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5장
예로부터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법이다. 과거에 나는 지환이 그 놈에게 내가 받았던 굴욕과 모멸에 대한 대가를 확실하게 되돌려 준 적이 있었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제대로 된 엄청난 복수였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서연이의 마음이 내게 기울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사내로서 어찌 그런 굴욕을 잊을 수 있을까?
나 또한 내심은 알고 있었다. 지환이 그 놈이 결코 그렇게 얌전히 꼬리를 말고 물러나지는 않을 거란걸. 하지만 놈의 얼굴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등장한다는 것은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대체 현아와 지환이 사이에 무슨 개연성이 있기에 그녀의 PC 화면에서 놈의 얼굴이 나오며, 또 하물며 둘이 저렇게 살을 섞고 있단 말인가.
"최근 누군가로부터 미행 당했다고 느낀 적이 없나요?"
멍하니 PC만 들여다 보고 있는 내 귓전에 현아의 목소리가 꽂혔다. 워낙 얼이 나가 있었기에 말이 귀로 들어오고 나서도 의미를 해석하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사적으로 뇌 속에서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고 있었다.
미행...? 미행이라고?
"자, 잘 모르겠어요..."
물론 내가 조금만 더 세부적인 기억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그 언젠가 현주의 아파트 앞에서 내 차를 뒤따라 붙었던 바로 그 정체 모를 자동차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기억해 낸 것은 그 후의 일이고,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현아의 설명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 사람을 처음 만난건 불과 일주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어요. 지난 주 화요일 쯤이었나?"
"어, 어떻게 이 녀석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아파트 앞에서 웬 낯선 남자가 나를 불러 세우더군요. 모양새로 보아하니 꽤 오랜 시간을 우리 집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내게 접근한 이 남자가 대뜸 내게 묻더군요. 최성진의 여자친구가 아니냐고."
"네에....?"
너무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의외의 전개 앞에 나는 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의 다음 설명만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난 눈치가 빨라서 말이에요.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남자가 나를 현주로 착각했다는 것쯤은 대충 느낄 수 있었죠. 성진 씨도 보다시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 자매가 얼굴만으로는 조금 구분하기 힘들잖아요."
"그, 그 놈이... 현아 씨를 현주로 착각하고 접근했다는 거에요?"
"그래요. 이 남자 말에 따르면 꽤 끈질기게 당신을 미행했다던 걸요. 미행 끝에 여자친구의 집을 알아냈고, 그 여자친구에게 꼭 말해줄 것이 있어서 내게 접근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불쌍하게도 당신 여자친구의 얼굴을 제대로 구별해 낼 수 있을 만큼 유심히 보지는 못한 모양이죠. 그 애와 꼭 닮은 언니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을 테니까."
"자, 잠깐만요..."
현아와 현주를 착각했다고? 그렇다면 놈은 처음부터 내 여자친구를 노리고 접근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머릿 속이 정리가 되질 않았지만 그걸 정리하기 위해선 그녀의 설명이 더 필요했다. 정신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현아의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요?"
"말했듯이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 이게 성진 씨에 관련된 일이라는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죠. 나는 내가 당신의 여자친구가 맞다고 대답해 줬어요. 그 남자가 그대로 나를 현주로 착각하게끔 말이에요."
"왜, 왜 그랬어요?"
"그럼 그 낯선 남자가 현주에게 접근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뒀어야 한다는 거에요?"
순간 할 말을 잃고 만다. 그 때까지 내가 지환이 놈의 목적을 모르고 있긴 했었지만 그 놈이 나와 관련된 일로 현주를 찾는다면 결코 그것이 좋은 의도는 아닐 것임이 안 봐도 뻔했기에.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그 남자에게서는 뭔가 수상한 기색이 확 풍겼어요. 나는 남자를 읽는데엔 도가 텄으니 그 정도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어렴풋이 알 수 있었죠. 그렇게 느낌이 수상한 남자를 내 동생과 마주치게 하고 싶진 않았어요. 게다가...."
"게, 게다가 뭐요?"
"무척 재미있는 냄새가 났거든요. 성진 씨도 알다시피.... 나는 그런 재미난 일은 그냥 넘기질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뭔가가 있었달까?"
그 말을 하면서 현아는 진정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니 어제의 노예 같았던 그녀에서 다시 평소의 그녀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지환이의 얘기를 듣는게 훨씬 중요했다. 하지만 그 일을 "재미있다"라고 표현하는 그녀의 내면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그래서 그 놈이 현아 씨를 내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다 이거죠. 그래서 놈이 뭐라던 가요? 그, 그리고, 왜 당신이 이 놈과 이렇게...."
"진정해요. 그 남자는 내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요. 우리는 자리를 옮겨서 꽤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오랜 시간 동안 그가 내게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어주었죠. 그건 마치... 고자질 같더군요. 누군가의 그릇된 행위에 대한."
"........"
그 누군가는 당연히 나를 가르킬 터.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 놈에게서.... 뭘 어디까지 들었나요?"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들었죠. 아마 성진 씨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모두 들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네요. 무척 재미있기도 하고 꽤 놀랍기도 했어요. 사실 처음 들었을 땐 몰랐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성진 씨가 빼앗아 갔다는 그 남자의 연인이었던 여자가 아까 얘기했던 그 아가씨죠? 당신이 강간했다던 그 학회장 아가씨....."
"........"
서연이의 이야기까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는건 지환이 놈이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는지 한마디로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그녀가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어차피 아니라고 속이는 것도 부질 없는 짓이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 호호 웃었다.
"솔직히 이야기를 듣자마자 병원에서 봤던 그 아가씨 얼굴을 떠올리긴 했었죠. 왠지 그럴 것 같더군요. 하지만 그녀를 강간했었다니 정말 놀랍네요. 그 남자는 단순히 성진 씨가 그녀의 마음을 훔쳐간 걸로만 알고 있던데.... 이거 그 남자가 알면 더욱 분노할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하긴 지환이 놈은 내가 서연이를 강제로 범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지.
"그, 그래서요? 그 뒤는요?"
"그 남자가 말하더군요. 당신에게 연인을 빼앗긴 비참함이 너무 크다고.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어 내 남자친구의 만행을 나에게 직접 실토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는군요. 마치 나를 위해 내가 모르는 정보를 넘겨주는 듯이 말은 했지만 결국 그것이 그 나름의 복수라는 사실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죠. 아마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줌으로 인해 나와 당신이.... 아니, 당신과 현주가 헤어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요."
"이런 개새끼가...."
나도 모르게 무심코 욕설이 튀어나왔다. 물론 내가 놈에게 한 짓도 그 못지 않게 악랄한 짓이었긴 했지만 내가 그런걸 굳이 비교할 이유가 없잖은가. 사람은 자고로 받은 것만 기억하는 법이니. 그래서 현아는 뭐라고 대답했는지를 묻자, 그녀가 나의 분노에도 아랑곳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나는 그 남자의 비참함에 공감해주는 척 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나... 그러니까 여자친구인 나를 두고 배신을 했다는 사실에 무척 충격 받은 척 연기를 해줬죠. 나 모르게 그런 짓을 하고 다닐 줄은 몰랐다며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무척 만족해 하는 것 같더군요."
이런 씨발.... 그 새끼는 설마 자기가 쪼르르 달려가서 내 여친에게 몇 마디 고자질 한다고 해서 내 여친이 자기 말만 믿고 나를 경멸할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실로 단순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놈으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만든 현아의 연기가 그만큼 대단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이 사실을 알고 당신과 헤어지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남자의 약점들을 이용해 보복을 할 것임이 분명하니 자기는 얼른 몸을 피해야 겠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듣자하니 무슨 각서 같은걸 썼다고 하던데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대충 들어보니 휴학을 하고 도피 삼아 유학을 갈 생각이었다던데 해외로 피하기 전에 내게 이 사실을 꼭 알려주고 싶었나보죠."
"해, 해외? 이 새끼가 진짜...."
그러니까 내 여친에게 나의 만행을 고자질하는 것으로 앙갚음을 대신한 후에, 외국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단 건가? 보자보자하니까 진짜 별 짓거리를 다하는 구나. 이젠 정말 참을 수 없다. 이 놈에게 아량을 베풀기로 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응징을 가해야 한다.
"조, 좋아요. 아직도 얼떨떨하지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대충 알겠어요. 그런데 도대체 당신이 왜 이 놈과 이런 영상을 남기게 되었는지는 이해가 안 가네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영상 속의 장소는 지금 내가 그녀와 함께 있는 바로 이 스위트룸 안이다. 이 영상이 사실이라면 지환이 놈도 여기에 들어왔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갑자기 무척 불쾌한 기분이 솟구치면서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꼭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아 또한 그런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기색이었다.
"나는 당신의 비행에 좌절하는 척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남자의 비참함을 이해하는 척 했죠. 나는 우선 그를 안심시켰어요. 성진 씨가 언제 보복을 가해올지 모르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국내를 뜰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내가 들은 내용을 비밀로 지켜주겠노라고 단단히 약속했어요."
"도대체 왜요?"
"킥킥."
그 순간 현아의 그 어딘지 모르게 광기 어린 웃음은 어제와 같이 나를 섬짓하게 만들었다. 내 노예를 자처했던 그녀가 내게 다시금 이런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며칠 후에 나는 그에게 연락해서 그를 다시 한번 만났죠. 성진 씨는 물론이고 현주에게까지 비밀로 하면서. 그 지환이란 남자가 전해준 이야기로 인해 내가 며칠 동안 큰 충격에 시달렸으며, 지금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느낄 수 있도록 얼빠진 여자 연기를 톡톡히 해줬지요. 우리는 술을 마셨어요. 서로가 취할 정도로 마셨지만 그는 특히나 더 깊게 취한 것 같더군요. 나는 그를 이 방으로 데려왔어요."
"........"
"술에 취한 그는 버릇처럼 되뇌어 말하더군요. 최성진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고. 그런 그에게 나 또한 나를 배신한 남자로 하여금 대가를 치루게 해주고 싶다고 속삭였어요. 지환 씨가 성진 씨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 것 같냐며 나는 은근히 그를 유혹했죠."
"뭐, 뭐라구요?"
순간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그 띵한 감각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 유혹의 결과가 지금 이렇게 PC 안에서 재생되고 있지 않은가.
"조금만 유혹을 가했을 뿐인데 그는 눈이 뒤집어져서 나를 덮치더군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남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짜릿했겠어요? 여자친구를 빼앗아 간 남자에게 자신도 똑같은 방법으로 극적인 복수를 가한다. 성진 씨 모르게 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는 얼마나 흥분되었을까요?"
"........"
"후후. 그 남자는 정말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난 그 쾌감을 더 높여주기 위해 정말 가련한 여자인 것처럼 신음하고 유린 당했죠. 남자친구에게 배신 당한 여자가 복수를 빙자한 강간을 당하며 불쌍하게 무너지는 모습. 아마 그 남자 입장에선 정말 황홀한 기분이었겠죠."
순간 속에서 억센 분노가 불같이 들끓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와 같은 일을 벌였는지는 몰라도 그 지환이 새끼가 현아를 유린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내가 현아를 특별히 아끼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순수하게 임지환이란 놈을 향한 분노였다.
속사정이야 그녀가 다 알고서 임지환을 조종한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녀가 결국 지환이 새끼에게 따먹힌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하물며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지환이 새끼가 지금쯤 "최성진의 여친을 따먹었다" 라는 사실로 인해 얼마나 커다란 만족감과 짜릿함을 느끼고 있을 지를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 지는 기분이었다. 그 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나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에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버럭 높아진다. 구태여 사건을 그런 방향으로 몰고간 그녀의 독단이 너무도 어처구니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언성에도 불구하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이제 그녀에게서는 더이상 어제와 같던 노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말했잖아요. 재미있으니까."
"재, 재미라구요? 재미를 위해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요. 내가 기껏 마음 먹고 성진 씨에게 내 솔직한 내면을 털어놓았는데 당신은 의외로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성진 씨, 나에게는 이 세상 남자들을 내 손아귀 위에서 쥐락펴락 갖고 놀며 그들을 유린하는게 삶에 있어 가장 큰 기쁨이에요. 그걸 재미라는 이름으로 표현하지만 나에겐 그만한 가치가 또 없죠. 그 지환이란 남자와 처음으로 말을 섞은 순간부터 나는 느꼈어요. 비참함이라는 이름으로 심정을 포장하고 있긴 하지만 실상은 그도 똑같은 남자. 어차피 자기 자신의 추잡한 복수를 이루기 위해 여자를 도구처럼 이용하려고 내게 접근했다는 것을요. 난 반대로 그런 그의 의도를 이용하고 싶었어요. 그게 재미있으니까요. 이게 잘못되었나요?"
"하,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이 그 놈에게 당한 거나 다름 없잖아요!"
"뭐가 당했다는 거죠? 몸을 한번 내어준게 당했다는 건가요? 하긴 대부분이 남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더군요. 여자의 몸을 취하기만 하면 그 여자를 짓눌렀다고 생각하는게 남자들의 사고방식이니까요."
영상 속의 그녀는 정말이지 처참하게 무너지며, 지환이 새끼의 손아귀에 알몸이 희롱 당하고 있었다. 지환이 새끼의 열에 달뜬 표정은 놈이 얼마나 극적인 복수심을 짜릿하게 느끼고 있는지를 내게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 놈이 그런 쾌감을 느끼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는데, 그녀는 자신이 그것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단 말인가? 나는 도무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더 화가 날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게 너무도 여유롭게 말한다.
"성진 씨, 당신 눈 앞에 있는 것을 보세요. 나는 그 잠깐의 욕정을 받아준 대가로 "이걸" 손에 넣게 되었죠. 이 약점 하나가 사내에게 있어 얼마나 큰 족쇄가 되는지 당신은 알기나 하나요?"
그녀는 PC 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어찌보면 파일 하나에 불과할 따름인 그 영상을 똑바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그 영상 하나가 발휘하는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어쩌면 그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녀는 저렇게도 일부러 가련하게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영상 속의 두 사람의 모습만 놓고 보면 누가 보더라도 지환이가 현아를 강간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모순적이네요. 그럼 성진 씨는 이 남자가 현주에게 의도대로 접근했기를 바라는 건가요? 만약 그랬다간 일이 더 심각해 졌을텐데요. 이 남자가 나를 현주로 착각한건 성진 씨에게 있어 오히려 천운이에요. 그리고 어찌보면 나는 당신을 도와준 조력자나 다름이 없구요. 대체 당신이 이 상황에서 무슨 이유로 화를 내는 건가요?"
"........"
물론 그녀의 말이 맞다. 지환이 새끼가 만약 계획대로 현주에게 접근했다면 사태는 지금보다 더욱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현아의 말마따나 그녀가 지환이를 대함에 있어 그런 기지를 발휘한 것은 결과만 놓고보면 오히려 나를 도운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화를 낼 처지가 아닌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런 사태를 초래하게끔 만든 장본인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겨우 몸 한번 내준 것 따위,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 오히려 또 한 남자를 손 안에서 갖고 놀게 되었다는 사실이 재미있을 뿐이죠. 내가 오늘 이 사실을 성진 씨에게 말해주는 이유는 당신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에요. 내가 약속했듯이 당신이 내게 솔직했으니, 나는 앞으로 당신의 사생활에 대해서 함부로 참견하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이 사랑과 욕정을 명확하게 구분해주기만 한다면 나는 당신의 번잡한 여자관계를 비난하지 않을 거에요. 다만...."
"........"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현주가 피해를 보게 하지는 말아줬으면 해요. 이번엔 내가 중간에서 그것을 막았지만 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요. 당신이 현주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이해해 줄 거라 믿어요."
할 말이 없다. 분명 마음 속은 무언가 찝찝한 기분으로 들끓고 있는데 일언반구도 그녀의 말에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입술을 깨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앞으로 지환이 그 놈을 어떻게 처리할 건가요?"
"글쎄요.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이 나를 이용해서 당신에게 복수를 하고 있다는 것에 너무도 큰 쾌감을 느끼고 있어서, 여전히 당신 모르게 나를 무척 만나고 싶어해요. 당분간은 그 쾌감을 이룰 수 있게 허락해 주는 것도 괜찮겠죠. 혼자 들뜨는 모습을 보는게 재미있기도 하고."
"그, 그럼 앞으로 또 그 놈을 만나서 이런 일을 되풀이 하겠단 거에요? 안 돼요!"
"왜 안 돼죠? 나는 흥미롭기만 한 걸요."
"그 놈이....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구요."
현아는 야릇한 웃음을 짓는다. 지환이는 물론이고 마치 내 머리 위에도 서 있는 것 같은 여유로운 웃음이다.
"그건 수컷으로서의 승리감을 박탈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불과해요. 성진 씨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모처럼 이런 큰 재미를 버리고 싶진 않네요. 누가 뭐래도 성진 씨에겐 나를 말릴 자격이 없잖아요?"
그녀의 말은 치욕스러울 정도로 사실이었기에, 나는 순간 얼굴이 울컥 붉어졌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복으로 그녀를 또 한번 여기서 노예처럼 부린다거나, 그녀의 몸을 희롱하여 정신적인 만족을 얻는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현아가 상대라면 오히려 그것은 내가 지환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걸 스스로 인정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너무도 분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성진 씨에게 피해 가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나도 적당히 갖고 놀다가 버릴 생각이니 이 문제는 나에게 맡겨줬으면 좋겠네요. 오늘 성진 씨에게 이걸 보여주는 데엔 거기에 대한 허락을 구하고자 했던 이유도 있답니다."
허락이라니,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려놓고 또 무슨 허락을 내게 구한단 말인가. 간밤의 일로 조금은 사랑스럽게 느껴졌었던 그녀가 다시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아무 반박을 할 수 없는 내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와중에 현아 씨의 휴대폰이 울린 것은 어찌보면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비참한 일이었다. 짤막한 전화를 받고 난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럼 난 이만 슬슬 다른 일에 신경을 써야겠네요. 고객과의 약속이 있어서요. 성진 씨도 이만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
내 복잡한 심정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여기서 이제는 떠냐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마지못해 움직였지만 걸음걸이가 너무도 찝찝했다. 얼굴을 애써 보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구태여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문을 나서기 전에 딱 한마디를 씹어뱉듯이 그녀에게 건넸다.
"당신은 그런걸 재미있다고 표현했지만.... 그렇게 사는게 결코 행복하다고 느끼지는 않을 거에요."
그녀는 어느새 알몸에 셔츠 한장을 걸치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에 스위트룸의 문을 닫았다. 고요하게 닫힌 방 문을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는 그 호텔을 떠났다.
*
호텔을 나서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현아와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를 실감했다. 해는 이미 중천을 넘어 기울고 있었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현실의 감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깨어났기에, 나는 잊고 있었던 것 하나를 깨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학교!"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도 아니었다. 서둘러 시간표를 더듬어본다. 빌어먹게도 이미 오전 수업 하나를 놓친 상황이다. 나도 모르게 오늘이 휴일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는지 나의 일정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차를 몰고 그대로 곧장 학교로 향했다. 어지간하면 자취방에 들러 옷이라도 갈아입고 싶었지만 시간을 보니 당장 학교로 향하지 않으면 이번 수업도 놓칠 타이밍이었다. 출결 점수에 그렇게 신경을 썼던 걸로 보면 그 와중에도 내가 전체 과탑에 대한 욕심이 있긴 있었나보다.
때마침 가는 길에 핸드폰이 한차례 울려서 확인하니 서연이로부터 날아온 톡이었다.
- 선배, 어디에요?
- 학교 가는 길인데 왜?
- 오늘 오전 수업 빼먹으셨잖아요. 무슨 일 있어요?
신기하군. 그 오전 수업은 서연이랑 같이 듣는 수업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정말 요 계집애가 나한테 마음이 생기긴 생긴 걸까? 하지만 그걸 마냥 귀여워하고 있기에는 지금 내 마음 속이 너무 복잡했다. 하물며 이건 지환이에 관련된 문제였기에 서연이의 톡을 받고보니 더욱 기분이 혼잡스러웠다.
"선배?"
서연이의 얼굴을 보는게 결코 싫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솔직히 서연이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머피의 법칙 때문인지 인문관에 발을 들이는 순간 서연이와 마주치고 말았다. 우연도 무슨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우연도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고 했다.
"한참 기다렸어요."
"기, 기다려? 왜?"
"곧 주말이잖아요. 우리 조별 발표 준비하기로 했잖아요. 잊었어요?"
아 참, 조별발표!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것은 유정이와 같이 듣는 수업의 과제이기도 했기에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유정이가 떠올랐다.
"PPT 제작은 예정대로 다음 주에 선배네 자취방에서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전에 선배도 알다시피 박물관 견학을 다녀와야 해서요. 선배만 괜찮으면 이번주 토요일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으응. 좋아."
"상의할 것도 있으니까 유정이도 부를게요. 곧 수업 끝나니까 금방 올 거에요. 그런데 선배도 수업 들어갈 시간 아니었어요?"
"아 참, 맞다. 수업!"
서연이가 일깨워 준 덕분에 나는 부리나케 강의실로 뛰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수업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기에 중간에 머쓱하게 들어가는 것도 민망한 일이긴 했다. 난 눈치껏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학생들이 밖으로 나올 때 혼잡한 틈을 타서 교수님께 출석체크를 부탁했다. 비록 지각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그래도 결석을 면했다는 사실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별 얻은 것도 없는 수업을 끝마치고 다시 서연이에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매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수업에 들어갔다 오는 사이에 유정이도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으응, 유정아 안녕."
유정이를 마주하는 순간 괜히 낯이 부끄러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늦더라도 옷이나 갈아입고 올 걸.... 나는 혹시나 그녀들이 내가 어제와 옷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않길 바랐지만 불행인지 행복인지 의외로 두 여자 다 내게 생각보다 관심이 있는 모양인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입을 모아 물었다.
"왜 어제랑 옷이 같아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두 사람이 똑같은 타이밍에 질문을 던지고는, 자기들이 생각해도 신기한지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두 여자. 다른 때 같았지만 왠지 묘하게 기분이 좋았겠지만 지금은 더이상의 고민거리를 만들기 싫었기에 대충 둘러댔다.
"아, 그냥 오늘 너무 정신없이 나와서...."
"그런데 오빠, 어디 아파요? 얼굴이 퀭하네요."
서연이가 내게 뭐라고 말을 건네려는 찰나 유정이가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할 말을 놓친 서연이가 표정이 애매하게 굳었지만 그 "오빠" 소리를 듣고 더욱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여전히 유정이와 내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영 못마땅하게 들리나 보다. 하긴 그녀는 내가 유성이를 유정이라고 부르는 이유조차도 모를 테니까.
"아, 그, 그게... 아무래도 배탈이 난 거 같아. 속이 좀 안 좋네."
차마 얼굴이 헬쓱한 이유가 다른 여자와 밤새도록 섹스를 하고 와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말 못할 얘기이긴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그 사실을 비밀로 감추어야 할 상대를 우선순위로 매겨보라고 한다면 눈 앞의 두 여자는 충분히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배탈이요?"
두 여자의 표정이 약간 애매하게 굳었다. 특히 서연이의 기묘한 표정이 가관이었다. 뭔가 심기가 뒤틀린 것 같긴 한데 아프다니까 화도 못 내겠고 입술을 툭 내밀고 있는 모습이 뭔가 귀여웠다. 유정이만 없었더라도 뭔가 해줬을 텐데.
매점의 작은 테이블을 두고 우리 세 사람은 둥글게 둘러앉아 주말에 견학을 다녀올 일정을 세웠다. 나는 우리 셋만 다녀오는 줄 알고 약간 불안해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기대하는 바가 없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만 가는게 아니라 다른 조 한 팀과 함께 다녀오나보다.
하긴 우리 조만 과제를 하는건 아니니까 그럴 만 하긴 했지만 왠지 우리 셋만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 받는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나와 서연이, 유정이만 다녀오게 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어느 조랑 같이 가는 건데?"
"제 동기 예진이 아시죠? 마침 조사해야 하는 부분이 비슷해서 같이 다녀오자고 그쪽에서 얘기가 나왔어요. 예진이네 조는 예진이랑 남자 선배 둘이던데 한 분은 성진 선배랑 동기던걸요."
"그래? 뭐 알겠어."
예진이? 예진이라.... 나도 이름은 꽤 여러번 들어본 것 같다. 친구들은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그녀도 서연이의 절친답게 학과 내에서 미모로 평판이 자자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친한 사이이니 이렇게 조끼리도 얘기가 쉽게 이루어졌나보다. 서연이가 말하는 그 남자 선배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건 내 관심 밖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다른 문제에 그닥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그럼 이번 토요일에 예진이네 조랑 만나서 같이 출발하는 걸로 해요. 두 사람 다 시간은 괜찮죠?"
"응."
"저도 괜찮아요, 언니."
일단 얘기가 일단락 되고 나니 나는 다시 온전히 내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 신경을 쓰느라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내 표정이 더없이 불편해 보였는지 두 여자는 줄곧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게다가 그녀들의 말마따나, 어제의 그 엄청난 섹스를 겪고 난 이후로 지금 내 몰골은 그야말로 철인 3종 경기라도 뛰고 온 사람처럼 진이 빠진 모습이었기에 그녀들은 더욱 날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오빠, 밥은 먹었어요?"
유정이가 다시 내게 묻는다. 이번에도 서연이는 뭔가 말할 타이밍을 빼앗긴 모양인지 표정이 샐쭉해졌다.
"아니. 급하게 오느라..."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밥을 안 먹어요?"
"배, 배탈 때문이지. 근데 왜 갑자기 화를 내?"
얘기를 꺼낸건 유정인데 엉뚱하게도 다짜고짜 서연이가 끼어들어 화를 낸다. 얘 화난 건가? 조금 움찔해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때마침 누군가가 등장해서 그 애매한 난국을 종식시켰다.
"서연아, 뭐해?"
"어... 예진아."
한 쌍의 남녀였다. 서연이의 반응으로 보건대 그녀의 친구 예진인가보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서연이의 친구 답게 스타일이 좋았다. 비록 내 눈엔 서연이에 비해 한참 모자라 보였지만 소문대로 역시 미모가 상당했다. 어쨌거나 솔직히 지금은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으므로 나는 두 사람이 얘기하는 동안 내 문제에나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연이가 먼저 나에게 그녀의 친구를 소개하고 나섰기에 시선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 제 친구 예진이에요. 이번에 같이 견학가게 된."
"아, 으응."
"예진아, 안 그래도 방금 전까지 너네 조 얘기하고 있었어. 우리 조 성진 선배랑 유성이야."
"아~ 안녕하세요 성진 선배. 오랜만이에요~"
음, 오랜만이라...? 그녀 입장에서는 내가 학과 선배이고 하니 예의상 꺼낸 인사겠지만 솔직히 오랜만은커녕 나는 그녀와 대화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성진 선배, 요새 서연이하고 부쩍 같이 다니시는 것 같아요. 두 사람 언제부터 친해진 거에요? 원래는 사이 안좋지 않았었나? 호호."
내가 서연이에게 찌질하게 추근거렸던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을 그녀는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태여 그런 불편한 화제를 꺼내는 그 예진이라는 기집애가 내 입장에서는 썩 호감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서연이도 그 주제는 약간 불편한지 친구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른다.
"웬 쓸 데 없는 소리야?"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호호. 아 참, 이 쪽은 한수 선배에요. 우리 조장인 선배. 성진 선배랑은 동기인 걸로 알고 있는데 굳이 내가 소개할 필요는 없나?"
예진이는 함께 나타났던 옆의 남학생을 내게 소개한다. 다부진 인상의 남자가 쭈뻣거리며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한수? 그러고 보니 예전 신입생 시절에 그런 이름의 동기가 있었던 것 같긴 했다. 물론 내가 학과 생활을 잘 안 했기에 몇몇을 제외하고 동기들 이름을 거의 잊어버렸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보니까 대충 이런 녀석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기억이 났다.
"오랜만이다, 성진아. 복학하고 나서 이렇게 얘기해보는건 처음이네."
"어어, 그래. 반갑다."
내가 뭐라고 인사를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넨다. 나도 졸업을 늦게 하는 편이지만 이 녀석도 나와 별반 다를게 없는 처지인 모양이다. 거의 화석 취급을 받고 있는 내 학번이 나 말고도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있다는게 새삼 놀라웠다.
"너도 졸업 늦게 하나 보구나."
"뭐 휴학 좀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회포를 푼다고 보기에는 우리가 너무 남남 같은 사이였기에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바로 다음 순간 예진이의 입에서 새로운 화제가 나와 쓸 데 없이 대화를 이어갈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그렇고 서연이 너, 이렇게 있어도 돼? 좀 있으면 학회장들 회의 있잖아."
"아... 그래."
서연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그럼 토요일에 봐요."
"그래, 학과 일로 바쁜가보네. 수고해."
"흥."
흥이라니? 수고하라고 격려를 해줬건만 이 퉁명스런 반응은 또 뭐람.
아니꼬운 기분을 팍팍 뿜어내며 가버리는 서연이의 뒷모습을 보자 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서연이가 사라지니 그녀의 친구인 예진이도 덩달아 가버렸는데, 이상하게 그 한수라는 녀석은 계속 남아 있었다. 녀석은 나와 유정이가 있는 테이블에 불쑥 걸터 앉았다. 아까부터 유정이가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 못내 신경이 쓰였던 나였기에, 기껏 둘이 남게 된 시간을 함부로 방해 받는 기분이 들어 약간 언짢았다.
"성진아, 오랜만에 만나서 갑자기 대뜸 이런 말 꺼내는게 미안하긴 한데...."
"어?"
"나 실은 부탁이 있다."
부탁? 아니, 도대체 날 언제부터 잘 알고 지냈다고 갑자기 부탁이야?
"갑자기 부탁이라니? 뭔데."
"혹시 너 서연이랑 사귀는건 아니지?"
"콜록!"
생뚱맞은 질문에 마시던 커피가 도로 역류했다. 아니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젠장맞을 소리지?
"콜록, 콜록.... 가,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니, 네가 요새 부쩍 서연이랑 같이 다닌다는 말을 들어서. 혹시 두 사람 뭔가 있는가 하고."
놈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서연이랑 사귀고 있는가에 대해 진심으로 의혹을 품고 있지는 않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다음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형식상 물어보는 것 뿐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 같은 찌질이가 서연이랑 사귄다는 가정 자체를 처음부터 하고 있지 않는게 틀림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옆에 유정이가 있다는게 더 문제였다. 물론 서연이랑 내가 엄밀히 말해서 사귀는 사이가 아니긴 했지만 우리만이 알 수 있는 그 미묘한 사이를 인정하기에는 이 놈이 그럴 가치도 없었거니와 더군다나 유정이가 보는 앞에서 뭔가 특별한 뉘앙스를 주는 말을 하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인정했다.
"그래, 아냐. 그런데 그게 왜?"
"다행이다. 갑자기 이런 말 꺼내서 미안하긴한데.... 그럼 나 좀 도와줘라."
"뭘 도와달란거야?"
"내가 사실 서연이를 좋아하거든."
"콜록!"
두 번째 사레가 찾아왔다. 안그래도 지금 골치 아파 죽겠는데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소리지? 돌발발언에 나는 물론이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유정이조차도 표정이 약간 애매해졌다.
"너도 서연이가 지환이란 헤어졌단 말은 들었지? 내가 사실 서연이 신입생 때부터 많이 좋아했는데.... 용기도 못 내고 머뭇거리다가 지환이랑 사귄다는 말 듣고 많이 속상했었거든. 이렇게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이번엔 제대로 다가가 보려고. 마침 운 좋게도 이렇게 같이 견학도 가게 되서 좋은 계기라고 생각하는데, 그 날 네가 옆에서 좀 도와주면 더 수월하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대체 뭘 도와달란거야?"
기분이 상했기 때문인지 저절로 말이 욱하게 나온다. 하지만 이 놈은 생긴 것 만큼이나 눈치가 없나보다. 하긴 눈치가 없으니 내게 이런 말을 꺼내고 있겠지. 서연이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면 과거에 내가 서연이에게 찝적거린 적이 있다는 사실 또한 소문으로 알고 있을 텐데. 아니면 나 같은 찌질이는 어차피 서연이랑 잘 될 가망이 없으니까 자기나 도와달라 이건가? 어느 쪽이든 도저히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임은 분명했다.
"그냥 견학할 때 내가 서연이에게 말이라도 잘 붙일 수 있게 좀 도와줬으면 해서. 너 서연이랑 요새 친하다며. 아무래도 조사하는 부분이 다르다 보니까 계속 티나게 옆에 붙어있기는 너무 노골적일거 같고. 네가 분위기 좀 잘 만들어주면 같이 조사 하면서 서로 얘기도 많이 할 수 있을거 아냐. 안 그래?"
안 그래? 같은 소리하고 있네. 옥수수를 털어버리고 싶다.
"동기 좋다는게 뭐냐. 하하. 그 날 나 좀 도와줘라. 내가 서연이랑 잘 되면 진짜 크게 한턱 쏜다."
신입생 시절 이후로 말 한마디 안 섞어봤던 놈이 무슨 개뿔이 동기 타령이야? 대면하는 순간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보니 정말 맘에 안 드는 놈이다. 몇 마디 대화만으로 이렇게 비호감이 될 수 있다니 신기할 지경이다. 하지만 더욱 맘에 안 드는 것은 지금의 내 상황이었다. 당당하게 "주서연은 내 여자니까 그따위 개소리 집어쳐라!" 하며 쏘아 붙이지 못하니까.
"그럼 나 간다. 나중에 보자~"
눈치 없는 그 한수라는 새끼는 제 할 말만 끝내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비로소 나와 유정이가 둘만 남게 되었지만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우리는 잠시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오빠, 괜찮아요?"
"으, 응? 뭐가?"
"서연 언니 말이에요."
그녀는 나와 서연이 사이의 기묘한 기류를 그래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니 방금 전의 대화에서 내 심경의 변화를 나름대로 캐치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유정이 앞에서 서연이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은 지극히 가식적이었다.
"어어... 뭐.... 괜찮겠지."
"아까 서연 언니 좀 화난 것 같던데요."
"그러게. 왜 화난 거지?"
"나도 알 것 같은 문제를 오빠가 모른다니 이상하네요. 혹시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거에요?"
"......."
"뭐 그건 그렇고, 몸은 많이 안 좋은 거에요? 병원 안 가봐도 되나요?"
"아, 아니야. 됐어. 그냥 집에 가서 쉬면 돼."
그녀는 내가 병원에 가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난 한사코 됐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아프지가 않은데 무슨 병원을 간단 말인가. 섹스 후유증이라고는 죽어도 말 못할 노릇이니 참으로 고역이었다.
"그럼 가요. 집까지 데려다 줄 게요."
"그래.... 응? 뭐라구?"
"집까지 데려다 준다구요. 혹시 차 가져오신 거에요?"
문득 주차장에 얌전히 주차 되어 있을 내 차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머리 한 구석에서는 유정이의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가는 우리의 모습이 머릿 속에 그려졌다. 본능적으로 나도 모르게 대답을 내뱉고 있었다.
"아, 아니. 안 가져왔어."
부디 주차장에서 유정이가 내 차를 알아보지 못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아침엔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오늘은 이렇게 새벽에 글을 올리고 잠자리에 듭니다 ^^
주말은 잘들 보내셨는지요? 세간을 떠들석하게 했던 경기가 있었던 주말이었네요
Cheshier 님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글머리 문구에 소라넷 표기 사이에 점을 넣어보았어요. 타 사이트에서 소라라는 단어를 필터링 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또 조언해주실 점이 있다면 언제든 부탁드리겠습니다 ^^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5장
예로부터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법이다. 과거에 나는 지환이 그 놈에게 내가 받았던 굴욕과 모멸에 대한 대가를 확실하게 되돌려 준 적이 있었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제대로 된 엄청난 복수였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서연이의 마음이 내게 기울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사내로서 어찌 그런 굴욕을 잊을 수 있을까?
나 또한 내심은 알고 있었다. 지환이 그 놈이 결코 그렇게 얌전히 꼬리를 말고 물러나지는 않을 거란걸. 하지만 놈의 얼굴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등장한다는 것은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대체 현아와 지환이 사이에 무슨 개연성이 있기에 그녀의 PC 화면에서 놈의 얼굴이 나오며, 또 하물며 둘이 저렇게 살을 섞고 있단 말인가.
"최근 누군가로부터 미행 당했다고 느낀 적이 없나요?"
멍하니 PC만 들여다 보고 있는 내 귓전에 현아의 목소리가 꽂혔다. 워낙 얼이 나가 있었기에 말이 귀로 들어오고 나서도 의미를 해석하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사적으로 뇌 속에서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고 있었다.
미행...? 미행이라고?
"자, 잘 모르겠어요..."
물론 내가 조금만 더 세부적인 기억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그 언젠가 현주의 아파트 앞에서 내 차를 뒤따라 붙었던 바로 그 정체 모를 자동차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기억해 낸 것은 그 후의 일이고,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현아의 설명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 사람을 처음 만난건 불과 일주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어요. 지난 주 화요일 쯤이었나?"
"어, 어떻게 이 녀석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아파트 앞에서 웬 낯선 남자가 나를 불러 세우더군요. 모양새로 보아하니 꽤 오랜 시간을 우리 집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내게 접근한 이 남자가 대뜸 내게 묻더군요. 최성진의 여자친구가 아니냐고."
"네에....?"
너무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의외의 전개 앞에 나는 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의 다음 설명만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난 눈치가 빨라서 말이에요.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남자가 나를 현주로 착각했다는 것쯤은 대충 느낄 수 있었죠. 성진 씨도 보다시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 자매가 얼굴만으로는 조금 구분하기 힘들잖아요."
"그, 그 놈이... 현아 씨를 현주로 착각하고 접근했다는 거에요?"
"그래요. 이 남자 말에 따르면 꽤 끈질기게 당신을 미행했다던 걸요. 미행 끝에 여자친구의 집을 알아냈고, 그 여자친구에게 꼭 말해줄 것이 있어서 내게 접근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불쌍하게도 당신 여자친구의 얼굴을 제대로 구별해 낼 수 있을 만큼 유심히 보지는 못한 모양이죠. 그 애와 꼭 닮은 언니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을 테니까."
"자, 잠깐만요..."
현아와 현주를 착각했다고? 그렇다면 놈은 처음부터 내 여자친구를 노리고 접근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머릿 속이 정리가 되질 않았지만 그걸 정리하기 위해선 그녀의 설명이 더 필요했다. 정신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현아의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요?"
"말했듯이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 이게 성진 씨에 관련된 일이라는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죠. 나는 내가 당신의 여자친구가 맞다고 대답해 줬어요. 그 남자가 그대로 나를 현주로 착각하게끔 말이에요."
"왜, 왜 그랬어요?"
"그럼 그 낯선 남자가 현주에게 접근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뒀어야 한다는 거에요?"
순간 할 말을 잃고 만다. 그 때까지 내가 지환이 놈의 목적을 모르고 있긴 했었지만 그 놈이 나와 관련된 일로 현주를 찾는다면 결코 그것이 좋은 의도는 아닐 것임이 안 봐도 뻔했기에.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그 남자에게서는 뭔가 수상한 기색이 확 풍겼어요. 나는 남자를 읽는데엔 도가 텄으니 그 정도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어렴풋이 알 수 있었죠. 그렇게 느낌이 수상한 남자를 내 동생과 마주치게 하고 싶진 않았어요. 게다가...."
"게, 게다가 뭐요?"
"무척 재미있는 냄새가 났거든요. 성진 씨도 알다시피.... 나는 그런 재미난 일은 그냥 넘기질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뭔가가 있었달까?"
그 말을 하면서 현아는 진정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니 어제의 노예 같았던 그녀에서 다시 평소의 그녀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지환이의 얘기를 듣는게 훨씬 중요했다. 하지만 그 일을 "재미있다"라고 표현하는 그녀의 내면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그래서 그 놈이 현아 씨를 내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다 이거죠. 그래서 놈이 뭐라던 가요? 그, 그리고, 왜 당신이 이 놈과 이렇게...."
"진정해요. 그 남자는 내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요. 우리는 자리를 옮겨서 꽤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오랜 시간 동안 그가 내게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어주었죠. 그건 마치... 고자질 같더군요. 누군가의 그릇된 행위에 대한."
"........"
그 누군가는 당연히 나를 가르킬 터.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 놈에게서.... 뭘 어디까지 들었나요?"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들었죠. 아마 성진 씨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모두 들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네요. 무척 재미있기도 하고 꽤 놀랍기도 했어요. 사실 처음 들었을 땐 몰랐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성진 씨가 빼앗아 갔다는 그 남자의 연인이었던 여자가 아까 얘기했던 그 아가씨죠? 당신이 강간했다던 그 학회장 아가씨....."
"........"
서연이의 이야기까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는건 지환이 놈이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는지 한마디로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그녀가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어차피 아니라고 속이는 것도 부질 없는 짓이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 호호 웃었다.
"솔직히 이야기를 듣자마자 병원에서 봤던 그 아가씨 얼굴을 떠올리긴 했었죠. 왠지 그럴 것 같더군요. 하지만 그녀를 강간했었다니 정말 놀랍네요. 그 남자는 단순히 성진 씨가 그녀의 마음을 훔쳐간 걸로만 알고 있던데.... 이거 그 남자가 알면 더욱 분노할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하긴 지환이 놈은 내가 서연이를 강제로 범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지.
"그, 그래서요? 그 뒤는요?"
"그 남자가 말하더군요. 당신에게 연인을 빼앗긴 비참함이 너무 크다고.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어 내 남자친구의 만행을 나에게 직접 실토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는군요. 마치 나를 위해 내가 모르는 정보를 넘겨주는 듯이 말은 했지만 결국 그것이 그 나름의 복수라는 사실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죠. 아마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줌으로 인해 나와 당신이.... 아니, 당신과 현주가 헤어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요."
"이런 개새끼가...."
나도 모르게 무심코 욕설이 튀어나왔다. 물론 내가 놈에게 한 짓도 그 못지 않게 악랄한 짓이었긴 했지만 내가 그런걸 굳이 비교할 이유가 없잖은가. 사람은 자고로 받은 것만 기억하는 법이니. 그래서 현아는 뭐라고 대답했는지를 묻자, 그녀가 나의 분노에도 아랑곳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나는 그 남자의 비참함에 공감해주는 척 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나... 그러니까 여자친구인 나를 두고 배신을 했다는 사실에 무척 충격 받은 척 연기를 해줬죠. 나 모르게 그런 짓을 하고 다닐 줄은 몰랐다며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무척 만족해 하는 것 같더군요."
이런 씨발.... 그 새끼는 설마 자기가 쪼르르 달려가서 내 여친에게 몇 마디 고자질 한다고 해서 내 여친이 자기 말만 믿고 나를 경멸할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실로 단순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놈으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만든 현아의 연기가 그만큼 대단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이 사실을 알고 당신과 헤어지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남자의 약점들을 이용해 보복을 할 것임이 분명하니 자기는 얼른 몸을 피해야 겠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듣자하니 무슨 각서 같은걸 썼다고 하던데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대충 들어보니 휴학을 하고 도피 삼아 유학을 갈 생각이었다던데 해외로 피하기 전에 내게 이 사실을 꼭 알려주고 싶었나보죠."
"해, 해외? 이 새끼가 진짜...."
그러니까 내 여친에게 나의 만행을 고자질하는 것으로 앙갚음을 대신한 후에, 외국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단 건가? 보자보자하니까 진짜 별 짓거리를 다하는 구나. 이젠 정말 참을 수 없다. 이 놈에게 아량을 베풀기로 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응징을 가해야 한다.
"조, 좋아요. 아직도 얼떨떨하지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대충 알겠어요. 그런데 도대체 당신이 왜 이 놈과 이런 영상을 남기게 되었는지는 이해가 안 가네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영상 속의 장소는 지금 내가 그녀와 함께 있는 바로 이 스위트룸 안이다. 이 영상이 사실이라면 지환이 놈도 여기에 들어왔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갑자기 무척 불쾌한 기분이 솟구치면서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꼭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아 또한 그런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기색이었다.
"나는 당신의 비행에 좌절하는 척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남자의 비참함을 이해하는 척 했죠. 나는 우선 그를 안심시켰어요. 성진 씨가 언제 보복을 가해올지 모르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국내를 뜰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내가 들은 내용을 비밀로 지켜주겠노라고 단단히 약속했어요."
"도대체 왜요?"
"킥킥."
그 순간 현아의 그 어딘지 모르게 광기 어린 웃음은 어제와 같이 나를 섬짓하게 만들었다. 내 노예를 자처했던 그녀가 내게 다시금 이런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며칠 후에 나는 그에게 연락해서 그를 다시 한번 만났죠. 성진 씨는 물론이고 현주에게까지 비밀로 하면서. 그 지환이란 남자가 전해준 이야기로 인해 내가 며칠 동안 큰 충격에 시달렸으며, 지금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느낄 수 있도록 얼빠진 여자 연기를 톡톡히 해줬지요. 우리는 술을 마셨어요. 서로가 취할 정도로 마셨지만 그는 특히나 더 깊게 취한 것 같더군요. 나는 그를 이 방으로 데려왔어요."
"........"
"술에 취한 그는 버릇처럼 되뇌어 말하더군요. 최성진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고. 그런 그에게 나 또한 나를 배신한 남자로 하여금 대가를 치루게 해주고 싶다고 속삭였어요. 지환 씨가 성진 씨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 것 같냐며 나는 은근히 그를 유혹했죠."
"뭐, 뭐라구요?"
순간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그 띵한 감각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 유혹의 결과가 지금 이렇게 PC 안에서 재생되고 있지 않은가.
"조금만 유혹을 가했을 뿐인데 그는 눈이 뒤집어져서 나를 덮치더군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남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짜릿했겠어요? 여자친구를 빼앗아 간 남자에게 자신도 똑같은 방법으로 극적인 복수를 가한다. 성진 씨 모르게 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는 얼마나 흥분되었을까요?"
"........"
"후후. 그 남자는 정말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난 그 쾌감을 더 높여주기 위해 정말 가련한 여자인 것처럼 신음하고 유린 당했죠. 남자친구에게 배신 당한 여자가 복수를 빙자한 강간을 당하며 불쌍하게 무너지는 모습. 아마 그 남자 입장에선 정말 황홀한 기분이었겠죠."
순간 속에서 억센 분노가 불같이 들끓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와 같은 일을 벌였는지는 몰라도 그 지환이 새끼가 현아를 유린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내가 현아를 특별히 아끼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순수하게 임지환이란 놈을 향한 분노였다.
속사정이야 그녀가 다 알고서 임지환을 조종한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녀가 결국 지환이 새끼에게 따먹힌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하물며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지환이 새끼가 지금쯤 "최성진의 여친을 따먹었다" 라는 사실로 인해 얼마나 커다란 만족감과 짜릿함을 느끼고 있을 지를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 지는 기분이었다. 그 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나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에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버럭 높아진다. 구태여 사건을 그런 방향으로 몰고간 그녀의 독단이 너무도 어처구니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언성에도 불구하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이제 그녀에게서는 더이상 어제와 같던 노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말했잖아요. 재미있으니까."
"재, 재미라구요? 재미를 위해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요. 내가 기껏 마음 먹고 성진 씨에게 내 솔직한 내면을 털어놓았는데 당신은 의외로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성진 씨, 나에게는 이 세상 남자들을 내 손아귀 위에서 쥐락펴락 갖고 놀며 그들을 유린하는게 삶에 있어 가장 큰 기쁨이에요. 그걸 재미라는 이름으로 표현하지만 나에겐 그만한 가치가 또 없죠. 그 지환이란 남자와 처음으로 말을 섞은 순간부터 나는 느꼈어요. 비참함이라는 이름으로 심정을 포장하고 있긴 하지만 실상은 그도 똑같은 남자. 어차피 자기 자신의 추잡한 복수를 이루기 위해 여자를 도구처럼 이용하려고 내게 접근했다는 것을요. 난 반대로 그런 그의 의도를 이용하고 싶었어요. 그게 재미있으니까요. 이게 잘못되었나요?"
"하,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이 그 놈에게 당한 거나 다름 없잖아요!"
"뭐가 당했다는 거죠? 몸을 한번 내어준게 당했다는 건가요? 하긴 대부분이 남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더군요. 여자의 몸을 취하기만 하면 그 여자를 짓눌렀다고 생각하는게 남자들의 사고방식이니까요."
영상 속의 그녀는 정말이지 처참하게 무너지며, 지환이 새끼의 손아귀에 알몸이 희롱 당하고 있었다. 지환이 새끼의 열에 달뜬 표정은 놈이 얼마나 극적인 복수심을 짜릿하게 느끼고 있는지를 내게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 놈이 그런 쾌감을 느끼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는데, 그녀는 자신이 그것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단 말인가? 나는 도무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더 화가 날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게 너무도 여유롭게 말한다.
"성진 씨, 당신 눈 앞에 있는 것을 보세요. 나는 그 잠깐의 욕정을 받아준 대가로 "이걸" 손에 넣게 되었죠. 이 약점 하나가 사내에게 있어 얼마나 큰 족쇄가 되는지 당신은 알기나 하나요?"
그녀는 PC 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어찌보면 파일 하나에 불과할 따름인 그 영상을 똑바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그 영상 하나가 발휘하는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어쩌면 그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녀는 저렇게도 일부러 가련하게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영상 속의 두 사람의 모습만 놓고 보면 누가 보더라도 지환이가 현아를 강간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모순적이네요. 그럼 성진 씨는 이 남자가 현주에게 의도대로 접근했기를 바라는 건가요? 만약 그랬다간 일이 더 심각해 졌을텐데요. 이 남자가 나를 현주로 착각한건 성진 씨에게 있어 오히려 천운이에요. 그리고 어찌보면 나는 당신을 도와준 조력자나 다름이 없구요. 대체 당신이 이 상황에서 무슨 이유로 화를 내는 건가요?"
"........"
물론 그녀의 말이 맞다. 지환이 새끼가 만약 계획대로 현주에게 접근했다면 사태는 지금보다 더욱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현아의 말마따나 그녀가 지환이를 대함에 있어 그런 기지를 발휘한 것은 결과만 놓고보면 오히려 나를 도운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화를 낼 처지가 아닌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런 사태를 초래하게끔 만든 장본인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겨우 몸 한번 내준 것 따위,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 오히려 또 한 남자를 손 안에서 갖고 놀게 되었다는 사실이 재미있을 뿐이죠. 내가 오늘 이 사실을 성진 씨에게 말해주는 이유는 당신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에요. 내가 약속했듯이 당신이 내게 솔직했으니, 나는 앞으로 당신의 사생활에 대해서 함부로 참견하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이 사랑과 욕정을 명확하게 구분해주기만 한다면 나는 당신의 번잡한 여자관계를 비난하지 않을 거에요. 다만...."
"........"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현주가 피해를 보게 하지는 말아줬으면 해요. 이번엔 내가 중간에서 그것을 막았지만 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요. 당신이 현주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이해해 줄 거라 믿어요."
할 말이 없다. 분명 마음 속은 무언가 찝찝한 기분으로 들끓고 있는데 일언반구도 그녀의 말에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입술을 깨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앞으로 지환이 그 놈을 어떻게 처리할 건가요?"
"글쎄요.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이 나를 이용해서 당신에게 복수를 하고 있다는 것에 너무도 큰 쾌감을 느끼고 있어서, 여전히 당신 모르게 나를 무척 만나고 싶어해요. 당분간은 그 쾌감을 이룰 수 있게 허락해 주는 것도 괜찮겠죠. 혼자 들뜨는 모습을 보는게 재미있기도 하고."
"그, 그럼 앞으로 또 그 놈을 만나서 이런 일을 되풀이 하겠단 거에요? 안 돼요!"
"왜 안 돼죠? 나는 흥미롭기만 한 걸요."
"그 놈이....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구요."
현아는 야릇한 웃음을 짓는다. 지환이는 물론이고 마치 내 머리 위에도 서 있는 것 같은 여유로운 웃음이다.
"그건 수컷으로서의 승리감을 박탈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불과해요. 성진 씨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모처럼 이런 큰 재미를 버리고 싶진 않네요. 누가 뭐래도 성진 씨에겐 나를 말릴 자격이 없잖아요?"
그녀의 말은 치욕스러울 정도로 사실이었기에, 나는 순간 얼굴이 울컥 붉어졌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복으로 그녀를 또 한번 여기서 노예처럼 부린다거나, 그녀의 몸을 희롱하여 정신적인 만족을 얻는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현아가 상대라면 오히려 그것은 내가 지환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걸 스스로 인정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너무도 분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성진 씨에게 피해 가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나도 적당히 갖고 놀다가 버릴 생각이니 이 문제는 나에게 맡겨줬으면 좋겠네요. 오늘 성진 씨에게 이걸 보여주는 데엔 거기에 대한 허락을 구하고자 했던 이유도 있답니다."
허락이라니,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려놓고 또 무슨 허락을 내게 구한단 말인가. 간밤의 일로 조금은 사랑스럽게 느껴졌었던 그녀가 다시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아무 반박을 할 수 없는 내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와중에 현아 씨의 휴대폰이 울린 것은 어찌보면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비참한 일이었다. 짤막한 전화를 받고 난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럼 난 이만 슬슬 다른 일에 신경을 써야겠네요. 고객과의 약속이 있어서요. 성진 씨도 이만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
내 복잡한 심정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여기서 이제는 떠냐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마지못해 움직였지만 걸음걸이가 너무도 찝찝했다. 얼굴을 애써 보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구태여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문을 나서기 전에 딱 한마디를 씹어뱉듯이 그녀에게 건넸다.
"당신은 그런걸 재미있다고 표현했지만.... 그렇게 사는게 결코 행복하다고 느끼지는 않을 거에요."
그녀는 어느새 알몸에 셔츠 한장을 걸치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에 스위트룸의 문을 닫았다. 고요하게 닫힌 방 문을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는 그 호텔을 떠났다.
*
호텔을 나서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현아와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를 실감했다. 해는 이미 중천을 넘어 기울고 있었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현실의 감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깨어났기에, 나는 잊고 있었던 것 하나를 깨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학교!"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도 아니었다. 서둘러 시간표를 더듬어본다. 빌어먹게도 이미 오전 수업 하나를 놓친 상황이다. 나도 모르게 오늘이 휴일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는지 나의 일정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차를 몰고 그대로 곧장 학교로 향했다. 어지간하면 자취방에 들러 옷이라도 갈아입고 싶었지만 시간을 보니 당장 학교로 향하지 않으면 이번 수업도 놓칠 타이밍이었다. 출결 점수에 그렇게 신경을 썼던 걸로 보면 그 와중에도 내가 전체 과탑에 대한 욕심이 있긴 있었나보다.
때마침 가는 길에 핸드폰이 한차례 울려서 확인하니 서연이로부터 날아온 톡이었다.
- 선배, 어디에요?
- 학교 가는 길인데 왜?
- 오늘 오전 수업 빼먹으셨잖아요. 무슨 일 있어요?
신기하군. 그 오전 수업은 서연이랑 같이 듣는 수업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정말 요 계집애가 나한테 마음이 생기긴 생긴 걸까? 하지만 그걸 마냥 귀여워하고 있기에는 지금 내 마음 속이 너무 복잡했다. 하물며 이건 지환이에 관련된 문제였기에 서연이의 톡을 받고보니 더욱 기분이 혼잡스러웠다.
"선배?"
서연이의 얼굴을 보는게 결코 싫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솔직히 서연이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머피의 법칙 때문인지 인문관에 발을 들이는 순간 서연이와 마주치고 말았다. 우연도 무슨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우연도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고 했다.
"한참 기다렸어요."
"기, 기다려? 왜?"
"곧 주말이잖아요. 우리 조별 발표 준비하기로 했잖아요. 잊었어요?"
아 참, 조별발표!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것은 유정이와 같이 듣는 수업의 과제이기도 했기에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유정이가 떠올랐다.
"PPT 제작은 예정대로 다음 주에 선배네 자취방에서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전에 선배도 알다시피 박물관 견학을 다녀와야 해서요. 선배만 괜찮으면 이번주 토요일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으응. 좋아."
"상의할 것도 있으니까 유정이도 부를게요. 곧 수업 끝나니까 금방 올 거에요. 그런데 선배도 수업 들어갈 시간 아니었어요?"
"아 참, 맞다. 수업!"
서연이가 일깨워 준 덕분에 나는 부리나케 강의실로 뛰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수업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기에 중간에 머쓱하게 들어가는 것도 민망한 일이긴 했다. 난 눈치껏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학생들이 밖으로 나올 때 혼잡한 틈을 타서 교수님께 출석체크를 부탁했다. 비록 지각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그래도 결석을 면했다는 사실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별 얻은 것도 없는 수업을 끝마치고 다시 서연이에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매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수업에 들어갔다 오는 사이에 유정이도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으응, 유정아 안녕."
유정이를 마주하는 순간 괜히 낯이 부끄러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늦더라도 옷이나 갈아입고 올 걸.... 나는 혹시나 그녀들이 내가 어제와 옷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않길 바랐지만 불행인지 행복인지 의외로 두 여자 다 내게 생각보다 관심이 있는 모양인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입을 모아 물었다.
"왜 어제랑 옷이 같아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두 사람이 똑같은 타이밍에 질문을 던지고는, 자기들이 생각해도 신기한지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두 여자. 다른 때 같았지만 왠지 묘하게 기분이 좋았겠지만 지금은 더이상의 고민거리를 만들기 싫었기에 대충 둘러댔다.
"아, 그냥 오늘 너무 정신없이 나와서...."
"그런데 오빠, 어디 아파요? 얼굴이 퀭하네요."
서연이가 내게 뭐라고 말을 건네려는 찰나 유정이가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할 말을 놓친 서연이가 표정이 애매하게 굳었지만 그 "오빠" 소리를 듣고 더욱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여전히 유정이와 내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영 못마땅하게 들리나 보다. 하긴 그녀는 내가 유성이를 유정이라고 부르는 이유조차도 모를 테니까.
"아, 그, 그게... 아무래도 배탈이 난 거 같아. 속이 좀 안 좋네."
차마 얼굴이 헬쓱한 이유가 다른 여자와 밤새도록 섹스를 하고 와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말 못할 얘기이긴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그 사실을 비밀로 감추어야 할 상대를 우선순위로 매겨보라고 한다면 눈 앞의 두 여자는 충분히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배탈이요?"
두 여자의 표정이 약간 애매하게 굳었다. 특히 서연이의 기묘한 표정이 가관이었다. 뭔가 심기가 뒤틀린 것 같긴 한데 아프다니까 화도 못 내겠고 입술을 툭 내밀고 있는 모습이 뭔가 귀여웠다. 유정이만 없었더라도 뭔가 해줬을 텐데.
매점의 작은 테이블을 두고 우리 세 사람은 둥글게 둘러앉아 주말에 견학을 다녀올 일정을 세웠다. 나는 우리 셋만 다녀오는 줄 알고 약간 불안해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기대하는 바가 없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만 가는게 아니라 다른 조 한 팀과 함께 다녀오나보다.
하긴 우리 조만 과제를 하는건 아니니까 그럴 만 하긴 했지만 왠지 우리 셋만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 받는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나와 서연이, 유정이만 다녀오게 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어느 조랑 같이 가는 건데?"
"제 동기 예진이 아시죠? 마침 조사해야 하는 부분이 비슷해서 같이 다녀오자고 그쪽에서 얘기가 나왔어요. 예진이네 조는 예진이랑 남자 선배 둘이던데 한 분은 성진 선배랑 동기던걸요."
"그래? 뭐 알겠어."
예진이? 예진이라.... 나도 이름은 꽤 여러번 들어본 것 같다. 친구들은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그녀도 서연이의 절친답게 학과 내에서 미모로 평판이 자자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친한 사이이니 이렇게 조끼리도 얘기가 쉽게 이루어졌나보다. 서연이가 말하는 그 남자 선배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건 내 관심 밖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다른 문제에 그닥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그럼 이번 토요일에 예진이네 조랑 만나서 같이 출발하는 걸로 해요. 두 사람 다 시간은 괜찮죠?"
"응."
"저도 괜찮아요, 언니."
일단 얘기가 일단락 되고 나니 나는 다시 온전히 내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 신경을 쓰느라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내 표정이 더없이 불편해 보였는지 두 여자는 줄곧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게다가 그녀들의 말마따나, 어제의 그 엄청난 섹스를 겪고 난 이후로 지금 내 몰골은 그야말로 철인 3종 경기라도 뛰고 온 사람처럼 진이 빠진 모습이었기에 그녀들은 더욱 날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오빠, 밥은 먹었어요?"
유정이가 다시 내게 묻는다. 이번에도 서연이는 뭔가 말할 타이밍을 빼앗긴 모양인지 표정이 샐쭉해졌다.
"아니. 급하게 오느라..."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밥을 안 먹어요?"
"배, 배탈 때문이지. 근데 왜 갑자기 화를 내?"
얘기를 꺼낸건 유정인데 엉뚱하게도 다짜고짜 서연이가 끼어들어 화를 낸다. 얘 화난 건가? 조금 움찔해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때마침 누군가가 등장해서 그 애매한 난국을 종식시켰다.
"서연아, 뭐해?"
"어... 예진아."
한 쌍의 남녀였다. 서연이의 반응으로 보건대 그녀의 친구 예진인가보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서연이의 친구 답게 스타일이 좋았다. 비록 내 눈엔 서연이에 비해 한참 모자라 보였지만 소문대로 역시 미모가 상당했다. 어쨌거나 솔직히 지금은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으므로 나는 두 사람이 얘기하는 동안 내 문제에나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연이가 먼저 나에게 그녀의 친구를 소개하고 나섰기에 시선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 제 친구 예진이에요. 이번에 같이 견학가게 된."
"아, 으응."
"예진아, 안 그래도 방금 전까지 너네 조 얘기하고 있었어. 우리 조 성진 선배랑 유성이야."
"아~ 안녕하세요 성진 선배. 오랜만이에요~"
음, 오랜만이라...? 그녀 입장에서는 내가 학과 선배이고 하니 예의상 꺼낸 인사겠지만 솔직히 오랜만은커녕 나는 그녀와 대화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성진 선배, 요새 서연이하고 부쩍 같이 다니시는 것 같아요. 두 사람 언제부터 친해진 거에요? 원래는 사이 안좋지 않았었나? 호호."
내가 서연이에게 찌질하게 추근거렸던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을 그녀는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태여 그런 불편한 화제를 꺼내는 그 예진이라는 기집애가 내 입장에서는 썩 호감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서연이도 그 주제는 약간 불편한지 친구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른다.
"웬 쓸 데 없는 소리야?"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호호. 아 참, 이 쪽은 한수 선배에요. 우리 조장인 선배. 성진 선배랑은 동기인 걸로 알고 있는데 굳이 내가 소개할 필요는 없나?"
예진이는 함께 나타났던 옆의 남학생을 내게 소개한다. 다부진 인상의 남자가 쭈뻣거리며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한수? 그러고 보니 예전 신입생 시절에 그런 이름의 동기가 있었던 것 같긴 했다. 물론 내가 학과 생활을 잘 안 했기에 몇몇을 제외하고 동기들 이름을 거의 잊어버렸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보니까 대충 이런 녀석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기억이 났다.
"오랜만이다, 성진아. 복학하고 나서 이렇게 얘기해보는건 처음이네."
"어어, 그래. 반갑다."
내가 뭐라고 인사를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넨다. 나도 졸업을 늦게 하는 편이지만 이 녀석도 나와 별반 다를게 없는 처지인 모양이다. 거의 화석 취급을 받고 있는 내 학번이 나 말고도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있다는게 새삼 놀라웠다.
"너도 졸업 늦게 하나 보구나."
"뭐 휴학 좀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회포를 푼다고 보기에는 우리가 너무 남남 같은 사이였기에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바로 다음 순간 예진이의 입에서 새로운 화제가 나와 쓸 데 없이 대화를 이어갈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그렇고 서연이 너, 이렇게 있어도 돼? 좀 있으면 학회장들 회의 있잖아."
"아... 그래."
서연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그럼 토요일에 봐요."
"그래, 학과 일로 바쁜가보네. 수고해."
"흥."
흥이라니? 수고하라고 격려를 해줬건만 이 퉁명스런 반응은 또 뭐람.
아니꼬운 기분을 팍팍 뿜어내며 가버리는 서연이의 뒷모습을 보자 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서연이가 사라지니 그녀의 친구인 예진이도 덩달아 가버렸는데, 이상하게 그 한수라는 녀석은 계속 남아 있었다. 녀석은 나와 유정이가 있는 테이블에 불쑥 걸터 앉았다. 아까부터 유정이가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 못내 신경이 쓰였던 나였기에, 기껏 둘이 남게 된 시간을 함부로 방해 받는 기분이 들어 약간 언짢았다.
"성진아, 오랜만에 만나서 갑자기 대뜸 이런 말 꺼내는게 미안하긴 한데...."
"어?"
"나 실은 부탁이 있다."
부탁? 아니, 도대체 날 언제부터 잘 알고 지냈다고 갑자기 부탁이야?
"갑자기 부탁이라니? 뭔데."
"혹시 너 서연이랑 사귀는건 아니지?"
"콜록!"
생뚱맞은 질문에 마시던 커피가 도로 역류했다. 아니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젠장맞을 소리지?
"콜록, 콜록.... 가,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니, 네가 요새 부쩍 서연이랑 같이 다닌다는 말을 들어서. 혹시 두 사람 뭔가 있는가 하고."
놈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서연이랑 사귀고 있는가에 대해 진심으로 의혹을 품고 있지는 않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다음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형식상 물어보는 것 뿐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 같은 찌질이가 서연이랑 사귄다는 가정 자체를 처음부터 하고 있지 않는게 틀림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옆에 유정이가 있다는게 더 문제였다. 물론 서연이랑 내가 엄밀히 말해서 사귀는 사이가 아니긴 했지만 우리만이 알 수 있는 그 미묘한 사이를 인정하기에는 이 놈이 그럴 가치도 없었거니와 더군다나 유정이가 보는 앞에서 뭔가 특별한 뉘앙스를 주는 말을 하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인정했다.
"그래, 아냐. 그런데 그게 왜?"
"다행이다. 갑자기 이런 말 꺼내서 미안하긴한데.... 그럼 나 좀 도와줘라."
"뭘 도와달란거야?"
"내가 사실 서연이를 좋아하거든."
"콜록!"
두 번째 사레가 찾아왔다. 안그래도 지금 골치 아파 죽겠는데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소리지? 돌발발언에 나는 물론이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유정이조차도 표정이 약간 애매해졌다.
"너도 서연이가 지환이란 헤어졌단 말은 들었지? 내가 사실 서연이 신입생 때부터 많이 좋아했는데.... 용기도 못 내고 머뭇거리다가 지환이랑 사귄다는 말 듣고 많이 속상했었거든. 이렇게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이번엔 제대로 다가가 보려고. 마침 운 좋게도 이렇게 같이 견학도 가게 되서 좋은 계기라고 생각하는데, 그 날 네가 옆에서 좀 도와주면 더 수월하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대체 뭘 도와달란거야?"
기분이 상했기 때문인지 저절로 말이 욱하게 나온다. 하지만 이 놈은 생긴 것 만큼이나 눈치가 없나보다. 하긴 눈치가 없으니 내게 이런 말을 꺼내고 있겠지. 서연이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면 과거에 내가 서연이에게 찝적거린 적이 있다는 사실 또한 소문으로 알고 있을 텐데. 아니면 나 같은 찌질이는 어차피 서연이랑 잘 될 가망이 없으니까 자기나 도와달라 이건가? 어느 쪽이든 도저히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임은 분명했다.
"그냥 견학할 때 내가 서연이에게 말이라도 잘 붙일 수 있게 좀 도와줬으면 해서. 너 서연이랑 요새 친하다며. 아무래도 조사하는 부분이 다르다 보니까 계속 티나게 옆에 붙어있기는 너무 노골적일거 같고. 네가 분위기 좀 잘 만들어주면 같이 조사 하면서 서로 얘기도 많이 할 수 있을거 아냐. 안 그래?"
안 그래? 같은 소리하고 있네. 옥수수를 털어버리고 싶다.
"동기 좋다는게 뭐냐. 하하. 그 날 나 좀 도와줘라. 내가 서연이랑 잘 되면 진짜 크게 한턱 쏜다."
신입생 시절 이후로 말 한마디 안 섞어봤던 놈이 무슨 개뿔이 동기 타령이야? 대면하는 순간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보니 정말 맘에 안 드는 놈이다. 몇 마디 대화만으로 이렇게 비호감이 될 수 있다니 신기할 지경이다. 하지만 더욱 맘에 안 드는 것은 지금의 내 상황이었다. 당당하게 "주서연은 내 여자니까 그따위 개소리 집어쳐라!" 하며 쏘아 붙이지 못하니까.
"그럼 나 간다. 나중에 보자~"
눈치 없는 그 한수라는 새끼는 제 할 말만 끝내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비로소 나와 유정이가 둘만 남게 되었지만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우리는 잠시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오빠, 괜찮아요?"
"으, 응? 뭐가?"
"서연 언니 말이에요."
그녀는 나와 서연이 사이의 기묘한 기류를 그래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니 방금 전의 대화에서 내 심경의 변화를 나름대로 캐치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유정이 앞에서 서연이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은 지극히 가식적이었다.
"어어... 뭐.... 괜찮겠지."
"아까 서연 언니 좀 화난 것 같던데요."
"그러게. 왜 화난 거지?"
"나도 알 것 같은 문제를 오빠가 모른다니 이상하네요. 혹시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거에요?"
"......."
"뭐 그건 그렇고, 몸은 많이 안 좋은 거에요? 병원 안 가봐도 되나요?"
"아, 아니야. 됐어. 그냥 집에 가서 쉬면 돼."
그녀는 내가 병원에 가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난 한사코 됐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아프지가 않은데 무슨 병원을 간단 말인가. 섹스 후유증이라고는 죽어도 말 못할 노릇이니 참으로 고역이었다.
"그럼 가요. 집까지 데려다 줄 게요."
"그래.... 응? 뭐라구?"
"집까지 데려다 준다구요. 혹시 차 가져오신 거에요?"
문득 주차장에 얌전히 주차 되어 있을 내 차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머리 한 구석에서는 유정이의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가는 우리의 모습이 머릿 속에 그려졌다. 본능적으로 나도 모르게 대답을 내뱉고 있었다.
"아, 아니. 안 가져왔어."
부디 주차장에서 유정이가 내 차를 알아보지 못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아침엔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오늘은 이렇게 새벽에 글을 올리고 잠자리에 듭니다 ^^
주말은 잘들 보내셨는지요? 세간을 떠들석하게 했던 경기가 있었던 주말이었네요
Cheshier 님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글머리 문구에 소라넷 표기 사이에 점을 넣어보았어요. 타 사이트에서 소라라는 단어를 필터링 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또 조언해주실 점이 있다면 언제든 부탁드리겠습니다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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