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장에 사라를 내려주고서는, 테리우스와 별장으로 돌아오면서, 난 테리우스에게 형의 행방을 물었다.
"그래서, 너네 형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그 돌아가신 분 영안실에 있는 거냐?"
"왜? 우리 형은 갑자기."
"그냥, 좀 궁금해져서 말이야. 솔직히 난 사라가 내 곁으로 온 일이 영생교랑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잖아. 내가 영생교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 내가 가진 재산이 많냐. 뭐가 있냐?"
"간단해. 사라가 형 곁으로 온 건, 교단의 뜻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사라 자신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이야기 했었잖아. 형은 신도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형 입장에서 사라는 좋은 신도였을거야. 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런 인식이 이뤄지고 나면, 형은 사라가 어떤 것을 원하든 그것을 들어주려고 했을거야. 아마도 사라가 우리 형에게 형을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했거나 했겠지. 형은 사라를 형에게 보내려고 돈을 썼겠지."
"그게 말이 돼? 왜? 교단의 입장에선 사라가 일을 계속해서 헌금을 계속하는 편이 나은 것 아니야? 왜 은퇴를 시켜?"
"형은 진짜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유명한 배우 사라도 은퇴를 하면서까지 진짜 행복을 교 안에서 찾았어. 교회돈을 써서 교인의 소원을 들어준거야. 그게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잖아. 특히나 교단 내부에선 더 심하게 소문이 나겠지. 그리고 교인들에게 확신을 주는 거야. 영생교에 모든 것을 바치면, 모든 것을 얻는다는 확신. 일억원짜리 헌금도 사실 따지고 보면, 만명이서 만원씩 내도 일억원이 되는 거거든."
"시범케이스 같은 거네?"
"아니, 내가 우리 형을 제일 무서워하는 게 그거거든. 사라가 돈이 되지 않아도 형이 알았다면 형은 그렇게 했을거야. 형은 욕심이 없어. 진짜 신도를 위하는 사람이야. 그런 게 가끔 기적을 만들기도 하는 거거든. 사람에 대한 순수한 선의같은 것 말이야."
"좋은 사람이잖아. 결국."
"무서운 사람이지. 원래 형 성격은 그런 성격이 아니니까. 이치를 따지고, 사리를 심하게 따지고, 정확해야 하고, 원칙주의자에 극도로 계산적인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금 저런 모습을 만든거야. 지금 이진섭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말이야. 진짜 이진섭이 아니야. 그렇다고 가짜도 아니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쯤은 보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이 없을까?"
"형, 그런데, 저기 뒷차 말이야. 계속 우리 따라오는 것 같은데? 아까 식당에서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가 촬영장 앞에서 사라랑 이야기할 때도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더니, 여태 계속 따라오는데?"
"그래? 혹시 너네 형이 붙인 사람들 아니냐?"
"그렇지는 않을 걸. 우리 형은 강릉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야. 저런 사람들 안 붙여도, 그냥 말을 하면 돼. 제 동생이 타고 있는 차가 어떤 차종에 번호가 몇 번인데, 좀 찾아주세요. 삼십분 안으로 제보 전화가 오백통을 갈 걸. 누굴 붙일 필요가 없어. 형, 저기다가 한 번 대 봐. 아마 설걸."
갓길에 졸음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난 표지판을 따라 쉼터로 들어가서 뒤를 살폈다. 우릴 따라오던 검정색 렉스턴이 내 차 꽁무니에 서더니, 누군가 내렸다. 어두워서 여자라는 것만 보였는데, 조수석에서 카메라를 든 사람이 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 뒤를 따라붙은 사람이 김소희 기자라는 것을 알았다. 김기자는 내 차로 다가오더니 운전석 문의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테리우스가 눈을 찌푸리면서 창밖을 보더니 내게 물었다.
"형, 누구야? 아는 사람들이야?"
"응, 기자. 사라 때문에 왔나본데. 저번에 대강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인터뷰를 했었는데, 아마 뒤를 따라붙은 모양인데?"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죄졌냐? 잠깐만 있어봐."
차 문을 열고 나갔더니 휙 하고 늦가을 바람이 불었다. 몸이 떨릴정도로 차가워서 바바리 코트를 챙겨입은 김소희 기자가 좀 부러워졌다. 김 기자는 마치 이겼다는 듯, 내게 턱을 내밀고 말했다.
"이 작가님. 말씀하신 거랑 좀 다르네요. 인터뷰를 새로 해야겠죠?"
"뭐가 다르죠? 제가 인터뷰한 내용이랑 뭐가 다르죠?"
"일단, 유민영씨가 작가님을 찾아왔다는 것이 다르죠. 거기에다 몹시 친숙해보이시던데요. 녹취는 불법이라 하진 않았지만, 제가 들은 내용도 있고요. 유민영씨가 이번 작품을 경계로 은퇴를 하고, 이작가님과 혼인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 말았네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게 김 기자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대중이 원하는 알 권리라는 게 있잖아요."
"대중이 원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사생활을 당사자의 동의없이 보도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죠."
"하지만, 유민영씨는 공인이에요."
"왜 민영이가 공인이죠? 공직생활을 하고 있나요? 민영이가 연애를 하는 것이 대중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인가요? 그리고 들으셨다시피 민영이가 은퇴를 할 작정이면 가짜 공인의 자리에서도 내려오게 되는 것이니만큼, 더더욱 사생활을 보호해 줘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만약,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해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보도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소송을 하게 되겠죠. 부끄럽지 않나요. 남의 차 꽁무니를 따라다닐 시간이 있으면, 정말로 공익을 위한 일을 하세요. 이런 취재력이라면 나라를 위해 큰 일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럼 저도 레이디중앙을 정기구독하죠. 약속드릴 수도 있어요."
이야기를 마치는 도중에, 갑자기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갑자기 밝은 빛이 눈 앞에서 터져서 잠깐 눈이 보이지 않는 동시에 약간 어지러워서 차에 몸을 기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김소희가 바짝 다가오더니 내 얼굴 가까이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아마도 술냄새를 맡으려는 것 같았다. 이런 때에 내 비리를 하나 잡으면 훨씬 더 유리할 것이다. 킁킁 거리는 코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코에 유분기가 도는 파운데이션이 발라져 있지 않았다면, 난 그랬을지도 모른다. 난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 사진을 어디에 쓸지는 모르겠지만, 보도를 하거나, 아니면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에 흘리기라도 해서, 그걸 제가 보게 되면, 전 정말 소송절차를 밟을 생각이니까 알아서 하세요. 쭉 지켜봐와서 알겠지만, 민영이는 제게 부담이 될 정도로 좋은 여자이고, 예쁜 사람이니까요. 민영이가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게 내버려두지 않을래요."
"그런 훌륭한 면을 대중에게 알려서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좋은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바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요."
깎아놓은 밤톨같이 똘망똘망하게 생긴 잘생긴 사진기자가 좀 시니컬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좋아요. 좀 더 생각을 해보죠. 그건 맞는 말일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매체는 제 쪽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니만큼, 전 김기자님과는 더는 보고싶지 않네요. 제가 한 말을 신뢰할 수 있는 기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김기자님은 이미 신뢰를 잃었어요. 제 말을 믿지 않고, 온종일을 몰래 따라다니는 사람과는 인터뷰든 뭐든 하고 싶지 않아요. 그만 보죠."
얼이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김기자를 두고서 차에 탔더니, 테리우스가 엄지손가락을 두개 모두 올려서 내게 내밀었다.
"형, 진짜 말빨은 죽인다. 그냥 말로 후려패 버리는데. 가자."
"그래. 가자. 피곤하다."
"당신은 신뢰를 잃었죠. 날 믿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와.."
"됐다. 출발한다."
별장에 도착하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간 건지 몹시 피곤했다. 피곤이 계속 쌓여서, 쉽게 회복이 되질 않았다. 목욕탕이라도 가고 싶었는데, 근처에 목욕탕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냥 관두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불면증이 다시 나를 덥쳤다.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째깍거리는 큰 시계를 귀에 붙인 사람처럼 초단위로 모든 시간의 어그러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문자수신음이 들렸지만, 눈을 뜨기 싫어서 보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천천히 숫자를 셌다. 오백 정도를 세고 나서 눈을 뜨고, 가방을 뒤졌다. 수면제를 찾기 위해서였다. 가방엔 밝은 갈색의 서류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다. 내가 챙겨온 것이 아니었다. 수면유도제 봉투를 찾아들고, 서류봉투를 들고 식탁으로 나왔다. 물을 따르고, 서류봉투를 열었더니, 그곳에는 영지 다이어리가 들어있었다. 인조가죽 겉감을 제거한 큰 사이즈의 노트엔 달필의 글씨가 가득했다. 누군가의 일기장 같았는데, 난 첫문장을 읽고나서 바로 그것이 테리우스의 형 이진섭의 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월 17일. 일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를 설득해서 교회에서 억지로 들게 했던, 사망보험금을 내가 탈 듯하다. 좋지 않다. 신께로 가는 길에 또 내 한 다리를 돈에 잡혀버린 것 같다. 만원짜리가 쌓일수록, 영혼은 가난해진다. 2억쯤 될 것 같은데, 할머니 아들인 재욱형제는 소송이라도 할 기세지만, 그에게 쥐어주면 열흘도 가지 못할 것이다. 재욱형제가 할 수 있는 사업장을 교회의 이름으로 열 생각을 해보지만, 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한 가득이다. 체력관리를 좋 해야한다. 내일부터 닷새동안 다섯명의 신도와 섹스를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즐거워야 하는데, 난 지금 정신이 없다. 손에 당장 잡히는 희열을 주기 위해서라도 나부터 즐겨야 하는데, 아직도 마음에 잘못배운 도덕적 굴레가 남아있다. 난 선한 양을 이끄는 목자다라고 하루에도 수십번씩을 되뇌지만, 아직 어린 태가 나는 학생들과 섹스를 하는 내 모습이 꼴같지 않아서 계속 이건 아니다 싶을 때가 많다. 아직도 난 인간이다. 신께 향하지만, 신에 미치지 못하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서둘러서 몇 장을 더 넘겼다. 한 페이지를 할애해서는 자연사로 위장해서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 대한 것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적혀 있는 말은 손을 떨리게 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아버지가 신의 인도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정규모 이상의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역시 필요한 존재였다. 죽어주는 것이 모든 교인들에게 더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조용히 아버지와 죽는 방법에 대해 상의했었는데, 아버지는 죽을 생각이 없었다. 죽어야 하는데.. 죽어야 하는데 말이다."
일기장엔 정말로 놀라운 내용들이 가득했다. 서른 페이지 정도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은, 테리우스의 형 이진섭 목사에 대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인간적으로 그를 신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일기장엔 과정도 거짓도 없었고, 오직 신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한 인간의 처절함만이 있었다. 나라도 그 길을 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드르륵!
원목 식탁 위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잡고 귀에 가져갔다.
"이경민씨. 이진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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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신가요? 재미있으신가요?
"그래서, 너네 형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그 돌아가신 분 영안실에 있는 거냐?"
"왜? 우리 형은 갑자기."
"그냥, 좀 궁금해져서 말이야. 솔직히 난 사라가 내 곁으로 온 일이 영생교랑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잖아. 내가 영생교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 내가 가진 재산이 많냐. 뭐가 있냐?"
"간단해. 사라가 형 곁으로 온 건, 교단의 뜻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사라 자신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이야기 했었잖아. 형은 신도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형 입장에서 사라는 좋은 신도였을거야. 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런 인식이 이뤄지고 나면, 형은 사라가 어떤 것을 원하든 그것을 들어주려고 했을거야. 아마도 사라가 우리 형에게 형을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했거나 했겠지. 형은 사라를 형에게 보내려고 돈을 썼겠지."
"그게 말이 돼? 왜? 교단의 입장에선 사라가 일을 계속해서 헌금을 계속하는 편이 나은 것 아니야? 왜 은퇴를 시켜?"
"형은 진짜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유명한 배우 사라도 은퇴를 하면서까지 진짜 행복을 교 안에서 찾았어. 교회돈을 써서 교인의 소원을 들어준거야. 그게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잖아. 특히나 교단 내부에선 더 심하게 소문이 나겠지. 그리고 교인들에게 확신을 주는 거야. 영생교에 모든 것을 바치면, 모든 것을 얻는다는 확신. 일억원짜리 헌금도 사실 따지고 보면, 만명이서 만원씩 내도 일억원이 되는 거거든."
"시범케이스 같은 거네?"
"아니, 내가 우리 형을 제일 무서워하는 게 그거거든. 사라가 돈이 되지 않아도 형이 알았다면 형은 그렇게 했을거야. 형은 욕심이 없어. 진짜 신도를 위하는 사람이야. 그런 게 가끔 기적을 만들기도 하는 거거든. 사람에 대한 순수한 선의같은 것 말이야."
"좋은 사람이잖아. 결국."
"무서운 사람이지. 원래 형 성격은 그런 성격이 아니니까. 이치를 따지고, 사리를 심하게 따지고, 정확해야 하고, 원칙주의자에 극도로 계산적인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금 저런 모습을 만든거야. 지금 이진섭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말이야. 진짜 이진섭이 아니야. 그렇다고 가짜도 아니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쯤은 보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이 없을까?"
"형, 그런데, 저기 뒷차 말이야. 계속 우리 따라오는 것 같은데? 아까 식당에서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가 촬영장 앞에서 사라랑 이야기할 때도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더니, 여태 계속 따라오는데?"
"그래? 혹시 너네 형이 붙인 사람들 아니냐?"
"그렇지는 않을 걸. 우리 형은 강릉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야. 저런 사람들 안 붙여도, 그냥 말을 하면 돼. 제 동생이 타고 있는 차가 어떤 차종에 번호가 몇 번인데, 좀 찾아주세요. 삼십분 안으로 제보 전화가 오백통을 갈 걸. 누굴 붙일 필요가 없어. 형, 저기다가 한 번 대 봐. 아마 설걸."
갓길에 졸음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난 표지판을 따라 쉼터로 들어가서 뒤를 살폈다. 우릴 따라오던 검정색 렉스턴이 내 차 꽁무니에 서더니, 누군가 내렸다. 어두워서 여자라는 것만 보였는데, 조수석에서 카메라를 든 사람이 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 뒤를 따라붙은 사람이 김소희 기자라는 것을 알았다. 김기자는 내 차로 다가오더니 운전석 문의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테리우스가 눈을 찌푸리면서 창밖을 보더니 내게 물었다.
"형, 누구야? 아는 사람들이야?"
"응, 기자. 사라 때문에 왔나본데. 저번에 대강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인터뷰를 했었는데, 아마 뒤를 따라붙은 모양인데?"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죄졌냐? 잠깐만 있어봐."
차 문을 열고 나갔더니 휙 하고 늦가을 바람이 불었다. 몸이 떨릴정도로 차가워서 바바리 코트를 챙겨입은 김소희 기자가 좀 부러워졌다. 김 기자는 마치 이겼다는 듯, 내게 턱을 내밀고 말했다.
"이 작가님. 말씀하신 거랑 좀 다르네요. 인터뷰를 새로 해야겠죠?"
"뭐가 다르죠? 제가 인터뷰한 내용이랑 뭐가 다르죠?"
"일단, 유민영씨가 작가님을 찾아왔다는 것이 다르죠. 거기에다 몹시 친숙해보이시던데요. 녹취는 불법이라 하진 않았지만, 제가 들은 내용도 있고요. 유민영씨가 이번 작품을 경계로 은퇴를 하고, 이작가님과 혼인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 말았네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게 김 기자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대중이 원하는 알 권리라는 게 있잖아요."
"대중이 원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사생활을 당사자의 동의없이 보도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죠."
"하지만, 유민영씨는 공인이에요."
"왜 민영이가 공인이죠? 공직생활을 하고 있나요? 민영이가 연애를 하는 것이 대중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인가요? 그리고 들으셨다시피 민영이가 은퇴를 할 작정이면 가짜 공인의 자리에서도 내려오게 되는 것이니만큼, 더더욱 사생활을 보호해 줘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만약,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해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보도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소송을 하게 되겠죠. 부끄럽지 않나요. 남의 차 꽁무니를 따라다닐 시간이 있으면, 정말로 공익을 위한 일을 하세요. 이런 취재력이라면 나라를 위해 큰 일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럼 저도 레이디중앙을 정기구독하죠. 약속드릴 수도 있어요."
이야기를 마치는 도중에, 갑자기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갑자기 밝은 빛이 눈 앞에서 터져서 잠깐 눈이 보이지 않는 동시에 약간 어지러워서 차에 몸을 기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김소희가 바짝 다가오더니 내 얼굴 가까이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아마도 술냄새를 맡으려는 것 같았다. 이런 때에 내 비리를 하나 잡으면 훨씬 더 유리할 것이다. 킁킁 거리는 코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코에 유분기가 도는 파운데이션이 발라져 있지 않았다면, 난 그랬을지도 모른다. 난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 사진을 어디에 쓸지는 모르겠지만, 보도를 하거나, 아니면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에 흘리기라도 해서, 그걸 제가 보게 되면, 전 정말 소송절차를 밟을 생각이니까 알아서 하세요. 쭉 지켜봐와서 알겠지만, 민영이는 제게 부담이 될 정도로 좋은 여자이고, 예쁜 사람이니까요. 민영이가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게 내버려두지 않을래요."
"그런 훌륭한 면을 대중에게 알려서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좋은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바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요."
깎아놓은 밤톨같이 똘망똘망하게 생긴 잘생긴 사진기자가 좀 시니컬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좋아요. 좀 더 생각을 해보죠. 그건 맞는 말일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매체는 제 쪽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니만큼, 전 김기자님과는 더는 보고싶지 않네요. 제가 한 말을 신뢰할 수 있는 기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김기자님은 이미 신뢰를 잃었어요. 제 말을 믿지 않고, 온종일을 몰래 따라다니는 사람과는 인터뷰든 뭐든 하고 싶지 않아요. 그만 보죠."
얼이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김기자를 두고서 차에 탔더니, 테리우스가 엄지손가락을 두개 모두 올려서 내게 내밀었다.
"형, 진짜 말빨은 죽인다. 그냥 말로 후려패 버리는데. 가자."
"그래. 가자. 피곤하다."
"당신은 신뢰를 잃었죠. 날 믿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와.."
"됐다. 출발한다."
별장에 도착하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간 건지 몹시 피곤했다. 피곤이 계속 쌓여서, 쉽게 회복이 되질 않았다. 목욕탕이라도 가고 싶었는데, 근처에 목욕탕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냥 관두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불면증이 다시 나를 덥쳤다.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째깍거리는 큰 시계를 귀에 붙인 사람처럼 초단위로 모든 시간의 어그러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문자수신음이 들렸지만, 눈을 뜨기 싫어서 보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천천히 숫자를 셌다. 오백 정도를 세고 나서 눈을 뜨고, 가방을 뒤졌다. 수면제를 찾기 위해서였다. 가방엔 밝은 갈색의 서류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다. 내가 챙겨온 것이 아니었다. 수면유도제 봉투를 찾아들고, 서류봉투를 들고 식탁으로 나왔다. 물을 따르고, 서류봉투를 열었더니, 그곳에는 영지 다이어리가 들어있었다. 인조가죽 겉감을 제거한 큰 사이즈의 노트엔 달필의 글씨가 가득했다. 누군가의 일기장 같았는데, 난 첫문장을 읽고나서 바로 그것이 테리우스의 형 이진섭의 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월 17일. 일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를 설득해서 교회에서 억지로 들게 했던, 사망보험금을 내가 탈 듯하다. 좋지 않다. 신께로 가는 길에 또 내 한 다리를 돈에 잡혀버린 것 같다. 만원짜리가 쌓일수록, 영혼은 가난해진다. 2억쯤 될 것 같은데, 할머니 아들인 재욱형제는 소송이라도 할 기세지만, 그에게 쥐어주면 열흘도 가지 못할 것이다. 재욱형제가 할 수 있는 사업장을 교회의 이름으로 열 생각을 해보지만, 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한 가득이다. 체력관리를 좋 해야한다. 내일부터 닷새동안 다섯명의 신도와 섹스를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즐거워야 하는데, 난 지금 정신이 없다. 손에 당장 잡히는 희열을 주기 위해서라도 나부터 즐겨야 하는데, 아직도 마음에 잘못배운 도덕적 굴레가 남아있다. 난 선한 양을 이끄는 목자다라고 하루에도 수십번씩을 되뇌지만, 아직 어린 태가 나는 학생들과 섹스를 하는 내 모습이 꼴같지 않아서 계속 이건 아니다 싶을 때가 많다. 아직도 난 인간이다. 신께 향하지만, 신에 미치지 못하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서둘러서 몇 장을 더 넘겼다. 한 페이지를 할애해서는 자연사로 위장해서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 대한 것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적혀 있는 말은 손을 떨리게 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아버지가 신의 인도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정규모 이상의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역시 필요한 존재였다. 죽어주는 것이 모든 교인들에게 더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조용히 아버지와 죽는 방법에 대해 상의했었는데, 아버지는 죽을 생각이 없었다. 죽어야 하는데.. 죽어야 하는데 말이다."
일기장엔 정말로 놀라운 내용들이 가득했다. 서른 페이지 정도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은, 테리우스의 형 이진섭 목사에 대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인간적으로 그를 신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일기장엔 과정도 거짓도 없었고, 오직 신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한 인간의 처절함만이 있었다. 나라도 그 길을 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드르륵!
원목 식탁 위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잡고 귀에 가져갔다.
"이경민씨. 이진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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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신가요? 재미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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