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마치 검은색 트렌치코트라도 껴입은 듯이 어슴푸레 늘어진 떡갈나무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기분탓이었겠지만 쇼트웨이브는 그 나무가 서낭신이 붙어있다는 서낭처럼 느껴졌다. 불안하고 음침하며 속내를 알 수 없는 막강한 신비감. 예전엔 어느 마을에나 서낭이 그 마을 초입에 서 있었다. 그것은 마을을 지켜주는 토속신이었지만 또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원인을 제공하는 두려운 상징물이기도 했다. 마치 가지들을 꼬아 사람의 팔처럼 뭔가를 잡으려는 듯 그녀들을 향해 촉수를 뻗어내고 있는, 리어미러 속의 저 떡갈나무처럼 말이었다.
그 옆에 작은 집만 있다면 그야말로 그 집은 서낭당일 것이었다. 물론 근처 어디에도 당집은 없었다.
도로엔 언제부터인지 그녀들의 차 외엔 어떤 차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뭔가 움직이는 것들이 보였으면 좋으련만 어디론가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듯 어두운 산자락 사이로 소실되어가는 좁은 아스팔트 외에 그녀들 주위에는 아무 것도 없는것 같았다. 쇼트웨이브는 답답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얘기를 꺼냈다.
"나 향수 바꿨는데." 미끼를 물려고 찌를 건드린 고기처럼 디지털퍼머에게서 제깍 입질이 왔다.
"언제? 에스카다 좋아했잖아."
"그랬지,마그네티즘..아직도 좋긴한데 너무 오래썼잖아." 디지털퍼머는 에메랄드 컷팅을 연상시키는 장미빛의 유려한 곡선을 가진, 에스카다 마그네티즘의 장방형 향수병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휘발되는 플럼베리향의 탑노트가 코끝에서 아른거렸다.
"뭘로 바꿨어?"
"카롱."
"야,이 년아. 근데 왜 얘기 안했어. 내가 카롱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디지털퍼머는 향수에 대해 거의 마니아적인 취향을 갖고 있었다. 세계 4대 향수회사 중 하나인 카롱은 디오르와 함께 디지털퍼머가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였지만 값이 비싼게 흠이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쇼트웨이브는 디지털퍼머를 통해 향수에 입문했었다.
"어떤 계열이야?" 디지털퍼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플로럴 파우더리 노트."
"뭐야,뭐야. 남자친구 생겼어? 왜 갑자기 섹시하게 놀려구 그래?"
쇼트웨이브가 말한 향수의 계열은 특정 꽃 향기를 농축하여 벨벳처럼 관능적인 향으로 바꾸어낸 것으로 최음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것이었다. 그것은 과장된 소문이었다. 향수는 어디까지나 향수일뿐이라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알고 있었다.
"향수 이름이 뭔데?"
"음..뭐라더라. 뮤게 드 보네르?"
"오. 은방울꽃이라..취미도 고상하셔. 이 년아,그런거 샀으면 진작 언니한테 보여줬어야지. 어딨어?"
뮤게 드 보네르는 1만 2천 파운드에 달하는 은방울꽃에서 적출법으로 뽑아낸 2파운드의 앱설루트를, 카롱 특유의 로 머터리얼로 조향하고 숙성시켜 만들어낸 향수였다. 탑노트로는 은방울꽃의 에센스를, 미들노트로는 플로럴 향조를, 베이스노트로는 파우더리 계열을 사용했다.
"가방 안에 있을거야."
디지털퍼머가 조그만 친구의 손가방 안에서 치마를 입은 여성의 다리가 연상되는 보라색의 크리스털 병을 꺼냈다.
"응? 이거 뭐야. 한번도 안쓴거네. 산지 얼마 안됐어?"
"한 보름쯤."
"근데 왜 안썼어? 안썼으니 바꾼걸 내가 몰랐지."
"그거..사실은 병 때문에 샀어."
"병? 음..뭐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그 향수, 전세계적으로 3000개 한정판매하는 거야. 병만 하더라도 세르쥬 망소가 디자인한걸 생 루이에서 수작업으로 만든 크리스털이래."
"우와. 되게 비싸겠다. 얼마 줬어?" 디지털퍼머가 감탄하자 쇼트웨이브가 입술을 뾰족하게 빼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90만원."
디지털퍼머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미친 년. 돈이 어딨어서 이렇게 비싼걸 샀어."
"나도 모르겠어. 그걸 보는 순간에 그냥 탐이 났어. 아주 이쁜 어린애를 보는거 같았어..심하게 말하자면 오르가즘이 오려고 그러더라구."
디지털퍼머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진짜? 오르가즘이 왔어?"
"아니. 왔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런 분위기에 젖더라는 얘기지. 하여튼 돈 있는 여자들이 이래서 지르는구나 싶더라."
"돈이 어디서 났어?"
"교수님 프로젝트 해주고 받은거 있었어."
"이 년아, 그런 돈 있었으면 나 맛있는거나 좀 사주지."
"너? 그거야말로 낭비지."
"오,그러셔. 오늘 버섯찌게는 네가 쏘겠다 이거지. 간만에 한번 점심 좀 얻어 먹어보겠네."
그녀들의 드라이브는 여전히 을씨년스러웠지만 얘기를 나누는 도중 차 안의 분위기는 훨씬 좋아졌다.
"저기서 좌회전인가?"
멀리 청풍대교가 바라보이는 갈림길에 학현리로 가는 안내석이 세워져 있었다. 디지털퍼머가 안내책을 다시 펴들었다.
"응, 맞네. 좌회전해."
쇼트웨이브는 갈림길에서 왼쪽을 가리키는 방향지시등을 켜고는 차를 잠시 멈추었다. 역시 갈림길 어느 쪽에서도 다른 차는 오지 않았다. 거칠게 다듬은 안내석이 마치 비석처럼 우뚝 서 있었다. 왼쪽으로 갈려서 더욱 좁아진 길은 낮은 구릉을 오르는 오르막으로 되어 있었다. 가슴을 조이는 듯한 불안한 느낌이 그녀를 엄습했지만 단지 식사 한끼일 뿐인데 어떠랴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더 망설이지 않고 학현리로 가는 길로 진입했다.
"이제 어떻게 가야 돼?" 디지털퍼머가 안내책을 읽었다.
"쭉 직진하다가 하학현 마을에서 학현1교를 건너면 여근석이 나온대. 여근석?"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여자 거기 말하는거야?" 쇼트웨이브가 깔깔거렸다.
"재미있는 구경 하겠는걸."
"그러게. 어떻게 생겼을까." 디지털퍼머가 웃으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거기서 100미터 쯤 올라가면 저승골로 빠지는 사잇길이 나오는데 그 계곡 쪽으로 1킬로미터 남짓 들어가면 식당이래." 말을 마친 디지털퍼머가 붕어처럼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저승골이라.." 쇼트웨이브가 눈을 찌푸렸다.
"아우. 또 왜 하필이면 이름이 저승골이래?" 디지털퍼머가 푸하고 바람을 뱉으면서 말했다. 차가 고개마루를 올라가고 있었다.
"나 제천 와봤었는데."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언제?"
"엠티때. 영월가는데 차 갈아타느라고." 디지털퍼머가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터미널이 시내근처에 있더라. 차 시간이 남길래 시내 나가서 밥도 사먹고 잠깐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했어. 도시가 되게 작더라." 쇼트웨이브가 머리를 끄덕였다.
"나두 와봤어."
"너두? 언제?"
"여기 세명대학교라고 있거든. 거기서 세미나가 있었어. 교수랑 같이 왔지."
"이름이 뭐 그래. 세명대학? 대학생이 세명 뿐이야?" 얘기를 하면서 디지털퍼머가 킥킥거렸다.
"재밌니? 나 참. 썰렁해서 소름이 돋는다,이 년아."
"그래, 발표 잘 했니?"
"응. 발표는 뭐 그냥그냥..근데 좀."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근데, 뭐?"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아냐." 쇼트웨이브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냥 웃었다.
"이 년이. 죽을래? 내가 말하다 마는거 제일 싫어하는거 알지? 뭐야. 빨리 말해." 디지털퍼머가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면서 얘기를 재촉했다. 쇼트웨이브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발표가 끝났는데 어디 다른 대학에서 온 교수가 발표가 아주 좋았다고 식사나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 우리 교수는 인사만 하고 급한 일이 생겼다고 먼저 올라가고. 그래서 뭐, 밥 사준다니까 따라가서 먹었지. 학교 옆에 의림지라고 있더라구. 알지? 국사책에 나오는 그 의림지."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지금 의림지가 중요해,이 년아. 그래서 어떻게 됐어. 둘이서만 갔어?" 디지털퍼머가 채근했다. 쇼트웨이브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둘이만 간거."
"장난쳐? 여러 명이 가서 한꺼번에 밥 먹고 끝났으면 네가 왜 말을 안하려고 했겠어. 뭔가 일이 있었겠지. 말 끊지 말고 빨리 계속해." 쇼트웨이브가 하릴없이 실소를 지었다.
"그런건 어떻게 그리 냄새를 잘 맡누. 탐정해도 되겠다."
"시끄러,이 년아. 자꾸 뜸들일래?"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 사람도 같이 온 사람들이 있을텐데 왜 나만 데리고 식사를 하러 가는지 말야. 어쨌거나 밥 먹으면서 논문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어. 내 논문은 브로우베르의 부동점 이론을 이용해서 첨단직종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주 직업을 바꿀 경우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 수학적인 모형을 구축하는 것이었어." 논문에 관한 얘기가 시작되자 디지털퍼머가 버럭 화를 냈다.
"또 시작이다,또 시작이야. 이 년이 기회만 되면 꼭 어려운 말을 꺼내. 누가 그런거 알고 싶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 쇼트웨이브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 시간 괜찮으면 시내 나가서 얘기 좀 더하자구 그러더라."
"어머, 그래서?" 디지털퍼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두 뭐 어차피 고속버스 타려면 시내 나가야 되니까. 겸사겸사 차나 한잔 더 마시고 가면 되겠다 싶어서 그러자고 그랬지."
"이그, 순진한 년. 그래서?" 도로는 크게 커브를 그리며 내리막으로 바뀌었다.
"그런데..갑자기 횟집엘 들어가더라구."
"아니, 밥 먹었는데 왠 횟집이야."
"그러게 말야. 그래서 배 부르다고 그러니까 술이나 한잔 하자고 그러는거야."
"왠일이니. 작정했다,야. 그 교수. 교수 맞아?" 디지털퍼머가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했다.
"응, 교수는 맞아. 맞긴 맞는데..좀 밝히는 교수라고나 할까."
"왜? 무슨 일 있었어?" 디지털퍼머가 눈을 깜박였다.
"술을 한병 정도 마셨는데..이 사람 나한테..호텔을 같이 가자고 그러더라." 쇼트웨이브가 주저하면서 얘기를 꺼냈다.
"세상에,세상에." 별꼴 다 보겠다는 얼굴로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교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아무리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이 아니라고 그래두."
쇼트웨이브는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 디지털퍼머가 친구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너 혹시?"
"혹시 뭐?"
"따라간거 아냐?" 쇼트웨이브가 얼굴을 찡그리며 디지털퍼머를 흘겨봤다.
"미쳤니?"
"그럼 뭐라고 그랬어,그 사람한테."
"그냥 웃었어."
"웃었어?"
"응. 웃어야지,뭐. 그럼 화내나?"
"아니, 첨보는 사람이 호텔 가자는데 웃음이 나와?"
쇼트웨이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그 사람이 좀 재밌는 말을 했어. 섹스를 통해서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다나. 예를 들면 생명이나 재능같은거. 서로를 동질하게 만드는 힘이 섹스에 있다고 그러대. 섹스는 둘이 하는 거니까..둘 중에서 살아있는 한 쪽이 어떤 면에서 죽어있는 한 쪽을 깨워낼 수 있는데 그럴 경우는 아름다움이 섹스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든대. 아주 엄숙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하는거야. 미녀와의 섹스는 중요해요. 그러면서 내 몸을 원한다는 거야."
디지털퍼머가 입을 벌렸다. "뭔소리냐. 그게. 신종 작업기술이냐."
"알 수 없지, 나도. 그래서 나도 엄숙하게 이렇게 말했어."
"뭐라고 했는데?"
"교수님이 푸엥카레의 추측을 증명하신다면 같이 잠을 자드리겠어요."
디지털퍼머가 깔깔댔다. "너답다, 이것아. 푸엥카레의 추측이 뭔데? 그 증명 어려운거야?"
"어렵지..삼차원 다양체가,이게 사실은 이차원의 경계없는 공간인데 말야, 하여튼 그 추측이란건 이런 모든 기하학적인 대상이 삼차원 구와 위상적으로 동치라는 가설이야. 많은 사람들이 풀었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에 명확한 증명은 아직까지 없어."
디지털퍼머가 짜증을 냈다. "또,또.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전공 얘기만 나오면 아주 그냥."
"네가 물어봤잖아."
"물어봐도 대답하지마, 그런건. 알았어?"
"까다롭긴.."
전광판의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듯 그 순간 차가 하학현에 도착했다.
기분탓이었겠지만 쇼트웨이브는 그 나무가 서낭신이 붙어있다는 서낭처럼 느껴졌다. 불안하고 음침하며 속내를 알 수 없는 막강한 신비감. 예전엔 어느 마을에나 서낭이 그 마을 초입에 서 있었다. 그것은 마을을 지켜주는 토속신이었지만 또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원인을 제공하는 두려운 상징물이기도 했다. 마치 가지들을 꼬아 사람의 팔처럼 뭔가를 잡으려는 듯 그녀들을 향해 촉수를 뻗어내고 있는, 리어미러 속의 저 떡갈나무처럼 말이었다.
그 옆에 작은 집만 있다면 그야말로 그 집은 서낭당일 것이었다. 물론 근처 어디에도 당집은 없었다.
도로엔 언제부터인지 그녀들의 차 외엔 어떤 차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뭔가 움직이는 것들이 보였으면 좋으련만 어디론가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듯 어두운 산자락 사이로 소실되어가는 좁은 아스팔트 외에 그녀들 주위에는 아무 것도 없는것 같았다. 쇼트웨이브는 답답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얘기를 꺼냈다.
"나 향수 바꿨는데." 미끼를 물려고 찌를 건드린 고기처럼 디지털퍼머에게서 제깍 입질이 왔다.
"언제? 에스카다 좋아했잖아."
"그랬지,마그네티즘..아직도 좋긴한데 너무 오래썼잖아." 디지털퍼머는 에메랄드 컷팅을 연상시키는 장미빛의 유려한 곡선을 가진, 에스카다 마그네티즘의 장방형 향수병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휘발되는 플럼베리향의 탑노트가 코끝에서 아른거렸다.
"뭘로 바꿨어?"
"카롱."
"야,이 년아. 근데 왜 얘기 안했어. 내가 카롱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디지털퍼머는 향수에 대해 거의 마니아적인 취향을 갖고 있었다. 세계 4대 향수회사 중 하나인 카롱은 디오르와 함께 디지털퍼머가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였지만 값이 비싼게 흠이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쇼트웨이브는 디지털퍼머를 통해 향수에 입문했었다.
"어떤 계열이야?" 디지털퍼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플로럴 파우더리 노트."
"뭐야,뭐야. 남자친구 생겼어? 왜 갑자기 섹시하게 놀려구 그래?"
쇼트웨이브가 말한 향수의 계열은 특정 꽃 향기를 농축하여 벨벳처럼 관능적인 향으로 바꾸어낸 것으로 최음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것이었다. 그것은 과장된 소문이었다. 향수는 어디까지나 향수일뿐이라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알고 있었다.
"향수 이름이 뭔데?"
"음..뭐라더라. 뮤게 드 보네르?"
"오. 은방울꽃이라..취미도 고상하셔. 이 년아,그런거 샀으면 진작 언니한테 보여줬어야지. 어딨어?"
뮤게 드 보네르는 1만 2천 파운드에 달하는 은방울꽃에서 적출법으로 뽑아낸 2파운드의 앱설루트를, 카롱 특유의 로 머터리얼로 조향하고 숙성시켜 만들어낸 향수였다. 탑노트로는 은방울꽃의 에센스를, 미들노트로는 플로럴 향조를, 베이스노트로는 파우더리 계열을 사용했다.
"가방 안에 있을거야."
디지털퍼머가 조그만 친구의 손가방 안에서 치마를 입은 여성의 다리가 연상되는 보라색의 크리스털 병을 꺼냈다.
"응? 이거 뭐야. 한번도 안쓴거네. 산지 얼마 안됐어?"
"한 보름쯤."
"근데 왜 안썼어? 안썼으니 바꾼걸 내가 몰랐지."
"그거..사실은 병 때문에 샀어."
"병? 음..뭐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그 향수, 전세계적으로 3000개 한정판매하는 거야. 병만 하더라도 세르쥬 망소가 디자인한걸 생 루이에서 수작업으로 만든 크리스털이래."
"우와. 되게 비싸겠다. 얼마 줬어?" 디지털퍼머가 감탄하자 쇼트웨이브가 입술을 뾰족하게 빼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90만원."
디지털퍼머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미친 년. 돈이 어딨어서 이렇게 비싼걸 샀어."
"나도 모르겠어. 그걸 보는 순간에 그냥 탐이 났어. 아주 이쁜 어린애를 보는거 같았어..심하게 말하자면 오르가즘이 오려고 그러더라구."
디지털퍼머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진짜? 오르가즘이 왔어?"
"아니. 왔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런 분위기에 젖더라는 얘기지. 하여튼 돈 있는 여자들이 이래서 지르는구나 싶더라."
"돈이 어디서 났어?"
"교수님 프로젝트 해주고 받은거 있었어."
"이 년아, 그런 돈 있었으면 나 맛있는거나 좀 사주지."
"너? 그거야말로 낭비지."
"오,그러셔. 오늘 버섯찌게는 네가 쏘겠다 이거지. 간만에 한번 점심 좀 얻어 먹어보겠네."
그녀들의 드라이브는 여전히 을씨년스러웠지만 얘기를 나누는 도중 차 안의 분위기는 훨씬 좋아졌다.
"저기서 좌회전인가?"
멀리 청풍대교가 바라보이는 갈림길에 학현리로 가는 안내석이 세워져 있었다. 디지털퍼머가 안내책을 다시 펴들었다.
"응, 맞네. 좌회전해."
쇼트웨이브는 갈림길에서 왼쪽을 가리키는 방향지시등을 켜고는 차를 잠시 멈추었다. 역시 갈림길 어느 쪽에서도 다른 차는 오지 않았다. 거칠게 다듬은 안내석이 마치 비석처럼 우뚝 서 있었다. 왼쪽으로 갈려서 더욱 좁아진 길은 낮은 구릉을 오르는 오르막으로 되어 있었다. 가슴을 조이는 듯한 불안한 느낌이 그녀를 엄습했지만 단지 식사 한끼일 뿐인데 어떠랴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더 망설이지 않고 학현리로 가는 길로 진입했다.
"이제 어떻게 가야 돼?" 디지털퍼머가 안내책을 읽었다.
"쭉 직진하다가 하학현 마을에서 학현1교를 건너면 여근석이 나온대. 여근석?"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여자 거기 말하는거야?" 쇼트웨이브가 깔깔거렸다.
"재미있는 구경 하겠는걸."
"그러게. 어떻게 생겼을까." 디지털퍼머가 웃으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거기서 100미터 쯤 올라가면 저승골로 빠지는 사잇길이 나오는데 그 계곡 쪽으로 1킬로미터 남짓 들어가면 식당이래." 말을 마친 디지털퍼머가 붕어처럼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저승골이라.." 쇼트웨이브가 눈을 찌푸렸다.
"아우. 또 왜 하필이면 이름이 저승골이래?" 디지털퍼머가 푸하고 바람을 뱉으면서 말했다. 차가 고개마루를 올라가고 있었다.
"나 제천 와봤었는데."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언제?"
"엠티때. 영월가는데 차 갈아타느라고." 디지털퍼머가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터미널이 시내근처에 있더라. 차 시간이 남길래 시내 나가서 밥도 사먹고 잠깐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했어. 도시가 되게 작더라." 쇼트웨이브가 머리를 끄덕였다.
"나두 와봤어."
"너두? 언제?"
"여기 세명대학교라고 있거든. 거기서 세미나가 있었어. 교수랑 같이 왔지."
"이름이 뭐 그래. 세명대학? 대학생이 세명 뿐이야?" 얘기를 하면서 디지털퍼머가 킥킥거렸다.
"재밌니? 나 참. 썰렁해서 소름이 돋는다,이 년아."
"그래, 발표 잘 했니?"
"응. 발표는 뭐 그냥그냥..근데 좀."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근데, 뭐?"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아냐." 쇼트웨이브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냥 웃었다.
"이 년이. 죽을래? 내가 말하다 마는거 제일 싫어하는거 알지? 뭐야. 빨리 말해." 디지털퍼머가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면서 얘기를 재촉했다. 쇼트웨이브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발표가 끝났는데 어디 다른 대학에서 온 교수가 발표가 아주 좋았다고 식사나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 우리 교수는 인사만 하고 급한 일이 생겼다고 먼저 올라가고. 그래서 뭐, 밥 사준다니까 따라가서 먹었지. 학교 옆에 의림지라고 있더라구. 알지? 국사책에 나오는 그 의림지."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지금 의림지가 중요해,이 년아. 그래서 어떻게 됐어. 둘이서만 갔어?" 디지털퍼머가 채근했다. 쇼트웨이브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둘이만 간거."
"장난쳐? 여러 명이 가서 한꺼번에 밥 먹고 끝났으면 네가 왜 말을 안하려고 했겠어. 뭔가 일이 있었겠지. 말 끊지 말고 빨리 계속해." 쇼트웨이브가 하릴없이 실소를 지었다.
"그런건 어떻게 그리 냄새를 잘 맡누. 탐정해도 되겠다."
"시끄러,이 년아. 자꾸 뜸들일래?"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 사람도 같이 온 사람들이 있을텐데 왜 나만 데리고 식사를 하러 가는지 말야. 어쨌거나 밥 먹으면서 논문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어. 내 논문은 브로우베르의 부동점 이론을 이용해서 첨단직종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주 직업을 바꿀 경우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 수학적인 모형을 구축하는 것이었어." 논문에 관한 얘기가 시작되자 디지털퍼머가 버럭 화를 냈다.
"또 시작이다,또 시작이야. 이 년이 기회만 되면 꼭 어려운 말을 꺼내. 누가 그런거 알고 싶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 쇼트웨이브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 시간 괜찮으면 시내 나가서 얘기 좀 더하자구 그러더라."
"어머, 그래서?" 디지털퍼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두 뭐 어차피 고속버스 타려면 시내 나가야 되니까. 겸사겸사 차나 한잔 더 마시고 가면 되겠다 싶어서 그러자고 그랬지."
"이그, 순진한 년. 그래서?" 도로는 크게 커브를 그리며 내리막으로 바뀌었다.
"그런데..갑자기 횟집엘 들어가더라구."
"아니, 밥 먹었는데 왠 횟집이야."
"그러게 말야. 그래서 배 부르다고 그러니까 술이나 한잔 하자고 그러는거야."
"왠일이니. 작정했다,야. 그 교수. 교수 맞아?" 디지털퍼머가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했다.
"응, 교수는 맞아. 맞긴 맞는데..좀 밝히는 교수라고나 할까."
"왜? 무슨 일 있었어?" 디지털퍼머가 눈을 깜박였다.
"술을 한병 정도 마셨는데..이 사람 나한테..호텔을 같이 가자고 그러더라." 쇼트웨이브가 주저하면서 얘기를 꺼냈다.
"세상에,세상에." 별꼴 다 보겠다는 얼굴로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교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아무리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이 아니라고 그래두."
쇼트웨이브는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 디지털퍼머가 친구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너 혹시?"
"혹시 뭐?"
"따라간거 아냐?" 쇼트웨이브가 얼굴을 찡그리며 디지털퍼머를 흘겨봤다.
"미쳤니?"
"그럼 뭐라고 그랬어,그 사람한테."
"그냥 웃었어."
"웃었어?"
"응. 웃어야지,뭐. 그럼 화내나?"
"아니, 첨보는 사람이 호텔 가자는데 웃음이 나와?"
쇼트웨이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그 사람이 좀 재밌는 말을 했어. 섹스를 통해서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다나. 예를 들면 생명이나 재능같은거. 서로를 동질하게 만드는 힘이 섹스에 있다고 그러대. 섹스는 둘이 하는 거니까..둘 중에서 살아있는 한 쪽이 어떤 면에서 죽어있는 한 쪽을 깨워낼 수 있는데 그럴 경우는 아름다움이 섹스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든대. 아주 엄숙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하는거야. 미녀와의 섹스는 중요해요. 그러면서 내 몸을 원한다는 거야."
디지털퍼머가 입을 벌렸다. "뭔소리냐. 그게. 신종 작업기술이냐."
"알 수 없지, 나도. 그래서 나도 엄숙하게 이렇게 말했어."
"뭐라고 했는데?"
"교수님이 푸엥카레의 추측을 증명하신다면 같이 잠을 자드리겠어요."
디지털퍼머가 깔깔댔다. "너답다, 이것아. 푸엥카레의 추측이 뭔데? 그 증명 어려운거야?"
"어렵지..삼차원 다양체가,이게 사실은 이차원의 경계없는 공간인데 말야, 하여튼 그 추측이란건 이런 모든 기하학적인 대상이 삼차원 구와 위상적으로 동치라는 가설이야. 많은 사람들이 풀었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에 명확한 증명은 아직까지 없어."
디지털퍼머가 짜증을 냈다. "또,또.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전공 얘기만 나오면 아주 그냥."
"네가 물어봤잖아."
"물어봐도 대답하지마, 그런건. 알았어?"
"까다롭긴.."
전광판의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듯 그 순간 차가 하학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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