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7장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날씨가 너무도 화창했다. 봄과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완연한 가을 날씨라고 느껴질 만큼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은은하게 빛났고 바람도 선선하고 싱그러웠다. 한 마디로 놀러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비록 과제를 위한 박물관 견학이긴 했지만 날씨가 이렇다보니 뭔가 소풍 느낌이 나서 나이에 안 맞게도 살짝 들뜨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서연이랑 유정이가 함께 가는 거니까. 달갑지 않은 불청객의 얼굴들만 없었더라면 아마 더 완벽했겠지만 아쉽게도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볼 수 있었다.
"엇~ 성진 선배.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 되게 좋죠? 호호."
예전에도 느꼈지만 이 예진이란 계집애가 내게 왜 부쩍 친한 척을 해대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대화는커녕 인사도 없이 지냈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런담. 하긴 오늘 이왕 같이 움직이게 됐으니 사교성 있게 구는 것도 나쁠건 없었지만 내가 서연이에게 추근거릴 시절에 나를 깔보고 험담했을 무리들 중 그녀도 한몫을 했을게 틀림 없었기 때문에 그녀와 친근하게 지낸다는게 뭔가 미심쩍었다.
"왔어요?"
"응. 기다렸어?"
"내가 선배를 기다린다구요? 말도 안 돼."
내가 서연이와 인사 아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예진이가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좀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터미널엔 아직 서연이와 예진이 밖에 없었다.
"다른 애들 늦는건 아니겠지?"
"버스 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았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표는 좀 이따가 다들 오면 끊으러 가요."
난 서연이에게 물은 건데 좀 뜬금 없게도 예진이가 쏙 끼어들어 대답을 했다. 타이밍도 아주 미묘했기에 애초에 내가 예진이에게 물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서연이도 대답을 하려다 말고 애매하게 예진이를 흘끗거리는게 보였다.
유정이라면 몰라도 겨우 예진이 때문에 서연이가 토라지는 사태를 원하진 않았기에 적잖이 서연이 눈치가 보였다. 한편으론 아무렴 서연이가 그녀의 절친한 친구를 질투하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어지는 예진이의 언사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선배~ 버스에서 선배 옆자리에 앉아도 되죠?"
"뭐, 뭐?"
어떻게 보더라도 예진이는 나에게 그런 말을 던질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옆에 있던 서연이마저 동그랗게 토끼눈을 뜨고 예진이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황당한 사람은 나일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 계집애가 왜 이러는 걸까? 나한테 없던 호감이 생기기라도 했나?
"야~ 너 왜 그래?"
서연이가 장난스런 말투를 가장해서 예진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지만 그 장난스런 말투 속에서 왠지 모를 불길한 어떤 것이 느껴졌다는 것은 내가 그래도 손톱만큼은 서연이에 대한 이해도가 늘었다는 뜻일 터였다. 그런거야 뭐 어찌됐건 상관없지만 이어지는 예진이의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왜? 나도 성진 배랑 친해지면 좋지 뭐~ 너도 요새 선배랑 친하게 지내잖아. 너랑 친하면 나랑도 친해야지. 안 그래? 호호."
안 그래? 호호는 개뿔.... 서연이의 표정이 애매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오늘 견학에서 뭔가 곤란한 사태가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을 줄곧 가져오긴 했지만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분명 서연이나 유정이 때문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혼란을 제시하고 있었다.
"괜찮죠, 선배?"
"어? 그, 글쎄...."
"야, 너는 나랑 앉아야지. 니가 선배랑 앉으면 난 누구랑 앉아?"
심지어 나조차도 서연이 목소리가 약간 날카로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데 하물며 그녀의 친구인 예진이가 그걸 못 느낄리도 없었다. 하지만 예진이는 태연자약했다.
"너? 너는 한수 선배랑 앉으면 되잖아."
"뭐어?"
그녀의 대답은 서연이 뿐만 아니라 나까지 띵하게 만들었다. 과연 서연이가 뭐라고 대답을 할지가 궁금하다못해 두렵게 느껴지기까지 했지만 곧이어 다른 인물이 등장해 그녀의 반응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으응. 유정아."
유정이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인사에 반응한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깔려있던 미묘한 분위기를 유정이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없는 두 여자 선배의 모습이 화난 것처럼 보였는지 유정이는 머뭇거리다가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아니야. 버스 시간까지 아직 남았어."
마치 그녀를 변호하듯 내가 나섰지만 역시나 두 여자는 말이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앞에 내가 쭈뻣대고 있자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남자가 나타났다. 예진이 조의 남은 두 사람이었다. 지난번의 만남 이후로 나는 한수 녀석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기에 놈의 얼굴이 반가울 순 없었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녀석의 등장은 화제를 돌릴 만한 건덕지 정도는 될 수 있었다.
"애, 애들도 다 온 것 같으니까 표 끊자."
박물관을 가려면 시외버스를 타야 했기에 집에서 출발 할때만 해도 소풍 느낌이 나서 좋았지만 어째 버스표 끊는데서부터 난국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진이네 조는 예진이와 한수, 그리고 별로 특이할 것 없는 한 학번 아래의 남학생 후배 한 명이었다.
우리 조와 예진이네 조를 합하고 보니 남녀의 비율이 기묘하게도 딱 맞게 3대3으로 떨어졌다. 남녀 비율이 잘 맞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버스 좌석 하나를 정하는 데에도 왠지 모를 기묘함이 느껴졌다. 물론 내가 보기에 최고로 무난한 배치는 서연이의 말마따나 서연이가 예진이랑 같이 앉고, 예진이네 조 두 남학생이 같이 앉고, 마지막으로 남은 나와 유정이가 같이 앉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진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그 무난한 구도를 초장부터 완전히 박살내고 있었다.
"그럼 여기 내 자리~"
예고한 대로 내 옆 좌석에 냉큼 가방을 던지는 예진이의 행동을 미처 제지할 수도 없었다. 각자의 표에 적힌 좌석이 있을 테지만 그런거야 아무래도 좋았고, 굳이 버스에 탈 때부터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뒤에 바짝 따라붙었던 예진이의 행동은 분명 의도된 것이었다.
의외의 돌발 상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가 그걸 제지하고 들 만한 상황도 아니었기에 서연이조차 그녀를 말릴 수 없었고, 반 막무가내로 예진이가 내 옆자리에 앉자 남은 네 사람은 어떻게 자리를 정할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유정이가 나랑 앉자."
단단히 심기가 뒤틀린 것 같아 보이는 서연이가 애써 평온을 가장하며 유정이를 불렀다. 그러나 유정이가 서연이의 옆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한수가 그보다 한발 앞서 그 자리에 냅다 앉아버림으로써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선배?"
"그냥 내가 여기 앉을게 서연아~ 너랑 나란히 앉아서 가고 싶거든, 하하하."
능글맞은 한수의 태도를 보자 며칠 전의 만남에서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과연 서연이가 한수의 속셈을 눈치채고 있을지 없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이 년놈들이 막무가내로 이렇게 나오고 보니 유정이는 졸지에 얼굴도 모르는 남학생 한 명과 같이 앉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야, 너 나랑 자리 바꿔."
나는 성큼 다가가 유정이 옆자리 남학생 후배에게 대뜸 그렇게 말했다. 얼굴도 모르는 한 학번 아래의 후배였지만 내가 워낙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인지 쭈뻣거리며 내가 원래 앉아있었던 예진이의 옆자리로 가서 슬그머니 앉았다.
예진이나 한수는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별 상관이 없었는지 가만히 있는 눈치였다. 다만 서연이만이 아주 곱지 않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불만에 가득차 보이는 서연이였지만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버스가 출발해버려서 우리는 졸지에 그 자리 그대로 출발하게 되었다.
유정이의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은 나름대로 좋은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서연이의 기분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신 뒤를 흘끗거리며 서연이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녀는 아예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얼굴을 돌린채 창문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수 녀석은 그런 서연이에게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옆자리에서 용을 쓰고 있었다.
"서연아, 날씨 진짜 좋다. 그치?"
"그러네요."
한수의 추근거림에 고개도 안 돌리고 대꾸하는 서연이였지만 그 모습을 보며 통쾌하다는 기분 이전에 극도의 찝찝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비록 상황은 달랐어도 나 또한 유정이와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유, 유정아. 아침은 먹었어?"
"네."
짧디 짧은 대답. 분명 유정이가 평소에 감정 표현이나 붙임성이 뛰어난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무뚝뚝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와 나 사이의 분위기가 뭔가 무겁다는 것을 감지했다. 아무래도 며칠 전 자취방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 두 사람 다 계속 신경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연아~ 같이 음악 들을래?"
"아니요. 잘 거에요."
등 뒤에서 두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쪽으로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니 서연이는 여전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한수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추근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보다 한칸 뒤에서는 예진이가 그 전체적인 광경을 매우 흥미롭다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작부터 골치가 아프다.... 이 견학 정말 괜찮을까?
*
사실 견학 그 자체는 걱정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비록 우리가 모인 주 목적이 그것 때문이긴 했지만 견학 자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간단했다. 교수님이 지정해준 인문학 박물관을 탐방하여 각자 맡은 파트를 조사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오히려 조사를 한 시간보다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온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만큼 견학이 쉽게 끝나버리자 다소 허무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오늘 하루 신경써야 할 부분은 역설적이게도 주 목적인 견학 그 자체가 아니라 여기에 얽힌 복잡한 인간관계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는 서연이와 유정이만 신경 쓰면 되는 것이긴 했지만 한수와 예진이의 존재가 자꾸만 그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한수 녀석은 자료 조사를 하는 내내 서연이에게 붙어 서연이가 조사를 하는 것을 방해할 정도로 그녀에게 치근덕거렸다.
"그럼 다들 맡은 파트는 다 조사한거죠?"
서연이가 뚱하니 말이 없자 왠지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건 예진이의 몫이 되었다. 같은 박물관 내에서도 각자 조사해야 하는 인물이나 내용에 대한 부분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기에 모일 땐 모이더라도 조사를 할 땐 서로 떨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수는 서연이와 떨어지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학이 끝날 때 쯤이 되자 서연이와 한수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분위기를 우리 모두가 싫어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수가 서연이에게 집적거리는 의도를 이 자리의 그 누구라도 못 느낄 수가 없었다.
"서연아~ 넌 조사 잘 했어? 네가 한 것 좀 봐도 돼?"
"어차피 한수 선배하고는 파트도 다르잖아요."
"하하, 그래도 그냥 궁금해서."
한수 녀석이 서연이에게 엉겨붙는 꼴이 그렇게 꼴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내가 서연이에게 집적거릴 때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내가 뭐라고 얘기한단 말인가? 함부로 집적대지마라? 아니면 니가 맡은 부분에나 신경 써라?
"유정아, 넌 다 된 거 같아?"
"대충요."
유정이와 나는 여전히 사이가 조금 서먹했다. 아니, 서먹하다기보단 어딘지 좀 어색했다. 나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녀와 나 사이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자취방에서의 그 일이 있기 전에 비해서.
"성진 선배~ 선배는 조사 잘 했어요? 어디 한번 봐요."
"보긴 뭘 봐? 숙제검사하냐?"
"뭐라구요? 호호호호."
거기다 이 상황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요인이 있다면 바로 예진이의 태도였다. 이 기집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필요 이상으로 내게 친한 척을 하며 나긋나긋하게 굴고 있었는데, 이것이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방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서연이의 고까운 태도로 보건대 절대 일반적인 경우는 아닌 것 같았기에 찝찝할 수 밖에 없었다.
"성진 선배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네요. 방금 그거 웃기려고 한 말이죠?"
"......."
"나도 선배랑 더 친해져야겠다~~ 서연이랑 셋이서 같이 다니면 더 좋겠네.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죠?"
"아니."
단호한 내 대답에 예진이의 표정이 잠깐 샐쭉하게 굳었지만 이내 그녀는 못 들은 척 했다. 그 순간 서연이와 잠시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있는 대로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녀의 그런 시선과 태도는 그 예전 그녀가 나를 업신여기며 싫어했던 바로 그 시기의 모습이었기에 나는 순간 뭔가가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그 때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경멸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그런 미움에 가득 찬 시선은 오랜만이었기에 나 자신 또한 예전으로 회귀하는 기분이었다.
"이만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자료 조사만 하고 돌아가려니 너무 허전하지 않아?"
"그럼 뭐 어쩌자구?"
친한 친구에게마저 퉁명스런 말투로 일관하는 서연이의 모습을 보건대 무척 화났다는 사실을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예진이 또한 그걸 모를 턱이 없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근처에 놀이공원 있잖아. 거기서 쪼금만 놀다 가자. 기분전환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겸."
"놀이공원?"
이 지역은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었기에 여러가지 유흥거리가 많긴 했다. 놀이공원은 물론이고 워터파크와 생태공원을 비롯해서 가볼 만한 관광지가 제법 많았다. 예진이 말마따나 시외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와놓고 고작 자료 조사만 하고 돌아가는 것도 맥 빠지는 일이긴 했지만 서연이는 그리 내켜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물론 나도 그랬지만 말이다. 얼른 이 위태로운 하루를 끝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됐어.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
"야아~ 곧 시험기간인데 이런 날 아니면 또 언제 놀아. 어차피 지금 터미널 가봤자 버스 시간 땜에 한참 기다려야 돼. 조금만 놀다 가자, 응?"
"나, 나 지금 놀 기분 아닌데."
"그러니까 더 기분 전환이 필요한 거지. 가서 놀다보면 기분도 좀 좋아질 거야."
"몰라... 그럼 가서 너네끼리 놀아. 난 가만 있을래."
두 여자가 뭐라고 속닥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이윽고 예진이가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제안했다.
"버스 시간도 남는데 요 옆에 놀이공원에서 잠깐 놀다가요~ 다들 어떻게 생각해요?"
"난 찬성~ 무조건 찬성!"
옆에서 극성을 떨어대는 한수 녀석이야 그렇다 치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다지 의사 표현이 없었다. 유정이야 원래 말이 없는 편이고, 남학생 한 명도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다. 그나마 여기서는 내가 의사를 표현해줘야 진행이 될 것 같았다.
"글쎄... 난 그냥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아니면 놀고 싶은 사람들만 놀고 여기서 따로 찢어지든지."
"아이 참~~ 선배 왜요~ 같이 가서 놀아요. 여럿이서 놀아야 재밌잖아요~~"
"야, 왜 이래?"
예진이가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내게 엉겨붙었다. 그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거의 팔짱을 끼듯이 내게 몸을 밀착시켜오자 정말 당황스러웠다. 나 뿐만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던 서연이, 그리고 심지어 유정이까지도 움찔하며 예진이에게 시선이 주목되었다.
"오빠."
그제야 침묵하고 있었던 유정이가 내 등을 콕콕 찔렀다. 뿐만 아니라 유정이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예진이가 내 팔에 두른 손을 풀어 우리 두 사람을 은근히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팔을 풀어버리며 나서는 유정이의 움직임에 예진이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유정이는 그녀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냥 가요."
"응?"
"놀이공원이요. 그냥 같이 가요."
유정이의 말은 정말 의외였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서연이보다도 더 노는 데에 흥미가 없을 것 같았던 그녀가 그런 말을 하자 나는 방금 전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유정이의 말을 감히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아... 그게...."
"좋아요~ 그럼 다 같이 가는 거죠?"
유정이의 한 마디로 인해 내가 고민하고 있으려니 예진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여우 같은 계집애가 이 틈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아버린다.
"자자, 어서 가요."
예진이가 서연이를 비롯해서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버리자, 나는 유정이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유정아. 왜 같이 가자고 한 거야?"
"오빠는 서연 언니가 걱정 안 돼요?"
"응?"
"언니 좀 챙겨요, 오빠. 그러다가 정말 큰일날 수도 있어요."
야단을 맞은 듯한 기분에 잠깐 멍하니 굳어버렸지만, 그보다는 역시 유정이에 대한 알 수 없는 서운함과 기묘한 마음이 이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올라왔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유정이는 나를 남겨두고 걸어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 속이 복잡했다. 정말 그녀는 나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걸까?
*
박물관 견학이 어쩌다가 놀이공원으로 새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은 정말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놀이공원에 와본 지가 몇 년만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구 하나를 타기 위해서 끝도 없이 이어진 줄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만큼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서연아~~ 정말 안 탈거야?"
"응. 안 탈거야. 너나 많이 타."
"그러지 말고 같이 타자. 한 번만. 응?"
서연이를 어떻게든 바이킹에 한 번이라도 태우고 싶어하는 예진이의 지속적인 노력과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서연이의 냉랭한 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 실갱이가 어찌나 길었던지 그 와중에 줄이 상당히 줄어들어 어느새 우리 차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 서연아~ 같이 한번만 타자. 기왕 놀이 공원 왔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면 그것도 아깝잖아."
옆에서 한수 녀석까지 서연이를 꼬드기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녀석의 권유는 차라리 안하니만 못했다. 급기야 한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서연이는 매몰차게 걸어가 벤치에 앉아버렸다. 다들 그런 서연이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유정이의 야단 아닌 야단이 내 머릿 속을 줄곧 메우고 있었다. 서연이를 잘 챙기라는 유정이의 당부가 그렇게나 복잡미묘한 의미로 다가올 수 없었지만, 내 마음을 유정이에게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그렇게 말하는 유정이에 대한 야속함이 물씬 솟아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거의 반쯤은 유정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좌우지간 벤치에 앉아있는 서연이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서연아."
벤치에 앉아있는 그녀를 서연아, 하고 부르는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어느 날의 우리 모습이 겹쳐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그녀. 심기가 단단히 뒤틀려 있는 모습이었다.
"그냥. 네가 좀 신경 쓰여서."
"신경~?"
서연이에겐 기분이 상할 때면 그렇게 말꼬투리를 잡아 비꼬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의 그런 세세한 부분을 알게 되었을 만큼 그녀와 가까워졌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파악할 정도로 내가 영리하진 못했나보다. 내 말은 들은 서연이는 더욱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이제와서요?"
"무슨 말이야?"
"됐어요. 가서 바이킹이나 실컷 타세요."
"안 타. 니가 안 타면 나도 안 탈래."
"참 나... 웃기고 있어. 괜히 이제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에요? 하루종일 나한테...."
그녀는 말하다 말고 뒷말을 삼켰다.
"내, 내가 뭘?"
"됐어요."
내가 서연이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있자 꽤 여러 사람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유정이조차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이킹 같은 것엔 그다지 관심이 없어보였다.
"서연아, 미안해."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데요."
"그냥. 너한테 신경 못 쓴거."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요?"
서연이가 순간 목소리를 바락 높이며 화를 냈기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 뿐만이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움찔하며 무슨 일인가 하는 눈치였다. 서연이와 나 사이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문제에 있어서 나보다 더욱 조심스러워 해야 할 그녀였기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진정해."
"후우... 됐어요. 저리 가요."
냉랭한 그녀의 태도에 내가 쭈뻣거리고 있자 그녀가 나지막히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유성이에게는 그렇게...."
하지만 너무 목소리가 낮아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뭐?"
"아니에요."
벤치에서 일어난 서연이가 예진이를 따라 바이킹 대기줄에 합류했다. 그녀가 마음이 바뀌자 예진이가 화색을 띄며 서연이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 변화에 한수 녀석도 표정까지 밝아진 것은 물론이었다.
그녀가 마음을 바꾸자 나도 얼결에 덩달아 바이킹을 타게 되었다. 그러자 잠자코 있었던 유정이까지 줄에 합류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모두가 참여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이상적인 모습이긴 했지만 어쩐지 조금 찝찝한 전개였다.
"서연아, 옆에 앉아도 돼?"
우리 차례가 되자 한수 녀석이 어김없이 서연이에게 치근덕거리며 물었다. 나는 당연히 서연이가 거절하거나 냉랭하게 대꾸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내 예상을 깨뜨렸다.
"마음대로 해요."
비록 순수한 승낙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까처럼 매몰찬 거절도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한수 녀석은 입이 귀에 걸릴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예진이 또한 서연이의 그런 반응을 반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예진이가 그러면서도 내 얼굴을 흘끗 돌아보는 것이 어쩐지 내 반응을 살피고 있는 듯해서 뭔가 미심쩍었다.
서연이와 한수가 나란히 앉게 되자 나는 유정이의 옆에 앉게 되었다. 버스에서와 같은 상황이었다. 이윽고 바이킹이 진자 운동을 시작하자 나는 뱃속이 울렁거리는걸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보니 나는 놀이기구를 그다지 잘 타지 못했다. 왜 굳이 내가 이걸 타겠다고 나선 걸까? 서연이를 챙길거면 확실하게 챙기던지....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었다.
"으..."
한심하게도 놀이기구마저 잘 타지 못해 바이킹에서 내려오고 나니 속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유정이가 옆에서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요?"
"으응."
"토할래요?"
"아, 아니야. 너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요."
유정이는 정말 안색에 변화 하나 없었다. 질주를 즐기는 그녀답게 놀이기구 정도로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서연이마저도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려 숨이 거칠어져 있었는데,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사람은 우리 중에 유정이 하나 뿐이었다.
"갑갑하면 뭐라도 좀 마셔봐요. 시원한거 마시면 좀 나을 거에요."
"응.... 그래야겠다."
빌어먹을 바이킹은 뭐하느라 타가지고.... 나는 유정이와 근처 노점에서 음료수를 사오기 위해 잠시 무리에서 이탈했다. 흘끗 서연이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뭔가 샐쭉한 표정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를 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딴청을 피웠다.
유정이 또한 내가 서연이와 미묘한 기류를 조성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서연이를 챙기라는 무언의 지시보다는 그래도 나를 챙기는 것이 더 우선이었는지 그녀는 나를 이끌고 노점으로 향했다. 유정이의 그런 태도에 나는 기분이 살짝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사람 마음이란 간사한 것이다.
"오빠."
"응?"
유정이와 근처 벤치에 앉아 주스를 마셨다. 그녀의 말마따나 시원한걸 마시니 약간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저러다가 서연 언니가 오빠한테서 떠나면 정말 괜찮아요?"
"......."
나도 유정이의 말 뜻을 알고 있었다. 나에게 서연이를 계속 이런 애매한 관계로 묶어둘 수 있는 권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연이를 계속 내 옆에 둘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도 내게는 힘든 일이었다. 사귀지도 않으면서 마음 만으로 옆에 계속 묶어둘 수 있는 그런 관계를 지칭할 수 있는 단어가 내가 알기로는 없었다.
"유정아... 네가 이해하기엔 힘든 문제겠지만 나와 서연이는 서로의 몸을 탐해서 시작된 관계야. 우리는 애초에 마음을 전제로 하고 시작한 사이가 아니었어. 나 또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건 마찬가지야."
"......."
컵을 매만지는 유정이의 손가락이 나만큼이나 심란해보였다. 얽힌 실타래처럼 너저분한 문제였다.
누구도 답을 가르쳐줄 수 없는....
"봐, 서연이도 점점 긍정적으로 반응을 하잖아. 내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가면 뭔가 될 것 같지 않아?"
"글쎄, 난 잘 모르겠어. 일단 서연이가 지금 기분이 엄청 안 좋아 보이거든. 왠지 더 끈적하게 굴어봤자 좋을게 없을 것 같은데."
그 때 노점 뒤편에서 들린 두 사람의 말소리 때문에 나와 유정이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굳이 기척을 숨기려고 숨긴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 유정이가 먼저 두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본 탓에 우리는 예진이와 한수의 대화를 엿듣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서연이가 기분이 왜 안 좋은지를 우선 알아야겠어."
"혹시 내가 너무 들이대서 그런건 아니겠지?"
"글쎄...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서연이를 잘 아는데 싫으면 싫다고 단호하게 말을 하지 저렇게 입 닫고 있는 애는 아니거든."
"흠... 그럼 이제 어쩌지?"
"어쩌긴. 어차피 선배가 고민해봐야 알 수 있는 문제도 아니잖아? 선배는 선배 마음만 표현하면 되는 거야."
"그, 그런가?"
"기왕 마음 먹은거 남자답게 밀어부쳐. 생각해놓은게 있을 거 아니야."
"아, 알았어."
"잘 되면 내가 도와준거 잊지 말고."
"물론이지. 예진이 네가 많이 도와준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럼 됐어. 이제 가자."
예진이 저 계집애는 절친한 친구라면서 친구의 속내를 저렇게 모를 수가 있나? 하긴 서연이의 마음을 알고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작당하고 저러는 것을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이제야 아침부터 예진이 저 년이 내게 필요이상으로 친근하게 굴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서연이 옆에서 나를 떼놓음으로써 한수 놈이 서연이에게 붙어있을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유정아... 우리도 가자."
"저 두 사람 저대로 놔둬도 정말 괜찮을까요?"
"작당모의 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는 거잖아. 일단은 신경 끄자."
유정이는 내게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녀 이상으로 복잡한 내 표정을 보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이끌고 다시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중에 문득 유정이의 발걸음이 어느 지점에서 잠시 멈추었다.
"왜 그래?"
유정이의 움직임이 멈추자 의아해서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유정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어느 한 곳을 약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얼굴을 움직인 나는 익숙한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회전목마?"
여러 마리의 장난감 말이 원을 따라 천천히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공원에 꼭 하나씩은 있지만 그리 특별할 것은 없는 바로 그 익숙한 기구였다. 유정이가 그런데에 관심을 보일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혹시나 그녀가 다른 것을 보고 있나 주변을 더 둘러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유정이가 시선을 두고 있는 곳에는 목마 말고 다른 것이 없었다.
"왜? 혹시 저거 타고 싶어?"
"아, 아니에요."
유정이는 그녀 답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강한 부정을 하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영문을 몰랐지만 나 또한 얼결에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다시 모두가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니 이제는 롤러코스터에 서연이를 태우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는 한수와 예진이를 볼 수 있었다.
"야~~ 너 이거 좋아하잖아. 같이 타자, 응?"
"됐어. 난 쉬고 있을게. 타고 와."
"네가 빠지면 재미없잖아."
옥신각신 실갱이를 하는 그녀들에게 다가가자 서연이의 시선이 내게 와서 꽂혔다. 그녀의 눈이 나를 응시하더니, 곧 내 옆에 있는 유정이에게도 머물렀다. 그 순간 표정이 다시 샐쭉하게 변하는 서연이.
"좋아. 그럼 한번만 타자."
"응? 정말?"
"그래."
"얏호~!"
날더러 보란 듯이 나를 두고는 롤러코스터를 타러 가버리는 서연이.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그렇거니와 굳이 놀이기구를 타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유정이와 밑에서 기다리고 하고는 벤치에 앉았다. 서연이는 그런 우리 모습을 보더니 더욱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 후 롤러코스터에 오르기까지 그녀는 한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문득 유정이가 그런 서연이의 기분을 눈치채고 또 뭔가 걱정하는 말을 할까봐 나는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유정이로부터 아무런 꾸짖음이 없자 나는 슬그머니 유정이의 얼굴을 살폈다. 뜻밖에도 유정이는 어느 한 곳을 보느라 조금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았는데, 나는 어렵지 않게 그것이 아까의 회전목마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유정아, 솔직히 말해봐. 저거 타고 싶지?"
"......."
"가자."
"네?"
"타러 가자구. 너 지금 엄청 티나."
나는 유정이의 손을 이끌어 회전목마 앞까지 그녀를 데려갔다. 그녀는 머뭇거리면서도 싫다고 빼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의 기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놀이공원은 규모가 작아서 입장권이 따로 없이 기구를 한번 탈 때마다 이용료를 지불하는 식이었기에 나는 그녀를 대신해서 두 사람 몫의 값을 냈다.
"오빠... 안 그래도 되는데."
"괜찮으니까 어서 타."
유정이는 머뭇거리면서도 내가 꾸준히 권유하자 결국 목마 위에 슬며시 올랐다. 이윽고 말들이 천천히 회전하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다른 말에 탈까 하다가 그냥 유정이의 뒤에 올라탔다. 어차피 그녀와 오토바이도 같이 타봤는데 목마라고 뭐 다를거 있겠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다. 바이크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자그마한 장난감 목마의 등 위는 오토바이의 안장보다도 훨씬 좁았다. 몸이 더더욱 바짝 붙을 수 밖에 없었는데다 회전하는 속도도 오토바이로 달릴 때와는 다르게 너무도 느릿느릿했기에 그만큼 밀착되어 있는 느낌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어린애들 타라고 만든 기구에 성인 두 사람이 올라가 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거였지만, 유정이의 허리에 손을 얹기도 힘들 만큼 분위기가 뻣뻣해졌다.
"오빠."
"으응."
그녀도 그걸 느꼈는지 고맙게도 먼저 입을 열었다. 느릿느릿하게 회전하는 목마 위에서 그녀와 말을 주고 받으니 오토바이를 탈 때와는 다르게 너무도 선명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때문인지 나는 그녀의 말에 신경을 바짝곤두세웠다.
"어릴 적에... 아버지랑 종종 타보곤 했어요. 회전목마..."
비록 그녀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또렷한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과거에 대한 어떤 향수 같은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다.
"아버지는 내가 이걸 타는 모습을 좋아하셨어요. 내가 이걸 타고 있으면 소녀처럼 보인다면서... 사내아이들이 하는 것만 하지 말고 가끔 이런 것도 해야 한다며 나를 목마에 태우고는 뒤에서 나를 안아주셨어요."
나는 얼굴도 모르는 유정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오토바이 타는 모습도 어울리긴 했지만, 이 자그마한 장난감 목마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유정이에겐 더욱 잘 어울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녀다움이 그녀에게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그녀 스스로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사실은 아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났어요. 다시 타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안 했는데.... 선배 덕분에 이렇게 타보게 되네요."
"타보니까 어때? 옛날 느낌 그대로야?"
"잘 모르겠네요. 너무 옛날 일이라...."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왠지 묻어놓았던 추억 한 켠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뿌듯해졌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목마 위에서 잠시 말이 없던 유정이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오빠."
"뭐가?"
"나에게 신경 써주는 것처럼 서연 언니에게도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줘요. 그럼 아마 언니는 행복해 할 거에요."
"유정아. 나는..."
"오빠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주는거 알아요. 나도 그게 좋아요. 하지만 나는 아직 혼란스러운걸요. 오빠에 대한 내 마음도 그렇지만 내가 여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조차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내게 답을 가르쳐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오빠의 마음을 잘 모르긴 하지만... 오빠도 나와 비슷한 기분일거라 생각해요."
"......."
"난 그런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가 내게 가르쳐줄 수 있는게 아니라면 스스로 해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가치관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오빠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찾아보는게 어떨까요?"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나와 유정이 사이의 공통점이었다. 그녀가 내놓은 답 또한 비록 모호했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기에 부끄럽게도 스무살의 유정이가 나보다 훨씬 더 성숙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다구요?"
"......"
"오빠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만큼은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는 거라고 들었어요. 이런 말을 하면 오빠의 여자친구분에게 죄를 짓는게 될지도 모르지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마음까지 거짓이 되는건 아니잖아요. 오빠가 나를 좋아한다던 그 마음도 거짓이었나요?"
"그런건 아니야."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는 관념적인 관계를 떠나서 좋아한다는 마음만큼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게 사실이잖아요. 난 굳이 오빠가 지금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서연 언니와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마음에는 솔직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을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마음..."
마음.... 서연이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 그리고 유정이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 사실 유정이의 말이 옳았다. 나는 비록 현주와 사귀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거짓이 되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마음에 솔직해지기에는 온갖 타인의 가치관들이 나를 향해 비난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정이는 내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꼭 서연 언니와 사귀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오빠의 솔직한 마음을 언니에게 전하세요. 내가 알고 있는 성진 오빠는 좋은 사람이에요. 난 오빠가 더이상 여자를 슬프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오빠가 서연 언니를 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너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건 알고 있니?"
어찌보면 너무도 섣부른 질문이기도 했다. 미숙하기도 했고, 성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겐 더없이 솔직한 질문이었고, 따라서 굳이 그 말을 주워담지 않기로 했다.
"나에겐 시간이 필요해요, 오빠.... 오빠가 그랬듯이 누군가가 답을 말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나 혼자 생각하고 답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지금은 조금 더 고민하고 싶어요. 만약 오빠가 괜찮다면 조금만 기다려줬으면 좋겠어요. 난 비록 지금은 오빠에게 뭐라고 말을 해줄 수가 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빠에게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
"하지만 서연 언니는 아니에요. 언니는 오빠의 사랑을 원하고 있어요. 난 그걸 알 수 있어요. 나와는 다르게 언니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인걸요. 그러니까 서연 언니의 마음을 저렇게 버려두지 마세요."
"너는 내가 서연이를 사랑해도 전혀 상관 없어? 내가 너만을 좋아하길 바라지 않니?"
내가 말하고도 정말 부끄러운 질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현주만을, 서연이만을, 유정이만을 좋아하지 못하는 걸까? 그 치졸하고 옹색한 질문 앞에 유정이는 담담히 대답했다.
"물론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오빠 마음은 그런게 아니잖아요."
"......."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빠가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람만이 나를 여자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유, 유정아."
어쩌면 그 목마 위에서 그녀로부터 들은 말은 여지껏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 중에 가장 솔직하고 서슴 없었던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유정이마저도 내게 이렇게 진솔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정작 내가 그녀 앞에서 진솔하지 못하다면 그 얼마나 비겁한 일일까.
"그러니까 가서 오빠의 솔직한 마음을 전해요. 나하고의 문제는 그 후에 생각해도 괜찮아요. 오빠의 그런 답답한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조금은 뼈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녀가 내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 그렇게나 가슴 벅찰 수가 없었다. 비록 그녀의 말이 내 모든 고민을 날려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깨우쳐준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녀의 말마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닌 나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만 내릴 수 있는 오롯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유정이가 그 선택의 문 앞까지 나를 인도해주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
"고마워, 유정아. 나 잠시 서연이에게 다녀올게."
"그래요."
어느새 목마가 멈춰 서있었다. 나는 목마에서 내렸다. 유정이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목마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가려는 순간 유정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등에다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빠."
"응?"
"사실 놀이공원에 오자고 했던거... 서연 언니 때문도 있지만 회전목마를 꼭 한번 보고 싶어서였기도 했어요."
"......"
"고마워요. 꼭 아빠 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가려던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멈추었다. 나는 다시 유정이에게로 돌아와, 말 위에 올라타고 있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곧이어 입술과 입술이 위태롭게 살짝 닿았다.
믿기진 않지만 그녀와의 키스는 이로써 세 번째.... 하지만 이번엔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그저 입술만 살짝 붙였다 떼는 가벼운 키스였다.
"그래. 나도 고마워."
그 때 내가 보았던 유정이의 미소는 비록 한없이 옅고 희미했지만,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여자의 미소보다도 더 아름답고 눈이 부셨다. 그녀는 내게 어서 가보라며 무언으로 재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얀 목마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
롤러코스터 앞으로 돌아오니 서연이네는 이미 놀이기구에서 내린 것인지, 다들 땅에 내려와 있었다. 꽤 멀리서도 그들의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서연이네 무리들 주변으로 이상하리만치 인파가 몰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간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러분! 저는 이 여자를 정말 좋아합니다!"
꼴보기 싫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인파의 한 가운데에 난처해하는 얼굴의 서연이가 있었고, 한수 녀석이 서연이 앞에 서서 그녀에게 어디서 준비했는지 모를 꽃다발과 풍선을 주려고 땅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앞으로 평생 좋아할 것을 여러분 앞에 맹세합니다!"
"워우~~!"
"역시 젊음이 좋다!!"
"잘해봐라~~! 보기좋다!"
"받아줘라!"
"받! 아! 줘! 받! 아! 줘!"
한수가 서연이에게 고백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현주에게 고백하던 날의 나와 내 주변의 모습들이 겹쳐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주도 저런 기분이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녀는 내 고백을 받아줬으니까.
같은 고백이라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역시 가장 중요한건 마음이니까.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 그리고 사랑을 받는 사람의 마음. 서연이에게도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쟤네 지금 뭐하냐?"
난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예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보면 아시잖아요. 한수 선배가 서연이 좋아하는건 성진 선배도 알고 계셨죠? 마침 선배도 자리에 안계시고 해서 좋은 타이밍인 것 같길래."
"뭐?"
마치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예진이의 대답에 심기가 조금 불편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내 예진이에게 신경을 끄고 서연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느닷 없는 한수의 고백과, 그에 호응하여 열광하고 있는 군중들의 시선 때문에 더욱 난처해하고 있었다.
"받아줘! 받아줘!"
"뽀뽀해! 뽀뽀해!"
왜 사람들은 유독 이런 일만 일어나면 마치 자기 일처럼 열광적으로 환호하고 드는 건지. 내가 현주에게 고백할 때에는 그런 사람들의 호응이 고마웠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들의 환호가 오지랖으로 느껴지는걸 보면 역시 사람은 간사한 법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그동안 내가 서연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더없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왜 그걸 애써 모른 척 하려고 해왔던 걸까? 다른 사람에게 사랑 고백을 받는 서연이의 모습을 보는게 이렇게나 싫은데도.
"서연아, 이리 와."
인파의 한가운데에서 당황하며 서 있는 서연이의 손목을 잡아채 이끌었다.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의 돌발 행동에 한수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열광하던 군중들까지 황당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등으로 꽂히는 수많은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서연이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서, 선배."
나의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서연이도 한수 못지 않게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내가 이끄는 대로 마냥 끌려올 뿐이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그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정신을 차렸다.
"선배, 선배. 어디까지 가는 거에요? 나 팔 아파요."
"아, 미안."
멈춰서고 보니 생각보다도 더 멀리 와있었다. 서연이는 팔이 아픈지 내가 손을 놓아주자 연신 손목을 문질렀다.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서연이는 팔이 아픈 것보다도 내가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했는지가 더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그저 서연이와 나만을 위한 둘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서연아, 우리 저거 탈까?"
"네?"
서연이의 시선이 내 손가락 끝을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는 내가 가리킨 대관람차를 보고 두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공중에서 빙글빙글 조용히 돌아가며 말없이 창밖을 비추는.... 어찌보면 회전목마와도 비슷한 놀이기구였다.
"사람들 없는데서 너랑 둘이 있고 싶거든. 할 얘기가 있어."
"......."
고맙게도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여전히 조금은 화가 난, 그리고 조금은 당황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용기를 낸 나의 단호한 말에 그녀는 응해주었다. 관람차에 오르기 전까지 우리는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성인 두 사람이 들어가 앉기에는 무척 좁다고 느껴질 만큼 작고 둥그런 관람차 안에 천천히 올라타 서로를 마주보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윽고 관람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원의 움직임을 따라 서서히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상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창 밖으로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서연아."
"왜요?"
"우리 그냥 사귀자."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토라진 태도를 유지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이제는 서서히 점이 되어가고 있는 저 아래의 풍경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화난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잊은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더욱 당황하는 것 같았다.
"선배... 갑자기 무슨..."
"나도 너 좋아해. 니가 날 좋아하는 것만큼."
"내, 내가 왜 선배를...."
"나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더이상 미루기도 피하기도 싫으니까. 네가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정말 나쁜 놈으로 보이겠지만 너한텐 이제 그냥 솔직해지려고.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
"오늘 너한테 신경 못 썼던거 미안해. 아니, 사실은 여태껏 너한테 더 신경써주지 못한거 줄곧 미안하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게 솔직할 수 없었던건 내가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이야."
"부끄럽다니요...?"
"너도 알지만 나에겐 사귀는 사람이 있어. 현주는 나한테 소중한 여자야. 내가 좋아해서 사귀었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어. 처음엔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시작했지만 그 애를 깊이 알고 나니 내게도 더 깊은 감정이 생겼어. 그 애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상처가 있어. 그리고 그 애는 내게서 그걸 치유받길 원해. 그 애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나는 그런 현주를 버릴 수가 없어."
두서 없이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서연이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의 눈을 피하며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타임 리와인더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자신감과는 별개로, 나는 지금 다른 의미에서의 자신감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너를 보면서 나도 많이 고민했어. 우린 처음에 단순히 몸을 섞으면서 시작한 관계였지만.... 넌 갈수록 나에게 그 이상을 원하는 것 같았고 나도 사실 그런 네 마음이 싫지 않았어. 왜냐면 나도 네가 좋았으니까. 나도 너랑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고 싶었으니까."
"거, 거짓말 하지 마세요."
"정말이야. 네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했을 때.... 난 너무 부끄러웠어. 너에게 그 말을 하는게 내 스스로 죄스럽게 느껴질 것 같단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 나는 내 여자친구를 사랑하지만, 너 역시 사랑해. 누구 하나 나에겐 포기하고 싶지 않은 소중한 여자들이야. 이런 욕심이 너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에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기분이었어."
"........"
"그래서 난 하나는 포기하기로 했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잊어버릴거야. 지금부터는 네가 나를 어떻게 볼지만 생각할게."
"내,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원하는 거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이야기해주면 좋겠어. 그래서 솔직하게 얘기하는거야. 사귀자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굳이 우리가 사귀지 않아도 좋아. 다만 나는.... 우리가 좀 더 분명한 관계였으면 좋겠어."
관람차는 삐걱거리며 공중을 향해 더더욱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가장 높은 꼭대기에 다다른 관람차는 다시 반대편으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껏 멀어졌던 지상의 점들이 다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에요?"
"언제까지고 이런 모습으로 지낼 순 없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고백 받는 네 모습 보는거, 생각보다 너무 기분 나빴어."
"네?"
어이없어 하던 서연이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이내 실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에요, 그게?"
"진짜야. 한수 그 녀석이 너에게 그러고 있는 모습 보니까 속이 뒤집어 지더라고."
"그러면서도 오늘 하루종일 그 선배가 나에게 집적대도록 그냥 놔뒀잖아요."
"미안해. 이렇게 사과할게."
"사과 정도로는 부족해요."
"그럼 어떻게 할까?"
"더 간절하게 고백해봐요. 지금까지 내가 느낀 서운함이 조금은 날아갈 수 있게."
간절하게...? 아무리 그래도 한수처럼 무릎을 꿇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서연이가 그런걸 별로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서연이를 냅다 번쩍 안아들었다.
"어맛!"
좁디 좁은 관람차 안에서 내가 그녀를 안아들자 하마터면 천장에 우리 둘 다 머리를 박을 뻔 했다.
"뭐하는 거에요?"
"이리 와."
갓난 아기 달래듯이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었다. 혀를 섞는 키스가 아니라 유정이에게 했던 것처럼 입술만 살짝 붙이는 뽀뽀였다. 하지만 그 뽀뽀는 입술에서부터 시작해 목으로 내려왔고, 이윽고 다시 서서히 올라가 귀로 이어졌다. 귓볼을 잠시 간질이던 입술이 다시 움직여 그녀의 양쪽 볼과 코, 눈, 이마를 정신없이 마구 찍어댔다.
얼굴 전체를 입술로 건드리듯이 이어지던 무차별적인 뽀뽀 행진이 마침내 그녀의 이마에서, 어느새 살짝 감겨 있는 그녀의 두 눈꺼풀 위를 덮음으로써 끝났다. 입술을 떼고 뽀뽀를 멈추자 그녀가 감았던 눈을 뜨면서 대꾸했다.
"이게 뭐에요?"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아?"
"이게 뭐가 간절한 거에요. 그냥 힘으로 밀어부치는거지."
"눈코입 하나하나 전부 사랑스럽다는 의미로 한 거야."
"무슨.... 말은 참...."
말이야 어쨌건 이렇게 그녀를 안아들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좀 더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서로의 몸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품 안에 쏙 안겨 있는 날씬한 그녀의 몸을 언제든 뜨겁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배."
"응."
"선배는 비겁해요."
"왜?"
"이기적인 말을 이기적이지 않게 하니까요."
"무슨 말이야?"
"결국 나더러 선배의 첩이 되라는 이야기를 그럴 싸하게 포장하고 있는 거잖아요."
물론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게 서연이에겐 어쩌면 하나의 굴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표현해야만 했다.
"그래, 맞아."
"나, 나는.... 세컨드는 싫다고 얘기했잖아요."
"누군가의 둘째가 될 바에는 그냥 섹파로만 지내는게 낫다고 했었지. 넌 정서적인 두번째가 되는 것보단 육체적인 첫번째가 되길 원한다는거 알아. 하지만 나는 너를 두번째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 넌 정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내게 첫번째였으면 좋겠어. 그리고 현주도...."
"못 믿겠어요. 그렇게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런 모습으로 사랑하는게 정말 행복할까요?"
"행복할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둘다 그걸 원하고 있으니까."
서연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창밖으로 가까워지는 땅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무들이 다시금 크게 보일 정도로 땅이 가까워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녁에 시간 있어요?"
"응?"
생뚱맞은 대답에 약간 의아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술 한잔 해요. 우리 둘이."
어느새 관람차는 우리가 출발했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한바퀴를 빙 돌고 난 관람차의 모습은 출발하기 전과 다름이 없어보였다. 상황에 맞기 않게도 원이라는 것은 정말 신비롭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답은 그 때 할게요."
과연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할 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백을 했고, 그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탈 때 만큼이나 조심스럽게 관람차에서 내렸다.
- 다음 화에 계속 -
27장도 26장과 마찬가지로 너무 오래 걸렸네요 ㅠ.ㅠ
먼저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쪽지로도 그렇고 게시판으로도 그렇고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마음이 더욱 불편했습니다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연중이라던가 하는 그런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요새 업무상 일이 많을 시기라.... 심하면 새벽에 집에 들어와서 다시 새벽에 나가는 날도 많을 만큼 조금은 여유가 없는 시기인 듯 하네요
그래도 글 쓰는건 중단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건 저의 즐거움이기도 하니까요 ^^
그리고 요새 게시판으로 향후 스토리를 예측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저는 그런 예측을 통해서 독자분들과 소통하는 것을 즐깁니다
지난 주엔 너무 바빠서 독자분들께 답글조차 제대로 달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확인하고 흐뭇해 했습니다
스토리에 대해 그런 피드백을 해주시는 분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언제 어떤 내용으로라도 게시판에 글을 남겨주시면 하나하나 정성껏 챙겨보겠습니다
그리고 타임 리와인더가 이달의 작품에 선정되어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아껴주셨다는 뜻이기에 독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으나.... 순수한 의미로 이 영광을 독자분들에게 돌리고 싶네요
앞으로도 더 많이 사랑해주세요 ^^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7장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날씨가 너무도 화창했다. 봄과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완연한 가을 날씨라고 느껴질 만큼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은은하게 빛났고 바람도 선선하고 싱그러웠다. 한 마디로 놀러가기 딱 좋은 날씨였다.
비록 과제를 위한 박물관 견학이긴 했지만 날씨가 이렇다보니 뭔가 소풍 느낌이 나서 나이에 안 맞게도 살짝 들뜨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서연이랑 유정이가 함께 가는 거니까. 달갑지 않은 불청객의 얼굴들만 없었더라면 아마 더 완벽했겠지만 아쉽게도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볼 수 있었다.
"엇~ 성진 선배.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 되게 좋죠? 호호."
예전에도 느꼈지만 이 예진이란 계집애가 내게 왜 부쩍 친한 척을 해대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대화는커녕 인사도 없이 지냈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런담. 하긴 오늘 이왕 같이 움직이게 됐으니 사교성 있게 구는 것도 나쁠건 없었지만 내가 서연이에게 추근거릴 시절에 나를 깔보고 험담했을 무리들 중 그녀도 한몫을 했을게 틀림 없었기 때문에 그녀와 친근하게 지낸다는게 뭔가 미심쩍었다.
"왔어요?"
"응. 기다렸어?"
"내가 선배를 기다린다구요? 말도 안 돼."
내가 서연이와 인사 아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예진이가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좀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터미널엔 아직 서연이와 예진이 밖에 없었다.
"다른 애들 늦는건 아니겠지?"
"버스 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았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표는 좀 이따가 다들 오면 끊으러 가요."
난 서연이에게 물은 건데 좀 뜬금 없게도 예진이가 쏙 끼어들어 대답을 했다. 타이밍도 아주 미묘했기에 애초에 내가 예진이에게 물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서연이도 대답을 하려다 말고 애매하게 예진이를 흘끗거리는게 보였다.
유정이라면 몰라도 겨우 예진이 때문에 서연이가 토라지는 사태를 원하진 않았기에 적잖이 서연이 눈치가 보였다. 한편으론 아무렴 서연이가 그녀의 절친한 친구를 질투하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어지는 예진이의 언사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선배~ 버스에서 선배 옆자리에 앉아도 되죠?"
"뭐, 뭐?"
어떻게 보더라도 예진이는 나에게 그런 말을 던질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옆에 있던 서연이마저 동그랗게 토끼눈을 뜨고 예진이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황당한 사람은 나일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 계집애가 왜 이러는 걸까? 나한테 없던 호감이 생기기라도 했나?
"야~ 너 왜 그래?"
서연이가 장난스런 말투를 가장해서 예진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지만 그 장난스런 말투 속에서 왠지 모를 불길한 어떤 것이 느껴졌다는 것은 내가 그래도 손톱만큼은 서연이에 대한 이해도가 늘었다는 뜻일 터였다. 그런거야 뭐 어찌됐건 상관없지만 이어지는 예진이의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왜? 나도 성진 배랑 친해지면 좋지 뭐~ 너도 요새 선배랑 친하게 지내잖아. 너랑 친하면 나랑도 친해야지. 안 그래? 호호."
안 그래? 호호는 개뿔.... 서연이의 표정이 애매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오늘 견학에서 뭔가 곤란한 사태가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을 줄곧 가져오긴 했지만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분명 서연이나 유정이 때문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혼란을 제시하고 있었다.
"괜찮죠, 선배?"
"어? 그, 글쎄...."
"야, 너는 나랑 앉아야지. 니가 선배랑 앉으면 난 누구랑 앉아?"
심지어 나조차도 서연이 목소리가 약간 날카로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데 하물며 그녀의 친구인 예진이가 그걸 못 느낄리도 없었다. 하지만 예진이는 태연자약했다.
"너? 너는 한수 선배랑 앉으면 되잖아."
"뭐어?"
그녀의 대답은 서연이 뿐만 아니라 나까지 띵하게 만들었다. 과연 서연이가 뭐라고 대답을 할지가 궁금하다못해 두렵게 느껴지기까지 했지만 곧이어 다른 인물이 등장해 그녀의 반응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으응. 유정아."
유정이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인사에 반응한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깔려있던 미묘한 분위기를 유정이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없는 두 여자 선배의 모습이 화난 것처럼 보였는지 유정이는 머뭇거리다가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아니야. 버스 시간까지 아직 남았어."
마치 그녀를 변호하듯 내가 나섰지만 역시나 두 여자는 말이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앞에 내가 쭈뻣대고 있자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남자가 나타났다. 예진이 조의 남은 두 사람이었다. 지난번의 만남 이후로 나는 한수 녀석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기에 놈의 얼굴이 반가울 순 없었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녀석의 등장은 화제를 돌릴 만한 건덕지 정도는 될 수 있었다.
"애, 애들도 다 온 것 같으니까 표 끊자."
박물관을 가려면 시외버스를 타야 했기에 집에서 출발 할때만 해도 소풍 느낌이 나서 좋았지만 어째 버스표 끊는데서부터 난국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진이네 조는 예진이와 한수, 그리고 별로 특이할 것 없는 한 학번 아래의 남학생 후배 한 명이었다.
우리 조와 예진이네 조를 합하고 보니 남녀의 비율이 기묘하게도 딱 맞게 3대3으로 떨어졌다. 남녀 비율이 잘 맞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버스 좌석 하나를 정하는 데에도 왠지 모를 기묘함이 느껴졌다. 물론 내가 보기에 최고로 무난한 배치는 서연이의 말마따나 서연이가 예진이랑 같이 앉고, 예진이네 조 두 남학생이 같이 앉고, 마지막으로 남은 나와 유정이가 같이 앉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진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그 무난한 구도를 초장부터 완전히 박살내고 있었다.
"그럼 여기 내 자리~"
예고한 대로 내 옆 좌석에 냉큼 가방을 던지는 예진이의 행동을 미처 제지할 수도 없었다. 각자의 표에 적힌 좌석이 있을 테지만 그런거야 아무래도 좋았고, 굳이 버스에 탈 때부터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뒤에 바짝 따라붙었던 예진이의 행동은 분명 의도된 것이었다.
의외의 돌발 상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가 그걸 제지하고 들 만한 상황도 아니었기에 서연이조차 그녀를 말릴 수 없었고, 반 막무가내로 예진이가 내 옆자리에 앉자 남은 네 사람은 어떻게 자리를 정할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유정이가 나랑 앉자."
단단히 심기가 뒤틀린 것 같아 보이는 서연이가 애써 평온을 가장하며 유정이를 불렀다. 그러나 유정이가 서연이의 옆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한수가 그보다 한발 앞서 그 자리에 냅다 앉아버림으로써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선배?"
"그냥 내가 여기 앉을게 서연아~ 너랑 나란히 앉아서 가고 싶거든, 하하하."
능글맞은 한수의 태도를 보자 며칠 전의 만남에서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과연 서연이가 한수의 속셈을 눈치채고 있을지 없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이 년놈들이 막무가내로 이렇게 나오고 보니 유정이는 졸지에 얼굴도 모르는 남학생 한 명과 같이 앉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야, 너 나랑 자리 바꿔."
나는 성큼 다가가 유정이 옆자리 남학생 후배에게 대뜸 그렇게 말했다. 얼굴도 모르는 한 학번 아래의 후배였지만 내가 워낙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인지 쭈뻣거리며 내가 원래 앉아있었던 예진이의 옆자리로 가서 슬그머니 앉았다.
예진이나 한수는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별 상관이 없었는지 가만히 있는 눈치였다. 다만 서연이만이 아주 곱지 않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불만에 가득차 보이는 서연이였지만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버스가 출발해버려서 우리는 졸지에 그 자리 그대로 출발하게 되었다.
유정이의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은 나름대로 좋은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서연이의 기분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신 뒤를 흘끗거리며 서연이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녀는 아예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얼굴을 돌린채 창문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수 녀석은 그런 서연이에게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옆자리에서 용을 쓰고 있었다.
"서연아, 날씨 진짜 좋다. 그치?"
"그러네요."
한수의 추근거림에 고개도 안 돌리고 대꾸하는 서연이였지만 그 모습을 보며 통쾌하다는 기분 이전에 극도의 찝찝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비록 상황은 달랐어도 나 또한 유정이와 그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유, 유정아. 아침은 먹었어?"
"네."
짧디 짧은 대답. 분명 유정이가 평소에 감정 표현이나 붙임성이 뛰어난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무뚝뚝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와 나 사이의 분위기가 뭔가 무겁다는 것을 감지했다. 아무래도 며칠 전 자취방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 두 사람 다 계속 신경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연아~ 같이 음악 들을래?"
"아니요. 잘 거에요."
등 뒤에서 두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쪽으로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니 서연이는 여전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한수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추근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보다 한칸 뒤에서는 예진이가 그 전체적인 광경을 매우 흥미롭다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작부터 골치가 아프다.... 이 견학 정말 괜찮을까?
*
사실 견학 그 자체는 걱정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비록 우리가 모인 주 목적이 그것 때문이긴 했지만 견학 자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간단했다. 교수님이 지정해준 인문학 박물관을 탐방하여 각자 맡은 파트를 조사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오히려 조사를 한 시간보다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온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만큼 견학이 쉽게 끝나버리자 다소 허무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오늘 하루 신경써야 할 부분은 역설적이게도 주 목적인 견학 그 자체가 아니라 여기에 얽힌 복잡한 인간관계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는 서연이와 유정이만 신경 쓰면 되는 것이긴 했지만 한수와 예진이의 존재가 자꾸만 그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한수 녀석은 자료 조사를 하는 내내 서연이에게 붙어 서연이가 조사를 하는 것을 방해할 정도로 그녀에게 치근덕거렸다.
"그럼 다들 맡은 파트는 다 조사한거죠?"
서연이가 뚱하니 말이 없자 왠지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건 예진이의 몫이 되었다. 같은 박물관 내에서도 각자 조사해야 하는 인물이나 내용에 대한 부분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기에 모일 땐 모이더라도 조사를 할 땐 서로 떨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수는 서연이와 떨어지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학이 끝날 때 쯤이 되자 서연이와 한수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분위기를 우리 모두가 싫어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수가 서연이에게 집적거리는 의도를 이 자리의 그 누구라도 못 느낄 수가 없었다.
"서연아~ 넌 조사 잘 했어? 네가 한 것 좀 봐도 돼?"
"어차피 한수 선배하고는 파트도 다르잖아요."
"하하, 그래도 그냥 궁금해서."
한수 녀석이 서연이에게 엉겨붙는 꼴이 그렇게 꼴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내가 서연이에게 집적거릴 때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내가 뭐라고 얘기한단 말인가? 함부로 집적대지마라? 아니면 니가 맡은 부분에나 신경 써라?
"유정아, 넌 다 된 거 같아?"
"대충요."
유정이와 나는 여전히 사이가 조금 서먹했다. 아니, 서먹하다기보단 어딘지 좀 어색했다. 나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녀와 나 사이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자취방에서의 그 일이 있기 전에 비해서.
"성진 선배~ 선배는 조사 잘 했어요? 어디 한번 봐요."
"보긴 뭘 봐? 숙제검사하냐?"
"뭐라구요? 호호호호."
거기다 이 상황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요인이 있다면 바로 예진이의 태도였다. 이 기집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필요 이상으로 내게 친한 척을 하며 나긋나긋하게 굴고 있었는데, 이것이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방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서연이의 고까운 태도로 보건대 절대 일반적인 경우는 아닌 것 같았기에 찝찝할 수 밖에 없었다.
"성진 선배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네요. 방금 그거 웃기려고 한 말이죠?"
"......."
"나도 선배랑 더 친해져야겠다~~ 서연이랑 셋이서 같이 다니면 더 좋겠네.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죠?"
"아니."
단호한 내 대답에 예진이의 표정이 잠깐 샐쭉하게 굳었지만 이내 그녀는 못 들은 척 했다. 그 순간 서연이와 잠시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있는 대로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녀의 그런 시선과 태도는 그 예전 그녀가 나를 업신여기며 싫어했던 바로 그 시기의 모습이었기에 나는 순간 뭔가가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그 때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경멸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그런 미움에 가득 찬 시선은 오랜만이었기에 나 자신 또한 예전으로 회귀하는 기분이었다.
"이만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자료 조사만 하고 돌아가려니 너무 허전하지 않아?"
"그럼 뭐 어쩌자구?"
친한 친구에게마저 퉁명스런 말투로 일관하는 서연이의 모습을 보건대 무척 화났다는 사실을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예진이 또한 그걸 모를 턱이 없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근처에 놀이공원 있잖아. 거기서 쪼금만 놀다 가자. 기분전환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겸."
"놀이공원?"
이 지역은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었기에 여러가지 유흥거리가 많긴 했다. 놀이공원은 물론이고 워터파크와 생태공원을 비롯해서 가볼 만한 관광지가 제법 많았다. 예진이 말마따나 시외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와놓고 고작 자료 조사만 하고 돌아가는 것도 맥 빠지는 일이긴 했지만 서연이는 그리 내켜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물론 나도 그랬지만 말이다. 얼른 이 위태로운 하루를 끝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됐어.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
"야아~ 곧 시험기간인데 이런 날 아니면 또 언제 놀아. 어차피 지금 터미널 가봤자 버스 시간 땜에 한참 기다려야 돼. 조금만 놀다 가자, 응?"
"나, 나 지금 놀 기분 아닌데."
"그러니까 더 기분 전환이 필요한 거지. 가서 놀다보면 기분도 좀 좋아질 거야."
"몰라... 그럼 가서 너네끼리 놀아. 난 가만 있을래."
두 여자가 뭐라고 속닥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이윽고 예진이가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제안했다.
"버스 시간도 남는데 요 옆에 놀이공원에서 잠깐 놀다가요~ 다들 어떻게 생각해요?"
"난 찬성~ 무조건 찬성!"
옆에서 극성을 떨어대는 한수 녀석이야 그렇다 치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다지 의사 표현이 없었다. 유정이야 원래 말이 없는 편이고, 남학생 한 명도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다. 그나마 여기서는 내가 의사를 표현해줘야 진행이 될 것 같았다.
"글쎄... 난 그냥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아니면 놀고 싶은 사람들만 놀고 여기서 따로 찢어지든지."
"아이 참~~ 선배 왜요~ 같이 가서 놀아요. 여럿이서 놀아야 재밌잖아요~~"
"야, 왜 이래?"
예진이가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내게 엉겨붙었다. 그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거의 팔짱을 끼듯이 내게 몸을 밀착시켜오자 정말 당황스러웠다. 나 뿐만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던 서연이, 그리고 심지어 유정이까지도 움찔하며 예진이에게 시선이 주목되었다.
"오빠."
그제야 침묵하고 있었던 유정이가 내 등을 콕콕 찔렀다. 뿐만 아니라 유정이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예진이가 내 팔에 두른 손을 풀어 우리 두 사람을 은근히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팔을 풀어버리며 나서는 유정이의 움직임에 예진이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유정이는 그녀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냥 가요."
"응?"
"놀이공원이요. 그냥 같이 가요."
유정이의 말은 정말 의외였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서연이보다도 더 노는 데에 흥미가 없을 것 같았던 그녀가 그런 말을 하자 나는 방금 전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유정이의 말을 감히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아... 그게...."
"좋아요~ 그럼 다 같이 가는 거죠?"
유정이의 한 마디로 인해 내가 고민하고 있으려니 예진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여우 같은 계집애가 이 틈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아버린다.
"자자, 어서 가요."
예진이가 서연이를 비롯해서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버리자, 나는 유정이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유정아. 왜 같이 가자고 한 거야?"
"오빠는 서연 언니가 걱정 안 돼요?"
"응?"
"언니 좀 챙겨요, 오빠. 그러다가 정말 큰일날 수도 있어요."
야단을 맞은 듯한 기분에 잠깐 멍하니 굳어버렸지만, 그보다는 역시 유정이에 대한 알 수 없는 서운함과 기묘한 마음이 이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올라왔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유정이는 나를 남겨두고 걸어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 속이 복잡했다. 정말 그녀는 나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걸까?
*
박물관 견학이 어쩌다가 놀이공원으로 새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은 정말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놀이공원에 와본 지가 몇 년만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구 하나를 타기 위해서 끝도 없이 이어진 줄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만큼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서연아~~ 정말 안 탈거야?"
"응. 안 탈거야. 너나 많이 타."
"그러지 말고 같이 타자. 한 번만. 응?"
서연이를 어떻게든 바이킹에 한 번이라도 태우고 싶어하는 예진이의 지속적인 노력과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서연이의 냉랭한 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 실갱이가 어찌나 길었던지 그 와중에 줄이 상당히 줄어들어 어느새 우리 차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 서연아~ 같이 한번만 타자. 기왕 놀이 공원 왔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면 그것도 아깝잖아."
옆에서 한수 녀석까지 서연이를 꼬드기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녀석의 권유는 차라리 안하니만 못했다. 급기야 한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서연이는 매몰차게 걸어가 벤치에 앉아버렸다. 다들 그런 서연이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유정이의 야단 아닌 야단이 내 머릿 속을 줄곧 메우고 있었다. 서연이를 잘 챙기라는 유정이의 당부가 그렇게나 복잡미묘한 의미로 다가올 수 없었지만, 내 마음을 유정이에게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그렇게 말하는 유정이에 대한 야속함이 물씬 솟아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거의 반쯤은 유정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좌우지간 벤치에 앉아있는 서연이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서연아."
벤치에 앉아있는 그녀를 서연아, 하고 부르는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어느 날의 우리 모습이 겹쳐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그녀. 심기가 단단히 뒤틀려 있는 모습이었다.
"그냥. 네가 좀 신경 쓰여서."
"신경~?"
서연이에겐 기분이 상할 때면 그렇게 말꼬투리를 잡아 비꼬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의 그런 세세한 부분을 알게 되었을 만큼 그녀와 가까워졌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파악할 정도로 내가 영리하진 못했나보다. 내 말은 들은 서연이는 더욱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이제와서요?"
"무슨 말이야?"
"됐어요. 가서 바이킹이나 실컷 타세요."
"안 타. 니가 안 타면 나도 안 탈래."
"참 나... 웃기고 있어. 괜히 이제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에요? 하루종일 나한테...."
그녀는 말하다 말고 뒷말을 삼켰다.
"내, 내가 뭘?"
"됐어요."
내가 서연이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있자 꽤 여러 사람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유정이조차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이킹 같은 것엔 그다지 관심이 없어보였다.
"서연아, 미안해."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데요."
"그냥. 너한테 신경 못 쓴거."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요?"
서연이가 순간 목소리를 바락 높이며 화를 냈기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 뿐만이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움찔하며 무슨 일인가 하는 눈치였다. 서연이와 나 사이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문제에 있어서 나보다 더욱 조심스러워 해야 할 그녀였기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진정해."
"후우... 됐어요. 저리 가요."
냉랭한 그녀의 태도에 내가 쭈뻣거리고 있자 그녀가 나지막히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유성이에게는 그렇게...."
하지만 너무 목소리가 낮아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뭐?"
"아니에요."
벤치에서 일어난 서연이가 예진이를 따라 바이킹 대기줄에 합류했다. 그녀가 마음이 바뀌자 예진이가 화색을 띄며 서연이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 변화에 한수 녀석도 표정까지 밝아진 것은 물론이었다.
그녀가 마음을 바꾸자 나도 얼결에 덩달아 바이킹을 타게 되었다. 그러자 잠자코 있었던 유정이까지 줄에 합류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모두가 참여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이상적인 모습이긴 했지만 어쩐지 조금 찝찝한 전개였다.
"서연아, 옆에 앉아도 돼?"
우리 차례가 되자 한수 녀석이 어김없이 서연이에게 치근덕거리며 물었다. 나는 당연히 서연이가 거절하거나 냉랭하게 대꾸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내 예상을 깨뜨렸다.
"마음대로 해요."
비록 순수한 승낙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까처럼 매몰찬 거절도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한수 녀석은 입이 귀에 걸릴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예진이 또한 서연이의 그런 반응을 반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예진이가 그러면서도 내 얼굴을 흘끗 돌아보는 것이 어쩐지 내 반응을 살피고 있는 듯해서 뭔가 미심쩍었다.
서연이와 한수가 나란히 앉게 되자 나는 유정이의 옆에 앉게 되었다. 버스에서와 같은 상황이었다. 이윽고 바이킹이 진자 운동을 시작하자 나는 뱃속이 울렁거리는걸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보니 나는 놀이기구를 그다지 잘 타지 못했다. 왜 굳이 내가 이걸 타겠다고 나선 걸까? 서연이를 챙길거면 확실하게 챙기던지....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었다.
"으..."
한심하게도 놀이기구마저 잘 타지 못해 바이킹에서 내려오고 나니 속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유정이가 옆에서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요?"
"으응."
"토할래요?"
"아, 아니야. 너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요."
유정이는 정말 안색에 변화 하나 없었다. 질주를 즐기는 그녀답게 놀이기구 정도로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서연이마저도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려 숨이 거칠어져 있었는데,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사람은 우리 중에 유정이 하나 뿐이었다.
"갑갑하면 뭐라도 좀 마셔봐요. 시원한거 마시면 좀 나을 거에요."
"응.... 그래야겠다."
빌어먹을 바이킹은 뭐하느라 타가지고.... 나는 유정이와 근처 노점에서 음료수를 사오기 위해 잠시 무리에서 이탈했다. 흘끗 서연이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뭔가 샐쭉한 표정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를 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딴청을 피웠다.
유정이 또한 내가 서연이와 미묘한 기류를 조성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서연이를 챙기라는 무언의 지시보다는 그래도 나를 챙기는 것이 더 우선이었는지 그녀는 나를 이끌고 노점으로 향했다. 유정이의 그런 태도에 나는 기분이 살짝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사람 마음이란 간사한 것이다.
"오빠."
"응?"
유정이와 근처 벤치에 앉아 주스를 마셨다. 그녀의 말마따나 시원한걸 마시니 약간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저러다가 서연 언니가 오빠한테서 떠나면 정말 괜찮아요?"
"......."
나도 유정이의 말 뜻을 알고 있었다. 나에게 서연이를 계속 이런 애매한 관계로 묶어둘 수 있는 권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연이를 계속 내 옆에 둘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도 내게는 힘든 일이었다. 사귀지도 않으면서 마음 만으로 옆에 계속 묶어둘 수 있는 그런 관계를 지칭할 수 있는 단어가 내가 알기로는 없었다.
"유정아... 네가 이해하기엔 힘든 문제겠지만 나와 서연이는 서로의 몸을 탐해서 시작된 관계야. 우리는 애초에 마음을 전제로 하고 시작한 사이가 아니었어. 나 또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건 마찬가지야."
"......."
컵을 매만지는 유정이의 손가락이 나만큼이나 심란해보였다. 얽힌 실타래처럼 너저분한 문제였다.
누구도 답을 가르쳐줄 수 없는....
"봐, 서연이도 점점 긍정적으로 반응을 하잖아. 내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가면 뭔가 될 것 같지 않아?"
"글쎄, 난 잘 모르겠어. 일단 서연이가 지금 기분이 엄청 안 좋아 보이거든. 왠지 더 끈적하게 굴어봤자 좋을게 없을 것 같은데."
그 때 노점 뒤편에서 들린 두 사람의 말소리 때문에 나와 유정이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굳이 기척을 숨기려고 숨긴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 유정이가 먼저 두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본 탓에 우리는 예진이와 한수의 대화를 엿듣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서연이가 기분이 왜 안 좋은지를 우선 알아야겠어."
"혹시 내가 너무 들이대서 그런건 아니겠지?"
"글쎄...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서연이를 잘 아는데 싫으면 싫다고 단호하게 말을 하지 저렇게 입 닫고 있는 애는 아니거든."
"흠... 그럼 이제 어쩌지?"
"어쩌긴. 어차피 선배가 고민해봐야 알 수 있는 문제도 아니잖아? 선배는 선배 마음만 표현하면 되는 거야."
"그, 그런가?"
"기왕 마음 먹은거 남자답게 밀어부쳐. 생각해놓은게 있을 거 아니야."
"아, 알았어."
"잘 되면 내가 도와준거 잊지 말고."
"물론이지. 예진이 네가 많이 도와준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럼 됐어. 이제 가자."
예진이 저 계집애는 절친한 친구라면서 친구의 속내를 저렇게 모를 수가 있나? 하긴 서연이의 마음을 알고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작당하고 저러는 것을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이제야 아침부터 예진이 저 년이 내게 필요이상으로 친근하게 굴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서연이 옆에서 나를 떼놓음으로써 한수 놈이 서연이에게 붙어있을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유정아... 우리도 가자."
"저 두 사람 저대로 놔둬도 정말 괜찮을까요?"
"작당모의 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는 거잖아. 일단은 신경 끄자."
유정이는 내게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녀 이상으로 복잡한 내 표정을 보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이끌고 다시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중에 문득 유정이의 발걸음이 어느 지점에서 잠시 멈추었다.
"왜 그래?"
유정이의 움직임이 멈추자 의아해서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유정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어느 한 곳을 약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얼굴을 움직인 나는 익숙한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회전목마?"
여러 마리의 장난감 말이 원을 따라 천천히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공원에 꼭 하나씩은 있지만 그리 특별할 것은 없는 바로 그 익숙한 기구였다. 유정이가 그런데에 관심을 보일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혹시나 그녀가 다른 것을 보고 있나 주변을 더 둘러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유정이가 시선을 두고 있는 곳에는 목마 말고 다른 것이 없었다.
"왜? 혹시 저거 타고 싶어?"
"아, 아니에요."
유정이는 그녀 답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강한 부정을 하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영문을 몰랐지만 나 또한 얼결에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다시 모두가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니 이제는 롤러코스터에 서연이를 태우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는 한수와 예진이를 볼 수 있었다.
"야~~ 너 이거 좋아하잖아. 같이 타자, 응?"
"됐어. 난 쉬고 있을게. 타고 와."
"네가 빠지면 재미없잖아."
옥신각신 실갱이를 하는 그녀들에게 다가가자 서연이의 시선이 내게 와서 꽂혔다. 그녀의 눈이 나를 응시하더니, 곧 내 옆에 있는 유정이에게도 머물렀다. 그 순간 표정이 다시 샐쭉하게 변하는 서연이.
"좋아. 그럼 한번만 타자."
"응? 정말?"
"그래."
"얏호~!"
날더러 보란 듯이 나를 두고는 롤러코스터를 타러 가버리는 서연이.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그렇거니와 굳이 놀이기구를 타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유정이와 밑에서 기다리고 하고는 벤치에 앉았다. 서연이는 그런 우리 모습을 보더니 더욱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 후 롤러코스터에 오르기까지 그녀는 한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문득 유정이가 그런 서연이의 기분을 눈치채고 또 뭔가 걱정하는 말을 할까봐 나는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유정이로부터 아무런 꾸짖음이 없자 나는 슬그머니 유정이의 얼굴을 살폈다. 뜻밖에도 유정이는 어느 한 곳을 보느라 조금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았는데, 나는 어렵지 않게 그것이 아까의 회전목마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유정아, 솔직히 말해봐. 저거 타고 싶지?"
"......."
"가자."
"네?"
"타러 가자구. 너 지금 엄청 티나."
나는 유정이의 손을 이끌어 회전목마 앞까지 그녀를 데려갔다. 그녀는 머뭇거리면서도 싫다고 빼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의 기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놀이공원은 규모가 작아서 입장권이 따로 없이 기구를 한번 탈 때마다 이용료를 지불하는 식이었기에 나는 그녀를 대신해서 두 사람 몫의 값을 냈다.
"오빠... 안 그래도 되는데."
"괜찮으니까 어서 타."
유정이는 머뭇거리면서도 내가 꾸준히 권유하자 결국 목마 위에 슬며시 올랐다. 이윽고 말들이 천천히 회전하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다른 말에 탈까 하다가 그냥 유정이의 뒤에 올라탔다. 어차피 그녀와 오토바이도 같이 타봤는데 목마라고 뭐 다를거 있겠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다. 바이크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자그마한 장난감 목마의 등 위는 오토바이의 안장보다도 훨씬 좁았다. 몸이 더더욱 바짝 붙을 수 밖에 없었는데다 회전하는 속도도 오토바이로 달릴 때와는 다르게 너무도 느릿느릿했기에 그만큼 밀착되어 있는 느낌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어린애들 타라고 만든 기구에 성인 두 사람이 올라가 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거였지만, 유정이의 허리에 손을 얹기도 힘들 만큼 분위기가 뻣뻣해졌다.
"오빠."
"으응."
그녀도 그걸 느꼈는지 고맙게도 먼저 입을 열었다. 느릿느릿하게 회전하는 목마 위에서 그녀와 말을 주고 받으니 오토바이를 탈 때와는 다르게 너무도 선명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때문인지 나는 그녀의 말에 신경을 바짝곤두세웠다.
"어릴 적에... 아버지랑 종종 타보곤 했어요. 회전목마..."
비록 그녀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또렷한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과거에 대한 어떤 향수 같은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다.
"아버지는 내가 이걸 타는 모습을 좋아하셨어요. 내가 이걸 타고 있으면 소녀처럼 보인다면서... 사내아이들이 하는 것만 하지 말고 가끔 이런 것도 해야 한다며 나를 목마에 태우고는 뒤에서 나를 안아주셨어요."
나는 얼굴도 모르는 유정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오토바이 타는 모습도 어울리긴 했지만, 이 자그마한 장난감 목마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유정이에겐 더욱 잘 어울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녀다움이 그녀에게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그녀 스스로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사실은 아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났어요. 다시 타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안 했는데.... 선배 덕분에 이렇게 타보게 되네요."
"타보니까 어때? 옛날 느낌 그대로야?"
"잘 모르겠네요. 너무 옛날 일이라...."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왠지 묻어놓았던 추억 한 켠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뿌듯해졌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목마 위에서 잠시 말이 없던 유정이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오빠."
"뭐가?"
"나에게 신경 써주는 것처럼 서연 언니에게도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줘요. 그럼 아마 언니는 행복해 할 거에요."
"유정아. 나는..."
"오빠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주는거 알아요. 나도 그게 좋아요. 하지만 나는 아직 혼란스러운걸요. 오빠에 대한 내 마음도 그렇지만 내가 여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조차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내게 답을 가르쳐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오빠의 마음을 잘 모르긴 하지만... 오빠도 나와 비슷한 기분일거라 생각해요."
"......."
"난 그런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가 내게 가르쳐줄 수 있는게 아니라면 스스로 해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가치관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오빠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찾아보는게 어떨까요?"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나와 유정이 사이의 공통점이었다. 그녀가 내놓은 답 또한 비록 모호했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기에 부끄럽게도 스무살의 유정이가 나보다 훨씬 더 성숙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다구요?"
"......"
"오빠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만큼은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는 거라고 들었어요. 이런 말을 하면 오빠의 여자친구분에게 죄를 짓는게 될지도 모르지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마음까지 거짓이 되는건 아니잖아요. 오빠가 나를 좋아한다던 그 마음도 거짓이었나요?"
"그런건 아니야."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는 관념적인 관계를 떠나서 좋아한다는 마음만큼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게 사실이잖아요. 난 굳이 오빠가 지금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서연 언니와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마음에는 솔직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을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마음..."
마음.... 서연이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 그리고 유정이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 사실 유정이의 말이 옳았다. 나는 비록 현주와 사귀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거짓이 되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마음에 솔직해지기에는 온갖 타인의 가치관들이 나를 향해 비난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정이는 내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꼭 서연 언니와 사귀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오빠의 솔직한 마음을 언니에게 전하세요. 내가 알고 있는 성진 오빠는 좋은 사람이에요. 난 오빠가 더이상 여자를 슬프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오빠가 서연 언니를 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너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건 알고 있니?"
어찌보면 너무도 섣부른 질문이기도 했다. 미숙하기도 했고, 성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겐 더없이 솔직한 질문이었고, 따라서 굳이 그 말을 주워담지 않기로 했다.
"나에겐 시간이 필요해요, 오빠.... 오빠가 그랬듯이 누군가가 답을 말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나 혼자 생각하고 답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지금은 조금 더 고민하고 싶어요. 만약 오빠가 괜찮다면 조금만 기다려줬으면 좋겠어요. 난 비록 지금은 오빠에게 뭐라고 말을 해줄 수가 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빠에게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
"하지만 서연 언니는 아니에요. 언니는 오빠의 사랑을 원하고 있어요. 난 그걸 알 수 있어요. 나와는 다르게 언니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인걸요. 그러니까 서연 언니의 마음을 저렇게 버려두지 마세요."
"너는 내가 서연이를 사랑해도 전혀 상관 없어? 내가 너만을 좋아하길 바라지 않니?"
내가 말하고도 정말 부끄러운 질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현주만을, 서연이만을, 유정이만을 좋아하지 못하는 걸까? 그 치졸하고 옹색한 질문 앞에 유정이는 담담히 대답했다.
"물론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오빠 마음은 그런게 아니잖아요."
"......."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빠가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람만이 나를 여자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유, 유정아."
어쩌면 그 목마 위에서 그녀로부터 들은 말은 여지껏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 중에 가장 솔직하고 서슴 없었던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유정이마저도 내게 이렇게 진솔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정작 내가 그녀 앞에서 진솔하지 못하다면 그 얼마나 비겁한 일일까.
"그러니까 가서 오빠의 솔직한 마음을 전해요. 나하고의 문제는 그 후에 생각해도 괜찮아요. 오빠의 그런 답답한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조금은 뼈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녀가 내게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 그렇게나 가슴 벅찰 수가 없었다. 비록 그녀의 말이 내 모든 고민을 날려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깨우쳐준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녀의 말마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닌 나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만 내릴 수 있는 오롯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유정이가 그 선택의 문 앞까지 나를 인도해주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
"고마워, 유정아. 나 잠시 서연이에게 다녀올게."
"그래요."
어느새 목마가 멈춰 서있었다. 나는 목마에서 내렸다. 유정이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목마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가려는 순간 유정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등에다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빠."
"응?"
"사실 놀이공원에 오자고 했던거... 서연 언니 때문도 있지만 회전목마를 꼭 한번 보고 싶어서였기도 했어요."
"......"
"고마워요. 꼭 아빠 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가려던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멈추었다. 나는 다시 유정이에게로 돌아와, 말 위에 올라타고 있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곧이어 입술과 입술이 위태롭게 살짝 닿았다.
믿기진 않지만 그녀와의 키스는 이로써 세 번째.... 하지만 이번엔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그저 입술만 살짝 붙였다 떼는 가벼운 키스였다.
"그래. 나도 고마워."
그 때 내가 보았던 유정이의 미소는 비록 한없이 옅고 희미했지만,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여자의 미소보다도 더 아름답고 눈이 부셨다. 그녀는 내게 어서 가보라며 무언으로 재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얀 목마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
롤러코스터 앞으로 돌아오니 서연이네는 이미 놀이기구에서 내린 것인지, 다들 땅에 내려와 있었다. 꽤 멀리서도 그들의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서연이네 무리들 주변으로 이상하리만치 인파가 몰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간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러분! 저는 이 여자를 정말 좋아합니다!"
꼴보기 싫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인파의 한 가운데에 난처해하는 얼굴의 서연이가 있었고, 한수 녀석이 서연이 앞에 서서 그녀에게 어디서 준비했는지 모를 꽃다발과 풍선을 주려고 땅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앞으로 평생 좋아할 것을 여러분 앞에 맹세합니다!"
"워우~~!"
"역시 젊음이 좋다!!"
"잘해봐라~~! 보기좋다!"
"받아줘라!"
"받! 아! 줘! 받! 아! 줘!"
한수가 서연이에게 고백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현주에게 고백하던 날의 나와 내 주변의 모습들이 겹쳐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주도 저런 기분이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녀는 내 고백을 받아줬으니까.
같은 고백이라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역시 가장 중요한건 마음이니까.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 그리고 사랑을 받는 사람의 마음. 서연이에게도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쟤네 지금 뭐하냐?"
난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예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보면 아시잖아요. 한수 선배가 서연이 좋아하는건 성진 선배도 알고 계셨죠? 마침 선배도 자리에 안계시고 해서 좋은 타이밍인 것 같길래."
"뭐?"
마치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예진이의 대답에 심기가 조금 불편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내 예진이에게 신경을 끄고 서연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느닷 없는 한수의 고백과, 그에 호응하여 열광하고 있는 군중들의 시선 때문에 더욱 난처해하고 있었다.
"받아줘! 받아줘!"
"뽀뽀해! 뽀뽀해!"
왜 사람들은 유독 이런 일만 일어나면 마치 자기 일처럼 열광적으로 환호하고 드는 건지. 내가 현주에게 고백할 때에는 그런 사람들의 호응이 고마웠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들의 환호가 오지랖으로 느껴지는걸 보면 역시 사람은 간사한 법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그동안 내가 서연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더없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왜 그걸 애써 모른 척 하려고 해왔던 걸까? 다른 사람에게 사랑 고백을 받는 서연이의 모습을 보는게 이렇게나 싫은데도.
"서연아, 이리 와."
인파의 한가운데에서 당황하며 서 있는 서연이의 손목을 잡아채 이끌었다.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의 돌발 행동에 한수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열광하던 군중들까지 황당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등으로 꽂히는 수많은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서연이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서, 선배."
나의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서연이도 한수 못지 않게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내가 이끄는 대로 마냥 끌려올 뿐이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그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정신을 차렸다.
"선배, 선배. 어디까지 가는 거에요? 나 팔 아파요."
"아, 미안."
멈춰서고 보니 생각보다도 더 멀리 와있었다. 서연이는 팔이 아픈지 내가 손을 놓아주자 연신 손목을 문질렀다.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서연이는 팔이 아픈 것보다도 내가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했는지가 더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그저 서연이와 나만을 위한 둘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서연아, 우리 저거 탈까?"
"네?"
서연이의 시선이 내 손가락 끝을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는 내가 가리킨 대관람차를 보고 두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공중에서 빙글빙글 조용히 돌아가며 말없이 창밖을 비추는.... 어찌보면 회전목마와도 비슷한 놀이기구였다.
"사람들 없는데서 너랑 둘이 있고 싶거든. 할 얘기가 있어."
"......."
고맙게도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여전히 조금은 화가 난, 그리고 조금은 당황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용기를 낸 나의 단호한 말에 그녀는 응해주었다. 관람차에 오르기 전까지 우리는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성인 두 사람이 들어가 앉기에는 무척 좁다고 느껴질 만큼 작고 둥그런 관람차 안에 천천히 올라타 서로를 마주보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윽고 관람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원의 움직임을 따라 서서히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상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창 밖으로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서연아."
"왜요?"
"우리 그냥 사귀자."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토라진 태도를 유지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이제는 서서히 점이 되어가고 있는 저 아래의 풍경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화난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잊은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더욱 당황하는 것 같았다.
"선배... 갑자기 무슨..."
"나도 너 좋아해. 니가 날 좋아하는 것만큼."
"내, 내가 왜 선배를...."
"나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더이상 미루기도 피하기도 싫으니까. 네가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정말 나쁜 놈으로 보이겠지만 너한텐 이제 그냥 솔직해지려고.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
"오늘 너한테 신경 못 썼던거 미안해. 아니, 사실은 여태껏 너한테 더 신경써주지 못한거 줄곧 미안하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게 솔직할 수 없었던건 내가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이야."
"부끄럽다니요...?"
"너도 알지만 나에겐 사귀는 사람이 있어. 현주는 나한테 소중한 여자야. 내가 좋아해서 사귀었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어. 처음엔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시작했지만 그 애를 깊이 알고 나니 내게도 더 깊은 감정이 생겼어. 그 애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상처가 있어. 그리고 그 애는 내게서 그걸 치유받길 원해. 그 애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나는 그런 현주를 버릴 수가 없어."
두서 없이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서연이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의 눈을 피하며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타임 리와인더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자신감과는 별개로, 나는 지금 다른 의미에서의 자신감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너를 보면서 나도 많이 고민했어. 우린 처음에 단순히 몸을 섞으면서 시작한 관계였지만.... 넌 갈수록 나에게 그 이상을 원하는 것 같았고 나도 사실 그런 네 마음이 싫지 않았어. 왜냐면 나도 네가 좋았으니까. 나도 너랑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고 싶었으니까."
"거, 거짓말 하지 마세요."
"정말이야. 네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했을 때.... 난 너무 부끄러웠어. 너에게 그 말을 하는게 내 스스로 죄스럽게 느껴질 것 같단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 나는 내 여자친구를 사랑하지만, 너 역시 사랑해. 누구 하나 나에겐 포기하고 싶지 않은 소중한 여자들이야. 이런 욕심이 너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에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기분이었어."
"........"
"그래서 난 하나는 포기하기로 했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잊어버릴거야. 지금부터는 네가 나를 어떻게 볼지만 생각할게."
"내,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원하는 거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이야기해주면 좋겠어. 그래서 솔직하게 얘기하는거야. 사귀자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굳이 우리가 사귀지 않아도 좋아. 다만 나는.... 우리가 좀 더 분명한 관계였으면 좋겠어."
관람차는 삐걱거리며 공중을 향해 더더욱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가장 높은 꼭대기에 다다른 관람차는 다시 반대편으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껏 멀어졌던 지상의 점들이 다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에요?"
"언제까지고 이런 모습으로 지낼 순 없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고백 받는 네 모습 보는거, 생각보다 너무 기분 나빴어."
"네?"
어이없어 하던 서연이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이내 실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에요, 그게?"
"진짜야. 한수 그 녀석이 너에게 그러고 있는 모습 보니까 속이 뒤집어 지더라고."
"그러면서도 오늘 하루종일 그 선배가 나에게 집적대도록 그냥 놔뒀잖아요."
"미안해. 이렇게 사과할게."
"사과 정도로는 부족해요."
"그럼 어떻게 할까?"
"더 간절하게 고백해봐요. 지금까지 내가 느낀 서운함이 조금은 날아갈 수 있게."
간절하게...? 아무리 그래도 한수처럼 무릎을 꿇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서연이가 그런걸 별로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서연이를 냅다 번쩍 안아들었다.
"어맛!"
좁디 좁은 관람차 안에서 내가 그녀를 안아들자 하마터면 천장에 우리 둘 다 머리를 박을 뻔 했다.
"뭐하는 거에요?"
"이리 와."
갓난 아기 달래듯이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었다. 혀를 섞는 키스가 아니라 유정이에게 했던 것처럼 입술만 살짝 붙이는 뽀뽀였다. 하지만 그 뽀뽀는 입술에서부터 시작해 목으로 내려왔고, 이윽고 다시 서서히 올라가 귀로 이어졌다. 귓볼을 잠시 간질이던 입술이 다시 움직여 그녀의 양쪽 볼과 코, 눈, 이마를 정신없이 마구 찍어댔다.
얼굴 전체를 입술로 건드리듯이 이어지던 무차별적인 뽀뽀 행진이 마침내 그녀의 이마에서, 어느새 살짝 감겨 있는 그녀의 두 눈꺼풀 위를 덮음으로써 끝났다. 입술을 떼고 뽀뽀를 멈추자 그녀가 감았던 눈을 뜨면서 대꾸했다.
"이게 뭐에요?"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아?"
"이게 뭐가 간절한 거에요. 그냥 힘으로 밀어부치는거지."
"눈코입 하나하나 전부 사랑스럽다는 의미로 한 거야."
"무슨.... 말은 참...."
말이야 어쨌건 이렇게 그녀를 안아들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좀 더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서로의 몸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품 안에 쏙 안겨 있는 날씬한 그녀의 몸을 언제든 뜨겁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배."
"응."
"선배는 비겁해요."
"왜?"
"이기적인 말을 이기적이지 않게 하니까요."
"무슨 말이야?"
"결국 나더러 선배의 첩이 되라는 이야기를 그럴 싸하게 포장하고 있는 거잖아요."
물론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게 서연이에겐 어쩌면 하나의 굴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표현해야만 했다.
"그래, 맞아."
"나, 나는.... 세컨드는 싫다고 얘기했잖아요."
"누군가의 둘째가 될 바에는 그냥 섹파로만 지내는게 낫다고 했었지. 넌 정서적인 두번째가 되는 것보단 육체적인 첫번째가 되길 원한다는거 알아. 하지만 나는 너를 두번째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 넌 정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내게 첫번째였으면 좋겠어. 그리고 현주도...."
"못 믿겠어요. 그렇게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런 모습으로 사랑하는게 정말 행복할까요?"
"행복할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둘다 그걸 원하고 있으니까."
서연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창밖으로 가까워지는 땅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무들이 다시금 크게 보일 정도로 땅이 가까워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녁에 시간 있어요?"
"응?"
생뚱맞은 대답에 약간 의아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술 한잔 해요. 우리 둘이."
어느새 관람차는 우리가 출발했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한바퀴를 빙 돌고 난 관람차의 모습은 출발하기 전과 다름이 없어보였다. 상황에 맞기 않게도 원이라는 것은 정말 신비롭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답은 그 때 할게요."
과연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할 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백을 했고, 그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탈 때 만큼이나 조심스럽게 관람차에서 내렸다.
- 다음 화에 계속 -
27장도 26장과 마찬가지로 너무 오래 걸렸네요 ㅠ.ㅠ
먼저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쪽지로도 그렇고 게시판으로도 그렇고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마음이 더욱 불편했습니다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연중이라던가 하는 그런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요새 업무상 일이 많을 시기라.... 심하면 새벽에 집에 들어와서 다시 새벽에 나가는 날도 많을 만큼 조금은 여유가 없는 시기인 듯 하네요
그래도 글 쓰는건 중단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건 저의 즐거움이기도 하니까요 ^^
그리고 요새 게시판으로 향후 스토리를 예측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저는 그런 예측을 통해서 독자분들과 소통하는 것을 즐깁니다
지난 주엔 너무 바빠서 독자분들께 답글조차 제대로 달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확인하고 흐뭇해 했습니다
스토리에 대해 그런 피드백을 해주시는 분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언제 어떤 내용으로라도 게시판에 글을 남겨주시면 하나하나 정성껏 챙겨보겠습니다
그리고 타임 리와인더가 이달의 작품에 선정되어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아껴주셨다는 뜻이기에 독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으나.... 순수한 의미로 이 영광을 독자분들에게 돌리고 싶네요
앞으로도 더 많이 사랑해주세요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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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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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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