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선화가 눈을 떴을 때 병희는 떠나버린 후였다.
그녀는 언제 잠들었는지 그가 언제 떠나갔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지난 밤의 아찔한 기억이 떠올라 새삼스럽게도 겁이 났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었을까. 하지만 어찌 한단 말인가. 이미 활을 떠난 화살과 같은데.
선화는 자신이 더 이상 순수한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귀밑으로 떨어졌다.
선화는 가게에만 신경쓰고 며칠 동안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다.
조금은 연락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병희와의 만남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희의 얼굴을 보고 싶어진 날, 선화는 미리 전화도 하지 않고 병원으로 찾아갔다.
전에 보았던 간호사는 점심이라도 먹으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화는 직접 진료실 문을 노크했고 들어오라는 병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담담했다. 반갑게 맞아주는 병희의 얼굴이 더 그렇게 만들었다.
저렇게 이성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으로 내 몸을 추락시켰을까.
그리고 이젠 그의 구애를 기다리고 있는 나.
"잘 지냈어?"
병희는 여전히 평온한 웃음으로 선화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차를 타기 시작했다.
선화는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린 채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간간히 다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보내는 병희.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
"영권이는 연락 없어?"
태연하게 친구의 소식을 물어보는 병희였다.
"언젠간 돌아오겠지. 죽지 않았다면 말이야. 죽었다면 벌써 소식이 있었을 테고."
그가 말을 꺼낼때마다 선화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말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이 보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어쩌면 더 흥미진진한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을 거야."
선화는 현기증을 느끼고 그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병희에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소파에 좌초한 선화를 또 다시 농락하기 시작했다.
선화는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힘과 본능, 이미 더럽혀진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병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몸 주인이 된 병희에게 맡기고 가만히 있는 편이 더 좋았다.
그러면 그가 알아서 그녀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욕망의 찌꺼기 같은 응어리들을 끄집어내 치워주기 때문이다.
어느새 반쯤 알몸이 된 두 사람은 진료실에서의 섹스에 열중하고 있었다.
"밖에, 간호사는."
선화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갔지. 돼지 같은 년이라서 한 시간 내내 먹을 거야."
병희는 방금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서 거친 욕찌거리를 섞어가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선화에게도 마찬가지여서 하고 있는 동안 그런 욕설을 듣는 것은 성적 자극이 되었다.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돼지같다는 간호사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자신이 돼지 같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에겐 뭐라고 말할까.
개 같은 인간들이라고 할까. 병희는 서둘렀고 잠시 후 우려한 대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병희가 소리를 질렀다.
"기다려!"
너무 큰 소리였기 때문에 선화가 놀랐을 정도였고 그녀의 비명에 가까운 격정의 소리도 묻혔으며 곧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일을 마치자 제대로 정리할 틈도 없이 옷을 입은 선화는 잘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진료실을 빠져 나왔다.
서두르는 모습 때문에 더 그랬는지 간호사는 의혹에 찬 눈으로 선화를 바라보았다.
우선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선화는 밑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밖을 바라보는 척하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에 도착하자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문득 코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냄새. 병희의 정액 냄새가 났다.
집에 들어간 선화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물기를 말리고 손 냄새를 맡아 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 비누로 손을 닦고 냄새를 맡았다.
지워진 것 같기도 하고 냄새가 약간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옷을 입고 거실에 앉은 선화는 오늘 한끼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배가 고프지 않은 건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배고픔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자신이 강물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헤엄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강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몸을 담근 채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강물에 빠진 선화는 녹슬어가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온 날, 아무 생각 없이 수화기를 들었던 선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그렇게 놀랬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한 달 가까이 연락이 없었던 그가 아닌가.
게다가 그 동안 선화는 많은 일을 겪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거기 어디야?"
선화는 물었고 영권은 반쯤 가라앉은 목소리로 간략하게 병원의 위치만을 설명해 주었다.
전화를 끊은 선화는 어떻게 해야할지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내린 결정은 병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연락을 받은 병희는 흔쾌히 함께 가겠다고 말했고 집으로 태우러 오겠다고 말했다.
"같이 가도 괜찮을까?"
차에 오르고 선화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내가 잘 알아서 할게."
병희는 언제나 침착하게 말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를 당황하게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중간에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다녀온 두 사람. 병희는 차에서 선화의 다리를 만졌었다.
따뜻한 체온이 안쪽으로 파고들자 선화는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 어서 가자고 말했다.
병희는 별 말없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우릴 의심하진 않을까?"
선화는 그런 말을 꺼낼까도 망설여졌지만 불안함이 커지자 더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 혼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괜찮다니까. 영권이는 내가 잘 알아. 나만 믿어."
병희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거래?"
"자세한 얘기는 나도 못 들었어. 병원 위치만 말하고 그냥 오라고 했어."
그녀는 언제 잠들었는지 그가 언제 떠나갔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지난 밤의 아찔한 기억이 떠올라 새삼스럽게도 겁이 났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었을까. 하지만 어찌 한단 말인가. 이미 활을 떠난 화살과 같은데.
선화는 자신이 더 이상 순수한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귀밑으로 떨어졌다.
선화는 가게에만 신경쓰고 며칠 동안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다.
조금은 연락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병희와의 만남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희의 얼굴을 보고 싶어진 날, 선화는 미리 전화도 하지 않고 병원으로 찾아갔다.
전에 보았던 간호사는 점심이라도 먹으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화는 직접 진료실 문을 노크했고 들어오라는 병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담담했다. 반갑게 맞아주는 병희의 얼굴이 더 그렇게 만들었다.
저렇게 이성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으로 내 몸을 추락시켰을까.
그리고 이젠 그의 구애를 기다리고 있는 나.
"잘 지냈어?"
병희는 여전히 평온한 웃음으로 선화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차를 타기 시작했다.
선화는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린 채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간간히 다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보내는 병희.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
"영권이는 연락 없어?"
태연하게 친구의 소식을 물어보는 병희였다.
"언젠간 돌아오겠지. 죽지 않았다면 말이야. 죽었다면 벌써 소식이 있었을 테고."
그가 말을 꺼낼때마다 선화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말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이 보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어쩌면 더 흥미진진한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을 거야."
선화는 현기증을 느끼고 그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병희에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소파에 좌초한 선화를 또 다시 농락하기 시작했다.
선화는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힘과 본능, 이미 더럽혀진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병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몸 주인이 된 병희에게 맡기고 가만히 있는 편이 더 좋았다.
그러면 그가 알아서 그녀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욕망의 찌꺼기 같은 응어리들을 끄집어내 치워주기 때문이다.
어느새 반쯤 알몸이 된 두 사람은 진료실에서의 섹스에 열중하고 있었다.
"밖에, 간호사는."
선화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갔지. 돼지 같은 년이라서 한 시간 내내 먹을 거야."
병희는 방금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서 거친 욕찌거리를 섞어가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선화에게도 마찬가지여서 하고 있는 동안 그런 욕설을 듣는 것은 성적 자극이 되었다.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돼지같다는 간호사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자신이 돼지 같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에겐 뭐라고 말할까.
개 같은 인간들이라고 할까. 병희는 서둘렀고 잠시 후 우려한 대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병희가 소리를 질렀다.
"기다려!"
너무 큰 소리였기 때문에 선화가 놀랐을 정도였고 그녀의 비명에 가까운 격정의 소리도 묻혔으며 곧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일을 마치자 제대로 정리할 틈도 없이 옷을 입은 선화는 잘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진료실을 빠져 나왔다.
서두르는 모습 때문에 더 그랬는지 간호사는 의혹에 찬 눈으로 선화를 바라보았다.
우선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선화는 밑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밖을 바라보는 척하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에 도착하자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문득 코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냄새. 병희의 정액 냄새가 났다.
집에 들어간 선화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물기를 말리고 손 냄새를 맡아 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 비누로 손을 닦고 냄새를 맡았다.
지워진 것 같기도 하고 냄새가 약간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옷을 입고 거실에 앉은 선화는 오늘 한끼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배가 고프지 않은 건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배고픔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자신이 강물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헤엄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강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몸을 담근 채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강물에 빠진 선화는 녹슬어가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온 날, 아무 생각 없이 수화기를 들었던 선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그렇게 놀랬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한 달 가까이 연락이 없었던 그가 아닌가.
게다가 그 동안 선화는 많은 일을 겪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거기 어디야?"
선화는 물었고 영권은 반쯤 가라앉은 목소리로 간략하게 병원의 위치만을 설명해 주었다.
전화를 끊은 선화는 어떻게 해야할지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내린 결정은 병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연락을 받은 병희는 흔쾌히 함께 가겠다고 말했고 집으로 태우러 오겠다고 말했다.
"같이 가도 괜찮을까?"
차에 오르고 선화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내가 잘 알아서 할게."
병희는 언제나 침착하게 말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를 당황하게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중간에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다녀온 두 사람. 병희는 차에서 선화의 다리를 만졌었다.
따뜻한 체온이 안쪽으로 파고들자 선화는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 어서 가자고 말했다.
병희는 별 말없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우릴 의심하진 않을까?"
선화는 그런 말을 꺼낼까도 망설여졌지만 불안함이 커지자 더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 혼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괜찮다니까. 영권이는 내가 잘 알아. 나만 믿어."
병희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거래?"
"자세한 얘기는 나도 못 들었어. 병원 위치만 말하고 그냥 오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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