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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리와인더 - 1부41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23:27 924회 0건
*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41장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옆집 여자가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내 안의 뭔가를 놓아버렸다. 예전에는 그래도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해서 내 삶의 질적인 가치를 올려보겠다는 근본적인 "목표"라는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그저 단순히 "즐길" 뿐이었다.

고작 하루 동안 스포츠 복권으로 꽤 큰 돈을 벌었다. 예나 지금이나 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돈이라는걸 통해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나는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굳이 필요 이상으로 돈을 축적해 타인의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사고방식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이제사 내가 아주 약간의 돈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저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였다. 하루쯤은 이렇게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단순한 변덕 말이다.

"여기였나?"

와보았던 기억을 어렵지 않게 더듬어 나는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예전 현아와의 짜릿했던 추억이 남아있는 바로 그 호텔이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꽤 재미있는 놀이를 해볼 생각이었다.

"이 시간에 나를 부른 이유가 뭐에요? 당신은 오늘 현주를 만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프론트에 들어서니 미리 연락한 대로 현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불만 그 이상의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그 표정은 차라리 증오에 가까웠다. 하긴 꼴도 보기 싫은 내가 여전히 현주의 곁에서 얼쩡거리고 있다는 걸로도 모자라, 자신을 이렇게 멋대로 오라가라 명령하니 기분이 좋을 리는 없을 테지.

불과 어제 내 손에 처참하게 희롱당했던 그녀가, 오늘은 또 사뭇 다른 느낌으로 내 앞에서 기를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야릇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현아의 가장 치명적인 매력이긴 했지만, 나는 오늘 그녀의 그 남은 자존심마저도 밟아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제까지와는 좀 색다른 의미에서 들뜨고 있었다.

"일단 룸으로 올라가죠."

나는 그녀에게 능글맞게 씩 웃어보이며 앞장 서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가 머무는 룸이 어딘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눈치 볼 것도 없이 스위트룸의 문을 성큼 열어젖혔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무언가를 뒤지듯이 그녀의 소지품들을 마구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자 따라 들어온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내게 소리쳐 항변했다.

"도대체 뭐하는 거에요!"

잠시 동안 그녀의 물건들을 뒤지던 나는, 흡사 브리프 케이스처럼 생긴 그녀의 가죽 가방 하나를 들어올렸다. 무게가 제법 나가는 그 묵직한 느낌이, 내가 찾던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지퍼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었던 그녀의 휴대용 PC를 꺼냈다.

"이거 맞죠? 당신의 은밀한 사생활이 보관된 소중한 보물창고 말이에요."
"이리 내요.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나는 기계를 낚아채려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PC의 전원을 올렸다. 노여움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태연히 받아넘기며, 나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영상파일들을 재생시켰다. 이전에 그녀가 내게 보여준 적이 있는, 현아의 문란하고 추잡한 사생활이 한가득 담겨 있는 바로 그 영상들이었다.

"그러게 내게 이걸 보여주지 말았어야죠."
"그걸로 뭘 하려고 이러는 거죠?"
"지금부터 이건 압수에요."
"뭐라구요?"
"그리고 오늘 하루동안 내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지 않으면 이걸 그대로 현주 눈 앞에 틀어줄 거에요."
"뭐... 뭐?! 당신 미쳤어?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나는 여전히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휴대용 PC의 화면을 그녀의 눈 앞에 보란 듯이 내보이며 분명하게 못 박았다. 화면 안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남성의 손에 의해 알몸이 사정없이 유린 당하고 짓이겨지는 현아의 모습이 여전히 적나라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내 말을 안 들으면 언니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똑똑히 알 수 있게끔 이걸 현주에게 보여주겠다는 거에요. 내 말이 이해가 안 가나요?"
"미친 또라이 새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너한테 뭘 잘못하기라도 했어?"
"당연히 잘못했죠. 지환이 새끼랑 만나지 말라는 내 경고를 보기좋게 무시했잖아요. 당신은 오늘 그 벌을 받게 될 거에요."

선고를 내리듯이 그녀에게 내 할 말을 전한 나는, 그녀의 휴대용 PC를 도로 정리하여 품 안에 챙겼다. 이걸 약점으로 잡은 이상 그녀는 내 명령을 어길래야 도저히 어길 수가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쥘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약점인 동시에, 또한 내가 가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협박이기도 했다.

이것은 오직 나이기에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이다. 현주와 현아의 과거를 알고 있는, 그리고 그 과거의 영향이 두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를 모두 이해하고 있는 나만이 지금 현아에게 이러한 무기를 들이댈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그야말로,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잔혹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 봐도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여차하면 없던 일로 해버리면 되는 거지."

재미를 위해 세워진 내 계획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나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내가 결과를 모르고 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내가 바라지 않는 결과가 나왔을 때엔 나는 그 결과를 뒤집어버릴 수 있다. 그 능력이 내게 있는 이상, 나는 매사 거리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도덕으로부터, 양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지금의 나는 그저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즐기는, 또한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전능한 인간일 따름이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나는 마치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듯 극단적인 즐거움에 심취해가고 있었다.

"오늘 지환이 새끼 만나기로 했어요?"
"......."

어이가 없기도 하고 너무 분한 탓이기도 한지, 현아는 여전히 입술을 앙다문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녀답지 않게 미적지근한 그 반응에 나는 휴대폰을 꺼내에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오빠 왜?
"현주야, 어디야?"
- 나 아직 집이지. 우리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아직 많이 남았잖아.
"응. 그냥 궁금해서. 빨리 보고 싶기도 하고.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게 있거든."
- 보여줄거? 뭔데?

일부러 통화 내용을 현아가 들을 수 있게끔 해두고 현주와의 대화를 들려주자, 옆에서 듣고 있던 현아가 표정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몸을 날려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우리가 몸이 뒤엉켜 아둥바둥거리는 동안 통화는 종료되어버렸고, 곧이어 씩씩거리는 얼굴의 현아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러지 마.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원하는게 뭔데?"
"이제부터 묻는 말에 바로바로 대답해요. 오늘 지환이 새끼 만나기로 했어요, 안 했어요?"
"오, 오늘은 그런 약속 안 정했어. 나는 이따가 다른 고객을 만나기로 했단 말이야."
"그 고객과의 약속은 취소하세요. 그리고 지환이 그 놈을 불러요. 지금 당장."
"뭐....?"

현아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판단 같은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나는 할 말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다급하게 나를 붙잡으며 물었다.

"잠깐만!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당신은 알 것 없어요. 그냥 노예처럼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에요. 그럼 적어도 현주가 당신의 사생활에 대해 알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요."
"비.... 비겁한 놈.... 어떻게 그런 걸로 협박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어? 그러고도 네가 현주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어? 이 쓰레기 같은 새끼...."
"나중에 생각해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아예 없던 일로 돌려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하."

나는 현아가 결코 이해하지 못할 한 마디를 남겼지만 그녀는 분노에 몸을 떠느라 내 마지막 말 따윈 듣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자제력을 잃고 분노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일종의 복수심마저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치졸하기 짝이 없는 쾌감을 느꼈다. 예전에 이 스위트룸에 우리가 들어와 있었을 때에는, 내가 현아의 손아귀 위에서 완전히 놀아날 수 밖에 없었음을 새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도권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있다.

등 뒤에서 노려보는 현아의 시선을 끝까지 뒷모습으로만 태연하게 받아 넘기며, 나는 스위트룸을 나섰다. 이제는 마치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듯이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저열한 웃음이 입가에 가득 번졌다.


*


프론트 근처의 유리문이 열렸다. 한 남자가 그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모습이 좀 바뀌긴 했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뺀질이의 얼굴을 내가 잊을 리는 없었다.

여전히 재수없는 생김새였다.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저 놈을 보았던게 언제였더라. 아마 이번 학기 초무렵의 일이었으니 그렇게까지 오래 지난 일은 아니었다. 치렁치렁했던 놈의 머리카락이 그 사이에 짧게 잘려있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호텔에 걸어들어온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녀석이 현아와 어떤 관계인지를 새삼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어 기분이 묘했다. 그동안 저 놈도 많은 일을 겪었겠지. 그러면서 자기 딴에는 내게 복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둔하고 멍청한 새끼 같으니....

"그럼 가볼까?"

나는 호텔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지환아의 모습을 보며 한번 더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놈이 홀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오자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나는 불쑥 앞으로 나서며 일부러 놈과 몸을 부딪혔다.

"어억!"
"아...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덴... 어?"

내가 일부러 보란 듯이 볼썽 사납게 바닥을 뒹굴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나를 급히 일으켜 세우려고 녀석이 몸을 숙였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녀석도 내 얼굴을 알아보았고, 순식간에 녀석의 동공이 몇 배로 커졌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똑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 너 지환이 아니야! 야, 지환이 맞지?"

녀석이 뭐라고 채 지껄이기도 전에 먼저 오도방정을 떨어가며 아는 체를 했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꼴보기 싫은 인간이 분명할 터인 내가 이런 곳에서 튀어나온 것도 모자라 아는 체를 해대니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야아~! 지환이 맞구나. 반갑다! 어떻게 이런데서 다 만나냐? 하하!"
"아.... 예. 오랜만.... 입니다. 선배."

그래도 녀석의 입장에서는 내가 여전히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는 인물이라 여겼는지, 아니면 그저 이 상황이 놀라웠기 때문인지 녀석은 조심스럽게 나를 대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읽을 수 없지만 솔직히 안 봐도 대충 짐작이 갔다. 녀석은 나에게서 자꾸만 뭔가를 읽어내려는듯 나를 위아래로 살피고 있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마치 친한 형동생끼리 우애라도 다지듯이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그러자 살짝 인상을 찡그리던 녀석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 저는....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러는 선배는 어쩐 일로?"
"아~ 나는 내 여자친구 만나고 가는 길이야. 내 여자친구가 무려 여기 "스위트룸"에서 지내고 있거든. 하하하. 내 여친 능력 좋지~? 잘 나가는 여친 둔 덕분에 나는 매일 이런 곳에도 와보거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다가 나오는 길이야."

주책맞게 지껄여대는 내 말을 듣자 지환이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이 놈은 내 여자친구를 여전히 현아라고 굳게 믿고 있으니 분명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을 터였다. 현아와 수차례의 밀회를 가져온 녀석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이런 말을 떠들어대는 내가 얼마나 병신같고 멍청해보이겠는가.

지환이는 방금 전과는 다르게 비릿한 웃음마저 지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물론 그 웃음의 의미를 내가 모를 리는 없었다.

"아~ 그러셨군요. 하하. 그렇게 능력있는 애인이 있으셔서 정말 부럽네요. 선배 애인이 어떤 여자인지 궁금해지네요. 저도 오늘 여자 만나러 여기 왔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보여드리죠."
"뭐? 이야~ 역시 지환이가 능력이 좋긴 좋아. 그새 또 여자 하나 만들었구나~"

놈은 나를 농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심지어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약간 불쌍한 머저리를 보는 듯이 깔아보는 눈으로 바뀌어있었다. 하긴 여자친구가 외간남자와 놀아나는 것도 모르는 채 바보같이 헤죽헤죽 웃고 있는 내 꼴이 불쌍해보이긴 했겠지.

"야, 휴학했다고 소식도 없이 지내지말고 가끔 학교에 놀러 오고 그래~ 형이 한잔 쏠게. 나 예전 일은 다 잊었다. 그러잖아도 너랑 술 한잔 하고 싶었어."
"아... 하하, 알겠습니다. 언제 한잔 하시죠, 선배."

지환이를 휴학하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는걸 생각하면 녀석 입장에서 이만한 도발은 또 없을 터였다. 하지만 녀석은 마음 속으로 나를 갖고 놀고 있다는 여유가 있기 때문인지 오히려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래~ 나 간다~"

하지만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문득, 녀석이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에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을 불러세웠다.

"아 참, 지환아~"
"예?"

놈의 시선이 다시금 내게 머물자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요새 서연이 소식 들은거 있어?"
"서연이.... 요? 글.... 쎄요...."

내 입에서 서연이 이야기가 나오는 것만큼 녀석의 속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일은 또 없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자극의 효과는 충분했지만 나는 뒤이어 다시 한번 말했다.

"서연이, 요새 만나는 사람이 있다던데."
"........"

녀석은 대답 대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짧게 눌렀다. 놈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나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자 등 뒤로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선 내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녀석은 곧이어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입구까지 걸어가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이미 지환이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고 없었다. 녀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뻔히 아는 나로서는 이 상황이 그저 웃길 뿐이었다.

"미안해요, 현아 씨. 흐흐...."

사전에 나는 휴대폰 메시지를 통해 이미 현아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싫든 좋든 오늘 그녀는 또 한번 지환이의 노리개가 되어야한다.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과연 자신이 지환이를 농락하고 있는 입장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적어도 오늘의 이 갑작스러운 방문이, 그녀가 스스로 원했던 바는 아닐 텐데.

현주와의 만남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유희를 즐기기에는 넉넉한 시간이었다. 나는 곧바로 지환이를 태웠던 엘리베이터를 불러, 녀석이 향했을 현아의 스위트룸으로 곧장 올라갔다.


*


복도를 가로질러 문앞까지 도달한 나는 숨죽여 스위트룸의 안쪽을 향해 살며시 귀를 기울였다.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봐서는 이미 지환이가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후의 상황을 안봐도 뻔히 짐작할 수 있는 나로서는 좀 더 느긋하게 상황을 살피며 기다리기로 했다.

현아는 내가 미리 지시한 대로 문을 잠그지 않고 살짝 열어둔 상태였다. 룸의 구조 자체가 깊숙히 들어가면 문 쪽이 잘 보이지 않는 형태로 되어 있었기에 나는 안심하고 문을 조금 열어보았다. 모습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내용 정도는 드문드문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놈이 방금 전까지 여기 있다가 간거라 이거네? 여자친구가 능력이 좋니 어쩌니 하면서 존나게 지껄여대던데 말야. 병신 같은 놈. 지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곳에 내가 들어와있다는걸 꿈에나 알까...."

씹어뱉듯이 이죽거리는 지환이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이야말로 지금 내가 여기 숨어서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꿈에나 알까?

"그래서 그 놈이랑 섹스했어?"

놈은 꽤나 직설적으로 따져물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정말이지 내 예상을 한치도 빗나가지 않는 질문이었다. 나는 녀석이 현아를 만나면 곧장 그것부터 물어볼 것이라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아니.... 안했어~ 나 이제 그 사람이랑 섹스 잘 안해."
"진짜야? 믿어도 돼?"
"진짜야. 내가 왜 자기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나 이제 그 사람한테 완전히 마음 떴다는거 자기도 알잖아. 자기가 있는데 내가 왜 그 사람하고 섹스를 해~"

최대한 지환이 놈의 비위를 맞춰가며 평소보다 더 살갑게 유혹하라는 것이 내가 현아에게 문자 메시지를 통해서 내린 명령이었다. 하지만 고양이처럼 아양을 떨어가며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굴리는 그녀의 태도를 보건대, 굳이 내 명령이 없더라도 평소에 두 사람은 저런 분위기 속에서 지내왔던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현아가 지환이를 "자기"라고 부른다는 것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지환이 놈의 입장에서는 "최성진의 애인"이란 여자가 얼마나 지조없고 걸레같은 년으로 보였겠냔 말이다. 이것이 모두 속임수에 의해 만들어진 상황이긴 했지만 지금 현아가 맡고 있는 역할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왠지 현주의 존재를 추잡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아 조금 아니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런 주제에 그렇게 히죽거리면서 좋아하는 꼴이라니.... 병신."
"그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이리 와~ 보고 싶었단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부른 거야? 흐흐, 너 암만 봐도 내 좆맛에 너무 빠진거 아니야?"

가만히 엿듣고 있던 나로서는 박장대소가 터질 뻔한 이야기였다. 좆맛이라니....

내가 놈의 섹스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서연이가 묘사했던 몇몇 내용들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깊이 생각해보면 그만큼 현아가 교묘한 기술과 언변으로 그동안 지환이 놈의 자존심과 정복감을 부추겨왔다는 뜻이겠지만 말이다.

곧이어 룸 안에서부터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공기가 무르익는 것이 느껴졌다.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살을 섞을 때의 그 특유의 그 열기가 문 밖에서 숨죽이고 있는 나에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환이 놈을 유혹하라는 내 명령을 현아가 필요 이상으로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녀의 그 끈적이는 언행이 현주에게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 스스로도 이 상황에 심취해있기 때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간간히 드문드문 룸 밖으로 새어나오는 뜨거운 신음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아아.... 하.... 아응!"
"그러지말고 그냥 그 새끼랑 헤어져버리지 그래. 면전에서 네가 헤어지잔 말을 하면 그 놈이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한데."

달뜬 신음만 흘려내는 현아와 다르게, 지환이 놈은 쉴 새 없이 뭐라고 지껄여대고 있었다. 하긴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건네는 나에 대한 말 하나하나가 녀석에게 있어선 복수 그 자체일테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생각해보니 네가 그 놈이랑 헤어지면 내 입장에선 재미가 없지. 네가 그 놈의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내가 너와 섹스하는게 이렇게 짜릿한 거거든. 네가 헤어져버리면 나는 더이상 복수를 할 수 없게 되잖아. 그러니까 당분간은 이대로가 좋아.... 흐흐흐."
"하아.... 하아.... 아아앙...."
"자, 말해봐.... 최성진 그 새끼 좆보다 내 좆이 훨씬 더 좋지?"
"으.... 으응.... 하아.... 자기 좆이.... 더 좋아."

웃기는 소리였다. 내가 섹스의 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지환이 저 새끼보다는 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현아의 저 멘트가 비위를 맞추기 위한 가식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의 쾌감과 복수심에 한껏 취해서 떠들어대는 지환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살짝 배알이 꼴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너 그거 알아? 최성진 그 새끼 너 말고도 또 만나는 여자 있어.... 예전에 내가 말했던 내 전여친.... 그 놈이 아직도 걔랑 만나고 있다고. 개찌질이 새끼 주제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단 말이야."
"으응.... 하아.... 아, 알아...."
"안다고? 넌 알면서 아무렇지도 않아?"
"무슨 상관이야.... 하아.... 나도 양다리 걸치고 있잖아.... 하윽...."

아무래도 녀석은 현아의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여자친구에게 충실할 수록, 그 여친을 뺏는 입장인 자신의 쾌감이 더 깊어질 것이기에 녀석의 그런 심리가 이해는 되었다.

서연이에 대한 생각이 나서 기분이 더러워졌기 때문인지, 녀석은 욕지거리를 한다발 내뱉으며 과격하게 움직임의 속도를 올렸다. 그 모습을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소리와 느낌만으로도 대충 짐작이 갔다.

문을 조금 더 열고 고개를 빼꼼 안으로 들이밀어 보았다. 침대기둥의 모서리 부분이 살짝 보였다. 과감하게 안으로 몇 발짝 들어서니 현아를 깔아놓고 그 위에서 헐떡이며 몸을 움직여대는 지환이 놈의 엉덩짝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화장실 안쪽으로 슬금슬금 숨어드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녀석은 좆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아.... 아아악.... 하아아앙...."

가슴을 주물러대며 피스톤질의 속력을 높이는 지환이의 행위 앞에 현아가 몸을 꼬으며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이미 현아를 겪어본 나로서는 암만 들어도 그것이 거짓으로 쥐어짜내는 신음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섹스를 이렇게 지켜본다는 것은 나름대로 꽤 자극적인 일이었다. 물론 애초에 두 사람의 관계 자체가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벌거벗겨진 현아가 지환이의 손에 유린되고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적어도 시각적인 면에서만큼은 내게 적지 않은 흥분을 주었다. 아마도 이 상황을 즐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환이 녀석은 과거에 서연이가 묘사했던 그대로, 조루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 그 짧은 사이에 이미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으윽.... 싼다...."

헐벗은 녀석의 등이 꿈틀꿈틀 떨리더니, 녀석은 현아의 몸에서 자신의 물건을 뽑아 곧장 현아의 입에다 물렸다. 사정하는 그 순간 녀석이 얼마나 아찔한 쾌감을 느끼고 있는지가 뒷모습에서부터 생생히 전해져왔다. 하긴 내 여친의 입에 좆물을 싸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얼마나 짜릿할까.

꿀떡거리며 자신의 정액을 받아삼키는 현아의 모습을 지환이가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한 만족감이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로 녀석이 말했다.

"언젠가는 이 모습을 최성진 그 놈이 꼭 봐야하는데...."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 될거란 사실을 녀석이 어찌 짐작했을까. 화장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나는 더이상 조심스러울 것도 없이 방 안으로 곧장 들어섰다. 여전히 자신의 좆대가리를 현아의 입에 물린 채로 사정의 여운을 즐기고 있던 녀석은 내 모습을 보지 못 했지만, 녀석의 몸 밑에 깔려있던 현아는 나를 금방 발견했다.

지환이의 좆을 입에 문 채로, 내 모습을 발견한 현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물론 사전에 나와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으니 그녀가 나를 보고 크게 놀랐을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내가 보는 앞에서 지환이의 정액을 삼키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나름대로 그녀에겐 굴욕이 되는 모양이었다.

"웁... 읍... 으읍...."
"뭐야? 왜 그래?"

현아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낀 지환이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며 소리쳤다.

"이 개새끼야!!"


*


주먹을 얻어맞은 지환이가 순식간에 침대 밑으로 벌렁 나뒹굴었다. 현아의 입에서 녀석의 물건이 뽑혀져 나가며 알몸의 몸뚱아리가 볼썽 사납게 바닥에 굴렀다.

만약 이것이 내게 있어 정말로 분노할 만한 상황이었다면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녀석에게 달려들었겠지만, 나는 달려드는 대신 쇼크라도 받은 것처럼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내가 생각해도 남우주연상에 버금가는 연기력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내가 메소드 연기에 생각보다 소질이 있다는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감정을 연기하려니 쉽지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입을 멍하니 벌리고 뻐끔거리는 내 표정을 보며, 바닥에 쓰러졌던 지환이가 얼빠진 얼굴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선배.... 이건...."
"닥쳐, 이 개새끼야!!"

놈의 입장에서는 내가 여전히 과거의 잘못에 대한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조심스러운지, 막상 내 모습을 눈 앞에서 직면하고보니 다소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놈이 뭐라고 항변을 하기도 전에 나는 현아에게 성큼 다가가 그녀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따귀를 맞은 현아조차도 놀란 눈이 되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씨발년아!! 요새 바람 피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니 그게 다른 놈도 아니고 이 새끼였냐? 너희 뭐야? 언제부터 만난 거야? 대답 안 해, 이 씨발 년놈들아?!"
"......."

광분하는 내 연기 앞에 현아도 지환이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현아는 이게 모두 나의 장난이라는걸 알고 있기에 오히려 더욱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고, 지환이 놈은 이 와중에도 대가리를 굴려가며 내게 어떻게 나오는게 좋을지를 고민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까딱 잘못하면 과거의 죄를 빌미삼아 내가 자신을 감옥에 보낼 수 있다는걸 아는 지환이로서는 막상 이 상황에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선배.... 그러니까 이건...."
"이 씨발새끼! 이 쳐죽일 개새끼야! 니가 감히 내 여친을 손대? 내가 니놈 인생이 불쌍해서 봐줬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렸다 이거지? 너 이 새끼, 이제 콩밥 먹을 각오해."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지환이가 어떻게 나올지 꽤나 궁금했다. 살려달라며 다시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할지, 아니면 오히려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며 배째라는 식으로 나올지 말이다. 하지만 놈은 생각과는 다르게 다소 의외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주먹을 꾹 쥐고 나를 노려보던 녀석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씨발.... 내가 니놈이랑 뭐가 달라!"
"뭐라고?"
"너도 내 여친 따먹었잖아. 나는 니 여친 따먹으면 안 되냐? 똑같이 돌려주고 싶었던 것 뿐이야. 니가 한 짓이니 고스란히 그대로 돌려받아야지. 안 그래? 그런 주제에 나를 콩밥 먹이겠다고? 웃기지 마. 절대로 혼자 죽지는 않을 테니까."

궁지에 몰리자 오히려 비로소 진심이 나오기 시작하는 듯, 녀석은 쌓여있던 울분을 내게 터뜨리듯이 이빨을 드러내고 나섰다. 물론 녀석이 어떻게 나오던 나는 전혀 무서울게 없었지만 녀석의 그런 모습은 꽤 의외이면서도 재미있었다. 나는 실성한 듯한 웃음을 보이며 녀석에게 물었다.

"하, 하하.... 이 새끼 봐라. 그러니까 니가 지금 나한테 복수하려고.... 이런 짓을 했다는 거냐?"
"물론이지. 처음부터 니가 한 짓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려고 시작한 거야. 너도 당해보니 기분이 어때? 좆 같지?"

상황이야 어쨌건 나에게 복수를 가했다는 그 사실이 놈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이 상황이 고무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듯, 녀석은 바닥에 무릎 꿇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정말 좆 같은 기분이구나....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뭐....?"

녀석은 귀를 의심하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거라곤 아마 생각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비굴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좆 같은 기분일 줄 알았다면 너에게서 서연이를 뺏지 않았을 텐데.... 미안하다. 내가 좆 놀리는 능력이 너무 좋아서 네 여친을 빼앗고 말았구나. 니가 아무리 허접한 조루새끼 같은 놈이라도 남의 여자 뺏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정말 너에게 면목이 없구나."

내 말이 한자 한자 이어질 수록 녀석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바닥에서 일어나, 아직도 알몸으로 멍하니 누워있는 현아에게로 다가갔다. 지환이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며, 나는 녀석을 향해 덧붙였다.

"그런데 어쩌지? 이 여자는 내 애인이 아닌데."
"뭐....?"

또 한번 녀석의 얼빠진 대답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녀석의 표정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나는 현아의 머리를 마치 칭찬이라도 하는 듯이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지환이 녀석이 들으라는듯 그녀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동안 연기하느라 수고했어요. 두 사람 떡치는 것도 재미있게 잘 봤구요."

할 말을 잃고 침묵하는 두 사람의 반응.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얼굴에 이죽거리는 미소를 띄운 채로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옷이 벗겨진 현아의 두 다리를 하나씩 붙들고 양쪽으로 벌렸다. 그리고 지환이에게 되려 보란듯이 현아의 다리 사이를 훤하게 보여주며 미소를 지었다.

"지환아, 이 여자 어때? 죽이지? 그동안 먹으면서 꽤 즐겁지 않았어?"
"......."

지환이 놈은 내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 멍청아, 따먹을 여자를 잘 골랐어야지. 골라도 하필 이런 여자를 고르냐. 너 이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 모르지?"

나는 품 안에 준비해두었던 현아의 휴대용 PC를 꺼내어 지환이가 보는 앞에서 전원을 켰다. 그리고 곧이어 화면에 하나의 영상을 띠웠다. 그것은 바로 지환이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는 영상이었다.

"......."

화면 속의 영상에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지환이 자신이, 현아의 몸을 유린하는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섹스영상이라 그런지 영상 속에서 두 사람이 섹스를 하는 모습은 조금 전처럼 평화롭지 못한, 일방적인 강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실 그것이 바로 현아가 교묘하게 연출해낸 장면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게.... 뭐....."

입장이 바뀌어, 이제 경악하는 쪽은 내가 아닌 지환이가 되어있었다. 방금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녀석은 얼이 빠져 더듬거렸다. 물론 내 경우에는 철저한 연기였지만 말이다. 그동안 자신이 현아와 섹스를 하면서, 그 과정들이 모두 촬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지환이는 그야말로 넋이 나가 턱을 벌리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너 강간죄로 감방에 처넣는 거 일도 아닐 것 같은데. 이거 어쩌냐? 아무래도 너한테 또 하나의 죄목이 생긴 것 같다."
"......."

아무 말을 하지 못하는 지환이를 내버려두고 나는 몸을 일으켜 이번엔 알몸의 현아를 내려다보았다. 굳은 표정이 되어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다시 미소지어주었다.

"이제 볼장 다 봤으니까 저런 놈하고는 엮이지 말이요. 당신도 이제 동생 생각해서 남자관계에 신경을 좀 써야죠."

이후의 상황을 내가 정리해 줄 필요는 없었다. 충분히 즐거움을 만끽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서슴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지환이 녀석의 얼굴을 마주보며 나는 여유있게 웃었다.

"그럼 난 이만 가봐야겠다. 여친이랑 데이트 약속이 있거든. 아, 물론 거기 있는 여자말고 진짜 여친 말이야."

그걸로도 모자라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서연이는 내가 꼭 행복하게 해줄테니까 걔는 그냥 잊어. 또 되도 않은 복수하겠답시고 설쳐서 괜히 더 험한 꼴 당하지 말고. 넌 나를 찌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너는 예나 지금이나 내 상대가 못 되거든."
"......."

끝까지 아무 대답을 못하는 녀석을 내버려두고, 나는 룸을 나섰다.

"하하하하!"

내 웃음소리가 룸 바깥의 복도에 유쾌하게 울렸다.


*


난봉꾼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기분일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로지 즐거움만이 모든 것에 있어 최우선이 되었다.

지환이를 상대로 저열한 승리감을 한껏 만끽한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현주와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나는 현주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차를 몰고가 근처 시내에서 그녀를 만났다.

"오빠!"

현주는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반갑게 나를 불렀다. 여전히 몸이 조금 안 좋아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표정이 밝았다. 자신의 언니가 그동안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며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는 채 웃음 짓는 현주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현주를 차에 태워, 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호텔로 다시 되돌아왔다. 물론 현주는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겠지만 우리가 오늘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미리 약속한 만큼, 내가 이곳을 찾은 것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이런 데는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그냥. 너랑 데이트하려고 어제 미리 좀 봐뒀지."

처음으로 나와 호텔에 왔다는 사실이 현주에게는 들뜨는 기분을 넘어 긴장마저 느끼게 하는지, 그녀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현주의 손을 잡고 태연하게 로비를 넘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혹시나 하고 예상했던 상황이긴 했지만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던 현아, 그리고 지환이와 그 자리에서 딱 마주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어.... 언니?!"

벼락을 맞은 듯이 경악한 현주가 현아의 얼굴을 보고 펄쩍 뛰었지만, 사실 놀라기로 따지면 현아 역시 현주 못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하니 내가 현주를 데리고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별다른 내색도 하지 못한채 그녀는 그저 놀란 시늉만 하는 것으로 표현을 대신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아, 나는.... 오빠랑...."

현주로서는 이 상황이 적잖이 부끄러운지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언니와 같은 호텔에서 마주치게 될 거란 상황을 그녀가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

하지만 현아는 가타부타 아무 말도 못하고 우리를 지나쳤다. 눈치가 빠른 그녀이니만큼 지금의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또한 내가 어떤 장난을 치고 있는지 나름대로 느꼈을 터였다. 현아가 아무 말도 없이 나와 현주를 그대로 둔 채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걸어가버리자, 당황한 현주는 소리 높여 뒷모습에다 대고 그녀를 불러댔다.

현아가 가버리자 옆에 있던 지환이 녀석도 마지못해 그 자리를 떴다. 엘리베이터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나와 지환이의 눈이 잠깐 동안 마주쳤다. 뭐라고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담은 복잡한 눈으로 녀석이 나를, 그리고 내 곁의 현주를 묵묵히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도 이제야 비로소 진실을 깨달은 것일까?

내게 하고 싶은 말이야 산더미처럼 불구덩이 속에 쌓여있겠지만, 녀석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언니!"

그러는 사이에도 현주는 여전히 현아를 부르고 있었다. 이미 저만치 가버린 언니의 뒷모습을 쫓아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그녀는 갈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그녀를 내 쪽으로 이끌었다.

"에이, 그러지 마. 현아 씨도 부끄러워서 그러는건데 서로 이해해야지."
"부끄럽다니? 뭘?"
"척 보면 모르겠어? 현아 씨도 남자친구랑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서 부끄러운 거잖아."

그러자 현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에이, 설마.... 언니는 남자친구 같은거 안 만들어."
"그거야 모르지. 남자친구도 아닌데 호텔 같은 곳에 같이 왔을리가 없잖아."
"그, 그런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의문에 빠져있는 현주를 이끌고 나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내가 미리 예약해둔 그 룸은, 현아가 지내고 있는 스위트룸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근처의 방이었다.

룸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문득 지환이에 대해 생각했다. 녀석이 지금쯤 무슨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사실 나는 오로지 내 복수의 수단으로써 현아를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지환이가 나에 대한 복수의 수단으로 현아를 이용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지환의 말 그대로였다. 녀석과 나는 별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환이와 나를 평행선에 놓지는 않았다. 녀석에게는 전지전능한 능력이 없고, 나에게는 그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이 능력은 나를 조금씩 미쳐가게 만들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즐거운 주말입니다 ^^
지난 화에 미리 말씀드린대로 이번주말에는 연속으로 연재를 해보려 합니다

다음 화는 내일 저녁무렵에 올릴 예정입니다
응원 부탁드려요
편안한 주말 보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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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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