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9장
"오빠!"
오랜만에 만난 현주는 달라진 구석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예뻤고, 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를 보는 내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잘 지냈어?"
요며칠 나는 현주와 일부러 만날 약속을 잡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현주는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고백할 것이 하나 있었고,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분명 그것을 좋게 받아들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비밀로 할까? 며칠 사이 수도 없이 했던 고민이다. 어쩌면 서연이의 일을 그녀에게 비밀로 하는 것이 모두에게 있어 더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내게는 타임 리와인더가 있다. 나의 외도가 현주에게 발각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단순히 그때 그때 시간을 되감아서 해결해버리면 그만인 문제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르게 이 고민이 현주에게 진실을 들키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변명과 합리화를 통해서도 바람을 피운 행위가 정당하게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스스로 떳떳해지기 위해서는 현주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매번 도달하곤 했다.
그러한 고백이 나의 행동을 적어도 단순한 불륜보다는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줄 거라 믿으면서. 그것이 서연이를, 그리고 현주를 위해서도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흠... 현주야."
하지만.... 아무리 그런 고민의 과정을 거쳐 결론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것을 실제로 그녀에게 털어놓은 행위는, 정말이지 결심과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것이 좋단 말인가?
나는 타임 리와인더를 떠올렸다. 시간을 되감을 수 있는 능력이 이 상황에서도 도움이 될까? 물론 다소의 도움은 될 것이다. 적어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문장을 고를 수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표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질의 문제였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타임 리와인더라도 해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지는 못하니까. 내가 그 어떤 매끄러운 표현으로 내용을 거듭 포장한다고 한들 이 문제의 본질에 대한 현주의 대답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허용이든 거부이든 말이다.
아마 이 상황에서 타임 리와인더가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기껏해야 그녀에게 서연이의 일을 털어놓기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나의 고백을 없었던 일로 하는 것 정도일 터. 그러나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현주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애석하게도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이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내 능력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응? 왜?"
"아... 아니야."
적어도 말할 타이밍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는 말할 수 없었다.
"배고프네. 우리 밥 먹을까?"
"오빠 배고파? 그럼 내가 요리해줄까?"
"요리?"
"응.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
보통 여자친구가 집에 아무도 없다며 남자를 안으로 들인다면 남자 입장에서는 그 후의 이벤트를 상상하며 설렐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현주의 경우라면 그 말의 의미가 정말로 순수하게 "요리를 해주겠다"는 뜻임을 나는 알고 있었기에 여느 남자들처럼 마음이 들뜨거나 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오늘도 안 들어오신대. 게다가 언니도 오늘은 밖에서 자고 온대나...."
"현아 씨는 왜?"
"몰라. 일 때문인가보지 뭐."
하마터면 현아 씨를 나도 모르게 "현아"라고 낮추어 부를 뻔 했다. 현주 앞에서 아무래도 현아와 있었던 일의 흔적을 어떤 형태로든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특히 현아와 보냈던 호텔에서의 하룻밤 동안 내가 그녀에게 퍼부었던 온갖 변태적인 행위들을 현주가 알게 되는 날에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럼 오늘 집에 혼자 있는단 거야?"
"아마도...."
"쓸쓸하지 않겠어?"
"모르겠어. 언니가 원래는 웬만해선 외박을 잘 안하는 편인데 요새 부쩍 그러는 것 같아. 일이 바쁜가?"
그 말을 듣고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생각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왠지 현주의 그 말을 듣고 나서 지환이 놈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혹시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혐오스런 놈과 몸을 섞고 있을지도 모르는 현아를 상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것을 유희라고 여기고 있을테지.
"그래.. 그럼 일단 집으로 가자. 너 안 쓸쓸하게 저녁까지 있다 갈게."
"응. 좋아!"
현주가 내게 팔짱을 낀다. 사랑스런 여자친구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속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녀가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하나 정도는 그녀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문제도 아니고 우리 둘 사이의 애정에 관한 일이라면....
현주의 집까지 가는 길 내내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를 속으로 고민했다. 물론 그 고백 이후 그녀에게서 받게 될 대답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
현주가 요리를 하는 모습은 이제 내게 무척 익숙하다. 앞치마를 두르고 그녀가 주방 앞에 서면 도마 위에 칼질하는 소리와 함께 보글거리는 소리가 이어나왔고, 요리가 뭐든지 간에 그 뒤엔 맛있는 냄새가 한껏 퍼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요리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현주와 결혼을 하면 아마도 행복하겠지.
"다 됐어 오빠~~"
한식이든 양식이든 그녀는 항상 다채로운 요리를 만들어내곤 했다. 수프부터 시작해서 스파게티에 리조또까지 테이블에 올린 그녀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자신이 먹기보단 내가 얼른 먹고 평가를 해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녀의 여성스러운 매력을 이렇게 평가한다면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그녀에겐 어느 모로 봐도 좋은 주부가 될 자질이 넘쳐나는 듯 했다.
"맛있다. 전부 다 맛있어."
내가 하나씩 맛을 본 뒤에 칭찬을 해주자 그녀가 방긋 웃음을 짓는다. 우리는 단란한 저녁 식사를 했다. 접시를 치우고 같이 뒷정리를 한 다음 우리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 현주의 집에서 부모님이나 현아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거실을 차지하고 있으니 어쩐지 조금 어색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현주는 한술 더 떠서 양치를 하고 싶으면 새 칫솔을 꺼내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오늘 그냥 자고갈까?"
"어?"
불쑥 꺼낸 갑작스런 제안에 현주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별 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다. 다만 현주와 깊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한 것 뿐이었고, 그러자면 아무래도 한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였다. 현주로서는 이것저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겠지만, 사실 부모님이나 현아가 들이닥친다 해도 나에겐 타임 리와인더가 있으니까 뭐....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집에 혼자 있는다며. 너 쓸쓸할 것 같아서."
"으응. 그렇긴 한데.... 남자를 집에 들인건 처음이라.... 엄마나 언니가 알면 곤란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싫은건 아닌데.... 어쩌지?"
횡설수설하는 현주. 그녀로서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큼 그녀도 나와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일 터였다.
"아, 그냥 해본 말이야~ 곤란하면 안 그래도 돼. 막차 타고 가면 되니까."
"아니야! 그, 그냥 그렇게 하자."
"응?"
"그냥 같이 자자구."
뭔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하듯이 단호하게 못을 박는 그녀였다.
"괜찮아? 갑자기 왜?"
"어차피 부모님도 언니도 오늘은 안 들어오겠다고 했는걸. 그,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언니는 가끔씩 집에 남자들 데려오는데 나라고 못할 것 없잖아?"
평소 현아의 행실에 대한 반박 심리도 약간은 끼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문득 그녀의 집에 처음 왔을 때 낯선 남자가 현아와 같이 있었던 것을 떠올려냈다.
현주도 그러한 현아의 행태를 보면서 언니가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영업을 한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겠지만, 그 내면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아마도 모르고 있을 거라는게 내 짐작이었다. 마치 성노리개처럼 남자들의 욕망에 의해 뒤틀려지고, 거기에서 복수의 미학을 발견하는 언니의 비뚤어진 내면을....
"그래도 될까?"
"뭐야... 오빠가 먼저 말해놓고는."
"네가 불편할까봐 그러지. 너만 괜찮으면 같이 자자."
"응, 좋아."
현주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같이 밤을 보내기로 결정하고보니 나보다 훨씬 들뜨는 기색이었다. 비록 섹스라는 이벤트는 없을지언정 밤을 같이 보낸다는건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니까. 집에 아무도 없는데 구태여 우리가 다른 침대에서 따로 잘 이유도 없고 말이다.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다가 12시 즈음이 되자 간단하게 씻고 잘 준비를 갖추었다. 조금 이른 감이 있긴 했어도 서로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는 남자이기에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없다는게 못내 아쉽긴 했지만 말이다.... 그놈의 섹스가 뭐길래.
"오빠... 여기 누워."
"으응."
침대로 나를 이끄는 현주의 목소리가 약간은 경직된 것처럼 느껴졌다. 섹스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녀 역시 한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나와 함께 덮는다는 사실 그 자체로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요 근래의 경험들 (정확하게 말하면 주로 서연이와의) 을 통해서 여자와 동침을 하는 것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첫경험 딱지 떼는 숫총각마냥 침대에 오르는 동작 하나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긴장한 듯 하면서도 수줍어하는 현주의 태도가 그러한 느낌을 더욱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히려 섹스가 없을거라는걸 알기에 더욱 미묘하게 긴장되는 느낌이랄까... 말로는 참으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었다.
"오빠, 잘 때 내 쪽으로 돌아눕지 마."
"뭐? 왜?"
"나 지금 화장 지운 얼굴이잖아. 창피해."
"참 나... 나 너 맨얼굴 본 적 있어. 새삼스럽게 무슨."
"언제?"
"처음 여기 왔을때 기억 안나? 너 자다 말고 뛰쳐나왔잖아."
"오빠 그 때 내 얼굴 봤어?"
"당연하지."
복부를 가격하는 현주의 고사리 같은 주먹이 느껴졌다. 꽤나 매서웠다.
"내가 보지 말랬잖아 그 때!"
"자세히는 안 봤어."
"씨이..."
시덥잖은 문제로 잠시 투닥거리다가 결국은 화해하고는 사이좋게 끌어안고 잠을 청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대로 다정하게 잠이 들었어도 별로 나쁠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오늘 꼭 해야할 말이 있었고, 얄궂게도 그녀 역시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빠, 자?"
"아니... 아직."
"왜? 잠이 안 와?"
"그냥. 이것저것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하는데?"
그냥 말해버릴까... 눈 딱 감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일단 질러보듯이 꺼낼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내게 기회가 여러번 보장되어 있다고 한들 그 기회는 아무 댓가 없이 오는 것도 아니거니와, 거기에 의존하기만 해서는 몇 번의 기회가 거듭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해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랬다.
"뭐 그냥... 여기가 내 여자친구가 매일 잠드는 침대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들뜨네."
결국 제대로 된 핵심은 꺼내지도 못하고 또 말이 헛돌고 만다. 하지만 현주는 즉흥적인 내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내 몸의 반쪽을 얽어오듯이 매달리며 더욱 깊숙히 안겼다. 내 가슴 위에 그녀의 팔이 올라왔고, 한쪽 다리 위에 그녀의 다리가 얽혔다. 마치 섹스를 끝낸 후에 후희를 즐기는 듯한 원색적인 형상이었다.
"나도 오빠랑 내 침대에 누워서 같이 자니까 너무 설레고 좋아. 히히."
"그래. 꼭 신혼부부 같다."
별 뜻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현주에게 부부라는 단어가 준 영향이 생각보다 퍽 진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층 더 내게 코알라처럼 매달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랑 결혼하면 행복하겠지?"
아까 내가 머릿 속으로만 어렴풋이 했던 생각이 신기하게도 그녀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이상하게 그 말에 긍정을 할 수가 없었다. 여느 연인사이라면 이런 분위기에서는 보통 무겁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만인 질문이었다. 설령 상대에 대한 짙은 확신이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리기엔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가 너무....
"글쎄...."
아리송한 대답에 현주가 꽤 서운한지 가슴팍에 올렸던 손을 들어 나를 한대 툭 때렸다.
"뭐야? 오빠는 나랑 결혼하면 안 행복할 것 같아?"
"아니야."
"그런데 대답이 왜 그래?"
"음... 그냥.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읽고 먼저 움직여주었던 내가 야속하게도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해주질 않자 그녀는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현주에게 하고 싶은 말을 어떤 형태로 꺼낼지를 고민하느라 머리가 복잡했고, 현주도 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조용히 내게 안겨만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생각을 정리하고 먼저 침묵을 깨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외로 먼저 정적을 깨뜨린 것은 현주 쪽이었다.
"혹시... 그것 때문이야?"
"응?"
"내가... 다른 여자들하고 달라서..."
현주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아차 싶어 그녀를 마주보고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니야. 그런거 아니야. 정말이야."
그녀도 우리 사이의 섹스리스(sexless)가 적어도 우리 관계에 있어 좋은 영향을 미칠 리는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그녀가 내게 던진 질문의 의미를 내 입장에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완전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문제이긴 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이런 식의 과정을 통해서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녀의 생각을 오해로 일축해버렸다.
"하긴 남자 입장에서.... 잠자리도 선뜻 못하는 여자랑 결혼하고 싶을 리가 없지. 나도 알아."
"그런거 아니라니까.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말 하지마."
생각보다 그녀가 많이 토라진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니 별 거부감 없이 그대로 침묵하는 현주였다.
내일 그녀에게 고백을 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 분위기에서 더 그런 방향으로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녀가 이대로 잠든다면 나도 순순히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구태여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
"미안해, 오빠..."
"왜?"
"사실 나도 알고 있어. 오빠가 얼마나 힘든지...."
사실 그리 힘들건 없었다. 나는 현주 모르게 벌써 두 여인과 몸을 섞었고, 그 중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언니였다. 게다가 그녀의 언니는 현주에게 사랑을 주기만 하는 것을 대가로 스스로의 몸을 내게 바쳤다. 현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연인의 언니와 몸을 섞는 그런 경험 같은건 결코 해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현주와 있는 그대로 사랑을 나누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나, 적어도 지금은 그녀와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현주야. 있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이 순간이 내가 그녀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에, 너와의 그런 부분 때문에 힘들어서.... 다른 방법으로 그걸 해결하겠다고 하면, 넌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은 목적어가 분명치 못한 모호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현주는 그 말의 핵심을 어렴풋이 알아들은 것 같았다. 받아들이고 말고 하는 것은 그와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다른 방법이라니...?"
"그러니까 예를 들면, 다른 여자랑 몸을 섞는다던지. 아니면 유흥업소 같은 곳엘 간다던지 하는 식으로...?"
세상에. 예상은 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내 스스로도 그렇게 한심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말을 어떻게 잘 꾸미느냐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표현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겉으로 꺼내는 순간 나라는 인간 그 자체가 구질구질해지는 느낌.... 마음 같아서는 그 즉시 주워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말을 꺼낸 이상, 대답은 들어야만 했다.
"진심이야?"
그녀의 반응만은 내 예상과 달랐다. 그녀는 기겁하거나 당황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저 내게 낮은 목소리로 되물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짧고 진지한 반문이야말로 가장 나를 두렵게 만드는 반응이라는걸 나는 듣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라고 대답할 뻔한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냥... 만약 내가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못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할 건데? 나 몰래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닐 거야?"
"그, 그 때는.... 내가 그냥 감수해야겠지."
오히려 그녀의 또박또박한 반응 때문에 나는 되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만다. 이래서는 안 된다. 기왕 솔직해지기로 한 거라면 정말로 진솔해져야하니까.
"싫어."
"응?"
"싫다구. 그런거.... 아무리 그래도 그런건 그냥 바람 피는 거랑 다를게 없잖아. 그럴 거면 오빠가 나를 떠나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게 맞는거 아닐까?"
"으, 으응... 그렇지."
물론 그녀의 말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그냥 생각해본거야... 너도 우리 사이의 그런 부분 때문에 많이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네가 나랑 헤어지고 싶지 않듯이 나도 너랑 헤어지기 싫으니까. 만약 그런 부분이 앞으로 정말 큰 문제가 된다면 그 때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게 좋을지 나도 한번씩 생각해보곤 해. 그래서 물어본거야... 별다른 뜻은 없었어."
"정말이야?"
"응?"
"정말 별 다른 뜻이 없는거 맞냐구...."
어둠 속에서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망울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눈을 마주보면서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정말로 불가항력이었다.
"응... 물론이지."
현주는 꽤 오랜동안 다시 침묵을 지켰다. 조명이 꺼진 아늑한 침대 위에서 그녀의 작은 뒤척거림까지 생생히 느껴져 왔다. 몸이 닿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속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녀 또한 내 마음을 읽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안해, 오빠.... 정말 미안해."
"왜 또 미안하다고 그래."
"내가 부족해서 오빠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거잖아.... 난 정말 모자란 여자친구야. 어쩌면 오빠에게 난 좋은 여자가 아닐 수도 있어. 요새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걸."
"현주야."
"오늘 오빠에게 자고 가라고 말한 것도 어쩌면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우리는 섹스 없이도 잘 사귈 수 있다고... 그런 느낌을 받고 싶었던 걸거야. 오빠는 정말 특별하니까. 다른 남자들 하곤 다르게 정말로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현주야. 나도 그건 마찬가지야."
"물론 오빠 마음을 의심하는건 아니야. 하지만 남자는 그것 때문에 힘들어지게 되어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인걸...."
눈으로 본 것이 아니었다.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슴 언저리가 촉촉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저 손을 내려 조용히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 밖에 없었다.
"난 정말 이기적인 여자인가봐 오빠...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란걸 알면서도 오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걸 상상하고 싶지 않아. 오빠는 나만 좋아했으면 좋겠어. 내가 오빠에게 해줄 수 없는게 오빠에겐 얼마나 큰 부분인지 알면서도 그게 내 솔직한 욕심인걸. 나 정말 못 됐다. 그치...?"
"아니야 현주야. 그게 자연스러운거야."
"오빠가 나를 이기적으로 생각할까봐 무서워.... 어쩌면 정말로 오빠가 그런 마음을 먹는다 해도 나는 부정할 수 없을지도 몰라. 나한텐 오빠랑 헤어질 용기가 없을 테니까."
여자로서, 자존심을 버리고 그런 말을 한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상대방을 사랑해야 가능한 일인지를 나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현주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바보 같이 나 또한 눈물 한방울이 찔끔하고 흐를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 서연이의 일을 비밀로 하는 것이.... 결국 최선의 방법일까?
"현주야. 뭐해?"
"가만 있어줘, 오빠...."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머릿 속이 복잡했지만 몸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내 품에 안겨 이야기만 하고 있었던 현주가 몸을 움직여 내 위에 올라탄 것이었다. 그 저돌적이고 갑작스런 움직임 앞에 나는 굳어버렸지만 그 이상 현주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들었다.
"현주야... 뭐하려고...."
나는 망연히 넋을 놓고 현주가 내 팬티를 아래로 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내 자지는 현주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음에도 단단해질 기미 없이 그저 조용하게 죽어있었다. 그것이 물론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현주에게는 내심 서글픈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현주는 그것을 자신의 입에 덥썩 물었다.
"혀, 현주야...!"
실패로 끝났던 지난번 섹스 직전까지의 애무 이후 우리 사이엔 이렇다 할 만한 스킨십 행위가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우리 둘 다 유지해왔기에 그녀의 이런 행동은 정말이지 돌발적이었다. 갑자기 난데없는 오랄이라니....
"나... 나 연습했어 오빠."
"뭐....?"
"컴퓨터로 동영상 보면서... 조금씩 연습했어. 언니한테도 비밀로 하고 몰래 한 거지만 그래도 틈틈이 보면서 공부했어. 아직은 자신이 없어서... 사실 오늘 말을 할까말까 많이 고민했어. 비록 혼자 연습한 거지만 그, 그래도 내가 오빠를 조금은 만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작게 쪼그라든 내 물건을 입에 물다말고 심호흡을 하는 현주의 모습이 그렇게나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송곳 하나가 욱신하게 내 가슴을 후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습이라니.... 세상 그 어느 여자가 성불감증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남몰래 애무를 연습한단 말인가. 그것도 모니터 너머로 혼자 싸구려 동영상이나 들여다보면서....
"무, 물론 실제로 해본 적은 없어서 오빠가 실망할 지도 몰라.... 그래도 오빠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건 오빠도 많이 힘들다는 뜻이니까. 내가 어떻게든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지금 한번 해볼게."
기껏해야 이 좁은 방에서 가족들 모르게 포르노 영상 따위나 보며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을 현주를 떠올리니 웃음은커녕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무얼 얼마나 연습했는지는 몰라도 그 연습은 결코 자신이 즐거워지기 위한 연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일 뿐이었다.
"현주야.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런 연습 같은 것도 하지 마."
"싫어.... 나도 오빠한테 뭔가 해줄 거야. 나도 할 수 있어. 내 몸으로 오빠를 받아들이는건 아직 힘들어도 이 정도는 충분히 나도 할 수 있는걸. 그러니까 제발 가만히 있어줘... 응?"
자신의 충족을 위함이 아닌 오로지 상대방의 만족을 위한 애무.... 참으로 바보 같고, 참으로 맹목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사랑이든 애무든 결국 그 본질은 그러한 감정으로 인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는 과정이다.
어떻게 순수히 상대방만을 위한 애무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지금 내게 그러한 자기희생을 감수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과연 내가 그만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인가?
"알겠어... 가만히 있을게."
성적인 흥분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마음을 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나의 물건을 다시 입에 물었고, 나는 그녀의 눈이 살짝 질끈하며 감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혀가.... 애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쭙... 쭈웁..."
서툴지만 노력이 한껏 느껴지는 혀의 움직임. 예상은 했지만 그녀는 전혀 능숙하지 못했다. 의욕만 앞선 탓에 가끔은 자지 표면에 이빨이 닿아버려 내게 통증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언니에 비하면 현주의 기교는 정말이지 하늘과 땅 차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숙하고, 또한 엉성했다. 아마도 남자의 자지를 자기 자신의 의지로 물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과거의 어느 끔찍했던 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열심이었다. 정말로 열심히.... 내 물건을 입에 물고 혀를 움직였다. 그 처연한 노력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혼자서 많은 고민을 했고, 또 실제로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쾌감이 솟기보단 오히려 가슴이 더 뭉클해질 뿐이었다.
"오, 오빠... 어때?"
그녀는 내 예상을 빗나가지 못했다. 자지 오랄을 처음 시도해본 여자답게 그녀는 오랜 시간 자지를 입에 물고 있지도 못했다. 미숙한 탓에 입 안에 자지가 들어와있으면 아직은 숨을 쉬는 것조차 불편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숨을 고르며 내 반응을 살핀다.
"으응... 기분 좋아."
"정말이야? 거짓말 하는거 아냐?"
"아냐. 정말로 좋아."
"내 눈엔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현주가 벌떡 몸을 일으켜 이번엔 내 배위로 올라온다. 마치 기승위를 하듯이 그녀는 내 복부를 깔고 앉아 나를 마주보았다. 나도 상반신을 더욱 일으켜 그녀와 눈높이를 마주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더니, 자연스럽게 이끌어 그녀의 젖가슴 위에 스르르 얹어놓았다.
"그리고 오빠가 원한다면.... 몸 만지는 것 정도는 괜찮아. 그 정도는 나도 참을 수 있어. 아, 아니... 참는다는 표현은 사실 옳지 않아. 나도 원하는 거니까."
"현주야...."
마음 한 구석에서 애써 억눌러왔던 무언가가 그 순간 울컥하고 터져버렸다. 더는 그녀의 애절한 노력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더이상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으로 주워담고 말고를 생각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내가 얼마나 더 기만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현주야, 미안해."
"으응...? 뭐가?"
여전히 그녀는 그녀 자신의 손으로 내가 그녀의 몸을 만지도록 이끌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끌어내린 후, 최대한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의 두 눈을 마주보고 말했다.
"사실은 너한테 거짓말을 했어."
"거짓말.... 이라니?"
말해야만 했다.... 여기서 피해버리면 아마 영영 비밀로 할 수 밖에 없을 테니.
"나... 다른 여자랑 잤어."
결국 입 밖으로 나오고 마는 짧은 한 마디. 한 마디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도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그 말.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지는.... 너무도 무겁게 그 뒤에 이어지는 불편한 정적. 두 눈망울만 깜빡이는 현주의 표정을 보며, 잠시 동안 나의 세상이 얼어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자하고도.... 사귀고 싶어."
그 뒤를 이은 나의 말은 비록 있는 그대로 진솔했지만, 아마도.... 그녀에게 있어선 너무도 가혹했을 터였다.
*
"헤이~ 사랑하는 내 동생! 언니 왔다~~ 벌써 자니?"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이닥친 것은 어찌보면 신의 장난이었을 것이다. 망연자실하게 굳어있던 현주의 얼굴이 마치 기계처럼 뻣뻣하게 돌아가, 문 앞을 가득 메우고 서 있는 그녀의 언니를 발견했다.
놀란 것은 나나 현주 뿐만이 아니었다. 방 문을 벌컥 열었던 현아조차도 침대 위의 우리 두 사람 모습을 보고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쩍하니 굳어버렸다. 그 침묵은 지독할 정도로 오래 이어졌다. 하지만 나와 현주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현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어머나.... 이 상황은 뭐람?"
침대 위의 두 남녀를 보는 순간 아마도 그녀는 대강의 사정을 짐작했을 터. 문제는 우리 사이에 방금 전 오고간 대화를 그녀가 모르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게다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팬티를 무릎께까지 내린 상태였다. 그러나 그것을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우리 두 사람은, 특히 현주는 넋이 나가 있었다.
"호호... 두 사람, 혹시 내가 방해한거?"
그 어색하고 불편한 정적이 자기 때문이라고 여겼는지 현아는 어떻게든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심지어 그녀의 언니에게서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현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하~~ 알겠다. 현주 너 내가 오늘 집에 안 들어온다고 해서 성진 씨 불렀던 거구나? 그래서 같이 있다보니까 보내기는 너무 아쉽고 허전해서 자고 가라고 한 거지? 언니도 그런거 다 알어 기집애야~ 나도 가끔 남자 데려올 때 있잖아. 호호. 아빠나 엄마가 알면 화내겠지만 특별히 난 너그럽게 못 본 척 넘어가줄게. 그러니까 인상 풀어~~"
"......."
"사실은 오늘 고객 약속이 취소되서 말야~ 밖에서 잘까 하다가 그냥 집에 왔지 뭐. 이럴 줄 알았으면 들어오지 말걸 그랬나? 헤헤.... 좋은 시간 방해한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하네. 다시 나가줄까?"
현아는 심지어 주책스러워 보일 만큼 혼자서 길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주는 굳어져 말이 없었고, 때문에 나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현아는 그것이 현주의 수줍음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저기... 그보다 성진 씨는 속옷이라도 좀 입는게...."
"나가, 언니."
그러자 현주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로 그녀는 한 마디를 뱉었다.
"현주야.... 화 났어?"
"나가라구, 빨리!"
"아, 알았어. 나갈게. 나가면 되잖아.... 기집애 정말 성질은...."
현주의 목소리가 언젠가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그 모습처럼 크게 높아졌다. 움찔한 현아가 방 문을 닫고 이내 사라졌고, 현주는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오빠."
"응...."
"거짓말이지?"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아래로 흘려내려 그녀의 숙인 얼굴과 표정, 그리고 두 눈을 감추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내 몸 위에 태운 채로.... 힘겹게 다시 한번 그녀에게 진실을 고했다.
"거짓말 아냐... 다른 여자랑 잤어."
"무슨 말이야, 그게....?"
"......."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일지 몰랐지만, 애초에 이 상황에 어울릴 만한 행동이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막연한 기분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나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 거센 몸짓의 분노를 그대로 담은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무슨 말이냐고, 그게!!!"
고개를 홱 들면서 소리 지르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까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조차 고여있지 않았다. 그 어떤 말로도 지금의 상황을 명약관화하게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녀와 충분한 대화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두 사람?"
현주의 목소리를 듣고 현아가 다시 방 문을 열어젖혔다. 싸우는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동생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심상치 않은 그녀의 목소리를 현아도 나름대로 느낀 것일 터였다.
현주와 현아.... 그리고 나. 현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로 얽혀있는 세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었다. 서연이의 일을 현주에게 고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그녀의 언니와 내게 있었던 일까지도 끄집어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지만 그 이전에 서연이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이미 현주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오빠."
"......."
"장난이었다고.... 말하란 말이야."
"미안해."
"뭐가 미안해!!! 빨리 말하란 말이야!"
현주가 내 멱살을 두 손으로 잡아올렸다. 나는 그녀가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걸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게 결코 일반적인 행동이 아니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언니인 현아조차도 소스라치게 놀라 허겁지겁 그녀를 말리러 달려왔기에.
"혀, 현주야. 너 왜 그래....?"
"저리 가!"
"아악!"
말리려 드는 언니의 손길마저 거칠게 뿌리치는 현주였다. 뿌리치는 손짓이 얼마나 거칠었던지 현아가 동생의 밀쳐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털썩 주저앉은 현아가 멍한 눈으로 현주를 올려다보았다. 현주는 여전히 내 목을 틀어올린 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뒷말을 이었다.
"오빠가 그럴 리가 없잖아.... 오빠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내가 차라리 시간이 멈추길 바랐을 정도로, 정말이지 그것은 지독한 순간이었다. 나도 현주도,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현아도.... 누구 하나 말이 없었다. 우리는 긴 침묵 속에서 정적을 지키며, 한동안 그렇게 굳어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3일 이상 연재텀이 길어지면 미리 공지를 드린다고 말씀드렸는데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실 24일 오전에 올리려고 했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하루나 더 늦어져 버렸네요...
그리고 내용 중에 유정이와 유성이의 호칭 쓰임에 충분히 혼동을 느끼실 수 있는데, 일단 지금은 주인공인 성진만이 유정이를 유정이라 부르고 그 외 기타 일상에서 쓰이는 유정이의 이름은 "유성이"가 맞습니다. 공식적으로 호적상 그녀의 이름은 한유성이니까요 ^^ 유정이의 이름은 유정이가 성진에게만 허락한 특별한 이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듯 합니다
5월달의 바빴던 주기가 어느 정도 지나간 느낌이네요
6월에 다시 바쁠 시기가 찾아오겠지만 어쩔 수 없겠죠
한숨 돌리며 휴식하면서 다음 30장은 비교적 빠르게 써볼 생각입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독자분들~ ^^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9장
"오빠!"
오랜만에 만난 현주는 달라진 구석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예뻤고, 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를 보는 내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잘 지냈어?"
요며칠 나는 현주와 일부러 만날 약속을 잡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현주는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고백할 것이 하나 있었고,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분명 그것을 좋게 받아들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비밀로 할까? 며칠 사이 수도 없이 했던 고민이다. 어쩌면 서연이의 일을 그녀에게 비밀로 하는 것이 모두에게 있어 더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내게는 타임 리와인더가 있다. 나의 외도가 현주에게 발각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단순히 그때 그때 시간을 되감아서 해결해버리면 그만인 문제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르게 이 고민이 현주에게 진실을 들키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변명과 합리화를 통해서도 바람을 피운 행위가 정당하게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스스로 떳떳해지기 위해서는 현주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매번 도달하곤 했다.
그러한 고백이 나의 행동을 적어도 단순한 불륜보다는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줄 거라 믿으면서. 그것이 서연이를, 그리고 현주를 위해서도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흠... 현주야."
하지만.... 아무리 그런 고민의 과정을 거쳐 결론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것을 실제로 그녀에게 털어놓은 행위는, 정말이지 결심과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것이 좋단 말인가?
나는 타임 리와인더를 떠올렸다. 시간을 되감을 수 있는 능력이 이 상황에서도 도움이 될까? 물론 다소의 도움은 될 것이다. 적어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문장을 고를 수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표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질의 문제였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타임 리와인더라도 해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지는 못하니까. 내가 그 어떤 매끄러운 표현으로 내용을 거듭 포장한다고 한들 이 문제의 본질에 대한 현주의 대답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허용이든 거부이든 말이다.
아마 이 상황에서 타임 리와인더가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기껏해야 그녀에게 서연이의 일을 털어놓기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나의 고백을 없었던 일로 하는 것 정도일 터. 그러나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현주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애석하게도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이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내 능력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응? 왜?"
"아... 아니야."
적어도 말할 타이밍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는 말할 수 없었다.
"배고프네. 우리 밥 먹을까?"
"오빠 배고파? 그럼 내가 요리해줄까?"
"요리?"
"응.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
보통 여자친구가 집에 아무도 없다며 남자를 안으로 들인다면 남자 입장에서는 그 후의 이벤트를 상상하며 설렐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현주의 경우라면 그 말의 의미가 정말로 순수하게 "요리를 해주겠다"는 뜻임을 나는 알고 있었기에 여느 남자들처럼 마음이 들뜨거나 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오늘도 안 들어오신대. 게다가 언니도 오늘은 밖에서 자고 온대나...."
"현아 씨는 왜?"
"몰라. 일 때문인가보지 뭐."
하마터면 현아 씨를 나도 모르게 "현아"라고 낮추어 부를 뻔 했다. 현주 앞에서 아무래도 현아와 있었던 일의 흔적을 어떤 형태로든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특히 현아와 보냈던 호텔에서의 하룻밤 동안 내가 그녀에게 퍼부었던 온갖 변태적인 행위들을 현주가 알게 되는 날에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럼 오늘 집에 혼자 있는단 거야?"
"아마도...."
"쓸쓸하지 않겠어?"
"모르겠어. 언니가 원래는 웬만해선 외박을 잘 안하는 편인데 요새 부쩍 그러는 것 같아. 일이 바쁜가?"
그 말을 듣고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생각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왠지 현주의 그 말을 듣고 나서 지환이 놈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혹시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혐오스런 놈과 몸을 섞고 있을지도 모르는 현아를 상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것을 유희라고 여기고 있을테지.
"그래.. 그럼 일단 집으로 가자. 너 안 쓸쓸하게 저녁까지 있다 갈게."
"응. 좋아!"
현주가 내게 팔짱을 낀다. 사랑스런 여자친구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속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녀가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하나 정도는 그녀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문제도 아니고 우리 둘 사이의 애정에 관한 일이라면....
현주의 집까지 가는 길 내내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를 속으로 고민했다. 물론 그 고백 이후 그녀에게서 받게 될 대답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
현주가 요리를 하는 모습은 이제 내게 무척 익숙하다. 앞치마를 두르고 그녀가 주방 앞에 서면 도마 위에 칼질하는 소리와 함께 보글거리는 소리가 이어나왔고, 요리가 뭐든지 간에 그 뒤엔 맛있는 냄새가 한껏 퍼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요리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현주와 결혼을 하면 아마도 행복하겠지.
"다 됐어 오빠~~"
한식이든 양식이든 그녀는 항상 다채로운 요리를 만들어내곤 했다. 수프부터 시작해서 스파게티에 리조또까지 테이블에 올린 그녀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자신이 먹기보단 내가 얼른 먹고 평가를 해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녀의 여성스러운 매력을 이렇게 평가한다면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그녀에겐 어느 모로 봐도 좋은 주부가 될 자질이 넘쳐나는 듯 했다.
"맛있다. 전부 다 맛있어."
내가 하나씩 맛을 본 뒤에 칭찬을 해주자 그녀가 방긋 웃음을 짓는다. 우리는 단란한 저녁 식사를 했다. 접시를 치우고 같이 뒷정리를 한 다음 우리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았다. 현주의 집에서 부모님이나 현아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거실을 차지하고 있으니 어쩐지 조금 어색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현주는 한술 더 떠서 양치를 하고 싶으면 새 칫솔을 꺼내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오늘 그냥 자고갈까?"
"어?"
불쑥 꺼낸 갑작스런 제안에 현주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별 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다. 다만 현주와 깊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한 것 뿐이었고, 그러자면 아무래도 한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였다. 현주로서는 이것저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겠지만, 사실 부모님이나 현아가 들이닥친다 해도 나에겐 타임 리와인더가 있으니까 뭐....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집에 혼자 있는다며. 너 쓸쓸할 것 같아서."
"으응. 그렇긴 한데.... 남자를 집에 들인건 처음이라.... 엄마나 언니가 알면 곤란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싫은건 아닌데.... 어쩌지?"
횡설수설하는 현주. 그녀로서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큼 그녀도 나와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일 터였다.
"아, 그냥 해본 말이야~ 곤란하면 안 그래도 돼. 막차 타고 가면 되니까."
"아니야! 그, 그냥 그렇게 하자."
"응?"
"그냥 같이 자자구."
뭔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하듯이 단호하게 못을 박는 그녀였다.
"괜찮아? 갑자기 왜?"
"어차피 부모님도 언니도 오늘은 안 들어오겠다고 했는걸. 그,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언니는 가끔씩 집에 남자들 데려오는데 나라고 못할 것 없잖아?"
평소 현아의 행실에 대한 반박 심리도 약간은 끼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문득 그녀의 집에 처음 왔을 때 낯선 남자가 현아와 같이 있었던 것을 떠올려냈다.
현주도 그러한 현아의 행태를 보면서 언니가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영업을 한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겠지만, 그 내면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아마도 모르고 있을 거라는게 내 짐작이었다. 마치 성노리개처럼 남자들의 욕망에 의해 뒤틀려지고, 거기에서 복수의 미학을 발견하는 언니의 비뚤어진 내면을....
"그래도 될까?"
"뭐야... 오빠가 먼저 말해놓고는."
"네가 불편할까봐 그러지. 너만 괜찮으면 같이 자자."
"응, 좋아."
현주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같이 밤을 보내기로 결정하고보니 나보다 훨씬 들뜨는 기색이었다. 비록 섹스라는 이벤트는 없을지언정 밤을 같이 보낸다는건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니까. 집에 아무도 없는데 구태여 우리가 다른 침대에서 따로 잘 이유도 없고 말이다.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다가 12시 즈음이 되자 간단하게 씻고 잘 준비를 갖추었다. 조금 이른 감이 있긴 했어도 서로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는 남자이기에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없다는게 못내 아쉽긴 했지만 말이다.... 그놈의 섹스가 뭐길래.
"오빠... 여기 누워."
"으응."
침대로 나를 이끄는 현주의 목소리가 약간은 경직된 것처럼 느껴졌다. 섹스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녀 역시 한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나와 함께 덮는다는 사실 그 자체로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요 근래의 경험들 (정확하게 말하면 주로 서연이와의) 을 통해서 여자와 동침을 하는 것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첫경험 딱지 떼는 숫총각마냥 침대에 오르는 동작 하나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긴장한 듯 하면서도 수줍어하는 현주의 태도가 그러한 느낌을 더욱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히려 섹스가 없을거라는걸 알기에 더욱 미묘하게 긴장되는 느낌이랄까... 말로는 참으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었다.
"오빠, 잘 때 내 쪽으로 돌아눕지 마."
"뭐? 왜?"
"나 지금 화장 지운 얼굴이잖아. 창피해."
"참 나... 나 너 맨얼굴 본 적 있어. 새삼스럽게 무슨."
"언제?"
"처음 여기 왔을때 기억 안나? 너 자다 말고 뛰쳐나왔잖아."
"오빠 그 때 내 얼굴 봤어?"
"당연하지."
복부를 가격하는 현주의 고사리 같은 주먹이 느껴졌다. 꽤나 매서웠다.
"내가 보지 말랬잖아 그 때!"
"자세히는 안 봤어."
"씨이..."
시덥잖은 문제로 잠시 투닥거리다가 결국은 화해하고는 사이좋게 끌어안고 잠을 청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대로 다정하게 잠이 들었어도 별로 나쁠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오늘 꼭 해야할 말이 있었고, 얄궂게도 그녀 역시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빠, 자?"
"아니... 아직."
"왜? 잠이 안 와?"
"그냥. 이것저것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하는데?"
그냥 말해버릴까... 눈 딱 감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일단 질러보듯이 꺼낼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내게 기회가 여러번 보장되어 있다고 한들 그 기회는 아무 댓가 없이 오는 것도 아니거니와, 거기에 의존하기만 해서는 몇 번의 기회가 거듭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해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랬다.
"뭐 그냥... 여기가 내 여자친구가 매일 잠드는 침대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들뜨네."
결국 제대로 된 핵심은 꺼내지도 못하고 또 말이 헛돌고 만다. 하지만 현주는 즉흥적인 내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내 몸의 반쪽을 얽어오듯이 매달리며 더욱 깊숙히 안겼다. 내 가슴 위에 그녀의 팔이 올라왔고, 한쪽 다리 위에 그녀의 다리가 얽혔다. 마치 섹스를 끝낸 후에 후희를 즐기는 듯한 원색적인 형상이었다.
"나도 오빠랑 내 침대에 누워서 같이 자니까 너무 설레고 좋아. 히히."
"그래. 꼭 신혼부부 같다."
별 뜻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현주에게 부부라는 단어가 준 영향이 생각보다 퍽 진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층 더 내게 코알라처럼 매달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랑 결혼하면 행복하겠지?"
아까 내가 머릿 속으로만 어렴풋이 했던 생각이 신기하게도 그녀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이상하게 그 말에 긍정을 할 수가 없었다. 여느 연인사이라면 이런 분위기에서는 보통 무겁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만인 질문이었다. 설령 상대에 대한 짙은 확신이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리기엔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가 너무....
"글쎄...."
아리송한 대답에 현주가 꽤 서운한지 가슴팍에 올렸던 손을 들어 나를 한대 툭 때렸다.
"뭐야? 오빠는 나랑 결혼하면 안 행복할 것 같아?"
"아니야."
"그런데 대답이 왜 그래?"
"음... 그냥.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읽고 먼저 움직여주었던 내가 야속하게도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해주질 않자 그녀는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현주에게 하고 싶은 말을 어떤 형태로 꺼낼지를 고민하느라 머리가 복잡했고, 현주도 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조용히 내게 안겨만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생각을 정리하고 먼저 침묵을 깨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외로 먼저 정적을 깨뜨린 것은 현주 쪽이었다.
"혹시... 그것 때문이야?"
"응?"
"내가... 다른 여자들하고 달라서..."
현주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아차 싶어 그녀를 마주보고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니야. 그런거 아니야. 정말이야."
그녀도 우리 사이의 섹스리스(sexless)가 적어도 우리 관계에 있어 좋은 영향을 미칠 리는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그녀가 내게 던진 질문의 의미를 내 입장에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완전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문제이긴 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이런 식의 과정을 통해서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녀의 생각을 오해로 일축해버렸다.
"하긴 남자 입장에서.... 잠자리도 선뜻 못하는 여자랑 결혼하고 싶을 리가 없지. 나도 알아."
"그런거 아니라니까.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말 하지마."
생각보다 그녀가 많이 토라진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니 별 거부감 없이 그대로 침묵하는 현주였다.
내일 그녀에게 고백을 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 분위기에서 더 그런 방향으로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녀가 이대로 잠든다면 나도 순순히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구태여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
"미안해, 오빠..."
"왜?"
"사실 나도 알고 있어. 오빠가 얼마나 힘든지...."
사실 그리 힘들건 없었다. 나는 현주 모르게 벌써 두 여인과 몸을 섞었고, 그 중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언니였다. 게다가 그녀의 언니는 현주에게 사랑을 주기만 하는 것을 대가로 스스로의 몸을 내게 바쳤다. 현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연인의 언니와 몸을 섞는 그런 경험 같은건 결코 해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현주와 있는 그대로 사랑을 나누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나, 적어도 지금은 그녀와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현주야. 있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이 순간이 내가 그녀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에, 너와의 그런 부분 때문에 힘들어서.... 다른 방법으로 그걸 해결하겠다고 하면, 넌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은 목적어가 분명치 못한 모호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현주는 그 말의 핵심을 어렴풋이 알아들은 것 같았다. 받아들이고 말고 하는 것은 그와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다른 방법이라니...?"
"그러니까 예를 들면, 다른 여자랑 몸을 섞는다던지. 아니면 유흥업소 같은 곳엘 간다던지 하는 식으로...?"
세상에. 예상은 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내 스스로도 그렇게 한심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말을 어떻게 잘 꾸미느냐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표현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겉으로 꺼내는 순간 나라는 인간 그 자체가 구질구질해지는 느낌.... 마음 같아서는 그 즉시 주워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말을 꺼낸 이상, 대답은 들어야만 했다.
"진심이야?"
그녀의 반응만은 내 예상과 달랐다. 그녀는 기겁하거나 당황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저 내게 낮은 목소리로 되물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짧고 진지한 반문이야말로 가장 나를 두렵게 만드는 반응이라는걸 나는 듣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라고 대답할 뻔한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냥... 만약 내가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못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할 건데? 나 몰래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닐 거야?"
"그, 그 때는.... 내가 그냥 감수해야겠지."
오히려 그녀의 또박또박한 반응 때문에 나는 되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만다. 이래서는 안 된다. 기왕 솔직해지기로 한 거라면 정말로 진솔해져야하니까.
"싫어."
"응?"
"싫다구. 그런거.... 아무리 그래도 그런건 그냥 바람 피는 거랑 다를게 없잖아. 그럴 거면 오빠가 나를 떠나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게 맞는거 아닐까?"
"으, 으응... 그렇지."
물론 그녀의 말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그냥 생각해본거야... 너도 우리 사이의 그런 부분 때문에 많이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네가 나랑 헤어지고 싶지 않듯이 나도 너랑 헤어지기 싫으니까. 만약 그런 부분이 앞으로 정말 큰 문제가 된다면 그 때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게 좋을지 나도 한번씩 생각해보곤 해. 그래서 물어본거야... 별다른 뜻은 없었어."
"정말이야?"
"응?"
"정말 별 다른 뜻이 없는거 맞냐구...."
어둠 속에서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망울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눈을 마주보면서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정말로 불가항력이었다.
"응... 물론이지."
현주는 꽤 오랜동안 다시 침묵을 지켰다. 조명이 꺼진 아늑한 침대 위에서 그녀의 작은 뒤척거림까지 생생히 느껴져 왔다. 몸이 닿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속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녀 또한 내 마음을 읽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안해, 오빠.... 정말 미안해."
"왜 또 미안하다고 그래."
"내가 부족해서 오빠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거잖아.... 난 정말 모자란 여자친구야. 어쩌면 오빠에게 난 좋은 여자가 아닐 수도 있어. 요새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걸."
"현주야."
"오늘 오빠에게 자고 가라고 말한 것도 어쩌면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우리는 섹스 없이도 잘 사귈 수 있다고... 그런 느낌을 받고 싶었던 걸거야. 오빠는 정말 특별하니까. 다른 남자들 하곤 다르게 정말로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현주야. 나도 그건 마찬가지야."
"물론 오빠 마음을 의심하는건 아니야. 하지만 남자는 그것 때문에 힘들어지게 되어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인걸...."
눈으로 본 것이 아니었다.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슴 언저리가 촉촉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저 손을 내려 조용히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 밖에 없었다.
"난 정말 이기적인 여자인가봐 오빠...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란걸 알면서도 오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걸 상상하고 싶지 않아. 오빠는 나만 좋아했으면 좋겠어. 내가 오빠에게 해줄 수 없는게 오빠에겐 얼마나 큰 부분인지 알면서도 그게 내 솔직한 욕심인걸. 나 정말 못 됐다. 그치...?"
"아니야 현주야. 그게 자연스러운거야."
"오빠가 나를 이기적으로 생각할까봐 무서워.... 어쩌면 정말로 오빠가 그런 마음을 먹는다 해도 나는 부정할 수 없을지도 몰라. 나한텐 오빠랑 헤어질 용기가 없을 테니까."
여자로서, 자존심을 버리고 그런 말을 한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상대방을 사랑해야 가능한 일인지를 나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현주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바보 같이 나 또한 눈물 한방울이 찔끔하고 흐를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 서연이의 일을 비밀로 하는 것이.... 결국 최선의 방법일까?
"현주야. 뭐해?"
"가만 있어줘, 오빠...."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머릿 속이 복잡했지만 몸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내 품에 안겨 이야기만 하고 있었던 현주가 몸을 움직여 내 위에 올라탄 것이었다. 그 저돌적이고 갑작스런 움직임 앞에 나는 굳어버렸지만 그 이상 현주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들었다.
"현주야... 뭐하려고...."
나는 망연히 넋을 놓고 현주가 내 팬티를 아래로 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내 자지는 현주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음에도 단단해질 기미 없이 그저 조용하게 죽어있었다. 그것이 물론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현주에게는 내심 서글픈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현주는 그것을 자신의 입에 덥썩 물었다.
"혀, 현주야...!"
실패로 끝났던 지난번 섹스 직전까지의 애무 이후 우리 사이엔 이렇다 할 만한 스킨십 행위가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우리 둘 다 유지해왔기에 그녀의 이런 행동은 정말이지 돌발적이었다. 갑자기 난데없는 오랄이라니....
"나... 나 연습했어 오빠."
"뭐....?"
"컴퓨터로 동영상 보면서... 조금씩 연습했어. 언니한테도 비밀로 하고 몰래 한 거지만 그래도 틈틈이 보면서 공부했어. 아직은 자신이 없어서... 사실 오늘 말을 할까말까 많이 고민했어. 비록 혼자 연습한 거지만 그, 그래도 내가 오빠를 조금은 만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작게 쪼그라든 내 물건을 입에 물다말고 심호흡을 하는 현주의 모습이 그렇게나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송곳 하나가 욱신하게 내 가슴을 후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습이라니.... 세상 그 어느 여자가 성불감증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남몰래 애무를 연습한단 말인가. 그것도 모니터 너머로 혼자 싸구려 동영상이나 들여다보면서....
"무, 물론 실제로 해본 적은 없어서 오빠가 실망할 지도 몰라.... 그래도 오빠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건 오빠도 많이 힘들다는 뜻이니까. 내가 어떻게든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지금 한번 해볼게."
기껏해야 이 좁은 방에서 가족들 모르게 포르노 영상 따위나 보며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을 현주를 떠올리니 웃음은커녕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무얼 얼마나 연습했는지는 몰라도 그 연습은 결코 자신이 즐거워지기 위한 연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일 뿐이었다.
"현주야.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런 연습 같은 것도 하지 마."
"싫어.... 나도 오빠한테 뭔가 해줄 거야. 나도 할 수 있어. 내 몸으로 오빠를 받아들이는건 아직 힘들어도 이 정도는 충분히 나도 할 수 있는걸. 그러니까 제발 가만히 있어줘... 응?"
자신의 충족을 위함이 아닌 오로지 상대방의 만족을 위한 애무.... 참으로 바보 같고, 참으로 맹목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사랑이든 애무든 결국 그 본질은 그러한 감정으로 인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는 과정이다.
어떻게 순수히 상대방만을 위한 애무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지금 내게 그러한 자기희생을 감수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과연 내가 그만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인가?
"알겠어... 가만히 있을게."
성적인 흥분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마음을 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나의 물건을 다시 입에 물었고, 나는 그녀의 눈이 살짝 질끈하며 감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혀가.... 애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쭙... 쭈웁..."
서툴지만 노력이 한껏 느껴지는 혀의 움직임. 예상은 했지만 그녀는 전혀 능숙하지 못했다. 의욕만 앞선 탓에 가끔은 자지 표면에 이빨이 닿아버려 내게 통증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언니에 비하면 현주의 기교는 정말이지 하늘과 땅 차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숙하고, 또한 엉성했다. 아마도 남자의 자지를 자기 자신의 의지로 물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과거의 어느 끔찍했던 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열심이었다. 정말로 열심히.... 내 물건을 입에 물고 혀를 움직였다. 그 처연한 노력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혼자서 많은 고민을 했고, 또 실제로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쾌감이 솟기보단 오히려 가슴이 더 뭉클해질 뿐이었다.
"오, 오빠... 어때?"
그녀는 내 예상을 빗나가지 못했다. 자지 오랄을 처음 시도해본 여자답게 그녀는 오랜 시간 자지를 입에 물고 있지도 못했다. 미숙한 탓에 입 안에 자지가 들어와있으면 아직은 숨을 쉬는 것조차 불편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숨을 고르며 내 반응을 살핀다.
"으응... 기분 좋아."
"정말이야? 거짓말 하는거 아냐?"
"아냐. 정말로 좋아."
"내 눈엔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현주가 벌떡 몸을 일으켜 이번엔 내 배위로 올라온다. 마치 기승위를 하듯이 그녀는 내 복부를 깔고 앉아 나를 마주보았다. 나도 상반신을 더욱 일으켜 그녀와 눈높이를 마주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더니, 자연스럽게 이끌어 그녀의 젖가슴 위에 스르르 얹어놓았다.
"그리고 오빠가 원한다면.... 몸 만지는 것 정도는 괜찮아. 그 정도는 나도 참을 수 있어. 아, 아니... 참는다는 표현은 사실 옳지 않아. 나도 원하는 거니까."
"현주야...."
마음 한 구석에서 애써 억눌러왔던 무언가가 그 순간 울컥하고 터져버렸다. 더는 그녀의 애절한 노력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더이상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으로 주워담고 말고를 생각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내가 얼마나 더 기만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현주야, 미안해."
"으응...? 뭐가?"
여전히 그녀는 그녀 자신의 손으로 내가 그녀의 몸을 만지도록 이끌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끌어내린 후, 최대한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의 두 눈을 마주보고 말했다.
"사실은 너한테 거짓말을 했어."
"거짓말.... 이라니?"
말해야만 했다.... 여기서 피해버리면 아마 영영 비밀로 할 수 밖에 없을 테니.
"나... 다른 여자랑 잤어."
결국 입 밖으로 나오고 마는 짧은 한 마디. 한 마디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도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그 말.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지는.... 너무도 무겁게 그 뒤에 이어지는 불편한 정적. 두 눈망울만 깜빡이는 현주의 표정을 보며, 잠시 동안 나의 세상이 얼어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자하고도.... 사귀고 싶어."
그 뒤를 이은 나의 말은 비록 있는 그대로 진솔했지만, 아마도.... 그녀에게 있어선 너무도 가혹했을 터였다.
*
"헤이~ 사랑하는 내 동생! 언니 왔다~~ 벌써 자니?"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이닥친 것은 어찌보면 신의 장난이었을 것이다. 망연자실하게 굳어있던 현주의 얼굴이 마치 기계처럼 뻣뻣하게 돌아가, 문 앞을 가득 메우고 서 있는 그녀의 언니를 발견했다.
놀란 것은 나나 현주 뿐만이 아니었다. 방 문을 벌컥 열었던 현아조차도 침대 위의 우리 두 사람 모습을 보고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쩍하니 굳어버렸다. 그 침묵은 지독할 정도로 오래 이어졌다. 하지만 나와 현주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현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어머나.... 이 상황은 뭐람?"
침대 위의 두 남녀를 보는 순간 아마도 그녀는 대강의 사정을 짐작했을 터. 문제는 우리 사이에 방금 전 오고간 대화를 그녀가 모르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게다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팬티를 무릎께까지 내린 상태였다. 그러나 그것을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우리 두 사람은, 특히 현주는 넋이 나가 있었다.
"호호... 두 사람, 혹시 내가 방해한거?"
그 어색하고 불편한 정적이 자기 때문이라고 여겼는지 현아는 어떻게든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심지어 그녀의 언니에게서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현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하~~ 알겠다. 현주 너 내가 오늘 집에 안 들어온다고 해서 성진 씨 불렀던 거구나? 그래서 같이 있다보니까 보내기는 너무 아쉽고 허전해서 자고 가라고 한 거지? 언니도 그런거 다 알어 기집애야~ 나도 가끔 남자 데려올 때 있잖아. 호호. 아빠나 엄마가 알면 화내겠지만 특별히 난 너그럽게 못 본 척 넘어가줄게. 그러니까 인상 풀어~~"
"......."
"사실은 오늘 고객 약속이 취소되서 말야~ 밖에서 잘까 하다가 그냥 집에 왔지 뭐. 이럴 줄 알았으면 들어오지 말걸 그랬나? 헤헤.... 좋은 시간 방해한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하네. 다시 나가줄까?"
현아는 심지어 주책스러워 보일 만큼 혼자서 길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주는 굳어져 말이 없었고, 때문에 나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현아는 그것이 현주의 수줍음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저기... 그보다 성진 씨는 속옷이라도 좀 입는게...."
"나가, 언니."
그러자 현주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로 그녀는 한 마디를 뱉었다.
"현주야.... 화 났어?"
"나가라구, 빨리!"
"아, 알았어. 나갈게. 나가면 되잖아.... 기집애 정말 성질은...."
현주의 목소리가 언젠가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그 모습처럼 크게 높아졌다. 움찔한 현아가 방 문을 닫고 이내 사라졌고, 현주는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오빠."
"응...."
"거짓말이지?"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아래로 흘려내려 그녀의 숙인 얼굴과 표정, 그리고 두 눈을 감추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내 몸 위에 태운 채로.... 힘겹게 다시 한번 그녀에게 진실을 고했다.
"거짓말 아냐... 다른 여자랑 잤어."
"무슨 말이야, 그게....?"
"......."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일지 몰랐지만, 애초에 이 상황에 어울릴 만한 행동이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막연한 기분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나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 거센 몸짓의 분노를 그대로 담은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무슨 말이냐고, 그게!!!"
고개를 홱 들면서 소리 지르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까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조차 고여있지 않았다. 그 어떤 말로도 지금의 상황을 명약관화하게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녀와 충분한 대화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두 사람?"
현주의 목소리를 듣고 현아가 다시 방 문을 열어젖혔다. 싸우는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동생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심상치 않은 그녀의 목소리를 현아도 나름대로 느낀 것일 터였다.
현주와 현아.... 그리고 나. 현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로 얽혀있는 세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었다. 서연이의 일을 현주에게 고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그녀의 언니와 내게 있었던 일까지도 끄집어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지만 그 이전에 서연이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이미 현주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오빠."
"......."
"장난이었다고.... 말하란 말이야."
"미안해."
"뭐가 미안해!!! 빨리 말하란 말이야!"
현주가 내 멱살을 두 손으로 잡아올렸다. 나는 그녀가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걸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게 결코 일반적인 행동이 아니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언니인 현아조차도 소스라치게 놀라 허겁지겁 그녀를 말리러 달려왔기에.
"혀, 현주야. 너 왜 그래....?"
"저리 가!"
"아악!"
말리려 드는 언니의 손길마저 거칠게 뿌리치는 현주였다. 뿌리치는 손짓이 얼마나 거칠었던지 현아가 동생의 밀쳐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털썩 주저앉은 현아가 멍한 눈으로 현주를 올려다보았다. 현주는 여전히 내 목을 틀어올린 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뒷말을 이었다.
"오빠가 그럴 리가 없잖아.... 오빠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내가 차라리 시간이 멈추길 바랐을 정도로, 정말이지 그것은 지독한 순간이었다. 나도 현주도,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현아도.... 누구 하나 말이 없었다. 우리는 긴 침묵 속에서 정적을 지키며, 한동안 그렇게 굳어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3일 이상 연재텀이 길어지면 미리 공지를 드린다고 말씀드렸는데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실 24일 오전에 올리려고 했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하루나 더 늦어져 버렸네요...
그리고 내용 중에 유정이와 유성이의 호칭 쓰임에 충분히 혼동을 느끼실 수 있는데, 일단 지금은 주인공인 성진만이 유정이를 유정이라 부르고 그 외 기타 일상에서 쓰이는 유정이의 이름은 "유성이"가 맞습니다. 공식적으로 호적상 그녀의 이름은 한유성이니까요 ^^ 유정이의 이름은 유정이가 성진에게만 허락한 특별한 이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듯 합니다
5월달의 바빴던 주기가 어느 정도 지나간 느낌이네요
6월에 다시 바쁠 시기가 찾아오겠지만 어쩔 수 없겠죠
한숨 돌리며 휴식하면서 다음 30장은 비교적 빠르게 써볼 생각입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독자분들~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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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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