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5장
결국 서연이는 나를 신고하지도 않았고, 어떤 소동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의아한 일이었다.
똥 밟았다 셈치고 곱게 잊어버리기라도 하겠단건가?
그와 더불어 나는 시간을 되돌려야하나 말아야하나의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그녀를 강간하기 이전의 시간으로 말이다.
애시당초 계획대로라면 마음껏 서연이를 강간한 다음에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되게 말이다. 물론 내가 그녀의 기만과 경멸에 대한 극적인 복수를 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란이 일어나지 않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시간을 되돌려야하나?
서연이가 신고를 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굳이 시간을 되돌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재밌지 않은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보다는 서연이가 그 날 있었던 일을 기억해주는 것이 나에겐 더 짜릿한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을 돌려서 기억을 지워버리게 되면 예전과 다를바 없이 나를 무시하고 경멸할텐데, 그래서야 그 날 있었던 일은 한낱 나만의 추억담으로 잊혀져버릴테니 말이다.
"그래, 뭐 좋아. 어떻게 나오는지 그냥 내버려둬 보자고."
만약 혹시라도 내버려뒀다가 일이 잘못되면 그 때가서 시간을 되돌려도 되지 않는가?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게 있다면 바로 수명이었다.
[가격은 당신의 수명이다.]
되돌릴 시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수명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사실 시계를 사용할 때마다 내 수명이 진짜로 깎이고 있긴 한건지 궁금했다. 체감 상으론 별로 느껴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되돌린 시간과 줄어드는 수명이 어떤 식으로 계산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 한 구석이 계속 찝찝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계를 사용하면 할 수록, 내 안에서는 이런 생각이 커져만 갔다.
"결국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살 수 있는 인생이 최고인거야! 짧게 살더라도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살아야 후회가 없지. 인생은 굵고 짧게 아니겠어? 그깟 수명 좀 줄어들면 어때. 남보다 특별한 삶을 살면 되는 거야!"
시간을 조절함으로써 내가 하고 싶은 것과 갖고 싶은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수명이 조금 줄어든다는 위협 정도로는 그 유혹을 막지 못 했다.
"아쉬운게 하나 있다면 지환이 새끼에게 쓴맛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 했다는거야. 마지막에 시간을 되감았을 땐 그 녀석에게 서연이 꼴을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지환이 녀석은 지 여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조차 못 잡고 있을게 뻔했다. 지환이마저 서연이와 내게 있었던 일을 알게 된다면 아무리 서연이가 신고를 하지 않는다한들 일이 더욱 커질게 뻔했지만, 전능한 수단을 손에 넣은 나로서는 그런 상황조차도 하나의 짜릿한 재미로 느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아쉬웠다.
"뭐, 됐어. 그렇게 모르고 있는게 더 비참할 수도 있지."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애지중지 아끼는 여친이 다른 남자의 좆물받이로 실컷 굴렀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는건 어찌보면 아는 것보다도 더 불쌍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지환이를 골탕 먹일 수 있는 방법이야 앞으로도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제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서연이와 나 사이의 일은 시간을 되감지 않고서도, 그저 그렇게 "잊혀져" 갔다. 캠퍼스에서 가끔 서연이와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제 나를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그냥 가벼운 인사만 주고 받는 정도가 되었다. 나 역시 이제 그녀에게 추근댈 건덕지도 없었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냥 그런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따금씩, 그녀의 머릿 속에 분명 그 날의 기억이 새겨져 있을 것임을 떠올리고는 과연 그녀가 나를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궁금해 했다. 그걸 물어볼 기회는 당연히 없었고, 가끔은 그녀와의 33시간에 걸친 길고 긴 섹스를 떠올리며 나는 혼자 고요한 흥분에 젖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오빠아~!"
토요일에 현주와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저 멀리서 귀엽게 손을 흔드는 현주가 보인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준다. 현주와의 관계는 근래 들어 내가 가장 신경쓰고 있는 것 중 하나였다. 타임 리와인더를 포함해서 말이다.
"내가 좀 늦었지? 미안해, 버스 탔는데 대학로 입구에서부터 좀 막혀서."
"너 뛰어온거야?"
"응. 하도 버스가 안가서 그냥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어."
"왜 그랬어. 천천히 와도 되는데."
현주와 나는 서로 편하게 말을 놓기로 했다. 나도 그 편이 좋았다. 현주는 지난 일로 내게 호감이 생기긴 생겼는지 우리는 매일 같이 연락을 주고 받고 주말엔 이렇게 데이트를 하곤 했다. 이번이 세번째 데이트였다.
"영화 뭐볼까?"
"음, 글쎄.. 공포영화 어때? 며칠 전에 개봉한 스릴러."
"음, 오빠가 보고 싶으면 그거 보자."
"왜? 별로 안 땡겨?"
"아냐! 좋아."
영화관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탔는데 현주가 뭔가 불편해하는게 느껴졌다. 무심코 현주보다 앞에 탄 나는 현주가 오늘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밑에서 대학생 남자 두어명 정도가 현주의 치마 속을 보려고 흘끗흘끗 위를 보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선택한 스릴러 영화는 그야말로 킬링타임에 적합한 영화였다.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데이트에 어울릴 만한 영화도 아닌... 굳이 데이트에 스릴러를 보기로 했던 것은 예전에 현주가 자기는 공포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오늘 현주는 그다지 재밌게 보는 것 같지 않았다.
"현주야, 오늘 영화 재미 없었어?"
"아니? 볼만했는데 왜?"
"그냥. 너 왠지 재미없게 보는 것 같아서."
영화를 보고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구태여 여러번 캐묻자 현주는 약간 뜸을 들이더니 솔직히 말했다.
"사실은 봄이잖아. 오늘은 왠지 스릴러보단 로맨스가 보고 싶었거든. 그런 날이 가끔 있긴 해."
"뭐? 그럼 진작 말을 하지. 왜 말 안했어?"
"그냥. 오빠가 그거 보고 싶어하는 눈치길래."
그러고보니 생각이 난다. 며칠 전에 톡을 주고 받으면서 현주가 지나가듯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개봉한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라고. 하지만 우회적으로 말했을 뿐, 직접적으로 말을 해준 것이 아니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현주는 배려있는 여자다. 하지만 가끔 그 배려 때문에 속마음을 알기 힘들게 한다. 그것이 연애에 있어 남자들이 항상 풀어야 할 숙제라는 사실을, 나는 연애에 좀 더 능숙해지고 난 다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으앙~ 흘렸어."
현주가 치마에 떨어진 바베큐 요리 소스를 물티슈로 닦아내며 칭얼거렸다. 크게 묻은건 아니지만 자세히 보니 얼룩이 약간 남을 것 같다. 어째 먹는 모습이 좀 불안하더라니. 현주는 어딘가 칠칠 맞은 구석이 있었다.
"치마 드라이 맡겨줄까?"
"칫. 됐어. 밥이나 먹어."
"넌 이런 요리 좋아해? 소스 많은거?"
"음 아니. 파스타는 맘에 드는데 이건 좀 별루다. 차라리 필라프 요리를 시킬걸."
"응? 근데 왜 이거 시켰어?"
"파스타랑 바베큐가 세트잖아. 세트로 먹으면 할인돼."
"아, 그, 그랬어?"
늘 그렇지만 여자들의 마음을 캐치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현주가 착해서 그런거지만, 가끔은 그걸 캐치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식사를 하고 나서 현주와 근처 백화점에서 잠시 아이쇼핑을 즐겼다. 현주는 여자애답게 보석이나 장신구 종류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어느 매장 앞에 서서 실버 목걸이를 구경하고 있는 현주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거 맘에 들어? 사줄까?"
"뭐? 됐어."
"왜?"
"남자가 그런거 너무 함부로 사주겠다 하는 것도 안 돼. 남자는 남자대로 호구 소리 듣고 여자는 여자대로 된장녀 소리 듣는단 말야."
"그, 그래?"
현주와 함께 있을 때의 나는 의욕만 앞서는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나지막한 현주의 한 마디가 귓가에 들렸다.
"그리고...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어딘지 야속함이 느껴지는 한 마디.
시계를 보았다. 저녁 7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제 이만하면 됐다.
"현주야,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줘."
"응? 어디가?"
"잠깐이면 돼."
나는 현주를 내버려두고 남자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칸막이를 찾아 문을 잠갔다.
지금 시간은 7시 6분. 현주를 만났을 무렵이 오후 3시쯤이었다.
품 속에서 타임 리와인더를 꺼냈다. 파란색 바늘을 5칸 정도 옆으로 이동시켰다.
뱃 속이 요동치는 느낌과 함께 시간 되감기가 시작되었다. 정확히 5시간 전을 향해서.
*
"현주야~"
나는 버스에서 내리는 현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를 발견한 현주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오, 오빠? 어떻게 여기 있어?"
"너 왠지 여기서 내릴 것 같아서."
한 정거장 앞에 내려서 뛰어왔다면 현주가 집에서 오는 방향을 생각했을 때 내릴 만한 곳은 여기뿐이었다. 내가 마중을 나와있자 현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약속장소랑 전혀 다른 곳을 내가 알아서 찾아왔으니 놀랄 수 밖에.
"뭐야~ 어떻게 알았어. 사실대로 말해줘. 혹시 스토킹 한거 아냐?"
"그럴 리가."
"그럼 어떻게 알았는데~ 빨리 말해줘."
"그냥. 왠지 네가 늦을까봐 여기서 내릴 것 같았어. 지금 차 많이 막히잖아."
"와.. 진짜 신기하다. 나 진짜 차 막혀서 여기서 내렸던거거든. 오빠 천잰데?"
"니가 왠지 뛰어올 것 같아서 말야. 구두 신고 뛰면 다리 아플텐데 내가 마중 나와있는게 낫지."
"우와, 오빠 진짜 대박이다. 나 늦어서 완전 초조했거든. 뛰어가려고 했는데..."
"내가 잘 캐치한거 맞지?"
"응. 진짜 짱이다. 완전 놀랐어."
현주를 데리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현주가 줄지어 붙은 영화 포스터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현주가 얼마 전에 개봉한 로맨스 영화의 포스터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속마음을 알고 나니 그게 캐치가 된다. 알고보면 이렇게 쉬운건데 왜 그걸 몰랐던 걸까?
"오빠, 영화 뭐볼까?"
"음, 글쎄.. 공포영화 어때? 며칠 전에 개봉한 스릴러."
"음, 오빠가 보고 싶으면 그거 보자."
"왜? 별로 안 땡겨?"
"아냐! 좋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난 품 속에서 미리 예매해둔 티켓 두 장을 꺼냈다. 미리 끊어놓은 로맨스 영화 표였다.
"농담이야. 봄인데 스릴러보단 아무래도 로맨스가 낫지 않겠냐?"
"어? 언제 예매한거야?"
"그냥 너 오기전에. 너 이 배우 좋아하잖아."
"내가 그걸 오빠한테 말했었어?"
"그냥 지나가듯이? 그리고 너 왠지 오늘 로맨스 보고 싶어할 것 같았거든."
"진짜? 내가 티낸거 아니고 진짜 오빠가 그렇게 생각한거야?"
"응."
영화를 보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상영관으로 올라가는데, 뇌리에 스치는게 있었다. 나는 일부러 현주를 앞에 태웠고, 그 뒤에 가까이 붙었다. 아니나다를까 아래쪽에서 남자 대학생 두명이 현주를 올려다보다가 아쉬워하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런 개새끼들.
"풋."
현주가 나지막히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한칸 아래 있었지만 이렇게 서있으니 그럭저럭 키가 맞았다. 눈이 마주치자 현주가 한쪽눈을 찡긋 하며 고양이처럼 웃었다.
현주도 내가 자신을 보호한 것이라는걸 내심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자 현주는 내게 좀 더 가까이 몸을 밀착시켜왔다. 아까 에스컬레이터를 내렸을 때보다 확실히 좀 더 밀착된 거리였다.
가슴 속에서부터 흐뭇함이 솟구쳐오른다.
다음 순서는 레스토랑이다.
"여기 파스타랑, 바베큐 세트로 주세요."
현주가 메뉴판에서 그림을 짚으며 주문을 했다. 하지만 나는 현주를 말리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바베큐 말고 필라프로 주세요."
"왜? 이게 세트라서 더 싼데."
"너 바베큐 안 좋아하는거 다 알아. 그리고 여기 앞치마도 하나만 줘요."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레스토랑용 앞치마를 가져오자 나는 손수 현주 목에 그걸 씌워주었다.
"흘릴지도 모르니까 그거 하고 있어."
"오빠 내가 바베큐 안 좋아하는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뭐... 감이지."
"오빠 혹시 초능력 같은거 쓰는거 아니지?"
"그냥 너한테 관심이 많은거야."
그러자 현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약간 당황했는지 현주는 물컵을 집다가 손을 삐긋해서 물을 약간 쏟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앞치마를 한 덕에 옷을 버리지는 않았다.
젖은 앞치마를 걷어내 치워주면서 나는 현주를 보고 씩 웃었다.
"봐. 흘릴지도 모른댔지?"
"......"
현주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할말이 없는지 자신도 쑥스럽게 웃었다.
*
"오빠, 저거 예쁘다."
백화점에서 현주는 아까의 그 은목걸이를 관심 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저거 맘에 들어? 사줄까?"
"뭐어? 됐어."
"왜?"
"남자가 그런거 너무 함부로 사주겠다 하는 것도 안 돼. 남자는 남자대로 호구 소리 듣고 여자는 여자대로 된장녀 소리 듣는단 말야."
그리고 현주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리고...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나는 품 속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포장 상자를 꺼냈다.
"그럼 지금부터 사귀면 되겠네. 이거 받아."
"어?"
현주의 눈 앞에서 상자의 포장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 현주가 구경하고 있었던 목걸이와 똑같은 목걸이가 상자 안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반짝이는 목걸이를 본 현주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니가 구경하던 저거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오빠가 어떻게 이걸...."
"너 주려고 샀어. 너한테 고백하려고."
"......"
시간을 되감자마자 가장 먼저 했던게 이 목걸이를 산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있는 현주와 눈을 마주보며 난 또박또박 말했다. 떨리지 않았다. 긴장되지 않았다. 실패하면 다시 도전할 수 있으니까.
"나 너 좋아해. 사귀자."
"......."
옆에서 매장을 구경하다말고 내 말을 들은 다른 손님들이 하나둘씩 휘파람을 불거나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질렀다. 한두 사람이 시작하자 마치 물결처럼 분위기가 퍼져나가 나중에는 주변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함성을 질러주었다.
"받! 아! 줘! 받! 아! 줘!"
"사! 겨! 라! 사! 겨! 라!"
주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재촉까지 해대니 얼이 빠져있던 현주도 자기도 모르게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더욱 크게 환호해주었고, 현주는 마침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뭘 이런것까지 사고 그래. 그냥 사귀자고 하면 되지."
할말이 없어 그저 멋쩍게 웃었다.
나는 그날 그렇게 현주와 애인 사이가 되었다.
*
"오빠는 참 신기해."
"뭐가?"
집까지 그녀를 바래다주는 버스에서, 그녀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처음으로 끼는 팔짱. 현주의 감촉이 팔을 통해 느껴지는 그 특별한 기분이 참 좋았다.
"그냥 뭐랄까... 내 맘을 다 읽고 있는 것 같아."
"왜 그런 생각을 해?"
"오빤 내가 말 안 한것도 알아서 다 해주고.... 내가 말을 안했는데도 내 기분도 파악 해주고... 먹고 싶은 것도 척척 알아 맞추고.... 보통 남자들은 그런거 잘 못하잖아."
"하하. 그건 내가 너한테 관심이 많은거라니까. 애정을 가지고 보면 다 보이게 되있어."
윽, 내가 한 말이지만 조금 오글거린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멘트는 죽어도 못 했을텐데.
"난 그래서 오빠가 좋아."
하지만 현주는 내가 한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걸로 됐다.
"오빠, 저 커플 싸우나봐."
흐뭇해하고 있는 내 귓전을 현주의 목소리가 깨웠다. 현주가 가르키는 곳을 보니 버스의 출구에서 한 쌍의 남녀가 싸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핏대를 올리고 있었다.
"너 진짜 왜 그래? 기분이 왜 안좋은지 말이라도 해줘야 알거 아냐?"
"아, 그런거 없다고! 그냥 일찍 집에가고 싶다는데 왜 자꾸 난리야?"
"니 태도를 봐. 딱 봐도 기분 나쁜거 맞는데 말을 안 해주잖아!"
"그냥 신경 꺼, 됐어?"
바락바락 고함을 주고받는 남녀를 보며 눈쌀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고, 흥미롭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현주는 이 와중에 귀엽게 애교 웃음을 지으며 내 팔에 더욱 세게 팔짱을 껴왔다.
"우린 저런 일로 싸울 일은 없겠다. 오빠는 내가 말 안해도 내 기분 다 알아주니까. 그치? 헤헤."
"어? 으, 응... 그렇지."
당황해서 말이 더듬더듬 나온다. 현주가 한 말이 당황스러운게 아니었다.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싸움질을 하고 있는 그 한 쌍의 커플이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서연이잖아."
싸우고 있는 여자는 서연이었다. 그러니 옆에 있던 남자는 당연히 지환이 녀석이었고.
"골 때린다. 같은 버스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
두 사람은 아직 이쪽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가급적 그 둘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에 현주가 내리기전에 두 사람이 버스에서 내려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내릴지 말지조차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결국 현주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했다.
"오빠, 여기서 내려야해."
"어, 으응."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최대한 빨리 내려 두 사람이 나를 못 보게 하려고 했지만 좁은 버스에서 그게 맘처럼 쉬운건 아니었다. 출구에서 얄궂게도 서연이와 정면으로 눈이 딱 마주쳤다.
"......"
내 얼굴을 본 서연이 표정이 기묘하게 굳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연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가 겪었던 그 모든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 손에 서른 번이 넘도록 윤간 당한 서연이. 짐승처럼 크게 신음소리를 울부짖던 서연이.
"으음, 안녕?"
인사를 건네니 지환이 놈도 나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서로 주먹질까지 주고받았던 사이다. 타임 리와인더로 그 일까지 묻은 것은 아니기에 지환이는 여전히 내게 감정이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그 감정골이 예전처럼 깊지는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지환이 놈이 꿈에도 모를 경험을 했으니까 말이다.
"......."
지환이는 나를 보고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나도 별 상관하지 않았다. 이 놈은 과연 눈 앞에 있는 내가 자기 여친을 무려 33시간 동안이나 마음대로 굴리고 따먹었다는 사실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 속에서부터 이 불쌍한 새끼를 대함에 있어 여유가 솟아올랐던 것이었다.
니가 무슨 생각을 하건 간에, 어떤 말을 하건 간에 나는 니 머리 위에 있다. 나는 니 여친을 가지고 놀았으니까.
뭐 대충 그런 기분이었다.
"오빠, 내리자."
"응."
현주는 내게 팔짱을 끼며 나를 이끌었고, 우리가 나란히 내리는 모습을 서연이와 지환이는 등 뒤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우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묘하게 뿌듯하기도 한 것이, 너희가 그렇게 무시했던 나도 이렇게 예쁘고 어엿한 여자친구를 사귀었단 사실을 어필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흐뭇했던 것이다.
그 때, 등 뒤에서 서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내릴게. 집에 들어가."
"야, 여기 너네 집도 아니잖아."
"따라오지마, 그냥."
지환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연이는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 혼자 남은 지환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단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고, 그 사이 출구의 문이 닫혔다. 나는 신경쓰지 않는 척 걸었지만, 왠지 내 뒷모습을 서연이가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빠, 오빠."
현주가 팔에 매달리며 묻는다.
"아까 그 사람들 아는 사람들이었어?"
"아니, 그냥 조금..."
차마 현주에겐 말해줄 수 없었다.
*
엄밀히 말하자면 타임 리와인더의 기능은 아니지만, 나는 이 시계의 커다란 장점을 하나 깨우쳤다.
이 시계는 삶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왜냐?
실패해도 다시 돌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RPG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다. 저장(SAVE)이라는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혹시나 잘못해서 게임을 망치더라도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별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아까의 고백에서 "실패해도 다시 시도하면 돼"라는 생각이 없었다면 그런 용기와 당당함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기회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자신감은 나를 좀 더 매력있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타임 리와인더를 얻지 못했다면 나는 결코 그런 매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그리고 또 한가지가 더 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매사를 마주하다보면, 굳이 시간을 되돌리지 않더라도 일이 쉽게 풀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 좋은 예는 아니겠지만 서연이와의 일을 생각해보라.
처음에 나는 당연히 서연이가 내게 법적으로든 뭐든 앙갚음을 할거란 생각에 시간을 되돌릴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 일은 조용히 묻혀져갔다.
우리는 무언가를 시도함에 있어 항상 그 결과를 걱정하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책임이나 불안함에 얽매여 시도하지도 못하고 포기하는 일들이 많다. 하지만 막상 부딪혀보면, 우려했던 만큼 그 일이 걱정할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런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는 그런 불안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남들은 흉내내지 못할 과감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과감함에 대한 결과가 걱정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또한 타임 리와인더가 없었다면 느껴보지 못했을 교훈임에 틀림없다.
뜬구름 잡는 소리일진 모르겠지만 이 점은 내게 중요했다. 왜냐하면 수명이 담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에 있어 타임 리와인더를 남발할 수는 없을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시간과 수명의 비례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밝히지 못했다는 찝찝함도 한 몫 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내게는, 타임 리와인더의 사용을 최대한 아끼면서도 그것을 사용할 때와 같은 자신감과 당당함을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진리였지만, 이 시기의 나는 그걸 모르고 마법 같은 힘에 취해 그 힘을 남용하기에 바빴을 따름이다.
훗날 돌이켜보면, 그 진리를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어느새 한 학기가 훌쩍 지나갔다. 나는 지환이가 조별 발표에서 내 이름을 빼버린 그 치욕의 교양수업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A 를 받았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고, 그냥 시험지를 받아보고나서 문제를 외운 후 시간을 되돌리는 식으로 만점짜리 시험지를 작성해왔을 뿐이다.
이렇게 사니까 인생이 얼마나 편한가? 이 때 쯤의 내가 딱 이런 꼴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치트키의 맛을 알아버렸다고 할까. 이것은 어찌보면 타임 리와인더의 부작용이다. 이 시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가져다주지만, 그 대신 성실함을 앗아가게 된다. 삶이란 것을 마치 게임처럼 "저장" 할 수 있는 사람은 더이상 매순간에 최선을 다하기가 힘든 법이므로.
더불어 나는 학과 수석의 자리를 그 교양수업 하나 때문에 놓친 꼴이 되었으므로, 이 사실이 나도 모르는 사이 공공연하게 학과 내부에 퍼져 지환이가 나를 조별 과제에서 제외시킨 사건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원 목록에서 이름을 빼버린건 너무했다."
"그래, 지환이가 좀 심했던 것 같긴 해."
"불쌍하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장학금인데."
학과 내부에서 나에 대해 옹호적인 여론이 돌기 시작했지만 난 아무 관심 없었다. 그까짓 수석, 장학금 따위가 뭐 중요하다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고, 한동안 다시 학교 구경을 하지 못했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당연히 서연이를 볼 일도 없어졌다. 이따금씩 그녀는 여전히 내 머릿 속에 나타나곤 했지만 그 이후로는 나는 그녀를 건들지 않았다.
현주는 여름에 코스모스 졸업을 했다. 군대 다녀와서 휴학기간이 꽤 길었던 나는 현주보다 더 오래 학교를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현주의 졸업식 날, 나는 그 자리에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많이 망설였다. 부모님과 언니까지 오는 가족행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친의 부모님을 뵙는다는건 남자친구 입장에서 언제나 부담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졸업식 당일 아침에, 현주로부터 현주의 아버님이 바빠서 졸업식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아버지가 오지 못해서 많이 허전하다고, 나라도 대신 와달라고 하는 현주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긴 힘들었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지만 나는 부랴부랴 옷을 차려입고 현주네 대학 캠퍼스로 향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과분할 정도로 많은 분들이 댓글과 추천을 주시고, 재미있다고 칭찬해 주셔서
어제 오늘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매화 댓글 하나하나를 감사하게 잘 보고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5장
결국 서연이는 나를 신고하지도 않았고, 어떤 소동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의아한 일이었다.
똥 밟았다 셈치고 곱게 잊어버리기라도 하겠단건가?
그와 더불어 나는 시간을 되돌려야하나 말아야하나의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그녀를 강간하기 이전의 시간으로 말이다.
애시당초 계획대로라면 마음껏 서연이를 강간한 다음에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되게 말이다. 물론 내가 그녀의 기만과 경멸에 대한 극적인 복수를 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란이 일어나지 않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시간을 되돌려야하나?
서연이가 신고를 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굳이 시간을 되돌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재밌지 않은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보다는 서연이가 그 날 있었던 일을 기억해주는 것이 나에겐 더 짜릿한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을 돌려서 기억을 지워버리게 되면 예전과 다를바 없이 나를 무시하고 경멸할텐데, 그래서야 그 날 있었던 일은 한낱 나만의 추억담으로 잊혀져버릴테니 말이다.
"그래, 뭐 좋아. 어떻게 나오는지 그냥 내버려둬 보자고."
만약 혹시라도 내버려뒀다가 일이 잘못되면 그 때가서 시간을 되돌려도 되지 않는가?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게 있다면 바로 수명이었다.
[가격은 당신의 수명이다.]
되돌릴 시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수명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사실 시계를 사용할 때마다 내 수명이 진짜로 깎이고 있긴 한건지 궁금했다. 체감 상으론 별로 느껴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되돌린 시간과 줄어드는 수명이 어떤 식으로 계산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 한 구석이 계속 찝찝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계를 사용하면 할 수록, 내 안에서는 이런 생각이 커져만 갔다.
"결국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살 수 있는 인생이 최고인거야! 짧게 살더라도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살아야 후회가 없지. 인생은 굵고 짧게 아니겠어? 그깟 수명 좀 줄어들면 어때. 남보다 특별한 삶을 살면 되는 거야!"
시간을 조절함으로써 내가 하고 싶은 것과 갖고 싶은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수명이 조금 줄어든다는 위협 정도로는 그 유혹을 막지 못 했다.
"아쉬운게 하나 있다면 지환이 새끼에게 쓴맛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 했다는거야. 마지막에 시간을 되감았을 땐 그 녀석에게 서연이 꼴을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지환이 녀석은 지 여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조차 못 잡고 있을게 뻔했다. 지환이마저 서연이와 내게 있었던 일을 알게 된다면 아무리 서연이가 신고를 하지 않는다한들 일이 더욱 커질게 뻔했지만, 전능한 수단을 손에 넣은 나로서는 그런 상황조차도 하나의 짜릿한 재미로 느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아쉬웠다.
"뭐, 됐어. 그렇게 모르고 있는게 더 비참할 수도 있지."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애지중지 아끼는 여친이 다른 남자의 좆물받이로 실컷 굴렀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는건 어찌보면 아는 것보다도 더 불쌍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지환이를 골탕 먹일 수 있는 방법이야 앞으로도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제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서연이와 나 사이의 일은 시간을 되감지 않고서도, 그저 그렇게 "잊혀져" 갔다. 캠퍼스에서 가끔 서연이와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제 나를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그냥 가벼운 인사만 주고 받는 정도가 되었다. 나 역시 이제 그녀에게 추근댈 건덕지도 없었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냥 그런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따금씩, 그녀의 머릿 속에 분명 그 날의 기억이 새겨져 있을 것임을 떠올리고는 과연 그녀가 나를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궁금해 했다. 그걸 물어볼 기회는 당연히 없었고, 가끔은 그녀와의 33시간에 걸친 길고 긴 섹스를 떠올리며 나는 혼자 고요한 흥분에 젖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오빠아~!"
토요일에 현주와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저 멀리서 귀엽게 손을 흔드는 현주가 보인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준다. 현주와의 관계는 근래 들어 내가 가장 신경쓰고 있는 것 중 하나였다. 타임 리와인더를 포함해서 말이다.
"내가 좀 늦었지? 미안해, 버스 탔는데 대학로 입구에서부터 좀 막혀서."
"너 뛰어온거야?"
"응. 하도 버스가 안가서 그냥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어."
"왜 그랬어. 천천히 와도 되는데."
현주와 나는 서로 편하게 말을 놓기로 했다. 나도 그 편이 좋았다. 현주는 지난 일로 내게 호감이 생기긴 생겼는지 우리는 매일 같이 연락을 주고 받고 주말엔 이렇게 데이트를 하곤 했다. 이번이 세번째 데이트였다.
"영화 뭐볼까?"
"음, 글쎄.. 공포영화 어때? 며칠 전에 개봉한 스릴러."
"음, 오빠가 보고 싶으면 그거 보자."
"왜? 별로 안 땡겨?"
"아냐! 좋아."
영화관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탔는데 현주가 뭔가 불편해하는게 느껴졌다. 무심코 현주보다 앞에 탄 나는 현주가 오늘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밑에서 대학생 남자 두어명 정도가 현주의 치마 속을 보려고 흘끗흘끗 위를 보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선택한 스릴러 영화는 그야말로 킬링타임에 적합한 영화였다.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데이트에 어울릴 만한 영화도 아닌... 굳이 데이트에 스릴러를 보기로 했던 것은 예전에 현주가 자기는 공포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오늘 현주는 그다지 재밌게 보는 것 같지 않았다.
"현주야, 오늘 영화 재미 없었어?"
"아니? 볼만했는데 왜?"
"그냥. 너 왠지 재미없게 보는 것 같아서."
영화를 보고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구태여 여러번 캐묻자 현주는 약간 뜸을 들이더니 솔직히 말했다.
"사실은 봄이잖아. 오늘은 왠지 스릴러보단 로맨스가 보고 싶었거든. 그런 날이 가끔 있긴 해."
"뭐? 그럼 진작 말을 하지. 왜 말 안했어?"
"그냥. 오빠가 그거 보고 싶어하는 눈치길래."
그러고보니 생각이 난다. 며칠 전에 톡을 주고 받으면서 현주가 지나가듯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개봉한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라고. 하지만 우회적으로 말했을 뿐, 직접적으로 말을 해준 것이 아니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현주는 배려있는 여자다. 하지만 가끔 그 배려 때문에 속마음을 알기 힘들게 한다. 그것이 연애에 있어 남자들이 항상 풀어야 할 숙제라는 사실을, 나는 연애에 좀 더 능숙해지고 난 다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으앙~ 흘렸어."
현주가 치마에 떨어진 바베큐 요리 소스를 물티슈로 닦아내며 칭얼거렸다. 크게 묻은건 아니지만 자세히 보니 얼룩이 약간 남을 것 같다. 어째 먹는 모습이 좀 불안하더라니. 현주는 어딘가 칠칠 맞은 구석이 있었다.
"치마 드라이 맡겨줄까?"
"칫. 됐어. 밥이나 먹어."
"넌 이런 요리 좋아해? 소스 많은거?"
"음 아니. 파스타는 맘에 드는데 이건 좀 별루다. 차라리 필라프 요리를 시킬걸."
"응? 근데 왜 이거 시켰어?"
"파스타랑 바베큐가 세트잖아. 세트로 먹으면 할인돼."
"아, 그, 그랬어?"
늘 그렇지만 여자들의 마음을 캐치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현주가 착해서 그런거지만, 가끔은 그걸 캐치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식사를 하고 나서 현주와 근처 백화점에서 잠시 아이쇼핑을 즐겼다. 현주는 여자애답게 보석이나 장신구 종류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어느 매장 앞에 서서 실버 목걸이를 구경하고 있는 현주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거 맘에 들어? 사줄까?"
"뭐? 됐어."
"왜?"
"남자가 그런거 너무 함부로 사주겠다 하는 것도 안 돼. 남자는 남자대로 호구 소리 듣고 여자는 여자대로 된장녀 소리 듣는단 말야."
"그, 그래?"
현주와 함께 있을 때의 나는 의욕만 앞서는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나지막한 현주의 한 마디가 귓가에 들렸다.
"그리고...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어딘지 야속함이 느껴지는 한 마디.
시계를 보았다. 저녁 7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제 이만하면 됐다.
"현주야,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줘."
"응? 어디가?"
"잠깐이면 돼."
나는 현주를 내버려두고 남자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칸막이를 찾아 문을 잠갔다.
지금 시간은 7시 6분. 현주를 만났을 무렵이 오후 3시쯤이었다.
품 속에서 타임 리와인더를 꺼냈다. 파란색 바늘을 5칸 정도 옆으로 이동시켰다.
뱃 속이 요동치는 느낌과 함께 시간 되감기가 시작되었다. 정확히 5시간 전을 향해서.
*
"현주야~"
나는 버스에서 내리는 현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를 발견한 현주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오, 오빠? 어떻게 여기 있어?"
"너 왠지 여기서 내릴 것 같아서."
한 정거장 앞에 내려서 뛰어왔다면 현주가 집에서 오는 방향을 생각했을 때 내릴 만한 곳은 여기뿐이었다. 내가 마중을 나와있자 현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약속장소랑 전혀 다른 곳을 내가 알아서 찾아왔으니 놀랄 수 밖에.
"뭐야~ 어떻게 알았어. 사실대로 말해줘. 혹시 스토킹 한거 아냐?"
"그럴 리가."
"그럼 어떻게 알았는데~ 빨리 말해줘."
"그냥. 왠지 네가 늦을까봐 여기서 내릴 것 같았어. 지금 차 많이 막히잖아."
"와.. 진짜 신기하다. 나 진짜 차 막혀서 여기서 내렸던거거든. 오빠 천잰데?"
"니가 왠지 뛰어올 것 같아서 말야. 구두 신고 뛰면 다리 아플텐데 내가 마중 나와있는게 낫지."
"우와, 오빠 진짜 대박이다. 나 늦어서 완전 초조했거든. 뛰어가려고 했는데..."
"내가 잘 캐치한거 맞지?"
"응. 진짜 짱이다. 완전 놀랐어."
현주를 데리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현주가 줄지어 붙은 영화 포스터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현주가 얼마 전에 개봉한 로맨스 영화의 포스터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속마음을 알고 나니 그게 캐치가 된다. 알고보면 이렇게 쉬운건데 왜 그걸 몰랐던 걸까?
"오빠, 영화 뭐볼까?"
"음, 글쎄.. 공포영화 어때? 며칠 전에 개봉한 스릴러."
"음, 오빠가 보고 싶으면 그거 보자."
"왜? 별로 안 땡겨?"
"아냐! 좋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난 품 속에서 미리 예매해둔 티켓 두 장을 꺼냈다. 미리 끊어놓은 로맨스 영화 표였다.
"농담이야. 봄인데 스릴러보단 아무래도 로맨스가 낫지 않겠냐?"
"어? 언제 예매한거야?"
"그냥 너 오기전에. 너 이 배우 좋아하잖아."
"내가 그걸 오빠한테 말했었어?"
"그냥 지나가듯이? 그리고 너 왠지 오늘 로맨스 보고 싶어할 것 같았거든."
"진짜? 내가 티낸거 아니고 진짜 오빠가 그렇게 생각한거야?"
"응."
영화를 보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상영관으로 올라가는데, 뇌리에 스치는게 있었다. 나는 일부러 현주를 앞에 태웠고, 그 뒤에 가까이 붙었다. 아니나다를까 아래쪽에서 남자 대학생 두명이 현주를 올려다보다가 아쉬워하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런 개새끼들.
"풋."
현주가 나지막히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한칸 아래 있었지만 이렇게 서있으니 그럭저럭 키가 맞았다. 눈이 마주치자 현주가 한쪽눈을 찡긋 하며 고양이처럼 웃었다.
현주도 내가 자신을 보호한 것이라는걸 내심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자 현주는 내게 좀 더 가까이 몸을 밀착시켜왔다. 아까 에스컬레이터를 내렸을 때보다 확실히 좀 더 밀착된 거리였다.
가슴 속에서부터 흐뭇함이 솟구쳐오른다.
다음 순서는 레스토랑이다.
"여기 파스타랑, 바베큐 세트로 주세요."
현주가 메뉴판에서 그림을 짚으며 주문을 했다. 하지만 나는 현주를 말리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바베큐 말고 필라프로 주세요."
"왜? 이게 세트라서 더 싼데."
"너 바베큐 안 좋아하는거 다 알아. 그리고 여기 앞치마도 하나만 줘요."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레스토랑용 앞치마를 가져오자 나는 손수 현주 목에 그걸 씌워주었다.
"흘릴지도 모르니까 그거 하고 있어."
"오빠 내가 바베큐 안 좋아하는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뭐... 감이지."
"오빠 혹시 초능력 같은거 쓰는거 아니지?"
"그냥 너한테 관심이 많은거야."
그러자 현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약간 당황했는지 현주는 물컵을 집다가 손을 삐긋해서 물을 약간 쏟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앞치마를 한 덕에 옷을 버리지는 않았다.
젖은 앞치마를 걷어내 치워주면서 나는 현주를 보고 씩 웃었다.
"봐. 흘릴지도 모른댔지?"
"......"
현주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할말이 없는지 자신도 쑥스럽게 웃었다.
*
"오빠, 저거 예쁘다."
백화점에서 현주는 아까의 그 은목걸이를 관심 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저거 맘에 들어? 사줄까?"
"뭐어? 됐어."
"왜?"
"남자가 그런거 너무 함부로 사주겠다 하는 것도 안 돼. 남자는 남자대로 호구 소리 듣고 여자는 여자대로 된장녀 소리 듣는단 말야."
그리고 현주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리고...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나는 품 속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포장 상자를 꺼냈다.
"그럼 지금부터 사귀면 되겠네. 이거 받아."
"어?"
현주의 눈 앞에서 상자의 포장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 현주가 구경하고 있었던 목걸이와 똑같은 목걸이가 상자 안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반짝이는 목걸이를 본 현주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니가 구경하던 저거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오빠가 어떻게 이걸...."
"너 주려고 샀어. 너한테 고백하려고."
"......"
시간을 되감자마자 가장 먼저 했던게 이 목걸이를 산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있는 현주와 눈을 마주보며 난 또박또박 말했다. 떨리지 않았다. 긴장되지 않았다. 실패하면 다시 도전할 수 있으니까.
"나 너 좋아해. 사귀자."
"......."
옆에서 매장을 구경하다말고 내 말을 들은 다른 손님들이 하나둘씩 휘파람을 불거나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질렀다. 한두 사람이 시작하자 마치 물결처럼 분위기가 퍼져나가 나중에는 주변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함성을 질러주었다.
"받! 아! 줘! 받! 아! 줘!"
"사! 겨! 라! 사! 겨! 라!"
주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재촉까지 해대니 얼이 빠져있던 현주도 자기도 모르게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더욱 크게 환호해주었고, 현주는 마침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뭘 이런것까지 사고 그래. 그냥 사귀자고 하면 되지."
할말이 없어 그저 멋쩍게 웃었다.
나는 그날 그렇게 현주와 애인 사이가 되었다.
*
"오빠는 참 신기해."
"뭐가?"
집까지 그녀를 바래다주는 버스에서, 그녀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처음으로 끼는 팔짱. 현주의 감촉이 팔을 통해 느껴지는 그 특별한 기분이 참 좋았다.
"그냥 뭐랄까... 내 맘을 다 읽고 있는 것 같아."
"왜 그런 생각을 해?"
"오빤 내가 말 안 한것도 알아서 다 해주고.... 내가 말을 안했는데도 내 기분도 파악 해주고... 먹고 싶은 것도 척척 알아 맞추고.... 보통 남자들은 그런거 잘 못하잖아."
"하하. 그건 내가 너한테 관심이 많은거라니까. 애정을 가지고 보면 다 보이게 되있어."
윽, 내가 한 말이지만 조금 오글거린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멘트는 죽어도 못 했을텐데.
"난 그래서 오빠가 좋아."
하지만 현주는 내가 한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걸로 됐다.
"오빠, 저 커플 싸우나봐."
흐뭇해하고 있는 내 귓전을 현주의 목소리가 깨웠다. 현주가 가르키는 곳을 보니 버스의 출구에서 한 쌍의 남녀가 싸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핏대를 올리고 있었다.
"너 진짜 왜 그래? 기분이 왜 안좋은지 말이라도 해줘야 알거 아냐?"
"아, 그런거 없다고! 그냥 일찍 집에가고 싶다는데 왜 자꾸 난리야?"
"니 태도를 봐. 딱 봐도 기분 나쁜거 맞는데 말을 안 해주잖아!"
"그냥 신경 꺼, 됐어?"
바락바락 고함을 주고받는 남녀를 보며 눈쌀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고, 흥미롭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현주는 이 와중에 귀엽게 애교 웃음을 지으며 내 팔에 더욱 세게 팔짱을 껴왔다.
"우린 저런 일로 싸울 일은 없겠다. 오빠는 내가 말 안해도 내 기분 다 알아주니까. 그치? 헤헤."
"어? 으, 응... 그렇지."
당황해서 말이 더듬더듬 나온다. 현주가 한 말이 당황스러운게 아니었다.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싸움질을 하고 있는 그 한 쌍의 커플이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서연이잖아."
싸우고 있는 여자는 서연이었다. 그러니 옆에 있던 남자는 당연히 지환이 녀석이었고.
"골 때린다. 같은 버스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
두 사람은 아직 이쪽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가급적 그 둘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에 현주가 내리기전에 두 사람이 버스에서 내려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내릴지 말지조차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결국 현주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했다.
"오빠, 여기서 내려야해."
"어, 으응."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최대한 빨리 내려 두 사람이 나를 못 보게 하려고 했지만 좁은 버스에서 그게 맘처럼 쉬운건 아니었다. 출구에서 얄궂게도 서연이와 정면으로 눈이 딱 마주쳤다.
"......"
내 얼굴을 본 서연이 표정이 기묘하게 굳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연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가 겪었던 그 모든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 손에 서른 번이 넘도록 윤간 당한 서연이. 짐승처럼 크게 신음소리를 울부짖던 서연이.
"으음, 안녕?"
인사를 건네니 지환이 놈도 나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서로 주먹질까지 주고받았던 사이다. 타임 리와인더로 그 일까지 묻은 것은 아니기에 지환이는 여전히 내게 감정이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그 감정골이 예전처럼 깊지는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지환이 놈이 꿈에도 모를 경험을 했으니까 말이다.
"......."
지환이는 나를 보고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나도 별 상관하지 않았다. 이 놈은 과연 눈 앞에 있는 내가 자기 여친을 무려 33시간 동안이나 마음대로 굴리고 따먹었다는 사실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 속에서부터 이 불쌍한 새끼를 대함에 있어 여유가 솟아올랐던 것이었다.
니가 무슨 생각을 하건 간에, 어떤 말을 하건 간에 나는 니 머리 위에 있다. 나는 니 여친을 가지고 놀았으니까.
뭐 대충 그런 기분이었다.
"오빠, 내리자."
"응."
현주는 내게 팔짱을 끼며 나를 이끌었고, 우리가 나란히 내리는 모습을 서연이와 지환이는 등 뒤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우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묘하게 뿌듯하기도 한 것이, 너희가 그렇게 무시했던 나도 이렇게 예쁘고 어엿한 여자친구를 사귀었단 사실을 어필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흐뭇했던 것이다.
그 때, 등 뒤에서 서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내릴게. 집에 들어가."
"야, 여기 너네 집도 아니잖아."
"따라오지마, 그냥."
지환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연이는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 혼자 남은 지환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단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고, 그 사이 출구의 문이 닫혔다. 나는 신경쓰지 않는 척 걸었지만, 왠지 내 뒷모습을 서연이가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빠, 오빠."
현주가 팔에 매달리며 묻는다.
"아까 그 사람들 아는 사람들이었어?"
"아니, 그냥 조금..."
차마 현주에겐 말해줄 수 없었다.
*
엄밀히 말하자면 타임 리와인더의 기능은 아니지만, 나는 이 시계의 커다란 장점을 하나 깨우쳤다.
이 시계는 삶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왜냐?
실패해도 다시 돌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RPG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다. 저장(SAVE)이라는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혹시나 잘못해서 게임을 망치더라도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별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아까의 고백에서 "실패해도 다시 시도하면 돼"라는 생각이 없었다면 그런 용기와 당당함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기회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자신감은 나를 좀 더 매력있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타임 리와인더를 얻지 못했다면 나는 결코 그런 매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그리고 또 한가지가 더 있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매사를 마주하다보면, 굳이 시간을 되돌리지 않더라도 일이 쉽게 풀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 좋은 예는 아니겠지만 서연이와의 일을 생각해보라.
처음에 나는 당연히 서연이가 내게 법적으로든 뭐든 앙갚음을 할거란 생각에 시간을 되돌릴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 일은 조용히 묻혀져갔다.
우리는 무언가를 시도함에 있어 항상 그 결과를 걱정하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책임이나 불안함에 얽매여 시도하지도 못하고 포기하는 일들이 많다. 하지만 막상 부딪혀보면, 우려했던 만큼 그 일이 걱정할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런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는 그런 불안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남들은 흉내내지 못할 과감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과감함에 대한 결과가 걱정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또한 타임 리와인더가 없었다면 느껴보지 못했을 교훈임에 틀림없다.
뜬구름 잡는 소리일진 모르겠지만 이 점은 내게 중요했다. 왜냐하면 수명이 담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에 있어 타임 리와인더를 남발할 수는 없을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시간과 수명의 비례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밝히지 못했다는 찝찝함도 한 몫 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내게는, 타임 리와인더의 사용을 최대한 아끼면서도 그것을 사용할 때와 같은 자신감과 당당함을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진리였지만, 이 시기의 나는 그걸 모르고 마법 같은 힘에 취해 그 힘을 남용하기에 바빴을 따름이다.
훗날 돌이켜보면, 그 진리를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어느새 한 학기가 훌쩍 지나갔다. 나는 지환이가 조별 발표에서 내 이름을 빼버린 그 치욕의 교양수업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A 를 받았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고, 그냥 시험지를 받아보고나서 문제를 외운 후 시간을 되돌리는 식으로 만점짜리 시험지를 작성해왔을 뿐이다.
이렇게 사니까 인생이 얼마나 편한가? 이 때 쯤의 내가 딱 이런 꼴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치트키의 맛을 알아버렸다고 할까. 이것은 어찌보면 타임 리와인더의 부작용이다. 이 시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가져다주지만, 그 대신 성실함을 앗아가게 된다. 삶이란 것을 마치 게임처럼 "저장" 할 수 있는 사람은 더이상 매순간에 최선을 다하기가 힘든 법이므로.
더불어 나는 학과 수석의 자리를 그 교양수업 하나 때문에 놓친 꼴이 되었으므로, 이 사실이 나도 모르는 사이 공공연하게 학과 내부에 퍼져 지환이가 나를 조별 과제에서 제외시킨 사건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원 목록에서 이름을 빼버린건 너무했다."
"그래, 지환이가 좀 심했던 것 같긴 해."
"불쌍하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장학금인데."
학과 내부에서 나에 대해 옹호적인 여론이 돌기 시작했지만 난 아무 관심 없었다. 그까짓 수석, 장학금 따위가 뭐 중요하다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고, 한동안 다시 학교 구경을 하지 못했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당연히 서연이를 볼 일도 없어졌다. 이따금씩 그녀는 여전히 내 머릿 속에 나타나곤 했지만 그 이후로는 나는 그녀를 건들지 않았다.
현주는 여름에 코스모스 졸업을 했다. 군대 다녀와서 휴학기간이 꽤 길었던 나는 현주보다 더 오래 학교를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현주의 졸업식 날, 나는 그 자리에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많이 망설였다. 부모님과 언니까지 오는 가족행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친의 부모님을 뵙는다는건 남자친구 입장에서 언제나 부담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졸업식 당일 아침에, 현주로부터 현주의 아버님이 바빠서 졸업식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아버지가 오지 못해서 많이 허전하다고, 나라도 대신 와달라고 하는 현주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긴 힘들었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지만 나는 부랴부랴 옷을 차려입고 현주네 대학 캠퍼스로 향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과분할 정도로 많은 분들이 댓글과 추천을 주시고, 재미있다고 칭찬해 주셔서
어제 오늘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매화 댓글 하나하나를 감사하게 잘 보고 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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