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무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라 서두에 짤막한 공지를 드리고 싶습니다 ㅠㅠ
오늘에야 게시판에 공지를 남기긴 했지만 그동안 아무 소식이 없어서 기다리신 분들께 죄송해요
쪽지나 게시판을 통해서 안부를 묻거나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이 많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집안사정으로 꽤 오래 글을 쓰지 못했다가 지금은 다시 글을 써보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간 경황이 없어 1부의 수정작업을 아직 다 끝내지 못한 터라 연재처 문제는 12월이 되어서야
뚜렷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 예상으로는 더 빨리 진행을 하려고 했으나 중간에 제 사정으로 생각보다 지연되어 버렸네요...
지금은 1부의 프롤로그 작업과 원고에 새로이 삽입할 부분 등을 추가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연재처나 웹툰화에 대한 문제는 초기에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면 소라 독자분들에게
가장 먼저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타임 리와인더와 더불어 새로 쓰기 시작한 글을 함께 올리고 가려 합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거듭 죄송하고, 조금이나마 보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감사합니다. )
*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2부 6장
어쩌면 엄마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순전히 미련 때문이었다. 죽음으로써 정해져 있는 누군가의 운명을 바꿔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과율을 깨뜨리는 명백한 위반행위나 다름없으니까.
그 대가는 죽음이다. 아니, 죽음도 아닌 완전한 소멸이다. 더 이상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나의 흔적은 이 세상에서……, 수도 없이 쪼개어진 그 무수한 시간의 틈 속에서도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나’가 나의 자리를 대신하겠지.
‘두려워.’
미란은 그것이 두려웠다. 이제는 나이마저 망각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존재해왔지만 여전히 그것이 무서웠고, 앞으로 몇 번을 더 시간을 되감는다 한들 그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해, 엄마……. 나는 착한 딸이 아니야. 엄마를 위해 죽을 용기조차 없는 년인걸. 하지만 나도 행복을 꿈꾸고 싶어. 다시 한 번 오빠의 얼굴을 보면서 마주 웃고 싶어……. 그 정도는 원해도 되는 거잖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는 내 모습이 바보 같아 보여?’
서글펐다. 서글프지만 눈물이 흐르지 않아서 더 서글펐다. 언젠가부터 눈물을 흘리는 일도 점점 줄어만 갔다. 이제는 그저 메말라가고 있는 썩은 고목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미란은 여느 때처럼 눈물 대신 담배연기를 허공에 흘렸다. 긴 세월 내도록 담배를 태워왔지만 미란의 몸은 병들지 않았다. 아니, 병들 수도 없었다. 노화는 물론이고 신체의 모든 기관은 이미 활동을 완전히 멈추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녀는 ‘살아있는’ 인간도 아닌 셈이었다.
이제 그녀의 육신은 그저 앞날을 지켜보기 위해 하염없이 존재하고만 있을 뿐인, 오직 그 목적 하나를 위해 숨 쉬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 나무 조각 같은 껍데기에 대체 무슨 미련이 남았기에 자꾸만 이런 무의미한 짓을 반복하고 있단 말인가……? 대체 왜?
‘엄마를 살리기 위해 태어난 딸이라……’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죽기 위해 태어난 목숨이라니 너무 불쌍하면서도 우습지 않은가. 마치 짐승과도 같은 흐느낌이 속에서부터 차올라 미란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하하…… 하하하.”
그러면서도 그녀의 메마른 두 눈동자는 한 여인의 뒷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인한 여인의 등……. 하지만 미란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냘파 보이는 등에 지나지 않았다. 암세포가 이미 퍼지기 시작한 여인의 몸은 마치 그것을 감추기 위해 더 씩씩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보 같으니.”
언제나처럼 여인은 미란의 말을 듣지 못했다.
*
쨍!
바닥에 떨어진 유리컵이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산산이 조각났다. 성진은 혀를 차며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을 천천히 쓸고 담아 수습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사무실 직원 몇 명이 다가와 성진을 도우려 들었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아, 괜찮으니까 하던 일들 하세요. 소란 피워서 미안해요.”
“좀 도와드릴게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수습한 성진은 뒤숭숭한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아내가 준 머그컵을 실수로 깨뜨린 것이 못내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오늘은 아침부터 내내 기분이 이상했었다.
‘어젯밤 꿈자리가 좀 사나웠었나? 기억이 안 나는걸.’
성진은 천천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유리면에 비치는 모습은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그 너머로 다른 여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내의 얼굴이 아니었다.
‘지난번에는 몸도 아파 보였는데…….’
유정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엔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동시에 물씬 차올랐다. 오늘은 아내에게 야근이 있다고 말해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퇴근길에 잠깐 들렀다 가는 것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한숨을 뱉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도 마찬가지 심정일까? 어쩌면 유정에게 그만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라고 권유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도리일지도 모른다.
‘잠깐 얼굴만 보고 오자. 같이 저녁은 못 먹더라도…….’
미리 연락을 해둘까 하다가 문득 그러지 않기로 했다. 식사조차 함께 해주지 못하는 처지에 잠깐 머물고 가겠다는 말을 꺼낸다는 것이 너무도 염치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뱉는 순간 스스로가 너무도 부끄럽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성진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불쑥 찾아가더라도 유정이 분명 자신을 반겨줄 것임을. 그녀는 그런 여인이었고…… 그래서 그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
“그게 뭐야?”
용수의 질문에 민혁은 손에 쥐고 있던 공책을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그러자 용수는 기분이 상했는지 더더욱 민혁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아, 뭔데 그래? 야한 그림이라도 돼?”
“아무 것도 아니야.”
“뭔데? 보여줘.”
옆에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아도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민혁을 보채는 용수의 언행을 나무라며 나섰을 그녀였지만, 요새 들어 수상쩍게 행동하는 민혁에 대한 궁금증을 참기가 힘들었나보다.
결국 민혁은 어쩔 수 없이 공책을 펴서 두 친구에게 내용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공책 바닥을 빼곡하게 메운 그림을 확인한 두 친구의 얼굴은 더더욱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뭔데?”
“그냥. 요새 호기심이 생기는 물건이 좀 있어서.”
공책 안쪽에는 온통 알 수 없는 도면에 대한 스케치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 용도를 도무지 짐작하기 힘든 물건이었기에 용수의 눈에는 그냥 단순한 낙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 최민혁이라는 친구가 여느 또래들처럼 의미 없는 낙서를 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면, 아마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네가 별 의미도 없는 도면을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있을 녀석은 아닌데……. 솔직히 말해봐. 이거 어디다가 쓰려는 물건이야? 네 발명품이야?”
“모, 몰라. 난 그냥 돕기만 하고 있어서…….”
“돕다니? 누구를?”
“아, 그건…… 비밀.”
“뭐야?”
버럭 성을 내는 용수를 피해서 민혁은 달아나듯 교실을 빠져나왔다. 운동장 나무 밑에 자리를 잡은 민혁은 다시 조심스럽게 공책을 펼쳐들어 도면을 들여다보았다.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그 괴상한 도면은 요즘 민혁에게 있어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새 일주일째구나.’
그 날, 옥상에서 미란의 일을 도왔던 이후로 민혁에게는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학교가 끝나고 나서 미란의 빌라로 찾아가는 것이야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이제는 멀찍이서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무언가를 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민혁은 그녀가 만들고 있는 그 조잡한 기계장치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한 쓰임새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구조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타고난 그의 소질은 적어도 설계적인 측면에서의 도움을 줄 수는 있었기에 그는 그 때 이후로 줄곧 이러한 도면의 구상 작업에 몰두해 온 것이다.
돌이켜보면 미란은 민혁에게 그 일을 함께 하자거나 도움을 달라는 식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가 끼어드는 것을 말리거나 예전처럼 격한 거부반응을 보이지도 않았기에, 민혁은 그것을 좋은 징조로써 해석하기로 했다. 그녀의 진의야 어쨌든 간에 이 기회를 통해서 미란과 가까워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궁금하긴 해. 대체 어디다 쓰는 물건일까?’
용수 역시 도면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름대로 영재 소리를 듣는 용수와 정아였지만 그들의 눈으로도 이 도면의 쓰임새를 파악하긴 힘들었던 것이다. 하기야 자만심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알아볼 수 없다면 다른 누가 보더라도 마찬가지일거라는 것이 민혁의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 물건은 기존의 역학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있어. 이런 식의 운동 원리로 구동시킬 수 있는 기계는 이 세상에 없다구……. 그걸 모를 애가 아닐 텐데.’
미란은 천재다. 민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시험에서 자신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다. 민혁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 비정상적일만큼 유별난 천재성을 줄곧 피부로 느껴왔었다.
그렇기에 민혁은 그녀가 이 논리를 벗어난 괴이한 도면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강한 흥미를 느꼈다. 대체 그녀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물건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인지…… 민혁은 그것이 꼭 알고 싶었다.
‘아무튼 잘 된 일이야. 매일 볼 수 있는 구실이 생겼으니까.’
그 마음은 이미 순수한 궁금증을 넘어선,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어떤 특별한 호기심이었다. 민혁도 그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이러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딱히 그 애매한 감정을 무어라고 정의할 수가 없었다.
*
“오늘따라 재호가 좀 이상하네요, 한 선생님.”
“그런가요?”
유정은 박 선생의 말을 듣고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재호는 아침부터 내내 유정의 모습을 연신 흘끗거리며 한 번씩 겁에 질린 표정을 짓거나 몸을 움찔거리곤 했다. 하기야 자기 아버지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놓았으니 어린애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하면서도 무서웠을까.
“따끔하게 혼이라도 내신 건가요? 한 선생님을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글……쎄요.”
재호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유정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작자들은 호된 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치근덕대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요새는 쉽게 지치는 것 같아. 병원에 한번 가봐야 할까?’
잠을 깊게 못 자서 그런 건지 몸이 왠지 무겁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검진이라도 받아야할까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대로 일을 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이번에도 그 생각을 그저 기우로 넘겼다.
퇴근길에 오른 유정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미란의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거니와, 오늘은 어쩐지 반가운 얼굴이 찾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대감을 품었다가 실망으로 그친 경우도 허다했지만 매번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소녀처럼 들뜨는 자신의 모습이 유정은 스스로도 꽤 우습다고 생각했다.
*
“아, 안녕?”
“…….”
비록 접점이 생겼다고는 해도 미란의 태도가 살가워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민혁의 인사에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 알 수 없는 기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민혁은 굴하지 않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적어도 이제 이 옥상에 그가 찾아오는 것을 그녀가 거부하지 않는 것만 해도 좋았다.
“오늘은 왜…… 아무 것도 안하고 있어?”
하지만 민혁은 최근 들어 그녀가 여기서 매일같이 살펴보고 있었던 그 수상한 기계장치가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미란은 마치 그 기계에 대해 연구하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러니까 그가 처음 미란을 훔쳐보기 시작했을 그 무렵처럼, 오늘은 그저 멍한 눈으로 동네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미란의 모습이 꽤 오랜만이기도 했거니와, 생각해보니 그녀가 이렇게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가까이에서 미란을 본 적이 좀체 없었다는 사실을 민혁은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미란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얌전히 곁에 앉아서 그녀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불청객이 찾아올 거야.”
“뭐?”
그런 그의 시선이 거슬렸기 때문인지, 미란은 대뜸 입을 열었다.
“너보다 더 보기 싫은 누군가가 올 것 같아. 그것도 두 명씩이나……”
“무, 무슨 말이야?”
“보면 알아. 한 사람은 너도 잘 아는 얼굴일 테니까.”
뜻 모를 말을 툭툭 늘어놓는 게 미란의 특징임을 이제는 민혁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기이한 언행은 왠지 조금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미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버렸다.
“돌아가.”
“으, 응? 왜?”
“오늘은 네가 할 일이 없어.”
가타부타 더 설명도 하지 않고는 미란은 그 길로 옥상을 떠났다. 남겨진 민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에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자리만 눈으로 쫓았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보려고 준비도 많이 해왔는데…….
‘정말 종잡을 수가 없구나. 여자들은 원래 저런 걸까?’
하긴 엄마도 아빠에게 매번 틱틱대며 화를 내다가도 밤만 되면 풀어지곤 했었지. 아빠에게는 왠지 엄마의 화를 풀어줄 수 있는 열쇠 같은 게 있는 것 같았어. 나한테도 그런 게 필요한 걸까? 다음에 아빠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어?’
생각에 잠겨있던 민혁은 문득 옥상 아래를 내려다보고 놀랐다. 옥상을 떠난 그녀가 어느새 바깥으로 내려가 있었던 것이다. 미란은 특유의 그 정처 없는 발걸음으로 빌라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따라 내려가 볼까 싶었지만 왠지 지금 그녀를 쫓아갔다간 미움을 받을 것만 같아서 민혁은 고민했다.
그런 그녀에게로 문득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유심히 살펴보니 한 여인이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띌 만큼 머리를 무척 길게 기른 여인…….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민혁은 그 여인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 유난히 긴 머리카락 때문이었을까?
미란은 여인의 품으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민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품에 안긴 미란의 머리를 쓰다듬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민혁은 직감적으로 여인이 미란의 가족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저 분이 미란이의 어머니……?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분위기가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내려가서 인사라도 드리면 미란이가 화내겠지?’
하지만 민혁의 고민은 거기서 멈추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인과 미란을 향해 낯선 남자들 무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미란아,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
“왜?”
유정은 인상을 찡그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살다보면 가끔 예감이 빗나가는 일도 종종 있다지만 이건 불쾌해도 너무 불쾌했다. 반가운 얼굴이 찾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 대신 이런 꼴도 보기 싫은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설마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이 빌어먹을 년…….”
재호의 아비인 그 병호라는 작자의 얼굴엔 여전히 유정에게 얻어맞았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었다. 눈덩이엔 피멍이 들고 뺨은 퉁퉁 불어있었지만 그는 유정의 얼굴을 보자 이를 부드득 갈았다. 게다가 그의 등 뒤로는 몇몇 사내들이 더 줄지어 서있었기에 유정은 골치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구제불능이란 건 이런 인간을 두고 쓰는 말이겠지……?
“무슨 볼일이죠?”
“무슨 볼일이냐고? 네년이 더 잘 알 텐데. 우리 얘기가 아직 다 안 끝났잖아?”
“글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딸아이 앞이니까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소중한 딸아이 위험하게 만들기 싫으면 잠자코 따라오기나 하지 그래?”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쉰 유정은 미란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금방 올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흠…….”
미란은 아무 대답도 않고 그저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병호는 미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생각이 바뀌었는지 뒤에 서있던 사내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니야, 애도 데리고 가.”
“저 꼬마애도요?”
“그래. 딸년 보는 앞에서 망신을 줘야 고분고분해질 테니까.”
사내들 가운데 하나가 미란에게로 손을 뻗자, 유정의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한 빠르기로 그 손을 쳐내고는 그대로 사내의 목젖 부근을 가격했다. 급소를 맞은 사내가 헛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섰지만 유정은 허깨비 같은 움직임으로 몸을 비틀어 사내의 인중을 팔꿈치로 연달아 찍어버렸다.
“컥!”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내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유정이 날카로운 눈으로 병호를 노려보자 그는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얻어맞았을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것이 그리도 수치스러웠는지 그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사내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잡아! 잡아서 차에 태워.”
“하지만 사장님, CCTV 같은 거에 걸리기라도 하면……”
“등신…… 이런 후진 빌라에 그런 게 있을 것 같냐? 얼른 태워, 딸년도 같이.”
남은 사내들이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하자 유정은 이를 악물었다. 가뜩이나 숫자도 많은데 미란을 신경 쓰면서 이들을 모두 제압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어쩐지 어제부터 몸에서 자꾸만 느껴지고 있는 이 심상치 않은 낌새는…….
“당장 잡아와!”
하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내들이 동시에 유정에게로 달려들었다.
*
‘뭐, 뭐야? 싸움?’
옥상에서 지켜보고 있던 민혁은 이 느닷없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란이 그녀의 어머니와 만나는가 싶더니, 이후에 나타난 험상궂은 사내들 여럿이 갑자기 그녀들에게로 달려든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미란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민혁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몸놀림으로 사내들을 바닥에 나뒹굴게 만들고 있었다.
‘위험해…… 이, 일단 경찰에 신고를……’
여인 한 명을 상대로 남자들이 여럿 달려드는 상황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아보였고, 게다가 미란이 관련되어 있으니 도저히 못 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민혁은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래쪽에서 소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
“뭐야, 이 여자……?”
사내들 중 하나가 어안이 벙벙해져 중얼거렸다. 여럿이서 달려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사내 세 명이 쓰러진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치명적인 급소를 눈 깜짝할 사이에 얻어맞고 바닥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평범한 년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게 뒤에서 덮치라고 했건만 자신 있다며 나서더니……. 그 년 못 잡으면 네놈들 전부 모가지 날아갈 줄 알아.”
무리들 중 절반이 나가떨어지자 사내들도 바짝 긴장하는 것 같았다. 병호는 그럴수록 추하게 소리치며 사내들을 더욱 재촉할 뿐이었다. 유정은 숨을 고르며 미란이 자신의 등 뒤에 안전하게 서있는지를 재차 확인했다.
‘빨리 처리해야겠어. 숨이……’
몸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 빠르게 움직인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호흡이 흐트러지고 눈앞이 어질어질한 느낌이었다. 하필 이럴 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달려들어 붙잡으려드는 사내의 손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유정은 그들의 정수리, 인중, 목, 명치, 무릎 등 노리기 쉬운 급소만을 쏜살같은 움직임으로 가격했다.
급소를 공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완력으로는 도저히 성인 남성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공격만을 가하는 것이 그녀에게 있어선 유일한 수단이었다. 게다가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은 지금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그녀는 조금 과감하더라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상대를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윽…….’
그 순간 신경이 일순 끊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몸속에서 내내 느껴졌던 적신호이긴 했지만 이번엔 충격이 심했다. 몸을 무리하게 움직였기 때문일까? 그러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또 하나의 사내가 달려들었다.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사내가 눈치 챈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녀의 빈틈을 헤집은 셈이었다.
“큭…….”
통증으로 그녀가 잠시 주춤한 사이에 사내는 유정을 뒤에서 단단히 붙들었고, 유정의 앞에서 달려든 또 다른 사내가 그녀의 복부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유정은 이를 악물었지만 몸속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더불어 아랫배에 가해진 둔탁한 충격이 뒤섞여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하! 좋아, 잘했어!”
병호는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에게 붙들려 꼼짝 못하게 된 유정에게로 천천히 다가온 그는 히죽 웃음을 지었다.
“어때? 아프지? 역시 계집년답게 맷집은 좋지 못한걸.”
“…….”
“지금이라도 여기서 옷 벗고 애원하면 곱게 데려가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더 험한 꼴 나기 전에 고분고분하게 굴지 그래?”
유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병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엄마.”
미란의 낮고 가느다란 목소리는 신기하게도 그 순간,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유정이 고개를 돌리니, 마치 유령처럼 음산한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미란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미란아. 엄마가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잖아.”
유정은 지쳐있던 것도 아랑곳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미란에게 말했다. 하지만 미란은 들은 체도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 이 사람들 죽여도 돼?”
“…….”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너무도 섬뜩한 말이었다. 말의 내용을 떠나서 그 음색에서 묻어나는 느낌이 너무도 진심처럼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말이긴 했지만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분명히 한순간 공포를 느꼈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얼른 집에 들어가. 엄마 금방 올라갈 테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정의 태도는 너무나 담담해보였다.
“그래서 어쩔 건데? 저 놈 말대로 옷 벗고 애원하게?”
“글쎄…… 진짜 그래야하려나?”
모녀가 이 상황에서 위기상황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병호는 잠시 놓고 있었던 정신을 찾은 것 같았다. 부아가 치민 그가 뭐라고 위협을 가하려던 찰나에, 마침 또 다른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만 해!”
“뭐?”
갑자기 터져 나온 알 수 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 자리에 서있던 이는 그저 자그마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바로잡으며 휴대폰을 들어보이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 나쁜 놈……, 아니, 이 나쁜 사람들! 당신들 깡패들이지?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당장 도망가는 게 좋을걸!”
“뭐야, 저 꼬마는?”
“이 여자 아들인가?”
모두가 황당해하는 사이, 유일하게 소년의 얼굴을 알아본 미란은 인상을 찡그리며 소년에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너 뭐해?”
“네, 네가 위험해보여서…….”
민혁은 여전히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어수룩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미란은 여전히 매몰찼다.
“신고를 했으면 위에서 계속 보고 있었어야지, 뭐 하러 기어 내려와?”
“그게…… 너무 걱정이 돼서……”
웅얼웅얼 말을 흐리는 민혁의 모습을 보고 미란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 틈에 뒤에서 달려든 사내가 민혁을 붙잡고 말았다. 억센 체구의 사내에게 순식간에 제압된 민혁은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으아악!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그 애새끼 입 막아! 그리고 이것들 얼른 차에 태워!”
뒤편에는 어느새 밴 차량 한 대가 다가와 있었다. 사내들이 유정과 미란, 그리고 민혁을 차에 태우려고 들자 그제야 잠자코 있었던 유정이 입을 열었다.
“애들은 놔줘.”
“입 닥쳐, 저것들 보는 앞에서 널 걸레로 만들어 줄 테니까.”
“말을 못 알아듣는군. 애들 눈에 피 튀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멀리 보내려고 했던 건데…….”
“뭐?”
그 순간 유정의 발뒤꿈치가 뒤에서 그녀를 붙들고 있던 사내의 낭심을 정확하게 올려쳤다. 급소 중의 급소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사내는 비명을 지를 생각도 못하고 눈에서 흰자위를 드러내며 줄 끊어진 인형처럼 뒤로 허물어졌다.
사내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병호가 채 인지하기도 전에, 유정은 올려쳤던 발을 그대로 다시 휘둘러 병호의 관자놀이에 돌려차기를 꽂아 넣었다. 퓨즈가 끊기듯이 한순간 눈앞이 뚝 하고 멎어들며 그는 그대로 그렇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유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멍하니 벌어진 병호의 입을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그의 앞니가 처참하게 우수수 부서지며 피가 튀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 모습에 대고 유정은 말했다.
“한 번 더 눈에 띄면 주둥이를 찢어버린다고……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피거품을 물고 실신한 그를 내버려두고는 유정은 민혁을 붙잡고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두 다리로 서있는 사내라고는 그 한 사람 뿐이었다.
“그 앨 놔줘.”
“가, 가까이 오지 마! 이 괴물 년!”
“괴물 년이라니…… 기분 참 더럽네.”
“다가오지 말라니까!”
“당장 애 놔두고 꺼져.”
겁에 질린 사내는 이성을 잃은 모양인지 민혁을 놓아줄 생각도 않고 그저 뒷걸음질 치고만 있었다. 그대로 밴을 타고 도망칠 생각인 것 같았다. 멀리서 그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미란은 고개를 몇 차례 절레절레 저었다.
“여러모로 귀찮게 하네.”
사내가 차량에 오르기 전에 미란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조잡한 기계장치 비슷한 무언가를 꺼내든 미란은 촘촘히 박혀있는 버튼들 가운데 하나를 꾹 하고 눌렀다. 아마도 민혁이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봤다면, 그것이 익숙한 기계장치의 부속품임을 알아보았겠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살펴볼 경황이 없었다…….
*
‘어?’
문득, 민혁은 굉장히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소란스러웠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것이다. 마치 영사기에서 재생되던 필름이 한순간 뚝 하고 끊긴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정지’해버렸다. 고함을 질러대던 사내의 목소리는 물론이고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던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와, 심지어는 근처에서 희미하게 울리던 풀벌레소리마저 완전히 멎어버렸다.
그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침묵 속에서…… 유일하게 목소리 하나가 정적을 뚫었다.
“젠장. 역시 멈추기만 하고 되감는 게 안 되잖아……. 이번에도 실패야.”
모든 게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 미란의 신경질적인 그 목소리만이 귓전을 울리자 민혁은 미지의 감각으로 심장이 벌렁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도무지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소리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투덜거린 미란은 민혁에게로 다가와, 그의 몸을 옥죄고 있는 사내의 손을 억지로 풀어냈다. 그러자 자유로워진 민혁의 몸이 비로소 땅에 닿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어수룩하게 쭈뼛거리며 미란에게 말했다.
“아…… 저기, 고마워.”
“…….”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진 모르겠지만 미란이 그를 구해준 것은 분명해보였기에 민혁은 우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미란의 반응은 그야말로 생각 밖이었다.
미란을 알고 난 이후로, 민혁은 그녀가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얼굴에 그만큼 뚜렷한 감정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미란은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심지어 어떻게 반응해야할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녀답지 않게 대답을 잇지 못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너……,”
“응?”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있는 민혁에게, 미란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움직일 수 있지?”
당연하게도 민혁은 미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오늘에야 게시판에 공지를 남기긴 했지만 그동안 아무 소식이 없어서 기다리신 분들께 죄송해요
쪽지나 게시판을 통해서 안부를 묻거나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이 많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집안사정으로 꽤 오래 글을 쓰지 못했다가 지금은 다시 글을 써보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간 경황이 없어 1부의 수정작업을 아직 다 끝내지 못한 터라 연재처 문제는 12월이 되어서야
뚜렷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 예상으로는 더 빨리 진행을 하려고 했으나 중간에 제 사정으로 생각보다 지연되어 버렸네요...
지금은 1부의 프롤로그 작업과 원고에 새로이 삽입할 부분 등을 추가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 밖의 연재처나 웹툰화에 대한 문제는 초기에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면 소라 독자분들에게
가장 먼저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타임 리와인더와 더불어 새로 쓰기 시작한 글을 함께 올리고 가려 합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거듭 죄송하고, 조금이나마 보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감사합니다. )
*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2부 6장
어쩌면 엄마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순전히 미련 때문이었다. 죽음으로써 정해져 있는 누군가의 운명을 바꿔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과율을 깨뜨리는 명백한 위반행위나 다름없으니까.
그 대가는 죽음이다. 아니, 죽음도 아닌 완전한 소멸이다. 더 이상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나의 흔적은 이 세상에서……, 수도 없이 쪼개어진 그 무수한 시간의 틈 속에서도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나’가 나의 자리를 대신하겠지.
‘두려워.’
미란은 그것이 두려웠다. 이제는 나이마저 망각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존재해왔지만 여전히 그것이 무서웠고, 앞으로 몇 번을 더 시간을 되감는다 한들 그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해, 엄마……. 나는 착한 딸이 아니야. 엄마를 위해 죽을 용기조차 없는 년인걸. 하지만 나도 행복을 꿈꾸고 싶어. 다시 한 번 오빠의 얼굴을 보면서 마주 웃고 싶어……. 그 정도는 원해도 되는 거잖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는 내 모습이 바보 같아 보여?’
서글펐다. 서글프지만 눈물이 흐르지 않아서 더 서글펐다. 언젠가부터 눈물을 흘리는 일도 점점 줄어만 갔다. 이제는 그저 메말라가고 있는 썩은 고목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미란은 여느 때처럼 눈물 대신 담배연기를 허공에 흘렸다. 긴 세월 내도록 담배를 태워왔지만 미란의 몸은 병들지 않았다. 아니, 병들 수도 없었다. 노화는 물론이고 신체의 모든 기관은 이미 활동을 완전히 멈추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녀는 ‘살아있는’ 인간도 아닌 셈이었다.
이제 그녀의 육신은 그저 앞날을 지켜보기 위해 하염없이 존재하고만 있을 뿐인, 오직 그 목적 하나를 위해 숨 쉬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 나무 조각 같은 껍데기에 대체 무슨 미련이 남았기에 자꾸만 이런 무의미한 짓을 반복하고 있단 말인가……? 대체 왜?
‘엄마를 살리기 위해 태어난 딸이라……’
헛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죽기 위해 태어난 목숨이라니 너무 불쌍하면서도 우습지 않은가. 마치 짐승과도 같은 흐느낌이 속에서부터 차올라 미란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하하…… 하하하.”
그러면서도 그녀의 메마른 두 눈동자는 한 여인의 뒷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인한 여인의 등……. 하지만 미란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냘파 보이는 등에 지나지 않았다. 암세포가 이미 퍼지기 시작한 여인의 몸은 마치 그것을 감추기 위해 더 씩씩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보 같으니.”
언제나처럼 여인은 미란의 말을 듣지 못했다.
*
쨍!
바닥에 떨어진 유리컵이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산산이 조각났다. 성진은 혀를 차며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을 천천히 쓸고 담아 수습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사무실 직원 몇 명이 다가와 성진을 도우려 들었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아, 괜찮으니까 하던 일들 하세요. 소란 피워서 미안해요.”
“좀 도와드릴게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수습한 성진은 뒤숭숭한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아내가 준 머그컵을 실수로 깨뜨린 것이 못내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오늘은 아침부터 내내 기분이 이상했었다.
‘어젯밤 꿈자리가 좀 사나웠었나? 기억이 안 나는걸.’
성진은 천천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유리면에 비치는 모습은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그 너머로 다른 여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내의 얼굴이 아니었다.
‘지난번에는 몸도 아파 보였는데…….’
유정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엔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동시에 물씬 차올랐다. 오늘은 아내에게 야근이 있다고 말해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퇴근길에 잠깐 들렀다 가는 것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한숨을 뱉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도 마찬가지 심정일까? 어쩌면 유정에게 그만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라고 권유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도리일지도 모른다.
‘잠깐 얼굴만 보고 오자. 같이 저녁은 못 먹더라도…….’
미리 연락을 해둘까 하다가 문득 그러지 않기로 했다. 식사조차 함께 해주지 못하는 처지에 잠깐 머물고 가겠다는 말을 꺼낸다는 것이 너무도 염치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뱉는 순간 스스로가 너무도 부끄럽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성진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불쑥 찾아가더라도 유정이 분명 자신을 반겨줄 것임을. 그녀는 그런 여인이었고…… 그래서 그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
“그게 뭐야?”
용수의 질문에 민혁은 손에 쥐고 있던 공책을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그러자 용수는 기분이 상했는지 더더욱 민혁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아, 뭔데 그래? 야한 그림이라도 돼?”
“아무 것도 아니야.”
“뭔데? 보여줘.”
옆에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아도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민혁을 보채는 용수의 언행을 나무라며 나섰을 그녀였지만, 요새 들어 수상쩍게 행동하는 민혁에 대한 궁금증을 참기가 힘들었나보다.
결국 민혁은 어쩔 수 없이 공책을 펴서 두 친구에게 내용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공책 바닥을 빼곡하게 메운 그림을 확인한 두 친구의 얼굴은 더더욱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뭔데?”
“그냥. 요새 호기심이 생기는 물건이 좀 있어서.”
공책 안쪽에는 온통 알 수 없는 도면에 대한 스케치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 용도를 도무지 짐작하기 힘든 물건이었기에 용수의 눈에는 그냥 단순한 낙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 최민혁이라는 친구가 여느 또래들처럼 의미 없는 낙서를 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면, 아마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네가 별 의미도 없는 도면을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있을 녀석은 아닌데……. 솔직히 말해봐. 이거 어디다가 쓰려는 물건이야? 네 발명품이야?”
“모, 몰라. 난 그냥 돕기만 하고 있어서…….”
“돕다니? 누구를?”
“아, 그건…… 비밀.”
“뭐야?”
버럭 성을 내는 용수를 피해서 민혁은 달아나듯 교실을 빠져나왔다. 운동장 나무 밑에 자리를 잡은 민혁은 다시 조심스럽게 공책을 펼쳐들어 도면을 들여다보았다.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그 괴상한 도면은 요즘 민혁에게 있어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새 일주일째구나.’
그 날, 옥상에서 미란의 일을 도왔던 이후로 민혁에게는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학교가 끝나고 나서 미란의 빌라로 찾아가는 것이야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이제는 멀찍이서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무언가를 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민혁은 그녀가 만들고 있는 그 조잡한 기계장치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한 쓰임새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구조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타고난 그의 소질은 적어도 설계적인 측면에서의 도움을 줄 수는 있었기에 그는 그 때 이후로 줄곧 이러한 도면의 구상 작업에 몰두해 온 것이다.
돌이켜보면 미란은 민혁에게 그 일을 함께 하자거나 도움을 달라는 식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가 끼어드는 것을 말리거나 예전처럼 격한 거부반응을 보이지도 않았기에, 민혁은 그것을 좋은 징조로써 해석하기로 했다. 그녀의 진의야 어쨌든 간에 이 기회를 통해서 미란과 가까워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궁금하긴 해. 대체 어디다 쓰는 물건일까?’
용수 역시 도면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름대로 영재 소리를 듣는 용수와 정아였지만 그들의 눈으로도 이 도면의 쓰임새를 파악하긴 힘들었던 것이다. 하기야 자만심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알아볼 수 없다면 다른 누가 보더라도 마찬가지일거라는 것이 민혁의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 물건은 기존의 역학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있어. 이런 식의 운동 원리로 구동시킬 수 있는 기계는 이 세상에 없다구……. 그걸 모를 애가 아닐 텐데.’
미란은 천재다. 민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시험에서 자신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다. 민혁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 비정상적일만큼 유별난 천재성을 줄곧 피부로 느껴왔었다.
그렇기에 민혁은 그녀가 이 논리를 벗어난 괴이한 도면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강한 흥미를 느꼈다. 대체 그녀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물건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인지…… 민혁은 그것이 꼭 알고 싶었다.
‘아무튼 잘 된 일이야. 매일 볼 수 있는 구실이 생겼으니까.’
그 마음은 이미 순수한 궁금증을 넘어선,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어떤 특별한 호기심이었다. 민혁도 그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이러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딱히 그 애매한 감정을 무어라고 정의할 수가 없었다.
*
“오늘따라 재호가 좀 이상하네요, 한 선생님.”
“그런가요?”
유정은 박 선생의 말을 듣고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재호는 아침부터 내내 유정의 모습을 연신 흘끗거리며 한 번씩 겁에 질린 표정을 짓거나 몸을 움찔거리곤 했다. 하기야 자기 아버지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놓았으니 어린애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하면서도 무서웠을까.
“따끔하게 혼이라도 내신 건가요? 한 선생님을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글……쎄요.”
재호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유정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작자들은 호된 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치근덕대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요새는 쉽게 지치는 것 같아. 병원에 한번 가봐야 할까?’
잠을 깊게 못 자서 그런 건지 몸이 왠지 무겁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검진이라도 받아야할까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대로 일을 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이번에도 그 생각을 그저 기우로 넘겼다.
퇴근길에 오른 유정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미란의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거니와, 오늘은 어쩐지 반가운 얼굴이 찾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대감을 품었다가 실망으로 그친 경우도 허다했지만 매번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소녀처럼 들뜨는 자신의 모습이 유정은 스스로도 꽤 우습다고 생각했다.
*
“아, 안녕?”
“…….”
비록 접점이 생겼다고는 해도 미란의 태도가 살가워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민혁의 인사에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 알 수 없는 기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민혁은 굴하지 않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적어도 이제 이 옥상에 그가 찾아오는 것을 그녀가 거부하지 않는 것만 해도 좋았다.
“오늘은 왜…… 아무 것도 안하고 있어?”
하지만 민혁은 최근 들어 그녀가 여기서 매일같이 살펴보고 있었던 그 수상한 기계장치가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미란은 마치 그 기계에 대해 연구하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러니까 그가 처음 미란을 훔쳐보기 시작했을 그 무렵처럼, 오늘은 그저 멍한 눈으로 동네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미란의 모습이 꽤 오랜만이기도 했거니와, 생각해보니 그녀가 이렇게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가까이에서 미란을 본 적이 좀체 없었다는 사실을 민혁은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미란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얌전히 곁에 앉아서 그녀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불청객이 찾아올 거야.”
“뭐?”
그런 그의 시선이 거슬렸기 때문인지, 미란은 대뜸 입을 열었다.
“너보다 더 보기 싫은 누군가가 올 것 같아. 그것도 두 명씩이나……”
“무, 무슨 말이야?”
“보면 알아. 한 사람은 너도 잘 아는 얼굴일 테니까.”
뜻 모를 말을 툭툭 늘어놓는 게 미란의 특징임을 이제는 민혁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기이한 언행은 왠지 조금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미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버렸다.
“돌아가.”
“으, 응? 왜?”
“오늘은 네가 할 일이 없어.”
가타부타 더 설명도 하지 않고는 미란은 그 길로 옥상을 떠났다. 남겨진 민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에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자리만 눈으로 쫓았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보려고 준비도 많이 해왔는데…….
‘정말 종잡을 수가 없구나. 여자들은 원래 저런 걸까?’
하긴 엄마도 아빠에게 매번 틱틱대며 화를 내다가도 밤만 되면 풀어지곤 했었지. 아빠에게는 왠지 엄마의 화를 풀어줄 수 있는 열쇠 같은 게 있는 것 같았어. 나한테도 그런 게 필요한 걸까? 다음에 아빠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어?’
생각에 잠겨있던 민혁은 문득 옥상 아래를 내려다보고 놀랐다. 옥상을 떠난 그녀가 어느새 바깥으로 내려가 있었던 것이다. 미란은 특유의 그 정처 없는 발걸음으로 빌라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따라 내려가 볼까 싶었지만 왠지 지금 그녀를 쫓아갔다간 미움을 받을 것만 같아서 민혁은 고민했다.
그런 그녀에게로 문득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유심히 살펴보니 한 여인이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띌 만큼 머리를 무척 길게 기른 여인…….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민혁은 그 여인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 유난히 긴 머리카락 때문이었을까?
미란은 여인의 품으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민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품에 안긴 미란의 머리를 쓰다듬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민혁은 직감적으로 여인이 미란의 가족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저 분이 미란이의 어머니……?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분위기가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내려가서 인사라도 드리면 미란이가 화내겠지?’
하지만 민혁의 고민은 거기서 멈추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인과 미란을 향해 낯선 남자들 무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미란아,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
“왜?”
유정은 인상을 찡그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살다보면 가끔 예감이 빗나가는 일도 종종 있다지만 이건 불쾌해도 너무 불쾌했다. 반가운 얼굴이 찾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 대신 이런 꼴도 보기 싫은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설마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이 빌어먹을 년…….”
재호의 아비인 그 병호라는 작자의 얼굴엔 여전히 유정에게 얻어맞았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었다. 눈덩이엔 피멍이 들고 뺨은 퉁퉁 불어있었지만 그는 유정의 얼굴을 보자 이를 부드득 갈았다. 게다가 그의 등 뒤로는 몇몇 사내들이 더 줄지어 서있었기에 유정은 골치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구제불능이란 건 이런 인간을 두고 쓰는 말이겠지……?
“무슨 볼일이죠?”
“무슨 볼일이냐고? 네년이 더 잘 알 텐데. 우리 얘기가 아직 다 안 끝났잖아?”
“글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딸아이 앞이니까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소중한 딸아이 위험하게 만들기 싫으면 잠자코 따라오기나 하지 그래?”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쉰 유정은 미란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금방 올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흠…….”
미란은 아무 대답도 않고 그저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병호는 미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생각이 바뀌었는지 뒤에 서있던 사내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니야, 애도 데리고 가.”
“저 꼬마애도요?”
“그래. 딸년 보는 앞에서 망신을 줘야 고분고분해질 테니까.”
사내들 가운데 하나가 미란에게로 손을 뻗자, 유정의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한 빠르기로 그 손을 쳐내고는 그대로 사내의 목젖 부근을 가격했다. 급소를 맞은 사내가 헛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섰지만 유정은 허깨비 같은 움직임으로 몸을 비틀어 사내의 인중을 팔꿈치로 연달아 찍어버렸다.
“컥!”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내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유정이 날카로운 눈으로 병호를 노려보자 그는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얻어맞았을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것이 그리도 수치스러웠는지 그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사내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잡아! 잡아서 차에 태워.”
“하지만 사장님, CCTV 같은 거에 걸리기라도 하면……”
“등신…… 이런 후진 빌라에 그런 게 있을 것 같냐? 얼른 태워, 딸년도 같이.”
남은 사내들이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하자 유정은 이를 악물었다. 가뜩이나 숫자도 많은데 미란을 신경 쓰면서 이들을 모두 제압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어쩐지 어제부터 몸에서 자꾸만 느껴지고 있는 이 심상치 않은 낌새는…….
“당장 잡아와!”
하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내들이 동시에 유정에게로 달려들었다.
*
‘뭐, 뭐야? 싸움?’
옥상에서 지켜보고 있던 민혁은 이 느닷없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란이 그녀의 어머니와 만나는가 싶더니, 이후에 나타난 험상궂은 사내들 여럿이 갑자기 그녀들에게로 달려든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미란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민혁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몸놀림으로 사내들을 바닥에 나뒹굴게 만들고 있었다.
‘위험해…… 이, 일단 경찰에 신고를……’
여인 한 명을 상대로 남자들이 여럿 달려드는 상황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아보였고, 게다가 미란이 관련되어 있으니 도저히 못 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민혁은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래쪽에서 소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
“뭐야, 이 여자……?”
사내들 중 하나가 어안이 벙벙해져 중얼거렸다. 여럿이서 달려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사내 세 명이 쓰러진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치명적인 급소를 눈 깜짝할 사이에 얻어맞고 바닥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평범한 년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게 뒤에서 덮치라고 했건만 자신 있다며 나서더니……. 그 년 못 잡으면 네놈들 전부 모가지 날아갈 줄 알아.”
무리들 중 절반이 나가떨어지자 사내들도 바짝 긴장하는 것 같았다. 병호는 그럴수록 추하게 소리치며 사내들을 더욱 재촉할 뿐이었다. 유정은 숨을 고르며 미란이 자신의 등 뒤에 안전하게 서있는지를 재차 확인했다.
‘빨리 처리해야겠어. 숨이……’
몸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 빠르게 움직인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호흡이 흐트러지고 눈앞이 어질어질한 느낌이었다. 하필 이럴 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달려들어 붙잡으려드는 사내의 손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유정은 그들의 정수리, 인중, 목, 명치, 무릎 등 노리기 쉬운 급소만을 쏜살같은 움직임으로 가격했다.
급소를 공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완력으로는 도저히 성인 남성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공격만을 가하는 것이 그녀에게 있어선 유일한 수단이었다. 게다가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은 지금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그녀는 조금 과감하더라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상대를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윽…….’
그 순간 신경이 일순 끊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몸속에서 내내 느껴졌던 적신호이긴 했지만 이번엔 충격이 심했다. 몸을 무리하게 움직였기 때문일까? 그러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또 하나의 사내가 달려들었다.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사내가 눈치 챈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녀의 빈틈을 헤집은 셈이었다.
“큭…….”
통증으로 그녀가 잠시 주춤한 사이에 사내는 유정을 뒤에서 단단히 붙들었고, 유정의 앞에서 달려든 또 다른 사내가 그녀의 복부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유정은 이를 악물었지만 몸속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더불어 아랫배에 가해진 둔탁한 충격이 뒤섞여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하! 좋아, 잘했어!”
병호는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에게 붙들려 꼼짝 못하게 된 유정에게로 천천히 다가온 그는 히죽 웃음을 지었다.
“어때? 아프지? 역시 계집년답게 맷집은 좋지 못한걸.”
“…….”
“지금이라도 여기서 옷 벗고 애원하면 곱게 데려가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더 험한 꼴 나기 전에 고분고분하게 굴지 그래?”
유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병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엄마.”
미란의 낮고 가느다란 목소리는 신기하게도 그 순간,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유정이 고개를 돌리니, 마치 유령처럼 음산한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미란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미란아. 엄마가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잖아.”
유정은 지쳐있던 것도 아랑곳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미란에게 말했다. 하지만 미란은 들은 체도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 이 사람들 죽여도 돼?”
“…….”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너무도 섬뜩한 말이었다. 말의 내용을 떠나서 그 음색에서 묻어나는 느낌이 너무도 진심처럼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말이긴 했지만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분명히 한순간 공포를 느꼈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얼른 집에 들어가. 엄마 금방 올라갈 테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정의 태도는 너무나 담담해보였다.
“그래서 어쩔 건데? 저 놈 말대로 옷 벗고 애원하게?”
“글쎄…… 진짜 그래야하려나?”
모녀가 이 상황에서 위기상황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병호는 잠시 놓고 있었던 정신을 찾은 것 같았다. 부아가 치민 그가 뭐라고 위협을 가하려던 찰나에, 마침 또 다른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만 해!”
“뭐?”
갑자기 터져 나온 알 수 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 자리에 서있던 이는 그저 자그마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바로잡으며 휴대폰을 들어보이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 나쁜 놈……, 아니, 이 나쁜 사람들! 당신들 깡패들이지?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당장 도망가는 게 좋을걸!”
“뭐야, 저 꼬마는?”
“이 여자 아들인가?”
모두가 황당해하는 사이, 유일하게 소년의 얼굴을 알아본 미란은 인상을 찡그리며 소년에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너 뭐해?”
“네, 네가 위험해보여서…….”
민혁은 여전히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어수룩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미란은 여전히 매몰찼다.
“신고를 했으면 위에서 계속 보고 있었어야지, 뭐 하러 기어 내려와?”
“그게…… 너무 걱정이 돼서……”
웅얼웅얼 말을 흐리는 민혁의 모습을 보고 미란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 틈에 뒤에서 달려든 사내가 민혁을 붙잡고 말았다. 억센 체구의 사내에게 순식간에 제압된 민혁은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으아악!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그 애새끼 입 막아! 그리고 이것들 얼른 차에 태워!”
뒤편에는 어느새 밴 차량 한 대가 다가와 있었다. 사내들이 유정과 미란, 그리고 민혁을 차에 태우려고 들자 그제야 잠자코 있었던 유정이 입을 열었다.
“애들은 놔줘.”
“입 닥쳐, 저것들 보는 앞에서 널 걸레로 만들어 줄 테니까.”
“말을 못 알아듣는군. 애들 눈에 피 튀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멀리 보내려고 했던 건데…….”
“뭐?”
그 순간 유정의 발뒤꿈치가 뒤에서 그녀를 붙들고 있던 사내의 낭심을 정확하게 올려쳤다. 급소 중의 급소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사내는 비명을 지를 생각도 못하고 눈에서 흰자위를 드러내며 줄 끊어진 인형처럼 뒤로 허물어졌다.
사내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병호가 채 인지하기도 전에, 유정은 올려쳤던 발을 그대로 다시 휘둘러 병호의 관자놀이에 돌려차기를 꽂아 넣었다. 퓨즈가 끊기듯이 한순간 눈앞이 뚝 하고 멎어들며 그는 그대로 그렇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유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멍하니 벌어진 병호의 입을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그의 앞니가 처참하게 우수수 부서지며 피가 튀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 모습에 대고 유정은 말했다.
“한 번 더 눈에 띄면 주둥이를 찢어버린다고……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피거품을 물고 실신한 그를 내버려두고는 유정은 민혁을 붙잡고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두 다리로 서있는 사내라고는 그 한 사람 뿐이었다.
“그 앨 놔줘.”
“가, 가까이 오지 마! 이 괴물 년!”
“괴물 년이라니…… 기분 참 더럽네.”
“다가오지 말라니까!”
“당장 애 놔두고 꺼져.”
겁에 질린 사내는 이성을 잃은 모양인지 민혁을 놓아줄 생각도 않고 그저 뒷걸음질 치고만 있었다. 그대로 밴을 타고 도망칠 생각인 것 같았다. 멀리서 그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미란은 고개를 몇 차례 절레절레 저었다.
“여러모로 귀찮게 하네.”
사내가 차량에 오르기 전에 미란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조잡한 기계장치 비슷한 무언가를 꺼내든 미란은 촘촘히 박혀있는 버튼들 가운데 하나를 꾹 하고 눌렀다. 아마도 민혁이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봤다면, 그것이 익숙한 기계장치의 부속품임을 알아보았겠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살펴볼 경황이 없었다…….
*
‘어?’
문득, 민혁은 굉장히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소란스러웠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것이다. 마치 영사기에서 재생되던 필름이 한순간 뚝 하고 끊긴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정지’해버렸다. 고함을 질러대던 사내의 목소리는 물론이고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던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와, 심지어는 근처에서 희미하게 울리던 풀벌레소리마저 완전히 멎어버렸다.
그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침묵 속에서…… 유일하게 목소리 하나가 정적을 뚫었다.
“젠장. 역시 멈추기만 하고 되감는 게 안 되잖아……. 이번에도 실패야.”
모든 게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 미란의 신경질적인 그 목소리만이 귓전을 울리자 민혁은 미지의 감각으로 심장이 벌렁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도무지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소리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투덜거린 미란은 민혁에게로 다가와, 그의 몸을 옥죄고 있는 사내의 손을 억지로 풀어냈다. 그러자 자유로워진 민혁의 몸이 비로소 땅에 닿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어수룩하게 쭈뼛거리며 미란에게 말했다.
“아…… 저기, 고마워.”
“…….”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진 모르겠지만 미란이 그를 구해준 것은 분명해보였기에 민혁은 우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미란의 반응은 그야말로 생각 밖이었다.
미란을 알고 난 이후로, 민혁은 그녀가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얼굴에 그만큼 뚜렷한 감정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미란은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심지어 어떻게 반응해야할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녀답지 않게 대답을 잇지 못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너……,”
“응?”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있는 민혁에게, 미란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움직일 수 있지?”
당연하게도 민혁은 미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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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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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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