 지로의 노래는 저도 자주 듣던 노래였습니다...”

내 말에 초희엄마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이베트 지로를 아세요?~”

“제게 그림을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께서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란 시를 좋아하셨는데, 이베트 지로나 티노 로씨의 노래 말고도 쟈크 라스리가 작곡한 노래도 갖고 계셔서 ...운 좋게 모두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음...왠지 모르게 그 분도 술 꽤나 드실 분 같네요...”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 별명이 바쿠스였습니다.”

내 말에 초희엄마는 그녀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깔깔대고 웃었다. 확실히 사람들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초희에게도 다른 모습이 있을까? 나는 초희엄마의 웃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하면 초희에게서 다른 모습을 끄집어낼까를 고민했다.

“장 선생님은 그렇게 재밌는 얘기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담담하게 하는 거죠?”

초희엄마는 과장되게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내 얘기가 정말로 재미있다는 것인데 조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내가 말을 재미있게 잘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광호의 가게에 들어가니 깔끔한 정장차림을 한 상인과 광호가 우리를 맞아 주었고, 예쁜 여자들이 유니폼인 듯한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 색 스커트를 입고 서빙을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정장차림을 한 광호를 보자 다르게 느껴졌다. 상인과 광호가 안내해주는 룸으로 걸어가면서 상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미소를 짓고 있는 상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상인과 광호가 안내해준 룸으로 들어가자 주인남자인 석관부부와 함께 도의원인 권중부부, 신문사 대표인 경섭부부와 kbs 지역 본부장인 지환부부가 자리를 잡고 술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정 원장과 학송이 그들 사이에 껴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과분하게 환대를 받으며 나와 초희엄마가 안으로 들어가 난 학송 옆에 앉았고, 초희엄마는 내 옆에 앉았다.


“장 선생, 첫 수업을 해보니 어때요?...우리, 초희 가능성이 있습디까?”

“...가능성을 보고 시작한 일이 아니라서요... 무조건 합격시켜야죠...”


내 말에 학송과 주인남자 그리고 도의원 권중이 크게 웃었고, 주인여자가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주인여자와 내 눈이 마주쳐서 얼마간 시선을 주고받다가 다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여자가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새벽에 벌어진 일에 대한 어떤 변명거리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주인여자의 변명도 들을 수 없는 것인가?

수업 때문에 한사코 거절했지만 기어코 학송이 주는 소주 한 잔은 마실 수 밖에 없었다. 상인과 특별한 사이가 된 후로 자꾸 이렇게 나만의 룰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술을 마시는 행위는 내게 있어선 엄청난 일이었다. 한번도 어긴 적이 없었는데 이젠 내가 정한 규칙들이 깨져가는 것을 나 스스로가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도 같았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상인이 나와 초의엄마의 음식을 들고 들어와 앞에 내려주었다. 흰색 스타킹을 신고 있는 상인의 모습도 너무나 섹시했고, 그녀의 다리를 보자 내 자지는 금방 발기해버리고 말았다.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자지를 위로 올리는데 주인여자와 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의 눈빛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생각에 내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말았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음식이야?...우동도 아니고, 울면도 아니고...!..”

내 앞으로 나온 하얀 짬뽕을 보고 학송이 이상한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주인남자가 하얀 짬뽕의 유래를 설명해주었다. 초희엄마도 모르고 있었는지 주인남자의 설명에 신기해했고, 내게 양해를 구하고는 면과 함께 국물 맛을 보았다. 그러자 학송도 면과 국물을 떠서 맛을 보았다.

“어머!~ 정말 신기한 맛이에요. 이런 것도 있었구나...!”

초희엄마는 하얀 짬뽕의 맛이 괜찮은지 연신 감탄을 하며 자꾸 짬뽕을 뺏어갔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내 음식을 누군가가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 나는 초희 엄마의 송이 덮밥을 뺏어먹고 있었다.

“에이!~ 이건 맹숭~ 맹숭한 게 이도 저도 아니잖아...! 짬뽕은 그저, 칼칼한 빨간 짬뽕이 제격이지...!”

학송은 맛이 없는지 그렇게 말하고는 소주를 마셨다. 그러면서 또 자기 잔을 내게 주면서 술을 따라 주려했다. 보다 못한 정 원장이 학송을 말렸지만 내가 괜찮다고 말하고 학송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신 뒤 다시, 학송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정 원장은 외계인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녁을 모두 먹고 조금 얘기를 나누다가, 나와 초희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룸에서 나오자 광호와 상인이 우리를 배웅했다. 상인은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 난 섹스를 했고, 신혼부부가 된 것처럼 여행을 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 했다. 인영과는 몇 년이 걸려도 하지 못했던 것을 상인과는 일주일 사이에 모두 다 했다. 하지만 인영이나 상인이나 내게는 다른 것이 없었다.

광호와 함께 서서 내게 손을 흔들어주는 상인을 보자, 두 사람의 빈틈이 보이지 않았고 상인은 인영보다도 더욱 멀게 느껴졌다. 주인여자의 말대로 현실은 내 생각과는 달리 이렇게 철저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장 선생님은 ...하얀 짬뽕을 닮은 것 같네요...”

초희엄마가 운전을 하면서 내게 그렇게 말했다.

“맹숭~ 맹숭 한가요?...”

“하하하...!...그건 아니고요...너무나 담백하다고요...아무튼 다행이에요...”

“다행...이라뇨?”

“...초희를 가르치기가 쉽지 않으실 거예요...하지만 장 선생님과는 잘 맞을 것 같아서요...”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나요?”

“그냥...느낌이 그러네요...다른 과외선생님들 하고는 다른 것 같아서요...”

초희에겐 나 말고도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과외선생들이 있었다. 그들과 내가 다른 것이 뭐가 있을까? 초희엄마는 더 이상 자신의 말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고, 다시 음악을 틀었다. 처량한 샹송이 초희엄마와 나 사이를 지나 차안에 맴돌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해 지하실로 내려가니 초희가 벽에 붙은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발자국 소리를 들은 초희가 돌아서서 나를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저녁, 맛있게 먹었니?”

“예...”

나는 싱크대 쪽으로 다가가 컵을 들고 커피를 넣었다.

“너도...커피...마실래?”

고개를 돌려 초희를 보고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진행될 수업을 견디려면 카페인을 섭취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해서까지 대학에 가야만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학생이나, 그 중간에 끼인 학부형이나 그런 의문을 갖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써 의문을 당연하게 가져야 했지만 대학이라는 대 전제 앞에서는 어떤 것도 용서되지 않았다.


커피를 함께 마시고 초희와 나는 다시, 선 연습을 시작했다. 1타임 때의 경험 때문인지 초희는 1미리 만큼의 진전이 있었다. 누군가를 가르칠 때 가장 힘든 것은 학생이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봐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지점이 명확하지 않아 강사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분분했다. 어느 선까지 지켜봐야하고, 어느 선에서 손을 대줘야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일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1타임 때처럼 5단 계를 모두 거치고 흰 화지를 까맣게 만든 뒤, 초희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연필의 움직임을 조금씩 수정해줬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초희는 잘 해나가고 있었다. 초희 같은 친구들이 차라리 편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설 미술학원에 오래 다닌 학생들 중엔 잘 못된 습관이 들어있는 채로 굳어져 버린 친구들이 많았다. 그것은 그 학생을 가르친 강사들의 잘 못이라기보다는 학생 스스로가 그 선생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 멋대로 했을 확률이 컸다. 아무리 돈에 팔려서 사는 용병이라도 잘 못 된 것을 가르치는 강사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잘 못된 습관이 몸에 밴 친구들은 뭔가를 가르치기 보다는 잘 못된 습관을 없애는 것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가르치는 사람이나 학생이나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만약, 강사가 모른 척 넘어가 버리거나, 학생이 강사의 지적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절대로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학생이 견디지 못하고 다른 학원으로 옮긴다고 하더라도 그 학생은 그 학원에서도 수업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 뭔가를 비슷하게 그려내는 미술에서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은 스포츠나 국, 영, 수의 과목과 같아서 기초가 부실해서는 절대로 높은 단계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초희와 새벽 수업까지 모두 끝내고 오전 8시쯤 아침을 먹었다. 학송은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고, 초희와 나도 샤워를 하긴 했지만 밤을 샜기 때문에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초희엄마 만이 표정이 좋았고, 얼굴엔 생기가 돌았다. 신기한 것은 이 큰 집에 세 사람 만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 사람이 살기엔 너무나 큰 집이었고, 공간의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 그래요, 장 선생? ...음식이 안 맞나?”

“아닙니다...세 사람이 살기엔 집이 너무 큰 것 같아서요...”

“그렇지?...후우!~~ 나도 요즘 그런 것 같다니까...초희 위로 쌍둥이 오빠언니가 있는데...큰 놈은 군대에 갔고... 한 놈은 3학년 인데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보기가 쉽지 않아서...!...”

쌍둥이 오빠와 언니라는 것을 보니 이란성 쌍생아인 모양이었다. 초희가 무남독려 외동딸인 줄 알았는데, 여러 가지로 내 예상은 빗나가고 있었다.

“...요즘은 취업이 힘들어서 대학생도 고등학생들과 다를 게 없을 겁니다...”

내 말에 학송과 초희엄마가 약간 한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편해지긴 했는데...좋아진 것 같지는 않아 ...그렇지 여보?...그래서 늦둥이를...”

“어머!~ 이이가 또 그 소리네!~~ 참 내...!~~”

학송의 말에 초희엄마가 펄쩍 뛰었고, 그 모습을 보며 초희가 피식 웃었다.

“아, 뭐 어때서 그래?~ 경수자식도 늦둥이 보더니 아주 좋아서 죽더라! 연정씨도 얼마나 좋아하디?”

“아유, 몰라!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또 애를 낳아요?~~”

점점 대화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상인과 광호가 이런 식으로 다툴 때도 상당히 난처했는데, 그들보다 훨씬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학송부부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서 신기하면서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사람 사는 모습은 모두 거기서 거기라고 하더니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난 어제까지만 해도 초희와 그녀의 엄마는 학송의 기에 눌려서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학송부부는 광호, 상인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고, 정 원장과 유정의 모습도 보였다. 초희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학송 앞에서 그렇게 억눌린 모습이 아니었다. 정말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쉽게 남을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장 선생, 생각은 어때? 이 사람 나이가 지금 마흔 다섯 밖에 안 됐는데 뭐 이상할 게 있나?”

초희는 밥을 먹다말고 깔깔대고 웃어버렸고, 난 얼굴이 달아올라 말을 못하고 냉수를 마셨다.


“이이가 정말, 아침부터 주책이야!~~”

학송은 초희엄마가 어깨를 때리는데도 살짝 피하며 나를 보고 능글맞게 껄껄거렸다.


아침을 다 먹고 초희는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고, 학송과 나는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초희엄마는 서재에서 나오더니 내게 시디를 건네주었는데 보니까 어제 들었던 이베트 지로의 음악이었다.

“뭐야?...뇌물이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학송이 초희엄마에게 물었다.

“하하...이이가 오늘 아침부터 자꾸만 시비네...장 선생님이 이베트 지로를 좋아하셔서 드리는 거야...!...”

“어이구!~~ 그 청승맞게 웅어얼~ 우엉얼~ 대는 게 뭐가 좋다고...난 말이야!~ 그저 뽕짝이 좋더라. 안 그래, 장 선생?”

“저도 뽕짝, 좋아합니다...”

내 말에 초희 엄마가 나와 학송을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초희엄마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아든 나는 학송의 차를 타고 학원으로 가서 내린 뒤 내 차를 끌고 원룸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 원룸에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초희의 집으로 가서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 수업을 할 것이었다. 수능이 끝날 때까지 매주 이런 식의 수업을 반복될 것이었고, 내겐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다. 피곤하긴 했지만 좀체 잠이 들지 않았다. 열린 창문으로 주인집 쪽을 보니 창문이 모두 닫혀있었다. 불과 하루 전에 이 방에서 난 자살을 하려했었고, 주인여자와 그런 일이 있었지만 기억이 흐릿할 정도로 오래 된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 정말로 나는 자살을 할 수 있었을까? 주인여자가 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까?

머리에 피가 잔뜩 몰리면서 또 다시 예민해져버렸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여서 짜증이 났고, 갈증이 밀려오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적막함에 귀까지 먹먹해지는 것 같아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노트북을 킨 나는 시디를 이것저것 뒤지다가 그만두고는 초희엄마가 준 이베트 지로의 시디를 아트 백에서 꺼내 들었다. 시디에는 이베트의 노래 말고도 살바토레 아다모의 노래도 있었는데, 초희엄마의 글씨는 여자들 글씨답지 않게 힘 있게 느껴지면서도 세련돼 보였다.

창문을 모두 닫고 커튼도 쳐 버리자 방 안이 어둑해졌고, 머리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디를 컴퓨터에 넣은 뒤 침대에 무거운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나른한 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방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스키하면서도 힘 있는 아다모의 ‘그대를 사랑해’라는 노래가 끈적끈적하게 나왔다. 아다모의 흐느끼는 소리는 내 귀 속 안으로 들어와 뇌를 자극시켰고,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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