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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리와인더 - 1부11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07:34 906회 0건
*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1장


"담력훈련"이라는 서연이의 아이디어를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획기적이라는 생각보다는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의문이 더 컸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설렘에 들떠 재잘거리는 새내기들의 모습을 보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여느 엠티 때라면 지금쯤 왁자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을 시간이지만 서연이와 집행부가 기획한 이 독특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밤중에 야외로 나와있었다. 술자리도 마다하고 모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의 표정을 보니 무척 기대하는 눈치였다.

낮에 학과생들이 계곡에서 놀 동안 레크레이션 업체 사람들이 계곡 옆구리 쪽으로 나있는 산길 코스를 담력훈련장으로 꾸며둔 모양이었다. 코스 앞 공터에 옹기종기 모인 학생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얼른 저마다 출발하고 싶어했다.

서연이는 아주 제대로 준비를 한 것 같았다. 모 아니면 도라는 반응을 얻기 쉬운 이런 개성적인 이벤트에서는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아예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히려 제대로 준비를 갖춰서 확실한 분위기를 잡아주기만 하면 획기적인 반응을 얻을 수도 있다는걸 그녀는 이미 아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순서를 설명할게요!"

서연이가 메가폰을 들고 운을 떼자 학과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열광을 해댔다. 좌중을 한껏 휘어잡는 저 여자가 불과 몇 시간 전에 나하고 야외에서 살을 섞었던 여인이라는 사실이 왠지 짜릿했다. 이제보니 서연이는 분위기에 맞게끔 소복을 입은 채로 귀신 분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설명을 대충 들어보니 산길 코스 곳곳에 숨겨져 있는 미션 아이템들을 모아서 다시 이 공터로 돌아오면 미션 클리어라는 것 같았다. 물론 코스 곳곳엔 업체 사람들이 준비한 함정이나 장치들이 있겠지. 6명 정도가 한 조가 되어 이동하며, 미션을 완수하지 못한 조에게는 이따가 술자리에서 벌칙이 있을 거라고 한다. 제법 머리를 쓴 것 같았다.

"뭐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지."

서연이가 어차피 고학번은 참가 여부가 자율이라고 했으니, 나는 그저 공터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의 반응이나 재미삼아 보려는 마음이었다. 서연이의 설명이 끝나고나서 곧이어 첫 조가 출발했다. 대충 6명 정도가 1개조로 움직이는 모양이다.

첫 조가 돌아올 때까지 남은 아이들이 심심하지 않게끔 서연이는 산길 곳곳 나무에 설치해둔 스피커를 이용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BGM을 깔아주고, 각종 음향효과로 아이들을 긴장시켰다. 새내기들은 순진한 건지, 아니면 즐기고 있는 건지 이따금씩 공포스런 음향이 튀어나올 때마다 펄쩍 뛰며 놀라거나, 아니면 깔깔거리며 웃거나 각양각색의 반응으로 그 나름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서연이가 기획한 이벤트가 성공적인 반응을 얻는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멀리서 서연이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귀여웠다.

확실히 환절기는 환절기인가보다. 낮에 계곡물에서 물장구치며 놀았다는게 거짓말처럼 밤이 깊어지자 상당히 매서운 바람이 살결을 스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챙겨온 여벌의 바람막이용 옷가지를 챙겨입고도 몸을 으슬으슬 떨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은근한 추위는 지금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살리는 데에 한층 더 도움을 주었다.

"완전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빨리 출발하고싶다."
"난 이런거 태어나서 처음 해봐."
"근데 어두워지니까 좀 으스스하긴 하다... 여기."
"으스스하긴. 그냥 한바퀴 돌고온다고 생각하면 되지."
"꼭 너같이 허세부리는 애들이 막상 할 땐 못하더라."

차례를 기다리며 저마다 한마디씩 재잘거리는 새내기들이 보였다. 그 중에 유성이의 모습도 있었다. 비록 다른 아이들처럼 재잘거리고 있진 않았지만 말이다. 우연히 유성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유성아, 왜?"
"아니에요."

할 말이 있는 걸까? 하지만 더 물어보기도 전에 공터 앞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느새 첫 조가 도착한 것이다.

"야, 야, 어땠어? 말 좀 해봐."
"야, 진짜 존나 무서워. 너네 장난일거같지? 진짜 한번 가봐."
"에이, 거짓말. 겨우 한바퀴 돌고 오는게 무섭다고?"
"니가 직접 가봐야 알지. 진짜 마음의 준비 하고 가라. 장난 아니야."

코스를 경험하고 온 아이들에게 달라붙어서 후발 주자들은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캐물으려고 난리를 쳤고, 다녀온 첫 조의 아이들은 으쓱해하며 뒷사람들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기 위해 약을 올리는 분위기였다.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더 무섭게 느껴질 거란 심리인가보다.

그래도 대충 들어보니 업체 사람들이 코스 곳곳에 준비해놓은 것들이 상상 이상이긴 한 모양이다. 내가 직접 가보진 않았으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어쩌면 서연이가 무섭기는커녕 귀엽기 짝이 없는 저런 처녀귀신 분장을 하고 있는 이유가 오히려 출발 전에 긴장감을 탁 풀어주기 위한 전초작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문득 호기심이 솟았다.

2조가 출발하고나서 다시 돌아오기까지 1조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돌아온 2조 아이들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들어보니 무슨 시간제한 미션을 실패해서 미션을 완수하지 못했대나.... 좌우지간 그러고나서 3조가 출발했고, 이어서 4조, 5조의 순서까지 진행되었다.

아이들이 돌아올 때마다 반응을 살펴보았는데 저마다 "무섭다"는 한마디씩은 꼭 했다. 그쯤되니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자, 혹시 아직 못 가본 사람? 조 편성이 안 됐지만 혹시라도 가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모아서 7조로 만들어 줄테니까 한번 손들어봐요!"

대여섯개의 조가 코스를 돌고 나자, 대충 끝나갈 때가 되어보였다. 결과를 보니 4개조는 미션에 성공했고, 2개조는 실패했다. 서연이가 메가폰을 잡고는 아직 코스 참가를 못 해본 인원이 없는지를 체크했다. 나처럼 뒤로 빠진 고학번들은 몰라도 새내기들은 한번씩 다 참여를 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참가를 못한 새내기들이 있었는지, 여학생 두명이 쭈뻣거리며 손을 들었다.

"서연 선배~ 저희도 해보고 싶은데요."
"너희 아직 못 가봤어?"
"네. 남는 사람들이 몇 명 없어서..."

아마 뒷전으로 계속 밀리다가 몇 명만 남게 되어 조를 짜지 못하고 소외된 아이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기심이 많은 애들인지 꼭 가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자, 여기 예쁜 새내기 두 명 데리고 다녀올 남학생들 없어요? 꼭 1학년 아니더라도 괜찮으니까 안 갔다온 사람들은 한번 손들어 봐요~"

그러자 한 구석에서 학년이 좀 되어보이는 고학번 남학생 하나가 쑥스럽게 손을 들었다. 나처럼 뒷전으로 빠져 있었던 모양인데 아무래도 새내기 여자 후배들과 다녀올 수 있다는 사실에 메리트를 느꼈나보다. 그 남학생이 손을 들자 나도 문득 마음이 동했다. 그렇잖아도 호기심이 생기긴 했는데... 까짓거 그냥 한번 해볼까?

"나도."

내가 손을 들자, 메가폰을 잡고 있던 서연이가 역시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근슬쩍 대열에 끼어든 내 옆구리를 서연이가 푹 찌르며 낮게 말했다.

"뭐에요? 선배는 안 한다면서요?"
"보다보니까 재밌을 것 같아서. 왜? 안돼?"
"어린 여자 후배들에 혹한게 아니구요?"
"야, 날 뭘로 보는거야?"
"어쩐지 유성이한테도 집적거리는게 수상하다 싶더니... 새내기 취향이었어요?"
"참 나...."

서연이와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한 무리의 학생들 속에서 누군가가 한명 더 비집고 나타났다. 나는 물론이고 서연이로서도 전혀 예상 못한 인물이었기에 우리 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낄게."

아니, 놀랐다는 표현만으론 뭔가 부족했다. 어이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특히나 서연이의 얼굴은 어안이 벙벙해서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이었다.

"지, 지환 선배?"

서연이는 이제 지환이를 "오빠"가 아닌 "선배"라고 부르나보다. 그런거야 내 알 바가 아니었지만, 내가 가겠다는걸 보고서 버젓이 자기도 끼겠다고 하는 지환이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학과생들이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나, 그리고 서연이에게는 이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는 내 얼굴만 봐도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자리를 뜨거나 인상을 구기는 지환이 놈이였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같은 조로 끼겠다니... 대체 뭔 생각이지?

"선배, 괜찮겠어요?"

서연이가 나를 슬쩍 찌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와 지환이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 서연이가 보기에 이건 보통 해괴한 일이 아니었나보다. 심지어 나를 보는 서연이의 눈에는 걱정하는 기색까지 있었다. 사실 예전에 나와 지환이는 서로 주먹질까지 한 적이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 했지만.

"별 수 없지. 저 녀석도 나처럼 없던 호기심이 갑자기 생겼나보네, 뭐."
"내가 보기엔 그런게 아닌 것 같은데... 선배가 간다고 하니까 일부러 따라오는 것 같잖아요. 느낌이 안 좋은데 그냥 선밴 빠져요."
"야, 그럼 내가 지환이 얼굴 보고 일부러 피하는 것 같잖아. 더 이상해 보인다구."
"그, 그래도요."
"됐어. 설마 이런데서 무슨 수작이라도 걸까봐? 의외로 저 놈도 아무 생각 없을 수도 있으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나와 서연이가 서로 귓속말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고서도 지환이 놈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와 서연이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 봐도 멀리서 스토커처럼 인상을 구기던 녀석이었는데....

오히려 나와 시선이 마주치니 씨익 웃기까지 한다. 그 언젠가 있었던 개총 행사의 술자리에서 녀석이 내가 지어보였던 그 재수없는 웃음 그대로였다. 웃는 낯짝을 보니 진짜로 뭔가 꿍꿍이가 있나 싶어 찝찝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녀석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성진 선배. 저도 같이 껴도 되겠죠?"

어랍쇼... 이것 봐라. 여태껏 투명 인간 취급하며 무시하더니 갑자기 인사?

"그래. 뭐 그러던가."

한 마디씩 주고 받는 나와 지환이의 모습을 서연이는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여자 특유의 직감이 뭔가를 캐치한 것 같았지만 내가 빠질 생각이 없어보이자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나머지 인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6인 1조가 원칙이기도 했거니와, 아무래도 한 명이라도 더 붙여서 보내는게 그녀로서는 마음이 놓일 테니.

"자, 그러면.... 한 명만 더 모을게요. 아직 안 해본 사람 중에 가고 싶은 사람?"

새내기들은 모두 한 차례씩 다녀왔기에 더이상 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한 명이 손을 들고 나왔다. 지환이 만큼 의외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나와 서연이 입장에선 꽤 익숙한 얼굴이었기에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유성아? 너 아직 코스 안 다녀왔었어?"
"네.. 무서운건 좀 싫어해서요. 조 만들 때 뒤로 빠져 있었어요."
"그, 그래? 그런데 왜 굳이...?"
"그냥요... 어떤지 궁금해서..."

유성이는 보기보다 거짓말에 서투른게 분명했다. 시선을 피하면서 말 끝을 흐리는 모습이 아까 계곡에서의 유성이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무서운게 싫어서 뒤로 빠져 있었다던 애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지환이 녀석에 이어서 유성이까지... 갑자기 왜 이렇게 꼬리들이 주렁주렁 달린 기분이 들지?

"안 되나요?"
"아냐, 안 되는건 아니지. 알겠어 그럼."

그렇게 7번째 조가 이루어졌다. 여학생 둘, 남학생 하나, 지환이, 유성이, 그리고 나.
이 애매한 조합은 대체 뭘까?

"유성아."
"......"

출발 전에 잠시 시끌시끌한 틈을 타서 유성이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유성이는 대답 없이 고개만 들었다.

"무서운거 싫다는 애가 왜 굳이 마지막에 나왔어? 혹시 나 따라 나온거니?"
"그런거 아니에요."

농담으로 건넨 말이긴 했지만 속으로 어쩌면 아웃사이더 축에 드는 유성이로서는 아는 얼굴이 몇 명 없으니 나를 보고 나왔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유성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조원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학번이 높았기에 어쩌다보니 조장 비슷한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뭐 각자의 이유야 모르겠지만 나는 기왕 다녀오기로 한거 즐겁게 즐겨보자는 생각으로 조원들을 이끌고 출발했다. 이래뵈도 괴기현상이나 공포영화에 관심이 많은 나다. 어쩌면 즐거운 추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출발하기 전에 상의 안주머니를 무의식적으로 한번 확인해보았다.
타임 리와인더는 여전히 그 자리에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쓸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


"윽!"

두번째 미션 아이템이 숨겨져 있는 나무의 옹이구멍을 발견했을 때쯤, 나는 뜻밖에도 유성이가 평정심을 잃는 모습을 보았다. 언제 어디서든 무표정한 얼굴로 무뚝뚝한 대답만 할 것 같은 그 아이가 놀라서 몸을 움찔한 것이다.

물론 그럴 만 하긴 했다. 옹이구멍 속에 숨겨진 미션 아이템인 귀신 인형을 집어들었을 때, 놀랍게도 구멍 안에서 해골의 손이 쑥 튀어나와 내 손을 덥썩 잡은 것이었다. 살면서 진짜 해골을 보지는 못했지만, 질감이나 형태 등이 도저히 가짜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만큼 퀄리티가 높은 해골이었다.

"아씨... 무, 무섭잖아..."
"농담인줄 알았는데....."

해골손을 목격한 여학생 두명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처음에는 즐기는 듯한 반응이었던 두 여학생은 첫번째 미션 장소를 지나 두번째 미션 장소에 이를 때 즈음이 되니 이제는 완전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얼른 미션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나조차도 깜짝 놀랐던 것이다. 새삼 서연이의 스케일에 감탄을 느낄 정도였다. 곳곳에 설치된 목 매달린 귀신 인형이라던지, 스피커에서 이따금씩 튀어나오곤 하는 으스스한 울음소리라던지, 미션 장소까지 가기 위해서 필수로 거쳐야하는 지역 곳곳에 배치해놓은 섬칫한 함정 같은 것들을 거쳐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물론 이 정도의 퀄리티는 레크레이션 전문업체에서 협력을 받았으니 가능한 거겠지만 그래도 산골 한바퀴 슥 돌고오는 수준의 고등학교 수련회 담력훈련과는 여러모로 질의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먼젓번에 다녀왔던 앞의 조 아이들이 무섭다고 했던 반응이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으윽... 선배들, 우리 빨리 끝내고 내려가요."
"귀신의 집 들어온 기분이야...."

두 여학생은 수다로 공포를 이겨내보려는 마음인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하지만 그에 비해 유성이는 여전히 과묵하게 그저 우리 뒤를 따라 걷기만 했는데, 겉모습과는 다르게 나는 유성이가 조금 떨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유성이의 동기들도 유성이를 잘 모르겠지만, 거기 모였던 6명 중에서는 그래도 내가 그나마 그 아이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할 수 있는 편이기에 나만이 그걸 느끼고 있었다.

"유성아, 너 무서운거 싫어한다던거 정말인가보네."
"왜요?"
"그냥 네가 놀라는게 의외여서. 무서워하는 모습 보니까 너도 스무살 여자애 같아보인달까. 하하."
"저 무서워한거 아닌데요?"

다시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유성이였지만 왠지 이번에는 발끈해서 그러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귀여웠다. 세번째 미션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잠시 볼일이나 해결할까 해서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 나름대로 급한 느낌이 왔기에 어쩔 수 없이 노상방뇨를 하기로 했다.

"얘들아, 선배 잠시 화장실 좀."
"어머, 선배. 지금 자연훼손 하시려는 거에요?"
"돌아가면 애들한테 소문낼 거에요."
"맘대로 해, 다녀온다."

유성이를 제외한 여학생 둘은 정말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재주를 가진 것 같았다. 아웃사이더인 나로서는 학과 후배들과 이렇게 웃고 떠드는게 정말로 모처럼만의 일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묘했다.

"그럼 저도 같이가요."

내가 수풀 구석으로 움직이자 지환이 녀석도 따라왔다.
왜 아까부터 이 놈이 나한테 달라붙는다는 느낌이 들지?

"어머나, 지환 선배처럼 잘 생긴 남자도 노상방뇨를 해요?"
"야, 원빈도 노상방뇨는 할 수 있는 거야. 이해해 드려야지."

참 놀고들 있다... 떠들어 제끼는 여학생 둘에게 까불지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주의를 준 다음 수풀 근처에서 적당한 곳을 찾았다. 그 두 여학생과 유성이는 별로 친해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을 유성이의 모습이 안 봐도 뻔했다. 유성이가 외롭지 않게 되도록 얼른 싸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진 선배, 요새 뭐 좋은 일 있으신가봐요?"

내 살다살다 지환이 놈이랑 나란히 서서 오줌을 싸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역시 인생은 의외의 연속이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더욱 의외스럽게도 지환이 녀석이 뜬금없는 소리를 뱉었다. 무슨 뜻일까?

"딱히 별 일 없는데. 뭔 소리야?"

아직까지 주먹질의 기억이 머리 한켠에 남아있긴 했지만 말을 걸어온다면 대화를 하지 못할 이유는 또 없었다. 어찌됐든 지금이야 뭐 지환이 녀석에게 별 감정이 없으니까. 오히려 녀석의 소중한 여자친구를 어찌보면 내가 단단히 훔친 셈이 되기에 녀석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글쎄요, 별 일 없으신건 아닌 것 같던데요. 남의 여자 보란 듯이 가로채서 계곡에서 시원하게 빠구리도 한판 즐기시고 말이에요."
"뭐....?"

하지만 지환이 놈의 다음 말을 듣자마자 잠시나마 녀석을 불쌍하게 여겼던 생각은 단번에 날아가버렸다. 등 뒤에 한줄기 식은땀이 주룩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타임 리와인더를 가져본 이후로 "당황" 이라던가 하는 감정을 느껴본 일이 좀체 없었기 때문에 모처럼 찾아온 그 경악스런 느낌은 내게 있어 무척 이질적이었다.

게다가, 그 놀라움의 크기가 너무도 컸다.

"무, 무슨 소리야?"
"시치미 떼시긴요. 이걸 보시면 떠오르시려나?"

지환이 녀석이 능글맞게 휴대폰을 꺼내어 내게 사진첩을 열어 보여주었다. 화면 속의 사진들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서연이와 계곡 바위 위에서 살을 섞고 있는 내 모습들이 녀석의 사진첩 안에 가지런히 정열되어 있었다. 몇 장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진들이 주루룩 늘어서 있었는데 굳이 그것들을 다 보지 않아도 서연이와 나의 섹스를 촬영한 사진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서연이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허리를 올려치고 있었고, 서연이는 그런 나의 행위에 자극받은 걸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눈을 감고 음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 하나하나까지 찍힐 정도라면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찍었다는건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문득,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머릿 속에서 금방 지워버렸던 사소한 것 하나가 떠올랐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지만, 분명 서연이와 절정에 오를 때 뭔가 거슬리는 소리 하나를 듣긴 들었던 것 같다.

"보고 있었던게.... 너였냐?"
"킥킥."

내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낚아채려고 하자 지환이가 재빨리 손을 거두면서 기분 나쁘게 웃어댔다. 기분이 섬뜩했다. 자기의 옛 여친이 다른 남자와, 그것도 야외에서 섹스하는 모습을 핸드폰으로 촬영까지 한 장본인이 눈 앞에서 웃고 있다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섬뜩했을 것이다. 혹시 이 새끼 충격으로 어디가 잘못된 걸까?

"성진 선배, 후배 여친 뺏어서 존나게 따먹으니까 기분이 어떠시던가요? 안그래도 나 맘에 안들었을텐데... 아주 후련하셨겠어요? 좆같은 후배새끼 아주 제대로 엿먹인거잖아요. 큭큭...."
"......."
"서연이 먹어보니까 어떠냐구요? 하긴 그러고보니 나랑 사귀기 전에 선배가 참 구질구질하게 쫓아다녔다고 했지... 어떻게 한번 따먹어보려는 생각으로 쫓아다닌거 맞죠? 소원 성취하고 나니까 기분 어때요? 응? 어떠냐고, 이 개새끼야!!!"

미친놈처럼 주절거리던 지환이 녀석이 달려들어 내 멱살을 와락 움켜쥐었다. 무섭다기보단 당황스러웠다. 이미 사진은 찍혔고, 만약 이게 문제가 된다면 이건 오로지 내 잘못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서연이더러 야외에서 하자고 꼬신게 나였고, 주변을 살피지 않은 것도 나의 부주의 때문이었다. 지환이 녀석은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그딴 것보다도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를 머릿 속으로 굴리고 있었다.

"니... 니가 뭔데.... 너 같은 찌질이새끼 따위가.... 서연이도 찐따새끼라며 늘 무시했었던 니가.... 어떻게 감히 서연이를...."
"야, 진정해. 어차피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서연이랑 끝났다며."
"좆까, 이 씨발새끼야!!!!"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입술에서 피가 터졌다. 주먹을 한방 허용한 내 고개가 홱 돌아가며 머리가 핑 돌았지만 나는 애써 거리를 벌리며 침착하게 놈과의 대화를 이끌어가려고 시도했다.

"야, 진정하라고. 일단 사진부터 지우고 얘기하자. 너도 서연이가 문제되는건 원하지 않을거 아냐. 안 그래?"
"입 닥쳐. 이 자리에서 당장 서연이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낱낱이 다 밝히고 다시는 서연이 곁에서 집적거리지 마."
"뭔 소리야.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뻔뻔한 새끼.... 너 같은 찌질이 따위가 어떻게 서연이를 차지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지. 강제로 범해놓고 그걸 빌미로 협박 같은걸 했겠지? 아니면 그보다 더한 악질적인 방법을 썼거나. 그게 아니라면 너 같은 새끼가 서연이를 갖고 논다는 일은 있을 수 없어."

솔직히 말하면, 강간을 한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절대로 그거 가지고 협박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새끼에게 그걸 말한다한들 당연히 믿을 리는 없어보였다.

"선배들, 무슨 소리에요? 뭔 일 있어요?"
"귀신이라도 나온 거에요?"

멀리서 여학생 두 명이 우리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있었다. 다행히도 대화 내용까진 듣지 못하는 거리인지 외침소리가 아득하게 들렸지만, 혹시나 그 애들이 지금 여기에 온다면 상황은 더욱 꼬여버릴 것이다.

"아냐! 아무 일 없어. 그냥 거기 있어!"

혹시라도 방금 그 사진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지환이 새끼도 내가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 같았다. 비열한 새끼.

"큭큭, 생각해봐. 엠티 와가지고 야외에서 학과생과 발가벗고 섹스하는 여성 학회장이라니.... 소문 겁나 빠르게 퍼질 것 같지 않아? 파급력 죽일 것 같지 않냐구? 응?"
"나한테 그걸 보여주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였냐? 일단 진정하고 우리 말로 하자. 너도 애들 보는 눈 없는 여기까지 와서 굳이 이러는거보면 서연이가 소문 나는건 원치 않는 거잖아, 안 그래?"
"웃기지 마. 그 걸레같은 년이 어떻게 되든 이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뭐?"
"아무리 약점을 잡힌게 있다고 해도 지 남친이랑 할 때보다 더 짐승같이 따먹히며 좋아하는 그런 걸레같은 년, 이제 나도 필요없어. 그 년 실체를 알았으니 이제 복수할 일만 남았지. 나를 갖고 논 것에 대한 복수 말이야."

병신... 그거야 니가 섹스를 존나게 못하기 때문이지. 오죽하면 서연이가 너랑 했던 수많은 섹스들보다 나한테 당한 강간 한 번이 더 좋았다고 얘기를 하겠냐? 라고 쏘아붙이지 못하는 내 처지가 답답했다.

"복수라니 뭘 어떻게 하겠단 거야?"
"큭큭큭. 여기서 내려가는대로 서연이 그 년 불러다가 이걸 보여줄거야. 소문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나랑 다시 사귀고, 앞으로는 내 말 잘 들으라고 말이지. 다른 놈 좆대가리에 잠시 홀려서 걸레처럼 가랑이 벌려댔으니 그 댓가를 치러야지 않겠어? 그 년이 걸레라는걸 알았으니 나도 이제 걸레처럼 대해주려고."
"미친 놈...."

상태가 안좋은 놈인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광기 어린 눈빛에서 이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더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당신도 몸 성하고 싶으면 깝치지 말고 조용히 찌그러져 살아, 알겠어? 어차피 내가 원하는건 서연이 그 씨발년이지, 너 같은 찌질이는 내 안중에도 없었으니까. 잠시 주제 넘게 설쳤던걸 후회하면서 조용히 살라고. 알아들어?"
"......."
"난 여기서 내려가는대로 서연이 그년을 불러다가, 네놈이 낮에 서연이 따먹었던 그 장소, 그 자리에서 그 년을 그대로 혼내줄거야. 자기 주인 놔두고 다른 놈 좆에 홀린 벌이니까 네놈이 했던 것 몇 배 이상으로 즐겨줘야겠지. 넌 그걸 보면서도 못 본척 하고 있으면 돼.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서연이 그 년 곁에서 집적거리지 않는 거야."
"......."
"크크크, 마음 같아서는 네놈도 인생 시궁창을 만들어주고 싶지만.... 그 정도에서 눈 감아주겠다는거지. 어때? 내 말대로 할 수 있겠지? 안 그랬다간...."

다시 휴대폰을 꺼내들어 보란듯이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어대는 지환. 나도 그리 떳떳하게 도덕적인 인간은 아니다만, 자기의 옛 여친을 무슨 소유물로 보고 약점을 잡아 노리개 삼으려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이가 부드득 갈렸다. 어쩌면 그동안 나로서도 서연이에 대해 정이 들만큼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서연이가 그런 꼴을 당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품 안을 더듬어 타임 리와인더를 손끝에 쥐었다. 저 놈이 지금은 저렇게 신이 나서 지껄여대고 있지만 시간을 돌리기만 하면 놈의 무기는 사라진다. 시간을 어느 시점 근처로 되감는 것이 좋을까? 담력 훈련을 시작하기 전으로? 아니면 계곡에서 섹스하기 이전으로? 아니면 아예 엠티를 오기 이전으로?

"아차..."

그 순간 나는 지금 타임 리와인더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뒤통수에 망치를 한 방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갖 사소한 문제들까지 그것으로 해결해오던 습관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로서는, 이런 극악의 사태를 앞에 두고 달리 떠올릴 수 있는 해결책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씨팔..."

당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지환이 새끼는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무척 즐기는 듯한 눈치였다.

"앞으로 서연이 그 년은 내가 잘 가지고 놀거니까, 다시는 그 년 근처에 얼씬대지마라. 안 그랬다간 학교에서는 물론 앞으로 얼굴 떳떳하게 들고 살아가기 힘들게 만들어 줄 테니까. 요새 인터넷에 한번만 올리면 전국에 쫙 퍼진다는거 알지? 인생 망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살아."
"........"
"애초에 너 같은 찌질이 새끼 따위가 어딜 감히.... 미쳐가지고. 킥킥."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히죽 웃으며 핸드폰을 들어보인 지환이 놈은 땅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져가는 그 놈의 등을 바라보며 머릿 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교차하고 지나갔다.

"어쩌지....? 그냥 내버려두고 내일까지 기다릴까...?"

타임 리와인더의 재구동에 필요한 시간은 10시간. 시계가 전달하는 문장을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었지만, 그걸 믿는다 쳐도 앞으로도 서너시간 정도는 남았을 것이다. 그냥 얌전히 기다렸다가 시계의 기능이 돌아오면 그 때가서 시간을 되감아 버릴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음 속에서 한 가지 목소리가 나를 질책하듯 꾸짖었다.

"한심한 새끼."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물건에 의존하고 있다니....

내가 지금 저 새끼를 말리지 않으면 서연이는 어떤 형태로든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지환이에게 사정없이 유린당하거나, 아니면 학과생들에게 퍼져나가는 사진들로 인해 더욱 비참한 신세가 되거나.... 어느 쪽이든 도저히 눈 뜨고 지켜볼 수 없는 사태였다. 이미 그 일이 일어나고나서 뒤늦게 시간을 되감는다 한들 그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그게 없었던 일이 된다고 해서 내 스스로 위로가 될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아마 아닐 것이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시간이 지난다 한들 시계가 무사히 작동해줄거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나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런 비현실적인 물건 따위에 의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건 나로 인해 일어난 문제이며, 내가 수습해야 할 일인 것이다. 서연이가 어떤 형태로든 그 책임을 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야, 거기 서."

지환이를 불러세웠다. 마음 속의 그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힘 따위에 의존해서는 안 돼. 불과 몇 시간 전에 나는 그렇게 다짐했지 않은가.

"핸드폰 내놔."

지환이에게 손을 내밀자, 녀석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런 놈에게 서연이가 유린 당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여기 이 자리에서 이 놈의 속셈을 말려야만 했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것 따윈 지금은 무리다.

"뭔 개소리야?"
"핸드폰 내놓으라고, 이 자식아."
"달란다고 내가 줄 거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를 상대로 그런 생각이나 하는 니가 쓰레기라는 생각 스스로 안 드냐?"
"푸핫. 남의 여자 협박해서 노리개로 갖고 노는 놈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네가 믿을진 모르지만 협박 같은건 한 적 없어. 오히려 네가 지금 하려는 짓이야말로 네가 욕했던 그런 더러운 짓이라는걸 모르겠냐?"

여차하면 힘으로라도 뺏을 생각이었다. 좌우지간 저 핸드폰만 없으면 녀석이 서연이를 협박할 거리는 없다. 물론 녀석이 서연이와 나 사이를 학과생들에게 떠벌리고 다닐 수는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물증이 없다면 한낱 유언비어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하기로 한다.

"맞고 줄래, 그냥 줄래?"
"......."

지환이 녀석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순순히 내 손 위에 자신의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풀리는 것 아닌가 싶어 의아했지만 나는 곧장 휴대폰을 열어 녀석의 사진첩에서 사진들을 지울 생각으로 폰 화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눈 앞이 까매지며 머리에 둔탁한 충격을 받은 나는 수풀 위에 털썩 쓰러졌다.

"크헉..."

무언가로 머리를 찍어내린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이대로 기절해 버릴 것만 같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통증을 참아냈다.

"찌질이 새끼가 나이 한살 많다고 존나 가오 쳐잡네.... 가져가봐, 힘으로 가져가 보라고, 찌질이 새끼야! 앙!?"
"이 개새끼가...."

쓰러진 내 몸에 있는 힘껏 발길질을 해대는 지환.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고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런 태클에 당황한 그 놈이 뒤로 넘어졌고, 우리는 그 언젠가 술집에서 뒹굴었던 것처럼 다시 서로에게 주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와는 다르게 머리 뒤쪽에 입은 통증이 너무 커서 그런지 주먹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다.

위에 올라타 마운트를 잡긴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런지 아슬아슬했다. 내 주먹 세례를 받던 지환이가 왼손으로 땅바닥을 더듬더듬 짚더니, 내 눈에 모래를 한움큼 뿌려버렸다.

"으큭."

시야가 막히는 것은 물론이고 모래 안에 잡다한 이물질도 있었는지 순식간에 눈알에 통증이 왔다. 내가 옆으로 나뒹굴자 지환이 녀석은 벌떡 몸을 일으켜 있는 대로 나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퍽퍽 거리는 소리가 수풀 너머로 울러퍼졌다.

"그만 해!"

정신을 잃을 정도까지 구타가 이어졌을 무렵, 나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하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긴 했지만 그 누군가가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나는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그 여학생의 실루엣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 유성아...."

모래가 들어갔던 눈을 헐레벌떡 털어내며 위를 올려다보자 유성이가 서 있었다. 처참한 꼴의 나를 내려다보던 유성이가 예의 그 무덤덤한 말투로 내게 묻는다.

"괜찮아요?"
"응.... 그런데....."
"일단 가만히 있어요. 다른 여자애들은 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신경 쓰지 말구요."

왠지 지금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한 유성이의 말투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의문을 궁금해 하기에는 지금 내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어떻게 된건진 모르겠지만 이 틈에 기력을 회복해서 어떻게든 지환이 녀석을 제압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유성이는 그런건 아랑곳 않고서, 곧장 지환이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야."
"뭐?"
"니 핸드폰 내 놔."

지환이 새끼도 어이가 없었겠지만 쓰러져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나도 귀를 의심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뭘 어쩌려는 거야?

"너 지금 뭐랬냐?"
"니 핸드폰 내놓으라고, 이 씨발 좆만한 새끼야."

경악.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그 와중에도 말 그대로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전의 그 말은 분명 유성이의 목소리를 빌어 튀어나온 것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 아이가 한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허... 허헛. 나 참. 이 년이 처돌았나? 너 신입생 아니냐?"
"아가리 닥쳐. 다시 두 번 말하게 했다간 대가리를 찢어줄테니까. 당장 내 손 위에 니 핸드폰 올려놔."
"미친 년이 주둥이에 걸레를 물었나? 못 주겠다면 어쩔 건데."
"못 주겠다 이거야?"
"그래, 이 씨발년아.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 커억!"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이 순간에 내가 받았던 충격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고, 그 다음엔 눈을 의심했다. 말보다 빠른 유성이의 주먹이 내가 도저히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지환이의 명치에 정확하게 꽂혔고, 쩍 하는 짧은 타격음이 한 차례 울린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야."

명치를 움켜쥐고 구토를 하듯 상체를 수그린 지환이의 뒷통수를 유성이가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그러자 뒤통수 채로 꺾이는 목. 유성이가 뒤로 꺾인 지환이의 목젖 부근을 사정없이 손날로 내리쳤다. 뭔가가 짓이겨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수풀 들판에 또렷하게 울렸다.

"꺼... 꺼허억... 꺼헉...."

명치와 목젖. 인체의 치명적인 급소 두 군데를 얻어맞은 지환이가 순식간에 바닥에 데굴데굴 뒹굴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목을 움켜쥔 채로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걸로 봐서 기도에 제대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누가 보면 여학생의 주먹에 파워가 얼마나 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리석은 소리다. 저 곳은 초등학생이라도 정확하게 제대로 때리면 사람을 죽게 만들 수도 있는 급소다.

"내가 씨발, 좋은 말로 하니까."

발길질로 지환의 복부를 그대로 걷어차는 유성이.
지환이가 나를 걷어찰 때와 마찬가지로 퍼억! 하는 소리가 울린다.

"알아 처 먹질."

퍼억!

"못하지."

퍼억!

"이 개새끼야."

퍼억!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가며 발길질을 해대는 유성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얼이 빠져 손발이 떨리는걸 느꼈다. 고작해야 스무살 짜리 여자애가 사람을 패는 장면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면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그 누군가도 지금 유성이의 모습을 직접 본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유성이의 모습은, 정말로 무서웠다.

"으으... 으으으...."

내가 입을 멍하니 벌리고 차마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믿을 수 없는 구타의 현장을 가만히 보고만 있은지 1분 정도가 지나자 지환이의 꼴은 오히려 그 녀석에게 얻어맞은 나보다 더 심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성인 남성을 피떡으로 만들어버린 스무살짜리 여자애가 숨을 고르며, 이윽고 쓰러진 지환의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아냈다. 핸드폰을 뒤지느라 고개를 숙인 탓에 나는 잠깐 유성이의 눈을 볼 수 있었는데, 도저히 여자애라고 생각할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좆 같은 새끼가 잠금까지 걸어놨네."

유성이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수풀에 침을 탁 뱉었다.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믿을 수 없다고 해야 할지....
내가 물론 유성이를 오랜 시간 보면서 파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애가 한순간에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건가?

빠작!
잠금장치 때문에 욕설을 내뱉던 유성이가 아예 핸드폰을 밟아서 뭉개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몇 번이나 반복해서 폰을 밟아대더니, 너덜너덜해진 휴대폰을 휙 던져 수풀 옆쪽으로 흐르는 계곡물길에 그대로 첨벙 빠뜨려버렸다.

"일어나요, 선배."
"으, 응?"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믿기 힘들 이 비현실적인 사태 앞에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자, 유성이가 손수 나를 일으켜세웠다. 방금 전까지 성인 남자를 죽도록 두들겨 팼던 그 고사리 같은 손이 나를 부축한다.

"걸을 순 있어요?"
"으응."
"일단 가서 얘기해요. 저 개새끼도 사진은 없어졌으니까 함부로 헛짓거리는 못하겠죠."
"으, 응. 근데 유성이 너 어떻게....."

.....이 상황을 알고 있는 거야? 라고 물으려던 내 질문이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쓰러진 줄 알았던 지환이가 뒤에서 내 등을 몸통 채로 들이받은 것이었다. 덕분에 나를 부축하고 있던 유성이까지 불시의 기습을 받고 몸이 휘청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 씨발 개 같은 년! 죽여버린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눈이 뒤집혀 괴성을 지르며 지환이 새끼는 유성이에게 발길질을 가했다. 유성이는 가느다란 양팔을 들어 발길질을 막았지만 역시나 신체가 남성에 비해 연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지 궁지에 몰리자 반격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당장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순간, 충격적인 것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야!! 임지환, 미친 새끼야!! 그만 둬! 그 뒤는 낭떠러지란 말이야!!"

얄궂게도 지환이 놈이 유성이를 몰아붙이고 있는 그 방향은, 좀 전에 유성이가 지환이의 핸드폰을 집어던져버린 바로 그 계곡물과 닿아있는 낭떠러지였다. 높이가 그리 높진 않았지만 아래로는 계곡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는지, 물줄기 흘러가는 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아득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맛이 간 지환이 새끼는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여러 대의 타격을 허용하던 유성이의 가느다란 작은 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점점 떠밀렸고, 급기야는 낭떠러지 끝자락에 붕 떴다.

"그만두라고, 새끼야!!"

유성이의 몸이 공중에 뜨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지환이를 향해 달려간게 아니라, 유성이를 향해 달린 것이다. 지금 유성이를 구하려고 했다간 나도 덩달아 같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몸은 그래도 움직이고 있었다.

유성이가 낭떠러지 아래로 내밀려 떨어지기 직전에 나는 몸을 날려 그 아이의 몸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그 직후 지환이의 발길질이 내 등에 다시 한번 가해졌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음 순간 나의 몸은 사정 없이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여전히 유성이의 몸을 감싸 안은 채로.

"저... 개새끼...."

아래로 떨어지면서, 나는 낭떠러지 끝에 서있는 그 놈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이가 부드득 갈렸지만 분노할 여유마저 없었다. 계곡 물의 수면 위에 나의 등이 부딪히기 직전에, 나는 유성이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그 아이를 몸으로 감싸 안고 추락에 대비했다.

첨벙!
유성이를 끌어안은 내 몸이 수면을 세차게 뚫고 물 속으로 잠기는 것을 느꼈다. 물살이 차갑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수면 너머로 아득하게 달빛이 아른거리는 모습을 끝으로 나는 그만 의식을 잃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지금까지 타임 리와인더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는 당연히 농담입니다 ^^;

오늘은 고향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고향에 다녀오면 또 밤이 늦어질 것 같아서 아예 일어나자마자 한편을 마무리해서 올려놓고 갑니다.
지난 화를 올린지 너무 얼마 되지 않아 올리는 건가 하는 느낌도 들지만요 하하..
모쪼록 남은 주말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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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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