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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0:02 418회 0건
여인의 모습이 사라진 후로도 한동안 그녀들은 문 앞에 서있었다.
디지털퍼머는 뛰는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여인이 보여주었던 위압감은 이제껏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2000톤의 형체력을 가진 유압프레스가 찍어누르는 것 같던 압박감과 고열의 사막을 휩쓸어 대는 모래바람 같던 열풍은, 마치 앞으로 그녀들이 겪어야 할 고통의 난이도를 보여주는 듯 싶었다.
쇼트웨이브의 얼굴에 열풍에 찢겨진 생채기가 군데군데 보였다. 디지털퍼머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어쩌지."
"글쎄. 나가야겠지." 쇼트웨이브가 문을 바라보았다.
"문 열고 나갔는데 귀신들이 우글거리면 어떡해."
"설마."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쇼트웨이브는 얼굴을 찡그렸다.
"지옥엔 벌레들도 많다던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디지털퍼머가 중얼거렸다.
"누가 그래? 지가 가봤대?"
"진짜래. 이 년아. 구더기나 기생충 같은게 꾸물꾸물 기어다니구. 알을 다닥다닥 까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디지털퍼머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만해. 이 년아. 소름끼쳐." 쇼트웨이브가 버럭 화를 냈다.
둘은 서로를 잠깐 노려보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무 뜨거웠어, 그 여자한테서 나온 바람. 타 죽는 줄 알았어." 디지털퍼머가 멍한 시선으로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우리 죽은거 아냐? 뭘 또 죽어."
디지털퍼머가 자기 손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그래. 우리 죽었댔지. 잘 실감이 안나."
"나두 그래." 쇼트웨이브도 디지털퍼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그거 알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
"뭔데?"
"우리 비 맞아서 머리랑 옷이랑 다 젖었었잖아. 그 여자가 바람 불어줘서 다 말랐어."
쇼트웨이브가 키들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바라보다가 디지털퍼머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여자 보니까 머리 감은 다음에 드라이기 필요없겠더라."
웃음을 멈추고 자신의 팔을 쓸어보던 쇼트웨이브가 이윽고 결심한 듯 문 앞으로 돌아섰다.
"그럼, 나간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열지는 않고 디지털퍼머를 쳐다보았다.
"네가 제일 무서운 귀신이 뭐야?"
"음.." 디지털퍼머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다코."
"일본귀신이야?"
"그거 있잖아. 링이란 영화에서, 텔레비젼에서 기어나오는 귀신."
"아하." 기억이 난다는 듯 쇼트웨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드라큐라."
"끔찍하지. 송곳니 긴 놈." 디지털퍼머가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걘 짐승이야. 피도 빨아먹구."
"제발 걔네 둘은 여기 없었으면 좋겠다."
쇼트웨이브는 문을 열었다. 밖을 내다본 그녀가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뭐야?" 쇼트웨이브 뒤에서 그녀의 등을 바라보던 디지털퍼머가 외쳤다.
"귀신 맞지? 그치? 몇이나 있어? 많아?"
쇼트웨이브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우리 죽은거 맞나봐."
그녀가 문을 반쯤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와봐." 밖에서 쇼트웨이브의 소리가 들렸다.
"싫어. 나 죽을 때까지 여기 있을거야." 디지털퍼머가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우리 죽었다니까, 이 년아. 몇번을 말해." 쇼트웨이브가 대답했다.
디지털퍼머는 뒤를 돌아보았다. 잘 가꿔진 밭과 곧바른 이랑, 탐스런 과일들과 채소, 그리고 바람에 산들거리는 푸른 나뭇잎들. 그 뒤로 신기루처럼 서 있는 궁궐같은 집이 보였다. 평화로와 보였지만 그것은 그녀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집주인들의 완곡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내?긴 것이었고, 역겹고 무서운 것일지라도 그녀들의 미래는 이 안이 아니라 저 밖에 있었다. 디지털퍼머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나섰다.

제일 처음 보인 것은 모래와 황토로 만들어진 것 같은 붉고 황량한 풍경이었다. 디지털퍼머는 그녀들이 집에 들어올 때와는 너무도 달라진 바깥 풍경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쇼트웨이브 역시 말을 잃은 채 옆에 서 있었다.
울창했던 나무들과 수량이 풍부했던 깊숙한 골짜기는 간데없고 뻘겋게 벗은 산들과 괴상한 모양으로 파열된 바위들이 굴러다니는 누런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짧은 창을 꽂아 놓은 것처럼 말라 비틀어진 나무들이 간간이 산등성이에 박혀 있었고 히이스로 보이는 쓸모없는 작은 관목들만이 왜바람에 사그러들고 있었다. 푸른 색이라곤 바위 표면에 로제트를 형성한 고착 지의류뿐인 듯 했다. 온통 붉고 노란 전경이 시야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차를 타고 들어올 때 달렸던 판석 포장도로와 석등으로 이루어진 가로등 행렬도 물론 없어졌다. 덩그러니 그녀들의 차 한대만이 거친 황무지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화성같다." 쇼트웨이브가 중얼거렸다.
"차라리 화성이면 좋겠다. 살아있긴 한거잖아." 디지털퍼머가 울먹거리는 소리로 말을 받았다.
문이 등 뒤에서 저절로 닫히더니 빗장 지르는 소리가 철컥하며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매캐하고 지독한 유황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시에 마치 커다란 태양이라도 옆에 떠오른 것처럼 무덥고 탁한 열기가 그녀들을 뒤덮었는데 그 뜨거운 열기에 피부가 익을 듯이 화끈거렸다.

"저것 봐."
디지털퍼머가 가리킨 곳에는 저 멀리 짙은 연어살처럼 붉게 드러난 벌판 끝에 높은 산 하나가 솟아 있었는데 그것이 이상하게도 아지랑이 같은 것으로 일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냄새와 열기는 그 곳에서 풍겨나오고 있었다. 쇼트웨이브는 그것을 자세히 보다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세상에. 벌판이 아니었어."
"그래. 너무 빛을 내더라니.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잖아." 디지털퍼머가 그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그녀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건 용암이야. 용암으로 된 강. 어마어마하게 넓은.."
"맞아. 그래서 이 근처에서 아무 것도 못 자라는거야. 독가스와 열기 때문에 말야."
열기에 노출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그녀들은 벌써 숨이 막히며 갈증이 심해졌다.
"다시 들어가서 물이라도 얻어가지고 나와야 되는거 아냐?"
그녀들이 뒤돌아 보았을 때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커다란 집과 정원과 담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바위 하나 만이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아니,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두개였다. 하나의 바위 위에 또 하나가 올려져 마치 한 개의 커다란 바위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쇼트웨이브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걸 가리켜서 귀신한테 홀렸다고 그러나봐." 완전히 넋이 빠진 듯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집은 어디 갔지. 이 돌은 또 뭐야."
"선돌같아. 입석이라고 부르는거." 쇼트웨이브가 옆으로 돌아가 돌을 면밀히 살폈다.
"이런거 우리나라 거의 모든 고장에 하나씩 다 있어. 풍요를 기원하는 돌."
그녀가 조심스럽게 돌의 표면을 쓸어보았다. 거칠고 푸석푸석거렸다.
"알아? 이것도 남근석의 일종이야. 대체 집은 어디 가고 이런게 생겼지?"
그러나 디지털퍼머는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보았을 때 그녀는 용암이 흐르는 강의 어떤 곳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뭘 보는거야?"
"저기 뭔가가 떠 있어."
쇼트웨이브가 그곳을 보자 디지털퍼머의 말대로 아까는 볼 수 없었던 무언가가 용암의 강 위에 떠 있었다. 그것은 그녀들이 발견했을 때만 해도 작았으나 순식간에 커져갔다.
"맙소사. 저건 배야."
그 순간 디지털퍼머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왜?" 쇼트웨이브가 그녀을 돌아보았다.
디지털퍼머가 겁에 질린 채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이게 내 손가락을 물었어."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보였는데 그곳엔 골무가 끼워져 있었다. 골무는 헐렁하게 끼워져 있던 처음과는 달리 불가사리가 먹이를 흡착하듯 그녀의 손가락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작은 조개가 입을 닫고 있는 모습같았다.
쇼트웨이브가 다시 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배는 이제 형상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커졌고 그 위에 누군가가 기다랗게 휘어진 막대기를 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의 손을 잡고 차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서둘러."
"저게 뭐지?"
쇼트웨이브가 짧게 대답했다.
"현존하는 위협."

배가 대단한 속도로 커져왔다. 이제 그 위에 서 있는 자의 차림새도 볼 수 있었다. 그자는 두건이 달리고 옷자락은 발까지 끌리는 헐렁한 검은색 로브를 망토 걸치듯 두르고 있었는데, 막대기라고 여겼던 것은 그녀들이 생전 처음 보는 초대형 낫이었다.
"뭐야,저거. 모터보트야? 뭐 저렇게 빨라?"
쇼트웨이브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달리면서 디지털퍼머가 소리쳤다. 힐끗 배쪽을 쳐다 본 쇼트웨이브가 더 세게 디지털퍼머를 잡아 끌었다.
"그림 리퍼야." 헐떡거리며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뭐라구?"
"그림 리퍼. 저승사자." 그녀들이 구르듯이 차를 향해 돌진했다.
"저 놈이 든 낫은 사이드라고 부르는거야. 그걸로 희생자를 벤 다음 영혼을 끌고 가는거지."

그녀들이 숨이 턱에 차서 차에 도달했을 때 배 역시 이쪽 기슭에 닿았다. 그자가 배에서 뛰어내려 허겁지겁 그녀들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로브가 바람에 펴져 마치 검은 날개처럼 펄럭였다.
쇼트웨이브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탔다.
"빨리 타."
디지털퍼머가 조수석에 탔을 때 쇼트웨이브는 이미 차의 시동을 걸고 있었다. 디지털퍼머는 안전벨트를 채우려고 버클을 잡아당기다가 신경질적으로 홱 집어던졌다.
"빌어먹을 습관 같으니라구."
디지털퍼머가 몸을 뒤로 돌려 뒷쪽 창을 통해 시커먼 물체를 보고는 의외로 가까와져 있는 그자와의 거리에 불에 덴듯 깜짝 놀랐다. 그가 뒤집어 쓴 두건은 거의 벗겨질 듯 걸쳐져 있었고 두 눈은 홍호마노를 박아놓은 것처럼 적의를 담은 붉은 색을 발광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잿빛 얼굴 피부가 소름끼칠 만큼 악의적으로 일그러진 것을 바라보았다. 뿌리까지 드러난 치아가 질콘처럼 번뜩였다.
시동이 걸리자 쇼트웨이브는 기어를 중립에 놓은 상태에서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알피엠 게이지가 분당 7000을 넘어가며 엔진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 허위허위 달려온 그가 차에 거의 접근해 낫을 쳐들었다. 검은 색 금속으로 된 긴 손잡이가 육중하게 공중에서 춤을 췄다.
디지털퍼머는 그 손잡이에 양각된 뱀무늬를 볼 수 있었다. 뱀은 구불구불 손잡이를 감고 올라가 꼭대기에서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있었는데 초승달 모양의 길고 날카로운 낫의 날이 그 주둥이에서부터 튀어나와 있었다.
쇼트웨이브는 사이드미러를 지켜보며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낫이 치켜올라가자 가속된 액셀레이터를 유지한 채 번개처럼 기어를 드라이브에 맞췄다. 엄청난 실린더의 폭발력이 트랜스미션의 변속기어를 집어삼키고 등속조인트로 흘러들어 전륜구동방식의 앞바퀴를 맹렬한 속도로 회전시켰다. 구동토크가 접지마찰력을 훨씬 상회하는 바람에 바퀴는 제자리에서 미친 듯이 헛돌며 연막탄을 터뜨린 것처럼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그가 가마니째로 집어던지는 듯한 흙더미를 뒤집어쓰면서 차창을 향해 수평으로 낫을 휘두르는 순간 고속회전하던 타이어가 접지력을 회복하면서 그녀들이 탄 차는 마치 총알이 발사되는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낫은 허공을 갈랐고 그 서슬에 그가 줄에 매달린 꼭둑각시처럼 비틀대며 균형을 잃었다.
일단 차가 출발하자 쇼트웨이브는 그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차를 전속력으로 가속시켰다. 그녀의 전투적인 악셀링으로 인해 스로틀포지션 센서는 네온사인처럼 깜박거리고, 디시모터는 클러치마스터실린더의 유압을 분수처럼 채워넣고는 숨쉴틈 없이 고속기어로 변속시켰다.
차는 몇 초안에 시속 180킬로미터에 육박하며 울퉁불퉁한 황무지를 빛살처럼 갈랐다. 보기좋게 헛스윙을 한 그자가 차를 따라잡으려고 몇번 시도를 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멈춰섰다. 시트를 움켜쥐고 지켜보던 디지털퍼머가 비로서 한숨을 쉬며 제자리로 돌아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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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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