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급한 용무가 생겼다는 핑계로 다른 직원들보다 2시간이나 일찍 퇴근을 한 터였지만, 호준은 집으로 향하지 않고, 무작정 한수진 부장이 입원해 있다는 △△대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김희선 주임도 똑같은 증상인 걸 보면, 아무래도 예감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이미 김희선 주임과도 전화통화를 마친 후였고, 몹시 쑥스러워 하는 그녀에게서 결국은 유경희 대리와 똑같은 증상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오전 중에 병원에 다녀왔지만 병명은 알 수 없었노라 라는 기막힌 대답을 들었던 것이다.
전화를 끊은 후에 되짚어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 출근 전에 어머니도 대충 얼버무렸던 얘기도 바로 이 증상이 아닐까 하는 심증이 굳어졌고, 결국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수진 부장을 만나봐야겠다 는 생각에 도달했던 것이다.
‘만약 부작용이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치료제를 만들어야 될까?’
특허만 취득하면 돈방석에 나앉는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들어있었고, 또한 내심 자긍심도 대단했는데, 하루아침에 허물어진 기분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유경희 대리의 부작용이 난 부위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던가.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피딱지가 나앉을 정도로 긁어댔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더욱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안가는 건, 어째서 한 날 한시에 모두들 똑같은 부작용을 겪는 것 일까?’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호준도 한 가닥 의구심이 일었다.
자신과 성관계를 갖은 여자들이 모두들 부작용을 일으켰다면, 제각각 부작용을 일으키는 시점이 달라야 하지 않을까.
혹, 일정시간의 잠복기간을 거쳤다가,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한 날 한시에 발작을 하는 건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한수진 부장을 만나면 무언가 확연해 지겠지.’
가속 페달을 밟는 호준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고, 초조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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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시간들 됐으니, 이제 그만 퇴근 하세요!”
이지적이면서도 차가운 외모를 가진 배지수 차장이 오랜만에 환한 웃음을 지었기 때문에 디자인부 직원들은 조금 어리둥절한 느낌인 듯 했다.
“어머, 차장님!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28세의 이미영 대리가 그녀의 깊고 선명한 쌍꺼풀 눈동자를 동그랗게 치켜뜨면서 되묻는다.
“좋은 일은 무슨...... 그냥, 좋은 일이라도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지 뭐.”
“호호. 아닌 것 같은데요. 어쨌든 한 미모 하시는 차장님이 웃으시니깐 사무실이 훨씬 밝아진 느낌이네요. 그럼, 저희들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이미영 대리가 집 방향이 같은 신한별 주임, 강나영 주임과 더불어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자, 곧이어 안효정 대리와 김현숙 주임도 책상 정리를 막 끝마치고는 일어선다.
“차장님은 퇴근 안하세요?”
“응. 거의 정리를 끝냈으니까, 나도 금방 일어설 거야.”
“예. 그럼, 내일 뵐게요.”
“그래요. 조심해서 들어들 가요.”
사무실에 배지수 차장과 노란 염색머리의 정유미 대리만이 남았을 때, 정유미가 힐끔 눈치를 살피는 가 싶더니 배지수의 책상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평소의 습관대로 눈썹을 잔뜩 치켜 올린 배지수의 목소리에서 의아함이 묻어난다.
“구매건 때문에요. 제가 잘 한 일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구매라니? 어떤 거?”
“원단이요.”
정유미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 말꼬리를 흐렸는데, 갑자기 배지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원단? 그거야 정대리가 담당이고, 부장님 결재사항 아니에요?”
“그, 그렇긴 하지만, 아직 부장님께서 업무 파악도 안 되신 상태고......”
순간, 배지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려 나왔다.
“이봐요! 정대리! 내가 뭐라고 했어요? 난 그 일에 관여 안한다고 했지? 또, 부장님께서 나이는 젊지만, 워낙에 유능하신 분이잖아요. 어련히 알아서 결정을 했을까.”
“하지만, 차장님도 알고 계시는 내용이고, 또 의견은 어떠신 가 궁금해서요......”
“능력 있는 부장님이 계시는데, 내 의견 따윈 상관없잖아. 어쨌든 난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까 정대리가 알아서 추진해요.”
배지수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화사했던 미소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냉담하기 조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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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 복판에 자리 잡은 유원지였지만, 늦은 밤이었고 또한 비수기였기 때문에 주차장에는 차량 몇 대만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다.
실내등이 꺼져있는 검은색 세단에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예상대로 일은 잘 되었어요. 백부장은 업무에 전혀 관심이 없고, 배차장을 내심 경계했는데, 백부장의 인사 건으로 인해서 심사가 많이 뒤틀려 있었나 봐요.”
“흐흐. 다행이로군.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까다로운 배차장이 묵인했다면 정말 잘 된 일이지.”
30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는 굵은 저음이었고, 그는 디자인부의 생리를 익히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번 일이 정말로 잘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흐흐. 별 걱정을 다 하는군. 이미 시제품 테스트를 마쳤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잖아. 더구나, 백호준 그 인간이 하는 짓거리를 다 알면서도 그런 걱정을 하고 있나? 그 자식이 어디 부장 역할에 가당키나 해? 언젠가 큰 실수를 저질러서 회사를 말아먹을 인간이 틀림없다고.”
“하긴, 오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긴 했어요. 왜, 있잖아요. 기획부 유경희 대리...... 그 여자랑 또 무슨 사고를 저질렀는지 사무실이 난리도 아니었다니까요. 어떻게 사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정말 황당했어요.”
여자는 오전에 디자인부 사무실에서 있었던 백호준과 유경희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정당성을 찾은 듯 많이 안정된 목소리였다.
“흐흐.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이지. 두 년 놈 다......”
남자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가볍게 이를 갈았고, 그 모습으로 보건데, 백호준 이나 유경희에게 무언가 원한이 있는 듯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선금은 언제쯤 입금해 주실 거죠?”
“흐흐. 왜? 돈이 좀 급한가?”
“급히 쓸 곳이 있어서요.”
“흐흐. 걱정 말라고. 회사에서 돈을 입금하면 바로 송금할 테니까. 그나저나 난 다른 게 더 급한데......”
말을 마친 남자가 여자의 허벅지를 더듬는 듯 했다.
“아이, 왜 이러세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볼 테면 보라고 하지 뭐...... 히야, 흠뻑 젖었잖아. 하여간 감도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으흥......시, 싫어.”
싫다는 여자의 목소리에서 콧소리가 잔뜩 묻어나오는 것을 보면, 그리 싫지도 않은가 보다.
검은색 세단의 차체가 숨을 헐떡이는 들개마냥 커다란 몸뚱이를 들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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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었구나!”
호준이 구두를 벗고 있을 때, 거실로 나온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실려 있지 않은 듯 했다.
“예. 죄송해요......일이 좀 있어서요.”
“저녁은 먹고 왔니?”
“예......참, 병원에는 다녀오셨어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상태가 걱정이었기 때문에 호준은 불안스런 표정으로 바라봤고, 어머니는 괜찮다는 듯 초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응......피부에 좀 뭐가 났는지, 가렵고 쓰라려서 어젯밤에는 한 숨도 못 잤지, 뭐니.”
역시, 유경희, 김희선 등과 같은 증상인 듯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수진도 교통사고의 원인을 그 증상 때문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얼마나 가렵고 아팠으면 밤새 잠을 못 주무셨을까 하는 마음이 들자, 고개도 들지 못할 만큼 죄스럽기만 했는데, 자신의 방으로 건너가려는 호준의 귓속으로 어머니의 혼잣말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아무래도 내가 나쁜 년이라서 그렇지......”
호준은 돌아서서 무언가 위로를 해드리고 싶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해드려야 위로가 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못 들은 척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께서야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모든 게 내 잘못이지.’
왜, 그런 엉뚱한 발명품을 만들었는지, 또 왜 하필이면 어머니와 누나한테까지 그런 몹쓸 시험을 했던 것인지 모든 것이 엉망인 듯 느껴졌고, 사는 것도 별 반 재미없게 느껴졌다.
“이런 것 갖고 있으면 뭘 해!”
화가 난 호준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시약병을 꺼내들고는 벽을 향해서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퍽~
쨍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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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품 출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강현희 팀장의 기분은 불안하기만 했다.
그것은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해본 경력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미묘한 본능이었으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도통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원인을 찾지 못해서 답답할 뿐이었다.
따르릉~
“예. 강현흽니다.”
“......”
“아, 황전무님! 어쩌신 일로.”
“......”
“그럴 리가요? 우린 국산 원단만을 고집하는데......”
“......”
“예. 한번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리죠. 안녕히 계세요.”
급하게 전화를 끊은 강현희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모든 옷감의 생명은 좋은 원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더구나 직접 피부와 맞닿는 속옷을 생산하는 회사에서는 가히 철칙이다 싶은 것이 아니었던가.
“서,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방금 전에 걸려온 전화는 오랜 거래처인 S물산이었다.
자신들과의 오랜 거래를 깨고 중국산 원단과 계약을 맺은 것에 관하여 무척이나 서운해 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백부장의 경력이 일천하다지만, 나름대로 패기가 있고, 두뇌가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강한 믿음을 주고 있었는데, 설마 속옷의 기본인 원단을 검증되지 않은 중국산으로 선택했을 리야 있겠냐는 마음이 들었으나, 어쨌든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경리부장님 좀 부탁해요.”
다급해진 손길로 수화기를 집어 든 강현희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떨렸으나, 그녀는 내심 자신을 최대한 진정시키기 위해서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본부 경리부장인 최부장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최부장입니다.”
“연구팀 강현희예요.”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평소 콧대 높기로 소문난 강현희가 직접 전화를 건 것이 처음이다 싶었던지 최부장의 목소리는 과장대고 들떠있는 듯 느껴졌지만, 강현희는 지금 그런 것은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원단대금 결재 하셨나요?”
“아, 원단이요? 예. 선금 1억은 조금 전에 보냈습니다만......왜요?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렇잖아도 금액이 평소보다 높아서 조금 이상하다 싶기는 했는데......”
“아, 아니에요. 일단, 나머지 결재는 보류해 두세요.”
“그거야 뭐. 팀장님이 직접 지시하시는 건데, 그렇게 하죠. 그런데, 무슨 일인데요?”
“아니, 더 이상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되요. 그럼.”
“아, 예. 예.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전화를 끊은 강현희가 붉게 닳아 오른 얼굴로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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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대책회의가 열렸는데도, 회의실 안은 썰렁하기만 했다.
기획부의 한수진 부장은 계속 입원 중이었고, 송주희 차장과 김희선 주임은 통원 치료차 잠시 병원에 들렀다 온다고 자리를 비웠으며, 디자인부의 정유미 대리는 집안에 일이 있다면서 이틀째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고민 때문인지는 몰라도 호준의 얼굴은 바짝 야위어서 눈에 생기를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며, 유경희 대리 또한 피부질환으로 고통이 심했던지 한 눈에 보기에도 무척 피로해 보였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예요? 명색이 부장이라는 사람은 형편없는 중국산 원단을 고가에 계약하질 않나? 직원들은 아프다고 매일같이 병원으로 출퇴근 도장을 찍질 않나? 이러니 사무실이 어디 제대로 돌아가기나 하겠어요?”
강현희 팀장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으나, 모두들 어딘지 맥 풀린 분위기 속에서 그저 꿀 먹은 벙어리들 뿐 이었다.
“백부장님! 어디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좀 해보세요!”
“......”
호준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었으나, 이런저런 생각도 없이 덥석 계약서에 사인을 한 장본인으로서 달리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으랴. 고개를 파묻을 수밖에.
“그럼, 배차장님!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얘기 좀 해보세요. 백부장이야 아직 경험이 미숙해서 그렇다지만, 배차장은 어째서 몰랐던 거죠?”
“저는 백부장님이 알아서 하실 줄 알고......”
배지수가 기껏 변명이라고 내뱉은 말이 강현희의 부아를 더욱 돋운 듯 했고, 강현희의 싸늘하고도 매서운 눈동자가 배지수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았는데, 문득 한쪽 구석에서 안절부절 앉아 있던 김영희 주임이 다급한 목소리로 손을 번쩍 들었다.
“팀장님! 죄, 죄송한데 화장실 좀......”
‘바보......’
호준은 내심 웃음이 쏟아질 번 한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아야 했다.
이런 냉각된 분위기 속에서 저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다니, 평소의 영리한 김영희 답지 않게 사람 웃기는 재주도 있군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강현희 팀장의 입에서 불화살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
“죄송해요. 도저히 못 참겠어요.”
김영희가 마치 똥을 못 참는 어린아이처럼 다짜고짜 몸을 일으키더니, 문을 열고 달려 나갔고, 강현희 팀장은 너무 화가 나서 히스테리를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이번에는 나수정 대리까지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팀장님, 저, 저도요......”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면서도 잽싼 동작으로 화장실로 달려 나가는 순간, 불현듯 어떤 의구심 하나가 호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한두 살 먹은 어린 아이들도 아니고, 저렇게 다급한 표정으로 화장실로 달려가야 한다면 혹시, 그녀들도 어머니나 유경희와 같은 증상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약품으로 인한 부작용이 아니라는 얘긴데......’
김영희 주임, 나수정 대리는 결코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적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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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임! 잠깐 물어볼 말이 있는데.”
“뭔데요?”
복도에서 마주친 김영희는 이 얼간이가 또 무슨 엉뚱한 얘기를 꺼낼까 하는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호준을 바라보았고, 호준은 쑥스러운 듯 예의 습관대로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이 생머리의 빼빼마른 계집애는 평소 자신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더니만, 오늘은 또 왜 이리도 감이 없을까. 호준은 내심 답답하기만 했다.
다짜고짜 거기가 가렵냐고 묻자니, 변태소리 들을 일은 자명할 것이고. 도대체 뭐라고 물어야 잘 물었다는 소문이 난단 말이냐.
“저기, 혹시......가렵거나 쓰라리거나 하지 않아?”
“어디가요?”
이 남자가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김영희는 빤히 호준의 눈동자를 바라보는데, 그의 눈동자가 자신의 중심부를 유심히 훑어보고 있는 것을 보자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무리 이물 없는 사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남녀가 유별하거늘 이 인간이 보자보자 하니깐. 정말.
“지금 어딜 보는 거예요? 징그럽게.”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화장실에 달려갔을 때, 혹시 어디가 아파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해서......”
“나, 참. 별꼴이야!”
김영희가 찬바람이 일 정도로 몸을 홱 하니 돌아서는데, 호준의 마음은 무척이나 조급했기 때문에 무작정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매달렸다.
“자, 잠깐만!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
“그게 왜 궁금한데요?”
“그, 그게 그러니까......아, 맞다. 팬티!”
“팬티?”
“그래. 샘플용 팬티.”
무심결에 둘러대긴 했는데, 말을 뱉고 보니 제법 상황에 맞는 핑계인 듯싶어서 호준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중국산 원단이기 때문에 착용감으로 인한 불편이나 통증은 없을까 해서.”
호준의 얘기를 들은 김영희가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내리깔았다가, 잠시 후 눈을 반짝 들면서 그를 바라봤다.
“어? 정말 그러네. 오늘 아침에야 처음 입어 봤는데......”
“오, 그래? 오늘 아침에 입었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면, 아마도 변태들로 여겼으리라.
“그래서? 착용감이 어땠는데?”
호준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한 움큼 넘어간다.
“아까 회의실에서 봤잖아요. 급하게 뛰어가는 것......”
“왜 그랬는데? 가려워서? 따가워서?”
호준은 빨리 대답을 듣지 못해서 안달난 사람처럼 김영희를 다그쳤고, 그녀가 마지못한 듯 부끄럽게 대답했다.
“두 가지 다요.”
“둘 다? 그럼 그렇지!”
역시 그랬던 거야. 그동안 부작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살았는지 생각하니, 호준은 저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들어서 상황도 의식하지 않고 무작정 탄성부터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본 김영희의 눈동자에 어찌 힘이 들어가지 않으랴.
“아니, 내가 아픈 게 그렇게나 좋아요?”
“그, 그럴 리 가!”
“아님,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일부러 사람 골탕 먹이려고 품질이 좋지 않은 원단을 쓴 사람처럼.”
“아니, 이 여자가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
“흥. 백부장님 엉뚱한 거야 울 회사 직원들 모두 알고 있는데, 새삼.”
김영희가 더 이상 상종도 하기 싫다는 듯 호준을 거칠게 째려보면서 돌아섰지만, 호준의 마음은 그동안 자신의 가슴을 옥죄어 왔던 실망감과 죄책감에서 가까스로 해방된 기분이었다.
‘범인은 팬티였구나. 죽일 놈의 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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