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소위 말하는 양공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어두운 과거이죠...
그 어둠의 산물 중 하나인 주한 미군의 2세들.
우리나라 정서상 흑인 미군과 우리나라 여성 사이의 2세가 특히 문제가 되었었습니다.
일례로 일란성 쌍둥이 여아였는데 남편이 미국으로 돌아가며 쌍둥이의 언니만을 데리고 갔습니다.
지금 그 쌍둥이의 언니는 고등학교에서 치어리더의 회장까지 하며 밝고 유쾌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반면,
한국에 남은 쌍둥이의 동생은 까만 피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으로 인한 조롱과 차별로 인해 말수도 적고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받는 그런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이는 자아 정체성의 형성에 문화사회학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심리학과 조성혜 교수>
17.
꼭 매스컴에 음식점이 소개된 것이 자랑스러운 것처럼 조 선생님의 방에 자랑스레 걸려 있는 "이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 출연 사진을 쳐다 보지 않더라도, 조 선생님의 정신병리학적 설명이 없더라도, 나도 요즈음 느끼고 있다.
한 인간이란 개체의 정체성은 주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속한 사회, 한 사회의 문화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을...
주위에서의 칭찬 혹은 비난, 사랑 혹은 폭력...
한 사람을 향한 그런 평가가 그 사람을 극적으로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18.
열한 살 여름 이었다.
수녀님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나에게 안경 아저씨가 무릎을 굽히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던 그 때,
그 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달리 몸이 자주 아파 신경질을 자주-아니 가끔 냈던 것 같은데-내던 순수한 꼬맹이였다.
그저 어리숙하고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묘사할 때 쓰는 꼬맹이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꼬맹이",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난쟁이.
그 때 나는 수녀님이 가장 끔찍히 돌봐주셨던 허약한 아이였다.
열한 살이나 먹은 아이가 키가 120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 그럴만도 했다.
누가보면 다섯 살이나 여섯 살로 생각했지 절대 열한 살로는 보지 않았다.
누구라도 내 나이가 열한 살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처음은 깜짝 놀라는 반응이 나타나고,
그 뒤로 왜 그러냐는 물음이 뒤따라온 뒤 이 후 안타까운 얼굴로 바뀌곤 했다.
나는 늘 항상 주위로부터 그런 시선을 받아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었는지 모르겠다.
자주 드나들던 원장 수녀님 방문 옆에 그어진 짧은 선과 선 옆에 적힌 날짜는 이미 4년 전 여름으로 머물러 있었다.
같이 지냈던 남자 아이들은 나와 비교되게 2개월 마다 금이 조금씩 올라가는 모양새였고
원장 수녀님이 우리의 키를 기록하기 시작한지 5년이 접어들 무렵에 나로서는
그 아이들의 금 조차 목을 힘껏 젖혀야 볼 수 있는 높이가 되었다.
친구들은 그 당시 경쟁적으로 거의 매주마다 키를 재달라고 보챘었다.
일종의 거룩한 의식인 양 친구들은 숨을 죽이며 키를 쟀고,
친구 한 명의 키가 다른 친구의 그것을 앞지르는 날 일때면 원장 수녀님실 주변은 늘 난리가 났었다.
한 명은 다시 재달라고 소리치고 한 명은 봤지? 봤지?라며 소리치곤 했다.
키가 옆의 친구보다 큰 것이 다른 친구 보다 낫다는 생각, 그리고 자존감을 가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와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순간인 것 같지만 군중심리였을까..
나 역시 그 거룩한 의식에 참여하고 싶었고 멀리서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긴 했었다.
그 거룩한 의식에서 혹여나 상처받을까 야단법석인 장소에서 배제된 나에게 단 한 가지 위안이 되었던 것은
원장 수녀님의 배려로 나는 그 시간에 특별히 과자를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친구들 중에 제일 큰 애가 두 번째 큰 애에게 키를 역전당해 울고불고 난리가 났던 그 다음날,
나의 열한 살 여름에 늘 과자를 사들고 우리에게 놀러오셨던 안경 아저씨의 제안을 받았다.
모두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할 그 제안을 수락하면서 독특했던 내 삶이 더 특별나게,
아니 나쁘게 말해 배배 꼬이고 비틀릴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19.
날씨 좋은 오후의 원장 수녀님 방 밖에 서있는 길지 않은 시간은 내게 짜증이 한 가득 흘러 넘치는게 할만큼 충분했다.
친구들은 다같이 모래밭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을텐데..
나 오늘도 재민이랑 엄마 아빠놀이 해야하는데 하며 머리칼을 축 늘어트리고 입이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원장 수녀님, 수아가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반대하십니까?]
[한 선생님, 수아는 아직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수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씩씩한 아이들 조차 누구에게나 있는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하물며 몸도 아프고 자신이 어떤 원인으로 성장하지 않는 약한 수아가 그것들을 알아내고 스스로 고민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나긋나긋한 원장 수녀님의 얘기 소리만 듣던 나는 그렇게 격앙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깜짝 놀란 나는 까치발을 하고 원장님 방안을 쳐다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안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나는 귀를 좀더 쫑긋했다.
[수녀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자신이 아픈 것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키워주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허락하신 생명의 신비이지요. 게다가 수아는 이제 11살 입니다. 친구들 또래로 치면 빠르면 불과 1~2년 후에 2차 성징이 나타나고 사춘기가 시작 될 나이지요. 이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알고 스스로 지켜야 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게 딱 6개월 간의 시간을 주십시오 수아만 허락한다면 제가 수아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것을 알려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수아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십시다. 수아야! 수아야 밖에 있니?]
나는 절반 정도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갸웃갸웃거리던 중에 안에서 들리는 나의 이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수녀님!]
20.
[... 수아야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을거다... 하지만 아저씨가 가르쳐 주는 공부를 배우면 수아가 왜 자주 아프고 왜 키가 자라지 않는지 알게될 수 있어! 수아는 수아 자신이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았니?]
[아 몰라요, 아저씨 때문에 재민이랑 소꿉놀이 못했단 말예요.. 으앙!]
원장 수녀님 방에서 나는 무슨 말을 들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빨리 놀 생각에,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안하면 더 시간이 지체될 것 같은 안경 아저씨의 표정 때문인지
얼른 승락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듯이...
하지만 그 날 원장 수녀님 방에서 나오면서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울음이 터졌다.
지금와서 되돌아보면 정말 그 순간에는 또래 친구들이랑 놀지 못해서 운 것 같았지만,
지금 와서 그 때 진짜 운 이유를 생각해보면 안경아저씨에게서 아빠 같은 그런 사랑을 느껴 그랬던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21.
안경 아저씨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생물학 지식이었다.
어렵지 않게,
그림을 그려가면서,
이해는 안되지만 만화캐릭터가 잔뜩 나와서 얘기하는 비디오를 보면서 조금씩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여느 여자아이와 다를 것 없이 나도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안경 아저씨네 놀러가면 항상 맛있는 과자와 48가지나 색깔이 들어있던 크레파스,
내 마음을 모두 담고도 항상 여백이 남았던 커다란 스케치북이 있어 더 행복했다.
그래서 그런지 안경 아저씨네 가면 신경질 내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안경 아저씨, 나는요~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요~ 과자 한 두개 밖에 못 먹거든요. 먹는 속도가 느려서요. 근데 안경 아저씨 집에 오면요~ 천천히 먹어도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헤헤]
내말을 듣고 빙그레 웃는 안경 아저씨는 빠다코코아 한 조각을 들고 먹고 있는 내게 시브레 한 조각을 더 내 손에 쥐어주었다.
22.
6개월 동안 난 아이들이 읽는 신체의 탐험과 같은 책을 많이 읽었었다.
동시에 48가지의 다양한 색깔을 가진 표현도구가 여러 명의 왕비와 공주로 탄생했다.
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공주 두 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DNA와 암이었다.
자랑스레 안경아저씨에게 자랑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웃긴 것은 안경 아저씨는 내 친구 이름이 암이라고 해도 말리지 않았었다.
아저씨의 생각대로 사람의 몸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내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고,
내 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여자와 남자가 다르구나,
내 몸에는 콩콩콩 뛰는 심장도 있고
밥을 먹으면 소화가 되는 위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츰차츰 그런 얘깃거리가 쌓이자 조그만 난쟁이로 아이들에게 무시당하던 내가 처음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잘하는게 생겼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다.
남보다 내가 잘 할수 있다는 미음은 자연스럽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친구에게 말해주게 되었고,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내 말을 들어주니 나 역시 성격이 조금씩 밝아졌던 것 같았다.
물론 여느 아이들처럼 못됐게 말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야! 재민아 너 호몬이 뭔지 알아?]
[그게 뭔데?]
[그것도 모르나 바보야! 히히]
[모를수도 있지 먹는기가? 아니면 새로 나온 로보트 이름이가?]
[아니다. 호몬은 우리가 추울 때 덜덜덜 떨게 만드는게 호몬이다]
[그기 무슨 소린데? 아 몰라 니 똥 굵다, 니 똥 칼라똥이다!]
[치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지 삐지고 그러낭 여기 책에 나온다~ 키키킥]
[어디어디...응? 수아야 여기에는 호르몬이라고 밖에 안 적혀있는데? 호몬은 없다!]
[그러게~? 수아 잘난 척하더니 웃기당 히히히히!]
[깔깔깔]
[우헤헤]
[아 몰라몰라 내 책 돌려줘! 이씨...짜증나!]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을 하고 책을 가지고 도망치는 내 뒤로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하늘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23.
[호르몬 수치가 꽤 안정화 됐어! 요즘 두통이 좀 줄어들지 않았니?]
나는 처음 보는 것처럼 모르는 척 표정을 지으며 검사결과지를 받아 들었다.
[녀석... 모르는 척 하기는... 그 결과와 비교하려는 거지?]
나는 모르는 척 계속 눈을 검사 결과지에 떨군다.
/에스트로겐 수치가 지난번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수준으로 떨어져 유지 하고 있고... GH는 이제 거의 베이직한 정도로 나타나고 있고... 역시 신경쓰이는 것은 텔로머라아제랑 토포이소머라아제 수치구나...그 결과랑 비슷해지고 있네.../
[네가 말한 그 결과처럼 네 몸의 전 세포에서도 텔로머라아제 수치가 나타나고 있어... 암 세포처럼 특정 세포가 텔로머라아제 활성을 획득해서 암세포같이 증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포가 그러니... 오히려 서로를 견제해서 균형을 이루어 정상처럼 보이지만... 네가... 예상...한 것 처럼 그 균형이 붕괴되면 순식간에 몸 전체가 암세포로 바뀔거야...]
끊어질듯 내뱉는 안경 아저씨의 말이 들리자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안경 아저씨를 봤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왼쪽 눈에서 자기 몸무게를 못이긴 한 방울이 결과지 위로 톡 떨어졌다.
방울은 금새 새로운 주인을 찾은 양 종이와 한 몸이 되었고 종이는 환영하듯 자기 표면을 구겨서 물방울과 하나가 되었다.
/....../
[...지금도 네가 넘겨준 논문이랑 cell line을 가지고 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보고 갈래?]
안경 아저씨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니요... 저 이제 바이올로지 안해요.../
난 쓴 웃음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소위 말하는 양공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어두운 과거이죠...
그 어둠의 산물 중 하나인 주한 미군의 2세들.
우리나라 정서상 흑인 미군과 우리나라 여성 사이의 2세가 특히 문제가 되었었습니다.
일례로 일란성 쌍둥이 여아였는데 남편이 미국으로 돌아가며 쌍둥이의 언니만을 데리고 갔습니다.
지금 그 쌍둥이의 언니는 고등학교에서 치어리더의 회장까지 하며 밝고 유쾌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반면,
한국에 남은 쌍둥이의 동생은 까만 피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으로 인한 조롱과 차별로 인해 말수도 적고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받는 그런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이는 자아 정체성의 형성에 문화사회학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심리학과 조성혜 교수>
17.
꼭 매스컴에 음식점이 소개된 것이 자랑스러운 것처럼 조 선생님의 방에 자랑스레 걸려 있는 "이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 출연 사진을 쳐다 보지 않더라도, 조 선생님의 정신병리학적 설명이 없더라도, 나도 요즈음 느끼고 있다.
한 인간이란 개체의 정체성은 주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속한 사회, 한 사회의 문화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을...
주위에서의 칭찬 혹은 비난, 사랑 혹은 폭력...
한 사람을 향한 그런 평가가 그 사람을 극적으로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18.
열한 살 여름 이었다.
수녀님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나에게 안경 아저씨가 무릎을 굽히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던 그 때,
그 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달리 몸이 자주 아파 신경질을 자주-아니 가끔 냈던 것 같은데-내던 순수한 꼬맹이였다.
그저 어리숙하고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묘사할 때 쓰는 꼬맹이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꼬맹이",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난쟁이.
그 때 나는 수녀님이 가장 끔찍히 돌봐주셨던 허약한 아이였다.
열한 살이나 먹은 아이가 키가 120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 그럴만도 했다.
누가보면 다섯 살이나 여섯 살로 생각했지 절대 열한 살로는 보지 않았다.
누구라도 내 나이가 열한 살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처음은 깜짝 놀라는 반응이 나타나고,
그 뒤로 왜 그러냐는 물음이 뒤따라온 뒤 이 후 안타까운 얼굴로 바뀌곤 했다.
나는 늘 항상 주위로부터 그런 시선을 받아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었는지 모르겠다.
자주 드나들던 원장 수녀님 방문 옆에 그어진 짧은 선과 선 옆에 적힌 날짜는 이미 4년 전 여름으로 머물러 있었다.
같이 지냈던 남자 아이들은 나와 비교되게 2개월 마다 금이 조금씩 올라가는 모양새였고
원장 수녀님이 우리의 키를 기록하기 시작한지 5년이 접어들 무렵에 나로서는
그 아이들의 금 조차 목을 힘껏 젖혀야 볼 수 있는 높이가 되었다.
친구들은 그 당시 경쟁적으로 거의 매주마다 키를 재달라고 보챘었다.
일종의 거룩한 의식인 양 친구들은 숨을 죽이며 키를 쟀고,
친구 한 명의 키가 다른 친구의 그것을 앞지르는 날 일때면 원장 수녀님실 주변은 늘 난리가 났었다.
한 명은 다시 재달라고 소리치고 한 명은 봤지? 봤지?라며 소리치곤 했다.
키가 옆의 친구보다 큰 것이 다른 친구 보다 낫다는 생각, 그리고 자존감을 가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와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순간인 것 같지만 군중심리였을까..
나 역시 그 거룩한 의식에 참여하고 싶었고 멀리서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긴 했었다.
그 거룩한 의식에서 혹여나 상처받을까 야단법석인 장소에서 배제된 나에게 단 한 가지 위안이 되었던 것은
원장 수녀님의 배려로 나는 그 시간에 특별히 과자를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친구들 중에 제일 큰 애가 두 번째 큰 애에게 키를 역전당해 울고불고 난리가 났던 그 다음날,
나의 열한 살 여름에 늘 과자를 사들고 우리에게 놀러오셨던 안경 아저씨의 제안을 받았다.
모두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할 그 제안을 수락하면서 독특했던 내 삶이 더 특별나게,
아니 나쁘게 말해 배배 꼬이고 비틀릴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19.
날씨 좋은 오후의 원장 수녀님 방 밖에 서있는 길지 않은 시간은 내게 짜증이 한 가득 흘러 넘치는게 할만큼 충분했다.
친구들은 다같이 모래밭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을텐데..
나 오늘도 재민이랑 엄마 아빠놀이 해야하는데 하며 머리칼을 축 늘어트리고 입이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원장 수녀님, 수아가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반대하십니까?]
[한 선생님, 수아는 아직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수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씩씩한 아이들 조차 누구에게나 있는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하물며 몸도 아프고 자신이 어떤 원인으로 성장하지 않는 약한 수아가 그것들을 알아내고 스스로 고민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나긋나긋한 원장 수녀님의 얘기 소리만 듣던 나는 그렇게 격앙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깜짝 놀란 나는 까치발을 하고 원장님 방안을 쳐다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안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나는 귀를 좀더 쫑긋했다.
[수녀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자신이 아픈 것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키워주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허락하신 생명의 신비이지요. 게다가 수아는 이제 11살 입니다. 친구들 또래로 치면 빠르면 불과 1~2년 후에 2차 성징이 나타나고 사춘기가 시작 될 나이지요. 이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알고 스스로 지켜야 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게 딱 6개월 간의 시간을 주십시오 수아만 허락한다면 제가 수아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것을 알려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수아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십시다. 수아야! 수아야 밖에 있니?]
나는 절반 정도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갸웃갸웃거리던 중에 안에서 들리는 나의 이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수녀님!]
20.
[... 수아야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을거다... 하지만 아저씨가 가르쳐 주는 공부를 배우면 수아가 왜 자주 아프고 왜 키가 자라지 않는지 알게될 수 있어! 수아는 수아 자신이 왜 그런지 궁금하지 않았니?]
[아 몰라요, 아저씨 때문에 재민이랑 소꿉놀이 못했단 말예요.. 으앙!]
원장 수녀님 방에서 나는 무슨 말을 들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빨리 놀 생각에,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안하면 더 시간이 지체될 것 같은 안경 아저씨의 표정 때문인지
얼른 승락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듯이...
하지만 그 날 원장 수녀님 방에서 나오면서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울음이 터졌다.
지금와서 되돌아보면 정말 그 순간에는 또래 친구들이랑 놀지 못해서 운 것 같았지만,
지금 와서 그 때 진짜 운 이유를 생각해보면 안경아저씨에게서 아빠 같은 그런 사랑을 느껴 그랬던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21.
안경 아저씨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생물학 지식이었다.
어렵지 않게,
그림을 그려가면서,
이해는 안되지만 만화캐릭터가 잔뜩 나와서 얘기하는 비디오를 보면서 조금씩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여느 여자아이와 다를 것 없이 나도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안경 아저씨네 놀러가면 항상 맛있는 과자와 48가지나 색깔이 들어있던 크레파스,
내 마음을 모두 담고도 항상 여백이 남았던 커다란 스케치북이 있어 더 행복했다.
그래서 그런지 안경 아저씨네 가면 신경질 내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안경 아저씨, 나는요~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요~ 과자 한 두개 밖에 못 먹거든요. 먹는 속도가 느려서요. 근데 안경 아저씨 집에 오면요~ 천천히 먹어도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헤헤]
내말을 듣고 빙그레 웃는 안경 아저씨는 빠다코코아 한 조각을 들고 먹고 있는 내게 시브레 한 조각을 더 내 손에 쥐어주었다.
22.
6개월 동안 난 아이들이 읽는 신체의 탐험과 같은 책을 많이 읽었었다.
동시에 48가지의 다양한 색깔을 가진 표현도구가 여러 명의 왕비와 공주로 탄생했다.
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공주 두 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DNA와 암이었다.
자랑스레 안경아저씨에게 자랑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웃긴 것은 안경 아저씨는 내 친구 이름이 암이라고 해도 말리지 않았었다.
아저씨의 생각대로 사람의 몸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내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고,
내 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여자와 남자가 다르구나,
내 몸에는 콩콩콩 뛰는 심장도 있고
밥을 먹으면 소화가 되는 위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츰차츰 그런 얘깃거리가 쌓이자 조그만 난쟁이로 아이들에게 무시당하던 내가 처음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잘하는게 생겼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다.
남보다 내가 잘 할수 있다는 미음은 자연스럽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친구에게 말해주게 되었고,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내 말을 들어주니 나 역시 성격이 조금씩 밝아졌던 것 같았다.
물론 여느 아이들처럼 못됐게 말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야! 재민아 너 호몬이 뭔지 알아?]
[그게 뭔데?]
[그것도 모르나 바보야! 히히]
[모를수도 있지 먹는기가? 아니면 새로 나온 로보트 이름이가?]
[아니다. 호몬은 우리가 추울 때 덜덜덜 떨게 만드는게 호몬이다]
[그기 무슨 소린데? 아 몰라 니 똥 굵다, 니 똥 칼라똥이다!]
[치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지 삐지고 그러낭 여기 책에 나온다~ 키키킥]
[어디어디...응? 수아야 여기에는 호르몬이라고 밖에 안 적혀있는데? 호몬은 없다!]
[그러게~? 수아 잘난 척하더니 웃기당 히히히히!]
[깔깔깔]
[우헤헤]
[아 몰라몰라 내 책 돌려줘! 이씨...짜증나!]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을 하고 책을 가지고 도망치는 내 뒤로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하늘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23.
[호르몬 수치가 꽤 안정화 됐어! 요즘 두통이 좀 줄어들지 않았니?]
나는 처음 보는 것처럼 모르는 척 표정을 지으며 검사결과지를 받아 들었다.
[녀석... 모르는 척 하기는... 그 결과와 비교하려는 거지?]
나는 모르는 척 계속 눈을 검사 결과지에 떨군다.
/에스트로겐 수치가 지난번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수준으로 떨어져 유지 하고 있고... GH는 이제 거의 베이직한 정도로 나타나고 있고... 역시 신경쓰이는 것은 텔로머라아제랑 토포이소머라아제 수치구나...그 결과랑 비슷해지고 있네.../
[네가 말한 그 결과처럼 네 몸의 전 세포에서도 텔로머라아제 수치가 나타나고 있어... 암 세포처럼 특정 세포가 텔로머라아제 활성을 획득해서 암세포같이 증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포가 그러니... 오히려 서로를 견제해서 균형을 이루어 정상처럼 보이지만... 네가... 예상...한 것 처럼 그 균형이 붕괴되면 순식간에 몸 전체가 암세포로 바뀔거야...]
끊어질듯 내뱉는 안경 아저씨의 말이 들리자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안경 아저씨를 봤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왼쪽 눈에서 자기 몸무게를 못이긴 한 방울이 결과지 위로 톡 떨어졌다.
방울은 금새 새로운 주인을 찾은 양 종이와 한 몸이 되었고 종이는 환영하듯 자기 표면을 구겨서 물방울과 하나가 되었다.
/....../
[...지금도 네가 넘겨준 논문이랑 cell line을 가지고 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보고 갈래?]
안경 아저씨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니요... 저 이제 바이올로지 안해요.../
난 쓴 웃음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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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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