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을 만나는 시간은 주로 수업시간과 조회, 그리고 종례시간이었다.
세영은 우선 조회, 종례 시간에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민영이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수업시간 역시 반 학생들의 중간 수준에 맞추어 진행되었기 때문에 원어민과도 어느 정도 무리 없이 통하는 민영에게는 하품이 날 정도였다.
평소 졸거나, 멍하니 창밖을 보는 민영이었다.
‘걱정할 것도 없잖아.’
세영은 갑자기 자신이 한심해 지기 시작했다.
‘음, 너무 외로왔구나, 안세영...남자가 필요한거야..넌..’
세영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네며 전화를 들었다.
“오늘은 시간이 안되는데...”
“그럼, 할 수 없지..뭐.”
준철이 먼저 세영을 거절했다.
준철이라면...자신의 가슴을 떨리게 해 줄수는는 없어도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가슴을 떨리게라...
가슴 좀 떨리면 어때, 뭐가 대수야....그게...
세영은 그 순간이 다시 생각났다.
‘두근...두근...’
‘음, 합이 네근이라... 요즘 소고기 네근이면 얼마더라....’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세영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다시 열었다.
중얼중얼 무엇인가를 계속 이야기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탄 세영은 18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18층에 엘리베이터가 서자 세영이 계속 중얼거리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민영은 이 말도 안되는 황당한 상황에 얼어붙어 버렸다.
닫치려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한 여자를 본 순간부터 민영은 얼어 붙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는 전혀 느끼지 못한듯 무엇인가 중얼거리면서 있다가 문이 열리자 좀비처럼 걸어 나가버리는 세영을 보면서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십삼층에서 내린 민영은 천천히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선생님, 왜 자꾸 날 괴롭히나요...’
세영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었다.
자꾸만 민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게 틀림 없어, 열여섯살 차이야. 정신차려! 유세영...’
세영이 머리까지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뽀글뽀글 물방울이 올라왔다.
어느순간 물밖으로 머리를 내민 세영이 물을 먹은듯 ‘푸푸’거렸다.
민영은 벽에 걸린 세영의 사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뭐야. 왜 날 이렇게 혼란스럽게 해.’
민영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의 움직임에 혼란스러웠다.
세영에게 느껴지는 감정의 흐름, 그것은 민영이 살아오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한 그런 것이었다.
침착하기로는 어렸을적부터 노인네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을만큼 그 수준이 상당했던 민영은 근래에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여러 가지 일과 그에 반응하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가 활동을 하면서 수없이 아름다운 여자들도 만나보았고 매력적인 여자들도 보았지만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만큼 아름답게 느껴진 여성들이 없었던 것이었다.
남들은 사춘기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과 여자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을 때에도 민영은 콧웃음을 치며 그 시절을 보냈었다.
하지만 이 세영이란 여자는 틀렸다.
순간순간 자신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과 말, 그리고 느낌을 주었다.
아직도 민영은 자신 안에 느껴지는 세영에 대한 감정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리고 이해할수도 없었다.
아니 안다 해도 인정할 수 없었다.
베란다로 나가 난간에 기대였다.
어느순간 고개를 젖혀 하늘을 쳐다 보았다.
컴컴한 하늘에 빛나는 작은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하나의 별이 길게 꼬리를 끌며 하늘에 호선을 그렸다.
목욕을 마친 세영은 천천히 베란다로 걸어 나갔다.
난간에 턱을 기대고 밖을 바라보았다.
세영의 얼굴에서 장난끼 어린 표정은 사라졌다.
하염없이 그렇게 검은 도시를 바라보던 희정의 눈에 도시 뒤쪽으로 떨어지는 한 유성을 보았다.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던 유성은 도시 바로 위쪽의 하늘에서 반짝하면서 사라졌다.
세영은 문득 가슴이 아파왔다.
민영이 보고 싶어졌다.
참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져 갔다.
저 검은 하늘보다도 더욱 보고 싶었다.
도저히 내일까지 기다릴수가 없을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눈을 뜬 세영이 거실로 들어왔다.
가방을 꺼내 작은 수첩하나를 꺼내 들었다.
핸드폰을 들고 잠시 망설이던 세영이 번호를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민영은 눈에서 사라진 유성을 쫓는듯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개가 아파왔다.
뒷덜미를 만지면서 거실로 들어왔다.
“때르르릉”
전화벨이 울리고 민영이 받았다.
“뚜뚜뚜뚜.”
통화중임을 알리는 신호음이 세영의 전화기 속에서 귓속으로 울려 퍼졌다.
세영은 통화중의 전화라도 그렇게 계속 잡고 있으면 민영이 전화를 받을 것 같았다.
“응, 어머니, 전 괜찮아요, 별일 없구요.”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따뜻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민영은 마음이 포근해졌다.
“네, 자주 전화할께요. 아버지한테도 안부전해 주세요.”
전화를 끊은 민영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화기를 들고 작업실로 갔다.
학교에 들고 다니던 쌕을 뒤져 한권의 다이어리를 꺼냈다.
‘담임샘 안세영 010-3483-****’
민영은 어머니와 통화하던 중에 또 한번 놀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머니와 통화중에도 세영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답답했다.
해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잠을 이룰수가 없을것 같았다.
‘뚜뚜뚜뚜’
통화중이었다.
민영은 답답했다. 정말 답답했다.
다시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여전했다.
머릿속이 헝클어져 미칠것만 같았다.
가슴이 아파왔다.
민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띵동띵동.”
세영이 멍한 모습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여전히 뚜뚜거리는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띵동띵동띵동..”
벨소리가 미친것처럼 울렸다.
세영이 정신을 차리고 현관으로 서둘러 갔다.
“누구세요?”
세영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민영은 계단으로 올라가 한층 위의 난간에서 세영이 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목욕을 한 후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검은 머리의 세영을 위에서 바라보는 민영은 가슴이 아려왔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세영의 집으로 오기는 했지만 벨을 누르는 순간 자신은 단지 세영의 제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세영이 뭐라고 반응할까...
열두시가 넘어 한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 자신이 세영의 집을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순식간에 돌아온 이성이 민영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하였고 세영이 문을 열기 바로전 다행히 윗층 계단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터벅터벅 계단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민영의 발걸음이 허탈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단지 난 선생님의 제자일 뿐일텐데....’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의자에 몸을 묻었다.
“야, 얘들아 4열로 줄 한번 서봐라, 인원파악 좀 하게.”
2학년 2학기의 마지막 행사가 될 체험학습이 이루어지는 대관령 목장은 안개로 자욱하게 덮혀 있었다.
“이거 뭐야. 하나도 안 보이잖아. 참내, 뭘 보라고 여길 온거야..”
철민이가 투덜거리면서 눈에 보이는 작은 돌을 발로 톡톡 찼다.
세영은 아이들의 불평을 눈에 힘을 주어 방어한 후 관계자와 긴급 회의를 갖었다.
“오늘은 안개로 인해 목장의 정경을 볼 수가 없데. 그래서 오후에 할 먹이주기와 실내 우리 견학을 먼저 할거야. 알았지?”
세영의 말에 여전히 투덜거리던 아이들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가이드의 뒤를 따라 안개속으로 들어갔다.
세영은 뒤쪽에 남아 혹시 이탈자라도 없는지 살피고는 곧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서둘러 따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세영은 앞에 선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길을 따라 가다보면 아이들이 보일 것 같아 세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이 다녀 다져진 작은 길 옆에는 푸른 풀들이 자라있었다.
세영은 길이 있으니 당연히 이 길을 따라 갔으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걸었다.
그러나 한참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설상가상 길의 폭이 점점 좁아지더니 이젠 세영의 발 아래 풀들이 밟히기 시작했다.
세영은 조금만 더 가면 아이들이 보일것 같은 생각에 좀 더 가보기로 결정했다.
어느덧 풀의 높이가 무릎을 넘어서고 가뜩이나 안개로 쌓인 산속에서 방향을 잃은 세영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통화권이탈이었다.
세영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깊이 숲으로 들어온 듯 사방이 나무로 쌓여 있었다.
겁에 질린 세영이 걸음을 좀 더 빨리 하여 걸어갔다.
하지만 방향을 이미 잃어버린 세영은 자신이 가는 길이 정확한 길인지 알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세영이 갑자기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진 세영은 발목이 심하게 삔듯했다.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두려움과 아픔에, 그리고 왠지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영은 간간히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았다.
햇빛이 사선을 이루면서 비추고 있었다.
한두시간이 흐른것이 아니라면 벌써 저녁때가 되는 것 같았다.
세영은 다리의 아픔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었지만 억지로 나무를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나무가지 하나를 손에 쥐었다.
절둑 거리면서 다시 온 길이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주저 앉았다.
눈물이 다시 나왔다.
“선생님 어디 가셨니?”
안내하던 남자가 양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까 출발할 때 뒤쪽에 있었는데요.”
가이드가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민영은 무엇인가 잘못 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거나 통화되지 않는 지역에........”
무전기로 통신을 하던 가이드가 무전기를 내리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선생님 전화 아는 사람 있니?”
아이들이 전화를 꺼내 들 때 민영은 이미 뛰기 시작했다.
“선생님! 선생님!”
하지만 민영이 출발한 곳에 다시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민영의 마음은 급해지기 시작했다.
“에이...뭐야...이게....도대체..”
민영은 문득 오는 길에 작게 이어진 갈래길이 생각났다.
다시 뛰었다.
아이들이 갔던 길 중간쯤에 갈라지는 부분....
민영은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 길로 뛰었다.
한 십여분정도를 뛰니 길이 없어졌다.
길이 끝나는 부분에서 민영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선생님, 선생님!”
돌아오는 민영의 메아리진 목소리만이 산을 울렸다.
민영은 누엇누엇 산등성이에 걸친 해를 쳐다보았다.
다시 돌아가 렌턴이라도 들고 와야 하는가...
하지만 그 생각은 길지 않았다.
그냥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리에 걸리는 풀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민영은 점점 정신이 나가는 듯 했다.
미친듯이 소리 질렀다.
“선생님, 선생님!!!!”
나무가 우거진 숲이 나왔지만 민영은 이번에는 멈춤 없이 그냥 그 사이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나무를 밀어내면서 지나가야 할 만큼 우거진 숲이었다.
민영은 혹시 자신이 잘못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쪽으로 갔으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민영의 팔에 나무가지가 스치면서 붉게 상처를 만들었다.
얼굴에도 가시들의 자국이 점점 갯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민영은 전혀 상관치 않고 묵묵히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세영의 귓가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세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서둘러 나무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여기 있어요, 도와주세요.”
민영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어디선가 들리는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
민영은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방향을 잡고는 뛰기 시작했다.
산비탈을 거의 구르듯이 내려갔다.
“나 여기........”
세영은 불쑥 나무 사이에서 구르듯이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너무 반가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세영의 앞에 나타난 민영이 세영을 보았다.
위아래를 천천히 살펴 보았다.
발목 부분이 심하게 부어 있음을 발견했다.
마음이 찟어지는 듯이 아파왔다.
“도대체 뭐예요?”
민영이 뚜벅뚜벅 걸어와 세영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살짝 부운 발목을 잡았다.
“아...아..”
세영의 신음소리에 민영이 손을 놓았다.
“민영아....”
세영은 떨어지듯 나타난 사람이 민영이란 것을 깨닫고는 반가움에 소리를 치려 했지만 민영의 모습을 보고는 더욱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훨씬 더....처참한 모습이었다.
반 소매로 드러난 팔에서는 여기저기 찢겨 피가 새어 나오는 곳이 있었다.
잘생긴 하얀 얼굴에도 여기저기 나무가지가 스쳐지나간 자국으로 인해 생긴 빨간 생채기들이 여러군데 있었고 손도 역시 넘어지기라도 한 듯 흙과 먼지들로 잔뜩 묻어 있었다.
“민영아...”
세영은 자신보다 민영이 더욱 걱정이 되었다.
“에이..참....이게 뭐예요. 칠칠치 못하게...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하지만 민영의 싸늘한 목소리에 순간 세영은 눈에 불이 확 일었다.
“뭐야? 칠칠치 못하다고? 너 죽을래?”
발목을 만지고 있는 민영의 머리에 꼴밤을 한대 먹이는 세영이었다.
세영은 민영의 등이 참 넓다는 생각을 했다.
다친 발목으로 인해 민영의 업히라는 말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민영의 부축에도 불구하고 겨우 산속을 벗어나자마자 주저앉아 다시 일어나기 힘들정도로 아픈 발목에 할 수 없이 민영의 등에 업혔었다.
민영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풀들이 발목을 휘감아도 내색하지 않고 세영의 허벅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세영은 민영에게 고개를 묻었다.
민영의 목덜미에서 화한 스킨 냄새가 났다.
남자의 냄새였다.
민영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어 꼭 끌어 안았다.
자신의 몸이 늘어짐에 더욱 힘이 들 수 있는 민영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민영은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손에 느껴지는 팽팽한 허벅지, 그리고 자꾸 등을 자극하는 탱탱한 가슴의 부드러움이 민영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민영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러니?”
세영은 갑작스런 민영의 행동에 눈이 똥그래졌다.
“몰라도 되요!!”
민영은 신경질적으로 세영의 말에 대답했다.
“이 녀석이 조금 업어준다고 유세야...”
‘힘들어서 그러나, 에휴...내 팔자야...좋긴 한데 너무 미안하네..’
세영은 속으로 미안함을 감추고자 오히려 민영에게 호통을 쳤다.
“그럴거면 내려놔, 혼자서도 갈 수 있어!”
“아니라고요! 그냥 가만히 계세요!”
민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세영의 까탈스러움에 다행히 민영의 말초신경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손에 걸리는 세영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비록 민영이 186의 거구고 세영은 오십키로도 나가지 않았지만 발목에 걸리는 풀숲을 깔려가는 어둠에 앞도 잘 안보이는 산길을 가기는 쉽지 않았다.
세영이 입을 다물고 민영의 목을 끌어 안았다.
민영의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걸음을 멈춘 민영이 세영의 몸을 한 번 추켜 올렸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시작했다.
세영은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번쩍 올려지면서 다시 안정되게 민영의 몸에 업혀지자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민영이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남자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짐에 기분이 야릇해졌다.
더군다나 민영의 손은 자신의 허벅지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저 멀리서 아이들이 민영과 세영을 발견하자 우루루 몰려왔다.
“선생님, 어떻게 된 일이예요?”
세영은 괜히 눈물이 났다.
한명도 빠지지 않고 전부 세영과 민영의 주변으로 몰려 들어 잔뜩 걱정된 표정으로 세영을 바라보면서 안부를 묻는 아이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내려줘.”
아직까지 민영은 세영을 내려 놓지 않았었기에 세영이 말을 했다.
갑작스런 아이들의 몰려듬에 놀라 그대로 세영을 등에 업고 있었던 민영이 깜짝 놀라 허벅지를 잡은 손을 놓아 버렸다.
“아아....악..”
세영은 팔에 힘이 빠져 있던 것과 아이들의 모습에 민영의 목을 감은 팔을 풀고 있었기에 허벅지를 잡은 민영의 손이 치워지자 그대로 민영의 등을 타고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너 죽을래?”
아이들의 질시어린 시선과 땅으로 내팽겨쳐진 세영의 모습에 분노한 아이들의 표정이 일제히 민영을 향했고 민영은 뜻밖에 벌어진 일에 천천히 손을 내져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아니...그게 아니고....”
“배신자, 너가 감히 선생님을 업어보다니..아무리 아줌마같은 처녀 선생님이라고 해도...말이야..”
세영의 얼굴에 팔자가 그려졌다.
“뭐라고?? 이 녀석들이....”
검정 뿔테 안경 안쪽의 눈가가 아주 크게 찌푸려졌다.
세영은 우선 조회, 종례 시간에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민영이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수업시간 역시 반 학생들의 중간 수준에 맞추어 진행되었기 때문에 원어민과도 어느 정도 무리 없이 통하는 민영에게는 하품이 날 정도였다.
평소 졸거나, 멍하니 창밖을 보는 민영이었다.
‘걱정할 것도 없잖아.’
세영은 갑자기 자신이 한심해 지기 시작했다.
‘음, 너무 외로왔구나, 안세영...남자가 필요한거야..넌..’
세영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네며 전화를 들었다.
“오늘은 시간이 안되는데...”
“그럼, 할 수 없지..뭐.”
준철이 먼저 세영을 거절했다.
준철이라면...자신의 가슴을 떨리게 해 줄수는는 없어도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가슴을 떨리게라...
가슴 좀 떨리면 어때, 뭐가 대수야....그게...
세영은 그 순간이 다시 생각났다.
‘두근...두근...’
‘음, 합이 네근이라... 요즘 소고기 네근이면 얼마더라....’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세영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다시 열었다.
중얼중얼 무엇인가를 계속 이야기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탄 세영은 18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18층에 엘리베이터가 서자 세영이 계속 중얼거리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민영은 이 말도 안되는 황당한 상황에 얼어붙어 버렸다.
닫치려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한 여자를 본 순간부터 민영은 얼어 붙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는 전혀 느끼지 못한듯 무엇인가 중얼거리면서 있다가 문이 열리자 좀비처럼 걸어 나가버리는 세영을 보면서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십삼층에서 내린 민영은 천천히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선생님, 왜 자꾸 날 괴롭히나요...’
세영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었다.
자꾸만 민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게 틀림 없어, 열여섯살 차이야. 정신차려! 유세영...’
세영이 머리까지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뽀글뽀글 물방울이 올라왔다.
어느순간 물밖으로 머리를 내민 세영이 물을 먹은듯 ‘푸푸’거렸다.
민영은 벽에 걸린 세영의 사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뭐야. 왜 날 이렇게 혼란스럽게 해.’
민영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의 움직임에 혼란스러웠다.
세영에게 느껴지는 감정의 흐름, 그것은 민영이 살아오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한 그런 것이었다.
침착하기로는 어렸을적부터 노인네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을만큼 그 수준이 상당했던 민영은 근래에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여러 가지 일과 그에 반응하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가 활동을 하면서 수없이 아름다운 여자들도 만나보았고 매력적인 여자들도 보았지만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만큼 아름답게 느껴진 여성들이 없었던 것이었다.
남들은 사춘기를 통해 정체성의 혼란과 여자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을 때에도 민영은 콧웃음을 치며 그 시절을 보냈었다.
하지만 이 세영이란 여자는 틀렸다.
순간순간 자신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과 말, 그리고 느낌을 주었다.
아직도 민영은 자신 안에 느껴지는 세영에 대한 감정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리고 이해할수도 없었다.
아니 안다 해도 인정할 수 없었다.
베란다로 나가 난간에 기대였다.
어느순간 고개를 젖혀 하늘을 쳐다 보았다.
컴컴한 하늘에 빛나는 작은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하나의 별이 길게 꼬리를 끌며 하늘에 호선을 그렸다.
목욕을 마친 세영은 천천히 베란다로 걸어 나갔다.
난간에 턱을 기대고 밖을 바라보았다.
세영의 얼굴에서 장난끼 어린 표정은 사라졌다.
하염없이 그렇게 검은 도시를 바라보던 희정의 눈에 도시 뒤쪽으로 떨어지는 한 유성을 보았다.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던 유성은 도시 바로 위쪽의 하늘에서 반짝하면서 사라졌다.
세영은 문득 가슴이 아파왔다.
민영이 보고 싶어졌다.
참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져 갔다.
저 검은 하늘보다도 더욱 보고 싶었다.
도저히 내일까지 기다릴수가 없을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눈을 뜬 세영이 거실로 들어왔다.
가방을 꺼내 작은 수첩하나를 꺼내 들었다.
핸드폰을 들고 잠시 망설이던 세영이 번호를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민영은 눈에서 사라진 유성을 쫓는듯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개가 아파왔다.
뒷덜미를 만지면서 거실로 들어왔다.
“때르르릉”
전화벨이 울리고 민영이 받았다.
“뚜뚜뚜뚜.”
통화중임을 알리는 신호음이 세영의 전화기 속에서 귓속으로 울려 퍼졌다.
세영은 통화중의 전화라도 그렇게 계속 잡고 있으면 민영이 전화를 받을 것 같았다.
“응, 어머니, 전 괜찮아요, 별일 없구요.”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따뜻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민영은 마음이 포근해졌다.
“네, 자주 전화할께요. 아버지한테도 안부전해 주세요.”
전화를 끊은 민영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화기를 들고 작업실로 갔다.
학교에 들고 다니던 쌕을 뒤져 한권의 다이어리를 꺼냈다.
‘담임샘 안세영 010-3483-****’
민영은 어머니와 통화하던 중에 또 한번 놀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머니와 통화중에도 세영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답답했다.
해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잠을 이룰수가 없을것 같았다.
‘뚜뚜뚜뚜’
통화중이었다.
민영은 답답했다. 정말 답답했다.
다시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여전했다.
머릿속이 헝클어져 미칠것만 같았다.
가슴이 아파왔다.
민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띵동띵동.”
세영이 멍한 모습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여전히 뚜뚜거리는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띵동띵동띵동..”
벨소리가 미친것처럼 울렸다.
세영이 정신을 차리고 현관으로 서둘러 갔다.
“누구세요?”
세영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민영은 계단으로 올라가 한층 위의 난간에서 세영이 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목욕을 한 후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검은 머리의 세영을 위에서 바라보는 민영은 가슴이 아려왔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세영의 집으로 오기는 했지만 벨을 누르는 순간 자신은 단지 세영의 제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세영이 뭐라고 반응할까...
열두시가 넘어 한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에 자신이 세영의 집을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순식간에 돌아온 이성이 민영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하였고 세영이 문을 열기 바로전 다행히 윗층 계단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터벅터벅 계단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민영의 발걸음이 허탈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단지 난 선생님의 제자일 뿐일텐데....’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의자에 몸을 묻었다.
“야, 얘들아 4열로 줄 한번 서봐라, 인원파악 좀 하게.”
2학년 2학기의 마지막 행사가 될 체험학습이 이루어지는 대관령 목장은 안개로 자욱하게 덮혀 있었다.
“이거 뭐야. 하나도 안 보이잖아. 참내, 뭘 보라고 여길 온거야..”
철민이가 투덜거리면서 눈에 보이는 작은 돌을 발로 톡톡 찼다.
세영은 아이들의 불평을 눈에 힘을 주어 방어한 후 관계자와 긴급 회의를 갖었다.
“오늘은 안개로 인해 목장의 정경을 볼 수가 없데. 그래서 오후에 할 먹이주기와 실내 우리 견학을 먼저 할거야. 알았지?”
세영의 말에 여전히 투덜거리던 아이들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가이드의 뒤를 따라 안개속으로 들어갔다.
세영은 뒤쪽에 남아 혹시 이탈자라도 없는지 살피고는 곧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서둘러 따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세영은 앞에 선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길을 따라 가다보면 아이들이 보일 것 같아 세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이 다녀 다져진 작은 길 옆에는 푸른 풀들이 자라있었다.
세영은 길이 있으니 당연히 이 길을 따라 갔으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걸었다.
그러나 한참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설상가상 길의 폭이 점점 좁아지더니 이젠 세영의 발 아래 풀들이 밟히기 시작했다.
세영은 조금만 더 가면 아이들이 보일것 같은 생각에 좀 더 가보기로 결정했다.
어느덧 풀의 높이가 무릎을 넘어서고 가뜩이나 안개로 쌓인 산속에서 방향을 잃은 세영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통화권이탈이었다.
세영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깊이 숲으로 들어온 듯 사방이 나무로 쌓여 있었다.
겁에 질린 세영이 걸음을 좀 더 빨리 하여 걸어갔다.
하지만 방향을 이미 잃어버린 세영은 자신이 가는 길이 정확한 길인지 알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세영이 갑자기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진 세영은 발목이 심하게 삔듯했다.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두려움과 아픔에, 그리고 왠지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영은 간간히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았다.
햇빛이 사선을 이루면서 비추고 있었다.
한두시간이 흐른것이 아니라면 벌써 저녁때가 되는 것 같았다.
세영은 다리의 아픔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었지만 억지로 나무를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나무가지 하나를 손에 쥐었다.
절둑 거리면서 다시 온 길이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주저 앉았다.
눈물이 다시 나왔다.
“선생님 어디 가셨니?”
안내하던 남자가 양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까 출발할 때 뒤쪽에 있었는데요.”
가이드가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민영은 무엇인가 잘못 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거나 통화되지 않는 지역에........”
무전기로 통신을 하던 가이드가 무전기를 내리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선생님 전화 아는 사람 있니?”
아이들이 전화를 꺼내 들 때 민영은 이미 뛰기 시작했다.
“선생님! 선생님!”
하지만 민영이 출발한 곳에 다시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민영의 마음은 급해지기 시작했다.
“에이...뭐야...이게....도대체..”
민영은 문득 오는 길에 작게 이어진 갈래길이 생각났다.
다시 뛰었다.
아이들이 갔던 길 중간쯤에 갈라지는 부분....
민영은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 길로 뛰었다.
한 십여분정도를 뛰니 길이 없어졌다.
길이 끝나는 부분에서 민영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선생님, 선생님!”
돌아오는 민영의 메아리진 목소리만이 산을 울렸다.
민영은 누엇누엇 산등성이에 걸친 해를 쳐다보았다.
다시 돌아가 렌턴이라도 들고 와야 하는가...
하지만 그 생각은 길지 않았다.
그냥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리에 걸리는 풀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민영은 점점 정신이 나가는 듯 했다.
미친듯이 소리 질렀다.
“선생님, 선생님!!!!”
나무가 우거진 숲이 나왔지만 민영은 이번에는 멈춤 없이 그냥 그 사이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나무를 밀어내면서 지나가야 할 만큼 우거진 숲이었다.
민영은 혹시 자신이 잘못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쪽으로 갔으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민영의 팔에 나무가지가 스치면서 붉게 상처를 만들었다.
얼굴에도 가시들의 자국이 점점 갯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민영은 전혀 상관치 않고 묵묵히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세영의 귓가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세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서둘러 나무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여기 있어요, 도와주세요.”
민영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어디선가 들리는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
민영은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방향을 잡고는 뛰기 시작했다.
산비탈을 거의 구르듯이 내려갔다.
“나 여기........”
세영은 불쑥 나무 사이에서 구르듯이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너무 반가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세영의 앞에 나타난 민영이 세영을 보았다.
위아래를 천천히 살펴 보았다.
발목 부분이 심하게 부어 있음을 발견했다.
마음이 찟어지는 듯이 아파왔다.
“도대체 뭐예요?”
민영이 뚜벅뚜벅 걸어와 세영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살짝 부운 발목을 잡았다.
“아...아..”
세영의 신음소리에 민영이 손을 놓았다.
“민영아....”
세영은 떨어지듯 나타난 사람이 민영이란 것을 깨닫고는 반가움에 소리를 치려 했지만 민영의 모습을 보고는 더욱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훨씬 더....처참한 모습이었다.
반 소매로 드러난 팔에서는 여기저기 찢겨 피가 새어 나오는 곳이 있었다.
잘생긴 하얀 얼굴에도 여기저기 나무가지가 스쳐지나간 자국으로 인해 생긴 빨간 생채기들이 여러군데 있었고 손도 역시 넘어지기라도 한 듯 흙과 먼지들로 잔뜩 묻어 있었다.
“민영아...”
세영은 자신보다 민영이 더욱 걱정이 되었다.
“에이..참....이게 뭐예요. 칠칠치 못하게...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하지만 민영의 싸늘한 목소리에 순간 세영은 눈에 불이 확 일었다.
“뭐야? 칠칠치 못하다고? 너 죽을래?”
발목을 만지고 있는 민영의 머리에 꼴밤을 한대 먹이는 세영이었다.
세영은 민영의 등이 참 넓다는 생각을 했다.
다친 발목으로 인해 민영의 업히라는 말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민영의 부축에도 불구하고 겨우 산속을 벗어나자마자 주저앉아 다시 일어나기 힘들정도로 아픈 발목에 할 수 없이 민영의 등에 업혔었다.
민영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풀들이 발목을 휘감아도 내색하지 않고 세영의 허벅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세영은 민영에게 고개를 묻었다.
민영의 목덜미에서 화한 스킨 냄새가 났다.
남자의 냄새였다.
민영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어 꼭 끌어 안았다.
자신의 몸이 늘어짐에 더욱 힘이 들 수 있는 민영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민영은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손에 느껴지는 팽팽한 허벅지, 그리고 자꾸 등을 자극하는 탱탱한 가슴의 부드러움이 민영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민영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러니?”
세영은 갑작스런 민영의 행동에 눈이 똥그래졌다.
“몰라도 되요!!”
민영은 신경질적으로 세영의 말에 대답했다.
“이 녀석이 조금 업어준다고 유세야...”
‘힘들어서 그러나, 에휴...내 팔자야...좋긴 한데 너무 미안하네..’
세영은 속으로 미안함을 감추고자 오히려 민영에게 호통을 쳤다.
“그럴거면 내려놔, 혼자서도 갈 수 있어!”
“아니라고요! 그냥 가만히 계세요!”
민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세영의 까탈스러움에 다행히 민영의 말초신경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손에 걸리는 세영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비록 민영이 186의 거구고 세영은 오십키로도 나가지 않았지만 발목에 걸리는 풀숲을 깔려가는 어둠에 앞도 잘 안보이는 산길을 가기는 쉽지 않았다.
세영이 입을 다물고 민영의 목을 끌어 안았다.
민영의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걸음을 멈춘 민영이 세영의 몸을 한 번 추켜 올렸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시작했다.
세영은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번쩍 올려지면서 다시 안정되게 민영의 몸에 업혀지자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민영이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남자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짐에 기분이 야릇해졌다.
더군다나 민영의 손은 자신의 허벅지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저 멀리서 아이들이 민영과 세영을 발견하자 우루루 몰려왔다.
“선생님, 어떻게 된 일이예요?”
세영은 괜히 눈물이 났다.
한명도 빠지지 않고 전부 세영과 민영의 주변으로 몰려 들어 잔뜩 걱정된 표정으로 세영을 바라보면서 안부를 묻는 아이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내려줘.”
아직까지 민영은 세영을 내려 놓지 않았었기에 세영이 말을 했다.
갑작스런 아이들의 몰려듬에 놀라 그대로 세영을 등에 업고 있었던 민영이 깜짝 놀라 허벅지를 잡은 손을 놓아 버렸다.
“아아....악..”
세영은 팔에 힘이 빠져 있던 것과 아이들의 모습에 민영의 목을 감은 팔을 풀고 있었기에 허벅지를 잡은 민영의 손이 치워지자 그대로 민영의 등을 타고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너 죽을래?”
아이들의 질시어린 시선과 땅으로 내팽겨쳐진 세영의 모습에 분노한 아이들의 표정이 일제히 민영을 향했고 민영은 뜻밖에 벌어진 일에 천천히 손을 내져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아니...그게 아니고....”
“배신자, 너가 감히 선생님을 업어보다니..아무리 아줌마같은 처녀 선생님이라고 해도...말이야..”
세영의 얼굴에 팔자가 그려졌다.
“뭐라고?? 이 녀석들이....”
검정 뿔테 안경 안쪽의 눈가가 아주 크게 찌푸려졌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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