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2부 3장
“창의적 문제해결(creative problem solving) 과정은 다양한 모형을 통해서 개발될 수 있어요. 이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독자적 해결법을 만들어내는 정신과정이죠. 그러나 창의성만으로는 문제해결을 할 수 없어요. 창의성은 만들어진 것의 새로움이나 독창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가치나 지식에 적합한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에요. 창의성을 평가함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가치를 가지는 것이며, 그것은 명확하게 제시된 문제를 풀었는가, 혹은 상황이 더 나아진 것에 대해 다른 이에게 객관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죠. 만약 창의적 해결법이 널리 사용된다면 해결법은 ‘혁신(innovation)’이 될 수 있고, 또한 혁신을 위한 창조과정이 될 수 있어요. 이것이 새로운 물체, 물질, 과정, 소프트웨어나 시장적 가치가 있는 상품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로소 ‘발명(invention)’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겁니다.”
길고 장황한 PPT자료를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지도강사의 목소리가 교단 앞에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민혁은 비록 두 눈을 뜨고 있긴 했지만 그 PPT에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고, 계속해서 귓가로 날아오는 강사의 목소리에도 별 흥미가 가질 않았다.
‘지루해.’
민혁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고 난해한 내용을, 더 복잡한 언어로 설명할 바엔 왜 굳이 가르침이 필요한 걸까? 가르침이라는 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전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 텐데.
민혁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지겨운 설명을 듣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새삼 그는 이 캠프에 온 것이 후회되었다. 아빠가 원해서 오게 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유익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극히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민혁은 생각했다.
‘흠, 그래도 한 명은 있구나.’
매사에 있어 관찰하고 살펴보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민혁의 그 기질이 다시 한 번 발동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유익하지 못한 설명을 계속해서 들을 바엔, 차라리 학생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살피고 관찰하는 것이 더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뭔가 흥미를 가질 거리가 없나 살피던 민혁의 눈에, 아주 특이한 여학생 하나가 포착되었다. 그 ‘특이함’이란 순전히 아주 사소한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꾸벅꾸벅 졸기 일쑤인 대다수 학생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 여학생 한 명만이 유일하게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네. 저 지루한 설명이 재미있는 걸까?’
민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여학생의 모습을 더욱 면밀히 주시했다. 하지만 몇 분 동안 그 여학생의 모습이나 반응을 살펴본 후에, 민혁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여학생은 결코 그 설명을 재미있게 여겨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입가에 맺힌 아주 희미한 냉소와, 지극히 시큰둥한 표정 때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교육내용을 흥미로이 여기고 있는 학생의 태도는 아니었다. 비록 별 생각 없이 호기심을 갖게 되긴 했지만, 민혁은 왠지 그 여학생에게서 더욱 관찰할 요소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시니컬한 얼굴을 하고서 강당 앞의 PPT자료를 바라보고 있는 그 여학생에게서는, 민혁이 또래 여자애들에게선 좀체 느낄 수 없었던 냉소적인 태도가 한껏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어린아이에게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바로 그 이질성이 민혁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뭐야, 너 쟤가 맘에 들어?”
민혁의 친구인 용수가 옆자리에서 물었다. 민혁은 어느 것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겉으로 티가 나는 편이기에, 뚫어져라 여학생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용수도 알아챈 것 같았다. 어쩌면 민혁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붙어 다닌 친구이기 때문에 좀 더 쉽게 그를 파악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니, 처음 보는 애야.”
“어? 너 쟤 몰라? 쟤 유명한 앤데.”
“유명?”
“쟤가 경시대회에만 나가면 항상 만점 받아온다는 그 애잖아. 대회만 나갔다 하면 한 번도 문제를 틀린 적이 없대. 어디 학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학교 선생님들도 저 애 이름은 다 알더라.”
“그래? 넌 어떻게 그런걸 아는 거야?”
“캠프나 영재교육 프로그램에 자주 오다보면 싫어도 쟤 이름을 들을 수밖에 없어.”
용수는 민혁과는 다르게, 이런 캠프를 비롯한 각종 교육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었다. 사실 용수 본인이 적극적이었다기보다는, 그의 부모님이 그만큼 교육열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학교에서 용수가 자신이 다녀온 프로그램에 또래 아이들 중 유명한 천재가 하나 있었다며 한 번씩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는데, 아마도 그게 저 여학생의 이야기였나 보다.
민혁은 머리가 비상하고 남달랐지만 친구인 용수처럼 각종 대회나 행사에 선뜻 참여하곤 했던 편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민혁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과학에 관심이 많긴 했지만 그것은 사물의 구조나 운동 원리 등을 탐구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 딱딱한 ‘과학’이라는 과목 자체에 흥미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서연은 민혁에게, 성인이 되고 나면 ‘공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원하는 분야의 학문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민혁은 엄마의 말을 믿었고, 지금 그가 겪고 배우는 이러한 과목이나 지식들은 그저 그것을 위한 준비단계 쯤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민혁은 용수가 계속해서 천재라고 추켜세우는 그 이름 모를 여학생의 지식수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경쟁할 사이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때? 관심 있으면 가서 말이나 한 번 붙여볼래?”
“무슨 말이야? 처음 보는 애라니까 관심은 무슨?”
“말은 그렇게 하면서 쟤한테 눈을 못 떼고 있잖아.”
아무래도 용수는, 민혁이 그 여학생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를 다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용수는 원래부터 소위 ‘남녀문제’라는 것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민혁은 스스로가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용수는 유난히도 이성에 대해, 정확히는 여자애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또 그만큼 여학생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무던히 애를 쓰곤 했다.
“참 나, 혁이가 너 같은 앤 줄 알아? 혁이는 그런 거에 관심 없어. 그치, 혁아?”
이번엔 옆에서 정아가 끼어들었다. 민혁의 오른쪽엔 용수가, 왼쪽엔 정아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 또한 아까부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던 것 같았다. 민혁의 학교에서 참가한 학생은 민혁을 포함하여 용수와 정아 셋뿐이었기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모여 앉게 되었다.
정아는 평소에도 민혁의 문제에 대해 곧잘 끼어들어 입을 열곤 하는 편이었다. 특히 이렇게 용수가 여자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엔 더더욱 그랬다. 용수는 그런 정아를 심심찮게 놀려대곤 했었다. 밸런타인데이에 정아가 민혁에게 손수 만든 초콜릿을 주었을 때엔, 그녀를 일주일 내내 놀려먹어 울렸던 적도 있었다.
그 후로도 용수는 이따금씩 정아가 민혁을 좋아한다며 짓궂게 장난을 쳐대곤 했지만 정아가 무덤덤하게 대응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다소 시들해진 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아는 용수가 민혁에게 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이렇게 끼어들어 용수를 구박하거나 핀잔을 주곤 했다.
“어, 뭐…… 그렇지.”
민혁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정아가 어쨌건, 저 여학생이 어쨌건, 그런 문제들을 떠나서 민혁은 자신이 이성문제에 관심을 갖기엔 아직 이른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민혁은 문득 머릿속으로 엄마와 아빠에 대해 떠올렸다.
거의 매일 밤, 혹은 매일 아침…… 격정적인 모습으로 뜨겁게 몸을 섞곤 하는 엄마와 아빠. 이성관계라는 것에 종착점이 있다면 아마도 엄마와 아빠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할 것이리라. 만약 그렇다면, 민혁은 더더욱 자신이 아직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나이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에게 있어 그런 감정은 아직 머나먼 미래의, 어른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긴 뭐가 그래? 우리도 충분히 여자애들한테 관심 가질 나이가 됐다고. 정아 너도 그렇게 말하면서 혁이가 좋으니까 자꾸 참견하는 거 아니야?”
“시끄러워. 얘기가 왜 그쪽으로 새는 거야?”
용수와 정아가 가운데 자리에 앉은 민혁을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과학 캠프에 와서 왜 갑자기 이런 주제로 대화가 이어지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지만, 민혁은 적어도 저 무익한 강사의 설명보다는 더 흥미 있는 주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아까의 그 여학생에게로 향해 있었다.
어느 학교의 학생일까? 민혁은 문득 그런 호기심이 들었다. 캠프에는 여러 곳의 학교에서 온 우등생들이 한데 모여 있었기 때문에 사방이 모르는 얼굴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왠지 그 여학생의 처음 보는 얼굴은, 민혁의 머릿속에 아주 묘한 인상을 남겼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다.”
어느새 정아와 말다툼이 끝났는지, 용수가 곁에서 또 재잘대며 입을 열었다.
“저 여자애랑 민혁이 중에 누가 더 똑똑할까?”
“뭐? 무슨 말이야.”
난데없는 비교에 민혁이 되물었다.
“아니, 사실 민혁이 넌 대회나 시험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머리는 우리 중에 제일 좋잖아. 저 여자애도 천재라고 소문이 나있지만 내가 보기엔 민혁이 너도 천재니까. 둘 중에 누가 더 똑똑할까, 그냥 좀 궁금해서. 하하.”
“야,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혁이가 더 똑똑하지. 너 저번에 영재과학기술대회에서 혁이가 만든 로봇 못 봤어? 그리고 국립연구원 학생부 시험에서도 1등한 거 몰라? 혁이는 그냥 천재가 아니라 초천재야. 그리고 또……”
“알았어, 알았어. 그만 해. 저 계집애 저거 또 지랄 시작이네. 네가 무슨 민혁이 비서야? 최민혁 백과사전이라도 돼?”
“그게 아니라 네가……”
잠깐 휴전했나 싶더니 또 싸우기 시작하는 두 사람이다. 왜 이 둘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원……. 근본적인 이유가 민혁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도통 깨닫지 못한 채 그는 여전히 그 여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학생의 얼굴은 마치 표정이 고정되어 있는 듯, 아까 전과 다를 바 없이 무척 냉소적이었고 한편으로는 꽤 삭막해보였다.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두 눈동자가 꾸준히 PPT자료를 향해 있긴 했지만, 그녀는 입가에 빈정거리는 것 같은 조소를 한번씩 띄우곤 했다.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일까? 민혁은 문득 궁금해졌다.
*
강의가 이어지고 나서는 무슨 시험 비슷한 것을 보았다. 민혁은 시험이라는 것 자체를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총체적인 지식이나 능력을, 다른 누군가가 출제한 문제를 통해서 점수로 평가받는다는 것이 썩 합리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민혁은 학교에서 1등의 자리를 놓쳐본 적은 없었다. 그가 시험이나 성적 따위에 별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우등생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아빠나 엄마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구태여 어긋나게 굴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험이란 일종의 숙제와 비슷했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잘해둔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는 것. 따라서 이 시험도 그러한 개념의 연장이라 생각했다. 기왕 마음을 내서 참가한 것이니 좋은 결과를 갖고 돌아가면 아빠, 엄마도 흡족해 하겠지.
“혁아, 잘 본 것 같아? 나는 뒷면의 문제들은 손도 못 대겠더라.”
정아가 칭얼거리며 민혁에게 말을 걸었다. 민혁은 시험지를 걷어간 강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지막의 서술형 문제들을 풀 때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이 나이 무렵의 아이들에게 서술형이라는 형태는 워낙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민혁의 경우엔 엄밀히 말하면 생소하다기보다는 번거로운 형태였다.
아마 내키기만 했다면 좀 더 길게 답을 쓸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민혁은 도중에 펜을 놓아버린 것을 그다지 후회하진 않았다. 그 정도만 써도 그럭저럭 괜찮은 점수를 받을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프로그램 끝나기 전에 시험 점수를 강당에 공지할거래. 도대체 왜 시험 점수 따위를 공개하지 못해서 안달인 거지? 꼴찌 부근에 이름이 있으면 얼마나 쪽팔릴까.”
용수는 불만에 가득 차 내내 툴툴거렸다. 구태여 시험 점수를 등수 별로 나누어 공개된 장소에 게시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민혁도 그러한 방침이 썩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점수가 궁금하기도 했다.
서술형을 대강 적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문제들은 모두 맞힌 것 같은데, 그런대로 괜찮은 등수가 나오지 않을까? 민혁은 결코 자만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수준을 모를 만큼 지나치게 겸손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또래의 학생들 수준에서는 자신만큼 높은 점수를 획득한 아이가 몇 없을 거라고 그는 여겼다.
‘2등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당 벽면에 대문짝만하게 붙은 이름 목록에서 자신의 등수를 발견했을 때 민혁은 무척 애매한 기분을 느꼈다. 차라리 1등을 해버리거나, 혹은 아예 하위권으로 추락했다면 그럭저럭 납득이 되었을 텐데……. 그 ‘2등’이라는 숫자는 민혁에게 있어 지극히 모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죽도 밥도 아니라는 게 이런 느낌일까?
“말도 안 돼……. 혁이가 2등?”
“1등은 누군데?”
민혁 본인보다도 오히려 옆에서 정아와 용수가 더 부산스럽게 호들갑을 떨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민혁을 대신해서, 그의 이름 위에 위치하고 있는 단 하나의 이름을 읽었다. 용수나 정아에 비하면 크게 관심이 없었던 민혁이었지만, 그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덩달아 그 이름을 살펴보게 되었다.
‘1등 최미란, 100점. 2등 최민혁, 99점.’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그 벽보 위쪽에 적힌 두 이름을 나란히 읽었다. 성씨(姓氏)가 같기 때문일까, 왠지 낯설면서도 조금은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그 애네, 아까 봤던 그 여자애.”
“누구?”
“아까 얘기했던 그 천재라는 여자애 있잖아. 그 애 이름이 최미란이거든.”
용수가 감탄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목록을 꼼꼼하게 훑었다.
“진짜 대단하네, 100점이라면 하나도 안 틀렸다는 거잖아? 소문이 괜히 난 게 아니었어. 그 여자애가 진짜 천재 중의 초천재 아니야?”
“웃기지 마!”
정아가 바락 대들며 성질을 냈다.
“혁이가 문제를 대충 풀어서 그렇지 제대로 맘먹고 하면 충분히 100점 받을 수 있었어! 아니, 마음만 먹으면 그깟 여자애쯤은 상대도 안 될걸?”
“100점이 상대가 안 된다면 말이 안 되지…… 점수가 대등하면 모를까.”
“시끄러워!”
용수와 정아는 지치지도 않고 또 말다툼을 시작했다. 아마도 정아는 민혁이 1등자리를 빼앗긴 사태로 인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정작 민혁 본인은 그리 큰 충격을 느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다만 민혁은 아까 전에 비해 한층 더 그 여자아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었다.
‘대단하네. 그럼 서술형 문제에 대한 답을 완벽하게 썼다는 건데.’
사실 민혁으로서도 의욕적으로 마지막 문제에 대한 답을 썼다면 그 1점의 차이를 메울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다. 제대로 마음먹고 답을 썼더라도 점수가 바뀌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러한 가정을 떠나서, 민혁은 그 미란이라는 여학생에게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아빠가 이래서 캠프에 가보라고 했던 걸까? 그…… 속담 중에, 뭐라더라?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있기 때문에?’
내심 자신이 또래 아이들 중에서는 특출한 편이라는 생각을 줄곧 해왔던 민혁이었다. 그것은 자만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미란의 이름은 민혁에게 꽤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미란이라는 그 애, 학교는 어디 학교래?”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왜? 그건 왜 궁금해 하는데?”
정아가 민감하게 열을 올리며 캐묻자 민혁은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애매하게 고개를 돌리던 민혁의 눈에 문득 누군가가 들어왔다. 민혁의 시선을 느낀 용수도 따라서 그 곳을 보더니, 히죽 웃으며 민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마침 저기 있네.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봐.”
민혁의 시선이 물끄러미 강당 어느 한 구석에 머물렀다. 강당 벽에 붙은 이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그저 구석진 계단 끄트머리에 멍하니 앉아 무릎을 가만히 끌어안고 있는 한 여자아이의 모습이 민혁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까 보았던 그 냉소적인 분위기의 여학생이었다.
“가서 말 걸어봐.”
“말?”
“그래, 인사라도 하고. 학교가 어딘지도 물어보고. 전화번호까지 받으면 더 좋고.”
“야, 김용수. 넌 혁이한테 왜 이상한 걸 시키고 그래? 혁이는 그런 거에 관심 없다고 했지?”
“넌 좀 가만있어 봐. 한창 재미있을 순간에.”
민혁은 속으로 잠깐 고민했다. 말을 걸어보라고?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이름조차 몰랐던 사이에 무슨 말을 한단 말이지? 용수는 그게 무슨 로맨스의 시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민혁으로서는 선뜻 납득이 안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여학생에게 이런저런 것을 묻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민혁 스스로도 좀체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민혁은 의아했다.
이것이 정말 용수나 다른 아이들이 재미삼아 말하던,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긴다는 그런 느낌인가?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왠지 그렇게 쓸쓸히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보는 순간, 잊고 있었던 뭔가를 다시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캠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상대에게 아련함이라니? 아마 용수나 정아가 들으면 무슨 헛소리냐고 이상하게 여겼겠지…… .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혁은 그 미란이라는 아이로부터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처음 보는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좀체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느낌이었다.
“말 안 걸어봐?”
“…….”
하지만 결국 민혁은 그녀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으레 말하는 숫기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삭막한 기운이 그를 망설이게 했는지도 몰랐다.
분명 그 아이가 완전한 ‘타인’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에게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어떤 막연한 울타리가 둘러져 있는 느낌이었다. 메마른 눈빛도, 냉소적인 표정도 모두 그 폐쇄적인 벽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미란에 대한 민혁의 첫인상이었다.
*
‘그런데……, 이런 데서 보게 될 줄은.’
교육 프로그램이 끝나고 민혁은 용수, 정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버스가 길의 모퉁이를 돌아 한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민혁은 의도치 않게 또 그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미란이라는 이름의 그 아이는 길게 펼쳐진 인도를 얌전히 걷고 있었다.
“미사일이 더 무섭지! 맞으면 다 끝장인데.”
“멍청아, 방사능 피폭이 더 무서워.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지?”
용수와 정아는, 늘 그랬듯이 정말 쓸데없는 화제로 옆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열을 올리느라 민혁이 버스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민혁은 두 사람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창밖을 통해 미란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신호등이 바뀌었고, 버스가 출발했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는 너무도 손쉽게 앞서 가던 미란을 추월하여 달렸다.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저만치 멀어지는 미란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곳을 계속 바라보았다.
“너 뭐 봐?”
그제야 용수가 말다툼을 잠시 멈추고 물었다. 민혁은 대답했다.
“나 여기서 내릴게.”
“뭐?”
얼빠진 용수와 정아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지만 공교롭게도 그 순간 버스는 정류장에 멈춰 섰다. 민혁은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후다닥 달려, 열린 버스의 뒷문으로 잽싸게 뛰어내렸다. 그가 내리자마자 버스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 최민혁! 여기 너네 집 방향도 아니잖아!”
창문 너머로 친구들이 민혁을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
‘참 독특하게도 걷는구나.’
민혁은 자신이 왜 오늘 처음 본 여자아이의 뒤꽁무니를 미행하듯이 졸졸 쫓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그 이유를 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미란이라는 그 아이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싶은 호기심을 결국 이기지 못했다.
‘걷는 모습이 꼭 유령 같아. 정말 특이해.’
특이하기로 따지면 그 자신도 어릴 적부터 엄마의 속을 깨나 썩였을 정도로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민혁이었지만, 그런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미란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정말 특이해 보였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특이함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민혁은 마치 엄마의 뒤꽁무니를 쫄래쫄래 쫓아가는 아이처럼 미란의 뒤를 따라갔다. 미란은 여전히 초점이 없는 것 같은 두 눈으로 가끔씩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로 발을 움직이곤 했다. 마치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 동안을 쫓아갔을까. 미란은 웬 허름한 빌라가 세워져 있는 단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민혁이 처음 와보는 장소였다. 미란은 익숙한 걸음으로 줄지어 서 있는 빌라의 건물들 가운데 한 곳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러자 민혁은 그 순간 고민에 빠졌다.
‘돌아가야 하나?’
다시 생각해봐도 민혁은 미란의 집까지 그녀를 쫓아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물며 이대로 더 쫓아가봤자 대문 안까지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민혁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갈등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발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왕 여기까지 쫓아온 것, 여기서 돌아가면 아무 의미도 없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도 없이 민혁은 무작정 미란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이미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는 행동이었다.
‘어디로 갔지?’
그 빌라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요즘 세상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니……. 참 낡기도 낡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민혁은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벌써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걸까.’
꽤 깊은 허탈감이 엄습했다. 이래서야 쫓아온 의미가 없는데. 어쩌면 진즉에 용수 말대로 말을 걸었어야 했을까?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말을 걸어볼 수도 있겠지.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말이야……. 근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민혁은 또 혼란스러워졌다.
극심한 허무함으로 인해 민혁은 곧장 건물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그저 정처 없이 터덜터덜 계단을 계속 걸어 올라갔다. 어쩌면 미란을 뒤늦게나마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대로 건물 밖으로 나가기엔 지금까지 뒤를 쫓아온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게 여겨졌기 때문도 있었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다보니 민혁의 발은 어느새 옥상 문 앞까지 이르러 있었다.
‘에휴, 바람이나 좀 쐬다 가자.’
이유 모를 침울함에 휩싸인 민혁은 조심스럽게 옥상 문을 살짝 밀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고, 그 순간 민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문 너머에, 그가 쫓아왔던 여자아이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옥상으로 올라왔던 건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민혁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다소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황하는 민혁과는 달리 미란은 그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듯, 그저 옥상 모서리 부근의 난간에 앉아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자신이 두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풍경 그 이외의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보였다. 민혁이 생각하기에, 아마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왔더라도 그녀는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듯한, 극심한 폐쇄감이 그녀로부터 묻어나오고 있었다.
“너 뭐야?”
그렇기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을 때, 민혁은 오히려 움찔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천년이든 만년이든 내내 침묵하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짧고 차가운 그 한 마디는, 민혁이 미란에게서 처음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아……, 그게.”
조금은 창피하기도 했지만 민혁은 애써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답하려 노력했다.
“안녕? 나는 민혁이야……. 최민혁.”
서연은 언제나 아들의 그 또박또박한 목소리를 대견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얄미워했다. 아무리 혼이 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늘 목소리만큼은 또박또박 야무지게 대답하는 모습이 조금은 밉상처럼 보인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정도로 평소 똑 부러지는 민혁이었지만, 어쩐지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또박또박 대답하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미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심지어 고개를 돌려 민혁의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할 말이 없어진 민혁은 어설프게 서서 미란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지만 끝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민혁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음…… 미안해. 나는 그냥…… 너한테서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혹시 내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니?”
“…….”
여전히 미란은 묵묵부답이었다.
“저기, 네가 아까 시험에서 1등 했다는 거 알고 있어. 너 정말 대단하더라. 혹시 알고 있니? 네가 1등이고 내가 2등이었어.”
민혁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굉장히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그것은 분명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1등이니 2등이니 하는 것은 크게 중요치 않다. 같은 ‘과학’이라는 말로 뭉뚱그린다고 해도, 세부적으로는 용수가 물리학에 관심이 있고, 정아가 생물학에 관심이 있고, 민혁 자신은 기계공학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똑똑함이라는 것에도 저마다 각각의 분야가 있을 뿐 점수나 등수가 인간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아니라고 민혁은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런 그가, 구태여 1등이니 2등이니 하는 말을,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여자애 앞에서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저 단순히 꺼낼 말이 없어서 이런 얘기를 꺼내게 된 건 아닐까? 새삼 용수에게, 처음 말을 건넬 때는 무슨 말을 꺼내는 게 좋은지 한번쯤은 들어뒀어야 했나 하고 후회를 해보는 민혁이었다.
“음……, 그리고 넌 모르겠지만 사실 아까 교육시간에도 나는 널 보고 있었어. 왠지 너한테 자꾸 눈이 갔거든. 아무도 안 듣는 내용을 혼자서 듣고 있는 모습이 꽤 신기했다고 해야 하나……, 뭐 네가 그걸 재밌게 듣고 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
할 말이 없으니 자꾸만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민혁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그래서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나니 두 사람 사이에는 완전한 정적이 내려앉고 말았다.
“미, 미안해……. 내가 널 방해했지? 난 이만 가볼게.”
애초에 왜 따라왔던 건지……. 이것도 아직 내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부분일까? 엄마는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민혁은 부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발걸음을 돌렸다.
“네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
미란의 입에서 대답을 듣길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순간 민혁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옥상을 떠나려던 그의 걸음을 미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우뚝 잡아 세웠다.
“응? 방금 뭐라고 했어?”
“너한테선 숨길 수 없는 냄새가 나는구나.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의 냄새가 나.”
“으, 응?”
영문을 몰라서 당황하는 민혁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미란은 동네의 야경을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하며 무감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라져. 꼴 보기 싫어.”
“…….”
민혁은 화가 난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여자애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본 적도 처음이었고, 하물며 오늘 처음 본 여자애로부터 무슨 이유로 이런 미움을 받아야 하는지 두뇌를 총동원해 따져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 알았어…… 갈게.”
풀이 잔뜩 죽은 민혁은 힘없이 옥상 철문을 다시 열고는, 들어올 때보다 한층 더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그 문을 넘었다. 철문을 닫기 전에 민혁은 한 번 더 미란의 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미란이 이제는 허공에 떠다니는 뭔가를 잡기 위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뭘 잡으려고 하는 걸까? 반딧불이라도 본 걸까? 이 삭막한 빌라 옥상에 반딧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민혁은 생각을 멈추었다.
옥상 문이 천천히 닫혔다.
*
“아들, 이제 왔어? 좀 늦었네?”
서연은 천천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 민혁의 모습을 반겨주었다. 아들의 표정이 어쩐지 침울해 보였기에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엄마.”
“어허, 어디서 엄마를 속이려고? 빨리 말해봐. 너는 기분이 표정에 바로 드러난단 말이야.”
민혁은 말없이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뜸을 들였다. 서연은 팔짱을 끼고는 고집스런 모습으로 아들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엄마를 이기지 못한 민혁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지만, 입에서 나온 말의 내용은 서연이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엄마, 엄마는 아빠랑 어떻게 만났어?”
“엥?”
설마하니 아들이 그런 것을 물어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기에 서연은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엄마랑 아빠도 처음부터 서로 좋아했던 건 아닐 거 아냐. 엄마는 어쩌다가 아빠를 좋아하게 된 거야?”
“어어? 음, 그건 말이지…….”
서연은 예상치 못한 민혁의 질문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따지고 보면 남편과는 대학에서 처음 만났지만, 민혁의 말마따나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 봤을 때는 인상이 참으로 좋지 않았었다. 그저 얼굴 하나만 보고 끈질기게 치근덕거렸던 남편이 그 때에는 정말로 부담스럽게 여겨졌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서연은 새삼 아득한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무척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푼수 같았던 인간과 결국 이렇게 결혼까지 해서 애도 낳고 도란도란 살아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문득 자신이 어쩌다가 남편과 가까워졌는지를 회상하다가, 서연은 아들 모르게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 참, 하필 많고 많은 기억들 중에서 그 기억이 떠오를 게 뭐람……. 흘끗 민혁의 눈치를 보니, 아들은 그가 던진 질문이 얼마나 엄마를 곤란케 했는지 감도 못 잡고 두 눈을 멀뚱거리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서연은 곧이곧대로 민혁에게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아직은 마냥 어리기만 한 꼬맹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순 없지 않은가? 아니, 실은 민혁이 어른이 되더라도 그 이야기는 아마 해주지 못하겠지만.
“그게, 네 아빠가…… 평소엔 저래 보여도 어떨 땐 은근히 매력이 있어.”
“무슨 매력?”
“음, 네가 좀 더 크고 나면 가르쳐 줄게.”
“아, 왜. 뭔데? 지금 말해줘.”
아들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호기심을 갖고 덤벼드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서연은 비록 꽤 놀랐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호호, 순수한 우리 혁이는 아직 잘 모르는 그런 게 있어.”
“나 별로 안 순수한데…….”
“무슨 말이야, 우리 혁이 만큼 순진한 애가 어딨다구?”
엄마랑 아빠 때문에 적어도 또래 애들보다는 덜 순진하지……. 민혁은 엄마 몰래 속으로 그렇게 툴툴거렸다. 거의 매일 같이 엄마와 아빠가 안방 창문을 통해서 보여주곤 하는 광경 덕분에 민혁은 다른 건 몰라도 성애(性愛)에 대한 것만큼은 남들보다 빨리 깨우친 편이었다.
이성에 대한 연애감정이라던가 하는 그런 애틋한 감각의 영역에 대해선 백지나 다름없는 민혁이었지만, 오히려 성교나 육체관계에 대해서만큼은 빨리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즉, 민혁은 연애보다 섹스라는 것을 한 발 먼저 알아버린 몇 안 되는 특이케이스였다.
“몰라. 말 안 해줄 거면 나 들어갈래.”
민혁은 참으로 드물게도 계집아이처럼 토라진 티를 내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들의 생소한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서연은, 힘없이 닫히는 방의 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춘기인가?”
물론 어느 정도는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
“야, 혁아. 같이 피씨방 안 갈래?”
“아니, 됐어. 나 바빠.”
“어? 야! 어디 가!”
민혁은 친구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제 자신이 되돌아왔던 길을 반대로 짚어가며 다시금 그 빌라로 향했다. 사물의 구조를 파악하고 정보를 입력하는 능력이 남들에 비해 특히 비상했던 민혁은, 한 번 찾아갔던 길을 여간해서는 쉽게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길을 헤매본 적이 없었다.
“여기였지……? 아마?”
버스 노선까지 되짚어가며 민혁은 꽤 오랜 시간 끝에 다시 그 빌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시간이 꽤 많이 지체되었기에 어쩌면 미란은 벌써 집으로 들어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혁은 괜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어제처럼 조심스럽게 옥상의 철문을 열어보았다.
‘있구나.’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이 참 신기할 노릇이었다. 꼴 보기 싫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왜 나는 저 아이를 보는게 반가운 걸까? 민혁은 정말로 실마리조차 없는 난제를 접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막막한 기분이 느껴지는 난제는 살아오면서 처음인 것 같았다.
미란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말이 없었다. 어쩌면 민혁이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나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민혁은 인기척을 낼까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을 바꾸고는 철문 뒤에 얌전히 숨어 미란의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하나에 관심이 생기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본성이었다.
미란은 어제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처럼, 이따금씩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곤 했다. 숨어서 지켜보던 민혁은 그럴 때마다 그녀가 손에 쥐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했다. 어떨 때는 나비를 잡으려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의미 없이 허공을 가르는 손짓인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저물고 주변이 어두워지자 나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꾸준히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내밀어보곤 했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을 꾸준하게 지켜보는 행동. 무의미하기로 따지면 그야말로 막상막하일 것 같은 대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민혁은 군소리 없이 오랜 시간 미란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옥상에, 문득 쌀쌀함을 머금은 바람 한줄기가 날아와 난간에 앉아있는 미란의 몸을 훑고 지나가버렸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허공을 수놓듯이 펄럭였지만 미란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민혁은 미란이 바라보고 있는 도시의 야경이 왠지 너무도 황량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쓸쓸한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란의 모습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인다고 느꼈다.
*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민혁은 미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가면 엄마가 요새 들어 왜 부쩍 늦게 돌아오는지 이유를 묻곤 했지만 민혁은 그저 관심 가는 것을 관찰하느라 그러는 거라고 둘러댔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민혁은 마치 정해진 일상처럼 이곳으로 와서 철문 뒤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는 미란의 모습을 보곤 했다.
그렇게 어느새 일주일이 넘게 흘렀다. 왠지 민혁은 자신의 모습이 조금 변태같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을 걸면 몰라도 자꾸 이렇게 숨어서 뭘 어쩌려는 건지……. 사내답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이런 식의 관찰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민혁은 오늘에야말로 용기를 내기로 했다.
‘추울 텐데…….’
환절기를 지나며 날씨는 점점 더 쌀쌀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란은 매번 이 옥상에 올라와서 도시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일과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비록 주말에는 와보지 못했지만 민혁은 내심 그녀가 평일이든 휴일이든 옥상에 올라오는 일을 빼먹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저기…….”
민혁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며, 용기를 내어 철문을 넘었다. 손에는 집에서 가져온 담요 한 장이 곱게 개어진 채로 쥐어져있었다. 하지만 미란은 여전히 아무 말도, 기색도, 반응도 없었다. 민혁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추, 추울 텐데……, 이거 덮을래?”
미란에게서 대답이 없자 민혁은 지극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져온 담요를 넓게 펼쳐 미란의 어깨에 그것을 천천히 둘렀다. 아니, 두르려고 했다.
“저리 치워!”
미란의 어깨에 민혁의 손길이 닿자마자, 미란은 지금까지의 침묵과 정적이 무색해질 만큼 뾰족한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그녀의 팔에 민혁의 손이 부딪혀 담요가 허공을 날았다. 힘없이 공중에서 헤엄치던 담요가 옥상 바닥에 가라앉았다.
“미, 미안해.”
민혁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우선 사과를 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털어 사각형으로 곱게 접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미란의 옆자리에 머뭇거리며 내려놓았다.
“이거, 두고 갈게……. 추운데 그렇게 있으면 감기 걸릴 거야. 그, 그럼 난 가볼게.”
그리고 민혁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홀로 그 자리에 남은 미란의 몸을, 어김없이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할퀴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혹시 눈치 채신 분이 계실런지 모르겠지만,
이번 화부터 글의 형식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침묵 처리나 따옴표 사용부터 시작해서 글을 전체적으로 규정 양식에 맞게끔 수정을 했는데요
그 이유는 타임 리와인더 1부의 수정 작업을 하면서, "처음 쓸 때 바로 쓰자!"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ㅠ.ㅠ
출판이나 연재를 위해서는 글의 형식을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어서....
2부는 아예 처음 쓸 때부터 형식에 맞추어 글을 써보려 합니다
이미 쓰고 나서 글을 한번 더 수정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더군요 하하
이제껏 써왔던 형식과는 조금 다를 수 있어서 이질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지만
아마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
아 참, 그리고.... 독자님들이 보시다시피 2부는 그리 재미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ㅠ.ㅠ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2부 3장
“창의적 문제해결(creative problem solving) 과정은 다양한 모형을 통해서 개발될 수 있어요. 이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독자적 해결법을 만들어내는 정신과정이죠. 그러나 창의성만으로는 문제해결을 할 수 없어요. 창의성은 만들어진 것의 새로움이나 독창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가치나 지식에 적합한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에요. 창의성을 평가함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가치를 가지는 것이며, 그것은 명확하게 제시된 문제를 풀었는가, 혹은 상황이 더 나아진 것에 대해 다른 이에게 객관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죠. 만약 창의적 해결법이 널리 사용된다면 해결법은 ‘혁신(innovation)’이 될 수 있고, 또한 혁신을 위한 창조과정이 될 수 있어요. 이것이 새로운 물체, 물질, 과정, 소프트웨어나 시장적 가치가 있는 상품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로소 ‘발명(invention)’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겁니다.”
길고 장황한 PPT자료를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지도강사의 목소리가 교단 앞에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민혁은 비록 두 눈을 뜨고 있긴 했지만 그 PPT에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고, 계속해서 귓가로 날아오는 강사의 목소리에도 별 흥미가 가질 않았다.
‘지루해.’
민혁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고 난해한 내용을, 더 복잡한 언어로 설명할 바엔 왜 굳이 가르침이 필요한 걸까? 가르침이라는 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전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 텐데.
민혁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지겨운 설명을 듣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새삼 그는 이 캠프에 온 것이 후회되었다. 아빠가 원해서 오게 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유익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극히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민혁은 생각했다.
‘흠, 그래도 한 명은 있구나.’
매사에 있어 관찰하고 살펴보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민혁의 그 기질이 다시 한 번 발동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유익하지 못한 설명을 계속해서 들을 바엔, 차라리 학생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살피고 관찰하는 것이 더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뭔가 흥미를 가질 거리가 없나 살피던 민혁의 눈에, 아주 특이한 여학생 하나가 포착되었다. 그 ‘특이함’이란 순전히 아주 사소한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꾸벅꾸벅 졸기 일쑤인 대다수 학생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 여학생 한 명만이 유일하게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네. 저 지루한 설명이 재미있는 걸까?’
민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여학생의 모습을 더욱 면밀히 주시했다. 하지만 몇 분 동안 그 여학생의 모습이나 반응을 살펴본 후에, 민혁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여학생은 결코 그 설명을 재미있게 여겨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입가에 맺힌 아주 희미한 냉소와, 지극히 시큰둥한 표정 때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교육내용을 흥미로이 여기고 있는 학생의 태도는 아니었다. 비록 별 생각 없이 호기심을 갖게 되긴 했지만, 민혁은 왠지 그 여학생에게서 더욱 관찰할 요소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시니컬한 얼굴을 하고서 강당 앞의 PPT자료를 바라보고 있는 그 여학생에게서는, 민혁이 또래 여자애들에게선 좀체 느낄 수 없었던 냉소적인 태도가 한껏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어린아이에게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바로 그 이질성이 민혁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뭐야, 너 쟤가 맘에 들어?”
민혁의 친구인 용수가 옆자리에서 물었다. 민혁은 어느 것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겉으로 티가 나는 편이기에, 뚫어져라 여학생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용수도 알아챈 것 같았다. 어쩌면 민혁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붙어 다닌 친구이기 때문에 좀 더 쉽게 그를 파악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니, 처음 보는 애야.”
“어? 너 쟤 몰라? 쟤 유명한 앤데.”
“유명?”
“쟤가 경시대회에만 나가면 항상 만점 받아온다는 그 애잖아. 대회만 나갔다 하면 한 번도 문제를 틀린 적이 없대. 어디 학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학교 선생님들도 저 애 이름은 다 알더라.”
“그래? 넌 어떻게 그런걸 아는 거야?”
“캠프나 영재교육 프로그램에 자주 오다보면 싫어도 쟤 이름을 들을 수밖에 없어.”
용수는 민혁과는 다르게, 이런 캠프를 비롯한 각종 교육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었다. 사실 용수 본인이 적극적이었다기보다는, 그의 부모님이 그만큼 교육열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학교에서 용수가 자신이 다녀온 프로그램에 또래 아이들 중 유명한 천재가 하나 있었다며 한 번씩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는데, 아마도 그게 저 여학생의 이야기였나 보다.
민혁은 머리가 비상하고 남달랐지만 친구인 용수처럼 각종 대회나 행사에 선뜻 참여하곤 했던 편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민혁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과학에 관심이 많긴 했지만 그것은 사물의 구조나 운동 원리 등을 탐구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 딱딱한 ‘과학’이라는 과목 자체에 흥미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서연은 민혁에게, 성인이 되고 나면 ‘공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원하는 분야의 학문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민혁은 엄마의 말을 믿었고, 지금 그가 겪고 배우는 이러한 과목이나 지식들은 그저 그것을 위한 준비단계 쯤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민혁은 용수가 계속해서 천재라고 추켜세우는 그 이름 모를 여학생의 지식수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경쟁할 사이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때? 관심 있으면 가서 말이나 한 번 붙여볼래?”
“무슨 말이야? 처음 보는 애라니까 관심은 무슨?”
“말은 그렇게 하면서 쟤한테 눈을 못 떼고 있잖아.”
아무래도 용수는, 민혁이 그 여학생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를 다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용수는 원래부터 소위 ‘남녀문제’라는 것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민혁은 스스로가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용수는 유난히도 이성에 대해, 정확히는 여자애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또 그만큼 여학생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무던히 애를 쓰곤 했다.
“참 나, 혁이가 너 같은 앤 줄 알아? 혁이는 그런 거에 관심 없어. 그치, 혁아?”
이번엔 옆에서 정아가 끼어들었다. 민혁의 오른쪽엔 용수가, 왼쪽엔 정아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 또한 아까부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던 것 같았다. 민혁의 학교에서 참가한 학생은 민혁을 포함하여 용수와 정아 셋뿐이었기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모여 앉게 되었다.
정아는 평소에도 민혁의 문제에 대해 곧잘 끼어들어 입을 열곤 하는 편이었다. 특히 이렇게 용수가 여자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엔 더더욱 그랬다. 용수는 그런 정아를 심심찮게 놀려대곤 했었다. 밸런타인데이에 정아가 민혁에게 손수 만든 초콜릿을 주었을 때엔, 그녀를 일주일 내내 놀려먹어 울렸던 적도 있었다.
그 후로도 용수는 이따금씩 정아가 민혁을 좋아한다며 짓궂게 장난을 쳐대곤 했지만 정아가 무덤덤하게 대응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다소 시들해진 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아는 용수가 민혁에게 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이렇게 끼어들어 용수를 구박하거나 핀잔을 주곤 했다.
“어, 뭐…… 그렇지.”
민혁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정아가 어쨌건, 저 여학생이 어쨌건, 그런 문제들을 떠나서 민혁은 자신이 이성문제에 관심을 갖기엔 아직 이른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민혁은 문득 머릿속으로 엄마와 아빠에 대해 떠올렸다.
거의 매일 밤, 혹은 매일 아침…… 격정적인 모습으로 뜨겁게 몸을 섞곤 하는 엄마와 아빠. 이성관계라는 것에 종착점이 있다면 아마도 엄마와 아빠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할 것이리라. 만약 그렇다면, 민혁은 더더욱 자신이 아직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나이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에게 있어 그런 감정은 아직 머나먼 미래의, 어른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긴 뭐가 그래? 우리도 충분히 여자애들한테 관심 가질 나이가 됐다고. 정아 너도 그렇게 말하면서 혁이가 좋으니까 자꾸 참견하는 거 아니야?”
“시끄러워. 얘기가 왜 그쪽으로 새는 거야?”
용수와 정아가 가운데 자리에 앉은 민혁을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과학 캠프에 와서 왜 갑자기 이런 주제로 대화가 이어지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지만, 민혁은 적어도 저 무익한 강사의 설명보다는 더 흥미 있는 주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아까의 그 여학생에게로 향해 있었다.
어느 학교의 학생일까? 민혁은 문득 그런 호기심이 들었다. 캠프에는 여러 곳의 학교에서 온 우등생들이 한데 모여 있었기 때문에 사방이 모르는 얼굴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왠지 그 여학생의 처음 보는 얼굴은, 민혁의 머릿속에 아주 묘한 인상을 남겼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다.”
어느새 정아와 말다툼이 끝났는지, 용수가 곁에서 또 재잘대며 입을 열었다.
“저 여자애랑 민혁이 중에 누가 더 똑똑할까?”
“뭐? 무슨 말이야.”
난데없는 비교에 민혁이 되물었다.
“아니, 사실 민혁이 넌 대회나 시험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머리는 우리 중에 제일 좋잖아. 저 여자애도 천재라고 소문이 나있지만 내가 보기엔 민혁이 너도 천재니까. 둘 중에 누가 더 똑똑할까, 그냥 좀 궁금해서. 하하.”
“야,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혁이가 더 똑똑하지. 너 저번에 영재과학기술대회에서 혁이가 만든 로봇 못 봤어? 그리고 국립연구원 학생부 시험에서도 1등한 거 몰라? 혁이는 그냥 천재가 아니라 초천재야. 그리고 또……”
“알았어, 알았어. 그만 해. 저 계집애 저거 또 지랄 시작이네. 네가 무슨 민혁이 비서야? 최민혁 백과사전이라도 돼?”
“그게 아니라 네가……”
잠깐 휴전했나 싶더니 또 싸우기 시작하는 두 사람이다. 왜 이 둘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원……. 근본적인 이유가 민혁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도통 깨닫지 못한 채 그는 여전히 그 여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학생의 얼굴은 마치 표정이 고정되어 있는 듯, 아까 전과 다를 바 없이 무척 냉소적이었고 한편으로는 꽤 삭막해보였다.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두 눈동자가 꾸준히 PPT자료를 향해 있긴 했지만, 그녀는 입가에 빈정거리는 것 같은 조소를 한번씩 띄우곤 했다.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일까? 민혁은 문득 궁금해졌다.
*
강의가 이어지고 나서는 무슨 시험 비슷한 것을 보았다. 민혁은 시험이라는 것 자체를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총체적인 지식이나 능력을, 다른 누군가가 출제한 문제를 통해서 점수로 평가받는다는 것이 썩 합리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민혁은 학교에서 1등의 자리를 놓쳐본 적은 없었다. 그가 시험이나 성적 따위에 별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우등생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아빠나 엄마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구태여 어긋나게 굴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험이란 일종의 숙제와 비슷했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잘해둔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는 것. 따라서 이 시험도 그러한 개념의 연장이라 생각했다. 기왕 마음을 내서 참가한 것이니 좋은 결과를 갖고 돌아가면 아빠, 엄마도 흡족해 하겠지.
“혁아, 잘 본 것 같아? 나는 뒷면의 문제들은 손도 못 대겠더라.”
정아가 칭얼거리며 민혁에게 말을 걸었다. 민혁은 시험지를 걷어간 강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지막의 서술형 문제들을 풀 때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이 나이 무렵의 아이들에게 서술형이라는 형태는 워낙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민혁의 경우엔 엄밀히 말하면 생소하다기보다는 번거로운 형태였다.
아마 내키기만 했다면 좀 더 길게 답을 쓸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민혁은 도중에 펜을 놓아버린 것을 그다지 후회하진 않았다. 그 정도만 써도 그럭저럭 괜찮은 점수를 받을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프로그램 끝나기 전에 시험 점수를 강당에 공지할거래. 도대체 왜 시험 점수 따위를 공개하지 못해서 안달인 거지? 꼴찌 부근에 이름이 있으면 얼마나 쪽팔릴까.”
용수는 불만에 가득 차 내내 툴툴거렸다. 구태여 시험 점수를 등수 별로 나누어 공개된 장소에 게시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민혁도 그러한 방침이 썩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점수가 궁금하기도 했다.
서술형을 대강 적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문제들은 모두 맞힌 것 같은데, 그런대로 괜찮은 등수가 나오지 않을까? 민혁은 결코 자만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수준을 모를 만큼 지나치게 겸손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또래의 학생들 수준에서는 자신만큼 높은 점수를 획득한 아이가 몇 없을 거라고 그는 여겼다.
‘2등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당 벽면에 대문짝만하게 붙은 이름 목록에서 자신의 등수를 발견했을 때 민혁은 무척 애매한 기분을 느꼈다. 차라리 1등을 해버리거나, 혹은 아예 하위권으로 추락했다면 그럭저럭 납득이 되었을 텐데……. 그 ‘2등’이라는 숫자는 민혁에게 있어 지극히 모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죽도 밥도 아니라는 게 이런 느낌일까?
“말도 안 돼……. 혁이가 2등?”
“1등은 누군데?”
민혁 본인보다도 오히려 옆에서 정아와 용수가 더 부산스럽게 호들갑을 떨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민혁을 대신해서, 그의 이름 위에 위치하고 있는 단 하나의 이름을 읽었다. 용수나 정아에 비하면 크게 관심이 없었던 민혁이었지만, 그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덩달아 그 이름을 살펴보게 되었다.
‘1등 최미란, 100점. 2등 최민혁, 99점.’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그 벽보 위쪽에 적힌 두 이름을 나란히 읽었다. 성씨(姓氏)가 같기 때문일까, 왠지 낯설면서도 조금은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그 애네, 아까 봤던 그 여자애.”
“누구?”
“아까 얘기했던 그 천재라는 여자애 있잖아. 그 애 이름이 최미란이거든.”
용수가 감탄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목록을 꼼꼼하게 훑었다.
“진짜 대단하네, 100점이라면 하나도 안 틀렸다는 거잖아? 소문이 괜히 난 게 아니었어. 그 여자애가 진짜 천재 중의 초천재 아니야?”
“웃기지 마!”
정아가 바락 대들며 성질을 냈다.
“혁이가 문제를 대충 풀어서 그렇지 제대로 맘먹고 하면 충분히 100점 받을 수 있었어! 아니, 마음만 먹으면 그깟 여자애쯤은 상대도 안 될걸?”
“100점이 상대가 안 된다면 말이 안 되지…… 점수가 대등하면 모를까.”
“시끄러워!”
용수와 정아는 지치지도 않고 또 말다툼을 시작했다. 아마도 정아는 민혁이 1등자리를 빼앗긴 사태로 인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정작 민혁 본인은 그리 큰 충격을 느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다만 민혁은 아까 전에 비해 한층 더 그 여자아이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었다.
‘대단하네. 그럼 서술형 문제에 대한 답을 완벽하게 썼다는 건데.’
사실 민혁으로서도 의욕적으로 마지막 문제에 대한 답을 썼다면 그 1점의 차이를 메울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다. 제대로 마음먹고 답을 썼더라도 점수가 바뀌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러한 가정을 떠나서, 민혁은 그 미란이라는 여학생에게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아빠가 이래서 캠프에 가보라고 했던 걸까? 그…… 속담 중에, 뭐라더라?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있기 때문에?’
내심 자신이 또래 아이들 중에서는 특출한 편이라는 생각을 줄곧 해왔던 민혁이었다. 그것은 자만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미란의 이름은 민혁에게 꽤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미란이라는 그 애, 학교는 어디 학교래?”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왜? 그건 왜 궁금해 하는데?”
정아가 민감하게 열을 올리며 캐묻자 민혁은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애매하게 고개를 돌리던 민혁의 눈에 문득 누군가가 들어왔다. 민혁의 시선을 느낀 용수도 따라서 그 곳을 보더니, 히죽 웃으며 민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마침 저기 있네.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봐.”
민혁의 시선이 물끄러미 강당 어느 한 구석에 머물렀다. 강당 벽에 붙은 이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그저 구석진 계단 끄트머리에 멍하니 앉아 무릎을 가만히 끌어안고 있는 한 여자아이의 모습이 민혁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까 보았던 그 냉소적인 분위기의 여학생이었다.
“가서 말 걸어봐.”
“말?”
“그래, 인사라도 하고. 학교가 어딘지도 물어보고. 전화번호까지 받으면 더 좋고.”
“야, 김용수. 넌 혁이한테 왜 이상한 걸 시키고 그래? 혁이는 그런 거에 관심 없다고 했지?”
“넌 좀 가만있어 봐. 한창 재미있을 순간에.”
민혁은 속으로 잠깐 고민했다. 말을 걸어보라고?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이름조차 몰랐던 사이에 무슨 말을 한단 말이지? 용수는 그게 무슨 로맨스의 시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민혁으로서는 선뜻 납득이 안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여학생에게 이런저런 것을 묻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민혁 스스로도 좀체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민혁은 의아했다.
이것이 정말 용수나 다른 아이들이 재미삼아 말하던,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긴다는 그런 느낌인가?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왠지 그렇게 쓸쓸히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보는 순간, 잊고 있었던 뭔가를 다시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캠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상대에게 아련함이라니? 아마 용수나 정아가 들으면 무슨 헛소리냐고 이상하게 여겼겠지…… .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혁은 그 미란이라는 아이로부터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처음 보는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좀체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느낌이었다.
“말 안 걸어봐?”
“…….”
하지만 결국 민혁은 그녀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으레 말하는 숫기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삭막한 기운이 그를 망설이게 했는지도 몰랐다.
분명 그 아이가 완전한 ‘타인’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에게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어떤 막연한 울타리가 둘러져 있는 느낌이었다. 메마른 눈빛도, 냉소적인 표정도 모두 그 폐쇄적인 벽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미란에 대한 민혁의 첫인상이었다.
*
‘그런데……, 이런 데서 보게 될 줄은.’
교육 프로그램이 끝나고 민혁은 용수, 정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버스가 길의 모퉁이를 돌아 한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민혁은 의도치 않게 또 그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미란이라는 이름의 그 아이는 길게 펼쳐진 인도를 얌전히 걷고 있었다.
“미사일이 더 무섭지! 맞으면 다 끝장인데.”
“멍청아, 방사능 피폭이 더 무서워.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지?”
용수와 정아는, 늘 그랬듯이 정말 쓸데없는 화제로 옆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열을 올리느라 민혁이 버스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민혁은 두 사람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창밖을 통해 미란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신호등이 바뀌었고, 버스가 출발했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는 너무도 손쉽게 앞서 가던 미란을 추월하여 달렸다.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저만치 멀어지는 미란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곳을 계속 바라보았다.
“너 뭐 봐?”
그제야 용수가 말다툼을 잠시 멈추고 물었다. 민혁은 대답했다.
“나 여기서 내릴게.”
“뭐?”
얼빠진 용수와 정아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지만 공교롭게도 그 순간 버스는 정류장에 멈춰 섰다. 민혁은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후다닥 달려, 열린 버스의 뒷문으로 잽싸게 뛰어내렸다. 그가 내리자마자 버스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 최민혁! 여기 너네 집 방향도 아니잖아!”
창문 너머로 친구들이 민혁을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
‘참 독특하게도 걷는구나.’
민혁은 자신이 왜 오늘 처음 본 여자아이의 뒤꽁무니를 미행하듯이 졸졸 쫓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그 이유를 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미란이라는 그 아이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싶은 호기심을 결국 이기지 못했다.
‘걷는 모습이 꼭 유령 같아. 정말 특이해.’
특이하기로 따지면 그 자신도 어릴 적부터 엄마의 속을 깨나 썩였을 정도로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민혁이었지만, 그런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미란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정말 특이해 보였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특이함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민혁은 마치 엄마의 뒤꽁무니를 쫄래쫄래 쫓아가는 아이처럼 미란의 뒤를 따라갔다. 미란은 여전히 초점이 없는 것 같은 두 눈으로 가끔씩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로 발을 움직이곤 했다. 마치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 동안을 쫓아갔을까. 미란은 웬 허름한 빌라가 세워져 있는 단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민혁이 처음 와보는 장소였다. 미란은 익숙한 걸음으로 줄지어 서 있는 빌라의 건물들 가운데 한 곳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러자 민혁은 그 순간 고민에 빠졌다.
‘돌아가야 하나?’
다시 생각해봐도 민혁은 미란의 집까지 그녀를 쫓아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물며 이대로 더 쫓아가봤자 대문 안까지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민혁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갈등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발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왕 여기까지 쫓아온 것, 여기서 돌아가면 아무 의미도 없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도 없이 민혁은 무작정 미란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이미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는 행동이었다.
‘어디로 갔지?’
그 빌라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요즘 세상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니……. 참 낡기도 낡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민혁은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벌써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걸까.’
꽤 깊은 허탈감이 엄습했다. 이래서야 쫓아온 의미가 없는데. 어쩌면 진즉에 용수 말대로 말을 걸었어야 했을까?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말을 걸어볼 수도 있겠지.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말이야……. 근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민혁은 또 혼란스러워졌다.
극심한 허무함으로 인해 민혁은 곧장 건물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그저 정처 없이 터덜터덜 계단을 계속 걸어 올라갔다. 어쩌면 미란을 뒤늦게나마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대로 건물 밖으로 나가기엔 지금까지 뒤를 쫓아온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게 여겨졌기 때문도 있었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다보니 민혁의 발은 어느새 옥상 문 앞까지 이르러 있었다.
‘에휴, 바람이나 좀 쐬다 가자.’
이유 모를 침울함에 휩싸인 민혁은 조심스럽게 옥상 문을 살짝 밀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고, 그 순간 민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문 너머에, 그가 쫓아왔던 여자아이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옥상으로 올라왔던 건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민혁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다소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황하는 민혁과는 달리 미란은 그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듯, 그저 옥상 모서리 부근의 난간에 앉아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자신이 두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풍경 그 이외의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보였다. 민혁이 생각하기에, 아마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왔더라도 그녀는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듯한, 극심한 폐쇄감이 그녀로부터 묻어나오고 있었다.
“너 뭐야?”
그렇기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을 때, 민혁은 오히려 움찔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천년이든 만년이든 내내 침묵하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짧고 차가운 그 한 마디는, 민혁이 미란에게서 처음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아……, 그게.”
조금은 창피하기도 했지만 민혁은 애써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답하려 노력했다.
“안녕? 나는 민혁이야……. 최민혁.”
서연은 언제나 아들의 그 또박또박한 목소리를 대견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얄미워했다. 아무리 혼이 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늘 목소리만큼은 또박또박 야무지게 대답하는 모습이 조금은 밉상처럼 보인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정도로 평소 똑 부러지는 민혁이었지만, 어쩐지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또박또박 대답하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미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심지어 고개를 돌려 민혁의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할 말이 없어진 민혁은 어설프게 서서 미란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지만 끝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민혁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음…… 미안해. 나는 그냥…… 너한테서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혹시 내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니?”
“…….”
여전히 미란은 묵묵부답이었다.
“저기, 네가 아까 시험에서 1등 했다는 거 알고 있어. 너 정말 대단하더라. 혹시 알고 있니? 네가 1등이고 내가 2등이었어.”
민혁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굉장히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그것은 분명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1등이니 2등이니 하는 것은 크게 중요치 않다. 같은 ‘과학’이라는 말로 뭉뚱그린다고 해도, 세부적으로는 용수가 물리학에 관심이 있고, 정아가 생물학에 관심이 있고, 민혁 자신은 기계공학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똑똑함이라는 것에도 저마다 각각의 분야가 있을 뿐 점수나 등수가 인간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아니라고 민혁은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런 그가, 구태여 1등이니 2등이니 하는 말을,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여자애 앞에서 늘어놓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저 단순히 꺼낼 말이 없어서 이런 얘기를 꺼내게 된 건 아닐까? 새삼 용수에게, 처음 말을 건넬 때는 무슨 말을 꺼내는 게 좋은지 한번쯤은 들어뒀어야 했나 하고 후회를 해보는 민혁이었다.
“음……, 그리고 넌 모르겠지만 사실 아까 교육시간에도 나는 널 보고 있었어. 왠지 너한테 자꾸 눈이 갔거든. 아무도 안 듣는 내용을 혼자서 듣고 있는 모습이 꽤 신기했다고 해야 하나……, 뭐 네가 그걸 재밌게 듣고 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
할 말이 없으니 자꾸만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민혁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그래서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나니 두 사람 사이에는 완전한 정적이 내려앉고 말았다.
“미, 미안해……. 내가 널 방해했지? 난 이만 가볼게.”
애초에 왜 따라왔던 건지……. 이것도 아직 내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부분일까? 엄마는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민혁은 부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발걸음을 돌렸다.
“네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
미란의 입에서 대답을 듣길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순간 민혁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옥상을 떠나려던 그의 걸음을 미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우뚝 잡아 세웠다.
“응? 방금 뭐라고 했어?”
“너한테선 숨길 수 없는 냄새가 나는구나.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의 냄새가 나.”
“으, 응?”
영문을 몰라서 당황하는 민혁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미란은 동네의 야경을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하며 무감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라져. 꼴 보기 싫어.”
“…….”
민혁은 화가 난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여자애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본 적도 처음이었고, 하물며 오늘 처음 본 여자애로부터 무슨 이유로 이런 미움을 받아야 하는지 두뇌를 총동원해 따져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 알았어…… 갈게.”
풀이 잔뜩 죽은 민혁은 힘없이 옥상 철문을 다시 열고는, 들어올 때보다 한층 더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그 문을 넘었다. 철문을 닫기 전에 민혁은 한 번 더 미란의 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미란이 이제는 허공에 떠다니는 뭔가를 잡기 위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뭘 잡으려고 하는 걸까? 반딧불이라도 본 걸까? 이 삭막한 빌라 옥상에 반딧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민혁은 생각을 멈추었다.
옥상 문이 천천히 닫혔다.
*
“아들, 이제 왔어? 좀 늦었네?”
서연은 천천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 민혁의 모습을 반겨주었다. 아들의 표정이 어쩐지 침울해 보였기에 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엄마.”
“어허, 어디서 엄마를 속이려고? 빨리 말해봐. 너는 기분이 표정에 바로 드러난단 말이야.”
민혁은 말없이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뜸을 들였다. 서연은 팔짱을 끼고는 고집스런 모습으로 아들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엄마를 이기지 못한 민혁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지만, 입에서 나온 말의 내용은 서연이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엄마, 엄마는 아빠랑 어떻게 만났어?”
“엥?”
설마하니 아들이 그런 것을 물어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기에 서연은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엄마랑 아빠도 처음부터 서로 좋아했던 건 아닐 거 아냐. 엄마는 어쩌다가 아빠를 좋아하게 된 거야?”
“어어? 음, 그건 말이지…….”
서연은 예상치 못한 민혁의 질문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따지고 보면 남편과는 대학에서 처음 만났지만, 민혁의 말마따나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 봤을 때는 인상이 참으로 좋지 않았었다. 그저 얼굴 하나만 보고 끈질기게 치근덕거렸던 남편이 그 때에는 정말로 부담스럽게 여겨졌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서연은 새삼 아득한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무척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푼수 같았던 인간과 결국 이렇게 결혼까지 해서 애도 낳고 도란도란 살아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문득 자신이 어쩌다가 남편과 가까워졌는지를 회상하다가, 서연은 아들 모르게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 참, 하필 많고 많은 기억들 중에서 그 기억이 떠오를 게 뭐람……. 흘끗 민혁의 눈치를 보니, 아들은 그가 던진 질문이 얼마나 엄마를 곤란케 했는지 감도 못 잡고 두 눈을 멀뚱거리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서연은 곧이곧대로 민혁에게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아직은 마냥 어리기만 한 꼬맹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순 없지 않은가? 아니, 실은 민혁이 어른이 되더라도 그 이야기는 아마 해주지 못하겠지만.
“그게, 네 아빠가…… 평소엔 저래 보여도 어떨 땐 은근히 매력이 있어.”
“무슨 매력?”
“음, 네가 좀 더 크고 나면 가르쳐 줄게.”
“아, 왜. 뭔데? 지금 말해줘.”
아들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호기심을 갖고 덤벼드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서연은 비록 꽤 놀랐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호호, 순수한 우리 혁이는 아직 잘 모르는 그런 게 있어.”
“나 별로 안 순수한데…….”
“무슨 말이야, 우리 혁이 만큼 순진한 애가 어딨다구?”
엄마랑 아빠 때문에 적어도 또래 애들보다는 덜 순진하지……. 민혁은 엄마 몰래 속으로 그렇게 툴툴거렸다. 거의 매일 같이 엄마와 아빠가 안방 창문을 통해서 보여주곤 하는 광경 덕분에 민혁은 다른 건 몰라도 성애(性愛)에 대한 것만큼은 남들보다 빨리 깨우친 편이었다.
이성에 대한 연애감정이라던가 하는 그런 애틋한 감각의 영역에 대해선 백지나 다름없는 민혁이었지만, 오히려 성교나 육체관계에 대해서만큼은 빨리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즉, 민혁은 연애보다 섹스라는 것을 한 발 먼저 알아버린 몇 안 되는 특이케이스였다.
“몰라. 말 안 해줄 거면 나 들어갈래.”
민혁은 참으로 드물게도 계집아이처럼 토라진 티를 내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들의 생소한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서연은, 힘없이 닫히는 방의 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춘기인가?”
물론 어느 정도는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
“야, 혁아. 같이 피씨방 안 갈래?”
“아니, 됐어. 나 바빠.”
“어? 야! 어디 가!”
민혁은 친구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제 자신이 되돌아왔던 길을 반대로 짚어가며 다시금 그 빌라로 향했다. 사물의 구조를 파악하고 정보를 입력하는 능력이 남들에 비해 특히 비상했던 민혁은, 한 번 찾아갔던 길을 여간해서는 쉽게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길을 헤매본 적이 없었다.
“여기였지……? 아마?”
버스 노선까지 되짚어가며 민혁은 꽤 오랜 시간 끝에 다시 그 빌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시간이 꽤 많이 지체되었기에 어쩌면 미란은 벌써 집으로 들어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혁은 괜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어제처럼 조심스럽게 옥상의 철문을 열어보았다.
‘있구나.’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이 참 신기할 노릇이었다. 꼴 보기 싫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왜 나는 저 아이를 보는게 반가운 걸까? 민혁은 정말로 실마리조차 없는 난제를 접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막막한 기분이 느껴지는 난제는 살아오면서 처음인 것 같았다.
미란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말이 없었다. 어쩌면 민혁이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나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민혁은 인기척을 낼까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을 바꾸고는 철문 뒤에 얌전히 숨어 미란의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하나에 관심이 생기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본성이었다.
미란은 어제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처럼, 이따금씩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곤 했다. 숨어서 지켜보던 민혁은 그럴 때마다 그녀가 손에 쥐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했다. 어떨 때는 나비를 잡으려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의미 없이 허공을 가르는 손짓인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저물고 주변이 어두워지자 나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꾸준히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내밀어보곤 했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을 꾸준하게 지켜보는 행동. 무의미하기로 따지면 그야말로 막상막하일 것 같은 대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민혁은 군소리 없이 오랜 시간 미란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옥상에, 문득 쌀쌀함을 머금은 바람 한줄기가 날아와 난간에 앉아있는 미란의 몸을 훑고 지나가버렸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허공을 수놓듯이 펄럭였지만 미란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민혁은 미란이 바라보고 있는 도시의 야경이 왠지 너무도 황량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쓸쓸한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란의 모습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인다고 느꼈다.
*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민혁은 미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가면 엄마가 요새 들어 왜 부쩍 늦게 돌아오는지 이유를 묻곤 했지만 민혁은 그저 관심 가는 것을 관찰하느라 그러는 거라고 둘러댔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민혁은 마치 정해진 일상처럼 이곳으로 와서 철문 뒤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는 미란의 모습을 보곤 했다.
그렇게 어느새 일주일이 넘게 흘렀다. 왠지 민혁은 자신의 모습이 조금 변태같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을 걸면 몰라도 자꾸 이렇게 숨어서 뭘 어쩌려는 건지……. 사내답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이런 식의 관찰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민혁은 오늘에야말로 용기를 내기로 했다.
‘추울 텐데…….’
환절기를 지나며 날씨는 점점 더 쌀쌀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란은 매번 이 옥상에 올라와서 도시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일과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비록 주말에는 와보지 못했지만 민혁은 내심 그녀가 평일이든 휴일이든 옥상에 올라오는 일을 빼먹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저기…….”
민혁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며, 용기를 내어 철문을 넘었다. 손에는 집에서 가져온 담요 한 장이 곱게 개어진 채로 쥐어져있었다. 하지만 미란은 여전히 아무 말도, 기색도, 반응도 없었다. 민혁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추, 추울 텐데……, 이거 덮을래?”
미란에게서 대답이 없자 민혁은 지극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져온 담요를 넓게 펼쳐 미란의 어깨에 그것을 천천히 둘렀다. 아니, 두르려고 했다.
“저리 치워!”
미란의 어깨에 민혁의 손길이 닿자마자, 미란은 지금까지의 침묵과 정적이 무색해질 만큼 뾰족한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그녀의 팔에 민혁의 손이 부딪혀 담요가 허공을 날았다. 힘없이 공중에서 헤엄치던 담요가 옥상 바닥에 가라앉았다.
“미, 미안해.”
민혁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우선 사과를 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털어 사각형으로 곱게 접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미란의 옆자리에 머뭇거리며 내려놓았다.
“이거, 두고 갈게……. 추운데 그렇게 있으면 감기 걸릴 거야. 그, 그럼 난 가볼게.”
그리고 민혁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홀로 그 자리에 남은 미란의 몸을, 어김없이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할퀴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혹시 눈치 채신 분이 계실런지 모르겠지만,
이번 화부터 글의 형식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침묵 처리나 따옴표 사용부터 시작해서 글을 전체적으로 규정 양식에 맞게끔 수정을 했는데요
그 이유는 타임 리와인더 1부의 수정 작업을 하면서, "처음 쓸 때 바로 쓰자!"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ㅠ.ㅠ
출판이나 연재를 위해서는 글의 형식을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어서....
2부는 아예 처음 쓸 때부터 형식에 맞추어 글을 써보려 합니다
이미 쓰고 나서 글을 한번 더 수정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더군요 하하
이제껏 써왔던 형식과는 조금 다를 수 있어서 이질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지만
아마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
아 참, 그리고.... 독자님들이 보시다시피 2부는 그리 재미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ㅠ.ㅠ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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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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