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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리와인더 - 1부9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07:34 1,163회 0건
*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9장


"그래서 다음 주엔 학과 MT를 다녀올 것 같아. 1박으로...."

현주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는데 왠지 목소리가 떨렸다. 대학생이 MT 한번 갔다온다는게 무슨 큰 죄를 짓는 일은 아니건만, 행여나 현주에게 내 속을 들킬까 괜히 불안했다. 사실 신입생 이후로 생전 안가던 MT를 갑자기 가게 된 이유는 순전히 서연이 때문이라고 봐야 했으니까. 현주가 서연이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 꼭 가야 되는거야?"
"음... 그게... 친한 애들끼리 지난 학기부터 가기로 되있던 거라서..."

우리 학과 사람이 듣는다면 배를 잡고 웃을 얘기다. 내가 학과에 친한 애들이 어디있나...
현주는 내가 그런 자리에 다녀오는 것이 마냥 기분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누구든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술마시고 노는 자리에 가서 1박으로 자고 온다는 이야길 들으면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칫. 뭐 어쩔 수 없긴 한데... 가서 어린 여자 후배들이랑 막 술 마시고 게임하고 그러는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그런거 없어. 나 아웃사이더야."
"친한 애들끼리 가기로 되있던 거라며?"
"아, 아니 그게... 몇 명만 친하다는 거지. 대부분은 나 몰라."
"왜 당황하고 그래? 수상하게."
"네, 네가 화난 것 같으니까 그러지. 신경 쓰이면 그냥 가지말까?"
"됐어. 내가 뭐 그런거 구속하는 여자로 보여? 가서 꼬박꼬박 연락이나 잘해."

"가지말까?" 라고 물었을때 "응, 가지마" 라는 대답이 나왔으면 꽤 난감할 뻔 했다. 다행히 현주는 못마땅한 와중에도 나름대로 이해하는 눈치였고, 나도 현주 마음이 바뀔까봐 더이상 그 화제에 대해서는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나는 굳이 그런 자리에 가려고 하는 걸까? 서연이랑 약속을 해서? 내가 서연이를 그만큼 신경 쓰고 있는건가? 서연이하고는 이미 완전히 물 건너간 사이인데....

"그럼 섹스는 나랑 할래요?"

서연이가 내게 했던 말이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정말 진심이었을까?

"내가 선배 정액받이 해줄게요."

더 자극적인 말까지 연달아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하체에 힘이 들어갔다. 현주가 혹시라도 눈치챌까봐 괜히 딴청을 피워본다.

"뭐 만들어?"

요리를 하고 있는 현주를 괜스레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얼굴을 마주하면 심란한 표정이 드러날 것 같아서였다.

현주는 내 자취방에 한번 들어온 이후로 그때부터 별 거리낌 없이 내 방에 들락거리며 종종 이렇게 요리도 해주고, 가끔은 내가 미뤄놓은 청소나 빨래 같은걸 자기 손으로 해주기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 만류를 했지만 현주는 아랑곳 않는 것 같았다.

사실 현주가 지나치게 수고스러울까봐 말렸던 이유도 있지만, 내게는 현주가 가급적 내 방에 오랜시간 머물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면 현주와 긴 시간 동안 같은 방 안에 있다보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자꾸 성욕이 치밀어 오르는걸 억제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현주가 눈물을 보였던 그 이후로 나는 현주에게 직접적인 섹스 어필을 먼저 꺼낸 적이 없었고, 현주도 내가 일부러 그 부분에 대해서 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게 틀림 없었다. 내가 굳이 먼저 안달할 필요 없이 기다리고 있으면, 현주도 눈치가 있는 이상 언젠가는 자기 쪽에서 먼저 신호를 보낼 것이란게 내 생각이었다.

물론 기약 없는 이벤트를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을 이용해 현주를 강제로 범할 생각을 하지 않는 나를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오기였다. 결코 강간을 통해서 취하지 않고, 내 능력으로 현주를 떳떳하게 취해보겠다는 남자로서의 오기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주는 처음으로 내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과 사귀었다"는 성취감을 내게 안겨준, 여자친구 중에서도 특별한 여자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타임 리와인더가 있다고 한들 그걸 평생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이상, 이 부분 만큼은 내 힘으로 해결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액받이 해줄게요."

하지만 이렇게 어엿한 여자친구를 놔두고, 반 강제로 독수공방 신세를 이어나가려다 보니 자꾸만 머릿 속에 서연이의 존재가 떠오르는 것은 한편으로.... 정말 어쩔 수 없는 일.

특히 서연이가 했던 그 자극적인 한 마디가 하루에도 몇번씩 자꾸만 귓전을 울리곤 했다. 그건 바람을 피느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확실히 별개의 문제였다.

이런 내 심란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주는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요리를 하고 있다.

"봉골레 파스타야. 거의 다 됐으니까 좀만 기다려~"
"응. 냄새 좋다."

뒤에서 현주를 포옹하자 현주는 요리를 하는 와중에도 잠시 짬을 내어 뒤로 돌아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잔잔한 물결이 고요하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조용한 키스가 이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도 그 선을 넘지 않았고, 현주도 내 그런 마음을 이해했는지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직까지는 참을 수 있다. 아직까지는.


*


또 한편으로, 나는 현아 씨가 내게 남긴 쪽지의 의미를 아무리 생각해도 끝내 해석할 수가 없었다. 물론 표면상 쪽지의 의미는 매우 간단했다. 거기 적힌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만 시키면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왜?" 라는 의문은 내내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나는 괜한 망상에 혼자 빠져들곤 했다.

솔직히 말해서, 상식적인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동생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남자친구의 연락처를 알아두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의도였다면 이렇게 쪽지를 통해서 자신의 연락처를 내게 남기는 것보다는 "내 연락처"를 얻어갔어야 맥락상 말이 된다.

게다가 현아 씨의 비범한 성격이나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게 결코 상식적인 의도로 한 행동은 아닐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자꾸 나를 시달리게 했다. 현아 씨를 만난건 딱 두 번 밖에 없었기에 내가 그녀를 잘 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지만, 느낌상 그녀가 결코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딱 꼬집어 설명하기는 힘들었지만 뭐랄까... 그녀의 행동이나 말투 하나하나에서는 뭔가 "성적"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 야릇한 느낌은 분명 "여친의 언니"에게서 느낄 만한 감정은 아니었기에, 나는 괜히 혼자서 죄 지은 듯한 찝찝함에 시달렸던 것이다.

아무튼 결국 현아 씨의 쪽지대로 그녀의 연락처를 휴대폰에 입력은 해두었지만, 그녀로부터 연락이 온다거나 하는 일은 여태껏 없었다. 게다가 만약 그녀가 내 연락처를 모른다면, 나 혼자 그녀의 번호를 저장해두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카카오톡에 떴네."

그녀의 연락처를 저장해두니 자동으로 카카오톡에 그녀의 프로필이 떴다. 프로필에는 그녀 자신의 얼굴 사진이 걸려있었다. 현주는 돌아가고 나는 마침 혼자 있었기에, 호기심에 그 사진을 클로즈업 해보았다.

"두 사람이 참 닮긴 닮았구나."

현아 씨는 현주와 피를 나눈 자매 답게 얼굴 생김새만큼은 정말 빼다 박은 듯이 닮았다. 현주가 현아 씨를 닮은 건지, 현아 씨가 현주를 닮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쌍둥이마냥 자매의 얼굴 생김새가 꼭 비슷하단 것이었다.

나야 물론 현주와 사귀면서 그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있기에 두 사람을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지만 현주든 현아 씨든, 두 사람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가 동생이고 언니인지를 구분하기가 아마도 꽤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아주 조금만 알고 나면 언니와 동생을 구분하기가 그리 힘들지 않은 이유는 두 사람이 평소에 풍기는 그들 자신만의 분위기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일 터였다. 외모는 무척 닮았지만 둘은 느낌부터가 완전히 다르니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제길,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괜히 현아 씨의 프로필 사진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꼭 닮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과감한 노출 차림이 머릿 속에 자동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알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던 얇은 셔츠 한장, 그리고 졸업식에서의 그 노팬티...
이것저것 다 떠나서 남자로서 솔직하게 얘기한다면, 현아 씨는 몸매가 정말 좋았다.
동생의 남친마저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생각하면서 자위행위를 하게 만들 정도로.

"정말 신기한 여자야...."

결국 그날도 현아 씨를 생각하면서 자위를 했다. 이것으로 현아 씨를 생각하며 딸딸이를 친게 벌써 두 번째다.
동생으로 인해 일어난 욕구 불만을 그 언니를 생각하며 자위행위를 함으로써 푸는 꼴이었다. 웃기지 않은가.

현아 씨의 몸을 떠올렸다. 남자로서 어쩔 수 없는 상상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늘씬한 다리와 셔츠 자락 안 쪽으로 살짝 엿보이던 미끄러운 몸의 능선.
아마 현주의 몸도 그렇게 예쁘겠지...? 두 사람은 꼭 닮았으니까 말이다.

"아... 현주랑 섹스하고 싶다."

여친 언니의 몸을 떠올리면서 여친과의 섹스를 갈망하는게 비록 정상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지금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


학회장으로서 서연이의 인기를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그야말로 "여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자퇴 하기 전까지 1학기 학회장을 맡았던 홍규도 제법 일처리를 잘했다는 평가를 듣긴 했지만, 구태여 지금에 와서 그 인기를 서연이와 비교해보자면 그녀의 발목도 따라가지 못할 수준이었다.

물론 서연이가 홍규에 비해서 대중적으로 좋은 평가를 들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첫 째는 예쁜 여자이기 때문이고, 둘 째는 예쁜 여자이기 때문이며, 셋 째도 예쁜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또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물론 여학생들이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유이겠지만, 남학생들의 비율이 더 높은 우리 과의 특성상 "주서연"이라는 학회장의 존재는 관심과 주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1학기에 비해서 각종 학과 행사에 참여하는 학과생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는게 내게도 확연히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여학생들로부터 안티층이 형성되었느냐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그 와중에 서연이가 의외로 일처리도 꼼꼼하게 잘하고 나름대로 의욕있게 학과생들과 소통을 해주니 남자든 여자든 서연이가 새로운 학회장직에 오른 사실에 대해서 불만을 갖지 않았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요즘 학과 내에서 서연이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같이 먹어요."

따라서 서연이가 내 앞에 마주 앉았을 때, 나는 황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밥을 혼자 먹곤 했기에, 이렇게 학생식당에 앉아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앞에 앉는다는 일은 그 자체로 흔치 않은 일이었고, 게다가 그 누군가가 요즘 화제의 인기녀 주서연이라고 하니 더더욱 그랬다.

"왜 혼자 먹어요?"
"너 같은 애들은 모르겠지만 의외로 이렇게 매끼 혼자 먹는 사람들도 많아."
"그럼 매일 이렇게 혼자 먹는거에요?"
"너 아싸들이 화장실에서 혼자 숨어서 김밥먹는거 지어낸 얘기일거 같지? 그거 딱 내 얘기거든?"
"풋..."

어쭈, 웃어?

"그럼 매주 이 날은 나하고 먹어요. 나도 이 시간에 공강이니까."

순간 조금 놀랐다. 서연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긴 했지만 별로 크게 신경쓰진 않았었다. 하지만 서연이는 꽤 진심인 것 같았다. 그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무리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됐어. 그렇게까지 안해도 돼. 나 혼자 먹는거 익숙하다."
"선배. 어디선가 들은 얘긴데요, 왕따 시키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왕따들이 자기 스스로 고립되려고 하는 것도 문제래요. 그런 태도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나?"
"야, 어따 대고 왕따래. 왕따랑 아싸는 엄밀히 다른거 모르냐? 난 내가 원해서 아싸로 지내는 거거든?"
"어련하시겠어요. 아무튼 다음주부턴 이 날 같이 점심 먹는 거에요."

맹랑하다 못해 당돌하기까지 한 서연이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예전에 내가 그녀를 좋아했을 때는 그 도도함에 반해 그녀를 쫓아다녔지만, 지금은 왠지 도도하다기보다는 그런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만큼 서연이와 친밀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 비록 몸을 섞으면서 색정으로 친밀해진 사이이긴 하지만.

"다음 주에 엠티 가는거 기억하고 있죠?"
"뭘 자꾸 챙기고 그래. 안 까먹으니까 걱정 마."
"안심이 안 되니까 그렇죠. 준비는 하고 있어요?"
"엠티 가는데 준비는 무슨 준비? 그냥 가서 술 마시고 오면 되는거 아냐?"
"이것저것 많이 하고 놀거에요. 계곡에서도 놀고, 밤에는 담력훈련도 하고."
"뭐?"

뭐지? 방금 내가 뭘 들은거지?

"담력훈련은 뭐야?"
"술만 마시고 오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집행부 애들이랑 재학생들한테 의견 물어봤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요. 마침 거기 근처에 적당한데도 있고 재밌을 것 같던데."
"잠깐. 그런 얘긴 못들었어. 난 그냥 가서 대충 시간 떼우고 오려고 했단 말이야."
"뭐가 문제에요? 군대까지 갔다왔으면서."
"아무리 그래도...."

무슨 엠티를 그렇게 거창하게 진행 하려는거지?
자고로 엠티란 생각없이 가서 술 마시고 토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는 그런 행사가 아니었던가?

"그걸 어떻게 준비하려고?"
"레크레이션 업체에서 사람들도 좀 쓰고, 집행부끼리 기획도 좀 하고...."
"예산은?"
"홍규 오빠가 1학기 때 과비 예산을 생각보다 얼마 안 써서요. 어차피 쓸거 우리과 애들 재밌게 노는데 쓰는게 좋잖아요. 선배가 보기엔 재미없을거 같아요?"
"발상이 신선하긴 한데..."

고등학교 수련회도 아니고 대학생들이 모여서 담력훈련이라...? 오히려 그런 의외성 때문에 재미있겠다고 느껴질 수는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그걸 계획이 아닌 실행으로 추진시켜버린 서연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거 싫어하는 애들도 있을거 같은데, 오는 애들은 많아?"
"1학년은 6명인가 빼고 다 온다고 했구요, 재학생들도 합하니까 서른명이 넘던데요. 오히려 숙소가 비좁을 것 같아서 방 하나를 더 대여해야하나 고민 중이에요. 저도 많이 안올줄 알았는데 참 신기해요."
"......"

내 장담하건대, 그 개떼 같이 모인 인간들 중 절반 이상은 이 이벤트가 맘에 들어서 오는게 아니라 서연이가 학회장이라서 오는 부류들일 것이다. 백퍼 안 봐도 알 수 있다.

"이제와서 안 간다고 하는건 아니죠? 선배는 고학번이니까 정 하기 싫으면 그 때만 살짝 빠져도 되요. 참가비 낸건 못 돌려주니까 오기는 와야 해요."
"알았어... 뭐 그렇다면야..."

늙은 육신이 피로해질 것 같아서 불안했는데 굳이 안 해도 되는거라면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그건 그렇고 너 요새 인기 많은 것 같더라."
"제가 언제 인기 없었던 적 있나요?"
"재수 없으라고 하는 얘기 맞지?"
"농담이에요. 근데 왜 그런 얘길 해요?"
"그냥. 소문으로 들으니까 학과 애들이 너를 잘 따르는거 같아서."
"사실 요즘들어 내가 리더십에도 소질이 있었구나 하는걸 느끼는 중이에요. 저 좀 팔방미인인 것 같지 않나요?"
"......"

미처 몰랐는데, 서연이는 좀 공주병끼가 있었나보다.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가깝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즉, 서연이가 지금 이런 황당한 말을 재잘거린다는건 나를 그만큼 예전에 비해 친밀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었다. 뭐, 그걸 알았더라도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말이다.

"그 표정은 뭐에요?"
"그래그래. 너 잘 났어. 그래서 저런 스토커도 하나 데리고 다니는 거야?"
"스토커라니요?"

나는 말없이 숟가락으로 저쪽 건너편의 테이블 한구석을 가르켰다. 서연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따라오다가 이내 그녀의 표정이 애매하게 굳어졌다. 숟가락 끝이 향하는 곳에서 지환이 녀석이 나와 서연이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쟤가 요즘들어 나 완전 살벌하게 쳐다봐. 특히 이렇게 너랑 같이 있거나 할 때."
"하아... 이상하게 선배랑 있을때마다 저렇게 나타나곤 하더라구요."

서연이가 고개를 숙이고 지환이 녀석을 못 본체 하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지환이 녀석은 노려보는 시선을 숨길 생각도 않고 노골적으로 계속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기에, 나는 몰라도 서연이는 행여 체하진 않을지 신경이 쓰일 지경이었다.

"너네 끝난거 아니었어?"
"끝냈죠. 근데 연락이 계속 오더라구요. 어제는 수업 끝날때까지 강의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 곤란했어요. 학회장이다보니까 계속 피해다닐 수도 없고...."
"그래? 연락 와서는 무슨 얘기하는데?
"그냥... 다시 사귀자고... 다시 잘해보자며... 뭐 그런 얘기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하긴요. 그냥 대답 안했어요. 차단할까도 생각 중이에요."

서로 좋아서 사귀던 연인 사이가 남남만도 못한 사이가 되는거 참 한순간이구나.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내 입장에선 고소한 이야기이긴 했지만 왠지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얘기들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조금 허무한 감도 들었다. 나중에 나와 현주도 혹시 그렇게 될까?

"넌 이제 지환이한테 완전히 마음 뜬거야?"
"자꾸 그런걸 캐묻고 그래요? 선배 지금 질투하는 거에요?"
"질투라니?"
"아직도 마음 속으로는 사실 나를 좋아하고 있다거나, 혹시 뭐 그런건가 싶어서."
"웃기고 있다. 이보셔요, 너보다 백배 천배 예쁜 여자친구도 있거든?"

사실 예전에는 지환이 새끼를 죽도록 질투한 적이 있었긴 했다. 그 질투와 더불어 서연이에 대한 미운 감정으로 인해 결국 서연이를 강간하기도 했으니까. 그러고보면 결국 우리가 이렇게 예전에 비해서 가까워진 계기가 다른 것도 아닌, 무려 "강간"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건 정말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인연인 셈이었다.

"섹스도 안해준다는 그 여자친구 말이에요?"
"그, 그건...."

서연이의 가시 돋친 일침에 순간 할말이 쏙 기어들어갔다. 그러잖아도 요새 내 심리를 가장 괴롭히는 부분을 서연이가 방금 정확하게 콕 집어낸 것이었다. 반쯤 농담삼아 꺼낸 말에 내가 할말을 잃자 서연이도 아차 싶었는지 곧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내가 말 실수했네요."
"아니 뭐... 틀린 말도 아닌데. 그냥 넘어가자."
"왜 갑자기 풀이 죽고 그래요. 내가 미안해요."

서연이는 진짜로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사실 좀 기가 죽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까지는 또 아니었는데 서연이의 미안해하는 반응이 재미있어서 계속 말없이 앉아있으니 서연이가 이런 말을 꺼냈다.

"혹시 욕구불만이면.... 얘기해요. 내가 좀 도와줄게요."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요새 내 상태가 쌓일대로 쌓인 상태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굳이 그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서연이 같은 미인과의 섹스를 마다할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대신 이번주는 말구요. 다음주까지만 기다려요."
"왜?"
"그런게 있어요. 여자들만의 사정이."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여자들이 마술 걸리는...."

서연이가 주변을 잠깐 돌아보더니, 듣는 사람이 없는걸 확인하고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킥킥, 귀엽군.

사실 타임 리와인더가 있는 이상 시간을 돌아가서 해도 그만이고, 아니면 생리고 뭐고 필요없이 그냥 강제로 덮친 다음에 시간을 되감아도 그만이긴 했지만, 나는 요즘들어 그런 무분별한 능력의 남용을 최대한 줄여보자는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첫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수명에 대한 걱정이 주된 이유였고, 둘째 이유는 이른바 "가진 자의 여유"라고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치트키와 다름 없는 능력을 통해 나는 웬만큼 내가 원하는건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건 할 수 있는 상태란 것이다.

막말로 성욕이 땡기는 날이면 길 지나가는 아무 여자나 잡아다가 강간하고 시간을 되돌리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그래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냔 말이다. 그런게 남들에게는 짜릿한 환타지이고, 금기를 향한 로망이겠지만 실제로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수단을 손에 넣고 보니 나는 그런 의미없는 능력 남발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어버렸다.

다시 게임을 통해 예를 들어보자면, 치트키를 치고 게임을 하는 유저라도 상식적으로 "무조건 이기게 해주는" 치트키만을 계속 남발하는 유저는 드물다. 그래서야 아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치트키를 치는 것은 게임을 보다 즐겁게 즐기기 위함이지 단순한 의미에서의 "승리"만을 반복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히 똑같은 맥락은 아니겠지만, 아마 내가 이 때 쯤 타임 리와인더의 남용을 피하려는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것은 그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비록 나는 여전히 전지전능하고 싶었지만, 내 삶이 최소한의 어려움도 과제도 없는 그런 칙칙한 건조함으로 뒤덮이는 것은 싫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기묘한 이중성이자 모순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현주와의 해프닝은 내게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타임 리와인더라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오직 내가 내 스스로 노력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는 뜻이 된다. 결과적으로 현주는 내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 셈이다.

"무슨 생각해요?"
"응? 아니... 그냥 잡 생각."
"야한 생각한거 아니에요?"
"맞아. 너 같은 퀸카도 생리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변태에요?"
"이제 알았어?"

아무튼 서연이와의 섹스는 그녀의 요구에 의해 다음주로 미루기로 했다. 이것 또한 "있는 자의 여유"나 다름이 없었지만, 굳이 이런 일 하나에까지 수명을 깎아가며 시계를 쓰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시간의 흐름을 굳이 거스르지 않더라도 다음 주가 되면 자연스레 할 수 있는거니까.

"근데 정말 실감이 안 나네."
"네? 뭐가요?"
"아, 아냐. 그냥 혼잣말이야."

정말 실감이 안난다. 서연이와 "마음만 먹으면" 섹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 나의 모습이.

"그건 그렇고 쟤 진짜 무섭게 노려보는데, 넌 괜찮냐?"

지환이는 아직까지도 지치지 않고 우릴 열심히 노려보는데 여념이 없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 저 놈은 지금 우리 둘을 동시에 조각조각 찢어죽였을 것이다. 나야 사실 별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서연이는 학회장 일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칠 일도 많을텐데 많이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지환이 녀석이 예전에 나한테 서연이를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면서 시비를 걸었었지.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니 통쾌함이나 고소함 이전에 인생사 참으로 새옹지마로구나 하는 신선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진 모르겠는데 선배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늘 저렇게 나타나는 것 같아요."
"아니, 내가 보기엔 그런게 아니라... 늘 너를 뒤에서 따라다니고 있다가 나랑 이야기할 때를 노려서 나타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이에요? 찝찝하게."
"진짠데...."

농담이 아니라 사실 느낌이 그랬다. 언제 한번 타임 리와인더를 이용해서 역으로 지환이 녀석의 뒤를 잡아봐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환이도 엠티 오는거야?"
"그렇다네요."
"네가 학회장인거 알고 있을텐데 구태여 오겠다는거보니 신기하네."
"모르겠어요. 나 혼자만 불편해 하는 걸수도 있죠. 어차피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둘이 마주치진 않을테니까 신경 끄기로 했어요."
"근데 말야,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어."
"뭔데요?"
"혹시 두 사람 헤어진거 나 때문은 아니지?"
"치. 그런거 아니거든요."
"뭐 아님 말고..."
"괜한 걱정 하지말고 시간표나 좀 보여줘요."
"왜?"
"빨리요."

서연이가 내 시간표를 받아보더니 오늘의 마지막 수업인 교양과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교양 들을만 해요?"
"몰라. 오늘이 첫 수업이라. 왜?"
"나도 교양 하나 들어야 하는데 선배꺼 괜찮으면 수강 정정으로 이거 신청할까 싶네요."
"다른 것도 많을 텐데."
"같이 듣는거 싫어요?"
"아니, 니가 창피할까봐 그러지. 이거 일학년들까지 듣는거거든."
"학회장인데 일학년들 보는게 뭐가 창피해요?"
"너 혹시 나랑 수업 같이 들으려고 그러는거 아니야?"

예전의 나와 서연이 관계였다면 상상도 못했을 나의 자뻑멘트에 서연이의 표정이 뚱하게 굳어졌다. 삐진 것 같기도 했고, 또 어찌보면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또한 자뻑인가?

서연이가 내 얼굴에 대고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더니, 얼굴을 밀착시키고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선배. 선배가 밤일을 잘한다는건 인정하지만요, 너무 도끼병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아니면 말지 왜 발끈하고 그런대."

아무튼 그렇게해서 서연이와 같은 교양 수업을 듣게 되었다. 같이 밥을 먹고나서 서연이가 전산실에서 수강정정을 할 때 같이 있어주었기 때문에 공강시간을 자연스레 함께 보내게 되었다. 왠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찌됐든 나도 서연이와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 썩 기분 나쁘지 않았다.


*


"성적 평가는 출석 10%, 중간고사 30%, 기말고사 30%, 그리고 조별과제 30%로 이루어집니다."
"......."

조별과제가 무려 30%다. 이건 느낌이 좋지 않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긴 했지만 지난 학기의 교양 수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환이 때문이긴 했지만 그 과목 하나 때문에 피를 보지 않았던가.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수강 인원 수가 적어서 3인 1조로 조를 짠다고 한다.

조별과제에서 조의 구성원 수가 적다는 것은 어찌보면 좋은 일이긴 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가뜩이나 인원 수도 적은데 재수가 없어 무능한 조원이 굴러들어온다면 덩달아 망테크를 타게 될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연아. 이 수업 왠지 불길한데. 그냥 다시 정정할까?"
"왜요?"
"아니, 조별 과제가 30이래잖아."
"뭐 어때요. 그냥 하면 되지."
"나 지난 학기에 조별 과제 때문에 피본거 알잖아."

서연이의 표정이 약간 어색해졌다. 어찌됐든 내가 조원 명단에서 제외되는데에 그녀도 예전에 일조를 했었기에 내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오히려 더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걱정마요. 나랑 같은 조 하면 되잖아요. 3인 1조라고 하니까 한명만 더 모아서 같이 잘해봐요."

솔직히 말하면 난 교양수업을 싫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졸업학점 취득표를 따르려면 어쩔 수 없이 이번 학기에 교양수업을 하나는 필수적으로 들어야 했다. 지난 학기에 들었던 교양을 말아먹었으니까.

이 말이 의미하는 즉슨, 이번 학기에는 이 교양 수업에서 반드시 좋은 점수를 받아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서연이에 비해 이 수업에 느끼고 있는 부담감이 비교적 더 컸다. 더불어 학과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차피 시험이야 내게 별 문제가 안되니까.

"기왕이면 우리과 애들 중에 한명 데려와볼게요. 같은 과 학생이 아무래도 손발 맞추기 편하니까."

같은 과 학생이 손발 맞추기 편하다는건 어디까지나 서연이 입장에서의 얘기였지 나 같은 아웃사이더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말리기도 애매했으므로 나는 그냥 두기로 했다.

인문대에서 실시하는 교양 수업이라 그런지 우리과 학생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서연이는 그들 얼굴 하나하나를 모두 아는 것 같았지만 나는 대부분이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서연이 옆에 앉아있는 나를 굉장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나도 내가 서연이 옆자리에서 수업을 듣는 날이 올거란 생각을 못 했으니 저들 눈에도 이상하게 보일테지.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대놓고 쳐다볼건 뭐람?

"얘, 너 일학년이지? 괜찮으면 선배들이랑 같은조 안할래?"

서연이가 즉석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과 학생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나는 일학년이라는 말에 서연이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귓속말을 했다.

"왜 일학년을 꼬시고 그래? 기왕이면 고학년을 꼬시지."
"그게... 얘만 친구들이 없는 것 같아서요. 혼자 남을 것 같은데 불쌍하잖아요. 어차피 과제는 나랑 선배 둘이서만 손발 맞추는게 더 편할걸요."

서연이도 그 학생이 듣지 못하게끔 귓속말로 대답했다. 서연이의 말에 나는 문득 강의실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우리과 학생들은 서연이의 말대로 벌써 삼삼오오 지네들끼리 짝을 맞추어 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서연이가 지목한 학생만 아무데도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앉아 있었다는걸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새삼 서연이가 감탄스러웠다. 역시 학회장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 난 그냥 가까이에 있으니까 아무렇게나 말 붙인건 줄 알았는데 말이다. 상관도 없는 남의 일인데 그걸 그렇게 짧은 순간에 캐치해내다니....

"뭐... 그럼 그러던지."

어차피 서연이 말대로 과제는 둘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오히려 사공이 많아지면 그건 그것대로 힘들 수 있으니까. 게다가 그런 이유보다도, 일학년이라고 하면서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모습이 특히 내 입장에서는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서연이의 설명을 듣고보니 모른척 하기도 힘들었다.

"얘, 괜찮지? 나랑 여기 있는 이 못생긴 남자 선배랑 셋이 같은 조 하자. 어때?"

이게....

"학회장 언니 아니세요? 뭐 선배들이랑 같이 하면 저야 좋죠."

아웃사이더 느낌이 나길래 조금 음침한 학생인가 했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의외로 쾌활했다. 그 일학년생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겉모습도 따돌림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 것 같은 외모였다.

일단 여학생이고, 얼굴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허리께까지 풍성하게 늘어뜨린 긴 생머리가 돋보이는, 조금은 앳된 외모의 여학생이었다. 서연이에 비하면 약간 수준이 모자르지만 저 정도면 그래도 반반한 얼굴이다. 얼굴 반반한 여학생이 캠퍼스에서 따돌림 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니, 아무래도 왕따 보다는 나처럼 아웃사이더 쪽에 가까운 학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이는 나를 왕따로 보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순간, 왜 하필이면 그 짧은 한 장면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을까.
긴 생머리와 앳된 얼굴. 강변 도로에서의 황당했던 기억.
하지만 이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설마. 그냥 닮은 사람이겠지. 얼굴 제대로 본 것도 아니었잖아."

아무리 여자라도 머리를 저렇게까지 폭포수처럼 길게 기르는 사람은 드물다는게 뭔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곧 그 의혹을 잊어버렸다.

무엇보다 나는 그 싹수 없는 기집애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도 못했고, 눈 앞의 이 일학년생 여자애는 그 여자애처럼 싸가지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뻐큐를 날릴 만한 애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름이 뭐니?"
"유성이에요. 한유성."
"유성이? 남자 이름 같기도 하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여자애 이름이 유성이라니 꽤나 독특했다.
요새는 성별과 언밸런스한 이름이 개성이라고 보는 인식도 있지만 말이다.

첫 수업이라 별다른 내용 없이 간단한 오리엔테이션과 설명만 하고 수업이 끝났다. 강의실을 나오면서 나와 서연이, 그리고 유성이는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 예전 서연이의 연락처를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숱한 노력을 했는데 결국 얻지 못했던걸 감안한다면 내게는 참으로 허무한 일이긴 했다.

"그럼 과제 나오면 서로 연락하자. 과제 말고도 학과 일 궁금한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구."
"네, 언니. 고맙습니다."

하긴 유성이 입장에선 서연이가 하늘 같은 학회장이니 당연히 예의를 갖출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서연이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유성이는 인문대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왠지 나한테는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굳이 내가 인사를 챙겨받을 만한 선배도 아니고 해서 마음에 담지 않았다.

"쟤도 나처럼 아웃사이더인가봐."
"선밴 왕따라니까요."
"너 까불다가 후회한다?"
"그리고 쟤 나름 유명해요. 아까는 못 알아봤는데, 이름 들으니까 생각났어요. 1학년에 한유성이라고."
"왜? 뭐하는 앤데?"
"쟤 여자앤데 매일 오토바이 타고 등교하거든요. 특이하죠?"
"엉?"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서연이를 그 자리에 두고 다급히 유성이란 아이가 내려간 계단을 따라 쫓아갔다. 서연이가 등 뒤에서 뭐라고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르르릉~
내가 인문관 밖으로 나갔을 때 오토바이 한 대가 캠퍼스를 가로질러 내려가고 있었다. 헬멧도 쓰지 않은 긴 생머리가 바람결에 나부끼며 흩날리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내 기억 속의 한 장면과 심히 유사해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하하. 그런 기막힌 우연이 일어날리가..."
"뭐에요? 왜 갑자기 뛰어가요?"

서연이가 뒤늦게 나를 쫓아와서 물었다. 그녀는 멀어져가는 오토바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내 시선을 좇더니, 살짝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쑤시며 물었다.

"혹시 새내기한테 관심 가지는 거에요? 선배 나이에?"
"세상엔 참 닮은 사람이 많아. 그렇지, 서연아?"
"무슨 말이에요, 뜬금없이."
"그냥 그런게 있어."


*


학과 엠티 날의 아침이 밝았다. 아웃사이더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이런 행사를 신경쓰느라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기분이 참 생소하게 느껴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나도 놀기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살짝 붕 뜨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체 몇 년 만의 엠티냐 이게."

신입생 이후로 아마 처음이지.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근데 평범한 엠티가 아닐 것 같은 이 찝찝한 기분은 대체 뭐지?"

자취방 문을 닫고 나서는데, 희한하게도 까치와 까마귀가 하늘을 함께 날아가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뭔가 싱숭생숭한 기분이다. 품 안을 더듬어 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은백색의 초시계가 여전히 그 자리에 곱게 잠들어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ㅠ.ㅠ

출장지에서도 노트북이 있기에 업무 외 여유 시간이 된다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확답을 못 드리는 점은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릴게요. 이번주 금요일에 돌아온답니다. 그 전에 한편 정도는 꼭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출장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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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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