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엔 담배꽁초가 대여섯 흩어져 있었다.
담배꽁초를 보면, 괜히 담배가 피고 싶어진다. 강재협은 품속에서
꾸깃한 담배갑을 꺼내 담배 한가치를 꺼냈다. 불을 붙이고 깊이
빨아들였지만, 왠지 허하고 답답하여 손에 들고 보니, 가운데가
구겨져 구멍이 나 있었다.
‘제기랄...’
부러진 담배를 보면 가끔 자신의 신세처럼 보였다. 다섯 달하고도
열사흘... 아내가 시집올 때 겨우 스물 셋이었으니, 이제 서른 셋이다.
한참 섹스에 불붙을 나이인데, 유감스럽게도 사십을 막 넘긴 강재협은
그런 그녀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줄 수가 없었다.
비아그라가 불법이라 해도 정력만 돌려줄 수 있다면 정말이지
밀수라도 하고 싶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성격이 발랄하여, 짙은 농담도 서슴없이 하고, 그가 피곤하면
밤새 안마도 해 줄 줄 아는 눈썰미가 있었다.
게다가 사건이 나면,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일어나서 먼저 수첩이니,
손수건이니, 핸드폰이니 하는 것을 챙길 줄 알았다. 그리고 가끔은
주머니속에 포라로이드로 찍은 자신의 누드사진을 넣어두는
귀여운 짓도 할 줄 알았다.
여간해선 화내는 법도, 토라지는 법도 없었던 아내가 이젠 거의
한계였는지, 앵돌아져선 방에 틀어박혀 사흘을 나오지 않는다.
‘다섯 달 열사흘.... 그렇게 오래 됐었나...’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다. 그 놈의 형사 노릇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들에겐 아직 아이가 없었다. 사시사철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가는
신세라, 아내의 몸 위에서 호출을 받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판국에 아이는 고사하고, 아내가 바람이 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리라. 이렇게 내가 아내를 독수공방 시키니, 이럴 때 아이라도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싶다.
하지만 어쩌랴...이젠 서질 않는걸... 강재협은 그 이유를 모른다.
스트레스니 뭐니 하지만, 뭐 그런 것들이 섞여 있는 것일테지...
그렇게 된 시기는 알고 있었다. 조도형과 문혜주의 정사장면...
그리고 문혜주의 눈벌판같은 허벅지 사이로 흐르던 정액...
바로 그 모습을 본 이후부터였다.
아내는 강재협이 발기가 부진한 게 일반적인 다른 이유들 때문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야 그럴 테지, 한번도 그 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한약을 먹인다, 휴식을 시킨다, 하고
나름대로 정성을 보이지만, 원인이 다르니 들을 리가 없는 것이다.
강재협은 발기부전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문혜주의 허벅지,
그리고 그를 쏘아보던 그 서릿발 같은 눈초리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남성은 한껏 부풀어오르곤 했으니까... 다만, 아내의 정성
떠는 모습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결코 그녀에게서 마음이 떠난
것이 아니었는데...
강재협은 다시 담배갑을 뒤졌다. 그리곤 한 개피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알고는 짜증이 솟구쳐 사정없이 담배갑을 구겨버렸다.
제기랄... 또 그 머리똥 놈한테 가야 되나... 미처 담배를 생각
못한 것이 실수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았다.
이미 새벽 세 시가 가까와 오고 있었다. 그만 들어가 쉬어야
할 때였다. 어차피 이미 수사본부도 해체되어 그저 수배만 되어
있을 뿐, 정식으로 움직이는 인원은 없었기에 교대할 사람도 없었다.
한숨을 가볍게 쉬고는 강재협은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 떼었다.
삼지 아파트는 현재 비어 있는 상태이다. 조도형 사건이 일어난 후,
아파트 값이 폭락한 데다, 지난 여름에 난 홍수로 아파트 축대가
무너져 한쪽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결국 주민들은 조합이
그 동안 돌려 불린 전세금을 나눠 갖고 뿔뿔이 흩어져 갔다.
끝까지 이사비를 받아내겠노라고 악을 쓰던 여편네 셋이 올 가을에
이사를 나가고 나선, 결국 삼지 아파트는 빈집이 되어 버렸다.
이런 집에는 불량배들이 꼬여 들기 마련이지만, 강재협이 일당의
두목 놈을 찾아가 조진 끝에, 한 놈도 얼씬거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노숙자들이 꼬여 들었다. 언뜻언뜻 담뱃불 같은
불빛이 비치는 걸 보면, 아마도 아직도 댓 놈쯤 꼬여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이 아파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헐릴 예정이었다. 어차피 오래 되어
재개발 대상이었던 데다, 축대도 무너져 기울어지고, 게다가
조도형 사건까지 있어, 사람들한테 흉가로 점찍혀 있던 상황이었다.
업자만 나선다면 얼씨구나 하고 팔아치울 형편에, 마침 대기업에서
손을 대, 아파트 땅은 시세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아마도 올 겨울이 지나고 나면, 바로 해체 작업이 시작되고, 요새
한참 인기 있는 인터넷아파트니 오피스텔이니 하는 건물이 세워질 테지….
그리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전의 기억을 잊은 채, 꾸역꾸역 모여들어
이 땅위에 있었던 혐오스런 과거를 모두 생활의 그림자로 덮어버릴
것이다. 조도형의 병자같은 그 흰 미소도, 문혜주의 달빛같은 허벅지도...
끼이익...
창문이 모두 깨져 있는 탓에, 알루미늄 현관문은 그 틀이 일그러졌다.
그 삐죽한 부분이 세멘트바닥을 긁은 소리가 밤공기를 짓찢는 듯 했다.
조도형, 살인마, 내 딸 내놔라!
맞아죽을 놈, 당장 사형시켜버려!
개 같은 년의 보지를 찢어 버려라!
...아파트 벽에는 이런한 살기 짙은 낙서들이 가득했다. 피해자의
가족이거나, 혹은 사건에 대해 분노한 시민들의 짓이리라. 아닐 수도
있겠지만...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조도형과 문혜주가 있었던 방은 403호.
이 아파트에는 드물게 4층을 쓰고 있었다. 4라는 숫자가 어감상
좋지 않다 하여 대부분의 건물에서는 F라던가, 아니면 그대로 건너
뛰어 5층을 쓰거나 한다. 하지만 여기는 4라는 숫자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만일 이 숫자를 쓰지 않았더라면, 이 건물도 멀쩡했을까...
조도형이라는 희대의 살인마도 나타나지 않았었을까...
강재협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전용면적을 넓게 쓰고 싶은
조합원들의 욕심 때문이었는지, 이 아파트는 계단이 아주 좁았다.
겨우 한 사람이 조금 넓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 밖에 없었다.
오 층 짜리 건물이었던 덕분에 엘리베이터 설치규정은 겨우 비켜갈
수 있었겠지만, 이사할 때마다 솟구치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삼 층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놈의 집이다. 갑자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이 방에 한두 번 찾아오는 것이 아닌데, 왠지 여기에 올 때마다
숨이 턱에 차 오른다. 그리고 까닭 없이 자지가 서는 것이다...
빌어먹을... 마누라 데리고 이 아파트로 이사올까...
미숙아, 나 왔다 간다. 내 사랑 믿지?
혜지는 이제 내 거다.
우리의 사랑을 맹세하며.
두려움은 사랑으로.
아래층에서 보던 낙서와는 사뭇 다른 내용들이다. 글씨도
아기자기하고, 하트모양으로 장식을 한 것도 있다. 조도형이
사건을 일으켰던 장소라는 게 소문이 나면서, 시덥잖은 놈들이
가끔 배짱시험이니, 사랑의 맹세니 하는 것을 하느라, 여기까지
찾아오곤 하는 모양이었다.
특히나, 조도형이 체포 당시, 애인과 섹스중이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그것이 마치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애인과의
결합을, 뭐 그런 인상을 주었던지, 특히나 연인들의 낙서가
많았다.
여기 가득 적힌 사랑의 낙서들 중 여럿은 간 크게도 여기서
진한 정사를 나누기도 하였으리라. 그래서 그런지, 올 때마다
낙서는 늘어만 가고 있었다.
놈의 방문 앞에 섰다.
누군가가 기념으로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방문의 홋수의 번호는
모두 떼어가고 숫자가 붙어 있던 곳에 희미하게 자국만이 남아
이곳이 403호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둔탁한 낮은 철쇄소리가 나다 말고 막힌다.
잠겨 있는 것이다. 강재협은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내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면서 관리실 영감도 어디론가 가 버렸는데,
그 때 강재협이 미리 마스터 키를 받아두었던 것이다.
마스터 키를 열쇠구멍에 꼽으면서 강재협은 문득 또 다시 한번
문혜주의 흰 허벅지와 그 사이의 구멍을 떠올렸다.
문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한발 안으로 들어선 강재협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곰팡이 냄새였다. 한 겨울에 웬
곰팡이람...
방안은 새까맸다. 두터운 커튼이 걸쳐져 있는 탓에 빛줄기 하나
새어 들어오는 곳이 없었다. 강재협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려 함이다. 이윽고, 사물의
윤곽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고, 강재협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수라장... 이곳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온통 엎어져 헤질러진 가구, 옷들, 물건들, 책들... 마치 폭탄이라도
떨어진 집처럼 제법 넓었을 마루에는 시커먼 물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가택수색을
하느라 무장경찰 일곱과 특수과 형사 다섯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샅샅이 뒤져댄 탓이다. 그 후, 바로 조도형이 체포되었고,
문혜주도 같이 연행되었으므로, 그 이후로는 돌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조도형은 그 후, 이송 중에 탈출하였고, 문혜주는 그 후
다신 세상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강재협은 왠지 믿고 싶었다. 아니, 믿고 있었다.
조도형은 반드시 여기로 돌아온다. 반드시 돌아온다...
이유는 문혜주다.
<계속>
담배꽁초를 보면, 괜히 담배가 피고 싶어진다. 강재협은 품속에서
꾸깃한 담배갑을 꺼내 담배 한가치를 꺼냈다. 불을 붙이고 깊이
빨아들였지만, 왠지 허하고 답답하여 손에 들고 보니, 가운데가
구겨져 구멍이 나 있었다.
‘제기랄...’
부러진 담배를 보면 가끔 자신의 신세처럼 보였다. 다섯 달하고도
열사흘... 아내가 시집올 때 겨우 스물 셋이었으니, 이제 서른 셋이다.
한참 섹스에 불붙을 나이인데, 유감스럽게도 사십을 막 넘긴 강재협은
그런 그녀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줄 수가 없었다.
비아그라가 불법이라 해도 정력만 돌려줄 수 있다면 정말이지
밀수라도 하고 싶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성격이 발랄하여, 짙은 농담도 서슴없이 하고, 그가 피곤하면
밤새 안마도 해 줄 줄 아는 눈썰미가 있었다.
게다가 사건이 나면,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일어나서 먼저 수첩이니,
손수건이니, 핸드폰이니 하는 것을 챙길 줄 알았다. 그리고 가끔은
주머니속에 포라로이드로 찍은 자신의 누드사진을 넣어두는
귀여운 짓도 할 줄 알았다.
여간해선 화내는 법도, 토라지는 법도 없었던 아내가 이젠 거의
한계였는지, 앵돌아져선 방에 틀어박혀 사흘을 나오지 않는다.
‘다섯 달 열사흘.... 그렇게 오래 됐었나...’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다. 그 놈의 형사 노릇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들에겐 아직 아이가 없었다. 사시사철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가는
신세라, 아내의 몸 위에서 호출을 받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판국에 아이는 고사하고, 아내가 바람이 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리라. 이렇게 내가 아내를 독수공방 시키니, 이럴 때 아이라도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싶다.
하지만 어쩌랴...이젠 서질 않는걸... 강재협은 그 이유를 모른다.
스트레스니 뭐니 하지만, 뭐 그런 것들이 섞여 있는 것일테지...
그렇게 된 시기는 알고 있었다. 조도형과 문혜주의 정사장면...
그리고 문혜주의 눈벌판같은 허벅지 사이로 흐르던 정액...
바로 그 모습을 본 이후부터였다.
아내는 강재협이 발기가 부진한 게 일반적인 다른 이유들 때문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야 그럴 테지, 한번도 그 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한약을 먹인다, 휴식을 시킨다, 하고
나름대로 정성을 보이지만, 원인이 다르니 들을 리가 없는 것이다.
강재협은 발기부전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문혜주의 허벅지,
그리고 그를 쏘아보던 그 서릿발 같은 눈초리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남성은 한껏 부풀어오르곤 했으니까... 다만, 아내의 정성
떠는 모습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결코 그녀에게서 마음이 떠난
것이 아니었는데...
강재협은 다시 담배갑을 뒤졌다. 그리곤 한 개피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알고는 짜증이 솟구쳐 사정없이 담배갑을 구겨버렸다.
제기랄... 또 그 머리똥 놈한테 가야 되나... 미처 담배를 생각
못한 것이 실수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았다.
이미 새벽 세 시가 가까와 오고 있었다. 그만 들어가 쉬어야
할 때였다. 어차피 이미 수사본부도 해체되어 그저 수배만 되어
있을 뿐, 정식으로 움직이는 인원은 없었기에 교대할 사람도 없었다.
한숨을 가볍게 쉬고는 강재협은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 떼었다.
삼지 아파트는 현재 비어 있는 상태이다. 조도형 사건이 일어난 후,
아파트 값이 폭락한 데다, 지난 여름에 난 홍수로 아파트 축대가
무너져 한쪽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결국 주민들은 조합이
그 동안 돌려 불린 전세금을 나눠 갖고 뿔뿔이 흩어져 갔다.
끝까지 이사비를 받아내겠노라고 악을 쓰던 여편네 셋이 올 가을에
이사를 나가고 나선, 결국 삼지 아파트는 빈집이 되어 버렸다.
이런 집에는 불량배들이 꼬여 들기 마련이지만, 강재협이 일당의
두목 놈을 찾아가 조진 끝에, 한 놈도 얼씬거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노숙자들이 꼬여 들었다. 언뜻언뜻 담뱃불 같은
불빛이 비치는 걸 보면, 아마도 아직도 댓 놈쯤 꼬여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이 아파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헐릴 예정이었다. 어차피 오래 되어
재개발 대상이었던 데다, 축대도 무너져 기울어지고, 게다가
조도형 사건까지 있어, 사람들한테 흉가로 점찍혀 있던 상황이었다.
업자만 나선다면 얼씨구나 하고 팔아치울 형편에, 마침 대기업에서
손을 대, 아파트 땅은 시세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아마도 올 겨울이 지나고 나면, 바로 해체 작업이 시작되고, 요새
한참 인기 있는 인터넷아파트니 오피스텔이니 하는 건물이 세워질 테지….
그리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전의 기억을 잊은 채, 꾸역꾸역 모여들어
이 땅위에 있었던 혐오스런 과거를 모두 생활의 그림자로 덮어버릴
것이다. 조도형의 병자같은 그 흰 미소도, 문혜주의 달빛같은 허벅지도...
끼이익...
창문이 모두 깨져 있는 탓에, 알루미늄 현관문은 그 틀이 일그러졌다.
그 삐죽한 부분이 세멘트바닥을 긁은 소리가 밤공기를 짓찢는 듯 했다.
조도형, 살인마, 내 딸 내놔라!
맞아죽을 놈, 당장 사형시켜버려!
개 같은 년의 보지를 찢어 버려라!
...아파트 벽에는 이런한 살기 짙은 낙서들이 가득했다. 피해자의
가족이거나, 혹은 사건에 대해 분노한 시민들의 짓이리라. 아닐 수도
있겠지만...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조도형과 문혜주가 있었던 방은 403호.
이 아파트에는 드물게 4층을 쓰고 있었다. 4라는 숫자가 어감상
좋지 않다 하여 대부분의 건물에서는 F라던가, 아니면 그대로 건너
뛰어 5층을 쓰거나 한다. 하지만 여기는 4라는 숫자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만일 이 숫자를 쓰지 않았더라면, 이 건물도 멀쩡했을까...
조도형이라는 희대의 살인마도 나타나지 않았었을까...
강재협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전용면적을 넓게 쓰고 싶은
조합원들의 욕심 때문이었는지, 이 아파트는 계단이 아주 좁았다.
겨우 한 사람이 조금 넓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 밖에 없었다.
오 층 짜리 건물이었던 덕분에 엘리베이터 설치규정은 겨우 비켜갈
수 있었겠지만, 이사할 때마다 솟구치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삼 층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놈의 집이다. 갑자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이 방에 한두 번 찾아오는 것이 아닌데, 왠지 여기에 올 때마다
숨이 턱에 차 오른다. 그리고 까닭 없이 자지가 서는 것이다...
빌어먹을... 마누라 데리고 이 아파트로 이사올까...
미숙아, 나 왔다 간다. 내 사랑 믿지?
혜지는 이제 내 거다.
우리의 사랑을 맹세하며.
두려움은 사랑으로.
아래층에서 보던 낙서와는 사뭇 다른 내용들이다. 글씨도
아기자기하고, 하트모양으로 장식을 한 것도 있다. 조도형이
사건을 일으켰던 장소라는 게 소문이 나면서, 시덥잖은 놈들이
가끔 배짱시험이니, 사랑의 맹세니 하는 것을 하느라, 여기까지
찾아오곤 하는 모양이었다.
특히나, 조도형이 체포 당시, 애인과 섹스중이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그것이 마치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애인과의
결합을, 뭐 그런 인상을 주었던지, 특히나 연인들의 낙서가
많았다.
여기 가득 적힌 사랑의 낙서들 중 여럿은 간 크게도 여기서
진한 정사를 나누기도 하였으리라. 그래서 그런지, 올 때마다
낙서는 늘어만 가고 있었다.
놈의 방문 앞에 섰다.
누군가가 기념으로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방문의 홋수의 번호는
모두 떼어가고 숫자가 붙어 있던 곳에 희미하게 자국만이 남아
이곳이 403호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둔탁한 낮은 철쇄소리가 나다 말고 막힌다.
잠겨 있는 것이다. 강재협은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내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면서 관리실 영감도 어디론가 가 버렸는데,
그 때 강재협이 미리 마스터 키를 받아두었던 것이다.
마스터 키를 열쇠구멍에 꼽으면서 강재협은 문득 또 다시 한번
문혜주의 흰 허벅지와 그 사이의 구멍을 떠올렸다.
문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한발 안으로 들어선 강재협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곰팡이 냄새였다. 한 겨울에 웬
곰팡이람...
방안은 새까맸다. 두터운 커튼이 걸쳐져 있는 탓에 빛줄기 하나
새어 들어오는 곳이 없었다. 강재협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려 함이다. 이윽고, 사물의
윤곽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고, 강재협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수라장... 이곳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온통 엎어져 헤질러진 가구, 옷들, 물건들, 책들... 마치 폭탄이라도
떨어진 집처럼 제법 넓었을 마루에는 시커먼 물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가택수색을
하느라 무장경찰 일곱과 특수과 형사 다섯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샅샅이 뒤져댄 탓이다. 그 후, 바로 조도형이 체포되었고,
문혜주도 같이 연행되었으므로, 그 이후로는 돌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조도형은 그 후, 이송 중에 탈출하였고, 문혜주는 그 후
다신 세상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강재협은 왠지 믿고 싶었다. 아니, 믿고 있었다.
조도형은 반드시 여기로 돌아온다. 반드시 돌아온다...
이유는 문혜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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