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8장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이미 서연이는 가고 없었다. 간밤에 수차례 섹스를 하면서 그녀의 몸 곳곳에 묻은 내 정액들을 닦아준 크리넥스 뭉치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어야 하는데, 바닥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걸 보니 그녀가 정리를 하고 간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을 청소하고 갔는지 방 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고 정갈한 모습이었다. 마치 어젯밤의 일이 모두 꿈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스렌지에 붙은 메모 쪼가리 한장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꿈이었나 하고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메모지를 떼서 읽어보았다.
- 학교에서 봐요. 아침 차려놨으니까 일어나서 먹구요.
렌지에 올려져 있는 냄비를 열어보니 북어국이 담겨져 있다. 이걸 언제 조리했지 싶어서 살짝 맛을 봤는데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마트에서 파는 조리된 식품이었다. 이제보니 렌지 옆에 햇반도 포개놓은 것이 보인다.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사왔나보다. 왠지 귀여웠다.
혹시 몰라서 메모지를 뒤집어보니까 뒷면에 한줄이 더 있었다.
- 어젠 고마웠어요.
서연이에겐 이런 면도 있구나. 만약 현주가 아니라 서연이랑 잘 되어서 사귀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순간 뒤통수를 강타하듯 잊고 있었던게 떠올라 급하게 핸드폰을 찾았다.
"웁스..."
현주로부터 날아온 부재중 전화를 포함해서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차마 읽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고 대충 보니 "벌써 자?",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혹시 화난거야?", "오빠 전화좀 받아봐." 등등의 메시지들이 주루룩 쌓여있었다.
"이런..."
황급히 전화를 걸어보았다. 통화음이 길게 울리는 동안 마음이 초조하게 타들어갔다.
현주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톡이든 메시지든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답장이 오지 않는다. 이쯤되니 뭔가 불안해진다.
지은 죄가 있어 그런 것이겠지만, 말도 안 되는 망상들을 하기 시작한다.
혹시 연락이 안 되니 답답해서 현주가 새벽에 여기까지 왔던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서연이랑 누워있는 나를 본건 아닐까?
"끄응..."
연애경험조차 비리비리한 내가 여자문제로 이런 난관에 봉착해 본 경험이 있을리 없었다. 내 머리로 생각해봐야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현주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인내심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현주의 표현을 고스란히 빌리자면, 나는 "연애초보"였기 때문이다.
"택시!"
택시를 잡아타고 현주네 집까지 쏜살같이 달렸다. 다행히 예전에 집까지 그녀를 바래다줬을때 혹시 몰라 현주네의 정확한 동과 호를 물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우선 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 그 순간에 고작 내어놓을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아마 내가 간밤에 현주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그 혼자만의 "죄책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괜시리 오버해서 날뛰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딩동~
아파트에 도착해 초조한 마음으로 벨을 눌러본다. 아침부터 남의 집에 불쑥 찾아오는 것이 실례가 될줄은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사태부터 파악하고나서, 뭔가 잘못 돌아간다 싶으면 시간을 되감아 버리면 되니까.
- 누구세요?
"저, 저기.. 혹시 현주네 집인가요?"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현주일까?
기계음이 조잡해서 제대로 분간할 수는 없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잘못 찾아온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다행히 잘못 찾아온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진 씨 아니에요?"
"혀, 현아 씨..."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현주가 아니라 그녀의 언니였다. 집을 제대로 찾아왔다는 안도감과, 갑작스럽게 그녀의 언니와 마주쳤다는 당황함이 뒤섞여 바보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게다가 그런 이유 외에도, 문을 열고 나온 현주 언니의 복장을 보는 순간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질 수 밖에 없었다.
장담하건대, 지금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고 정신없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난 현아 씨의 차림새를 보는 순간 입을 쩍 벌리고 그 자리에 굳어졌을 것이다. 그녀의 몸을 두르고 있는 헐렁한 와이셔츠 한 장 밑으로는 맨살의 살결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하의는 입지 않았는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매끈하고 길쭉한 다리 한 쌍이 펄럭이는 셔츠 자락 밑으로 곧게 뻗어있었고, 심지어는 속옷조차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브래지어와 팬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옅은 살색만이 비치고 있었다. 만약 속옷을 입은게 아니라면, 이 여자는 지금 알몸에 와이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치고 나온 것이었다.
"혀, 현아 씨... 저기, 그게... 현주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서 민망하게 시선을 피하면서 얘기하자 그녀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들어올래요? 엄마 아빠 지금 다 나가셨거든요."
"그, 그래도 되나요? 근데... 혹시 현주한테 무슨 일 있는건 아니죠?"
"무슨 일 있죠. 어제 거의 밤새도록 성진 씨 연락만 기다리다가 울다 지쳐 잠들었어요."
"네에? 울다 지쳐요?"
"그러고보니 왜 내 동생 울리고 그래요? 괜찮게 봤는데 실망이에요."
"미, 미안해요... 그럴 일이 좀...."
"농담이에요. 연인 문제는 당사자들끼리 얘기해야죠. 일단 들어와요."
현아 씨는 그런 야한 옷차림을 하고도 서슴없이 문을 열어주고 뒤돌아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며 보니 와이셔츠의 밑자락 아래로 엉덩이의 살결이 미세하게 실룩이는 윤곽이 보였다.
졸업식에서의 노팬티 사건도 그렇고.... 현아 씨는 혹시 노출증 환자 같은게 아닐까?
"야! 박현주! 일어나봐. 왕자님께서 직접 오셨네."
집은 생각보다 아주 넓었고, 고급스러웠다.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간 현아 씨가 현주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곳이 현주의 방인가보다. 나는 그저 거실 한가운데에 어색한 자세로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뭐...? 무슨 소리야."
"성진 씨 왔다구. 너 보러 왔대."
순간 요란하게 뭔가가 우당탕하는 소리가 방 안에서 새어나왔다. 다급함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소란스런 소리가 몇 차례 울림과 동시에 현아 씨가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게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웃음지었다.
"곧 나올 거에요."
그러고선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옷을 대충 걸쳐입은 현주가 헐레벌떡하니 당황한 얼굴로 뛰어나왔다.
"오, 오빠...!"
"으응. 현주야..."
"오빠! 일단 눈 돌려.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나 쳐다보지마. 지금 세수도 안 했단 말이야!"
"아, 으응. 알겠어."
우리는 서로 다른 의미로 당황했다. 현주는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고 나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덕분에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주방으로 들어간 현아 씨가 간단하게 마실 것을 담아서 내어왔고, 일단 좀 앉으라는 현아 씨의 권유에 내가 슬며시 식탁 의자에 앉을 때쯤 세수를 끝낸 현주가 등장했다. 이제보니 그 짧은 사이에 기초 화장까지 하고 온 것 같았다.
"오빠! 집엔 어떻게 왔어?"
"네가 연락이 안 되길래.... 걱정되서 그랬지. 예전에 집이 몇 호인지 들어놨으니까."
"씨이...! 그렇다고 이렇게 불쑥 오면 어떡해. 그거 완전 매너없는 짓인거 몰라?"
"미, 미안. 너무 예의가 없었지? 부모님 계실지도 몰랐는데."
"뭔 소리야. 그딴게 문제가 아니라, 잠옷바람에 눈곱까지 붙인 얼굴을 오빠가 봤잖아!"
"뭐? 아냐... 니가 눈 돌리래서 안 보고 있었어."
"거짓말 하지 마."
"진짜야."
아웅다웅거리는 우리 모습을 본 현아 씨가 닭살 돋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랑 싸움할거면 집 밖에 나가서 하고."
"잠깐, 언니..."
그제야 자기 언니의 파격적인 옷차림을 눈으로 확인한 현주가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맨다리가 훤히 보이는데다 속살까지 희미하게 비치는 현아 씨의 알몸 와이셔츠 차림을 잠시 살펴보던 현주의 얼굴이 서서히 아연실색하기 시작했다.
"어, 언니... 혹시 그 꼴로 나갔던 거야?"
"응. 지금도 이러고 있잖아. 왜?"
"미쳤어!? 빨리 방으로 들어가!!!"
현주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처음 봤다. 아니, 그렇게 화를 낼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처음 알았다. 그냥 신경질을 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나한테까지 확연히 느껴질 만한 분노를 담은 고함소리였다.
"알았어, 알았어. 기지배가 괜히 지랄이야."
하지만 현아 씨는 무슨 어린애 땡깡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그 분노를 받아넘겼다. 자신의 무지막지한 노출도를 본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경쾌하기까지 한 걸음걸이로 사뿐사뿐 그녀가 주방을 나가버리자 현주는 잠시 화를 가라앉히느라 숨을 씩씩거렸다.
"혀, 현주야."
"......."
그러잖아도 지은 죄가 있어 온 건데, 현주가 별 생각지도 못한 일로 화가 폭발하니 나는 더더욱 눈치를 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현주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마침내 내게 시선을 옮겼다.
"언니보고 이상한 생각 한거 아니지?"
"그, 그럼. 지금 내가 딴 생각할 여유가 어딨어. 니가 전화 안받으니까 걱정되서 죽는 줄 알았어."
"그게 걱정할 일이란걸 아는 사람이 내 연락은 왜 밤새도록 안받았는데?"
"미, 미안해. 진짜 미안해. 너무 일찍 잠들어버렸어. 내가 잔다고 말을 하고 잤어야 하는데... 깜빡 잠든데다가 핸드폰도 무음으로 해놔서 몰랐어."
양심이 콕콕 찔리긴 했지만, 진실을 그대로 실토한다는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나를 노려보는 현주의 눈빛에 나는 그저 고양이 앞의 쥐꼴이 되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현주의 시선을 감히 마주할 용기가 없어 시선을 피하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 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현주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는걸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혀, 현주야. 왜 울어?"
"흑... 흐흑..."
운다. 현주가 또 운다. 현주는 왜 이렇게 뜬금없이 잘 우는 걸까?
난 졸지에 이틀 연속으로 여친을 눈앞에서 울려버린 남친이 되고 말았다.
"흑.. 흑흑... 난... 오빠가 일부러 안 받는줄 알았잖아."
"응? 뭐라구?"
"내가 오빠 마음 무시해서... 흑흑... 그, 그거 안해줘서.... 그래서 나 싫어져서 일부러 안 받는줄 알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아? 흑...."
"......."
그 순간 말도 안될 만큼 모순적이게도, "안쓰러움"과 "안도감"이라는 두 가지 전혀 다른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안쓰러움이야 당연한 거고, 안도감은 현주의 눈물을 보니 적어도 내가 혼자 상상했던 그런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확실히 섰기 때문이었다.
어제 집에 가는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도 현주는 내게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갔는데, 내가 어제 그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연락을 무시한 거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보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나 너한테 화난거 아무 것도 없어. 진짜야."
"씨이.. 몰라.. 흑흑... 계속 잠도 못자고 오빠 전화만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들었단 말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잔다고 말을 하고 잤어야 했는데... 우리 현주가 많이 속상했구나."
"훌쩍... 훌쩍...."
서럽게 흐느끼고는 있지만 현주 또한 속으로 안도하고 있다는게 느껴져왔다. 그래서 괜히 더 마음이 아팠다.
"오빠가 현주 맘 아프게 했으니까 오늘 너가 해달라는거 다 해줄게. 오빠가 뭐해줄까?"
"씨잉... 됐어..."
갓난 애기 달래듯이 어르고 달래서 현주의 눈물이 멎어들자, 나는 마치 지구 평화라도 지켜낸 것처럼 긴장이 탁 풀리는게 느껴졌다. 다행히 사태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불안함이라는 한 고비를 넘기고나니 떠올리기를 미뤄두었던 다른 감정들, 이를 테면 극도의 회의감이라던지 죄책감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 스멀스멀 몰려왔지만 우선은 현주 앞에서 내색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암튼, 아무리 섹스에 집중했기로소니 외간 여자랑 옷 벗고 뒹구느라 여친 생각을 머리에서 아예 지워버리다니...
인간 최성진, 생각보다 더 쓰레기일지도 모르겠다.
*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았던 아침의 그 소동이 어찌어찌 겨우 수습되었다. 현주는 근처에서 같이 밥이라도 간단히 먹자며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동안 다시 혼자 남게된 나는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처음 들어와보는 여자친구의 집 생김새를 이래저래 구경했다.
"현주네 집은... 의외로 잘 사는 것 같네."
집안 인테리어나 소품 등을 놓고 미루어 짐작할 때, 분명 "없는 집안"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보니 문득 현아 씨도 온 몸에 고급스런 장식들을 주렁주렁 하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충격적인 노팬티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지만....
"어라? 현주는요?"
깜짝 놀랐다. 방으로 사라졌던 현아 씨가 어느새 다시 나와 있었다. 현아 씨의 등 뒤쪽으로 방 문 하나가 열려있는 것으로 봐서 저기가 현아 씨의 방인 것 같았다. 하지만 더욱 놀랄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갈게. 멀리 나오지 마."
"알았어~ 조심히 가. 내가 말한거 꼭 신경쓰구."
현아 씨의 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웬 남자 하나가 따라나왔던 것이다. 방에서 나온 남자는 곧장 신발장에서 구두를 챙겨신었다. 그러고보니 들어올 때 벗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남자 구두가 있었긴 했지만, 현주 아버님 것이라도 되나보다 하며 신경쓰지 않았었다.
나이가 그렇게 많아보이는 사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편도 아니었다. 나보다 족히 열살 정도는 윗줄에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보아 적어도 30대가 분명했다. 신발을 신던 남자와 우연히도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개의치 않으며 구두를 마저 신더니, 마중을 하러 현관까지 나온 현아 씨에게 흘끗 물었다.
"고객이야?"
"아니야. 동생 남친이야."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둘이 무슨 사이인걸까?
현아 씨는 분명 애인은 없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현주 말로는 남자들에게 인기는 많다고 했지만.
남자가 그렇게 가버리자 엘리베이터까지 나갔던 현아 씨도 현관문을 닫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그저 생글생글 웃었는데, 그 웃음은 확실히 자기 동생의 것과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현아 씨,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부모님 나가셨다고 했지 집에 아무도 없다고는 안 했는데...."
그, 그런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부모님도 안 계신 와중에, 그것도 여자 둘만 있는 집에 남자가 집 안까지 들어왔다는거 아니야. 물론 나도 지금 마찬가지긴 했지만 현주가 자고 있는 마당에 웬 낯선 남자가 현주 집에 들어와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어디까지나 현아 씨와 관계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남자친구에요?"
두 사람이 같은 방에서 나온걸보면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현아 씨가 아까 전에 보여주었던 그 경악스런 노출 차림을 생각한다면, 남자친구가 아닌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보니 동생한테 한 소리 구박을 먹어서 그런지, 그 위에 가디건을 한겹 더 걸치긴 했지만 하의를 입지 않은 하체는 그대로여서 가디건 자락 밑으로 맨 다리가 보이는 것은 여전했다.
"음, 비밀이요. 호호."
"그런거 안 키운다고 하시더니 그새 하나 만드셨나봐요."
"노코멘트할게요. 원래 예쁜 여자는 비밀이 많아요."
그 명쾌하지 못한 대답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섹스파트너라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입 밖으로 말했다간 엄청난 실례가 될게 뻔해서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졸업식에서도 느꼈지만 그녀에게는 왠지 함부로 질문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현주는 어디갔어요?"
"안에서 준비 좀 하고 나온대요."
"킥킥, 평소에 추리닝 바람으로 잘만 돌아다니는 애가 저렇게 유난법석 떠는거보면 성진 씨가 좋긴 좋은가봐요."
"기분은 좋네요."
"그보다 성진 씨."
"네?"
현아 씨는 가타부타 뜬금없이 내게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었다. 손바닥을 펴보니 바람개비 모양으로 곱게 접힌 쪽지 한 장이었다. 뭐지 이건?
"그거 나중에 읽어요. 난 좀 더 자야겠어요. 그럼 이만~"
부연설명도 없이 그녀는 자기 방으로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나는 접힌 쪽지를 멍청하게 잠시 손에 쥐고 있다가, 꼬깃꼬깃 펼쳐서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원래 호기심은 참기 힘든 법이다. 의외로 내용은 아주 심플했다.
핸드폰 번호 하나. 그리고 딱 두 마디.
- 010-XXXX-XXXX.
- 내 번호에요. 저장해둬요.
대체 왜?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생각 좀 해보려는데, 하필 그 순간 현주가 옷을 다 챙겨입고 나왔다. 나는 영문도 모르면서 괜시리 쪽지를 접어 다시 주머니에 숨겼다.
"가자, 오빠."
"응. 근데 현주야."
"응?"
"집에 손님이 있었던거 같은데... 누구야?"
"......."
현주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언니 방의 문을 가만히 노려보던 현주가 내게 물었다.
"그 사람 갔어?"
"응. 아는 사람이야?"
"그냥... 언니 손님이야."
현주의 대답을 들어보니 도저히 남자친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현주의 기묘한 표정을 보니 더 캐묻기가 힘들었다. 여친의 언니 일에 괜한 관심 갖지 말기로 하고 나도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 날 현주와 늦은 아침식사를 함께하고 동네 근처에서 가벼운 데이트를 즐겼다. 덕분에 서연이에겐 미안하지만 자취방의 북어국은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다. 돌아갈 때가 되어 현주를 다시 집으로 바래다주었을 때, 그녀가 까치발을 세워 내게 기습키스를 해주었다. 키스라기보단 뽀뽀에 가까웠지만, 아무튼 그녀가 화가 풀린 것 같아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
2학기가 시작되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기 전, 여태껏 미뤄두었던 자동차 면허를 땄다. 삶의 풍족함을 느끼고 나니 아무래도 자가용이 한 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는 명품 옷이나 장신구처럼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으로 손쉽게 훔쳐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기에 나는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로또 번호라도 맞춰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복권에 당첨되면 암만 꼭꼭 숨겨도 주변에서 돈 냄새 맡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건 패스했다. 고민 끝에 선택한 방법이 자동차 경품 응모 이벤트였다. 복권식으로 번호 응모 이벤트를 개최하는 곳을 찾기만 하면 내가 경품을 따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 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좌우지간 그렇게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자동차 한 대를 장만해냈다.
개강 첫 날, 뿌듯한 마음으로 새 자동차를 캠퍼스 주차장에 세웠다. 허세는 아니었지만 더이상 버스를 타고 등교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내가 자동차를 타고 오든 자전거를 타고 오든 이 학교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를 옆으로 오토바이 두어 대가 나란히 서 있는게 보였다. 오토바이를 보니 왠지 얼마 전에 있었던 해괴한 기억이 떠올라 뭔가 기분이 묘했다. 그 싹수없는 계집애...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다음에 또 동네에서 마주치면 반드시 혼구녕을 내줄거다.
"안녕하세요, 선배."
전공수업에 들어가자마자 서연이를 만났다. 학번은 달랐어도 학년은 같았기에 수업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첫 날 첫 수업에서부터 그녀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예상과 다르게 아주 또박또박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보니 여태껏 그녀가 학교에서 제대로 먼저 인사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
"으응, 안녕. 너도 이 수업 듣는구나."
"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그 날 밤의 섹스를 떠올렸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평소처럼 쿨한 모습 그대로였다. 서연이와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많이 생각도 해봤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나를 자연스럽게 대하는 그녀를 보니 왠지 내가 쓸데없이 걱정을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암튼 그렇게 뒷자리에 앉았다.
꿈지럭거리며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어서 지환이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 지환이의 시선이 멈칫하며 잠깐 서연이에게로 머물렀다. 헤어진 마당에 학교에서 저렇게 얼굴보고 지내려면 참 불편하겠구나. 그건 그렇고 서로 합의 하에 나랑 서연이가 질펀하게 뒹굴었단 사실을 저 녀석이 알면 과연 어떻게 나올까?
"서연 선배, 여기 1학년들 MT참석자 명단 체크해온거에요."
수업이 끝나자 1학년 과대표가 서연이에게 서류 한장을 들고 왔다. 강의실을 나가려고 가방을 챙기던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서연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서연이는 2학기부터 우리과 학회장이라고 했었지. 학과 행사 하나하나를 일일이 신경 써서 체크하고 후배들 챙기려면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인 왜 굳이 그 힘든 일을 맡아서 하겠다고 나선 걸까?
"선배."
강의실을 나가려는데 서연이의 목소리가 날 잡아세웠다. 서연이와 겪었던 우리만의 특별한 경험 때문인지 서연이의 자연스러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 앞에서 괜히 태도가 어색해진다. 그런 내 모습이 싫었다.
"갈거죠?"
"응?"
"지난 번에 얘기했잖아요. 2학기 학과 MT."
"아아.. 그거.."
물론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기억나지만, 그것보다도 그 이야기를 했던 날 밤에 서연이와 내가 했던 짓이 먼저 떠오르는 내 자신이 왠지 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연이는 재촉없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 좀 해보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되잖아요."
"아.. 알았어. 갈게."
섹스할 때 나와 서연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주인과 육노예로 칭할 만큼 주종 관계가 확실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일상에서는 서연이를 대함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소심해지는 것 같았다.
서연이는 그걸 무슨 반전매력 쯤으로 치부하는 것 같았고, 나 또한 서연이의 그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도도한 태도가 더 맘에 들긴 했으니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아무튼 빤히 바라보는 그 시선을 대하고 있자니 왠지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참가비 2만원이에요."
서연이가 재학생들의 MT 참석 여부를 체크하는 종이를 펄럭펄럭 보여주며 덧붙였다. 이제보니 처음부터 내 이름에 동그라미를 쳐둔 상태였다. 참 나... 맹랑한 년 같으니.
강의실을 나오려는데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지환이 녀석이 겁날 정도로 띠꺼운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뭘 보냐?"
"......"
거북스런 눈빛을 쏴대던 지환이 녀석은 이내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 가버렸다.
왠지 앞으로도 골치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팍팍 든다고나 할까....
주차장에 세워뒀던 애마의 문을 열었다. 개강 첫 수업이라 대체적으로 수업들이 일찍 마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현주 얼굴이라도 볼까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시동을 거는데 문득 아까 보았던 오토바이 중 한 대에 사람이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 차창 너머로 보였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너울거리는 긴 생머리는 확실히 보인다. 여자였다.
"세상에는 참 닮은 사람이 많기도 하지."
바르르릉 소리를 내며 캠퍼스 아래로 멀어져가는 오토바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월요일이네요. 또 한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가끔은 시간은 되감아서 주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월요병 잘 이겨내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8장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이미 서연이는 가고 없었다. 간밤에 수차례 섹스를 하면서 그녀의 몸 곳곳에 묻은 내 정액들을 닦아준 크리넥스 뭉치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어야 하는데, 바닥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걸 보니 그녀가 정리를 하고 간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을 청소하고 갔는지 방 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고 정갈한 모습이었다. 마치 어젯밤의 일이 모두 꿈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스렌지에 붙은 메모 쪼가리 한장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꿈이었나 하고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메모지를 떼서 읽어보았다.
- 학교에서 봐요. 아침 차려놨으니까 일어나서 먹구요.
렌지에 올려져 있는 냄비를 열어보니 북어국이 담겨져 있다. 이걸 언제 조리했지 싶어서 살짝 맛을 봤는데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마트에서 파는 조리된 식품이었다. 이제보니 렌지 옆에 햇반도 포개놓은 것이 보인다.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사왔나보다. 왠지 귀여웠다.
혹시 몰라서 메모지를 뒤집어보니까 뒷면에 한줄이 더 있었다.
- 어젠 고마웠어요.
서연이에겐 이런 면도 있구나. 만약 현주가 아니라 서연이랑 잘 되어서 사귀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순간 뒤통수를 강타하듯 잊고 있었던게 떠올라 급하게 핸드폰을 찾았다.
"웁스..."
현주로부터 날아온 부재중 전화를 포함해서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차마 읽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고 대충 보니 "벌써 자?",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혹시 화난거야?", "오빠 전화좀 받아봐." 등등의 메시지들이 주루룩 쌓여있었다.
"이런..."
황급히 전화를 걸어보았다. 통화음이 길게 울리는 동안 마음이 초조하게 타들어갔다.
현주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톡이든 메시지든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답장이 오지 않는다. 이쯤되니 뭔가 불안해진다.
지은 죄가 있어 그런 것이겠지만, 말도 안 되는 망상들을 하기 시작한다.
혹시 연락이 안 되니 답답해서 현주가 새벽에 여기까지 왔던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서연이랑 누워있는 나를 본건 아닐까?
"끄응..."
연애경험조차 비리비리한 내가 여자문제로 이런 난관에 봉착해 본 경험이 있을리 없었다. 내 머리로 생각해봐야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현주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인내심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현주의 표현을 고스란히 빌리자면, 나는 "연애초보"였기 때문이다.
"택시!"
택시를 잡아타고 현주네 집까지 쏜살같이 달렸다. 다행히 예전에 집까지 그녀를 바래다줬을때 혹시 몰라 현주네의 정확한 동과 호를 물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우선 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 그 순간에 고작 내어놓을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아마 내가 간밤에 현주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그 혼자만의 "죄책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괜시리 오버해서 날뛰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딩동~
아파트에 도착해 초조한 마음으로 벨을 눌러본다. 아침부터 남의 집에 불쑥 찾아오는 것이 실례가 될줄은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사태부터 파악하고나서, 뭔가 잘못 돌아간다 싶으면 시간을 되감아 버리면 되니까.
- 누구세요?
"저, 저기.. 혹시 현주네 집인가요?"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현주일까?
기계음이 조잡해서 제대로 분간할 수는 없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잘못 찾아온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다행히 잘못 찾아온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진 씨 아니에요?"
"혀, 현아 씨..."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현주가 아니라 그녀의 언니였다. 집을 제대로 찾아왔다는 안도감과, 갑작스럽게 그녀의 언니와 마주쳤다는 당황함이 뒤섞여 바보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게다가 그런 이유 외에도, 문을 열고 나온 현주 언니의 복장을 보는 순간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질 수 밖에 없었다.
장담하건대, 지금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고 정신없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난 현아 씨의 차림새를 보는 순간 입을 쩍 벌리고 그 자리에 굳어졌을 것이다. 그녀의 몸을 두르고 있는 헐렁한 와이셔츠 한 장 밑으로는 맨살의 살결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하의는 입지 않았는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매끈하고 길쭉한 다리 한 쌍이 펄럭이는 셔츠 자락 밑으로 곧게 뻗어있었고, 심지어는 속옷조차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브래지어와 팬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옅은 살색만이 비치고 있었다. 만약 속옷을 입은게 아니라면, 이 여자는 지금 알몸에 와이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치고 나온 것이었다.
"혀, 현아 씨... 저기, 그게... 현주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서 민망하게 시선을 피하면서 얘기하자 그녀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들어올래요? 엄마 아빠 지금 다 나가셨거든요."
"그, 그래도 되나요? 근데... 혹시 현주한테 무슨 일 있는건 아니죠?"
"무슨 일 있죠. 어제 거의 밤새도록 성진 씨 연락만 기다리다가 울다 지쳐 잠들었어요."
"네에? 울다 지쳐요?"
"그러고보니 왜 내 동생 울리고 그래요? 괜찮게 봤는데 실망이에요."
"미, 미안해요... 그럴 일이 좀...."
"농담이에요. 연인 문제는 당사자들끼리 얘기해야죠. 일단 들어와요."
현아 씨는 그런 야한 옷차림을 하고도 서슴없이 문을 열어주고 뒤돌아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며 보니 와이셔츠의 밑자락 아래로 엉덩이의 살결이 미세하게 실룩이는 윤곽이 보였다.
졸업식에서의 노팬티 사건도 그렇고.... 현아 씨는 혹시 노출증 환자 같은게 아닐까?
"야! 박현주! 일어나봐. 왕자님께서 직접 오셨네."
집은 생각보다 아주 넓었고, 고급스러웠다.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간 현아 씨가 현주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곳이 현주의 방인가보다. 나는 그저 거실 한가운데에 어색한 자세로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뭐...? 무슨 소리야."
"성진 씨 왔다구. 너 보러 왔대."
순간 요란하게 뭔가가 우당탕하는 소리가 방 안에서 새어나왔다. 다급함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소란스런 소리가 몇 차례 울림과 동시에 현아 씨가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게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웃음지었다.
"곧 나올 거에요."
그러고선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옷을 대충 걸쳐입은 현주가 헐레벌떡하니 당황한 얼굴로 뛰어나왔다.
"오, 오빠...!"
"으응. 현주야..."
"오빠! 일단 눈 돌려.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나 쳐다보지마. 지금 세수도 안 했단 말이야!"
"아, 으응. 알겠어."
우리는 서로 다른 의미로 당황했다. 현주는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고 나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덕분에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주방으로 들어간 현아 씨가 간단하게 마실 것을 담아서 내어왔고, 일단 좀 앉으라는 현아 씨의 권유에 내가 슬며시 식탁 의자에 앉을 때쯤 세수를 끝낸 현주가 등장했다. 이제보니 그 짧은 사이에 기초 화장까지 하고 온 것 같았다.
"오빠! 집엔 어떻게 왔어?"
"네가 연락이 안 되길래.... 걱정되서 그랬지. 예전에 집이 몇 호인지 들어놨으니까."
"씨이...! 그렇다고 이렇게 불쑥 오면 어떡해. 그거 완전 매너없는 짓인거 몰라?"
"미, 미안. 너무 예의가 없었지? 부모님 계실지도 몰랐는데."
"뭔 소리야. 그딴게 문제가 아니라, 잠옷바람에 눈곱까지 붙인 얼굴을 오빠가 봤잖아!"
"뭐? 아냐... 니가 눈 돌리래서 안 보고 있었어."
"거짓말 하지 마."
"진짜야."
아웅다웅거리는 우리 모습을 본 현아 씨가 닭살 돋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랑 싸움할거면 집 밖에 나가서 하고."
"잠깐, 언니..."
그제야 자기 언니의 파격적인 옷차림을 눈으로 확인한 현주가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맨다리가 훤히 보이는데다 속살까지 희미하게 비치는 현아 씨의 알몸 와이셔츠 차림을 잠시 살펴보던 현주의 얼굴이 서서히 아연실색하기 시작했다.
"어, 언니... 혹시 그 꼴로 나갔던 거야?"
"응. 지금도 이러고 있잖아. 왜?"
"미쳤어!? 빨리 방으로 들어가!!!"
현주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처음 봤다. 아니, 그렇게 화를 낼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처음 알았다. 그냥 신경질을 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나한테까지 확연히 느껴질 만한 분노를 담은 고함소리였다.
"알았어, 알았어. 기지배가 괜히 지랄이야."
하지만 현아 씨는 무슨 어린애 땡깡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그 분노를 받아넘겼다. 자신의 무지막지한 노출도를 본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경쾌하기까지 한 걸음걸이로 사뿐사뿐 그녀가 주방을 나가버리자 현주는 잠시 화를 가라앉히느라 숨을 씩씩거렸다.
"혀, 현주야."
"......."
그러잖아도 지은 죄가 있어 온 건데, 현주가 별 생각지도 못한 일로 화가 폭발하니 나는 더더욱 눈치를 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현주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마침내 내게 시선을 옮겼다.
"언니보고 이상한 생각 한거 아니지?"
"그, 그럼. 지금 내가 딴 생각할 여유가 어딨어. 니가 전화 안받으니까 걱정되서 죽는 줄 알았어."
"그게 걱정할 일이란걸 아는 사람이 내 연락은 왜 밤새도록 안받았는데?"
"미, 미안해. 진짜 미안해. 너무 일찍 잠들어버렸어. 내가 잔다고 말을 하고 잤어야 하는데... 깜빡 잠든데다가 핸드폰도 무음으로 해놔서 몰랐어."
양심이 콕콕 찔리긴 했지만, 진실을 그대로 실토한다는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나를 노려보는 현주의 눈빛에 나는 그저 고양이 앞의 쥐꼴이 되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현주의 시선을 감히 마주할 용기가 없어 시선을 피하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 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현주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는걸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혀, 현주야. 왜 울어?"
"흑... 흐흑..."
운다. 현주가 또 운다. 현주는 왜 이렇게 뜬금없이 잘 우는 걸까?
난 졸지에 이틀 연속으로 여친을 눈앞에서 울려버린 남친이 되고 말았다.
"흑.. 흑흑... 난... 오빠가 일부러 안 받는줄 알았잖아."
"응? 뭐라구?"
"내가 오빠 마음 무시해서... 흑흑... 그, 그거 안해줘서.... 그래서 나 싫어져서 일부러 안 받는줄 알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아? 흑...."
"......."
그 순간 말도 안될 만큼 모순적이게도, "안쓰러움"과 "안도감"이라는 두 가지 전혀 다른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안쓰러움이야 당연한 거고, 안도감은 현주의 눈물을 보니 적어도 내가 혼자 상상했던 그런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확실히 섰기 때문이었다.
어제 집에 가는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도 현주는 내게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갔는데, 내가 어제 그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연락을 무시한 거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보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나 너한테 화난거 아무 것도 없어. 진짜야."
"씨이.. 몰라.. 흑흑... 계속 잠도 못자고 오빠 전화만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들었단 말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잔다고 말을 하고 잤어야 했는데... 우리 현주가 많이 속상했구나."
"훌쩍... 훌쩍...."
서럽게 흐느끼고는 있지만 현주 또한 속으로 안도하고 있다는게 느껴져왔다. 그래서 괜히 더 마음이 아팠다.
"오빠가 현주 맘 아프게 했으니까 오늘 너가 해달라는거 다 해줄게. 오빠가 뭐해줄까?"
"씨잉... 됐어..."
갓난 애기 달래듯이 어르고 달래서 현주의 눈물이 멎어들자, 나는 마치 지구 평화라도 지켜낸 것처럼 긴장이 탁 풀리는게 느껴졌다. 다행히 사태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불안함이라는 한 고비를 넘기고나니 떠올리기를 미뤄두었던 다른 감정들, 이를 테면 극도의 회의감이라던지 죄책감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 스멀스멀 몰려왔지만 우선은 현주 앞에서 내색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암튼, 아무리 섹스에 집중했기로소니 외간 여자랑 옷 벗고 뒹구느라 여친 생각을 머리에서 아예 지워버리다니...
인간 최성진, 생각보다 더 쓰레기일지도 모르겠다.
*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았던 아침의 그 소동이 어찌어찌 겨우 수습되었다. 현주는 근처에서 같이 밥이라도 간단히 먹자며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동안 다시 혼자 남게된 나는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처음 들어와보는 여자친구의 집 생김새를 이래저래 구경했다.
"현주네 집은... 의외로 잘 사는 것 같네."
집안 인테리어나 소품 등을 놓고 미루어 짐작할 때, 분명 "없는 집안"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보니 문득 현아 씨도 온 몸에 고급스런 장식들을 주렁주렁 하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충격적인 노팬티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지만....
"어라? 현주는요?"
깜짝 놀랐다. 방으로 사라졌던 현아 씨가 어느새 다시 나와 있었다. 현아 씨의 등 뒤쪽으로 방 문 하나가 열려있는 것으로 봐서 저기가 현아 씨의 방인 것 같았다. 하지만 더욱 놀랄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갈게. 멀리 나오지 마."
"알았어~ 조심히 가. 내가 말한거 꼭 신경쓰구."
현아 씨의 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웬 남자 하나가 따라나왔던 것이다. 방에서 나온 남자는 곧장 신발장에서 구두를 챙겨신었다. 그러고보니 들어올 때 벗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남자 구두가 있었긴 했지만, 현주 아버님 것이라도 되나보다 하며 신경쓰지 않았었다.
나이가 그렇게 많아보이는 사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편도 아니었다. 나보다 족히 열살 정도는 윗줄에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보아 적어도 30대가 분명했다. 신발을 신던 남자와 우연히도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개의치 않으며 구두를 마저 신더니, 마중을 하러 현관까지 나온 현아 씨에게 흘끗 물었다.
"고객이야?"
"아니야. 동생 남친이야."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둘이 무슨 사이인걸까?
현아 씨는 분명 애인은 없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현주 말로는 남자들에게 인기는 많다고 했지만.
남자가 그렇게 가버리자 엘리베이터까지 나갔던 현아 씨도 현관문을 닫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그저 생글생글 웃었는데, 그 웃음은 확실히 자기 동생의 것과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현아 씨,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부모님 나가셨다고 했지 집에 아무도 없다고는 안 했는데...."
그, 그런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부모님도 안 계신 와중에, 그것도 여자 둘만 있는 집에 남자가 집 안까지 들어왔다는거 아니야. 물론 나도 지금 마찬가지긴 했지만 현주가 자고 있는 마당에 웬 낯선 남자가 현주 집에 들어와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어디까지나 현아 씨와 관계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남자친구에요?"
두 사람이 같은 방에서 나온걸보면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현아 씨가 아까 전에 보여주었던 그 경악스런 노출 차림을 생각한다면, 남자친구가 아닌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보니 동생한테 한 소리 구박을 먹어서 그런지, 그 위에 가디건을 한겹 더 걸치긴 했지만 하의를 입지 않은 하체는 그대로여서 가디건 자락 밑으로 맨 다리가 보이는 것은 여전했다.
"음, 비밀이요. 호호."
"그런거 안 키운다고 하시더니 그새 하나 만드셨나봐요."
"노코멘트할게요. 원래 예쁜 여자는 비밀이 많아요."
그 명쾌하지 못한 대답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섹스파트너라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입 밖으로 말했다간 엄청난 실례가 될게 뻔해서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졸업식에서도 느꼈지만 그녀에게는 왠지 함부로 질문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현주는 어디갔어요?"
"안에서 준비 좀 하고 나온대요."
"킥킥, 평소에 추리닝 바람으로 잘만 돌아다니는 애가 저렇게 유난법석 떠는거보면 성진 씨가 좋긴 좋은가봐요."
"기분은 좋네요."
"그보다 성진 씨."
"네?"
현아 씨는 가타부타 뜬금없이 내게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었다. 손바닥을 펴보니 바람개비 모양으로 곱게 접힌 쪽지 한 장이었다. 뭐지 이건?
"그거 나중에 읽어요. 난 좀 더 자야겠어요. 그럼 이만~"
부연설명도 없이 그녀는 자기 방으로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나는 접힌 쪽지를 멍청하게 잠시 손에 쥐고 있다가, 꼬깃꼬깃 펼쳐서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원래 호기심은 참기 힘든 법이다. 의외로 내용은 아주 심플했다.
핸드폰 번호 하나. 그리고 딱 두 마디.
- 010-XXXX-XXXX.
- 내 번호에요. 저장해둬요.
대체 왜?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생각 좀 해보려는데, 하필 그 순간 현주가 옷을 다 챙겨입고 나왔다. 나는 영문도 모르면서 괜시리 쪽지를 접어 다시 주머니에 숨겼다.
"가자, 오빠."
"응. 근데 현주야."
"응?"
"집에 손님이 있었던거 같은데... 누구야?"
"......."
현주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언니 방의 문을 가만히 노려보던 현주가 내게 물었다.
"그 사람 갔어?"
"응. 아는 사람이야?"
"그냥... 언니 손님이야."
현주의 대답을 들어보니 도저히 남자친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현주의 기묘한 표정을 보니 더 캐묻기가 힘들었다. 여친의 언니 일에 괜한 관심 갖지 말기로 하고 나도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 날 현주와 늦은 아침식사를 함께하고 동네 근처에서 가벼운 데이트를 즐겼다. 덕분에 서연이에겐 미안하지만 자취방의 북어국은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다. 돌아갈 때가 되어 현주를 다시 집으로 바래다주었을 때, 그녀가 까치발을 세워 내게 기습키스를 해주었다. 키스라기보단 뽀뽀에 가까웠지만, 아무튼 그녀가 화가 풀린 것 같아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
2학기가 시작되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기 전, 여태껏 미뤄두었던 자동차 면허를 땄다. 삶의 풍족함을 느끼고 나니 아무래도 자가용이 한 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는 명품 옷이나 장신구처럼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으로 손쉽게 훔쳐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기에 나는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로또 번호라도 맞춰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복권에 당첨되면 암만 꼭꼭 숨겨도 주변에서 돈 냄새 맡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건 패스했다. 고민 끝에 선택한 방법이 자동차 경품 응모 이벤트였다. 복권식으로 번호 응모 이벤트를 개최하는 곳을 찾기만 하면 내가 경품을 따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 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좌우지간 그렇게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자동차 한 대를 장만해냈다.
개강 첫 날, 뿌듯한 마음으로 새 자동차를 캠퍼스 주차장에 세웠다. 허세는 아니었지만 더이상 버스를 타고 등교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내가 자동차를 타고 오든 자전거를 타고 오든 이 학교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를 옆으로 오토바이 두어 대가 나란히 서 있는게 보였다. 오토바이를 보니 왠지 얼마 전에 있었던 해괴한 기억이 떠올라 뭔가 기분이 묘했다. 그 싹수없는 계집애...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다음에 또 동네에서 마주치면 반드시 혼구녕을 내줄거다.
"안녕하세요, 선배."
전공수업에 들어가자마자 서연이를 만났다. 학번은 달랐어도 학년은 같았기에 수업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첫 날 첫 수업에서부터 그녀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예상과 다르게 아주 또박또박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보니 여태껏 그녀가 학교에서 제대로 먼저 인사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
"으응, 안녕. 너도 이 수업 듣는구나."
"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그 날 밤의 섹스를 떠올렸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평소처럼 쿨한 모습 그대로였다. 서연이와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많이 생각도 해봤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나를 자연스럽게 대하는 그녀를 보니 왠지 내가 쓸데없이 걱정을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암튼 그렇게 뒷자리에 앉았다.
꿈지럭거리며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어서 지환이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온 지환이의 시선이 멈칫하며 잠깐 서연이에게로 머물렀다. 헤어진 마당에 학교에서 저렇게 얼굴보고 지내려면 참 불편하겠구나. 그건 그렇고 서로 합의 하에 나랑 서연이가 질펀하게 뒹굴었단 사실을 저 녀석이 알면 과연 어떻게 나올까?
"서연 선배, 여기 1학년들 MT참석자 명단 체크해온거에요."
수업이 끝나자 1학년 과대표가 서연이에게 서류 한장을 들고 왔다. 강의실을 나가려고 가방을 챙기던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서연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서연이는 2학기부터 우리과 학회장이라고 했었지. 학과 행사 하나하나를 일일이 신경 써서 체크하고 후배들 챙기려면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인 왜 굳이 그 힘든 일을 맡아서 하겠다고 나선 걸까?
"선배."
강의실을 나가려는데 서연이의 목소리가 날 잡아세웠다. 서연이와 겪었던 우리만의 특별한 경험 때문인지 서연이의 자연스러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 앞에서 괜히 태도가 어색해진다. 그런 내 모습이 싫었다.
"갈거죠?"
"응?"
"지난 번에 얘기했잖아요. 2학기 학과 MT."
"아아.. 그거.."
물론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기억나지만, 그것보다도 그 이야기를 했던 날 밤에 서연이와 내가 했던 짓이 먼저 떠오르는 내 자신이 왠지 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연이는 재촉없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 좀 해보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되잖아요."
"아.. 알았어. 갈게."
섹스할 때 나와 서연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주인과 육노예로 칭할 만큼 주종 관계가 확실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일상에서는 서연이를 대함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소심해지는 것 같았다.
서연이는 그걸 무슨 반전매력 쯤으로 치부하는 것 같았고, 나 또한 서연이의 그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도도한 태도가 더 맘에 들긴 했으니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아무튼 빤히 바라보는 그 시선을 대하고 있자니 왠지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참가비 2만원이에요."
서연이가 재학생들의 MT 참석 여부를 체크하는 종이를 펄럭펄럭 보여주며 덧붙였다. 이제보니 처음부터 내 이름에 동그라미를 쳐둔 상태였다. 참 나... 맹랑한 년 같으니.
강의실을 나오려는데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지환이 녀석이 겁날 정도로 띠꺼운 눈빛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뭘 보냐?"
"......"
거북스런 눈빛을 쏴대던 지환이 녀석은 이내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 가버렸다.
왠지 앞으로도 골치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팍팍 든다고나 할까....
주차장에 세워뒀던 애마의 문을 열었다. 개강 첫 수업이라 대체적으로 수업들이 일찍 마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현주 얼굴이라도 볼까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시동을 거는데 문득 아까 보았던 오토바이 중 한 대에 사람이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 차창 너머로 보였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너울거리는 긴 생머리는 확실히 보인다. 여자였다.
"세상에는 참 닮은 사람이 많기도 하지."
바르르릉 소리를 내며 캠퍼스 아래로 멀어져가는 오토바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월요일이네요. 또 한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가끔은 시간은 되감아서 주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월요병 잘 이겨내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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