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누구보다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살아왔다 자부한다. 그런 추억을 간직한 우리였기에 서로의 믿음과 신뢰는 최강의 짝꿍들이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한 날,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의 절대 단짝이 된 영철이. 청순하고 귀여웠던 수진이. 새초롬하던 현정이.
우리는 점점 성장했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수학여행을 갈 때도 항상 늘 함께 했으며 밥을 먹어도 항상 함께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 하지만 영철이와 나는 남자공학에 진학하고 수진이와 현정이는 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래도 우리는 학교가 파하고 나면 항상 함께 했다.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기 하루 전날, 서로 같은 대학에 가자며 우정을 맹세하던 그 순순했던 시절. 모두 떠올리면 아름다운 추억이다. 우리 모두 함께 한 대학에 아쉽게 영철이는 재수생이 되어야 했지만...
일년이 지난 후 당당히 우리와 함께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영철이가 합류하면서 끈끈한 우정이 다시 완성되어 졌다. 그리고 우리의 군 입대. 애인보다 더 서글프게 울던 수진이와 현정이의 얼굴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참 웃긴 일로 회자된다.
아참, 내 소개를 하지 않았다. 나는 영근이다. 다영근. 성이 특이해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잊지 않는 이름 중에 하나다. 친구들은 나보고 다 영글었는데 철 언제드냐고 놀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내 이름이 맘에 들고 좋다.
군 제대 후 다시 만난 사회. 군대보다 힘들고 빡신 일상 속에 소소한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젊은 날의 초상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생한 만큼 달콤한 열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확신하며 미래를 설계했다.
그 결과, 나와 영철이는 공기업에 당당히 취업했고 수진이와 현정이도 나름 알아주는 직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일 때문에 잠시 외국으로 1년동안 출장에 다녀 온 나는 한통의 청첩장을 받았다. 영철이와 수진이의 결혼. 충격적이었지만 행복하게 살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결혼식 피로연 후 나와 현정이는 인사불성이 되어 서로 뜻하지 않는 하룻밤의 인연으로 부부의 정을 맺게 되었다. 영철이 놈은 지금도 나보고 원래 현정이 좋아 했는데 자기들 결혼을 핑계로 작업건거 아니냐며 놀려대는 통에 변명하기 바쁜 생활의 연속이긴 하지만...
뭐 어쨌든, 우리 네 명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간다. 우리가 결혼을 한지도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내 아내가 된 현정은 임신 3개월이 되었고 영철이와 수진이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얌마, 오늘 술 한잔 해야지?”
영철이는 항상 술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 영철이 덕분에 나도 자연스럽게 주량이 늘어가고 있다.
“안되. 오늘 술 마시고 집에 가면 현정이가 날 죽이려고 할거야.”
“넌 그러니까 아직도 그렇게 사는 거야.”
“현정이 임신 했잖아.”
“네. 잘나셨나요.”
영철이의 술 마시자는 제의를 거절한 나는 늘 이런씩으로 무시를 받는다. 그러면 나는 정의감에 못이기는 척 술자리에 동승을 하게 된다.
“여보세요? 자기야, 미안한데 오늘...”
나는 아내 현정이에게 오늘 영철이와 술을 마시기로 했다고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거라고 변경 같지 않은 변명으로 허락을 받으려 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알지 못하는 어려운 외계어가 내 귀 속에 있는 달팽이관을 괴롭힌다.
“#@%^@&$$@@#@!!!”
“미안... 일찍 들어갈게.”
은근슬쩍 급하게 잘 안 들린다는 핑계로 전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는 퇴근준비를 한다. 비공식 허락이랄까? 항상 이렇게 나와 영철이는 술자리를 만들었다. 물론 집에가면 나는 하얀 런딩과 팬티 바람으로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야 했지만. 나름 낭만적이지 않는가?
퇴근 후 우리 집 앞 포장마차에서 영철이를 만났다.
“너 때문에 내가 못산다. 못살아.”
“죽어. 그럼.”
“병신 새끼.”
“죽지도 못할 꺼면서.”
우리는 서로간의 애정(?)을 과시하고 포장마차로 들어간다. 오늘도 우리를 정답게 맞아주시는 주인아주머니. 매상이 많이 오를 것이란 기대감과 흥분감에 사로 잡혀 있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아주 반갑게 대해주신다.
“아이쿠, 출근 도장을 찍네. 찍어.”
“우리가 퇴근하고 어디 가겠어요. 여기가 집인데.”
“집에서 뭐라고들 안 해?”
영철이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키득거린다.
“괜찮아요. 이따 밤에 잘해주면 되죠.”
“그렇지!”
누가 뭐라해도 우린 손발이 잘 맞는 짝꿍이다. 말하지 않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절대 친구다. 이런 말장난 정도야 얼마든 서로 통하는 사이다.
“그거, 저거 주세요.”
“그거는 내가 해야 하고 저거는 알아서 꺼내 마셔.”
그거는 우리가 매일 시켜먹는 우동 한 그릇이고 저거는 소주를 말하는 것이다. 단골이 되다 보니 알아서 척척이었다. 주인아주머니에 말에 달달한 소주를 꺼내 든 영철이가 잔 두 개를 들고 신이 난 채 내가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온다.
“수진이 보고도 그렇게 웃어 주냐?”
“수진이?”
“아, 제수씨라고 해야지.”
“기본이 안 된 자식 같으니. 형수라고 해야지.”
“왜?”
“내가 너보다 형이잖아.”
“네가 왜 나보다 형이야? 동갑인데. 학번도 내가 더 빠른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영철이보다 생일도 빠르고 학번도 선배인데 형수님이라고 불러줄 이유가 없었다. 내 말을 듣고 영철이가 자기 머리에 손가락을 올리며 가리킨다.
“정신세계. 알겠냐?”
“지랄하네.”
“술이나 받아, 임마.”
그렇게 영철이와 소주 한 병을 다 마셔 갈 때쯤, 그거가 왔다. 우동 두 그릇.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우동은 우리의 저녁 대용이자 최고의 소주 안주다. 젓가락을 그릇에 담가 입금을 불며 한 젓가락 집어 올리던 영철이가 주인아주머니를 불렀다.
“너무하시네.”
왜 그러냐며 영철이에게 다가 온 주인아주머니는 영철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영철이가 주인아주머니를 부른 용무를 잘 몰랐다.
“왜 오늘은 튀김가루 한번만 넣으셨어요. 세 번은 넣어주셔야죠.”
“잉? 그래, 알겠다. 옛다! 배터지게 먹어라.”
주인아주머니는 튀김가루가 담긴 용기를 들고 와서 세 번, 네 번 넣어주신다. 그런 주인아주머니께 감사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90도로 하는 영철, 그리고 아이스박스에서 소주한병을 더 꺼내오며 소주병을 좌우로 흔든다.
“사장님, 나이스!”
주인아주머니와 나는 그런 영철이가 밉지 않았다. 항상 즐겁고 재밌게 사는 친구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부럽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한잔, 두잔... 두병, 세병... 술이 된다는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영철이와 나는 술에 취해 혀가 많이 꼬부라졌다. 이성이 뇌를 지배하는 시간이 아닌 알콜이 뇌를 지배하는 시간이 되었다.
“영근아, 요즘도 일 많이 바쁘냐?”
“똑같지 뭐.”
“하루하루 눈치 보느라 나는 정신이 없다.”
“왜?”
“알면서 그래. 밑에서는 치고 올라오지 위에서는 누르지.”
“너만 그러냐? 다 똑같아. 병신아.”
“그래도 너는 승진해서 상여금이라도 두둑하지. 나는 아직 말단이라 힘들어.”
대학을 먼저 나온 나는 영철이보다 1년 앞서 취직을 했고 영철이보다 먼저 승진을 했다. 막내 생활이 길다고 투덜대는 영철이가 딱해보였다.
“조금만 참아. 너도 곧 풀린다.”
“오냐? 그날이. 큭큭큭.”
“아, 미안. 넌 안 와. 큭큭큭.”
“병신!”
“술이나 한잔 드세요.”
쨍-
술한잔 기울일 친구가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사용되는 말인가 보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친구랑 보잘 것 없는 포장마차라 할지라도 이렇게 힘이 솟는 걸 봐서는.
띠리리-
전화가 한통 울린다. 내 전화기 같다. 누군지 감이 온다. 아주 강하고 무서운 사람 같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운동을 해서 누구에게도 싸움을 져 본적이 없다. 하지만 왠지 내가 싸우면 질 것 같은 사람이 전화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다. 역시... 내 예상은 빗나가질 않는다.
“여보세요.”
“미쳤니?”
아내 현정이다. 세상에서 우리 엄마와 동급으로 무서운 사람. 어쩌면 우리 엄마보다 더 공포스럽고 무서운 사람이다.
“아... 나 안치해써.”
“혀가 꼬였는데?”
연기다. 나는 위기를 느낄 때 연기대상에 빛나는 연기력이 발휘된다.
“그러리가. 옆에 영칠이 있는데. 바까줘? 딸꾹.”
“내가 돈다, 돌아. 영철이 바꿔줘!”
아내는 영철이를 바꿔달란다. 영철이에게 잔소리를 쏟아 부을 심산이다. 나는 살았다하는 마음으로 앞에 있는 영철이에게 전화기를 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없다. 이 자식.
주변을 둘러봤다. 영철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간거지? 주인아주머니를 바라봤다. 주인아주머니는 웃기만 하시며 영철이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나만 왕따를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너, 영철이 없지?”
“..............”
“어디야!”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전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오늘 집에 들어가면 과연 죽지 않고 살아 내일 정상출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때 바로 영철이가 스물스물 포장마차 안으로 기어들어온다.
“너 어디 갔었어?!”
“잠깐, 화... 장실.”
“개새끼.”
영철이는 내 눈치만 보며 술을 한잔 마신다. 자기도 미안할 것이다. 내가 삐져 있자 또 한 잔, 두 잔을 권한다. 그렇게 마시다 보니 진짜 왕창 취했다.
“영근아, 애 가지니 좋냐?”
“좋지.”
“우리 불임 검사했다.”
“너희들?”
“불임이라고 존경하는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더라.”
“진짜?”
영철이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영철이의 심정보다 상처받았을 수진이가 걱정이 되었다.
“수진이는 뭐래?”
“뭘 뭐래. 할 수 없는 거지.”
“그럼 애 안 낳을 거야?”
“무슨 수로 애를 낳아? 생기지도 않는데. 딸꾹.”
슬퍼하는 영철이의 한쪽 어깨를 다독여주며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으니 기운 내라 했다. 하지만 내가 해주는 위로조차 영철이에게는 큰 위안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얘기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수진이는 밝은 아이였는데... 불임이라니 참 안타깝다.”
“에휴... 수진이가 아니고, 내가 씨 없는 수박이래.”
나는 한 잔 마시던 소주잔을 뿜어냈다.
“뭐라고? 왜?”
“몰라. 이 새끼야.”
“영철아.”
지금까지 나는 수진이에게 문제가 있어 임신이 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영철이가 불임이라니... 영철이가 안쓰러워 보였다.
“남자가 태어나 자식도 못 보는 내 심정 아냐?”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웃긴게 나는 아들, 딸 다 필요 없다. 우리 수진이만 항상 행복하면...”
“왜 그런 마음 약한 소릴 해?”
“진심이야. 자식 없어도 나는 살아. 그런데 수진이는 여자로서 애를 낳지 못한다고 얼마나 슬퍼하는 줄 아니.”
“.............”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받아들여야 하는 당사자의 입장은 참혹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던 절친, 수진이가 아니던가. 가슴이 먹먹해지고 힘들었다.
그만 마셔야 하는 소주를 영철이의 고민으로 몇 병 더 마시게 되었다. 잠시 앉아 있던 자리에 소주병이 산을 이루며 쌓여만 갔다. 집에서 내가 오기만을 바라는 현정이의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친구가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에 혼자 일어설 수 없었다.
그런데 영철이가 많이 취해서 인지 아니면 제 정신이 아닌지 나에게 부탁을 했다.
“영근아, 우리 친구지?”
“그럼. 우린 친구아이가!”
“거두절미 하고 부탁 좀 하나 들어주라.”
“뭐? 집에까지 같이 걸어갈까? 수진이 선물 하나 사줘?”
“선물? 훗. 그래 선물 좀 줘라. 우리 수진이 애 좀 낳게 해줘라. 네 씨 좀 줘라.”
“!”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점점 성장했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수학여행을 갈 때도 항상 늘 함께 했으며 밥을 먹어도 항상 함께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 하지만 영철이와 나는 남자공학에 진학하고 수진이와 현정이는 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래도 우리는 학교가 파하고 나면 항상 함께 했다.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기 하루 전날, 서로 같은 대학에 가자며 우정을 맹세하던 그 순순했던 시절. 모두 떠올리면 아름다운 추억이다. 우리 모두 함께 한 대학에 아쉽게 영철이는 재수생이 되어야 했지만...
일년이 지난 후 당당히 우리와 함께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영철이가 합류하면서 끈끈한 우정이 다시 완성되어 졌다. 그리고 우리의 군 입대. 애인보다 더 서글프게 울던 수진이와 현정이의 얼굴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참 웃긴 일로 회자된다.
아참, 내 소개를 하지 않았다. 나는 영근이다. 다영근. 성이 특이해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잊지 않는 이름 중에 하나다. 친구들은 나보고 다 영글었는데 철 언제드냐고 놀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내 이름이 맘에 들고 좋다.
군 제대 후 다시 만난 사회. 군대보다 힘들고 빡신 일상 속에 소소한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젊은 날의 초상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생한 만큼 달콤한 열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확신하며 미래를 설계했다.
그 결과, 나와 영철이는 공기업에 당당히 취업했고 수진이와 현정이도 나름 알아주는 직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일 때문에 잠시 외국으로 1년동안 출장에 다녀 온 나는 한통의 청첩장을 받았다. 영철이와 수진이의 결혼. 충격적이었지만 행복하게 살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결혼식 피로연 후 나와 현정이는 인사불성이 되어 서로 뜻하지 않는 하룻밤의 인연으로 부부의 정을 맺게 되었다. 영철이 놈은 지금도 나보고 원래 현정이 좋아 했는데 자기들 결혼을 핑계로 작업건거 아니냐며 놀려대는 통에 변명하기 바쁜 생활의 연속이긴 하지만...
뭐 어쨌든, 우리 네 명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간다. 우리가 결혼을 한지도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내 아내가 된 현정은 임신 3개월이 되었고 영철이와 수진이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얌마, 오늘 술 한잔 해야지?”
영철이는 항상 술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 영철이 덕분에 나도 자연스럽게 주량이 늘어가고 있다.
“안되. 오늘 술 마시고 집에 가면 현정이가 날 죽이려고 할거야.”
“넌 그러니까 아직도 그렇게 사는 거야.”
“현정이 임신 했잖아.”
“네. 잘나셨나요.”
영철이의 술 마시자는 제의를 거절한 나는 늘 이런씩으로 무시를 받는다. 그러면 나는 정의감에 못이기는 척 술자리에 동승을 하게 된다.
“여보세요? 자기야, 미안한데 오늘...”
나는 아내 현정이에게 오늘 영철이와 술을 마시기로 했다고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거라고 변경 같지 않은 변명으로 허락을 받으려 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알지 못하는 어려운 외계어가 내 귀 속에 있는 달팽이관을 괴롭힌다.
“#@%^@&$$@@#@!!!”
“미안... 일찍 들어갈게.”
은근슬쩍 급하게 잘 안 들린다는 핑계로 전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는 퇴근준비를 한다. 비공식 허락이랄까? 항상 이렇게 나와 영철이는 술자리를 만들었다. 물론 집에가면 나는 하얀 런딩과 팬티 바람으로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야 했지만. 나름 낭만적이지 않는가?
퇴근 후 우리 집 앞 포장마차에서 영철이를 만났다.
“너 때문에 내가 못산다. 못살아.”
“죽어. 그럼.”
“병신 새끼.”
“죽지도 못할 꺼면서.”
우리는 서로간의 애정(?)을 과시하고 포장마차로 들어간다. 오늘도 우리를 정답게 맞아주시는 주인아주머니. 매상이 많이 오를 것이란 기대감과 흥분감에 사로 잡혀 있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아주 반갑게 대해주신다.
“아이쿠, 출근 도장을 찍네. 찍어.”
“우리가 퇴근하고 어디 가겠어요. 여기가 집인데.”
“집에서 뭐라고들 안 해?”
영철이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키득거린다.
“괜찮아요. 이따 밤에 잘해주면 되죠.”
“그렇지!”
누가 뭐라해도 우린 손발이 잘 맞는 짝꿍이다. 말하지 않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절대 친구다. 이런 말장난 정도야 얼마든 서로 통하는 사이다.
“그거, 저거 주세요.”
“그거는 내가 해야 하고 저거는 알아서 꺼내 마셔.”
그거는 우리가 매일 시켜먹는 우동 한 그릇이고 저거는 소주를 말하는 것이다. 단골이 되다 보니 알아서 척척이었다. 주인아주머니에 말에 달달한 소주를 꺼내 든 영철이가 잔 두 개를 들고 신이 난 채 내가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온다.
“수진이 보고도 그렇게 웃어 주냐?”
“수진이?”
“아, 제수씨라고 해야지.”
“기본이 안 된 자식 같으니. 형수라고 해야지.”
“왜?”
“내가 너보다 형이잖아.”
“네가 왜 나보다 형이야? 동갑인데. 학번도 내가 더 빠른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영철이보다 생일도 빠르고 학번도 선배인데 형수님이라고 불러줄 이유가 없었다. 내 말을 듣고 영철이가 자기 머리에 손가락을 올리며 가리킨다.
“정신세계. 알겠냐?”
“지랄하네.”
“술이나 받아, 임마.”
그렇게 영철이와 소주 한 병을 다 마셔 갈 때쯤, 그거가 왔다. 우동 두 그릇.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우동은 우리의 저녁 대용이자 최고의 소주 안주다. 젓가락을 그릇에 담가 입금을 불며 한 젓가락 집어 올리던 영철이가 주인아주머니를 불렀다.
“너무하시네.”
왜 그러냐며 영철이에게 다가 온 주인아주머니는 영철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영철이가 주인아주머니를 부른 용무를 잘 몰랐다.
“왜 오늘은 튀김가루 한번만 넣으셨어요. 세 번은 넣어주셔야죠.”
“잉? 그래, 알겠다. 옛다! 배터지게 먹어라.”
주인아주머니는 튀김가루가 담긴 용기를 들고 와서 세 번, 네 번 넣어주신다. 그런 주인아주머니께 감사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90도로 하는 영철, 그리고 아이스박스에서 소주한병을 더 꺼내오며 소주병을 좌우로 흔든다.
“사장님, 나이스!”
주인아주머니와 나는 그런 영철이가 밉지 않았다. 항상 즐겁고 재밌게 사는 친구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부럽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한잔, 두잔... 두병, 세병... 술이 된다는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영철이와 나는 술에 취해 혀가 많이 꼬부라졌다. 이성이 뇌를 지배하는 시간이 아닌 알콜이 뇌를 지배하는 시간이 되었다.
“영근아, 요즘도 일 많이 바쁘냐?”
“똑같지 뭐.”
“하루하루 눈치 보느라 나는 정신이 없다.”
“왜?”
“알면서 그래. 밑에서는 치고 올라오지 위에서는 누르지.”
“너만 그러냐? 다 똑같아. 병신아.”
“그래도 너는 승진해서 상여금이라도 두둑하지. 나는 아직 말단이라 힘들어.”
대학을 먼저 나온 나는 영철이보다 1년 앞서 취직을 했고 영철이보다 먼저 승진을 했다. 막내 생활이 길다고 투덜대는 영철이가 딱해보였다.
“조금만 참아. 너도 곧 풀린다.”
“오냐? 그날이. 큭큭큭.”
“아, 미안. 넌 안 와. 큭큭큭.”
“병신!”
“술이나 한잔 드세요.”
쨍-
술한잔 기울일 친구가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사용되는 말인가 보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친구랑 보잘 것 없는 포장마차라 할지라도 이렇게 힘이 솟는 걸 봐서는.
띠리리-
전화가 한통 울린다. 내 전화기 같다. 누군지 감이 온다. 아주 강하고 무서운 사람 같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운동을 해서 누구에게도 싸움을 져 본적이 없다. 하지만 왠지 내가 싸우면 질 것 같은 사람이 전화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다. 역시... 내 예상은 빗나가질 않는다.
“여보세요.”
“미쳤니?”
아내 현정이다. 세상에서 우리 엄마와 동급으로 무서운 사람. 어쩌면 우리 엄마보다 더 공포스럽고 무서운 사람이다.
“아... 나 안치해써.”
“혀가 꼬였는데?”
연기다. 나는 위기를 느낄 때 연기대상에 빛나는 연기력이 발휘된다.
“그러리가. 옆에 영칠이 있는데. 바까줘? 딸꾹.”
“내가 돈다, 돌아. 영철이 바꿔줘!”
아내는 영철이를 바꿔달란다. 영철이에게 잔소리를 쏟아 부을 심산이다. 나는 살았다하는 마음으로 앞에 있는 영철이에게 전화기를 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없다. 이 자식.
주변을 둘러봤다. 영철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간거지? 주인아주머니를 바라봤다. 주인아주머니는 웃기만 하시며 영철이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나만 왕따를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너, 영철이 없지?”
“..............”
“어디야!”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전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오늘 집에 들어가면 과연 죽지 않고 살아 내일 정상출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때 바로 영철이가 스물스물 포장마차 안으로 기어들어온다.
“너 어디 갔었어?!”
“잠깐, 화... 장실.”
“개새끼.”
영철이는 내 눈치만 보며 술을 한잔 마신다. 자기도 미안할 것이다. 내가 삐져 있자 또 한 잔, 두 잔을 권한다. 그렇게 마시다 보니 진짜 왕창 취했다.
“영근아, 애 가지니 좋냐?”
“좋지.”
“우리 불임 검사했다.”
“너희들?”
“불임이라고 존경하는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더라.”
“진짜?”
영철이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영철이의 심정보다 상처받았을 수진이가 걱정이 되었다.
“수진이는 뭐래?”
“뭘 뭐래. 할 수 없는 거지.”
“그럼 애 안 낳을 거야?”
“무슨 수로 애를 낳아? 생기지도 않는데. 딸꾹.”
슬퍼하는 영철이의 한쪽 어깨를 다독여주며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으니 기운 내라 했다. 하지만 내가 해주는 위로조차 영철이에게는 큰 위안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얘기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수진이는 밝은 아이였는데... 불임이라니 참 안타깝다.”
“에휴... 수진이가 아니고, 내가 씨 없는 수박이래.”
나는 한 잔 마시던 소주잔을 뿜어냈다.
“뭐라고? 왜?”
“몰라. 이 새끼야.”
“영철아.”
지금까지 나는 수진이에게 문제가 있어 임신이 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영철이가 불임이라니... 영철이가 안쓰러워 보였다.
“남자가 태어나 자식도 못 보는 내 심정 아냐?”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웃긴게 나는 아들, 딸 다 필요 없다. 우리 수진이만 항상 행복하면...”
“왜 그런 마음 약한 소릴 해?”
“진심이야. 자식 없어도 나는 살아. 그런데 수진이는 여자로서 애를 낳지 못한다고 얼마나 슬퍼하는 줄 아니.”
“.............”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받아들여야 하는 당사자의 입장은 참혹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던 절친, 수진이가 아니던가. 가슴이 먹먹해지고 힘들었다.
그만 마셔야 하는 소주를 영철이의 고민으로 몇 병 더 마시게 되었다. 잠시 앉아 있던 자리에 소주병이 산을 이루며 쌓여만 갔다. 집에서 내가 오기만을 바라는 현정이의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친구가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에 혼자 일어설 수 없었다.
그런데 영철이가 많이 취해서 인지 아니면 제 정신이 아닌지 나에게 부탁을 했다.
“영근아, 우리 친구지?”
“그럼. 우린 친구아이가!”
“거두절미 하고 부탁 좀 하나 들어주라.”
“뭐? 집에까지 같이 걸어갈까? 수진이 선물 하나 사줘?”
“선물? 훗. 그래 선물 좀 줘라. 우리 수진이 애 좀 낳게 해줘라. 네 씨 좀 줘라.”
“!”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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