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1장
그 날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여름도 다 지나갔는데 난 데 없는 소나기라니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기분을 대변하듯이 추적거리며 내려오는 빗줄기는 그 자체로 꽤 시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 비가 싫었다.
워셔에 의해 차창에 뿌려진 빗물은 계속해서 걷혀져 나갔지만 내 기분은 줄곧 먹먹했고, 그 먹먹함이 쉽게 씻겨져 나갈 것 같지 않았다. 주차장에 다다라 자동차는 멈추었지만 나는 핸들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한참을....
"잘한 걸까?"
그렇게 스스로 물었다. 아마도 그건 잘한 일이었을 게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그냥 혼란스러웠다. 도덕이나 윤리를 기준 삼아 내린 판단으로 자기 위로를 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그런 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굳이 지나간 기억을 되짚겠다는 의욕 없이도 나는 머릿 속에서 자꾸만 그 장면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 되새김이 타임 리와인더처럼 편리하게 내 대답을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선택에 대해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이 회의감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되새기는 행위는 비록 내 선택을 바꾸거나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왜" 그랬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글쎄.... 내가 정말 왜 그랬을까?
싫어도 그 순간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야 만다.
*
"싫어요."
한참을 침묵 속에 앉아있었던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현아 씨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이 그 요염한 자세 그대로 내 얼굴을 들여다 보고만 있다. 젖가슴은 물론이고 알몸의 속살이 가운 자락 안쪽으로 훤하게 들여다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요?"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마도 "좋아요." 라는 내 대답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거란 생각이 내게 들 만큼, 그녀의 태도엔 자신감이 넘쳤기에 나는 그녀가 당황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이런 내 대답까지도 예상에 두었을까?
"그럼 이게 성진 씨의 세 번째 거짓말이라고 봐도 되려나요?"
"아니. 이건 정말 내 솔직한 대답이었어요. 하지만...."
나는 되도록 그녀의 두 눈을 마주보며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에게 느꼈던 공포나 그런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지금 그녀가 너무나....
"현아 씨가 이걸 내 솔직한 마음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요. 나도 그걸 받아 들일테니까."
"무슨 의미인가요?"
"아마도 현아 씨는 못 믿을 테니까요."
감정 변화가 없던 그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화난 것 같기도 했고, 부끄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감정의 형태를 소리내어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럼 현주와 헤어져요."
"그건 현주가 결정할 일이에요."
그녀가 그렇게 말할 것이란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주의 언니로부터 그런 말을 직접 듣게 되니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과연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일까?
그건 모르겠다.
다만 여느 다른 남자들처럼 이 순간에 정당한 분노를 터뜨리지 못하는 내 처지가 너무도 한심하게 여겨졌다.
"글쎄요. 성진 씨의 난잡한 관계를 내가 직접 현주에게 들려줘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난 기왕이면 그 애가 그래도 사랑에 대한 좋은 추억을 남기길 바라는데. 그건 성진 씨도 그렇지 않나요?"
"현아 씨의 요구 하나 때문에 내가 현주와 억지로 헤어져야 한다면 그것 또한 좋지 않은 추억으로 남을 텐데요."
"그렇다 한들, 자기가 그렇게나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들과 몸을 섞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만큼은 아니겠죠. 그 애한테는 정말로 "진실한 사랑"이 필요하거든요."
차마 대꾸하지 못하는 내가 우두커니 앉아있자 현아 씨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맞은 편으로 걸어와 여전히 교태로운 몸짓으로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표정과 태도에는 "내가 이겼다."라는 듯한, 너무도 가여울 만큼의 자신감과 당당함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성진 씨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지금처럼 그 애 옆에 있어주면 돼요. 그 애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사랑을 느끼며 행복할 수 있게. 그걸 위해서라면 남자의 성욕 정도는 얼마든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요."
"......."
"어떤가요? 성진 씨에게도 솔깃한 얘기 아닌가요?"
물론 그녀의 몸은 뭇 사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도저히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남자이기에 시선을 피하려 해도 자꾸만 나도 모르게 그녀의 벌어진 가운 틈새 안으로 눈이 가는 것을 막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 그게 아주 "조금"만 더 단순한 상황이었더라면, 나는 그녀의 요구에 즉각 응했을 것이다. 내 욕구를 필사적으로 짓누르고 있는 그 "조금"의 정체는 연인의 언니와 몸을 섞는다는 사실 때문에 느껴야 하는 죄책감 따위가 결코 아니었다.
현주와 계속 사귀기 위해서 그녀의 언니가 발벗고 내게 스스로 봉사해 주겠다면, 나는 결코 그걸 거부할 위인은 아니다. 난 본능과 감각에 솔직하며, 윤리나 도덕에 얽매여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이상적인 제안이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 하나를 제외하면.
"당신이 불쌍해요."
당당함이 넘치는 모습이 오히려 이토록 가엾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는게 신기했다. 그녀가 가여웠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는게 너무도 힘들었다. 그녀는 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뭐라구요?"
"솔직히 나는 남자라서.... 현아 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성적인 유혹을 느낀건 사실이었어요. 당신이 나를 유혹하기도 했으니까요. 안 그래요?"
그 순간 왜 그렇게 강한 확신이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제야 나는 현주의 졸업식 날 내가 현아 씨의 치마 속을 보게 된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게 현아 씨의 유혹이었든 아니든 간에 이제와서 딱히 그런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부끄럽지만 당신 생각을 하면서 자위를 한 적도 있고 기회가 되면 한번 품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그 정도로 당신은 매력적이었으니까. 아마 이런 과정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우리가 다른 상황에 있을 때 내게 그런 유혹을 했다면 나는 당신에게 넘어갔겠지요. 분명 그랬을 거에요."
"그럼 성진 씨의 대답이 거짓말이란걸 인정하는 건가요?"
"아니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건 내 진심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이 너무나도 불쌍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정말 불쌍한 여자에요. 내가 제대로 설명을 할 순 없지만 살아오면서 당신처럼 불쌍한 여자를 본 적이 없어요."
짜악!
그 순간 내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의외의 일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놀라진 않았다. 심지어 아프지도 않았다. 뺨을 때린 여자의 손길마저도 불쌍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에요? 당신이 뭘 안다고."
"현아 씨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만으로도 당신이 불쌍하다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진짜 불쌍한 이유는 사랑이란 감정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에요."
"뭐, 뭐라구?"
"당신이 말한 "진실한 사랑"이란거.... 정말 이런 식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당신 말처럼 내가 사랑은 현주와 하고, 섹스는 당신과 하면서 현주에게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해준다는게 과연 가능할 것 같나요?"
"하, 하하하하하!"
현아 씨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아까처럼 광기에 찬 웃음도 아니었고, 자조적인 웃음도 아니었다.
그저 비웃음, 나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당신 같은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정말 우습네요.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이미 다른 여자들과 난잡하게 얽혀있다는걸 내가 못 느낄 것 같나요? 이런 식의 삶을 살아오면서 내게 남은 거라곤 남자의 속내를 읽어내는 능력 뿐이에요. 때로는 그 이상의 것까지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죠. 성진 씨, 당신은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걸 부정하려는건 아니에요. 내가 훌륭한 인간이라고 얘기하고 싶은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현아 씨, 누구든지 당신의 불쌍함을 지적해 줄 순 있는 거에요."
"입 닥쳐요!"
처음으로 그녀의 분노한 모습을 본다. 그녀의 노한 얼굴에서 문득 그 어느 날 현주가 처음으로 화를 냈었던 모습이 겹쳐 지나갔다. 바라보기 힘들었지만 애써 그녀의 두 눈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현아 씨가 너무 불쌍해서 지금은 당신의 몸을 봐도 흥분조차 되질 않아요."
"웃기지 마. 남자들은 다 똑같은 거야. 당신 같은 남자가 섹스 없이 현주를 계속 사랑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그게 안 되는걸 인정하고 일찌감치 현주랑 헤어지기라도 하게?"
"현아 씨가 과거의 죄책감 때문에 줄곧 현주에게 행복을 찾아주고 싶어했다는건 충분히 알겠어요. 하지만... 그걸 위해서라면 더더욱 이래서는 안 되는...."
"잘난 척 하지마!!! 솔직하게 인정하란 말이야."
화가 폭발한 그녀는 뺨을 또 한번 때리거나 테이블을 엎거나 하는 과격한 행동 대신, 오히려 노예처럼 의자에 앉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서두르는 손길로 직접 내 바지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애처롭기까지 한 그 손짓과 행위 앞에 나는 차마 말릴 생각도 못하고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남자들은 다 똑같아. 솔직하게 인정해. 내가 이런 요구를 해서 기쁘다고.... 복잡한 이야기 집어치우고 내 생각대로 하겠다고 말하란 말이야. 그게 당신의 솔직한 마음이잖아. 안 그래?"
"......"
"어려운 걸 요구하는게 아니야. 당신은 내 동생을 행복하게 해주기만 하면 돼.... 거짓이든 아니든 그딴건 상관없어. 그 애를 낫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현아 씨 말처럼 그건 어려운게 아니에요. 애초에 불가능하니까...."
"위선자 같은 새끼!"
버럭 성질을 터뜨리는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현아 씨는 순종적으로 무릎을 꿇은 채 어느새 내 바지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비록 내가 엉덩이를 들어주지 않아서 옷이 아래로 끌려내려가진 않았지만 그녀가 어찌나 처절하게 잡아당겼는지 옷이 찢어질 듯 당겨지고 있었다.
그녀가 하얗고 고운 손을 내 팬티 안으로 쑥 밀어넣어 몇 번 뒤적거리자마자, 그녀는 어렵지 않게 내 물건을 찾아냈다. 그것을 거의 억지로 힘주어 팬티 바깥으로 끄집어 내는 그녀.
"......."
상황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만큼 내 물건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축 늘어진 번데기처럼, 방금 막 사정을 끝마친 자지처럼 힘 없이 쪼그라 들어 있었다. 그걸 본 현아 씨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감정을 읽기 힘든 그녀라 한들, 지금의 그 얼굴이 굴욕을 느끼고 있는 모습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마치 부정하기라도 하듯이 내 쪼글쪼글한 자지를 덥썩 입 안에 물어 삼키는 그녀. 그런 과감한 행동은 나도 예상치 못하고 있었기에 순간 숨이 헉 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돌발적으로 입에 문 것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귀두가 입 안으로 빨려들어가자마자 온 사방에서 혀끝이 내 물건을 자극해왔다.
마치 서너개의 혀가 한번에 내 물건을 핥아주는 듯한 섬세하고 치밀한 애무. 그녀의 펠라치오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라는걸 그 와중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물리적인 자극이 직접적으로 가해지니 마음과는 상관없이 찌릿한 감각이 치고 올라오며 얼굴이 뜨거워지는걸 느낄 수 있었지만, 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이성의 끈을 붙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감정이 무너진 상태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이 정도의 애무를 가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들의 물건을 몸으로 겪어왔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불결하게 느껴지기보단 역시 너무도 안타까웠다.
"현아 씨.... 이러지 말아요."
"......."
자지를 빨던 움직임이 내 손에 의해 제지되자 현아 씨는 그 노예 같은 모습에서 나를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거의 반쯤 헐벗은 연인의 언니가 나를 표독스런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내 물건을 한 손에 쥔 채로.
"가세요."
"현아 씨."
"가버려요. 우리 대화는 여기서 끝이에요."
내 물건을 손에서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아 씨의 모습을 보며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없었던 일로 하기라도 하자는 듯, 돌아서서 가운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그녀의 등만이 내게 무언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당장 여기에서 나가라고. 그리고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
"후우."
운전대에 머리를 처박고 한숨을 쉬어본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차에서 내려 원룸텔 입구로 걸었다. 방에 들어가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밖을 싸돌아다니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 때 정말로 우습게도 누군가로부터의 위로를 마음 속으로 바랐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스스로 내린 선택에 결과와 책임이 따른다는건 어린애들도 아는 사실인데. 하물며 이건 누군가가 들어줄 수도 없는 문제다. 내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였고, 나는 그렇게 했다. 누가 여기에 위로를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선배."
하지만 서연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저 위로를 바라던 순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기뻤고, 그게 서연이였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 더 기뻤다. 그 뿐이었다.
"서, 서연아...? 너 여긴 어떻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원룸텔 입구에는, 비를 피하며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서연이가 있었다. 나는 심장이 터질 듯이 놀랐지만 내 우울한 기분이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방해했고, 서연이 역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다름 없이 무척 담담해 보였다.
"지난 번에 한 번 와봤으니까요. 대충 기억이 났어요."
"아, 아니. 내가 묻는건 그런게 아니고.... 그러니까 웬 일로....?"
내 질문에 서연이는 구두의 힐 끝으로 애꿎은 건물 바닥을 슥 긁었다. 그녀 답지 않게 푹 숙인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낼 수 있었지만 나는 서연이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냥... 언제 들어오나 궁금해서요."
문득 아까 캠퍼스에서 서연이와 헤어지던 순간이 기억났다. 나 때문에 기분이 많이 나빠보였던 그녀.
서연이가 나로 인해 질투를 느낄 날이 오게 될 거란 짐작을 꿈에서라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분명 오늘의 그녀는 내 주위의 여자들을 질투하고 있었다. 현주나 유정이, 심지어 현아 씨 까지도....
그래서 기분이 묘했다. 당분간은 내 얼굴도 보기 싫어할 줄 알았는데.
"내가 다른 여자랑 놀아날까봐 신경 쓰였던 거야?"
"흥... 자만하지 마세요."
귀여웠다. 한 여자로서의 서연이가 가진 여성적인 내면을 하나씩 알아간다는 것은 아주 즐거운 기분이었다.
아마 서연이와 사귀었더라도 꽤 행복했을 거야. 그 옛날엔 그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긴 했지만....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서정적인 내면에 응해줄 수 없다는게 아쉬웠다. 지금 기분이 너무 우울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었더라도 현주를 버리고 덥석 서연이를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서연이도 내가 그러지 않을 거란 사실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렇게 나를 찾아오는 걸 보면 그녀는 정말 내게 마음이 생긴 걸까? 지레짐작하여 앞서 나가고 싶진 않았지만 괜히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을 어찌할 순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녀가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으니.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비 오는데 왜 기다리고 서 있어."
"사실 방금 전화할까 생각을 하던 중이긴 했어요."
"왜 진작 하지 않고?"
"다른 여자랑 즐거운 시간 보내는데 방해 될까봐서요."
가시 돋힌 말투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그녀를 내 방으로 인도했다. 예전에 한번 들어온 적이 있어서인지.... 아니, 들어오다 못해 안에서 몸을 섞은 경험까지 있기 때문인지 그녀는 생각보다 서슴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비는 안 맞았어? 혹시 많이 젖었으면 내 옷이라도 줄게."
너무 당황했기 때문인지 조금은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가 튀어나온다. 내뱉고 나서 속으로 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서연이와 나 사이에 그런 얘기 정도는 할 수 있긴 했지만 어쩐지 조금 민망했다.
"괜찮아요."
"그, 그래. 일단 편하게 좀 앉아."
마실 것이라도 주려고 냉장고를 뒤적이고 있는데 서연이가 앉을 생각을 않고 가만히 서서 나를 보고 있다는걸 알았다. 나도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아까 봤던 그 여자.... 선배 여자친구분이랑 관련 있죠?"
"어어...? 응?"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가 조금 쭈뻣거리며 내 시선을 피한다.
"처음 봤을 땐 몰랐는데.... 생각해보니까 선배 여자친구분이랑 얼굴이 너무 닮았더군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병원에서 만났던 것도 기억 났어요. 그래서 그 분이 저더러 구면이라고 했던 거네요."
"응... 맞아. 여자친구 언니 되는 사람이야."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현주가 현아 씨와 닮았다는 사실 만으로 그런 짐작을 할 만큼 서연이도 나 모르게 현주의 얼굴을 눈여겨 봤던 것일까. 여자들의 마음이란 알면 알수록 참 신기했다.
"그 언니 되는 분이랑.... 무슨 일 있었나요?"
"응? 무슨 일이라니?"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문득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정이도 나를 보자마자 내 기분을 알아챘었지.
내가 그렇게 감정 변화가 잘 드러나는 사람인가? 아니면 생각보다 내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많은 걸지도.
어찌됐든 내가 호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세밀한 부분까지 파악해 준다는 것은 썩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서연이에게 털어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좀...."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말해 봐요."
서연이에게 털어놓을까? 어쩌면 그녀가 내 편을 들어줄지도 모르지. 그녀가 나를 옹호해준다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몰라.... 하지만 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걸까?
"말하기 힘들어요?"
입술을 달짝거리다 결국 목소리를 안으로 삼키는 내 모습을 보고 서연이도 뭔가를 느낀 것 같았다.
그녀는 대답을 재촉하기보단 그냥 얌전히 침대에 앉았다. 나도 그 옆자리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다시 한번 침묵이 흘렀지만 아까처럼 불편한 침묵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괜찮아요."
"내가 그 여자분하고 놀아날까봐 걱정했던 거야? 여친 언니란거 알았다면서?"
"그래요. 사실 처음엔 또 웬 여자가 꼬였나 싶었는데.... 그걸 떠올리고 나니까 내 오해였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그런 걱정 같은건 안 했어요. 나는 단지...."
그녀는 스타킹에 감싸인 작은 발가락으로 다시 한번 방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어색함을 피하고자 하는 그 딴청 어린 몸짓이 무얼 의미하는지 느낄 만큼, 나도 이제는 차츰 그녀를 알아가고 있었다.
"단지 그냥 선배가 보고 싶었어요."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을 잇는다. 그 한마디가 왜 그다지도 가슴을 흔들었을까...
현아 씨와의 만남 이후로 줄곧 내 마음 속에서 뭔가를 아슬아슬하게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 그 때 툭 하고 끊어진 기분이었다. 절벽 끝에 매달려 있었다가 끝내 손을 놓고 마음 편히 아래로 추락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마치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그 아늑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나는 서연이와 깊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하아..."
벌써 오래 전 일로 느껴질 만큼 아득하지만 사실은 불과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다.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서 그녀와 몰래 이렇게 뜨겁고 깊은 키스를 나누었었다. 평소와 달랐던 서정적인 키스.
지금도 그런가? 지금의 이 키스는 성욕 없는 순수한 애정의 키스일 뿐인가?
모르겠다. 사실 그런건 중요치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의 키스가 성욕 뿐만이 아닌 다른 것을 분명히 내게 전해 주고 있다는 것이니.
"선배... 안 좋은 일 있었던 거 맞군요."
"왜...?"
서로의 혀와 타액이 얽혀들며 우리는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그 조그만 틈새 사이로 목소리를 주고 받았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 사이로 그녀는 내게 감미로운 목소리를 전했다.
"느낌이 너무 달라요. 아까 전이랑...."
그런 것도 느껴지는 걸까? 서연이의 눈동자를 보면 나도 뭔가를 느낄 수 있을까 싶어 살짝 눈을 떠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 혀 끝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더 깊게 느끼려는 듯이.
"왜? 아까보다 테크닉이 형편없어?"
멋쩍은 분위기를 깨려고 농을 던져보지만 하등 쓸 데가 없었다. 되려 서연이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울해 하고 있는게 느껴져요."
"그래?"
키스를 하는 동안 그녀가 두 팔로 내 등을 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때 깨달았다. 나 또한 그녀의 목과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로 스르르 힘없이 침대에 누웠고, 그녀도 그런 내 손길을 따라 침대에 누웠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마주보고 누워서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줘도 괜찮아요. 다만 나는... 그냥 위로해 주고 싶네요. 무슨 일이던 간에..."
"섹스로 그게 위로가 될까...?"
아무리 내가 멍청하다 한들 그녀가 나와의 섹스를 원하고 있다는걸 못 느낄 만큼 둔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망설여졌다. 이런 마음으로 서연이를 안는 것이 그녀에 대한 모욕은 아닌지, 또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싶어하는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인간이긴 한건지, 온갖 관념적인 생각들이 머릿 속을 휘젓고 다니며 판단을 내리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비겁하지만 그녀에게 대신 물은 것이다.
"섹스든 키스든, 아니면 그저 이렇게 안고 있는 것이든.... 다 의미가 있어요. 남들 눈에는 우리가 난잡하게 그저 하룻밤 몸을 섞기만 하는 지저분한 관계로 보이겠지만, 지금은 그런거 신경 쓰지 말기로 해요. 우리가 해왔던 것들... 나름대로 다 의미가 있었을 거에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지금은 그 의미를 "위로"라고 생각하기로 해요. 그게 지금 선배한테 가장 필요한 것 같으니까."
그녀의 대답은 돌이켜보면 그 얼마나 다정했는지. 왠지 나는 갓난 아이처럼 순종적으로 그녀의 말에 이끌려 가는 기분이었다. 나와 그녀의 섹스는 언제나 나의 주도 아래에서 이루어지곤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처음으로 서연이는 그녀 스스로의 주도 아래 나와의 행위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내 아래를 더듬는 것이 느껴졌다. 청바지의 후크를 풀고, 지퍼를 내린다. 현아 씨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서연이의 모습에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와의 결합을 바라고 있는 내 욕구를 인정해야만 했기에 정말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연이는 바깥으로 드러난 내 자지를 조심스럽게 입에 문다. 서연이와 현아 씨 중 그 물건을 더 자극적으로 애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런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 물건은 서연이의 입을 좀 더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아 씨가 건드렸을 때는 용케도 반응하지 않았던 그것이 순식간에 힘이 들어가 빳빳해진다.
마치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현아 씨 앞에서 그토록 힘겹게 자제했던 내 무언가가, 서연이로 인해 해방 된 느낌이랄까.... 댐이 무너지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지만 그처럼 아찔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늑했고, 평온했으며, 그 느낌으로 인해 나는 위로 받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성진 씨는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 그 말이 맞긴 했다.
"서연아, 누워 봐."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옷을 하나씩 벗긴다. 오늘 나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신경 써서 입었다던 그녀의 그 세련된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벗겨나갔다. 하늘하늘한 플레어 스커트마저 벗겨져 나가자 그녀는 순식간에 알몸에 속옷과 스타킹만 입은 모습이 되었다. 나는 서둘지 않고 그녀의 맨몸 곳곳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으응...!"
손가락 끝 하나하나가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지껏 서연이와의 섹스는 우리 둘에게 있어, 서로에게 성적 쾌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행위의 교환이었다. 서연이는 나의 행위로 충분한 만족과 오르가즘을 느꼈고, 나 또한 서연이의 육체를 품음으로 하여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마치 정말로 그녀가 현주를 대신하듯, 나는 그녀의 몸 곳곳을 애정을 담아 더듬기 시작한다. 연인의 온몸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듯이, 아끼는 인형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듯이, 아까 강의실에서 내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그대로....
"하으응...."
그녀도 역시나 평소와는 다르게 반응하는 느낌이다. 성적인 절정을 향해 마구 치달아 올라가는 교미의 느낌과는 다르게 손길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애정을 그녀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그녀가 조금은 수줍어하며 몸을 꼬았고, 등과 옆구리를 더듬어가며 살결을 매만지자 그녀가 나를 두 팔로 와락 끌어 안았다. 직접적으로 성감대를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나름대로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
"응."
"오늘은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괜찮아요.... 오늘은 내가 받는 것보단 내가 해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내가 위에 올라 갈래요."
그녀와의 섹스에 있어 언제나 전희 하나만큼은 충실하게 오랜 시간을 공들여 해왔던 나였기에 그런 그녀의 유혹은 뜻 밖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이 고마웠다. 그녀가 그 부분을 포기한다는 것이 결코 적지 않은 의미임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서로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있다. 그녀가 천장을 보고 누운 내 아랫도리 위에 조심스럽게 올라 탄다. 그러고 보니 기승위로 해보는 것은 또 색다른 일이다. 서연이가 위에 올라타 내 눈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평소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서연이도 그걸 느꼈는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많이 해보자고 했잖아요."
"으응. 그랬지."
너무 빨리 삽입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한 손으로 서연이의 가랑이 사이를 살짝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이 뜨거운 여자는 또 언제 스스로 젖어들었는지 질구 부근이 약간 미끌거리고 있었다. 비록 지금까지의 섹스에서처럼 홍수가 났다거나 하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대신 내 자지도 그녀의 오랄 덕분에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에 힘입어 우린 조심스럽게, 조금은 이르게 느껴지는 삽입을 강행한다.
"으읏..."
평소와는 다른 뻑뻑한 느낌 때문인지 서연이가 조금 아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움직임을 멈추려던 내 반응을 구태여 제지하며 그녀는 힘주어 자신의 몸 속으로 나의 물건을 되려 조금 더 깊히 틀어넣는다. 귀두 부분이 서연이의 보지 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그 뻑뻑한 느낌 탓에 나는 되려 전율하고 말았다.
"서... 연아. 안 아파?"
"괜찮아요..."
첫 스타트에서 그녀가 용기를 내주었으니 그 다음은 내 몫이었다. 그녀가 더 아프지 않도록 나는 부드럽게 허리를아래로 끌어내렸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밀어올린다. 우선은 그녀의 구멍 속에 내 물건을 무사히 안착시키기 위해 천천히 느린 박동으로 리듬을 만들어 나간다.
"키스하자."
요구는 내가 했지만 먼저 입술을 덮은 것은 서연이였다.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 간의 성교라도 되는 듯이 우리는 그렇게 성기를 결합한 채로 뜨겁고 진한 키스에 빠져들었다. 혀와 혀가 얽히는 순간에도 나는 신경 써서 그녀의 안쪽으로 내 물건을 밀어넣는 일에 전념했다.
마침내 내 물건이 그녀의 자궁 부근까지 깊숙히 틀어박혔을 때, 그녀는 움찔하며 혀에 힘을 꼭 주었지만 나는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입안을 부드럽게 헤엄쳤다. 서연이의 윗입과 아랫입을 동시에 어루만지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 느낌으로 인해 나는 현아 씨의 존재를 머릿 속에서 잠시나마 지웠다. 어쩌면 현주까지도....
"하아... 하아...."
아랫입에 박은 물건이 점점 더 빠르게 넘실거릴 수록 서연이의 입에서 나오는 숨결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 날의 섹스는 우리가 그동안 줄곧 나누어왔던 것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격정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천천히 서로의 반응을 살피듯이 더듬고, 매만지고, 결합하는 것 뿐. 하지만 단지 그 뿐임에도 내 손길과 허리놀림에 반응해오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서연아..."
"하아아... 네?"
"이런 것도 괜찮아?"
내가 말하는 "이런 것"이라는게 뭘 말하는지 그녀도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몸에 관해서라면 서로에게 있어 더없이 진솔한 우리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것도 좋아요. 선배의 이런 손길도...."
"정말?"
"네. 정말이에요."
애써 잊었던 현아 씨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또 한번 뇌리에 박힌다.
강간을 당한 경험으로 인해 성적 본능을 깨닫게 된 여자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그래, 있다. 어쩌면 현아 씨는 믿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 눈 앞에도 그런 여자가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나의 행위에 의해 그것을 깨닫게 된 한 명의 여인이. 그래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녀와 나의 관계에 선을 그어왔던 걸까? 애초에 우리는 성욕으로 인해 맺어진 관계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서연이는 그렇지 않은가보다. 아무리 그게 믿기 힘든 사실이라 한들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금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모욕일 테니.
"나 정말 이상하죠, 선배...? 선배의 그런 애정 어린 손길이 나를 기쁘게 하네요. 육체적인 관계로만 지내자고 먼저 말을 꺼냈던건 나인데.... 내가 스스로 그 선을 지켜야만 하는데 나는 자꾸 그 선을 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내가 선배에게 부렸던 그 모든 투정들이 내가 했던 말을 스스로 어기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 감정에 솔직하고 싶은 걸요. 서로에게 거짓말은 하지 말자고 약속했으니까."
"서연아...."
"사실 선배 옆에 다른 여자들이 있는게 싫어요. 유성이도, 그 여자도.... 그리고 선배 여자친구까지도요."
기억도 안 날만큼 아득한 그 옛날에는 서연이가 나를 한번이라도 봐주길 애타게 기대했던 때가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에 대한 마음을 확인받고 있음에도 나는 마냥 행복하지 못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란 말인가.
"선배. 한번만 더 약속해줘요... 우리 절대 서로에게 거짓말은 않겠다고. 언제나 서로에게 솔직하겠다고...."
"그래... 그럴게. 늘 그럴 거야."
"그러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줘요. 있는 그대로."
그녀가 내 두 눈을 피하지 않고 들여다보며 물어온다. 그 태도가 현아 씨를 대할 때의 나와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몸을 연결한 채로, 서로의 피부를 느끼고 있을 때에 그런 질문을 해오다니.... 그녀 답지 않게 조금은 치사한 방법이라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랴, 그 또한 그녀의 마음인데.
"널 좋아해."
"정말인가요?"
"그래. 정말 좋아해. 빈 말 아냐...."
예전에도 그랬지만 나는 서연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좋아한다는 말은 내게 있어 상당히 비겁한 표현이었다. 핵심을 피하기 위해 조금 에둘러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서연이도 그것을 못 느낄 만큼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부디 지금은 그 이상의 요구를 해오지 않길 바랐지만, 그녀는 바로 이 순간 내게서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서연아."
"오늘은 그 말이 듣고 싶어요."
서연이는 너무도 뚜렷하게 그것을 요구해 왔다. 그녀 다운 모습이었다. 언제나 뚜렷하고 솔직한 그녀이니까.
하지만 왜 하필 지금 내게 그 한 마디를 바라는 건지....
"........"
"안 되나요?"
내 마음과는 별개로 지금은 입 밖으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나도 서연이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그 말을 내뱉고 싶었다. 무척 간단한 일이니까. 그 한 마디로 인해 서연이가 만족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주고 싶다고 느꼈다. 하지만 왜 입이 이렇게 떨어지지 않을까.
"미안해...."
결국 나는 대답 대신 사과를 한다. 차마 서연이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
"선배."
"응."
"여자는.... 가끔 그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어요."
"......"
"그러니까 선배가 너무 자책하지 말았으면 해요."
서연이는 돌아가기 전에 그런 말을 남겼다. 오늘밤 여기서 서연이를 재울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미 서연이는 충분히 내게 헌신적인 위로를 해주었다. 적어도 오늘은 그녀를 보내주는게 더 낫다.
"괜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아니야.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다는 말도 이제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공허한 말의 반복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냔 말이다.
서연이는 나를 안심시키려는지 옅게 한번 웃었다. 그리고는 내 이마와 입술에 한번씩 입을 맞추었다.
"갈게요. 그리고...."
"......"
"기분 정리 되면 말해줘요. 무슨 일인지."
그녀가 고마웠다. 하지만 가는 순간까지도 별다른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저 건물 입구로 나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을 뿐. 서연이가 떠나간 자리엔 또다시 침묵이 남았다. 다행히도 소나기는 그쳐 있었지만 비가 그친 바깥의 모습은 더욱 정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너무 싫었다.
"오늘은 어째선지 우울해 보이네."
그래서 였을까, 평소라면 놀랄 일이었겠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옆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눅눅한 공기를 타고 담배 냄새가 한껏 코 끝을 자극해왔다.
어느새 내 곁에 서 있었던 걸까? 302호 여자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부터 다른 감각들이 작동하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또 그제야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쪽도 어째선지 요즘 들어 자주 보이네요."
처음으로 그녀와 대화 다운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떠나가는 서연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비록 그 표정은 여전히 너무도 무미건조했지만, 그 눈동자가 미세하게 웃음 짓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게 된 것도 처음인 것 같다.
기분이 이상하다. 순간 뭔가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 뭔가가 필요해 보이는데... 안 그래?"
그녀는 담배 꽁초를 던져버린 손으로 두 손가락을 이용해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 둥근 시계 모양이 무얼 의미하는지 느낀 나는 속으로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정말로 모든걸 알고 있었던 걸까?
"살다보면 꼭 그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긴 하지."
"......."
그녀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를 뜰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고, 그녀 역시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 번에.... 언제 한번 찾아와도 된다고 말씀하셨죠. 그게 지금이어도 괜찮나요?"
용기내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재어보기라도 하듯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 무미건조한 눈동자가 나의 얼굴을 살폈고, 그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솜털까지 섬칫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그 기묘한 감각이 또 한번 나의 온몸을 강타했다.
"마음 대로."
그녀는 한 마디만을 내뱉고 앞장서서 계단을 올랐다.
비록 뚜렷한 승낙은 아니었지만 나는 무작정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즐거운 금요일입니다!! ^^
302호 처자에게 흥미를 가져주시는 분들이 많네요 하하
독자분들의 관심이 있을 때마다 큰 보람을 느끼는걸 보면 아무래도 글쓰기가 활력소이긴 한가 봅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까지 화이팅입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1장
그 날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여름도 다 지나갔는데 난 데 없는 소나기라니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기분을 대변하듯이 추적거리며 내려오는 빗줄기는 그 자체로 꽤 시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 비가 싫었다.
워셔에 의해 차창에 뿌려진 빗물은 계속해서 걷혀져 나갔지만 내 기분은 줄곧 먹먹했고, 그 먹먹함이 쉽게 씻겨져 나갈 것 같지 않았다. 주차장에 다다라 자동차는 멈추었지만 나는 핸들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한참을....
"잘한 걸까?"
그렇게 스스로 물었다. 아마도 그건 잘한 일이었을 게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그냥 혼란스러웠다. 도덕이나 윤리를 기준 삼아 내린 판단으로 자기 위로를 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그런 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굳이 지나간 기억을 되짚겠다는 의욕 없이도 나는 머릿 속에서 자꾸만 그 장면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 되새김이 타임 리와인더처럼 편리하게 내 대답을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선택에 대해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이 회의감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되새기는 행위는 비록 내 선택을 바꾸거나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왜" 그랬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글쎄.... 내가 정말 왜 그랬을까?
싫어도 그 순간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야 만다.
*
"싫어요."
한참을 침묵 속에 앉아있었던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현아 씨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이 그 요염한 자세 그대로 내 얼굴을 들여다 보고만 있다. 젖가슴은 물론이고 알몸의 속살이 가운 자락 안쪽으로 훤하게 들여다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요?"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마도 "좋아요." 라는 내 대답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거란 생각이 내게 들 만큼, 그녀의 태도엔 자신감이 넘쳤기에 나는 그녀가 당황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이런 내 대답까지도 예상에 두었을까?
"그럼 이게 성진 씨의 세 번째 거짓말이라고 봐도 되려나요?"
"아니. 이건 정말 내 솔직한 대답이었어요. 하지만...."
나는 되도록 그녀의 두 눈을 마주보며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에게 느꼈던 공포나 그런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지금 그녀가 너무나....
"현아 씨가 이걸 내 솔직한 마음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요. 나도 그걸 받아 들일테니까."
"무슨 의미인가요?"
"아마도 현아 씨는 못 믿을 테니까요."
감정 변화가 없던 그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화난 것 같기도 했고, 부끄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감정의 형태를 소리내어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럼 현주와 헤어져요."
"그건 현주가 결정할 일이에요."
그녀가 그렇게 말할 것이란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주의 언니로부터 그런 말을 직접 듣게 되니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과연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일까?
그건 모르겠다.
다만 여느 다른 남자들처럼 이 순간에 정당한 분노를 터뜨리지 못하는 내 처지가 너무도 한심하게 여겨졌다.
"글쎄요. 성진 씨의 난잡한 관계를 내가 직접 현주에게 들려줘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난 기왕이면 그 애가 그래도 사랑에 대한 좋은 추억을 남기길 바라는데. 그건 성진 씨도 그렇지 않나요?"
"현아 씨의 요구 하나 때문에 내가 현주와 억지로 헤어져야 한다면 그것 또한 좋지 않은 추억으로 남을 텐데요."
"그렇다 한들, 자기가 그렇게나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들과 몸을 섞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만큼은 아니겠죠. 그 애한테는 정말로 "진실한 사랑"이 필요하거든요."
차마 대꾸하지 못하는 내가 우두커니 앉아있자 현아 씨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맞은 편으로 걸어와 여전히 교태로운 몸짓으로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표정과 태도에는 "내가 이겼다."라는 듯한, 너무도 가여울 만큼의 자신감과 당당함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성진 씨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지금처럼 그 애 옆에 있어주면 돼요. 그 애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사랑을 느끼며 행복할 수 있게. 그걸 위해서라면 남자의 성욕 정도는 얼마든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요."
"......."
"어떤가요? 성진 씨에게도 솔깃한 얘기 아닌가요?"
물론 그녀의 몸은 뭇 사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도저히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남자이기에 시선을 피하려 해도 자꾸만 나도 모르게 그녀의 벌어진 가운 틈새 안으로 눈이 가는 것을 막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 그게 아주 "조금"만 더 단순한 상황이었더라면, 나는 그녀의 요구에 즉각 응했을 것이다. 내 욕구를 필사적으로 짓누르고 있는 그 "조금"의 정체는 연인의 언니와 몸을 섞는다는 사실 때문에 느껴야 하는 죄책감 따위가 결코 아니었다.
현주와 계속 사귀기 위해서 그녀의 언니가 발벗고 내게 스스로 봉사해 주겠다면, 나는 결코 그걸 거부할 위인은 아니다. 난 본능과 감각에 솔직하며, 윤리나 도덕에 얽매여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이상적인 제안이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 하나를 제외하면.
"당신이 불쌍해요."
당당함이 넘치는 모습이 오히려 이토록 가엾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는게 신기했다. 그녀가 가여웠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는게 너무도 힘들었다. 그녀는 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뭐라구요?"
"솔직히 나는 남자라서.... 현아 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성적인 유혹을 느낀건 사실이었어요. 당신이 나를 유혹하기도 했으니까요. 안 그래요?"
그 순간 왜 그렇게 강한 확신이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제야 나는 현주의 졸업식 날 내가 현아 씨의 치마 속을 보게 된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게 현아 씨의 유혹이었든 아니든 간에 이제와서 딱히 그런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부끄럽지만 당신 생각을 하면서 자위를 한 적도 있고 기회가 되면 한번 품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그 정도로 당신은 매력적이었으니까. 아마 이런 과정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우리가 다른 상황에 있을 때 내게 그런 유혹을 했다면 나는 당신에게 넘어갔겠지요. 분명 그랬을 거에요."
"그럼 성진 씨의 대답이 거짓말이란걸 인정하는 건가요?"
"아니요.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건 내 진심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이 너무나도 불쌍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정말 불쌍한 여자에요. 내가 제대로 설명을 할 순 없지만 살아오면서 당신처럼 불쌍한 여자를 본 적이 없어요."
짜악!
그 순간 내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의외의 일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놀라진 않았다. 심지어 아프지도 않았다. 뺨을 때린 여자의 손길마저도 불쌍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에요? 당신이 뭘 안다고."
"현아 씨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만으로도 당신이 불쌍하다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진짜 불쌍한 이유는 사랑이란 감정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에요."
"뭐, 뭐라구?"
"당신이 말한 "진실한 사랑"이란거.... 정말 이런 식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당신 말처럼 내가 사랑은 현주와 하고, 섹스는 당신과 하면서 현주에게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해준다는게 과연 가능할 것 같나요?"
"하, 하하하하하!"
현아 씨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아까처럼 광기에 찬 웃음도 아니었고, 자조적인 웃음도 아니었다.
그저 비웃음, 나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당신 같은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정말 우습네요.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이미 다른 여자들과 난잡하게 얽혀있다는걸 내가 못 느낄 것 같나요? 이런 식의 삶을 살아오면서 내게 남은 거라곤 남자의 속내를 읽어내는 능력 뿐이에요. 때로는 그 이상의 것까지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죠. 성진 씨, 당신은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걸 부정하려는건 아니에요. 내가 훌륭한 인간이라고 얘기하고 싶은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현아 씨, 누구든지 당신의 불쌍함을 지적해 줄 순 있는 거에요."
"입 닥쳐요!"
처음으로 그녀의 분노한 모습을 본다. 그녀의 노한 얼굴에서 문득 그 어느 날 현주가 처음으로 화를 냈었던 모습이 겹쳐 지나갔다. 바라보기 힘들었지만 애써 그녀의 두 눈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현아 씨가 너무 불쌍해서 지금은 당신의 몸을 봐도 흥분조차 되질 않아요."
"웃기지 마. 남자들은 다 똑같은 거야. 당신 같은 남자가 섹스 없이 현주를 계속 사랑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그게 안 되는걸 인정하고 일찌감치 현주랑 헤어지기라도 하게?"
"현아 씨가 과거의 죄책감 때문에 줄곧 현주에게 행복을 찾아주고 싶어했다는건 충분히 알겠어요. 하지만... 그걸 위해서라면 더더욱 이래서는 안 되는...."
"잘난 척 하지마!!! 솔직하게 인정하란 말이야."
화가 폭발한 그녀는 뺨을 또 한번 때리거나 테이블을 엎거나 하는 과격한 행동 대신, 오히려 노예처럼 의자에 앉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서두르는 손길로 직접 내 바지의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애처롭기까지 한 그 손짓과 행위 앞에 나는 차마 말릴 생각도 못하고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남자들은 다 똑같아. 솔직하게 인정해. 내가 이런 요구를 해서 기쁘다고.... 복잡한 이야기 집어치우고 내 생각대로 하겠다고 말하란 말이야. 그게 당신의 솔직한 마음이잖아. 안 그래?"
"......"
"어려운 걸 요구하는게 아니야. 당신은 내 동생을 행복하게 해주기만 하면 돼.... 거짓이든 아니든 그딴건 상관없어. 그 애를 낫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현아 씨 말처럼 그건 어려운게 아니에요. 애초에 불가능하니까...."
"위선자 같은 새끼!"
버럭 성질을 터뜨리는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현아 씨는 순종적으로 무릎을 꿇은 채 어느새 내 바지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비록 내가 엉덩이를 들어주지 않아서 옷이 아래로 끌려내려가진 않았지만 그녀가 어찌나 처절하게 잡아당겼는지 옷이 찢어질 듯 당겨지고 있었다.
그녀가 하얗고 고운 손을 내 팬티 안으로 쑥 밀어넣어 몇 번 뒤적거리자마자, 그녀는 어렵지 않게 내 물건을 찾아냈다. 그것을 거의 억지로 힘주어 팬티 바깥으로 끄집어 내는 그녀.
"......."
상황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만큼 내 물건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축 늘어진 번데기처럼, 방금 막 사정을 끝마친 자지처럼 힘 없이 쪼그라 들어 있었다. 그걸 본 현아 씨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감정을 읽기 힘든 그녀라 한들, 지금의 그 얼굴이 굴욕을 느끼고 있는 모습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마치 부정하기라도 하듯이 내 쪼글쪼글한 자지를 덥썩 입 안에 물어 삼키는 그녀. 그런 과감한 행동은 나도 예상치 못하고 있었기에 순간 숨이 헉 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돌발적으로 입에 문 것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귀두가 입 안으로 빨려들어가자마자 온 사방에서 혀끝이 내 물건을 자극해왔다.
마치 서너개의 혀가 한번에 내 물건을 핥아주는 듯한 섬세하고 치밀한 애무. 그녀의 펠라치오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라는걸 그 와중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물리적인 자극이 직접적으로 가해지니 마음과는 상관없이 찌릿한 감각이 치고 올라오며 얼굴이 뜨거워지는걸 느낄 수 있었지만, 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이성의 끈을 붙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감정이 무너진 상태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이 정도의 애무를 가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들의 물건을 몸으로 겪어왔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불결하게 느껴지기보단 역시 너무도 안타까웠다.
"현아 씨.... 이러지 말아요."
"......."
자지를 빨던 움직임이 내 손에 의해 제지되자 현아 씨는 그 노예 같은 모습에서 나를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거의 반쯤 헐벗은 연인의 언니가 나를 표독스런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내 물건을 한 손에 쥔 채로.
"가세요."
"현아 씨."
"가버려요. 우리 대화는 여기서 끝이에요."
내 물건을 손에서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아 씨의 모습을 보며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없었던 일로 하기라도 하자는 듯, 돌아서서 가운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그녀의 등만이 내게 무언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당장 여기에서 나가라고. 그리고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
"후우."
운전대에 머리를 처박고 한숨을 쉬어본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차에서 내려 원룸텔 입구로 걸었다. 방에 들어가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밖을 싸돌아다니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 때 정말로 우습게도 누군가로부터의 위로를 마음 속으로 바랐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스스로 내린 선택에 결과와 책임이 따른다는건 어린애들도 아는 사실인데. 하물며 이건 누군가가 들어줄 수도 없는 문제다. 내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였고, 나는 그렇게 했다. 누가 여기에 위로를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선배."
하지만 서연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저 위로를 바라던 순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기뻤고, 그게 서연이였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 더 기뻤다. 그 뿐이었다.
"서, 서연아...? 너 여긴 어떻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원룸텔 입구에는, 비를 피하며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서연이가 있었다. 나는 심장이 터질 듯이 놀랐지만 내 우울한 기분이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방해했고, 서연이 역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다름 없이 무척 담담해 보였다.
"지난 번에 한 번 와봤으니까요. 대충 기억이 났어요."
"아, 아니. 내가 묻는건 그런게 아니고.... 그러니까 웬 일로....?"
내 질문에 서연이는 구두의 힐 끝으로 애꿎은 건물 바닥을 슥 긁었다. 그녀 답지 않게 푹 숙인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낼 수 있었지만 나는 서연이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냥... 언제 들어오나 궁금해서요."
문득 아까 캠퍼스에서 서연이와 헤어지던 순간이 기억났다. 나 때문에 기분이 많이 나빠보였던 그녀.
서연이가 나로 인해 질투를 느낄 날이 오게 될 거란 짐작을 꿈에서라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분명 오늘의 그녀는 내 주위의 여자들을 질투하고 있었다. 현주나 유정이, 심지어 현아 씨 까지도....
그래서 기분이 묘했다. 당분간은 내 얼굴도 보기 싫어할 줄 알았는데.
"내가 다른 여자랑 놀아날까봐 신경 쓰였던 거야?"
"흥... 자만하지 마세요."
귀여웠다. 한 여자로서의 서연이가 가진 여성적인 내면을 하나씩 알아간다는 것은 아주 즐거운 기분이었다.
아마 서연이와 사귀었더라도 꽤 행복했을 거야. 그 옛날엔 그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긴 했지만....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서정적인 내면에 응해줄 수 없다는게 아쉬웠다. 지금 기분이 너무 우울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었더라도 현주를 버리고 덥석 서연이를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서연이도 내가 그러지 않을 거란 사실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렇게 나를 찾아오는 걸 보면 그녀는 정말 내게 마음이 생긴 걸까? 지레짐작하여 앞서 나가고 싶진 않았지만 괜히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을 어찌할 순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녀가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으니.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비 오는데 왜 기다리고 서 있어."
"사실 방금 전화할까 생각을 하던 중이긴 했어요."
"왜 진작 하지 않고?"
"다른 여자랑 즐거운 시간 보내는데 방해 될까봐서요."
가시 돋힌 말투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그녀를 내 방으로 인도했다. 예전에 한번 들어온 적이 있어서인지.... 아니, 들어오다 못해 안에서 몸을 섞은 경험까지 있기 때문인지 그녀는 생각보다 서슴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비는 안 맞았어? 혹시 많이 젖었으면 내 옷이라도 줄게."
너무 당황했기 때문인지 조금은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가 튀어나온다. 내뱉고 나서 속으로 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서연이와 나 사이에 그런 얘기 정도는 할 수 있긴 했지만 어쩐지 조금 민망했다.
"괜찮아요."
"그, 그래. 일단 편하게 좀 앉아."
마실 것이라도 주려고 냉장고를 뒤적이고 있는데 서연이가 앉을 생각을 않고 가만히 서서 나를 보고 있다는걸 알았다. 나도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아까 봤던 그 여자.... 선배 여자친구분이랑 관련 있죠?"
"어어...? 응?"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가 조금 쭈뻣거리며 내 시선을 피한다.
"처음 봤을 땐 몰랐는데.... 생각해보니까 선배 여자친구분이랑 얼굴이 너무 닮았더군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병원에서 만났던 것도 기억 났어요. 그래서 그 분이 저더러 구면이라고 했던 거네요."
"응... 맞아. 여자친구 언니 되는 사람이야."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현주가 현아 씨와 닮았다는 사실 만으로 그런 짐작을 할 만큼 서연이도 나 모르게 현주의 얼굴을 눈여겨 봤던 것일까. 여자들의 마음이란 알면 알수록 참 신기했다.
"그 언니 되는 분이랑.... 무슨 일 있었나요?"
"응? 무슨 일이라니?"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문득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정이도 나를 보자마자 내 기분을 알아챘었지.
내가 그렇게 감정 변화가 잘 드러나는 사람인가? 아니면 생각보다 내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많은 걸지도.
어찌됐든 내가 호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세밀한 부분까지 파악해 준다는 것은 썩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서연이에게 털어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좀...."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말해 봐요."
서연이에게 털어놓을까? 어쩌면 그녀가 내 편을 들어줄지도 모르지. 그녀가 나를 옹호해준다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몰라.... 하지만 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걸까?
"말하기 힘들어요?"
입술을 달짝거리다 결국 목소리를 안으로 삼키는 내 모습을 보고 서연이도 뭔가를 느낀 것 같았다.
그녀는 대답을 재촉하기보단 그냥 얌전히 침대에 앉았다. 나도 그 옆자리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다시 한번 침묵이 흘렀지만 아까처럼 불편한 침묵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괜찮아요."
"내가 그 여자분하고 놀아날까봐 걱정했던 거야? 여친 언니란거 알았다면서?"
"그래요. 사실 처음엔 또 웬 여자가 꼬였나 싶었는데.... 그걸 떠올리고 나니까 내 오해였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그런 걱정 같은건 안 했어요. 나는 단지...."
그녀는 스타킹에 감싸인 작은 발가락으로 다시 한번 방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어색함을 피하고자 하는 그 딴청 어린 몸짓이 무얼 의미하는지 느낄 만큼, 나도 이제는 차츰 그녀를 알아가고 있었다.
"단지 그냥 선배가 보고 싶었어요."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을 잇는다. 그 한마디가 왜 그다지도 가슴을 흔들었을까...
현아 씨와의 만남 이후로 줄곧 내 마음 속에서 뭔가를 아슬아슬하게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 그 때 툭 하고 끊어진 기분이었다. 절벽 끝에 매달려 있었다가 끝내 손을 놓고 마음 편히 아래로 추락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마치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그 아늑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나는 서연이와 깊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하아..."
벌써 오래 전 일로 느껴질 만큼 아득하지만 사실은 불과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다.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서 그녀와 몰래 이렇게 뜨겁고 깊은 키스를 나누었었다. 평소와 달랐던 서정적인 키스.
지금도 그런가? 지금의 이 키스는 성욕 없는 순수한 애정의 키스일 뿐인가?
모르겠다. 사실 그런건 중요치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의 키스가 성욕 뿐만이 아닌 다른 것을 분명히 내게 전해 주고 있다는 것이니.
"선배... 안 좋은 일 있었던 거 맞군요."
"왜...?"
서로의 혀와 타액이 얽혀들며 우리는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그 조그만 틈새 사이로 목소리를 주고 받았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 사이로 그녀는 내게 감미로운 목소리를 전했다.
"느낌이 너무 달라요. 아까 전이랑...."
그런 것도 느껴지는 걸까? 서연이의 눈동자를 보면 나도 뭔가를 느낄 수 있을까 싶어 살짝 눈을 떠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 혀 끝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더 깊게 느끼려는 듯이.
"왜? 아까보다 테크닉이 형편없어?"
멋쩍은 분위기를 깨려고 농을 던져보지만 하등 쓸 데가 없었다. 되려 서연이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울해 하고 있는게 느껴져요."
"그래?"
키스를 하는 동안 그녀가 두 팔로 내 등을 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때 깨달았다. 나 또한 그녀의 목과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로 스르르 힘없이 침대에 누웠고, 그녀도 그런 내 손길을 따라 침대에 누웠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마주보고 누워서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줘도 괜찮아요. 다만 나는... 그냥 위로해 주고 싶네요. 무슨 일이던 간에..."
"섹스로 그게 위로가 될까...?"
아무리 내가 멍청하다 한들 그녀가 나와의 섹스를 원하고 있다는걸 못 느낄 만큼 둔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망설여졌다. 이런 마음으로 서연이를 안는 것이 그녀에 대한 모욕은 아닌지, 또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싶어하는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인간이긴 한건지, 온갖 관념적인 생각들이 머릿 속을 휘젓고 다니며 판단을 내리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비겁하지만 그녀에게 대신 물은 것이다.
"섹스든 키스든, 아니면 그저 이렇게 안고 있는 것이든.... 다 의미가 있어요. 남들 눈에는 우리가 난잡하게 그저 하룻밤 몸을 섞기만 하는 지저분한 관계로 보이겠지만, 지금은 그런거 신경 쓰지 말기로 해요. 우리가 해왔던 것들... 나름대로 다 의미가 있었을 거에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지금은 그 의미를 "위로"라고 생각하기로 해요. 그게 지금 선배한테 가장 필요한 것 같으니까."
그녀의 대답은 돌이켜보면 그 얼마나 다정했는지. 왠지 나는 갓난 아이처럼 순종적으로 그녀의 말에 이끌려 가는 기분이었다. 나와 그녀의 섹스는 언제나 나의 주도 아래에서 이루어지곤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처음으로 서연이는 그녀 스스로의 주도 아래 나와의 행위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내 아래를 더듬는 것이 느껴졌다. 청바지의 후크를 풀고, 지퍼를 내린다. 현아 씨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서연이의 모습에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와의 결합을 바라고 있는 내 욕구를 인정해야만 했기에 정말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연이는 바깥으로 드러난 내 자지를 조심스럽게 입에 문다. 서연이와 현아 씨 중 그 물건을 더 자극적으로 애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런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 물건은 서연이의 입을 좀 더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아 씨가 건드렸을 때는 용케도 반응하지 않았던 그것이 순식간에 힘이 들어가 빳빳해진다.
마치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현아 씨 앞에서 그토록 힘겹게 자제했던 내 무언가가, 서연이로 인해 해방 된 느낌이랄까.... 댐이 무너지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지만 그처럼 아찔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늑했고, 평온했으며, 그 느낌으로 인해 나는 위로 받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성진 씨는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 그 말이 맞긴 했다.
"서연아, 누워 봐."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옷을 하나씩 벗긴다. 오늘 나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신경 써서 입었다던 그녀의 그 세련된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벗겨나갔다. 하늘하늘한 플레어 스커트마저 벗겨져 나가자 그녀는 순식간에 알몸에 속옷과 스타킹만 입은 모습이 되었다. 나는 서둘지 않고 그녀의 맨몸 곳곳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으응...!"
손가락 끝 하나하나가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지껏 서연이와의 섹스는 우리 둘에게 있어, 서로에게 성적 쾌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행위의 교환이었다. 서연이는 나의 행위로 충분한 만족과 오르가즘을 느꼈고, 나 또한 서연이의 육체를 품음으로 하여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마치 정말로 그녀가 현주를 대신하듯, 나는 그녀의 몸 곳곳을 애정을 담아 더듬기 시작한다. 연인의 온몸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듯이, 아끼는 인형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듯이, 아까 강의실에서 내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그대로....
"하으응...."
그녀도 역시나 평소와는 다르게 반응하는 느낌이다. 성적인 절정을 향해 마구 치달아 올라가는 교미의 느낌과는 다르게 손길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애정을 그녀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그녀가 조금은 수줍어하며 몸을 꼬았고, 등과 옆구리를 더듬어가며 살결을 매만지자 그녀가 나를 두 팔로 와락 끌어 안았다. 직접적으로 성감대를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나름대로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
"응."
"오늘은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괜찮아요.... 오늘은 내가 받는 것보단 내가 해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내가 위에 올라 갈래요."
그녀와의 섹스에 있어 언제나 전희 하나만큼은 충실하게 오랜 시간을 공들여 해왔던 나였기에 그런 그녀의 유혹은 뜻 밖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이 고마웠다. 그녀가 그 부분을 포기한다는 것이 결코 적지 않은 의미임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서로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있다. 그녀가 천장을 보고 누운 내 아랫도리 위에 조심스럽게 올라 탄다. 그러고 보니 기승위로 해보는 것은 또 색다른 일이다. 서연이가 위에 올라타 내 눈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평소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서연이도 그걸 느꼈는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많이 해보자고 했잖아요."
"으응. 그랬지."
너무 빨리 삽입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한 손으로 서연이의 가랑이 사이를 살짝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이 뜨거운 여자는 또 언제 스스로 젖어들었는지 질구 부근이 약간 미끌거리고 있었다. 비록 지금까지의 섹스에서처럼 홍수가 났다거나 하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대신 내 자지도 그녀의 오랄 덕분에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에 힘입어 우린 조심스럽게, 조금은 이르게 느껴지는 삽입을 강행한다.
"으읏..."
평소와는 다른 뻑뻑한 느낌 때문인지 서연이가 조금 아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움직임을 멈추려던 내 반응을 구태여 제지하며 그녀는 힘주어 자신의 몸 속으로 나의 물건을 되려 조금 더 깊히 틀어넣는다. 귀두 부분이 서연이의 보지 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그 뻑뻑한 느낌 탓에 나는 되려 전율하고 말았다.
"서... 연아. 안 아파?"
"괜찮아요..."
첫 스타트에서 그녀가 용기를 내주었으니 그 다음은 내 몫이었다. 그녀가 더 아프지 않도록 나는 부드럽게 허리를아래로 끌어내렸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밀어올린다. 우선은 그녀의 구멍 속에 내 물건을 무사히 안착시키기 위해 천천히 느린 박동으로 리듬을 만들어 나간다.
"키스하자."
요구는 내가 했지만 먼저 입술을 덮은 것은 서연이였다.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 간의 성교라도 되는 듯이 우리는 그렇게 성기를 결합한 채로 뜨겁고 진한 키스에 빠져들었다. 혀와 혀가 얽히는 순간에도 나는 신경 써서 그녀의 안쪽으로 내 물건을 밀어넣는 일에 전념했다.
마침내 내 물건이 그녀의 자궁 부근까지 깊숙히 틀어박혔을 때, 그녀는 움찔하며 혀에 힘을 꼭 주었지만 나는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입안을 부드럽게 헤엄쳤다. 서연이의 윗입과 아랫입을 동시에 어루만지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 느낌으로 인해 나는 현아 씨의 존재를 머릿 속에서 잠시나마 지웠다. 어쩌면 현주까지도....
"하아... 하아...."
아랫입에 박은 물건이 점점 더 빠르게 넘실거릴 수록 서연이의 입에서 나오는 숨결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 날의 섹스는 우리가 그동안 줄곧 나누어왔던 것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격정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천천히 서로의 반응을 살피듯이 더듬고, 매만지고, 결합하는 것 뿐. 하지만 단지 그 뿐임에도 내 손길과 허리놀림에 반응해오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서연아..."
"하아아... 네?"
"이런 것도 괜찮아?"
내가 말하는 "이런 것"이라는게 뭘 말하는지 그녀도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몸에 관해서라면 서로에게 있어 더없이 진솔한 우리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것도 좋아요. 선배의 이런 손길도...."
"정말?"
"네. 정말이에요."
애써 잊었던 현아 씨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또 한번 뇌리에 박힌다.
강간을 당한 경험으로 인해 성적 본능을 깨닫게 된 여자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그래, 있다. 어쩌면 현아 씨는 믿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 눈 앞에도 그런 여자가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나의 행위에 의해 그것을 깨닫게 된 한 명의 여인이. 그래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녀와 나의 관계에 선을 그어왔던 걸까? 애초에 우리는 성욕으로 인해 맺어진 관계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서연이는 그렇지 않은가보다. 아무리 그게 믿기 힘든 사실이라 한들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금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모욕일 테니.
"나 정말 이상하죠, 선배...? 선배의 그런 애정 어린 손길이 나를 기쁘게 하네요. 육체적인 관계로만 지내자고 먼저 말을 꺼냈던건 나인데.... 내가 스스로 그 선을 지켜야만 하는데 나는 자꾸 그 선을 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내가 선배에게 부렸던 그 모든 투정들이 내가 했던 말을 스스로 어기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 감정에 솔직하고 싶은 걸요. 서로에게 거짓말은 하지 말자고 약속했으니까."
"서연아...."
"사실 선배 옆에 다른 여자들이 있는게 싫어요. 유성이도, 그 여자도.... 그리고 선배 여자친구까지도요."
기억도 안 날만큼 아득한 그 옛날에는 서연이가 나를 한번이라도 봐주길 애타게 기대했던 때가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에 대한 마음을 확인받고 있음에도 나는 마냥 행복하지 못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란 말인가.
"선배. 한번만 더 약속해줘요... 우리 절대 서로에게 거짓말은 않겠다고. 언제나 서로에게 솔직하겠다고...."
"그래... 그럴게. 늘 그럴 거야."
"그러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줘요. 있는 그대로."
그녀가 내 두 눈을 피하지 않고 들여다보며 물어온다. 그 태도가 현아 씨를 대할 때의 나와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몸을 연결한 채로, 서로의 피부를 느끼고 있을 때에 그런 질문을 해오다니.... 그녀 답지 않게 조금은 치사한 방법이라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랴, 그 또한 그녀의 마음인데.
"널 좋아해."
"정말인가요?"
"그래. 정말 좋아해. 빈 말 아냐...."
예전에도 그랬지만 나는 서연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좋아한다는 말은 내게 있어 상당히 비겁한 표현이었다. 핵심을 피하기 위해 조금 에둘러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서연이도 그것을 못 느낄 만큼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부디 지금은 그 이상의 요구를 해오지 않길 바랐지만, 그녀는 바로 이 순간 내게서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서연아."
"오늘은 그 말이 듣고 싶어요."
서연이는 너무도 뚜렷하게 그것을 요구해 왔다. 그녀 다운 모습이었다. 언제나 뚜렷하고 솔직한 그녀이니까.
하지만 왜 하필 지금 내게 그 한 마디를 바라는 건지....
"........"
"안 되나요?"
내 마음과는 별개로 지금은 입 밖으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나도 서연이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그 말을 내뱉고 싶었다. 무척 간단한 일이니까. 그 한 마디로 인해 서연이가 만족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주고 싶다고 느꼈다. 하지만 왜 입이 이렇게 떨어지지 않을까.
"미안해...."
결국 나는 대답 대신 사과를 한다. 차마 서연이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
"선배."
"응."
"여자는.... 가끔 그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어요."
"......"
"그러니까 선배가 너무 자책하지 말았으면 해요."
서연이는 돌아가기 전에 그런 말을 남겼다. 오늘밤 여기서 서연이를 재울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미 서연이는 충분히 내게 헌신적인 위로를 해주었다. 적어도 오늘은 그녀를 보내주는게 더 낫다.
"괜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아니야.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다는 말도 이제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공허한 말의 반복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냔 말이다.
서연이는 나를 안심시키려는지 옅게 한번 웃었다. 그리고는 내 이마와 입술에 한번씩 입을 맞추었다.
"갈게요. 그리고...."
"......"
"기분 정리 되면 말해줘요. 무슨 일인지."
그녀가 고마웠다. 하지만 가는 순간까지도 별다른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저 건물 입구로 나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을 뿐. 서연이가 떠나간 자리엔 또다시 침묵이 남았다. 다행히도 소나기는 그쳐 있었지만 비가 그친 바깥의 모습은 더욱 정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너무 싫었다.
"오늘은 어째선지 우울해 보이네."
그래서 였을까, 평소라면 놀랄 일이었겠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옆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눅눅한 공기를 타고 담배 냄새가 한껏 코 끝을 자극해왔다.
어느새 내 곁에 서 있었던 걸까? 302호 여자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부터 다른 감각들이 작동하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또 그제야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쪽도 어째선지 요즘 들어 자주 보이네요."
처음으로 그녀와 대화 다운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떠나가는 서연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비록 그 표정은 여전히 너무도 무미건조했지만, 그 눈동자가 미세하게 웃음 짓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게 된 것도 처음인 것 같다.
기분이 이상하다. 순간 뭔가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 뭔가가 필요해 보이는데... 안 그래?"
그녀는 담배 꽁초를 던져버린 손으로 두 손가락을 이용해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 둥근 시계 모양이 무얼 의미하는지 느낀 나는 속으로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정말로 모든걸 알고 있었던 걸까?
"살다보면 꼭 그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긴 하지."
"......."
그녀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를 뜰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고, 그녀 역시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 번에.... 언제 한번 찾아와도 된다고 말씀하셨죠. 그게 지금이어도 괜찮나요?"
용기내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재어보기라도 하듯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 무미건조한 눈동자가 나의 얼굴을 살폈고, 그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솜털까지 섬칫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그 기묘한 감각이 또 한번 나의 온몸을 강타했다.
"마음 대로."
그녀는 한 마디만을 내뱉고 앞장서서 계단을 올랐다.
비록 뚜렷한 승낙은 아니었지만 나는 무작정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즐거운 금요일입니다!! ^^
302호 처자에게 흥미를 가져주시는 분들이 많네요 하하
독자분들의 관심이 있을 때마다 큰 보람을 느끼는걸 보면 아무래도 글쓰기가 활력소이긴 한가 봅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까지 화이팅입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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