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드러난 지 3일이 흘렀다.
자신의 진급 때문에 아내가 성상납을 했다는 것을 알게된 성욱은 집을 나갔다.
"생각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단지 그 말뿐이었다.
그가 그렇게 떠나고 유진은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유진이 본디 그렇게 약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그간 가지고 있던 모든 자책감이나 남편에 대한 죄책감, 불안함 등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그렇게 눈물이 흘렀다.
다음 날, 유진이 대대 사무실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급하게 전화로 연가를 신청하였을 뿐 보고도 않고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날 저녁, 장중령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중사, 미친 거 아냐?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이건 완전 중징계 감이야, 중징계 감. 알기나 해?"
유진은 짧게 대답했다.
"그래서요?"
"허허, 참. "그래서요"라니. 개념이 없군. 내 말은... 남편 허물을 자네가 덮으라는 거지. 자네가 오늘도 나서서 나를 좀 설득해주면 그냥 넘어갈 줄 수도 있고... 지금 나올 수 있겠나?"
"미친 새끼..."
장중령은 곧바로 언성을 높인다.
"뭐, 뭐?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이게 미쳤나..."
유진은 대답했다.
"남편이 이제 다 알아... 너나 나나 간통을 한 거야..."
장중령은 몹시 당황했다.
그래서인지 잠시 후... 아무런 대답 없이 전화는 끊겨버렸다.
3일째 저녁이 되던 날.
유진은 남편의 휴대폰으로 전활 했다.
역시 휴대폰은 꺼져있다.
유진은 음성사서함에 자신의 목소리를 남겼다.
"성욱씨... 나야.
정말 미안해... 이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네...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을게... 내가 당신이라도 나 같은 여자, 용서 못 할 것 같아.
당신을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유진은 한 숨을 쉬었다.
"나... 스무 살을 갓 넘겼을 무렵에... 참 많이 힘들었거든... 그 때 당신이 있어서 나 버틸 수 있었어. 어쩌면 나 그때 완전히 망가져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당신이라는 남자 만나서 날 잃지 않을 수 있었어.
당신은 늘 나에게 베풀기만 하잖아... 나 이제껏 당신에게 해준 게 없어... 그게 늘 가슴에 걸렸어. 그래서... 길을 잘 못 들었나봐... 미안해, 여보...
제발... 상처받지 말고... 나쁜 마음먹지마.
우리 헤어지면 가을이한텐 당신밖에 없어.
가을이에겐 내가 잘 얘기해 놓을 테니까 돌아와요, 여보... 부탁이야......"
목이 메어서 유진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외삼촌 집에서 돌아온 가을이에게 유진은 더 이상 자신과 가을이는 함께 살 수 없다는 걸 설명했다.
딸의 눈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눈물을 보는 유진의 가슴은 거북이등처럼 갈라졌다.
남편이 자신을 버려도 가을이 만큼은 자신이 키우고 싶다.
무슨 고생을 하더라도...
하지만... 자신만큼 가을이를 끔찍이 아끼는 성욱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그 날 딸아이의 방에서 잠을 청했다.
가을이를 품에 꼭 안은 채...
만약... 자신이 그 때... 장중령에게 다시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었을까.
뒤늦은 후회라는 것을 알지만 유진은 다시 그런 생각을 한다.
유진의 눈물로 딸의 머리카락 끝이 젖어갔다.
자정을 넘긴 시간...
성욱은 집으로 돌아왔다.
거칠어진 턱수염과 초췌해진 얼굴로 지난 사흘 간,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성욱은 딸아이 방에서 두 모녀의 잠이 든 모습을 보았다.
유진의 팔을 배고 새근새근 잠이 든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딸...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이 모든 걸 바쳐 사랑했던 아내가 누워있다.
방금 잠이 들었는지 눈에 눈물이 여전히 머금어있다.
아내를 처음 본지 이미 십 수년이 지났건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무엇이 이 여인을 그렇게 만들었나...
성욱은 가슴이 메여왔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지난 사흘 간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자신이, 배성욱이라는 남자가 최유진이라는 여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생긴 일은 아닐까.
아름다운 보석, 아름다운 집, 아름다운 차... 모든 것은 그 아름다움에 값어치를 치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내려다보이는 저 아름다운 여인을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여자로 만든 것은 아닐까.
만약 자신이 유진을 담을만한 능력이 되었다면 유진이는 그렇게 자신을 내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여자가, 자신만을 믿고 따르던 여자가 자신의 몸을 담보로 희생하게 만든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이런 자기 자신에게의 힘든 고백을 하기 위해 성욱은 사흘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욱은 아내의 고운 뺨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성욱은 그렇게 읊조렸다.
유진이 어렴풋이 눈을 뜬다.
이내 놀란 눈이 되어 소리 없이 남편을 부른다.
"여보..."
물이 끓고 있다.
달각달각 소리를 내며 주전자의 뚜껑이 움직인다.
단지 그 소리뿐.
주방에 두 사람이 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유진이 커피를 성욱에게 내밀며 어렵사리 입을 연다.
"어디... 갔었어?"
성욱은 커피 잔을 받아들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대구... 당신 고향."
유진이 아무 말 없이 커피 잔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린다.
"당신 처음 만났던 곳. 우리 처음 잤던 호텔. 데이트했던 곳.
많이 변했더군. 우리처럼이나..."
유진의 눈에서 또 눈물이 떨어졌다.
성욱이 그 모습을 보며 말한다.
"내가 또 너 울리네..."
유진이 소리 없이 웃는다.
"많이 생각했어..."
성욱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 관계...에 대해서...
사실 처음엔 화도 많이 났어...
하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더군..."
커피 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유진은 식탁 위에 떨어진 자신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비빈다.
"용서할 수가 없었어..."
유진의 손가락이 멈춘다.
"...네가 아닌 내가 말야.
널 그렇게까지 내 몬 내 자신의 무능함을 용서할 수가 없더라구..."
유진은 고갤 들어 남편을 바라봤다.
잔잔한 불빛 아래 눈물을 머금은 유진의 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아냐... 그런 게 아니잖아."
"이번 일... 그래. 네가 녹음한 음성을 듣고 확실히 알게 됐어.
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알고 있어."
성욱은 자신의 손등으로 유진의 뺨에 묻은 눈물을 닦았다.
"유진이, 넌 분명 나한테 과한 여자지만...
그런 사실보다 이제 와서 너 없이 산다는 걸 난 견딜 수가 없어."
유진은 놀란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만 좋다면... 죽을 때까지 같이 목욕하고, 밥 먹고, 가을이 키우고 싶은데... 어때?"
그 말에 유진은 일어서서 성욱에게로 다가갔다.
유진은 성욱을 꼭 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성욱도 유진을 감싸안는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아스러지도록 안고 있었다.
유진이 입을 연다.
"고마워... 성욱씨, 정말 고마워..."
"바보야,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유진의 눈에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다 성욱이 유진에게서 팔을 풀며 말한다.
"근데..."
성욱이 코를 찡긋하며 웃는다.
"나 목욕해야 할 거 같지 않아?"
욕조에 함께 들어간 유진과 성욱은 새롭게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진은 성욱의 가슴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욕조의 온기로 인해 유진의 모습이 더욱 청초해 보인다.
"우리... 떠났으면 해."
유진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성욱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성욱이 따뜻한 물을 손으로 퍼 유진의 어깨와 가슴에 조심스레 끼얹졌다..
물방울 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그리고 나... 관두려구..."
유진의 젖은 머리카락에 입 맞추며 성욱이 그렇게 얘기했다.
유진은 아무 말 없이 성욱의 팔을 잡으며 눈을 감았다.
"미안해... 나 때문에..."
성욱이 미소짓는다.
"아냐. 당신도 나 때문에 그렇게 희생했는데... 그리고... 대대장과의 일은 걱정마. 내가 알아서 할게."
유진의 가슴 한 구석이 메여왔다.
유진이 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성욱이 너스레를 떨며 묻는다.
"유진아. 나 관두면 우리 뭐 먹고살까?"
유진이 뒤로 손을 넣어 성욱의 물건을 잡으며 말한다.
"...난 당신 춥파춥스."
둘은 한 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길게 입맞췄다.
다음날 대대에 출근하자마자 성욱은 대대장실을 찾았다.
성욱을 보자 대대장은 괜스레 반가운 척을 한다.
"야∼ 성욱이. 어디 갔었어? 푹 쉬었냐?"
성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안에서 잠갔다.
대대장,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 성욱아. 내 할말이 있는데..."
"그보다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들어봐."
성욱은 대대장의 업무보드에 걸터앉으며 반말 조로 얘기한다.
"기무사 얘들 건 수 물려고 눈 벌겋게 설치는 거 알지?
재작년엔 스타가 소위 성희롱 했다가 옷 벗었잖아.
그런 판국에 요번 일 같은 거 물어다주면 절이라도 할 걸."
장중령의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배중사를 달래려고 한다.
"아, 참. 성욱이 왜 그러나......"
퍽!
그 순간 장중령의 왼쪽 턱에 성욱의 주먹이 꽂혔다.
"어구.... 어구...."
장중령이 자신의 턱을 잡고 데굴데굴 구른다.
성욱은 달려가 장중령의 배에 자신의 워커를 심었다.
"억!!!"
숨을 쉬기 곤란한지 장중령은 한참을 죽은 듯 누워있다.
성욱은 장중령의 머리채를 잡아들었다.
"아, 아!"
장중령을 자리에 다시 앉힌 성욱은 장중령을 쏘아보았다.
성욱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튀는 듯 하다.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는 장중령.
성욱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도 난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마음이 없어.
그리고 너도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으면 해.
만약에 내 와이프가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들리면..."
성욱은 옆에 있던 재떨이로 장중령의 머리를 후려쳤다.
성욱의 옷에 피가 튄다.
장중령은 고통도 잊은 채 성욱에게 빌었다.
"어이구... 내가 미안하네...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지..."
"지난 석 달 동안의 얘기, 절대 입밖에 내지마. 만약 누구에게든 얘기하는 날에는 정말로 넌 죽어."
그러며 성욱은 또 다른 재떨이를 집어들었다.
"히익!"
장중령은 지레 겁을 먹고 머리를 움츠린다.
"알아듣겠어...?"
장중령은 비굴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갤 끄덕인다.
"여부가 있겠나..."
"이건 협박이 아냐."
성욱은 재떨이를 내려놓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약속이지."
그리고는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김경태 병장을 비롯하여 행정계장과 최하사가 서 있다.
모두들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다.
성욱이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그리고 군인으로서 다시 만나는 일도 없을 거야.
절차 밟아 내가 나가도록 하지."
성욱이 떠난 뒤 행정계장인 서석호 중위가 대대장에게 달려간다.
"괜찮으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장중령은 손수건으로 머리의 출혈을 누르며 비통한 듯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그냥 넘어진 거야, 보면 몰라?"
성욱이 바깥으로 나가자 소담스런 햇살이 성욱을 내리쬔다.
성욱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있는 중사 계급장을 어루만졌다.
"아쉬움은 없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아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이제 자신의 인생은 막 시작되는 것이라고...
- 최종회에 계속
자신의 진급 때문에 아내가 성상납을 했다는 것을 알게된 성욱은 집을 나갔다.
"생각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단지 그 말뿐이었다.
그가 그렇게 떠나고 유진은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유진이 본디 그렇게 약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그간 가지고 있던 모든 자책감이나 남편에 대한 죄책감, 불안함 등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그렇게 눈물이 흘렀다.
다음 날, 유진이 대대 사무실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급하게 전화로 연가를 신청하였을 뿐 보고도 않고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날 저녁, 장중령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중사, 미친 거 아냐?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이건 완전 중징계 감이야, 중징계 감. 알기나 해?"
유진은 짧게 대답했다.
"그래서요?"
"허허, 참. "그래서요"라니. 개념이 없군. 내 말은... 남편 허물을 자네가 덮으라는 거지. 자네가 오늘도 나서서 나를 좀 설득해주면 그냥 넘어갈 줄 수도 있고... 지금 나올 수 있겠나?"
"미친 새끼..."
장중령은 곧바로 언성을 높인다.
"뭐, 뭐?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이게 미쳤나..."
유진은 대답했다.
"남편이 이제 다 알아... 너나 나나 간통을 한 거야..."
장중령은 몹시 당황했다.
그래서인지 잠시 후... 아무런 대답 없이 전화는 끊겨버렸다.
3일째 저녁이 되던 날.
유진은 남편의 휴대폰으로 전활 했다.
역시 휴대폰은 꺼져있다.
유진은 음성사서함에 자신의 목소리를 남겼다.
"성욱씨... 나야.
정말 미안해... 이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네...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을게... 내가 당신이라도 나 같은 여자, 용서 못 할 것 같아.
당신을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유진은 한 숨을 쉬었다.
"나... 스무 살을 갓 넘겼을 무렵에... 참 많이 힘들었거든... 그 때 당신이 있어서 나 버틸 수 있었어. 어쩌면 나 그때 완전히 망가져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당신이라는 남자 만나서 날 잃지 않을 수 있었어.
당신은 늘 나에게 베풀기만 하잖아... 나 이제껏 당신에게 해준 게 없어... 그게 늘 가슴에 걸렸어. 그래서... 길을 잘 못 들었나봐... 미안해, 여보...
제발... 상처받지 말고... 나쁜 마음먹지마.
우리 헤어지면 가을이한텐 당신밖에 없어.
가을이에겐 내가 잘 얘기해 놓을 테니까 돌아와요, 여보... 부탁이야......"
목이 메어서 유진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외삼촌 집에서 돌아온 가을이에게 유진은 더 이상 자신과 가을이는 함께 살 수 없다는 걸 설명했다.
딸의 눈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눈물을 보는 유진의 가슴은 거북이등처럼 갈라졌다.
남편이 자신을 버려도 가을이 만큼은 자신이 키우고 싶다.
무슨 고생을 하더라도...
하지만... 자신만큼 가을이를 끔찍이 아끼는 성욱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그 날 딸아이의 방에서 잠을 청했다.
가을이를 품에 꼭 안은 채...
만약... 자신이 그 때... 장중령에게 다시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었을까.
뒤늦은 후회라는 것을 알지만 유진은 다시 그런 생각을 한다.
유진의 눈물로 딸의 머리카락 끝이 젖어갔다.
자정을 넘긴 시간...
성욱은 집으로 돌아왔다.
거칠어진 턱수염과 초췌해진 얼굴로 지난 사흘 간,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알 수 있다.
성욱은 딸아이 방에서 두 모녀의 잠이 든 모습을 보았다.
유진의 팔을 배고 새근새근 잠이 든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딸...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이 모든 걸 바쳐 사랑했던 아내가 누워있다.
방금 잠이 들었는지 눈에 눈물이 여전히 머금어있다.
아내를 처음 본지 이미 십 수년이 지났건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무엇이 이 여인을 그렇게 만들었나...
성욱은 가슴이 메여왔다.
모든 것은...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지난 사흘 간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자신이, 배성욱이라는 남자가 최유진이라는 여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생긴 일은 아닐까.
아름다운 보석, 아름다운 집, 아름다운 차... 모든 것은 그 아름다움에 값어치를 치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내려다보이는 저 아름다운 여인을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여자로 만든 것은 아닐까.
만약 자신이 유진을 담을만한 능력이 되었다면 유진이는 그렇게 자신을 내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여자가, 자신만을 믿고 따르던 여자가 자신의 몸을 담보로 희생하게 만든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이런 자기 자신에게의 힘든 고백을 하기 위해 성욱은 사흘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욱은 아내의 고운 뺨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성욱은 그렇게 읊조렸다.
유진이 어렴풋이 눈을 뜬다.
이내 놀란 눈이 되어 소리 없이 남편을 부른다.
"여보..."
물이 끓고 있다.
달각달각 소리를 내며 주전자의 뚜껑이 움직인다.
단지 그 소리뿐.
주방에 두 사람이 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유진이 커피를 성욱에게 내밀며 어렵사리 입을 연다.
"어디... 갔었어?"
성욱은 커피 잔을 받아들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대구... 당신 고향."
유진이 아무 말 없이 커피 잔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린다.
"당신 처음 만났던 곳. 우리 처음 잤던 호텔. 데이트했던 곳.
많이 변했더군. 우리처럼이나..."
유진의 눈에서 또 눈물이 떨어졌다.
성욱이 그 모습을 보며 말한다.
"내가 또 너 울리네..."
유진이 소리 없이 웃는다.
"많이 생각했어..."
성욱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 관계...에 대해서...
사실 처음엔 화도 많이 났어...
하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더군..."
커피 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유진은 식탁 위에 떨어진 자신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비빈다.
"용서할 수가 없었어..."
유진의 손가락이 멈춘다.
"...네가 아닌 내가 말야.
널 그렇게까지 내 몬 내 자신의 무능함을 용서할 수가 없더라구..."
유진은 고갤 들어 남편을 바라봤다.
잔잔한 불빛 아래 눈물을 머금은 유진의 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아냐... 그런 게 아니잖아."
"이번 일... 그래. 네가 녹음한 음성을 듣고 확실히 알게 됐어.
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알고 있어."
성욱은 자신의 손등으로 유진의 뺨에 묻은 눈물을 닦았다.
"유진이, 넌 분명 나한테 과한 여자지만...
그런 사실보다 이제 와서 너 없이 산다는 걸 난 견딜 수가 없어."
유진은 놀란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만 좋다면... 죽을 때까지 같이 목욕하고, 밥 먹고, 가을이 키우고 싶은데... 어때?"
그 말에 유진은 일어서서 성욱에게로 다가갔다.
유진은 성욱을 꼭 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성욱도 유진을 감싸안는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아스러지도록 안고 있었다.
유진이 입을 연다.
"고마워... 성욱씨, 정말 고마워..."
"바보야,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유진의 눈에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다 성욱이 유진에게서 팔을 풀며 말한다.
"근데..."
성욱이 코를 찡긋하며 웃는다.
"나 목욕해야 할 거 같지 않아?"
욕조에 함께 들어간 유진과 성욱은 새롭게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진은 성욱의 가슴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욕조의 온기로 인해 유진의 모습이 더욱 청초해 보인다.
"우리... 떠났으면 해."
유진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성욱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성욱이 따뜻한 물을 손으로 퍼 유진의 어깨와 가슴에 조심스레 끼얹졌다..
물방울 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그리고 나... 관두려구..."
유진의 젖은 머리카락에 입 맞추며 성욱이 그렇게 얘기했다.
유진은 아무 말 없이 성욱의 팔을 잡으며 눈을 감았다.
"미안해... 나 때문에..."
성욱이 미소짓는다.
"아냐. 당신도 나 때문에 그렇게 희생했는데... 그리고... 대대장과의 일은 걱정마. 내가 알아서 할게."
유진의 가슴 한 구석이 메여왔다.
유진이 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성욱이 너스레를 떨며 묻는다.
"유진아. 나 관두면 우리 뭐 먹고살까?"
유진이 뒤로 손을 넣어 성욱의 물건을 잡으며 말한다.
"...난 당신 춥파춥스."
둘은 한 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길게 입맞췄다.
다음날 대대에 출근하자마자 성욱은 대대장실을 찾았다.
성욱을 보자 대대장은 괜스레 반가운 척을 한다.
"야∼ 성욱이. 어디 갔었어? 푹 쉬었냐?"
성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안에서 잠갔다.
대대장,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 성욱아. 내 할말이 있는데..."
"그보다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들어봐."
성욱은 대대장의 업무보드에 걸터앉으며 반말 조로 얘기한다.
"기무사 얘들 건 수 물려고 눈 벌겋게 설치는 거 알지?
재작년엔 스타가 소위 성희롱 했다가 옷 벗었잖아.
그런 판국에 요번 일 같은 거 물어다주면 절이라도 할 걸."
장중령의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배중사를 달래려고 한다.
"아, 참. 성욱이 왜 그러나......"
퍽!
그 순간 장중령의 왼쪽 턱에 성욱의 주먹이 꽂혔다.
"어구.... 어구...."
장중령이 자신의 턱을 잡고 데굴데굴 구른다.
성욱은 달려가 장중령의 배에 자신의 워커를 심었다.
"억!!!"
숨을 쉬기 곤란한지 장중령은 한참을 죽은 듯 누워있다.
성욱은 장중령의 머리채를 잡아들었다.
"아, 아!"
장중령을 자리에 다시 앉힌 성욱은 장중령을 쏘아보았다.
성욱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튀는 듯 하다.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는 장중령.
성욱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도 난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마음이 없어.
그리고 너도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으면 해.
만약에 내 와이프가 다른 사람 입을 통해 들리면..."
성욱은 옆에 있던 재떨이로 장중령의 머리를 후려쳤다.
성욱의 옷에 피가 튄다.
장중령은 고통도 잊은 채 성욱에게 빌었다.
"어이구... 내가 미안하네...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지..."
"지난 석 달 동안의 얘기, 절대 입밖에 내지마. 만약 누구에게든 얘기하는 날에는 정말로 넌 죽어."
그러며 성욱은 또 다른 재떨이를 집어들었다.
"히익!"
장중령은 지레 겁을 먹고 머리를 움츠린다.
"알아듣겠어...?"
장중령은 비굴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갤 끄덕인다.
"여부가 있겠나..."
"이건 협박이 아냐."
성욱은 재떨이를 내려놓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약속이지."
그리고는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김경태 병장을 비롯하여 행정계장과 최하사가 서 있다.
모두들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다.
성욱이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그리고 군인으로서 다시 만나는 일도 없을 거야.
절차 밟아 내가 나가도록 하지."
성욱이 떠난 뒤 행정계장인 서석호 중위가 대대장에게 달려간다.
"괜찮으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장중령은 손수건으로 머리의 출혈을 누르며 비통한 듯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그냥 넘어진 거야, 보면 몰라?"
성욱이 바깥으로 나가자 소담스런 햇살이 성욱을 내리쬔다.
성욱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있는 중사 계급장을 어루만졌다.
"아쉬움은 없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아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이제 자신의 인생은 막 시작되는 것이라고...
- 최종회에 계속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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