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꿈꾸는 늑대 34부
수혼은 지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저녁이 되자 병원 문을 나섰다.
“정말 갈 거야. 조금 더 있음 안돼...........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수혼씨 응~~”
“처음부터 형님이 걱정 되서 같이 있었던 거야. 이런 상처쯤은 금방 없어져. 이제 개강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공부도 해야지. 들어가 아빠 기다리겠다.”
“언니가 곁에 있으니 상관없어. 꼭 가야 돼........고집은 세요.......수혼씨 집으로 갈 거지. 그럼 바라다 줄게.”
“저기........나 집에 안가........영은이 좀 만나려고. 핸드폰을 해도 받지도 않고 걱정돼서.”
“여........영은이 만나려 간다고..........그....그래...............혼자가야 돼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네가 불편할 것 같아서”
“가.......같이 가자........영은이도 내 친구데 같이 만나지 뭐. 그.......래도 돼지”
“네가 상관없다면..........같이 가자.”
수혼과 지나는 택시를 타고 영은의 아파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기.......핸드폰 좀 빌러 줄려.”
“왜~ 아 급하게 나오느라고 두고 온 모양이네............자”
지나가 핸드폰을 꺼내주자 수혼은 영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한참이 지나서 누군가가 전화를 받는데 영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저기 최영은씨 핸드폰 아닌가요.”
“예~ 맞아요...........누구(?).......혹시 조수혼씨.........맞나요.”
“아~ 영은이 언니.........예~ 맞습니다. 영은이 있어요.”
“흐........흐으흑.........여기 ○○병원 장례식장..........이예요. 이곳으로 오실 수 있어요.”
“예~ 장례식장(?) 영은이도 그곳에 있나요.”
“예~ 이..........이곳에 있어요. 수......수혼씨가 잠깐 와주었으면 해요. 전해야 될 물건도 있고 흐으흑~”
“예~ 알겠습니다. 당장 달려가죠.”
수혼은 영은의 언니가 울먹이며 전화를 받자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별일이야 없겠지 싶었다.
“저기 ○○병원으로 가야겠는데..........넌 어떻게 할 거야”
“이왕 만나기로 했는데........같이 가”
차는 방향을 돌려 다시 다른 병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가 병원에 도착하자 수혼과 지나는 차에서 내렸다. 병원에 내려 장례식장을 물어보고 식장으로 내려가는데 입구에 영은의 언니인 영경이가 하얀 소복을 입고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수혼도 영경을 한눈에 알아보고 영경의 앞으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근대..........어떻게 된 거죠. 집안에 누가 돌아가셨어요.”
수혼은 영경이 소복을 입고 있자 집안어른들 중에서 누가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영은이도 정신이 없어 자신의 전화를 받지 못한 것으로 이해했다.
영경은 수혼 인사를 받지도 않고.........수혼을 보자 눈물을 흘리더니 품에서 편지 한 장을 수혼에게 전해 준다.
“수혼씨.........이거부터 읽어보세요.”
수혼은 영경이 내민 쪽지를 보고 의아해 하다 일단 받아서 펴 보았다.
“오빠 보고 싶어............지금 당장 오빠에게 달려가고 싶어. 하지만.......
왜 안 왔어............오빠 미워.........어디에 있어도 영은이 구해 준다고 했으면서.......
왜 안 온 거야. 아냐 오빠 잘못이 아냐..........
미안해 오빠........오빠가 훌륭한 법관이 될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고 싶었는데..........이렇게 말도 없이 먼저 떠나서 미안해.........정말 미안해.......
이젠 오빠에게 갈 수 없어..........난...........난............그냥...........이대로 갈게..........좋은 추억만을 간직하고.........이대로 떠나는 것이 웃으며 갈 수 있을 것 같아..........
오빠..........내가 없더라도.......건강하고........꼭 좋은 법관이 되어야 해........
오빠 보고 싶다. 안녕 내 사랑”
영은의 편지는 낙서처럼 정리되지 않고 문맥도 엉망이었다. 수혼은 편지를 읽으며 등줄기가 사늘해지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무슨 말인가. 이게 무슨 내용인가. 수혼은 떨떨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내리고 영경을 바라보았다.
“무.........무.......뭐죠. 설마.........설마”
“영........영은이가........죽었어요.”
“예~ 거짓말 이죠............몇 칠전에도 우리 집에서 왔었는데.......거짓말 이죠.”
“자살 했어요...........경찰이 왔다 갔는데.........자살이라고 했어요.”
“자살.........정말로 죽었어요...........무엇 때문에..........왜~~”
“몸에 많은 타박상이 있고...........강간당한 흔적이 있대요. 정확하게 왜 자살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다만 저에도 미안하다는 메모와 수혼씨 걱정하는 내용만 있었어요.”
“지금 어디에.........직접 봐야겠어요. 영은이..........영은아~”
“안돼요.......다음에.........지금 안에 부모님 와 계세요........수혼씨는 그냥 돌아가세요. 부모님이 수혼씨 보면........수혼씨 힘들지 몰라요..........그냥 돌아가세요.”
“하지만..........제발..........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게..........제발.”
“안돼요. 저에게 남긴 편지에 영은이도 수혼씨에게 자기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말라고 했어요.........아름다운 모습으로만 기억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어요.”
“제발 한번만........제발”
옆에서 수혼과 영경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나는 수혼의 팔을 잡았다.
“수혼씨 그만 돌아가자.......영은이 언니도 힘들어하시잖아.........어서”
“지.......지나야.........영은이가..........영은이가”
“알아. 나도 들었어. 일단 이리와.........응~ 제발 수혼씨.”
지나는 움직이지 않는 수혼의 팔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
수혼과 지나는 병원에 있는 공원으로 이동했다. 수혼은 실성한 사람처럼 지나에게 이끌려 공원 벤치에 앉았다. 수혼은 멍하니 있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영은이가 죽었다니........자신이 사랑하던 영은이가.........화선이 떠나고 나서 힘들게 마음을 잡고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영은이까지 떠난 것인가.......그것도 자살이라니........
지나는 수혼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지나는 멍하니 앉아 있는 수혼을 안아주었다. 수혼은 힘없이 지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지나는 수혼의 어깨가 가늘게 때리고 있는 것을 알고는 수혼을 꼭 안아주었다.
(이 사람 울고 있는 건가........이 강한 사내가.........수혼씨 울지 마요. 당신이 울면.........나도 눈물이 나요. 제발...........수혼씨)
수혼은 영은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갑자기 죽어버린 이유도 모르겠고, 자살이란 사실이 더욱 믿어지지 않는다. 영경의 말속에 강간당한 흔적이 있다고 했는데.......어디서 누구에게 당했단 말인가. 불과 며칠 전까지 자신의 집에 찾아와 밝게 웃어주던 영은이가 사늘한 시체가 되어 영안실에 누워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일까?
“수혼씨.......수혼씨.......울지 마.”
지나는 자신의 가슴이 촉촉이 젖어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수혼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고 있었다.
“지나........나 집에 갈게.”
“같이 가. 내가 바라다 줄게”
“고맙지만.........혼자 있고 싶어........미안해”
“그.......수혼씨........걱정 되서 안 되겠어.......같이 가자. 방해하지 않을게. 응~ 제발”
“걱정하지 마.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그래 줄 수 있지”
“안되겠어. 조금 수혼씨 너무 흥분했어.........같이 가자.........불안해 미치겠단 말이야.”
“그래........그럼 술 좀 사조.........나 취하고 싶어”
“수혼씨가 술을.........그래 가자”
지나가 일어나자 수혼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나가 수혼의 팔을 잡고 끌자 수혼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지나를 따라 간다. 수혼은 멀어지는 병원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술집에 도착한 수혼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지나도 술 마시는 걸 말리지 않았다. 수혼은 폭음을 하고 있었다. 평소 잘 먹지도 않는 술을 안주도 먹지 않고 입속에 떨어 넣고 있었다. 벌써 독한 양주 한 병이 수혼의 배속으로 살아져 버렸다. 지나는 자신 앞에 있는 술잔을 들지 못했다. 수혼의 아슬아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수혼은 다시 반병의 양주를 먹더니 급기야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려지고 말았다.
지나는 쓰려진 수혼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 집에 전화를 했다. 자신의 운전기사 아저씨를 호출하고 지나도 술 한 잔을 마신다. 술은 무척이나 쓰게 느껴진다. 지나도 갑자기 날아든 영은의 사망소식에 한숨을 쉬었다. 수혼이 영은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영은이가 살아져 버렸으면 하고 빌어 본적이 있다. 그녀만 수혼의 곁을 떠나면 자신이 수혼과 잘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수혼이 다른 여자 때문에 아파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일 줄은 몰랐다.
잠시 후 기사 아저씨가 술집으로 들어왔다.
“미안해요. 밤늦게 쉬지도 못하게...........수혼씨 좀 부축해 주세요.”
“제 일인데요 뭐.”
기사가 수혼을 부축하자 수혼은 힘없이 축 늘어져 버린다. 기사아저씨는 수혼을 엎더니 술집을 나왔다. 술집 앞에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수혼을 뒤 좌석에 눕히고 지나도 차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가요.”
“집으로 가세요.”
차안에서 수혼은 지나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버렸다. 정신적인 충격과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쓰려져 버린 것이다. 지나는 잠든 수혼의 얼굴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한숨을 쉬어 본다. 차가 강철의 집에 도착하자 다시 가사아저씨가 수혼을 엎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지나는 수혼이 쓰던 이층 방에 수혼을 눕게 했다.
“수고하셨어요. 이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럼 쉬세요.”
기사는 수혼을 눕히고 나갔다. 지나는 수혼의 옷을 벗기고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했다. 도복을 입고 있던 수혼에게 아침에 사다준 옷인데 다시 자신의 손으로 옷을 벗기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지나는 잠든 수혼을 한동안 바라보다 자신의 방으로 가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수혼의 방으로 들어왔다. 수혼은 깨어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지나는 수혼의 침대 곁에 앉아서 수혼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지나가 눈을 뜨자 수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데........더욱이 자신은 침대 밑에 있었는데 지금은 침대 위에서 자고 있고 이불까지 덮여 있었다. 지나는 벌떡 일어나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자기방도 가보고, 거실도 가보고, 안방도 보았다. 집안 어디에도 수혼의 모습이 없었다. 다급해진 지나는 정원으로 나와 살펴보아도 역시 수혼의 모습은 없었다.
허탈 했다. 어디를 간 건가? 혹시 나쁜 마음먹고...........마음이 급하다. 막 옷을 갈아입으려 집안으로 달려가려는데 체육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현재 집안에는 일하는 아줌마들과 몇몇 집을 지키는 아저씨가 있을 뿐이다. 아저씨들도 이 시간에는 밖에서 경비하고 있지 체육관에서 운동하지 않는다. 지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체육관 문을 활짝 열자...........그곳에 수혼이 있었다. 상의를 벗어 던지고 수혼은 공중을 훨훨 날고 있었다. 공중에서 화려한 발차기가 터지고 벽에 매달린 샌드백이 휘청하며 “뻑”소리가 울려 퍼진다. 수혼의 몸이 공중에서 비틀어지며 방향을 전환하더니 주먹이 샌드백을 강타하고 샌드백은 “뻑” 소리와 함께 터져버리며 속에서 모래가 솟아져 나온다.
바닥에 내려선 수혼의 몸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돌아가더니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 다시금 주먹을 날린다.
지나는 수혼의 모습이 아름답기도 슬프게도 보였다. 그의 손에 터져 나가는 샌드백이 늘어갈 때 마다 수혼의 동작은 빨라지고 있었다. 체육관 바닥에 수혼의 땀방울이 떨이지고 마지막 샌드백까지 찢어버리고 서야 수혼의 동작이 멈추었다. 수혼은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등줄기에 땀이 흘려 내리고, 옆구리를 감싸고 있는 하얀 붕대는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지나는 수혼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같이 앉았다. 수혼은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지나야........어제.......영은이 강간당한 흔적이 있다고 했지.......누굴까.......어떤 녀석들일까? 성철파가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른 녀석들의 소행일까?”
“수혼씨........먼저 수혼씨 마음부터 추수여야 할 것 같아. 지금도 수혼씨 흥분하고 있어.”
“크크크~ 평온하면 내가 인간이니.........지금 폭발하기 일보진적이야. 눈앞에 영은이를 자살하게 만든 녀석들이 있다면............갈가리 찢어죽어도 분이 안 풀려. 하여튼 자살동기와 범인들을 알아봐야겠어...........경찰 쪽으로 알아봐야 하나.”
“내가 도와줄게.........친구들 중에 경찰 쪽과 잘 아는 친구가 있어. 수혼씨도 알지 블랙로즈 아이들 집안이 다들 빵빵한 거.........그 아이들에게 부탁하면 알 수 있을 거야.”
“고맙다..............그리고 가위좀 가져다줄래.”
“뭐하게..........설마”
“엉뚱한 짓 안 해..........머리 좀 잘라버리려고.”
“왜~ 수혼씨 정성들여 가꾸던 머리 아냐. 근데 갑자기 왜!!!!”
“거추장스러워서..........화선이도..........영은이도 떠나버리고..........사랑 같은 거 다시는 안 해.........이런 머리도 이젠 필요 없어.”
“수혼씨.......꼭 그래야 돼.........지금은 힘들어도.........하여튼 꼭 그래야 돼”
“싫어.........무서워........이젠 사랑 같은 거 안 해........부탁이야.”
“알.......았어. 정 원한다면........하지만 수혼씨.”
수혼이 고개를 들고 지나를 바라보자 지나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고개를 떨구고 일어나 버린다.
“아니야..........내가 잘라 줄게..........잠시만 기다려”
지나는 집안으로 달려가서 약상자와 가위를 찾았다. 약상자는 안방에 항상 준비되어 있어 찾기 쉬운데 가위는 머리를 자를만한 적당한 것을 찾기 힘들었다.
힘들게 잘 드는 가위를 찾은 지나는 수혼이 있는 체육관으로 달려왔다. 수혼은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있었다.
지나가 약상자와 가위를 바닥에 내려두고 수혼의 곁에 앉자 수혼은 지나를 바라보았다.
“철부지........이젠 숙녀가 다된 모양이군.........고마워”
“치~~ 내가 언제.........그리고 나도 이제 20살이야. 언제까지 어린꼬마로만 보지 말란 말이야. 자 옆구리 상처부터 소득하자. 하여튼 남자들이란........자기 몸이 소중한지 몰라요. 팔 들어봐”
수혼이 팔을 들어주자 지나는 옆구리에 붙은 거지를 한번에 때어버린다. “찌~이~~익” 상처가 들러나며 피가 흘려 나온다.
지나는 수혼이 얼굴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있자 소독약을 솜에 잔뜩 묻히고는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상처에서 거품이 일고 다른 솜으로 상처를 씻어내니 붉은 입을 벌린 상처가 들어났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보통사람이라면 아프다고 펄펄 뛰어도 시원찮은데 수혼은 담담히 앉아 있었다.
“안 아파..........왜 가만있어.”
“아파........근데 마음 더욱 아파서.........이런 고통쯤은 아프다는 느낌도 없어.”
지나는 어떠하든 수혼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지만 역시나 안돼는 모양이다. 수혼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지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감추고 약을 바르고 다시 거지를 대주고는 치료를 마무리 한다.
가위를 들고 수혼의 등 뒤에 선다. 수혼의 긴 머리칼을 들어본다. 부드럽고 길다. 처음에는 댕기머리를 보았을 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얼마 후 지금의 모습은 수혼의 특색을 잘 방영하는 특징이 되어준 머리다. 수혼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머리인 줄은 모르겠지만 지금 수혼은 머리를 자르려 한다. 수혼이 언 듯 비춘 말 중에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는 의미........어쩌면 수혼은 머리를 자름으로써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수혼씨.........다시 생각해봐........정말 잘라.”
“응~”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 안 해. 잘라”
지나는 수혼의 머리를 잡고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사삭” 20년이 넘게 고이 길려 오던 머리가 한 순간에 잘려 나간다. 수혼은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잠긴 듯 했다.
지나는 수혼의 머리를 길게 자라 한쪽에 고이 놓았다. 잠깐 사이에 머리가 짧아진다.
“수혼씨.........이제 미용실가자........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고맙다. 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영은이에 대한 사항 꼭 알려주고.........너무 걱정하지 마.”
“밥 먹고..........함께 미용실 가자.”
“밥 생각 없는데”
“수혼씨.........나 화낸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
집안에 들어가 아줌마들이 준비해준 밥을 먹고 지나와 함께 동네에 있는 미용실로 향했다.
미용실에 들어가 짧게 자른 머리를 손질하고 보니 수혼의 모습이 완전히 틀려 보였다. 고독하고 외롭게 보이는 모습은 그대로지만 여자처럼 섬세하게 보이던 모습은 살아져 버렸다.
“이제 가봐야겠어.”
“혼자가도 되겠어..........같이 가면 안돼.”
“걱정하지 마...........딴 짓거리 안 해.............너도 조심해. 성철파와 전면전이 벌어진 모양인데..........성철파가 널 노리고 있을 지도 몰라.”
“그래.........수혼씨도 조심해.........꼭 연락하고........나도 조심할게”
“그래.........다음에 보자.”
수혼은 지나와 헤어지고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가시죠.”
수혼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어디로 가야하나. 체육관으로 가야하나 집으로 가야하나.........
“○○병원으로 가주세요.”
수혼은 영은이가 잠들어 있는 병원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녀의 죽음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차가 병원으로 달려가자 수혼은 창가에 스치는 정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창가에 자신을 향해 밝게 웃어주던 영은이의 영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차가 병원에 도착하자 수혼은 장례식장으로 가보았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벽에 최영은 식장이라고 쓴 종이가 있었다. 막 식장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가 앞 막았다.
“저.......조수혼씨........제가 잘못보지 않았군요.”
“영경이 누나.”
“머리를 잘라서.........혹시나 했는데.........들어가지 마시고........저와 잠깐 밖에서 이야기 좀 해요.”
“예~~ 알겠습니다.”
수혼과 영경은 밖으로 나왔다. 영경은 하얀 소복을 단정히 입고 있었다. 그녀는 수혼과 병원에 있는 공원으로 가서 벤치에 같이 자리했다.
“영은이 보고 싶어요...........저도 그 마음 이해해요..........저도 영은이가 죽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아요. 그 착하기만 한 영은이가 자살을 했다니........................영은이 죽어 가며서까지 수혼씨 걱정하더군요...........저보고 잘 돌봐 달라고 부탁까지 했어요.”
“어떻게 죽은 거죠.”
“아파트에서 떨어졌어요. 제가 입학식 때 선물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요. 그것만 기억해요...........영은이도 수혼씨가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기억해 주기 바라고 있을 게예요.”
“저에게 남긴 건, 그 편지가 전부예요.”
“영은이........유서 같은 거 남기지 않았어요. 그것도 연습장에 낙서처럼 쓰다 버린 걸 제가 주워 전해 준 거죠. 수혼씨........영은이는 수혼씨가 자길 빨리 잊고 좋은 인연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영은이의 바람대로 해 주세요.”
“영은이는 어디로..............제가 갈 수 있나요.”
“네일 고향으로 가요............그 아이가 뛰어놀던 곳에 뿌려준대요. 부모님이 수혼씨 보면 더 슬퍼하세요. 다음에.......다음에 보세요. 그래도 영은이는 수혼씨가 있어서 웃으며 갔어요. 전 이만 돌아가 봐야 해요. 잘 가세요.”
“저.........잠시만”
“잊으세요.........영은이를 위해서라도”
영경은 수혼을 두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수혼은 한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영은이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내리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자살을 했을까?.........수혼의 손가락이 벤치를 파고들고 있었다.
수혼은 체육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가기 무서웠다. 또 혼자가 되어버린 수혼에게 혼자 있는 집안은 감옥처럼 느껴졌다. 외롭고 힘들다. 영은이가 곁에 있을 때는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녀가 떠난 지금은 혼자 있기 무서울 정도로 외롭다. 산에 있을 때부터 수혼은 혼자였다. 비록 사부가 있었지만 사부는 평소에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혼자서 생활한 수혼은 사람이 그리울 정도로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렸다. 그걸 화선이가 감싸주었고, 영은이가 감싸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여인 모두 자신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수혼이 체육관이 들어서자 수지가 수혼을 맞이한다. 수지는 힘없이 들어오는 수혼을 보고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왜 이제 오는 거야.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데.......그리고 그 꼴은 뭐야. 머리까지 자르고.......무슨 일 있어.”
“다들 어디 갔어.”
“청양리에 조사한다고 갔어. 근데 정말 어떻게 된 거야. 힘도 없고 수혼씨 이상하다. 혹시 저번 싸움에서 많이 다친 거야.”
“아냐. 아이들도 없는데 넌 왜 혼자 있어.”
“수혼씨가 걱정돼서 기다리고 있었어.........정말 괜찮은 거지. 아무 일 없는 거지”
“미안하다 너에게까지 걱정을 끼치고.........아이들 언제쯤 온다고 했어.”
“아마 저녁 때 쯤이나 들어올 걸.........다른 아이들도 수혼씨 많이 걱정하는 눈치더라.”
“그래.........나 좀 쉬어야겠다. 집에 있을 테니 아이들 오면 연락해.”
“또 어디 간다고 그래.........그냥 이곳에서 쉬어. 방해하지 않을게.”
“내가 불편해서 그래.”
수지는 마음이 답답했다. 영은이에 대한 전화를 받고 전하지 못한 불안감도 있었고, 자꾸만 수혼에게 쏠리는 마음을 수혼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것도 바로 지금............지금 전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수혼씨........내가 선배애인이라서 부담스러워.......나 영기하고 헤어졌어. 이젠 혼자라고.......수혼씨 몰라. 나 수혼씨 사랑해. 수혼씨에게 영은이란 여자가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어. 처음에는 지나라는 여자애하고 사귀는지 알았는데........애인은 따로 있더군.”
“수지.........나 지금 힘들거든.........지금 뭐라고 해도, 귀에 안 들어와. 다음에 이야기 하자.”
“수혼씨 지금 들어. 지금 아니면 영영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처음에는 수혼씨 무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수혼씨에게 접근했어. 그리고 싫다는 수혼씨 곁에 억지로 붙어 있었지. 근데 어느 순간 수혼씨가 가슴에 들어와 버린 거야. 다른 사람에게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막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거야. 내 자신도 혼란스러운데.......나중에 보니 사랑인 모양이야. 그런데 수혼씨는 향상 도망만 치려하고.........선배애인이라서 그런다고........이젠 그 핑계 대지마. 수혼씨가 내 마음도 좀 헤아려 주며 좋겠어............알아 수혼씨에게 영은이란 여자가 있다는 걸........욕심 부리지 않을게. 영은이란 여자 버리고 나에게 오라는 거 아니야. 그냥.........그냥 수혼씨가 나에게도 사랑을 베풀어 주면 좋겠다는 거야. 응~ 수혼씨”
수혼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수지의 고백은 듣고 수혼은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 막 영은의 죽음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지도 못한 수혼이다. 그런데 또 다른 여인이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irony) 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곧이라도 눈물을 솟아낼 것 같은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미안해~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내 가슴이 너무 황패하다. 다음에.......다음에 얘기하자.”
“도망치는 거야.........남자답게 말해. 싫음 싫다. 좋으면 좋다. 나도 구차하게 수혼씨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얘기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나도 여자라고.”
수혼은 끝내 눈물을 흘리는 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지씨. 난 말이죠. 다시는 사랑 안 해. 내가 사랑한 여인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났어. 화선도, 영은도..........가슴 속에 재만 남았어..........지금 누구 사랑할 여유가 없어.”
“영은씨가 떠나다니.............무슨 말이야.”
수지는 속으로 찔리는 것이 있었다. 그 전화..........성철파라고 밝힌 의문의 남자에게 걸려온 전화가 사실이란 말인가.
“어제 자살했어. 방금 보고 오는 길이야.”
“자.......자살........왜~”
“나도 몰라.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미안하지만 수지씨 말은 안 들은 걸로 할게.”
“수........수혼씨.”
“이해해조..........지금 무척 피곤해..........다음에 이야기하자. 쉬고 싶어.........집에 갈게. 아이들 들어오면 연락해조”
수혼은 힘없이 체육관을 나섰다. 수지는 감히 수혼을 잡지 못했다. 지금 수혼의 심정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심정이 말이 아니었다. 그 전화가 사실이란 말인가. 자신이 소식을 전하지 않아 영은이가 죽었단 말인가. 수지는 수혼이 나가자 자신도 인천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인천의 한 건물..........갈치파의 본부가 있는 건물에 수지를 비롯한 4군자와 원화가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菊)님. 성철파가 영은이란 아가씨를 건드린 것이 사실인가요.”
수지는 성철파를 감시하는 국에게 먼저 질문을 했다. 국이라면 성철파와 성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예요. 보고 받은 걸로는 집단강간을 한 것 같아요. 성민이 강철을 죽이지 못한 분풀이를 영은이라는 여자에게 한거죠.”
“어떻게 그런 짓을..........그리고 어떻게 된 거죠. 수혼씨 말로는 자살했다고 하던데”
“성민은 수혼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강간을 하고 그녀를 집 앞에 던져버린 모양인데.........그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걸로 보여요.”
“아~ 이걸 어떻게...........나 때문이야..........나 때문에.”
“란(蘭)님 자책하지 마세요. 란님이 소식을 전했다고 해도 이미 늦었을 거예요.......하여튼 이제 성민과 수혼이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죠. 성민은 강철 외에 무서운 적을 하나 더 만들었군요. 어쩌면 가장 무서운 사람일 수 있는데 말이죠.”
“수혼이란 남자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닙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국(菊)이 말하자 원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수혼이란 사내가 음양도를 완벽하게 익힌 사람이라면...........아무도 그와 대적할 수 없어요. 국선도의 진정한 계승자가 나타나거나..........아님 제가 원예도를 완벽하게 익히지 않는 한 누구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어요.”
“하지만 세력간의 결투에서 한사람만의 능력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모르는 소리..........선봉장의 의미가 있어요. 선봉장이 승승장구하면 조직의 사기는 하늘높이 치솟아 오르고 반대로 상대방은 기가 꺾이게 되요. 싸움에서 사기는 곧 승패와 직결돼요. 특히나 국선도, 음양도, 원예도의 계승자라면........겨의 일당백이조. 그런 사람이 성민의 적으로 돌아선 거죠.”
“성민도 국선도를 익히고 있어요.”
“진정한 계승자는 아니죠. 내가 성민과 손을 잡지 않은 것은 그가 익힌 국선도가 진정한 국선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성민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서 보조하고 있는 3명 또한 국선도를 익힌 걸로 아는데.......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성민은 성철파와 별개로 움직이고 있죠...........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요. 조직에서 지원받는 것도 아니고, 성민은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끌어올 가요.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3명의 정체는..........답은 간단해요. 성민에게 또 다른 세력이 있다는 거죠. 그것도 막강한 자금력과 뛰어난 용사들이 있는 조직..........그런 조직이 우리나라에 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에는 없죠. 그럼 답은........”
“설마...........일본의 야쿠자나 중국의 삼합회”
“호호호. 그런 큰 조직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면 경찰이나 검찰이 가만있겠어요. 하지만 비슷해요. 성민에게 얼핏 들은 적이 있어요. 만주에 있는 조선인자치구, 우리에겐 연변이라고 잘 알려진 곳에 조선인들이 조직한 조직이 있어요. 그곳의 한 조직이 성민의 배후일 가망성이 높아요. 어쩌면 그 조직에 진정한 국선도의 후계자가 있는지 모르죠.”
“원화님 그럼 우린 어떻게 하죠.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까? 지금 강철파가 성철파의 종로를 초토화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기회에.......”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말아요. 지금 강철파의 기세는 하늘을 찔려요. 그리고 어차피 성철파는 망해요. 껍데기만 남는 성철파가 강철파를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돼요. 성민이 나선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경철파가 지부단위로 흩어져 있을 때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한곳에 뭉쳐 있다면........누구도 강철파를 상대하지 못해요. 우리가 성철파와 손을 잡는다면..........함께 죽어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침묵으로 일관해야 합니까?”
“사람의 욕심은 화를 부르죠. 우린 인천에 있던 작은 조직에 불과했어요. 지금은 인천을 통일하고 서울의 한 지역까지 진출했어요. 그래도 부족한가요?..............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와요.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정 그러시면.........하여튼 성철파는 곧 세상에서 살아지겠군요.”
“아마도.........그리고 란(蘭)님. 끝내 성기하고는 안돼는 모양이죠. 수혼이란 남자에 선택받지도 못하고.......성기도 버리고........계속 실망시킬 건가요. 란(蘭)님은 우리 갈치파의 수장이라 걸 잊지 마세요. 수혼이란 남자를 잡으려면 확실하게 잡아요. 사군자의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여자로써 해봐요.”
“워........원예님”
“해봐요. 본래는 안돼는 것이지만.........란님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말리지 않겠어요. 다신 확실하게 잡아요.”
“고맙습니다.”
수혼은 지나의 만류를 뿌리치고 저녁이 되자 병원 문을 나섰다.
“정말 갈 거야. 조금 더 있음 안돼...........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수혼씨 응~~”
“처음부터 형님이 걱정 되서 같이 있었던 거야. 이런 상처쯤은 금방 없어져. 이제 개강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공부도 해야지. 들어가 아빠 기다리겠다.”
“언니가 곁에 있으니 상관없어. 꼭 가야 돼........고집은 세요.......수혼씨 집으로 갈 거지. 그럼 바라다 줄게.”
“저기........나 집에 안가........영은이 좀 만나려고. 핸드폰을 해도 받지도 않고 걱정돼서.”
“여........영은이 만나려 간다고..........그....그래...............혼자가야 돼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네가 불편할 것 같아서”
“가.......같이 가자........영은이도 내 친구데 같이 만나지 뭐. 그.......래도 돼지”
“네가 상관없다면..........같이 가자.”
수혼과 지나는 택시를 타고 영은의 아파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기.......핸드폰 좀 빌러 줄려.”
“왜~ 아 급하게 나오느라고 두고 온 모양이네............자”
지나가 핸드폰을 꺼내주자 수혼은 영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한참이 지나서 누군가가 전화를 받는데 영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저기 최영은씨 핸드폰 아닌가요.”
“예~ 맞아요...........누구(?).......혹시 조수혼씨.........맞나요.”
“아~ 영은이 언니.........예~ 맞습니다. 영은이 있어요.”
“흐........흐으흑.........여기 ○○병원 장례식장..........이예요. 이곳으로 오실 수 있어요.”
“예~ 장례식장(?) 영은이도 그곳에 있나요.”
“예~ 이..........이곳에 있어요. 수......수혼씨가 잠깐 와주었으면 해요. 전해야 될 물건도 있고 흐으흑~”
“예~ 알겠습니다. 당장 달려가죠.”
수혼은 영은의 언니가 울먹이며 전화를 받자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별일이야 없겠지 싶었다.
“저기 ○○병원으로 가야겠는데..........넌 어떻게 할 거야”
“이왕 만나기로 했는데........같이 가”
차는 방향을 돌려 다시 다른 병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가 병원에 도착하자 수혼과 지나는 차에서 내렸다. 병원에 내려 장례식장을 물어보고 식장으로 내려가는데 입구에 영은의 언니인 영경이가 하얀 소복을 입고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수혼도 영경을 한눈에 알아보고 영경의 앞으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근대..........어떻게 된 거죠. 집안에 누가 돌아가셨어요.”
수혼은 영경이 소복을 입고 있자 집안어른들 중에서 누가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영은이도 정신이 없어 자신의 전화를 받지 못한 것으로 이해했다.
영경은 수혼 인사를 받지도 않고.........수혼을 보자 눈물을 흘리더니 품에서 편지 한 장을 수혼에게 전해 준다.
“수혼씨.........이거부터 읽어보세요.”
수혼은 영경이 내민 쪽지를 보고 의아해 하다 일단 받아서 펴 보았다.
“오빠 보고 싶어............지금 당장 오빠에게 달려가고 싶어. 하지만.......
왜 안 왔어............오빠 미워.........어디에 있어도 영은이 구해 준다고 했으면서.......
왜 안 온 거야. 아냐 오빠 잘못이 아냐..........
미안해 오빠........오빠가 훌륭한 법관이 될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고 싶었는데..........이렇게 말도 없이 먼저 떠나서 미안해.........정말 미안해.......
이젠 오빠에게 갈 수 없어..........난...........난............그냥...........이대로 갈게..........좋은 추억만을 간직하고.........이대로 떠나는 것이 웃으며 갈 수 있을 것 같아..........
오빠..........내가 없더라도.......건강하고........꼭 좋은 법관이 되어야 해........
오빠 보고 싶다. 안녕 내 사랑”
영은의 편지는 낙서처럼 정리되지 않고 문맥도 엉망이었다. 수혼은 편지를 읽으며 등줄기가 사늘해지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무슨 말인가. 이게 무슨 내용인가. 수혼은 떨떨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내리고 영경을 바라보았다.
“무.........무.......뭐죠. 설마.........설마”
“영........영은이가........죽었어요.”
“예~ 거짓말 이죠............몇 칠전에도 우리 집에서 왔었는데.......거짓말 이죠.”
“자살 했어요...........경찰이 왔다 갔는데.........자살이라고 했어요.”
“자살.........정말로 죽었어요...........무엇 때문에..........왜~~”
“몸에 많은 타박상이 있고...........강간당한 흔적이 있대요. 정확하게 왜 자살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다만 저에도 미안하다는 메모와 수혼씨 걱정하는 내용만 있었어요.”
“지금 어디에.........직접 봐야겠어요. 영은이..........영은아~”
“안돼요.......다음에.........지금 안에 부모님 와 계세요........수혼씨는 그냥 돌아가세요. 부모님이 수혼씨 보면........수혼씨 힘들지 몰라요..........그냥 돌아가세요.”
“하지만..........제발..........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게..........제발.”
“안돼요. 저에게 남긴 편지에 영은이도 수혼씨에게 자기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말라고 했어요.........아름다운 모습으로만 기억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어요.”
“제발 한번만........제발”
옆에서 수혼과 영경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나는 수혼의 팔을 잡았다.
“수혼씨 그만 돌아가자.......영은이 언니도 힘들어하시잖아.........어서”
“지.......지나야.........영은이가..........영은이가”
“알아. 나도 들었어. 일단 이리와.........응~ 제발 수혼씨.”
지나는 움직이지 않는 수혼의 팔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
수혼과 지나는 병원에 있는 공원으로 이동했다. 수혼은 실성한 사람처럼 지나에게 이끌려 공원 벤치에 앉았다. 수혼은 멍하니 있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영은이가 죽었다니........자신이 사랑하던 영은이가.........화선이 떠나고 나서 힘들게 마음을 잡고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영은이까지 떠난 것인가.......그것도 자살이라니........
지나는 수혼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지나는 멍하니 앉아 있는 수혼을 안아주었다. 수혼은 힘없이 지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지나는 수혼의 어깨가 가늘게 때리고 있는 것을 알고는 수혼을 꼭 안아주었다.
(이 사람 울고 있는 건가........이 강한 사내가.........수혼씨 울지 마요. 당신이 울면.........나도 눈물이 나요. 제발...........수혼씨)
수혼은 영은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갑자기 죽어버린 이유도 모르겠고, 자살이란 사실이 더욱 믿어지지 않는다. 영경의 말속에 강간당한 흔적이 있다고 했는데.......어디서 누구에게 당했단 말인가. 불과 며칠 전까지 자신의 집에 찾아와 밝게 웃어주던 영은이가 사늘한 시체가 되어 영안실에 누워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일까?
“수혼씨.......수혼씨.......울지 마.”
지나는 자신의 가슴이 촉촉이 젖어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수혼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고 있었다.
“지나........나 집에 갈게.”
“같이 가. 내가 바라다 줄게”
“고맙지만.........혼자 있고 싶어........미안해”
“그.......수혼씨........걱정 되서 안 되겠어.......같이 가자. 방해하지 않을게. 응~ 제발”
“걱정하지 마.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그래 줄 수 있지”
“안되겠어. 조금 수혼씨 너무 흥분했어.........같이 가자.........불안해 미치겠단 말이야.”
“그래........그럼 술 좀 사조.........나 취하고 싶어”
“수혼씨가 술을.........그래 가자”
지나가 일어나자 수혼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나가 수혼의 팔을 잡고 끌자 수혼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지나를 따라 간다. 수혼은 멀어지는 병원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술집에 도착한 수혼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지나도 술 마시는 걸 말리지 않았다. 수혼은 폭음을 하고 있었다. 평소 잘 먹지도 않는 술을 안주도 먹지 않고 입속에 떨어 넣고 있었다. 벌써 독한 양주 한 병이 수혼의 배속으로 살아져 버렸다. 지나는 자신 앞에 있는 술잔을 들지 못했다. 수혼의 아슬아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수혼은 다시 반병의 양주를 먹더니 급기야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려지고 말았다.
지나는 쓰려진 수혼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 집에 전화를 했다. 자신의 운전기사 아저씨를 호출하고 지나도 술 한 잔을 마신다. 술은 무척이나 쓰게 느껴진다. 지나도 갑자기 날아든 영은의 사망소식에 한숨을 쉬었다. 수혼이 영은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영은이가 살아져 버렸으면 하고 빌어 본적이 있다. 그녀만 수혼의 곁을 떠나면 자신이 수혼과 잘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수혼이 다른 여자 때문에 아파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일 줄은 몰랐다.
잠시 후 기사 아저씨가 술집으로 들어왔다.
“미안해요. 밤늦게 쉬지도 못하게...........수혼씨 좀 부축해 주세요.”
“제 일인데요 뭐.”
기사가 수혼을 부축하자 수혼은 힘없이 축 늘어져 버린다. 기사아저씨는 수혼을 엎더니 술집을 나왔다. 술집 앞에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수혼을 뒤 좌석에 눕히고 지나도 차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가요.”
“집으로 가세요.”
차안에서 수혼은 지나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버렸다. 정신적인 충격과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쓰려져 버린 것이다. 지나는 잠든 수혼의 얼굴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한숨을 쉬어 본다. 차가 강철의 집에 도착하자 다시 가사아저씨가 수혼을 엎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지나는 수혼이 쓰던 이층 방에 수혼을 눕게 했다.
“수고하셨어요. 이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럼 쉬세요.”
기사는 수혼을 눕히고 나갔다. 지나는 수혼의 옷을 벗기고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했다. 도복을 입고 있던 수혼에게 아침에 사다준 옷인데 다시 자신의 손으로 옷을 벗기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지나는 잠든 수혼을 한동안 바라보다 자신의 방으로 가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수혼의 방으로 들어왔다. 수혼은 깨어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지나는 수혼의 침대 곁에 앉아서 수혼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지나가 눈을 뜨자 수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데........더욱이 자신은 침대 밑에 있었는데 지금은 침대 위에서 자고 있고 이불까지 덮여 있었다. 지나는 벌떡 일어나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자기방도 가보고, 거실도 가보고, 안방도 보았다. 집안 어디에도 수혼의 모습이 없었다. 다급해진 지나는 정원으로 나와 살펴보아도 역시 수혼의 모습은 없었다.
허탈 했다. 어디를 간 건가? 혹시 나쁜 마음먹고...........마음이 급하다. 막 옷을 갈아입으려 집안으로 달려가려는데 체육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현재 집안에는 일하는 아줌마들과 몇몇 집을 지키는 아저씨가 있을 뿐이다. 아저씨들도 이 시간에는 밖에서 경비하고 있지 체육관에서 운동하지 않는다. 지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체육관 문을 활짝 열자...........그곳에 수혼이 있었다. 상의를 벗어 던지고 수혼은 공중을 훨훨 날고 있었다. 공중에서 화려한 발차기가 터지고 벽에 매달린 샌드백이 휘청하며 “뻑”소리가 울려 퍼진다. 수혼의 몸이 공중에서 비틀어지며 방향을 전환하더니 주먹이 샌드백을 강타하고 샌드백은 “뻑” 소리와 함께 터져버리며 속에서 모래가 솟아져 나온다.
바닥에 내려선 수혼의 몸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돌아가더니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 다시금 주먹을 날린다.
지나는 수혼의 모습이 아름답기도 슬프게도 보였다. 그의 손에 터져 나가는 샌드백이 늘어갈 때 마다 수혼의 동작은 빨라지고 있었다. 체육관 바닥에 수혼의 땀방울이 떨이지고 마지막 샌드백까지 찢어버리고 서야 수혼의 동작이 멈추었다. 수혼은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등줄기에 땀이 흘려 내리고, 옆구리를 감싸고 있는 하얀 붕대는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지나는 수혼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같이 앉았다. 수혼은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지나야........어제.......영은이 강간당한 흔적이 있다고 했지.......누굴까.......어떤 녀석들일까? 성철파가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른 녀석들의 소행일까?”
“수혼씨........먼저 수혼씨 마음부터 추수여야 할 것 같아. 지금도 수혼씨 흥분하고 있어.”
“크크크~ 평온하면 내가 인간이니.........지금 폭발하기 일보진적이야. 눈앞에 영은이를 자살하게 만든 녀석들이 있다면............갈가리 찢어죽어도 분이 안 풀려. 하여튼 자살동기와 범인들을 알아봐야겠어...........경찰 쪽으로 알아봐야 하나.”
“내가 도와줄게.........친구들 중에 경찰 쪽과 잘 아는 친구가 있어. 수혼씨도 알지 블랙로즈 아이들 집안이 다들 빵빵한 거.........그 아이들에게 부탁하면 알 수 있을 거야.”
“고맙다..............그리고 가위좀 가져다줄래.”
“뭐하게..........설마”
“엉뚱한 짓 안 해..........머리 좀 잘라버리려고.”
“왜~ 수혼씨 정성들여 가꾸던 머리 아냐. 근데 갑자기 왜!!!!”
“거추장스러워서..........화선이도..........영은이도 떠나버리고..........사랑 같은 거 다시는 안 해.........이런 머리도 이젠 필요 없어.”
“수혼씨.......꼭 그래야 돼.........지금은 힘들어도.........하여튼 꼭 그래야 돼”
“싫어.........무서워........이젠 사랑 같은 거 안 해........부탁이야.”
“알.......았어. 정 원한다면........하지만 수혼씨.”
수혼이 고개를 들고 지나를 바라보자 지나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고개를 떨구고 일어나 버린다.
“아니야..........내가 잘라 줄게..........잠시만 기다려”
지나는 집안으로 달려가서 약상자와 가위를 찾았다. 약상자는 안방에 항상 준비되어 있어 찾기 쉬운데 가위는 머리를 자를만한 적당한 것을 찾기 힘들었다.
힘들게 잘 드는 가위를 찾은 지나는 수혼이 있는 체육관으로 달려왔다. 수혼은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있었다.
지나가 약상자와 가위를 바닥에 내려두고 수혼의 곁에 앉자 수혼은 지나를 바라보았다.
“철부지........이젠 숙녀가 다된 모양이군.........고마워”
“치~~ 내가 언제.........그리고 나도 이제 20살이야. 언제까지 어린꼬마로만 보지 말란 말이야. 자 옆구리 상처부터 소득하자. 하여튼 남자들이란........자기 몸이 소중한지 몰라요. 팔 들어봐”
수혼이 팔을 들어주자 지나는 옆구리에 붙은 거지를 한번에 때어버린다. “찌~이~~익” 상처가 들러나며 피가 흘려 나온다.
지나는 수혼이 얼굴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있자 소독약을 솜에 잔뜩 묻히고는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상처에서 거품이 일고 다른 솜으로 상처를 씻어내니 붉은 입을 벌린 상처가 들어났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보통사람이라면 아프다고 펄펄 뛰어도 시원찮은데 수혼은 담담히 앉아 있었다.
“안 아파..........왜 가만있어.”
“아파........근데 마음 더욱 아파서.........이런 고통쯤은 아프다는 느낌도 없어.”
지나는 어떠하든 수혼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지만 역시나 안돼는 모양이다. 수혼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지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감추고 약을 바르고 다시 거지를 대주고는 치료를 마무리 한다.
가위를 들고 수혼의 등 뒤에 선다. 수혼의 긴 머리칼을 들어본다. 부드럽고 길다. 처음에는 댕기머리를 보았을 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얼마 후 지금의 모습은 수혼의 특색을 잘 방영하는 특징이 되어준 머리다. 수혼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머리인 줄은 모르겠지만 지금 수혼은 머리를 자르려 한다. 수혼이 언 듯 비춘 말 중에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는 의미........어쩌면 수혼은 머리를 자름으로써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수혼씨.........다시 생각해봐........정말 잘라.”
“응~”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 안 해. 잘라”
지나는 수혼의 머리를 잡고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사삭” 20년이 넘게 고이 길려 오던 머리가 한 순간에 잘려 나간다. 수혼은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잠긴 듯 했다.
지나는 수혼의 머리를 길게 자라 한쪽에 고이 놓았다. 잠깐 사이에 머리가 짧아진다.
“수혼씨.........이제 미용실가자........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고맙다. 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영은이에 대한 사항 꼭 알려주고.........너무 걱정하지 마.”
“밥 먹고..........함께 미용실 가자.”
“밥 생각 없는데”
“수혼씨.........나 화낸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
집안에 들어가 아줌마들이 준비해준 밥을 먹고 지나와 함께 동네에 있는 미용실로 향했다.
미용실에 들어가 짧게 자른 머리를 손질하고 보니 수혼의 모습이 완전히 틀려 보였다. 고독하고 외롭게 보이는 모습은 그대로지만 여자처럼 섬세하게 보이던 모습은 살아져 버렸다.
“이제 가봐야겠어.”
“혼자가도 되겠어..........같이 가면 안돼.”
“걱정하지 마...........딴 짓거리 안 해.............너도 조심해. 성철파와 전면전이 벌어진 모양인데..........성철파가 널 노리고 있을 지도 몰라.”
“그래.........수혼씨도 조심해.........꼭 연락하고........나도 조심할게”
“그래.........다음에 보자.”
수혼은 지나와 헤어지고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가시죠.”
수혼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어디로 가야하나. 체육관으로 가야하나 집으로 가야하나.........
“○○병원으로 가주세요.”
수혼은 영은이가 잠들어 있는 병원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녀의 죽음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차가 병원으로 달려가자 수혼은 창가에 스치는 정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창가에 자신을 향해 밝게 웃어주던 영은이의 영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차가 병원에 도착하자 수혼은 장례식장으로 가보았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벽에 최영은 식장이라고 쓴 종이가 있었다. 막 식장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가 앞 막았다.
“저.......조수혼씨........제가 잘못보지 않았군요.”
“영경이 누나.”
“머리를 잘라서.........혹시나 했는데.........들어가지 마시고........저와 잠깐 밖에서 이야기 좀 해요.”
“예~~ 알겠습니다.”
수혼과 영경은 밖으로 나왔다. 영경은 하얀 소복을 단정히 입고 있었다. 그녀는 수혼과 병원에 있는 공원으로 가서 벤치에 같이 자리했다.
“영은이 보고 싶어요...........저도 그 마음 이해해요..........저도 영은이가 죽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아요. 그 착하기만 한 영은이가 자살을 했다니........................영은이 죽어 가며서까지 수혼씨 걱정하더군요...........저보고 잘 돌봐 달라고 부탁까지 했어요.”
“어떻게 죽은 거죠.”
“아파트에서 떨어졌어요. 제가 입학식 때 선물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요. 그것만 기억해요...........영은이도 수혼씨가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기억해 주기 바라고 있을 게예요.”
“저에게 남긴 건, 그 편지가 전부예요.”
“영은이........유서 같은 거 남기지 않았어요. 그것도 연습장에 낙서처럼 쓰다 버린 걸 제가 주워 전해 준 거죠. 수혼씨........영은이는 수혼씨가 자길 빨리 잊고 좋은 인연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영은이의 바람대로 해 주세요.”
“영은이는 어디로..............제가 갈 수 있나요.”
“네일 고향으로 가요............그 아이가 뛰어놀던 곳에 뿌려준대요. 부모님이 수혼씨 보면 더 슬퍼하세요. 다음에.......다음에 보세요. 그래도 영은이는 수혼씨가 있어서 웃으며 갔어요. 전 이만 돌아가 봐야 해요. 잘 가세요.”
“저.........잠시만”
“잊으세요.........영은이를 위해서라도”
영경은 수혼을 두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수혼은 한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영은이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내리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자살을 했을까?.........수혼의 손가락이 벤치를 파고들고 있었다.
수혼은 체육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가기 무서웠다. 또 혼자가 되어버린 수혼에게 혼자 있는 집안은 감옥처럼 느껴졌다. 외롭고 힘들다. 영은이가 곁에 있을 때는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녀가 떠난 지금은 혼자 있기 무서울 정도로 외롭다. 산에 있을 때부터 수혼은 혼자였다. 비록 사부가 있었지만 사부는 평소에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혼자서 생활한 수혼은 사람이 그리울 정도로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렸다. 그걸 화선이가 감싸주었고, 영은이가 감싸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여인 모두 자신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수혼이 체육관이 들어서자 수지가 수혼을 맞이한다. 수지는 힘없이 들어오는 수혼을 보고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왜 이제 오는 거야.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데.......그리고 그 꼴은 뭐야. 머리까지 자르고.......무슨 일 있어.”
“다들 어디 갔어.”
“청양리에 조사한다고 갔어. 근데 정말 어떻게 된 거야. 힘도 없고 수혼씨 이상하다. 혹시 저번 싸움에서 많이 다친 거야.”
“아냐. 아이들도 없는데 넌 왜 혼자 있어.”
“수혼씨가 걱정돼서 기다리고 있었어.........정말 괜찮은 거지. 아무 일 없는 거지”
“미안하다 너에게까지 걱정을 끼치고.........아이들 언제쯤 온다고 했어.”
“아마 저녁 때 쯤이나 들어올 걸.........다른 아이들도 수혼씨 많이 걱정하는 눈치더라.”
“그래.........나 좀 쉬어야겠다. 집에 있을 테니 아이들 오면 연락해.”
“또 어디 간다고 그래.........그냥 이곳에서 쉬어. 방해하지 않을게.”
“내가 불편해서 그래.”
수지는 마음이 답답했다. 영은이에 대한 전화를 받고 전하지 못한 불안감도 있었고, 자꾸만 수혼에게 쏠리는 마음을 수혼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것도 바로 지금............지금 전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수혼씨........내가 선배애인이라서 부담스러워.......나 영기하고 헤어졌어. 이젠 혼자라고.......수혼씨 몰라. 나 수혼씨 사랑해. 수혼씨에게 영은이란 여자가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어. 처음에는 지나라는 여자애하고 사귀는지 알았는데........애인은 따로 있더군.”
“수지.........나 지금 힘들거든.........지금 뭐라고 해도, 귀에 안 들어와. 다음에 이야기 하자.”
“수혼씨 지금 들어. 지금 아니면 영영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처음에는 수혼씨 무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수혼씨에게 접근했어. 그리고 싫다는 수혼씨 곁에 억지로 붙어 있었지. 근데 어느 순간 수혼씨가 가슴에 들어와 버린 거야. 다른 사람에게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막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거야. 내 자신도 혼란스러운데.......나중에 보니 사랑인 모양이야. 그런데 수혼씨는 향상 도망만 치려하고.........선배애인이라서 그런다고........이젠 그 핑계 대지마. 수혼씨가 내 마음도 좀 헤아려 주며 좋겠어............알아 수혼씨에게 영은이란 여자가 있다는 걸........욕심 부리지 않을게. 영은이란 여자 버리고 나에게 오라는 거 아니야. 그냥.........그냥 수혼씨가 나에게도 사랑을 베풀어 주면 좋겠다는 거야. 응~ 수혼씨”
수혼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수지의 고백은 듣고 수혼은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 막 영은의 죽음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지도 못한 수혼이다. 그런데 또 다른 여인이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irony) 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곧이라도 눈물을 솟아낼 것 같은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미안해~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내 가슴이 너무 황패하다. 다음에.......다음에 얘기하자.”
“도망치는 거야.........남자답게 말해. 싫음 싫다. 좋으면 좋다. 나도 구차하게 수혼씨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얘기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나도 여자라고.”
수혼은 끝내 눈물을 흘리는 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지씨. 난 말이죠. 다시는 사랑 안 해. 내가 사랑한 여인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났어. 화선도, 영은도..........가슴 속에 재만 남았어..........지금 누구 사랑할 여유가 없어.”
“영은씨가 떠나다니.............무슨 말이야.”
수지는 속으로 찔리는 것이 있었다. 그 전화..........성철파라고 밝힌 의문의 남자에게 걸려온 전화가 사실이란 말인가.
“어제 자살했어. 방금 보고 오는 길이야.”
“자.......자살........왜~”
“나도 몰라.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미안하지만 수지씨 말은 안 들은 걸로 할게.”
“수........수혼씨.”
“이해해조..........지금 무척 피곤해..........다음에 이야기하자. 쉬고 싶어.........집에 갈게. 아이들 들어오면 연락해조”
수혼은 힘없이 체육관을 나섰다. 수지는 감히 수혼을 잡지 못했다. 지금 수혼의 심정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심정이 말이 아니었다. 그 전화가 사실이란 말인가. 자신이 소식을 전하지 않아 영은이가 죽었단 말인가. 수지는 수혼이 나가자 자신도 인천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인천의 한 건물..........갈치파의 본부가 있는 건물에 수지를 비롯한 4군자와 원화가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菊)님. 성철파가 영은이란 아가씨를 건드린 것이 사실인가요.”
수지는 성철파를 감시하는 국에게 먼저 질문을 했다. 국이라면 성철파와 성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예요. 보고 받은 걸로는 집단강간을 한 것 같아요. 성민이 강철을 죽이지 못한 분풀이를 영은이라는 여자에게 한거죠.”
“어떻게 그런 짓을..........그리고 어떻게 된 거죠. 수혼씨 말로는 자살했다고 하던데”
“성민은 수혼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강간을 하고 그녀를 집 앞에 던져버린 모양인데.........그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걸로 보여요.”
“아~ 이걸 어떻게...........나 때문이야..........나 때문에.”
“란(蘭)님 자책하지 마세요. 란님이 소식을 전했다고 해도 이미 늦었을 거예요.......하여튼 이제 성민과 수혼이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죠. 성민은 강철 외에 무서운 적을 하나 더 만들었군요. 어쩌면 가장 무서운 사람일 수 있는데 말이죠.”
“수혼이란 남자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닙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국(菊)이 말하자 원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수혼이란 사내가 음양도를 완벽하게 익힌 사람이라면...........아무도 그와 대적할 수 없어요. 국선도의 진정한 계승자가 나타나거나..........아님 제가 원예도를 완벽하게 익히지 않는 한 누구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어요.”
“하지만 세력간의 결투에서 한사람만의 능력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모르는 소리..........선봉장의 의미가 있어요. 선봉장이 승승장구하면 조직의 사기는 하늘높이 치솟아 오르고 반대로 상대방은 기가 꺾이게 되요. 싸움에서 사기는 곧 승패와 직결돼요. 특히나 국선도, 음양도, 원예도의 계승자라면........겨의 일당백이조. 그런 사람이 성민의 적으로 돌아선 거죠.”
“성민도 국선도를 익히고 있어요.”
“진정한 계승자는 아니죠. 내가 성민과 손을 잡지 않은 것은 그가 익힌 국선도가 진정한 국선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성민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서 보조하고 있는 3명 또한 국선도를 익힌 걸로 아는데.......그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성민은 성철파와 별개로 움직이고 있죠...........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조직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요. 조직에서 지원받는 것도 아니고, 성민은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끌어올 가요.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3명의 정체는..........답은 간단해요. 성민에게 또 다른 세력이 있다는 거죠. 그것도 막강한 자금력과 뛰어난 용사들이 있는 조직..........그런 조직이 우리나라에 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에는 없죠. 그럼 답은........”
“설마...........일본의 야쿠자나 중국의 삼합회”
“호호호. 그런 큰 조직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면 경찰이나 검찰이 가만있겠어요. 하지만 비슷해요. 성민에게 얼핏 들은 적이 있어요. 만주에 있는 조선인자치구, 우리에겐 연변이라고 잘 알려진 곳에 조선인들이 조직한 조직이 있어요. 그곳의 한 조직이 성민의 배후일 가망성이 높아요. 어쩌면 그 조직에 진정한 국선도의 후계자가 있는지 모르죠.”
“원화님 그럼 우린 어떻게 하죠.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까? 지금 강철파가 성철파의 종로를 초토화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기회에.......”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말아요. 지금 강철파의 기세는 하늘을 찔려요. 그리고 어차피 성철파는 망해요. 껍데기만 남는 성철파가 강철파를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돼요. 성민이 나선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요. 경철파가 지부단위로 흩어져 있을 때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한곳에 뭉쳐 있다면........누구도 강철파를 상대하지 못해요. 우리가 성철파와 손을 잡는다면..........함께 죽어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침묵으로 일관해야 합니까?”
“사람의 욕심은 화를 부르죠. 우린 인천에 있던 작은 조직에 불과했어요. 지금은 인천을 통일하고 서울의 한 지역까지 진출했어요. 그래도 부족한가요?..............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와요.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정 그러시면.........하여튼 성철파는 곧 세상에서 살아지겠군요.”
“아마도.........그리고 란(蘭)님. 끝내 성기하고는 안돼는 모양이죠. 수혼이란 남자에 선택받지도 못하고.......성기도 버리고........계속 실망시킬 건가요. 란(蘭)님은 우리 갈치파의 수장이라 걸 잊지 마세요. 수혼이란 남자를 잡으려면 확실하게 잡아요. 사군자의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여자로써 해봐요.”
“워........원예님”
“해봐요. 본래는 안돼는 것이지만.........란님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말리지 않겠어요. 다신 확실하게 잡아요.”
“고맙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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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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