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휴, 신경질 나!...이게 뭐야...독고 빈, 그 조그만 계집애가 대체 어디가 예쁘다고
다들 생난리야...’
대기실에 두고 왔던 자신의 핸드폰을 챙겨들고 나오던 이현지의 얼굴에서 짜증이
왕창 묻어나왔다.
처음에 무대 위에 올라가서 자신의 늘씬한 몸매를 뽐낼 때만 하더라도 오늘의 주역은
자신이 틀림없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일이 이다지도 꼬인다는 말이냐.
독고 빈, 그 가증스런 계집애가 무대에서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자신에게 집중되었던 시선들이 그렇게도 허망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곰곰 생각해보니 독고 빈이 넘어진 것도 일부러 그녀가 계획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몸매가 안 되니 일부러 넘어져서 시청자들의 동정표를 얻어 보겠다는 얄팍한 수작이지, 뭐.
‘흥. 정말 잔머리 하나는 끝내주는 계집애야...에잇, 재수 없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현관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문득 우측 복도의 화장실 쪽에서
웬 남자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앞서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어? 저 사람은?’
덜떨어진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걷고 있는 남자는 생방송 당시에
텅 빈 관객석에 혼자 앉아서 자신의 속옷차림 모습을 넋 빠진 듯 쳐다보던
바로 그 남자가 아니던가.
더구나 저 덜 떨어진 남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독고 빈과 서로 얼싸안고
한바탕 주접 블루스까지 추어대던데...둘이 사귀는 사이가 틀림없겠지.
그러고 보니, 독고 빈! 너도 참 눈이 낮구나!
‘전 국민을 사로잡은 대스타면 뭘 해? 겨우 저런 덜 떨어진 남자랑 사귀는 주제에...’
급기야 독고 빈을 이겼다는 이상한 승리감도 밀려드는 것이었으니, 걸어가는 호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현지의 얼굴에서 득의의 미소가 번져 올랐다.
‘참,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독고 빈! 이 가증스런 계집애를 이 기회에
아예 무참하게 짓밟아 버릴 수 있는 기회인데...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번했잖아.’
뒤처져있던 이현지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손 안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급하게 눌러댔다.
“여보세요...홍기자 언니죠?”
“......”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이현지라고 하는데요...”
“......”
“호호호...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요, 언니한테만 알려드릴 특종감이
있어서요.”
“......”
“독고 빈 아시죠? 오늘 나랑 한 무대에 섰었는데, 글쎄......애인을 데려왔더라고요......
정말이냐구요? 내가 설마 언니한테 거짓말이나 하겠어요? 조금 전에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까지 직접 봤는걸요.”
“......”
“지금 제 앞에서 걸어가고 있어요......붙잡아 두라고요? 그거야 뭐, 별로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걸요, 뭘......예. 맞아요. 조금 덜 떨어져 보이거든요......”
“......”
“예. 저만 믿으세요. 중간에 또 연락할 테니까 최대한 빨리 오셔야 돼요!”
“......”
핸드폰을 끊은 이현지가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잔인한 미소를 떠올렸다.
‘흥. 독고 빈! 넌 이제 아웃이야...호호호.’
...........................................................................................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 탄 호준이 물끄러미 시계를 보니, 이미 11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아, 제기랄...피곤해서 미치겠군.’
그나마 독고 빈이 출연한 홈쇼핑 광고가 기대이상의 성과를 얻었기 때문에 나름 뿌듯하긴
했다.
‘정말 타고난 배우라니깐...어휴 귀여운 것.’
그녀가 건네준 앙증맞은 휴대폰을 꺼내들었으나, 아무래도 아직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차안에 있을 듯싶었기 때문에 전화를 하는 것은 조금 망설여졌다.
‘뭐, 이따가 집에 도착해서 걸면 돼지.’
시동키를 넣었지만, 쌀쌀한 겨울밤이었기 때문에 창문에 뿌옇게 성애가 끼어있는 관계로
바로 출발을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윈도우를 살짝 내려놓은 상태에서 담배 한 개비를 피어대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창문에 끼어있던 성애도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제거된 듯싶기에
그제야 기어를 넣고 패달을 밟았다.
주차장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서 조금 전에 나왔던 건물의 현관 앞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달리는 차 앞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끼이익...
다급한 마음에서 브레이크를 밟긴 했지만, 살짝 얼어붙은 주행 길이었는지라,
자동차 바퀴가 마치 썰매를 타듯이 미끄러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헉...깜짝이야!’
그나마 속도를 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을 치룰 번했다는 생각이 들자,
모골이 쭈뼛하게 일어선다.
얼른 차문을 열고 뛰어나가 보니, 차 앞으로 뛰어들었던 여자도 많이 놀란 듯
움찔움찔 떨고 있는 듯 보였다.
“이봐요, 아가씨! 다친 곳은 없어요? 그러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뛰어들면 어떡해요.”
호준이 다가가서 말을 건네자, 키가 크고 늘씬한 짧은 청미니스커트의 아가씨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면서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어머, 죄송해요...빨리 나가서 택시를 잡으려는 생각에 그만...”
‘허,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예의는 있군.’
상대방이 오히려 저렇게까지 미안해하는데, 뭐 달리 할 말이 있겠는가 마는...
보면 볼수록 어린 아가씨가 정말 예쁘게도 생겼네...크크...
자신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예쁜 여자들만 보면 도무지 사족을 못 쓰도록 환장을
한다는 거. 그거 아니겠는가.
“이 야밤에 젊은 미인이 혼자서 택시를 타고 간 다고요? 어떻게 그런 위험한 일을...
집이 어디신데요?”
“과천이에요...”
‘과천이라...뭐, 이곳에서 뭐 그리 뭔 거리는 아닌데, 얼른 태워다 주고 올까?’
후딱 태워다만 주고 오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자니 지금
주변에 있는 여자들만 해도 수습이 어려워서 골머리가 다 지끈거리는데 웬 기사노릇이람.
하는 생각도 들어서 갈팡질팡 할 따름인데, 마음과 달리 그의 입에서는 연신
작업용 멘트가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여기 홈쇼핑에서 일하시나 보죠? 혹시, 모델 아니세요? 히야, 넘 예쁘다...”
“예...모델 맞아요. 방금 전에 10시 생방송이 있어서 그걸 끝내고 나오던 길이거든요...”
생글거리면서 웃는 얼굴이라니...아, 정말 죽음이로군.
어째서 신은 나에게 이리도 가혹한 유혹의 사과를 연거푸 던지는 것인지...
그런데, 10시 생방송이라면...아까 직접 방청했던 우리 회사 란제리 광고?
가만, 그러고 보니 어째 얼굴이 낯익은 것도 같은데...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제야 유독 자신의 시선을 끌어 잡았던 모델의
얼굴과 그녀의 얼굴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정말 그 모델이로군...머리 스타일만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그걸 몰라보다니,
나도 참 한심하다니깐.’
그나저나 방금 전에 팬티와 브라만 걸쳐 입고 무대 위에 서 있던 모델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바지 속에 들어있는 물건이 주책없이 불끈 일어서는 것이
느껴져서 서 있기가 몹시 불편했다.
어디 주책없는 곤두서는 물건만 불편했겠는가.
피곤해 죽겠다던 두 눈동자는 또 어떤가.
비록 똥꼬만 살짝 가릴 수 있는 짧은 청미니 스커트를 입었을망정, 어쨌든 치마는
걸친 상태였고, 배꼽도 숨을 쉬어야만 한다는 자연주의의 원칙아래 상반신에
살짝 걸쳐 입은 짧은 가죽재킷 역시 인간이 걸치는 의복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호준의 눈동자 속에 서 있는 그녀는 그 짧은 치마와 작은 재킷마저도 단번에
벗어던진 상태로 오직 브래지어와 팬티만 갖춰 입은 부끄러운 모습이었으니,
이건 또 어디에서 생겨난 거룩한 투시력이냔 말이다.
“어머, 이런...스타킹이 찢어져 버렸네...어쩜 좋아.”
호준의 부끄러운 망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앞에 서 있던 늘씬한 란제리 모델은
갑자기 허리를 구십도 각도로 굽히면서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엉덩이를 호준의 코앞으로
바짝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오매 아예 사람을 잡는구만. 잡아.
짧은 미니스커트만 입은 젊은 아가씨가 눈앞에서 풍만한 엉덩이를 들이밀며 허리를 숙이는
모습만 지켜보더라도 그것은 숨이 멎을 만큼 환상적인 장면일진데, 지금 호준의 눈동자는
그녀의 치마를 꿰뚫을 수 있는 야릇한 투시력까지 생겨났으니, 말을 하면 무엇 하리요.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창백하네요.”
자신의 물건을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유도한 발칙한 아가씨의 질문 치고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아, 아니에요...빈혈이 좀 있어서...”
“어머, 빈혈이 있으셨군요? 그럼, 얼른 차안으로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부축해 드릴 게요.”
이런, 세상에나! 이렇게 불공평한 경우가 있나.
젊지, 예쁘지, 키 크지, 늘씬하지, 젖가슴 빵빵하지, 엉덩이 풍만하지...
그것도 모자라서 국민훈장을 추천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만 같은 저 친절한 마음씨라니.
“괘, 괜찮습니다마는...”
난처한 얼굴로 비록 사양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자가 미처 그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풍만한 유방에 기대어 한쪽 볼을 힘겨운 듯 비벼대고 있었다.
“어머나! 많이 불편하신가 보네요...”
“아, 아닙니다. 그냥, 조금...”
호준은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에 안겨서 날이 새도록 얼굴이나 원 없이 비벼봤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샘솟았으나, 그를 부축하고 있는 미녀는 너무나 천사 같은 맑은 심성의
여자였는지라 겨울바람 앞에서 한 없이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을 더 이사 두고 볼 수
없었나 보다.
괜찮다는 호준을 억지로 그의 승용차 문까지 끌고 간 그녀가 덜컥 자동차 문을 열더니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를 우겨 넣는 것이 아닌가.
“자, 얼른 타세요...”
“정말, 괜찮은데...”
이런, 젠장. 여자가 너무 친절해도 안 좋은 것이로군.
이런 것을 두고 사자성어로 과유불급이라고 하던가. 어쨌든 젠장...젠장이로고.
향긋하면서도 말랑말랑했던 그녀의 젖가슴에서 얼굴이 분리되고 나자, 마치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상실감이 거센 파도처럼 가슴속에 아득하게 밀려들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속옷만 입고 있던 란제리 모델을 이렇게나마 가까이서 접해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정말 친절한 아가씨군요...그럼, 안녕히...”
그의 못다 한 말은 「가세요」였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다음에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요」까지였을까.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돌연 조수석의 문을 열더니 향긋한 향기를
발산하는 그녀의 몸이 스스럼없이 옆 좌석으로 덥석 자리를 비집고 앉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제가 옆에 잠깐만 앉아 있어도 실례가 되지는 않겠지요?”
“그, 그럼요!”
아프다던 호준의 입에서 자신이 생각해도 겸연쩍을 만큼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호호...아프다더니, 전부 거짓말이죠?”
“무,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이제 좀 정신이 돌아온 것뿐인지요. 흠.흠.”
그나저나 인간방향제가 따로 없구만. 옆자리에 앉아있기만 해도 향긋한 향기가 차안을
진동하네 그려.
그녀의 향기에 도취되자, 조금 전에 빈혈이라고 얼버무렸던 상황이 진짜로 발생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아득해지기만 했는데, 조용한 차안에서 갑자기 요란한 음악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옆에 앉아 있던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을 받았다.
“어머, 언니! 어쩐 일로요...나요?...나 지금 ND홈쇼핑 건물 앞에 있는데요...
아, 이 앞을 지나가는 길이라고요...그럼, 어쩌지? 나도 언니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그럴래요? 예. 알았어요. 그럼, 여기에서 기다릴게요.”
핸드폰을 끊은 그녀가 생글거리는 얼굴로 호준을 바라봤다.
“미안한데,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내려도 되죠? 친한 언니가 이 부근에 있다 네요.”
그거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럼요. 그게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고...”
“참,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잖아요...저는 백호준이라고 합니다.
올해 스물여덟이죠.”
“어머, 나이가 그렇게나 많았어요? 저는 이제 스물넷이나 다섯 정도로 생각했는데...”
“다들 그렇게 보나 봐요...우리 예쁜 모델 아가씨는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현지...이현지예요. 나이는 스무 살.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해요.”
“어? 그럼, 아직 학생? 이런, 겉모습만 보면 완전히 성숙한 아가씬데...그야말로 주가가
치솟는 영계 아가씨라니...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호호...말 놔요. 오빠!”
헉...오빠? 이거 요즘 넘 자주 듣는 말 아니야?
막상 그녀로부터 오빠라는 말을 듣고 보니, 그제야 핸드폰을 건네주고는 아쉬운 듯
뛰어가던 독고 빈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 말을 놓을게...”
“그래요, 말을 놓으니깐 훨씬 자연스럽고 친한 것처럼 느껴지잖아...호호.”
................................................................................
“어머, 언니! 벌써 도착했어요? 어디에 있는데요?...알았어요. 현관 앞으로 가 볼게요.”
두 번째 걸려온 핸드폰을 받은 이현지의 얼굴에서 조금 망설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왜? 무슨 일인데?”
호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을 때, 이현지가 가볍게 몸을 비틀면서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닌가.
“언니를 만나는 것은 좋은데,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서...피곤하기도 하고.”
“그래?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내가 조금 기다렸다가 집까지 데려다 줄까?”
호준도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현지처럼 예쁘고 상냥하고 몸매까지
훌륭한 어린 아가씨를 밤중에 혼자 남겨 두고 돌아간다는 것이 영 찝찝하기만 했던 것이다.
“어머, 오빠!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그럼,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고마워.”
쪽.
번개처럼 달라붙은 이현지의 달콤한 입술이 호준의 얼굴에 촉촉하면서도 뜨거운 입김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물들었고, 그는 쑥스러운 듯 그녀가 남기고 간
흔적을 자신도 모르게 어루만졌다.
“어차피 나를 집까지 데려다 줄 거라면 답답하게 차 안에서 기다리지 말고, 같이 나가자.”
이현지가 호준의 팔을 붙잡으면서 애교를 부렸기 때문에 호준은 자신도 모르게 차에서
내려서 그녀와 함께 나란히 홈쇼핑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나란히 걷고 있는 이현지를 보자니,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키는 자신보다도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듯해서 왠지 위축감을 맛봐야 했지만, 이현지는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듯 오히려 더 팔짱을 낀 그의 팔뚝을 자신의 유방 쪽으로 바짝 당기면서
밀착하는 것이었으니, 이거 참 환장할 노릇이로군.
“어? 언니가 현관으로 들어오라고 했는데...어디 있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이현지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핸드폰 통화를 하려는 듯 호준만
남겨놓은 체, 현관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거야, 원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가?
현관 복도에 어정쩡하게 서서 뒷머리만 긁적거리고 섰는데, 갑자기 열려 있는 현관문 밖에서 무언가 번쩍하는 플래시 불빛을 느끼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 뭐야? 이건.
당황해서 불빛이 번쩍인 방향을 바라보는데, 불과 5. 6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또 다시
불빛이 번쩍이는 것이었으니, 그곳에는 날렵한 청바지 차림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20대 후반의 여자가 호준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보란 듯이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나, 나를? 도대체 왜?’
머릿속이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고, 순간적으로
독고 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이봐요! 아가씨! 지금 내 얼굴을 찍은 건가요?”
호준이 가까이 다가서면서 무척이나 격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카메라 불빛은 연속해서 터지고 있었으니,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문득 고개를 돌려서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이현지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알듯 말듯 한 미소가 얄팍하게 번진 것을 보니,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어떻다는 것을 짐작하기에 충분할 듯싶었다.
이런, 제기랄...멍청하게도 겨우 저런 어린애한테 속다니...
펑...펑...
연속해서 터지고 있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그는 눈이 부신 듯 얼굴을 가리면서 소리쳤다.
“자, 잠깐만 진정하시고, 다 얘기할 테니깐...그만 좀 찍어요.”
그 말이 제법 먹힌 듯 했다.
연속해서 셔터를 눌러대던 청바지 차림의 긴 생머리 여자가 그제야 만족한 듯 득의의
미소를 떠올리는 것이 아닌가.
“정말이에요? 이건 완전히 특종이로군. 그럼, 독고 빈양과도 단독 인터뷰를 주선해 주실 수
있겠죠?”
“그, 그럼요...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고백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호준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두 여자들의 입가에서는 동시에 웃음꽃이 번졌으며,
뜨거운 동료애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하이파이브를 외치면서 손바닥을 맞부딪치는
것이었으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호준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불꽃이 용솟음치고 있는 것을 그녀들이
어찌 알 수나 있을까.
‘흥. 못된 계집년 들 같으니라구. 어디 두고 보라지.’
그의 손이 시약병이 들어있는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가고 있었다.
....................................................................................
넘 죄송해서 한편 더 올립니다.
앞으로 일주일간은 제발 닦달하지 마삼...
힘들어 죽겠다눈...ㅠ.ㅠ.
다들 생난리야...’
대기실에 두고 왔던 자신의 핸드폰을 챙겨들고 나오던 이현지의 얼굴에서 짜증이
왕창 묻어나왔다.
처음에 무대 위에 올라가서 자신의 늘씬한 몸매를 뽐낼 때만 하더라도 오늘의 주역은
자신이 틀림없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일이 이다지도 꼬인다는 말이냐.
독고 빈, 그 가증스런 계집애가 무대에서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자신에게 집중되었던 시선들이 그렇게도 허망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곰곰 생각해보니 독고 빈이 넘어진 것도 일부러 그녀가 계획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몸매가 안 되니 일부러 넘어져서 시청자들의 동정표를 얻어 보겠다는 얄팍한 수작이지, 뭐.
‘흥. 정말 잔머리 하나는 끝내주는 계집애야...에잇, 재수 없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현관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문득 우측 복도의 화장실 쪽에서
웬 남자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앞서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어? 저 사람은?’
덜떨어진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걷고 있는 남자는 생방송 당시에
텅 빈 관객석에 혼자 앉아서 자신의 속옷차림 모습을 넋 빠진 듯 쳐다보던
바로 그 남자가 아니던가.
더구나 저 덜 떨어진 남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독고 빈과 서로 얼싸안고
한바탕 주접 블루스까지 추어대던데...둘이 사귀는 사이가 틀림없겠지.
그러고 보니, 독고 빈! 너도 참 눈이 낮구나!
‘전 국민을 사로잡은 대스타면 뭘 해? 겨우 저런 덜 떨어진 남자랑 사귀는 주제에...’
급기야 독고 빈을 이겼다는 이상한 승리감도 밀려드는 것이었으니, 걸어가는 호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현지의 얼굴에서 득의의 미소가 번져 올랐다.
‘참,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독고 빈! 이 가증스런 계집애를 이 기회에
아예 무참하게 짓밟아 버릴 수 있는 기회인데...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번했잖아.’
뒤처져있던 이현지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손 안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급하게 눌러댔다.
“여보세요...홍기자 언니죠?”
“......”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이현지라고 하는데요...”
“......”
“호호호...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요, 언니한테만 알려드릴 특종감이
있어서요.”
“......”
“독고 빈 아시죠? 오늘 나랑 한 무대에 섰었는데, 글쎄......애인을 데려왔더라고요......
정말이냐구요? 내가 설마 언니한테 거짓말이나 하겠어요? 조금 전에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까지 직접 봤는걸요.”
“......”
“지금 제 앞에서 걸어가고 있어요......붙잡아 두라고요? 그거야 뭐, 별로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걸요, 뭘......예. 맞아요. 조금 덜 떨어져 보이거든요......”
“......”
“예. 저만 믿으세요. 중간에 또 연락할 테니까 최대한 빨리 오셔야 돼요!”
“......”
핸드폰을 끊은 이현지가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잔인한 미소를 떠올렸다.
‘흥. 독고 빈! 넌 이제 아웃이야...호호호.’
...........................................................................................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 탄 호준이 물끄러미 시계를 보니, 이미 11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아, 제기랄...피곤해서 미치겠군.’
그나마 독고 빈이 출연한 홈쇼핑 광고가 기대이상의 성과를 얻었기 때문에 나름 뿌듯하긴
했다.
‘정말 타고난 배우라니깐...어휴 귀여운 것.’
그녀가 건네준 앙증맞은 휴대폰을 꺼내들었으나, 아무래도 아직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차안에 있을 듯싶었기 때문에 전화를 하는 것은 조금 망설여졌다.
‘뭐, 이따가 집에 도착해서 걸면 돼지.’
시동키를 넣었지만, 쌀쌀한 겨울밤이었기 때문에 창문에 뿌옇게 성애가 끼어있는 관계로
바로 출발을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윈도우를 살짝 내려놓은 상태에서 담배 한 개비를 피어대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창문에 끼어있던 성애도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제거된 듯싶기에
그제야 기어를 넣고 패달을 밟았다.
주차장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서 조금 전에 나왔던 건물의 현관 앞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달리는 차 앞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끼이익...
다급한 마음에서 브레이크를 밟긴 했지만, 살짝 얼어붙은 주행 길이었는지라,
자동차 바퀴가 마치 썰매를 타듯이 미끄러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헉...깜짝이야!’
그나마 속도를 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을 치룰 번했다는 생각이 들자,
모골이 쭈뼛하게 일어선다.
얼른 차문을 열고 뛰어나가 보니, 차 앞으로 뛰어들었던 여자도 많이 놀란 듯
움찔움찔 떨고 있는 듯 보였다.
“이봐요, 아가씨! 다친 곳은 없어요? 그러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뛰어들면 어떡해요.”
호준이 다가가서 말을 건네자, 키가 크고 늘씬한 짧은 청미니스커트의 아가씨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면서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어머, 죄송해요...빨리 나가서 택시를 잡으려는 생각에 그만...”
‘허,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예의는 있군.’
상대방이 오히려 저렇게까지 미안해하는데, 뭐 달리 할 말이 있겠는가 마는...
보면 볼수록 어린 아가씨가 정말 예쁘게도 생겼네...크크...
자신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예쁜 여자들만 보면 도무지 사족을 못 쓰도록 환장을
한다는 거. 그거 아니겠는가.
“이 야밤에 젊은 미인이 혼자서 택시를 타고 간 다고요? 어떻게 그런 위험한 일을...
집이 어디신데요?”
“과천이에요...”
‘과천이라...뭐, 이곳에서 뭐 그리 뭔 거리는 아닌데, 얼른 태워다 주고 올까?’
후딱 태워다만 주고 오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자니 지금
주변에 있는 여자들만 해도 수습이 어려워서 골머리가 다 지끈거리는데 웬 기사노릇이람.
하는 생각도 들어서 갈팡질팡 할 따름인데, 마음과 달리 그의 입에서는 연신
작업용 멘트가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여기 홈쇼핑에서 일하시나 보죠? 혹시, 모델 아니세요? 히야, 넘 예쁘다...”
“예...모델 맞아요. 방금 전에 10시 생방송이 있어서 그걸 끝내고 나오던 길이거든요...”
생글거리면서 웃는 얼굴이라니...아, 정말 죽음이로군.
어째서 신은 나에게 이리도 가혹한 유혹의 사과를 연거푸 던지는 것인지...
그런데, 10시 생방송이라면...아까 직접 방청했던 우리 회사 란제리 광고?
가만, 그러고 보니 어째 얼굴이 낯익은 것도 같은데...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제야 유독 자신의 시선을 끌어 잡았던 모델의
얼굴과 그녀의 얼굴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정말 그 모델이로군...머리 스타일만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그걸 몰라보다니,
나도 참 한심하다니깐.’
그나저나 방금 전에 팬티와 브라만 걸쳐 입고 무대 위에 서 있던 모델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바지 속에 들어있는 물건이 주책없이 불끈 일어서는 것이
느껴져서 서 있기가 몹시 불편했다.
어디 주책없는 곤두서는 물건만 불편했겠는가.
피곤해 죽겠다던 두 눈동자는 또 어떤가.
비록 똥꼬만 살짝 가릴 수 있는 짧은 청미니 스커트를 입었을망정, 어쨌든 치마는
걸친 상태였고, 배꼽도 숨을 쉬어야만 한다는 자연주의의 원칙아래 상반신에
살짝 걸쳐 입은 짧은 가죽재킷 역시 인간이 걸치는 의복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호준의 눈동자 속에 서 있는 그녀는 그 짧은 치마와 작은 재킷마저도 단번에
벗어던진 상태로 오직 브래지어와 팬티만 갖춰 입은 부끄러운 모습이었으니,
이건 또 어디에서 생겨난 거룩한 투시력이냔 말이다.
“어머, 이런...스타킹이 찢어져 버렸네...어쩜 좋아.”
호준의 부끄러운 망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앞에 서 있던 늘씬한 란제리 모델은
갑자기 허리를 구십도 각도로 굽히면서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엉덩이를 호준의 코앞으로
바짝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오매 아예 사람을 잡는구만. 잡아.
짧은 미니스커트만 입은 젊은 아가씨가 눈앞에서 풍만한 엉덩이를 들이밀며 허리를 숙이는
모습만 지켜보더라도 그것은 숨이 멎을 만큼 환상적인 장면일진데, 지금 호준의 눈동자는
그녀의 치마를 꿰뚫을 수 있는 야릇한 투시력까지 생겨났으니, 말을 하면 무엇 하리요.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창백하네요.”
자신의 물건을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유도한 발칙한 아가씨의 질문 치고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아, 아니에요...빈혈이 좀 있어서...”
“어머, 빈혈이 있으셨군요? 그럼, 얼른 차안으로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부축해 드릴 게요.”
이런, 세상에나! 이렇게 불공평한 경우가 있나.
젊지, 예쁘지, 키 크지, 늘씬하지, 젖가슴 빵빵하지, 엉덩이 풍만하지...
그것도 모자라서 국민훈장을 추천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만 같은 저 친절한 마음씨라니.
“괘, 괜찮습니다마는...”
난처한 얼굴로 비록 사양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자가 미처 그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풍만한 유방에 기대어 한쪽 볼을 힘겨운 듯 비벼대고 있었다.
“어머나! 많이 불편하신가 보네요...”
“아, 아닙니다. 그냥, 조금...”
호준은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에 안겨서 날이 새도록 얼굴이나 원 없이 비벼봤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샘솟았으나, 그를 부축하고 있는 미녀는 너무나 천사 같은 맑은 심성의
여자였는지라 겨울바람 앞에서 한 없이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을 더 이사 두고 볼 수
없었나 보다.
괜찮다는 호준을 억지로 그의 승용차 문까지 끌고 간 그녀가 덜컥 자동차 문을 열더니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를 우겨 넣는 것이 아닌가.
“자, 얼른 타세요...”
“정말, 괜찮은데...”
이런, 젠장. 여자가 너무 친절해도 안 좋은 것이로군.
이런 것을 두고 사자성어로 과유불급이라고 하던가. 어쨌든 젠장...젠장이로고.
향긋하면서도 말랑말랑했던 그녀의 젖가슴에서 얼굴이 분리되고 나자, 마치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상실감이 거센 파도처럼 가슴속에 아득하게 밀려들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속옷만 입고 있던 란제리 모델을 이렇게나마 가까이서 접해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정말 친절한 아가씨군요...그럼, 안녕히...”
그의 못다 한 말은 「가세요」였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다음에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요」까지였을까.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돌연 조수석의 문을 열더니 향긋한 향기를
발산하는 그녀의 몸이 스스럼없이 옆 좌석으로 덥석 자리를 비집고 앉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제가 옆에 잠깐만 앉아 있어도 실례가 되지는 않겠지요?”
“그, 그럼요!”
아프다던 호준의 입에서 자신이 생각해도 겸연쩍을 만큼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호호...아프다더니, 전부 거짓말이죠?”
“무,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이제 좀 정신이 돌아온 것뿐인지요. 흠.흠.”
그나저나 인간방향제가 따로 없구만. 옆자리에 앉아있기만 해도 향긋한 향기가 차안을
진동하네 그려.
그녀의 향기에 도취되자, 조금 전에 빈혈이라고 얼버무렸던 상황이 진짜로 발생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아득해지기만 했는데, 조용한 차안에서 갑자기 요란한 음악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옆에 앉아 있던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을 받았다.
“어머, 언니! 어쩐 일로요...나요?...나 지금 ND홈쇼핑 건물 앞에 있는데요...
아, 이 앞을 지나가는 길이라고요...그럼, 어쩌지? 나도 언니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그럴래요? 예. 알았어요. 그럼, 여기에서 기다릴게요.”
핸드폰을 끊은 그녀가 생글거리는 얼굴로 호준을 바라봤다.
“미안한데,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내려도 되죠? 친한 언니가 이 부근에 있다 네요.”
그거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럼요. 그게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고...”
“참,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잖아요...저는 백호준이라고 합니다.
올해 스물여덟이죠.”
“어머, 나이가 그렇게나 많았어요? 저는 이제 스물넷이나 다섯 정도로 생각했는데...”
“다들 그렇게 보나 봐요...우리 예쁜 모델 아가씨는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현지...이현지예요. 나이는 스무 살.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해요.”
“어? 그럼, 아직 학생? 이런, 겉모습만 보면 완전히 성숙한 아가씬데...그야말로 주가가
치솟는 영계 아가씨라니...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호호...말 놔요. 오빠!”
헉...오빠? 이거 요즘 넘 자주 듣는 말 아니야?
막상 그녀로부터 오빠라는 말을 듣고 보니, 그제야 핸드폰을 건네주고는 아쉬운 듯
뛰어가던 독고 빈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 말을 놓을게...”
“그래요, 말을 놓으니깐 훨씬 자연스럽고 친한 것처럼 느껴지잖아...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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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언니! 벌써 도착했어요? 어디에 있는데요?...알았어요. 현관 앞으로 가 볼게요.”
두 번째 걸려온 핸드폰을 받은 이현지의 얼굴에서 조금 망설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왜? 무슨 일인데?”
호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을 때, 이현지가 가볍게 몸을 비틀면서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닌가.
“언니를 만나는 것은 좋은데,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서...피곤하기도 하고.”
“그래?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내가 조금 기다렸다가 집까지 데려다 줄까?”
호준도 피곤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현지처럼 예쁘고 상냥하고 몸매까지
훌륭한 어린 아가씨를 밤중에 혼자 남겨 두고 돌아간다는 것이 영 찝찝하기만 했던 것이다.
“어머, 오빠!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그럼,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고마워.”
쪽.
번개처럼 달라붙은 이현지의 달콤한 입술이 호준의 얼굴에 촉촉하면서도 뜨거운 입김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물들었고, 그는 쑥스러운 듯 그녀가 남기고 간
흔적을 자신도 모르게 어루만졌다.
“어차피 나를 집까지 데려다 줄 거라면 답답하게 차 안에서 기다리지 말고, 같이 나가자.”
이현지가 호준의 팔을 붙잡으면서 애교를 부렸기 때문에 호준은 자신도 모르게 차에서
내려서 그녀와 함께 나란히 홈쇼핑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나란히 걷고 있는 이현지를 보자니,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키는 자신보다도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듯해서 왠지 위축감을 맛봐야 했지만, 이현지는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듯 오히려 더 팔짱을 낀 그의 팔뚝을 자신의 유방 쪽으로 바짝 당기면서
밀착하는 것이었으니, 이거 참 환장할 노릇이로군.
“어? 언니가 현관으로 들어오라고 했는데...어디 있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이현지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핸드폰 통화를 하려는 듯 호준만
남겨놓은 체, 현관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거야, 원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가?
현관 복도에 어정쩡하게 서서 뒷머리만 긁적거리고 섰는데, 갑자기 열려 있는 현관문 밖에서 무언가 번쩍하는 플래시 불빛을 느끼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 뭐야? 이건.
당황해서 불빛이 번쩍인 방향을 바라보는데, 불과 5. 6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또 다시
불빛이 번쩍이는 것이었으니, 그곳에는 날렵한 청바지 차림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20대 후반의 여자가 호준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보란 듯이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나, 나를? 도대체 왜?’
머릿속이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고, 순간적으로
독고 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이봐요! 아가씨! 지금 내 얼굴을 찍은 건가요?”
호준이 가까이 다가서면서 무척이나 격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카메라 불빛은 연속해서 터지고 있었으니,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문득 고개를 돌려서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이현지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알듯 말듯 한 미소가 얄팍하게 번진 것을 보니,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어떻다는 것을 짐작하기에 충분할 듯싶었다.
이런, 제기랄...멍청하게도 겨우 저런 어린애한테 속다니...
펑...펑...
연속해서 터지고 있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그는 눈이 부신 듯 얼굴을 가리면서 소리쳤다.
“자, 잠깐만 진정하시고, 다 얘기할 테니깐...그만 좀 찍어요.”
그 말이 제법 먹힌 듯 했다.
연속해서 셔터를 눌러대던 청바지 차림의 긴 생머리 여자가 그제야 만족한 듯 득의의
미소를 떠올리는 것이 아닌가.
“정말이에요? 이건 완전히 특종이로군. 그럼, 독고 빈양과도 단독 인터뷰를 주선해 주실 수
있겠죠?”
“그, 그럼요...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고백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호준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두 여자들의 입가에서는 동시에 웃음꽃이 번졌으며,
뜨거운 동료애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하이파이브를 외치면서 손바닥을 맞부딪치는
것이었으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호준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불꽃이 용솟음치고 있는 것을 그녀들이
어찌 알 수나 있을까.
‘흥. 못된 계집년 들 같으니라구. 어디 두고 보라지.’
그의 손이 시약병이 들어있는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가고 있었다.
....................................................................................
넘 죄송해서 한편 더 올립니다.
앞으로 일주일간은 제발 닦달하지 마삼...
힘들어 죽겠다눈...ㅠ.ㅠ.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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