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5장
퇴원을 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썩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다. 다만 2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라는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게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와주었고 그 와중에 나름대로 독특했던 추억들도 만들었기에 조금 시원섭섭한 기분을 느꼈을 뿐.
병원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어쩌면 애써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려 2주라는 기간을 날로 쉬었다는 사실은, 일상 생활로 복귀하고 보니 내 학업 성적에 말도 안 될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우선 수업들을 모조리 빼먹어 버렸기에 진도를 맞추기가 힘들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재수 없게도 남들에 비해 과제제출도 한박자 늦어져 버려서 여러모로 뒤쳐진 상황이 되었다.
이 와중에 나를 좀 더 씁쓸하게 만드는 사실이 있었다면 바로 타임 리와인더의 부재였다. 타임 리와인더만 정상적으로 작동해준다면 사실 걱정할게 아무 것도 없었다. 완벽한 시험 성적만으로도 2주간의 부진을 모조리 메꾸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시계는 아직까지도 정상적으로 작동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대로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되는 건가?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시계의 고장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시계를 다시 쓸 수 있게 될 거란 그 이유 모를 직감을 지울 수 없었다.
"성진 선배."
퇴원 후 첫 등교, 첫 수업이 끝나고 나자 마자 의외의 돌발 상황이 나를 맞이했다. 그렇잖아도 내 쪽에서 찾아가려 했던 지환이 새끼가 제발로 나를 먼저 찾아온 것이었다. 조금 놀랍긴 했지만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나는 놈을 인적이 없는 캠퍼스 건물의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너 내가 무슨 말 할 것 같냐?"
"......."
지환이 놈은 다짜고짜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비록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 유성이가 병원에서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손을 봐줬다는건지 내내 궁금했는데 실제로 지환이의 모습을 보게 되니 유성이가 내게 했던 표현은, 실제로 그녀가 지환이에게 해놓은 것에 비해 너무도 약소하게 생략된 표현임을 비로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너 쌍판데기가 왜 그래?"
"......."
"혹시 유성이한테 맞은 거냐?"
한 쪽 눈은 팅팅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아보이는데다 반대편 눈에는 시퍼런 피멍까지 들어있다. 게다가 터진 입술은 아직도 아물지 않았는지 딱지가 덕지덕지 앉아있었고 얼굴 군데군데 반창고가 붙어있는 것 또한 가관이었다. 이걸 정말 유성이가 한 걸까?
"유성이한테 맞은 거냐고?"
"......."
차마 자기 입으로 인정하긴 싫은지 뻣뻣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지환이였다.
세상에 맙소사. 유성이가 어떤 아인지 대략 알고 있는 나였긴 했지만 도저히 그녀가 이렇게 사람을 패놓았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다. 도대체 그 순간의 유성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죄송합니다, 선배. 다시는 선배 눈에 띄지 않을게요. 제발 신고만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렇게 빌겠습니다."
더 오래 끌어봤자 좋을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지환이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도 모르게 "진심 어린 사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럴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겠죠." 라는 유성이의 말이 떠올랐다.
나 또한 그건 마찬가지였다. 이미 지환이라는 놈의 인간성을 두 눈으로 본 내게 지금 지환이의 이런 모습은 위기를 탈출하려는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란걸 이 녀석도 알고 있는게 틀림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창피를 무릅쓰고 용서를 구한다는건 이런 막무가내식의 구걸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다는 뜻이었다.
"다시는 눈에 띄지 않겠다? 그것 뿐이냐?"
"그, 그리고 또....."
"또?"
"서, 서연이나.... 유성이에게도.... 허튼 짓 하지 않겠습니다."
이 놈도 머리통이 있으니 내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는 스스로 이미 다 알고 있을 터였다. 마치 미리 연습이라도 해온 듯이 용서를 구하는 말을 읊는 지환이였지만 그 두 눈에는 미처 다 숨기지 못한 굴욕감이 남아있음을 나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네가 인간말종이란건 이미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말이야. 나중에라도 또 개수작을 부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잖아."
"보, 보장이라면.... 유성이가 쓰게 한 각서와 증거 사진들이...."
"아 참, 그거?"
그러고 보니 유성이가 지환이 놈으로 하여금 각서를 쓰게 하고 증거 사진을 찍어놓았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도대체 그 각서와 사진이라는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대충 어떤 것일지 정도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새삼 유성이의 일처리 방식이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협박으로 흥한자 협박으로 망하는 법인가? 사실 지환이 놈이 사진을 빌미로 했던 그 협박이 결코 흥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쨌든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수법으로 이번엔 되려 위협을 받게 되었으니 그 꼴이 아주 기묘했다. 어쩌면 유성이가 굳이 그런 증거사진을 확보해 놓은건 이런 식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만약 그런거라면 상당히 잔혹한 수법이었다.
"그래도 그런게 그다지 믿음이 가진 않는데. 생각 같아선 너 그냥 철창에 처넣어버리고 싶거든."
"서, 선배."
사실 마음 편히 콩밥을 먹이고 싶지만 굳이 참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서연이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말로는 자기 신경 쓰지말고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했던 서연이였지만 예전의 남자친구라는 관계를 떠나, 한 학과의 학회장으로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서연이가 학생회의 여론으로부터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 학과 내부에서 학과생의 범죄 행각이 낱낱이 밝혀지고 그로 인한 구속 사태까지 일어나게 된다면 그녀가 받는 고충이 지금보다 몇 배로 더 늘어날 것임이 분명했다. 심지어 다른 죄목도 아니고 지환이에게 걸어야 할 죄목은 살인 미수이니까.
모르긴 몰라도 학과는 물론 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히겠지. 그랬다간 서연이는 학회장직 박탈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단순히 서연이를 위해서만의 이유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망쳐놓는 행위에 대해 나 자신이 거북함을 느끼고 있었던 이유도 컸지만 말이다.
"내가 너를 뭘 보고 믿으면 되냐? 한번 말해봐. 들어보고 결정할 테니까."
"절대 다시는 선배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학교도 휴학할 겁니다... 선배나 서연이가 졸업하기 전까진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어차피 극단적인 선택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던 나였기에 적어도 지환이 놈이 하는 말이 꾸며낸 이야기 같지는 않아보여서 일단은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비록 그 속내는 여전히 나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고 있을 테지만 지금 당장 이렇게 절박하게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더이상 이 녀석에겐 할 수 있는게 없어보였다. 협박의 빌미였던 사진조차도 없어져 버렸으니까.
"그럼 내 말 명심해."
"......."
"네 말대로 두 번 다시는 나나 서연이, 그리고 유성이에게 개수작을 부리는 일이 없어야만 할 거야. 눈에 띄지 않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앞으로 너로 인해서 우리들 중 누구 하나에게라도 불미스런 일이 생긴다면 그 땐 나도 네가 했던 방식 그대로 너를 묻어버릴 거니까 명심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듣겠냐?"
"......."
"왜 대답이 없어?"
"아, 알겠... 습니다...."
그 순간 나를 놀려다보며 억지로 입을 열어 대답하는 지환이의 눈빛에서, 나는 녀석이 끝내 지우지 못한 나를 향한 복수심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굳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궁지에 몰렸다고 해서 인간이 쉽게 회개하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은 그저 이 구역질 나는 녀석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은 마음 뿐이었다.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좋아. 그럼 꺼져. 다시는 눈에 띄지 마."
"......"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지환이 녀석을 내버려두고 나는 등을 돌렸다.
걸어가는 내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뭐 잘한 거야.
어쩌면 이게 더 마음 편한 선택일테지.
그리고 다음날부터 지환이 놈은 더이상 학교에서 보이질 않았다.
정말 이걸로 끝인 걸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퇴원 후 3일째 학교 가던 날. 그 날은 서연이와 함께 듣는 교양 수업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서연이와 나, 유성이가 한 조가 되었던 바로 그 조별 수업이었다. 조를 구성했던 시간 이후로 나는 엠티니 입원이니 해서 한번도 수업을 들어온 적이 없었으므로 교수님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병결계를 인정은 해주셨다만은 조별 발표가 불과 몇 주 뒤로 다가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우리 슬슬 조별발표 준비해야겠네."
"네."
"네."
"......"
서연이와 유성이 둘 다 병원에서의 만남 이후 얼굴을 보는게 처음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같은 날에 와서, 게다가 둘 다 내게 어떤 썸씽을 남기고 갔다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아무래도 기분이 묘했다. 둘은 서로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양쪽 다 병원에서 헤어지기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을 겪고 헤어졌기에 나는 어쩐지 그녀들을 대하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다음 주 쯤에 우리 한번 모일까?"
"그래요."
"그래요."
"......"
무슨 클론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좀 더 원활한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단답식의 질문이 아닌 본격적인 사항들을 토의하기 시작하니 그제서야 서연이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두 여자가 나한테 뭔가 쌓인게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 어디서 과제를 하는게 좋을까?"
"컴퓨터만 있으면 아무데라도 상관 없어요. 주제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괜히 돈 들여서 피씨방 같은데 가지말고 선배네 자취방에서 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내 방에서?"
"왜요? 싫으세요?"
"아, 아니, 그런건 아닌데."
그 순간 서연이의 제안에 내가 잠시 멈칫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내 방에 두 여자를 들이게되면 왠지 모르게 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주와 마주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어쨌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분명 내가 아는 서연이라면 그녀도 그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터인데 어째서 저렇게 당연스럽게 저런 제안을 하는 건지. 혹시나 현주와 마주치더라도 단순히 조별 과제를 했을 뿐이니까 별로 문제될 건 없다는 건가?
하긴 서연이에게 현주가 서연이를 안좋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해준 적은 없지만, 그래도 눈치 빠른 서연이의 성격상 현주가 당연히 그녀를 아니꼽게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을 할 텐데...
"유성아, 넌 어때? 성진 선배 자취방에서 해도 괜찮겠지?"
"네, 전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그런데...."
유성이가 말꼬리를 흐리며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성진 선배 자취생이었어요?"
"으응. 왜?"
"그랬군요. 전 몰랐네요."
왠지 유성이의 그 말에서 평소의 담담함을 넘어서는 기묘한 냉랭함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내가 자취생이라는걸 유성이에게 진작 말해주지 않은게 그녀로 하여금 어떤 서운함을 느끼게 한걸까?
에이, 설마 다른 여자도 아니고 유성이가 그런걸로 삐칠 것 같지는 않은데....
아, 모르겠다. 오늘따라 두 여자의 태도가 왜 이렇게 찝찝하지?
아니면 단순히 내가 과민반응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발표자료를 준비하기전에 교수님이 지정해준 박물관 견학을 가야하니까 주말 쯤에 우리끼리 시간 한번 맞춰보도록 해요."
조별 과제를 준비하기 전에 교수님이 지정해준 박물관에 가서 해당 파트에 대한 자료 조사를 직접 해야만 하는게 이번 과제의 난관 중 하나였다. 인터넷이나 참고 문헌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닌데다가 PPT에 박물관 체험에 대한 인증자료를 첨부해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한번은 박물관 견학을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문득 서연이와 나, 유성이 셋이서 박물관 견학을 가는 모습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았다.
이거 왠지 벌써부터 분위기가 미묘해 지는 것 같은데.... 이것도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모르긴 몰라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견학"과는 다소 다른 경험이 될 거라는 예감이 마구 들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너희도 조심해서 들어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퇴원 후 모처럼 만난 서연이와 유성이랑 시간을 좀 더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현주가 자취방에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퇴원 당일 기념파티를 해주겠다며 약속한 그녀였지만 어쩌다보니 오늘로 밀려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굳이 여자친구와의 약속이 있다고 두 여자에게 말하기 싫었던 것을 보면 나도 참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어쩐지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여자의 시선을 애써 못본 척 하며 강의실을 급히 나섰다.
*
"짜잔!"
현주는 나름대로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자취방에 도착하니 이미 현주가 이것저것 요리를 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한가득 느껴져왔다. 요리에 대해 초짜배기인 내가 봐도 족히 몇 시간은 정성들여 준비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혀, 현주야. 너 언제....?"
"사실은 낮에부터 와있었어. 나 요새 졸업하고나서 백조잖아. 히히."
머리를 마치 사과처럼 올려묶은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현주의 모습을 보니 마치 우리가 정말로 신혼부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요새 여러모로 지은 죄가 많았지만 그 죄책감을 잠시 잊을 정도로 여자친구의 모습이 귀여웠다. 퇴근 후 집에 들어왔을 때 맛있는 저녁을 차려놓고 날 기다리는 아내를 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왔어?"
"비밀번호 기억해뒀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몹쓸 놈이었다. 현주가 나를 즐겁게 해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고작 이 순간 현주가 내 방의 비밀번호를 알았다고 해서 쓸 데 없는 걱정부터 하게 되는 내가 싫었다.
걱정할건 걱정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은 현주 앞에서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말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미묘한 그 어떤 무언가가 내 표정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현주는 애교 있게 웃다가도 갑자기 날 올려다보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빠~ 혹시 화났어? 내가 마음대로 들어와서?"
"으응? 아, 아니. 아니야. 그냥 창피해서 그러지. 방도 더러웠을텐데."
그러고 보니 현주가 청소며, 빨래까지 다 해놓았는지 방바닥은 털쪼가리 하나 없이 반질반질했고 빨래통은 이미 비어있었다. 요리도 모자라 집안일까지 해놓으려면 얼마 만큼 신경을 썼어야 했을지 심히 짐작이 되었기에 괜히 현주의 얼굴을 마주보는게 더욱 부끄러워졌다.
"치. 우리 사이에 뭘 그런걸 부끄러워하고 그러냐. 난 이제 오빠 팬티도 손빨래 할 수 있는데, 뭐."
"그래, 나 지금 너 보니까 완전 내 색시같다."
듣기 좋은 칭찬이었는지 현주가 배시시 웃었다. 그 행복한 웃음을 보면서 나는 애써 머릿 속에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지웠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인지라 머릿 속으로는 자꾸만 서연이와 함께 있을 때 현주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온다던지 하는 최악의 사태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억지로라도 잠깐 그런 생각을 잊기로 했다.
"힛. 나 시집가도 잘할 것 같지 않아?"
"응. 그런데 누구한테 시집 가려고?"
"글쎄~~"
내가 뻔한 대답을 괜스레 묻는다고 생각한 건지 현주가 능청을 피웠다. 문득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현주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역시나 기분이 나쁘다. 나를 좋아하는 현주가 웨딩드레스 입고 다른 남자 품에 달려가 안기는 모습을 상상한다는게 무척 배알이 튀틀렸다.
과연 소유욕은 사랑에서 파생되는 감정일까? 아니면 그저 내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한 남자로서의 욕망일 뿐인가?
"뭐야."
내가 그녀의 능청에 호응해주지 않자 현주는 되려 기분이 나빠진 듯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럴 땐 오빠가 번쩍 안아들면서 "당연히 나한테 시집와야지" 뭐 이런 말 해줘야 하는거 아니야? 무드 없게."
"아아, 미안."
나는 뒤늦게 현주의 허리를 껴안고 천장까지 번쩍 안아들어올렸지만, 현주는 이미 삐친 듯한 표정이었다.
"흥. 늦었다 뭐. 오빠 예전엔 내가 말 안해도 내 속마음 다 알아주더니, 요샌 무신경한 것 같아."
"응? 그, 그런거 아냐."
"쳇~ 변했다 변했어."
나왔다. 남자들이 가장 대처하기 힘든 여자들의 멘트 TOP 10안에 들어간다는 바로 그 한마디.
변했어.
비록 현주는 진심이 아닌 장난으로 서운함을 표하기 위해 한 말이겠지만, 괜시리 지금의 내가 그 현주의 한마디에 움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주가 말하는 그 "변했다"는 의미가, 내게 있어서는 타임 리와인더를 잃게 된 현실을 고스란히 지적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인식은 실제로도 어느 정도 타당한 생각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내가 예전에 그녀의 마음과 행동을 모두 읽고 한발 앞서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95퍼센트 정도가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이 있었기에 발휘할 수 있었던 기지였으니까.
물론 우리의 연애가 길게 이어지면서 내가 차츰 자신감을 얻고, 현주를 대함에 있어 "적응"이란 것을 하면서부터 굳이 타임 리와인더를 쓰는 경우는 점점 줄어갔던 것은 사실이다. 수명을 깎아가면서 그것을 남용할 필요까지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타임 리와인더가 있는 상태에서 그것의 사용을 일부러 자제하는 것과, 타임 리와인더를 전혀 쓸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사용을 안하는 것은 같아도 그 둘 사이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를 남겨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는 우선 "자신감"의 부재에서부터 드러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현주의 "변했다"는 말이 내게는 왠지, 그 시계를 잃은 너는 예전만큼 좋은 남자친구가 될 수 없을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해서 나는 스스로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남들 보기엔 정말로 한심한 이야기였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여자친구에게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나 혼자만의 고충이기도 했다.
"그런거 아닌데...."
장난으로 한 말에 내가 의기소침해지자, 이번엔 또 현주가 살짝 눈치를 보는 판국이 되었다.
평소와 다른 내 모습이 그녀 입장에서는 이상해 보이나 보다.
"에이, 또 왜 그래. 오빠답지 않게. 장난으로 한 말인거 몰라?"
"으응. 알지."
"치. 오빠 오늘 이상하다. 배고파서 그래? 얼른 씻고 나와서 밥 먹자."
"응."
내가 변한 이유. 따지고 보면 내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 하나를 잃은 것 뿐이었다.
그 무언가가 나라는 인간의 수준까지 바뀌게 할 만큼 대단한 거였나....? 정말 한심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타임 리와인더에 의존하지 않고도 나는 좋은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현주를 두고서 이미 두 여자에게나 마음을 열어버렸다.
그 시점에서 이미 나는 좋은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그런 생각들이 난잡하게 뒤섞여 나를 혼란케 했다.
결국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현주에게 있어 좋은 남자가 되기엔 부족하다는 걸까?
"맛있다."
현주가 해놓은 음식들을 먹으며 나는 애써 그런 생각들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는 나 혼자 쓰려고 사놓은 그 조그만한 밥상 위에, 족히 다섯 사람은 먹어도 될 만큼의 푸짐한 음식들이 올라와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 음식들 하나하나가 현주에게 한번씩 얘기했던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로만 이루어져 있는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마치 한 자리에 다 모여있는 느낌이었다. 닭도리탕, 파스타, 동그랑땡, 너비아니, 볶음밥, 칠리새우 등등...
어느 것 하나 직접 손으로 조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분명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것 하나하나를 머릿 속에 기억해뒀다가 단단히 준비해서 오늘 이렇게 내게 요리를 해준 것일게다. 이렇게 좋은 여자친구를 두고 나는 왜 한 명으로 만족을 못해서 다른 여자와 난잡한 관계를 만드는 걸까?
"진짜? 맛있어?"
"응. 진짜 맛있어."
"다행이다. 이것저것 한다고 간 조절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표정을 숨기려는 내 노력이 효과를 보는지 현주의 얼굴에도 웃음이 돌아왔다. 음식은 너무나 맛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내 마음은 더욱 시큰거렸다.
*
"오빠, 아까 괜한 말 해서 미안해."
푸짐하기 그지없는 저녁밥을 먹고 나서, 현주와 TV를 보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다가 배가 좀 꺼지고 나자 우리는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물론 나와 현주 사이에 여전히 스킨십의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옆에 나란히 눕는 것 정도는 현주도 싫지 않은 듯 했다.
"뭐가?"
"변했다니 뭐니 그런 말 한거. 남자들은 그런 말 싫어한다던데."
"하하, 장난이었다면서 뭐가 미안해."
내가 어쩔 수 없는 사내놈임을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실감한다. 현주에 대한 죄의식과 찝찝한 마음이 난잡하게 속에서 뒤엉키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현주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이 되자 내 몸은 성욕을 갈구하고 있었다.
섹스로 넘어갈 듯 말 듯한 그 특유의 아슬아슬한 감각을 좇아 반응하기 시작하는 내 육체가 한심했고, 또 그런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내 이성도 마찬가지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어, 내 스스로 먼저 현주에게 섹스어필을 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용케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사실은... 나 요 근래 들어 그런 생각을 하긴 했거든. 오빠가 연애 초반하고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난 혼자 있을 때 계속 그 생각을 했었어."
"그... 랬어?"
혼자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는 현주의 말을 듣고 "하긴 그럴 수도 있었겠다."라고 당연히 납득하게 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와의 연애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 타임 리와인더를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현주는 나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연애에 익숙한 남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그런 실수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익숙해졌기 때문에 더이상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빠진 것이다. 굳이 번거로울만큼 완벽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현주는 내게 웃어주었기에.
물론 내게는 타임 리와인더를 매번 써가면서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 할 순 없다는 정당한 합리화가 있긴 했다. 어찌 되었든 이것은 수명을 깎아먹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고 말고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러한 나의 태도가 현주로 하여금 변했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면, 아무래도 나로서는 할 말이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우리를 연결시켜준 것이 바로 이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늘 그녀의 마음을 읽어주고, 그녀의 행동을 예측해주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한발 앞서 이루어주었던 완벽한 남자친구의 모습을 나의 원래 모습으로 알고 있는 현주로서는, 이런 나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현주가 알고 있는 그 "원래 나의 모습"이야말로 알고 보면 내가 처절하게 꾸며낸 모습에 지나지 않는데.
게다가 이제, 만약 타임 리와인더가 여기서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녀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그녀는 평생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현주는 여전히 날 사랑해줄까?
"괜찮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다시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면 돼."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예전과 비해, 혹시라도 그것의 능력이 필요한 순간이 오더라도 내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는 대처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지금은, 아까도 말했듯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씁쓸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없더라도 여전히 현주가 나를 사랑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사실 좀 섭섭하기도 했어. 오빠가 이제 처음만큼 나를 좋아하진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해보니까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았어. 오빠가 변했건 안 변했건, 평소에 오빠가 내게 기울이는 노력을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한테 다 맞춰주는거 오빠한테도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현주야..."
현주는 좋은 여자친구였다. 난 그걸 알 수 있다. 나조차도 내가 변했다는 사실에 대해 마음 속으로부터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현주는 지금 나의 입장을 이해하고 오히려 그녀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내 노력의 근원에 대해 알건 모르건 간에, 그녀에게서는 나를 향한 배려가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반성해봤어. 생각해보면 오빠는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받기만 하고 오빠한테 별로 해준게 없는 것 같아. 어쩌면 내가 오빠를 질리게 만든건 아닐까, 이렇게 투정 부리는 생각만 하면서 정작 아무 것도 노력을 안하니까 오빠가 나를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는 거야... 그런 생각을 했었어."
"무슨 소리야.... 그런거 아니야. 너 정말 좋은 여자친구인걸. 진심이야."
그래. 진심이다. 현주는 정말 좋은 여자친구다.
하지만 나는 그리 좋은 남자친구가 아닌 것 같다. 현주의 진심어린 마음을 이렇게나 느끼면서도 다른 여자와 몸을 섞고 있으니까. 단지 그녀가 내 육체적인 욕망의 부분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그런 얄팍한 이유를 들어서.
"그래도 여자 입장에선 그런 생각이 드는걸... 그래서 계속 생각했어. 오빠가 나에 대해 질린 부분이 있다면 나도 거기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하니까. 내 어떤 부분이 오빠를 변하게 했는지... 뭐 그런거..."
"......."
"그렇게 계속 고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라. 어쩌면 내가 오빠에게 그...."
현주는 말하다 말고 부끄러운지 내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해서 표정을 내게 보이지 않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현주의 머리 위에 슬며시 손을 올려주었다.
"그... 잠자리... 를 허락해주지 않은게.... 이유가 아닐까 하는...."
"아, 아니야!"
나는 현주가 혼자 생각하고 내렸다는 결론이 무척 뜻밖의 내용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현주는, 자신이 내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 결국 내가 변하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걸까?
"사실은 친구들한테 많이 물어보고 상담도 해봤어. 남자친구에게 성관계를 허락하지 않는게 남자 입장에서 많이 힘든 일인지...."
현주가 내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 물론 내게 있어서는 더없이 힘든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주에 대한 마음을 변하게 할 만큼 치명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 때문에 물론 서연이와 그런 관계까지 치달아버리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현주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일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주가 혼자 생각하고 내렸다는 그 고민의 결론은 사실 정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귀결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 법이기 때문에, 그녀가 그 부분에 대해서 그렇게나 고민을 했다면 그 결과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찌 되었든 현주와 평생 섹스를 하지 않고 사귈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 그래서 친구들은... 뭐랬어?"
현주의 생각이 정답이 아닌 것은 아닌 거지만, 그래도 역시 궁금함을 억누를 순 없었다. 현주의 마음을 위로해주는건 우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냥... 사람마다 다 다른거래. 나처럼 오래 관계를 가지지 않고 잘 사귀는 커플들도 있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되어 충분히 헤어질 이유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그래도 역시 요즘 같은 시대에 육체적인 부분 없이 정신적으로만 연애하는건 좀 힘들지 않겠냐고 말해준 친구들이 조금 더 많았고....."
나는 참 어쩔 수 없는 놈인가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녀의 친구들이 나에 대해 유리한 쪽으로 조언을 해줬다는 사실 하나에 마음이 들뜨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쩌면 남자라는 동물은 이다지도 단순한 걸까?
"그랬어....?"
"응. 그리고 언니도.... 권태기를 극복하는 데엔 스킨십만한게 없다며.... 나, 나는 언니의 성관념에 딱히 동의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게다가 우리가 절대 권태기라고도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뭐 어쨌든...."
현아 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현아 씨가 나와 현주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해 그런 조언을 해주었다면, 그건 병원에서의 일이 있었기 이전일까, 이후일까?
"내,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우리한테 그게... 조, 좋은 방법일 것 같긴 해."
"혀, 현주야."
나는 현주의 말 뜻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에 그 순간 너무도 놀라 현주를 내려다보았다. 내 가슴팍에 묻은 현주는 여전히 얼굴을 내게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끝까지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싶은 것처럼.
그러나 내가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 계속 내려다보고 있자, 그녀는 결국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긴장과 떨림으로 기묘하게 굳어진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여전히 그녀는 어딘가 두려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이윽고 눈동자에 확연한 의지를 담아 내게 말했다. 비록 조금은 떨리지만 충분히 내게 들릴 만큼 뚜렷한 목소리로.
"그, 그래서 오늘은... 나 마음의 준비 하고 온 거야."
*
현주가 샤워를 한다. 내 자취방 좁은 화장실에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샤워기의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상황이 정말 현실이긴 한건지 다시 한번 내 스스로 감각을 되짚어 보았다. 오늘 정말 현주와 넘지 못했던 섹스의 벽을 넘게 되는 걸까...? 정말로? 이렇게 갑자기?
그동안 나는 현주의 바람에 따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잘 참아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에게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어쨌든 현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만약 현주가 내가 모르는 사이 혼자서 그런 고뇌의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내게 몸을 허락하기로 마음 먹은 거라면 솔직히 내 입장에서 이보다 더 바람직한 전개는 없었다.
물론 그녀가 내 애매한 태도로 인해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역시 속물적인 놈이다. 비록 그녀가 내 마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오해를 했다고 한들, 그녀 스스로 그렇게 내린 결론을 내 쪽에서 반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이런 섹스리스(sexless) 를 감수하면서까지 연애를 이어나갈 수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관계를 이어나가다보면 언젠간 정말로 현주가 말한 것처럼 내가 지치게 되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합리화를 시켰다. 그것은 비록 얄팍한 합리화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나와 현주에게 진전의 기회가 온 이상 나는 그것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 후에 현주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면 된다.
다정하게 섹스를 즐기고 나서 서로 기분 좋게 나른한 행복에 잠겨 있을 때,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천천히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어쩌면 훨씬 더 좋을 지도 모르지. 육체가 닿아있으면 마음도 그만큼 잘 통하는 법이니까.
"오빠..."
끼익, 하고 화장실 문이 열렸다. 내 자취방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렇게나 긴장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침을 꼴딱 삼키고 있는데 현주가 알몸에 타월 하나만 두른 차림으로 쭈뻣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으, 응. 다 씻었어?"
"으응. 근데 지금은 보지마. 부끄럽잖아."
섹스를 하려는 남녀가 어떻게 서로 알몸을 안 볼 수가 있니?
하지만 굳이 개의치 않고 그녀의 요구대로 시선을 슬쩍 돌려주었다. 어차피 좀 있으면 마음껏 보게 될 텐데.
나는 현주보다 한발 앞서 샤워를 끝냈기에 지금은 사각 팬티 한 장만 입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 한 장의 사각 팬티도 앞으로 다가올 이벤트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미 불룩하게 텐트를 세운지 오래였고.
"나 드, 들어갈게."
"으응."
현주는 확실히 섹스라는 것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익숙치 않아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거리낌 없이 누워있었던 침대에 지금은 들어오겠다고 허락을 구한다.
그런 현주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휩쓸린 나는, 이상하게 나조차도 동정 딱지 떼는 숫총각의 기분으로 돌아간 것 같아 아주 기묘한 의미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한게 있었다.
현주는 처녀일까?
물론 나는 여성의 순결이라던가 하는 부분에 대해 크게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적당한 경험을 갖춘 여성이야말로 섹스에서든 연애에서든 보다 능숙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의 "과거"는 오히려 남자에게도 플러스요인이 될 수 있었다. 너무 함부로 여기저기에 몸을 굴리고 다닌 경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현주의 순결을 의심하는 차원에서의 궁금증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에서 그녀가 과연 처녀일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았다. 만약 현주가 처녀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이해할 수 있으니까.
"현주야, 너 혹시...."
"으, 으응!?"
"......."
하지만 내가 현주의 어깨에 손을 슥 얹자마자 불에 덴 듯 화들짝 기겁하는 현주를 보고 나는 물으려던 것을 멈추었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걸까? 아무리 처녀라고 해도 보통 자기가 하자고 허락을 해놓고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나?
"왜 그래~ 편하게 있어."
"으응. 미안해... 놀라서..."
어찌 되었건 여자친구가 섹스 전에 긴장을 한다면 풀어주는 것도 남자의 의무이다.
우선은 다른 잡다한 생각은 다 치우고 현주와 어떻게 즐거운 섹스를 풀어나갈지에 대해서만 집중하자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우선 좀 안고 있자."
"으응..."
이런 모습의 현주를 본다는건 정말 뜻밖이었다.
언제나 쾌활하고 명랑한 웃음과 함께 애교 넘치는 모습만 보여주던 현주였는데 이렇게 병아리처럼 잔뜩 움츠러 들어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귀엽기도 했지만 글쎄, 너무 지나치게 긴장을 하니까 오히려 안쓰럽달까....
"현주야. 우린 지금 절대 권태기 같은게 아냐. 나 너에 대한 마음 조금도 변한거 없어. 네가 그거 알아줬으면 해."
"으응...."
우선 대화를 통해 긴장을 녹여보자는 셈으로 섹스 후에 꺼내려고 했던 얘기를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앞당겨 꺼냈다. 현주의 몸에는 여전히 가슴과 아랫도리까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타월 한장이 둘러져 있었지만, 등이나 어깨 부분은 현주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기에 나는 그 묘한 섹시함에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니 미안해. 앞으로 네가 그런 생각 하는 일 없게 내가 더 잘할게. 그리고 아마.... 내 생각이지만 오늘 우리 이렇게 잠자리 갖고 나면 아마 앞으로 서로 더 좋아질거야."
"그, 그럴까... 남자들은 여자랑 자고 나면 갑자기 확 식는 경우도 있다던데...."
"아냐... 그건 애초에 섹스하려고 만난 관계일 때나 그렇지. 우린 지금까지 잘 참았잖아. 오늘 우리가 관계를 가지게 된다면 분명 우리에게 좋은 기억이 될 일이지 절대로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을거야."
"진짜지? 오빠 그 말 믿을게... 나 근데 왠지 안심이 안 된다...."
혹시 현주는 여지껏 남자가 여자랑 섹스를 하고 나면 애정이 식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그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에 나와의 잠자리를 기피해왔던 걸까? 현주의 조심스런 태도를 보건대 분명 무슨 이유가 있긴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걸 대놓고 물어보기에는 이 적절한 타이밍에서 굳이 분위기를 흐리는 선택이 될 것 같았다.
"오빠 말 믿어. 절대 식거나 그러지 않을 거야."
"으응.. 믿을게. 나, 나는 잘 못하니까 오빠가 알아서 잘 이끌어줘."
아무렴 여자친구가 성경험이 별로 없다는데 그 사실 때문에 굳이 기분 나쁠 이유는 또 없었다.
나는 현주를 안심시키듯, 그녀의 맨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우선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키스 정도는 자기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듯, 용기를 내어 내 입술을 받아 무는 현주.
그 모습이 귀여웠다.
쪽쪽...
현주와 매번 나누었던 특유의 그 고요하고 잔잔한 키스의 소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익숙한 소리가 조금은 다르게 들린다. 언제나 여기서 끊어야 했던 우리였지만 오늘은 이 뒤의 일이 남아있으니까. 그것도 아주 많이.
"흐음..."
코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나와 현주의 코를 간지럽혔다. 서로의 입술이 부벼지면서 점점 혀도 얽히기 시작했고, 곧 타액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키스의 농도가 올라갈수록 나의 손은 현주의 등을 보다 넓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안쪽에서 바깥으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현주의 등을 마사지하는 내 손은 멈추지 않았고 현주는 그녀의 맨살에 내 손이 닿을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거렸지만 용케도 그것을 거부하거나 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마침내 비교적 깊숙한 옆구리 부근까지 가서 닿자, 현주가 또 한차례 크게 움찔거렸다.
"괜찮아. 놀라지 마."
"으응... 미, 미안해 오빠... 내가 자꾸 겁먹고 그래서..."
"아니야. 내가 다 풀어줄게."
그녀가 섹스를 이렇게 두려워하는 이유가 뭐가 됐든지 간에, 오늘 어떻게든 그녀를 만족시켜 앞으로 그녀가 섹스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고야 말리라, 하는 것이 나의 오늘 목표였다.
현주는 내가 처음으로 "이상형과 사귀었다"는 가슴 벅찬 만족감을 내게 안겨주었던 특별한 여자다. 그러니 그녀와의 섹스도 당연히 특별해야만 했다. 적어도 내 자지는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처음 봤을 때 부터 줄곧 호감을 가져왔던 현주의 몸을 드디어 안게 된다는 사실에 내 사타구니 사이에서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서연이의 몸을 품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아찔한 흥분이었다. 비록 어느 쪽이 더 흥분되는지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가 없지만, 적어도 두 사람의 육체가 주는 의미와 느낌이 내게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으니 그저 가슴 벅찬 기대감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현주야, 이거 벗길게."
"으응? 자.. 잠시..."
현주가 머뭇거렸지만 나는 일부러 못 들은척 하며 현주의 몸을 유일하게 가려주던 아슬아슬한 타월 한 장을 벗겨내고 말았다. 이 타이밍에서 더 머뭇거렸다간 진도를 빼는데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오.. 오빠.. 불 끄면 안 될까..?"
"왜? 나는 우리 예쁜 현주 몸 보고 싶은데. 그냥 하면 안 돼?"
"껐으면 좋겠는데... 꺄악!"
현주가 칭얼거리다 말고 뾰족한 소리를 냈다. 타월을 벗겨낸 내가 노골적으로 그녀의 알몸을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요란한 그 반응에 비록 나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손의 움직임을 멈추진 않았다. 어차피 현주의 반응으로 봐서 앞으로 내가 뭘 하든 그녀는 이렇게 움찔움찔 놀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럴 바엔 그냥 현주의 반응에 신경을 끄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꿋꿋하게 리드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강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현주도 동의해서 하는 거니까 기왕 할거라면 내가 주도력 있게 나가주는 편이 현주로서도 더 좋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현주가 놀라든 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섹스를 이끌어 나간다.
"오, 오빠아...."
현주의 울음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를 못 들은척 받아넘기며, 꿈에 그려왔던 현주의 감격스런 알몸을 여기저기 탐험해 나간다. 맛있는건 가장 마지막에 남겨두겠다는 심보로 우선은 그나마 바깥 쪽인 아랫배부터 시작해서 옆구리와 등허리를 더듬어본다. 맨들맨들한 속살의 감촉이 너무도 보드랍고 기분 좋다.
현주는 꾸준히 헬스장을 다닌 여자답게, 몸매가 너무도 좋았다. 현아 씨의 미끈하고 쭉 뻗은 매혹적인 몸매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매력이었지만 아담하고 귀여운 몸 답지 않게 온 몸에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자리 잡은 잔근육들의 흔적이 엿보였다. 여성적인 미를 망칠 정도의 근육이 아닌, 건강미가 물씬 느껴지는 아름다운 근육이었다.
배와 허리, 등을 잠깐 더듬었을 뿐인데도 속살 안쪽으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복근과 등근육이 느껴졌다. 물론 현주가 너무 긴장해서 내가 터치하는 부위마다 힘을 잔뜩 주게 되어 더욱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이렇게 세밀한 근육이 은근히 느껴지는 여성의 몸은, 그 나름대로 엄청난 흥분을 남자에게 가져다 주는 법이다.
"현주야. 네 살결 완전 탄력있다.. 느낌 너무 좋아."
"모, 몰라아..."
현주는 거의 흐느낄 것 같은 기세였다. 애써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일단은 신경 끄기로 하고 만지고 싶은 부분을 더 깊숙히 더듬어보았다. 등근육의 줄기들을 따라 척추를 훑고 올라가니 날개뼈 부근에서도 오밀조밀하게 가꾸어진 건강한 근육들이 만져졌다. 그 느낌이 무척 흥분된다.
"오, 오빠!"
현주의 알몸 전체를 감상하고 싶다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마지막으로 지켜주던 이불을 확 들추고 말았다. 최후의 보루가 순식간에 걷혀져나가자 현주는 기겁을 하며 그 순간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몸을 보이는게 부끄럽다면 몸을 가려야지 왜 애꿎은 얼굴을 가릴까? 귀엽기는.
"현주야, 혹시 우는거 아니지...?"
"그, 그런거 아니야... 그냥.... 오빠 눈 도저히 못 보겠다... 나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
이런 말을 하면 좀 짐승같이 보이겠지만 솔직히 지금 현주의 얼굴에 볼일이 있는건 아니었으니 나로서는 사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양손으로 그렇게 얼굴을 덮고 있으면 더 자세히 군데군데를 볼 수 있으니까 더 좋긴 하지. 크크.
그럼 드디어 오매불망 꿈속에서나 그려왔던 우리 현주의 알몸을 한번 감상해보실까?
"현주야... 몸매 죽인다, 진짜."
"그, 그런 말 하지마."
솔직한 감상이 머릿 속에서 맴돌다가,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렸다. 내가 그동안 현주의 이 알몸을 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애를 쓰고 노심초사 해왔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성스러운 몸을 보기 까지는 왠지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이불을 들추는 딱 한 동작 만에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간 베일에 쌓여있었던 현주의 알몸을 영접하기까지의 과정이 그 짧은 한 동작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지독할 만큼 허무함이 샘솟아 오르기도 했지만, 그 허무감에 빠져 있을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저 눈으로 보고, 느끼고, 뇌에 새겨넣는 반복 작업만으로 내 온 신경을 쏟아야 할 판이었으니.
솔직히 현주의 몸이 자기 언니의 몸처럼 길쭉길쭉하게 빠진 쭉빵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내가 현아 씨의 알몸까지 본 적은 없다만 눈대중으로도 그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흔히들 일컫는, 약간 "육덕진" 스타일을 선호하는 남자들에게 있어 현주의 몸매는 가히 환상적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굳이 이 순간에 서연이의 몸과 현주의 몸을 비교하는 것이 두 여자 모두에게 예의가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따지고보면 최근에 섹스를 했던 상대가 서연이 밖에 없었기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내 머리는 두 여자의 알몸을 뇌리에서 비교하고 있었다.
서연이는 솔직히 현주처럼 잔근육이 있는 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골격 자체가 날씬하고 슬렌더한 스타일이었고, 그런 와중에 마른 몸에 비해서 넓은 골반을 지닌 덕분에 잘록한 허리에서 이어지는 풍만한 엉덩이가 아주 매력적인 스타일이었다. 바지를 입었을 때 허리에서 엉덩이, 종아리로 떨어지는 요염한 라인이 너무도 예쁜 몸이랄까.
하지만 현주는 서연이처럼 몸의 골격이 가느다란 편은 아니었기에 전체적으로 서연이에 비해서는 약간 통통한 인상을 주었다. 대신에 군데군데 붙은 그녀의 살들은 탄력없이 늘어지는 군살이 아니라 운동으로 가꾼 매끈한 잔근육들로 덮여있었기 때문에 살집이 있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볼륨이 넘친다는 느낌을 주었다.
특히나 내가 현주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줄곧 눈독을 들였던 허벅지와 종아리의 경우에는 너무도 탄력있게 잔근육이 자리잡고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꼴딱 넘어가게 만들 정도였다. 현주가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기에 그런 볼륨 있는 몸매를 지녔다보니 솔직히 땅딸막한 인상이 한층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벗겨놓고 보니 만질 곳이 너무도 많아보였다.
온 몸 군데군데에서 볼륨감이 느껴지니 손맛이 즐거워 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
더이상 이런 생각만 머릿 속에 하면서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하흣!"
오매불망 손꼽아 기대해왔던 현주의 허벅지에 마침내 손을 얹었다. 지난번에 이 곳까지 만졌다가 현주에게 거절을 당했던 실패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에, 현주를 모텔에서 덮치려다가 뺨을 맞고 비참하게 돌아왔던 기억까지도 덩달아 같이 떠올랐다.
그런 과거의 실패들을 딛고서, 비로소 현주와 이 순간까지 온 것이다.
그래, 나는 그 때보다 훨씬 진보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현주야.. 너 되게 섹시해. 몸 진짜 좋아."
"나, 나는.. 돼지 같아 보이던데..."
이상하게도 여자들의 머릿 속엔 무조건 마른 여자가 되려고 하는 욕망 같은게 있나보다. 내 눈엔 너무도 볼륨감 있고 딱 적당할 만큼 통통한, 현주가 이런 표현을 듣는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박았을 때 딱 느낌 좋을" 그런 몸인 것 같은데 현주는 그런 자신의 몸이 단순히 살집이 많은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안 그래. 사실 오빠는 사귀기 전부터 너 운동할 때 허벅지만 보면 너무 흥분 됐었어. 이렇게 보니까 너무 좋다. 그리고...."
"그, 그리고 뭐....?"
"지금은 허벅지 말고 다른 것도 보이니까... 크크크."
"벼, 변태 같은 소리 하지 말구."
그래. 맨살의 허벅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지만, 더더욱 행복하게도 지금은 그 이상의 것이 보이고 있다. 이불 아래 있었던 그녀의 몸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팬티를 벗기거나 할 필요 없이 그녀의 허벅지를 따라올라가다 자연스럽게 새까만 하초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주의 가랑이 사이에 나있는 하초들의 틈새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둔덕의 윤곽이 보이자, 내 흥분은 순식간에 배가 되었다. 자지는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굳이 현주와 섹스할 때에도 서연이와의 섹스 루트를 고스란히 따라갈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여자든지간에 전희를 즐기지 않는 경우는 없기에 나는 조금 더 참고 우선은 현주를 즐겁게 해주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뤄두고, 우선은 마침내 눈 앞에 드러난 현주의 알가슴부터 음미하기로 했다. 한쪽 유방을 부드럽게 움켜쥐자 기껏 마사지로 조금 풀어놓았던 현주의 몸이 허무하리만치 다시 뻣뻣하게 굳는다.
"현주야. 힘 좀 풀어봐. 아픈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으응.... 자, 잘 안 되네..."
어찌 되었든 나는 한쪽 유방을 부드럽게 움켜쥔 채로, 그것을 내 마음대로 뭉개고 일그러뜨리며 내 손안에서 마구 희롱해주었다. 마치 지금까지 내게 몸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더 격한 애무로 응징이라도 하듯이.
자꾸 비교해서 두 여자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현주의 젖가슴은 서연이의 그것보다 조금 더 컸다. 가슴만 놓고 보면 의외로 한국 여자의 평균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서연이였기에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만, 요 근래의 섹스들로 인해 서연이의 젖가슴에 한껏 익숙해져 있었던 내 손은 보다 더 큰 유방을 주물럭거리게 되자 무척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서연이의 흰 우유같은 피부결에 비해서 현주의 몸은 자연스럽게 약간 그을린 살짝 구릿빛 톤의 느낌을 띄고 있었기에 육체의 볼륨감을 더더욱 섹시하게 강조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만지는 흥이 났다. 비록 현주는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도 불편한 모양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거절을 하지는 않기에 나는 신이 나서 그동안 거절 당해오며 쌓였던 성욕에 대한 불만들을 모조리 해소하려는 듯 마음껏 유방을 주물러댔다.
"으흑...."
구릿빛 유방을 신나게 주물러대자 현주가 약간 아픔에 호소하는 것 같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동안 울분이 너무 쌓여서 나도 모르게 조금 감정이 실려버린걸까? 킥킥.
"오, 오빠... 부드럽게 해줘... 아픈거 싫어."
"으응. 알았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또 그동안 현주가 나를 거절해오면서 쌓였던 그 울분이 떠오를 때면 다시 감정이 실릴지도 모르겠다.
서연이하고는 전혀 다른 구릿빛에 피부톤에, 금상첨화로 서연이보다 더 풍만한 볼륨까지. 솔직히 어느 몸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힘들 만큼 두 여인의 몸에는 저마다 나름의 매력이 각각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내게 "누가 더 낫냐" 하는 문제는 정말이지 아무 짝에도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새로운 몸"을 품는다는 사실 자체로 지금 너무도 행복한 것이다. 누구의 몸이 더 아름답냐 하는 답도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서연이의 몸과는 다른 매력을 가진 현주의 몸을 안는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너무도 즐거웠다.
그것은 지극히 동물적인 즐거움이었지만, 남자의 본능이 추구할 수 있는 욕망의 솔직한 형태이기도 했다.
"아흑."
그런 즐거운 마음에 힘입어 이번에는 양손으로 현주의 유방을 꽉 움켜쥐어본다. 서연이의 그것에 비해 손바닥 안을 조금 더 가득 메우는 느낌의 그 "새로운 젖가슴"을.
"아, 아프대두..."
"그럼 입으로 해줄게."
한층 더 풍만하게 느껴지는 그 특유의 볼륨감에 취해 나도 모르게 자꾸 힘이 들어가나보다. 손으로 주무르는 것은 이쯤 해두고 이번에는 입술로 현주의 유두를 빨아보았다. 아무래도 유방의 크기 차이 때문인지 젖꼭지도 현주의 것이 서연이에 비해 조금 더 크고 넓었다. 비록 유륜의 넓이는 현주가 더 넓긴 했지만, 빛깔만은 그래도 경험의 차이 때문인지 현주 쪽이 좀 더 깨끗한 것 같았다.
"으흑...."
유두에 꽤나 본격적인 구강 애무를 가해주는데도 여전히 현주의 신음소리는 아픔에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쯤되면 그녀도 성적인 자극에 몸을 맡겨도 좋으련만.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꾸준하고 성실한 전희 앞에 느끼지 않는 여자는 없다. 심지어 서연이는 강간을 당하면서도 충분한 전희 앞에 쾌감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서연이에게 해주는 것만큼 노력을 기울이며 애무를 해주면 충분할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애무를 이어나갔다. 앞으로 서서히 현주의 긴장이 풀릴 거라 믿으며.
쩝쩝... 쪼옥... 쪼옥쪼옥....
넓은 젖꼭지에 덕지덕지 침까지 게걸스럽게 발라가며 약간은 원색적으로 느껴질 만큼 과하게 유두를 자극해주었다. 하지만 약간의 오버를 감수하고서 동물적인 애무를 가했는데도 현주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덮은채 내 혀가 그녀의 유두를 빨아당길 때마다 움찔거리며 등을 딱딱하게 세울 뿐이었다.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느끼질 않는 건가? 심지어 유두도 고개를 세울 생각을 않고, 여전히 말랑말랑거리며 내 손과 혀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뭉개질 뿐이었다. 서연이의 젖꼭지는 조금만 정성껏 애무를 해줘도 금새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면서 내 애무를 맞이하곤 했는데.
"현주야, 기분 좀 어때?"
"모.. 모르겠어... 좀 이상한 것 같아."
남자 입장에서 섹스 도중에 테크닉에 대한 평가를 여자에게 요구하는건 한심한 짓이라는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찌질해도 그 정도도 모를까. 하지만 현주의 반응이 너무도 뻣뻣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주는 이도저도 아닌 대답으로 응수했다. 그 "이상하다"는 말의 뉘앙스가 아무리 들어도 "좋다"라는 표현을 에둘러 말한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 그래? 알겠어."
심지어 이빨 끝으로 살짝 젖꼭지를 깨물어보기까지 했는데도 현주는 약간 아파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젖가슴은 그녀에게 있어 성감대가 아닌가보다. 미련을 버리고 혀를 남하시켜 서서히 배꼽을 훑고, 또 하나의 대표적인 성감대를 향해 전진해나갔다.
중간에 까슬까슬한 수풀이 혀의 움직임을 가로막았지만 나는 거기서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들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배꼽에 혀 끝으로 자극을 가해도 그녀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더이상 뭘 아껴놓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가장 좋은 성감대를 자극시켜 성적인 흥분을 끌어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오.. 오빠 잠깐..!"
하지만 혀가 가랑이 사이의 계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5장
퇴원을 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썩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다. 다만 2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라는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게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와주었고 그 와중에 나름대로 독특했던 추억들도 만들었기에 조금 시원섭섭한 기분을 느꼈을 뿐.
병원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어쩌면 애써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려 2주라는 기간을 날로 쉬었다는 사실은, 일상 생활로 복귀하고 보니 내 학업 성적에 말도 안 될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우선 수업들을 모조리 빼먹어 버렸기에 진도를 맞추기가 힘들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재수 없게도 남들에 비해 과제제출도 한박자 늦어져 버려서 여러모로 뒤쳐진 상황이 되었다.
이 와중에 나를 좀 더 씁쓸하게 만드는 사실이 있었다면 바로 타임 리와인더의 부재였다. 타임 리와인더만 정상적으로 작동해준다면 사실 걱정할게 아무 것도 없었다. 완벽한 시험 성적만으로도 2주간의 부진을 모조리 메꾸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시계는 아직까지도 정상적으로 작동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대로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되는 건가?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시계의 고장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시계를 다시 쓸 수 있게 될 거란 그 이유 모를 직감을 지울 수 없었다.
"성진 선배."
퇴원 후 첫 등교, 첫 수업이 끝나고 나자 마자 의외의 돌발 상황이 나를 맞이했다. 그렇잖아도 내 쪽에서 찾아가려 했던 지환이 새끼가 제발로 나를 먼저 찾아온 것이었다. 조금 놀랍긴 했지만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나는 놈을 인적이 없는 캠퍼스 건물의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너 내가 무슨 말 할 것 같냐?"
"......."
지환이 놈은 다짜고짜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비록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 유성이가 병원에서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손을 봐줬다는건지 내내 궁금했는데 실제로 지환이의 모습을 보게 되니 유성이가 내게 했던 표현은, 실제로 그녀가 지환이에게 해놓은 것에 비해 너무도 약소하게 생략된 표현임을 비로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너 쌍판데기가 왜 그래?"
"......."
"혹시 유성이한테 맞은 거냐?"
한 쪽 눈은 팅팅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아보이는데다 반대편 눈에는 시퍼런 피멍까지 들어있다. 게다가 터진 입술은 아직도 아물지 않았는지 딱지가 덕지덕지 앉아있었고 얼굴 군데군데 반창고가 붙어있는 것 또한 가관이었다. 이걸 정말 유성이가 한 걸까?
"유성이한테 맞은 거냐고?"
"......."
차마 자기 입으로 인정하긴 싫은지 뻣뻣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지환이였다.
세상에 맙소사. 유성이가 어떤 아인지 대략 알고 있는 나였긴 했지만 도저히 그녀가 이렇게 사람을 패놓았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다. 도대체 그 순간의 유성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죄송합니다, 선배. 다시는 선배 눈에 띄지 않을게요. 제발 신고만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렇게 빌겠습니다."
더 오래 끌어봤자 좋을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지환이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도 모르게 "진심 어린 사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럴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겠죠." 라는 유성이의 말이 떠올랐다.
나 또한 그건 마찬가지였다. 이미 지환이라는 놈의 인간성을 두 눈으로 본 내게 지금 지환이의 이런 모습은 위기를 탈출하려는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란걸 이 녀석도 알고 있는게 틀림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창피를 무릅쓰고 용서를 구한다는건 이런 막무가내식의 구걸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다는 뜻이었다.
"다시는 눈에 띄지 않겠다? 그것 뿐이냐?"
"그, 그리고 또....."
"또?"
"서, 서연이나.... 유성이에게도.... 허튼 짓 하지 않겠습니다."
이 놈도 머리통이 있으니 내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는 스스로 이미 다 알고 있을 터였다. 마치 미리 연습이라도 해온 듯이 용서를 구하는 말을 읊는 지환이였지만 그 두 눈에는 미처 다 숨기지 못한 굴욕감이 남아있음을 나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네가 인간말종이란건 이미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말이야. 나중에라도 또 개수작을 부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잖아."
"보, 보장이라면.... 유성이가 쓰게 한 각서와 증거 사진들이...."
"아 참, 그거?"
그러고 보니 유성이가 지환이 놈으로 하여금 각서를 쓰게 하고 증거 사진을 찍어놓았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도대체 그 각서와 사진이라는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대충 어떤 것일지 정도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새삼 유성이의 일처리 방식이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협박으로 흥한자 협박으로 망하는 법인가? 사실 지환이 놈이 사진을 빌미로 했던 그 협박이 결코 흥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쨌든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수법으로 이번엔 되려 위협을 받게 되었으니 그 꼴이 아주 기묘했다. 어쩌면 유성이가 굳이 그런 증거사진을 확보해 놓은건 이런 식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만약 그런거라면 상당히 잔혹한 수법이었다.
"그래도 그런게 그다지 믿음이 가진 않는데. 생각 같아선 너 그냥 철창에 처넣어버리고 싶거든."
"서, 선배."
사실 마음 편히 콩밥을 먹이고 싶지만 굳이 참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서연이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말로는 자기 신경 쓰지말고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했던 서연이였지만 예전의 남자친구라는 관계를 떠나, 한 학과의 학회장으로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서연이가 학생회의 여론으로부터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 학과 내부에서 학과생의 범죄 행각이 낱낱이 밝혀지고 그로 인한 구속 사태까지 일어나게 된다면 그녀가 받는 고충이 지금보다 몇 배로 더 늘어날 것임이 분명했다. 심지어 다른 죄목도 아니고 지환이에게 걸어야 할 죄목은 살인 미수이니까.
모르긴 몰라도 학과는 물론 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히겠지. 그랬다간 서연이는 학회장직 박탈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단순히 서연이를 위해서만의 이유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망쳐놓는 행위에 대해 나 자신이 거북함을 느끼고 있었던 이유도 컸지만 말이다.
"내가 너를 뭘 보고 믿으면 되냐? 한번 말해봐. 들어보고 결정할 테니까."
"절대 다시는 선배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학교도 휴학할 겁니다... 선배나 서연이가 졸업하기 전까진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어차피 극단적인 선택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던 나였기에 적어도 지환이 놈이 하는 말이 꾸며낸 이야기 같지는 않아보여서 일단은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비록 그 속내는 여전히 나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고 있을 테지만 지금 당장 이렇게 절박하게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더이상 이 녀석에겐 할 수 있는게 없어보였다. 협박의 빌미였던 사진조차도 없어져 버렸으니까.
"그럼 내 말 명심해."
"......."
"네 말대로 두 번 다시는 나나 서연이, 그리고 유성이에게 개수작을 부리는 일이 없어야만 할 거야. 눈에 띄지 않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앞으로 너로 인해서 우리들 중 누구 하나에게라도 불미스런 일이 생긴다면 그 땐 나도 네가 했던 방식 그대로 너를 묻어버릴 거니까 명심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 듣겠냐?"
"......."
"왜 대답이 없어?"
"아, 알겠... 습니다...."
그 순간 나를 놀려다보며 억지로 입을 열어 대답하는 지환이의 눈빛에서, 나는 녀석이 끝내 지우지 못한 나를 향한 복수심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굳이 신경 쓰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궁지에 몰렸다고 해서 인간이 쉽게 회개하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은 그저 이 구역질 나는 녀석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은 마음 뿐이었다.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좋아. 그럼 꺼져. 다시는 눈에 띄지 마."
"......"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지환이 녀석을 내버려두고 나는 등을 돌렸다.
걸어가는 내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뭐 잘한 거야.
어쩌면 이게 더 마음 편한 선택일테지.
그리고 다음날부터 지환이 놈은 더이상 학교에서 보이질 않았다.
정말 이걸로 끝인 걸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퇴원 후 3일째 학교 가던 날. 그 날은 서연이와 함께 듣는 교양 수업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서연이와 나, 유성이가 한 조가 되었던 바로 그 조별 수업이었다. 조를 구성했던 시간 이후로 나는 엠티니 입원이니 해서 한번도 수업을 들어온 적이 없었으므로 교수님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병결계를 인정은 해주셨다만은 조별 발표가 불과 몇 주 뒤로 다가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우리 슬슬 조별발표 준비해야겠네."
"네."
"네."
"......"
서연이와 유성이 둘 다 병원에서의 만남 이후 얼굴을 보는게 처음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같은 날에 와서, 게다가 둘 다 내게 어떤 썸씽을 남기고 갔다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아무래도 기분이 묘했다. 둘은 서로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양쪽 다 병원에서 헤어지기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을 겪고 헤어졌기에 나는 어쩐지 그녀들을 대하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다음 주 쯤에 우리 한번 모일까?"
"그래요."
"그래요."
"......"
무슨 클론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좀 더 원활한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단답식의 질문이 아닌 본격적인 사항들을 토의하기 시작하니 그제서야 서연이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두 여자가 나한테 뭔가 쌓인게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 어디서 과제를 하는게 좋을까?"
"컴퓨터만 있으면 아무데라도 상관 없어요. 주제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괜히 돈 들여서 피씨방 같은데 가지말고 선배네 자취방에서 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내 방에서?"
"왜요? 싫으세요?"
"아, 아니, 그런건 아닌데."
그 순간 서연이의 제안에 내가 잠시 멈칫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내 방에 두 여자를 들이게되면 왠지 모르게 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주와 마주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어쨌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분명 내가 아는 서연이라면 그녀도 그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터인데 어째서 저렇게 당연스럽게 저런 제안을 하는 건지. 혹시나 현주와 마주치더라도 단순히 조별 과제를 했을 뿐이니까 별로 문제될 건 없다는 건가?
하긴 서연이에게 현주가 서연이를 안좋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해준 적은 없지만, 그래도 눈치 빠른 서연이의 성격상 현주가 당연히 그녀를 아니꼽게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을 할 텐데...
"유성아, 넌 어때? 성진 선배 자취방에서 해도 괜찮겠지?"
"네, 전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그런데...."
유성이가 말꼬리를 흐리며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성진 선배 자취생이었어요?"
"으응. 왜?"
"그랬군요. 전 몰랐네요."
왠지 유성이의 그 말에서 평소의 담담함을 넘어서는 기묘한 냉랭함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내가 자취생이라는걸 유성이에게 진작 말해주지 않은게 그녀로 하여금 어떤 서운함을 느끼게 한걸까?
에이, 설마 다른 여자도 아니고 유성이가 그런걸로 삐칠 것 같지는 않은데....
아, 모르겠다. 오늘따라 두 여자의 태도가 왜 이렇게 찝찝하지?
아니면 단순히 내가 과민반응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발표자료를 준비하기전에 교수님이 지정해준 박물관 견학을 가야하니까 주말 쯤에 우리끼리 시간 한번 맞춰보도록 해요."
조별 과제를 준비하기 전에 교수님이 지정해준 박물관에 가서 해당 파트에 대한 자료 조사를 직접 해야만 하는게 이번 과제의 난관 중 하나였다. 인터넷이나 참고 문헌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닌데다가 PPT에 박물관 체험에 대한 인증자료를 첨부해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한번은 박물관 견학을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문득 서연이와 나, 유성이 셋이서 박물관 견학을 가는 모습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았다.
이거 왠지 벌써부터 분위기가 미묘해 지는 것 같은데.... 이것도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모르긴 몰라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견학"과는 다소 다른 경험이 될 거라는 예감이 마구 들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너희도 조심해서 들어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퇴원 후 모처럼 만난 서연이와 유성이랑 시간을 좀 더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현주가 자취방에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퇴원 당일 기념파티를 해주겠다며 약속한 그녀였지만 어쩌다보니 오늘로 밀려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굳이 여자친구와의 약속이 있다고 두 여자에게 말하기 싫었던 것을 보면 나도 참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어쩐지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여자의 시선을 애써 못본 척 하며 강의실을 급히 나섰다.
*
"짜잔!"
현주는 나름대로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자취방에 도착하니 이미 현주가 이것저것 요리를 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한가득 느껴져왔다. 요리에 대해 초짜배기인 내가 봐도 족히 몇 시간은 정성들여 준비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혀, 현주야. 너 언제....?"
"사실은 낮에부터 와있었어. 나 요새 졸업하고나서 백조잖아. 히히."
머리를 마치 사과처럼 올려묶은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현주의 모습을 보니 마치 우리가 정말로 신혼부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요새 여러모로 지은 죄가 많았지만 그 죄책감을 잠시 잊을 정도로 여자친구의 모습이 귀여웠다. 퇴근 후 집에 들어왔을 때 맛있는 저녁을 차려놓고 날 기다리는 아내를 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왔어?"
"비밀번호 기억해뒀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몹쓸 놈이었다. 현주가 나를 즐겁게 해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고작 이 순간 현주가 내 방의 비밀번호를 알았다고 해서 쓸 데 없는 걱정부터 하게 되는 내가 싫었다.
걱정할건 걱정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은 현주 앞에서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말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미묘한 그 어떤 무언가가 내 표정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현주는 애교 있게 웃다가도 갑자기 날 올려다보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빠~ 혹시 화났어? 내가 마음대로 들어와서?"
"으응? 아, 아니. 아니야. 그냥 창피해서 그러지. 방도 더러웠을텐데."
그러고 보니 현주가 청소며, 빨래까지 다 해놓았는지 방바닥은 털쪼가리 하나 없이 반질반질했고 빨래통은 이미 비어있었다. 요리도 모자라 집안일까지 해놓으려면 얼마 만큼 신경을 썼어야 했을지 심히 짐작이 되었기에 괜히 현주의 얼굴을 마주보는게 더욱 부끄러워졌다.
"치. 우리 사이에 뭘 그런걸 부끄러워하고 그러냐. 난 이제 오빠 팬티도 손빨래 할 수 있는데, 뭐."
"그래, 나 지금 너 보니까 완전 내 색시같다."
듣기 좋은 칭찬이었는지 현주가 배시시 웃었다. 그 행복한 웃음을 보면서 나는 애써 머릿 속에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지웠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인지라 머릿 속으로는 자꾸만 서연이와 함께 있을 때 현주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온다던지 하는 최악의 사태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억지로라도 잠깐 그런 생각을 잊기로 했다.
"힛. 나 시집가도 잘할 것 같지 않아?"
"응. 그런데 누구한테 시집 가려고?"
"글쎄~~"
내가 뻔한 대답을 괜스레 묻는다고 생각한 건지 현주가 능청을 피웠다. 문득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현주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역시나 기분이 나쁘다. 나를 좋아하는 현주가 웨딩드레스 입고 다른 남자 품에 달려가 안기는 모습을 상상한다는게 무척 배알이 튀틀렸다.
과연 소유욕은 사랑에서 파생되는 감정일까? 아니면 그저 내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한 남자로서의 욕망일 뿐인가?
"뭐야."
내가 그녀의 능청에 호응해주지 않자 현주는 되려 기분이 나빠진 듯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럴 땐 오빠가 번쩍 안아들면서 "당연히 나한테 시집와야지" 뭐 이런 말 해줘야 하는거 아니야? 무드 없게."
"아아, 미안."
나는 뒤늦게 현주의 허리를 껴안고 천장까지 번쩍 안아들어올렸지만, 현주는 이미 삐친 듯한 표정이었다.
"흥. 늦었다 뭐. 오빠 예전엔 내가 말 안해도 내 속마음 다 알아주더니, 요샌 무신경한 것 같아."
"응? 그, 그런거 아냐."
"쳇~ 변했다 변했어."
나왔다. 남자들이 가장 대처하기 힘든 여자들의 멘트 TOP 10안에 들어간다는 바로 그 한마디.
변했어.
비록 현주는 진심이 아닌 장난으로 서운함을 표하기 위해 한 말이겠지만, 괜시리 지금의 내가 그 현주의 한마디에 움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주가 말하는 그 "변했다"는 의미가, 내게 있어서는 타임 리와인더를 잃게 된 현실을 고스란히 지적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인식은 실제로도 어느 정도 타당한 생각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내가 예전에 그녀의 마음과 행동을 모두 읽고 한발 앞서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95퍼센트 정도가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이 있었기에 발휘할 수 있었던 기지였으니까.
물론 우리의 연애가 길게 이어지면서 내가 차츰 자신감을 얻고, 현주를 대함에 있어 "적응"이란 것을 하면서부터 굳이 타임 리와인더를 쓰는 경우는 점점 줄어갔던 것은 사실이다. 수명을 깎아가면서 그것을 남용할 필요까지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타임 리와인더가 있는 상태에서 그것의 사용을 일부러 자제하는 것과, 타임 리와인더를 전혀 쓸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사용을 안하는 것은 같아도 그 둘 사이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를 남겨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는 우선 "자신감"의 부재에서부터 드러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현주의 "변했다"는 말이 내게는 왠지, 그 시계를 잃은 너는 예전만큼 좋은 남자친구가 될 수 없을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해서 나는 스스로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남들 보기엔 정말로 한심한 이야기였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여자친구에게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나 혼자만의 고충이기도 했다.
"그런거 아닌데...."
장난으로 한 말에 내가 의기소침해지자, 이번엔 또 현주가 살짝 눈치를 보는 판국이 되었다.
평소와 다른 내 모습이 그녀 입장에서는 이상해 보이나 보다.
"에이, 또 왜 그래. 오빠답지 않게. 장난으로 한 말인거 몰라?"
"으응. 알지."
"치. 오빠 오늘 이상하다. 배고파서 그래? 얼른 씻고 나와서 밥 먹자."
"응."
내가 변한 이유. 따지고 보면 내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 하나를 잃은 것 뿐이었다.
그 무언가가 나라는 인간의 수준까지 바뀌게 할 만큼 대단한 거였나....? 정말 한심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타임 리와인더에 의존하지 않고도 나는 좋은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현주를 두고서 이미 두 여자에게나 마음을 열어버렸다.
그 시점에서 이미 나는 좋은 남자친구는 아니었다.
그런 생각들이 난잡하게 뒤섞여 나를 혼란케 했다.
결국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현주에게 있어 좋은 남자가 되기엔 부족하다는 걸까?
"맛있다."
현주가 해놓은 음식들을 먹으며 나는 애써 그런 생각들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는 나 혼자 쓰려고 사놓은 그 조그만한 밥상 위에, 족히 다섯 사람은 먹어도 될 만큼의 푸짐한 음식들이 올라와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 음식들 하나하나가 현주에게 한번씩 얘기했던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로만 이루어져 있는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마치 한 자리에 다 모여있는 느낌이었다. 닭도리탕, 파스타, 동그랑땡, 너비아니, 볶음밥, 칠리새우 등등...
어느 것 하나 직접 손으로 조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분명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것 하나하나를 머릿 속에 기억해뒀다가 단단히 준비해서 오늘 이렇게 내게 요리를 해준 것일게다. 이렇게 좋은 여자친구를 두고 나는 왜 한 명으로 만족을 못해서 다른 여자와 난잡한 관계를 만드는 걸까?
"진짜? 맛있어?"
"응. 진짜 맛있어."
"다행이다. 이것저것 한다고 간 조절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표정을 숨기려는 내 노력이 효과를 보는지 현주의 얼굴에도 웃음이 돌아왔다. 음식은 너무나 맛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내 마음은 더욱 시큰거렸다.
*
"오빠, 아까 괜한 말 해서 미안해."
푸짐하기 그지없는 저녁밥을 먹고 나서, 현주와 TV를 보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다가 배가 좀 꺼지고 나자 우리는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물론 나와 현주 사이에 여전히 스킨십의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옆에 나란히 눕는 것 정도는 현주도 싫지 않은 듯 했다.
"뭐가?"
"변했다니 뭐니 그런 말 한거. 남자들은 그런 말 싫어한다던데."
"하하, 장난이었다면서 뭐가 미안해."
내가 어쩔 수 없는 사내놈임을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실감한다. 현주에 대한 죄의식과 찝찝한 마음이 난잡하게 속에서 뒤엉키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현주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이 되자 내 몸은 성욕을 갈구하고 있었다.
섹스로 넘어갈 듯 말 듯한 그 특유의 아슬아슬한 감각을 좇아 반응하기 시작하는 내 육체가 한심했고, 또 그런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내 이성도 마찬가지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어, 내 스스로 먼저 현주에게 섹스어필을 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용케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사실은... 나 요 근래 들어 그런 생각을 하긴 했거든. 오빠가 연애 초반하고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난 혼자 있을 때 계속 그 생각을 했었어."
"그... 랬어?"
혼자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는 현주의 말을 듣고 "하긴 그럴 수도 있었겠다."라고 당연히 납득하게 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와의 연애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 타임 리와인더를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현주는 나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연애에 익숙한 남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그런 실수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익숙해졌기 때문에 더이상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빠진 것이다. 굳이 번거로울만큼 완벽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현주는 내게 웃어주었기에.
물론 내게는 타임 리와인더를 매번 써가면서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 할 순 없다는 정당한 합리화가 있긴 했다. 어찌 되었든 이것은 수명을 깎아먹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고 말고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러한 나의 태도가 현주로 하여금 변했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면, 아무래도 나로서는 할 말이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우리를 연결시켜준 것이 바로 이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늘 그녀의 마음을 읽어주고, 그녀의 행동을 예측해주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한발 앞서 이루어주었던 완벽한 남자친구의 모습을 나의 원래 모습으로 알고 있는 현주로서는, 이런 나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현주가 알고 있는 그 "원래 나의 모습"이야말로 알고 보면 내가 처절하게 꾸며낸 모습에 지나지 않는데.
게다가 이제, 만약 타임 리와인더가 여기서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녀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그녀는 평생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현주는 여전히 날 사랑해줄까?
"괜찮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다시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면 돼."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예전과 비해, 혹시라도 그것의 능력이 필요한 순간이 오더라도 내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는 대처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지금은, 아까도 말했듯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씁쓸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없더라도 여전히 현주가 나를 사랑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사실 좀 섭섭하기도 했어. 오빠가 이제 처음만큼 나를 좋아하진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해보니까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았어. 오빠가 변했건 안 변했건, 평소에 오빠가 내게 기울이는 노력을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한테 다 맞춰주는거 오빠한테도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현주야..."
현주는 좋은 여자친구였다. 난 그걸 알 수 있다. 나조차도 내가 변했다는 사실에 대해 마음 속으로부터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현주는 지금 나의 입장을 이해하고 오히려 그녀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내 노력의 근원에 대해 알건 모르건 간에, 그녀에게서는 나를 향한 배려가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반성해봤어. 생각해보면 오빠는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받기만 하고 오빠한테 별로 해준게 없는 것 같아. 어쩌면 내가 오빠를 질리게 만든건 아닐까, 이렇게 투정 부리는 생각만 하면서 정작 아무 것도 노력을 안하니까 오빠가 나를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는 거야... 그런 생각을 했었어."
"무슨 소리야.... 그런거 아니야. 너 정말 좋은 여자친구인걸. 진심이야."
그래. 진심이다. 현주는 정말 좋은 여자친구다.
하지만 나는 그리 좋은 남자친구가 아닌 것 같다. 현주의 진심어린 마음을 이렇게나 느끼면서도 다른 여자와 몸을 섞고 있으니까. 단지 그녀가 내 육체적인 욕망의 부분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그런 얄팍한 이유를 들어서.
"그래도 여자 입장에선 그런 생각이 드는걸... 그래서 계속 생각했어. 오빠가 나에 대해 질린 부분이 있다면 나도 거기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하니까. 내 어떤 부분이 오빠를 변하게 했는지... 뭐 그런거..."
"......."
"그렇게 계속 고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라. 어쩌면 내가 오빠에게 그...."
현주는 말하다 말고 부끄러운지 내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해서 표정을 내게 보이지 않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현주의 머리 위에 슬며시 손을 올려주었다.
"그... 잠자리... 를 허락해주지 않은게.... 이유가 아닐까 하는...."
"아, 아니야!"
나는 현주가 혼자 생각하고 내렸다는 결론이 무척 뜻밖의 내용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현주는, 자신이 내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 결국 내가 변하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걸까?
"사실은 친구들한테 많이 물어보고 상담도 해봤어. 남자친구에게 성관계를 허락하지 않는게 남자 입장에서 많이 힘든 일인지...."
현주가 내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 물론 내게 있어서는 더없이 힘든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주에 대한 마음을 변하게 할 만큼 치명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 때문에 물론 서연이와 그런 관계까지 치달아버리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현주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일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주가 혼자 생각하고 내렸다는 그 고민의 결론은 사실 정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귀결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 법이기 때문에, 그녀가 그 부분에 대해서 그렇게나 고민을 했다면 그 결과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찌 되었든 현주와 평생 섹스를 하지 않고 사귈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 그래서 친구들은... 뭐랬어?"
현주의 생각이 정답이 아닌 것은 아닌 거지만, 그래도 역시 궁금함을 억누를 순 없었다. 현주의 마음을 위로해주는건 우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냥... 사람마다 다 다른거래. 나처럼 오래 관계를 가지지 않고 잘 사귀는 커플들도 있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되어 충분히 헤어질 이유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그래도 역시 요즘 같은 시대에 육체적인 부분 없이 정신적으로만 연애하는건 좀 힘들지 않겠냐고 말해준 친구들이 조금 더 많았고....."
나는 참 어쩔 수 없는 놈인가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녀의 친구들이 나에 대해 유리한 쪽으로 조언을 해줬다는 사실 하나에 마음이 들뜨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쩌면 남자라는 동물은 이다지도 단순한 걸까?
"그랬어....?"
"응. 그리고 언니도.... 권태기를 극복하는 데엔 스킨십만한게 없다며.... 나, 나는 언니의 성관념에 딱히 동의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게다가 우리가 절대 권태기라고도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뭐 어쨌든...."
현아 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현아 씨가 나와 현주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해 그런 조언을 해주었다면, 그건 병원에서의 일이 있었기 이전일까, 이후일까?
"내,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우리한테 그게... 조, 좋은 방법일 것 같긴 해."
"혀, 현주야."
나는 현주의 말 뜻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에 그 순간 너무도 놀라 현주를 내려다보았다. 내 가슴팍에 묻은 현주는 여전히 얼굴을 내게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끝까지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싶은 것처럼.
그러나 내가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 계속 내려다보고 있자, 그녀는 결국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긴장과 떨림으로 기묘하게 굳어진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여전히 그녀는 어딘가 두려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이윽고 눈동자에 확연한 의지를 담아 내게 말했다. 비록 조금은 떨리지만 충분히 내게 들릴 만큼 뚜렷한 목소리로.
"그, 그래서 오늘은... 나 마음의 준비 하고 온 거야."
*
현주가 샤워를 한다. 내 자취방 좁은 화장실에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샤워기의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상황이 정말 현실이긴 한건지 다시 한번 내 스스로 감각을 되짚어 보았다. 오늘 정말 현주와 넘지 못했던 섹스의 벽을 넘게 되는 걸까...? 정말로? 이렇게 갑자기?
그동안 나는 현주의 바람에 따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잘 참아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에게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어쨌든 현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만약 현주가 내가 모르는 사이 혼자서 그런 고뇌의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내게 몸을 허락하기로 마음 먹은 거라면 솔직히 내 입장에서 이보다 더 바람직한 전개는 없었다.
물론 그녀가 내 애매한 태도로 인해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역시 속물적인 놈이다. 비록 그녀가 내 마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오해를 했다고 한들, 그녀 스스로 그렇게 내린 결론을 내 쪽에서 반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이런 섹스리스(sexless) 를 감수하면서까지 연애를 이어나갈 수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관계를 이어나가다보면 언젠간 정말로 현주가 말한 것처럼 내가 지치게 되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합리화를 시켰다. 그것은 비록 얄팍한 합리화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나와 현주에게 진전의 기회가 온 이상 나는 그것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 후에 현주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면 된다.
다정하게 섹스를 즐기고 나서 서로 기분 좋게 나른한 행복에 잠겨 있을 때,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천천히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어쩌면 훨씬 더 좋을 지도 모르지. 육체가 닿아있으면 마음도 그만큼 잘 통하는 법이니까.
"오빠..."
끼익, 하고 화장실 문이 열렸다. 내 자취방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렇게나 긴장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침을 꼴딱 삼키고 있는데 현주가 알몸에 타월 하나만 두른 차림으로 쭈뻣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으, 응. 다 씻었어?"
"으응. 근데 지금은 보지마. 부끄럽잖아."
섹스를 하려는 남녀가 어떻게 서로 알몸을 안 볼 수가 있니?
하지만 굳이 개의치 않고 그녀의 요구대로 시선을 슬쩍 돌려주었다. 어차피 좀 있으면 마음껏 보게 될 텐데.
나는 현주보다 한발 앞서 샤워를 끝냈기에 지금은 사각 팬티 한 장만 입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 한 장의 사각 팬티도 앞으로 다가올 이벤트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미 불룩하게 텐트를 세운지 오래였고.
"나 드, 들어갈게."
"으응."
현주는 확실히 섹스라는 것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익숙치 않아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거리낌 없이 누워있었던 침대에 지금은 들어오겠다고 허락을 구한다.
그런 현주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휩쓸린 나는, 이상하게 나조차도 동정 딱지 떼는 숫총각의 기분으로 돌아간 것 같아 아주 기묘한 의미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한게 있었다.
현주는 처녀일까?
물론 나는 여성의 순결이라던가 하는 부분에 대해 크게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적당한 경험을 갖춘 여성이야말로 섹스에서든 연애에서든 보다 능숙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의 "과거"는 오히려 남자에게도 플러스요인이 될 수 있었다. 너무 함부로 여기저기에 몸을 굴리고 다닌 경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현주의 순결을 의심하는 차원에서의 궁금증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에서 그녀가 과연 처녀일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았다. 만약 현주가 처녀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이해할 수 있으니까.
"현주야, 너 혹시...."
"으, 으응!?"
"......."
하지만 내가 현주의 어깨에 손을 슥 얹자마자 불에 덴 듯 화들짝 기겁하는 현주를 보고 나는 물으려던 것을 멈추었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걸까? 아무리 처녀라고 해도 보통 자기가 하자고 허락을 해놓고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나?
"왜 그래~ 편하게 있어."
"으응. 미안해... 놀라서..."
어찌 되었건 여자친구가 섹스 전에 긴장을 한다면 풀어주는 것도 남자의 의무이다.
우선은 다른 잡다한 생각은 다 치우고 현주와 어떻게 즐거운 섹스를 풀어나갈지에 대해서만 집중하자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우선 좀 안고 있자."
"으응..."
이런 모습의 현주를 본다는건 정말 뜻밖이었다.
언제나 쾌활하고 명랑한 웃음과 함께 애교 넘치는 모습만 보여주던 현주였는데 이렇게 병아리처럼 잔뜩 움츠러 들어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귀엽기도 했지만 글쎄, 너무 지나치게 긴장을 하니까 오히려 안쓰럽달까....
"현주야. 우린 지금 절대 권태기 같은게 아냐. 나 너에 대한 마음 조금도 변한거 없어. 네가 그거 알아줬으면 해."
"으응...."
우선 대화를 통해 긴장을 녹여보자는 셈으로 섹스 후에 꺼내려고 했던 얘기를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앞당겨 꺼냈다. 현주의 몸에는 여전히 가슴과 아랫도리까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타월 한장이 둘러져 있었지만, 등이나 어깨 부분은 현주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기에 나는 그 묘한 섹시함에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니 미안해. 앞으로 네가 그런 생각 하는 일 없게 내가 더 잘할게. 그리고 아마.... 내 생각이지만 오늘 우리 이렇게 잠자리 갖고 나면 아마 앞으로 서로 더 좋아질거야."
"그, 그럴까... 남자들은 여자랑 자고 나면 갑자기 확 식는 경우도 있다던데...."
"아냐... 그건 애초에 섹스하려고 만난 관계일 때나 그렇지. 우린 지금까지 잘 참았잖아. 오늘 우리가 관계를 가지게 된다면 분명 우리에게 좋은 기억이 될 일이지 절대로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을거야."
"진짜지? 오빠 그 말 믿을게... 나 근데 왠지 안심이 안 된다...."
혹시 현주는 여지껏 남자가 여자랑 섹스를 하고 나면 애정이 식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그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에 나와의 잠자리를 기피해왔던 걸까? 현주의 조심스런 태도를 보건대 분명 무슨 이유가 있긴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걸 대놓고 물어보기에는 이 적절한 타이밍에서 굳이 분위기를 흐리는 선택이 될 것 같았다.
"오빠 말 믿어. 절대 식거나 그러지 않을 거야."
"으응.. 믿을게. 나, 나는 잘 못하니까 오빠가 알아서 잘 이끌어줘."
아무렴 여자친구가 성경험이 별로 없다는데 그 사실 때문에 굳이 기분 나쁠 이유는 또 없었다.
나는 현주를 안심시키듯, 그녀의 맨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우선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키스 정도는 자기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듯, 용기를 내어 내 입술을 받아 무는 현주.
그 모습이 귀여웠다.
쪽쪽...
현주와 매번 나누었던 특유의 그 고요하고 잔잔한 키스의 소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익숙한 소리가 조금은 다르게 들린다. 언제나 여기서 끊어야 했던 우리였지만 오늘은 이 뒤의 일이 남아있으니까. 그것도 아주 많이.
"흐음..."
코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나와 현주의 코를 간지럽혔다. 서로의 입술이 부벼지면서 점점 혀도 얽히기 시작했고, 곧 타액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키스의 농도가 올라갈수록 나의 손은 현주의 등을 보다 넓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안쪽에서 바깥으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현주의 등을 마사지하는 내 손은 멈추지 않았고 현주는 그녀의 맨살에 내 손이 닿을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거렸지만 용케도 그것을 거부하거나 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마침내 비교적 깊숙한 옆구리 부근까지 가서 닿자, 현주가 또 한차례 크게 움찔거렸다.
"괜찮아. 놀라지 마."
"으응... 미, 미안해 오빠... 내가 자꾸 겁먹고 그래서..."
"아니야. 내가 다 풀어줄게."
그녀가 섹스를 이렇게 두려워하는 이유가 뭐가 됐든지 간에, 오늘 어떻게든 그녀를 만족시켜 앞으로 그녀가 섹스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고야 말리라, 하는 것이 나의 오늘 목표였다.
현주는 내가 처음으로 "이상형과 사귀었다"는 가슴 벅찬 만족감을 내게 안겨주었던 특별한 여자다. 그러니 그녀와의 섹스도 당연히 특별해야만 했다. 적어도 내 자지는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처음 봤을 때 부터 줄곧 호감을 가져왔던 현주의 몸을 드디어 안게 된다는 사실에 내 사타구니 사이에서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서연이의 몸을 품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아찔한 흥분이었다. 비록 어느 쪽이 더 흥분되는지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가 없지만, 적어도 두 사람의 육체가 주는 의미와 느낌이 내게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으니 그저 가슴 벅찬 기대감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현주야, 이거 벗길게."
"으응? 자.. 잠시..."
현주가 머뭇거렸지만 나는 일부러 못 들은척 하며 현주의 몸을 유일하게 가려주던 아슬아슬한 타월 한 장을 벗겨내고 말았다. 이 타이밍에서 더 머뭇거렸다간 진도를 빼는데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오.. 오빠.. 불 끄면 안 될까..?"
"왜? 나는 우리 예쁜 현주 몸 보고 싶은데. 그냥 하면 안 돼?"
"껐으면 좋겠는데... 꺄악!"
현주가 칭얼거리다 말고 뾰족한 소리를 냈다. 타월을 벗겨낸 내가 노골적으로 그녀의 알몸을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요란한 그 반응에 비록 나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손의 움직임을 멈추진 않았다. 어차피 현주의 반응으로 봐서 앞으로 내가 뭘 하든 그녀는 이렇게 움찔움찔 놀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럴 바엔 그냥 현주의 반응에 신경을 끄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꿋꿋하게 리드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강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현주도 동의해서 하는 거니까 기왕 할거라면 내가 주도력 있게 나가주는 편이 현주로서도 더 좋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현주가 놀라든 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섹스를 이끌어 나간다.
"오, 오빠아...."
현주의 울음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를 못 들은척 받아넘기며, 꿈에 그려왔던 현주의 감격스런 알몸을 여기저기 탐험해 나간다. 맛있는건 가장 마지막에 남겨두겠다는 심보로 우선은 그나마 바깥 쪽인 아랫배부터 시작해서 옆구리와 등허리를 더듬어본다. 맨들맨들한 속살의 감촉이 너무도 보드랍고 기분 좋다.
현주는 꾸준히 헬스장을 다닌 여자답게, 몸매가 너무도 좋았다. 현아 씨의 미끈하고 쭉 뻗은 매혹적인 몸매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매력이었지만 아담하고 귀여운 몸 답지 않게 온 몸에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자리 잡은 잔근육들의 흔적이 엿보였다. 여성적인 미를 망칠 정도의 근육이 아닌, 건강미가 물씬 느껴지는 아름다운 근육이었다.
배와 허리, 등을 잠깐 더듬었을 뿐인데도 속살 안쪽으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복근과 등근육이 느껴졌다. 물론 현주가 너무 긴장해서 내가 터치하는 부위마다 힘을 잔뜩 주게 되어 더욱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이렇게 세밀한 근육이 은근히 느껴지는 여성의 몸은, 그 나름대로 엄청난 흥분을 남자에게 가져다 주는 법이다.
"현주야. 네 살결 완전 탄력있다.. 느낌 너무 좋아."
"모, 몰라아..."
현주는 거의 흐느낄 것 같은 기세였다. 애써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일단은 신경 끄기로 하고 만지고 싶은 부분을 더 깊숙히 더듬어보았다. 등근육의 줄기들을 따라 척추를 훑고 올라가니 날개뼈 부근에서도 오밀조밀하게 가꾸어진 건강한 근육들이 만져졌다. 그 느낌이 무척 흥분된다.
"오, 오빠!"
현주의 알몸 전체를 감상하고 싶다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마지막으로 지켜주던 이불을 확 들추고 말았다. 최후의 보루가 순식간에 걷혀져나가자 현주는 기겁을 하며 그 순간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몸을 보이는게 부끄럽다면 몸을 가려야지 왜 애꿎은 얼굴을 가릴까? 귀엽기는.
"현주야, 혹시 우는거 아니지...?"
"그, 그런거 아니야... 그냥.... 오빠 눈 도저히 못 보겠다... 나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
이런 말을 하면 좀 짐승같이 보이겠지만 솔직히 지금 현주의 얼굴에 볼일이 있는건 아니었으니 나로서는 사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양손으로 그렇게 얼굴을 덮고 있으면 더 자세히 군데군데를 볼 수 있으니까 더 좋긴 하지. 크크.
그럼 드디어 오매불망 꿈속에서나 그려왔던 우리 현주의 알몸을 한번 감상해보실까?
"현주야... 몸매 죽인다, 진짜."
"그, 그런 말 하지마."
솔직한 감상이 머릿 속에서 맴돌다가,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렸다. 내가 그동안 현주의 이 알몸을 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애를 쓰고 노심초사 해왔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성스러운 몸을 보기 까지는 왠지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이불을 들추는 딱 한 동작 만에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간 베일에 쌓여있었던 현주의 알몸을 영접하기까지의 과정이 그 짧은 한 동작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지독할 만큼 허무함이 샘솟아 오르기도 했지만, 그 허무감에 빠져 있을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저 눈으로 보고, 느끼고, 뇌에 새겨넣는 반복 작업만으로 내 온 신경을 쏟아야 할 판이었으니.
솔직히 현주의 몸이 자기 언니의 몸처럼 길쭉길쭉하게 빠진 쭉빵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내가 현아 씨의 알몸까지 본 적은 없다만 눈대중으로도 그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흔히들 일컫는, 약간 "육덕진" 스타일을 선호하는 남자들에게 있어 현주의 몸매는 가히 환상적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굳이 이 순간에 서연이의 몸과 현주의 몸을 비교하는 것이 두 여자 모두에게 예의가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따지고보면 최근에 섹스를 했던 상대가 서연이 밖에 없었기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내 머리는 두 여자의 알몸을 뇌리에서 비교하고 있었다.
서연이는 솔직히 현주처럼 잔근육이 있는 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골격 자체가 날씬하고 슬렌더한 스타일이었고, 그런 와중에 마른 몸에 비해서 넓은 골반을 지닌 덕분에 잘록한 허리에서 이어지는 풍만한 엉덩이가 아주 매력적인 스타일이었다. 바지를 입었을 때 허리에서 엉덩이, 종아리로 떨어지는 요염한 라인이 너무도 예쁜 몸이랄까.
하지만 현주는 서연이처럼 몸의 골격이 가느다란 편은 아니었기에 전체적으로 서연이에 비해서는 약간 통통한 인상을 주었다. 대신에 군데군데 붙은 그녀의 살들은 탄력없이 늘어지는 군살이 아니라 운동으로 가꾼 매끈한 잔근육들로 덮여있었기 때문에 살집이 있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볼륨이 넘친다는 느낌을 주었다.
특히나 내가 현주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줄곧 눈독을 들였던 허벅지와 종아리의 경우에는 너무도 탄력있게 잔근육이 자리잡고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꼴딱 넘어가게 만들 정도였다. 현주가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기에 그런 볼륨 있는 몸매를 지녔다보니 솔직히 땅딸막한 인상이 한층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벗겨놓고 보니 만질 곳이 너무도 많아보였다.
온 몸 군데군데에서 볼륨감이 느껴지니 손맛이 즐거워 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
더이상 이런 생각만 머릿 속에 하면서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하흣!"
오매불망 손꼽아 기대해왔던 현주의 허벅지에 마침내 손을 얹었다. 지난번에 이 곳까지 만졌다가 현주에게 거절을 당했던 실패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에, 현주를 모텔에서 덮치려다가 뺨을 맞고 비참하게 돌아왔던 기억까지도 덩달아 같이 떠올랐다.
그런 과거의 실패들을 딛고서, 비로소 현주와 이 순간까지 온 것이다.
그래, 나는 그 때보다 훨씬 진보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현주야.. 너 되게 섹시해. 몸 진짜 좋아."
"나, 나는.. 돼지 같아 보이던데..."
이상하게도 여자들의 머릿 속엔 무조건 마른 여자가 되려고 하는 욕망 같은게 있나보다. 내 눈엔 너무도 볼륨감 있고 딱 적당할 만큼 통통한, 현주가 이런 표현을 듣는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박았을 때 딱 느낌 좋을" 그런 몸인 것 같은데 현주는 그런 자신의 몸이 단순히 살집이 많은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안 그래. 사실 오빠는 사귀기 전부터 너 운동할 때 허벅지만 보면 너무 흥분 됐었어. 이렇게 보니까 너무 좋다. 그리고...."
"그, 그리고 뭐....?"
"지금은 허벅지 말고 다른 것도 보이니까... 크크크."
"벼, 변태 같은 소리 하지 말구."
그래. 맨살의 허벅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지만, 더더욱 행복하게도 지금은 그 이상의 것이 보이고 있다. 이불 아래 있었던 그녀의 몸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팬티를 벗기거나 할 필요 없이 그녀의 허벅지를 따라올라가다 자연스럽게 새까만 하초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주의 가랑이 사이에 나있는 하초들의 틈새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둔덕의 윤곽이 보이자, 내 흥분은 순식간에 배가 되었다. 자지는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굳이 현주와 섹스할 때에도 서연이와의 섹스 루트를 고스란히 따라갈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여자든지간에 전희를 즐기지 않는 경우는 없기에 나는 조금 더 참고 우선은 현주를 즐겁게 해주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뤄두고, 우선은 마침내 눈 앞에 드러난 현주의 알가슴부터 음미하기로 했다. 한쪽 유방을 부드럽게 움켜쥐자 기껏 마사지로 조금 풀어놓았던 현주의 몸이 허무하리만치 다시 뻣뻣하게 굳는다.
"현주야. 힘 좀 풀어봐. 아픈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으응.... 자, 잘 안 되네..."
어찌 되었든 나는 한쪽 유방을 부드럽게 움켜쥔 채로, 그것을 내 마음대로 뭉개고 일그러뜨리며 내 손안에서 마구 희롱해주었다. 마치 지금까지 내게 몸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더 격한 애무로 응징이라도 하듯이.
자꾸 비교해서 두 여자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현주의 젖가슴은 서연이의 그것보다 조금 더 컸다. 가슴만 놓고 보면 의외로 한국 여자의 평균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서연이였기에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만, 요 근래의 섹스들로 인해 서연이의 젖가슴에 한껏 익숙해져 있었던 내 손은 보다 더 큰 유방을 주물럭거리게 되자 무척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서연이의 흰 우유같은 피부결에 비해서 현주의 몸은 자연스럽게 약간 그을린 살짝 구릿빛 톤의 느낌을 띄고 있었기에 육체의 볼륨감을 더더욱 섹시하게 강조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만지는 흥이 났다. 비록 현주는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도 불편한 모양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거절을 하지는 않기에 나는 신이 나서 그동안 거절 당해오며 쌓였던 성욕에 대한 불만들을 모조리 해소하려는 듯 마음껏 유방을 주물러댔다.
"으흑...."
구릿빛 유방을 신나게 주물러대자 현주가 약간 아픔에 호소하는 것 같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동안 울분이 너무 쌓여서 나도 모르게 조금 감정이 실려버린걸까? 킥킥.
"오, 오빠... 부드럽게 해줘... 아픈거 싫어."
"으응. 알았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또 그동안 현주가 나를 거절해오면서 쌓였던 그 울분이 떠오를 때면 다시 감정이 실릴지도 모르겠다.
서연이하고는 전혀 다른 구릿빛에 피부톤에, 금상첨화로 서연이보다 더 풍만한 볼륨까지. 솔직히 어느 몸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힘들 만큼 두 여인의 몸에는 저마다 나름의 매력이 각각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내게 "누가 더 낫냐" 하는 문제는 정말이지 아무 짝에도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새로운 몸"을 품는다는 사실 자체로 지금 너무도 행복한 것이다. 누구의 몸이 더 아름답냐 하는 답도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서연이의 몸과는 다른 매력을 가진 현주의 몸을 안는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너무도 즐거웠다.
그것은 지극히 동물적인 즐거움이었지만, 남자의 본능이 추구할 수 있는 욕망의 솔직한 형태이기도 했다.
"아흑."
그런 즐거운 마음에 힘입어 이번에는 양손으로 현주의 유방을 꽉 움켜쥐어본다. 서연이의 그것에 비해 손바닥 안을 조금 더 가득 메우는 느낌의 그 "새로운 젖가슴"을.
"아, 아프대두..."
"그럼 입으로 해줄게."
한층 더 풍만하게 느껴지는 그 특유의 볼륨감에 취해 나도 모르게 자꾸 힘이 들어가나보다. 손으로 주무르는 것은 이쯤 해두고 이번에는 입술로 현주의 유두를 빨아보았다. 아무래도 유방의 크기 차이 때문인지 젖꼭지도 현주의 것이 서연이에 비해 조금 더 크고 넓었다. 비록 유륜의 넓이는 현주가 더 넓긴 했지만, 빛깔만은 그래도 경험의 차이 때문인지 현주 쪽이 좀 더 깨끗한 것 같았다.
"으흑...."
유두에 꽤나 본격적인 구강 애무를 가해주는데도 여전히 현주의 신음소리는 아픔에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쯤되면 그녀도 성적인 자극에 몸을 맡겨도 좋으련만.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꾸준하고 성실한 전희 앞에 느끼지 않는 여자는 없다. 심지어 서연이는 강간을 당하면서도 충분한 전희 앞에 쾌감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서연이에게 해주는 것만큼 노력을 기울이며 애무를 해주면 충분할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애무를 이어나갔다. 앞으로 서서히 현주의 긴장이 풀릴 거라 믿으며.
쩝쩝... 쪼옥... 쪼옥쪼옥....
넓은 젖꼭지에 덕지덕지 침까지 게걸스럽게 발라가며 약간은 원색적으로 느껴질 만큼 과하게 유두를 자극해주었다. 하지만 약간의 오버를 감수하고서 동물적인 애무를 가했는데도 현주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덮은채 내 혀가 그녀의 유두를 빨아당길 때마다 움찔거리며 등을 딱딱하게 세울 뿐이었다.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느끼질 않는 건가? 심지어 유두도 고개를 세울 생각을 않고, 여전히 말랑말랑거리며 내 손과 혀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뭉개질 뿐이었다. 서연이의 젖꼭지는 조금만 정성껏 애무를 해줘도 금새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면서 내 애무를 맞이하곤 했는데.
"현주야, 기분 좀 어때?"
"모.. 모르겠어... 좀 이상한 것 같아."
남자 입장에서 섹스 도중에 테크닉에 대한 평가를 여자에게 요구하는건 한심한 짓이라는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찌질해도 그 정도도 모를까. 하지만 현주의 반응이 너무도 뻣뻣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주는 이도저도 아닌 대답으로 응수했다. 그 "이상하다"는 말의 뉘앙스가 아무리 들어도 "좋다"라는 표현을 에둘러 말한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 그래? 알겠어."
심지어 이빨 끝으로 살짝 젖꼭지를 깨물어보기까지 했는데도 현주는 약간 아파할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젖가슴은 그녀에게 있어 성감대가 아닌가보다. 미련을 버리고 혀를 남하시켜 서서히 배꼽을 훑고, 또 하나의 대표적인 성감대를 향해 전진해나갔다.
중간에 까슬까슬한 수풀이 혀의 움직임을 가로막았지만 나는 거기서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들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배꼽에 혀 끝으로 자극을 가해도 그녀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더이상 뭘 아껴놓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가장 좋은 성감대를 자극시켜 성적인 흥분을 끌어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오.. 오빠 잠깐..!"
하지만 혀가 가랑이 사이의 계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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