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35분.
수업까지는 20분도 더 남아있어 충분히 여유가 있지만, 나는 빠르게 계단을 오른다.
복도를 지나 305호 강의실 앞에 선다.
그제야 비로소 가슴이 두방망이질 하는 것을 깨닿는다. 그것은 문고리를 잡는 손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다.
어제, 은채와 헤어지던 그 시각부터 딱 하나만 바랬다.
빨리 내일이 와서 은채를 만나고 싶다, 조금이라도 빨리 오늘이 되길.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머뭇거리는건 말이 안된다.
끼익-
강의실 문을 살짝 연다, 그리곤 열린 문 틈을 향해 한발을 살짝 끼워넣고 안을 살핀다.
있다.
두번째열, 맨 앞자리. 차분한 옷차림과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
항상 은채가 앉는 자리엔 당연하게도 그녀가 있었다.
나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의 방향을 바꿔 빠르게 옆자리로 다가간다.
"뭐 이렇게 빨리 온겨."
"어떻게 인사를 건내지?"에 대한 고민은 까마득한 점이 되어 있었기에 나는 내키는데로 한다.
"선배가 보고싶어서..~는 너무 그런가? 헤헤~"
"와우, 일단 그렇다고 칩시다?"
그녀의 장난스런 스트레이트를, 나는 위빙으로 가볍게 받아넘긴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평소와 같다는 점이, 오히려 나에겐 더욱 살갑게만 느껴졌다.
스읍, 하-
대리석 바닥의 차가운 질감이 코를 통해 폐를 스친다.
초여름의 고개를 넘어가는 와중에도 느낄 수 있는 시릿함,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 조각을 맛본다. 결코 흥미롭지 않은 향기는 그 자체의 생생함을 준다.
나는 늘 그래왔다는 듯이 은채의 옆자리에 앉는다.평소에는 닿을까봐 조심조심 움츠렸던 왼쪽 어깨도 오늘은 과감하게 펴낸다.
그녀가 거부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본다면 별것 아니라고 웃어넘길 수 있는 부분, 하지만 나에겐 차곡차곡 쌓여 한 발 올리는 발판이 된다.
비록 지금은 이만큼이지만, 그녀에게 닿길 조심했던 모습을 씻어내는 정도지만, 다음엔 "좀 더" 나아갈 수 있다.
백팩을 열서 전공서적을 뒤적이는 손길이 사뭇 뜨끈하다.
책상 위에 이것 저것을 펼쳐두곤, 숨 돌릴 겸 흘깃대며 은채를 쳐다본다.
하도 조용하길래 미리 예습이라도 하는가 싶었는데, 의외로 아무 것도 없다. 전공서도 펼쳐져있지 않고, 노트도 마찬가지.
그저 손을 들어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기만 할 뿐. 벌써 너댓번째다.
그 사이로 드러난 은채의 귀가 앙증맞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갛다. 목덜미의 색과 비교해봐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발갛게 익어있었다.
왜 저래?
궁금증이 채 걱정으로 번지기도 전에 그녀가 자세를 낮추고 내 귓가로 고개를 디민다.
"선배... 냄새나..?"
집중하지 않는다면 그냥 흘려버릴 정도의 낮은 톤, 은채는 매우 신중하게 물어온다.
"..응?"
"냄.새. 나냐구.."
"아니..?"
나는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말해준다.
"으..."
내 대답이 부족했던걸까, 손가락을 연신 꼼지락거리던 은채는 귀에 맺혀있던 붉은 물감으로 자신의 볼을 점차 물들여 간다.
"아침에 늦잠자서... 머리 못 감았어..."
"어?"
"쉬, 쉿!!.. 아이 참, 살살 얘기해 선배..너무 티 나잖아.."
나도 모르게 커지는 볼륨을, 은채가 다급하게 컨트롤한다.
"아, 미안. 몰랐지 난, 진짜 정말로 몰랐어."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결코 고의가 아니었다는 걸 또렷하게 피력한다.
"엑.. 뭐야, 아까 막 킁킁거렸잖아 선배..! 냄새나서 그런거 아녔어??"
"아니 난 그냥 뭐, 재채기가 나올려고해서 그랬지, 흠흠."
차마, 대리석 냄새를 맡고 있었다는 변태같은 대답을 들려줄 순 없었고, 적당히 포장해서 둘러댄다.
"..."
은채의 얼굴은 빨갛다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달아오른다.
속았다!
움켜쥔 두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찌뿌린 미간과 글썽이는 두 눈엔 억울함이 뚝뚝 떨어진다.
속았어, 속았어, 속았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만큼, 큰 글씨가 은채 얼굴을 수놓는다.
그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견 짓궂은 생각에 괜시리 톡톡 건드려본다.
"우리 후배님 뭐가 그리 급하셨나~ 어.. 그러고보니 뭔가 냄새가 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주변을 킁킁대며 일부러 과장된 액션을 취한다.
"!!"
그렁그렁 맺힌 은채의 두 눈과 역팔자로 휘어진 눈썹, 당장이라도 빽- 하고 소리를 질러도 모자랄만큼 가쁜 숨.
그녀의 얼굴은 본래의 색으로 더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빨개졌다.
"어.. 음,"
상당히 많은 구간을 지나왔음을 알고서야 나는 슬그머니 말꼬리를 말아쥔다.
좀 심했나?
그러나 한편으론, 꽤나 친해진 마당에 굳이 예의의 선을 지켜야할 필요가 있냐는 "뭐 어때?"적 마인드가 고개를 치켜 세운다.
슬쩍 자리를 잡고 적당히 강짜를 부리는 동안 사과와 해명의 타이밍은 지나갔고, 나는 단 하나의 카드를 위태롭게 쥔채 파워게임을 계속 잇는다.
그 외로운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행히도 말이다.
"...으휴, 선배 진짜 내가,"
빨갛던 은채의 얼굴이 발개질 즈음 그녀는 떠듬떠듬 입을 열었고, 잔뜩 찔린 나는 조용히 경청한다.
"내가 진짜 꼭 복수할거야, 꼭. 두고 봐!"
소 뒷걸음에 밟힌게 퍽이나 억울했는지 그녀의 눈이 이글이글거린다. 따갑다.
딱히 해줄말이 없었던 나는 "앗, 뜨거"하며 헛기침 두어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곤 속으로 씨익 웃는다.
이 선을 잘 기억해둬야 한다.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밟을 수 있는 그녀와의 거리다.
나는 그 선에 서서 뒤를 돌아본다. 많은 것들이 보인다. 가깝게는 어제의 일들부터, 멀게는 처음에 있었던 PC방 사건까지.
그러다 문득, 몇걸음 떨어진 뒤쪽에서 붉게 그어진 하나의 금이 보인다.
지난번 과제 문제로 크게 다툰 그날의 선이다.
당장이라도 아찔했던 그날의 기억이 재생된다. 이대로 은채에게서 떨어져나갈뻔 했던 사건, 해결하지 못했다면 앞으로 얼굴 마주치기도 어려웠을.
가벼운 현기증이 돌지만, 지난 일임을 확인하며 마음을 단단히 틀어쥔다.
확실히 그때의 선 보다는 배 이상 전진했다.
그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칭찬한다.
원래 그렇듯, 처음이 어렵다.
처녀의 치마를 들추고 피를 보기 위해선, 그녀가 아는 모든 세상을 다 줄수 있어야 하지만,
그 다음번은 그저 빠르게 치마를 까뒤집을 힘만 있으면 그만이다.
한번 뚫린 구멍은 다시 막힐 수가 없고, 몇번이고 접근하는 침범에는 갈수록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는 이 선을 단단히 잘 지켜야 했다.
그것은 은채와의 관계를 보다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도, 어쩌면 이것은 예상보다 빨리 그녀를 허물 수도 있는 키 아이템일지도 모른다.
다만, 어떻게 다루냐는 많은 부분을 고민해야 했다.
무작정 다룰 수는 없었다. 그러한 방법들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팔다리를 꺾어놓았는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당분간은 지금의 선을 지키며 신뢰를 쌓아야 했다.
그 신뢰가 탄탄할수록, 그녀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는 오래도록 유지되고, 나에 대한 그녀의 방어는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
그리곤 조심스레, 잠든 아이를 업어가듯 아무도 모르게 그 주변을 갉아먹으면 된다.
그 뿐이다.
수업이 끝나고 내 주변을 한참 얼쩡거리던 승호는, 은채가 강의실을 나가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다.
"왜 그래? 또 미팅있냐?"
그때 미팅 이후로 대화다운 대화는 오늘이 처음이다. 평소 승호의 관심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기대반 두려움반을 섞어 재빨리 건낸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연신 두리번대며 눈치를 살피던 녀석이, 히죽거리며 입꼬리를 올린다.
"은채랑 친해?"
"...?"
뜻밖의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문다. 하지만 그게 승호에게는 무언의 대답이 됐는지, 묘한 표정을 고수하고 떠벌린다.
"요새 형 말야, 강의 들을때 꼭 은채 옆자리에 앉는 것도 그렇고, 또 아까보니까 장난도 치는거 같던데."
승호는 자신의 근거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말에 힘을 싣는다.
초짜의 포커 실력만큼이나 조잡한, 얼굴에 새겨진 패.
정말 알고 싶었던, 사실은 처음부터 묻고싶었던 한마디.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은 그걸 꺼내든다.
"둘이 사귀는거?"
"..."
너무 당황하면 이런걸까, 순간적으로 할말을 잃은 나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이녀석이 지금 와서 뭐라고 하는건지.
또 그 은근한 눈은 무슨 의미인지.
아니, 거기다가 입싸기로는 학과에서 가장 유명한 놈이 이럴 정도면 이미 어느 수준으로 퍼져나갔을지 등등.
"에이, 진짜야? 형 진짜??"
한방 먹은 나머지 늦어진 답변이건만, 승호 녀석은 그게 무언의 긍정으로 낼름 받아삼켜버린다.
이녀석의 입을 타버린 소문이 뒤바뀌어버리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설기 선배 한건 했던데? 은채랑 사귄댄다! 크크크."
"아, 이번에 복학한 그 형? 이야~ 재주도 좋네 좋아!"
"...했겠지?"
"했지, 했어! 씨발 진작엔 후루룩했겠지. 그걸 놔둬? 아으..나 같으면 안 재우지!"
"와하하하-"
그리고 변질된 소문이 시커먼 남정네들의 술자리에서 희롱의 대상이 되는지도.
오해의 결과는 긍정적일 순 있어도, 과정이 가져다주는 창피함만큼은 피할 길이 없다.
그것만큼은 한사코 말려야했다.
"..잠깐, 잠깐, 잠깐만."
나는 낮지만 힘이 실린 묵직한 목소리로 녀석의 입에 자물쇠를 채운다.
하지만 그것은 미봉책.
여전히 승호의 눈에는 여전히 음흉함이 가득했기에 나는 빠르게 고삐를 매어간다.
"아냐."
"응?"
"아니라고."
"뭐가?"
"은채랑 사귀는 사이 아니라고."
간결한 말 한마디는 속시원한 해명이 될순 없지만, 확실한 부정은 가능했다.
"어, 그.."
"아냐."
"에이~ 보니..."
"조별과제 때문에 친해진건 맞는데, 그냥 친한거야."
수차례 이어지는 단언은 점점 그 힘을 더해갔고, 그것은 승호를 불확실하게 만들어간다.
"에..."
흔들거림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승호는 휘청거렸지만 아직까지 중심은 잘 잡고 있었다.
뿌리를 뽑지 않으면 위험하다. 분명 한발짝 물러선 다음, 다시금 언제고 고개를 처내밀게 뻔했다.
설령, 그때가 되서 정말 소문처럼 우리의 사이가 바뀐다해도, 굳이 상관도 없는 녀석들 입에 오르락거리며 음담패설의 안주거리가 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소문 돌면 아무 상관 없는 은채한테 너무 미안해지잖아."
"..."
"너도 궁금했으니까 나한테 와서 물었을거 아냐?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니까 믿어."
"음,"
"자랑하면 자랑할 얘기지, 그게 숨길 나쁜건 아니지 않냐? 그리고 내가 너한테까지 비밀로 하겠어?"
"..듣고보니 그런거 같기도하고..."
승호가 거의 다 넘어왔다. 이젠 어느정도 안정권에 진입한듯 싶었다.
쓸데 없는 가십은 여기서 끝. 정말 끝.
하지만 그 마음이 너무도 강했던 걸까, 나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까지를 내뱉고 만다.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내가 늘씬한 사람 좋아하는거. 은채가 착하고 예쁜건 맞는데, 좀 많이 아담해서 영..."
아차하는 마음에 자꾸만 목소리가 작아진다.
"응, 뭐... 형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아닌거지."
다행히도 승호는 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건지 곧잘 수긍하고 들어온다.
"그래, 암튼 괜한 소문 내지말고, 나 귀찮아진다."
"알았어, 알았어."
"아 참,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하자."
모처럼의 흥미거리가 꺾인 탓인지, 승호는 보기 드물게 순순했고 나는 못이기는 척 술 약속을 잡으며 화제를 돌린다.
"오~ 형이 쏘는거?"
"그래, 그래 내가 사니까 지갑 버리고 와라, 응?"
승호는 와하하- 웃으며 강의실을 떠난다. 나는 녀석이 휩쓸고 간 잔해에 걸터앉아 마모된 감정을 추스린다.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나가버린 강의실이다, 그것도 한참도 더 전에.
그런데 나는 뭐가 무서워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워싸려 드는 걸까, 이곳에는 승호와 나, 단 둘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스스로의 한심함에 짧막한 웃음이 흐흐-하고 나온다. 관절이란 관절은 모두 시릿한 느낌, 처진 어깨가 좀처럼 우뚝 솟아오르지 않는다.
아니라면?
만약, 승호말대로 은채와 내가 진짜로 사귀는 사이라면, 그렇게 만들 수 있다면?
불편한 강의실 의자에 되는데로 앉아 짱구를 굴려본다.
내가 이렇게 허둥댄 이유는 승호때문이지.
왜 승호 때문? 승호가 날 곤란하게 만들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왜 곤란하냐고? 음...일단 은채랑 내가 사귀는 것처럼 보인다고 그러고,
답답하네 정말, 본론만! 오해니까 그러지. 나 뿐만이 아니라 은채도 그런건 별로 안좋아할거 같은데.
은채가 싫대? 자기 입으로? 아니 뭐 그런건 아닌데... 곤란할 순 있으니까.
초딩이냐? 얼레리 꼴레리 그런걸로 토라지게? 어, 흠...
멍청하기는. 으이구, 답 없다~ ......
캥기면, 아니게 만들어. 둘이 사이 좋잖아? ..응?
걔가 너 싫다고 화내? 침을 뱉든? 그, 그런건 아니지.
어제 잘 놀았잖아. 사이 좋았잖아? 뭐, 그건 그랬지.
그럼 잘 꼬시면 되겠네. 으음,
오늘밤 당장 자빠트리라는게 아니잖아. 무슨 뭐, 후장을 따래? 질싸를 하래? 자지들 불러서 갱뱅 돌리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소심하게 굴어? 그냥 계집애 얘기할때 잘 들어주고, 방긋방긋 웃어주고 어쩌다 손 좀 잡아주면서 분위기 만들다보면, 알아서 소문처럼 될텐데 그게 무슨 걱정이라고 궁상맞게...엉...여기서......
...혼자의 고민이 길어지다보니 쓸데없는 곳까지 가버린다.
나는 지저분해지려는 생각을 탁탁 쳐내버리곤, 남은 부분을 잘 골라내본다.
하지만 썩 나쁜건 아냐.
맞는 말이다. 안될 이유는 없었고, 이상할 부분도 없었다.
만약, 정말로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학과 사람들한테 이것저것 소문은 돌겠지, 상대적으로 처지는게 나니까.
"저 사람이야?"
"엑, 뭐야 저런거랑?"
한동안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게 될게 뻔했다.
갑자기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더운 날씨였지만 오싹함은 틀림 없다.
아, 아니다. 어차피 "한동안", "한동안"이다. 그네들 입에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것도 분명히 있겠지만, 어차피 질겅질겅 씹어대고 단물 싹 빠지면 우리 소문은 가볍게 관심 밖으로 뱉어진다.
이거 해볼만하다.
나는 득과 실을 저울질해본 뒤, 가볍게 수긍한다.
은채와 있으면 즐겁다. 그녀와 함께라면 김밥천국에서의 간단한 김밥 한줄도 맛있었다. 날 부담스럽게 하지도 않는다. 내숭은 조금 있지만 애교로 봐줄만 하다. 착하고 예뻤다.
지금의 관계에서 한발 앞으로 나서고 싶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그걸 내가 원했다.
나는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복도를 빠르게 달린다.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대지만, 도무지 터질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잘 포장된 장난감은 포장을 뜯는 순간 가치가 하락한다. 그치만 꺼내서 가지고 노는게 훨씬 재미있는 법.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아주 능숙하게 받아들였다.
은채와의 관계.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가능했다, 하려고만 한다면.
그래, 해보자.
띠리링-
[안녕하세요, 신설기 고객님. 현재 고객님의 대출한도는...]
기쁠때나 슬플때나, 이도저도 아닌 아무때나 찾아오는 스팸문자, 정말 대단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문자를 지운다.
어?
그 와중에, 왼쪽 귀퉁이에 불이 난 아이콘이 눈에 들어온다.
카톡이다.
아 맞다, 서윤이...
어제 은채랑 한참 고기 구워먹을때였던가, 비소 녀석이 카톡을 엄청 보내긴했다. 뭐 이쪽에서는 궂이 방해받고 싶지 않아 그냥 엎어뒀지만 말이다.
13, 귀퉁이의 숫자.
진동이 한참 울려서 전화로 착각할 정도였더니만, 짧은 시간 안에 무슨 얘기를 그리 꾹꾹 눌러 담아 보냈는지.
나는 난간에 잠시 기대선다. 허리춤에 닿는 금속 재질의 손잡이가 찌릿할만큼 시원하게 느껴진다.
지금 봐야하나.
동시에 엄지와 검지로 코를 스윽 만진다.
대답은 No.
서윤이도 분명 할 얘기가 있으니 이렇게 보냈겠지, 시시덕 거리는 내용을 13통씩이나 보낼 애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우선 순위를 꼽자면 녀석보다는 내쪽이 높았을 뿐이다. 똑같은 주제라면, 당연히 석자 밖에 안되는 내 코를 걱정해야하지 않겠는가.
나중에, 그냥 나중에.
서윤이에 대한 부분은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 구석에 놔둔다.
어차피 그 남자놈과의 사소한 일들 중 하나겠지 뭐.
그리고 저녁에 학교 도서관에서 볼테니까, 대충 얼굴 보는 것 만으로도 안녕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합리화,
확실히 지금 내 머릿속은 은채로 가득했다.
나머지 3개의 수업을 날리며 궁리한 것은 "어떻게 하지?"가 전부였다.
이것저것 짜맞춰 본들, 어디서 들어봄직한 삼류 작업기술이 떡-하니 나왔고, 어쩌다 괜찮다 싶은게 튀어나와 차근 차근 잘 정리해보면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민망한 시츄에이션이 드러나곤 했다.
으... 정말 쉬운게 하나 없구나.
결국, 날이 저물고 도서관 입구를 서성댈때까지도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부메랑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담배나 뻑뻑 펴대고 만다.
아, 은채가 담배 피는 사람 싫다고 했는데...
산 넘어 산, 도무지 뜯어 고칠만한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한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경우의 수에 순간적으로 휘청거리지만, 웬일인지 내 입가엔 좀처럼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다르다. 머리가 지끈대는 골치아픔과는 그 형태부터가 달랐다. 힘들어도 찜찜하지 않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게 정말 내가 하고싶은 것이란 걸 알기까진 너무나도 시간이 짧았다.
일단 계속 생각해보자. 그러다보면 괜찮은게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아직 필터를 질겅대지도 않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다.
- 건강
- 담배값
- "은채"
계속해서 머릿속 한켠에 띄워둔 금연 메모에 은채 이름을 추가했다, 이번엔 성공할 것같은 설렘과 함께.
도서관 입구의 계단에 걸터앉은 나는 다리를 쭈욱 뻗는다. 발가락이 동그랗게 말리며 발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원한 기지개에 종아리 근육이 이완된다. 기분좋은 찌릿함에 나는 살짝 몸을 떤다. 그리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바지를 툭툭 턴다.
그런 나를 발견했던걸까, 서윤이가 다가온다.
통통 튀어대는 종종걸음, 녀석의 발걸음에서 상기된 표정을 읽는다.
"아, 안녕하세요!"
"오셨네요."
진작에 서윤이 달려오는걸 보고 있었던 나는 차분하게 인사했다.
"아, 네, 네..."
오히려 허둥대는 쪽은 그녀,
처음보다는 많이 친해졌지만 뚝뚝 끊기는 대화는 여전하다.
"오늘은 진짜 덥죠? 자, 그런 의미에서 이거 드세요."
"앗!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수차례 겪었기에 다루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나는 준비해둔 콜라캔을 건네며 대화의 꼬리를 잇는다.
화들짝 놀라며 캔을 받아드는 서윤의 모습은 낯설음과 익숙함이 절묘하게 배어 있었기에, 내 속은 간질간질함으로 가득했다.
홀짝대며 콜라를 마시는 그녀, 나는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오늘도 역시 여러모로 신경을 쓴 옷 매무새와 옅지 않은 화장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언제부터일까? 학기 초의 화장기 없고 수수한 청바지 차림의 서윤은 온데 없고, 꾸미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이 당연스러워진 것은.
여자의 변신에는 남자가 있는 법. 서윤이가 항상 카톡으로 말하는 그놈의 영향 때문임을, 나는 비로소 인정한다.
가장 먼저 떠오른 섭섭한 감정, 하지만 이윽고 다가온 시원함으로 그것을 씻어내리며 나는 마저 입을 연다.
"요새 서윤씨 다른 사람 같아요."
"네, 네? 무슨?"
깜짝 놀란 토끼처럼 콜록거리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어렵지 않게 풀어 말한다.
"아뇨, 아뇨. 안좋은 얘기가 아니라, 요즘 서윤씨 많이 좋아보여서요. 잘 꾸미고 다니시잖아요."
"에에, 아니에요! 저 같은게 꾸미고 다녀봤자..."
귀까지 빨개진 서윤이는, 낯 뜨거운 칭찬이 익숙치 않은지 온몸을 꼼지락거린다.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사그라들게 뻔했기에, 나는 조금 더 힘을 실어준다.
"잘 어울려요. 충분히 예쁜데요?"
"...으으"
바람이 충분히 들어간 탓일까, 그녀가 양손으로 뺨을 감싼 채 어쩔줄 몰라한다. 비록 겉모습은 많이 세련되어졌지만, 속은 여전히 시골처녀마냥 순진한 서윤이다.
문득 그녀에게서, 은채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내 모습을 본다.
온라인이었지만 오랫동안을 알아온 비소,
아니 이젠 하서윤.
꼬맹이 시절부터 봐 왔던 녀석이 어느새 숙녀가 되어 있었고 어쩌다보니 내 앞에 나타났다.
기적에 가까운 우연 속에 다 놀라기도 전, 이루어진 연애상담. 친한 동생을 뺏긴다는 느낌을 받아서일까, 알 수 없는 질투심에 그 둘을 무작정 미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서윤이가 전해주는 녀석은, 밝고 사람 가리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한, 썩 괜찮은 놈이었지.
어제 보낸 카톡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밝은 표정의 서윤이를 보아하니 별 일은 없어보였다.
꽉 움켜쥐어왔던 달콤한 사탕을, 이제는 조심스레 내려놓자. 그리고 불안한 고집도 함께 딸려가게 두자.
후련함이 찾아온다.
진심으로 녀석의 연애사업이 잘되길 빌었다.
그녀가 성공한다면, 왠지 모르게 나도 은채와 잘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좋아보여요."
"...어우, 어후,"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서윤의 얼굴에, 한번 더 훅-하고 불을 지르곤 나는 도서관으로 쏙 들어왔다.
썩 나쁘지 않은 웃음이 입꼬리를 살랑살랑 당긴다.
"바, 바쁘세요?"
집에 가려던 참인데요?
목구멍 근처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곤 다른 녀석을 끄집어냈다.
"아뇨 딱히 뭐, 공부도 다했고 별일 없으면 집에 갈까 했죠."
"아아,"
내가 황급히 붙인 살이 나쁘지 않았는지, 서윤은 가볍게 수긍한다. 그리곤 방금 전보다는 좀더 또렷한 말로 나를 붙잡는다.
(계속)
야담넷같은 불펌 사이트가 문제긴 하네요.
왠만하면 막아보고 싶은데 좋은 방법 없을까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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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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