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의 가정은 부유하지는 못했지만 그 어느 가정보다도 서로를 위하고, 헌신하는 모범적인 가정이었다.
유진이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은 행상이었다.
여름에는 길에서 과일을 팔고, 겨울에는 붕어빵과 오뎅을 파는 행상...
하지만 그녀가 아홉 살 때, 그녀의 여덟 살 아래 남동생을 두고 그녀의 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갔다.
겨울의 어느 새벽, 목욕을 하고 나오다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이다.
다행이 그녀의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처가 저세상에 간 후론 술,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해서 맹목적인 사랑을 베풀었고, 편부슬하란 말을 듣게 하기 싫어 두 남매가 가지고 싶어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사주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과 그녀의 남동생, 동진은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갖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것들을 입밖에 일절 내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런 자식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집 형편으로 인해 일찍 철이 든 사실이 안쓰럽기도 했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가장 큰 애정표현이 "저녁은 먹었냐" 일 정도였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예쁘게 커 가는 딸, 유진이 애교를 부릴 때면 집이 떠나가도록 웃기도 하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사실 육체적으로 몹시 고된 하루, 하루였지만 딸의 "아버지, 힘드셨죠?" 라는 말 한마디와 작은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것이면 세상의 어떤 힘든 일도 해낼 수 있는 기분이었다.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던 유진의 아버지가 부쩍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유진은 학원이나 과외 한 번 없이 줄곧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왔다.
실제로 서울의 명문 여대에 들어갈 성적이 되었고, 본인도 그렇게 하길 희망했지만...
그녀의 집안 형편은 그것을 허락하질 않았다.
유진은 그러한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다는 얘기 따위는 고3 내내 한번도 하질 않았었다.
하지만 그러한 딸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버지는 몹시나 가슴이 아팠다.
결국 그녀는 지방의 명문 국립대, 국문과에 입학금을 면제받으며 대학에 들어갔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며, 과외며 자신의 학비를 벌고 남은 돈으로 집안 살림에 보태며 열심히 살았다.
타고난 미모 덕에 많은 남자들의 프로포즈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럴 여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늘 화장기 없는 얼굴에 대충 차려입은 옷이 전부였던 그녀의 스무살.
한 번은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를 냉정하게 돌려보내고 집에 들어가자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유진아... 네 나이 땐 한창 연애도 하고 싶을 텐데... 아빠가 면목이 없구나..."
그녀는 고생으로 지문이 지워진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저 지금도 너무 행복해요. 하고 싶은 공부도 할 수 있고, 동진이도 착하게 잘 크고 있고. 게다가 얼마 안 되지만 적금도 꼬박꼬박 붓고 있어요... 아버지는 나중에 호강하실 수 있게 몸조리나 잘 하세요."
그때 유진은 늘 강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젊은 시절 큰 풍채를 가졌던, 하지만 이젠 구부정한 모습의 아버지의 주름진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흘러내렸다.
"추워~ 얼른 들어가자."
멋쩍으신지 얼른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말했다.
부녀의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날만큼 추운 날이었지만 부녀의 맞잡은 손만은 너무도 따뜻했다.
하지만...
그러한 작은 행복도 그녀에게는 얼마가지 못했다.
그녀가 대학 3학년에 들어갈 즈음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것이다.
학교에서 강의를 듣던 유진은 동생의 삐삐호출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동생이 교복을 입은 채 울며 말한다.
"아버지가 아침에 나 아침밥 챙겨준다고 상 들고 나오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시더니, 막 토하고... 그래서 119에 바로 연락했어..."
유진은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동진을 품에 앉으며 다독였다.
"그래, 잘했어. 별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마..."
의사를 만난 유진은 뇌출혈로 인한 뇌졸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 아니, 평소에 아무런 증상도 없으셨는데요."
의사는 딱한 듯 유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게 뇌졸중의 특징입니다. 지금 상태로선 우선 깨어나시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유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깨어나신다 해도 반신불수나 전신마비가 올 수 있습니다..."
유진은 산소호흡기를 물고 있는 아버지 옆에 섰다.
"아버지... 아버지..."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어요. 꼭 건강하게 일어나실 수 있도록 하겠어요."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때부터 그녀의 악전고투가 시작되었다.
바로 휴학을 하고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며, 과외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스무 살을 갓 넘긴 여자애가 벌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악착같이 벌고, 살던 집의 전세금까지 빼보았자 아버지 병원비엔 모자라기만 했다.
담보물이 없었기에 은행에서 대출 받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다, 어느 날 부턴가 유진의 눈엔 "월수 500 보장, 숙식 제공"이라는 광고가 부쩍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고갤 세차게 가로 저었지만... 가슴 한 켠에서는 "나만 희생한다면..."이라는 말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자신의 처녀성이 그렇게 중요한가.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가 그만큼 가치 있을까.
알량한 자존심이 뭐 그리 값비싼가.
그렇게, 그렇게... 그녀는 지쳐가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밤.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가는 막차 버스에 탔다 내리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다.
비를 맞으며 유진은 걸었다.
운동화에 물이 찔걱찔걱 들어차 온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짜증과 불안과 걱정, 서러움... 모든 것이 밀려왔다.
가슴에서 무언가 북받쳐 오르려는 순간 비가 그쳤다.
고갤 들어 보니 우산이 씌어져 있다.
"옷도 얇게 입고, 감기 들텐데..."
한 남자가 그렇게 얘기하며 우산을 들고 있다.
"필요 없어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우산에서 피해 빠르게 걸어갔다.
"알아요."
남자가 따라오며 다시 우산을 씌운다.
"근데 필요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치근덕거리지 말고 저리 가. 귀찮아."
유진은 옆을 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황당한 듯 잠시 서 있다 말을 이었다.
"저는 요앞 병원까지 가거든요. 그럼 거기 까지만 씌워 드릴게요. 그리고는 사라져 드리죠. 뭐."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그 남자의 어머니는 자궁암이었다.
말기라 단지 항암치료를 받으며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을 뿐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고교 졸업 후 공군 부사관에 자원 입대하여 5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병마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불평한마디 없이 사는 모습이 그녀 눈에 참 건강하게 보였다.
"저번엔 죄송했어요."
시간이 지나 둘이 조금은 가까워진 후 유진은 그렇게 말했다.
"하하... 미인이라 치근덕대는 사람이 많으신가 봐요...?"
유진은 따뜻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소리 없이 웃었다.
"전 배성욱이라고 합니다."
"전 최유진이에요."
그것이 그녀와 그녀 남편, 배중사의 첫 만남이었다.
둘은 동변상련 때문이었는지 서로의 부모님의 간병도 해가며 부쩍 가까워져 갔다.
그의 어머니는 몹시 불편한 몸이었지만, 유진에게 유달리 친절했다.
성욱의 말을 빌리자면 건강할 적 어머니는 목소리도 크고, 인심도 후하고, 우스갯소리도 잘하는 영락없는 통장 아줌마 스타일이었다 했다.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었던 유진에게 성욱의 어머니는 마치 친어머니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성욱의 어머니 또한 한 달이 지나오며, 서로의 처지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유진의 행동거지를 잘 살펴본 후 유진을 친딸처럼 여겼다.
"아픈덕에 결국 딸 하나 얻었네."
라며 그녀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곤 했다.
5월의 화창한 어느 날.
항암치료로 다 빠져버린 머리를 가리기 위해 보라색 모자를 쓰고, 휠체어를 탄 그녀는 유진의 아버지가 있는 병실에 왔다.
유진의 동생, 동진이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있다.
"유진이 학생 동생인가 보네... 참 잘 생겼다.
저기... 누나는 어디 갔어요?"
"네. 일하러요. 늦게나 되야 오는데..."
그녀는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동진에게 건넨다.
쪽지 하나와 만원짜리 한 장이다.
"이거 누나 좀 전해줘요. 돈은 뇌물이야. 학용품 사 쓰고. 그럼 부탁 좀 해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 병실을 나갔다.
그리고...
그 날 밤 그녀는 저 세상으로 갔다.
유진은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왜 자신에게 이렇게 안 좋은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일까.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는데...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5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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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리플 수 격려, 충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싫증을 느낄 겨를이 없네요.
어쨌든 낙천주의, 조까리, 막준다, 블루바다, 33169(님의 말도 맞아요. 확 돌면 못할것도 없죠^^;), 딕2(과찬 감사!), 보경이, 회원임, 논산제비, 제나비, 현성, fallout, 로렌조오일, #푸른초원#, 노름꾼, 신의 한수, 외로붜, 오감육부, 꿈청년 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모두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유진이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은 행상이었다.
여름에는 길에서 과일을 팔고, 겨울에는 붕어빵과 오뎅을 파는 행상...
하지만 그녀가 아홉 살 때, 그녀의 여덟 살 아래 남동생을 두고 그녀의 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갔다.
겨울의 어느 새벽, 목욕을 하고 나오다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이다.
다행이 그녀의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처가 저세상에 간 후론 술,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해서 맹목적인 사랑을 베풀었고, 편부슬하란 말을 듣게 하기 싫어 두 남매가 가지고 싶어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사주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과 그녀의 남동생, 동진은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갖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것들을 입밖에 일절 내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런 자식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집 형편으로 인해 일찍 철이 든 사실이 안쓰럽기도 했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가장 큰 애정표현이 "저녁은 먹었냐" 일 정도였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예쁘게 커 가는 딸, 유진이 애교를 부릴 때면 집이 떠나가도록 웃기도 하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사실 육체적으로 몹시 고된 하루, 하루였지만 딸의 "아버지, 힘드셨죠?" 라는 말 한마디와 작은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것이면 세상의 어떤 힘든 일도 해낼 수 있는 기분이었다.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던 유진의 아버지가 부쩍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유진은 학원이나 과외 한 번 없이 줄곧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왔다.
실제로 서울의 명문 여대에 들어갈 성적이 되었고, 본인도 그렇게 하길 희망했지만...
그녀의 집안 형편은 그것을 허락하질 않았다.
유진은 그러한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다는 얘기 따위는 고3 내내 한번도 하질 않았었다.
하지만 그러한 딸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버지는 몹시나 가슴이 아팠다.
결국 그녀는 지방의 명문 국립대, 국문과에 입학금을 면제받으며 대학에 들어갔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며, 과외며 자신의 학비를 벌고 남은 돈으로 집안 살림에 보태며 열심히 살았다.
타고난 미모 덕에 많은 남자들의 프로포즈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럴 여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늘 화장기 없는 얼굴에 대충 차려입은 옷이 전부였던 그녀의 스무살.
한 번은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를 냉정하게 돌려보내고 집에 들어가자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유진아... 네 나이 땐 한창 연애도 하고 싶을 텐데... 아빠가 면목이 없구나..."
그녀는 고생으로 지문이 지워진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저 지금도 너무 행복해요. 하고 싶은 공부도 할 수 있고, 동진이도 착하게 잘 크고 있고. 게다가 얼마 안 되지만 적금도 꼬박꼬박 붓고 있어요... 아버지는 나중에 호강하실 수 있게 몸조리나 잘 하세요."
그때 유진은 늘 강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젊은 시절 큰 풍채를 가졌던, 하지만 이젠 구부정한 모습의 아버지의 주름진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흘러내렸다.
"추워~ 얼른 들어가자."
멋쩍으신지 얼른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말했다.
부녀의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날만큼 추운 날이었지만 부녀의 맞잡은 손만은 너무도 따뜻했다.
하지만...
그러한 작은 행복도 그녀에게는 얼마가지 못했다.
그녀가 대학 3학년에 들어갈 즈음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것이다.
학교에서 강의를 듣던 유진은 동생의 삐삐호출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동생이 교복을 입은 채 울며 말한다.
"아버지가 아침에 나 아침밥 챙겨준다고 상 들고 나오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시더니, 막 토하고... 그래서 119에 바로 연락했어..."
유진은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동진을 품에 앉으며 다독였다.
"그래, 잘했어. 별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마..."
의사를 만난 유진은 뇌출혈로 인한 뇌졸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 아니, 평소에 아무런 증상도 없으셨는데요."
의사는 딱한 듯 유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게 뇌졸중의 특징입니다. 지금 상태로선 우선 깨어나시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유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깨어나신다 해도 반신불수나 전신마비가 올 수 있습니다..."
유진은 산소호흡기를 물고 있는 아버지 옆에 섰다.
"아버지... 아버지..."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어요. 꼭 건강하게 일어나실 수 있도록 하겠어요."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때부터 그녀의 악전고투가 시작되었다.
바로 휴학을 하고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며, 과외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스무 살을 갓 넘긴 여자애가 벌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악착같이 벌고, 살던 집의 전세금까지 빼보았자 아버지 병원비엔 모자라기만 했다.
담보물이 없었기에 은행에서 대출 받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다, 어느 날 부턴가 유진의 눈엔 "월수 500 보장, 숙식 제공"이라는 광고가 부쩍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고갤 세차게 가로 저었지만... 가슴 한 켠에서는 "나만 희생한다면..."이라는 말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자신의 처녀성이 그렇게 중요한가.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가 그만큼 가치 있을까.
알량한 자존심이 뭐 그리 값비싼가.
그렇게, 그렇게... 그녀는 지쳐가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밤.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가는 막차 버스에 탔다 내리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다.
비를 맞으며 유진은 걸었다.
운동화에 물이 찔걱찔걱 들어차 온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짜증과 불안과 걱정, 서러움... 모든 것이 밀려왔다.
가슴에서 무언가 북받쳐 오르려는 순간 비가 그쳤다.
고갤 들어 보니 우산이 씌어져 있다.
"옷도 얇게 입고, 감기 들텐데..."
한 남자가 그렇게 얘기하며 우산을 들고 있다.
"필요 없어요."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우산에서 피해 빠르게 걸어갔다.
"알아요."
남자가 따라오며 다시 우산을 씌운다.
"근데 필요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치근덕거리지 말고 저리 가. 귀찮아."
유진은 옆을 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황당한 듯 잠시 서 있다 말을 이었다.
"저는 요앞 병원까지 가거든요. 그럼 거기 까지만 씌워 드릴게요. 그리고는 사라져 드리죠. 뭐."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그 남자의 어머니는 자궁암이었다.
말기라 단지 항암치료를 받으며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을 뿐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고교 졸업 후 공군 부사관에 자원 입대하여 5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병마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불평한마디 없이 사는 모습이 그녀 눈에 참 건강하게 보였다.
"저번엔 죄송했어요."
시간이 지나 둘이 조금은 가까워진 후 유진은 그렇게 말했다.
"하하... 미인이라 치근덕대는 사람이 많으신가 봐요...?"
유진은 따뜻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소리 없이 웃었다.
"전 배성욱이라고 합니다."
"전 최유진이에요."
그것이 그녀와 그녀 남편, 배중사의 첫 만남이었다.
둘은 동변상련 때문이었는지 서로의 부모님의 간병도 해가며 부쩍 가까워져 갔다.
그의 어머니는 몹시 불편한 몸이었지만, 유진에게 유달리 친절했다.
성욱의 말을 빌리자면 건강할 적 어머니는 목소리도 크고, 인심도 후하고, 우스갯소리도 잘하는 영락없는 통장 아줌마 스타일이었다 했다.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었던 유진에게 성욱의 어머니는 마치 친어머니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성욱의 어머니 또한 한 달이 지나오며, 서로의 처지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유진의 행동거지를 잘 살펴본 후 유진을 친딸처럼 여겼다.
"아픈덕에 결국 딸 하나 얻었네."
라며 그녀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곤 했다.
5월의 화창한 어느 날.
항암치료로 다 빠져버린 머리를 가리기 위해 보라색 모자를 쓰고, 휠체어를 탄 그녀는 유진의 아버지가 있는 병실에 왔다.
유진의 동생, 동진이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있다.
"유진이 학생 동생인가 보네... 참 잘 생겼다.
저기... 누나는 어디 갔어요?"
"네. 일하러요. 늦게나 되야 오는데..."
그녀는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동진에게 건넨다.
쪽지 하나와 만원짜리 한 장이다.
"이거 누나 좀 전해줘요. 돈은 뇌물이야. 학용품 사 쓰고. 그럼 부탁 좀 해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 병실을 나갔다.
그리고...
그 날 밤 그녀는 저 세상으로 갔다.
유진은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왜 자신에게 이렇게 안 좋은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일까.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는데...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5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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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리플 수 격려, 충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싫증을 느낄 겨를이 없네요.
어쨌든 낙천주의, 조까리, 막준다, 블루바다, 33169(님의 말도 맞아요. 확 돌면 못할것도 없죠^^;), 딕2(과찬 감사!), 보경이, 회원임, 논산제비, 제나비, 현성, fallout, 로렌조오일, #푸른초원#, 노름꾼, 신의 한수, 외로붜, 오감육부, 꿈청년 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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