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잡시다. 자고나서 정신이 개운해지면 그때 마저 하던가 아님 대화를 하던가 결판을 보죠."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처진 그녀를 억지로 눕히곤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어줬고, 다행인지 그녀는 가만히 있는다.
"...그럼 잘자요."
나도 곧바로 침대에 눕는다. 빳빳한 고추가 덜렁인다.
잠시 미뤄뒀던 피로가 그제서야 밀려온다. 눈이 빠르게 감겨갔다.
아, 팬티 입고 자야하는데...
잠에서 깼을때, 이미 그녀는 없었다.
곱게 개어둔 이부자리가 바닥에 없었다면 그녀와 어젯밤을 함께 보냈다는 것도 의심할 만큼 깔끔했다.
머리 맡을 뒤적여서 휴대폰을 켠다.
오전 11시 23분
아침이 다 날아가버린 이른 정오다.
문득 어제의 모든 것이 낯설고 희미하게 다가왔다.
이해가지 않는 것들 투성이에 어느새 나는 한숨을 쉰다, 그리곤 시계바늘만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되짚어본다.
왜 생전 하지도 않는 일을 했을까.
졸렬한 영웅심도 아니고 쓰고 버리는 이기심도 없었는데, 왜 나는 덜컥 그녀 사이로 끼어들었던 걸까.
이유도 없었던 원인에 사고뭉치의 전개, 허무하게 박살난 결말만이 남았는데..
남은건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안도감, 그리고 한밤의 펠라치오.
그 와중에 이부자리 위에 있는 작은 쪽지를 발견한다.
나는 침대에서 어렵사리 일어나 그걸 집어서 폈다.
< 그냥 가면 예의없는 사람 될까봐 쪽지 남겨요. 재워준건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공짜는 싫어요. 꼭 연락해요. 010-... >
어두웠을텐데 용케도 썼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올망졸망한 글씨가 쪽지 안에 가득 채워져 있다.
그렇게 떨어져나갔다고 생각한 끈이 아직 간당간당하게 붙어있다는 느낌,
혹은 끝난 줄 알았던게 아직 한참 남아서 서서히 짓누르는 그런 기분이 든다.
안도와 부담감이 뒤섞인 한숨이 천천히 나왔다.
당돌한 그 아가씨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가보다, 한글자 한글자마다 그게 묻어 나온다.
공짜는 싫다니.
쭈그리고 바닥에서 잔 하룻밤일 뿐이다, 그것도 고작 3~4시간 남짓의.
그것도 갚겠다고 한다. 새벽에 저지른 그녀의 행동을 짚어본다면 그 방법이 뭔지는 안봐도 뻔했다.
살짝 흥분이 돌만큼 부끄러웠다.
술이라도 진탕 퍼먹지 않는 한, 그녀에게 먼저 연락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보였다.
나는 쪽지를 구긴다.
나중의 내가 안다면 모처럼의 기회를 날렸다고 바락바락 대들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로선 그녀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락하지도 않을 쪽지를 가지고 안절부절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오늘은 바빠.
그리고 약속도 있고 여러모로 다른 곳에 신경쓰고 싶지 않아.
덜컥-
쓰레기통 뚜껑을 연다, 그리곤 움켜쥔 손을 치켜든다.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좋다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사정하듯 쪽지를 버렸다.
끼익-
현관문을 조심스레 연다.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고 계시니 문고리를 잡은 손에 한결 힘이 들어갔다.
덜컥-
완전히 현관문이 닫힌걸 확인하고 나서야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일찍 일어난 탓에 약속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고 그게 행동에도 여실히 묻어나온다.
담배 한개피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모금 빨아들이자, 곧 뭉근한 연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멍할 정도로 여유를 부리던 마음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오늘은 조별 과제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발표는 다가오고 준비하는 사람은 항상 정해져있다보니, 내가 강짜를 부려서 괜히 모이자고 바람을 넣었다.
물론 내키기 않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놓고 싫은 척은 못하고, 결국 맞춰 맞춰 주말에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래봤자 올 사람은 정해져있었고, 4학년 선배는 당연히 오늘도 패스.
면접 준비가 바쁘다는 둥 도무지 시간이 안난다는 둥 미안해 하지만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듯 슬쩍 손을 털었다.
[미안해서... 이거 피자헛 기프티콘인데 조원들이랑 같이 먹어 ^^;]
그래도 좀 찔리긴 했는지 선배는 알아서 기프티콘을 선물해줬고, 나는 꽤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버스로 몇정거장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주말에도 은채를 만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주말에, 그것도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번화가는 한적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적당히 근처 편의점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떼운다.
약간의 지루함에 찌뿌둥할때쯤 은채로부터 카톡이 왔다.
[선배 어디야? 나 도착했어~]
드디어 왔다는 생각에 냉큼 편의점을 빠져나와 약속 장소로 달렸다.
은채가 보인다.
꽤 멀리 있어서 자세히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어깨 머리스타일 아담한 체형까지,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여자를 기다리게 하다니! 헤헤~"
일부러 샐쭉거리는 은채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오지만 되도록 내색하지 않고 받아쳤다.
"아~~까 전에 왔거든요? 편의점에서 뭐 좀 사고 왔지."
그러곤 그녀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민소매 차림이라 그런지 손에 닿는 그녀의 보드라운 어깨가 시릿할 정도로 부드럽다.
순간, 과한 스킨쉽인가 아차 싶었지만 은채는 대수롭지 않은지 기우뚱하는 몸의 균형을 잡고 금새 반격을 해왔다.
"에잇! 에잇 에잇!"
그 모습 마저도 귀여워, 나는 얌전히 등짝을 내줬다.
"그런데 선배, 다른 사람들은 아직인가봐?"
한바탕 꽁냥거림을 마무리하고 은채는 다른 조원을 찾는다.
"아아, 안그래도 연락해봤는데 그 선배님은 오늘도 못나올거 같다고 어제 연락왔었어."
"음~ 그랬어?"
"으응. 수민씨는 내가 한번 연락해볼께."
그러곤 재빨리 카톡을 보낸다.
하지만 그녀도 안올거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수민씨 주말에 조 모임 할 생각이에요."
"에? 으음, 저 그..."
사실 그녀에겐 어제 미리 전화를 했었다. 역시나 귀찮음 가득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흘러나왔었고, 나는 미리 예상한대로 준비한 미끼를 던졌다.
"사실 저희가 왠만한건 다 했잖아요?"
"네? 네, 네.."
"확인차 한번 모이자고 한거라서 딱히 뭐 할건 없어요. 물론 한번이라도 더 모이는게 서로 호흡 맞추기 좋겠지만..."
"..."
잠시 뜸을 들이곤 서로가 달가워할 말을 잇는다.
"정 바쁘시면 미리 연락주세요.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맞춰볼께요."
"아, 정말요??"
여태껏 들어본 그년의 목소리 중 가장 생기가 넘쳤다.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 나는 목소리. 나는 당장이라도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물론이죠. 안그래도 바쁘실텐데 번거롭게 굴 수도 없은거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문자라도 한통 보내주세요."
"네~~"
그녀는 기분좋게 대답했고 나도 속시원하게 전화를 끊는다.
통화는 1분 1초가 아까울만큼 역겨웠지만 단 한통, 한통의 전화로 그녀의 얼굴 볼 일을 비약적으로 줄였다.
몇번을 따지고봐도 이건 훨씬 남는 장사였고, 더불어 나에겐 더할 나위없는 시간을 선물해 준다.
방금전까지만해도 거북했던 기분이 점차 희미해지고 그 위를 두근거림으로 빠르게 덧 씌운다.
제발 평소대로만해서 나오지 않았으면.
역시 수민이 이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나는 확인차 전화를 건다.
여러번은 신호음이 지루하게 울리고나서야 건너편에서 그녀의 미적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웬일로..?"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그녀가 참으로 대단하고 뻔뻔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조별모임날인데 문자 안보내주셨더라구요."
"아..."
나도 따박따박 연락하기 싫은데 못 오겠다는 문자 한통 보내줬으면 좀 좋아?
당장이라도 마무리짓고 싶다.
"오늘 못나오시는거죠? 그냥 저희끼리 하는걸로 알께요."
"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화기 넘어로 죄송하다는 그녀의 말이 남루하게 기어나오지만, 신경쓰지않고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은채야, 수민씨 오늘 못 올거 같은데?"
"엥.? 왜?"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늦을꺼 같다길래 그냥 우리끼리 한다고 했는데, 음.. 괜찮지?"
나는 슬쩍 난감하다는 듯 턱을 긁으며 꾸며 말한다.
"에, 어려운 건 없으니까..."
은채는 잠시 고민 했지만, 그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뭐~ 후후, 선배가 많이 도와주겠지?"
마치 전혀 문제 없다는 듯이 동그란 눈을 찡긋거리는 그녀가 철없어 보이기도,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해서 나는 피식거린다.
"에! 뭐야! 선배 그거 비웃은거??"
아냐 아냐, 정말 조금도 아냐
입이 근질거렸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나는 굳이 해명하지않고 은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는걸로 넘겼다.
씩씩대는 그녀를 잘 달래곤, 우리는 카페로 왔다.
주말이라 그런지 몰라도 꽤나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조용하게 과제를 정리해야했으므로 적당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은채는 자리를 잡자마자 준비해온 자료를 촤르륵 펼친다. 그리곤 퍼즐 맞추듯 비슷한 유형별로 묶어내며 나름의 균형을 맞춰간다.
"으음..~"
은채는 정말 열심히도 한다. 원래 4명이서 할 일이라는 걸 잊었는지, 아니면 감내하는지 모르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다.
주문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겉이 물기로 흥건하다.
나는 달가워하며 아메리카노 한모금을 마신다.
얼음이 녹아 처음보단 밍밍하다. 커피가 아니라 그냥 진한 보리차를 마신 것만 같았다.
"커피 좀 마셔. 얼음 다 녹겠더라."
그리곤 그녀 앞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쑥 내밀자, 붙어있던 은채는 그제야 상체를 들어올린다.
"에구 에구.."
안그래도 불편한 카페 의자인데, 낮은 테이블에 꽤 오랜 시간을 바짝 붙어서 있었다보니 은채가 앓는 소리를 낸다.
조막만한 손으로 허리를 톡톡 두드리는게 여간 안쓰럽기 그지 없다.
"..거의 다 한건데, 너무 무리하지 말자."
부담주기 싫었던 나는 은근하게 말을 건냈고, 은채는 헤헤거리며 배시시 웃고 만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웃음이었지만, 결국 자기가 모든걸 책임지려 할걸 알기에 나는 속을 한숨을 쉰다.
행여 프린트한 자료가 젖을까봐, 마시던 아메리카노의 물기를 손으로 훔쳐내곤 테이블 한켠에 놔둔다.
그리곤 은채만큼이나 바짝 테이블에 붙는다.
산만하게 퍼트려진 프린트물 사이에서, 나는 한 묶음을 집어들었다.
PPT를 그대로 인쇄한 묶음은 얼핏봐도 양이 제법 되어 보인다.
이건 또 언제 준비한거야..
나는 PPT자료를 빠르게, 하지만 꼼꼼히 훑어본 뒤 덮는다.
그리곤 곧 내가 저지를 바보같은 일에 대해 이해득실을 갸늠해본다.
분명 내 능력 밖인데 하,
한톨만큼의 후회를 상기하곤 빠르게 지워낸다, 그리곤 머리가 빨리 돌기 전에 냅다 질러버린다.
(계속)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처진 그녀를 억지로 눕히곤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어줬고, 다행인지 그녀는 가만히 있는다.
"...그럼 잘자요."
나도 곧바로 침대에 눕는다. 빳빳한 고추가 덜렁인다.
잠시 미뤄뒀던 피로가 그제서야 밀려온다. 눈이 빠르게 감겨갔다.
아, 팬티 입고 자야하는데...
잠에서 깼을때, 이미 그녀는 없었다.
곱게 개어둔 이부자리가 바닥에 없었다면 그녀와 어젯밤을 함께 보냈다는 것도 의심할 만큼 깔끔했다.
머리 맡을 뒤적여서 휴대폰을 켠다.
오전 11시 23분
아침이 다 날아가버린 이른 정오다.
문득 어제의 모든 것이 낯설고 희미하게 다가왔다.
이해가지 않는 것들 투성이에 어느새 나는 한숨을 쉰다, 그리곤 시계바늘만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되짚어본다.
왜 생전 하지도 않는 일을 했을까.
졸렬한 영웅심도 아니고 쓰고 버리는 이기심도 없었는데, 왜 나는 덜컥 그녀 사이로 끼어들었던 걸까.
이유도 없었던 원인에 사고뭉치의 전개, 허무하게 박살난 결말만이 남았는데..
남은건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안도감, 그리고 한밤의 펠라치오.
그 와중에 이부자리 위에 있는 작은 쪽지를 발견한다.
나는 침대에서 어렵사리 일어나 그걸 집어서 폈다.
< 그냥 가면 예의없는 사람 될까봐 쪽지 남겨요. 재워준건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공짜는 싫어요. 꼭 연락해요. 010-... >
어두웠을텐데 용케도 썼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올망졸망한 글씨가 쪽지 안에 가득 채워져 있다.
그렇게 떨어져나갔다고 생각한 끈이 아직 간당간당하게 붙어있다는 느낌,
혹은 끝난 줄 알았던게 아직 한참 남아서 서서히 짓누르는 그런 기분이 든다.
안도와 부담감이 뒤섞인 한숨이 천천히 나왔다.
당돌한 그 아가씨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가보다, 한글자 한글자마다 그게 묻어 나온다.
공짜는 싫다니.
쭈그리고 바닥에서 잔 하룻밤일 뿐이다, 그것도 고작 3~4시간 남짓의.
그것도 갚겠다고 한다. 새벽에 저지른 그녀의 행동을 짚어본다면 그 방법이 뭔지는 안봐도 뻔했다.
살짝 흥분이 돌만큼 부끄러웠다.
술이라도 진탕 퍼먹지 않는 한, 그녀에게 먼저 연락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보였다.
나는 쪽지를 구긴다.
나중의 내가 안다면 모처럼의 기회를 날렸다고 바락바락 대들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로선 그녀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락하지도 않을 쪽지를 가지고 안절부절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오늘은 바빠.
그리고 약속도 있고 여러모로 다른 곳에 신경쓰고 싶지 않아.
덜컥-
쓰레기통 뚜껑을 연다, 그리곤 움켜쥔 손을 치켜든다.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좋다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사정하듯 쪽지를 버렸다.
끼익-
현관문을 조심스레 연다.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고 계시니 문고리를 잡은 손에 한결 힘이 들어갔다.
덜컥-
완전히 현관문이 닫힌걸 확인하고 나서야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일찍 일어난 탓에 약속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고 그게 행동에도 여실히 묻어나온다.
담배 한개피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모금 빨아들이자, 곧 뭉근한 연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멍할 정도로 여유를 부리던 마음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오늘은 조별 과제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발표는 다가오고 준비하는 사람은 항상 정해져있다보니, 내가 강짜를 부려서 괜히 모이자고 바람을 넣었다.
물론 내키기 않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놓고 싫은 척은 못하고, 결국 맞춰 맞춰 주말에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래봤자 올 사람은 정해져있었고, 4학년 선배는 당연히 오늘도 패스.
면접 준비가 바쁘다는 둥 도무지 시간이 안난다는 둥 미안해 하지만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듯 슬쩍 손을 털었다.
[미안해서... 이거 피자헛 기프티콘인데 조원들이랑 같이 먹어 ^^;]
그래도 좀 찔리긴 했는지 선배는 알아서 기프티콘을 선물해줬고, 나는 꽤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버스로 몇정거장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주말에도 은채를 만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주말에, 그것도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번화가는 한적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적당히 근처 편의점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떼운다.
약간의 지루함에 찌뿌둥할때쯤 은채로부터 카톡이 왔다.
[선배 어디야? 나 도착했어~]
드디어 왔다는 생각에 냉큼 편의점을 빠져나와 약속 장소로 달렸다.
은채가 보인다.
꽤 멀리 있어서 자세히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어깨 머리스타일 아담한 체형까지,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여자를 기다리게 하다니! 헤헤~"
일부러 샐쭉거리는 은채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오지만 되도록 내색하지 않고 받아쳤다.
"아~~까 전에 왔거든요? 편의점에서 뭐 좀 사고 왔지."
그러곤 그녀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민소매 차림이라 그런지 손에 닿는 그녀의 보드라운 어깨가 시릿할 정도로 부드럽다.
순간, 과한 스킨쉽인가 아차 싶었지만 은채는 대수롭지 않은지 기우뚱하는 몸의 균형을 잡고 금새 반격을 해왔다.
"에잇! 에잇 에잇!"
그 모습 마저도 귀여워, 나는 얌전히 등짝을 내줬다.
"그런데 선배, 다른 사람들은 아직인가봐?"
한바탕 꽁냥거림을 마무리하고 은채는 다른 조원을 찾는다.
"아아, 안그래도 연락해봤는데 그 선배님은 오늘도 못나올거 같다고 어제 연락왔었어."
"음~ 그랬어?"
"으응. 수민씨는 내가 한번 연락해볼께."
그러곤 재빨리 카톡을 보낸다.
하지만 그녀도 안올거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수민씨 주말에 조 모임 할 생각이에요."
"에? 으음, 저 그..."
사실 그녀에겐 어제 미리 전화를 했었다. 역시나 귀찮음 가득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흘러나왔었고, 나는 미리 예상한대로 준비한 미끼를 던졌다.
"사실 저희가 왠만한건 다 했잖아요?"
"네? 네, 네.."
"확인차 한번 모이자고 한거라서 딱히 뭐 할건 없어요. 물론 한번이라도 더 모이는게 서로 호흡 맞추기 좋겠지만..."
"..."
잠시 뜸을 들이곤 서로가 달가워할 말을 잇는다.
"정 바쁘시면 미리 연락주세요.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맞춰볼께요."
"아, 정말요??"
여태껏 들어본 그년의 목소리 중 가장 생기가 넘쳤다.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 나는 목소리. 나는 당장이라도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물론이죠. 안그래도 바쁘실텐데 번거롭게 굴 수도 없은거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문자라도 한통 보내주세요."
"네~~"
그녀는 기분좋게 대답했고 나도 속시원하게 전화를 끊는다.
통화는 1분 1초가 아까울만큼 역겨웠지만 단 한통, 한통의 전화로 그녀의 얼굴 볼 일을 비약적으로 줄였다.
몇번을 따지고봐도 이건 훨씬 남는 장사였고, 더불어 나에겐 더할 나위없는 시간을 선물해 준다.
방금전까지만해도 거북했던 기분이 점차 희미해지고 그 위를 두근거림으로 빠르게 덧 씌운다.
제발 평소대로만해서 나오지 않았으면.
역시 수민이 이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나는 확인차 전화를 건다.
여러번은 신호음이 지루하게 울리고나서야 건너편에서 그녀의 미적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웬일로..?"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그녀가 참으로 대단하고 뻔뻔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조별모임날인데 문자 안보내주셨더라구요."
"아..."
나도 따박따박 연락하기 싫은데 못 오겠다는 문자 한통 보내줬으면 좀 좋아?
당장이라도 마무리짓고 싶다.
"오늘 못나오시는거죠? 그냥 저희끼리 하는걸로 알께요."
"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화기 넘어로 죄송하다는 그녀의 말이 남루하게 기어나오지만, 신경쓰지않고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은채야, 수민씨 오늘 못 올거 같은데?"
"엥.? 왜?"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늦을꺼 같다길래 그냥 우리끼리 한다고 했는데, 음.. 괜찮지?"
나는 슬쩍 난감하다는 듯 턱을 긁으며 꾸며 말한다.
"에, 어려운 건 없으니까..."
은채는 잠시 고민 했지만, 그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뭐~ 후후, 선배가 많이 도와주겠지?"
마치 전혀 문제 없다는 듯이 동그란 눈을 찡긋거리는 그녀가 철없어 보이기도,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해서 나는 피식거린다.
"에! 뭐야! 선배 그거 비웃은거??"
아냐 아냐, 정말 조금도 아냐
입이 근질거렸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나는 굳이 해명하지않고 은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는걸로 넘겼다.
씩씩대는 그녀를 잘 달래곤, 우리는 카페로 왔다.
주말이라 그런지 몰라도 꽤나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조용하게 과제를 정리해야했으므로 적당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은채는 자리를 잡자마자 준비해온 자료를 촤르륵 펼친다. 그리곤 퍼즐 맞추듯 비슷한 유형별로 묶어내며 나름의 균형을 맞춰간다.
"으음..~"
은채는 정말 열심히도 한다. 원래 4명이서 할 일이라는 걸 잊었는지, 아니면 감내하는지 모르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다.
주문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겉이 물기로 흥건하다.
나는 달가워하며 아메리카노 한모금을 마신다.
얼음이 녹아 처음보단 밍밍하다. 커피가 아니라 그냥 진한 보리차를 마신 것만 같았다.
"커피 좀 마셔. 얼음 다 녹겠더라."
그리곤 그녀 앞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쑥 내밀자, 붙어있던 은채는 그제야 상체를 들어올린다.
"에구 에구.."
안그래도 불편한 카페 의자인데, 낮은 테이블에 꽤 오랜 시간을 바짝 붙어서 있었다보니 은채가 앓는 소리를 낸다.
조막만한 손으로 허리를 톡톡 두드리는게 여간 안쓰럽기 그지 없다.
"..거의 다 한건데, 너무 무리하지 말자."
부담주기 싫었던 나는 은근하게 말을 건냈고, 은채는 헤헤거리며 배시시 웃고 만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웃음이었지만, 결국 자기가 모든걸 책임지려 할걸 알기에 나는 속을 한숨을 쉰다.
행여 프린트한 자료가 젖을까봐, 마시던 아메리카노의 물기를 손으로 훔쳐내곤 테이블 한켠에 놔둔다.
그리곤 은채만큼이나 바짝 테이블에 붙는다.
산만하게 퍼트려진 프린트물 사이에서, 나는 한 묶음을 집어들었다.
PPT를 그대로 인쇄한 묶음은 얼핏봐도 양이 제법 되어 보인다.
이건 또 언제 준비한거야..
나는 PPT자료를 빠르게, 하지만 꼼꼼히 훑어본 뒤 덮는다.
그리곤 곧 내가 저지를 바보같은 일에 대해 이해득실을 갸늠해본다.
분명 내 능력 밖인데 하,
한톨만큼의 후회를 상기하곤 빠르게 지워낸다, 그리곤 머리가 빨리 돌기 전에 냅다 질러버린다.
(계속)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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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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