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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2 00:44 936회 0건
"어떻게 된거에요?"
"..."
그녀는 말이 없었다.
입술을 잔뜩 어그러뜨린게, 마치 꾹 다문 조개같다
나는 질문이 잘못됐다는 것을 한박자 늦게 깨달았다.

무엇을? 뭐가 어떻게?
두명한테 강간당한 이유? 아니면 우악스런 반팔티의 손찌검? 애당초 그놈들이 쫓아온 상황?
어느 부분에서부터 어디까지?

애당초 물어볼 필요도 없었고, 알아야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생각없이 앞서버린 호기심에 대한 무안함으로 내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진다.

그녀는 날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한 발자국씩 걸어나갈 뿐.
하지만 그 걸음은 매우 성나 보였고, 나를 지긋이 밀어부치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거라는 걸 나는 뒤늦게나마 알 수 있었다.

"갈 곳은 있나요?"
안부 인사같은 한마디 건네기가 왜이렇게 어렵던지.
적당히 화제를 돌리기 위한 미봉책이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뒷목을 움켜쥐는 한마디였다.

"...몰라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뚱한 표정이 말투에 그대로 묻어나온다.
"...그래서 뭐 어쩌라구요? 안그래도 그 새끼들한테 돈도 다 뺏겨서 찜질방도 못가는데!"
말이 화를 키우듯, 그녀는 점점 격양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꺼내놓았다.

"하..씨발..."
걸음을 멈춘 그녀는 북받친 감정을 주워담듯 쪼그리고 웅크려 앉는다.
그녀의 손이 당연하듯 내 손을 빠져나갔다.
놓쳐버린건지 아니면 놓아버린건지 모를 허전함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사그라들던 불안감 역시 다시금 꿈틀대며 비집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괜한걸 물어봤네요. 정말 미안해요."
모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를 달래던 내 목소리는 이윽고 애원조로 바뀌었고 구차한줄도 모르고 질질 매달린다.

"걱정되서 그랬어요, 옷도 다 찢어졌고 그런 상태로는 받아주는 찜질방도 잘 없을거 같아서..."
"..."

"그...으음..."
깔깔한 한마디가 목에 턱하니 걸려서 좀처럼 나오질 않는다.
하지만 버티는 힘보다 밀어내는 힘이 더 강했던 걸까,

"갈 곳 없으면, 그러니까 그..괜찮으면 우리집 갈래요?"
어려워했던만큼 빠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

여전히 웅크리고 앉아있는 그녀의 둥근 모습이 날 더 초조하게 만든다.
괜한 참견이었을까, 그냥 적당히 돈 몇푼 쥐어주고 깔끔하게 떠나는게 좋았을까.

아냐, 아니다.
평소라면 이렇게나 귀찮은 일, 조막만큼의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불안한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오늘만큼은 그녀가 꼭 필요하다.
정당방위의 폭력을 휘둘렀다는 그 안도감을 위해서라도, 이 여자애는 오늘 꼭 나와 함께 있어야만 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지금의 낯뜨거움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테니까.

"...하!"

땅을 꺼트릴만큼의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방금 전의 날선 말투는 온데간데 없고 금새 눈꼬릴 치며 배시시 웃는다.

"헤헤, 아저씨! 나 옷도 이모양인데다 흙투성인데도 정말 괜찮아요?"
스위치를 홱 돌리듯 바뀌어버린 모습이다.
나는 그 모습이 마치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웃음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네, 뭐..."
순간 내가 딴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빠르게 스친다.
"아, 그..수작 부릴려고 그런건 아니라서..."
입이라도 닿는다면 금방 구멍나는 솜사탕만큼이나 얄팍한 변명을 대보지만, 오히려 더욱 오해를 살 것만 같다.
머리카락 사이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질 못하겠다.

"괜찮아요 괜찮아~, 아저씨 마음 다 아니까 괜찮아요."
나와는 반대로 싹싹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투에 오히려 내가 더욱 뜨끔한다.
나쁜 마음 먹은 것도 아니고, 그럴 생각 있지도 않은 밤인데 왜 이런건지.

우물쭈물대는 내게 그녀가 다가와 한쪽 팔을 애워싼다.
약간 빈약하면서도 딱딱한 브래지어의 느낌, 하지만 분명히 말캉거리는 촉감이 왼쪽 팔에 그대로 느껴진다.

"나 구해줬잖아요, 아저씨 나 구해준 사람이잖아요?"
과한 스킨쉽을 스스로도 알고 있을텐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남자 많이 꼬이게 생겼네..

발랑 까져보이고 말투도 경박스럽지만, 딱 거기에 어울릴만큼 예쁘장하다.
비록 티나는 화장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지만 타고난 끼를 숨기긴 어려워 보인다.
아이라이너를 따라 올라간 눈꼬리도 그녀의 또렷한 눈을 한껏 강조해 준다.

그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확신한다는 말과는 다르게 오히려 확신 받고 싶어하는 눈,
가볍게 떨리지만 피하지 않는 눈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온 한마디가 나를 묘하게 떨리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나를 엮는 찝찝한 구속이 되버린다.
마치 처음부터 내가 딴 마음을 먹은 것 처럼, 음흉함이 깃들었다 부랴부랴 사라진 것 처럼 말이다.

"..."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목젖을 강하게 후려지는 느낌이, 그리고 그 소리가 그녀에게도 들릴까봐 조심스러워진다.
약간의 시간을 둔 다음, 건조해져 딱 달라붙은 입술을 혀로 비집어 갈랐다.
그 꾸덕한 틈을 사이로 억지로 한마디가 나왔다.

"...이쪽으로 가면 돼요."



"거의 다 왔어요, 저기 앞에 골목에서 꺾으면 바로 앞이에요."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 넘는 거리를 걸어왔는데도 불구하고 한참만에 건낸 말이었다.
새벽이었지만 열대야 탓에 매우 더운 날씨였기에 땀으로 흠뻑 젖은 온몸은 찝찝하기 그지 없었다.
등판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티셔츠며 팔뚝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하지만 꽉 움켜쥔 그녀의 손은 아니었다.
한시간이 가까운 거리를 걸어서 왔다. 행여나 그녀의 옷차림을 누가 볼까봐 몸을 사리며 골목을 굽이 굽이
돌아 왔으니 실제론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단 한번도 놓지 않았던 손은 충분히 미끌거리고 있었고 그 느낌이 여간 거슬렸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그 손을 더욱 꽉 움켜쥐어갔다.
놓치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은, 아니 도려내어진다는 느낌에 가까운 그것이 더욱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말이 오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게 당연했고 아마 그녀도 그렇게 수긍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별다른 대꾸 없는 그녀를 자연스럽게 이끌고 골목을 돈다.
채 스무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이 보인다.

"저기 보이는 저 집이에요."
손을 뻗어 집을 가리킨다. 손가락 끝에서 심장이 뛰는 것만 같다.
"으음..~"
그녀는 품평을 하듯 짐짓 훑어보곤 얌전히 나의 리드를 기다린다.

띠띠띠-
나는 준비된 일련의 동작을 펼쳐내듯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쳐내려갔다.
"들어오세요."
집 안으로 한발 먼저 들어온 나는 그녀를 맞이한다.
"...저기,"
그런데 그녀가 현관 밖에 서서 우물쭈물 거린다. 그리곤 주저하는 목소리로 마저 말을 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나요?"

아아,

지금이 새벽이고 음, 어머니는 분명 주무시고 계실게 틀림 없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라 나는 솔직히 말한다.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옆집에서 뛰쳐나올만큼 괴성과 소리만 지르지 않는다면요? 하하."
어깨를 으쓱하고 건내는 농담의 제구가 나쁘진 않았는지, 그녀도 금방 수긍하며 집으로 한발 들여놓는다.
그런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다.

딸깍-
불을 켠다.
싱글 침대 하나와 작은 책상, 그리고 옷장이 전부인 내 방.
지나치게 간소한, 뭐 좋게 말하자면 깔끔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있는 그대로 보자면 삭막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저 그런 좁은 방에 불과했다.
"대충 침대에 걸터 앉아요. 상관없거든요."
"네에."
그렇게 말하곤 나는 책상의자를 빼서 거기에 앉는다.
그제서야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에 몸이 한풀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
땀범벅에 흙투성이, 어두워서 몰랐는데 납작 엎드려있었던 덕분에 티셔츠 앞부분이 엉망으로 더러워져있다.
나도 이정도인데 그녀는 더했다.
어느 학교인지 잘 모르는 교복은 거적데기마냥 너덜거렸고, 그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만큼 흙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녀의 팔다리는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심심찮게 있었고 무릎은 잔뜩 까져서 아직도 핏물이 조금씩
배어나오고 있었다.

"아, 그거 좀 닦아야할거 같은..데."
뒤늦게 그녀의 얼굴이 들어온다.
덕지덕지 바른 비비크림, 과하게 그린 아이라이너와 진한 색조화장이 정말 잘 어울릴 정도로 한 성깔하게 생겼다.
산발한 머리와 아까 그 두 놈들에게 맞았는지 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애처로워 보였지만, 또 묘하게 어울린다.
피가 났는지 아님 빨간 립스틱인지 모를 그녀의 입술은 매우 붉어서 하얀 화장과 심하게 대비되기도 했다.
"..."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그녀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눈을 살포시 아래에 둔다.
뒷 목도 뻣뻣해지며 아차 싶었다.
"뭐라도 좀 가져올께요, 그럼..."
나는 황급히 방을 나왔다.
심한 갈증을 느껴 부엌으로 향했고 엉망진창으로 냉장고 문을 연다음 생수를 꺼냈다.

벌컥벌컥-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이 시원함을 넘어 화끈거린다. 그러니 아무리 마셔도 타는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생수 한통을 옆구리에 끼고 집구석을 이 잡듯 들쑤시고 다녔지만 그 흔한 빨간약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간단한 상비약통이라도 있을 법 한데 좀처럼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결국 나는 물티슈 한통과 생수를 가지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침대에 앉아있었는 그녀에게 다가가 나는 물티슈와 생수를 건냈다.
"이거 밖에 없네요."
"괜찮아요, 아저씨. 고마워요."
그녀는 곧 물티슈를 꺼내 까진 부위를 천천히 닦아간다.
팔꿈치, 무릎, 허벅지 안쪽까지 그녀는 거침없이 닦아갔지만 그녀의 씩씩한 모습 때문인지,
나는 의외로 민망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어느정도 뒷처리가 끝날 무렵, 나는 바닥에 요를 깔고 이불을 꺼냈다.
피곤하다, 씻고 싶다. 하지만 그런걸 다 뿌리치고라도 자고싶었다.

"거기에서 자요. 난 밑에서 잘께요."
그렇게 말하곤 이불을 덮는데 그녀가 손사레를 친다.
"아뇨, 아니에요! 제가 아래에서 잘께요!"
"바닥 딱딱해서 불편할텐데..."
"괜찮아요! 이미 충분히 민폐고 저 원래 바닥에서 잘 자요, 집에 침대가 없거든요."
너무 피곤했던걸까, 더이상 입씨름하기가 힘들어 그냥 그러려고 하곤 냉큼 침대로 올라갔다.
대충 잘자라는 인사를 건내곤 쓰러질듯 눕는다.
너무 힘들었다, 너무 힘들었어. 쓸데없이 달리고 한참을 걷고 땀으로 홀딱 젖고.
일단 자자, 자고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아가씨, 잘자요. 저도 잘께요.





얼마나 잤을까? 밖은 아직도 어둡고 조용하다. 몸은 여전히 쑤시고 결리는걸 보니 많이 자진 못한것 같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가 없어 입을 연다.

"...뭐하는 거에요 지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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