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38장
멍하니 상념에 빠져있다가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깜빡 잠이 들었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떴는데 전혀 낯설은 공간에 내가 서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겪은 두 차례의 자각몽이, 나로 하여금 이 꿈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 또한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이은, 자각몽의 연장이라는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미 겪은 두 번의 꿈에서 얻은 기억이 나를 익숙한 감각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런지, 굳이 의식을 하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나는 내 가족을 찾아 꿈 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그동안의 꿈 속에서 내가 가족을 찾아 헤매왔던 것이 아니라, 이 꿈이 처음부터 내 가족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기 위한 꿈이었다는걸. 다만 나는 지금껏 그걸 인식하지 못 했을 뿐이었다.
그걸 받아들이고 납득하는 순간 비로소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꿈 속에서의 나는 내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중년의 기억을 가진, 미래의 내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내가 겪지 못한 미래가 "기억"이라는 형태로 내게 남아있다니. 그건 어쩌면 기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간에 그 감각은 나를 너무 괴롭게 만들었다.
"아버지."
"아빠."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딸아이의 목소리도 메아리처럼 아른거렸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나의 자식들이다. 아마 두 아이도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젊은 날의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 선택은 누군가를 슬프게 만들었고, 그 슬픔은 비극이라는 형태가 되어 내 가족을 덮쳤다. 그것은 몇 번을 겪어도 쉽게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그 때도 내게 있었다면 나는 그걸 돌이켰을까? 아마 돌이켰을 것이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건 돌이켜야만 하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그 비극을 되돌리기 위해서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것은 그것과 또다른 문제였다.... 나는 어디서부터 뭘 잘못한 걸까?
"이 모든게 다 아빠 때문이야!"
딸아이의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 그리고 그 눈빛.... 매사에 감정이 없던 딸아이였지만 그 날 내게 보여주었던 증오의 눈길만큼은 너무도 격렬했다. 그 눈은 내 안에, 뇌보다도 더 깊숙한 곳에 새겨져 오랜 시간동안 나를 괴롭혔다. 심지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 시간의 굴레 속에서도 여전히 내 안에....
*
"아...."
눈을 떴을 때, 익숙한 한 쌍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그 눈.... 서연이가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결에 여전히 눈을 꿈뻑거리면서도 나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왜 바닥에서 자고 있어?"
"어...? 글쎄."
바닥에 앉은 채로 침대에 기대어 있다가, 그대로 여기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담요 한 장 덮지 않고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내가 안쓰러워보였는지 서연이는 덮고 있던 이불을 내게 덮어주었다. 그러자 서연이의 몸을 가려주던 이불이 걷혀나가며 속옷 한장 입지 않은 그녀의 알몸이 드러났다.
눈부시게 빛나는 나신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녀가 어제 나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걸 떠올리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유정이와의 일도 생생히 머릿속에 떠오르고 말았다. 나는 유정이의 앞에서 서연이와 섹스를 했고, 오히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유정이와도 사랑을 나누고 말았다.
물론 그것이 내가 바랐던 일이긴 했지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그 기억을 되짚어보는 기분은 어젯밤과는 또 사뭇 다른 느낌이라, 마음 속이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서연이는 그런 내가 걱정스러운지 계속해서 물었다.
"얼굴이 안 좋아. 혹시 감기 걸린 거야?"
"아, 괜찮아. 그냥 좀 멍해서..."
안심이 되지 않는지 그녀가 침대 위로 나를 끌어당겨 나를 온 몸으로 감싸안았다. 마치 한몸이 되려는 듯 힘차게 끌어안는 적극적인 포옹, 그녀의 그런 뜨거운 사랑이 나는 좋았다. 그 사랑은 분명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듯한 그 포옹은,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 더더욱 유정이를 떠올리게끔 만들고 있었다. 지난날 계곡에서 나를 그렇게 안아주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연이에겐 정말로 미안한 일이었다.
"유정인 뭐하고 있을까...."
어쩌면 유정이의 곁을 지켜줬어야 하는건 아닐까.... 난생 처음으로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는데, 다음날 아침 혼자 침대에서 눈을 뜨는 기분이 결코 행복하진 않을 것이다. 분명 유정이라면 "괜찮아요" 하며 담담하게 대답하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마음이 불편했다.
"자기, 내가 안아주니까 따뜻하지?"
"응..."
내 속도 모르는 서연이는 이 와중에도 적극적이었다. 한참 동안 나를 끌어안고 있던 그녀가 부스스한 눈을 들어 시계를 보더니, 이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 참! 과제해야 하는데!"
"아, 그러네."
그러고보니 나도, 서연이도, 유정이도, 이 방에 모이기로 했던 최초의 목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사색이 된 서연이가 방방 날뛰다시피하며 괜히 나를 꾸짖기 시작했다.
"이제 어쩔거야! 바로 다음 시간에 발표를 해야 하는데! 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PPT를 완성시켜야 했단 말야!!"
"......."
내가 어제 분명히 서연이의 육탄돌격을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애쓰며, 과제를 해야 한다는걸 그녀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켰다는 사실을 그녀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다소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왠지 남자가 여자에게 어쩔 수 없이 져줘야만 하는 순간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굳이 대꾸하진 않았다.
"깨우라고 했는데 왜 안 깨웠어?"
"아... 네가 너무 피곤하게 자길래."
차마 그 시간에 다른 여자랑 떡치고 있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암만 내 꼴리는 대로 살기로 마음 먹었다지만 그건 마음가짐의 문제 이전에 더 심각한 무언가를 고려해야 할 문제였다.
"그래도 그렇지 이제 어떡할 거야.... 시간도 없는데."
"아직 주말 남았잖아. 까짓거 벼락치기로 하면 돼."
"시험공부도 아니고 무슨 벼락치기야? PPT 만드는데도 시간 오래 걸릴 텐데. 그보다 어제 유성이는 안 온 거야?"
"어?"
서연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나는 괜히 움찔했다. 역시 연기자 체질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으응. 몸이 많이 안 좋은가봐."
"그래도 조별 약속인데 제대로 설명도 없이 빠지는거 좀 경우가 아닌 것 같지 않아? 솔직히 유성이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무책임한 면이 있는 것 같아."
사실 유정이는 지금도 불과 몇 계단 떨어지지 않은 이 건물의 105호에 있겠지만 굳이 지금은 서연이에게 그걸 얘기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았다. 유정이가 이사를 왔다는걸 서연이에게 밝히긴 해야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쩐지 서연이는 유정이의 험담에 대한 내 반응을 살피기 위해 일부러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았고 한편으로는 내가 실수로 유성이의 이름을 또 "유정이"라고 부르는건 아닌지 보려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어느 쪽이든 간에 그 페이스에 휘말리면 꽤 곤란할 것 같았다.
"몸이 많이 안 좋았겠지."
서연이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나는 유정이를 계속 "한유정"이라 부를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서연이와 지금 충돌할 필요는 없었기에 은근슬쩍 이름은 빼버렸다. 눈치를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애매한 대답과 함께 내가 빠져나가려 하자 서연이는 썩 맘에 들지 않는지 등짝을 한대 때리는 것으로 분을 풀었다.
"지금 유성이 옹호하는거야?"
"옹호는 뭐가 옹호야. 그보다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나 신경 쓰자."
비록 맘에 안들긴 해도 그 부분이 서연이에게 있어서 큰 걱정인 모양인지 그녀는 이내 과제 걱정에 빠졌다. 사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큰 걱정을 하고 있진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서연이의 신경을 그쪽으로 분산시킬 수 있다는건 좋은 일이었다.
서연이는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잔 탓에 피부가 상한 것 같다며 연신 투덜대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나는 간단히 아침거리를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에 빠졌지만 딱히 생산적인 결론이 나온 것은 없었다. 곧이어 서연이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왔지만, 가린 곳은 머리 뿐이었고 몸은 여전히 알몸 그대로인 채였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아마 수건 한 장으로 머리를 싸매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몸부터 우선 가렸을 텐데, 지금은 가리는 위치가 바뀌어 몸을 거리낌 없이 내게 드러낸 서연이를 보니 우리가 이젠 정말 연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유정이에 대한 생각과, 일종의 죄책감이 따라오는 것이.... 그것 참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우울한 기분이었다. 왜 자꾸 이런 상황의 연속인 걸까?
우리는 그 날 함께 등교를 했고, 나는 원룸 건물을 나서며 혹시라도 유정이와 마주치지는 않을까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105호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
심지어 강의실에서도 유정이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학교 여기저기를 조금 배회하기도 했지만 유정이를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등교 자체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쯤 되니 걱정스런 마음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말로 어디가 아픈건 아닐까? 혹시 첫 경험 이후에 뭔가 몸이 불편하다든지....
"유성이가 오늘도 학교를 안 왔나보네. 정말 몸이 많이 아픈가?"
서연이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차에, 그녀가 먼저 그 얘기를 꺼내준 것이 다행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유정이에 대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던 서연이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서연이도 다소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망설임 끝에 유정이에게 카톡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답장은 좀체 오지 않았다.
"어쩌면 유정이는 어젯밤의 일을 후회하고 있는건지도 몰라.... 그래서 내가 보기 싫어진 것 아닐까?"
어젯밤의 그 몽환적인 감각을 나는 여전히 되짚어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꿈만 같았던 그 감각.... 그래서 정말로 꿈을 꾸고 있는건 아닌지, 눈을 뜨면 현실로 돌아올까 불안해 하면서도 본능에 몸을 맡기고 서로에게 빠져들었던 그 황홀한 시간.
하지만 어쩌면 유정이는 정말로 꿈에서 깨듯이, 아마 아침이 되어 그 순간을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깐의 이끌림 때문에 너무도 숭고하게 지켜왔던 자신의 순결을 겨우 나 같은 남자에게 내어준 것을 책망하면서, 지금쯤 자괴감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온갖 불안함이 엄습하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역시 그녀의 곁에 있어줘야 했을까?
"이 바보! 병신!"
그게 그렇게나 불안했던 것을 보면 유정이가 정말 내게 특별하긴 특별했나보다. 초조함에 머릿속에 울렁거리고 심장이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나는 어서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휴대폰을 확인하며 혹시나 유정이에게 답장이 오진 않는지 계속해서 살폈다.
"어디 가?"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유정이에게서 답은 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는 내게 서연이가 잽싸게 물었다. 기왕이면 변명거리라도 좀 생각해둘걸.
"아, 약속이 있어서."
"약속? 누구랑?"
"음.... 그게...."
이거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여자 찾으러 간다고 대답을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남자 만난다고 하자니 나 친구 없다는걸 서연이가 뻔히 알고.... 하지만 내 머뭇거림의 의미를 서연이는 약간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았다.
"혹시 현주 씨?"
"응?"
서연이가 고양이 같은 얼굴을 약간 뾰로통하게 찡그리며 물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내가 다른 여자(이를테면 유정이라거나)의 문제로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을 때 내게 보여주곤 했던, 그 불쾌한 표정과는 미묘하게 달라보였다.
아마도 그녀는 나와 현주의 관계를 이제는 못마땅하게나마 인정하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서연이의 그 넓은 마음씨에 백번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또 한번 그녀를 속이려 들고 있었다. 인간 최성진의 쓰레기 행보가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질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아... 응. 맞아."
"두 사람 오늘 만나기로 했었어? 몰랐네."
아직 서연이나 현주가 서로 친밀하게 지낼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이 상황에선 다행이었다. 아무리 마음 속에서 인정하기로 한 관계라고는 해도, 연인을 다른 사람에게 보낸다는 것이 기분 좋을 수는 없는지 서연이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내가 따라가면 안 되는 거야? 같이 데이트해도 되잖아."
사실 그런 2대1 데이트라면 굳이 서연이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나 또한 한번쯤은 꼭 해보고 싶은 것이긴 했다. 서연이나 현주 정도 되는 여자를 둘 씩이나 끼고 시내를 활보하면 마치 패왕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만 같았다. 다만 나는 그게 오늘만 아니기를 바랐다.
"미안해. 모처럼 둘만 있는 거라서.... 대신 다음 주엔 우리 둘만 같이 있자. 응?"
"쳇.... 벌써부터 맘에 안드네. 왕의 선택을 받지 못한 후궁의 기분으로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라 이거지? 알았어. 데이트 잘 해봐. 흥!"
사실 이러한 형태의 연애를 해보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내심 각오하긴 했지만, 서연이의 반응을 보니 실제로 이 문제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으로 섬세한 대처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애써 서연이를 어르고 달래어 결국 그 날은 서연이가 양보하기로 합의 비슷한 것을 보았다. 이렇게까지 거짓말을 했는데 만약 내가 현주를 만나는게 아님을 서연이가 알면 무슨 사태가 벌어질까 차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일단은 서연이를 납득시킨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쏜살같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다급한 발걸음을 뒤쫓아오는 인물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너 저리 안 꺼질래?"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쾌활한 예진이의 목소리를 보니 순간 욕지기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 같았다. 내 과격한 반응에 그녀는 퍽 상처받았단 얼굴이었지만 이 너구리 같은 계집애의 수법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가식임에 분명했다.
"너무해요! 난 그냥 인사한 것 뿐인데!"
"또 뭐야? 또 뭐가 궁금한건데?"
"히히. 별거 아니에요. 난 그냥...."
"그냥 뭐?"
"서연이 옷이 어제랑 똑같길래. 어제 서연이가 어디서 뭘 하고 왔나 그게 너무 궁금해서요. 왠지 그게 성진 선배랑 관련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런 느낌에....? 호호호."
이쯤되면 서연이에게 왜 이런 귀찮은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가 대신 한 대 쥐어박으면 서연이가 내 편을 들어줄까?
"왜 그게 궁금한진 모르겠지만 궁금하면 서연이한테 가서 직접 물어."
"요새는 선배한테 듣는게 더 재밌단 말이에요."
"나 지금 바빠."
"아이 참~ 나랑 조금만 놀면 안 돼요?"
순간 아주 짜증나는 기분이 물씬 솟아올랐다. 귀찮기도 하고, 조금은 화가 나기도 하는.... "감정"이라고 말할 만큼 크게 느껴지는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결코 유쾌하지는 못한 그런 기분이었다. 지난번에 분명 경고를 했던 것 같은데 정말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아마도 이 계집애가 나를 호구로 보고 있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니 기분이 좋을 순 없었다.
"내가 커피 살게요~~ 우리 조용한 데서 수다나 떨.... 꺄악!"
모퉁이를 돌자마자 계집애를 벽으로 밀쳤다. 마치 터프함으로 묘사되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키스라도 하려는 모습처럼 나는 예진이를 안쪽으로 몰았다. 그러자 그녀가 당황하면서도 최대한 당황하지 않으려는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야, 서예진."
"........"
"내가 진짜 마지막으로 경고하는거야. 너 나 한번만 더 귀찮게 하면 눈물콧물 질질 흘리면서 후회하게 만들어줄게. 아마 그럼 내가 왜 서연이랑 사귈 수 있었는지도 알게 될 거야. 정말로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한번 더 까불어봐. 진짜 각오해야 할 걸."
사실 이 순간 나는 이미 품 속에서 타임 리와인더를 더듬고 있었다. 굳이 여기서 이 계집애를 손보지 않는 이유는 그저 지금의 내가 골치 아픈 문제를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을 되감고나면 내가 무슨 짓을 하건 그것은 지워지겠지만 그 이전에 내 스스로가 더이상의 여자문제로 자신을 경멸하게 되는 그런 상황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물론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옆집 여자가 타임 리와인더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킬 수도 있다는 결론에 생각이 이르자, 이제는 백 퍼센트 이 능력에 대해 신용할 수도 없겠다는 불신 또한 마음 속에서 조금씩 생기고 있던 참이었다. 비록 옆집 여자는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 음.... 새겨 들을게요~"
아무리봐도 예진이가 그리 새겨들은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발길을 옮겼다. 지금 신경 쓰고 싶은 사람은 오직 한 명 뿐이었다.
*
"유, 유정아!"
그렇게 혼자 불안해하고 걱정했던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나는 손쉽게 유정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우연히도 건물 앞에 멈춰서는 검정색 세단 한 대를 보았던 것이다. 그 뒷좌석에서 내리는 여자의 모습이 너무 낯익다 싶어서 봤더니 역시나 유정이였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토바이가 아닌 승용차에서 내리는 유정이의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유정이의 뒤를 이어 운전석에서도 누군가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키가 굉장히 크고 체격이 남성 못지 않게 탄탄하게 느껴지는, 나이가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아, 오빠."
내 얼굴을 발견한 유정이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비록 희미하긴 했지만 멀리서도 눈에 확연히 보일 만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바보처럼 마음 속에 쌓여있었던 불안이 모조리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나를 이렇게나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오빠?"
그 때, 세단의 운전석에서 내린 그 누군지 모를 여인이 유정이의 말을 그대로 따라 되뇌었다. 무척 의외라는 듯, 여인은 눈을 가리고 선글라스를 살짝 아래로 내려 그 속에 가려져있던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눈동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왠지 모를 날카로운 시선에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오빠, 지금 오는 거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유정이는 내게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유정이의 그러한 태도가 옆에 있는 여인의 궁금증을 더욱 부채질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유정이를 발견한 것이 좋았고, 유정이가 나를 경멸하고 있다거나 하는게 아니라는걸 느껴서 더욱 좋았지만, 한편으론 그 여인이 누구인지 나 또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 교관님.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당주님께도 먼저 안부 전하겠습니다."
유정이는 그 여인을 "교관님"이라 불렀다. 유정이의 배경에 대해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가문의 사람일까, 하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유정이를 "아가씨"라고 부르는걸 보니 아마 그 짐작은 맞는 것 같았다.
"아가씨, 그런데 저 분은 누구신가요?"
"네?"
여인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느닷없이 물으리라곤 유정이도 생각을 못 했던지, 유정이는 꽤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여인은 유정이의 그런 당황하는 기색조차도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외람되지만 오빠라는 말도 그렇고 아가씨의 그 태도도 그렇고.... 보통 사이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하하."
여인은 체격 뿐만이 아니라 웃음소리까지 사내들처럼 굵고 묵직했다. 목소리마저 약간 중성적인 느낌이라 그런지 그녀에게서는 여성적인 느낌보다 남성성이 더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나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여인의 눈길이 나는 조금 거북스러웠다.
"아, 그게...."
그러면서도 나는 유정이가 내심 나를 어떻게 소개할지를 궁금해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 이라는 말이라도 기대했던걸까?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그 여인이 유정이의 고민을 오래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하하하. 제가 곤란한 걸 물었나보군요. 괜찮습니다, 아가씨. 궁금하지만 대답은 다음에 듣겠습니다."
"아, 그래요."
여인은 눈치가 빠르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정이를 그만큼 잘 알기 때문인지, 더이상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 여인의 동작 하나하나에서는 왠지 모를 절도가 느껴졌다.
사라지기 직전에, 여인은 세단의 창문을 내려 유정이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유정이도 여인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렇게 검정색 세단이 가버리고 나자 그 자리에 비로소 나와 유정이만이 남게 되었다.
"오빠."
유정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제와는 조금 달라져 있다는걸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 깊은 눈이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안겨주었다. 평온, 안도, 행복, 사랑.... 그 외에도 여러가지 것들을.
"유정아.... 걱정했어."
"네? 왜요?"
"그, 그게... 연락도 안 되고. 네가 학교를 안 온걸 보고 어디 아픈건 아닌가.... 아, 아니 그보다는 내가 어제 너랑 같이 있어주지 못한게.... 그러니까 걱정도 되고, 불안하기도...."
이런 병신새끼... 떨지 말고 말하란 말이야! 타임 리와인더를 갖기 전의 내 모습이 왠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처 지워지지 못한 본연의 찌질함이 덕지덕지 묻어나오는걸 보면 역시 내 본성은 어쩔 수 없나보다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만큼 마음 속 깊이 유정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 연락하셨어요?"
유정이는 그제야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가방 속에 오래 파묻어놓은 것 같은 휴대폰을 그녀가 잠시 동안 확인하더니, 아마 내 전화와 메시지의 흔적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아주 애매한 표정이 되어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오빠.... 전화가 온 줄은 몰랐어요. 중요한 손님을 만날 땐 휴대폰을 보지 않거든요."
"으응. 괜찮아. 그런데 아까 그 분은....?"
내가 세단이 사라진 흔적을 눈으로 좇으며 묻자, 유정이도 덩달아 그 방향을 보며 대답했다.
"문선영 교관님이에요. 어렸을 적에 도장에서 저를 많이 가르쳐주신 분이에요. 아버님의 정식 제자이기도 하구요. 아버님이 일본으로 가실때 따라가셨는데 지금은 본토 유파 아래에서 여러 문하생들을 가르치고 계신대요."
"아~ 역시 가문의 분이셨구나. 그런데 일본에 계셔야 할 분이 어쩐 일로 한국에?"
나의 그 질문은 사실 내용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두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분위기를 보니 유정이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고 그렇다면 왠지 앞으로도 만날 일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정이는 내 질문에 나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나는 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토록 환하게 웃는 유정이의 얼굴은 또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버님이 한국에 오셨대요."
"응?"
그리고 이어진 유정이의 설명은 내게도 조금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번에 잠깐 한국에서의 일을 해결하러 오셨는데, 일본으로 다시 떠나기 전에 저를 만나고 싶으신가봐요. 원래는 정말 바쁜 분인데 제가 집을 옮겼다는 얘기를 들으시곤 걱정을 하셨나봐요. 출국하기전에 잠깐이라도 꼭 만나고 가시겠다며.... 저에겐 좋은 일이지만요."
잠깐이나마 아버지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정이는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가족의 품을 그리워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단면이었기에 나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지만 굳이 그녀의 좋은 기분을 해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저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잘 됐네. 오랜만에 아버지를 뵙겠구나."
"아버님은 지금 서울에 계신대요. 중요한 일을 먼저 해결하고 저를 보러 오시겠다고 했어요. 문 교관님은 그 전에 따로 저를 만나고 싶으셨나봐요. 어릴 때부터 선생님처럼 생각했던 분이라 저도 교관님이 무척 반가워요. 비록 어머님이나 동생은 바빠서 못 왔지만 교관님도 만나고 아버님도 뵐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는 좋아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유정이의 모습은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그녀의 그런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나는 좋았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105호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들어오긴 했지만 사실 나는 이곳에 또다시 들어왔다는 것 자체로 마음이 들뜨고 있었다. 유정이 또한 같은 마음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별 어색함 없이 나를 맞이했다. 방 안은 여전히 짐 더미로 여기저기 어수선한 상태였는데, 그녀는 내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보다도 오히려 지저분한 방을 보였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정리를 나름대로 하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혼자서 하다보니 좀...."
약간은 변명처럼 그렇게 혼자 웅얼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웃음을 참으며 나는 묵묵히 팔을 걷어붙이고 이곳 저곳에 널부러진 짐들을 하나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를 대접하려고 뭔가 하고 있던 유정이가 깜짝 놀라 나를 만류하고 들었다.
"오빠, 왜 일을 하고 그래요."
"어차피 이것들 정리해야 하잖아. 같이 하자."
"그, 그래도... 혼자 할 수 있는데."
"주말에 도와주기로 했었잖아. 빨리 시작하면 좋지 뭐."
머뭇거리던 유정이도 내가 앞장서서 박스를 옮기고 짐을 치우기 시작하니 어느새부턴가 동참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날 그렇게 그녀의 방을 함께 정리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닌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던 방 안의 모습도 두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니 차츰차츰 단정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거...."
그러던 중에 눈길을 사로 잡는 그 물건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 투박한 은색의 라이터가 내 시선을 끌어당겼던건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박스 속 잡동사니들의 한가운데에서 마치 그것만이 빛을 발하듯 나에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상태는 다르지만 아무리 봐도 똑같아. 옆집 여자의 물건이 분명한데...."
나는 유정이가 의아해하지 않도록 그 감상을 마음 속으로만 삼켰다. 하지만 생각이 계속해서 꼬리를 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옆집 여자가 정말로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시간의 순서를 따졌을 때 이것은 옆집 여자의 물건이 아니라 유정이의 물건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유정이의 물건이 왜 시간이 흘러 옆집 여자의 손에 남아있게 된 걸까? 나는 비로소 이 때부터 옆집 여자의 정체성이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물쇠를 일부러 풀듯이,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라는걸 느끼고 있었나보다. 골치아파서 억지로 묻어두기만 했던 고민거리를 마침내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내 머릿속에서는 유독 유정이와 옆집 여자 사이의 어떤 연결고리를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유정이에 대한 내 마음을 확고하게 한 것이, 옆집 여자의 문제와도 모종의 관련이 있는 걸까?
"오빠, 이것 좀 봐요."
유정이의 목소리가 왠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던 내 의식을 잡아세웠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돌아보니 유정이가 자그마한 앨범 하나를 내게 흔들어보이고 있었다.
"앨범?"
"이사할 때 물건 정리하다가 찾아낸 거에요. 옛날건데... 같이 볼래요?"
비록 유정이는 가타부타 설명을 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옛날 모습을 내게 보여주려한다는 것이 너무도 애틋한 의미로 다가와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잠깐 옆집 여자의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하고 나는 그녀와 함께 앨범 앞에 앉았다.
"이거... 내 어릴적 모습이에요."
유정이는 천천히 책장을 하나하나 넘겼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본다는 것이 좋았다. 유아기 시절의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작고 귀여웠다. 하지만 머리가 사내아이처럼 무척 짧았고, 표정은 날카로웠으며, 몸이 좀 자란 이후부터는 주로 도복을 입은 모습들이 쭉 이어졌다.
"이 때는 초등학생이었어요. 한국에 퍼져있는 우리 한씨 유파들 간의 친선 대련에서 우승했을 때였어요. 우승한 내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그 때는 나도 이런 것들이 내 삶의 전부일 줄 알았죠."
그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처음으로 나는 유정이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어린 유정이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는 얼굴이 아주 고왔지만, 대신에 표정이 없었다. 다른 모녀들이 이런 추억을 사진으로 남길 때 어머니 쪽이 더 밝게 웃고 있는게 보통이라는걸 감안한다면,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는 딸아이만큼이나 감정이 절제된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유정이의 어머니는 굉장히 유정이와 닮아보였다. 그 담담한 표정 하나까지도 내게는 모녀 관의 혈연관계를 뚜렷이 전달하는 요소처럼 느껴졌다. 사진 속 유정이 어머니의 모습에서 머리만 조금 더 길게 기르더라도 아마 유정이와 어머니를 구분하기 꽤 힘들 것 같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남자들에게 질 것 같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사진을 찍고 몇 년 후에 후계자 대련에서 져버렀어요. 사춘기가 올 무렵 쯤이었던 것 같아요. 여자 몸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달까. 아무튼 이 때부턴 무예에서 꽤 부진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실망했죠. 결국 아까의 사진 이후로 어머니와 둘이서 찍은 사진은 이제 없는 것 같아요...."
이것저것 내게 설명하는 유정이의 표현이 퍽 쓸쓸해보였다. 그런 이유로 딸아이에게 냉담하게 바뀌어버린 어머니의 태도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왠지 그 이야기에서는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무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저 조용히 들어주기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꾸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라고 콕 집어 얘기하기가 힘들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위화감 비슷한 것이었다. 내 마음 속의 뭔가가 자꾸만 유정이의 어머니 사진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어머니 사진 한번만 더 봐도 돼?"
"그럼요."
스스로도 좀체 믿기지 않지만 나는 유정이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희미하게 그 위로 옆집 여자의 느낌을 겹쳐보았다. 사진 속의 얼굴에서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옆집 여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삭막하고 메마른 감정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그 사진을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그게 아니었단걸 깨달았다.
일부러 걸어두었던 자물쇠를 한겹 더 뜯어내는 기분이었다. 유정이를 빼다 박은 듯한 그녀의 어머니를 옆집 여자와 일부 동일시했다는건 곧 유정이와 옆집 여자가 닮았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묻어놓았던 중요한 사실을 끄집어내 머리에 새길 수가 있었다. 분명 유정이는 옆집 여자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또한 한 가지 더 깨달은게 있다면 나는 그동안 그것을 느끼지 못했던게 아니라, 내 감각이 그것에 대해 인지하는걸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유정이와 옆집 여자를 동일시하려는 인식을 끊임없이 거부해왔던 뇌가, 유정이가 아닌 다른 사람(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옆집 여자를 투영하기 시작하니 어쩔 수 없이 그 인식을 이제는 받아들이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상해, 왜 놀랍지가 않지?"
그것은 분명 말로써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힘든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내 마음은 생각보다 별로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까먹고 있었던 사소한 것을 이제야 떠올려내기라도 한 듯, 나의 감각은 그 사실에 대해 환기하는 것을 아무런 무리 없이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럼 정말로 옆집 여자가 유정이란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또 한 차례의 목소리가 나의 상념을 깨뜨렸다.
"오빠, 무슨 생각해요?"
"아, 미안."
고개를 들어보니 유정이가 내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어느새 얼굴이 이렇게 가까워져 있었단걸 모르고 있었다. 내가 눈을 깜빡거리자 유정이가 약간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웅얼거렸다.
"오빠는 별로 재미가 없나봐요. 하긴 도복 입은 모습 같은 것들 밖에 없으니.... 그다지 볼 게 없긴 하죠."
"그, 그런거 아니야!"
오히려 옆집 여자에 대한 문제보다도, 당장 눈 앞의 유정이가 풀 죽은 모습이 내게는 더 심각하게 느껴진 것을 보면 참 기묘한 노릇이었다. 나는 다급히 유정이의 어머니 모습을 그녀에게 가리키며 애처로운 변명을 해댔다.
"어머니가 너랑 무척 비슷하셔서 놀라서 그런 거야. 네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어머니도 네 나이 무렵에는 꼭 너처럼 예쁘셨을 것 같아."
"예뻐요? 제가?"
"당연하지. 내 눈엔 세상에서 제일 예뻐."
솔직히 여자친구를 둘 씩이나 둔 남자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 파렴치한 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화제를 돌리기엔 적절한 이야기였는지 그녀가 무어라 웅얼거리면서도 픽 웃음을 지었다. 왠지 그녀에게서 웃음이 조금 많아진 느낌이었다. 사실 오늘따라 그녀가 특히나 더 기분이 좋아보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런데 아버님이 오셨으니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건 아니야? 이사를 반대하시면 어쩌지?"
"글쎄요... 아마 아버님은 한국에 오래 머물진 못하실 거에요. 곧 일본으로 돌아가셔야 할 테니, 제가 어떻게 하던 크게 개의치는 않으실걸요."
"아버님은 어떤 분이실지 궁금하네."
"왜요?"
"그냥. 아버님 뿐만 아니라 어머님이나 동생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가족 이야기도 더 듣고 싶기도 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는 생각에 덧붙였다.
"사실 너에 대한걸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것 같아."
유정이는 깜짝 놀란듯이 두 눈을 토끼처럼 깜빡거렸다. 놀라면서도 싫지는 않은 듯한 그 기색에 나도 속으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마음 속에서는 무거운 죄책감 비슷한게 떠올랐다. 그러고보면 나는 서연이나 현주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오빠."
"으응."
잠깐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죄책감이 이내 이어진 유정이의 목소리에 다시 묻혀버렸다. 그녀는 수줍어하는 듯 내 시선을 피하면서도 목소리만큼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은 아버지를 만나게 된거.... 오빠 덕분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내가 바보처럼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냥,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좋았어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고 느꼈죠. 그런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반가운 연락이 온 거에요. 마치 누군가가 내게 행운을 가져다 준 것처럼요."
"......."
"아침에 왜 기분이 좋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 생각엔 그게 오빠 덕분도 있는 것 같아요. 오빠랑 좋은 일이 있었던 덕분에 나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 같았어요."
"유, 유정아."
뭐라 차마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여러가지의 복잡한 의미로 내게 그 말을 전한 것이겠지만, 나는 그저 유정이가 지난밤의 일을 "좋은 일"이라고 표현해준 것만으로도 가슴에 벅차는 것 같았다. 가슴이 떨리고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내 이런 모습을 그녀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빠랑 사랑을 나눈 덕분에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아서.... 고마워요."
가슴 밑바닥까지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그녀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미 나도 모르게 달려들어 유정이의 입술을 훔치고 있었다.
그녀와 단둘이 있으면 매번 이렇게 된다는걸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유정이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모양인지, 여느 때처럼 무례하고 갑작스러운 내 기습 키스를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으음...."
지난밤의 육체적인 결합이 모든 면에 있어 우리를 서로에게 좀 더 익숙하게끔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시작된 키스였지만 지난 몇 번의 키스와는 다르게 이번엔 한 쌍의 입술이 이내 제자리를 찾아 서로에게 붙었고, 코로 내뿜는 잔잔한 숨결만이 그 후에 고요히 남았다.
내가 혀로 그녀의 이를 두드리자 그녀가 서툴지만 얌전히 혀를 내어주었다. 그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있어선 더없이 적극적인 승낙이란걸 나는 알고 있었기에 더 힘차게 그녀의 혀를 감싸안았다. 타액이 넘나들기 시작했고, 어쩐지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지는 소리가 방 안에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유정이의 입술과 혀를 탐닉하던 내 입이 마침내 살짝 떨어졌을 때, 나는 내 진솔한 감정을 유정이에게 속삭이듯 털어놓았다.
"사실 많이 불안했어.... 네가 이제 날 보기 싫어하는건 아닌지. 또 그 일을 네가 후회하고 있는건 아닌지. 네 옆에 있어주지 못한게 너무 후회되면서도 그렇게 못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어."
"난 괜찮아요. 내 마음에 든 사람에게 허락한거니까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오빠도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렇게 또 몽환의 감각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취해가듯, 또는 그렇게 홀려가듯 현실감을 상실한 우리만의 세계를 다시 한번 더듬어내고 있었다. 내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하자 유정이가 내 귓가에 대고 한 마디를 속삭였다.
"오빠...."
그녀의 그 "오빠"라는 한 마디는 왜 그렇게도 자극적일까. 마치 도화선을 터뜨리는 불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랑해요."
그 날 우리는 또 한번의 결합을 이루었다.
정해진 곳을 향해 헤엄쳐나가듯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 다음 화에 계속 -
38장이 너무 늦었지요? 죄송합니다ㅠ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느라 조금은 빡빡하네요
부디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릴게요
지난화 캘리컷님의 아이디어에 힘입어, 다음에 기회를 봐서
추천수 이벤트를 한번 진행해볼까해요 (지금은 말구요)
분량을 미리 많이 만들어놓고 일정 추천수가 되면 다음화를 즉각 올리는 식으루요
캘리컷님 말씀대로 해볼까 했는데 사실 700까지는 너무 과욕인 것 같고 500~600이 좋겠어요
암튼 주말동안 틈틈이 글도 최대한 써둬야겠습니다 ^^
늦어서 다시 한번 죄송해요~~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38장
멍하니 상념에 빠져있다가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깜빡 잠이 들었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떴는데 전혀 낯설은 공간에 내가 서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겪은 두 차례의 자각몽이, 나로 하여금 이 꿈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 또한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이은, 자각몽의 연장이라는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미 겪은 두 번의 꿈에서 얻은 기억이 나를 익숙한 감각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런지, 굳이 의식을 하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나는 내 가족을 찾아 꿈 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그동안의 꿈 속에서 내가 가족을 찾아 헤매왔던 것이 아니라, 이 꿈이 처음부터 내 가족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기 위한 꿈이었다는걸. 다만 나는 지금껏 그걸 인식하지 못 했을 뿐이었다.
그걸 받아들이고 납득하는 순간 비로소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꿈 속에서의 나는 내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중년의 기억을 가진, 미래의 내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내가 겪지 못한 미래가 "기억"이라는 형태로 내게 남아있다니. 그건 어쩌면 기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간에 그 감각은 나를 너무 괴롭게 만들었다.
"아버지."
"아빠."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딸아이의 목소리도 메아리처럼 아른거렸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나의 자식들이다. 아마 두 아이도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젊은 날의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 선택은 누군가를 슬프게 만들었고, 그 슬픔은 비극이라는 형태가 되어 내 가족을 덮쳤다. 그것은 몇 번을 겪어도 쉽게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그 때도 내게 있었다면 나는 그걸 돌이켰을까? 아마 돌이켰을 것이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건 돌이켜야만 하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그 비극을 되돌리기 위해서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것은 그것과 또다른 문제였다.... 나는 어디서부터 뭘 잘못한 걸까?
"이 모든게 다 아빠 때문이야!"
딸아이의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 그리고 그 눈빛.... 매사에 감정이 없던 딸아이였지만 그 날 내게 보여주었던 증오의 눈길만큼은 너무도 격렬했다. 그 눈은 내 안에, 뇌보다도 더 깊숙한 곳에 새겨져 오랜 시간동안 나를 괴롭혔다. 심지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 시간의 굴레 속에서도 여전히 내 안에....
*
"아...."
눈을 떴을 때, 익숙한 한 쌍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그 눈.... 서연이가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결에 여전히 눈을 꿈뻑거리면서도 나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왜 바닥에서 자고 있어?"
"어...? 글쎄."
바닥에 앉은 채로 침대에 기대어 있다가, 그대로 여기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담요 한 장 덮지 않고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내가 안쓰러워보였는지 서연이는 덮고 있던 이불을 내게 덮어주었다. 그러자 서연이의 몸을 가려주던 이불이 걷혀나가며 속옷 한장 입지 않은 그녀의 알몸이 드러났다.
눈부시게 빛나는 나신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녀가 어제 나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걸 떠올리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유정이와의 일도 생생히 머릿속에 떠오르고 말았다. 나는 유정이의 앞에서 서연이와 섹스를 했고, 오히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유정이와도 사랑을 나누고 말았다.
물론 그것이 내가 바랐던 일이긴 했지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그 기억을 되짚어보는 기분은 어젯밤과는 또 사뭇 다른 느낌이라, 마음 속이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서연이는 그런 내가 걱정스러운지 계속해서 물었다.
"얼굴이 안 좋아. 혹시 감기 걸린 거야?"
"아, 괜찮아. 그냥 좀 멍해서..."
안심이 되지 않는지 그녀가 침대 위로 나를 끌어당겨 나를 온 몸으로 감싸안았다. 마치 한몸이 되려는 듯 힘차게 끌어안는 적극적인 포옹, 그녀의 그런 뜨거운 사랑이 나는 좋았다. 그 사랑은 분명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듯한 그 포옹은,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 더더욱 유정이를 떠올리게끔 만들고 있었다. 지난날 계곡에서 나를 그렇게 안아주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연이에겐 정말로 미안한 일이었다.
"유정인 뭐하고 있을까...."
어쩌면 유정이의 곁을 지켜줬어야 하는건 아닐까.... 난생 처음으로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는데, 다음날 아침 혼자 침대에서 눈을 뜨는 기분이 결코 행복하진 않을 것이다. 분명 유정이라면 "괜찮아요" 하며 담담하게 대답하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마음이 불편했다.
"자기, 내가 안아주니까 따뜻하지?"
"응..."
내 속도 모르는 서연이는 이 와중에도 적극적이었다. 한참 동안 나를 끌어안고 있던 그녀가 부스스한 눈을 들어 시계를 보더니, 이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 참! 과제해야 하는데!"
"아, 그러네."
그러고보니 나도, 서연이도, 유정이도, 이 방에 모이기로 했던 최초의 목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사색이 된 서연이가 방방 날뛰다시피하며 괜히 나를 꾸짖기 시작했다.
"이제 어쩔거야! 바로 다음 시간에 발표를 해야 하는데! 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PPT를 완성시켜야 했단 말야!!"
"......."
내가 어제 분명히 서연이의 육탄돌격을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애쓰며, 과제를 해야 한다는걸 그녀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켰다는 사실을 그녀는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다소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왠지 남자가 여자에게 어쩔 수 없이 져줘야만 하는 순간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굳이 대꾸하진 않았다.
"깨우라고 했는데 왜 안 깨웠어?"
"아... 네가 너무 피곤하게 자길래."
차마 그 시간에 다른 여자랑 떡치고 있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암만 내 꼴리는 대로 살기로 마음 먹었다지만 그건 마음가짐의 문제 이전에 더 심각한 무언가를 고려해야 할 문제였다.
"그래도 그렇지 이제 어떡할 거야.... 시간도 없는데."
"아직 주말 남았잖아. 까짓거 벼락치기로 하면 돼."
"시험공부도 아니고 무슨 벼락치기야? PPT 만드는데도 시간 오래 걸릴 텐데. 그보다 어제 유성이는 안 온 거야?"
"어?"
서연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나는 괜히 움찔했다. 역시 연기자 체질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으응. 몸이 많이 안 좋은가봐."
"그래도 조별 약속인데 제대로 설명도 없이 빠지는거 좀 경우가 아닌 것 같지 않아? 솔직히 유성이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무책임한 면이 있는 것 같아."
사실 유정이는 지금도 불과 몇 계단 떨어지지 않은 이 건물의 105호에 있겠지만 굳이 지금은 서연이에게 그걸 얘기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았다. 유정이가 이사를 왔다는걸 서연이에게 밝히긴 해야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쩐지 서연이는 유정이의 험담에 대한 내 반응을 살피기 위해 일부러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았고 한편으로는 내가 실수로 유성이의 이름을 또 "유정이"라고 부르는건 아닌지 보려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어느 쪽이든 간에 그 페이스에 휘말리면 꽤 곤란할 것 같았다.
"몸이 많이 안 좋았겠지."
서연이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나는 유정이를 계속 "한유정"이라 부를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서연이와 지금 충돌할 필요는 없었기에 은근슬쩍 이름은 빼버렸다. 눈치를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애매한 대답과 함께 내가 빠져나가려 하자 서연이는 썩 맘에 들지 않는지 등짝을 한대 때리는 것으로 분을 풀었다.
"지금 유성이 옹호하는거야?"
"옹호는 뭐가 옹호야. 그보다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나 신경 쓰자."
비록 맘에 안들긴 해도 그 부분이 서연이에게 있어서 큰 걱정인 모양인지 그녀는 이내 과제 걱정에 빠졌다. 사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큰 걱정을 하고 있진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서연이의 신경을 그쪽으로 분산시킬 수 있다는건 좋은 일이었다.
서연이는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잔 탓에 피부가 상한 것 같다며 연신 투덜대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나는 간단히 아침거리를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에 빠졌지만 딱히 생산적인 결론이 나온 것은 없었다. 곧이어 서연이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왔지만, 가린 곳은 머리 뿐이었고 몸은 여전히 알몸 그대로인 채였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아마 수건 한 장으로 머리를 싸매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몸부터 우선 가렸을 텐데, 지금은 가리는 위치가 바뀌어 몸을 거리낌 없이 내게 드러낸 서연이를 보니 우리가 이젠 정말 연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유정이에 대한 생각과, 일종의 죄책감이 따라오는 것이.... 그것 참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우울한 기분이었다. 왜 자꾸 이런 상황의 연속인 걸까?
우리는 그 날 함께 등교를 했고, 나는 원룸 건물을 나서며 혹시라도 유정이와 마주치지는 않을까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105호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
심지어 강의실에서도 유정이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학교 여기저기를 조금 배회하기도 했지만 유정이를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등교 자체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쯤 되니 걱정스런 마음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말로 어디가 아픈건 아닐까? 혹시 첫 경험 이후에 뭔가 몸이 불편하다든지....
"유성이가 오늘도 학교를 안 왔나보네. 정말 몸이 많이 아픈가?"
서연이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차에, 그녀가 먼저 그 얘기를 꺼내준 것이 다행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유정이에 대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던 서연이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서연이도 다소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망설임 끝에 유정이에게 카톡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답장은 좀체 오지 않았다.
"어쩌면 유정이는 어젯밤의 일을 후회하고 있는건지도 몰라.... 그래서 내가 보기 싫어진 것 아닐까?"
어젯밤의 그 몽환적인 감각을 나는 여전히 되짚어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꿈만 같았던 그 감각.... 그래서 정말로 꿈을 꾸고 있는건 아닌지, 눈을 뜨면 현실로 돌아올까 불안해 하면서도 본능에 몸을 맡기고 서로에게 빠져들었던 그 황홀한 시간.
하지만 어쩌면 유정이는 정말로 꿈에서 깨듯이, 아마 아침이 되어 그 순간을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깐의 이끌림 때문에 너무도 숭고하게 지켜왔던 자신의 순결을 겨우 나 같은 남자에게 내어준 것을 책망하면서, 지금쯤 자괴감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온갖 불안함이 엄습하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역시 그녀의 곁에 있어줘야 했을까?
"이 바보! 병신!"
그게 그렇게나 불안했던 것을 보면 유정이가 정말 내게 특별하긴 특별했나보다. 초조함에 머릿속에 울렁거리고 심장이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나는 어서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휴대폰을 확인하며 혹시나 유정이에게 답장이 오진 않는지 계속해서 살폈다.
"어디 가?"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유정이에게서 답은 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는 내게 서연이가 잽싸게 물었다. 기왕이면 변명거리라도 좀 생각해둘걸.
"아, 약속이 있어서."
"약속? 누구랑?"
"음.... 그게...."
이거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여자 찾으러 간다고 대답을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남자 만난다고 하자니 나 친구 없다는걸 서연이가 뻔히 알고.... 하지만 내 머뭇거림의 의미를 서연이는 약간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았다.
"혹시 현주 씨?"
"응?"
서연이가 고양이 같은 얼굴을 약간 뾰로통하게 찡그리며 물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내가 다른 여자(이를테면 유정이라거나)의 문제로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을 때 내게 보여주곤 했던, 그 불쾌한 표정과는 미묘하게 달라보였다.
아마도 그녀는 나와 현주의 관계를 이제는 못마땅하게나마 인정하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서연이의 그 넓은 마음씨에 백번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또 한번 그녀를 속이려 들고 있었다. 인간 최성진의 쓰레기 행보가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질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아... 응. 맞아."
"두 사람 오늘 만나기로 했었어? 몰랐네."
아직 서연이나 현주가 서로 친밀하게 지낼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이 상황에선 다행이었다. 아무리 마음 속에서 인정하기로 한 관계라고는 해도, 연인을 다른 사람에게 보낸다는 것이 기분 좋을 수는 없는지 서연이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내가 따라가면 안 되는 거야? 같이 데이트해도 되잖아."
사실 그런 2대1 데이트라면 굳이 서연이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나 또한 한번쯤은 꼭 해보고 싶은 것이긴 했다. 서연이나 현주 정도 되는 여자를 둘 씩이나 끼고 시내를 활보하면 마치 패왕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만 같았다. 다만 나는 그게 오늘만 아니기를 바랐다.
"미안해. 모처럼 둘만 있는 거라서.... 대신 다음 주엔 우리 둘만 같이 있자. 응?"
"쳇.... 벌써부터 맘에 안드네. 왕의 선택을 받지 못한 후궁의 기분으로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라 이거지? 알았어. 데이트 잘 해봐. 흥!"
사실 이러한 형태의 연애를 해보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내심 각오하긴 했지만, 서연이의 반응을 보니 실제로 이 문제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으로 섬세한 대처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애써 서연이를 어르고 달래어 결국 그 날은 서연이가 양보하기로 합의 비슷한 것을 보았다. 이렇게까지 거짓말을 했는데 만약 내가 현주를 만나는게 아님을 서연이가 알면 무슨 사태가 벌어질까 차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일단은 서연이를 납득시킨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쏜살같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다급한 발걸음을 뒤쫓아오는 인물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너 저리 안 꺼질래?"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쾌활한 예진이의 목소리를 보니 순간 욕지기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 같았다. 내 과격한 반응에 그녀는 퍽 상처받았단 얼굴이었지만 이 너구리 같은 계집애의 수법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가식임에 분명했다.
"너무해요! 난 그냥 인사한 것 뿐인데!"
"또 뭐야? 또 뭐가 궁금한건데?"
"히히. 별거 아니에요. 난 그냥...."
"그냥 뭐?"
"서연이 옷이 어제랑 똑같길래. 어제 서연이가 어디서 뭘 하고 왔나 그게 너무 궁금해서요. 왠지 그게 성진 선배랑 관련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런 느낌에....? 호호호."
이쯤되면 서연이에게 왜 이런 귀찮은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가 대신 한 대 쥐어박으면 서연이가 내 편을 들어줄까?
"왜 그게 궁금한진 모르겠지만 궁금하면 서연이한테 가서 직접 물어."
"요새는 선배한테 듣는게 더 재밌단 말이에요."
"나 지금 바빠."
"아이 참~ 나랑 조금만 놀면 안 돼요?"
순간 아주 짜증나는 기분이 물씬 솟아올랐다. 귀찮기도 하고, 조금은 화가 나기도 하는.... "감정"이라고 말할 만큼 크게 느껴지는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결코 유쾌하지는 못한 그런 기분이었다. 지난번에 분명 경고를 했던 것 같은데 정말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아마도 이 계집애가 나를 호구로 보고 있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니 기분이 좋을 순 없었다.
"내가 커피 살게요~~ 우리 조용한 데서 수다나 떨.... 꺄악!"
모퉁이를 돌자마자 계집애를 벽으로 밀쳤다. 마치 터프함으로 묘사되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키스라도 하려는 모습처럼 나는 예진이를 안쪽으로 몰았다. 그러자 그녀가 당황하면서도 최대한 당황하지 않으려는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야, 서예진."
"........"
"내가 진짜 마지막으로 경고하는거야. 너 나 한번만 더 귀찮게 하면 눈물콧물 질질 흘리면서 후회하게 만들어줄게. 아마 그럼 내가 왜 서연이랑 사귈 수 있었는지도 알게 될 거야. 정말로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한번 더 까불어봐. 진짜 각오해야 할 걸."
사실 이 순간 나는 이미 품 속에서 타임 리와인더를 더듬고 있었다. 굳이 여기서 이 계집애를 손보지 않는 이유는 그저 지금의 내가 골치 아픈 문제를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을 되감고나면 내가 무슨 짓을 하건 그것은 지워지겠지만 그 이전에 내 스스로가 더이상의 여자문제로 자신을 경멸하게 되는 그런 상황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물론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옆집 여자가 타임 리와인더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킬 수도 있다는 결론에 생각이 이르자, 이제는 백 퍼센트 이 능력에 대해 신용할 수도 없겠다는 불신 또한 마음 속에서 조금씩 생기고 있던 참이었다. 비록 옆집 여자는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 음.... 새겨 들을게요~"
아무리봐도 예진이가 그리 새겨들은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발길을 옮겼다. 지금 신경 쓰고 싶은 사람은 오직 한 명 뿐이었다.
*
"유, 유정아!"
그렇게 혼자 불안해하고 걱정했던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나는 손쉽게 유정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우연히도 건물 앞에 멈춰서는 검정색 세단 한 대를 보았던 것이다. 그 뒷좌석에서 내리는 여자의 모습이 너무 낯익다 싶어서 봤더니 역시나 유정이였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토바이가 아닌 승용차에서 내리는 유정이의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유정이의 뒤를 이어 운전석에서도 누군가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키가 굉장히 크고 체격이 남성 못지 않게 탄탄하게 느껴지는, 나이가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아, 오빠."
내 얼굴을 발견한 유정이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비록 희미하긴 했지만 멀리서도 눈에 확연히 보일 만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바보처럼 마음 속에 쌓여있었던 불안이 모조리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나를 이렇게나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오빠?"
그 때, 세단의 운전석에서 내린 그 누군지 모를 여인이 유정이의 말을 그대로 따라 되뇌었다. 무척 의외라는 듯, 여인은 눈을 가리고 선글라스를 살짝 아래로 내려 그 속에 가려져있던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눈동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왠지 모를 날카로운 시선에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오빠, 지금 오는 거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유정이는 내게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유정이의 그러한 태도가 옆에 있는 여인의 궁금증을 더욱 부채질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유정이를 발견한 것이 좋았고, 유정이가 나를 경멸하고 있다거나 하는게 아니라는걸 느껴서 더욱 좋았지만, 한편으론 그 여인이 누구인지 나 또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 교관님.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당주님께도 먼저 안부 전하겠습니다."
유정이는 그 여인을 "교관님"이라 불렀다. 유정이의 배경에 대해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가문의 사람일까, 하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유정이를 "아가씨"라고 부르는걸 보니 아마 그 짐작은 맞는 것 같았다.
"아가씨, 그런데 저 분은 누구신가요?"
"네?"
여인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느닷없이 물으리라곤 유정이도 생각을 못 했던지, 유정이는 꽤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여인은 유정이의 그런 당황하는 기색조차도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외람되지만 오빠라는 말도 그렇고 아가씨의 그 태도도 그렇고.... 보통 사이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하하."
여인은 체격 뿐만이 아니라 웃음소리까지 사내들처럼 굵고 묵직했다. 목소리마저 약간 중성적인 느낌이라 그런지 그녀에게서는 여성적인 느낌보다 남성성이 더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나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여인의 눈길이 나는 조금 거북스러웠다.
"아, 그게...."
그러면서도 나는 유정이가 내심 나를 어떻게 소개할지를 궁금해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 이라는 말이라도 기대했던걸까?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그 여인이 유정이의 고민을 오래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하하하. 제가 곤란한 걸 물었나보군요. 괜찮습니다, 아가씨. 궁금하지만 대답은 다음에 듣겠습니다."
"아, 그래요."
여인은 눈치가 빠르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정이를 그만큼 잘 알기 때문인지, 더이상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 여인의 동작 하나하나에서는 왠지 모를 절도가 느껴졌다.
사라지기 직전에, 여인은 세단의 창문을 내려 유정이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유정이도 여인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렇게 검정색 세단이 가버리고 나자 그 자리에 비로소 나와 유정이만이 남게 되었다.
"오빠."
유정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제와는 조금 달라져 있다는걸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 깊은 눈이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안겨주었다. 평온, 안도, 행복, 사랑.... 그 외에도 여러가지 것들을.
"유정아.... 걱정했어."
"네? 왜요?"
"그, 그게... 연락도 안 되고. 네가 학교를 안 온걸 보고 어디 아픈건 아닌가.... 아, 아니 그보다는 내가 어제 너랑 같이 있어주지 못한게.... 그러니까 걱정도 되고, 불안하기도...."
이런 병신새끼... 떨지 말고 말하란 말이야! 타임 리와인더를 갖기 전의 내 모습이 왠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처 지워지지 못한 본연의 찌질함이 덕지덕지 묻어나오는걸 보면 역시 내 본성은 어쩔 수 없나보다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만큼 마음 속 깊이 유정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 연락하셨어요?"
유정이는 그제야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가방 속에 오래 파묻어놓은 것 같은 휴대폰을 그녀가 잠시 동안 확인하더니, 아마 내 전화와 메시지의 흔적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아주 애매한 표정이 되어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오빠.... 전화가 온 줄은 몰랐어요. 중요한 손님을 만날 땐 휴대폰을 보지 않거든요."
"으응. 괜찮아. 그런데 아까 그 분은....?"
내가 세단이 사라진 흔적을 눈으로 좇으며 묻자, 유정이도 덩달아 그 방향을 보며 대답했다.
"문선영 교관님이에요. 어렸을 적에 도장에서 저를 많이 가르쳐주신 분이에요. 아버님의 정식 제자이기도 하구요. 아버님이 일본으로 가실때 따라가셨는데 지금은 본토 유파 아래에서 여러 문하생들을 가르치고 계신대요."
"아~ 역시 가문의 분이셨구나. 그런데 일본에 계셔야 할 분이 어쩐 일로 한국에?"
나의 그 질문은 사실 내용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두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분위기를 보니 유정이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고 그렇다면 왠지 앞으로도 만날 일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정이는 내 질문에 나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나는 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토록 환하게 웃는 유정이의 얼굴은 또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버님이 한국에 오셨대요."
"응?"
그리고 이어진 유정이의 설명은 내게도 조금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번에 잠깐 한국에서의 일을 해결하러 오셨는데, 일본으로 다시 떠나기 전에 저를 만나고 싶으신가봐요. 원래는 정말 바쁜 분인데 제가 집을 옮겼다는 얘기를 들으시곤 걱정을 하셨나봐요. 출국하기전에 잠깐이라도 꼭 만나고 가시겠다며.... 저에겐 좋은 일이지만요."
잠깐이나마 아버지와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정이는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가족의 품을 그리워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단면이었기에 나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지만 굳이 그녀의 좋은 기분을 해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저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잘 됐네. 오랜만에 아버지를 뵙겠구나."
"아버님은 지금 서울에 계신대요. 중요한 일을 먼저 해결하고 저를 보러 오시겠다고 했어요. 문 교관님은 그 전에 따로 저를 만나고 싶으셨나봐요. 어릴 때부터 선생님처럼 생각했던 분이라 저도 교관님이 무척 반가워요. 비록 어머님이나 동생은 바빠서 못 왔지만 교관님도 만나고 아버님도 뵐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는 좋아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유정이의 모습은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그녀의 그런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나는 좋았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105호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들어오긴 했지만 사실 나는 이곳에 또다시 들어왔다는 것 자체로 마음이 들뜨고 있었다. 유정이 또한 같은 마음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별 어색함 없이 나를 맞이했다. 방 안은 여전히 짐 더미로 여기저기 어수선한 상태였는데, 그녀는 내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보다도 오히려 지저분한 방을 보였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정리를 나름대로 하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혼자서 하다보니 좀...."
약간은 변명처럼 그렇게 혼자 웅얼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웃음을 참으며 나는 묵묵히 팔을 걷어붙이고 이곳 저곳에 널부러진 짐들을 하나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를 대접하려고 뭔가 하고 있던 유정이가 깜짝 놀라 나를 만류하고 들었다.
"오빠, 왜 일을 하고 그래요."
"어차피 이것들 정리해야 하잖아. 같이 하자."
"그, 그래도... 혼자 할 수 있는데."
"주말에 도와주기로 했었잖아. 빨리 시작하면 좋지 뭐."
머뭇거리던 유정이도 내가 앞장서서 박스를 옮기고 짐을 치우기 시작하니 어느새부턴가 동참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날 그렇게 그녀의 방을 함께 정리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닌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던 방 안의 모습도 두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니 차츰차츰 단정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거...."
그러던 중에 눈길을 사로 잡는 그 물건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 투박한 은색의 라이터가 내 시선을 끌어당겼던건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박스 속 잡동사니들의 한가운데에서 마치 그것만이 빛을 발하듯 나에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상태는 다르지만 아무리 봐도 똑같아. 옆집 여자의 물건이 분명한데...."
나는 유정이가 의아해하지 않도록 그 감상을 마음 속으로만 삼켰다. 하지만 생각이 계속해서 꼬리를 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옆집 여자가 정말로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시간의 순서를 따졌을 때 이것은 옆집 여자의 물건이 아니라 유정이의 물건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유정이의 물건이 왜 시간이 흘러 옆집 여자의 손에 남아있게 된 걸까? 나는 비로소 이 때부터 옆집 여자의 정체성이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물쇠를 일부러 풀듯이,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라는걸 느끼고 있었나보다. 골치아파서 억지로 묻어두기만 했던 고민거리를 마침내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내 머릿속에서는 유독 유정이와 옆집 여자 사이의 어떤 연결고리를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유정이에 대한 내 마음을 확고하게 한 것이, 옆집 여자의 문제와도 모종의 관련이 있는 걸까?
"오빠, 이것 좀 봐요."
유정이의 목소리가 왠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던 내 의식을 잡아세웠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돌아보니 유정이가 자그마한 앨범 하나를 내게 흔들어보이고 있었다.
"앨범?"
"이사할 때 물건 정리하다가 찾아낸 거에요. 옛날건데... 같이 볼래요?"
비록 유정이는 가타부타 설명을 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옛날 모습을 내게 보여주려한다는 것이 너무도 애틋한 의미로 다가와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잠깐 옆집 여자의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하고 나는 그녀와 함께 앨범 앞에 앉았다.
"이거... 내 어릴적 모습이에요."
유정이는 천천히 책장을 하나하나 넘겼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본다는 것이 좋았다. 유아기 시절의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작고 귀여웠다. 하지만 머리가 사내아이처럼 무척 짧았고, 표정은 날카로웠으며, 몸이 좀 자란 이후부터는 주로 도복을 입은 모습들이 쭉 이어졌다.
"이 때는 초등학생이었어요. 한국에 퍼져있는 우리 한씨 유파들 간의 친선 대련에서 우승했을 때였어요. 우승한 내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그 때는 나도 이런 것들이 내 삶의 전부일 줄 알았죠."
그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처음으로 나는 유정이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어린 유정이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는 얼굴이 아주 고왔지만, 대신에 표정이 없었다. 다른 모녀들이 이런 추억을 사진으로 남길 때 어머니 쪽이 더 밝게 웃고 있는게 보통이라는걸 감안한다면,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는 딸아이만큼이나 감정이 절제된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유정이의 어머니는 굉장히 유정이와 닮아보였다. 그 담담한 표정 하나까지도 내게는 모녀 관의 혈연관계를 뚜렷이 전달하는 요소처럼 느껴졌다. 사진 속 유정이 어머니의 모습에서 머리만 조금 더 길게 기르더라도 아마 유정이와 어머니를 구분하기 꽤 힘들 것 같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남자들에게 질 것 같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사진을 찍고 몇 년 후에 후계자 대련에서 져버렀어요. 사춘기가 올 무렵 쯤이었던 것 같아요. 여자 몸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달까. 아무튼 이 때부턴 무예에서 꽤 부진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실망했죠. 결국 아까의 사진 이후로 어머니와 둘이서 찍은 사진은 이제 없는 것 같아요...."
이것저것 내게 설명하는 유정이의 표현이 퍽 쓸쓸해보였다. 그런 이유로 딸아이에게 냉담하게 바뀌어버린 어머니의 태도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왠지 그 이야기에서는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무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저 조용히 들어주기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꾸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라고 콕 집어 얘기하기가 힘들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위화감 비슷한 것이었다. 내 마음 속의 뭔가가 자꾸만 유정이의 어머니 사진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어머니 사진 한번만 더 봐도 돼?"
"그럼요."
스스로도 좀체 믿기지 않지만 나는 유정이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희미하게 그 위로 옆집 여자의 느낌을 겹쳐보았다. 사진 속의 얼굴에서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옆집 여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삭막하고 메마른 감정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그 사진을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그게 아니었단걸 깨달았다.
일부러 걸어두었던 자물쇠를 한겹 더 뜯어내는 기분이었다. 유정이를 빼다 박은 듯한 그녀의 어머니를 옆집 여자와 일부 동일시했다는건 곧 유정이와 옆집 여자가 닮았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묻어놓았던 중요한 사실을 끄집어내 머리에 새길 수가 있었다. 분명 유정이는 옆집 여자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또한 한 가지 더 깨달은게 있다면 나는 그동안 그것을 느끼지 못했던게 아니라, 내 감각이 그것에 대해 인지하는걸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유정이와 옆집 여자를 동일시하려는 인식을 끊임없이 거부해왔던 뇌가, 유정이가 아닌 다른 사람(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옆집 여자를 투영하기 시작하니 어쩔 수 없이 그 인식을 이제는 받아들이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상해, 왜 놀랍지가 않지?"
그것은 분명 말로써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힘든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내 마음은 생각보다 별로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까먹고 있었던 사소한 것을 이제야 떠올려내기라도 한 듯, 나의 감각은 그 사실에 대해 환기하는 것을 아무런 무리 없이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럼 정말로 옆집 여자가 유정이란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또 한 차례의 목소리가 나의 상념을 깨뜨렸다.
"오빠, 무슨 생각해요?"
"아, 미안."
고개를 들어보니 유정이가 내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어느새 얼굴이 이렇게 가까워져 있었단걸 모르고 있었다. 내가 눈을 깜빡거리자 유정이가 약간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웅얼거렸다.
"오빠는 별로 재미가 없나봐요. 하긴 도복 입은 모습 같은 것들 밖에 없으니.... 그다지 볼 게 없긴 하죠."
"그, 그런거 아니야!"
오히려 옆집 여자에 대한 문제보다도, 당장 눈 앞의 유정이가 풀 죽은 모습이 내게는 더 심각하게 느껴진 것을 보면 참 기묘한 노릇이었다. 나는 다급히 유정이의 어머니 모습을 그녀에게 가리키며 애처로운 변명을 해댔다.
"어머니가 너랑 무척 비슷하셔서 놀라서 그런 거야. 네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어머니도 네 나이 무렵에는 꼭 너처럼 예쁘셨을 것 같아."
"예뻐요? 제가?"
"당연하지. 내 눈엔 세상에서 제일 예뻐."
솔직히 여자친구를 둘 씩이나 둔 남자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 파렴치한 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화제를 돌리기엔 적절한 이야기였는지 그녀가 무어라 웅얼거리면서도 픽 웃음을 지었다. 왠지 그녀에게서 웃음이 조금 많아진 느낌이었다. 사실 오늘따라 그녀가 특히나 더 기분이 좋아보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런데 아버님이 오셨으니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건 아니야? 이사를 반대하시면 어쩌지?"
"글쎄요... 아마 아버님은 한국에 오래 머물진 못하실 거에요. 곧 일본으로 돌아가셔야 할 테니, 제가 어떻게 하던 크게 개의치는 않으실걸요."
"아버님은 어떤 분이실지 궁금하네."
"왜요?"
"그냥. 아버님 뿐만 아니라 어머님이나 동생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가족 이야기도 더 듣고 싶기도 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는 생각에 덧붙였다.
"사실 너에 대한걸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것 같아."
유정이는 깜짝 놀란듯이 두 눈을 토끼처럼 깜빡거렸다. 놀라면서도 싫지는 않은 듯한 그 기색에 나도 속으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마음 속에서는 무거운 죄책감 비슷한게 떠올랐다. 그러고보면 나는 서연이나 현주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오빠."
"으응."
잠깐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죄책감이 이내 이어진 유정이의 목소리에 다시 묻혀버렸다. 그녀는 수줍어하는 듯 내 시선을 피하면서도 목소리만큼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은 아버지를 만나게 된거.... 오빠 덕분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내가 바보처럼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냥,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좋았어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고 느꼈죠. 그런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반가운 연락이 온 거에요. 마치 누군가가 내게 행운을 가져다 준 것처럼요."
"......."
"아침에 왜 기분이 좋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 생각엔 그게 오빠 덕분도 있는 것 같아요. 오빠랑 좋은 일이 있었던 덕분에 나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 같았어요."
"유, 유정아."
뭐라 차마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여러가지의 복잡한 의미로 내게 그 말을 전한 것이겠지만, 나는 그저 유정이가 지난밤의 일을 "좋은 일"이라고 표현해준 것만으로도 가슴에 벅차는 것 같았다. 가슴이 떨리고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내 이런 모습을 그녀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빠랑 사랑을 나눈 덕분에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아서.... 고마워요."
가슴 밑바닥까지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그녀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미 나도 모르게 달려들어 유정이의 입술을 훔치고 있었다.
그녀와 단둘이 있으면 매번 이렇게 된다는걸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유정이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모양인지, 여느 때처럼 무례하고 갑작스러운 내 기습 키스를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으음...."
지난밤의 육체적인 결합이 모든 면에 있어 우리를 서로에게 좀 더 익숙하게끔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시작된 키스였지만 지난 몇 번의 키스와는 다르게 이번엔 한 쌍의 입술이 이내 제자리를 찾아 서로에게 붙었고, 코로 내뿜는 잔잔한 숨결만이 그 후에 고요히 남았다.
내가 혀로 그녀의 이를 두드리자 그녀가 서툴지만 얌전히 혀를 내어주었다. 그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있어선 더없이 적극적인 승낙이란걸 나는 알고 있었기에 더 힘차게 그녀의 혀를 감싸안았다. 타액이 넘나들기 시작했고, 어쩐지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지는 소리가 방 안에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유정이의 입술과 혀를 탐닉하던 내 입이 마침내 살짝 떨어졌을 때, 나는 내 진솔한 감정을 유정이에게 속삭이듯 털어놓았다.
"사실 많이 불안했어.... 네가 이제 날 보기 싫어하는건 아닌지. 또 그 일을 네가 후회하고 있는건 아닌지. 네 옆에 있어주지 못한게 너무 후회되면서도 그렇게 못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어."
"난 괜찮아요. 내 마음에 든 사람에게 허락한거니까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오빠도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렇게 또 몽환의 감각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취해가듯, 또는 그렇게 홀려가듯 현실감을 상실한 우리만의 세계를 다시 한번 더듬어내고 있었다. 내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하자 유정이가 내 귓가에 대고 한 마디를 속삭였다.
"오빠...."
그녀의 그 "오빠"라는 한 마디는 왜 그렇게도 자극적일까. 마치 도화선을 터뜨리는 불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랑해요."
그 날 우리는 또 한번의 결합을 이루었다.
정해진 곳을 향해 헤엄쳐나가듯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 다음 화에 계속 -
38장이 너무 늦었지요? 죄송합니다ㅠ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느라 조금은 빡빡하네요
부디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릴게요
지난화 캘리컷님의 아이디어에 힘입어, 다음에 기회를 봐서
추천수 이벤트를 한번 진행해볼까해요 (지금은 말구요)
분량을 미리 많이 만들어놓고 일정 추천수가 되면 다음화를 즉각 올리는 식으루요
캘리컷님 말씀대로 해볼까 했는데 사실 700까지는 너무 과욕인 것 같고 500~600이 좋겠어요
암튼 주말동안 틈틈이 글도 최대한 써둬야겠습니다 ^^
늦어서 다시 한번 죄송해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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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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