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실 들릴까?"
하얀색 승용차에 타고 있던 두 여성 중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세미 롱헤어의 여성이 말을 꺼냈다.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머리를 길고 짧게 반복 커팅한 후 저온에서 컬링한 디지털 퍼머로 이제 막 샴푸질을 마친 듯 상쾌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쉬보드에 맨발을 올리고는 음악에 맞춰 발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차에 탄지 벌써 두시간 남짓, 포크와 칼,그리고 주유기가 간단명료하게 그려진 낯익은 푸른색 표지판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그녀는 갑자기 배가 고파져 옆에서 열심히 운전하고 있는 친구에게 얘기를 건넸다.
"뭐 먹지 않을래?"
"음..글쎄." 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앞을 바라보았다. 버스 손잡이처럼 커다란 지름의 은제 이어링이 친구의 귀에서 흔들렸다. 쇼트웨이브를 준 친구의 짧고 풍성한 머리가 보기 좋게 찰랑거렸다. 레이어드 커트 후에 바깥 쪽으로 강하게 컬을 말아 고정시킨 머리였다. 저 멀리서 먹을걸 보채는 아이의 손바닥처럼 또하나의 표지판이 고개를 바짝 들고 득달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저런 표지판 그림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쇼트웨이브가 차의 속도와 똑같이 그녀들을 덮쳐오는 표지판을 노려보며 물었다. 디지털퍼머가 코웃음을 쳤다.
"날 너무 우습게 보는거 아냐,응?"
"우스워."
"정말?"
"응." 디지털퍼머가 중앙의 룸미러를 자기쪽으로 휙 돌려놓고는 앞머리를 매만졌다.
"이 년이 날 뭘로 보고."
그녀가 거울이 마치 친구라도 되는양 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두번째 표지판이 차 옆을 스쳐 지나갔다.
"모노그램."
쇼트웨이브가 과장되게 웃음을 터뜨렸다. 디지털퍼머가 친구를 노려보며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라고 말할줄 알았지? 흥."
"솔직히 말해. 모르지? 시각디자인 공부한다는 년이 말야."
"알아,이 년아."
"뭔데?"
"로고타이프." 쇼트웨이브가 또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디지털퍼머가 다시 친구를 노려봤다.
"장난 좀 쳐봤다,야."
"어,그러셔. 언제쯤 정답을 말하시려나."
"곧 나간다,이 년아." 그녀가 거만한 자세로 창틀에 기대 앉았다가 친구를 향해 말했다.
"엠블럼."
이번엔 쇼트웨이브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이 년아. 차라리 포스터라고 그래라."
디지털퍼머가 인상을 쓰며 짜증을 냈다.
"정말 뭐 이런 게 다 있어. 진짜 재수없다,너." 그때 이번엔 표지판이 아닌 휴게소가 디지털퍼머 옆을 지나갔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야,이 년아. 너땜에 휴게소 놓쳤잖아. 스톱,스톱. 후진해."
"이게 미쳤나. 고속도로에서 어떻게 후진해, 이 년아."
"배고파 죽겠다구." 그녀가 애꿎은 사물함을 열었다가 탕 하고 닫았다.친구가 미소를 지었다.
"가만 있어봐. 모처럼 놀러왔는데 휴게소 음식이나 먹는다는게 말이 되니. 우리 고속도로에서 나가가지구 맛있는데서 먹자."
"맛있는데? 어디."
"네가 한번 찾아봐. 뒷좌석에 맛집기행이나 여행안내 책자나 뭐 그런거 있을거야."
디지털퍼머가 뒤를 돌아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친구의 차 뒷자석에는 책들이 그득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장난삼아 자신의 차를 이동도서관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그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디지털퍼머는 여전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친구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나름대로 중학교에서 꽤나 공부를 잘했던 그녀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반을 배정받고 나서 자신보다 좀 더 좋은 성적으로 같은 반에 배정받은 쇼트웨이브를 내심 경계하고 있었다.
좋다구. 나도 한머리 해.
디지털퍼머는 열심히 공부해서 입학 후 첫시험에서 쇼트웨이브를 따라잡으리라 결심했다. 한달 정도 지켜본 쇼트웨이브의 일상은 매우 따분하고 활기없고 무료한 것이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교과서가 아닌 이상한 책을 본다거나 끄적끄적 낙서를 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잠을 잤다.
좋았어. 너 그렇게 여유부리다가 다음 시험에 2등해봐.
만약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낙서를 얼핏 보기라도 했다면 아마도 입이 벌어졌을 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디지털퍼머는 그 낙서가 그저 의미없는 책 감상문이나 만화 주인공 그림인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낙서는 20세기 초에 르베그가 리만적분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르베그적분의 기초증명 문제였다.
자신있어하던 첫 시험에서 디지털퍼머는 쇼트웨이브를 추격하는데 실패했다. 그 다음달도 마찬가지였다. 성적차이가 많이 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몇점 안되는 점수의 차이를 극복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달도,그 다음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조그만 차이는 디지털퍼머와 쇼트웨이브간의 생래적인 차이,즉 디지털퍼머가 쫓아갈 수 없는 능력의 한계였던 것이다.
그렇게 여름방학 전까지 쭉 역전되지 않는 추격전이 계속 되었다. 도저히 쇼트웨이브를 쫓아갈 수 없었던 디지털퍼머는 방학 중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던 어느 날 늦은 오후, 쇼트웨이브 책상 앞에 가서 섰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나오는 만년 2인자의 피해의식 따위는 애초부터 디지털퍼머에게는 없었다. 따라갈 수 없다면 모범으로 삼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쇼트웨이브와 얘기를 나눠본 디지털퍼머는 그녀의 예리하고 풍부한 지적 능력에 충격을 받았다. 쇼트웨이브는 진짜 천재였던 것이다. 디지털퍼머는 자신의 일생을 통틀어 이런 류의 인간을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쇼트웨이브가 좋건 싫건 디지털퍼머는 그녀에게 들러붙기로 결심했다. 쇼트웨이브도 디지털퍼머가 싫지 않았다. 깨끗하고 이지적이고 사려깊은 친구였다. 그녀들은 그로부터 3년내내 티격태격 거리면서도 함께 붙어다녔고 과는 달랐지만 대학교도 같은 곳으로 진학했다.
"야,이 년아. 내가 네 도서관 사서냐. 저기서 어떻게 여행안내 책자를 찾으란 말야."
"어..그거. 뒷자석 주머니에 넣어놨을걸." 디지털퍼머는 센터콘솔 위로 몸을 기울여 운전석 뒷 주머니에서 여행안내 책자를 꺼냈다.
"어디 보자..뒷페이지에 맛집 소개가 있네." 그 책은 앞부분엔 도로지도가 소개되어 있고 뒷부분엔 맛집이나 관광지가 소개되어 있는 전형적인 여행 안내책이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쯤 가고있니?"
"다음 톨게이트가 제천일거야."
"제천. 제천이라. 흠..인명은 재천이라.." 디지털퍼머가 힐끗 친구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쇼트웨이브 입에서 짜증이 터져나왔다.
"나 참 어이없네. 90년대 개그하니. 썰렁하다,이 년아." 디지털퍼머가 킥킥대며 주먹을 쥐었다.
"좋았어. 최고의 유머감각. 오늘도 한껀 올렸어." 그녀가 여기저기 책을 뒤적거리다가 어느 한 곳을 집중해서 보더니 쇼트웨이브에게 물었다.
"너 버섯찌게 먹고 싶지?"
"뭐?"
"너 버섯찌게 먹고 싶잖아." 쇼트웨이브가 코웃음을 쳤다.
"지랄하네. 너 먹고 싶다고 그래라,이 년아."
"좋았어. 최고의 선택센스. 또 한껀 올렸어." 디지털퍼머가 책을 탕하고 덮었다.
"일루 가자. 마고네 할머니 버섯찌게. 남제천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서 학현리 쪽으로 가면 된대." 쇼트웨이브가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왜 우리가 거기 가야 되는데?"
"그야 네가 버섯찌게를 먹고 싶어하니까."
쇼트웨이브가 어이없다는 듯이 친구 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친구의 손에는 은으로 만든 백조모양의 무광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친구의 것은 초크랄스키 용융법으로 합성된 0.5캐럿자리 인조 사파이어가 박혀있었고 그녀의 것은 크니쉬카 채덤공정으로 만들어진 같은 크기의 합성 루비가 박혀있었다. 대학 입학기념으로 둘이서 맞춰 끼운 반지였다. 말하자면 우정의 징표같은 것이었다.
뭐 버섯찌게 좋지. 쇼트웨이브가 친구가 정한 음식점에 가기로 생각한 순간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근데 아까 그 문제 답이 뭐야?"
"무슨 문제?"
"표지판 그림말야."
"아,그거." 쇼트웨이브가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아이소타이프야. 그림언어 교육에 관한 국제 체계..뭐 이런 뜻을 가진 약어야."
정말 별걸 다 아네. 디지털퍼머는 그녀의 친구를 다시한번 쳐다보았다. 평범하지 않은 능력. 처음엔 그저 친구가 부럽다고만 생각했었지만 이젠 그 재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친구가 그 능력을 잘 활용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오지랖도 넓다 이 년아. 수학 논문이나 잘 쓰셔. 시각 디자인은 놔두고. 남의 전공은 왜 넘봐."
"수화 배우는거나 마찬가지지 뭐. 꼭 전공이라서 공부하나?" 쇼트웨이브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들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봉사 동아리에 함께 가입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들은 수화를 배우는 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디지털퍼머가 그녀의 친구와 유일하게 진도를 맞출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수화라는 사실이었다. 쇼트웨이브의 놀라운 천재성도 정교한 손놀림에서 만큼은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들에게 있어 경쟁의식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더구나 남을 위한 봉사활동은 그녀들의 심신을 깨끗하고 건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들을 오랫동안 그 동아리에 묶어두는 이유가 되었다.
그녀들이 탄 차는 이윽고 남제천 톨게이트에 도착했고 잠시 후 그곳을 빠져나와 국도로 진입했다.
하얀색 승용차에 타고 있던 두 여성 중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세미 롱헤어의 여성이 말을 꺼냈다.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머리를 길고 짧게 반복 커팅한 후 저온에서 컬링한 디지털 퍼머로 이제 막 샴푸질을 마친 듯 상쾌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쉬보드에 맨발을 올리고는 음악에 맞춰 발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차에 탄지 벌써 두시간 남짓, 포크와 칼,그리고 주유기가 간단명료하게 그려진 낯익은 푸른색 표지판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그녀는 갑자기 배가 고파져 옆에서 열심히 운전하고 있는 친구에게 얘기를 건넸다.
"뭐 먹지 않을래?"
"음..글쎄." 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앞을 바라보았다. 버스 손잡이처럼 커다란 지름의 은제 이어링이 친구의 귀에서 흔들렸다. 쇼트웨이브를 준 친구의 짧고 풍성한 머리가 보기 좋게 찰랑거렸다. 레이어드 커트 후에 바깥 쪽으로 강하게 컬을 말아 고정시킨 머리였다. 저 멀리서 먹을걸 보채는 아이의 손바닥처럼 또하나의 표지판이 고개를 바짝 들고 득달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저런 표지판 그림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쇼트웨이브가 차의 속도와 똑같이 그녀들을 덮쳐오는 표지판을 노려보며 물었다. 디지털퍼머가 코웃음을 쳤다.
"날 너무 우습게 보는거 아냐,응?"
"우스워."
"정말?"
"응." 디지털퍼머가 중앙의 룸미러를 자기쪽으로 휙 돌려놓고는 앞머리를 매만졌다.
"이 년이 날 뭘로 보고."
그녀가 거울이 마치 친구라도 되는양 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두번째 표지판이 차 옆을 스쳐 지나갔다.
"모노그램."
쇼트웨이브가 과장되게 웃음을 터뜨렸다. 디지털퍼머가 친구를 노려보며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라고 말할줄 알았지? 흥."
"솔직히 말해. 모르지? 시각디자인 공부한다는 년이 말야."
"알아,이 년아."
"뭔데?"
"로고타이프." 쇼트웨이브가 또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디지털퍼머가 다시 친구를 노려봤다.
"장난 좀 쳐봤다,야."
"어,그러셔. 언제쯤 정답을 말하시려나."
"곧 나간다,이 년아." 그녀가 거만한 자세로 창틀에 기대 앉았다가 친구를 향해 말했다.
"엠블럼."
이번엔 쇼트웨이브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이 년아. 차라리 포스터라고 그래라."
디지털퍼머가 인상을 쓰며 짜증을 냈다.
"정말 뭐 이런 게 다 있어. 진짜 재수없다,너." 그때 이번엔 표지판이 아닌 휴게소가 디지털퍼머 옆을 지나갔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야,이 년아. 너땜에 휴게소 놓쳤잖아. 스톱,스톱. 후진해."
"이게 미쳤나. 고속도로에서 어떻게 후진해, 이 년아."
"배고파 죽겠다구." 그녀가 애꿎은 사물함을 열었다가 탕 하고 닫았다.친구가 미소를 지었다.
"가만 있어봐. 모처럼 놀러왔는데 휴게소 음식이나 먹는다는게 말이 되니. 우리 고속도로에서 나가가지구 맛있는데서 먹자."
"맛있는데? 어디."
"네가 한번 찾아봐. 뒷좌석에 맛집기행이나 여행안내 책자나 뭐 그런거 있을거야."
디지털퍼머가 뒤를 돌아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친구의 차 뒷자석에는 책들이 그득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장난삼아 자신의 차를 이동도서관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그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디지털퍼머는 여전히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친구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나름대로 중학교에서 꽤나 공부를 잘했던 그녀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반을 배정받고 나서 자신보다 좀 더 좋은 성적으로 같은 반에 배정받은 쇼트웨이브를 내심 경계하고 있었다.
좋다구. 나도 한머리 해.
디지털퍼머는 열심히 공부해서 입학 후 첫시험에서 쇼트웨이브를 따라잡으리라 결심했다. 한달 정도 지켜본 쇼트웨이브의 일상은 매우 따분하고 활기없고 무료한 것이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교과서가 아닌 이상한 책을 본다거나 끄적끄적 낙서를 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잠을 잤다.
좋았어. 너 그렇게 여유부리다가 다음 시험에 2등해봐.
만약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낙서를 얼핏 보기라도 했다면 아마도 입이 벌어졌을 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디지털퍼머는 그 낙서가 그저 의미없는 책 감상문이나 만화 주인공 그림인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낙서는 20세기 초에 르베그가 리만적분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르베그적분의 기초증명 문제였다.
자신있어하던 첫 시험에서 디지털퍼머는 쇼트웨이브를 추격하는데 실패했다. 그 다음달도 마찬가지였다. 성적차이가 많이 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몇점 안되는 점수의 차이를 극복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달도,그 다음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조그만 차이는 디지털퍼머와 쇼트웨이브간의 생래적인 차이,즉 디지털퍼머가 쫓아갈 수 없는 능력의 한계였던 것이다.
그렇게 여름방학 전까지 쭉 역전되지 않는 추격전이 계속 되었다. 도저히 쇼트웨이브를 쫓아갈 수 없었던 디지털퍼머는 방학 중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던 어느 날 늦은 오후, 쇼트웨이브 책상 앞에 가서 섰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나오는 만년 2인자의 피해의식 따위는 애초부터 디지털퍼머에게는 없었다. 따라갈 수 없다면 모범으로 삼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쇼트웨이브와 얘기를 나눠본 디지털퍼머는 그녀의 예리하고 풍부한 지적 능력에 충격을 받았다. 쇼트웨이브는 진짜 천재였던 것이다. 디지털퍼머는 자신의 일생을 통틀어 이런 류의 인간을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쇼트웨이브가 좋건 싫건 디지털퍼머는 그녀에게 들러붙기로 결심했다. 쇼트웨이브도 디지털퍼머가 싫지 않았다. 깨끗하고 이지적이고 사려깊은 친구였다. 그녀들은 그로부터 3년내내 티격태격 거리면서도 함께 붙어다녔고 과는 달랐지만 대학교도 같은 곳으로 진학했다.
"야,이 년아. 내가 네 도서관 사서냐. 저기서 어떻게 여행안내 책자를 찾으란 말야."
"어..그거. 뒷자석 주머니에 넣어놨을걸." 디지털퍼머는 센터콘솔 위로 몸을 기울여 운전석 뒷 주머니에서 여행안내 책자를 꺼냈다.
"어디 보자..뒷페이지에 맛집 소개가 있네." 그 책은 앞부분엔 도로지도가 소개되어 있고 뒷부분엔 맛집이나 관광지가 소개되어 있는 전형적인 여행 안내책이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쯤 가고있니?"
"다음 톨게이트가 제천일거야."
"제천. 제천이라. 흠..인명은 재천이라.." 디지털퍼머가 힐끗 친구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쇼트웨이브 입에서 짜증이 터져나왔다.
"나 참 어이없네. 90년대 개그하니. 썰렁하다,이 년아." 디지털퍼머가 킥킥대며 주먹을 쥐었다.
"좋았어. 최고의 유머감각. 오늘도 한껀 올렸어." 그녀가 여기저기 책을 뒤적거리다가 어느 한 곳을 집중해서 보더니 쇼트웨이브에게 물었다.
"너 버섯찌게 먹고 싶지?"
"뭐?"
"너 버섯찌게 먹고 싶잖아." 쇼트웨이브가 코웃음을 쳤다.
"지랄하네. 너 먹고 싶다고 그래라,이 년아."
"좋았어. 최고의 선택센스. 또 한껀 올렸어." 디지털퍼머가 책을 탕하고 덮었다.
"일루 가자. 마고네 할머니 버섯찌게. 남제천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서 학현리 쪽으로 가면 된대." 쇼트웨이브가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왜 우리가 거기 가야 되는데?"
"그야 네가 버섯찌게를 먹고 싶어하니까."
쇼트웨이브가 어이없다는 듯이 친구 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친구의 손에는 은으로 만든 백조모양의 무광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친구의 것은 초크랄스키 용융법으로 합성된 0.5캐럿자리 인조 사파이어가 박혀있었고 그녀의 것은 크니쉬카 채덤공정으로 만들어진 같은 크기의 합성 루비가 박혀있었다. 대학 입학기념으로 둘이서 맞춰 끼운 반지였다. 말하자면 우정의 징표같은 것이었다.
뭐 버섯찌게 좋지. 쇼트웨이브가 친구가 정한 음식점에 가기로 생각한 순간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근데 아까 그 문제 답이 뭐야?"
"무슨 문제?"
"표지판 그림말야."
"아,그거." 쇼트웨이브가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아이소타이프야. 그림언어 교육에 관한 국제 체계..뭐 이런 뜻을 가진 약어야."
정말 별걸 다 아네. 디지털퍼머는 그녀의 친구를 다시한번 쳐다보았다. 평범하지 않은 능력. 처음엔 그저 친구가 부럽다고만 생각했었지만 이젠 그 재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친구가 그 능력을 잘 활용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오지랖도 넓다 이 년아. 수학 논문이나 잘 쓰셔. 시각 디자인은 놔두고. 남의 전공은 왜 넘봐."
"수화 배우는거나 마찬가지지 뭐. 꼭 전공이라서 공부하나?" 쇼트웨이브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들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봉사 동아리에 함께 가입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들은 수화를 배우는 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디지털퍼머가 그녀의 친구와 유일하게 진도를 맞출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수화라는 사실이었다. 쇼트웨이브의 놀라운 천재성도 정교한 손놀림에서 만큼은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들에게 있어 경쟁의식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더구나 남을 위한 봉사활동은 그녀들의 심신을 깨끗하고 건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들을 오랫동안 그 동아리에 묶어두는 이유가 되었다.
그녀들이 탄 차는 이윽고 남제천 톨게이트에 도착했고 잠시 후 그곳을 빠져나와 국도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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