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 다수-불특정 다수-
‘담배 좀 줘봐!’
온 몸에는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녀는 담배를 찾는다. 나도 역시 침대에 누운 채로 담배를 피워 물고, 두 사람은 전혀 말이 없다. 항상 그렇지만, 이렇게 섹스가 끝나고 난 뒤의 느낌은 정말 좇나게 더러웠다. 미친 듯이 빨고, 핥고, 쑤시고, 벌려 댔지만, 모든 행위가 끝난 후, 맞이 하는 이 한 모금의 담배 속에는 찝찝하다는 느낌만이 가득했기에…..
‘언제 또 만나지?’
난 버릇처럼 물어댄다. 그건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거였다. 앞으로 다가올 섹스의 갈증을 염려하는 일종의 자기방어…..그럴 때면 그녀는 신경질적인 반응이 대부분 이다. 한숨을 섞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의 질문을 곧잘 씹기도 한다. 나를 바라보면서, 넌 왜 그 모냥으로 살아대니 라는 듯한 눈초리를 날리지만, 난 애써 모른 채 한다. 서로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와중에도, 난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일관하면서, 우리 사이를 몰라서 물어? 라는 대답을 회피해 버린다. 제일 엿 같은 경우는, 그녀가 먼저 방을 나설 때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하지마!’
그렇게 먼저 방을 나설 때 그녀가 던지는 상투적인 인사.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 버리듯이, 그렇게 얘기하고 돌아서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면서, 그렇게 얘기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라고 생각해 본다.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건 절대 아니다. 언제나 시작은 서로에게서 흐르는 끈끈한 시선으로 시작하는 걸 보면, 그녀와 나 사이에는 확실하게 존재하는 공감대가 있었고, 섹스라는 퍼즐을 기어이 맞추어 대는 코드도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느낌이 어쩐 일인지, 섹스라는 행위를 거치고 나면, 장터 바닥에 내버려진 배추 쪼가리처럼 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 수 있을까?’
그녀가 천장을 바라다 보면서, 허옇게 말라 붙은 보지 주변의 찝찝함도 잊은 채, 내던지던 푸념….하루는 일주일이 되고, 다달이 흘러, 해를 넘기고, 그렇게 이어지는 거지 뭐. 난 언제나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는 사람처럼 대답하곤 한다. 그녀는 피식 웃어 버린다.
‘그러니 살지!’
그녀는 내가 무척 신기한가 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섹스에 매달리는 나의 유아스런 응석마저도…..내 머리 속은 복잡하지도, 그렇다고 단순 하지만도 않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그녀는 언제나 섹스 속에 의미를 두었고,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은지…담배를 피워 무는 표정이 어둡기 그지 없다. 사실 걱정도 되긴 했을 것이다.
‘아직도 쿵쿵대는 걸 보니…..옆 방은 아직 인가봐.’
‘왜 모자라? 우리도 더 할까?’
‘아니, 저런 게 얼마나 더 오래갈까 싶어서…’
‘우리는 어때서? 재미 없어?’
그녀는 섹스를 하면서도 모텔의 옆 방에서 들려오는 신음과 비명, 쿵쿵대는 진동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들의 섹스도 옆에서 쳐다 본다면, 우리와 다를 바 없어도, 그녀는 무척 신경이 쓰이는 가 보다. 그들은 또 어떤 인연으로 엮이어, 이 자리까지 왔을까 하는, 자조적인 질문…난 드라마의 그 대사가 정말 적격임을 내세운다.
‘인생 뭐 있어? 굶주릴 때 들이대는 섹스가 좋으면, 그만 이잖아?’
나의 단세포 적인 질러댐에, 그녀는 또 입을 다문다. 난 그녀를 단순화 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00이 에게 죄스러워? 그런 거야? 아직도 그런 생각하는 거야?’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 드는 게 당연하잖아?’
‘그럼 뭐 할라고 이렇게 만나? 그냥 냉큼 니 생활로 돌아가지? 내가 언제 잡아 끌었냐?’
난 그녀의 느낌을 안다. 언제나 대하는 천진한 남편의 표정을 보는 것도, 그렇다고 나와의 격렬한, 때론 변태적인 섹스를 끊는다는 것도, 모두 어렵고 힘들기는 마찬가지 이면서도, 그 사이에서 헤어나올 수도 없다는 현실을 말이다.
‘그 느낌…., 그 느낌 말이야.’
‘뭐?’
‘자기는 몰라. 여자가 섹스를 통해 느끼는 그 느낌의 깊이를 말이야.’
‘오르가즘?’
‘그렇게 한 단어로 표현 하는 건 남자들의 방식이지. 이렇게 섹스를 하면서도 갑자기 창 밖에 비가 쏟아지면, 오늘 우산을 갖고 가지 않은 그이를 생각하면서 걱정을 해, 그러면서도 보지는 지근거리는 작열 감으로 화끈거리는 걸, 기어이 놓지 못하는, 그런 이중성 이랄까?’
‘아쭈, 왠 문자? 그게 이런 외도를 낳게 하는 원인 아냐?’
‘원인은 아니지. 그냥 결과일 뿐이야. 모르겠어? 자기나 나나 그냥 이렇게 섹스 속에 남겨졌을 뿐이지, 어떤 이유도, 동기도 중요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그렇게나 심오할까? 우리 둘의 그저 그런 섹스가?’
그런 대화를 나는 무척 싫어한다. 자칫 도를 넘어서는 경우, 둘 사이의 관계가 무의미 하기 이를 데 없는, 이른바 쓰잘데기 없는 불륜의 찌거기 라는 의미로 종착되어, 기어이 찢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런 와중에도 언제나 해답을 찾기에 급급해 한다. 그것은 해답이라기 보다는 자기변명일 수 있는데……
‘나, 이 자세 정말 좋아!’
‘왜?’
‘이 자세를 하면….하면….정말이지, 내가 진짜 섹스에 미친 년처럼 느껴지거든….’
그녀는 끊임없이 무엇이 좋다, 무엇이 황홀하다라는 것을 주어 섬겼다. 그건 어떻게 보면 측은해 보이는 발버둥으로 보이기 까지 하지만 말이다. 나와의 행위 중에 쉼 없이 무엇에 집중하고, 열심을 내고, 격렬함을 요구하면서도, 섹스가 끝나면, 나보다 더 허탈해 하는 그녀…그건 갈증이 아니었다.
‘콘돔 하게?’
‘왜 새삼스럽게? 너 요즈음 딴 사람 만나고 다니는 거 내가 다 아는데, 나라고 자기방어 없이 너랑 어울리라구? 예끼 여보슈! 믿을 걸 믿어야지….’
둘 사이에서 언제나 신뢰감을 전제로 만나는 것 같아도, 그녀는 언젠가부터 나 이외에 다른 이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난 좇빨리기 이후에나 착용하던 콘돔을 초장부터 꼈기에 하던 그녀의 질문……그건 그녀를 무슨 병자 취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가 보다.
‘나도 너만큼 조심해! 왜 이러셔?’
‘그래? 그럼 도대체 누굴 어찌 만나고 다니시는데, 조심을 철저히 하신다고 그러시남?’
난 괜한 투정을 부렸다. 난 그렇게 얘기하면서, 꼭 그녀가 나의 온전한 소유라도 된 것처럼 질투의 습성을 드러내고…..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녀는 그걸 몹시도 즐기는 듯 했다.
‘자기, 질투하니?’
‘그래, 나 질투한다, 왜 안되니? 불륜 저지르고 다니는 쇄끼들은 주구장창, 바다같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산다고 누가 그러디?’
‘질투씩이나!’
그러나, 그녀는 그 날, 정도를 넘어서게 소리를 쳐대고, 온 몸을 비틀고, 기어이 내 등을 손톱으로 긁어 놓았다.
‘일 났다. @@가 아는 날엔 난 죽었네.’
‘마누라가 무서워?’
‘무섭긴? 이 상처 보라 말이지. 길바닥에 엎어졌다고 거짓말을 허겠냐, 아님, 지나가는 고양이가 할퀴었다고 설레발을 떨까? 너 오늘, 해도 너무 했다.’
‘깔깔깔…..그렇다고 자기는 절대 뽀록 나게 하진 않을 껄? 내가 장담하건대….’
그건 그랬다. 이것보다도 더 심한 때도 있었다. 뻑뻑한 보지에 애무나, 콘돔도 없이, 횟수를 잊어먹으면서까지 줄창 쑤셔 박다가, 좇깝데기가 쓰라릴 정도로 벗겨졌는데도, 난 그 날 집 사람과 아무일 없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섹스를 했다. 등에 난 손톱 자욱 쯤이야 문제도 아니었다. 한 이 삼일, 피곤하다며, 등대고 자면 그 뿐 이었고, 섹스 할 때는 반드시 불을 끄고, 등에 손이 가지 않도록, 아내를 내 위에 올려 놓거나, 개치기로 돌려 대면 그 뿐 이었으니까. 사실 아내와 오랜 시간, 섹스를 하면서 정상위로 하는 날은 생각해 보면 점점 줄고 있었기에…..
‘오늘은 그냥 가자.’
‘싸웠니? 00이랑?’
‘……..’
‘왜?’
‘그냥 살다 보면 그런 거 있잖아? 자기도 싸우잖아!’
그녀가 섹스를 거르자고 하는 날은 분명 이유가 있긴 했다. 멘스 때도 우리는 섹스를 거르는 법이 없었다. 불결하니 어쩌니, 요도염의 원인제공이니 어쩌구들 씨부렸지만, 그녀와 떡볶이가 되도록 섹스를 해도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임신의 두려움 없이, 보지 속으로 장쾌하게 뿌려지는 뜨끈한 좇물의 타점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더 후련하다고 했다. 그녀는 유달리 좇물에 집착하곤 했는데, 그저 남자들의 단순한 매커니즘에 의해서 밀려 나오는 배설물일 따름인데도, 그녀는 그 좇물을 통해 자신만의 만족을 추구하는 모양 이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어가며, 쏟아 내놓는 좇물도 좇물 이려니와, 그녀는 그런 나의 모습에서 독특한 부분을 스스로 발췌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씹과 좇이 만나려면 콘돔 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질 않고는 조우하질 못하니, 그녀는 그걸 못내 아쉬워했다.
‘갸들은 콘돔 안해!’
‘이제야 실토하시넹? 누가?’
‘젊어서 그런가?’
‘난 뭐 늙어서 콘돔 한다디? 내 참, 어이가 없어서….갸들도 너 말고 쑤셔대는 구녕이 한 둘이 아닐텐데, 조심허고 다니지?’
‘누가 쑤실 때, 맨 좇으로 박게나 한다든?’
‘그럼?’
‘디저트로 물 뽑아 드실 때만 맨 좇으로 까놓지….내가 뭐 또라인가?’
그녀는 그녀의 얼굴에, 입에 줄줄 쏘아 대는 좇물속에 있을 때 정말 행복하다고 했었다. 오히려 펌핑보다 코 끝으로 싸하게 퍼져오는 좇물 냄새가 치밀 때, 온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고도 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 냄새 속에서 또 다른 스타일의 오르가즘을 꿈꾸었는지도…..
‘나보다 어려?’
‘궁금해?’
‘뭐 그렇다기 보담…..’
그러나, 궁금해 죽을 지경 이었다. 과연 그녀가 나 이외에 다른 남자들과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인지가 말이다. 난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와 만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여겼지만, 그녀는 서로가 기혼이라는 사실이 못내 걸리적 거렸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만나고 다니는 남자들은 이른바, 땜방 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자유스러움이 나에게는 질투로 불거졌고, 내심 괘씸하기까지 했다.
‘자기는 너무 점잖은 게 탈이야. 하긴 그게 매력인지는 모르지만….’
‘갸들은 어떤데?’
‘쉽게 얘기하면 날 가지고 놀아. 난 그들에게 놀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뻑이 가는 거고….이를 테면 롤플레이 같은 거지.’
‘너의 역할은 뭔데?’
‘한없이 짓밟히는 거. 속된 말로 그게 나를 자유롭게 하거든.’
‘뭣에서?’
‘나의 죄책감, 수치심…뭐 그런 거 있잖아? 걔들이랑 놀 때면, 난 나이도 잊고, 심지어는 내가 결혼 했다는 사실마저도….무슨 신기한 동굴 탐험하듯이 나를 둘러대면, 난 그 분위기에 휩쓸리면서 맛이 가는 거지. 꼭 만화처럼…..’
그녀는 나보다 더 상상 속의 섹스를 탐닉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그렇다 해도, 언제나 그녀의 얼굴에 감도는 그늘로 인해, 난 그게 섹스에 겨워 맛이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상실해 가는 길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이 겁 없는 땜방 들을 통해 퍼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 또한 슬슬 겁이 나고는 있었다. 그녀는 나와의 섹스 도중에 질러대던 신음과 비명, 쾌락의 아우성이 점차 잦아들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시체처럼 가랑이를 벌려대고 마는 지경으로 가고 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너, 00이가 알면 경친다!’
‘왜? 뭔 일 날까 봐?’
‘아니, 요즈음 널 보면 내가 다 위태위태 하다니깐?’
‘뭘 그런 걱정은?’
그러나, 그녀는 변하고 있었다, 아니, 변질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땜방들과 만난 후에는 그들과 있었던 롤플레이를 나에게 강요하기도 했다.
‘욕 좀 시원하게 해 봐.’
‘내 좇이 걸레지, 입이 걸레냐?’
‘….그냥 처 박지 말고, 응댕이 좀 벌겋게 되게 후려쳐 봐.’
‘이기 무신 SM도 아니고설랑, 너 자꾸 그 길로 빠지는 거 아냐? 다음 번엔 아예 밧줄로 묶어주리?’
그러나, 그것도 정확히 말하면 틀린 메뉴였다. 그녀가 원하는 패턴은 메조라고 하기에는 다른, 독특한 세디즘의 분위기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공중 화장실처럼 땜빵 들에게 제공 하면서도, 그 안에서는 자신이 명령과 제어권을 가져야 하는 아이러니….
‘널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
‘이름 부르면 되잖아? 이름?’
‘그게 아니고, 요즈음 너 하고 다니는 짓거리를 볼짝시면…’
‘그럼 자기는 뭐 군자처럼 살아대나? 사돈 남 말하고 자빠지시넹?’
그녀와의 섹스 시간이 점차 단축되고 있는 것은 일종의 불안감 이었다. 이 여자와 곧 끝날 수도 있다는 조바심…….내가 혀로 끈끈하게 애무 하려면, 시간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며, 벌떡 일어나 수도꼭지 틀듯이, 우격다짐으로 내 좇을 쥐고 빨아버리는 그녀의 변화…..그건 섹스가 아니라, 일종의 배역이 뒤바뀐 강간과도 같았다. 내가 그녀를 짓누르고는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그녀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형상…..해볼 테면 해봐라, 니 놈은 싸고 나서, 나가 떨어지면 그 뿐 아니냐는 식의 우격다짐…솔직히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서 난 이미 매력을 잃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녀 또한 그런 나의 낌새를 눈치채고 나름대로의 퇴로를 구축한 건지도…..
‘…..이제 올 때까지 왔지?’
‘응?’
‘잘 알면서!’
‘뭐, 이쯤에서……. 그만 두자고?’
‘너, 많이 변했어……., 그거 알아?’
‘…….’
그녀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는지 말이 없었다. 그 날은 하늘이 뻔뻔스럽게도, 너무나 청명했다. 얼굴을 들고 모텔에서 차를 몰고 나오기도 깨름직 할 정도로 맑던 하늘…..그게 이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녀와의 유일한 작별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처럼 두 사람의 사이에는 눈물 같은 건덕지도 없었다.
‘가끔은…..연락….해도 돼?’
‘연락하지마! 뭘 더 볼 게 있다고….’
언제나 자기가 연락할 때까지 하지 말라던,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었다는 생각에, 난 고소하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 이 씨부럴 년아! 오만 좇대가리 들이랑 그렇게 뒹굴다 뒈져버려! 난 속으로 그녀에게 욕지기를 퍼붓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좀 더 부드럽게, 여운을 남기며, 헤어졌어도 됐을 터인데, 난 차를 몰고 학교로 돌아 오면서, 곰곰히 나를 돌이켜 보았다. 혹시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던 건 아닐까? 난 그 날로 그녀를 내 기억 속에서 지웠다고 확신 했다. 이미 그녀는 섹스에 닳고 닳아, 그 패턴이 흉측하게 변해가는 몰골이라고 단정지어 버렸고, 난 또다시 섹스를 수줍어하는 부류들을 향해, 느글거리는 손길을 뻗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 밑에 깔려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새로운 여자들의 아우성 속에서, 난 내가 스스로의 정복욕과 소유로의 집착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짓밟아야만 만족하는 수컷 본능과 그 안에서 흡족해 하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내가 기어이 우위에 서 있음을 인정하는 거만덩어리. 그게 나였다. 그녀를 보내 버린 유일한 이유는, 바로 나의 통제권을 벗어남으로 인한 상실감 때문 임을 알았다. 아무튼 그녀를 기억에 떠올릴 적마다 나는 분한 마음을 어쩌질 못했다. 좀더 조져 놓는 건데, 기왕이면, 아주 아작을 내 놓는 건데…..난 정도 이상으로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증오해 온지도 모르겠다.
‘오늘 강의의 내용은 요즈음 떠오르고 있는 새로운 패턴에 대한 주제 입니다. 영어로 하면 Rampage Killer, 번역하면 광폭한 살인마….뭐 이정도 되겠죠. 심리적인 이상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살인의 패턴은 아주 다양합니다. 특히 이 케이스가 발견 된 것은 196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종탑살해범을 처음으로 예를 들 수 있겠죠. 종탑 위에 올라가 길거리의 시민들에다 대고 무작위로 사격을 가해, 많은 무고한 시민을 죽게 했던 사건 입니다. 이건 의도적 살해도 아니고, 길거리의 사람들이 범인과 연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죠. 그 당시에는 범인이 인종적인 편견이나 인종차별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인해 일으킨 범행이 아니냐 예상했었습니다.’
내가 학부 강의를 하는 도중에 뒷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난 갑자기 호흡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였다. 일년이 넘도록 연락이 없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강의실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일어났던 고등학교 내에서의 무차별 총격사건도 이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우선 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범인들은 어떤 좌절감에 봉착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사회로부터의 도태, 실직, 학업의 부진, 일방적인 사랑의 실패 등등,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범인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혹은 사회조직, 더 나아가서 넓은 범위의 영역까지 증오의 대상에 편입시키게 됩니다.’
그녀는 나와 만날 때보다 더 머리가 길어져 있었다. 여자는 밥만 먹고 머리만 자라느냐며, 놀렸던 기억이 나고 있었다. 흡사 가발처럼 보이고는 있었지만 가발은 아니었다. 멀리서 보아 자세히는 알 수 없었어도 그 늘씬한 체형은 그대로였다.
‘연쇄살해범과 다른 외형적인 특징은, 연쇄살해범의 경우, 범행에 대한 것을 교묘히 은폐해 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 경우, 범행 전에 자신의 의도를 친구, 이성, 또는 알릴 수 있는 방법, 예를 들어, 자신의 홈피 등을 통해 거의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선전한다는 점을 들 수 있지요. 자신의 증오가 결국 큰 일을 불러오고야 말 것이라는 경각심을 심어주면서, 오히려 범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그것을 즐기는 사태로 접어듭니다. 즉 그들이 벌이려고 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인 무력을 가함으로써 자신이 그 응징의 중심에 서 있다는 만족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녀는 팔을 괴고, 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가끔 학생들은 돌연히 끼어든 아리따운 청강생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지만, 곧 관심은 무뎌져 갔다. 그러나, 난 달랐다. 강의실 안에서 아무도 보이질 않고, 그녀만이 도드라지게 줌인 되는 괴로운 상황….그녀는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범인들의 단순한 목적은 증오에서 파생된 울분을 되돌려 준다는 것뿐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기폭제가 당연히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 최종적 도구는 역시 무기 입니다. 국내에서야 일반인의 대량 살상 무기의 소지가 극히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가 발생하기 어렵다고 보이지만, 어쨌든, 어떤 방법으로든지 간에, 그들이 무기를 손에 넣는 순간, 범인은 기다리질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심리적인 두려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조바심조차 없이, 무기가 손에 들려지는 순간, D-Day어쩌고 하는 준비단계도 없이, 범인은 곧바로 응징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알아야 할 것은 범행을 제어할 수 있는 타이밍은 이 부분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음에도, 주변에서는 무관심했고, 그들을 증오의 우물 안에 남겨두었으며, 경고를 듣고 있었음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죠.’
난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변하질 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후, 대부분 자살을 시도하거나, 혹은 스스로 자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자살의 경우에는 알 수 없지만, 자수를 한 경우에 대한 연구자료를 보면, 범인은 전혀 범행에 대한 뉘우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즉 범행을 계획할 당시부터 그들은 죄의식에서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 패턴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지요. 심리적인 변화도 없고,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생각에 싸여,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총탄 속에서, 가까운 동료, 친구, 지인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감을 보면서도, 기뻐하거나, 괴로워함이 없이 더러운 방을 청소한 것처럼 그들의 마음 속에는 심경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얘기 입니다. 놀랍죠?’
그때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또각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서서, 나에게 누런 봉투를 단상 위로 내미는 것이었다.
‘교수님, 강의 잘 들었습니다. 딱 맞춰 잘 왔네요. 이건 지난 번에 제출하지 못했던 리포트 구여……’
그녀는 앞문을 통해 횡 하니 나가버렸다. 난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그 봉투를 받아 든 채,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 볼 따름 이었다.
‘교수님, 강의 계속 하시져?’
‘응…그러지….’
난 그 시간 이후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마무리를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두고 간 그 누런 봉투의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할 따름 이었다. 난 연구실로 돌아 오면서, 그 누런 봉투를 쥐고 있는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배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딸깍.’
난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문 앞의 표시를 부재중이라고 돌려 놓은 뒤에 문을 잠갔다. 자리에 앉아 나는 조심스런 심정으로 봉투를 열었다. 봉투는 보기보다 꽤나 무거웠다. 제일 처음 내 손에 잡힌 것은 회사의 권고사직서 복사본 이었다. 권고사직 이유는 개인 신상 이라고만 되어 있었고, 다른 것은 이상한 것이 없었다. 그 뒷장은 합의 이혼서류의 복사본 이었다. 날짜로 보아 나와 헤어진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권고사직과 이혼은 2주 간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지막 서류의 복사본은 재직하던 회사의 직인이 찍힌 정기검진 기록이었다. 그 안에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곳은 다름아닌, HIV 양성반응이라는 부분……나의 등에서 식은 땀이 좌악 솟고 있었다. 그럼 그년이 에이즈? 난 손 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나에게도 혹시나? 난 마지막 서류를 열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필로 쓴 듯한 편지였다. 아주 짧막한 내용이었다.
‘지금쯤, 자기,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겠지? 아니야, 자기는 재수 좋게 용케 빠져 나갔다구! 그건 자기랑 헤어지고 나서, 그 이후에 걸린 거지. 그래도 점잖게 사귀어 온 정이 있지, 안 그래? 헤어지고 바로 만난 땜빵들 중에 양성섹스인 새끼가 하나 있었나 봐. 누군지는 잘 몰라도….사진 감상이나 하라고 보낸 거야. 날짜나 잘 봐 둬. 섹스에만 매달렸던 철모르던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개쇄끼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자기도 정신차려!, 강의만 번드르르 하게 하면 뭐하나? 꼴통 속에는 그 짓거리뿐인데……’
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사진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은 60여장이 넘고 있었다. 사진에는 보란 듯이 날짜가 찍혀 있었고, 사진마다 같아 보이는 인물들은 하나도 없었고, 콘돔도…… 차고 있지들 않았다. 그녀를 사이에 두고, 사진마다 여러 놈들이 들러붙어 쑤시고 빨고…..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진을 보낼 것을 미리 예상한 것처럼, 풀린 눈을 한 채로도, 그녀는 웃으면서 승리의 V 자를 앵글을 향해 지어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름 하야, 세상에 대한 울분을 그런 식으로 퍼붓고 있었다. 어떤 사진은 이틀 전의 것도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에이즈라는 살상무기를 온 몸에 장탄 한 채로, 섹스에 눈이 멀어 버린, 땜빵 들을 향해 신랄한 기총 소사를 날려대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 사진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얼굴 주위로 온통 질질 흘러 내리는 정액투성이에, 온 몸은 쥐어짜고, 빨아댄 흔적으로 울긋불긋 했으며, 도대체 어떤 자세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모든 구멍은 땜빵들의 싱싱한 좇대가리로 채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도드라지는 그녀의 미소와 승리의 손가락질. 난 섬?했다. 그녀의 미소는 분명, 그녀의 분노이자, 임무완수의 희색이 분명했기에……
-끝-
‘담배 좀 줘봐!’
온 몸에는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녀는 담배를 찾는다. 나도 역시 침대에 누운 채로 담배를 피워 물고, 두 사람은 전혀 말이 없다. 항상 그렇지만, 이렇게 섹스가 끝나고 난 뒤의 느낌은 정말 좇나게 더러웠다. 미친 듯이 빨고, 핥고, 쑤시고, 벌려 댔지만, 모든 행위가 끝난 후, 맞이 하는 이 한 모금의 담배 속에는 찝찝하다는 느낌만이 가득했기에…..
‘언제 또 만나지?’
난 버릇처럼 물어댄다. 그건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거였다. 앞으로 다가올 섹스의 갈증을 염려하는 일종의 자기방어…..그럴 때면 그녀는 신경질적인 반응이 대부분 이다. 한숨을 섞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의 질문을 곧잘 씹기도 한다. 나를 바라보면서, 넌 왜 그 모냥으로 살아대니 라는 듯한 눈초리를 날리지만, 난 애써 모른 채 한다. 서로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와중에도, 난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일관하면서, 우리 사이를 몰라서 물어? 라는 대답을 회피해 버린다. 제일 엿 같은 경우는, 그녀가 먼저 방을 나설 때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하지마!’
그렇게 먼저 방을 나설 때 그녀가 던지는 상투적인 인사.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 버리듯이, 그렇게 얘기하고 돌아서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면서, 그렇게 얘기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라고 생각해 본다.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건 절대 아니다. 언제나 시작은 서로에게서 흐르는 끈끈한 시선으로 시작하는 걸 보면, 그녀와 나 사이에는 확실하게 존재하는 공감대가 있었고, 섹스라는 퍼즐을 기어이 맞추어 대는 코드도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느낌이 어쩐 일인지, 섹스라는 행위를 거치고 나면, 장터 바닥에 내버려진 배추 쪼가리처럼 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 수 있을까?’
그녀가 천장을 바라다 보면서, 허옇게 말라 붙은 보지 주변의 찝찝함도 잊은 채, 내던지던 푸념….하루는 일주일이 되고, 다달이 흘러, 해를 넘기고, 그렇게 이어지는 거지 뭐. 난 언제나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는 사람처럼 대답하곤 한다. 그녀는 피식 웃어 버린다.
‘그러니 살지!’
그녀는 내가 무척 신기한가 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섹스에 매달리는 나의 유아스런 응석마저도…..내 머리 속은 복잡하지도, 그렇다고 단순 하지만도 않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그녀는 언제나 섹스 속에 의미를 두었고,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은지…담배를 피워 무는 표정이 어둡기 그지 없다. 사실 걱정도 되긴 했을 것이다.
‘아직도 쿵쿵대는 걸 보니…..옆 방은 아직 인가봐.’
‘왜 모자라? 우리도 더 할까?’
‘아니, 저런 게 얼마나 더 오래갈까 싶어서…’
‘우리는 어때서? 재미 없어?’
그녀는 섹스를 하면서도 모텔의 옆 방에서 들려오는 신음과 비명, 쿵쿵대는 진동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들의 섹스도 옆에서 쳐다 본다면, 우리와 다를 바 없어도, 그녀는 무척 신경이 쓰이는 가 보다. 그들은 또 어떤 인연으로 엮이어, 이 자리까지 왔을까 하는, 자조적인 질문…난 드라마의 그 대사가 정말 적격임을 내세운다.
‘인생 뭐 있어? 굶주릴 때 들이대는 섹스가 좋으면, 그만 이잖아?’
나의 단세포 적인 질러댐에, 그녀는 또 입을 다문다. 난 그녀를 단순화 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00이 에게 죄스러워? 그런 거야? 아직도 그런 생각하는 거야?’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 드는 게 당연하잖아?’
‘그럼 뭐 할라고 이렇게 만나? 그냥 냉큼 니 생활로 돌아가지? 내가 언제 잡아 끌었냐?’
난 그녀의 느낌을 안다. 언제나 대하는 천진한 남편의 표정을 보는 것도, 그렇다고 나와의 격렬한, 때론 변태적인 섹스를 끊는다는 것도, 모두 어렵고 힘들기는 마찬가지 이면서도, 그 사이에서 헤어나올 수도 없다는 현실을 말이다.
‘그 느낌…., 그 느낌 말이야.’
‘뭐?’
‘자기는 몰라. 여자가 섹스를 통해 느끼는 그 느낌의 깊이를 말이야.’
‘오르가즘?’
‘그렇게 한 단어로 표현 하는 건 남자들의 방식이지. 이렇게 섹스를 하면서도 갑자기 창 밖에 비가 쏟아지면, 오늘 우산을 갖고 가지 않은 그이를 생각하면서 걱정을 해, 그러면서도 보지는 지근거리는 작열 감으로 화끈거리는 걸, 기어이 놓지 못하는, 그런 이중성 이랄까?’
‘아쭈, 왠 문자? 그게 이런 외도를 낳게 하는 원인 아냐?’
‘원인은 아니지. 그냥 결과일 뿐이야. 모르겠어? 자기나 나나 그냥 이렇게 섹스 속에 남겨졌을 뿐이지, 어떤 이유도, 동기도 중요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그렇게나 심오할까? 우리 둘의 그저 그런 섹스가?’
그런 대화를 나는 무척 싫어한다. 자칫 도를 넘어서는 경우, 둘 사이의 관계가 무의미 하기 이를 데 없는, 이른바 쓰잘데기 없는 불륜의 찌거기 라는 의미로 종착되어, 기어이 찢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런 와중에도 언제나 해답을 찾기에 급급해 한다. 그것은 해답이라기 보다는 자기변명일 수 있는데……
‘나, 이 자세 정말 좋아!’
‘왜?’
‘이 자세를 하면….하면….정말이지, 내가 진짜 섹스에 미친 년처럼 느껴지거든….’
그녀는 끊임없이 무엇이 좋다, 무엇이 황홀하다라는 것을 주어 섬겼다. 그건 어떻게 보면 측은해 보이는 발버둥으로 보이기 까지 하지만 말이다. 나와의 행위 중에 쉼 없이 무엇에 집중하고, 열심을 내고, 격렬함을 요구하면서도, 섹스가 끝나면, 나보다 더 허탈해 하는 그녀…그건 갈증이 아니었다.
‘콘돔 하게?’
‘왜 새삼스럽게? 너 요즈음 딴 사람 만나고 다니는 거 내가 다 아는데, 나라고 자기방어 없이 너랑 어울리라구? 예끼 여보슈! 믿을 걸 믿어야지….’
둘 사이에서 언제나 신뢰감을 전제로 만나는 것 같아도, 그녀는 언젠가부터 나 이외에 다른 이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난 좇빨리기 이후에나 착용하던 콘돔을 초장부터 꼈기에 하던 그녀의 질문……그건 그녀를 무슨 병자 취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가 보다.
‘나도 너만큼 조심해! 왜 이러셔?’
‘그래? 그럼 도대체 누굴 어찌 만나고 다니시는데, 조심을 철저히 하신다고 그러시남?’
난 괜한 투정을 부렸다. 난 그렇게 얘기하면서, 꼭 그녀가 나의 온전한 소유라도 된 것처럼 질투의 습성을 드러내고…..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녀는 그걸 몹시도 즐기는 듯 했다.
‘자기, 질투하니?’
‘그래, 나 질투한다, 왜 안되니? 불륜 저지르고 다니는 쇄끼들은 주구장창, 바다같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산다고 누가 그러디?’
‘질투씩이나!’
그러나, 그녀는 그 날, 정도를 넘어서게 소리를 쳐대고, 온 몸을 비틀고, 기어이 내 등을 손톱으로 긁어 놓았다.
‘일 났다. @@가 아는 날엔 난 죽었네.’
‘마누라가 무서워?’
‘무섭긴? 이 상처 보라 말이지. 길바닥에 엎어졌다고 거짓말을 허겠냐, 아님, 지나가는 고양이가 할퀴었다고 설레발을 떨까? 너 오늘, 해도 너무 했다.’
‘깔깔깔…..그렇다고 자기는 절대 뽀록 나게 하진 않을 껄? 내가 장담하건대….’
그건 그랬다. 이것보다도 더 심한 때도 있었다. 뻑뻑한 보지에 애무나, 콘돔도 없이, 횟수를 잊어먹으면서까지 줄창 쑤셔 박다가, 좇깝데기가 쓰라릴 정도로 벗겨졌는데도, 난 그 날 집 사람과 아무일 없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섹스를 했다. 등에 난 손톱 자욱 쯤이야 문제도 아니었다. 한 이 삼일, 피곤하다며, 등대고 자면 그 뿐 이었고, 섹스 할 때는 반드시 불을 끄고, 등에 손이 가지 않도록, 아내를 내 위에 올려 놓거나, 개치기로 돌려 대면 그 뿐 이었으니까. 사실 아내와 오랜 시간, 섹스를 하면서 정상위로 하는 날은 생각해 보면 점점 줄고 있었기에…..
‘오늘은 그냥 가자.’
‘싸웠니? 00이랑?’
‘……..’
‘왜?’
‘그냥 살다 보면 그런 거 있잖아? 자기도 싸우잖아!’
그녀가 섹스를 거르자고 하는 날은 분명 이유가 있긴 했다. 멘스 때도 우리는 섹스를 거르는 법이 없었다. 불결하니 어쩌니, 요도염의 원인제공이니 어쩌구들 씨부렸지만, 그녀와 떡볶이가 되도록 섹스를 해도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임신의 두려움 없이, 보지 속으로 장쾌하게 뿌려지는 뜨끈한 좇물의 타점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더 후련하다고 했다. 그녀는 유달리 좇물에 집착하곤 했는데, 그저 남자들의 단순한 매커니즘에 의해서 밀려 나오는 배설물일 따름인데도, 그녀는 그 좇물을 통해 자신만의 만족을 추구하는 모양 이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어가며, 쏟아 내놓는 좇물도 좇물 이려니와, 그녀는 그런 나의 모습에서 독특한 부분을 스스로 발췌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씹과 좇이 만나려면 콘돔 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질 않고는 조우하질 못하니, 그녀는 그걸 못내 아쉬워했다.
‘갸들은 콘돔 안해!’
‘이제야 실토하시넹? 누가?’
‘젊어서 그런가?’
‘난 뭐 늙어서 콘돔 한다디? 내 참, 어이가 없어서….갸들도 너 말고 쑤셔대는 구녕이 한 둘이 아닐텐데, 조심허고 다니지?’
‘누가 쑤실 때, 맨 좇으로 박게나 한다든?’
‘그럼?’
‘디저트로 물 뽑아 드실 때만 맨 좇으로 까놓지….내가 뭐 또라인가?’
그녀는 그녀의 얼굴에, 입에 줄줄 쏘아 대는 좇물속에 있을 때 정말 행복하다고 했었다. 오히려 펌핑보다 코 끝으로 싸하게 퍼져오는 좇물 냄새가 치밀 때, 온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고도 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 냄새 속에서 또 다른 스타일의 오르가즘을 꿈꾸었는지도…..
‘나보다 어려?’
‘궁금해?’
‘뭐 그렇다기 보담…..’
그러나, 궁금해 죽을 지경 이었다. 과연 그녀가 나 이외에 다른 남자들과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인지가 말이다. 난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와 만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여겼지만, 그녀는 서로가 기혼이라는 사실이 못내 걸리적 거렸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만나고 다니는 남자들은 이른바, 땜방 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자유스러움이 나에게는 질투로 불거졌고, 내심 괘씸하기까지 했다.
‘자기는 너무 점잖은 게 탈이야. 하긴 그게 매력인지는 모르지만….’
‘갸들은 어떤데?’
‘쉽게 얘기하면 날 가지고 놀아. 난 그들에게 놀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뻑이 가는 거고….이를 테면 롤플레이 같은 거지.’
‘너의 역할은 뭔데?’
‘한없이 짓밟히는 거. 속된 말로 그게 나를 자유롭게 하거든.’
‘뭣에서?’
‘나의 죄책감, 수치심…뭐 그런 거 있잖아? 걔들이랑 놀 때면, 난 나이도 잊고, 심지어는 내가 결혼 했다는 사실마저도….무슨 신기한 동굴 탐험하듯이 나를 둘러대면, 난 그 분위기에 휩쓸리면서 맛이 가는 거지. 꼭 만화처럼…..’
그녀는 나보다 더 상상 속의 섹스를 탐닉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그렇다 해도, 언제나 그녀의 얼굴에 감도는 그늘로 인해, 난 그게 섹스에 겨워 맛이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상실해 가는 길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이 겁 없는 땜방 들을 통해 퍼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 또한 슬슬 겁이 나고는 있었다. 그녀는 나와의 섹스 도중에 질러대던 신음과 비명, 쾌락의 아우성이 점차 잦아들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시체처럼 가랑이를 벌려대고 마는 지경으로 가고 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너, 00이가 알면 경친다!’
‘왜? 뭔 일 날까 봐?’
‘아니, 요즈음 널 보면 내가 다 위태위태 하다니깐?’
‘뭘 그런 걱정은?’
그러나, 그녀는 변하고 있었다, 아니, 변질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땜방들과 만난 후에는 그들과 있었던 롤플레이를 나에게 강요하기도 했다.
‘욕 좀 시원하게 해 봐.’
‘내 좇이 걸레지, 입이 걸레냐?’
‘….그냥 처 박지 말고, 응댕이 좀 벌겋게 되게 후려쳐 봐.’
‘이기 무신 SM도 아니고설랑, 너 자꾸 그 길로 빠지는 거 아냐? 다음 번엔 아예 밧줄로 묶어주리?’
그러나, 그것도 정확히 말하면 틀린 메뉴였다. 그녀가 원하는 패턴은 메조라고 하기에는 다른, 독특한 세디즘의 분위기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공중 화장실처럼 땜빵 들에게 제공 하면서도, 그 안에서는 자신이 명령과 제어권을 가져야 하는 아이러니….
‘널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
‘이름 부르면 되잖아? 이름?’
‘그게 아니고, 요즈음 너 하고 다니는 짓거리를 볼짝시면…’
‘그럼 자기는 뭐 군자처럼 살아대나? 사돈 남 말하고 자빠지시넹?’
그녀와의 섹스 시간이 점차 단축되고 있는 것은 일종의 불안감 이었다. 이 여자와 곧 끝날 수도 있다는 조바심…….내가 혀로 끈끈하게 애무 하려면, 시간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며, 벌떡 일어나 수도꼭지 틀듯이, 우격다짐으로 내 좇을 쥐고 빨아버리는 그녀의 변화…..그건 섹스가 아니라, 일종의 배역이 뒤바뀐 강간과도 같았다. 내가 그녀를 짓누르고는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그녀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형상…..해볼 테면 해봐라, 니 놈은 싸고 나서, 나가 떨어지면 그 뿐 아니냐는 식의 우격다짐…솔직히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서 난 이미 매력을 잃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녀 또한 그런 나의 낌새를 눈치채고 나름대로의 퇴로를 구축한 건지도…..
‘…..이제 올 때까지 왔지?’
‘응?’
‘잘 알면서!’
‘뭐, 이쯤에서……. 그만 두자고?’
‘너, 많이 변했어……., 그거 알아?’
‘…….’
그녀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는지 말이 없었다. 그 날은 하늘이 뻔뻔스럽게도, 너무나 청명했다. 얼굴을 들고 모텔에서 차를 몰고 나오기도 깨름직 할 정도로 맑던 하늘…..그게 이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녀와의 유일한 작별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처럼 두 사람의 사이에는 눈물 같은 건덕지도 없었다.
‘가끔은…..연락….해도 돼?’
‘연락하지마! 뭘 더 볼 게 있다고….’
언제나 자기가 연락할 때까지 하지 말라던,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었다는 생각에, 난 고소하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 이 씨부럴 년아! 오만 좇대가리 들이랑 그렇게 뒹굴다 뒈져버려! 난 속으로 그녀에게 욕지기를 퍼붓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좀 더 부드럽게, 여운을 남기며, 헤어졌어도 됐을 터인데, 난 차를 몰고 학교로 돌아 오면서, 곰곰히 나를 돌이켜 보았다. 혹시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던 건 아닐까? 난 그 날로 그녀를 내 기억 속에서 지웠다고 확신 했다. 이미 그녀는 섹스에 닳고 닳아, 그 패턴이 흉측하게 변해가는 몰골이라고 단정지어 버렸고, 난 또다시 섹스를 수줍어하는 부류들을 향해, 느글거리는 손길을 뻗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 밑에 깔려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새로운 여자들의 아우성 속에서, 난 내가 스스로의 정복욕과 소유로의 집착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짓밟아야만 만족하는 수컷 본능과 그 안에서 흡족해 하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내가 기어이 우위에 서 있음을 인정하는 거만덩어리. 그게 나였다. 그녀를 보내 버린 유일한 이유는, 바로 나의 통제권을 벗어남으로 인한 상실감 때문 임을 알았다. 아무튼 그녀를 기억에 떠올릴 적마다 나는 분한 마음을 어쩌질 못했다. 좀더 조져 놓는 건데, 기왕이면, 아주 아작을 내 놓는 건데…..난 정도 이상으로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증오해 온지도 모르겠다.
‘오늘 강의의 내용은 요즈음 떠오르고 있는 새로운 패턴에 대한 주제 입니다. 영어로 하면 Rampage Killer, 번역하면 광폭한 살인마….뭐 이정도 되겠죠. 심리적인 이상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살인의 패턴은 아주 다양합니다. 특히 이 케이스가 발견 된 것은 196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종탑살해범을 처음으로 예를 들 수 있겠죠. 종탑 위에 올라가 길거리의 시민들에다 대고 무작위로 사격을 가해, 많은 무고한 시민을 죽게 했던 사건 입니다. 이건 의도적 살해도 아니고, 길거리의 사람들이 범인과 연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죠. 그 당시에는 범인이 인종적인 편견이나 인종차별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인해 일으킨 범행이 아니냐 예상했었습니다.’
내가 학부 강의를 하는 도중에 뒷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난 갑자기 호흡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였다. 일년이 넘도록 연락이 없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강의실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일어났던 고등학교 내에서의 무차별 총격사건도 이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우선 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범인들은 어떤 좌절감에 봉착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사회로부터의 도태, 실직, 학업의 부진, 일방적인 사랑의 실패 등등,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범인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혹은 사회조직, 더 나아가서 넓은 범위의 영역까지 증오의 대상에 편입시키게 됩니다.’
그녀는 나와 만날 때보다 더 머리가 길어져 있었다. 여자는 밥만 먹고 머리만 자라느냐며, 놀렸던 기억이 나고 있었다. 흡사 가발처럼 보이고는 있었지만 가발은 아니었다. 멀리서 보아 자세히는 알 수 없었어도 그 늘씬한 체형은 그대로였다.
‘연쇄살해범과 다른 외형적인 특징은, 연쇄살해범의 경우, 범행에 대한 것을 교묘히 은폐해 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 경우, 범행 전에 자신의 의도를 친구, 이성, 또는 알릴 수 있는 방법, 예를 들어, 자신의 홈피 등을 통해 거의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선전한다는 점을 들 수 있지요. 자신의 증오가 결국 큰 일을 불러오고야 말 것이라는 경각심을 심어주면서, 오히려 범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그것을 즐기는 사태로 접어듭니다. 즉 그들이 벌이려고 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인 무력을 가함으로써 자신이 그 응징의 중심에 서 있다는 만족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녀는 팔을 괴고, 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가끔 학생들은 돌연히 끼어든 아리따운 청강생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지만, 곧 관심은 무뎌져 갔다. 그러나, 난 달랐다. 강의실 안에서 아무도 보이질 않고, 그녀만이 도드라지게 줌인 되는 괴로운 상황….그녀는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범인들의 단순한 목적은 증오에서 파생된 울분을 되돌려 준다는 것뿐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기폭제가 당연히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 최종적 도구는 역시 무기 입니다. 국내에서야 일반인의 대량 살상 무기의 소지가 극히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가 발생하기 어렵다고 보이지만, 어쨌든, 어떤 방법으로든지 간에, 그들이 무기를 손에 넣는 순간, 범인은 기다리질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심리적인 두려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조바심조차 없이, 무기가 손에 들려지는 순간, D-Day어쩌고 하는 준비단계도 없이, 범인은 곧바로 응징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알아야 할 것은 범행을 제어할 수 있는 타이밍은 이 부분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음에도, 주변에서는 무관심했고, 그들을 증오의 우물 안에 남겨두었으며, 경고를 듣고 있었음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죠.’
난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변하질 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후, 대부분 자살을 시도하거나, 혹은 스스로 자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자살의 경우에는 알 수 없지만, 자수를 한 경우에 대한 연구자료를 보면, 범인은 전혀 범행에 대한 뉘우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즉 범행을 계획할 당시부터 그들은 죄의식에서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 패턴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지요. 심리적인 변화도 없고,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생각에 싸여,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총탄 속에서, 가까운 동료, 친구, 지인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감을 보면서도, 기뻐하거나, 괴로워함이 없이 더러운 방을 청소한 것처럼 그들의 마음 속에는 심경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얘기 입니다. 놀랍죠?’
그때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또각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서서, 나에게 누런 봉투를 단상 위로 내미는 것이었다.
‘교수님, 강의 잘 들었습니다. 딱 맞춰 잘 왔네요. 이건 지난 번에 제출하지 못했던 리포트 구여……’
그녀는 앞문을 통해 횡 하니 나가버렸다. 난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그 봉투를 받아 든 채,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 볼 따름 이었다.
‘교수님, 강의 계속 하시져?’
‘응…그러지….’
난 그 시간 이후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마무리를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두고 간 그 누런 봉투의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할 따름 이었다. 난 연구실로 돌아 오면서, 그 누런 봉투를 쥐고 있는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배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딸깍.’
난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문 앞의 표시를 부재중이라고 돌려 놓은 뒤에 문을 잠갔다. 자리에 앉아 나는 조심스런 심정으로 봉투를 열었다. 봉투는 보기보다 꽤나 무거웠다. 제일 처음 내 손에 잡힌 것은 회사의 권고사직서 복사본 이었다. 권고사직 이유는 개인 신상 이라고만 되어 있었고, 다른 것은 이상한 것이 없었다. 그 뒷장은 합의 이혼서류의 복사본 이었다. 날짜로 보아 나와 헤어진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권고사직과 이혼은 2주 간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지막 서류의 복사본은 재직하던 회사의 직인이 찍힌 정기검진 기록이었다. 그 안에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곳은 다름아닌, HIV 양성반응이라는 부분……나의 등에서 식은 땀이 좌악 솟고 있었다. 그럼 그년이 에이즈? 난 손 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나에게도 혹시나? 난 마지막 서류를 열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필로 쓴 듯한 편지였다. 아주 짧막한 내용이었다.
‘지금쯤, 자기,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겠지? 아니야, 자기는 재수 좋게 용케 빠져 나갔다구! 그건 자기랑 헤어지고 나서, 그 이후에 걸린 거지. 그래도 점잖게 사귀어 온 정이 있지, 안 그래? 헤어지고 바로 만난 땜빵들 중에 양성섹스인 새끼가 하나 있었나 봐. 누군지는 잘 몰라도….사진 감상이나 하라고 보낸 거야. 날짜나 잘 봐 둬. 섹스에만 매달렸던 철모르던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개쇄끼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자기도 정신차려!, 강의만 번드르르 하게 하면 뭐하나? 꼴통 속에는 그 짓거리뿐인데……’
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사진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은 60여장이 넘고 있었다. 사진에는 보란 듯이 날짜가 찍혀 있었고, 사진마다 같아 보이는 인물들은 하나도 없었고, 콘돔도…… 차고 있지들 않았다. 그녀를 사이에 두고, 사진마다 여러 놈들이 들러붙어 쑤시고 빨고…..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진을 보낼 것을 미리 예상한 것처럼, 풀린 눈을 한 채로도, 그녀는 웃으면서 승리의 V 자를 앵글을 향해 지어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름 하야, 세상에 대한 울분을 그런 식으로 퍼붓고 있었다. 어떤 사진은 이틀 전의 것도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에이즈라는 살상무기를 온 몸에 장탄 한 채로, 섹스에 눈이 멀어 버린, 땜빵 들을 향해 신랄한 기총 소사를 날려대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 사진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얼굴 주위로 온통 질질 흘러 내리는 정액투성이에, 온 몸은 쥐어짜고, 빨아댄 흔적으로 울긋불긋 했으며, 도대체 어떤 자세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모든 구멍은 땜빵들의 싱싱한 좇대가리로 채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도드라지는 그녀의 미소와 승리의 손가락질. 난 섬?했다. 그녀의 미소는 분명, 그녀의 분노이자, 임무완수의 희색이 분명했기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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