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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2 00:44 807회 0건
나는 PPT자료를 빠르게, 하지만 꼼꼼히 훑어본 뒤 덮는다.
그리곤 곧 내가 저지를 바보같은 일에 대해 이해득실을 갸늠해본다.

분명 내 능력 밖인데 하,
한톨만큼의 후회를 상기하곤 빠르게 지워낸다, 그리곤 머리가 빨리 돌기 전에 냅다 질러버린다.

"이거, 내가 할게."
"응?"
"발표."
"에?"
"내가 한다고, 발표."
나는 손에 쥔 프린트물로 탁자를 탁탁치며 은채에게 강짜를 부린다.
표지는 여러명의 조로 시작했지만, 엔딩크레딧이 올라갈때는 은채의 이름만 수두룩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기에 나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꾸준히 버틴다.

"하지만 그거.."
"어허~"
"아니..."
"어허험! 어험!"
"..."
"암튼, 이거 발표 내가 한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알어~"
계획에도 없던 파트가 늘었다, 그것도 60명도 넘게 듣는 전공 수업에서의 발표.
아니, 그거는 둘째 치더라도 그 깐깐한 교수님의 질문세례는 어떡하지?
벌써부터 머리가 핑-하고 돈다.
하지만 나는 내색 않고 가장 맛있는 부분을 한입 베어먹은 양,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맞은 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은채의 눈이 보인다.
당혹스러움과 걱정,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숨는 미안함이 뒤섞여 유리구슬처럼 반짝인다.

그녀를 마주보고 있는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일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두려워져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질 못하게 되버린 것 같다.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 시체를 버릴때도 항상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감겨줬던게 바로 난데,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대신 많이 좀 도와줘. 그, 그리고 나중에 밥이라도 한번 사주던가."
혼란스러워하는 내 모습이, 그녀에겐 부끄러워 보인걸까? 은채는 발갛게 익은 목소리로 조막조막 대답한다.
"...당연하지, 당연히 한턱 쏴야지."
그리곤 은채는 아메리카노를 다시 한모금 쪼옥 빨아들인다.
빨대를 물고 있는 입술이 앵두같아서 당장이라도 입에 넣고 터트리고 싶다.
"고마워, 선배."
담백한 그녀의 한마디가, 헤프게 웃는 모습 하나하나가 나를 빠르게 제자리로 던져놓았다.

PPT에 대한 교통정리가 일단락되자, 우리는 빠르게 몰두할 수 있었고 2시간 안에 대부분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사실, 은채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혼자서 팀별과제를 처리하는 것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았다.
발표를 내가 뺏어오고 나서야, 그녀는 어느정도 발표를 각오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미완성의 대본도 70%정도는 준비한 상황이라며 뒤늦게 실토했다.
은채는 그 대본을 참고하라며 흔쾌히 투척했고, 나는 조금의 사양도 없이 대본을 냉큼 챙겼다.

교통정리가 된 덕분인지, 우리는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않은 뒤 모든 과제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끝이다, 끝!"
어찌어찌 둘이서 납득할만큼을 뽑아냈다.
최악의 경우, 나머지 조원 두명이 발표 당일날 불참한다하더라도 하등 상관없을만큼 말이다.
물론 그건 준비과정까지의 일이다.
가장 큰 고비인 발표는 아직 남았고 학부생인 우리로서는 교수님께 와장창 깨지는 날이 겁날 수 밖에 없었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이자 숙제다. 지금은 준비과정의 끝을 순수하게 기뻐했다.

"이야, 이제 자긴 손털었다고 막 티를 내네?"
나는 괜시리 궁시렁대며 은채를 톡톡 건든다.
"고생 좀 해, 선배~"
으쓱하는 그녀의 어깨가 내려가는 동시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린다.

휴대폰을 켜서 슬쩍 시간을 본다.
- PM 3시 32분 -
2시간 남짓이라니, 꽤 시간이 걸린줄 알았는데 생각만큼은 아니다.
뭔가 아쉬웠다. 후련함과는 다른, 말 그대로의 아쉬움.
이제 뭐해야 하나.
적당히 헤어지고 집에 도착하면 5시쯤 되겠지. 대충 씻으면 저녁시간이 될거고, 밥 먹고 좀 쉬다보면 음...
오늘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중인데, 그녀가 나를 부른다.
"선배,"
"응?"
"저기, 음.."
은채가 우물쭈물한다.
왜그러지? 과제가 걱정되서 그러나?
"음, 음.."
항상 자신감에 차있던 그녀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던 모습.
당연하게도 나는 궁금했지만 애써 재촉하진 않는다.
주저하는 사람에게 성급함을 건네는 것은 판을 엎어버리겠다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선배, 오후에 바빠?"

왔다.

탁자의 모서리를 스치듯 넌지시 들어오는 은채의 말 한마디는 충분한 기다림의 보상이었고,
아무리 눈치가 없고 둔한 사람이라하더라도 그 의도를 읽을 수 있을만큼 정확했다.
"응? 아니 괜찮은데. 그냥 집에나 갈까 하고 있었지."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슬쩍 대답을 흘린다.
그것은 그녀가 원하던 정답.
"아! 잘됐다 그럼!"
그녀가 솜사탕을 베어물은 아이처럼 활짝 웃는다.
"선배 오늘 내가 저녁 쏠게!"
자신감 만큼이나 점점 커지는 은채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내 입꼬리는 아주 많이 올라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숨기지 않은 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만큼 나도 점점 커져간다.
"이야~ 완전 땡큔데?"
그녀 못지않게 붕뜬 기분을 숨기지 않고 활짝 터트렸다.
"음, 그런데..."
나는 손가락으로 턱을 긁으며 말꼬리를 늘인다.
"으, 응?"
약간의 긴장감이 은채를 흔든다.
"저녁 먹기엔 좀 이르지 않아?"
손가락은 어느새 액정이 켜진 휴대폰을 톡톡 두드리고 있다.
"엑! 그, 그런가.."
버벅이는 그녀를 빨리 풀어주기 위해, 나는 냉큼 딜을 한다.
"에이, 뭐 대충 구경도 하고 시간 좀 보내다가 밥 먹으면 되겠지, 안그래? "
"음~~ 콜!"
딜은 성공적으로 먹혀들어갔고 서로가 흡족해한다.

설렌다.

하하,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은채와 함께 기웃거리는 번화가는 충분히 익숙한 곳이라 그렇게 별다른건 없었지만, 신기하고 새롭기만 했다.
대형서점을 들어가 구경하거나, 아기자기한 물품을 모아둔 팬시점을 돌아다니며 전혀 다른 공간을 맛본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을,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던 곳들이 살갑게 다가왔지만 이상함은 처음 뿐,
나는 빠르게 그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갔고 어느새 은채와의 거리도 좁혀져있었다.

주말의 오후 때의 번화가는 당연하리만치 사람이 많았고, 지친 은채의 발걸음도 눈에 띄게 무뎌진다.
애시당초 계획하고 움직이는 형식이 아니라 남은 짜투리 시간에 맞춘거라 어쩔 수 없이 동선이 지저분했고,
은채의 하이힐은 그러한 상황에 맞지 않는 아이템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걷는건 힘들다고 판단, 나는 다른 대안을 생각해본다.
적당히 쉴 수 있는 곳.
카페?
아니다, 방금 전에 카페에서 나왔는데 무슨.
그럼 대실?
좋긴한데, 혼자서 너무 앞서가진 말자.
무작위로 떠오르는 선택지를 차분히 소거해가며 그럴듯한 몇가지중 하나를 표면으로 올린다.

"은채야, 너 혹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화 봤어? 안봤으면 오늘 볼래?"
"어! 선배 안봤어? 나도 그거 보고 싶었는데!"
정말 보고싶었던 영화였는지, 은채의 반응은 눈에 띄게 폴짝거린다.
"잘됐네. 가자, 가자."
나는 우물쭈물대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그녀를 이끌고 멀티플렉스로 향했다.

주말이었지만 다행히 자리는 있었고, 나는 재빨리 표 두장을 예매했다.
상영까진 15분 남짓 시간이 있었기에, 우리는 대충 앉을 곳을 찾아 막간의 휴식을 가진다.
"휴, 이제와서 말인데 우리 꽤나 걸었나봐. 사실 발이 좀 아프더라구."
"선배, 나도 나도! 으..괜히 힐 신고 왔나봐. 그냥 운동화 신고 올걸, 헤헤."
혀를 반쯤 베어문 은채가 눈을 찡긋한다.
말은 흘러갈듯 가벼웠지만 조금씩 다리를 주무르는 그녀를 보고있자니 하나하나 허투루 넘길만한건 아니었다.
"..."
순간 굉장히 무신경했을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상하게도 거기까지가 다였다.
그렇게 혼자서 낑낑대는 동안, 영화의 상영시간은 코 앞으로 다가왔고 우리는 슬슬 입장 준비를 한다.
"뭐 좀 마시는게 낫겠지?"
그렇게 말하곤 나는 매표소 옆 스낵바로 향한다.
음료수 두개 사는 가격이나 팝콘콤보 가격이나 거기서 거기니, 대충 콤보세트 하나 사야겠다 싶어 지갑을 꺼내는데 은채가 황급히 말린다.
"선배, 선배..! 잠시만!"
"응?"
은채는 내 손을 덥썩 잡고는 뒤쪽으로 끌어당긴다.
"아이 참,"
"왜? 음료수 싫어?"
나는 영문도 모른체 끌려왔기에 그녀에게 물어볼 말은 그것 밖엔 없었다.
"..너무 비싸!"
"응?"
"아니, 너무 비싸다고. 무슨 음료수가 3천원? 콤보 세트가 9천원? 어휴, 티켓 한장 값이야!"
"..."
"선배 그러지말고 저기 편의점에서 음료수 사가자. 그러면 두명이서 3천원이면 충분하거든."
"어, 음.. 팝콘은 안먹고 싶어? 팝콘은 금방 튀긴게 맛있는데.."
"에이 에이, 좀 이따 밥 먹을건데, 그리고 나 팝콘 별로 안좋아해요~"
"..."
듣고보니 은채의 말이 대부분 맞다. 항상 영화관에 오면 당연하다는 듯이 팝콘과 음료수를 극장내 스낵바에서 구매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절반도 먹지 못한 팝콘을 버리곤 했으니까.
그게 극장의 상술임을 알고 있었지만 딱히 어떻게 바꾸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고, 특히 여자 쪽에서 이렇게 말해준 건 처음이었다.
그녀들은 항상 사달라는 쪽에 포진하고 있다고만 생각했거든.
어쩜 이렇게 기특한 소리만 할까?
그래서 그런지 알뜰 살뜰하게 구는 은채가 놀라웠다. 자기 지갑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데 꼼꼼하게 챙기는게 여간 보통이 아니다.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가 신기하다. 까도 까도 새로운 속살을 보여주는 양파같다, 그것도 긍정적인 부분만 드러나는.
"하하, 이것 참."
"왜, 왜?"
내 입에선 더이상 숨기지 못하는 웃음이 튀어나왔고, 은채는 뒤늦게 아차했는지 뻘쭘하게 되묻는다.
"괘, 괜히 낭비해서 뭐해, 아낄 수 있는데는 아껴야지!"
파닥거리며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그녀의 머리를 쓰윽 쓰다듬어준다.
"맞아, 맞아. 울 후배님한테 매번 배웁니다요."
"선배 놀리는거 아니지?"
"놀리기는 무슨, 나는 그런 마인드 꽤나 좋아하고 지지해. 꼼꼼한게 좋은데? 아줌마 같아서?"
"아, 선배! 놀리는거 맞구만!"
한 여름날, 발갛게 익어버린 홍시같은 그녀의 얼굴이 터질듯 했다.
"후후, 영화 시작하겠다. 음료수나 사러 가자."
나는 적당히 얼무어버리곤 그녀를 이끈다. 아직도 씩씩대는 은채는 여전했지만, 막 화가 난것 같진 않았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고르며 생각한다.
그녀의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세심한 마음씨며 이것저것 재보지 않는 것 등등 정말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뭐, 너무 사람이 좋아서 이것저것 떠맡는 면이 있긴하지만, 그건 잘 조율해볼 문제고.
게다가 예쁘장한 얼굴도 충분히 높은 점수를 받지 않겠는가, 또 그 날 벗겨본 바로는 몸매도 나쁘지 않았고 말야.

"선배, 뭐해? 이러다 영화 시작해!"
"아, 응 응."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빠르게 현실로 돌아온다.
일단 지금은 재밌게 영화를 보자. 꼭 보고싶은 영화였으니까.




한시간 반 남짓한 영화가 끝나고 나니 어느새 저녁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 되고 말았다.
한턱 단단히 쏘겠다는 그녀가 데려간 곳은 허름한 오겹살집, 참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채의 장담만큼이나 맛집이 맞는지, 안은 꽉찬 사람으로 바글바글했고 우리는 약간의 대기시간을 거친다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모, 여기 오겹살 2인분, 아니 3인분 주세요."
나를 의식한 듯, 주문을 수정한 은채는 오겹살 3인분을 시켰고, 얻어먹는 입장에서 나는 얌전히 컵에 물을 따랐다.
이동이 끝났기 때문일까, 우리는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자연스레 서로가 좋았던 부분을 말하며 서로의 만족감을 드러낸다.
"우와, 영화 진짜 재밌더라 짱! 완전 짱!"
"동감. 잘 만들었더라, 지루하지도 않고."
나만큼이나 은채도 만족감이 컸던지 잔뜩 상기된 표정이 볼만하다.
"선배 호텔 완전 예쁘지 않았어?"
"응, 색감이 참 좋더라구."
맞아 맞아! 음, 호텔 뿐만이 아니라 영화가 전체적으로 생생한게 그, 그.."
뭔가를 말하고 싶은 그녀를 살짝 거들어준다.
"예쁜 액자덩어리 같았다?"
"그래 바로 그거! 진짜 예쁜 액자!"
그녀가 탁- 하고 무릎을 치며 히죽히죽 웃는 동안 고기가 나왔고, 한사코 자기가 굽겠다며 강짜를 부리는 은채의 손에서 여유롭게 집게를 뺏은 나는 적당량의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치익- 하는 소리가 지나가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퍼진다. 맞은 편에 앉은 은채는 벌써부터 침을 꼴깍 삼킨다.
"선배, 이거 수입산 아니고 제주산이다? 지난번에 먹어봤는데 완전 대박!"
젓가락을 입에 물고 엄지를 척척 올리는 그녀를 보고있자니, 어서 빨리 고기를 구워줘야겠다는 생각에 집게를 바삐 놀린다.
덕분인지 몇개 정도는 노릇하게 익었고, 적당한 크기의 한 조각을 그녀의 앞접시에 놓아준다.
"잘먹겠습니다~"
놓기 무섭게 집어든 그녀가 고기를 입안으로 넣었고 오물오물 씹는다. 이윽고 은채의 얼굴엔 행복감이 가득 맴돈다.
흐뭇한 마음이 절로 샘솟는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비슷한 상황. 지난번 그녀와의 식사도 이런식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땐 술이 문제였다.
뭐, 그 이후로 여러가지 선택의 차이가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취한 그녀와 미처 해소하지 못한 내 성욕이 부닥친 것.
그것을 재빨리 인정하고 적당히 긴장감을 유지한다.
"어, 음..."
나는 생각의 환기를 위해 적당히 운을 뗀다.
"우리 후배님은 되게 얌전하고 그런줄 알았는데, 갈수록 아니다?"
일단 운을 떼고나니 어떻게든 말이 이어졌고, 점점 머리 꼭대기로 오르는 그녀의 행동으로 자연스레 넘어간다.
"아, 물론 싫은건 아니고, 나야 좋지, 좋은데. 궁금해서 말야."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이 반가웠던 나로써는, 부담주지 않는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선에서 재촉을 가한다.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찬찬히 바라본다.
강한 한방보다도 때로는 지긋함이 무언가를 오픈하게끔 할때도 있었고, 은채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헤헤, 그냥 뭐 음.. 친한 사람한테는 이래, 원래."
목표가 없기 때문일까,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이 유독 더디다.
"낯은 좀 가렸나, 어렸을때부터? 공부는 곧 잘해도 뭐.. 주변에서 보면 재미는 없잖아, 그런 사람."
"흠,"
"내가 딱 그랬고. 아, 그렇다고 음침한 성격은이었냐면 또 그건 아녔어."
깨작거리는 그녀의 젓가락이 안쓰러워, 나는 슬쩍 고기를 집어 그녀의 앞접시에 놓는다.
"아, 선배 땡큐."
자신의 고기가 충분히 반가웠는지 은채는 냉큼 입안에 집어넣곤 오물거린다.
"음, 음..~ 타이밍이지. 무리에 못들어가기 시작하니까, 그 뒤론 계속 힘들더라구."
"..."
"푸하~! 암튼, 그래서 친구도 몇명 없네요!"
"..."

괜히 물었다.

알고싶던 걸 넘어서 굳이 들쳐내고싶지 않은 곳까지 들여다본 기분이다.
말마따나 요즘 세상에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어디 흔한가?
오랜만이네 잘지냈어? 하는 놈도 친구, 언제 한번 밥 먹자고 하는 놈도 친구, 그 뒤로 연락 끊기는 놈도 친구라고 하는데 말이다.
비록 은채의 입을 빌려서 나왔지만, 나의 푸념이기도 했다.
자연스레 내 손은 담배를 꺼냈고 불을 땡긴다.
딸칵-
"...후~"
몽골몽골한 흰 구름이 고기 연기와 뒤섞인다.
한창 혼자서 분위기를 만끽하던 중, 연기너머로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은채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순간 아차 싶어 담배를 입에서 뗀다.
"아.. 미안, 담배 별로지?"
지긋이 바라보던 그녀가 눈을 살짝 내린다.
"흐응..~"
묘한 콧소리가 귀를 맴돈다.
"담배도 피라고 파는건데 뭘, 괜찮아 선배."
"..."
애꿎은 파무침만 뒤적이는 그녀의 젓가락질이 유독 또렷하게 보인다.
한동안은 지속될것만 같은 어색함 속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타들어가는 담배의 허리가 끊어지길 바란다.
차라리, 차라리 그렇게 그냥 홀로 타버려라.

"근데, 난 담배 안피는 사람이 좋더라~"
아까보다 조금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눈치챈 것일까. 은채는 슬그머니 옆자리를 스치듯 운을 띄웠고, 그것은 꽤나 유효하게 들어온다.
피식, 웃게 만드는 힘이 그녀에겐 있다.
껄끄러운, 그게 누가 됐든 그 자체를 넘길 수 있는 힘이 은채에겐 있었다.

"아, 그래? 그럼 이제부터 담배 끊어야겠네."
마치 그래야했던 수순처럼, 나는 재빨리 담배를 재떨이에 비빈다.
비록 은채에 의해 조율 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 자체가 썩 나쁘진 않았다.
그 증거로,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그녀가 내 눈에 한껏 박혀들어오고 있었으니까.
동그랗던 은채의 눈이, 점점 초승달처럼 굽는다. 해맑은 미소가 눈꼬리를 타고 내려온다.
"오오, 선배~~"
"후후~"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여름이 차오르진 않았지만, 못지않게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오겹살 3인분에 찌개 하나 밥 두개, 다해서 3만1천원입니다."
"앗, 네 여기요."
은채는 카드를 꺼내곤 야무지게 계산을 한다.
"이모 잘먹었어요 수고하세요~"

"오늘 잘 얻어먹었네. 잘 먹었어 은채야."
"헤헤, 어때 맛있지? 맛있다니까~"
고기집을 빠져나온 우리는 가까운 정류장을 향해 걷는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고 오늘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다지만, 뭔지 모를 아쉬움은 여전했다.
"..벌써 8시네~"
은채도 같은 마음일까, 꼬리를 흘리는 말에는 시원섭섭함이 묻어나온다.
아쉬운만큼이나 우리는 정류장에 금방 도착했다.
나보다 먼저 올것 같은 그녀의 버스. 나는 그렇게 헤어짐을 기다린다.
"선배 그런데 아까 휴대폰 계속 울리던데, 전화? 바쁜거 아냐?"
은채는 아까 고깃집에서 울리던 내 휴대폰이 못내 신경쓰였나보다.
"아, 그거? 카톡이야. 친구, 친구."
한창 고기를 구울때 비소한테서 카톡이 몇통 오긴 했다. 하지만 정말 별것 아니었기에 나는 안심하라며 그녀를 다독인다.
"으음~"
"응?"
"으으음~~"
은채의 콧소리가 묘하게 길어진다, 마치 어서 빨리 실토하라는 듯이.
"친구?"
"응, 친구."
"여자?"
"어, 음,"
순간적인 기습에 나는 허를 찔렸고, 심장이 빠르게 곤두박질 친다.
"아니, 그.. 아는 동생인데, 옛날부터 알던 사이라.. 꽤 됐어, 3년? 4년?"
나는 캥기는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상금을 들킨 사람마냥 버벅인다.
눈앞이 핑그르 하고 돈다.
"아이고, 네 네. 그러시겠지요~"
"..."
평소보다도 반음정도 높은 은채의 목소리는, 자꾸만 나를 이상하게 몰아넣는다.

하아, 여기 꿀단지를 뺏긴 푸우가 있습니다.

정말 이번만큼은 비소가 귀찮다고 느껴진다. 아직 확인하지 않았지만 분명 평소처럼 시덥지않은 내용의 상담일게 분명했다.
오늘은 뭐했고, 그 남자애는 어떻게 해줬으며, 내일은 이랬으면 좋겠다는 둥.
꼬박 꼬박 보고해주는 건 고맙긴한데, 그렇다고 방해하면서까지는 좀 아니지.
알랑가 모르겠지만 말이다.

"풉!"
어정쩡하게 서서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이 웃겼던걸까, 은채는 깃털같은 웃음을 터트린다.
"에이~ 농담 농담! 연락할 수도 있지 뭐, 후후~"
"..."
후련할만큼 시원해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오히려 나는 맥이 풀려버린다.
"나도 연락하잖아?"
"응?"
"나도, 나도 선배 친구아냐?"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을 가리키는 은채. 나는 그냥 쓰게 웃고 만다. 오늘을 그녀에게 휘둘렸지만, 휘둘릴만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는 사이, 버스가 도착했고 은채는 크게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버스의 후미등이 까만점이 될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 응. 그냥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서라기에는, 너무 시간이 지났나..?"
"딱 좋은데, 선배? 한 4시간만 빨랐다면?"
"하하, 뭐 그건 늦었으니 어쩔 수 없고. 굿나잇 인사는 아직 유효하지?"
"음~ 안그래도 이제 잘려구."
"그래, 오늘 과제하고 돌아다니느라 고생했어. 늦었는데 빨리 자."
"고생은 무슨, 아무튼 선배도 잘자고 내일 봅시다!"
"응~"

삑-

"...후"
전화를 끊는다. 열감이 돌고 탁한 공기가 제멋대로 폐를 들락날락거리지만, 그 마저도 기꺼워하며 숨을 몰아쉰다.
덕분에 튀어나올듯 요동치던 심장이 차츰 정박자를 맞춰갔고, 여유가 생긴 나는 오늘 은채와 있었던 일들은 차근차근 되짚어본다.
오후에 과제로 씨름하고 못봤던 영화를 함께 감상, 잔뜩 벼른 그녀로 인해 얻어먹은 저녁 그리고 덤으로 뭉근했던 분위기까지.

이정도면 데이트라고 봐도..
조악한 수를 부린것 치고는, 예상보다 훨씬 질 좋은 수확을 거뒀다.
당연히 나는 행복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하하, 이거 참.."
스스로가 낯 뜨거울만큼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비록 지난번 같은 썸씽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고양감은 그때의 몇배를 책정한다해도 수긍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걸로 조금은 가까워진 것일까.
은채를 마주칠때 좀더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도 될까.
그녀의 선 안으로, 어느 정도는 내가 발을 디뎌도 괜찮지 않을까.
그 어떤 가정을 해봐도, 티끌만한 부정이 걸러나오질 않는다.
확실한 것은, 은채를 만날 내일이 지금 당장이라도 기대된다는 사실이다.

후후,
나는 다시 한번 힘을 낸다.
다시 시작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만 그녀를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고, 실제로 그랬다.
한번 사그라들었던 자지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다. 허전함을 달래줄 대상을 향해 발을 놀린다.
퍽-!
"...으읍!!"
아까 돌아오면서 주워왔던 여자.
나는 발을 몇번 더 놀려 윽윽거리는 이 년을 꺽꺽거리게 만든다.
이름? 나이? 모른다. 얼굴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유심히 본 적이 없으니까.
술에 잔뜩 취에 구석진 골목에 널부러져 있었고, 키가 은채만큼이나 아담했다는 점, 그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괜찮다. 이런 인스턴트에 너무 많은걸 바랄 순 없었고, 나는 그 정도의 이해심은 있었으니까 말이다.
정신을 못차리는 와중에도 덜덜떠는 이 년의 뺨을 몇대 갈겨주곤 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한다.
그리곤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꽐라년의 가랑이를 가르고 단번에 들어간다.
움찔하며 엉덩이에 힘을 주지만, 이 보지는 조이는 맛이 별로 없다.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아쉬운건 어쩔 수가 없었다.
천천히 두어번을 왕복하며 워밍업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찍어누르기 시작한다.
"후욱, 훅..훅..!"
50M를 6초대로 달릴만큼 빠르고 격하다.
귀두 끝이 짓눌릴 정도로 거침없이 찔러대지만, 이 년은 술을 얼마나 퍼마신건지 조금의 미동도 없다.
마치, 시체랑 하는 섹스같다.
평소라면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걷어차고 자지를 뽑아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은채를 생각하면 자지에는 얼마든지 새로운 피가 공급되고,
은채라고 생각하면 뾰루지 투성이의 더러운 엉덩이도 하얗고 탱글탱글하게만 보였다.

은채! 은채야!
나는 활화산 같은 외침을 속으로, 속으로 삼키며 질주한다. 불구덩이를 통째로 집어삼킨 벌거숭이마냥, 달리고 또 달린다.
도무지 멈출 수 없다는걸 알기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기에.
바닥에 깔려있는 개년의 몸이 질질질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양손을 써서 어깻죽지를 콱-하고 누른다.
상체를 틀어쥔 고정장치와 엉덩이를 쳐올리는 불주사에 의해 이 년의 허리가 점차 둥글게 말려간다, 여간 불편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은채를 몇번이고 생각한다면 제한시간 안에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두번, 세번은 없다.
한발, 한발이면 충분하다. 쏴죽일만큼 강력한 한발의 사정이면 충분하다.
자지가 닳아서 짧아질 것만 같다. 숨을 쉬지않고 허리를 몇번이나 흔들어재낀지 모르겠다. 시야가 거뭇거뭇하다.
더이상은 위험하다고 판단, 나는 막아둔 둑을 터트린다.
푸슉, 푸슈슉-
복근을 잔뜩 당기며 움츠린다. 한방울이라도 더 짜내듯, 나는 힘을 준다.
기분이 좋다.
하지만 이내 뒤집힌다.
진짜였다면, 저런 허벌나는 골뱅이년이 아닌 진짜 은채였다면...

나는 속으로 쓰게 웃는다.
이제 겨우 살가워졌을 뿐이다, 갈길이 구만리인데 나는 벌써 그 다음을 생각한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지나가지 않은 기회는 잡으면 된다. 그래서 만족스러웠던 오늘, 기대되는 내일이 아닌가.
정신적 자위로 남은 욕구를 빼준다. 덕분에 흥분된 몸과 마음이 빠르게 진정된다.

잘 될거야, 분명.
잘 될거다, 정말로.

1분 1초라도 빨리 오늘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일이 온다.
내일의 내가 온다, 은채가 온다.
은채의 웃는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환하다.
빨리 이 년을 처리하자.
그리고 은채를 만나자.

좀처럼 얼굴의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피식-
병이다.


(계속)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모두에게 좋은 일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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