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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의 시간 - 2부1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2 00:46 991회 0건
비가 후두둑 소리를 내고 있었다.
5월 치고는 꽤나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컸다.
하늘은 잿빛이었지만 어둡진 않았다.
회색빛 안개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그녀의 몸과 마음마저 채운듯 보였다.

그 날 이후, 며칠이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허기가 들면 일어나서 무언가를 먹고, 다시 잠을 잤다.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종종 찾아오는 꿈들이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셀 수 없는 남자들의 손과 그것들, 그리고 낮게 울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달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꿈속의 자신은 도리어 걸음을 늦추고
기다리는 듯 멈춰서곤 했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와 반짝이는 입술은 어쩌면
작은 흥분과 기대가 섞인 듯 해서, 꿈결에도 스스로를 부정하다 잠이 깨곤 했다.

잠이 깨면 두려웠다.
그 끔찍했던 밤의 기억은 마치 온 몸에 새겨진듯, 불쑥 뚜렷이 떠올랐다.
물론 그 기억이 자신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화면을 통해 지켜본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점과 순서가 뒤죽박죽인채로 머릿속에 구겨진 채로 들어가 있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 괴롭힌 것은 기억이 떠오를 때 마다 온 몸에 퍼져오는
그날의 감각들이었다. 머릿속에 기억의 문신을 새긴듯 기억과 감각은 하나가 되어
불쑥 쳐들어왔고 그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었던 것이란걸
마지못해 인정해야만 했었다.
몸의 감각들은 그녀가 현실에서 달아나고자 할 때마다 가시처럼 온몸에 박혀왔다.

그러다 가끔은 자신의 일상이 그렇게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며 두려워 하기도 했다.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일상이 그토록 쉽게 파괴될 수 있다는 것.
아직 욕심이 더 많을 나이의 여대생이 쉽게 받아 들일 수는 없었다.
머릿 속으로 상상하거나 거짓으로 꾸며낸 내용으로도 접해 보지 못한
상황을 겪었다는 점, 그리고 그 상황을 다시 자신의 눈으로 고스란히 확인했다는 점에서
그녀가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자기 자신은 죽어버리고
지금 이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이며,
원래의 나는 투명한 관찰자에 불과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전혀 공간을 차지하지 못한 채 허공에 떠올라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 보는.

질량이 희박해져 날아갈 것 같은 그녀를 땅으로 강하게 끌어내린 건 한통의 전화였다.
"은정이니?"
"네 아빠"
왈칵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언제나 부드러운 따뜻하고도 낮은 목소리.
"니가 한동안 연락이 없어서 어찌 지내나 궁금했다"
"응 시험 기간이라 조금 바빴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다. 설마 독립했다고 벌써 집으로 오는 길을 잊어버린 건 아니지? 아빠는 우리 딸이 보고 싶은데"
"네 아빠. 조만간 들를께요. 리포트랑 연구과제를 마무리 지으면 곧 갈 수 있을것 같아요"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말고. 끼니 거르지 마라"
"네 아빠"

전화를 끊고는 한동안 침대에 엎드려선 울었다.
눈물이 쉬지않고 흘러내렸다. 소리내어 서럽게 울진 않았지만,
마치 샘물이 솟아나오듯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한참을 울고 나니, 억울한 마음이 한켠에서 새록 솟아올랐다.
자신의 일상 그리고 몸과 마음은 지금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영문을 알 새도 없이 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변변한 저항(!)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주위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며 알아서도 안되는 일.

몸이 마치 바위에 깔린 것 같았다.
뭐라 외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 * *

"그동안 뭐했어? 전화도 안받고"
지혜였다. 옆자리 의자를 당겨 앉으며 얼굴을 살핀다..
안경 너머로 호기심이 흘러내릴 것 같다.
"아팠니? 얼굴이 좀 헬쓱해진 거 같은데?"
"응.... 아냐 리포트 땜에 좀 피곤했나봐"
"기집애... 너 혹시 남친이랑 둘이 여행갔다온거 아냐? " 하곤 혼자 웃음을 터뜨린다.
"아냐. 현이는 요즘 시험 준비하느라 바쁜 걸. 피곤하기도 했고. 해서 좀 쉬었어"
"에이 얼굴에 살 빠진거 보니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좋았던거 아냐?" 또 혼자만의 웃음.
"그런거 아냐.."
"알았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은 뭘 먹나..... 나가서 먹을까?"
"나 오늘 차 안가지고 왔는데..."
지혜가 팔을 일으켜 세우다시피 이끌었다.
"괜찮아. 차 수리 보냈다 데려왔어. 좀 불안해도 밥집 앞까지는 데려다 줄껄?"
"그럼 학교 앞에가서 냉면먹자. 멀리 가지 말고. 아직 좀 그래..."

교정을 가로질러 정문을 향해 같이 걸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라일락이나 아카시아의 향기들이 가득찼던 공간은
이제 푸른 색의 잎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주위로 신입생들이 출렁이는 머리를 흔들며 지나갔다.
다시 저렇게 즐거워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살짝 흐려졌다.
6월에 접어든 날씨는 순수와 젊음만을 위한 듯 타오르고 있었다.

==========================================================
1년전에 시작했던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씁니다.
혹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아직 계실까 해서요.
너그러이 봐주시길. 러브씬이 없어서 서운해 하는 분들께도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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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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