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사(相思)
-제 1 장- 홍패(紅覇)
전란의 회오리는 사람 사는 행색만을 뒤집어 놓은 것은 아니었던 듯 싶다. 그 사이에 집과 가산, 식솔들을 잃은 양민들은 나라에 대한 지극한 믿음을 허술하게 상실했으며, 죽어라 죽어라 하니, 힘없고, 기댈 곳 없는 치들만 생목숨을 내어 놓는 경우를 마주친 지 다반사라, 인심조차 박절하기 이를 데 없어 지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로 보이고 있었다. 거리를 방황하며 떼로 모여들어 문전걸식을 일삼는 걸뱅이 패들의 뻔뻔스러움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건만, 조정에서는 이렇다 할 구제책을 내어 놓지도 못하고 있었고, 전쟁의 여파로 재정이 어려워진 중앙에서는 그나마 세도를 틀어 쥐고 있는 귀족 계급과 양반 계층에 대한 과중한 자진 혈세를 강요하고 있어서, 정계의 해당 거물들은 그를 피해나가기 위한 묘수 짜내기에 혈안이 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민심이 흉흉하고, 도적 패들이 출몰하는 형편을 감안한 세력 계층들은 저마다 자신의 외부로 표출된 영역 위로 장막을 쳐 나가기에 급급했으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은밀한 축재 내역이라도 까발려 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제까지 목숨을 걸고 그들의 권력 옹호를 위해 몸 바쳤던 가신들이나 사병들을 가차없이 필요 없는 순서대로 문밖으로 내치는 웃지 못할 몰인정이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예상치 못한 사회상으로 치달았는데, 그 하나가 바로 무뢰배의 출현 이었다. 무뢰배는 불한당패, 혹은 검계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불법적 무장 세력으로서, 조정은 초기에 그 출현을 전쟁이 가져다 준 하나의 풍문 정도로 치부했던 실수를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다. 대개 양반가나 세도가에 기거, 숙식하면서 그들을 호위 하던 사병조직이나 호위 무사들은 어디서 굴러 먹다 튀어 나오는 위인들이 아니었던 점이 특징 이었다. 그들은 익히 들어서 알려져 있던 무관 계통의 직급에 있던 자나, 중앙으로의 진출이 애초에 막혀 있었던 서자, 백정, 천얼들 가운데 무예가 출중한 자들 중에서 선발되었던 점을 들 수 있었다. 그들이 관급의 미래를 상상하며, 몸을 담고 있었던 직위가 더 이상의 희망을 가져다 주지 못함을 깨닫고, 다른 형태의 신분 상승을 꿈꾸며, 세도가의 사병 조직이나 호위 무사로 자리 바꿈을 했던 것은 직접적인 출세의 가도는 아닐지라 하여도, 그들 스스로 세도가에 빌붙어 있음으로 해서 떨어지는 주변의 콩고물들이, 이전에 받아 챙기면서도 항상 허우적 대야 했던 녹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유함의 꼬투리 임을 익히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 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과 다르긴 해도 또 다른 계층으로서 세도가에 잦아드는 치들은 아예 출세의 가도가 출생의 신분으로 말미암아 막혀 있는 부류들 이었다. 아무리 면천이 된다 한들, 천민 계층에서 양민이 되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면천의 기회가 박탈되어 있는 서얼들이 그러했다. 그들에게는 양반 들에 대한 끓어 오르는 반감과 불신, 자신에 대한 혐오가 함께 뭉쳐진 채로 성장한 계층이었고, 그 중에서도 무예로 소신을 실천하려는 자들은 그러한 분노와 집념이 다른 이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정점에 다다르고 있어, 그들을 거두는 세력들은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냉혈한들을 소유한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이를테면 서로가 추구하는 이득이 맞아 떨어진 절세의 관계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두 부류들은 세도가의 밑에서 그 권력의 단맛을 은근히 향유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인물의 권력이 축소되는 것을 결코 바랄 수 없는 군상들 이었다. 평소 같으면 인력의 충원이 끊이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로 돌려지는 치명적인 패대기질은 때 아닌 경우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대개 권력 계층의 양반 세력들은 호위 목적, 또는 자제들의 체력 단련, 혹은 무과 급제의 한 방편으로 무예가 출중한 자들 중에서도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자신들의 자제에게 집중적인 사사를 시키고 있었던 고로, 이들에게는 그 사이 각별한 애정을 주인으로부터 받아 내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자제를 가리킬 수 없는 상황, 예를 들자면, 성장하여 조정에 진출 하였다 라든가, 아니면, 지나온 전쟁의 여파로 사조직의 범위와 영역이 축소 일로에 치달았을 경우, 필요 불가분의 위치에 있는 근접 호위무사들을 제외한 이들 중에서 이런 무예 스승들은 언제나 일순위로 세도가의 손에서 내쳐지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권력의 향기에 중독되어 있었고, 부유함의 그늘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조차 세도가들은 간과하고 있었다. 내쳐지면 내쳐지는 대로 지 놈들이 어찌 하겠느냐, 그저 생긴 대로 비럭질이나 하며 그렇게 살다가, 그도 안되면 화적질로 먹고 살다, 법의 심판 아래, 효수나 당하지 않으면, 기꺼이 죽어 지낼 터라고 너무나 쉽사리 그 결과를 생각하고 있었던 자체가 오산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을 가리켜 권력 계층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은 비곗살이라고 불렀으며, 끊어 내기에 합당한 치들인 동시에, 언제 버려도 아깝지 않을 인사들이라고 입을 모으며, 자신들의 이기적인 처사를 합리화하기에 급급해 있었다.
그러나, 더더욱 그들의 분노를 자극했던 처사는 더 이상 그들이 어디 에고 소속될 수 없다는 상실감 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깨나 써 보이는 것은 물론 이고, 항상 분신처럼 차고 다니던 병장기를 반납하고, 길거리로 나 앉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도 못했을 뿐더러, 기어이 떨려 나와 개밥만도 못한 종자가 되어버렸네 라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그들로 하여금 시절의 한탄을 쏟아 내놓기에 앞서서, 그들을 그렇듯 무위도식 하게 만들어 버린 양반님네들을 바수어 버리고 갈아 마셔도 속이 가라 앉지 않을 것 같은 억울함을 동시에 끓어 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이기도 했다.
유유상종 이라 했던가? 그런 그들은 서로를 잘도 알아 보았을 터이고, 이내 규합되고 뜻을 같이 하는 작자들이었을 테니, 이름하야 작당은 어찌 보면 그들을 위한 단어로 존재 하는 듯 보였다. 여기에 세를 더하는 세 번째 부류는 이른바, 잔여 세력들 이었다. 조정이나 세도가들이 필요에 의해서, 혹은 반역이 성공적인 정권 찬탈로 이어지고, 공적에 따른 포상의 줄 잔치가 끝을 맺고 나면, 그 어지러운 시절을 반추하려는 빌미를 포를 떠 없애려는 것처럼, 또 다른 예로 들자면, 전쟁의 방패 막으로 임시적으로 징발 되었던 부류들 중에서 단일 목적 하에 규합되었던 무장 세력들을 다시금 기약 없이 방출하여 버리는 이 두 가지 실례로 지칭된 역작용에 희생된 부류를 들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병장기를 들고 무장을 해야 할 명분과 당위성, 혹은 저마다 혹시나 이 기회에 큰 길로 나설 수 있을 는지도….라는 헛된 희망으로 부풀어 세상을 한 손에 아우른 양 뻐대기던 인물들이었다. 그들도 다름없이 길거리로 빨가벗겨져 내 몰린 것은 마찬가지 였으며, 시절의 한탄을 넘어서서 분노와 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들 이기도 했다.
‘성님, 아까 전, 저자 거리에서 귀동냥으로 듣고 왔는뎁쇼….’
‘무얼? 떠도는 얘기야, 다 그렇고 그런 것이지….’
윤가는 장쇠의 귀뜸에도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거 있자녀요, 얼마 전, 와장창 털리고, 그 댁 아씨 까정 보쌈 해다가니, 들구 놀다가 구릉에
시신으로 내팽개치고 내뺐던 그 자슥들 말여요…’
‘근데…’
‘잡혔다 허대요….’
‘그래? 그런데….또 뭐가 있다더냐?’
‘이 달 초 이레에 저자 거리에서 효수한다고 방이 붙었다 안혀요?’
‘늘상 있는 일 아니더냐?’
‘근디, 사람들 말인고로, 그 자가 보통이 아닌 거 같다 헙디여. 전옥서를 지키는 옥졸의 말이 돌고 도는디…..’
‘어허, 말은 옮기는 족족 번지느니…..너라도 입을 다물어야 하질 않겠느냐?’
‘하이고 성님두….거 보쇼.. 기냥 귀가 쫑긋혀 가꼬…..손 놓는 걸…내 모름 빙신이쥬….’
그건 그랬다. 윤가는 옥졸의 돌고 돈다는 헛소리라도 그 내용이 궁금했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 을 않는 것이었다. 세상을 어지럽혔다던 흉악 무도한 범인이 잡혀서 만인에게 본보기로 효수가 된다는 사실로 종결 될 수 있는 문제 였건만, 또 다른 얘기가 돈 다는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
‘옥졸의 말인 즉슨, 범인을 공초허는 과정에서 그 자의 품으로 부텀 붉은 댕기 거튼 띠가 나왔다는 디…..’
‘붉은 띠?’
‘야….그 띠에 세상 뒤집어질 얘기가 써 있었다 이 말이지라.’
‘세상 말세라 했더냐?’
‘하이고, 거 무시기냐, 혹세무민 헐라치는 글귀면 이러지두 안커시유….’
‘이 놈이 뜸을 들이기는….. 어서 말해 보래두?’
‘숨 좀 돌리구유, 일당은 양반을 척살 허세, 일당은 양반의 가산을 몰수 허세, 일당은 양가의 아녀자를 겁탈 허세…이렇게 써 있었다 허대요. 내참, 그 놈들이 사람 이래유? 인두껍을 쓴 개종자 들이지…..’
윤가는 양미간에 힘이 가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필시 세간에 흉흉한 소문으로 자자한 검계들 중의 하나인 홍패(紅覇)라는 떨거지들이 분명했다. 전후, 전국 각지에는 넘쳐 나는 검계의 출몰 소식에 가진 자들은 문 밖 출입도 자제하는 지경으로 가고 있었으며, 해가 떨어지면, 몸종이나 교꾼을 대동 했을 지라도, 무장 호위 무사가 없을 경우, 양가집 아녀자의 문 밖 출입은 여하한 경우에도 허락되질 않던 시절 이었다. 그렇듯 검계의 무리들은 있는 자들의 행색을 잘도 추려내고 있었고, 목표가 정해지고 나면, 반드시 거덜을 내고, 식솔들 중에서 가장 아끼고 숨겨 두었던 처자들은 깃발 삼아 짓밟아 버려, 그들에게 독한 교훈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 상례였다.
‘장쇠 이놈, 어디 검계로 자처하는 것들이 그 홍패치들 뿐이더냐? 길이 다른 듯 싶어도 도적은 도적, 살인자는 살인자인 법, 그 어디에고 그 길 위에 발을 들이고 있으면서 벗어났다고 외칠 수는 없는 법…..’
‘지가 그 말이랑게요….아니 달포 전에 붙들린 그 금수 가튼 놈들도 그랬다니 그러쥬….아니, 이기 뭐 사당패도 아니고설랑, 지들이 뭉쳐 댕기면 워쩔건지….참 내…..’
‘그자야, 그 창기를 농락한 죄로 그리 된 거 아니더냐?’
‘어허, 모르시는 말씀…..그 인간이 옆궁지에 칼 차고 그 짓만 혔을까? 딴 소문은 모르시쥬?’
‘딴 소문 이라니, 다른 사실도 불거졌더냐?’
‘아뉴우?, 다들 쉬쉬 허는디, 그 인간이 뒤에 떡 허니 버팅기고 앉아 설라무네, 양호(釀戶)로부텀 술동이를 빼끌어다 일반으로 댔다 허대요. 이러케나 세상이 어지러운 판국에 술들은 어찌 그리 퍼재끼고 있는지, 시방, 그 치가 잽혀 들어 갔어두, 그 떨거지들은 여적까지 배 뚜드림서 산다 안 혀요? 장안에서 팔아 재끼는 그 술동이만 감 잡아도…어휴, 이 놈 대가리로는 심도 지대루 안되네 그랴…난리가 끝난 지 원젠디 다들 초근목피로 살아 재끼는 이 시절에, 그 놈의 기방에는 술이랑 고기가 끓어 넘친당게요, 구데기가 워디루 모이거시유? 말하믄 입 아프지….헐…..’
검계로 뭉친 이들은 저마다 양반 계층에 대한 실망과 분이 맘 속에 가득한 지라, 그들에게 있어서 양반의 모든 영역들은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지경이었다. 약탈과 살인, 게다가 부녀자 겁탈에 이르기 까지 그들은 천인 공노할 범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고 다니면서도 쉽사리 토벌되지 못했던 것은 전후 그 영향력과 통제력이 약화된 조정의 실존 형세 이기도 했다. 그들의 규합이 가져다 주는 첫번째 범죄는 약탈이었다. 특수한 계층에게 국한 된 병장기의 소지는 전후 그 규율이 강화 되었고, 더불어 진검이나 병장기, 호신용 살기류를 보유할 수 있는 것은 관할 도감의 허가가 없이는 불가 했으며, 비밀리에 만들어 밀거래 되던 도검류에 대한 수색이 강화 되면서, 그들은 자신들 만의 세력과 힘을 비축하기 위해, 진검과 병장기 류를 불법적이라 할지라도 사 들일 수 있는 재력을 필요로 했다. 검단과, 검면에 표시되던 출처의 각인이 없는 것은 불법이었기에, 그들은 언제나 품속에 밀거래로 소지한 도검을 숨기고 다닐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길이와 모양새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도검류를 의복 안에 숨기려면 옷가지 조차 스스로 꿰매어 다루던가, 아님, 솜씨 좋은 여염집 아녀자를 겁탈한 뒤에, 입을 떼지 않는 조건으로 옷을 변형하여 고치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검계의 피해 반경에 들어가 있는 양민의 수는 죽어 나가는 시신이 아닌 경우, 실제 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이바구 였다.
두 번째 공공연한 그들의 범행은 다름 아닌 기방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시절이 하수상 하다 보니, 입신의 의지도 상실되고, 애초부터 부유했던 선친들의 가산을 하릴없이 기방에서 탕진하는 인사들이 늘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시대를 대표하는 금맥을 자처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문 밖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하고, 어제의 양민이 오늘의 도적이 되어 버리는 이 판국에, 그 기방이란 별천지는 언제나 풍요로움이 넘치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무뢰배들이 그 상황을 놓칠 리 없었고, 드나드는 양반들과 마주칠 일도 없이, 그 뒤편에서 그들은 기방의 전권을 장악한 뒤에, 술과 고기를 매점하여 공급하고, 기녀들의 전두를 가로채는 것도 모자라, 저마다 맘에 드는 기녀를 꿰차고 스스로 기부임을 자처하며, 색욕을 손쉽게 채우는 악행마저도 저질렀던 것이다. 특권 계층이야 자신들을 훼방치 않은 다음에야, 기방의 뒤편에 거머리가 버티고 있건 말건, 그들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즐기고 돌아가면 그 뿐이라는 생각에, 기방을 중심으로 암약하던 검계의 토포를 위해 머리를 짜내던 계획조차 억지로 무산 시켜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었기에, 다른 영향권 보다도 기방에 기생하여 악행을 일삼던 검계의 무리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생존을 보장 받는 셈이었다.
세 번째 그들의 포악한 악행은 바로 양반의 규방을 짓밟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분의 제약이 안고 있는 것은 출세나 금전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또 한가지 그들의 구미를 당기는 일은 꽁꽁 숨겨가며 키워내는 풋풋한 규수나, 혹은 고고함을 자랑하는 양반의 내자들을 낚아채는 일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나면 그들도 양반의 여인네들을 품을 수 있다고 공공연히 허언하고 다녔던 그들이기에, 약탈을 위해 침입한 양반의 가택 내에 고이 잠들어 있는 여인네의 살풋한 육향은 그들로 하여금 음심을 폭발 시키기에 충분했으며, 그것은 금단의 열매를 따는 쾌감마저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양반들은 여인네들의 문밖 출입을 자제 시켰고, 밤이면 호위 무사들을 이용하여 번을 서게 하거나, 가택의 내부에 순시를 돌게 하는 것을 의무처럼 여겼다.
네 번째 그들의 악행은 살인, 방화를 차제하고라도, 이권이 개입되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출몰한다는 점이었다. 그 비근한 예로, 검계의 효시로 보이는 부분을 본다면 바로 장례의 절차에 관여하는 향도계를 위시하여, 막대한 량의 진상품, 수시로 상부로 향하는 조세자금, 공물등을 약탈하는 것을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순순히 수중에 들어온 막대한 량의 물품과 금전이 법망을 뚫고, 상도의를 흐트러뜨리며 쏟아져 일반으로 향하니, 시세와 장세의 균형이 틀어지고 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환의 가치마저 흔들려, 시장경제는 그들의 뭉칫돈과 물량에 흔들거리는 지경으로 빠져,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매점매석이 횡행하면서 그 잇권의 향방조차 그들의 의도대로 딸려 오는 기현상을 속출했던 것이다.
‘성님, 우짜쓰까요잉?……돌던 어음도 이젠 코빼기도 안 돌려 보기 일 쑤고, 상단패들도 눈이 벌게서 얼릉 팔아치울 속심에, 이리 저리 무뢰배들 끄나풀 쫓기에 날을 샌다니깐여?’
‘상도의도 모르는 것들에게 휘둘려서야, 나라 꼴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골로 가는 거이지, 뭐 겄슈? 아이구, 이러다 난리나 또 터지는 거 아닌 가 모르겄네…..되려 왜구들이 들쑤실 때가 호시절 이었다니깜유? 근디, 성님, 정…. 안 가 보시려우?’
‘어딜 말이냐?’
‘아니, 엊저녁 효수한 놈, 쌍판이락두 보러 가야 안컸슈?’
‘이놈, 아무리 불한당에 무뢰배 이거늘, 그거야 목숨 부지할 때의 지화자고, 이미 망자가 된 이를 니 세치 혓바닥으로 욕보이는 것이 무에가 신나는 일이라 이리 호들갑 이더냐?’
‘다들 허는 굿 장단에 워찌 성님만 사래질이랴?’
‘허어 이 놈이 그래두?’
윤가는 처량맞은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세상은 힘을 가진 자의 것이 되어 가고 있는 듯이 보였고, 바른 심성으로 살아 보려는 것이 욕심이자, 춘몽처럼 보이는 어처구니 없음에 스스로 숨이 갑갑해져 오는 것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디서 우렁찬 목소리와 더불어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물렀거라!...물렀거라!’
‘아니, 저자 거리에 웬 행차?’
‘이리 오너라! 궁에서 나왔느니라. 전직 패관(稗官: 임금이, 민간의 풍속을 알려고 세상의 풍설과 소문을 수집, 정리, 집대성 하여 소설처럼 기록하여 바치는 벼슬아치) 윤가는 왕명을 받들라!’
때 아닌, 저자 거리의 대대한 행차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경이 났다며,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눈을 떼질 못했다. 그러나, 윤가는 당당한 자세와 품위를 흐트리지 않은 채, 눈 하나 깜짝하질 않고, 왕명이 담긴 교지를 받들었다.
‘오랬만일세.’
‘어이쿠, 어찌 어르신께서?’
고개를 들자, 윤가의 앞에는 궁에서도 서릿발 같은 성격으로 잘 알려진 승정원의 여섯 승지들 중에서도 으뜸이며, 정 3품에 해당하던 도승지 영감이 서 계셨다.
‘주상께서 자네를 긴히 찾으라 하시어서 말이지…….’
‘어찌 저 같이 퇴궁된 잡것을 다시금……’
윤가의 전력이야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건만, 파당의 정쟁 속에 휘말렸을지언정, 임금만이 볼 수 있던 패관기서(稗官奇書)의 장구한 집필에 대한 그 노고나마 인정되어, 옥살이나 유배는 면했다 해도, 패가 망신한 채로 이렇게 저자 거리에서 잡상을 하고 있는 지경의 인물을 급히 찾으신다는 말씀은, 윤가로서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구석이 있었다. 이미 모든 관직에서 밀려난 지라, 그는 도승지 영감과 눈도 바로 맞출 수 없었다.
‘저를 어찌하여 이렇게 다시 찾으시는지 연유라도….’
‘아주 중요한 일이네. 화급을 다툰다 기 보다, 주상께서는 이 사안의 경중을 자네가 가늠하여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으시지.’
그는 무조건 장쇠에게 전방을 부탁하고, 도승지의 앞에 서고 있었다. 예전 궁에서야, 예를 갖추고, 면면히 대담이 가능했을 테지만, 이제는 엄연히 신분이 달라, 교꾼(가마를 드는 인부) 옆에 붙어 머리를 조아리고 벌벌 거리며 서있는 지경이었다.
‘허어, 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구, 어찌 이리도 적조 했던 게야? 내가 어디 사람을 가려가며 보던가? 한가로울 때 일간 다녀가라 그리 일렀건만…..’
‘먹고 사는 일이 그렇습죠.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내야, 뭐 그런대로…..어디 긴히 얘기를 나눌 곳이 있겠는가? 사방에 눈과 귀가 많음이야.’
‘아니, 이런 누추한 곳에……, 아니 되옵니다. 제가 근간 따로 찾아 뵈오면 어떨는지 요?’
‘아닐세, 장소야 무에 그리 대순가? 다 먹고 사는 일에 둘러선 일상인데, 그걸 업수이 대해서야 민초의 뜻을 헤아린다 할 수 없는 것이지.’
‘그럼 이 쪽으로….’
윤가는 황송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는 표정으로, 도승지를 유기전의 내방으로 맞아 들였다. 이리 저리 어지러운 것을 치운다 하여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던지, 윤가도 이내, 좌정 할 수 있는 곳만을 추스르고, 자리에 상면하여 앉았다.
‘참, 딱하이…..어찌 그리 사람이 이리도 등을 돌려대고 사는 것인지….쯧쯧….’
‘저야 뭐, 이 짓이 편하고 좋긴 합니다. 남에게 보일 정도는 아니어도….’
‘그 말이 아닐세, 자네 처럼 뛰어난 식견과 학문의 깊이라면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겠건만, 어찌 이리도 막 살아대는 일에 몸을 던지고 사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기에 허는 말일세.’
‘과찬 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도승지가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눈매를 지그시 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중의 얘기를 꺼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자네도 익히 들었겠네만, 요즘 도성 안팎으로 시끄러운 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주상께서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닐세.’
‘네. 그러하실 것이옵니다만….’
‘이미 조정에서는 범죄의 수괴를 비롯하여 작당에 야합한 부류들이 전국을 궤적으로 하여 저질러 대는 그 악행이 한계를 상회했다고 보는 바,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네. 허나, 그렇다 하여 무조건 토포군을 징발하여 내세울 수도 없는 일, 그들의 추행이 도를 넘어섰다고는 하나, 무리가 소소하게 분산되어 있고, 흔적을 추쇄 하기에도 조정의 역량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네. 하여 주상께서 친히, 자네를 다시금 이 일의 조사를 위하여 천거하신 마당이라 사전에 자네로부터 고견이나 얻자고 이리 온게야.’
‘고견 이라니요? 당치도 않으신 말씀 입니다. 일개 패관 이었다가 파직도 모자라, 양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저 같은 자의 입에서 어찌 국가의 중대사를 다루는 고견이 토설 될 수 있겠는지요? 천부당 만부당 한 일이옵니다. 하문을 거두어 주십시오.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허어, 이 사람, 겸손하기는…..산적한 문제가 한 둘이 아니라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우선 먼저 화급을 다투어 토포군을 징발하여 출몰지를 중심으로 탐문에 힘쓰고, 지속적으로 검계의 적당들을 잡아들인 연후, 사리에 치우치지 않는 단정한 공초로 만인의 공의를 끌어낸 다음, 죄질에 따라 경중을 구분하여 처리하신다면 어려울 것이 무에가 있겠습니까?’
‘세상사, 모두 자네 말처럼 흘러간다면야, 내가 어찌 이 노구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겠나?’
‘어떤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두각을 드러내는 지요?’
‘그것보다도, 검계의 악행을 보고 받는 와중에, 호조로부터 때 아니게 초사가 올라왔다네.’
초사라고 하는 것은 각종 조사를 함에 있어서 처음으로 보고 되면서도 심각한 문제점을 담은 내부의 감사, 혹은 확인 보고서를 의미했다. 이것은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결정적 근거 였으며, 이를 통해 보다 확대된 조사를 지시할 수 있는 빌미 이기도 했다.
‘호조가 어찌 검계들의 악행과 관련이 있을 수 있는지요? 혹여, 조정 내부에 검계의 활동을 지원하는 세력이 자금의 확보를 위해 호조를 압박하는 것이옵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호조의 초사에 의하면,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앞 뒤가 맞질 않는다는 것이야.’
‘앞뒤가 맞지 않다라는 것은 진정 무슨 의미인지요?’
‘이미 검계의 무리들이 조정으로 상납되는 조세 자금과 진상품, 공물등을 약탈하여 잠적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 그래서 형조와 의금부가 공조하여 이렇게 약탈 되어진 물품과 자금등이 어떤 경로로 일반에게 풀어지는 가를 은밀히 알아보도록 하였다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야.’
‘문제라면?’
‘빼앗긴 것과 일반으로 내쳐진 물량, 자금 등이 결코 일치하여 맞아 떨어질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의 추적 결과, 상상할 수도 없는 내용들이 일반으로 나오질 않고 있으며, 그의 추적을 위해 전국에 걸쳐서 토벌되어 투옥된 인물들을 통해서도 잡다한 물량과 자금만이 드러날 뿐, 그 덩어리는 흔적조차 찾을 길이 요원하다는 것이 호조의 초사 내용일세.’
윤가의 양미간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호구지책으로 삼기 위해 약탈을 하였다면, 그 피해가 경미 하겠사오나, 그들은 전국에 걸쳐서 막대한 조정의 재물을 편취하였고, 그것을 사사로이 사용치 않았다면, 필시 연유가 있질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는 말이 아닌가? 대개 무뢰배라고 일컫는 도당들은 계층간 불평등에 앙심을 품고 일을 저지르는 치들이 일반인데, 그들이 축재를 목적으로 그렇듯 목숨을 내걸고 갈취한 재물을 특유의 목적으로 유용할 리 만무하고, 이제까지 보여 온 그들의 작태로 보아, 기집 질이나, 향락을 위해 뿌려댈 것이 분명하다 여기고, 초사에 들어간 것인데, 어찌 된 연유인지, 그 전면에 나서 있는 물량은 전혀 예상 밖의 소소한 것이었기에 고민이 시작되는 것일세.’
‘그렇다면 다른 걸림돌은 무에가 있겠는지요?’
‘흔들리는 민심과 그 영향력을 들 수 있지. 그들의 세력이 준동하는 지역은 특히나 전후 유랑민이나, 기근이 심하여 생활고가 극심한 지역이 대부분이고…... 그러다 보니, 눈만 뜨면 그 검계의 조직에 몸을 내던지는 양민이 나날이 늘어간다는 것이야. 그 세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다는 것은 주변의 치안이 마비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관할 지역의 관찰사나 수령조차 그들을 때려 잡는 일이 점차 요원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연약한 심사를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 또한 큰 일 아닌가? 그것을 수수방관하고 있자니, 조정에서는 그 무리들이 준동하여 지역적인 결성이 면면히 이루어지는 날에는 누군가 경미한 촉발만을 하여도, 민초들에 의한, 분연한 봉기의 국면으로 전환되어 겉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돌쳐 갈 것을 우려하고도 있다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것은 말처럼 쉽사리 결집되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어찌하여 그런가? 역모의 세력이 축적한 재력을 바탕으로 은밀히 그들을 동요한다면 가능한 처사가 아닐까 싶네만….’
‘그 세력은 이를 테면 충성을 맹세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혼탁한 정국을 바로 세우자고 발기한 인사들이 아니라는 데에 요점이 있습지요. 혹여 뒤를 보아주고, 그들을 통해 모반이라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들이 이미 특권 세력의 손아귀에서 내쳐져 무위도식의 검계가 되어져 왔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는 마당에,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누군가 그들을 조정하였다 쳐도, 사태가 안정되고, 그 주동자의 의도대로 정권의 수순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치면, 반드시 그 인물은 방패막이로 내세웠던 그 무리들을 거두기는 커녕. 영원히 매장 시키려 들고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지경인데, 그들이 섣불리 지역적 결당을 통해 세를 확장할 리 없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오리무중인 그 막대한 자금과 물량에 대한 것은 어찌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저로서도 가늠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할 수 있겠지요. 어찌 보면 단순하게 축재 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 물량이나, 그 내용이 조정에 바쳐질 공물과 진상품이란 것은 이를 테면 최고가 품이자, 선별된 진품들이란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게다가 조세 자금이 탈취 되었다는 것은 다른 면으로 해석한다면, 양반 계층이나 특권 세력을 겨냥 했다라기 보다는 조정을 상대로 그들의 의지가 어떠하냐 라는 것을 과시하는 듯한 인상이 역력하지요. 단순히 악행의 발로로 인해 놀다 흘러가는 자금을 편취했다라고 보기에는 보다 복잡한 그들 나름의 목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어떤 목표 말인가?’
‘만일에 그 약탈과 축재가 모반의 의지를 실현 하기 위한 초석으로 쓰여질 요량이었다면, 지속적으로 조세 자금을 강탈의 표적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 겠기에 말입지요. 그러한 행위의 모방이나, 지속적인 연계는 바로 자승자박의 결과일 뿐일텐데, 지금도 멈추질 않고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지요.’
‘허어, 답답하이…어서 속 시원하게 털어 놔 보게….’
‘그것은 땅을 갈아 엎는 것과 같은 이치입지요….황당하게도…..’
‘땅을 갈아 엎는다? 그건 또 무슨 연고 인가?’
‘자고로 땅을 갈아 먹고 사는 이들은 흙심의 정도를 냄새로 맡기만 하여도 안다 하였지요. 해가 바뀌고, 그들에게는 보다 증배된 수확을 위한 방편의 강구가 바로 코 앞에 다가오게 됩니다. 그들은 먼저 좋은 종자를 고르기에 앞서 땅을 갈아 엎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따르면 겨우내 땅 속에 잠자던 버러지들을 죽여 주기도 하고, 깊이로 하여 버티고 있던 흙심을 표면으로 끌어 올리는 것에 더 없이 훌륭한 방법이며, 수확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기본 예절 이기도 합지요. 어차피 지난 해와 같은 땅에, 뒤엎지도 않은 상황으로 씨를 뿌린들, 숨결이 막히고 약해진 흙심으로 인해, 보다 나은 수확을 보장 받을 수 없음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기왕 새로이 시작하는 초심으로 나선 마당에 일단 땅을 갈아 엎자는 것이 농자의 간절한 기원이기에 말입니다.’
‘허면?’
‘단적으로 그들은 이 세상이 뿌리부터 미운 것입니다. 정권을 새로이 누가 틀어쥔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흘러온 부유함은 여전히 계승될 판이고, 굶주린 치들은 기어이 하늘을 올려다 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인데, 누가 누구의 임의로 정권의 향방이 갈린다 한들, 그들에게 돌아올 몫은 여전히 척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땅을 갈아 엎는 것 만이 능사라고 믿고 있는 소치로 보인다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영감….’
‘나라의 근본을 흔들고야 만다? 허어 이거 참…..’
‘그냥 간신배 몇이 모여서, 궁터를 담보 삼아 저지르는 사물놀이가 아닙지요. 그들은 이 시절이 안고 있는 초장과 종장의 의미 마저도 모두 갈아 엎고 싶은 겝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 처리하려는가? 내 의금부와 포청에 기별하여, 은밀히 사람을 붙여 주어도 좋겠나?’
‘아닙지요. 그리하지 마십시오. 단신으로 수를 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안전하다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표면적 압박과 토포의 기미가 느껴진다면 대번에 그 표면의 점조직을 와해 시켜, 겉으로는 양민으로 돌아간 듯 박피하여 버릴 것이 분명 합지요. 이 싸움은 강공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경우 입니다. 제가 홀로 나서서 어떤 실마리를 잡을 때까지 영감께서는 제가 은밀히 올리는 연통을 주목하시고 함구하여 주십시오. 때가 되어 그들을 초절할 시기가 온다면 기별하여 드릴 것입니다.’
‘알겠네, 자네만 믿음세.’
총총이 사라져 가는 도승지 영감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윤가는 한참이나 조아리던 고개와 허리를 펴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뻐근해져 오는 등배와 허리를 통해, 이런 작은 직급과 계층 간의 차이조차 그들에게는 분함의 표상으로 돌출될 것이란 생각이 들자, 심히 착잡해져 오는 것이었다.
-제 2 장- 찰나가 영원처럼.
‘성님…워쩐 일이래유?’
‘어허…이놈…..아무 일도 아니라는 데도?’
‘성님이 범상치 않은 인사라는 건, 척 보고 알았지만도요…..이렇게 높으신 양반이 찾으실 줄은 몰랐당게요. 글코, 교지는 또 뭐당가요? 죽을 죄라도 지었남유?’
‘장쇠, 이놈! 장차 거간질로 밥 벌어 먹을 놈이 그렇게나 눈치가 없어서야…. 이 바닥에서 굴러 먹자면 눈치가 네 밥줄일 턱인데, 보면 모르겠느냐?’
‘아니, 그럼 성님이 거 뭐시냐, 암행 이다 뭐다 그런 거라 이 말이유?’
‘암행은 무신…..그저 예전에 녹봉께나 쥐어 보았던 게 무에 그리 내세울 것이 있겠느냐? 성은에 힘 입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대던 인사가 바로 나였느니라.’
‘죄를 지었스믄 응당 유배를 가시등가, 아님 쓴 비상탕에 세상 하직이 원칙 일턴데, 이렇게 저자 거리로 나와 앉으신 걸 볼짝시믄, 그게 영 어중간 하다는 거 아녀요?’
‘어중간 하다니?’
‘서릿발 같은 법통으로 다스려 졌다믄 이리 나와 있지 못할 거라 이 말이지유, 내 말즉슨….’
‘껄껄껄…..그래,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랭이는 아닌 모양인 게로구나. 얘기 하자면 길지.’
윤가는 항상 의문을 짚고는 있었어도 파악이 어두웠던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장쇠에게 늘어 놓기 시작했다. 패관잡기라는 특출난 언로를 통해, 고통 받고 있는 민초들의 일상과 외침들을 교묘히 임금에게로 전달하고 있던 그에게 쟁정의 화살은 희생양으로서의 역할을 강요하기에 이르렀고, 임금의 총애 속에 누구 못지 않은 충절로 과감히 간언하던 그를 가리켜, 주군을 미혹케 하는 마역당으로 몰아 부쳐, 목숨을 위협하는 사태에 다다르자, 윤가 스스로 직파를 청원했고, 그것도 모자라, 목숨을 담보 삼는 당쟁 세력들을 향해 반상의 신분마저 박탈되는 것을 묵묵히 받아 들였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때, 죽었어야 했지….그냥 죽었어야 옳은 것인데….’
‘하이고, 성님….누구 좋으라고요? 지 눔들은 뭐가 그리도 잘나서 입 바른 소리 허는 치들을 짓눌러 가며, 호의호식 한다요? 보란 듯이 다시 입청 허셔야 세상 바른 소리가 힘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거 아닌감유? 지가 틀린 말 했슈? 나랏님이 다시 찾으신다는 게, 성님의 입바른 소리가 갈급허다, 뭐 그런 거 아니냐고요?’
‘장쇠 이 놈….그러다, 하늘로 승천할 판이다. 세상 이치, 그리 꿰차고 있으면서도, 어찌 지나는 아낙만 눈에 띄어도 혼줄을 놓는 게야?’
‘히히….세상 이치가 고놈의 튼실한 기집들 궁둥짝에 있는 거 아니겄소? 헤헤…안 가 보실라우?’
‘일 없음이야…..초 이레에 그 홍패치들이나 보러 가자꾸나….그 인면수심의 작자, 도대체 목숨이 몇이나 되길래 그리도 험하게 세상 살아대는 것인지….’
윤가는 장쇠의 거스름을 애써 잠잠케 하면서도 속이 좋지는 않았다. 지분 거리는 장쇠의 풍문 걸이에 또다시 등장하는 그 홍패의 떨거지들은 옥사에서의 행패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 이었다. 칼과 차꼬를 틀어 놓았음에도, 기어이 자신의 신체를 자해하여 가며, 옥사의 형국을 스산하게 만든 것은 물론 이고, 그 아무도 옥바라지 해주는 자 없어, 이러한 혹한지절에 옷가지도 변변치 않게 차려 입었을 것인데도, 목청이 터져라 내지르는 고함과 악다구니가 옥사의 근방을 지나는 행인들의 간담마저 서늘케 하고 있다는 것은 듣기만 하고 있어도 가슴이 졸아 붙는 긴장이 따르고 있었기에 말이다. 영감이 다녀가고, 다시금 모든 것이 예전의 조용함과 일상의 번잡함으로 돌아가는 듯 보이고 있어, 장쇠조차 윤가의 심중에 무엇이 있을까 알아챌 수 없었던 듯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장쇠야, 전방 문 닫아 걸자꾸나…..’
‘성님, 얼릉 갑시다? 이리 미적이믄서 뒤 켠에 설라치믄 휘두르는 망나니 칼 끝도 볼 수 없다니껜?’
자리를 털고 저자 거리로의 너른 공터로 가는 도중에, 윤가는 사람들의 굳어진 표정들을 보면서 그들의 속닥거림 마저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금일의 효수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고, 징한 놈 잘 뒈진다는 표정보다는 갑갑한 구름이 잔뜩이나 표정에 드러나 있었기에 말이다.
-‘하이고, 오늘 또 생목숨 하나, 가는 구먼…..’
-‘누가 아니래, 그 두발이 무모로다가니 흉측한 인사가 바로 홍패의 우두머리격 인 삵이라는 인물 아니우?’
-‘삵은 또 뭐여? 살쾡이?…….이름 같덜 않게 돌아 댕겼다 허대….직일 놈들은 딴 곳에서 술 쳐먹고, 기집 질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는 판국에, 남 모르게 선한 일 하는 그런 치는 목이 뎅겅 이라니…..자네두 생각 잘 혀…..낭중에 누가 알아주기나 헌데?’
-‘걱정 붙들어 매쇼…..뭉치면 검계, 흩어지믄 양민이란 말도 있잖수? 시절 돌아가는 폼새, 영 아니다 싶으믄 나라고 별 수 있수? 칼 차고 그 짓 허는 거이지…어여 갑시다…..’
윤가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더 이상 무뢰배는 범접키 어려운 도당이란 의미가 상실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런 어려운 시절에는 그 누구도 검계의 무리에 흔연히 몸을 섞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저어함이 없었으며, 평범한 인물들 이라도 여차직 하면 그리 될 수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반 의식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게다가 다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잔혹한 범죄 행각 뒤에 양민을 때때로 구제하는 선행의 양면성으로 인해, 은근히 세도가들의 몰인정까지 싸잡아 미운 털이 박히는 곡절도 부추 켜지는 판이었다. 벌써부터 흉흉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고, 허공을 휙휙 거리며 날춤을 추어대는 망나니의 춤사위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던져 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껄껄껄……..’
‘죄인은 입 다물라!……..’
중앙에 끌려 나와 무릎이 꿇려 있는 채로 결박되어 있는 그 홍패의 우두머리라는 삵이란 인물은 멀리서 봐도 그 장대한 기골과 번뜩이는 눈매가 좌중을 압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이름이 연상시키는 것 마냥, 거의 스님처럼 깎아 놓은 그의 두발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고, 망나니의 춤사위 도중, 자신의 목에 내리쳐질 검면의 선득한 느낌이 끊임없이 견주어지는 목 뒤로 그를 자지러지게 할 수도 있었건만, 도리어 그는 군중을 향해 호탕한 웃음을 날리는 것이었다.
-‘아니, 워쩐 일이래? 미쳤남? 돌은겨? 시방 뒤지는 것두 실감 못하는 갑네…..쯧쯧….’
-‘하이고, 저 눈매 쫌 보라지? 승냥이가 따로 없구먼 그랴….죽을 판 인데두 저리 불을 뿜나?’
-‘보통 치는 넘는 겨……저리 죽을 인사가 아닌 갑지, 뭐….’
사람들은 그가 자신에게 이미 떨구어진 죽음의 암영으로 인해 혼절 직전이며, 정신 줄을 기어이 놓치고 있는 형국이 아니겠는가 라며, 혀를 차고 있었다.
‘형을 속히 집행하라….’
그것은 곧 바로 죄인에 대한 즉각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망나니의 춤사위가 자지러 들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천천히 정적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망나니의 휘돌아지던 검이 두 손으로 붙들려 딸려 가듯이 그의 목 뒤로 다가가 마지막 일격의 순간을 예감하는 찰나,
‘핏..핏..퓻..퓻…퓻퓻퓻……’
여기저기에서 정확히 조준 되어 때 아니게 형장을 향해 날아드는 것은 바로 화살들 이었다. 방향을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었고, 화살이 꿰뚫는 부위들은 사전에 정확히 조준 된 듯한, 신체의 요혈들 뿐이었다. 사람들은 때아닌 변고에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는 심산으로 소리 한번 질러 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난짝 자지러져 버렸고, 놀란 이들 중에는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화살의 서슬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팔푼이처럼 오줌을 지리는 치들도 부지기수 였다. 윤가와 장쇠는 그 화살의 난무를 목격함과 동시에, 다른 이들처럼 번개같이 복지부동의 자세로 바닥에 나뒹굴었는데,
‘윽..윽…….욱욱……’
그 화살의 과녁은 다름 아닌, 망나니와 형을 집행키 위해 죄인을 호송하여 온 의금부의 도사와 관할 포청의 부장, 군관, 사령들 이었다. 이미 형이 집행되기도 전에 형장의 주변에는, 죄인을 구명하기 위한 일환으로 날랜 궁수들이 곳곳에 매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고, 운집한 군중들의 웅성거림과 번잡함으로, 정작 형을 집행하는 자들과 군졸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죽음의 위험을 예감하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나라의 죄인을 참수하는 엄한 자리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 사태는 더더욱 급박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야 만다. 이를테면 그것은 단순히 죄인을 구명한다 라기 보다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지경의 기존 체제에 대한 조소라고 보이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윤가는 그래도 그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맘을 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대담한 일을 백주대낮에 자행하는 것인지, 두 눈으로 목도 해야만 했다.
‘파팟, 휴우…웅’
그 때였다. 그것은 허공을 비월 하는 한 마리 수리와도 같았다. 사람들은 엎드린 와중에도 허공을 즈려 밟듯이 어디로부턴가 날아 올라, 펄럭이는 옷자락 하나 없이 하늘을 가르며, 형장의 가운데로 스며드는 이를 보고 있었으며, 그 형상을 구분하기 어려운 온통 검은 옷 빛과 얼굴조차 복면으로 가려져 있는 그 외모에 할 말을 잊고 있었다. 그 자의 손에 들려진 것은 평범한 진검이 아니라, 흡사 창의 중단을 잘라 양 손에 들고 있는 형상 이었다. 무릎이 꿇려 있는 죄인의 주위에 내려 서는가 싶더니, 바로 이어 땅을 박차는 순간, 엎드려 있던 사람들의 무리가 아닌 다른 부류가 동시적으로 그 선봉에 선 흑의의 인물을 따라 달려 들었다. 무릎이 꿇려 있던 죄인을 그 무리들이 둘러 싸는 것과 동시에, 그 흑의의 무인이 땅을 딛는 듯, 흘러 가는 듯, 놀라운 활공술로 내닫는 곳은 화살로도 아직 숨이 채 끊어지지 않고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신음하고 있는 관군의 무리에게로 였다.
‘차칵…..’
그들의 몇 보 전에 멈추어 선 그 인물은 양 손에 들려진 무기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손에 들려진 것은 양끝에 날카로운 창이 부착된 장창이 되어 있었고, 마치 가녀린 춤사위 마냥 그 장창은 쉴 틈도 없이, 그의 어깨와 등판, 손목을 타고 돌면서 번득거림을 허공에 되돌렸다.
‘파싯, 푹푹…..팟팟…파싯…..핏핏핏’
그들에게 이 광경을 목격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처럼, 그 장창은 화려한 첨광의 꼬리를 끌면서, 주변의 관군에게 무차별 적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계산된 창 끝은 실수도 용납치 않으려는 것처럼, 둘러서서 겁에 질려 있는 관군의 목젖과 가슴을 여지없이 관통하며 갈라댔고, 죄인의 목에서 솟구쳐야 할 선혈은 오히려 죽음의 권세를 손아귀에 쥐고 있을 것 같던 집행자의 몫이 되어 있었다.
‘풋….’
그 화려한 살생의 난무가 그치고, 다시금 둘로 나뉘어진 장창이 그 무사의 등 뒤로 사라지는 것은 거의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것을 주목하고 있는 사이, 아차 하는 심정에 윤가가 돌아다 본 곳에는 있어야 할 죄인의 모습이 없었다. 그 흑의의 무사가 관군을 해하는 동안, 죄인의 주위를 장막처럼 둘러친 다른 무리들이 기어이 죄인을 빼내어 도주한 것이 분명했다.
‘내 이 녀석들을…..’
바닥에 엎드려 사태를 조심스레 관망하던 윤가가 허둥대는 장쇠의 만류를 무릅쓰고 땅을 박찬 것은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궁수들이 빠져 나갔다는 확신 때문 이었다.
‘아유, 성님!……나두 같이 가유…..’
‘넌 거기 그대로 있거라! 나서지 말고……’
장쇠는 저자 거리의 뒤켠으로 바람 같이 사라지는 그 흑의의 무사를 뒤쫓아 몸을 날리는 윤가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전신의 기력이 빠져나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 섯거라!’
목숨이 아까웠던지, 아무도 나서질 않았으며, 쫓아가는 윤가의 고함만이 허허롭게 떠다녔고, 누구도 관여하려 하질 않은 지라, 쫓아가는 윤가의 심정으로는 일발 저자의 발목만이라도 누군가 걸어 주었으면 싶었어도, 그 자는 아무런 제약도 없이 윤가와의 거리를 폭 넓게 떼어 놓고 있었다.
‘한번 해 보겠다는 것인가?’
윤가도 축지술까지는 가지 않더라고 무예라면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던 고로, 그의 앞을 내달으며, 거리를 벌려 놓는 그 흑의의 무사를 향해, 불끈 치솟는 결의가 두 건각에 힘을 실어 주기 시작했다.
‘쥐새끼 같은 자식….’
그자의 뒤를 좇으며 순간 느꼈던 것은 도성 안팎의 지리에 무척이나 밝은 자였다라는 사실 이었다. 돌쳐 들어가는 모든 샛길을 꿰차고 있었으며, 후방에서 추격을 해오는 윤가의 서슬을 알아채고 있었으면서도 절대 뒤를 돌아다 보는 법도 없었기에 말이다. 윤가의 추격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그의 태도가 더욱 윤가의 분을 자극하고 있었기에, 앞 뒤를 가릴 겨를은 없어 보였다.
‘핏핏……퓻퓻…….’
‘오냐, 네 놈이 죽기를 맘 먹었더냐?’
그 자는 도주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윤가를 향해 빨려 들듯이 달겨 드는 몇몇의 암기들…..그렇게 빠른 보법으로 날 듯이 거리를 띄우면서도 후방을 향해, 급소를 바로 한 치 앞에서 위협하는 것 같은 그자의 무예는 초절함을 넘어선 고강한 지경이었다.
‘푸욱…….윽……..아뿔사!’
그 자의 무예를 가벼이 보았던 탓일까? 하체의 힘이 급격하게 풀리면서 쥐가 나듯이 살이 뭉쳐버리는 그 격심한 통증…..윤가는 이미 그 암기가 한 쪽 사타구니의 정면을 깊게 박혀 들어갔다는 사실을 고꾸라지는 와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닥에 나 뒹굴면서 추격에 대한 전의가 상실된 그 찰나, 그 자가 그 날랜 몸집을 언간새 멈추고, 천천히 돌아서는 것이 윤가의 눈을 통해 올려다 보이고 있었다. 그자가 쉼 없는 탈주를 아예 접고서 그림자처럼 윤가에게 다가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인적조차 없었고, 이미 사람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와버린 지경에야 쓰러져 나뒹구는 윤가를 구해 줄 자들은 없다고 봐야 했다.
‘챙캉……’
그 자는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의도 였는지, 등 뒤에 품었던 그 단창 두 개를 양 손으로 천천히 꺼내 들었다. 멀리서도 그 장창의 예리함은 빛을 받아 윤가의 찌푸린 시선을 압박하기에 충분했고, 그제서야 윤가는 어째서 그가 그런 특출난 무기로 관군을 해하려 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복면을 하였다 할지라도, 장창의 길이로 말미암아 근접하여 그 자의 안면을 알아 보기 힘들 다는 한계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죽여라!…..뭘 기다리느냐? 나를 살려 두면 두고 두고 후환으로 남을 터…..’
윤가가 남은 힘을 모아 입으로 악다구니를 날리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 자에게 맞대항 하려 하자, 의외로 이내 날아들 것으로 예상했던 장창을 거두어 다시금 등 뒤로 숨기는 것이 보였다.
‘눈이 있으면 볼 것이고, 가슴이 있다면 느낄 것이외다.’
그 자의 장엄한 목소리가 자명고의 울림처럼 윤가의 속살을 치고 들어왔다. 그 자에게서 느껴지던 살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였고, 추격에 대한 전의를 상실한 윤가를 굳이 해하려는 의도는 애초부터 없었음을 새삼 깨닫는 도중, 그 자는 급히 몸을 돌려 허공으로 운신하려 몸을 경직 시키는 중이었다.
‘풀썩……휘이익……’
‘아흑!’
그 자가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터져 나온 것은 연약한 처자의 실낱 같은 비명이었다. 인기척이라도 있었어야 했거늘, 인적이 드문 길 위에 마주 한 두 장정의 묘한 분위기에 놀라, 그 자의 바로 뒤에서 발걸음이 멎어 버린 한 여인이, 돌아서 허공으로 몸을 날리려는 그 자와 엉겨 붙어 부닥뜨린 소리였다. 두 사람은 얼결에 서로의 중심을 잃고 있었고, 그것을 막으려는 그 자의 몸부림이 마치 그녀를 기어이 안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 형상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 여인이 쓰고 있던 장옷이 나풀거리며 허공으로 춤을 추고, 얼결에 맞부딪게 된 그자와 그 여인은 한 몸이 되어 몇 번의 휘돌림을 낳았다. 그 강강수월래 같은 어지러운 보폭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은, 찰나가 영원처럼 이어져 끊어질 줄을 몰랐고, 진창에 가까운 바닥에 그 고운 옷 매무새가 행여 더럽혀 질까 두려워 하는 것처럼, 흑의의 무사는 그 여인의 허리와 등을 보듬은 채로 몇 번을 돌더니만 가까스로 멈추어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 자는 넋을 잃은 듯이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굳어 버린 그 여인을 남겨 둔 채, 허공으로 몸을 날려 기척을 이내 감추고 말았다. 멀리 서도 확연히 보이는 그 여인의 단아한 옆 모습,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그 무사의 뒤를 쫓아 홍조로 얼룩진 그녀의 뺨으로부터 그 색조는 목을 타며 번지고 있었다. 그 여인은 그 자가 사라진 허공을 응시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붉게 물들어 화끈 거리는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허나, 윤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고로, 그 여인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눈빛…세상을 담고 있는 것인데…..’
-제 3 장- 고승 곡탁(哭鐸)
윤가는 기어이 사라진 그 자에 대한 것보다도, 눈 앞의 처자가 그를 목도 했는가의 여부가 더 궁금했다.
‘으…으…저….여기….’
넋을 잃고 그 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눈길을 떼질 못하는 그 처자도 심히 놀랐는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장옷조차 주을 기미가 없어 보였다.
‘아, 내 정신 좀 봐…..여기요!…..사람이 다쳤어요….여기요!…..누구 좀 도와 줘요…..’
다리를 붙들고, 반쯤 스러져 지탱하고 있던 윤가의 신음 소리에, 그 처자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화급히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향해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녀가 유별한 지라, 그녀는 그저 내려다 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 고작 이었다.
‘저……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으으…..혹여 그 자의 얼굴을 보셨는지요?’
‘그게……., 너무나 황망한 부지불식 간이라, 눈 여겨 보질 못하였습니다. 어찌 된 영문 인지도, 이 년, 기억에 없으니 어쩌지요?’
그러나, 윤가는 그 처자의 말이 허언임을 단박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듯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목 밑으로 붉게 홍조를 띄고 있는 그녀의 흥분은 그저 경악의 소치라고 밀어 부치기에는 그 정도와 간격이 심했기에 말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라도…..’
‘아니요….상간에 생 목숨이 넘나드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소저, 어찌 거짓을 고하오리까?’
‘후에라도 참고 될 일이 있을까 하여 그러는 것인데, 어디 사시는 누구신지, 혹여 알려 주실 수 있겠는지요?’
‘그리 합지요….’
그녀가 얘기를 꺼내려는 찰나,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달려들고 있었다.
‘하이고, 성님, 워찌된 거래요, 시방? 아니, 뒤를 차고 나설 때는 언제고, 이리 피떡지가 됐디야?’
‘아니다, 호들갑은…...부축이나 좀 해주련?’
‘내, 겁실랑 팽개치고 튀어 나갈 때부텀 알아 봤당게요…..아니, 그다지도 신출귀몰한 작자가 어디 성님 근력에 용케 잡힌답디여?’
‘난 됐으니, 어서 저 처자를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전방으로 오니라…..난 슬슬 걸어 갈 테니……이눔…..윽………아!’
윤가는 혼저 힘으로나마 걸어가려는 듯이, 넓적다리에 박힌 암기를 쑤욱 뽑으면서 붉게 번지는 피를 보고 있었다.
‘흐미, 워쪄쓰까 잉? 가만히 좀 있으쇼….내 피라도 멎게 동쳐 맬터니….’
장쇠는 자신의 옷섶을 부욱 찢는가 싶더니, 요란한 솜씨로 윤가의 넓적다리를 동여 매는 것이었다. 눈 앞에서 선혈을 목도했음인지, 그 처자의 전신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어여 모셔다 드리고 오래두?’
‘하이고, 사둔 남 걱정 혀고 자빠졌네 그랴, 아니, 지 몸이 이 지경 인디, 누굴 워쩌라 할 수 있겄냐, 이 말이요, 내 말은….’
투덜대는 장쇠를 다독여 그 처자의 뒤로 딸려 보내고, 윤가는 다리를 절어가며, 유기전으로 돌아왔다. 유기전으로 돌아와 곰방대에 불을 붙이면서도 윤가는 도주한 그 자 보다도, 그 처자의 눈가에 남았던 그 아스라한 느낌을 머리 속에서 지우기 힘들 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아무리 부지불식간 찰나의 순간이었을 지언정, 서로가 마주한 그 시선 속에 천마디 말보다 더 진한 언사가 건네어 졌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자의 심중에는 처자를 배려할 구석이 없었을 것임에도, 바닥으로 그 가녀린 몸매를 떨구지 않으려는 그 섬세한 손길 하며, 그 처자를 온전히 놔 두고 사라지는 그 단정한 몸짓이 기억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필시 그 자와 그 처자 사이에는 묘한 감정이 기류가 되어 그 짧은 순간, 접통 했을 것이 분명했고, 설사 그 자를 알아 보았다손 치더라도 그녀의 표정으로 연상하건대, 그 자와 유사한 자를 포박하였다 할지라도 그 자였음을 스스로 증언키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은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허어, 어찌한다? 처자를 설득하는 것이 난제로고….’
그 때였다.
‘게 있느냐?’
다리가 퉁퉁 부어 오르고, 미처 선혈이 낭자한 옷을 갈아입지 못한 와중에 유기전으로 들이닥친 것은, 효수의 장소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해 현장을 검험키 위해 급파된 것으로 보이는 포도청 종사관과 그가 대동한 서리였다. 이미 유기전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서리는 기록을 위한 채비를 했고, 종사관은 범행 현장의 주변을 살필 요량으로 탐문을 시작해 나갔다.
‘자네는 형장의 광경을 전부 목도 하였는가?’
‘예 그러하옵니다. 나으리….’
‘내 인근 사람들의 말을 들어 이리로 곧장 올 수 있었다만, 무슨 연유로 적당들의 뒤를 추적 했는지 말하여 줄 수 있는가? 형장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으나, 유독 자네 만이 그 무리들의 뒤를 쫓았다 하는데, 맞는가?’
‘예, 어찌 범죄를 저지른 도두가 죄 값을 치르기도 전에 활보하며, 빠져 나가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무리를 추적한 것은 아니었고, 관군을 향해 무참한 살인을 저지른 자를 따라간 것이지요. 저의 작은 미력이나마, 범죄 척결에 쓰여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나라를 위하고, 상감마마의 고심을 덜어드리는 길이 아닐는지요.’
‘그 기개가 남 다르구나…..헌데, 이미 형장의 주위에서는 검시관을 통해 초검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경인데, 그에 더할 말은 없느냐?’
‘사인에 대해서는 보고 받으셨는지요?’
‘네가 그것은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너는 내가 묻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만 답을 하면 될 것을…..’
‘아닙니다. 사인에 이르게 된 관군은 당시 많지 않았습죠. 기 매복한 적당들의 화살에 맞아, 대다수가 부상당한 것은 사실 이오나, 그것 만으로는 목숨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시위가 당겨 졌기에, 많은 자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옵니다. 허나, 문제는 죄인을 탈출 시킨 적당들에 대한 관군의 차후 증언을 두려워한 나머지, 흑의로 변복한 자가 장창으로 주위의 관군을 2차적으로 상해하였기에 사망에 이르른 것이지요. 세세히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화살이든, 장창이든 간에 의도적인 살해동기로 본다 치면 그 죄질이 무겁기 때문이지요.’
‘허, 자네는 어찌 그리도 포도와 검안의 사견에 능한 것인고?’
‘소인, 지금은 이러한 지경으로 천한 잡질에 곡기를 이어가고 있사오나, 소싯적, 패관으로 궁에서 녹을 먹던 자였습니다.’
‘아, 그러하신가? 내 몰라보고….허참….결례를 용서 하시게나’
‘아니옵니다. 이렇듯 부상을 당하는 와중에라도 나으리께 보고나마 드릴 수 있게 됨이 다행입니다요. 저를 이렇듯 상해하고 달아난, 그 변복한 자와 면전에서 마주친 이가 있긴 한데….., 부지불식간이라 기억이 정확치 않다 하는 말만을 들었을
-제 1 장- 홍패(紅覇)
전란의 회오리는 사람 사는 행색만을 뒤집어 놓은 것은 아니었던 듯 싶다. 그 사이에 집과 가산, 식솔들을 잃은 양민들은 나라에 대한 지극한 믿음을 허술하게 상실했으며, 죽어라 죽어라 하니, 힘없고, 기댈 곳 없는 치들만 생목숨을 내어 놓는 경우를 마주친 지 다반사라, 인심조차 박절하기 이를 데 없어 지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로 보이고 있었다. 거리를 방황하며 떼로 모여들어 문전걸식을 일삼는 걸뱅이 패들의 뻔뻔스러움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건만, 조정에서는 이렇다 할 구제책을 내어 놓지도 못하고 있었고, 전쟁의 여파로 재정이 어려워진 중앙에서는 그나마 세도를 틀어 쥐고 있는 귀족 계급과 양반 계층에 대한 과중한 자진 혈세를 강요하고 있어서, 정계의 해당 거물들은 그를 피해나가기 위한 묘수 짜내기에 혈안이 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민심이 흉흉하고, 도적 패들이 출몰하는 형편을 감안한 세력 계층들은 저마다 자신의 외부로 표출된 영역 위로 장막을 쳐 나가기에 급급했으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은밀한 축재 내역이라도 까발려 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제까지 목숨을 걸고 그들의 권력 옹호를 위해 몸 바쳤던 가신들이나 사병들을 가차없이 필요 없는 순서대로 문밖으로 내치는 웃지 못할 몰인정이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예상치 못한 사회상으로 치달았는데, 그 하나가 바로 무뢰배의 출현 이었다. 무뢰배는 불한당패, 혹은 검계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불법적 무장 세력으로서, 조정은 초기에 그 출현을 전쟁이 가져다 준 하나의 풍문 정도로 치부했던 실수를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다. 대개 양반가나 세도가에 기거, 숙식하면서 그들을 호위 하던 사병조직이나 호위 무사들은 어디서 굴러 먹다 튀어 나오는 위인들이 아니었던 점이 특징 이었다. 그들은 익히 들어서 알려져 있던 무관 계통의 직급에 있던 자나, 중앙으로의 진출이 애초에 막혀 있었던 서자, 백정, 천얼들 가운데 무예가 출중한 자들 중에서 선발되었던 점을 들 수 있었다. 그들이 관급의 미래를 상상하며, 몸을 담고 있었던 직위가 더 이상의 희망을 가져다 주지 못함을 깨닫고, 다른 형태의 신분 상승을 꿈꾸며, 세도가의 사병 조직이나 호위 무사로 자리 바꿈을 했던 것은 직접적인 출세의 가도는 아닐지라 하여도, 그들 스스로 세도가에 빌붙어 있음으로 해서 떨어지는 주변의 콩고물들이, 이전에 받아 챙기면서도 항상 허우적 대야 했던 녹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유함의 꼬투리 임을 익히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 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과 다르긴 해도 또 다른 계층으로서 세도가에 잦아드는 치들은 아예 출세의 가도가 출생의 신분으로 말미암아 막혀 있는 부류들 이었다. 아무리 면천이 된다 한들, 천민 계층에서 양민이 되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면천의 기회가 박탈되어 있는 서얼들이 그러했다. 그들에게는 양반 들에 대한 끓어 오르는 반감과 불신, 자신에 대한 혐오가 함께 뭉쳐진 채로 성장한 계층이었고, 그 중에서도 무예로 소신을 실천하려는 자들은 그러한 분노와 집념이 다른 이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정점에 다다르고 있어, 그들을 거두는 세력들은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냉혈한들을 소유한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이를테면 서로가 추구하는 이득이 맞아 떨어진 절세의 관계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두 부류들은 세도가의 밑에서 그 권력의 단맛을 은근히 향유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인물의 권력이 축소되는 것을 결코 바랄 수 없는 군상들 이었다. 평소 같으면 인력의 충원이 끊이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로 돌려지는 치명적인 패대기질은 때 아닌 경우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대개 권력 계층의 양반 세력들은 호위 목적, 또는 자제들의 체력 단련, 혹은 무과 급제의 한 방편으로 무예가 출중한 자들 중에서도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자신들의 자제에게 집중적인 사사를 시키고 있었던 고로, 이들에게는 그 사이 각별한 애정을 주인으로부터 받아 내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자제를 가리킬 수 없는 상황, 예를 들자면, 성장하여 조정에 진출 하였다 라든가, 아니면, 지나온 전쟁의 여파로 사조직의 범위와 영역이 축소 일로에 치달았을 경우, 필요 불가분의 위치에 있는 근접 호위무사들을 제외한 이들 중에서 이런 무예 스승들은 언제나 일순위로 세도가의 손에서 내쳐지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권력의 향기에 중독되어 있었고, 부유함의 그늘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조차 세도가들은 간과하고 있었다. 내쳐지면 내쳐지는 대로 지 놈들이 어찌 하겠느냐, 그저 생긴 대로 비럭질이나 하며 그렇게 살다가, 그도 안되면 화적질로 먹고 살다, 법의 심판 아래, 효수나 당하지 않으면, 기꺼이 죽어 지낼 터라고 너무나 쉽사리 그 결과를 생각하고 있었던 자체가 오산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을 가리켜 권력 계층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은 비곗살이라고 불렀으며, 끊어 내기에 합당한 치들인 동시에, 언제 버려도 아깝지 않을 인사들이라고 입을 모으며, 자신들의 이기적인 처사를 합리화하기에 급급해 있었다.
그러나, 더더욱 그들의 분노를 자극했던 처사는 더 이상 그들이 어디 에고 소속될 수 없다는 상실감 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깨나 써 보이는 것은 물론 이고, 항상 분신처럼 차고 다니던 병장기를 반납하고, 길거리로 나 앉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도 못했을 뿐더러, 기어이 떨려 나와 개밥만도 못한 종자가 되어버렸네 라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그들로 하여금 시절의 한탄을 쏟아 내놓기에 앞서서, 그들을 그렇듯 무위도식 하게 만들어 버린 양반님네들을 바수어 버리고 갈아 마셔도 속이 가라 앉지 않을 것 같은 억울함을 동시에 끓어 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이기도 했다.
유유상종 이라 했던가? 그런 그들은 서로를 잘도 알아 보았을 터이고, 이내 규합되고 뜻을 같이 하는 작자들이었을 테니, 이름하야 작당은 어찌 보면 그들을 위한 단어로 존재 하는 듯 보였다. 여기에 세를 더하는 세 번째 부류는 이른바, 잔여 세력들 이었다. 조정이나 세도가들이 필요에 의해서, 혹은 반역이 성공적인 정권 찬탈로 이어지고, 공적에 따른 포상의 줄 잔치가 끝을 맺고 나면, 그 어지러운 시절을 반추하려는 빌미를 포를 떠 없애려는 것처럼, 또 다른 예로 들자면, 전쟁의 방패 막으로 임시적으로 징발 되었던 부류들 중에서 단일 목적 하에 규합되었던 무장 세력들을 다시금 기약 없이 방출하여 버리는 이 두 가지 실례로 지칭된 역작용에 희생된 부류를 들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병장기를 들고 무장을 해야 할 명분과 당위성, 혹은 저마다 혹시나 이 기회에 큰 길로 나설 수 있을 는지도….라는 헛된 희망으로 부풀어 세상을 한 손에 아우른 양 뻐대기던 인물들이었다. 그들도 다름없이 길거리로 빨가벗겨져 내 몰린 것은 마찬가지 였으며, 시절의 한탄을 넘어서서 분노와 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들 이기도 했다.
‘성님, 아까 전, 저자 거리에서 귀동냥으로 듣고 왔는뎁쇼….’
‘무얼? 떠도는 얘기야, 다 그렇고 그런 것이지….’
윤가는 장쇠의 귀뜸에도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거 있자녀요, 얼마 전, 와장창 털리고, 그 댁 아씨 까정 보쌈 해다가니, 들구 놀다가 구릉에
시신으로 내팽개치고 내뺐던 그 자슥들 말여요…’
‘근데…’
‘잡혔다 허대요….’
‘그래? 그런데….또 뭐가 있다더냐?’
‘이 달 초 이레에 저자 거리에서 효수한다고 방이 붙었다 안혀요?’
‘늘상 있는 일 아니더냐?’
‘근디, 사람들 말인고로, 그 자가 보통이 아닌 거 같다 헙디여. 전옥서를 지키는 옥졸의 말이 돌고 도는디…..’
‘어허, 말은 옮기는 족족 번지느니…..너라도 입을 다물어야 하질 않겠느냐?’
‘하이고 성님두….거 보쇼.. 기냥 귀가 쫑긋혀 가꼬…..손 놓는 걸…내 모름 빙신이쥬….’
그건 그랬다. 윤가는 옥졸의 돌고 돈다는 헛소리라도 그 내용이 궁금했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 을 않는 것이었다. 세상을 어지럽혔다던 흉악 무도한 범인이 잡혀서 만인에게 본보기로 효수가 된다는 사실로 종결 될 수 있는 문제 였건만, 또 다른 얘기가 돈 다는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
‘옥졸의 말인 즉슨, 범인을 공초허는 과정에서 그 자의 품으로 부텀 붉은 댕기 거튼 띠가 나왔다는 디…..’
‘붉은 띠?’
‘야….그 띠에 세상 뒤집어질 얘기가 써 있었다 이 말이지라.’
‘세상 말세라 했더냐?’
‘하이고, 거 무시기냐, 혹세무민 헐라치는 글귀면 이러지두 안커시유….’
‘이 놈이 뜸을 들이기는….. 어서 말해 보래두?’
‘숨 좀 돌리구유, 일당은 양반을 척살 허세, 일당은 양반의 가산을 몰수 허세, 일당은 양가의 아녀자를 겁탈 허세…이렇게 써 있었다 허대요. 내참, 그 놈들이 사람 이래유? 인두껍을 쓴 개종자 들이지…..’
윤가는 양미간에 힘이 가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필시 세간에 흉흉한 소문으로 자자한 검계들 중의 하나인 홍패(紅覇)라는 떨거지들이 분명했다. 전후, 전국 각지에는 넘쳐 나는 검계의 출몰 소식에 가진 자들은 문 밖 출입도 자제하는 지경으로 가고 있었으며, 해가 떨어지면, 몸종이나 교꾼을 대동 했을 지라도, 무장 호위 무사가 없을 경우, 양가집 아녀자의 문 밖 출입은 여하한 경우에도 허락되질 않던 시절 이었다. 그렇듯 검계의 무리들은 있는 자들의 행색을 잘도 추려내고 있었고, 목표가 정해지고 나면, 반드시 거덜을 내고, 식솔들 중에서 가장 아끼고 숨겨 두었던 처자들은 깃발 삼아 짓밟아 버려, 그들에게 독한 교훈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 상례였다.
‘장쇠 이놈, 어디 검계로 자처하는 것들이 그 홍패치들 뿐이더냐? 길이 다른 듯 싶어도 도적은 도적, 살인자는 살인자인 법, 그 어디에고 그 길 위에 발을 들이고 있으면서 벗어났다고 외칠 수는 없는 법…..’
‘지가 그 말이랑게요….아니 달포 전에 붙들린 그 금수 가튼 놈들도 그랬다니 그러쥬….아니, 이기 뭐 사당패도 아니고설랑, 지들이 뭉쳐 댕기면 워쩔건지….참 내…..’
‘그자야, 그 창기를 농락한 죄로 그리 된 거 아니더냐?’
‘어허, 모르시는 말씀…..그 인간이 옆궁지에 칼 차고 그 짓만 혔을까? 딴 소문은 모르시쥬?’
‘딴 소문 이라니, 다른 사실도 불거졌더냐?’
‘아뉴우?, 다들 쉬쉬 허는디, 그 인간이 뒤에 떡 허니 버팅기고 앉아 설라무네, 양호(釀戶)로부텀 술동이를 빼끌어다 일반으로 댔다 허대요. 이러케나 세상이 어지러운 판국에 술들은 어찌 그리 퍼재끼고 있는지, 시방, 그 치가 잽혀 들어 갔어두, 그 떨거지들은 여적까지 배 뚜드림서 산다 안 혀요? 장안에서 팔아 재끼는 그 술동이만 감 잡아도…어휴, 이 놈 대가리로는 심도 지대루 안되네 그랴…난리가 끝난 지 원젠디 다들 초근목피로 살아 재끼는 이 시절에, 그 놈의 기방에는 술이랑 고기가 끓어 넘친당게요, 구데기가 워디루 모이거시유? 말하믄 입 아프지….헐…..’
검계로 뭉친 이들은 저마다 양반 계층에 대한 실망과 분이 맘 속에 가득한 지라, 그들에게 있어서 양반의 모든 영역들은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지경이었다. 약탈과 살인, 게다가 부녀자 겁탈에 이르기 까지 그들은 천인 공노할 범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고 다니면서도 쉽사리 토벌되지 못했던 것은 전후 그 영향력과 통제력이 약화된 조정의 실존 형세 이기도 했다. 그들의 규합이 가져다 주는 첫번째 범죄는 약탈이었다. 특수한 계층에게 국한 된 병장기의 소지는 전후 그 규율이 강화 되었고, 더불어 진검이나 병장기, 호신용 살기류를 보유할 수 있는 것은 관할 도감의 허가가 없이는 불가 했으며, 비밀리에 만들어 밀거래 되던 도검류에 대한 수색이 강화 되면서, 그들은 자신들 만의 세력과 힘을 비축하기 위해, 진검과 병장기 류를 불법적이라 할지라도 사 들일 수 있는 재력을 필요로 했다. 검단과, 검면에 표시되던 출처의 각인이 없는 것은 불법이었기에, 그들은 언제나 품속에 밀거래로 소지한 도검을 숨기고 다닐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길이와 모양새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도검류를 의복 안에 숨기려면 옷가지 조차 스스로 꿰매어 다루던가, 아님, 솜씨 좋은 여염집 아녀자를 겁탈한 뒤에, 입을 떼지 않는 조건으로 옷을 변형하여 고치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검계의 피해 반경에 들어가 있는 양민의 수는 죽어 나가는 시신이 아닌 경우, 실제 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이바구 였다.
두 번째 공공연한 그들의 범행은 다름 아닌 기방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시절이 하수상 하다 보니, 입신의 의지도 상실되고, 애초부터 부유했던 선친들의 가산을 하릴없이 기방에서 탕진하는 인사들이 늘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시대를 대표하는 금맥을 자처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문 밖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하고, 어제의 양민이 오늘의 도적이 되어 버리는 이 판국에, 그 기방이란 별천지는 언제나 풍요로움이 넘치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무뢰배들이 그 상황을 놓칠 리 없었고, 드나드는 양반들과 마주칠 일도 없이, 그 뒤편에서 그들은 기방의 전권을 장악한 뒤에, 술과 고기를 매점하여 공급하고, 기녀들의 전두를 가로채는 것도 모자라, 저마다 맘에 드는 기녀를 꿰차고 스스로 기부임을 자처하며, 색욕을 손쉽게 채우는 악행마저도 저질렀던 것이다. 특권 계층이야 자신들을 훼방치 않은 다음에야, 기방의 뒤편에 거머리가 버티고 있건 말건, 그들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즐기고 돌아가면 그 뿐이라는 생각에, 기방을 중심으로 암약하던 검계의 토포를 위해 머리를 짜내던 계획조차 억지로 무산 시켜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었기에, 다른 영향권 보다도 기방에 기생하여 악행을 일삼던 검계의 무리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생존을 보장 받는 셈이었다.
세 번째 그들의 포악한 악행은 바로 양반의 규방을 짓밟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분의 제약이 안고 있는 것은 출세나 금전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또 한가지 그들의 구미를 당기는 일은 꽁꽁 숨겨가며 키워내는 풋풋한 규수나, 혹은 고고함을 자랑하는 양반의 내자들을 낚아채는 일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나면 그들도 양반의 여인네들을 품을 수 있다고 공공연히 허언하고 다녔던 그들이기에, 약탈을 위해 침입한 양반의 가택 내에 고이 잠들어 있는 여인네의 살풋한 육향은 그들로 하여금 음심을 폭발 시키기에 충분했으며, 그것은 금단의 열매를 따는 쾌감마저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양반들은 여인네들의 문밖 출입을 자제 시켰고, 밤이면 호위 무사들을 이용하여 번을 서게 하거나, 가택의 내부에 순시를 돌게 하는 것을 의무처럼 여겼다.
네 번째 그들의 악행은 살인, 방화를 차제하고라도, 이권이 개입되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출몰한다는 점이었다. 그 비근한 예로, 검계의 효시로 보이는 부분을 본다면 바로 장례의 절차에 관여하는 향도계를 위시하여, 막대한 량의 진상품, 수시로 상부로 향하는 조세자금, 공물등을 약탈하는 것을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순순히 수중에 들어온 막대한 량의 물품과 금전이 법망을 뚫고, 상도의를 흐트러뜨리며 쏟아져 일반으로 향하니, 시세와 장세의 균형이 틀어지고 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환의 가치마저 흔들려, 시장경제는 그들의 뭉칫돈과 물량에 흔들거리는 지경으로 빠져,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매점매석이 횡행하면서 그 잇권의 향방조차 그들의 의도대로 딸려 오는 기현상을 속출했던 것이다.
‘성님, 우짜쓰까요잉?……돌던 어음도 이젠 코빼기도 안 돌려 보기 일 쑤고, 상단패들도 눈이 벌게서 얼릉 팔아치울 속심에, 이리 저리 무뢰배들 끄나풀 쫓기에 날을 샌다니깐여?’
‘상도의도 모르는 것들에게 휘둘려서야, 나라 꼴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골로 가는 거이지, 뭐 겄슈? 아이구, 이러다 난리나 또 터지는 거 아닌 가 모르겄네…..되려 왜구들이 들쑤실 때가 호시절 이었다니깜유? 근디, 성님, 정…. 안 가 보시려우?’
‘어딜 말이냐?’
‘아니, 엊저녁 효수한 놈, 쌍판이락두 보러 가야 안컸슈?’
‘이놈, 아무리 불한당에 무뢰배 이거늘, 그거야 목숨 부지할 때의 지화자고, 이미 망자가 된 이를 니 세치 혓바닥으로 욕보이는 것이 무에가 신나는 일이라 이리 호들갑 이더냐?’
‘다들 허는 굿 장단에 워찌 성님만 사래질이랴?’
‘허어 이 놈이 그래두?’
윤가는 처량맞은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세상은 힘을 가진 자의 것이 되어 가고 있는 듯이 보였고, 바른 심성으로 살아 보려는 것이 욕심이자, 춘몽처럼 보이는 어처구니 없음에 스스로 숨이 갑갑해져 오는 것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디서 우렁찬 목소리와 더불어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물렀거라!...물렀거라!’
‘아니, 저자 거리에 웬 행차?’
‘이리 오너라! 궁에서 나왔느니라. 전직 패관(稗官: 임금이, 민간의 풍속을 알려고 세상의 풍설과 소문을 수집, 정리, 집대성 하여 소설처럼 기록하여 바치는 벼슬아치) 윤가는 왕명을 받들라!’
때 아닌, 저자 거리의 대대한 행차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경이 났다며,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눈을 떼질 못했다. 그러나, 윤가는 당당한 자세와 품위를 흐트리지 않은 채, 눈 하나 깜짝하질 않고, 왕명이 담긴 교지를 받들었다.
‘오랬만일세.’
‘어이쿠, 어찌 어르신께서?’
고개를 들자, 윤가의 앞에는 궁에서도 서릿발 같은 성격으로 잘 알려진 승정원의 여섯 승지들 중에서도 으뜸이며, 정 3품에 해당하던 도승지 영감이 서 계셨다.
‘주상께서 자네를 긴히 찾으라 하시어서 말이지…….’
‘어찌 저 같이 퇴궁된 잡것을 다시금……’
윤가의 전력이야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건만, 파당의 정쟁 속에 휘말렸을지언정, 임금만이 볼 수 있던 패관기서(稗官奇書)의 장구한 집필에 대한 그 노고나마 인정되어, 옥살이나 유배는 면했다 해도, 패가 망신한 채로 이렇게 저자 거리에서 잡상을 하고 있는 지경의 인물을 급히 찾으신다는 말씀은, 윤가로서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구석이 있었다. 이미 모든 관직에서 밀려난 지라, 그는 도승지 영감과 눈도 바로 맞출 수 없었다.
‘저를 어찌하여 이렇게 다시 찾으시는지 연유라도….’
‘아주 중요한 일이네. 화급을 다툰다 기 보다, 주상께서는 이 사안의 경중을 자네가 가늠하여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으시지.’
그는 무조건 장쇠에게 전방을 부탁하고, 도승지의 앞에 서고 있었다. 예전 궁에서야, 예를 갖추고, 면면히 대담이 가능했을 테지만, 이제는 엄연히 신분이 달라, 교꾼(가마를 드는 인부) 옆에 붙어 머리를 조아리고 벌벌 거리며 서있는 지경이었다.
‘허어, 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구, 어찌 이리도 적조 했던 게야? 내가 어디 사람을 가려가며 보던가? 한가로울 때 일간 다녀가라 그리 일렀건만…..’
‘먹고 사는 일이 그렇습죠.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내야, 뭐 그런대로…..어디 긴히 얘기를 나눌 곳이 있겠는가? 사방에 눈과 귀가 많음이야.’
‘아니, 이런 누추한 곳에……, 아니 되옵니다. 제가 근간 따로 찾아 뵈오면 어떨는지 요?’
‘아닐세, 장소야 무에 그리 대순가? 다 먹고 사는 일에 둘러선 일상인데, 그걸 업수이 대해서야 민초의 뜻을 헤아린다 할 수 없는 것이지.’
‘그럼 이 쪽으로….’
윤가는 황송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는 표정으로, 도승지를 유기전의 내방으로 맞아 들였다. 이리 저리 어지러운 것을 치운다 하여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던지, 윤가도 이내, 좌정 할 수 있는 곳만을 추스르고, 자리에 상면하여 앉았다.
‘참, 딱하이…..어찌 그리 사람이 이리도 등을 돌려대고 사는 것인지….쯧쯧….’
‘저야 뭐, 이 짓이 편하고 좋긴 합니다. 남에게 보일 정도는 아니어도….’
‘그 말이 아닐세, 자네 처럼 뛰어난 식견과 학문의 깊이라면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겠건만, 어찌 이리도 막 살아대는 일에 몸을 던지고 사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기에 허는 말일세.’
‘과찬 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도승지가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눈매를 지그시 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중의 얘기를 꺼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자네도 익히 들었겠네만, 요즘 도성 안팎으로 시끄러운 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주상께서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닐세.’
‘네. 그러하실 것이옵니다만….’
‘이미 조정에서는 범죄의 수괴를 비롯하여 작당에 야합한 부류들이 전국을 궤적으로 하여 저질러 대는 그 악행이 한계를 상회했다고 보는 바,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네. 허나, 그렇다 하여 무조건 토포군을 징발하여 내세울 수도 없는 일, 그들의 추행이 도를 넘어섰다고는 하나, 무리가 소소하게 분산되어 있고, 흔적을 추쇄 하기에도 조정의 역량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네. 하여 주상께서 친히, 자네를 다시금 이 일의 조사를 위하여 천거하신 마당이라 사전에 자네로부터 고견이나 얻자고 이리 온게야.’
‘고견 이라니요? 당치도 않으신 말씀 입니다. 일개 패관 이었다가 파직도 모자라, 양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저 같은 자의 입에서 어찌 국가의 중대사를 다루는 고견이 토설 될 수 있겠는지요? 천부당 만부당 한 일이옵니다. 하문을 거두어 주십시오.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허어, 이 사람, 겸손하기는…..산적한 문제가 한 둘이 아니라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우선 먼저 화급을 다투어 토포군을 징발하여 출몰지를 중심으로 탐문에 힘쓰고, 지속적으로 검계의 적당들을 잡아들인 연후, 사리에 치우치지 않는 단정한 공초로 만인의 공의를 끌어낸 다음, 죄질에 따라 경중을 구분하여 처리하신다면 어려울 것이 무에가 있겠습니까?’
‘세상사, 모두 자네 말처럼 흘러간다면야, 내가 어찌 이 노구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겠나?’
‘어떤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두각을 드러내는 지요?’
‘그것보다도, 검계의 악행을 보고 받는 와중에, 호조로부터 때 아니게 초사가 올라왔다네.’
초사라고 하는 것은 각종 조사를 함에 있어서 처음으로 보고 되면서도 심각한 문제점을 담은 내부의 감사, 혹은 확인 보고서를 의미했다. 이것은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결정적 근거 였으며, 이를 통해 보다 확대된 조사를 지시할 수 있는 빌미 이기도 했다.
‘호조가 어찌 검계들의 악행과 관련이 있을 수 있는지요? 혹여, 조정 내부에 검계의 활동을 지원하는 세력이 자금의 확보를 위해 호조를 압박하는 것이옵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호조의 초사에 의하면,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앞 뒤가 맞질 않는다는 것이야.’
‘앞뒤가 맞지 않다라는 것은 진정 무슨 의미인지요?’
‘이미 검계의 무리들이 조정으로 상납되는 조세 자금과 진상품, 공물등을 약탈하여 잠적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 그래서 형조와 의금부가 공조하여 이렇게 약탈 되어진 물품과 자금등이 어떤 경로로 일반에게 풀어지는 가를 은밀히 알아보도록 하였다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야.’
‘문제라면?’
‘빼앗긴 것과 일반으로 내쳐진 물량, 자금 등이 결코 일치하여 맞아 떨어질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의 추적 결과, 상상할 수도 없는 내용들이 일반으로 나오질 않고 있으며, 그의 추적을 위해 전국에 걸쳐서 토벌되어 투옥된 인물들을 통해서도 잡다한 물량과 자금만이 드러날 뿐, 그 덩어리는 흔적조차 찾을 길이 요원하다는 것이 호조의 초사 내용일세.’
윤가의 양미간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호구지책으로 삼기 위해 약탈을 하였다면, 그 피해가 경미 하겠사오나, 그들은 전국에 걸쳐서 막대한 조정의 재물을 편취하였고, 그것을 사사로이 사용치 않았다면, 필시 연유가 있질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는 말이 아닌가? 대개 무뢰배라고 일컫는 도당들은 계층간 불평등에 앙심을 품고 일을 저지르는 치들이 일반인데, 그들이 축재를 목적으로 그렇듯 목숨을 내걸고 갈취한 재물을 특유의 목적으로 유용할 리 만무하고, 이제까지 보여 온 그들의 작태로 보아, 기집 질이나, 향락을 위해 뿌려댈 것이 분명하다 여기고, 초사에 들어간 것인데, 어찌 된 연유인지, 그 전면에 나서 있는 물량은 전혀 예상 밖의 소소한 것이었기에 고민이 시작되는 것일세.’
‘그렇다면 다른 걸림돌은 무에가 있겠는지요?’
‘흔들리는 민심과 그 영향력을 들 수 있지. 그들의 세력이 준동하는 지역은 특히나 전후 유랑민이나, 기근이 심하여 생활고가 극심한 지역이 대부분이고…... 그러다 보니, 눈만 뜨면 그 검계의 조직에 몸을 내던지는 양민이 나날이 늘어간다는 것이야. 그 세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다는 것은 주변의 치안이 마비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관할 지역의 관찰사나 수령조차 그들을 때려 잡는 일이 점차 요원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연약한 심사를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 또한 큰 일 아닌가? 그것을 수수방관하고 있자니, 조정에서는 그 무리들이 준동하여 지역적인 결성이 면면히 이루어지는 날에는 누군가 경미한 촉발만을 하여도, 민초들에 의한, 분연한 봉기의 국면으로 전환되어 겉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돌쳐 갈 것을 우려하고도 있다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것은 말처럼 쉽사리 결집되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어찌하여 그런가? 역모의 세력이 축적한 재력을 바탕으로 은밀히 그들을 동요한다면 가능한 처사가 아닐까 싶네만….’
‘그 세력은 이를 테면 충성을 맹세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혼탁한 정국을 바로 세우자고 발기한 인사들이 아니라는 데에 요점이 있습지요. 혹여 뒤를 보아주고, 그들을 통해 모반이라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들이 이미 특권 세력의 손아귀에서 내쳐져 무위도식의 검계가 되어져 왔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는 마당에,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누군가 그들을 조정하였다 쳐도, 사태가 안정되고, 그 주동자의 의도대로 정권의 수순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치면, 반드시 그 인물은 방패막이로 내세웠던 그 무리들을 거두기는 커녕. 영원히 매장 시키려 들고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지경인데, 그들이 섣불리 지역적 결당을 통해 세를 확장할 리 없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오리무중인 그 막대한 자금과 물량에 대한 것은 어찌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저로서도 가늠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할 수 있겠지요. 어찌 보면 단순하게 축재 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 물량이나, 그 내용이 조정에 바쳐질 공물과 진상품이란 것은 이를 테면 최고가 품이자, 선별된 진품들이란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게다가 조세 자금이 탈취 되었다는 것은 다른 면으로 해석한다면, 양반 계층이나 특권 세력을 겨냥 했다라기 보다는 조정을 상대로 그들의 의지가 어떠하냐 라는 것을 과시하는 듯한 인상이 역력하지요. 단순히 악행의 발로로 인해 놀다 흘러가는 자금을 편취했다라고 보기에는 보다 복잡한 그들 나름의 목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어떤 목표 말인가?’
‘만일에 그 약탈과 축재가 모반의 의지를 실현 하기 위한 초석으로 쓰여질 요량이었다면, 지속적으로 조세 자금을 강탈의 표적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 겠기에 말입지요. 그러한 행위의 모방이나, 지속적인 연계는 바로 자승자박의 결과일 뿐일텐데, 지금도 멈추질 않고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지요.’
‘허어, 답답하이…어서 속 시원하게 털어 놔 보게….’
‘그것은 땅을 갈아 엎는 것과 같은 이치입지요….황당하게도…..’
‘땅을 갈아 엎는다? 그건 또 무슨 연고 인가?’
‘자고로 땅을 갈아 먹고 사는 이들은 흙심의 정도를 냄새로 맡기만 하여도 안다 하였지요. 해가 바뀌고, 그들에게는 보다 증배된 수확을 위한 방편의 강구가 바로 코 앞에 다가오게 됩니다. 그들은 먼저 좋은 종자를 고르기에 앞서 땅을 갈아 엎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따르면 겨우내 땅 속에 잠자던 버러지들을 죽여 주기도 하고, 깊이로 하여 버티고 있던 흙심을 표면으로 끌어 올리는 것에 더 없이 훌륭한 방법이며, 수확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기본 예절 이기도 합지요. 어차피 지난 해와 같은 땅에, 뒤엎지도 않은 상황으로 씨를 뿌린들, 숨결이 막히고 약해진 흙심으로 인해, 보다 나은 수확을 보장 받을 수 없음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기왕 새로이 시작하는 초심으로 나선 마당에 일단 땅을 갈아 엎자는 것이 농자의 간절한 기원이기에 말입니다.’
‘허면?’
‘단적으로 그들은 이 세상이 뿌리부터 미운 것입니다. 정권을 새로이 누가 틀어쥔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흘러온 부유함은 여전히 계승될 판이고, 굶주린 치들은 기어이 하늘을 올려다 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인데, 누가 누구의 임의로 정권의 향방이 갈린다 한들, 그들에게 돌아올 몫은 여전히 척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땅을 갈아 엎는 것 만이 능사라고 믿고 있는 소치로 보인다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영감….’
‘나라의 근본을 흔들고야 만다? 허어 이거 참…..’
‘그냥 간신배 몇이 모여서, 궁터를 담보 삼아 저지르는 사물놀이가 아닙지요. 그들은 이 시절이 안고 있는 초장과 종장의 의미 마저도 모두 갈아 엎고 싶은 겝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 처리하려는가? 내 의금부와 포청에 기별하여, 은밀히 사람을 붙여 주어도 좋겠나?’
‘아닙지요. 그리하지 마십시오. 단신으로 수를 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안전하다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표면적 압박과 토포의 기미가 느껴진다면 대번에 그 표면의 점조직을 와해 시켜, 겉으로는 양민으로 돌아간 듯 박피하여 버릴 것이 분명 합지요. 이 싸움은 강공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경우 입니다. 제가 홀로 나서서 어떤 실마리를 잡을 때까지 영감께서는 제가 은밀히 올리는 연통을 주목하시고 함구하여 주십시오. 때가 되어 그들을 초절할 시기가 온다면 기별하여 드릴 것입니다.’
‘알겠네, 자네만 믿음세.’
총총이 사라져 가는 도승지 영감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윤가는 한참이나 조아리던 고개와 허리를 펴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뻐근해져 오는 등배와 허리를 통해, 이런 작은 직급과 계층 간의 차이조차 그들에게는 분함의 표상으로 돌출될 것이란 생각이 들자, 심히 착잡해져 오는 것이었다.
-제 2 장- 찰나가 영원처럼.
‘성님…워쩐 일이래유?’
‘어허…이놈…..아무 일도 아니라는 데도?’
‘성님이 범상치 않은 인사라는 건, 척 보고 알았지만도요…..이렇게 높으신 양반이 찾으실 줄은 몰랐당게요. 글코, 교지는 또 뭐당가요? 죽을 죄라도 지었남유?’
‘장쇠, 이놈! 장차 거간질로 밥 벌어 먹을 놈이 그렇게나 눈치가 없어서야…. 이 바닥에서 굴러 먹자면 눈치가 네 밥줄일 턱인데, 보면 모르겠느냐?’
‘아니, 그럼 성님이 거 뭐시냐, 암행 이다 뭐다 그런 거라 이 말이유?’
‘암행은 무신…..그저 예전에 녹봉께나 쥐어 보았던 게 무에 그리 내세울 것이 있겠느냐? 성은에 힘 입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대던 인사가 바로 나였느니라.’
‘죄를 지었스믄 응당 유배를 가시등가, 아님 쓴 비상탕에 세상 하직이 원칙 일턴데, 이렇게 저자 거리로 나와 앉으신 걸 볼짝시믄, 그게 영 어중간 하다는 거 아녀요?’
‘어중간 하다니?’
‘서릿발 같은 법통으로 다스려 졌다믄 이리 나와 있지 못할 거라 이 말이지유, 내 말즉슨….’
‘껄껄껄…..그래,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랭이는 아닌 모양인 게로구나. 얘기 하자면 길지.’
윤가는 항상 의문을 짚고는 있었어도 파악이 어두웠던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장쇠에게 늘어 놓기 시작했다. 패관잡기라는 특출난 언로를 통해, 고통 받고 있는 민초들의 일상과 외침들을 교묘히 임금에게로 전달하고 있던 그에게 쟁정의 화살은 희생양으로서의 역할을 강요하기에 이르렀고, 임금의 총애 속에 누구 못지 않은 충절로 과감히 간언하던 그를 가리켜, 주군을 미혹케 하는 마역당으로 몰아 부쳐, 목숨을 위협하는 사태에 다다르자, 윤가 스스로 직파를 청원했고, 그것도 모자라, 목숨을 담보 삼는 당쟁 세력들을 향해 반상의 신분마저 박탈되는 것을 묵묵히 받아 들였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때, 죽었어야 했지….그냥 죽었어야 옳은 것인데….’
‘하이고, 성님….누구 좋으라고요? 지 눔들은 뭐가 그리도 잘나서 입 바른 소리 허는 치들을 짓눌러 가며, 호의호식 한다요? 보란 듯이 다시 입청 허셔야 세상 바른 소리가 힘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거 아닌감유? 지가 틀린 말 했슈? 나랏님이 다시 찾으신다는 게, 성님의 입바른 소리가 갈급허다, 뭐 그런 거 아니냐고요?’
‘장쇠 이 놈….그러다, 하늘로 승천할 판이다. 세상 이치, 그리 꿰차고 있으면서도, 어찌 지나는 아낙만 눈에 띄어도 혼줄을 놓는 게야?’
‘히히….세상 이치가 고놈의 튼실한 기집들 궁둥짝에 있는 거 아니겄소? 헤헤…안 가 보실라우?’
‘일 없음이야…..초 이레에 그 홍패치들이나 보러 가자꾸나….그 인면수심의 작자, 도대체 목숨이 몇이나 되길래 그리도 험하게 세상 살아대는 것인지….’
윤가는 장쇠의 거스름을 애써 잠잠케 하면서도 속이 좋지는 않았다. 지분 거리는 장쇠의 풍문 걸이에 또다시 등장하는 그 홍패의 떨거지들은 옥사에서의 행패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 이었다. 칼과 차꼬를 틀어 놓았음에도, 기어이 자신의 신체를 자해하여 가며, 옥사의 형국을 스산하게 만든 것은 물론 이고, 그 아무도 옥바라지 해주는 자 없어, 이러한 혹한지절에 옷가지도 변변치 않게 차려 입었을 것인데도, 목청이 터져라 내지르는 고함과 악다구니가 옥사의 근방을 지나는 행인들의 간담마저 서늘케 하고 있다는 것은 듣기만 하고 있어도 가슴이 졸아 붙는 긴장이 따르고 있었기에 말이다. 영감이 다녀가고, 다시금 모든 것이 예전의 조용함과 일상의 번잡함으로 돌아가는 듯 보이고 있어, 장쇠조차 윤가의 심중에 무엇이 있을까 알아챌 수 없었던 듯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장쇠야, 전방 문 닫아 걸자꾸나…..’
‘성님, 얼릉 갑시다? 이리 미적이믄서 뒤 켠에 설라치믄 휘두르는 망나니 칼 끝도 볼 수 없다니껜?’
자리를 털고 저자 거리로의 너른 공터로 가는 도중에, 윤가는 사람들의 굳어진 표정들을 보면서 그들의 속닥거림 마저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금일의 효수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고, 징한 놈 잘 뒈진다는 표정보다는 갑갑한 구름이 잔뜩이나 표정에 드러나 있었기에 말이다.
-‘하이고, 오늘 또 생목숨 하나, 가는 구먼…..’
-‘누가 아니래, 그 두발이 무모로다가니 흉측한 인사가 바로 홍패의 우두머리격 인 삵이라는 인물 아니우?’
-‘삵은 또 뭐여? 살쾡이?…….이름 같덜 않게 돌아 댕겼다 허대….직일 놈들은 딴 곳에서 술 쳐먹고, 기집 질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는 판국에, 남 모르게 선한 일 하는 그런 치는 목이 뎅겅 이라니…..자네두 생각 잘 혀…..낭중에 누가 알아주기나 헌데?’
-‘걱정 붙들어 매쇼…..뭉치면 검계, 흩어지믄 양민이란 말도 있잖수? 시절 돌아가는 폼새, 영 아니다 싶으믄 나라고 별 수 있수? 칼 차고 그 짓 허는 거이지…어여 갑시다…..’
윤가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더 이상 무뢰배는 범접키 어려운 도당이란 의미가 상실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런 어려운 시절에는 그 누구도 검계의 무리에 흔연히 몸을 섞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저어함이 없었으며, 평범한 인물들 이라도 여차직 하면 그리 될 수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반 의식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게다가 다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잔혹한 범죄 행각 뒤에 양민을 때때로 구제하는 선행의 양면성으로 인해, 은근히 세도가들의 몰인정까지 싸잡아 미운 털이 박히는 곡절도 부추 켜지는 판이었다. 벌써부터 흉흉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고, 허공을 휙휙 거리며 날춤을 추어대는 망나니의 춤사위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던져 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껄껄껄……..’
‘죄인은 입 다물라!……..’
중앙에 끌려 나와 무릎이 꿇려 있는 채로 결박되어 있는 그 홍패의 우두머리라는 삵이란 인물은 멀리서 봐도 그 장대한 기골과 번뜩이는 눈매가 좌중을 압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이름이 연상시키는 것 마냥, 거의 스님처럼 깎아 놓은 그의 두발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고, 망나니의 춤사위 도중, 자신의 목에 내리쳐질 검면의 선득한 느낌이 끊임없이 견주어지는 목 뒤로 그를 자지러지게 할 수도 있었건만, 도리어 그는 군중을 향해 호탕한 웃음을 날리는 것이었다.
-‘아니, 워쩐 일이래? 미쳤남? 돌은겨? 시방 뒤지는 것두 실감 못하는 갑네…..쯧쯧….’
-‘하이고, 저 눈매 쫌 보라지? 승냥이가 따로 없구먼 그랴….죽을 판 인데두 저리 불을 뿜나?’
-‘보통 치는 넘는 겨……저리 죽을 인사가 아닌 갑지, 뭐….’
사람들은 그가 자신에게 이미 떨구어진 죽음의 암영으로 인해 혼절 직전이며, 정신 줄을 기어이 놓치고 있는 형국이 아니겠는가 라며, 혀를 차고 있었다.
‘형을 속히 집행하라….’
그것은 곧 바로 죄인에 대한 즉각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망나니의 춤사위가 자지러 들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천천히 정적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망나니의 휘돌아지던 검이 두 손으로 붙들려 딸려 가듯이 그의 목 뒤로 다가가 마지막 일격의 순간을 예감하는 찰나,
‘핏..핏..퓻..퓻…퓻퓻퓻……’
여기저기에서 정확히 조준 되어 때 아니게 형장을 향해 날아드는 것은 바로 화살들 이었다. 방향을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었고, 화살이 꿰뚫는 부위들은 사전에 정확히 조준 된 듯한, 신체의 요혈들 뿐이었다. 사람들은 때아닌 변고에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는 심산으로 소리 한번 질러 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난짝 자지러져 버렸고, 놀란 이들 중에는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화살의 서슬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팔푼이처럼 오줌을 지리는 치들도 부지기수 였다. 윤가와 장쇠는 그 화살의 난무를 목격함과 동시에, 다른 이들처럼 번개같이 복지부동의 자세로 바닥에 나뒹굴었는데,
‘윽..윽…….욱욱……’
그 화살의 과녁은 다름 아닌, 망나니와 형을 집행키 위해 죄인을 호송하여 온 의금부의 도사와 관할 포청의 부장, 군관, 사령들 이었다. 이미 형이 집행되기도 전에 형장의 주변에는, 죄인을 구명하기 위한 일환으로 날랜 궁수들이 곳곳에 매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고, 운집한 군중들의 웅성거림과 번잡함으로, 정작 형을 집행하는 자들과 군졸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죽음의 위험을 예감하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나라의 죄인을 참수하는 엄한 자리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 사태는 더더욱 급박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야 만다. 이를테면 그것은 단순히 죄인을 구명한다 라기 보다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지경의 기존 체제에 대한 조소라고 보이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윤가는 그래도 그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맘을 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대담한 일을 백주대낮에 자행하는 것인지, 두 눈으로 목도 해야만 했다.
‘파팟, 휴우…웅’
그 때였다. 그것은 허공을 비월 하는 한 마리 수리와도 같았다. 사람들은 엎드린 와중에도 허공을 즈려 밟듯이 어디로부턴가 날아 올라, 펄럭이는 옷자락 하나 없이 하늘을 가르며, 형장의 가운데로 스며드는 이를 보고 있었으며, 그 형상을 구분하기 어려운 온통 검은 옷 빛과 얼굴조차 복면으로 가려져 있는 그 외모에 할 말을 잊고 있었다. 그 자의 손에 들려진 것은 평범한 진검이 아니라, 흡사 창의 중단을 잘라 양 손에 들고 있는 형상 이었다. 무릎이 꿇려 있는 죄인의 주위에 내려 서는가 싶더니, 바로 이어 땅을 박차는 순간, 엎드려 있던 사람들의 무리가 아닌 다른 부류가 동시적으로 그 선봉에 선 흑의의 인물을 따라 달려 들었다. 무릎이 꿇려 있던 죄인을 그 무리들이 둘러 싸는 것과 동시에, 그 흑의의 무인이 땅을 딛는 듯, 흘러 가는 듯, 놀라운 활공술로 내닫는 곳은 화살로도 아직 숨이 채 끊어지지 않고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신음하고 있는 관군의 무리에게로 였다.
‘차칵…..’
그들의 몇 보 전에 멈추어 선 그 인물은 양 손에 들려진 무기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손에 들려진 것은 양끝에 날카로운 창이 부착된 장창이 되어 있었고, 마치 가녀린 춤사위 마냥 그 장창은 쉴 틈도 없이, 그의 어깨와 등판, 손목을 타고 돌면서 번득거림을 허공에 되돌렸다.
‘파싯, 푹푹…..팟팟…파싯…..핏핏핏’
그들에게 이 광경을 목격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처럼, 그 장창은 화려한 첨광의 꼬리를 끌면서, 주변의 관군에게 무차별 적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계산된 창 끝은 실수도 용납치 않으려는 것처럼, 둘러서서 겁에 질려 있는 관군의 목젖과 가슴을 여지없이 관통하며 갈라댔고, 죄인의 목에서 솟구쳐야 할 선혈은 오히려 죽음의 권세를 손아귀에 쥐고 있을 것 같던 집행자의 몫이 되어 있었다.
‘풋….’
그 화려한 살생의 난무가 그치고, 다시금 둘로 나뉘어진 장창이 그 무사의 등 뒤로 사라지는 것은 거의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것을 주목하고 있는 사이, 아차 하는 심정에 윤가가 돌아다 본 곳에는 있어야 할 죄인의 모습이 없었다. 그 흑의의 무사가 관군을 해하는 동안, 죄인의 주위를 장막처럼 둘러친 다른 무리들이 기어이 죄인을 빼내어 도주한 것이 분명했다.
‘내 이 녀석들을…..’
바닥에 엎드려 사태를 조심스레 관망하던 윤가가 허둥대는 장쇠의 만류를 무릅쓰고 땅을 박찬 것은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궁수들이 빠져 나갔다는 확신 때문 이었다.
‘아유, 성님!……나두 같이 가유…..’
‘넌 거기 그대로 있거라! 나서지 말고……’
장쇠는 저자 거리의 뒤켠으로 바람 같이 사라지는 그 흑의의 무사를 뒤쫓아 몸을 날리는 윤가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전신의 기력이 빠져나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 섯거라!’
목숨이 아까웠던지, 아무도 나서질 않았으며, 쫓아가는 윤가의 고함만이 허허롭게 떠다녔고, 누구도 관여하려 하질 않은 지라, 쫓아가는 윤가의 심정으로는 일발 저자의 발목만이라도 누군가 걸어 주었으면 싶었어도, 그 자는 아무런 제약도 없이 윤가와의 거리를 폭 넓게 떼어 놓고 있었다.
‘한번 해 보겠다는 것인가?’
윤가도 축지술까지는 가지 않더라고 무예라면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던 고로, 그의 앞을 내달으며, 거리를 벌려 놓는 그 흑의의 무사를 향해, 불끈 치솟는 결의가 두 건각에 힘을 실어 주기 시작했다.
‘쥐새끼 같은 자식….’
그자의 뒤를 좇으며 순간 느꼈던 것은 도성 안팎의 지리에 무척이나 밝은 자였다라는 사실 이었다. 돌쳐 들어가는 모든 샛길을 꿰차고 있었으며, 후방에서 추격을 해오는 윤가의 서슬을 알아채고 있었으면서도 절대 뒤를 돌아다 보는 법도 없었기에 말이다. 윤가의 추격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그의 태도가 더욱 윤가의 분을 자극하고 있었기에, 앞 뒤를 가릴 겨를은 없어 보였다.
‘핏핏……퓻퓻…….’
‘오냐, 네 놈이 죽기를 맘 먹었더냐?’
그 자는 도주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윤가를 향해 빨려 들듯이 달겨 드는 몇몇의 암기들…..그렇게 빠른 보법으로 날 듯이 거리를 띄우면서도 후방을 향해, 급소를 바로 한 치 앞에서 위협하는 것 같은 그자의 무예는 초절함을 넘어선 고강한 지경이었다.
‘푸욱…….윽……..아뿔사!’
그 자의 무예를 가벼이 보았던 탓일까? 하체의 힘이 급격하게 풀리면서 쥐가 나듯이 살이 뭉쳐버리는 그 격심한 통증…..윤가는 이미 그 암기가 한 쪽 사타구니의 정면을 깊게 박혀 들어갔다는 사실을 고꾸라지는 와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닥에 나 뒹굴면서 추격에 대한 전의가 상실된 그 찰나, 그 자가 그 날랜 몸집을 언간새 멈추고, 천천히 돌아서는 것이 윤가의 눈을 통해 올려다 보이고 있었다. 그자가 쉼 없는 탈주를 아예 접고서 그림자처럼 윤가에게 다가서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인적조차 없었고, 이미 사람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와버린 지경에야 쓰러져 나뒹구는 윤가를 구해 줄 자들은 없다고 봐야 했다.
‘챙캉……’
그 자는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의도 였는지, 등 뒤에 품었던 그 단창 두 개를 양 손으로 천천히 꺼내 들었다. 멀리서도 그 장창의 예리함은 빛을 받아 윤가의 찌푸린 시선을 압박하기에 충분했고, 그제서야 윤가는 어째서 그가 그런 특출난 무기로 관군을 해하려 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복면을 하였다 할지라도, 장창의 길이로 말미암아 근접하여 그 자의 안면을 알아 보기 힘들 다는 한계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죽여라!…..뭘 기다리느냐? 나를 살려 두면 두고 두고 후환으로 남을 터…..’
윤가가 남은 힘을 모아 입으로 악다구니를 날리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 자에게 맞대항 하려 하자, 의외로 이내 날아들 것으로 예상했던 장창을 거두어 다시금 등 뒤로 숨기는 것이 보였다.
‘눈이 있으면 볼 것이고, 가슴이 있다면 느낄 것이외다.’
그 자의 장엄한 목소리가 자명고의 울림처럼 윤가의 속살을 치고 들어왔다. 그 자에게서 느껴지던 살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였고, 추격에 대한 전의를 상실한 윤가를 굳이 해하려는 의도는 애초부터 없었음을 새삼 깨닫는 도중, 그 자는 급히 몸을 돌려 허공으로 운신하려 몸을 경직 시키는 중이었다.
‘풀썩……휘이익……’
‘아흑!’
그 자가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터져 나온 것은 연약한 처자의 실낱 같은 비명이었다. 인기척이라도 있었어야 했거늘, 인적이 드문 길 위에 마주 한 두 장정의 묘한 분위기에 놀라, 그 자의 바로 뒤에서 발걸음이 멎어 버린 한 여인이, 돌아서 허공으로 몸을 날리려는 그 자와 엉겨 붙어 부닥뜨린 소리였다. 두 사람은 얼결에 서로의 중심을 잃고 있었고, 그것을 막으려는 그 자의 몸부림이 마치 그녀를 기어이 안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 형상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 여인이 쓰고 있던 장옷이 나풀거리며 허공으로 춤을 추고, 얼결에 맞부딪게 된 그자와 그 여인은 한 몸이 되어 몇 번의 휘돌림을 낳았다. 그 강강수월래 같은 어지러운 보폭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은, 찰나가 영원처럼 이어져 끊어질 줄을 몰랐고, 진창에 가까운 바닥에 그 고운 옷 매무새가 행여 더럽혀 질까 두려워 하는 것처럼, 흑의의 무사는 그 여인의 허리와 등을 보듬은 채로 몇 번을 돌더니만 가까스로 멈추어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 자는 넋을 잃은 듯이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굳어 버린 그 여인을 남겨 둔 채, 허공으로 몸을 날려 기척을 이내 감추고 말았다. 멀리 서도 확연히 보이는 그 여인의 단아한 옆 모습,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 그 무사의 뒤를 쫓아 홍조로 얼룩진 그녀의 뺨으로부터 그 색조는 목을 타며 번지고 있었다. 그 여인은 그 자가 사라진 허공을 응시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붉게 물들어 화끈 거리는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허나, 윤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고로, 그 여인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눈빛…세상을 담고 있는 것인데…..’
-제 3 장- 고승 곡탁(哭鐸)
윤가는 기어이 사라진 그 자에 대한 것보다도, 눈 앞의 처자가 그를 목도 했는가의 여부가 더 궁금했다.
‘으…으…저….여기….’
넋을 잃고 그 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눈길을 떼질 못하는 그 처자도 심히 놀랐는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장옷조차 주을 기미가 없어 보였다.
‘아, 내 정신 좀 봐…..여기요!…..사람이 다쳤어요….여기요!…..누구 좀 도와 줘요…..’
다리를 붙들고, 반쯤 스러져 지탱하고 있던 윤가의 신음 소리에, 그 처자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화급히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향해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녀가 유별한 지라, 그녀는 그저 내려다 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 고작 이었다.
‘저……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으으…..혹여 그 자의 얼굴을 보셨는지요?’
‘그게……., 너무나 황망한 부지불식 간이라, 눈 여겨 보질 못하였습니다. 어찌 된 영문 인지도, 이 년, 기억에 없으니 어쩌지요?’
그러나, 윤가는 그 처자의 말이 허언임을 단박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듯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목 밑으로 붉게 홍조를 띄고 있는 그녀의 흥분은 그저 경악의 소치라고 밀어 부치기에는 그 정도와 간격이 심했기에 말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라도…..’
‘아니요….상간에 생 목숨이 넘나드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소저, 어찌 거짓을 고하오리까?’
‘후에라도 참고 될 일이 있을까 하여 그러는 것인데, 어디 사시는 누구신지, 혹여 알려 주실 수 있겠는지요?’
‘그리 합지요….’
그녀가 얘기를 꺼내려는 찰나,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달려들고 있었다.
‘하이고, 성님, 워찌된 거래요, 시방? 아니, 뒤를 차고 나설 때는 언제고, 이리 피떡지가 됐디야?’
‘아니다, 호들갑은…...부축이나 좀 해주련?’
‘내, 겁실랑 팽개치고 튀어 나갈 때부텀 알아 봤당게요…..아니, 그다지도 신출귀몰한 작자가 어디 성님 근력에 용케 잡힌답디여?’
‘난 됐으니, 어서 저 처자를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전방으로 오니라…..난 슬슬 걸어 갈 테니……이눔…..윽………아!’
윤가는 혼저 힘으로나마 걸어가려는 듯이, 넓적다리에 박힌 암기를 쑤욱 뽑으면서 붉게 번지는 피를 보고 있었다.
‘흐미, 워쪄쓰까 잉? 가만히 좀 있으쇼….내 피라도 멎게 동쳐 맬터니….’
장쇠는 자신의 옷섶을 부욱 찢는가 싶더니, 요란한 솜씨로 윤가의 넓적다리를 동여 매는 것이었다. 눈 앞에서 선혈을 목도했음인지, 그 처자의 전신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어여 모셔다 드리고 오래두?’
‘하이고, 사둔 남 걱정 혀고 자빠졌네 그랴, 아니, 지 몸이 이 지경 인디, 누굴 워쩌라 할 수 있겄냐, 이 말이요, 내 말은….’
투덜대는 장쇠를 다독여 그 처자의 뒤로 딸려 보내고, 윤가는 다리를 절어가며, 유기전으로 돌아왔다. 유기전으로 돌아와 곰방대에 불을 붙이면서도 윤가는 도주한 그 자 보다도, 그 처자의 눈가에 남았던 그 아스라한 느낌을 머리 속에서 지우기 힘들 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아무리 부지불식간 찰나의 순간이었을 지언정, 서로가 마주한 그 시선 속에 천마디 말보다 더 진한 언사가 건네어 졌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기도 했다. 그자의 심중에는 처자를 배려할 구석이 없었을 것임에도, 바닥으로 그 가녀린 몸매를 떨구지 않으려는 그 섬세한 손길 하며, 그 처자를 온전히 놔 두고 사라지는 그 단정한 몸짓이 기억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필시 그 자와 그 처자 사이에는 묘한 감정이 기류가 되어 그 짧은 순간, 접통 했을 것이 분명했고, 설사 그 자를 알아 보았다손 치더라도 그녀의 표정으로 연상하건대, 그 자와 유사한 자를 포박하였다 할지라도 그 자였음을 스스로 증언키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은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허어, 어찌한다? 처자를 설득하는 것이 난제로고….’
그 때였다.
‘게 있느냐?’
다리가 퉁퉁 부어 오르고, 미처 선혈이 낭자한 옷을 갈아입지 못한 와중에 유기전으로 들이닥친 것은, 효수의 장소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해 현장을 검험키 위해 급파된 것으로 보이는 포도청 종사관과 그가 대동한 서리였다. 이미 유기전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서리는 기록을 위한 채비를 했고, 종사관은 범행 현장의 주변을 살필 요량으로 탐문을 시작해 나갔다.
‘자네는 형장의 광경을 전부 목도 하였는가?’
‘예 그러하옵니다. 나으리….’
‘내 인근 사람들의 말을 들어 이리로 곧장 올 수 있었다만, 무슨 연유로 적당들의 뒤를 추적 했는지 말하여 줄 수 있는가? 형장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으나, 유독 자네 만이 그 무리들의 뒤를 쫓았다 하는데, 맞는가?’
‘예, 어찌 범죄를 저지른 도두가 죄 값을 치르기도 전에 활보하며, 빠져 나가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무리를 추적한 것은 아니었고, 관군을 향해 무참한 살인을 저지른 자를 따라간 것이지요. 저의 작은 미력이나마, 범죄 척결에 쓰여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나라를 위하고, 상감마마의 고심을 덜어드리는 길이 아닐는지요.’
‘그 기개가 남 다르구나…..헌데, 이미 형장의 주위에서는 검시관을 통해 초검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경인데, 그에 더할 말은 없느냐?’
‘사인에 대해서는 보고 받으셨는지요?’
‘네가 그것은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너는 내가 묻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만 답을 하면 될 것을…..’
‘아닙니다. 사인에 이르게 된 관군은 당시 많지 않았습죠. 기 매복한 적당들의 화살에 맞아, 대다수가 부상당한 것은 사실 이오나, 그것 만으로는 목숨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시위가 당겨 졌기에, 많은 자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옵니다. 허나, 문제는 죄인을 탈출 시킨 적당들에 대한 관군의 차후 증언을 두려워한 나머지, 흑의로 변복한 자가 장창으로 주위의 관군을 2차적으로 상해하였기에 사망에 이르른 것이지요. 세세히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화살이든, 장창이든 간에 의도적인 살해동기로 본다 치면 그 죄질이 무겁기 때문이지요.’
‘허, 자네는 어찌 그리도 포도와 검안의 사견에 능한 것인고?’
‘소인, 지금은 이러한 지경으로 천한 잡질에 곡기를 이어가고 있사오나, 소싯적, 패관으로 궁에서 녹을 먹던 자였습니다.’
‘아, 그러하신가? 내 몰라보고….허참….결례를 용서 하시게나’
‘아니옵니다. 이렇듯 부상을 당하는 와중에라도 나으리께 보고나마 드릴 수 있게 됨이 다행입니다요. 저를 이렇듯 상해하고 달아난, 그 변복한 자와 면전에서 마주친 이가 있긴 한데….., 부지불식간이라 기억이 정확치 않다 하는 말만을 들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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