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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0:05 470회 0건
선아는 치한을 만난 후 학원을 그만두었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귀가했다. 거리에서 낯선 남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면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불안정한 심리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아는 딸이 안정을 찾도록 일찍 집으로 돌아와 딸을 보살폈다.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선아는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선아는 어느 정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선아는 학교가 끝나자 바로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그때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선아는 요즘 그 생각으로 복잡하다. 치한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은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사람인지, 귀신인지조차 불분명했다. 분명 그녀의 눈에 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꿈이라고 치부하기에 그녀가 경험한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엄마에게 그런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남자가 도와주었다는 말만 하고 진실을 숨겼다. 엄마는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사례를 하려고 찾아보겠다고 하셨지만,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그 사람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경고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를 찾아온다고 했는데...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우리 집도 모를 텐데... 어떻게 찾아오겠다는 걸까?”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건 어렵지 않지!”
순간 허공에 목소리가 울렸다.
선아는 혼자 있는 방안에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안에는 분명 그녀 혼자뿐이었다. 무서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꿈인가 싶어 살짝 손등을 꼬집어보니 아팠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벌건 대낮에 귀신이 나타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 누구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목소리가 그녀의 떨림을 감지하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무서워하지 마. 벌써 내 목소리를 잊은 건 아니겠지?”
선아는 문득 그 목소리를 기억했다. 치한에게 당할 뻔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 다만, 그때는 마음속에 공명하는 것처럼 들렸고, 지금은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린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목소리가 같다는 걸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 그때 절 도와주신 분?”
“후후, 다행히 아직 잊지 않았군. 그래, 그게 바로 나였지”
여전히 선아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막연히 허공을 보며 물었다.
“어, 어디 계세요?”
“아직 기력이 부족해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사, 사람이 아닌가요?”
그녀는 자신이 물어보고 괜한 질문을 했다고 자책했다.
‘바보같이... 눈에 안 보이는데 사람일 리 없잖아’
그가 낮게 웃었다.
“후후, 재밌는 질문을 하네. 보면서도 모르겠어? 하긴 너무 놀랍겠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사람이 아냐”
“그, 그럼 귀, 귀신인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너무 무서워서 오줌을 쌀 것 같았고 당장 방을 뛰쳐나가 엄마에게 가고 싶었다.
목소리가 잠시 들리지 않았다. 선아는 공포가 심해서 멍했으나 침묵이 지속되자 차츰 안정을 찾았다.
“여보세요?”
선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갔는지 싶어 불러보았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선아는 움찔 놀랐다. 그러나 조금 전처럼 떨지는 않았다.
“네, 조금... 절 도와주셨는데 죄송해요.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네요.”
“그렇겠지. 그래도 나와의 약속, 너의 맹세를 지켜주었으면 좋겠어.”
“숙주가 되어달란 말씀인가요? 그런데 저는 아직 그 의미조차 모르고 있어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편하게 앉지”
선아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목소리가 그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일단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나는 색귀야. 여인의 음정을 취하며 기생하는 존재이지.”
선아가 움찔 놀라 경직되었다. 목소리도 그녀의 변화를 눈치 챘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사람들은 나와 같은 존재를 악귀라 칭하며 두려워하더군. 하지만 나도 원한 건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해. 두렵고 떨리겠지만 마저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군. 말했다시피 색귀는 숙명적으로 여인의 음정을 취하도록 되어 있어. 여인의 음정을 취해야만 육신을 얻고 강력한 능력을 얻을 수 있지. 그러나 분명히 말해두는데 나는 숙주를 구할 생각이 없었어. 그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간에 떠돌며 세상을 구경하는 것을 즐겼지. 물론 숙주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숙주가 계약을 거부하면 소멸되는 운명이 두려웠어. 거의 대부분의 색귀들이 계약에 실패해서 소멸하는 걸로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숙명을 거부하고 떠돌아다녔지. 겁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어. 저절로 소멸되기 전까지 유랑을 즐기려고 결심했었지. 그런데 우연히 너를 보게 되었어. 네가 간절히 도움을 청하더군. 그건 내게 엄청난 유혹이었어. 절박한 심정의 너라면 계약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지. 나도 결국은 색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숙주에 대한 욕망은 내 맹세를 깨도록 만들더군. 그래서 네게 계약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내 예감대로 성공했어. 육신이 없는 상태로 그 녀석을 처리하는 게 힘들었지만 이렇게 훌륭한 숙주를 얻게 되었잖아.”
선아는 만화 같은 이야기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색귀라니... 이건 꿈일 거야.’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꿈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정신을 너무도 또렷했다. 그녀는 강하게 부정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당신의 말을 믿죠?”
“지금 네 앞에 있는 날 보면 믿어지겠지.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너는 이미 맹세를 했기 때문이지. 맹세를 한 순간 이미 너는 나의 숙주가 되었어.”
“싫어요. 전 당신의 숙주가 되지 않겠어요.”
선아는 강하게 부정했다. 목소리가 잠시 침묵한다. 이어 분노가 실린 싸늘한 목소리로 변했다.
“계약을 파기하겠다면 나는 소멸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 혼자 소멸되지는 않겠어. 나를 배신한 너도 대가를 치러야 해. 나는 네 가족의 목숨을 취하겠어.”
“뭐, 뭐라고요? 그건 안 돼요.”
선아는 다급히 소리쳤다. 당장 엄마와 언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만큼 색귀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안 된다고? 너의 배신으로 인해 소멸의 고통을 겪어야할 난 어떡하지? 소멸의 고통은 인간의 죽음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이 끔찍해. 너는 널 도와준 내게 참혹한 고통을 선물로 주었으니 나도 네게 슬픔을 선물하겠어. 네가 결정했다면 나는 이만 사라져야겠어.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허나 빈손으로 가지 않을 거야. 네가 사랑하는 가족을 데리고 가겠어.”
선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만으로도 엄마와 언니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엄마와 언니를 지켜야 한다. 자신이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엄마와 언니를 잃을 수는 없었다.
“잠시만, 아직 가지 말아요. 내 맹세를 지키겠어요.”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약속은 함부로 어기는 것이 아냐. 비록 위급한 상황에서의 선택이었다 해도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해.”
그녀는 목소리가 그녀를 매우 걱정해준다고 느꼈다. 막연한 불안감이 한층 감소되었다.
“음정을 취한다고 했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음정은 여인의 음부에 태동하는 음기를 말하지. 간단히 말하면 널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뜻이야.”
“다, 당신은 정말 사악한 악귀로군요.”
그녀는 다시 공포에 떨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녀의 순결을 짓밟는다는 생각에 머리가 쭈뼛 곤두섰다. 굳게 마음을 먹었으나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다. 그녀의 심리를 간파하였는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딘지 슬픈 감정이 깃들었다.
“부정하지 않겠어. 그것이 나의 운명이니까.”
“당신은 그 치한보다 더 나빠요”
그녀는 절박한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악귀를 저주했다. 그녀에게 그의 구원을 거부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이용해 그녀를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도 네가 선택해. 이번 결정은 신중하게 해야 할 거야. 마지막 선택이 될 테니까. 네가 맹세한대로 내 숙주가 되어 음정을 취하도록 해주는 것과 네 가족의 목숨이야. 선택해!!”
목소리가 얼음굴에 들어간 것처럼 차갑게 들려왔다. 삽시간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어느 것 하나 선택할 수 없었다. 그녀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못해요. 선택할 수 없어요”
“좋아. 그럼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이만 가겠어. 다시 만나는 일이 없을 거야”
그녀는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말에 그가 무슨 선택을 하였는지 알았다. 가족의 목숨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안 돼요. 엄마와 언니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이겠다는 건가요.”
목소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놀라고 두려워서 서둘러 핸드폰을 찾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호만 가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려움이 너무 커졌다.
‘서, 설마 나 때문에 엄마가... 안 돼. 그럴 순 없어’
그녀는 이번에는 언니 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 나쁜 놈아.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우리 엄마와 언니가 무슨 죄가 있다고... 차라리 나를 죽여!”
그녀는 허공에다 벼락처럼 소리쳤다. 실제로 엄마와 언니가 죽는다면 자신이 죽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럴 수는 없었다.
“안 돼. 다시 돌아와.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게. 제발 우리 가족을 해치지 마.”
선아는 발악적으로 허공에 외쳤다. 그가 돌아와야 한다. 가족을 잃을 수는 없었다. 제발 돌아와 주기를... 제발 가족을 헤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음인가?
“정말이야?”
그녀는 목소리가 들리자 가족이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기뻤다.
“그래, 정말이야.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 그러니 엄마와 언니를 헤치지 말아줘”
“어쩌면 나는 너의 말처럼 악귀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차라리 그때 너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이런 불쾌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텐데... 악귀가 되었어.”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기운이 빠져 멍하니 침상에 앉아 있었다. 믿지 못할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건 꿈이라고 자고 일어나면 잊혀질 것처럼 느껴졌다. 털썩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래, 꿈이야. 자고 일어나면 모두 잊어질 거야’
그녀는 눈을 감았고, 거짓말처럼 스르륵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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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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