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수업이 통 귀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수업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신혜는 왜 울면서 그런 말을 했을까? 수업이 끝난 후 수지는 넋이 나간 사람같다고 핀잔을 주며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만, 뭐라 대답하지를 못했다. 내가 딱히 자뻑이 심한 놈도 아니고, 눈치가 없는 놈도 아니기에, 어제 신혜의 그 행동들은 나를 좋아해서였다는 내 결론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점심을 먹고나서 수업에 들어가보니, 아직 시간이 20분쯤 남아서인지, 사람이 몇 명 없다. 할짓이 마땅치 않아 가방을 열고 아무 책이나 좀 볼까 싶었는데, 보약이 한팩 들어있다. 언젠가 술먹고 다니면 몸관리도 해야 한다며 할아버지께서 특별히 어머니한테 당부하셨던 그 약이다. 갑자기 날려버린 오전수업에 대해 심한 죄책감이 든다. 등록금도 만만찮은데, 수업이라도 똑바로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날려버린 오전 수업을 정리해 놓은 수지의 노트가 마침 가방에 함께 있다. 이럴때 보면 수지는 역시 참 고마운 사람이다. 나같은 놈한테는 과분하기 이를데가 없다.
노트를 보고 있는데, 누가 교단으로 성큼 성큼 오르더니 칠판에 글씨를 쓴다. "금일OOOO 수업 휴강".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등록금은 지들 맘대로 쳐 올리면서 이따위로 수업 날려먹고. 첫날이면 최소한 교수가 자기 인사는 하고, 앞으로 수업 어떻게 할건지는 설명을 해줘야 할거 아니냐.
얼마전에 수업료 인상에 반대한다면서 학생회에서 시위하던데, 걔들도 한심하다. 학교측에서는 물가 인상에 맞춰서 등록금 올린다고 하는데, 무조건 올리지 말라는게 말이돼나? 요구를 할거면, 그 많은 등록금 다 어디다 썼는지 내역이나 공개하라고 해봐라. 내가 장담하는데, 중간에 삥땅친돈이 어마어마 할거다. 돈내는건 우리니까 그거 요구할 권리쯤은 있지 않나? 등록금 사용내역 공개하면, 당연히 삥땅 덜 칠거고, 등록금은 자연스럽게 내려갈텐데, 왜 그생각을 못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지금 화가 난다. 이따위 수업 안들을테다. 아직 수업 변경도 가능하다. 강의실에서 나와 무턱대고 다른 강의실에 들어가본다. 수업 전이긴 한데, 사람이 반쯤 차있다. 뒷자리에서 멍때리고 있는 남자가 있어, 말을 건낸다.
"이거 무슨 수업이에요?"
"철학수업인데요? OOO 교수님 수업이요."
"첫날이죠?"
"네."
철학? 뭐 한번 받아볼까 싶다. 괜찮다 싶으면 아예 수업을 옮겨야겠다. 어디 앉을까 둘러보는데, 창가에 볕 좋은 자리가 하나 있다. 창 바로 옆에는 누가 엎드려 자고 있지만, 3인용 책상이니 한칸 건너 앉으면 서로 불편할 일도 없고, 자리도 좋아보여 그곳에 앉는다.
점심 먹고나서 수업 시작 전까지 잠깐 자는거 좋지.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반팔 후드티의 후드를 뒤집어 쓴 채 트레이닝 저지까지 덮고 자는 폼이 아주 자려고 준비를 해 온 사람 같다. 여자겠지 싶다. 살 타는거 싫어서 그렇게 철저하게 자외선을 차단하는걸 보니.
"쿵"
강의실 뒷문을 누가 생각없이 세게 닫은 모양이다. 다들 뒤로 돌아 째려본다. 그놈도 미안했는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원위치 시키는데, 옆사람이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나를 의식했는지 쳐다본다. 아는 사람이다. 신혜였다. 많이 놀랐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후드를 내리고 머리를 매만지며 시선을 피한다.
"이거 일반선택인데, 이거 받아?"
"원래 이거 아닌데, 교수가 안와서 그냥 수업 바꾸려고요. 누나 이 수업 받아요?"
"응. 교수님이 수업 잘한다고 해서"
문득, 수지와 강의실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학생도 많은 학교에서 쉽지 않은 우연인데.
"근데, 누나 머리..."
신혜의 모습이 어제와 많이 다르다. 예쁘던 단발머리가 많이 짧아졌다. 커트머리가 유행도 아닐텐데. 근데, 전보다 만배는 귀여워진거같다.
"음. 그냥. 단발 좀 지겨워서."
"잘 어울려요."
이렇게 대화를 이어가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신기하다. 막상 마주보면 어제일 때문에 한마디도 못할줄 알았는데. 물론, 신혜가 대화를 이어주는게 가장 큰 요인이기는 하다.
잘 어울린다는 말에 신혜가 살짝 애잔하게 웃는 옆모습이 보인다. 예쁘다. 그리고 어제 일이 더 미안해진다. 어떡하지.
"어제 많이 놀랐지?"
"...."
이럴때는 정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단말이지.
"너무 신경 쓰지마. 앞으로 니 말대로 좋은 사람 만나보려고. 응원해줄래?"
"...."
마음을 정리한건가? 미안해서 대답을 못하겠다.
"나 괜찮아. 정말이야. 전처럼 편하게 해."
애써 나를 보며 웃어준다. 예쁘고, 고맙고, 미안하다. 순간 꼭 껴안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래서도 안된다.
"네."
.
.
.
.
수업은 내 마음에도 들었다. 계속 듣기로 했다. 수업과 관련해서 뭔가 신혜를 도울 일이라도 생기면 꼭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수업을 마치고 함께 강의실을 빠져 나가는데, 수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기다린게 아니니, 신혜를 기다렸을테지.
우선은 나를 보며 놀란다.
"너도 이거 받아?"
"그러려구요."
"이자식, 신혜 스토킹하는거 아냐?"
뭐야 이 재미없는 농담은. 수지 속은 항상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신혜와 같이 수업을 받는다는게 신경쓰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머리 진짜 했네?"
신혜를 보더니, 머리를 만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신혜는 수지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나도 저 머리 만져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네. 문재수 너 오늘 짐꾼좀 하자. 이따 6시에 여기서 다시 봐"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라면 해야지. 말을 들어보니, 다음주면 신혜가 정식으로 이사를 할테니, 거기에 맞춰 냄비며, 그릇 따위를 간단하게 사러 가는 것이라 한다.
"오늘은 좀 편하겠다. 그치?"
"뭐 언제는 힘들었어?"
"그럼. 그때 너랑 나랑 둘이 들고가면서 얼마나 힘들었냐?"
아무래도 수지가 원룸 들어갈때도 둘이서 장을 봤던 모양이다. 어쨌든, 짐꾼 하면 밥은 먹여주겠지 뭐. 식비 굳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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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에 그렇게 장을 보고 수지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수지와 신혜는 저녁 준비를 하는데, 신혜가 좀 놀랄만한 소식을 전했다.
"나 내일 소개팅 하기로 했어"
"웬일로? 너 그런거 무조건 거절했잖아."
"한번 해보려고. 너네 사이에서 불편하게 하는것도 그만해야지."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해? 불편하게 하는게 있으면, 저 찐따지. 우리가 하루 이틀 된 사이야? 응?"
최수지, 나쁜년. 하루라도 나한테 좋은 말을 안해준다. 늘상 갈구기만 하고.
"나, 몰래 구경하면 안돼? 어차피 나 내일 오후에 수업 없는데."
내일 오후에 나도 수업 없는데, 나까지 끌고가진 않겠지, 최수지? 난 안보고싶어.
"그럴래?"
어쨌든, 수지와 나 사이를 생각하면 다행이다. 수지한테 말은 안했지만, 그간에 내가 신혜에게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들이 수지한테는 미안할만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한편으로 아쉽다. 그리고 어떤 놈이지 소개팅 상대라는 사람 참 부럽다. 언젠가 과 동기들이 단체로 미팅 나갔다가 결국 지들끼리 술만 퍼마시고 왔다고 한탄하던 걸 생각해보면 소개팅에서 신혜같은 여자를 만나기가 쉬운일은 아닐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역시 내 마음은, 아쉽다. 아쉬워 하는 내 모습을 스스로 생각하니, 나도 참 나쁜놈이다. 수지처럼 과분한 여자와 함께 있으면서도 신혜를 아쉬워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도둑놈이다. 주제를 알자. 문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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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수업에 들어가니 역시 최수지가 내 스케쥴을 확인한다. 그리고 예상했던 그 말을 꺼낸다.
"같이 보러가자."
"제가 그거 봐서 뭐해요?"
"왜? 안궁금해?"
"네."
"너이새끼 속쓰려서 그렇지?"
정답! 역시 눈치 백단 최수지님이십니다 라며 박수를 치고 싶지만, 쳐맞을게 뻔하다.
"무슨말이에요, 그게. 나는 누나 밖에 없는거 몰라요?"
당장에 100%는 아니지만, 75%정도는 진심이다. 그리고 내 목표는 100% 진심이 되는거다.
"뻥치시네. 그리고 너 신혜 좋아하잖아? 그치?"
"왜자꾸 말도 안되는걸 물어요?"
"놀구있네. 내가 너 속쓰린거 모를까봐?"
하긴, 이렇게 농담처럼 말하지만 수지 눈치면 웬만큼 보일거다. 알면서도 모르는척을 해야하는 것도 있었을테고. 내 속을 이만큼 알면, 신혜 심경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나역시 최수지 당신이 어느정도 감을 잡고 있다는걸 알고 있다. 원인은 스스로 제공했지만, 어쨌든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겠다 최수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요."
내가 수지를 대하면서 이렇게 정색 해본적이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래야 한다. 수지는 아주 잠깐 의외라는 표정과 내 속을 아는지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이 드러난다. 하지만, 곧바로 내 볼태기를 쥔다.
"죽을래? 어디서 성질이야? 잘하면 나 치겠다? 그러냐? 응?"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수지가 나를 이렇게 갈구며 짓는 즐거운 표정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하지만, 난 그 소개팅인지 뭐지 보러가기 싫단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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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도왔다. 과제가 엄청나다. 오늘 안으로 가닥을 잡아놔야 기한 내에 마칠 수 있을것 같다. 과제 핑계를 대고 수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만 빠질줄 알았는데, 수지도 시간이 빠듯하겠다며 신혜의 소개팅 염탐을 포기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정문 밖으로 가는데, 저만치에 신혜가 보인다. 어제는 후드티에 트레이닝 저지까지 걸치고 있어서 그냥 귀엽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오늘은 또 다르다.
빨간색과 흰색의 스프라이프 원피스. 마린룩이라고 하나? 그런 스타일의 복장과 짧은 커트머리가 인형처럼 예쁘고 귀엽다. 그 순간의 솔직한 심경으로 수지보다 훨씬 예뻤다.
"수업 끝났어?"
신혜가 먼저 인사를 건낸다.
신혜는 우리를 보고, 그러니까 수지를 보고나서 나를 보고 살짝 웃는다. 담담해진 신혜를 보니 이렇게 나와는 남이 되는구나 싶다.
"우리 못가겠다, 숙제때문에. 저녁 먹고 올거야?"
"응 그럴거 같아. 이따 봐"
신혜와 그렇게 헤어지고 수지의 원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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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의 원룸. 시간이 빠듯할 그 과제물 덕분에 가기 싫은 염탐을 안갔지만, 막상 그놈의 과제를 하겠다고 잔뜩 이 책 저 책 늘어놓고서, 수지는 딴얘기를 꺼낸다.
"신혜 완전 이쁘지?"
정말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 막 심장이 멈추는줄 알았어.
"네"
하지만 난 무심한듯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시원하냐, 문재수?"
"네"
"빵치시네. 배아파 죽겠지?"
"왜 또 그래요?"
"뭘 왜 그래요야, 왜 그래요는. 너랑 신혜도 말하자면 그렇고 그런 사이였잖아?"
농담 섞인 말투지만 이럴때 생각 없이 대답하다가는 맞을수도 있지. 근데, 니 얼굴 보면서 거짓말하기 싫다.
"뭐 그런거 없지는 않은데, 솔직히 시원한게 더 커요."
"왜?"
"몰라서 물어요? 저 임자 있어요."
"누구?"
이년이 진짜. 자꾸 정떨어지는 소리만 해대는거야 왜?
"있어요. 성격 더러운 여자."
한대 맞을줄 알았는데, 역시나 한대 맞는다. 입술로. 수지는 내 볼에 살짝 뽀뽀를 해줬다.
"욕먹는거 좋아해요? 몰랐네. 은근히 변태였구나?"
"너만 할까봐? 너 나한테 맞으면 막 좋아하잖아?"
하긴. 최수지의 갈굼도, 약간의 폭력도 나한테는 삶의 활력소가 되어버린것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나저나 걱정이네. 신혜 잘 하려나. 넌 걱정 안되냐?"
"걱정할거 뭐있어요? 누나가 좋으면 잘되겠죠. 남자가 싫다고 하겠어요?"
"신혜 남자랑 말도 잘 못한단말야. 엄청 불편해 하거든"
"저번에 여기서 처음 봤을때는 잘하던데요?"
"니가 몰라서 그래. 걔도 엄청 긴장했었는데, 나 때문에 억지로 그런거야."
그때 생각을 하니 우습다. 지금 보면 누나같다는 생각은 전혀 안들고 한참 동생같고, 귀여운 여자다. 근데, 그때는 내가 쫄았었다.
"잘 되겠죠."
"야, 신혜가 이쁘냐, 내가 이쁘냐?"
"누나가요."
"이새끼야, 어떤 누나가 더 이쁘냐고?"
"아, 거참.. 숙제나 빨리 해요 좀."
내 핀잔에 수지는 투덜대며 숙제로 신경을 돌린다. 근데, 그게 조금도 오래 가지를 못한다.
"그냥 가볼걸 그랬나? 이거 손에 잡히지도 않네."
거참 더럽게 산만하네, 최수지.
"솔직히 나는 불안하다. 소개팅은 조금 이르지 않나 싶기도 하고."
"전에도 남자 사겼다면서요?"
"그때는 그냥 다 잘 될줄 알고 만난거였어."
솔직히 나는 내가 직접 본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나는 그런거 전혀 못느꼈는데?
"저한테는 처음부터 어려워하는거 없었잖아요."
"너한테만 그런거야 그거."
뭐지? 왜 나한테만? 내가 만만해서? 처음에 조금 사납게 대했던게 나한테 먹혀서? 그게 다는 아닐것 같은데.
"그런거 있잖아. 여자친구 없는 남자보다는 있는 남자가 그냥 편하게 대화하기는 부담 없는거."
대충 이해가 된다. 상대방이 나를 그냥 무심하게 대한다면, 나도 그렇게 대할 수 있겠지.
"근데, 그거 알아? 그게 계속되면 정말 편해져서 가까워질수도 있어. 자기 의지하고는 다르게 어느순간 좋아하고 있다거나."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신혜도 나한테 그런거 느꼈나?
"근데, 왜 울렸어 이새끼야?"
갑자기 수지의 말투가 공격적이다. 알고 있었구나, 어제일.
"나 때문에 그랬어?"
아주 다 알고 있구만, 근데 왜 물어봐? 더이상 다그치지도 않는다. 이미 다 이해한다는 그 표정. 그말투. 신혜 성격에 먼저 말 꺼내지는 않았을거 같고, 최수지 눈치센서가 작동한거 같은데. 역시 무서워.
"나는 있잖아. 정말 내가 신혜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나만 행복해지는게 너무 미안했었어."
그래 너 마음고생한거 나도 알아. 이제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그리고, 신혜가 조금 달라진게 너무 고마워. 신혜한테도 너한테도. 나 무슨생각까지 한 줄 알아?"
"?"
"신혜가 너 좋아하는거 같다고 느꼈을때, 다행이라고 생각 했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신혜가 너보다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안들거든. 너라면 신혜 잘 보듬어 줄 수 있으니까."
"누나는요? 그리고 나는?"
"너도 마음에 신혜 조금은 두고 있잖아. 보면 알아. 자꾸 마음 쓰는거. 그거 나한테 미안해 하지마."
침착하게, 그리고 무덤덤하게 그런 얘기를 잘도 한다.
"둘 다 나한테는 너무 고마운 사람이고, 너무 미안한 사람이야."
"...."
"전에 니가 말했지? 나만 외톨이 되면 어쩔거냐고."
"...."
"니가 그럴 수 있을거 같아? 신혜가 그럴 수 있을거 같고?"
그렇지. 나나 신혜나 그렇게는 못할거다.
"그걸 뻔히 아니까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알아? 너도 신혜 좋아하고, 신혜도 너 좋아하는데, 괜히 사정도 모르는 사람이 신혜 또 상처 주는거 보다는 그냥 우리끼리 서로 보듬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겠지만, 신혜 상처 완전히 아물때 까지라도 당장에는 그게 최선이 아닐가 하는 ..."
수지가 뭔가 무난한 이야기처럼 엄청난 소리를 해댄다. 그게 가능할까? 수지 말을 듣고 있으면 가능할 것도 같다. 그러면 나한테야 천국이지. 하지만, 이미 신혜는 떠났다. 아쉽기도 하지만, 그냥 신혜가 잘 됐으면 좋겠다.
"이새끼야 침닦아."
"안흘렸거든요? 누굴 진짜 변태로 아나?"
"너 변태 맞잖아, 아니야?"
뭐,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자꾸 누나가 나 변태로 만드는거 같은데요? 누나도 변태같고."
"죽을래?"
언제나 이 한마디면 상황이 정리된다.
"누나를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정말 그게 괜찮을거 같아요?"
"응. 너네 둘 다 정말 좋아하니까"
정말 모르겠다. 이여자. 내가 최수지 당신이었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잘 될거에요. 우리도. 신혜 누나도. 너무 걱정하지 마요."
수지가 살짝 웃는다. 나 이래뵈도 당신 남자야. 좀 믿음이 가나?
"뭘봐. 더럽게?"
보면 보는거지, 더럽게 보는건 또 뭐야? 내가 더러워?
"어디가 어떻게 더러운데요?"
일부러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닥쳐"
뭔가 기세가 꺾인 한마디다. 거기에 시선까지 피하면서. 이럴때 보면 당신도 정말 귀엽단말이지.
"사랑해요."
"징그러워 병신아"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해본건 처음인거 같은데, 거기에 돌아오는 대답이 병신이라니. 당신은 역시 쉽지 않은 여자야.
점심을 먹고나서 수업에 들어가보니, 아직 시간이 20분쯤 남아서인지, 사람이 몇 명 없다. 할짓이 마땅치 않아 가방을 열고 아무 책이나 좀 볼까 싶었는데, 보약이 한팩 들어있다. 언젠가 술먹고 다니면 몸관리도 해야 한다며 할아버지께서 특별히 어머니한테 당부하셨던 그 약이다. 갑자기 날려버린 오전수업에 대해 심한 죄책감이 든다. 등록금도 만만찮은데, 수업이라도 똑바로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날려버린 오전 수업을 정리해 놓은 수지의 노트가 마침 가방에 함께 있다. 이럴때 보면 수지는 역시 참 고마운 사람이다. 나같은 놈한테는 과분하기 이를데가 없다.
노트를 보고 있는데, 누가 교단으로 성큼 성큼 오르더니 칠판에 글씨를 쓴다. "금일OOOO 수업 휴강".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등록금은 지들 맘대로 쳐 올리면서 이따위로 수업 날려먹고. 첫날이면 최소한 교수가 자기 인사는 하고, 앞으로 수업 어떻게 할건지는 설명을 해줘야 할거 아니냐.
얼마전에 수업료 인상에 반대한다면서 학생회에서 시위하던데, 걔들도 한심하다. 학교측에서는 물가 인상에 맞춰서 등록금 올린다고 하는데, 무조건 올리지 말라는게 말이돼나? 요구를 할거면, 그 많은 등록금 다 어디다 썼는지 내역이나 공개하라고 해봐라. 내가 장담하는데, 중간에 삥땅친돈이 어마어마 할거다. 돈내는건 우리니까 그거 요구할 권리쯤은 있지 않나? 등록금 사용내역 공개하면, 당연히 삥땅 덜 칠거고, 등록금은 자연스럽게 내려갈텐데, 왜 그생각을 못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지금 화가 난다. 이따위 수업 안들을테다. 아직 수업 변경도 가능하다. 강의실에서 나와 무턱대고 다른 강의실에 들어가본다. 수업 전이긴 한데, 사람이 반쯤 차있다. 뒷자리에서 멍때리고 있는 남자가 있어, 말을 건낸다.
"이거 무슨 수업이에요?"
"철학수업인데요? OOO 교수님 수업이요."
"첫날이죠?"
"네."
철학? 뭐 한번 받아볼까 싶다. 괜찮다 싶으면 아예 수업을 옮겨야겠다. 어디 앉을까 둘러보는데, 창가에 볕 좋은 자리가 하나 있다. 창 바로 옆에는 누가 엎드려 자고 있지만, 3인용 책상이니 한칸 건너 앉으면 서로 불편할 일도 없고, 자리도 좋아보여 그곳에 앉는다.
점심 먹고나서 수업 시작 전까지 잠깐 자는거 좋지.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반팔 후드티의 후드를 뒤집어 쓴 채 트레이닝 저지까지 덮고 자는 폼이 아주 자려고 준비를 해 온 사람 같다. 여자겠지 싶다. 살 타는거 싫어서 그렇게 철저하게 자외선을 차단하는걸 보니.
"쿵"
강의실 뒷문을 누가 생각없이 세게 닫은 모양이다. 다들 뒤로 돌아 째려본다. 그놈도 미안했는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원위치 시키는데, 옆사람이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나를 의식했는지 쳐다본다. 아는 사람이다. 신혜였다. 많이 놀랐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후드를 내리고 머리를 매만지며 시선을 피한다.
"이거 일반선택인데, 이거 받아?"
"원래 이거 아닌데, 교수가 안와서 그냥 수업 바꾸려고요. 누나 이 수업 받아요?"
"응. 교수님이 수업 잘한다고 해서"
문득, 수지와 강의실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학생도 많은 학교에서 쉽지 않은 우연인데.
"근데, 누나 머리..."
신혜의 모습이 어제와 많이 다르다. 예쁘던 단발머리가 많이 짧아졌다. 커트머리가 유행도 아닐텐데. 근데, 전보다 만배는 귀여워진거같다.
"음. 그냥. 단발 좀 지겨워서."
"잘 어울려요."
이렇게 대화를 이어가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신기하다. 막상 마주보면 어제일 때문에 한마디도 못할줄 알았는데. 물론, 신혜가 대화를 이어주는게 가장 큰 요인이기는 하다.
잘 어울린다는 말에 신혜가 살짝 애잔하게 웃는 옆모습이 보인다. 예쁘다. 그리고 어제 일이 더 미안해진다. 어떡하지.
"어제 많이 놀랐지?"
"...."
이럴때는 정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단말이지.
"너무 신경 쓰지마. 앞으로 니 말대로 좋은 사람 만나보려고. 응원해줄래?"
"...."
마음을 정리한건가? 미안해서 대답을 못하겠다.
"나 괜찮아. 정말이야. 전처럼 편하게 해."
애써 나를 보며 웃어준다. 예쁘고, 고맙고, 미안하다. 순간 꼭 껴안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래서도 안된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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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은 내 마음에도 들었다. 계속 듣기로 했다. 수업과 관련해서 뭔가 신혜를 도울 일이라도 생기면 꼭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수업을 마치고 함께 강의실을 빠져 나가는데, 수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기다린게 아니니, 신혜를 기다렸을테지.
우선은 나를 보며 놀란다.
"너도 이거 받아?"
"그러려구요."
"이자식, 신혜 스토킹하는거 아냐?"
뭐야 이 재미없는 농담은. 수지 속은 항상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신혜와 같이 수업을 받는다는게 신경쓰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머리 진짜 했네?"
신혜를 보더니, 머리를 만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신혜는 수지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나도 저 머리 만져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네. 문재수 너 오늘 짐꾼좀 하자. 이따 6시에 여기서 다시 봐"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라면 해야지. 말을 들어보니, 다음주면 신혜가 정식으로 이사를 할테니, 거기에 맞춰 냄비며, 그릇 따위를 간단하게 사러 가는 것이라 한다.
"오늘은 좀 편하겠다. 그치?"
"뭐 언제는 힘들었어?"
"그럼. 그때 너랑 나랑 둘이 들고가면서 얼마나 힘들었냐?"
아무래도 수지가 원룸 들어갈때도 둘이서 장을 봤던 모양이다. 어쨌든, 짐꾼 하면 밥은 먹여주겠지 뭐. 식비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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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에 그렇게 장을 보고 수지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수지와 신혜는 저녁 준비를 하는데, 신혜가 좀 놀랄만한 소식을 전했다.
"나 내일 소개팅 하기로 했어"
"웬일로? 너 그런거 무조건 거절했잖아."
"한번 해보려고. 너네 사이에서 불편하게 하는것도 그만해야지."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해? 불편하게 하는게 있으면, 저 찐따지. 우리가 하루 이틀 된 사이야? 응?"
최수지, 나쁜년. 하루라도 나한테 좋은 말을 안해준다. 늘상 갈구기만 하고.
"나, 몰래 구경하면 안돼? 어차피 나 내일 오후에 수업 없는데."
내일 오후에 나도 수업 없는데, 나까지 끌고가진 않겠지, 최수지? 난 안보고싶어.
"그럴래?"
어쨌든, 수지와 나 사이를 생각하면 다행이다. 수지한테 말은 안했지만, 그간에 내가 신혜에게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들이 수지한테는 미안할만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한편으로 아쉽다. 그리고 어떤 놈이지 소개팅 상대라는 사람 참 부럽다. 언젠가 과 동기들이 단체로 미팅 나갔다가 결국 지들끼리 술만 퍼마시고 왔다고 한탄하던 걸 생각해보면 소개팅에서 신혜같은 여자를 만나기가 쉬운일은 아닐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역시 내 마음은, 아쉽다. 아쉬워 하는 내 모습을 스스로 생각하니, 나도 참 나쁜놈이다. 수지처럼 과분한 여자와 함께 있으면서도 신혜를 아쉬워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도둑놈이다. 주제를 알자. 문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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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수업에 들어가니 역시 최수지가 내 스케쥴을 확인한다. 그리고 예상했던 그 말을 꺼낸다.
"같이 보러가자."
"제가 그거 봐서 뭐해요?"
"왜? 안궁금해?"
"네."
"너이새끼 속쓰려서 그렇지?"
정답! 역시 눈치 백단 최수지님이십니다 라며 박수를 치고 싶지만, 쳐맞을게 뻔하다.
"무슨말이에요, 그게. 나는 누나 밖에 없는거 몰라요?"
당장에 100%는 아니지만, 75%정도는 진심이다. 그리고 내 목표는 100% 진심이 되는거다.
"뻥치시네. 그리고 너 신혜 좋아하잖아? 그치?"
"왜자꾸 말도 안되는걸 물어요?"
"놀구있네. 내가 너 속쓰린거 모를까봐?"
하긴, 이렇게 농담처럼 말하지만 수지 눈치면 웬만큼 보일거다. 알면서도 모르는척을 해야하는 것도 있었을테고. 내 속을 이만큼 알면, 신혜 심경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나역시 최수지 당신이 어느정도 감을 잡고 있다는걸 알고 있다. 원인은 스스로 제공했지만, 어쨌든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겠다 최수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요."
내가 수지를 대하면서 이렇게 정색 해본적이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래야 한다. 수지는 아주 잠깐 의외라는 표정과 내 속을 아는지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이 드러난다. 하지만, 곧바로 내 볼태기를 쥔다.
"죽을래? 어디서 성질이야? 잘하면 나 치겠다? 그러냐? 응?"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수지가 나를 이렇게 갈구며 짓는 즐거운 표정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하지만, 난 그 소개팅인지 뭐지 보러가기 싫단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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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도왔다. 과제가 엄청나다. 오늘 안으로 가닥을 잡아놔야 기한 내에 마칠 수 있을것 같다. 과제 핑계를 대고 수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만 빠질줄 알았는데, 수지도 시간이 빠듯하겠다며 신혜의 소개팅 염탐을 포기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정문 밖으로 가는데, 저만치에 신혜가 보인다. 어제는 후드티에 트레이닝 저지까지 걸치고 있어서 그냥 귀엽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오늘은 또 다르다.
빨간색과 흰색의 스프라이프 원피스. 마린룩이라고 하나? 그런 스타일의 복장과 짧은 커트머리가 인형처럼 예쁘고 귀엽다. 그 순간의 솔직한 심경으로 수지보다 훨씬 예뻤다.
"수업 끝났어?"
신혜가 먼저 인사를 건낸다.
신혜는 우리를 보고, 그러니까 수지를 보고나서 나를 보고 살짝 웃는다. 담담해진 신혜를 보니 이렇게 나와는 남이 되는구나 싶다.
"우리 못가겠다, 숙제때문에. 저녁 먹고 올거야?"
"응 그럴거 같아. 이따 봐"
신혜와 그렇게 헤어지고 수지의 원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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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의 원룸. 시간이 빠듯할 그 과제물 덕분에 가기 싫은 염탐을 안갔지만, 막상 그놈의 과제를 하겠다고 잔뜩 이 책 저 책 늘어놓고서, 수지는 딴얘기를 꺼낸다.
"신혜 완전 이쁘지?"
정말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 막 심장이 멈추는줄 알았어.
"네"
하지만 난 무심한듯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시원하냐, 문재수?"
"네"
"빵치시네. 배아파 죽겠지?"
"왜 또 그래요?"
"뭘 왜 그래요야, 왜 그래요는. 너랑 신혜도 말하자면 그렇고 그런 사이였잖아?"
농담 섞인 말투지만 이럴때 생각 없이 대답하다가는 맞을수도 있지. 근데, 니 얼굴 보면서 거짓말하기 싫다.
"뭐 그런거 없지는 않은데, 솔직히 시원한게 더 커요."
"왜?"
"몰라서 물어요? 저 임자 있어요."
"누구?"
이년이 진짜. 자꾸 정떨어지는 소리만 해대는거야 왜?
"있어요. 성격 더러운 여자."
한대 맞을줄 알았는데, 역시나 한대 맞는다. 입술로. 수지는 내 볼에 살짝 뽀뽀를 해줬다.
"욕먹는거 좋아해요? 몰랐네. 은근히 변태였구나?"
"너만 할까봐? 너 나한테 맞으면 막 좋아하잖아?"
하긴. 최수지의 갈굼도, 약간의 폭력도 나한테는 삶의 활력소가 되어버린것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나저나 걱정이네. 신혜 잘 하려나. 넌 걱정 안되냐?"
"걱정할거 뭐있어요? 누나가 좋으면 잘되겠죠. 남자가 싫다고 하겠어요?"
"신혜 남자랑 말도 잘 못한단말야. 엄청 불편해 하거든"
"저번에 여기서 처음 봤을때는 잘하던데요?"
"니가 몰라서 그래. 걔도 엄청 긴장했었는데, 나 때문에 억지로 그런거야."
그때 생각을 하니 우습다. 지금 보면 누나같다는 생각은 전혀 안들고 한참 동생같고, 귀여운 여자다. 근데, 그때는 내가 쫄았었다.
"잘 되겠죠."
"야, 신혜가 이쁘냐, 내가 이쁘냐?"
"누나가요."
"이새끼야, 어떤 누나가 더 이쁘냐고?"
"아, 거참.. 숙제나 빨리 해요 좀."
내 핀잔에 수지는 투덜대며 숙제로 신경을 돌린다. 근데, 그게 조금도 오래 가지를 못한다.
"그냥 가볼걸 그랬나? 이거 손에 잡히지도 않네."
거참 더럽게 산만하네, 최수지.
"솔직히 나는 불안하다. 소개팅은 조금 이르지 않나 싶기도 하고."
"전에도 남자 사겼다면서요?"
"그때는 그냥 다 잘 될줄 알고 만난거였어."
솔직히 나는 내가 직접 본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나는 그런거 전혀 못느꼈는데?
"저한테는 처음부터 어려워하는거 없었잖아요."
"너한테만 그런거야 그거."
뭐지? 왜 나한테만? 내가 만만해서? 처음에 조금 사납게 대했던게 나한테 먹혀서? 그게 다는 아닐것 같은데.
"그런거 있잖아. 여자친구 없는 남자보다는 있는 남자가 그냥 편하게 대화하기는 부담 없는거."
대충 이해가 된다. 상대방이 나를 그냥 무심하게 대한다면, 나도 그렇게 대할 수 있겠지.
"근데, 그거 알아? 그게 계속되면 정말 편해져서 가까워질수도 있어. 자기 의지하고는 다르게 어느순간 좋아하고 있다거나."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신혜도 나한테 그런거 느꼈나?
"근데, 왜 울렸어 이새끼야?"
갑자기 수지의 말투가 공격적이다. 알고 있었구나, 어제일.
"나 때문에 그랬어?"
아주 다 알고 있구만, 근데 왜 물어봐? 더이상 다그치지도 않는다. 이미 다 이해한다는 그 표정. 그말투. 신혜 성격에 먼저 말 꺼내지는 않았을거 같고, 최수지 눈치센서가 작동한거 같은데. 역시 무서워.
"나는 있잖아. 정말 내가 신혜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나만 행복해지는게 너무 미안했었어."
그래 너 마음고생한거 나도 알아. 이제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그리고, 신혜가 조금 달라진게 너무 고마워. 신혜한테도 너한테도. 나 무슨생각까지 한 줄 알아?"
"?"
"신혜가 너 좋아하는거 같다고 느꼈을때, 다행이라고 생각 했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신혜가 너보다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안들거든. 너라면 신혜 잘 보듬어 줄 수 있으니까."
"누나는요? 그리고 나는?"
"너도 마음에 신혜 조금은 두고 있잖아. 보면 알아. 자꾸 마음 쓰는거. 그거 나한테 미안해 하지마."
침착하게, 그리고 무덤덤하게 그런 얘기를 잘도 한다.
"둘 다 나한테는 너무 고마운 사람이고, 너무 미안한 사람이야."
"...."
"전에 니가 말했지? 나만 외톨이 되면 어쩔거냐고."
"...."
"니가 그럴 수 있을거 같아? 신혜가 그럴 수 있을거 같고?"
그렇지. 나나 신혜나 그렇게는 못할거다.
"그걸 뻔히 아니까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알아? 너도 신혜 좋아하고, 신혜도 너 좋아하는데, 괜히 사정도 모르는 사람이 신혜 또 상처 주는거 보다는 그냥 우리끼리 서로 보듬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겠지만, 신혜 상처 완전히 아물때 까지라도 당장에는 그게 최선이 아닐가 하는 ..."
수지가 뭔가 무난한 이야기처럼 엄청난 소리를 해댄다. 그게 가능할까? 수지 말을 듣고 있으면 가능할 것도 같다. 그러면 나한테야 천국이지. 하지만, 이미 신혜는 떠났다. 아쉽기도 하지만, 그냥 신혜가 잘 됐으면 좋겠다.
"이새끼야 침닦아."
"안흘렸거든요? 누굴 진짜 변태로 아나?"
"너 변태 맞잖아, 아니야?"
뭐,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자꾸 누나가 나 변태로 만드는거 같은데요? 누나도 변태같고."
"죽을래?"
언제나 이 한마디면 상황이 정리된다.
"누나를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정말 그게 괜찮을거 같아요?"
"응. 너네 둘 다 정말 좋아하니까"
정말 모르겠다. 이여자. 내가 최수지 당신이었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잘 될거에요. 우리도. 신혜 누나도. 너무 걱정하지 마요."
수지가 살짝 웃는다. 나 이래뵈도 당신 남자야. 좀 믿음이 가나?
"뭘봐. 더럽게?"
보면 보는거지, 더럽게 보는건 또 뭐야? 내가 더러워?
"어디가 어떻게 더러운데요?"
일부러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닥쳐"
뭔가 기세가 꺾인 한마디다. 거기에 시선까지 피하면서. 이럴때 보면 당신도 정말 귀엽단말이지.
"사랑해요."
"징그러워 병신아"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해본건 처음인거 같은데, 거기에 돌아오는 대답이 병신이라니. 당신은 역시 쉽지 않은 여자야.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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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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