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30장
"기다려요."
아파트 단지를 떠나는 내 발걸음을 현아가 멈추어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현아가 다급한 걸음으로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다가올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주었다.
"현주는요?"
"울고 있어요."
숨을 고르면서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녀의 표정. 내가 했던 말에 후회를 하는건 아니었지만 양심상 차마 그녀를 바라볼 면목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당신도 들었잖아요. 게다가 현아 씨는... 애초에 알고 있었지 않나요?"
"그걸 왜 현주에게 말했냐는 거에요!"
그녀는 아마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생각처럼 현주에게 이런 추잡한 부분을 내 입으로 고백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나는 이 선택이 현주에게 있어 커다란 상처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그것은 분명 나의 의지로 이루어진 선택이었고, 따라서 돌이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현주도 소중하지만 다른 한 사람도 나에겐 소중하니까요. 어느 한 사람의 마음도 기만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다에요... 나도 내가 지저분하다는걸 알고는 있지만 적어도 이게 최소한의 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그 여자를 선택하겠다 이거죠? 내 동생을 버리고?"
"그저 어느 한 쪽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에요."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찬 따귀가 날아왔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지만 화나거나 하진 않았다.
"웃기지 말아요. 당신은 그저 쓰레기일 뿐이야."
"부정하고 싶진 않네요. 그건 현아 씨도 알고 있었던 거니까."
"지금이라도 현주에게 가서 말해요. 거짓말이었다고... 이렇게 사귀는게 힘들어서 일부러 그런 극단적인 말을 한거라고 둘러대란 말이에요. 미련하게 고집부려서 내 동생에게 상처 남기지 말아요."
"그건 현주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거에요."
"잘난척 지껄이지 마. 당신이 지금 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했던 그녀가 이제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혐오로 가득한 시선을 차마 피하지도 못하고 나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당신과 했던 약속... 못 지킬 것 같아요."
그녀에게는 그 말 한마디로 충분했을 것이다. 구태여 여러말 하지 않아도 나와 현아 사이를 규정지어주던 단 하나의 고리가 그 순간 무너졌음을 그녀도 느꼈을 테니.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내 뺨을 후려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 동안 얼굴에 느껴지는 감각이 없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이 보였다.
"나는.... 나는 당신이 정말로.... 원망스러워요."
"......."
뒤돌아서 걸어가버리는 현아. 그녀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서럽게 뛰어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허망함이 느껴지는 뒷모습을 내게 보이며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밤하늘이 그렇게 답답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걸 새삼스럽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니코틴을 끊고 산지 한참 되었는데도 오늘은 왠지 담배 한 개비 생각이 났다. 담배 연기를 떠올리니 왠지 모르게 한 사람이 덩달아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메마른 표정으로 늘 담배를 피우곤 했었던 그녀....
차를 가져오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었다. 택시에 올라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
"안에 있어요?"
무작정 302호의 문을 두드렸다. 벨도 한번 눌러보았다. 하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바로 옆집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온전히 내 의지로 이곳을 찾아온게 처음이었다. 특별한 용건이 없다면 이웃끼리도 서로 왕래가 없는 것이 요즘 세상에선 일반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여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 같은게 있었다.
"......."
대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하지만 왠지 그녀가 안에 있을거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처음 그녀의 집에 들어서 타임 리와인더를 줏었던 그 날처럼, 나는 무례하게도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쥐고 살짝 돌려보았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뭐야?"
"왜 없는척 했어요?"
여전히 그녀는 방 안을 유영하듯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전혀 목적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 유령 같은 움직임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중요한 시간을 방해 받은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없는 척이라니. 귀찮았을 뿐이야."
"미안해요. 그래도 잠시 실례 좀 해야겠어요."
나는 그녀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녀에게만 허락된 그 이상하고 신비스런 공간 안으로 성큼 발을 옮겼다. 평소와는 다르게 당돌하기 짝이 없는 내 태도에 그녀도 약간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뭐야?"
"누가 뭐래도 당신이 내 손에 시계를 쥐어줬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상담 정도는 부탁할 권리가 있는거 아닌가요?"
"그래서?"
"담배 한 까치만 줘요."
늘 변함없이 세상 모든 일에 초연해보이는 표정과 말투로 일관하던 그녀가 어이가 없어하는 표정을 짓는걸 보니 약간은 졸렬한 보복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분위기로 봐서는 그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였지만 실내에서는 결코 흡연을 하지 않는 주의인지 그녀는 나를 데리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가 언제나 담배를 피고 있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고, 고마워요."
순순히 담배를 건넨 것도 그랬지만 직접 불까지 붙여주는 그녀의 호의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능숙한 손짓으로 라이터를 긁었다. 문득 그녀가 손에 쥔 지포 라이터에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굉장히 낡아보이네요."
"이거?"
그러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라이터를 공중으로 한번 휙 던진 뒤 받아채고는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아무 생각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내 말이 무척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나름대로 역사가 있는 물건이지."
그녀가 가진 물건이라면 왠지 이제는 다 신비스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 오래된 라이터의 외관 역시 타임 리와인더와 마찬가지로 낡디 낡은 투박한 은백색 빛깔을 띄고 있었기에 내게는 특히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 했다.
"어쨌든...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이렇게 사람 불러내놓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늘어놓는다면 화날지도 몰라."
"그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다. 하지만 이런 막막한 기분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역설적이게도 그녀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내게 있어 막막함의 결정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니까. 그 어떤 막막한 이야기라도 그녀에게 늘어놓고나면 왠지 일상의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후우..."
얘기를 꺼내기에 앞서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한 뭉텅이의 담배 연기를 훅 하고 뱉었다. 군대 있을 때 이후로 거의 몇 년만에 처음 입에 대는 니코틴이었다. 너무도 오랜만의 흡연에 순간 쿨럭하고 목이 들끓을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기분이 좋다기보단 오랜만의 감각이라 그런지 낯설기만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옆집 여자가 갑자기 내 입에서 담배를 홱 낚아채버렸다.
"왜, 왜 그래요? 그 아까운걸."
그녀가 낚아챈 담배를 쓰레기통에 휙 던져넣어버린 것이다. 아직 두 모금도 제대로 빨지 못한 장초였기에 그것은 누가 봐도 낭비 중의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며 내게 대꾸했다.
"역시 못 주겠어."
"왜, 왜요? 아까워요?"
"담배는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거든. 내 가족까지 병들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고."
이건 또 무슨 담뱃값 경고문구 같은 소리람.... 설마 지금 내 건강을 걱정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고 있는건 아니겠지?
"그럼 그 쪽은 왜 피는 건데요?"
"나?"
뭐가 그리도 웃긴지 그녀는 내 말을 듣고선 키득거리며 웃음을 연신 터뜨렸다.
"글쎄. 내가 왜 담배를 피기 시작했을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마 언젠간 알게 될 거야."
여전히 아리송한 그녀.... 그녀가 정말로 시간을 되돌아 온 나의 주변 인물이 맞다면 사실 내가 그녀에게 물어야 할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요사이 몇 번의 대화를 통해 내가 그녀에게 그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너무도 무의미한 일임을 이제는 나도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미스테리였고, 그것은 혼자 고민한다고 해서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녀를 대함에 있어 다만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얻어가는 것으로 만족해야함을 스스로 어렴풋이 터득하고 있었다. 따지고보면 지금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궁금한게 있어요."
그녀는 대꾸도 없이 연기를 훅 하고 뱉었지만 나는 그걸 긍정의 표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는 대가... 수명과 시간의 비례관계를 가르쳐주세요."
"갑자기 그건 왜?"
"아, 알고 싶어요."
내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왠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였다. 사실 이 질문을 던지면서도 나는 그녀가 내 질문에 온전히 대답을 해줄거란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내게 말해줄 수 있었다면 그녀가 이미 이전의 대화에서 그 질문에 대답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 그녀는 내 질문에 대해 핵심적인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여느 때처럼 모호한 말로 대답을 비껴가면서도 그녀는 교묘하게 딴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만 그 말투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웠기에 나는 그녀에게 뭔가 좋은 일이 있나보다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목숨 아까운 기분이 이제야 드나보지?"
"그런거 아니에요."
"무슨 짓을 했는진 몰라도 꽤 고민 되는 일이 생긴 모양이야. 아무래도 선택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은데."
"헤매고 있다구요? 제가?"
"그래."
다시 한차례 연기를 뿜고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인간은 지극히 단순한 동물이거든. 너만 해도 그렇잖아. 네가 그동안 시계를 어떻게 사용해왔는지 그 하나하나를 내가 전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네가 시계를 반드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결심이 확고한 일이었다면 그 때마다 수명이라는 대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겠지. 눈으로 잴 수도 없는 목숨이 조금 깎여나가는 것보다는 당장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더 중요했을테니까 말이야."
"......."
"하지만 네가 지금에 와서 이렇게 수명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보면 보나마나 둘 중 하나일걸. 이제와서 목숨이 비로소 아깝다고 느껴지기 시작했거나, 아니면 지금 네가 고민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긴 중요하되 과연 수명을 깎아가면서까지 시간을 돌이킬 만큼 중요한 일인지 네 스스로 망설이고 있는 거야. 내가 보기에 너는 벌써 목숨 끝자락을 걱정할 만큼 늙지는 않았으니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은데...."
폐부를 정확하게 찌르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저 멍하니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이토록 명확하게 뇌리에 인식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녀의 말이 백 퍼센트 정확하게 옳았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현주와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되돌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일을 되돌린다고 한들 그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느냐의 의문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심리를 전제로 한다면 그녀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이 시간을 계속해서 되감아 봤자 그것은 결국 수명의 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비록 수명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비례법칙으로 계산되는지를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다만 그것을 완전하게 없던 일로 돌이켜 버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으나 중요한 것은 내게 그럴 마음이 없다는 점이었다.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현주에게 솔직히 털어놓은 내 선택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후회할 수 없었다. 그걸 후회해버린다면 기껏 용기를 낸 나의 진솔함이 그저 한 순간의 객기로 전락해버리고 말테니.
그러니 이것은 어찌보면 중요함의 정도에 달린 문제라기보단, 내가 후회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질문에 더 직결되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세세한 부분을 그녀에게 구태여 늘어놓지는 않았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라면 내 이런 심리까지도 이미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물론 너에게 수명의 법칙 따위를 알려주고픈 마음은 없지만.... 그런 고민이 들만한 문제라면 그냥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것이 너에게도 좋을 거야."
"어째서 그렇죠?"
"아까도 말했잖아. 반드시 시간을 되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일이었다면 수명이야 어찌되었건 너는 이미 그렇게 했을 테니까.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전에 말이야. 네가 이렇게 찾아와서 시시콜콜한 것을 묻고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네 마음 속에서는 스스로 그럴 일이 아니라고 답을 내렸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런가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녀의 담배가 꽁초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은 쓰레기통에 툭 던져넣고는 갑자기 철학자라도 된 양 하늘을 올려다보며 뒷말을 이었다.
"네가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해. 그렇게 될 일은 반드시 그렇게 되게 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은 결국 그렇지 않은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좀 쉽게 설명해 줄 수 없나요?"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결국 그렇게 흘러간다는 얘기야. 너도 그 시계를 사용하면서 내심 느꼈을 텐데? 아무리 시간을 되돌리며 발악을 하고 생떼를 쓰더라도 되는게 있고 안 되는게 있어. 특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제는 더 그래. 시계를 사용함으로 해서 더 좋은 환경과 여건 등을 마련할 수는 있지만 결국 중요한건 따로 있다는 거지."
"아무리 타임 리와인더라 해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지는 못하죠.... 그걸 얘기하시는 건가요?"
"그래. 맞아."
그녀는 왠지 평소와는 다르게 다소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그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 또한 그녀와의 대화에서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명확함을 얻어가는 기분이라 그녀에게 더 불평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말야, 네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게 뭐든지 간에 나는 네가 그 일로 시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추천하겠어. 물론 네가 어떻게 그걸 사용하든 나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지만 애초에 네가 그렇게 고민하는 문제라면 그걸 쓰던 말던 결과는 비슷할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걸 해결하고 싶다면 온전히 네 힘으로 해결해보라구."
"........"
"일종의 진리지. 그 시계를 지니고 있다면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물론 말처럼 쉬운건 아니지만 말야."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예전에 나 또한 그런 사색을 해본 적이 있었다.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물건을 손에 넣게 되었을 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시계의 능력에 심취해가다 보면 그 점을 망각하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어쩌면 그 사이에서 중심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 시계를 사용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몰랐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는걸."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사라져버리는 그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그 마지막만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서 더욱 기분이 묘했다. 그 후 조금 더 현관에서 서성이다가 나 또한 내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있자니 여러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내 머리를 괴롭게 했다. 현주, 현아... 그리고 서연이. 연기처럼 서로 뒤얽히는 생각들을 그냥 머리 속에 그대로 방치하듯 담아놓은 채로,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
"안녕하세요, 선배~!"
멍하니 앉아 수업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해맑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옆자리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딴생각에 정신이 한가득 팔려 있었기에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수업에서 내 옆자리에 앉는 사람은 언제나 서연이였기에 난 당연히 그녀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옆자리의 얼굴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너 뭐야?"
"저 예진이잖아요, 헤헤. 그새 이름 까먹으셨어요?"
아니, 이름이 중요한게 아니잖아 이 여자야. 니가 왜 내 옆에 앉냐고. 내 표정만으로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챈 예진이가 까불거리며 내게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은 선배 옆에 앉아도 되죠? 저 성진 선배랑 친해지고 싶다고 계속 얘기했잖아요."
"아니, 안 돼."
"왜, 왜요?"
"거기 서연이 자리잖아. 친구라면서 그것도 몰라?"
꽤 심하게 면박을 주었음에도 그녀는 물러섬 없이 곧 헤실거리는 웃음을 되찾고는 더욱 알랑거리기 시작했다.
"서연이 오면 제가 잘 말할게요~~"
잘 말하긴 뭘 말해...? 아무튼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계집애였다. 억지로 쫓아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밀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서연이가 오고 나면 알아서 비킬 테니까. 하지만 그 때까지 예진이의 재잘거리는 수다를 들어줘야한다는게 문제였다.
"참, 선배~ 한수 선배 얘기 들으셨어요?"
"그 놈 소식을 내가 뭐하러 들어."
"한수 선배 며칠이나 앓아누웠대요. 오늘도 아파서 못 나온 것 같은데."
"뭐... 안 됐네. 근데 그건 왜?"
"갑자기 사람이 앓아눕는다는게 좀 이상하잖아요. 내 생각엔 서연이한테 차여서 그런게 아닐까 싶은데."
"서연이가 한수를 찼어?"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서연이가 한수를 직접적으로 찼다는걸 모르고 있었기에 그 소식에는 퍽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서연이가 반 암묵적으로 나와의 연인 사이를 받아들였으니 그 수순이야 당연한 거였지만 적어도 한수에게 직접 액션을 취했다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기에 예진이의 말을 듣는 순간 괜시리 그녀가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나와 서연이의 관계 진전에 그녀에 대한 내 마음까지도 더욱 향상시켰는지 전에 없던 애틋함이 갑자기 물씬 솟는 것이 느껴졌다. 현주와의 일도 있는 마당에 그녀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는걸 보면.... 나 또한 서연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걸 뚜렷하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수 선배가 되게 충격이 컸나봐요. 서연이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서연이가 신입생 때부터."
"그래 뭐 그거야 안됐다만...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는 이유가 뭐야?"
"헤~ 그건 선배가 더 잘 알지 않아요?"
"뭐?"
요망한 계집이었다. 자기 입으로 핵심을 말하는걸 피하면서 되려 나에게 대답을 슬쩍 미루고 있으니....
"그래. 그러고보면 너도 한수가 서연이랑 잘되길 계속 돕고 있었지. 그래서 일이 잘 안되서 유감이다 이거야?"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딱히 저는 한수 선배가 서연이랑 잘 되길 바란건 아니었는데."
"시치미 떼지마. 너랑 한수가 일 꾸미는거 놀이공원에서 다 들었으니까."
나는 예진이 고 년이 호들갑을 떨며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발뺌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부정하지 않고 그저 헤실헤실 웃어넘길 뿐이었다.
"물론 한수 선배에게 약간 도움을 준건 사실이죠. 하지만 꼭 한수 선배가 서연이랑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건 아니거든요. 히히... 나한테 진짜 중요한건 따로 있으니까."
"진짜 중요한거? 그게 뭔데?"
"서연이 맘을 알아보는 거랄까요?"
구태여 다리를 꼴 필요가 없었을 것 같았는데도 그녀는 짧은 치마 아래로 쭉 뻗은 다리를 책상 밑으로 꼬았다. 꼭 내게 허벅지 속살을 일부러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여자에 환장한 나이긴 해도 지금은 예진이 따위가 내 머릿 속에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무덤덤히 대꾸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이야?"
"선배도 아다시피 서연이랑 저는 각별한 사이에요. 입학하기 전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니까요. 학교 생활 하면서 서연이랑은 할 얘기 못할 얘기 다 주고 받으면서 허물 없이 지냈어요."
"근데?"
"근데 서연이 요것이 요즘들어 저한테 숨기는게 있는 눈치란 말예요. 분명히 뭔가 이상한게 있는데, 나한테는 말을 하려고 들지 않아요. 서연이가 저한테 그런 태도를 보이는건 처음 있는 일이거든요. 친구로서 당연히 관심이 가지 않겠어요?"
어디선가 줏어들은 얘기로는 여자애들끼리의 우정이란 생각보다 무척 미묘한 것이라, 절친한 친구를 빼앗기면 무척 분노를 느낌과 동시에 그 친구를 빼앗아간 대상으로부터 엄청난 질투심마저 느낀다는 말이 있었던 것 같다.
화장실마저 같이 가곤 한다는 여자애들 특유의 그 미묘한 우정에 대해 내가 썩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서연이를 보는 예진이의 기분은 그런 미묘한 우정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말 못할 비밀 하나쯤은 있는 거지. 네가 오지랖이 너무 심한거 같은데."
"호호. 맞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말이에요... 다른 것도 아니고 원래 여자애들끼리는 연애문제라면 관심을 끌래야 끌 수가 없는 법이거든요."
"그게 꼭 연애문제라고 어떻게 확신해?"
"여자의 직감을 너무 무시하시네요. 아무리 몰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느껴요. 서연이랑 알고 지낸게 몇 년인데."
"뭐 그건 그렇다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서연이 맘을 떠보려고 한수 선배를 일부러 서연이한테 접근시켜 본 건데 냅다 차버리더라구요. 지환 오빠랑 헤어지고나서 서연이도 조금 적적해 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거죠. 솔직히 한수 선배 정도면 어느 모로 보나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잖아요?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참으로 가증스럽게 짝이 없는 계집애였다. 그러니까 결국 자기가 알지 못하는 친구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한 남자의 마음을 완전히 이용해먹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비록 한수 녀석을 좋게 생각할 수 없지만 내막을 알고보니 놈에게 일말의 동정심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행위의 동기도 물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제와서 내게 그걸 구태여 낱낱이 밝히는 그녀의 저의도 여전히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서연이가 한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서연이 본인만 아는 거지. 네가 왈가왈부할게 아니야."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적어도 내 눈치에 따르면 서연이가 한수 선배를 거절한 이유가 단순히 한수 선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거든요."
그녀는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며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찌나 노골적인 몸짓이었는지 강의실의 몇몇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연이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걸까.
"그리고 왠지 성진 선배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
혹시 지금 이 계집애가 나를 추궁하고 있는 건가?
"그거 아세요? 전 사실 한수 선배가 서연이에게 차였을 때 별로 놀라진 않았어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죠. 왜냐하면 서연이 고 기집애, 요새 다른 남자가 마음 속에 꽉 들어차 있는 것 같길래.... 호호호."
"핵심을 말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야?"
"좋아요. 핵심은 이거에요. 성진 선배는 그게 누구일 것 같아요? 서연이 맘 속에 있는 남자 말이에요."
그 질문을 받은 순간 머리가 아주 기묘하게 돌아갔다. 이제 서연이와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여기서 그녀와의 관계를 시인해버려도 그만인 문제였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서연이와의 사이를 은폐하는 것이 은연 중에 내게 습관처럼 자리잡고 있었는지 나는 곧장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성진 선배는 아마 알고 있을 거에요. 서연이를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챌 수 있을 걸요. 두 사람.... 요새 정말 수상한거 알죠? 호호."
"........"
"정말 두 사람 아무 사이도 아닌게 맞아요? 난 요새 그게 너무너무 궁금하다니까요."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서연이랑 내가 무슨 사이든 말든."
"당연히 어떤 남자를 만나건 간에 서연이 마음이죠. 난 다만 궁금할 뿐이에요. 작년에만 해도 그렇게나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떤 과정으로 그런 사이가 된 걸까? 너무 궁금하잖아요. 헤헤... 심지어 서연이는 그 시기에 선배를 징그럽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에요. 내가 서연이의 그런 속마음을 바로 옆에서 들어줬기 때문에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죠. 험담까지 늘어놓을 정도로 싫어했던 남자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과연 뭘까나?"
질문을 우회적으로 질질 끌기는 했지만 결국 이 년이 하고 있는 말은 이거였다. 네까짓 찌질이가 도대체 어떻게 서연이의 마음을 얻은 것이냐.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차올랐다. 헤실거리며 웃고 있지만 결국 이 년은 지금 나를 대놓고 개무시하고 있는 거였다. 자신의 친한 친구가 겨우 나 따위 찌질한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게 차마 못 볼 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 그게 궁금해?"
화를 낼까 싶었지만 그건 찌질한 짓이었다. 가뜩이나 나를 찌질하게 보고 있는 년에게 찌질하게 대처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특별히 가르쳐줄게. 놀라지 마."
나는 그녀에게 귓속말이라도 하듯이 몸을 숙였다. 서로의 얼굴이 더욱 밀착되면서 모양새가 꽤 야릇해졌다.
"사실은 말이야."
예진이 또한 당황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며 내게 몸을 밀착시켜왔다. 솔직히 이 년에게 곧이 곧대로 말해도 될거란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타임 리와인더가 있으니 별 걱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엔 이 년의 가증스런 태도를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순간 결정적인 인물이 마침내 등장하여 나는 본의 아니게 시계를 사용할까 말까의 고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사람... 뭐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서연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얼굴을 밀착시킨 예진이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불륜의 현장이라도 걸린 것처럼 억울한 기분에 나는 재깍 예진이년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서연이는 여전히 찡그린 표정이었다.
"어머~~ 왔어?"
참으로 가증스럽게도 예진이는 친구의 얼굴을 보자마자 재깍 미소를 지으며 부산스럽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서연이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너 왜 여기 앉아있어? 네 자리 따로 있잖아."
"강의실에 자리가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닌데 뭐. 내가 오늘 성진 선배 옆에 앉으면 안 돼?"
"뭐?"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듯한 서연이의 그 반응을 예진이는 되려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연이는 헤실거리는 친구의 면전에다 대고, 나조차도 놀랄 만큼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
"안 돼."
"뭐? 왜?"
"거긴 내 자리니까."
서연이가 어찌나 단호하게 대답을 했던지 도저히 예진이가 더 딴지를 걸거라는 생각이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자들이란 정말이지 늘 예상을 뛰어넘는 존재들이었다.
"뭐야~~ 그런게 어딨어. 네가 자리 주인도 아니면서! 나도 성진 선배랑 친해질거야."
이 년이 정말 미쳤나?
"내가 주인 맞아."
"뭐?"
"그 자리 내꺼 맞다구."
"음, 어째서?"
그러자 서연이가.... 내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퉁명스럽게 내리치면서, 나는 물론이고 예진이조차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
"성진 선배, 내 남자거든."
그 순간,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강의실 내의 모든 학생들의 눈과 귀가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으, 응...? 뭐라구?"
예진이조차도 경악하여 헤실거리던 웃음이 싹 날아가고 말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서연이는 가차 없는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내 남자친구라구. 그러니까 여기 이 자리는 당연히 내꺼여야 하는거 아니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어... 음...."
예진이는 대꾸할 말을 찾는 눈치였지만 당사자인 내가 서연이의 말에 벙쪄 있는 와중에 예진이라고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선배한테 이러지 마. 앞으로는 너한테 감추거나 비밀로 하지 않을 테니까. 알겠어?"
싸하게 강의실에 내려앉는 정적.... 이 순간 이후 학생들 사이에 무슨 소문이 퍼질지는 안 봐도 불을 보듯 뻔했지만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서연이가 이렇게 무서운 여자였구나, 하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뿐이었다.
*
"무슨 생각해?"
나의 고백 이후로 서연이는 다소 변한 것 같았다. 존대가 반말로 바뀐 것도 있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큰 부분이 달라져버렸다. 물론 그녀는 언제나 내게 있어 첫번째가 되고 싶어했던 여자였다. 육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그녀는 언제나 1등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바람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의 고백이 그녀의 어떤 자존감을 일정 부분 채워주었던 것만은 분명했던 모양이었다. 그 영향이기 때문인지 그녀는 나조차도 놀랄 만큼 거리낌이 없었다. 애당초 나는 우리의 관계를 주위 사람들에게 밝히는 문제에 대해서 나보다는 서연이가 더욱 조심스러울 것이라 내내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듯 했다.
"너 정말 괜찮아?"
"뭐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도 말야."
"선배가 떳떳하게 사귀자고 했잖아. 뭐 어때서 그래? 나랑 사귀는게 창피해?"
"그럴 리가... 네가 행여나 불편할까봐 그러는 거야."
그런 나의 태도가 서연이는 조금 못마땅한 것 같았다. 옆에서 함께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확실하게 말해줘. 나 이제 정말 여자친구 맞는 거지?"
"그럼..."
"남들 앞에 드러내기 부끄러운 여자친구 아니지?"
"물론이지."
"그럼 그냥 떳떳하게 말해. 예진이한테도 확실하게 말했으면 되는 거였잖아. 왜 거기서 쩔쩔매고 그래? 바보 같이."
내 입으로 예진이에게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것이 서연이 눈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내 딴에는 그녀의 입장을 신경쓴다고 했던 것이 오히려 그렇게 보였다니 억울했지만 서연이가 나와의 관계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단 뜻이기에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서연아."
"왜?"
"나 현주한테 말했어. 너랑 사귄다고...."
두어걸음 앞서 걷던 서연이가 다시 뚝 멈추어섰다. 그녀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화제였다.
"뭐라고... 하던데?"
"그냥..."
현주에게도 그랬지만 서연이 앞에서도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서연이는 왠지 내 표정만으로도 대충 짐작을 한 것 같았다.
"좋은 결과는 아니었어."
어쩌면 내게 있어서는 좋은 결과가 아니었지만 서연이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곧 좋은 결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연이는 똑똑한 여자이기 때문인지 그걸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만 방금 전과는 다르게 내 눈치를 조금 살필 뿐이었다.
"음... 선배는 괜찮아?"
"......"
괜찮냐고....? 사실 잘 모르겠다.
"글쎄... 그래도 내가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니까. 후회하거나 하면 안 되겠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부분을 그녀가 내게서 읽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연이는 말이 없었다. 다만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서 더 길게 얘기하지 않는 그녀가 고마웠다. 캠퍼스 입구에 내려올 때까지 별다른 말이 없다가 그녀가 불쑥 말했다.
"그거 알아? 오늘 유성이 학교에 안 왔어."
"어? 으응."
사실 아까부터 마음 한 구석으로 계속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었다. 오늘 유정이가 수업 시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소 자유로운 구석이 있는 그녀였긴 했지만 수업을 빼먹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발표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이기도 하고.
"혹시 어디 아픈가?"
"글... 쎄..."
서연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정말로 유정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혼자 사는 애인데 아프기라도 하면 얼마나 서러울까. 문득 지난번에 그녀가 내게 죽을 사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따가 그녀에게 전화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서연이가 손바닥으로 내 등짝을 세차게 내려쳤다.
"아야! 왜 그래?"
"방금 유성이 생각했지?"
"뭐?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걱정하는거 다 보여."
"그, 그럴거면 애초에 유정이 얘길 왜 꺼냈어?"
"신경 쓰는지 안 쓰는지 한번 시험해본거야. 한마디로 선배가 제대로 낚인거지."
"참 나...."
"이제 내가 여자친구니까 나보다 유성이 챙기는 모습 한번이라도 보이면 죽을 줄 알아. 알겠어?"
전보다 한층 더 뚜렷해진 서연이의 질투 앞에 그저 허허 웃고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게도 유정이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감정 표현이 더욱 뚜렷해진 서연이의 모습이 내게도 귀엽게 느껴져 나는 무언의 표시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살짝 둘렀다.
"자기야."
"응?"
어느 순간 서연이가 날 부르는 호칭이 선배에서 자기로 바뀌었다. 모텔에서 있었던 뜨거웠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호칭이었다.
"그냥 이렇게 한번 불러보고 싶었어. 굳이 숨기지 않기로 했으니까 밖에서도 이렇게 불러도 괜찮지?"
"응. 나도 그게 좋아."
서연이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거닐었다.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연이가 곁에 있음으로 해서 금새 행복해지는 내가 너무 속물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구태여 행복하다는걸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서연이 또한 내게 소중한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현주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대로 그녀를 놓아주는게 더 좋을 지도 몰라.... 그 때 처음으로 현주를 내 마음 속에서 지우는 상상을 했다. 가슴 아프겠지만 오히려 그게 모두를 위하는 길이지 않을까?
"오늘 자기 집에서 있다 가도 돼?"
함께 식사를 하고 대학로를 유유히 거닐고 있는데 서연이가 불쑥 과감한 제안을 던졌다. 기묘하게도 그 질문이 문득 어제 현주가 나를 그녀의 집으로 초대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들렸다. 서연이와 현주는 다르다.
현주가 요리를 해주겠다며 나를 집으로 초대한 것은 말그대로 요리를 해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서연이가 내 방에서 있다 가겠다는 말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그 뒤의 은밀한 스킨십까지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도 서연이도 그것을 한 치의 의심 없이 확신할 수 있는.... 오히려 이게 정말 연인다운 것일지도 모르지.
"응... 그러자."
비록 서연이가 느꼈을 지는 모르지만, 그 질문에 내가 그러자고 대답했다는건 그 순간 내가 현주의 존재를 애써 마음 속에서 떨쳐버렸음을 의미했다. 정말 이대로 그녀를 마음 속에서 지우게 될까? 현주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역시....
*
서연이와 함께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예전엔 서연이를 내 방에 들이는 것조차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현주가 알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학교 갔다 오는 거야?"
옆집 여자가 요즘들어 어찌나 자주 보이는지 이제는 그녀의 존재가 그리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예전엔 모습조차 보기 힘들던 그녀였는데 이제는 거의 매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보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는데, 바로 옆에 서연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 요새는 한가한가봐요."
괜히 어색하게 대하는 것이 오히려 서연이에게 더 수상쩍어 보이겠다는 생각에 나름대로는 자연스럽게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옆집 여자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내게는 어려운 상대인지 조금 말이 떨렸다.
"나? 나는 항상 한가해."
옆집 여자가 내 얼굴엔 관심도 두지 않고 서연이에게 눈길을 향했다. 옆집 여자에 대해 알 턱이 없는 서연이는 그 시선이 약간은 불편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경계심 때문이었을까? 무슨 의도인지 서연이가 내 팔을 조금 더 힘주어 안았다.
서연이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빤히 들여다보던 옆집 여자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반가운걸."
"네?"
너무 뜬금없었는데다 목소리 또한 너무 낮았기에 나와 서연이는 똑같이 반문하고 말았다. 하지만 옆집 여자는 역시나 그녀답게 할 말만 남기고는 제멋대로 또 뒤돌아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서연이가 마치 추궁하듯이 질문을 시작한다.
"누구야? 저 여자?"
"아... 그냥 옆집 사는 여자야."
"뭐, 뭐라구? 옆집?"
어쩐지 서연이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옆집에 저렇게 젊은 여자가 산다는 말은 안했잖아."
"그냥 옆집일 뿐이야. 왜 그래?"
"둘이 얘기 하는 꼴을 보니 아예 남남도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봐. 저 여자랑은 또 무슨 관계야?"
"무, 무슨 소리야? 절대 그런거 아니야."
나는 옆집 여자가 남긴 아리송한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서연이는 그저 젊은 이웃여자의 존재 자체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내 방의 문 앞까지 가면서도 그녀는 계속 불평불만을 재잘거리며 늘어놓았다.
"나 정말 짜증나.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왜 이렇게 엮여있는 여자들이 많아?"
"남자친구 외모를 그렇게 비하해도 되는 거야?"
"비하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야."
티격태격거리며 303호의 문 앞에 다다라 대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이 문을 열고 나서 생길 일에 대해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문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나라고 해도 처음 겪는 일에 대해서는 무방비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끼익 하고 열리는 문. 그리고 멈춰서는 나의 발걸음. 나는 들어가려던 것도 잊고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방 안에는 이미 나보다 먼저 누군가가 와 있었던 것이다.
"현... 주야."
사실 누구일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내 허락 없이 내 집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여태껏 한 명 뿐이었으니.
"......."
바닥에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앉아있던 현주가 고개를 들어 나를, 그리고 서연이를 보았다. 나와 현주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서연이와 현주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는 정말로 시간을 멈춰버릴까 싶어 나도 모르게 상의 안주머니로 손이 향했을 정도였다.
"우리 얘기 좀 해."
아마 그 뒤를 이어 현주의 입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 자리에서 시간을 되감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모처럼 여유 있는 저녁입니다 ^^
역시 야근이 없어야 삶의 질이 향상되나 봅니다
어느덧 타임 리와인더도 30장까지 왔네요
새삼스럽게 흐뭇해지는 저녁입니다~~
독자님들도 편안한 휴식 되시길 바라며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30장
"기다려요."
아파트 단지를 떠나는 내 발걸음을 현아가 멈추어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현아가 다급한 걸음으로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다가올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주었다.
"현주는요?"
"울고 있어요."
숨을 고르면서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녀의 표정. 내가 했던 말에 후회를 하는건 아니었지만 양심상 차마 그녀를 바라볼 면목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당신도 들었잖아요. 게다가 현아 씨는... 애초에 알고 있었지 않나요?"
"그걸 왜 현주에게 말했냐는 거에요!"
그녀는 아마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생각처럼 현주에게 이런 추잡한 부분을 내 입으로 고백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나는 이 선택이 현주에게 있어 커다란 상처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그것은 분명 나의 의지로 이루어진 선택이었고, 따라서 돌이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현주도 소중하지만 다른 한 사람도 나에겐 소중하니까요. 어느 한 사람의 마음도 기만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다에요... 나도 내가 지저분하다는걸 알고는 있지만 적어도 이게 최소한의 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그 여자를 선택하겠다 이거죠? 내 동생을 버리고?"
"그저 어느 한 쪽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에요."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찬 따귀가 날아왔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지만 화나거나 하진 않았다.
"웃기지 말아요. 당신은 그저 쓰레기일 뿐이야."
"부정하고 싶진 않네요. 그건 현아 씨도 알고 있었던 거니까."
"지금이라도 현주에게 가서 말해요. 거짓말이었다고... 이렇게 사귀는게 힘들어서 일부러 그런 극단적인 말을 한거라고 둘러대란 말이에요. 미련하게 고집부려서 내 동생에게 상처 남기지 말아요."
"그건 현주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거에요."
"잘난척 지껄이지 마. 당신이 지금 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했던 그녀가 이제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혐오로 가득한 시선을 차마 피하지도 못하고 나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당신과 했던 약속... 못 지킬 것 같아요."
그녀에게는 그 말 한마디로 충분했을 것이다. 구태여 여러말 하지 않아도 나와 현아 사이를 규정지어주던 단 하나의 고리가 그 순간 무너졌음을 그녀도 느꼈을 테니.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내 뺨을 후려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 동안 얼굴에 느껴지는 감각이 없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이 보였다.
"나는.... 나는 당신이 정말로.... 원망스러워요."
"......."
뒤돌아서 걸어가버리는 현아. 그녀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서럽게 뛰어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허망함이 느껴지는 뒷모습을 내게 보이며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밤하늘이 그렇게 답답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걸 새삼스럽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니코틴을 끊고 산지 한참 되었는데도 오늘은 왠지 담배 한 개비 생각이 났다. 담배 연기를 떠올리니 왠지 모르게 한 사람이 덩달아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메마른 표정으로 늘 담배를 피우곤 했었던 그녀....
차를 가져오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었다. 택시에 올라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
"안에 있어요?"
무작정 302호의 문을 두드렸다. 벨도 한번 눌러보았다. 하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바로 옆집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온전히 내 의지로 이곳을 찾아온게 처음이었다. 특별한 용건이 없다면 이웃끼리도 서로 왕래가 없는 것이 요즘 세상에선 일반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여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 같은게 있었다.
"......."
대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하지만 왠지 그녀가 안에 있을거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처음 그녀의 집에 들어서 타임 리와인더를 줏었던 그 날처럼, 나는 무례하게도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쥐고 살짝 돌려보았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뭐야?"
"왜 없는척 했어요?"
여전히 그녀는 방 안을 유영하듯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전혀 목적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 유령 같은 움직임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중요한 시간을 방해 받은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없는 척이라니. 귀찮았을 뿐이야."
"미안해요. 그래도 잠시 실례 좀 해야겠어요."
나는 그녀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녀에게만 허락된 그 이상하고 신비스런 공간 안으로 성큼 발을 옮겼다. 평소와는 다르게 당돌하기 짝이 없는 내 태도에 그녀도 약간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뭐야?"
"누가 뭐래도 당신이 내 손에 시계를 쥐어줬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상담 정도는 부탁할 권리가 있는거 아닌가요?"
"그래서?"
"담배 한 까치만 줘요."
늘 변함없이 세상 모든 일에 초연해보이는 표정과 말투로 일관하던 그녀가 어이가 없어하는 표정을 짓는걸 보니 약간은 졸렬한 보복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분위기로 봐서는 그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였지만 실내에서는 결코 흡연을 하지 않는 주의인지 그녀는 나를 데리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가 언제나 담배를 피고 있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고, 고마워요."
순순히 담배를 건넨 것도 그랬지만 직접 불까지 붙여주는 그녀의 호의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능숙한 손짓으로 라이터를 긁었다. 문득 그녀가 손에 쥔 지포 라이터에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굉장히 낡아보이네요."
"이거?"
그러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라이터를 공중으로 한번 휙 던진 뒤 받아채고는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아무 생각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내 말이 무척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나름대로 역사가 있는 물건이지."
그녀가 가진 물건이라면 왠지 이제는 다 신비스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 오래된 라이터의 외관 역시 타임 리와인더와 마찬가지로 낡디 낡은 투박한 은백색 빛깔을 띄고 있었기에 내게는 특히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 했다.
"어쨌든...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이렇게 사람 불러내놓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늘어놓는다면 화날지도 몰라."
"그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다. 하지만 이런 막막한 기분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역설적이게도 그녀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내게 있어 막막함의 결정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니까. 그 어떤 막막한 이야기라도 그녀에게 늘어놓고나면 왠지 일상의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후우..."
얘기를 꺼내기에 앞서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한 뭉텅이의 담배 연기를 훅 하고 뱉었다. 군대 있을 때 이후로 거의 몇 년만에 처음 입에 대는 니코틴이었다. 너무도 오랜만의 흡연에 순간 쿨럭하고 목이 들끓을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기분이 좋다기보단 오랜만의 감각이라 그런지 낯설기만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옆집 여자가 갑자기 내 입에서 담배를 홱 낚아채버렸다.
"왜, 왜 그래요? 그 아까운걸."
그녀가 낚아챈 담배를 쓰레기통에 휙 던져넣어버린 것이다. 아직 두 모금도 제대로 빨지 못한 장초였기에 그것은 누가 봐도 낭비 중의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며 내게 대꾸했다.
"역시 못 주겠어."
"왜, 왜요? 아까워요?"
"담배는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거든. 내 가족까지 병들게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고."
이건 또 무슨 담뱃값 경고문구 같은 소리람.... 설마 지금 내 건강을 걱정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고 있는건 아니겠지?
"그럼 그 쪽은 왜 피는 건데요?"
"나?"
뭐가 그리도 웃긴지 그녀는 내 말을 듣고선 키득거리며 웃음을 연신 터뜨렸다.
"글쎄. 내가 왜 담배를 피기 시작했을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마 언젠간 알게 될 거야."
여전히 아리송한 그녀.... 그녀가 정말로 시간을 되돌아 온 나의 주변 인물이 맞다면 사실 내가 그녀에게 물어야 할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요사이 몇 번의 대화를 통해 내가 그녀에게 그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너무도 무의미한 일임을 이제는 나도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미스테리였고, 그것은 혼자 고민한다고 해서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녀를 대함에 있어 다만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얻어가는 것으로 만족해야함을 스스로 어렴풋이 터득하고 있었다. 따지고보면 지금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궁금한게 있어요."
그녀는 대꾸도 없이 연기를 훅 하고 뱉었지만 나는 그걸 긍정의 표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는 대가... 수명과 시간의 비례관계를 가르쳐주세요."
"갑자기 그건 왜?"
"아, 알고 싶어요."
내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왠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였다. 사실 이 질문을 던지면서도 나는 그녀가 내 질문에 온전히 대답을 해줄거란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내게 말해줄 수 있었다면 그녀가 이미 이전의 대화에서 그 질문에 대답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 그녀는 내 질문에 대해 핵심적인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여느 때처럼 모호한 말로 대답을 비껴가면서도 그녀는 교묘하게 딴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만 그 말투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한층 부드러웠기에 나는 그녀에게 뭔가 좋은 일이 있나보다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목숨 아까운 기분이 이제야 드나보지?"
"그런거 아니에요."
"무슨 짓을 했는진 몰라도 꽤 고민 되는 일이 생긴 모양이야. 아무래도 선택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은데."
"헤매고 있다구요? 제가?"
"그래."
다시 한차례 연기를 뿜고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인간은 지극히 단순한 동물이거든. 너만 해도 그렇잖아. 네가 그동안 시계를 어떻게 사용해왔는지 그 하나하나를 내가 전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네가 시계를 반드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결심이 확고한 일이었다면 그 때마다 수명이라는 대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겠지. 눈으로 잴 수도 없는 목숨이 조금 깎여나가는 것보다는 당장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더 중요했을테니까 말이야."
"......."
"하지만 네가 지금에 와서 이렇게 수명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보면 보나마나 둘 중 하나일걸. 이제와서 목숨이 비로소 아깝다고 느껴지기 시작했거나, 아니면 지금 네가 고민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긴 중요하되 과연 수명을 깎아가면서까지 시간을 돌이킬 만큼 중요한 일인지 네 스스로 망설이고 있는 거야. 내가 보기에 너는 벌써 목숨 끝자락을 걱정할 만큼 늙지는 않았으니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은데...."
폐부를 정확하게 찌르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저 멍하니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이토록 명확하게 뇌리에 인식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녀의 말이 백 퍼센트 정확하게 옳았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현주와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되돌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일을 되돌린다고 한들 그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느냐의 의문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심리를 전제로 한다면 그녀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이 시간을 계속해서 되감아 봤자 그것은 결국 수명의 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비록 수명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비례법칙으로 계산되는지를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다만 그것을 완전하게 없던 일로 돌이켜 버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으나 중요한 것은 내게 그럴 마음이 없다는 점이었다.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현주에게 솔직히 털어놓은 내 선택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후회할 수 없었다. 그걸 후회해버린다면 기껏 용기를 낸 나의 진솔함이 그저 한 순간의 객기로 전락해버리고 말테니.
그러니 이것은 어찌보면 중요함의 정도에 달린 문제라기보단, 내가 후회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질문에 더 직결되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세세한 부분을 그녀에게 구태여 늘어놓지는 않았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라면 내 이런 심리까지도 이미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물론 너에게 수명의 법칙 따위를 알려주고픈 마음은 없지만.... 그런 고민이 들만한 문제라면 그냥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것이 너에게도 좋을 거야."
"어째서 그렇죠?"
"아까도 말했잖아. 반드시 시간을 되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일이었다면 수명이야 어찌되었건 너는 이미 그렇게 했을 테니까.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전에 말이야. 네가 이렇게 찾아와서 시시콜콜한 것을 묻고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네 마음 속에서는 스스로 그럴 일이 아니라고 답을 내렸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런가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녀의 담배가 꽁초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은 쓰레기통에 툭 던져넣고는 갑자기 철학자라도 된 양 하늘을 올려다보며 뒷말을 이었다.
"네가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해. 그렇게 될 일은 반드시 그렇게 되게 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은 결국 그렇지 않은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좀 쉽게 설명해 줄 수 없나요?"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결국 그렇게 흘러간다는 얘기야. 너도 그 시계를 사용하면서 내심 느꼈을 텐데? 아무리 시간을 되돌리며 발악을 하고 생떼를 쓰더라도 되는게 있고 안 되는게 있어. 특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제는 더 그래. 시계를 사용함으로 해서 더 좋은 환경과 여건 등을 마련할 수는 있지만 결국 중요한건 따로 있다는 거지."
"아무리 타임 리와인더라 해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지는 못하죠.... 그걸 얘기하시는 건가요?"
"그래. 맞아."
그녀는 왠지 평소와는 다르게 다소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그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 또한 그녀와의 대화에서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명확함을 얻어가는 기분이라 그녀에게 더 불평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말야, 네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게 뭐든지 간에 나는 네가 그 일로 시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추천하겠어. 물론 네가 어떻게 그걸 사용하든 나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지만 애초에 네가 그렇게 고민하는 문제라면 그걸 쓰던 말던 결과는 비슷할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걸 해결하고 싶다면 온전히 네 힘으로 해결해보라구."
"........"
"일종의 진리지. 그 시계를 지니고 있다면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물론 말처럼 쉬운건 아니지만 말야."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예전에 나 또한 그런 사색을 해본 적이 있었다.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물건을 손에 넣게 되었을 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시계의 능력에 심취해가다 보면 그 점을 망각하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어쩌면 그 사이에서 중심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 시계를 사용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몰랐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는걸."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사라져버리는 그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그 마지막만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서 더욱 기분이 묘했다. 그 후 조금 더 현관에서 서성이다가 나 또한 내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있자니 여러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내 머리를 괴롭게 했다. 현주, 현아... 그리고 서연이. 연기처럼 서로 뒤얽히는 생각들을 그냥 머리 속에 그대로 방치하듯 담아놓은 채로,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
"안녕하세요, 선배~!"
멍하니 앉아 수업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해맑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옆자리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딴생각에 정신이 한가득 팔려 있었기에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수업에서 내 옆자리에 앉는 사람은 언제나 서연이였기에 난 당연히 그녀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옆자리의 얼굴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너 뭐야?"
"저 예진이잖아요, 헤헤. 그새 이름 까먹으셨어요?"
아니, 이름이 중요한게 아니잖아 이 여자야. 니가 왜 내 옆에 앉냐고. 내 표정만으로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챈 예진이가 까불거리며 내게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은 선배 옆에 앉아도 되죠? 저 성진 선배랑 친해지고 싶다고 계속 얘기했잖아요."
"아니, 안 돼."
"왜, 왜요?"
"거기 서연이 자리잖아. 친구라면서 그것도 몰라?"
꽤 심하게 면박을 주었음에도 그녀는 물러섬 없이 곧 헤실거리는 웃음을 되찾고는 더욱 알랑거리기 시작했다.
"서연이 오면 제가 잘 말할게요~~"
잘 말하긴 뭘 말해...? 아무튼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계집애였다. 억지로 쫓아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밀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서연이가 오고 나면 알아서 비킬 테니까. 하지만 그 때까지 예진이의 재잘거리는 수다를 들어줘야한다는게 문제였다.
"참, 선배~ 한수 선배 얘기 들으셨어요?"
"그 놈 소식을 내가 뭐하러 들어."
"한수 선배 며칠이나 앓아누웠대요. 오늘도 아파서 못 나온 것 같은데."
"뭐... 안 됐네. 근데 그건 왜?"
"갑자기 사람이 앓아눕는다는게 좀 이상하잖아요. 내 생각엔 서연이한테 차여서 그런게 아닐까 싶은데."
"서연이가 한수를 찼어?"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서연이가 한수를 직접적으로 찼다는걸 모르고 있었기에 그 소식에는 퍽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서연이가 반 암묵적으로 나와의 연인 사이를 받아들였으니 그 수순이야 당연한 거였지만 적어도 한수에게 직접 액션을 취했다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기에 예진이의 말을 듣는 순간 괜시리 그녀가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나와 서연이의 관계 진전에 그녀에 대한 내 마음까지도 더욱 향상시켰는지 전에 없던 애틋함이 갑자기 물씬 솟는 것이 느껴졌다. 현주와의 일도 있는 마당에 그녀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는걸 보면.... 나 또한 서연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걸 뚜렷하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수 선배가 되게 충격이 컸나봐요. 서연이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서연이가 신입생 때부터."
"그래 뭐 그거야 안됐다만...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는 이유가 뭐야?"
"헤~ 그건 선배가 더 잘 알지 않아요?"
"뭐?"
요망한 계집이었다. 자기 입으로 핵심을 말하는걸 피하면서 되려 나에게 대답을 슬쩍 미루고 있으니....
"그래. 그러고보면 너도 한수가 서연이랑 잘되길 계속 돕고 있었지. 그래서 일이 잘 안되서 유감이다 이거야?"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딱히 저는 한수 선배가 서연이랑 잘 되길 바란건 아니었는데."
"시치미 떼지마. 너랑 한수가 일 꾸미는거 놀이공원에서 다 들었으니까."
나는 예진이 고 년이 호들갑을 떨며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발뺌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부정하지 않고 그저 헤실헤실 웃어넘길 뿐이었다.
"물론 한수 선배에게 약간 도움을 준건 사실이죠. 하지만 꼭 한수 선배가 서연이랑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건 아니거든요. 히히... 나한테 진짜 중요한건 따로 있으니까."
"진짜 중요한거? 그게 뭔데?"
"서연이 맘을 알아보는 거랄까요?"
구태여 다리를 꼴 필요가 없었을 것 같았는데도 그녀는 짧은 치마 아래로 쭉 뻗은 다리를 책상 밑으로 꼬았다. 꼭 내게 허벅지 속살을 일부러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여자에 환장한 나이긴 해도 지금은 예진이 따위가 내 머릿 속에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무덤덤히 대꾸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이야?"
"선배도 아다시피 서연이랑 저는 각별한 사이에요. 입학하기 전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니까요. 학교 생활 하면서 서연이랑은 할 얘기 못할 얘기 다 주고 받으면서 허물 없이 지냈어요."
"근데?"
"근데 서연이 요것이 요즘들어 저한테 숨기는게 있는 눈치란 말예요. 분명히 뭔가 이상한게 있는데, 나한테는 말을 하려고 들지 않아요. 서연이가 저한테 그런 태도를 보이는건 처음 있는 일이거든요. 친구로서 당연히 관심이 가지 않겠어요?"
어디선가 줏어들은 얘기로는 여자애들끼리의 우정이란 생각보다 무척 미묘한 것이라, 절친한 친구를 빼앗기면 무척 분노를 느낌과 동시에 그 친구를 빼앗아간 대상으로부터 엄청난 질투심마저 느낀다는 말이 있었던 것 같다.
화장실마저 같이 가곤 한다는 여자애들 특유의 그 미묘한 우정에 대해 내가 썩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서연이를 보는 예진이의 기분은 그런 미묘한 우정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말 못할 비밀 하나쯤은 있는 거지. 네가 오지랖이 너무 심한거 같은데."
"호호. 맞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말이에요... 다른 것도 아니고 원래 여자애들끼리는 연애문제라면 관심을 끌래야 끌 수가 없는 법이거든요."
"그게 꼭 연애문제라고 어떻게 확신해?"
"여자의 직감을 너무 무시하시네요. 아무리 몰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느껴요. 서연이랑 알고 지낸게 몇 년인데."
"뭐 그건 그렇다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서연이 맘을 떠보려고 한수 선배를 일부러 서연이한테 접근시켜 본 건데 냅다 차버리더라구요. 지환 오빠랑 헤어지고나서 서연이도 조금 적적해 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거죠. 솔직히 한수 선배 정도면 어느 모로 보나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잖아요?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참으로 가증스럽게 짝이 없는 계집애였다. 그러니까 결국 자기가 알지 못하는 친구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한 남자의 마음을 완전히 이용해먹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비록 한수 녀석을 좋게 생각할 수 없지만 내막을 알고보니 놈에게 일말의 동정심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행위의 동기도 물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제와서 내게 그걸 구태여 낱낱이 밝히는 그녀의 저의도 여전히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서연이가 한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서연이 본인만 아는 거지. 네가 왈가왈부할게 아니야."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적어도 내 눈치에 따르면 서연이가 한수 선배를 거절한 이유가 단순히 한수 선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거든요."
그녀는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며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찌나 노골적인 몸짓이었는지 강의실의 몇몇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연이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걸까.
"그리고 왠지 성진 선배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
혹시 지금 이 계집애가 나를 추궁하고 있는 건가?
"그거 아세요? 전 사실 한수 선배가 서연이에게 차였을 때 별로 놀라진 않았어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죠. 왜냐하면 서연이 고 기집애, 요새 다른 남자가 마음 속에 꽉 들어차 있는 것 같길래.... 호호호."
"핵심을 말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야?"
"좋아요. 핵심은 이거에요. 성진 선배는 그게 누구일 것 같아요? 서연이 맘 속에 있는 남자 말이에요."
그 질문을 받은 순간 머리가 아주 기묘하게 돌아갔다. 이제 서연이와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여기서 그녀와의 관계를 시인해버려도 그만인 문제였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서연이와의 사이를 은폐하는 것이 은연 중에 내게 습관처럼 자리잡고 있었는지 나는 곧장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성진 선배는 아마 알고 있을 거에요. 서연이를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챌 수 있을 걸요. 두 사람.... 요새 정말 수상한거 알죠? 호호."
"........"
"정말 두 사람 아무 사이도 아닌게 맞아요? 난 요새 그게 너무너무 궁금하다니까요."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서연이랑 내가 무슨 사이든 말든."
"당연히 어떤 남자를 만나건 간에 서연이 마음이죠. 난 다만 궁금할 뿐이에요. 작년에만 해도 그렇게나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떤 과정으로 그런 사이가 된 걸까? 너무 궁금하잖아요. 헤헤... 심지어 서연이는 그 시기에 선배를 징그럽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에요. 내가 서연이의 그런 속마음을 바로 옆에서 들어줬기 때문에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죠. 험담까지 늘어놓을 정도로 싫어했던 남자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과연 뭘까나?"
질문을 우회적으로 질질 끌기는 했지만 결국 이 년이 하고 있는 말은 이거였다. 네까짓 찌질이가 도대체 어떻게 서연이의 마음을 얻은 것이냐.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차올랐다. 헤실거리며 웃고 있지만 결국 이 년은 지금 나를 대놓고 개무시하고 있는 거였다. 자신의 친한 친구가 겨우 나 따위 찌질한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게 차마 못 볼 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 그게 궁금해?"
화를 낼까 싶었지만 그건 찌질한 짓이었다. 가뜩이나 나를 찌질하게 보고 있는 년에게 찌질하게 대처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특별히 가르쳐줄게. 놀라지 마."
나는 그녀에게 귓속말이라도 하듯이 몸을 숙였다. 서로의 얼굴이 더욱 밀착되면서 모양새가 꽤 야릇해졌다.
"사실은 말이야."
예진이 또한 당황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며 내게 몸을 밀착시켜왔다. 솔직히 이 년에게 곧이 곧대로 말해도 될거란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타임 리와인더가 있으니 별 걱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엔 이 년의 가증스런 태도를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순간 결정적인 인물이 마침내 등장하여 나는 본의 아니게 시계를 사용할까 말까의 고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사람... 뭐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서연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얼굴을 밀착시킨 예진이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불륜의 현장이라도 걸린 것처럼 억울한 기분에 나는 재깍 예진이년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서연이는 여전히 찡그린 표정이었다.
"어머~~ 왔어?"
참으로 가증스럽게도 예진이는 친구의 얼굴을 보자마자 재깍 미소를 지으며 부산스럽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서연이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너 왜 여기 앉아있어? 네 자리 따로 있잖아."
"강의실에 자리가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닌데 뭐. 내가 오늘 성진 선배 옆에 앉으면 안 돼?"
"뭐?"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듯한 서연이의 그 반응을 예진이는 되려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연이는 헤실거리는 친구의 면전에다 대고, 나조차도 놀랄 만큼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
"안 돼."
"뭐? 왜?"
"거긴 내 자리니까."
서연이가 어찌나 단호하게 대답을 했던지 도저히 예진이가 더 딴지를 걸거라는 생각이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자들이란 정말이지 늘 예상을 뛰어넘는 존재들이었다.
"뭐야~~ 그런게 어딨어. 네가 자리 주인도 아니면서! 나도 성진 선배랑 친해질거야."
이 년이 정말 미쳤나?
"내가 주인 맞아."
"뭐?"
"그 자리 내꺼 맞다구."
"음, 어째서?"
그러자 서연이가.... 내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퉁명스럽게 내리치면서, 나는 물론이고 예진이조차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
"성진 선배, 내 남자거든."
그 순간,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강의실 내의 모든 학생들의 눈과 귀가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으, 응...? 뭐라구?"
예진이조차도 경악하여 헤실거리던 웃음이 싹 날아가고 말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서연이는 가차 없는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내 남자친구라구. 그러니까 여기 이 자리는 당연히 내꺼여야 하는거 아니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어... 음...."
예진이는 대꾸할 말을 찾는 눈치였지만 당사자인 내가 서연이의 말에 벙쪄 있는 와중에 예진이라고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선배한테 이러지 마. 앞으로는 너한테 감추거나 비밀로 하지 않을 테니까. 알겠어?"
싸하게 강의실에 내려앉는 정적.... 이 순간 이후 학생들 사이에 무슨 소문이 퍼질지는 안 봐도 불을 보듯 뻔했지만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서연이가 이렇게 무서운 여자였구나, 하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뿐이었다.
*
"무슨 생각해?"
나의 고백 이후로 서연이는 다소 변한 것 같았다. 존대가 반말로 바뀐 것도 있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큰 부분이 달라져버렸다. 물론 그녀는 언제나 내게 있어 첫번째가 되고 싶어했던 여자였다. 육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그녀는 언제나 1등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바람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의 고백이 그녀의 어떤 자존감을 일정 부분 채워주었던 것만은 분명했던 모양이었다. 그 영향이기 때문인지 그녀는 나조차도 놀랄 만큼 거리낌이 없었다. 애당초 나는 우리의 관계를 주위 사람들에게 밝히는 문제에 대해서 나보다는 서연이가 더욱 조심스러울 것이라 내내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듯 했다.
"너 정말 괜찮아?"
"뭐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도 말야."
"선배가 떳떳하게 사귀자고 했잖아. 뭐 어때서 그래? 나랑 사귀는게 창피해?"
"그럴 리가... 네가 행여나 불편할까봐 그러는 거야."
그런 나의 태도가 서연이는 조금 못마땅한 것 같았다. 옆에서 함께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확실하게 말해줘. 나 이제 정말 여자친구 맞는 거지?"
"그럼..."
"남들 앞에 드러내기 부끄러운 여자친구 아니지?"
"물론이지."
"그럼 그냥 떳떳하게 말해. 예진이한테도 확실하게 말했으면 되는 거였잖아. 왜 거기서 쩔쩔매고 그래? 바보 같이."
내 입으로 예진이에게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것이 서연이 눈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내 딴에는 그녀의 입장을 신경쓴다고 했던 것이 오히려 그렇게 보였다니 억울했지만 서연이가 나와의 관계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단 뜻이기에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서연아."
"왜?"
"나 현주한테 말했어. 너랑 사귄다고...."
두어걸음 앞서 걷던 서연이가 다시 뚝 멈추어섰다. 그녀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화제였다.
"뭐라고... 하던데?"
"그냥..."
현주에게도 그랬지만 서연이 앞에서도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서연이는 왠지 내 표정만으로도 대충 짐작을 한 것 같았다.
"좋은 결과는 아니었어."
어쩌면 내게 있어서는 좋은 결과가 아니었지만 서연이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곧 좋은 결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연이는 똑똑한 여자이기 때문인지 그걸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만 방금 전과는 다르게 내 눈치를 조금 살필 뿐이었다.
"음... 선배는 괜찮아?"
"......"
괜찮냐고....? 사실 잘 모르겠다.
"글쎄... 그래도 내가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니까. 후회하거나 하면 안 되겠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부분을 그녀가 내게서 읽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연이는 말이 없었다. 다만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서 더 길게 얘기하지 않는 그녀가 고마웠다. 캠퍼스 입구에 내려올 때까지 별다른 말이 없다가 그녀가 불쑥 말했다.
"그거 알아? 오늘 유성이 학교에 안 왔어."
"어? 으응."
사실 아까부터 마음 한 구석으로 계속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었다. 오늘 유정이가 수업 시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소 자유로운 구석이 있는 그녀였긴 했지만 수업을 빼먹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발표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이기도 하고.
"혹시 어디 아픈가?"
"글... 쎄..."
서연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정말로 유정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혼자 사는 애인데 아프기라도 하면 얼마나 서러울까. 문득 지난번에 그녀가 내게 죽을 사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따가 그녀에게 전화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서연이가 손바닥으로 내 등짝을 세차게 내려쳤다.
"아야! 왜 그래?"
"방금 유성이 생각했지?"
"뭐?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걱정하는거 다 보여."
"그, 그럴거면 애초에 유정이 얘길 왜 꺼냈어?"
"신경 쓰는지 안 쓰는지 한번 시험해본거야. 한마디로 선배가 제대로 낚인거지."
"참 나...."
"이제 내가 여자친구니까 나보다 유성이 챙기는 모습 한번이라도 보이면 죽을 줄 알아. 알겠어?"
전보다 한층 더 뚜렷해진 서연이의 질투 앞에 그저 허허 웃고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게도 유정이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감정 표현이 더욱 뚜렷해진 서연이의 모습이 내게도 귀엽게 느껴져 나는 무언의 표시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살짝 둘렀다.
"자기야."
"응?"
어느 순간 서연이가 날 부르는 호칭이 선배에서 자기로 바뀌었다. 모텔에서 있었던 뜨거웠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호칭이었다.
"그냥 이렇게 한번 불러보고 싶었어. 굳이 숨기지 않기로 했으니까 밖에서도 이렇게 불러도 괜찮지?"
"응. 나도 그게 좋아."
서연이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거닐었다.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연이가 곁에 있음으로 해서 금새 행복해지는 내가 너무 속물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구태여 행복하다는걸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서연이 또한 내게 소중한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현주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대로 그녀를 놓아주는게 더 좋을 지도 몰라.... 그 때 처음으로 현주를 내 마음 속에서 지우는 상상을 했다. 가슴 아프겠지만 오히려 그게 모두를 위하는 길이지 않을까?
"오늘 자기 집에서 있다 가도 돼?"
함께 식사를 하고 대학로를 유유히 거닐고 있는데 서연이가 불쑥 과감한 제안을 던졌다. 기묘하게도 그 질문이 문득 어제 현주가 나를 그녀의 집으로 초대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들렸다. 서연이와 현주는 다르다.
현주가 요리를 해주겠다며 나를 집으로 초대한 것은 말그대로 요리를 해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서연이가 내 방에서 있다 가겠다는 말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그 뒤의 은밀한 스킨십까지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도 서연이도 그것을 한 치의 의심 없이 확신할 수 있는.... 오히려 이게 정말 연인다운 것일지도 모르지.
"응... 그러자."
비록 서연이가 느꼈을 지는 모르지만, 그 질문에 내가 그러자고 대답했다는건 그 순간 내가 현주의 존재를 애써 마음 속에서 떨쳐버렸음을 의미했다. 정말 이대로 그녀를 마음 속에서 지우게 될까? 현주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역시....
*
서연이와 함께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예전엔 서연이를 내 방에 들이는 것조차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현주가 알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학교 갔다 오는 거야?"
옆집 여자가 요즘들어 어찌나 자주 보이는지 이제는 그녀의 존재가 그리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예전엔 모습조차 보기 힘들던 그녀였는데 이제는 거의 매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보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는데, 바로 옆에 서연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 요새는 한가한가봐요."
괜히 어색하게 대하는 것이 오히려 서연이에게 더 수상쩍어 보이겠다는 생각에 나름대로는 자연스럽게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옆집 여자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내게는 어려운 상대인지 조금 말이 떨렸다.
"나? 나는 항상 한가해."
옆집 여자가 내 얼굴엔 관심도 두지 않고 서연이에게 눈길을 향했다. 옆집 여자에 대해 알 턱이 없는 서연이는 그 시선이 약간은 불편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경계심 때문이었을까? 무슨 의도인지 서연이가 내 팔을 조금 더 힘주어 안았다.
서연이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빤히 들여다보던 옆집 여자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반가운걸."
"네?"
너무 뜬금없었는데다 목소리 또한 너무 낮았기에 나와 서연이는 똑같이 반문하고 말았다. 하지만 옆집 여자는 역시나 그녀답게 할 말만 남기고는 제멋대로 또 뒤돌아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서연이가 마치 추궁하듯이 질문을 시작한다.
"누구야? 저 여자?"
"아... 그냥 옆집 사는 여자야."
"뭐, 뭐라구? 옆집?"
어쩐지 서연이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옆집에 저렇게 젊은 여자가 산다는 말은 안했잖아."
"그냥 옆집일 뿐이야. 왜 그래?"
"둘이 얘기 하는 꼴을 보니 아예 남남도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봐. 저 여자랑은 또 무슨 관계야?"
"무, 무슨 소리야? 절대 그런거 아니야."
나는 옆집 여자가 남긴 아리송한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서연이는 그저 젊은 이웃여자의 존재 자체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내 방의 문 앞까지 가면서도 그녀는 계속 불평불만을 재잘거리며 늘어놓았다.
"나 정말 짜증나.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왜 이렇게 엮여있는 여자들이 많아?"
"남자친구 외모를 그렇게 비하해도 되는 거야?"
"비하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야."
티격태격거리며 303호의 문 앞에 다다라 대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이 문을 열고 나서 생길 일에 대해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문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나라고 해도 처음 겪는 일에 대해서는 무방비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끼익 하고 열리는 문. 그리고 멈춰서는 나의 발걸음. 나는 들어가려던 것도 잊고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방 안에는 이미 나보다 먼저 누군가가 와 있었던 것이다.
"현... 주야."
사실 누구일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내 허락 없이 내 집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여태껏 한 명 뿐이었으니.
"......."
바닥에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앉아있던 현주가 고개를 들어 나를, 그리고 서연이를 보았다. 나와 현주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서연이와 현주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는 정말로 시간을 멈춰버릴까 싶어 나도 모르게 상의 안주머니로 손이 향했을 정도였다.
"우리 얘기 좀 해."
아마 그 뒤를 이어 현주의 입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 자리에서 시간을 되감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모처럼 여유 있는 저녁입니다 ^^
역시 야근이 없어야 삶의 질이 향상되나 봅니다
어느덧 타임 리와인더도 30장까지 왔네요
새삼스럽게 흐뭇해지는 저녁입니다~~
독자님들도 편안한 휴식 되시길 바라며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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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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