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안의 소국가(小國家).
작은 국가라 칭해지는 만큼 이 서울 안에서도 엄연히 상하가 존재하며, 그 상위층 중 구심점이 되는 그룹이 있다.
바로 정치·경제의 핵심인사들.
그리고 내가 살던 성북동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했다.
일명 있는 사람들인 산다는 부자동네.
가끔 영화촬영을 한다며 이상한 장치를 바리바리 싸들고 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사람들이나 하트가 그려진 천을 들고 둥글게 서 하루 종일 꺄아꺄아 거리는 이들만 없으면 사람이 사는 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조용한 곳.
자칫 어린 내게 지루함과 따분함을 안겨줄 수 있는 적막한 분위기였지만 자상하신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 그리고 아직 젖살이 가득한 막내로 인해 얻는 행복은 다른 환경을 깨끗하게 무시하게 해주는 미증의 힘이 있었다.
매일매일 우리 집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사랑이 넘쳤으며 생기가 돌았다.
적어도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
그 날 우리 집의 분위기는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평범한 집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침 6시 30분.
안방의 자명종 소리를 시작으로 적막한 집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부글부글
-달그락 달그락
-탁탁탁탁
-쨍그랑
으응? 쨍그랑?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아침을 준비하는 거겠지.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써는 폼이 부대찌개를 하시려나? 아니면 전골? 난 김치찌개가 좋던데…….
눈을 감고 누워 오늘의 요리를 상상하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오신다.
-부비적부비적
“우리 왕자님, 일어나야지?”
굵은 목소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아버지는 얼굴도 그에 맞게 참 듬직하게 생기셨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직한 곰을 닮은, 그러나 강아지보다 애교가 넘치는 우리 아버지는 코밑과 턱 주변에 듬성듬성 난 수염의 꺼끌꺼끌한 촉감만 제외한다면 세상 무엇과도 바꾸기 싫을 만큼 자상하고 부드러운 분이시다.
아,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까지 포함해두자.
“아아아, 따가워. 5분만 더 있다가…….”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잠이 없는 편이다.
일찍 자야 키가 큰다는 어머니의 조기교육에 10시면 반자동적으로 잠자리에 누워서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안방의 자명종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눈이 번쩍 뜨인다.
그래도 더 자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건 아버지의 품이 좋아서가 아닐까.
이렇게 이불을 꼭 잡고 웅크리면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자, 어서 일어나 씻고 아침먹자. 늦으면 국물도 없는 거 알지?”
오늘도 역시나 몸이 번쩍 들렸고, 욕실천장이 보이나 싶더니 곧이어 시원한 물줄기가 내 얼굴을 때린다.
내 나이 이제 11살.
이래봬도 주위에서 다 컸다는 소리를 듣는 나이건만 아침마다 아버지에게 알몸을 보여야하다니… 라는 생각을 할 법도 하지만, 뇌가 활성화되고 기억력이라는 단어가 내 머리 속에 존재하는 순간부터 이렇게 아버지와 목욕을 해왔기에 딱히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사실 혼자서는 등에 비누칠하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아버지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을 포기하기 싫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욕조에 몸을 담구고 물장구를 치니 옷을 하나하나 벗으시는 아버지,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몸에 신기함 반 부러움 반으로 만져보고 찔러본다.
“근데 아빠, 내가 이렇게 딱딱해지려면 얼마나 더 운동해야 돼?”
회사 사장님하면 보통 반쯤 벗겨진 머리에 올챙이처럼 뽈록 튀어나온 배를 상상하겠지만 우리 아버지 몸매는 운동선수의 그것마냥 탄탄하다. 젊은 시절 차렸다는 체육관에서 가끔 운동을 하시는데 많은 관원들 중 아버지 몸매가 단연 최고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몸매는 멋지게 잡힌 근육질이지 무식하게 부피만 늘린 떡대는 아니다.
“우리 귀여운 왕자님은 키부터 커야지. 어렸을 때부터 아빠처럼 멋진 몸매 기르려다가 키 안 큰다. 은진이를 올려다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재작년까지는 사내라면 각진 근육이 필수라며 삼촌들을 시켜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날 납치해 시도 때도 없이 체육관에 데려가셨건만, 얼마 전 삼촌들이 드는 무거운 쇳덩어리를 나도 한 번 들어보겠다며 낑낑대다가 제법 큰 사고를 친 이후로 계속 이러신다.
무작정 위험하니 안 된다는 말 보다야 한층 좋은 표현이었으나, 왜 하필 끝에 은진이 얘기를 집어넣는단 말인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는 아버지와 반비례해 내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안 그래도 무섭게 크는 동생 은진이.
엊그제만 해도 손수 젖병을 물려줬을 만큼 작았던 이 아이는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키가 눈에 보일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다섯 살 때까지는 내 무릎 아래에서 놀았는데 이제는 벌써 허리 위로 올라와버리고 말았다. 이 속도와 비율로 자란다면 분명 몇 년 후 내 키를 넘어설 지도 모른다.
내 11년 인생의 유일한 경쟁자 강은진.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을 쏙 가로채가더니 그도 모자라 어머니의 사랑을 밑거름으로 내 키마저 위협하고 있다.
“아빠! 자존심 상하게 그런 꼬맹이랑 나를 비교해. 나 요즘 농구하는 거 몰라? 키는 키고, 나도 아빠처럼 딱딱한 몸 갖고 싶어.”
“어린 애가 우락부락해도 보기 안 좋아. 몸은 운동하면 금방 만들지만 키는 마음대로 안 크는 법이다 너? 클 수 있을 때까지는 키부터 커두는 거야. 근육은 옷을 벗어야 보이지만 키는 가만히 있어도 보이잖아. 학교 애들 앞에서 웃통 깔 일 있어?”
“아빠도 밖에서 웃통 안 벗잖아. 왜 이렇게 운동을 열심히 해?”
“아빠는 안방에서 너희 엄마한테 자랑해야지. 하하하!”
“그럼 고추에 울룩불룩한 것도 엄마한테 자랑하려고 넣은 거야?”
“…….”
“엄마가 포경수술 하라는데 나도 아빠처럼 막 이상한 구슬 집어넣어야대? 어떻게 살 안에 구슬을 집어넣지…아프지 않을까?”
“에, 에헴. 그, 그것은 말이야…….”
“난 자랑할 사람도 없는데 안 하면 안 될까? 왜 그런 걸 자랑할 용도…….”
“으흠. 은혁아 다 씻었으니까 나가자. 엄마 기다리시겠다.”
갑자기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강도가 세지더니 순식간에 목욕이 끝나고 하얀 가운이 몸을 두른다.
그렇게 아픈 건가? 아버지가 대답을 회피하시는 건 드문 일인데 말이다.
살짝 긴장된 가슴을 안고 머리를 정돈하고 나오니 어김없이 풍기는 구수한 냄새, 식탁을 보니 맑은 국이 놓여 있다.
“오늘은 시원한 해물탕을 끓여봤어요. 많이 드세요.”
사업을 하시며 술자리가 잦은 아버지를 위해 아침에는 꼭 국을 끓이시는 어머니, 그릇 바닥이 보일만큼 맑은 국물과 향긋한 내가 절로 콧구멍을 벌렁대게 만든다.
그런데 국 안에서 팔딱대는 정체모를 이 건더기들은 대체 무어라 말인가.
러시아에 사업차 건너갔다가 만났다는 어머니는 정말 아름다운 미모와 몸매, 천상의 목소리와 고운 성품의 소유자셨으나 신은 공명정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요리솜씨를 지니셨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아버지의 이마에 맑은 땀이 맺혀있다.
하긴, 오죽하면 고작 4명이 사는 집에 요리사를 고용할까.
그러나 어머니 말씀이라면 죽고 못 사는 우리 아버지는 예와 마찬가지로 환하게 웃으며 국을 뜨신다.
-후르륵
“으, 으흠. 우리 자기 요리솜씨는 날이 갈수록 발전한단 말이지. 좋은데?”
“어머, 정말이에요? 처음 시도해보는 탕이라 걱정했는데, 많이 드세요. 평소에 비린내가 좀 났는데 원래 술을 살짝 넣고 볶아야한다더라고요. 마침 당신이 안 마시는 양주가 보여서 비린내를 제거했는데 다행히 성공이네요.”
“그래? 뭘 넣었는데?”
“뭐더라? 로얄…뭐였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 헤헤.”
“로, 로얄 뭐? 서, 설마 Royal Salute 50?”
“아, 맞다. 그거에요. 찬장구석에 있어서 꺼내봤는데, 괜찮죠? 기왕 하는 거 싸구려 와인보다는 숙성된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쿠, 쿨럭
참, 우리 어머니는 눈치도 많이 없으신 편이다.
숟가락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미묘하게 뒤틀어지는 아버지의 안면근육을 정녕 못 보셨단 말인가. 아니, 건더기가 두 배로 늘어나는 국그릇을 보며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이마에서 그 속마음을 짐작할 법도 하건만…….
아니다.
다 차치하고 국에서 나는 향기의 정체가 차마 아까워 따지도 못한 최고급 양주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쯤 아버지의 가슴은 날카로운 송곳으로 난자질 당한 것보다 더 쓰라리시리라.
‘휴…….’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손수건과 함께 내밀었다.
내 기억력이 틀리지 않다면 아버지가 외국에서 힘들게 구해 뚜껑조차 못 연 그 술의 가격은 1400만원이다.
자그마치 우유맛 서주아이스크림을 1,400,000,000개나 먹을 수 있는 액수.
그런 가치의 술을 고작 국을 끓이는데 쓰실 분은 지구상에 우리 어머니밖에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내민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쓰디 쓴 소주를 꿀물마냥 벌컥벌컥 들이키셨다.
“캬아, 역시 우리 아들이야. 참 대견하지 않아? 더워 보이니까 닦으라고 손수건까지 챙겨주고. 그리고 아침에 술 한 잔이 말이야, 암을 예방해주고 당신의 요리를 더 즐길 수 있는 애피타이저 역할을 해준다니까. 하, 하하하.”
입은 웃고 있지만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저것은 눈물이다.
사내라면 태어나서,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집안이 망했을 때 딱 3번만 울어야한다 강변하셨던 아버지셨다.
남자의 눈물보다 고귀한 것은 없다 하셨던가.
그런 아버지가 울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에 절로 내 마음이 아려온다.
“어머, 그래도 아침부터 술이라니요. 어제 밤에도 많이 마셨다면서요. 안 돼요.”
그러나 정확히 목울대가 한 차례 울리는 순간 손에서 술잔을 획하니 가로채 소주병에 다시 붓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시는 어머니의 힘은 남자의 눈물을 쏙 들어가게 했다.
고개를 내게 돌리고 울상을 짓는 아버지에게서 마치…….
덩치 큰 반달곰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절규하는 그림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렇게 알콩달콩 티격태격 아침식사를 마치니 벌써 7시 30분이다.
결국 정체모를 탕을 두 그릇이나 깔끔하게 비우신 아버지는 어머니가 설거지를 위해 돌아서는 순간 얼굴을 감싸 쥐며 화장실로 달려가셨고, 난 두 분의 행동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응?’
**
참으로 아름다운 가정이 아닙니까?
물론 제 가정이 저렇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작은 국가라 칭해지는 만큼 이 서울 안에서도 엄연히 상하가 존재하며, 그 상위층 중 구심점이 되는 그룹이 있다.
바로 정치·경제의 핵심인사들.
그리고 내가 살던 성북동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했다.
일명 있는 사람들인 산다는 부자동네.
가끔 영화촬영을 한다며 이상한 장치를 바리바리 싸들고 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사람들이나 하트가 그려진 천을 들고 둥글게 서 하루 종일 꺄아꺄아 거리는 이들만 없으면 사람이 사는 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조용한 곳.
자칫 어린 내게 지루함과 따분함을 안겨줄 수 있는 적막한 분위기였지만 자상하신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 그리고 아직 젖살이 가득한 막내로 인해 얻는 행복은 다른 환경을 깨끗하게 무시하게 해주는 미증의 힘이 있었다.
매일매일 우리 집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사랑이 넘쳤으며 생기가 돌았다.
적어도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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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우리 집의 분위기는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평범한 집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침 6시 30분.
안방의 자명종 소리를 시작으로 적막한 집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부글부글
-달그락 달그락
-탁탁탁탁
-쨍그랑
으응? 쨍그랑?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아침을 준비하는 거겠지.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써는 폼이 부대찌개를 하시려나? 아니면 전골? 난 김치찌개가 좋던데…….
눈을 감고 누워 오늘의 요리를 상상하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오신다.
-부비적부비적
“우리 왕자님, 일어나야지?”
굵은 목소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아버지는 얼굴도 그에 맞게 참 듬직하게 생기셨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직한 곰을 닮은, 그러나 강아지보다 애교가 넘치는 우리 아버지는 코밑과 턱 주변에 듬성듬성 난 수염의 꺼끌꺼끌한 촉감만 제외한다면 세상 무엇과도 바꾸기 싫을 만큼 자상하고 부드러운 분이시다.
아,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까지 포함해두자.
“아아아, 따가워. 5분만 더 있다가…….”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잠이 없는 편이다.
일찍 자야 키가 큰다는 어머니의 조기교육에 10시면 반자동적으로 잠자리에 누워서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안방의 자명종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눈이 번쩍 뜨인다.
그래도 더 자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건 아버지의 품이 좋아서가 아닐까.
이렇게 이불을 꼭 잡고 웅크리면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자, 어서 일어나 씻고 아침먹자. 늦으면 국물도 없는 거 알지?”
오늘도 역시나 몸이 번쩍 들렸고, 욕실천장이 보이나 싶더니 곧이어 시원한 물줄기가 내 얼굴을 때린다.
내 나이 이제 11살.
이래봬도 주위에서 다 컸다는 소리를 듣는 나이건만 아침마다 아버지에게 알몸을 보여야하다니… 라는 생각을 할 법도 하지만, 뇌가 활성화되고 기억력이라는 단어가 내 머리 속에 존재하는 순간부터 이렇게 아버지와 목욕을 해왔기에 딱히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사실 혼자서는 등에 비누칠하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아버지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을 포기하기 싫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욕조에 몸을 담구고 물장구를 치니 옷을 하나하나 벗으시는 아버지,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몸에 신기함 반 부러움 반으로 만져보고 찔러본다.
“근데 아빠, 내가 이렇게 딱딱해지려면 얼마나 더 운동해야 돼?”
회사 사장님하면 보통 반쯤 벗겨진 머리에 올챙이처럼 뽈록 튀어나온 배를 상상하겠지만 우리 아버지 몸매는 운동선수의 그것마냥 탄탄하다. 젊은 시절 차렸다는 체육관에서 가끔 운동을 하시는데 많은 관원들 중 아버지 몸매가 단연 최고라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몸매는 멋지게 잡힌 근육질이지 무식하게 부피만 늘린 떡대는 아니다.
“우리 귀여운 왕자님은 키부터 커야지. 어렸을 때부터 아빠처럼 멋진 몸매 기르려다가 키 안 큰다. 은진이를 올려다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재작년까지는 사내라면 각진 근육이 필수라며 삼촌들을 시켜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날 납치해 시도 때도 없이 체육관에 데려가셨건만, 얼마 전 삼촌들이 드는 무거운 쇳덩어리를 나도 한 번 들어보겠다며 낑낑대다가 제법 큰 사고를 친 이후로 계속 이러신다.
무작정 위험하니 안 된다는 말 보다야 한층 좋은 표현이었으나, 왜 하필 끝에 은진이 얘기를 집어넣는단 말인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는 아버지와 반비례해 내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안 그래도 무섭게 크는 동생 은진이.
엊그제만 해도 손수 젖병을 물려줬을 만큼 작았던 이 아이는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키가 눈에 보일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다섯 살 때까지는 내 무릎 아래에서 놀았는데 이제는 벌써 허리 위로 올라와버리고 말았다. 이 속도와 비율로 자란다면 분명 몇 년 후 내 키를 넘어설 지도 모른다.
내 11년 인생의 유일한 경쟁자 강은진.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을 쏙 가로채가더니 그도 모자라 어머니의 사랑을 밑거름으로 내 키마저 위협하고 있다.
“아빠! 자존심 상하게 그런 꼬맹이랑 나를 비교해. 나 요즘 농구하는 거 몰라? 키는 키고, 나도 아빠처럼 딱딱한 몸 갖고 싶어.”
“어린 애가 우락부락해도 보기 안 좋아. 몸은 운동하면 금방 만들지만 키는 마음대로 안 크는 법이다 너? 클 수 있을 때까지는 키부터 커두는 거야. 근육은 옷을 벗어야 보이지만 키는 가만히 있어도 보이잖아. 학교 애들 앞에서 웃통 깔 일 있어?”
“아빠도 밖에서 웃통 안 벗잖아. 왜 이렇게 운동을 열심히 해?”
“아빠는 안방에서 너희 엄마한테 자랑해야지. 하하하!”
“그럼 고추에 울룩불룩한 것도 엄마한테 자랑하려고 넣은 거야?”
“…….”
“엄마가 포경수술 하라는데 나도 아빠처럼 막 이상한 구슬 집어넣어야대? 어떻게 살 안에 구슬을 집어넣지…아프지 않을까?”
“에, 에헴. 그, 그것은 말이야…….”
“난 자랑할 사람도 없는데 안 하면 안 될까? 왜 그런 걸 자랑할 용도…….”
“으흠. 은혁아 다 씻었으니까 나가자. 엄마 기다리시겠다.”
갑자기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강도가 세지더니 순식간에 목욕이 끝나고 하얀 가운이 몸을 두른다.
그렇게 아픈 건가? 아버지가 대답을 회피하시는 건 드문 일인데 말이다.
살짝 긴장된 가슴을 안고 머리를 정돈하고 나오니 어김없이 풍기는 구수한 냄새, 식탁을 보니 맑은 국이 놓여 있다.
“오늘은 시원한 해물탕을 끓여봤어요. 많이 드세요.”
사업을 하시며 술자리가 잦은 아버지를 위해 아침에는 꼭 국을 끓이시는 어머니, 그릇 바닥이 보일만큼 맑은 국물과 향긋한 내가 절로 콧구멍을 벌렁대게 만든다.
그런데 국 안에서 팔딱대는 정체모를 이 건더기들은 대체 무어라 말인가.
러시아에 사업차 건너갔다가 만났다는 어머니는 정말 아름다운 미모와 몸매, 천상의 목소리와 고운 성품의 소유자셨으나 신은 공명정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요리솜씨를 지니셨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아버지의 이마에 맑은 땀이 맺혀있다.
하긴, 오죽하면 고작 4명이 사는 집에 요리사를 고용할까.
그러나 어머니 말씀이라면 죽고 못 사는 우리 아버지는 예와 마찬가지로 환하게 웃으며 국을 뜨신다.
-후르륵
“으, 으흠. 우리 자기 요리솜씨는 날이 갈수록 발전한단 말이지. 좋은데?”
“어머, 정말이에요? 처음 시도해보는 탕이라 걱정했는데, 많이 드세요. 평소에 비린내가 좀 났는데 원래 술을 살짝 넣고 볶아야한다더라고요. 마침 당신이 안 마시는 양주가 보여서 비린내를 제거했는데 다행히 성공이네요.”
“그래? 뭘 넣었는데?”
“뭐더라? 로얄…뭐였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 헤헤.”
“로, 로얄 뭐? 서, 설마 Royal Salute 50?”
“아, 맞다. 그거에요. 찬장구석에 있어서 꺼내봤는데, 괜찮죠? 기왕 하는 거 싸구려 와인보다는 숙성된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쿠, 쿨럭
참, 우리 어머니는 눈치도 많이 없으신 편이다.
숟가락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미묘하게 뒤틀어지는 아버지의 안면근육을 정녕 못 보셨단 말인가. 아니, 건더기가 두 배로 늘어나는 국그릇을 보며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이마에서 그 속마음을 짐작할 법도 하건만…….
아니다.
다 차치하고 국에서 나는 향기의 정체가 차마 아까워 따지도 못한 최고급 양주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쯤 아버지의 가슴은 날카로운 송곳으로 난자질 당한 것보다 더 쓰라리시리라.
‘휴…….’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손수건과 함께 내밀었다.
내 기억력이 틀리지 않다면 아버지가 외국에서 힘들게 구해 뚜껑조차 못 연 그 술의 가격은 1400만원이다.
자그마치 우유맛 서주아이스크림을 1,400,000,000개나 먹을 수 있는 액수.
그런 가치의 술을 고작 국을 끓이는데 쓰실 분은 지구상에 우리 어머니밖에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내민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쓰디 쓴 소주를 꿀물마냥 벌컥벌컥 들이키셨다.
“캬아, 역시 우리 아들이야. 참 대견하지 않아? 더워 보이니까 닦으라고 손수건까지 챙겨주고. 그리고 아침에 술 한 잔이 말이야, 암을 예방해주고 당신의 요리를 더 즐길 수 있는 애피타이저 역할을 해준다니까. 하, 하하하.”
입은 웃고 있지만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저것은 눈물이다.
사내라면 태어나서,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집안이 망했을 때 딱 3번만 울어야한다 강변하셨던 아버지셨다.
남자의 눈물보다 고귀한 것은 없다 하셨던가.
그런 아버지가 울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에 절로 내 마음이 아려온다.
“어머, 그래도 아침부터 술이라니요. 어제 밤에도 많이 마셨다면서요. 안 돼요.”
그러나 정확히 목울대가 한 차례 울리는 순간 손에서 술잔을 획하니 가로채 소주병에 다시 붓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시는 어머니의 힘은 남자의 눈물을 쏙 들어가게 했다.
고개를 내게 돌리고 울상을 짓는 아버지에게서 마치…….
덩치 큰 반달곰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절규하는 그림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렇게 알콩달콩 티격태격 아침식사를 마치니 벌써 7시 30분이다.
결국 정체모를 탕을 두 그릇이나 깔끔하게 비우신 아버지는 어머니가 설거지를 위해 돌아서는 순간 얼굴을 감싸 쥐며 화장실로 달려가셨고, 난 두 분의 행동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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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아름다운 가정이 아닙니까?
물론 제 가정이 저렇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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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 2024-11-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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