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31장
서연이는 고마울 정도로 영리한 여자였다. 그녀는 그 상황에서 당황하거나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먼저 화를 내거나 따지고 들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굳어있는 내 팔을 등 뒤에서 보일듯 말듯 두어번 두드린 후 내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은 같이 있기 힘들겠다."
"그게..."
"천천히 얘기해. 두 사람이 해결 봐야 하는 문제잖아."
뭐라 대답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있는 나를 두고 서연이가 등을 돌렸다. 그 자리에서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였을 터였다. 하지만 서연이가 채 한발짝을 떼기도 전에 나지막한 현주의 목소리가 그녀의 걸음을 붙잡아세웠다. 비록 현주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희미하고 연약했지만 그 지독한 정적을 산산히 뚫고 서연이의 귓가에 선명하게 다다랐다.
"너야?"
"......."
서연이도 비록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현주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낀 것 같았다. 여전히 등을 돌리고 서있는 서연이에게 현주는 이어서 말했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얼굴이네. 결국 남의 남자를 그렇게 빼앗고나니 기분이 아주 즐거운가봐."
"......."
"타인의 사랑을 깨뜨리면서 보란 듯이 우월감이라도 느끼나보지? 같은 여자로서 당신이 똑같이 그대로 당해서 비참해지길 간절히 빌거야."
현주를 말려야 한다는걸 느꼈다. 그건 분명히 내 몫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자기혐오에나 시달리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서연이가 애써 무시하고 그대로 가주기만을 바랐지만 그녀는 말없이 사라지는 대신 결국 뒤돌아서고 말았다.
"빼앗은 적 없어요. 깨뜨린 적도 없구요."
"뭐라구?"
"다만 나도 일부를 차지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성진 선배의 마음이 이미 당신에게 가있는걸 알면서도 나는 이 남자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그런 내 감정을 스스로 받아들였죠. 비록 마음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이 사람에겐 있었어요. 그건 당신이 결코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었죠. 안 그런가요?"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서연이의 말에 현주가 멍하니 할 말을 잃고 굳어졌다. 폐부를 찌르는 서연이의 말은 현주가 가진 가장 큰 상처를 고스란히 후벼파는 것과 동시에, 나와 현주 사이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서연이가 이미 알고 있음을 최악의 형태로 드러낸거나 다름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서연이에게 현주의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을 후회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에게 더욱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지 못해서 후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현주에게 있었던 과거의 일을 서연이가 정확하게 알았더라면 같은 여자로서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현주를 단순히 혼전순결녀 쯤으로 알고 있는 서연이는 너무도 거침없이 그녀의 약점을 찌르고 말았다.
"우, 웃기지 마... 네가 한 짓은 그저 더럽고 파렴치한 짓일 뿐이야."
"그렇게 말해도 좋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선배는 당신보다 나하고 있을 때 더 행복해 해요. 당신이 해줄 수 없는걸 나는 해줄 수 있으니까요."
"......."
"선배가 나와 진지한 관계를 맺기로 하고 그걸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다고 했을때, 나는 그걸 받아들였어요. 비록 나 역시 한 남자를 둘로 나눈다는 기분이 싫었지만 선배가 당신을 포기하는게 힘든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이해하기로 마음 먹은 거에요. 난 당신에게 선배를 반으로 나눠서 한쪽을 달라고 말하지 않을 거에요. 그저 당신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내가 채울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뿐이에요."
"다, 닥쳐 이 뻔뻔한 년!! 고작해야 바람 피운걸 가지고 그딴 식으로 정당화 하지마! 어, 어디서 그런 궤변을..."
현주는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현주가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노발대발하며 서연이의 머리채를 쥐어뜯는다한들 이상하게 여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서연이의 말에 평정을 잃는 이유는 그러한 문제로 인해 자기 자신이 평소에 수도 없이 느껴왔던 자괴감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현주를 몰아세우고 있는 서연이조차도 스스로가 하는 말이 한 여자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내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하리라.
"나는 내 입장과 감정을 전달한 것 뿐이에요. 나머지는 두 사람이 해결해요."
이번에야말로 돌아서서 걸어가버리는 서연이. 현주조차 이번에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붙잡지 못했다. 현주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눈길로 서연이의 등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흑.... 흐흑.... 엉엉...."
서럽게 허물어져 하염없이 흐느끼는 현주.... 어디까지나 그녀는 아직도 내 여자친구였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통곡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를 달래줄 자격이 내게 있는지 없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 내 꼴이 너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 손대지 마!"
보다 못한 내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을 때 그녀는 내 손길을 거부했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서 지금 나보다 더 혐오스런 인간이 있을까 싶었다. 그녀가 내 손길을 뿌리치는 순간 우리 사이가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 또한 느끼고 말았다.
"나쁜 놈... 나쁜 새끼..."
욕 한마디 제대로 못할 것 같았던 그녀가, 더군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욕을 했다는게 아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였기에 그녀를 그만큼 바꾸어놓고 만 것이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울었다. 차라리 막되먹은 놈처럼 그녀가 흐느끼든 말든 내버려두고 가버릴 수 있는 남자였다면 나로서도 그게 더욱 깔끔했을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멍청히 서 있는 꼴이라니....
"미안해, 현주야..."
"흑흑... 엉엉..."
"마음대로 욕해. 욕을 하든 때리든 네 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대로 해..."
비록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설마 그 말을 하자마자 현주가 정말로 나를 때릴 줄은 미처 몰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는 사람을 한번도 때려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그 두 손을 움켜쥐고 나를 마구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정말 싫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너 따위...."
물론 그것은 주먹질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팔을 휘두를 때마다 두 뺨에서 떨어진 그녀의 눈물방울들이 바닥에 흩뿌려지곤 했다. 온 몸에 꽂히는 그녀의 손길을 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입에 담아본 적 없을 그녀 나름대로의 저주와 분노를 내게 가득 쏟아낸 그녀는 지쳐서 헐떡이는 와중에도 여전히 울고 있었다.
"헤어져."
결국 그녀의 입에서 그 한마디가 나오고 말았다.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다. 애초부터 그런 관념적인 형태의 사랑이 가능할거라 생각한 것은 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현주라면 그걸 이해해 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나는 홀로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 현실적이었다.
내가 그녀의 이별 선언을 받아들인 것은 그것을 내가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더이상 현주를 상처 입히는 것이 나로서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래... 알겠어."
"......"
"미안해. 너에게 난 정말 최악이었겠구나."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질질 끌지 않고 이대로 눈 앞에서 사라져주는게 마지막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마지막 장소가 얄궂게도 내 방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녀에게도 마음을 추스르고 떠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방에 혼자 그녀를 내버려두고 나는 대문을 나왔다. 몇 시간 정도 바깥에서 있다가 들어오면 그녀는 없을 것이고, 그 후엔 모든게 끝나버리겠지. 이 방 안에서 없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그녀를 완전히 떨쳐내야 하리라. 비록 믿기지도 않고 쉽게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
몇 발짝이나 떼었을까.... 복도를 걷던 나는 다시 멈추어섰다. 걸음을 세우는 손길이 등 뒤에서 나의 팔을 조용히 붙들었다. 끌어안은 것도 아닌 그저 팔을 조용히 붙드는 힘없는 손길. 뒤돌아섰을때 현주는 여전히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그걸로 끝이야?"
그녀가 나를 더이상 오빠라고 불러주지 않는 것에 의미부여를 하고 싶진 않았다. 모든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그녀와 내가 이제 끝났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를 잡아세우고 있었다. 설마 나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걸까....
"알겠다구....? 그, 그 한 마디로 정말 다 끝인 거야? 너랑 내가 만났던 날들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다 그 한 마디로 끝나는 거야?"
"........"
"대답해 봐.... 너, 너는 그게 그렇게 쉬워? 정말로....?"
"너를 속이고 싶진 않았어."
"속일 만한 일을 왜 만들었어! 왜!"
복도가 떠나갈 듯한 그녀의 외침 소리에 몇몇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보려고 복도로 나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다시 내 손을 뿌리쳤다.
"말해 봐.... 너 정말 나를 사랑하긴 했니?"
"지금도 널 사랑해."
"헛소리 하지 마!"
"정말이야. 나는 널 사랑해.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건 아니야. 나는 단지.... 조금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나, 나눈다고? 나눌 수 있다면 그게 사랑이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거야!"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건 당연해. 하지만 나는 그게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그저 우리 사이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야. 애써 아닌 척 하거나 숨기려고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해결책을 찾는게 너와 나에게 더 좋을거라고 생각했...."
"그 해결책이 다른 여자랑 놀아나는거야? 그게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는거야!?"
"미안해.... 물론 그건 내 욕심이 섞인 것이기도 해. 하지만 네가 이해해 줄 수 있다면 우린 계속해서 잘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네가 나에게 굳이 육체적인 뭔가를 해주지 않아도...."
"나, 나도 해주기 싫어서 안 해주는게 아니야! 내가 해줄 수 없는 부분을 다른 년이 대신 해주는걸 원하는게 아니라고! 도대체 오빠에게 있어서 나는 뭐야? 갖기는 싫지만 남주기는 싫은 그런 여자일 뿐이야?"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다시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의식하고 있는 내가 싫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 그만큼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거라고 속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이 더더욱 싫었다.
내 곁에 있는 것과 나를 떠나는 것 사이에서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면 그녀를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호하게 마음 먹었지만 결국 나는 이런 인간이었다.
"흐... 흐흑... 그래... 분하지만 그 뻔뻔한 년 말이 맞아.... 내, 내가 오빠에게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 있어. 하지만.... 하지만 오빠는 내게 희망이었어. 알아? 이 남자라면 나도 언젠간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언젠가는 다른 여자들처럼 정상적으로 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고. 흐흑... 흑..."
"......."
"오빠가 나에게 그런 희망을 갖게 만들었어.... 오빠가 그렇게 만들었다구. 그래놓고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사랑하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잖아.... 흐흑...."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순간에도 그녀는 정말로 사랑에 충실한 여자였나보다....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나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거나 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포기한 그녀 내면의 울음소리 앞에 나는 더 먹먹해졌다. 마음은 이대로 그녀를 보내는걸 원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나를 위해서, 또한 그녀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 믿고 싶었다.
"오빠도.... 오빠도 결국 다른 남자랑 똑같을 뿐이야? 섹스 없이는 식어버릴 수 밖에 없는.... 그런 남자인거야? 그래서 이제는 나보다 그 년을 더 사랑하는거야?"
나에게 묻는다는건 현주가 아마도 내게서 "아니" 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지금의 이 상황을 바로잡고 싶었을 것이다. 설령 내 입에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더라도 지금의 이 모든 문제를 예전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걸 그녀 또한 알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녀에게 타임 리와인더가 있다면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을까? 나와 그녀 사이의 문제가 생기기 이전으로, 혹은 내게 이렇게 절절히 매달리기 이전으로, 그도 아니라면 그녀의 상처가 생겼던 날의 이전으로.
그런건 모른다. 비록 나는 그녀의 시간을 돌이켜 줄 수는 없지만, 마음을 먹는다면 내가 대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이 순간이 지나간 후에 내가 시간을 여기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게끔 말이다....
"그래, 나는 그런 남자야. 다른 남자들이랑 전혀 다를게 없는 평범하고 찌질한 그런 남자라구."
"......."
"그렇지만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너는 내가 너를 떠나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게 옳다고 말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지금 네 모습을 봐. 내가 만약 너보다 서연이를 더 사랑한 거라면 나도 미련없이 너를 버리고 서연이를 택했을 거야. 하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었어. 그건 누가 뭐래도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란 말이야."
"집어치워... 그, 그런 말로 오빠를 합리화 하지마!"
"받아들이는건 네 선택이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만은 네가 믿어줬으면 좋겠어. 처음엔 그저 너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관계였지만.... 그 과정에서 결국 서연이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어. 나는 그걸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너에게 숨기고 싶지도 않아. 그 선택이 결국 상황을 여기까지 만들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단지 너도 나에게 솔직해줬으면 하는 마음 뿐이야...."
"소, 솔직해달라고? 도대체 뭘 솔직하라는 거야?"
"네가 나와 정말로 헤어지고 싶은지, 네 마음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솔직하게 말해달라는거야. 보편적인 가치관이나 자존심을 떠나서.... 오직 서로의 솔직한 마음만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너만 허락해준다면 우리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난 생각해. 난 너를 사랑하고.... 그리고 너도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 아니야. 나는 오빠를 사랑하지 않아. 이, 이제는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 순간에 그녀는 내게서 얼굴을 돌렸다. 흐르는 눈물을 내게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내게 눈물을 감추던 그녀가.... 손 틈새로, 마치 이성의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감정의 외침소리처럼 절규하며 말했다.
"그래!! 아직도 오빠를 사랑해.... 그런 내가 너무 싫어서 미칠 것만 같다고!! 하지만 오빠가 하는 말은 말도 안 돼! 구역질 나는 궤변일 뿐이란 말이야. 세상 어느 누가 사랑을 반으로 나눌 수 있어?"
"네가 나에게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나는 사랑을 반으로 나누지 않을 거야. 너도, 서연이도.... 있는 그대로 다 사랑할 거야. 우린 그렇게 할 수 있어."
"싫어!! 오빠는 정말... 구질구질해! 꼴도 보기 싫다구!!"
그 말을 끝으로 현주는 뒤돌아 달려가버렸다. 여전히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뿌리며. 그녀를 붙잡기 위해 들어올렸던 손을 나는 힘없이 내렸다. 결국 안 되는 걸까?
관념적인 관계. 관념적인 연애. 관념적인 사랑.... 애초에 그것들은 관념적인 채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건지도 몰라. 나는 진솔함으로, 있는 그대로의 내면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이니까.
"하...."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자조 섞인 웃음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홀로 남게 된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현주가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현주가 다시 "오빠" 하고 나를 부르며 달려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내가 끌어안는 순간 이 모든 일들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오빠."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진 걸까?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무슨 일 있어요?"
그것은 기묘하게도.... 언제나처럼 담담하고, 또한 그러면서도 나로 하여금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바로 그런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두 눈으로, 도저히 이 장소에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한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현주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을.
"유... 정아?"
물론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가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지만....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걸까?
*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나는 멍한 눈으로 원룸 건물 입구에 서있는 유정이의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담담한 표정의 그녀는 양손으로 커다란 박스 하나를 들고 있었다.
"저 이사 왔어요."
"뭐....?"
마음이 그토록 혼잡하고 무거웠음에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에 오빠에게 말했었지 않나요? 이 근처로 이사올 생각이라고."
"아,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금방 올 줄은.... 게다가 너 그럼 혹시, 이 건물에....?"
"네. 알아보니 마침 105호가 비었더라구요. 부동산에서 중개를 받았어요. 미루다보면 방이 팔릴 것 같았거든요."
새삼스럽지만 그녀에게는 그 어떤 일이라도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사를 오겠다고는 했지만 설마하니 나와 같은 건물로 이사를 올 줄은 몰랐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들고 있는 박스가 이삿짐을 정리중인 흔적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물론 너무도 갑작스럽기도 했거니와, 또한 지금의 마음 상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기에 나는 대답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오, 오늘 학교는 그래서 안 온거야?"
"네... 짐이 별로 없어서 평일에 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주말에 할걸 그랬나봐요. 생각보단 할게 많네요."
그녀는 지적 받는 비행청소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약간은 쑥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아팠다거나 무슨 일이 있었던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약간은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그랬구나. 나는 혹시 네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줄 알고..."
"걱정하셨어요?"
"으, 응?"
별 것 아닌 말인데도 왜 괜시리 움찔하는걸까?
"걱정하셨냐구요."
"으응. 당연하지. 너 혼자 사는데 아프기라도 하면...."
그러자 그녀가 아주 옅게,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눈치도 못챌 만큼 아주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사실은 오빠한테 연락을 할까 생각을 하긴 했어요."
"왜 안 했어?"
"놀래켜주려구요. 이사 온다는걸 미리 말하면 오빠가 같은 건물인걸 알게 되니까.... 나름대로 서프라이즈랄까요?"
만약에 내가 조금만 더 평소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면 유정이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런 애교 비슷한 이벤트를 계획했다는 것만으로 그게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를 느꼈을 것이었다.
"그, 그랬구나...."
"그런데 오빠는 생각보다 그리 반가워하는 것 같지 않네요."
"응?"
"사실은 오빠가 조금 더 반가워할거라 생각했는데..."
물론 그녀가 나와 같은 건물에 이사를 왔다는건 내게 있어 정말로 굉장한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있는 그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나는 그녀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어떻게? 라는 물음이 꼬리를 물듯이 그 뒤를 이었다.
"아... 그... 미안해."
"괜찮아요. 그보다 부탁 하나 들어주실래요?"
"부탁이라니?"
"짐 정리 좀 도와주세요."
그것은 어찌보면 유혹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를 그녀의 집 안으로 들이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다른 여자도 아닌 유정이가 야릇한 의도를 담아서 내게 그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녀는 그런 말이 유혹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는게 분명했다.
그래.... 아마도 현아 같은 여자가 남자에게 그런 말을 던진다면 그건 더할 나위없이 치명적인 유혹이 되겠지.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순간에 현아가 떠오르는걸까?
"미, 미안해... 지금은 사실 머릿 속이 좀 복잡해서. 혼자 있고 싶어."
이상하게 유정이가 약간은 움찔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또한 나의 과민반응일거라 여겼다. 그녀는 여전히 담담했고, 실망한 기색이라곤 없었다. 그저 그 뿐이다.
"그래요. 괜찮아요. 사실 짐도 별로 없는걸요."
"대신 이건 들어줄게. 방으로 옮기면 되는 거야?"
"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커다란 상자를 대신 안아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옮길 만한 짐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트럭을 빌릴 것도 없이 자잘한 짐은 직접 왔다갔다하며 옮겼다나.... 우선 꼭 필요한 물건만 대충 옮기고는 주말에 나머지 다른 물건들을 옮길 예정이라고 했다.
"그럼 주말엔 꼭 도와줄게."
"안 그러셔도 돼요."
"돕고 싶어서 돕는 거야. 약속할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금새 105호 문 앞까지 다다랐다. 이곳이 유정이의 새로운 집이라고 생각하니 나 또한 덩달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말했다시피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이사 왔는데 별로 도움도 못 주고 미안...."
일부러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녀 또한 이해하는 눈치였고 나는 들고왔던 상자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등을 돌리려던 나를 어쩔 수 없이 잡아세우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온 그 의문의 목소리를 유정이도 느꼈나보다.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내 시선은 그녀가 받아든 그 상자 안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상자 내부의 어떤 물건 하나에 말이다.
"이건...."
내가 본 것은 그저 은색 빛깔을 띄고 있는 하나의 금속 물체였다. 그것은 바로 라이터였다. 제법 낡은 티가 나는.... 군데군데 실금이 나있는 투박한 디자인의 지포 라이터. 하지만 상자 속에 담긴 잡다한 그녀의 물건들 가운데서 그 라이터가 유독 내 시선을 끌었던 이유는, 분명 그것이 내가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이거 분명...."
분명 그것은 내가 보았던 것과 똑같은 생김새를 띄고 있었다. 비록 옆집 여자의 라이터는 심하게 닳아 표면이 너덜너덜하게 느껴질 만큼 낡아서 엄밀히 말하면 이것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나는 두 물체가 본능적으로 같은 물건이란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걸 왜.... 네가...."
"뭘 말씀하시는 거에요?"
"이 라이터...."
목소리를 더듬거리며 내가 상자에서 라이터를 집어들자,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그건 제 아버지의 물건이었어요. 아버지가 일본으로 가실때 두고 가셨죠. 뭐 저는 사용하지 않는 거지만.... 보고 있으면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아직도 갖고 있는 거에요."
"그, 그래...?"
"약간은 상징적인 물건이죠. 그런데 왜 그러세요? 혹시 필요하신가요?"
"아. 아냐! 아무 것도... 그럼 이만 갈게."
왠지 도망치듯이 그렇게 유정이를 두고 나는 3층으로 달려 올라왔다. 굳이 달릴 필요도 없었거늘 나는 괜히 내 방의 문 앞까지 다다라 숨을 헐떡이며 몰아쉬었다.
도대체 뭐였을까, 그 기분은....? 왜 그걸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나도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데자뷰라든가 하는 말이 머릿 속에 얼핏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복잡한 와중에 새로운 문제가 끼어드는 것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애써 이상한 감각을 스스로 밀어내면서 나는 결국 속 편한 결론을 내렸다.
"그냥 닮은 물건이었겠지...."
*
침대에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나는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유정이를 만났기 때문이었을까....? 그녀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꾸었던 그 자각몽과 비슷한 꿈을 한번 더 꾸게 되었다.
나는 또다시 시간을 헤집듯이 위를 향해 헤엄쳐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미래의 나를 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더 높이, 더 깊이....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먼 곳을 향해서.
"그래... 맞아. 바로 이런 기분이었어."
액자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이 기분. 나는 바로 이 자리에서 미래의 나를 만났었다. 그는 바로 나였지만, 나는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때와 변함없이 지금도 여전히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 바로 나의 가족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상해."
꿈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은 유독 이상했다. 도대체 왜 얼굴을 볼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때 봤던 가족들이 아냐...."
비록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육감으로 알 수 밖에 없는 사실이 있었다. 미래의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아내도, 그리고 딸도, 그 때와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가족이 다를 수가 있을까? 혹시 내가 꾸었던 꿈은, 그리고 지금 꾸고 있는 이 꿈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까?
"사내아이구나."
기묘하게도 나의 아이가, 그러니까 지금 이 꿈에서의 나의 아이가 딸이 아닌 아들이라는 것만큼은 느낄 수가 있었다. 어쩌면 지난번과 지금의 꿈이 서로 다름을 내가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내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속에서는 자꾸만 이것이 환상이 아님을 내게 전하고 있었다.
"왜지?"
왜지? 왜 자꾸 날 혼란스럽게 만드는거야? 그리고.... 왜 이 아이도 울고 있는 걸까? 그 때 그 아이처럼....
"울지 마."
나는 사내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던 것이다. 그 아픔을 실감하는 순간 나는 이 아이가 나의 아들임을 분명하게 인지했다. 손을 뻗어서라도 달래주고 싶었지만 꿈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처음으로 나는 꿈속에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메아리처럼, 그리고 절규처럼 내 꿈 속을 가득 메웠고, 나는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울지 마...."
꿈에서 깨어나면서도 나는 스스로가 그 말을 되뇌이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이야....? 울지 말라니."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내 잠든 얼굴을 내려보고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두 눈동자를 깜빡여 애써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몽사몽한 머릿 속과는 다르게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그 얼굴의 주인을 소리내어 부르고 있었다.
"현... 주야...."
"......."
나는 아직도 내가 꿈속이라 믿기로 했다. 나를 두고 떠난 현주가 다시 내 눈앞에 돌아와 있는걸 믿는 것보다는 그쪽이 차라리 받아들이기 쉬울 테니. 하지만 현주는 말없이 내 침대 발치에 걸터앉았고,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전해지는 감각은 이것이 현실임을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너... 왜 여기에...."
현주도 그렇고 유정이도 그렇고.... 오늘은 여자들이 의외의 상황에서 연이어 나타나는 날인가보다. 하지만 적어도 유정이의 일보다는 현주가 이곳에 있는게 나로서는 더 놀라운 일이었고, 꿈에서 현실로 차츰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그 놀라움은 더 커져만 갔기에 나는 그녀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나...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 그래서 온 거야...."
"뭔데....?"
부디 그녀의 부탁이 유정이의 부탁처럼 거절하기 쉬운 것이기를 바랐다. 물론 그게 무엇이든지간에 그녀의 마지막 부탁이라면 나로서는 들어줄 수 밖에 없을 거란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뒤이어 나온 그녀의 말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나랑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볼 수 있어?"
"뭐....?"
"섹스... 한번만 더 해볼 수 있냐구."
어안이 벙벙해지는 말이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되물을 뿐.
"왜...?"
그러자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는 말했다.
"오빠가 내 희망이었으니까."
"......."
"오빠랑 할 수 없다면 아마 평생 불가능할거야. 그런 기분이 들어.... 그러니까 확인하게 해줘. 내가 아직도 오빠를 사랑하고 있을때.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
그녀의 그 말은 정말로 진심이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 또한 그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강요했었다. 그러니 내게는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할 책임이 있었다. 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제발...."
그 애절한 목소리라니.... 이성이 어떻게 판단하건간에 마음이 이미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내 신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팔이 움직였고, 몸이 움직였고, 그 다음에 입술이 움직였다.
"흡...."
내 입술이 현주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와의 키스는 종종 있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왠지 찝찔한 눈물 맛이 혀 끝에서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지금껏 살면서 해봤던 키스 중에 몸과 마음이 이토록 따로 놀았던 적은 없었다.
"현주야... 나는...."
틈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이 이번엔 나의 입을 막았다. 혀가 얽히기 시작했고, 우리는 또 한차례 키스를 나누었다. 겨우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가 내게 나직히 말했다.
"지금은... 그냥 여기에 집중해줘."
의무감이라도 좋으리라. 그것이 만약 정말로 그녀의 바람이라면....
나는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벗겼다. 비록 저항은 없었지만 다가올 쾌감에 대한 한줄기 기대감을 느끼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굳어 있을 뿐.... 나는 그녀를 쉽게 알몸으로 만들었지만, 그녀의 나신은 너무도 뻣뻣해 보였다.
"그, 그럼 할게."
그럼 할게, 라니. 찌질했던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찌질한 대사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세상에 어느 찌질한 놈이 섹스 전에 그런 말을 한단 말이지?
"응..."
하지만 그 말에 곧이 곧대로 또 대답을 하는 현주였다. 나는 그녀의 가슴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지만, 결코 어떤 특별한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젖꼭지를 입에 무는 것도, 허리와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도 모두 그런 기계적인 의무감의 연장선이었다. 도저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애무를 포기하고 그녀의 다리를 좌우로 벌려버렸다. 애액이 조금도 흐르지 않은 메마른 음부가 적나라하게 눈 앞에 드러났다. 어차피 이것은 애무를 얼마나 잘하냐 못하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확인하고 싶은 것을 확인하는, 내게 있어선 그저 의무감에 의한 수순일 뿐이었다.
"괜찮겠어....?"
"괜찮아.... 해 봐."
정말로 하기 싫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녀는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웃기는 이야기란 말인가. 그녀도 나처럼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이었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받아들이는 기분을....
"아악....!"
귀두가 그녀의 질 입구를 파고들었다. 차마 다 세워지지도 않은, 심지어 지금은 흐물흐물하게까지 느껴지는 나의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뾰족한 고통의 신음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소리 낸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을 참아내겠다는 그녀 나름의 의지였다.
"현주야."
"괜찮아... 난 괜찮아! 어서 해줘...."
자지가 조금씩 질 안쪽으로 억지로 들어갈 때마다 그녀는 더욱 세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쾌감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감았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아래로 흘러 떨어졌지만 입을 가리고 있느라 그녀는 그것을 손으로 감추지 못했다.
"싫어. 못하겠어."
"오빠...!"
나는 그녀의 질에서 자지를 뽑고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말로....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억지로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난 못해. 네가 괴로워하는게 나에게도 다 느껴진단 말이야. 난 할 수 없어. 네 마지막 부탁이더라도.... 미안해."
"......."
나는 현주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눈물자국을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돌아앉은 내 뒷모습에 대고 그녀는 말했다.
"그 여자는.... 어땠어?"
"......."
"아마 나하고는 많이 달랐을거야.... 키스가 끝나고 나면 오빠는 그 여자의 몸을 어루만졌을테고, 그러면 그 여자도 자연스럽게 오빠의 몸을 만졌겠지. 두 사람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눴을 거야. 거기엔 내가 절대로 흉내내지 못하는 뜨거움이 있었겠지...."
"......."
"나쁜 년.... 재수 없는 년.... 남의 남자 빼앗아간 못되먹은 년...."
무릎을 끌어안고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은 현주가 기어코 또다시 눈물 한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하지만 흐느끼는 소리만은 내지 않은채 그녀는 입술을 악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년이.... 그 나쁜 년이 너무 부러워.... 미치도록 질투나...."
"현주야...."
떨리는 그녀의 알몸을 나는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녀가 아까처럼 내 손길을 뿌리치지 않는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내가 더이상 그녀에게 뭘 해줄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부탁이야, 오빠."
"미안해.... 그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 없어."
"그게 아니야. 다른 부탁이 있어...."
눈물이 맺힌 눈을 내게 보이지 않으려는듯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품 안에 잠긴 그녀의 입에서 희미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내 눈 앞에서.... 그 여자랑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줘."
"뭐...?"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처음에 이해하질 못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야?"
머리로 이해한다고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마치 내가 현주에게 꺼냈던 관념적인 형태의 사랑처럼.... 하지만 현주는 너무도 분명하게, 적어도 나보다는 분명하게, 그녀의 바람을 나에게 전달했다.
"내가 보는 앞에서.... 그 여자랑 섹스해보라구."
물론 현주가 그랬듯이, 나 또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때까지는.
- 다음 화에 계속 -
날씨가 눈에 띄게 무더워지는군요. 여름이 오는건 달갑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은 편안한 주말입니다.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 독자님들도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더위 조심,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31장
서연이는 고마울 정도로 영리한 여자였다. 그녀는 그 상황에서 당황하거나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먼저 화를 내거나 따지고 들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굳어있는 내 팔을 등 뒤에서 보일듯 말듯 두어번 두드린 후 내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은 같이 있기 힘들겠다."
"그게..."
"천천히 얘기해. 두 사람이 해결 봐야 하는 문제잖아."
뭐라 대답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있는 나를 두고 서연이가 등을 돌렸다. 그 자리에서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였을 터였다. 하지만 서연이가 채 한발짝을 떼기도 전에 나지막한 현주의 목소리가 그녀의 걸음을 붙잡아세웠다. 비록 현주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희미하고 연약했지만 그 지독한 정적을 산산히 뚫고 서연이의 귓가에 선명하게 다다랐다.
"너야?"
"......."
서연이도 비록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현주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낀 것 같았다. 여전히 등을 돌리고 서있는 서연이에게 현주는 이어서 말했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얼굴이네. 결국 남의 남자를 그렇게 빼앗고나니 기분이 아주 즐거운가봐."
"......."
"타인의 사랑을 깨뜨리면서 보란 듯이 우월감이라도 느끼나보지? 같은 여자로서 당신이 똑같이 그대로 당해서 비참해지길 간절히 빌거야."
현주를 말려야 한다는걸 느꼈다. 그건 분명히 내 몫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자기혐오에나 시달리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서연이가 애써 무시하고 그대로 가주기만을 바랐지만 그녀는 말없이 사라지는 대신 결국 뒤돌아서고 말았다.
"빼앗은 적 없어요. 깨뜨린 적도 없구요."
"뭐라구?"
"다만 나도 일부를 차지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성진 선배의 마음이 이미 당신에게 가있는걸 알면서도 나는 이 남자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그런 내 감정을 스스로 받아들였죠. 비록 마음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이 사람에겐 있었어요. 그건 당신이 결코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었죠. 안 그런가요?"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서연이의 말에 현주가 멍하니 할 말을 잃고 굳어졌다. 폐부를 찌르는 서연이의 말은 현주가 가진 가장 큰 상처를 고스란히 후벼파는 것과 동시에, 나와 현주 사이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서연이가 이미 알고 있음을 최악의 형태로 드러낸거나 다름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서연이에게 현주의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을 후회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에게 더욱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지 못해서 후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현주에게 있었던 과거의 일을 서연이가 정확하게 알았더라면 같은 여자로서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현주를 단순히 혼전순결녀 쯤으로 알고 있는 서연이는 너무도 거침없이 그녀의 약점을 찌르고 말았다.
"우, 웃기지 마... 네가 한 짓은 그저 더럽고 파렴치한 짓일 뿐이야."
"그렇게 말해도 좋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선배는 당신보다 나하고 있을 때 더 행복해 해요. 당신이 해줄 수 없는걸 나는 해줄 수 있으니까요."
"......."
"선배가 나와 진지한 관계를 맺기로 하고 그걸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다고 했을때, 나는 그걸 받아들였어요. 비록 나 역시 한 남자를 둘로 나눈다는 기분이 싫었지만 선배가 당신을 포기하는게 힘든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이해하기로 마음 먹은 거에요. 난 당신에게 선배를 반으로 나눠서 한쪽을 달라고 말하지 않을 거에요. 그저 당신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내가 채울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뿐이에요."
"다, 닥쳐 이 뻔뻔한 년!! 고작해야 바람 피운걸 가지고 그딴 식으로 정당화 하지마! 어, 어디서 그런 궤변을..."
현주는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현주가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노발대발하며 서연이의 머리채를 쥐어뜯는다한들 이상하게 여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서연이의 말에 평정을 잃는 이유는 그러한 문제로 인해 자기 자신이 평소에 수도 없이 느껴왔던 자괴감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현주를 몰아세우고 있는 서연이조차도 스스로가 하는 말이 한 여자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내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하리라.
"나는 내 입장과 감정을 전달한 것 뿐이에요. 나머지는 두 사람이 해결해요."
이번에야말로 돌아서서 걸어가버리는 서연이. 현주조차 이번에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붙잡지 못했다. 현주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눈길로 서연이의 등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흑.... 흐흑.... 엉엉...."
서럽게 허물어져 하염없이 흐느끼는 현주.... 어디까지나 그녀는 아직도 내 여자친구였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통곡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를 달래줄 자격이 내게 있는지 없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 내 꼴이 너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 손대지 마!"
보다 못한 내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을 때 그녀는 내 손길을 거부했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서 지금 나보다 더 혐오스런 인간이 있을까 싶었다. 그녀가 내 손길을 뿌리치는 순간 우리 사이가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 또한 느끼고 말았다.
"나쁜 놈... 나쁜 새끼..."
욕 한마디 제대로 못할 것 같았던 그녀가, 더군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욕을 했다는게 아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였기에 그녀를 그만큼 바꾸어놓고 만 것이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울었다. 차라리 막되먹은 놈처럼 그녀가 흐느끼든 말든 내버려두고 가버릴 수 있는 남자였다면 나로서도 그게 더욱 깔끔했을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멍청히 서 있는 꼴이라니....
"미안해, 현주야..."
"흑흑... 엉엉..."
"마음대로 욕해. 욕을 하든 때리든 네 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대로 해..."
비록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설마 그 말을 하자마자 현주가 정말로 나를 때릴 줄은 미처 몰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는 사람을 한번도 때려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그 두 손을 움켜쥐고 나를 마구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정말 싫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너 따위...."
물론 그것은 주먹질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팔을 휘두를 때마다 두 뺨에서 떨어진 그녀의 눈물방울들이 바닥에 흩뿌려지곤 했다. 온 몸에 꽂히는 그녀의 손길을 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입에 담아본 적 없을 그녀 나름대로의 저주와 분노를 내게 가득 쏟아낸 그녀는 지쳐서 헐떡이는 와중에도 여전히 울고 있었다.
"헤어져."
결국 그녀의 입에서 그 한마디가 나오고 말았다.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다. 애초부터 그런 관념적인 형태의 사랑이 가능할거라 생각한 것은 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현주라면 그걸 이해해 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나는 홀로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 현실적이었다.
내가 그녀의 이별 선언을 받아들인 것은 그것을 내가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더이상 현주를 상처 입히는 것이 나로서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래... 알겠어."
"......"
"미안해. 너에게 난 정말 최악이었겠구나."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질질 끌지 않고 이대로 눈 앞에서 사라져주는게 마지막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마지막 장소가 얄궂게도 내 방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녀에게도 마음을 추스르고 떠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방에 혼자 그녀를 내버려두고 나는 대문을 나왔다. 몇 시간 정도 바깥에서 있다가 들어오면 그녀는 없을 것이고, 그 후엔 모든게 끝나버리겠지. 이 방 안에서 없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그녀를 완전히 떨쳐내야 하리라. 비록 믿기지도 않고 쉽게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
몇 발짝이나 떼었을까.... 복도를 걷던 나는 다시 멈추어섰다. 걸음을 세우는 손길이 등 뒤에서 나의 팔을 조용히 붙들었다. 끌어안은 것도 아닌 그저 팔을 조용히 붙드는 힘없는 손길. 뒤돌아섰을때 현주는 여전히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그걸로 끝이야?"
그녀가 나를 더이상 오빠라고 불러주지 않는 것에 의미부여를 하고 싶진 않았다. 모든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그녀와 내가 이제 끝났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를 잡아세우고 있었다. 설마 나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걸까....
"알겠다구....? 그, 그 한 마디로 정말 다 끝인 거야? 너랑 내가 만났던 날들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다 그 한 마디로 끝나는 거야?"
"........"
"대답해 봐.... 너, 너는 그게 그렇게 쉬워? 정말로....?"
"너를 속이고 싶진 않았어."
"속일 만한 일을 왜 만들었어! 왜!"
복도가 떠나갈 듯한 그녀의 외침 소리에 몇몇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보려고 복도로 나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다시 내 손을 뿌리쳤다.
"말해 봐.... 너 정말 나를 사랑하긴 했니?"
"지금도 널 사랑해."
"헛소리 하지 마!"
"정말이야. 나는 널 사랑해.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건 아니야. 나는 단지.... 조금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나, 나눈다고? 나눌 수 있다면 그게 사랑이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거야!"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건 당연해. 하지만 나는 그게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그저 우리 사이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야. 애써 아닌 척 하거나 숨기려고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해결책을 찾는게 너와 나에게 더 좋을거라고 생각했...."
"그 해결책이 다른 여자랑 놀아나는거야? 그게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는거야!?"
"미안해.... 물론 그건 내 욕심이 섞인 것이기도 해. 하지만 네가 이해해 줄 수 있다면 우린 계속해서 잘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네가 나에게 굳이 육체적인 뭔가를 해주지 않아도...."
"나, 나도 해주기 싫어서 안 해주는게 아니야! 내가 해줄 수 없는 부분을 다른 년이 대신 해주는걸 원하는게 아니라고! 도대체 오빠에게 있어서 나는 뭐야? 갖기는 싫지만 남주기는 싫은 그런 여자일 뿐이야?"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다시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의식하고 있는 내가 싫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 그만큼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거라고 속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이 더더욱 싫었다.
내 곁에 있는 것과 나를 떠나는 것 사이에서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면 그녀를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호하게 마음 먹었지만 결국 나는 이런 인간이었다.
"흐... 흐흑... 그래... 분하지만 그 뻔뻔한 년 말이 맞아.... 내, 내가 오빠에게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 있어. 하지만.... 하지만 오빠는 내게 희망이었어. 알아? 이 남자라면 나도 언젠간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언젠가는 다른 여자들처럼 정상적으로 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고. 흐흑... 흑..."
"......."
"오빠가 나에게 그런 희망을 갖게 만들었어.... 오빠가 그렇게 만들었다구. 그래놓고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사랑하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잖아.... 흐흑...."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순간에도 그녀는 정말로 사랑에 충실한 여자였나보다....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나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거나 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포기한 그녀 내면의 울음소리 앞에 나는 더 먹먹해졌다. 마음은 이대로 그녀를 보내는걸 원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나를 위해서, 또한 그녀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 믿고 싶었다.
"오빠도.... 오빠도 결국 다른 남자랑 똑같을 뿐이야? 섹스 없이는 식어버릴 수 밖에 없는.... 그런 남자인거야? 그래서 이제는 나보다 그 년을 더 사랑하는거야?"
나에게 묻는다는건 현주가 아마도 내게서 "아니" 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지금의 이 상황을 바로잡고 싶었을 것이다. 설령 내 입에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더라도 지금의 이 모든 문제를 예전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걸 그녀 또한 알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녀에게 타임 리와인더가 있다면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을까? 나와 그녀 사이의 문제가 생기기 이전으로, 혹은 내게 이렇게 절절히 매달리기 이전으로, 그도 아니라면 그녀의 상처가 생겼던 날의 이전으로.
그런건 모른다. 비록 나는 그녀의 시간을 돌이켜 줄 수는 없지만, 마음을 먹는다면 내가 대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이 순간이 지나간 후에 내가 시간을 여기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게끔 말이다....
"그래, 나는 그런 남자야. 다른 남자들이랑 전혀 다를게 없는 평범하고 찌질한 그런 남자라구."
"......."
"그렇지만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너는 내가 너를 떠나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게 옳다고 말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지금 네 모습을 봐. 내가 만약 너보다 서연이를 더 사랑한 거라면 나도 미련없이 너를 버리고 서연이를 택했을 거야. 하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었어. 그건 누가 뭐래도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란 말이야."
"집어치워... 그, 그런 말로 오빠를 합리화 하지마!"
"받아들이는건 네 선택이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만은 네가 믿어줬으면 좋겠어. 처음엔 그저 너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관계였지만.... 그 과정에서 결국 서연이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어. 나는 그걸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너에게 숨기고 싶지도 않아. 그 선택이 결국 상황을 여기까지 만들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단지 너도 나에게 솔직해줬으면 하는 마음 뿐이야...."
"소, 솔직해달라고? 도대체 뭘 솔직하라는 거야?"
"네가 나와 정말로 헤어지고 싶은지, 네 마음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솔직하게 말해달라는거야. 보편적인 가치관이나 자존심을 떠나서.... 오직 서로의 솔직한 마음만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너만 허락해준다면 우리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난 생각해. 난 너를 사랑하고.... 그리고 너도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 아니야. 나는 오빠를 사랑하지 않아. 이, 이제는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 순간에 그녀는 내게서 얼굴을 돌렸다. 흐르는 눈물을 내게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내게 눈물을 감추던 그녀가.... 손 틈새로, 마치 이성의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감정의 외침소리처럼 절규하며 말했다.
"그래!! 아직도 오빠를 사랑해.... 그런 내가 너무 싫어서 미칠 것만 같다고!! 하지만 오빠가 하는 말은 말도 안 돼! 구역질 나는 궤변일 뿐이란 말이야. 세상 어느 누가 사랑을 반으로 나눌 수 있어?"
"네가 나에게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나는 사랑을 반으로 나누지 않을 거야. 너도, 서연이도.... 있는 그대로 다 사랑할 거야. 우린 그렇게 할 수 있어."
"싫어!! 오빠는 정말... 구질구질해! 꼴도 보기 싫다구!!"
그 말을 끝으로 현주는 뒤돌아 달려가버렸다. 여전히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뿌리며. 그녀를 붙잡기 위해 들어올렸던 손을 나는 힘없이 내렸다. 결국 안 되는 걸까?
관념적인 관계. 관념적인 연애. 관념적인 사랑.... 애초에 그것들은 관념적인 채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건지도 몰라. 나는 진솔함으로, 있는 그대로의 내면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이니까.
"하...."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자조 섞인 웃음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홀로 남게 된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현주가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현주가 다시 "오빠" 하고 나를 부르며 달려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내가 끌어안는 순간 이 모든 일들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오빠."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진 걸까?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무슨 일 있어요?"
그것은 기묘하게도.... 언제나처럼 담담하고, 또한 그러면서도 나로 하여금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바로 그런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두 눈으로, 도저히 이 장소에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한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현주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을.
"유... 정아?"
물론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가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지만....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걸까?
*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나는 멍한 눈으로 원룸 건물 입구에 서있는 유정이의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담담한 표정의 그녀는 양손으로 커다란 박스 하나를 들고 있었다.
"저 이사 왔어요."
"뭐....?"
마음이 그토록 혼잡하고 무거웠음에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에 오빠에게 말했었지 않나요? 이 근처로 이사올 생각이라고."
"아,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금방 올 줄은.... 게다가 너 그럼 혹시, 이 건물에....?"
"네. 알아보니 마침 105호가 비었더라구요. 부동산에서 중개를 받았어요. 미루다보면 방이 팔릴 것 같았거든요."
새삼스럽지만 그녀에게는 그 어떤 일이라도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사를 오겠다고는 했지만 설마하니 나와 같은 건물로 이사를 올 줄은 몰랐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들고 있는 박스가 이삿짐을 정리중인 흔적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물론 너무도 갑작스럽기도 했거니와, 또한 지금의 마음 상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기에 나는 대답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오, 오늘 학교는 그래서 안 온거야?"
"네... 짐이 별로 없어서 평일에 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주말에 할걸 그랬나봐요. 생각보단 할게 많네요."
그녀는 지적 받는 비행청소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약간은 쑥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아팠다거나 무슨 일이 있었던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약간은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그랬구나. 나는 혹시 네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줄 알고..."
"걱정하셨어요?"
"으, 응?"
별 것 아닌 말인데도 왜 괜시리 움찔하는걸까?
"걱정하셨냐구요."
"으응. 당연하지. 너 혼자 사는데 아프기라도 하면...."
그러자 그녀가 아주 옅게,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눈치도 못챌 만큼 아주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사실은 오빠한테 연락을 할까 생각을 하긴 했어요."
"왜 안 했어?"
"놀래켜주려구요. 이사 온다는걸 미리 말하면 오빠가 같은 건물인걸 알게 되니까.... 나름대로 서프라이즈랄까요?"
만약에 내가 조금만 더 평소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면 유정이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런 애교 비슷한 이벤트를 계획했다는 것만으로 그게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를 느꼈을 것이었다.
"그, 그랬구나...."
"그런데 오빠는 생각보다 그리 반가워하는 것 같지 않네요."
"응?"
"사실은 오빠가 조금 더 반가워할거라 생각했는데..."
물론 그녀가 나와 같은 건물에 이사를 왔다는건 내게 있어 정말로 굉장한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있는 그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나는 그녀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어떻게? 라는 물음이 꼬리를 물듯이 그 뒤를 이었다.
"아... 그... 미안해."
"괜찮아요. 그보다 부탁 하나 들어주실래요?"
"부탁이라니?"
"짐 정리 좀 도와주세요."
그것은 어찌보면 유혹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를 그녀의 집 안으로 들이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다른 여자도 아닌 유정이가 야릇한 의도를 담아서 내게 그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녀는 그런 말이 유혹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는게 분명했다.
그래.... 아마도 현아 같은 여자가 남자에게 그런 말을 던진다면 그건 더할 나위없이 치명적인 유혹이 되겠지.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순간에 현아가 떠오르는걸까?
"미, 미안해... 지금은 사실 머릿 속이 좀 복잡해서. 혼자 있고 싶어."
이상하게 유정이가 약간은 움찔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또한 나의 과민반응일거라 여겼다. 그녀는 여전히 담담했고, 실망한 기색이라곤 없었다. 그저 그 뿐이다.
"그래요. 괜찮아요. 사실 짐도 별로 없는걸요."
"대신 이건 들어줄게. 방으로 옮기면 되는 거야?"
"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커다란 상자를 대신 안아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옮길 만한 짐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트럭을 빌릴 것도 없이 자잘한 짐은 직접 왔다갔다하며 옮겼다나.... 우선 꼭 필요한 물건만 대충 옮기고는 주말에 나머지 다른 물건들을 옮길 예정이라고 했다.
"그럼 주말엔 꼭 도와줄게."
"안 그러셔도 돼요."
"돕고 싶어서 돕는 거야. 약속할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금새 105호 문 앞까지 다다랐다. 이곳이 유정이의 새로운 집이라고 생각하니 나 또한 덩달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말했다시피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이사 왔는데 별로 도움도 못 주고 미안...."
일부러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녀 또한 이해하는 눈치였고 나는 들고왔던 상자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등을 돌리려던 나를 어쩔 수 없이 잡아세우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온 그 의문의 목소리를 유정이도 느꼈나보다.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내 시선은 그녀가 받아든 그 상자 안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상자 내부의 어떤 물건 하나에 말이다.
"이건...."
내가 본 것은 그저 은색 빛깔을 띄고 있는 하나의 금속 물체였다. 그것은 바로 라이터였다. 제법 낡은 티가 나는.... 군데군데 실금이 나있는 투박한 디자인의 지포 라이터. 하지만 상자 속에 담긴 잡다한 그녀의 물건들 가운데서 그 라이터가 유독 내 시선을 끌었던 이유는, 분명 그것이 내가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이거 분명...."
분명 그것은 내가 보았던 것과 똑같은 생김새를 띄고 있었다. 비록 옆집 여자의 라이터는 심하게 닳아 표면이 너덜너덜하게 느껴질 만큼 낡아서 엄밀히 말하면 이것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나는 두 물체가 본능적으로 같은 물건이란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걸 왜.... 네가...."
"뭘 말씀하시는 거에요?"
"이 라이터...."
목소리를 더듬거리며 내가 상자에서 라이터를 집어들자,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그건 제 아버지의 물건이었어요. 아버지가 일본으로 가실때 두고 가셨죠. 뭐 저는 사용하지 않는 거지만.... 보고 있으면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아직도 갖고 있는 거에요."
"그, 그래...?"
"약간은 상징적인 물건이죠. 그런데 왜 그러세요? 혹시 필요하신가요?"
"아. 아냐! 아무 것도... 그럼 이만 갈게."
왠지 도망치듯이 그렇게 유정이를 두고 나는 3층으로 달려 올라왔다. 굳이 달릴 필요도 없었거늘 나는 괜히 내 방의 문 앞까지 다다라 숨을 헐떡이며 몰아쉬었다.
도대체 뭐였을까, 그 기분은....? 왜 그걸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나도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데자뷰라든가 하는 말이 머릿 속에 얼핏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복잡한 와중에 새로운 문제가 끼어드는 것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애써 이상한 감각을 스스로 밀어내면서 나는 결국 속 편한 결론을 내렸다.
"그냥 닮은 물건이었겠지...."
*
침대에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나는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유정이를 만났기 때문이었을까....? 그녀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꾸었던 그 자각몽과 비슷한 꿈을 한번 더 꾸게 되었다.
나는 또다시 시간을 헤집듯이 위를 향해 헤엄쳐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미래의 나를 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더 높이, 더 깊이....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먼 곳을 향해서.
"그래... 맞아. 바로 이런 기분이었어."
액자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이 기분. 나는 바로 이 자리에서 미래의 나를 만났었다. 그는 바로 나였지만, 나는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때와 변함없이 지금도 여전히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 바로 나의 가족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상해."
꿈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은 유독 이상했다. 도대체 왜 얼굴을 볼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때 봤던 가족들이 아냐...."
비록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육감으로 알 수 밖에 없는 사실이 있었다. 미래의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아내도, 그리고 딸도, 그 때와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가족이 다를 수가 있을까? 혹시 내가 꾸었던 꿈은, 그리고 지금 꾸고 있는 이 꿈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까?
"사내아이구나."
기묘하게도 나의 아이가, 그러니까 지금 이 꿈에서의 나의 아이가 딸이 아닌 아들이라는 것만큼은 느낄 수가 있었다. 어쩌면 지난번과 지금의 꿈이 서로 다름을 내가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내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속에서는 자꾸만 이것이 환상이 아님을 내게 전하고 있었다.
"왜지?"
왜지? 왜 자꾸 날 혼란스럽게 만드는거야? 그리고.... 왜 이 아이도 울고 있는 걸까? 그 때 그 아이처럼....
"울지 마."
나는 사내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던 것이다. 그 아픔을 실감하는 순간 나는 이 아이가 나의 아들임을 분명하게 인지했다. 손을 뻗어서라도 달래주고 싶었지만 꿈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처음으로 나는 꿈속에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메아리처럼, 그리고 절규처럼 내 꿈 속을 가득 메웠고, 나는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울지 마...."
꿈에서 깨어나면서도 나는 스스로가 그 말을 되뇌이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이야....? 울지 말라니."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내 잠든 얼굴을 내려보고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두 눈동자를 깜빡여 애써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몽사몽한 머릿 속과는 다르게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그 얼굴의 주인을 소리내어 부르고 있었다.
"현... 주야...."
"......."
나는 아직도 내가 꿈속이라 믿기로 했다. 나를 두고 떠난 현주가 다시 내 눈앞에 돌아와 있는걸 믿는 것보다는 그쪽이 차라리 받아들이기 쉬울 테니. 하지만 현주는 말없이 내 침대 발치에 걸터앉았고,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전해지는 감각은 이것이 현실임을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너... 왜 여기에...."
현주도 그렇고 유정이도 그렇고.... 오늘은 여자들이 의외의 상황에서 연이어 나타나는 날인가보다. 하지만 적어도 유정이의 일보다는 현주가 이곳에 있는게 나로서는 더 놀라운 일이었고, 꿈에서 현실로 차츰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그 놀라움은 더 커져만 갔기에 나는 그녀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렸다.
"나...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 그래서 온 거야...."
"뭔데....?"
부디 그녀의 부탁이 유정이의 부탁처럼 거절하기 쉬운 것이기를 바랐다. 물론 그게 무엇이든지간에 그녀의 마지막 부탁이라면 나로서는 들어줄 수 밖에 없을 거란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뒤이어 나온 그녀의 말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나랑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볼 수 있어?"
"뭐....?"
"섹스... 한번만 더 해볼 수 있냐구."
어안이 벙벙해지는 말이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되물을 뿐.
"왜...?"
그러자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는 말했다.
"오빠가 내 희망이었으니까."
"......."
"오빠랑 할 수 없다면 아마 평생 불가능할거야. 그런 기분이 들어.... 그러니까 확인하게 해줘. 내가 아직도 오빠를 사랑하고 있을때.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
그녀의 그 말은 정말로 진심이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 또한 그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강요했었다. 그러니 내게는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할 책임이 있었다. 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제발...."
그 애절한 목소리라니.... 이성이 어떻게 판단하건간에 마음이 이미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내 신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팔이 움직였고, 몸이 움직였고, 그 다음에 입술이 움직였다.
"흡...."
내 입술이 현주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와의 키스는 종종 있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왠지 찝찔한 눈물 맛이 혀 끝에서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지금껏 살면서 해봤던 키스 중에 몸과 마음이 이토록 따로 놀았던 적은 없었다.
"현주야... 나는...."
틈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이 이번엔 나의 입을 막았다. 혀가 얽히기 시작했고, 우리는 또 한차례 키스를 나누었다. 겨우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가 내게 나직히 말했다.
"지금은... 그냥 여기에 집중해줘."
의무감이라도 좋으리라. 그것이 만약 정말로 그녀의 바람이라면....
나는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벗겼다. 비록 저항은 없었지만 다가올 쾌감에 대한 한줄기 기대감을 느끼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굳어 있을 뿐.... 나는 그녀를 쉽게 알몸으로 만들었지만, 그녀의 나신은 너무도 뻣뻣해 보였다.
"그, 그럼 할게."
그럼 할게, 라니. 찌질했던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찌질한 대사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세상에 어느 찌질한 놈이 섹스 전에 그런 말을 한단 말이지?
"응..."
하지만 그 말에 곧이 곧대로 또 대답을 하는 현주였다. 나는 그녀의 가슴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지만, 결코 어떤 특별한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젖꼭지를 입에 무는 것도, 허리와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도 모두 그런 기계적인 의무감의 연장선이었다. 도저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애무를 포기하고 그녀의 다리를 좌우로 벌려버렸다. 애액이 조금도 흐르지 않은 메마른 음부가 적나라하게 눈 앞에 드러났다. 어차피 이것은 애무를 얼마나 잘하냐 못하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확인하고 싶은 것을 확인하는, 내게 있어선 그저 의무감에 의한 수순일 뿐이었다.
"괜찮겠어....?"
"괜찮아.... 해 봐."
정말로 하기 싫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녀는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웃기는 이야기란 말인가. 그녀도 나처럼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이었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받아들이는 기분을....
"아악....!"
귀두가 그녀의 질 입구를 파고들었다. 차마 다 세워지지도 않은, 심지어 지금은 흐물흐물하게까지 느껴지는 나의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뾰족한 고통의 신음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소리 낸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을 참아내겠다는 그녀 나름의 의지였다.
"현주야."
"괜찮아... 난 괜찮아! 어서 해줘...."
자지가 조금씩 질 안쪽으로 억지로 들어갈 때마다 그녀는 더욱 세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쾌감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감았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아래로 흘러 떨어졌지만 입을 가리고 있느라 그녀는 그것을 손으로 감추지 못했다.
"싫어. 못하겠어."
"오빠...!"
나는 그녀의 질에서 자지를 뽑고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말로....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억지로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난 못해. 네가 괴로워하는게 나에게도 다 느껴진단 말이야. 난 할 수 없어. 네 마지막 부탁이더라도.... 미안해."
"......."
나는 현주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눈물자국을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돌아앉은 내 뒷모습에 대고 그녀는 말했다.
"그 여자는.... 어땠어?"
"......."
"아마 나하고는 많이 달랐을거야.... 키스가 끝나고 나면 오빠는 그 여자의 몸을 어루만졌을테고, 그러면 그 여자도 자연스럽게 오빠의 몸을 만졌겠지. 두 사람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눴을 거야. 거기엔 내가 절대로 흉내내지 못하는 뜨거움이 있었겠지...."
"......."
"나쁜 년.... 재수 없는 년.... 남의 남자 빼앗아간 못되먹은 년...."
무릎을 끌어안고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은 현주가 기어코 또다시 눈물 한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하지만 흐느끼는 소리만은 내지 않은채 그녀는 입술을 악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년이.... 그 나쁜 년이 너무 부러워.... 미치도록 질투나...."
"현주야...."
떨리는 그녀의 알몸을 나는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녀가 아까처럼 내 손길을 뿌리치지 않는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내가 더이상 그녀에게 뭘 해줄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부탁이야, 오빠."
"미안해.... 그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 없어."
"그게 아니야. 다른 부탁이 있어...."
눈물이 맺힌 눈을 내게 보이지 않으려는듯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품 안에 잠긴 그녀의 입에서 희미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내 눈 앞에서.... 그 여자랑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줘."
"뭐...?"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처음에 이해하질 못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야?"
머리로 이해한다고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마치 내가 현주에게 꺼냈던 관념적인 형태의 사랑처럼.... 하지만 현주는 너무도 분명하게, 적어도 나보다는 분명하게, 그녀의 바람을 나에게 전달했다.
"내가 보는 앞에서.... 그 여자랑 섹스해보라구."
물론 현주가 그랬듯이, 나 또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때까지는.
- 다음 화에 계속 -
날씨가 눈에 띄게 무더워지는군요. 여름이 오는건 달갑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은 편안한 주말입니다.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 독자님들도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더위 조심,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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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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