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퍼머가 숨을 죽이고 차창 밖을 둘러보았다.
주위엔 여러가지 모양의 암벽들이 가시처럼 꽂혀 있었다. 짧은 것은 전봇대 만한 것도 있었지만 긴 것은 하늘에 맞대놓은 사다리처럼 끝없이 뻗어 올라가 있었다.
누런 색의 메마른 흙의 입자들은,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식빵처럼 거칠게 버석거리면서도 아교로 뭉쳐놓은 듯 용케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이제 막 제작한 석고모형을 미처 굳기도 전에 움켜잡아 난폭하게 비틀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중력을 무시한 듯한 그 괴상한 형태에 압도당한 그녀들은, 암벽들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전진하면서도 한시도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디지털퍼머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수시로 골무낀 손가락을 내려다 보았지만 위험을 예고하는 별다른 신호를 발견하진 못했다.
"이게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대체 왜 안 무너지는거지. 단지 우연일까."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바라보며 말했다. 쇼트웨이브는 입을 한일자로 다물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우연은 수수께끼처럼 작동하지."
디지털퍼머가 눈을 깜박였다.
"그건 또 무슨 수수께끼 같은 소리니?"
"확률을 공부하면 알게되는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는 사건들이 실제로는 자주 일어난다는 거야. 우연이란게 다 그런 식인거지."
쇼트웨이브는 앞을 가로막은 암벽을 피해 옆으로 차를 돌렸다. S자 주행을 하듯이 코스를 변형하며 그녀는 암벽들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예를 들어서 네가 동창회에 나간다고 생각해봐. 한 스무 명쯤 모였어. 그럼 그 중에 생일이 같은 사람들이 있을까."
"글쎄, 아마 없겠지. 있더라도 확률이 매우 낮을거 같은데."
"그래, 직관적으로는 그렇게 생각되지.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 계산해보면 생일이 같은 사람이 존재할 확률이 50퍼센트 정도 돼. 그러니까 동창회에 두번 나가면 한번쯤은 생일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거지."
"진짜? 그렇게 많아?"
"동창회 인원이 서른 명이 넘잖니. 그럼 생일이 같을 확률이 얼마나 높아지는지 알아? 95퍼센트가 돼. 생일이 같은 사람이 거의 한 명씩은 있는 셈이야. 희안하지?"
"믿기 어려운데."
"그래. 그게 너무 희안해서 수학자들이 일반적인 공식을 만들 정도였어. 주어진 집단 안에서, 적어도 2개가 같은 특성을 가질 확률이 95퍼센트가 되기 위해 필요한 개체의 수는, 집단 크기의 제곱근에 1.6을 곱한 값이야. 그러니까 생일의 경우는, 1년이 365일이니까 루트 365 곱하기 1.6 하면 되는거지."
디지털퍼머가 완전히 짜증이 나는 얼굴로 쇼트웨이브를 째려봤다.
"이 년아. 넌 이 지경이 되서도 수학공식이 나오니. 진짜 너무한거 아니니. 재수 지대루 없다."
쇼트웨이브가 소리를 죽여 웃었다.
그녀들은 최대한 코스를 구부리지 않고 효율적으로 직선에 가깝게 주행했다.
대충 절반쯤 왔을 거라고 느꼈을 때였다. 도로를 달리다가 고양이나 강아지를 치었을 때처럼 갑자기 덜컹하며 차가 튀어 올랐다.
"뭐야, 왜 그래."
디지털퍼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쇼트웨이브가 차를 세웠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운전석 차창 너머로 바닥을 살폈다.
"땅바닥에서 뭔가가 움직였어."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뱀처럼 길쭉한 것이 차 바퀴 밑에서 스슥거리며 기어나와 앞쪽에 놓여진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향해 빠르게 기어갔다. 그녀들이 그게 무엇인지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별안간 바위가 꿈틀하며 움직였다.
"저게 뭐야."
디지털퍼머가 눈을 크게 뜬채 바위를 쳐다 보았다.
바위가 서서히 일어나더니, 물에 빠진 곰이 몸을 흔들어 물을 털어버리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바위덩어리로부터 사방팔방으로 먼지가 솟구쳐 자욱히 퍼져나갔다.
"바위가 살아있나봐."
디지털퍼머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바위가 아니야."
쇼트웨이브 역시 놀라서 잔뜩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뭔가 살아있는 동물 같은데..좀 전에 우리가 밟은 게 저 놈의 꼬리같아."
먼지가 가라앉자 바위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라지고, 새카만 털이 송곳처럼 곤두선 커다란 짐승이 뒤로 돌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몸집이 너무 컸을 뿐 아니라 마치 몇 년간을 그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처럼 잔뜩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 바위덩어리라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거의 화물트럭만한 크기의 그것은, 기지개를 켜는 듯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켜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꿈틀댔다. 몸을 덮은 새까만 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땅을 딛고 선 네 발이 흙 속에 파묻혀 들어가고 철판을 긁어내듯이 이빨을 가는 소리가 적막했던 공기를 할퀴었다. 꼬리가 머리를 세운 뱀처럼 들려 허공에서 흔들리다가 일순간 멈췄다.
짐승은 자신을 밟은 것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짐승의 머리는 늑대와 비슷했는데 두 눈은 화염덩어리처럼 타올랐고 코에서는 검은 연기가 내뿜어졌다. 이빨은 하나하나가 상아처럼 커다랗고 날카로왔으며, 먹이를 분쇄하기 위해 위협적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짐승의 눈이 하얗고 네모나게 생긴 그녀들의 차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그 물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잠시 그것을 주시하던 짐승이, 이내 유리창 너머로 겁에 질린채 앉아있는 그녀들을 발견했다.
그녀들이 짐승의 눈에서 불이 방사된다고 느낄만큼 번쩍대는 것을 보았을 때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들을 쳐다보는 머리 너머로 그것과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머리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놀라서 숨을 들이키는 순간 그 위로 또다시 하나의 머리가 더 나타나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디지털퍼머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짐승은 머리가 셋이 달린 괴물이었다. 괴물이 그녀들에게 밟혔던 검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땅바닥을 철퍽 내리쳤다. 뽀얀 먼지가 부서진 안개처럼 일어나고 그 순간 골무가 디지털퍼머의 손가락을 물었다.
"이런. 빨리도 가르쳐 준다. 이거 고장났나봐."
디지털퍼머가 온 몸을 떨며 내뱉었다. 쇼트웨이브가 괴물과 골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야. 저 놈이 이제 우리를 잡을 생각을 한거야. 잠재적인 위협에서 현존하는 위협으로 변한거지."
그녀가 숨을 몰아 쉬며 핸들을 꼭 잡았다.
"그 여자가 골무만 믿고 있지 말라고 한 뜻을 이제 알겠어."
괴물은 하늘을 향해 동시에 세 개의 머리를 들고 세 개의 서로 다른 높낮이로 길고 무서운 울음소리를 질러냈다. 그 끔찍한 화음은 암벽들 사이로 메아리쳐,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이 긴 시간동안 대기를 격탕시키고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그녀들은 닫힌 차 안에 앉아있었지만 고막을 찢는 듯한 그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괴물이 차의 전면으로 돌아섰다. 열차가 교각을 통과하는 것같이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은 그녀들을 향해 한 발 내딛었다. 쇼트웨이브가 침을 삼키며 재빨리 룸미러를 통해 뒤를 확인했다. 그녀가 살며시 기어를 후진으로 바꾸었다. 괴물이 도약을 시작하자 그녀는 악셀레이터를 있는 힘껏 밟았다.
타이어의 번아웃이 시작되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용수철이 튕겨져 나가듯 그녀들의 차가 전속력으로 후진했다. 그러나 괴물의 도약력은 굉장했다. 금새 앞 유리를 물어뜯을 수 있을만큼 바짝 그녀들을 쫓아왔다. 디지털퍼머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쇼트웨이브는 입술을 깨물고 기다리고 있다가 괴물이 범퍼에 닿을 듯 접근했을때 브레이크를 밟았다. 순간적으로 차의 하중이 그녀들의 뒷편으로 이동하며 그녀들이 앉아있는 앞부분이 들리는 오버스티어가 발생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그녀는 핸들을 왼쪽으로 잡아채듯이 꺾었다. 타이어가 지면을 긁으며 60도 가량 왼쪽으로 비껴나면서 빙판을 미끄러지듯 드리프트 되었다. 동시에 쇼트웨이브는 브레이크를 놓으며 짧게 악셀레이터를 두들겼다. 드리프트량이 제로로 떨어지며 차는 그립을 되찾고 무서운 속도로 후진했다. 차가 야생동물같은 순발력으로 폭발적인 슬랄롬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것은 통상 일으키는 드리프트와 정반대 되는 순서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그녀들이 후진으로 괴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에 쇼트웨이브가 고안해 낸 슬랄롬으로 인해 괴물은 옆으로 꺾여나간 그녀들의 차를 잡지 못하고 그녀들을 지나쳐 직진해 버리고 말았다. 쇼트웨이브가 그 잠시의 틈을 이용해 숨 쉴겨를 없이 괴물로부터 도망갔다. 괴물은 가속을 겨우 멈추고 발을 버둥대며 방향을 틀었다. 세 개의 머리가 제각각 아우성을 쳐대며 그녀들을 다시 쫓아왔다. 직선거리에서는 도무지 괴물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괴물이 그녀들을 덮칠만큼 쫓아오자 쇼트웨이브는 똑같은 방식의 드리프트를 시도했다.
브레이크를 짧게 밟았다 떼고, 찰나적인 오버스티어가 발생하고, 그 순간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자, 차가 돌풍이 일어난 것처럼 먼지를 일으키며 옆으로 슬라이딩, 미끄러짐이 멈추기 전에 다시 악셀 온.
시계톱니처럼 정확한 슬랄롬이 이어지자 괴물은 또다시 그녀들을 놓치고 미끄러졌다. 디지털퍼머가 비명조차 못지르고 얼굴이 하얗게 변한채 안전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그녀들은 괴물이 몸을 일으켜 쫓아올 때까지 다시금 시간을 조금 벌었으나 이것이 최종적인 탈출이 될 수는 없었다. 쇼트웨이브가 괴물로부터 도망가며 전력을 다해 리어미러를 살폈다. 위태롭고 낮은 암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괴물이 이내 그녀들을 다시 쫓아왔고 쇼트웨이브는 그 암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후진했다.
"뒤를 봐줘."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에게 소리쳤다. 디지털퍼머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 보았다. 암벽이 순식간에 커져왔다. 괴물은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먹이를 자꾸 놓쳐서인지 미친 듯이 화를 내며 그녀들에게 달려들었다.
"1미터쯤 남기면 말해줘."
10미터,5미터,3미터,2미터 점점 거리가 줄어들었다. 괴물과의 거리 역시 줄어들었다. 마치 샌드위치처럼 암벽과 괴물 사이에 그녀들의 차가 끼어들었다. 디지털퍼머가 자기도 모르게 시트의 등받이를 껴안았다.
"지금이야."
디지털퍼머가 외쳤다. 쇼트웨이브는 아주 짧게 악셀레이터를 끊어 밟아 엔진 토크를 일시적으로 엄청나게 올려놓고 핸들을 잡아채며 악셀레이터를 놓아버렸다. 차는 암벽과 거의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마치 리버스 파킹을 하듯이 직각에 가까운 스핀을 먹으며 미끄러져 암벽과 나란히 섰다. 앞 유리 전면의 광경이 롤러코스터를 탈 때처럼 괴물의 입을 비추다가 순식간에 괴물과 90도에 놓인 왼쪽 편의 황무지 풍경으로 바뀌었다.
쇼트웨이브는 다시금 악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차는 암벽을 향해 돌진하다가 90도로 방향을 틀며 미끄러지면서 한순간도 멈춤없이 암벽을 스치며 그 공간을 빠져나갔다. 반면 그녀들에게만 집중하며 돌진했던 괴물은 너무 짧아진 거리를 피하지 못하고 암벽에 충돌했다.
어마어마한 운동에너지가 충돌에너지로 변해 암벽을 강타했다. 안그래도 위태로왔던 암벽에 금이 가며 먼지가 떨어졌다. 잠시 정신을 못 차리던 괴물이 세 머리를 흔들며 동시에 좌우를 둘러보다가 또다시 놓친 것을 알고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엄청난 괴성을 질러댔다.
그때 위태롭게 서있던 암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돌멩이와 흙더미가 아우성을 치는 세 머리 위로 쏟아져 눈사태처럼 괴물을 덮어버렸다. 괴물은 위를 쳐다보며 발버둥쳤으나 플라스틱 폭탄으로 해체된 빌딩처럼 폭삭 무너져 내리는 암벽의 흙더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들은 차를 잠시 멈추고 괴물이 파묻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욱한 흙먼지가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뭉게뭉게 일어났다.
"죽었을까?"
디지털퍼머가 손을 덜덜 떨며 물었다.
"글쎄."
쇼트웨이브 역시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흙먼지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자 암벽이 서 있던 곳에는 반쯤 무너진 채로 서 있는 암벽과 그 조각들로 만들어진 큼지막한 돌무덤이 생긴 것을 볼 수 있었다.
"죽었나봐."
"골무는 어때?"
디지털퍼머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물고 있어."
쇼트웨이브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돌무덤이 움찔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흙더미 사이에서 괴물의 머리가 하나 튀어올라왔다. 이어 또 하나. 돌무덤의 틈새로 시뻘건 불길이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괴물이 정면으로 그녀들의 차를 노려보았다. 쇼트웨이브는 지체없이 악셀링을 시작했다. 차가 다시 빠른 속도로 후진했다.
괴물은 흙더미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낑낑거렸다. 몸을 비틀어대며 다리를 휘저어 대자 괴물을 덮고 있던 흙더미들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쇼트웨이브는 오른발을 두 페달에 걸쳐 밟고 악셀링에서 곧바로 브레이킹으로 바꾼 다음 핸들을 빠르게 감았다. 차는 급격한 오버스티어를 일으키고는 찢어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180도 스핀을 먹으며 터닝되었다. 차가 주행방향을 향해 똑바로 서자 스핀이 아직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미 쇼트웨이브는 기어를 드라이브로 바꾸고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하중이동이 완벽히 컨트롤 되며 차가 단속없이 후진에서 전진으로 진행방향을 바꾸었다.
마침내 흙더미에서 괴물이 튀어나왔다. 괴물은 여전히 놀라운 속도로 그녀들을 추격했다. 쇼트웨이브는 다음 암벽까지 속도를 내어 전진하고, 볼링핀처럼 이곳 저곳에 세워져 있는 암벽들 사이에서 진행 코스를 Z자 형태로 구부러뜨렸다. 그녀는 속도를 유지시키기 위해 바퀴를 미끄러뜨리지 않은 채 한계그립력 만으로 코스를 돌파했다. 거의 완벽한 그녀의 롤링 스피드 테크닉은 코너링이 끝났을 때에도 처음에 비해 전혀 줄어들지 않은 속도를 보여주었다. 반면 괴물은 코스의 클립 마다 미끄러지며 암벽에 부딪쳤으나 믿어지지 않는 순발력으로 그것을 극복하며 곧바로 그녀들의 뒤를 따라왔다.
쇼트웨이브가 마지막 암벽을 통과했을 때 눈 앞에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암벽 숲의 가장자리까지 온 것이었다. 그녀는 핸들을 끊어채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곧 차가 방향을 틀며 절벽을 향해 드리프트 되었다. 디지털퍼머가 자신의 옆 창쪽으로 순식간에 커지는 낭떠러지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쇼트웨이브는 침착하게 적절한 클립 포인트에 근접할 때까지 드리프트를 유지했다가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하중이 후륜으로 넘어가며 미끄러짐이 멈추고, 차는 낭떠러지를 옆으로 낀채 주행을 시작했다. 리어미러에 곧바로 괴물의 모습이 나타났고 금새 커져왔다.
쇼트웨이브는 낭떠러지를 따라 전속력으로 차를 달리며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았다. 송곳니를 드러낸 괴물의 머리들이 호흡을 할 때마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차를 쫓아 달려왔다. 마침내 쇼트웨이브가 낭떠러지에 삐죽 나와있는 발판 모양의 지형을 확인했다. 그녀는 전진방향에 있는 커다란 암벽 앞에서 아웃 인 아웃 방식의 코너링을 통해 그립주행으로 암벽 숲 안쪽으로 들어왔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괴물 역시 그녀들을 따라 암벽 숲 안으로 들어왔다.
쇼트웨이브는 전속력으로 20미터 쯤 직진하여 그녀들의 앞을 가로막은 암벽에 접근하였다. 그 암벽을 코너로 삼아 인접한 암벽 사이로 헤어핀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잠시 떨어졌던 괴물이 그녀들을 바짝 쫓아왔다. 다음 순간 그녀는 풀브레이킹하여 차의 하중을 앞으로 옮겼다.
타이어가 락이 걸리자 힐앤토를 사용한 악셀링을 시도하면서 그녀는 뒷바퀴를 슬라이딩 시켰다. 차는 곧바로 코너의 탈출방향까지 90도가 넘도록 각도를 미끄러뜨렸으며, 그녀는 코너 회전방향의 반대쪽으로 핸들을 꺾어주는 카운터 스티어링를 사용하며 클립 포인트까지 차를 드리프트 시켰다.
숨막히는 시간이 영원처럼 흘러갔다. 괴물의 머리 중 하나가 길게 목을 뽑고 차창 바로 앞에서 불꽃튀는 숨결을 뿜어댔다. 디지털퍼머가 기절할 듯이 비명을 질렀다. 그 미묘한 찰나 쇼트웨이브는 악셀레이터를 살짝 밟아 타이어의 그립력을 회복시키고 곧바로 카운터 스티어링 된 핸들의 각도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전면적인 악셀링을 통해 그녀들을 가로막았던 앞쪽의 암벽을 탈출하면서 인접한 또다른 암벽을 스치고, 거의 180도에 가까운 유턴을 성공시켰다. 괴물의 입이 창문을 따라 뒤쪽으로 흘러 사라졌다.
괴물은 가볍게 암벽에 부딪혔으나 이제는 그녀들을 추적하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재빠르게 속력을 줄이며 차를 따라 유턴했다.
"꽉 잡아."
쇼트웨이브가 소리쳤다. 얼굴이 하얘진채 거의 기절할 듯 손잡이에 매달려 있던 디지털퍼머가 외쳤다.
"아직도 더 할 짓이 남았어?"
쇼트웨이브가 아까 떠나왔던 낭떠러지를 향해서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괴물이 그녀들을 바짝 쫓아왔다.
"무슨 짓이야?"
디지털퍼머가 소리쳤다. 알피엠은 더욱 더 올라가 6000을 넘어갔다. 쇼트웨이브는 차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출력을 끌어냈다. 그것은 6000 알피엠에서 200마력을 상회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괴물의 추격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괴물은 차 뒤쪽의 범퍼에 가까이 붙었다. 낭떠러지가 시시가각 커져왔다. 쇼트웨이브는 이를 악물었다. 디지털퍼머는 비로서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안전벨트를 당겨매며 소리쳤다.
"다시는 네가 모는 차는 안 탈거야. 이 년아."
순간 낭떠러지가 유리창 앞으로 커다란 입을 벌렸고 차는 먼지만을 남긴 채 절벽 위로 날아올랐다. 괴물도 역시 차의 뒷트렁크를 물기 위해서 도약했으나 자신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낭떠러지를 보고는 마지막 순간에 주춤했다. 하지만 괴물의 발은 이미 지상을 떠난 후였고 그가 온전히 절벽을 건너뛰기엔 그의 몸이 너무나 크고 무거웠다. 괴물은 정점에 도달했다가 이내 그녀들과 표고차를 벌리더니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해 갔다.
끔찍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으나 점차로 멀어져갔고 그 사이 그녀들의 차는 20미터에 가까운 너비를 날아서 건너편에 떨어졌다. 앞 유리창에 금이 가며 차가 쪼개질 것같은 충격이 급습했다. 에어백이 터지면서 그녀들이 쿠션 속으로 파묻혔다. 거인의 손아귀에 움켜 잡히듯 안전벨트에 거칠게 조여지며 그녀들이 비명을 터뜨리는 순간 온 몸의 뼈가 탈구되는 듯한 고통이 불길처럼 그녀들을 휘감았다.
주위엔 여러가지 모양의 암벽들이 가시처럼 꽂혀 있었다. 짧은 것은 전봇대 만한 것도 있었지만 긴 것은 하늘에 맞대놓은 사다리처럼 끝없이 뻗어 올라가 있었다.
누런 색의 메마른 흙의 입자들은,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식빵처럼 거칠게 버석거리면서도 아교로 뭉쳐놓은 듯 용케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이제 막 제작한 석고모형을 미처 굳기도 전에 움켜잡아 난폭하게 비틀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중력을 무시한 듯한 그 괴상한 형태에 압도당한 그녀들은, 암벽들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전진하면서도 한시도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디지털퍼머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수시로 골무낀 손가락을 내려다 보았지만 위험을 예고하는 별다른 신호를 발견하진 못했다.
"이게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대체 왜 안 무너지는거지. 단지 우연일까."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바라보며 말했다. 쇼트웨이브는 입을 한일자로 다물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우연은 수수께끼처럼 작동하지."
디지털퍼머가 눈을 깜박였다.
"그건 또 무슨 수수께끼 같은 소리니?"
"확률을 공부하면 알게되는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는 사건들이 실제로는 자주 일어난다는 거야. 우연이란게 다 그런 식인거지."
쇼트웨이브는 앞을 가로막은 암벽을 피해 옆으로 차를 돌렸다. S자 주행을 하듯이 코스를 변형하며 그녀는 암벽들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예를 들어서 네가 동창회에 나간다고 생각해봐. 한 스무 명쯤 모였어. 그럼 그 중에 생일이 같은 사람들이 있을까."
"글쎄, 아마 없겠지. 있더라도 확률이 매우 낮을거 같은데."
"그래, 직관적으로는 그렇게 생각되지.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 계산해보면 생일이 같은 사람이 존재할 확률이 50퍼센트 정도 돼. 그러니까 동창회에 두번 나가면 한번쯤은 생일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거지."
"진짜? 그렇게 많아?"
"동창회 인원이 서른 명이 넘잖니. 그럼 생일이 같을 확률이 얼마나 높아지는지 알아? 95퍼센트가 돼. 생일이 같은 사람이 거의 한 명씩은 있는 셈이야. 희안하지?"
"믿기 어려운데."
"그래. 그게 너무 희안해서 수학자들이 일반적인 공식을 만들 정도였어. 주어진 집단 안에서, 적어도 2개가 같은 특성을 가질 확률이 95퍼센트가 되기 위해 필요한 개체의 수는, 집단 크기의 제곱근에 1.6을 곱한 값이야. 그러니까 생일의 경우는, 1년이 365일이니까 루트 365 곱하기 1.6 하면 되는거지."
디지털퍼머가 완전히 짜증이 나는 얼굴로 쇼트웨이브를 째려봤다.
"이 년아. 넌 이 지경이 되서도 수학공식이 나오니. 진짜 너무한거 아니니. 재수 지대루 없다."
쇼트웨이브가 소리를 죽여 웃었다.
그녀들은 최대한 코스를 구부리지 않고 효율적으로 직선에 가깝게 주행했다.
대충 절반쯤 왔을 거라고 느꼈을 때였다. 도로를 달리다가 고양이나 강아지를 치었을 때처럼 갑자기 덜컹하며 차가 튀어 올랐다.
"뭐야, 왜 그래."
디지털퍼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쇼트웨이브가 차를 세웠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운전석 차창 너머로 바닥을 살폈다.
"땅바닥에서 뭔가가 움직였어."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뱀처럼 길쭉한 것이 차 바퀴 밑에서 스슥거리며 기어나와 앞쪽에 놓여진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향해 빠르게 기어갔다. 그녀들이 그게 무엇인지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별안간 바위가 꿈틀하며 움직였다.
"저게 뭐야."
디지털퍼머가 눈을 크게 뜬채 바위를 쳐다 보았다.
바위가 서서히 일어나더니, 물에 빠진 곰이 몸을 흔들어 물을 털어버리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바위덩어리로부터 사방팔방으로 먼지가 솟구쳐 자욱히 퍼져나갔다.
"바위가 살아있나봐."
디지털퍼머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바위가 아니야."
쇼트웨이브 역시 놀라서 잔뜩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뭔가 살아있는 동물 같은데..좀 전에 우리가 밟은 게 저 놈의 꼬리같아."
먼지가 가라앉자 바위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라지고, 새카만 털이 송곳처럼 곤두선 커다란 짐승이 뒤로 돌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몸집이 너무 컸을 뿐 아니라 마치 몇 년간을 그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처럼 잔뜩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 바위덩어리라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거의 화물트럭만한 크기의 그것은, 기지개를 켜는 듯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켜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꿈틀댔다. 몸을 덮은 새까만 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땅을 딛고 선 네 발이 흙 속에 파묻혀 들어가고 철판을 긁어내듯이 이빨을 가는 소리가 적막했던 공기를 할퀴었다. 꼬리가 머리를 세운 뱀처럼 들려 허공에서 흔들리다가 일순간 멈췄다.
짐승은 자신을 밟은 것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짐승의 머리는 늑대와 비슷했는데 두 눈은 화염덩어리처럼 타올랐고 코에서는 검은 연기가 내뿜어졌다. 이빨은 하나하나가 상아처럼 커다랗고 날카로왔으며, 먹이를 분쇄하기 위해 위협적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짐승의 눈이 하얗고 네모나게 생긴 그녀들의 차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그 물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잠시 그것을 주시하던 짐승이, 이내 유리창 너머로 겁에 질린채 앉아있는 그녀들을 발견했다.
그녀들이 짐승의 눈에서 불이 방사된다고 느낄만큼 번쩍대는 것을 보았을 때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들을 쳐다보는 머리 너머로 그것과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머리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놀라서 숨을 들이키는 순간 그 위로 또다시 하나의 머리가 더 나타나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디지털퍼머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짐승은 머리가 셋이 달린 괴물이었다. 괴물이 그녀들에게 밟혔던 검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땅바닥을 철퍽 내리쳤다. 뽀얀 먼지가 부서진 안개처럼 일어나고 그 순간 골무가 디지털퍼머의 손가락을 물었다.
"이런. 빨리도 가르쳐 준다. 이거 고장났나봐."
디지털퍼머가 온 몸을 떨며 내뱉었다. 쇼트웨이브가 괴물과 골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야. 저 놈이 이제 우리를 잡을 생각을 한거야. 잠재적인 위협에서 현존하는 위협으로 변한거지."
그녀가 숨을 몰아 쉬며 핸들을 꼭 잡았다.
"그 여자가 골무만 믿고 있지 말라고 한 뜻을 이제 알겠어."
괴물은 하늘을 향해 동시에 세 개의 머리를 들고 세 개의 서로 다른 높낮이로 길고 무서운 울음소리를 질러냈다. 그 끔찍한 화음은 암벽들 사이로 메아리쳐,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이 긴 시간동안 대기를 격탕시키고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그녀들은 닫힌 차 안에 앉아있었지만 고막을 찢는 듯한 그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괴물이 차의 전면으로 돌아섰다. 열차가 교각을 통과하는 것같이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은 그녀들을 향해 한 발 내딛었다. 쇼트웨이브가 침을 삼키며 재빨리 룸미러를 통해 뒤를 확인했다. 그녀가 살며시 기어를 후진으로 바꾸었다. 괴물이 도약을 시작하자 그녀는 악셀레이터를 있는 힘껏 밟았다.
타이어의 번아웃이 시작되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용수철이 튕겨져 나가듯 그녀들의 차가 전속력으로 후진했다. 그러나 괴물의 도약력은 굉장했다. 금새 앞 유리를 물어뜯을 수 있을만큼 바짝 그녀들을 쫓아왔다. 디지털퍼머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쇼트웨이브는 입술을 깨물고 기다리고 있다가 괴물이 범퍼에 닿을 듯 접근했을때 브레이크를 밟았다. 순간적으로 차의 하중이 그녀들의 뒷편으로 이동하며 그녀들이 앉아있는 앞부분이 들리는 오버스티어가 발생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그녀는 핸들을 왼쪽으로 잡아채듯이 꺾었다. 타이어가 지면을 긁으며 60도 가량 왼쪽으로 비껴나면서 빙판을 미끄러지듯 드리프트 되었다. 동시에 쇼트웨이브는 브레이크를 놓으며 짧게 악셀레이터를 두들겼다. 드리프트량이 제로로 떨어지며 차는 그립을 되찾고 무서운 속도로 후진했다. 차가 야생동물같은 순발력으로 폭발적인 슬랄롬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것은 통상 일으키는 드리프트와 정반대 되는 순서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그녀들이 후진으로 괴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에 쇼트웨이브가 고안해 낸 슬랄롬으로 인해 괴물은 옆으로 꺾여나간 그녀들의 차를 잡지 못하고 그녀들을 지나쳐 직진해 버리고 말았다. 쇼트웨이브가 그 잠시의 틈을 이용해 숨 쉴겨를 없이 괴물로부터 도망갔다. 괴물은 가속을 겨우 멈추고 발을 버둥대며 방향을 틀었다. 세 개의 머리가 제각각 아우성을 쳐대며 그녀들을 다시 쫓아왔다. 직선거리에서는 도무지 괴물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괴물이 그녀들을 덮칠만큼 쫓아오자 쇼트웨이브는 똑같은 방식의 드리프트를 시도했다.
브레이크를 짧게 밟았다 떼고, 찰나적인 오버스티어가 발생하고, 그 순간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자, 차가 돌풍이 일어난 것처럼 먼지를 일으키며 옆으로 슬라이딩, 미끄러짐이 멈추기 전에 다시 악셀 온.
시계톱니처럼 정확한 슬랄롬이 이어지자 괴물은 또다시 그녀들을 놓치고 미끄러졌다. 디지털퍼머가 비명조차 못지르고 얼굴이 하얗게 변한채 안전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그녀들은 괴물이 몸을 일으켜 쫓아올 때까지 다시금 시간을 조금 벌었으나 이것이 최종적인 탈출이 될 수는 없었다. 쇼트웨이브가 괴물로부터 도망가며 전력을 다해 리어미러를 살폈다. 위태롭고 낮은 암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괴물이 이내 그녀들을 다시 쫓아왔고 쇼트웨이브는 그 암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후진했다.
"뒤를 봐줘."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에게 소리쳤다. 디지털퍼머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 보았다. 암벽이 순식간에 커져왔다. 괴물은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먹이를 자꾸 놓쳐서인지 미친 듯이 화를 내며 그녀들에게 달려들었다.
"1미터쯤 남기면 말해줘."
10미터,5미터,3미터,2미터 점점 거리가 줄어들었다. 괴물과의 거리 역시 줄어들었다. 마치 샌드위치처럼 암벽과 괴물 사이에 그녀들의 차가 끼어들었다. 디지털퍼머가 자기도 모르게 시트의 등받이를 껴안았다.
"지금이야."
디지털퍼머가 외쳤다. 쇼트웨이브는 아주 짧게 악셀레이터를 끊어 밟아 엔진 토크를 일시적으로 엄청나게 올려놓고 핸들을 잡아채며 악셀레이터를 놓아버렸다. 차는 암벽과 거의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마치 리버스 파킹을 하듯이 직각에 가까운 스핀을 먹으며 미끄러져 암벽과 나란히 섰다. 앞 유리 전면의 광경이 롤러코스터를 탈 때처럼 괴물의 입을 비추다가 순식간에 괴물과 90도에 놓인 왼쪽 편의 황무지 풍경으로 바뀌었다.
쇼트웨이브는 다시금 악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차는 암벽을 향해 돌진하다가 90도로 방향을 틀며 미끄러지면서 한순간도 멈춤없이 암벽을 스치며 그 공간을 빠져나갔다. 반면 그녀들에게만 집중하며 돌진했던 괴물은 너무 짧아진 거리를 피하지 못하고 암벽에 충돌했다.
어마어마한 운동에너지가 충돌에너지로 변해 암벽을 강타했다. 안그래도 위태로왔던 암벽에 금이 가며 먼지가 떨어졌다. 잠시 정신을 못 차리던 괴물이 세 머리를 흔들며 동시에 좌우를 둘러보다가 또다시 놓친 것을 알고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엄청난 괴성을 질러댔다.
그때 위태롭게 서있던 암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돌멩이와 흙더미가 아우성을 치는 세 머리 위로 쏟아져 눈사태처럼 괴물을 덮어버렸다. 괴물은 위를 쳐다보며 발버둥쳤으나 플라스틱 폭탄으로 해체된 빌딩처럼 폭삭 무너져 내리는 암벽의 흙더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녀들은 차를 잠시 멈추고 괴물이 파묻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욱한 흙먼지가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뭉게뭉게 일어났다.
"죽었을까?"
디지털퍼머가 손을 덜덜 떨며 물었다.
"글쎄."
쇼트웨이브 역시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흙먼지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자 암벽이 서 있던 곳에는 반쯤 무너진 채로 서 있는 암벽과 그 조각들로 만들어진 큼지막한 돌무덤이 생긴 것을 볼 수 있었다.
"죽었나봐."
"골무는 어때?"
디지털퍼머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물고 있어."
쇼트웨이브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돌무덤이 움찔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흙더미 사이에서 괴물의 머리가 하나 튀어올라왔다. 이어 또 하나. 돌무덤의 틈새로 시뻘건 불길이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괴물이 정면으로 그녀들의 차를 노려보았다. 쇼트웨이브는 지체없이 악셀링을 시작했다. 차가 다시 빠른 속도로 후진했다.
괴물은 흙더미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낑낑거렸다. 몸을 비틀어대며 다리를 휘저어 대자 괴물을 덮고 있던 흙더미들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쇼트웨이브는 오른발을 두 페달에 걸쳐 밟고 악셀링에서 곧바로 브레이킹으로 바꾼 다음 핸들을 빠르게 감았다. 차는 급격한 오버스티어를 일으키고는 찢어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180도 스핀을 먹으며 터닝되었다. 차가 주행방향을 향해 똑바로 서자 스핀이 아직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미 쇼트웨이브는 기어를 드라이브로 바꾸고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하중이동이 완벽히 컨트롤 되며 차가 단속없이 후진에서 전진으로 진행방향을 바꾸었다.
마침내 흙더미에서 괴물이 튀어나왔다. 괴물은 여전히 놀라운 속도로 그녀들을 추격했다. 쇼트웨이브는 다음 암벽까지 속도를 내어 전진하고, 볼링핀처럼 이곳 저곳에 세워져 있는 암벽들 사이에서 진행 코스를 Z자 형태로 구부러뜨렸다. 그녀는 속도를 유지시키기 위해 바퀴를 미끄러뜨리지 않은 채 한계그립력 만으로 코스를 돌파했다. 거의 완벽한 그녀의 롤링 스피드 테크닉은 코너링이 끝났을 때에도 처음에 비해 전혀 줄어들지 않은 속도를 보여주었다. 반면 괴물은 코스의 클립 마다 미끄러지며 암벽에 부딪쳤으나 믿어지지 않는 순발력으로 그것을 극복하며 곧바로 그녀들의 뒤를 따라왔다.
쇼트웨이브가 마지막 암벽을 통과했을 때 눈 앞에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암벽 숲의 가장자리까지 온 것이었다. 그녀는 핸들을 끊어채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곧 차가 방향을 틀며 절벽을 향해 드리프트 되었다. 디지털퍼머가 자신의 옆 창쪽으로 순식간에 커지는 낭떠러지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쇼트웨이브는 침착하게 적절한 클립 포인트에 근접할 때까지 드리프트를 유지했다가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하중이 후륜으로 넘어가며 미끄러짐이 멈추고, 차는 낭떠러지를 옆으로 낀채 주행을 시작했다. 리어미러에 곧바로 괴물의 모습이 나타났고 금새 커져왔다.
쇼트웨이브는 낭떠러지를 따라 전속력으로 차를 달리며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았다. 송곳니를 드러낸 괴물의 머리들이 호흡을 할 때마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차를 쫓아 달려왔다. 마침내 쇼트웨이브가 낭떠러지에 삐죽 나와있는 발판 모양의 지형을 확인했다. 그녀는 전진방향에 있는 커다란 암벽 앞에서 아웃 인 아웃 방식의 코너링을 통해 그립주행으로 암벽 숲 안쪽으로 들어왔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괴물 역시 그녀들을 따라 암벽 숲 안으로 들어왔다.
쇼트웨이브는 전속력으로 20미터 쯤 직진하여 그녀들의 앞을 가로막은 암벽에 접근하였다. 그 암벽을 코너로 삼아 인접한 암벽 사이로 헤어핀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잠시 떨어졌던 괴물이 그녀들을 바짝 쫓아왔다. 다음 순간 그녀는 풀브레이킹하여 차의 하중을 앞으로 옮겼다.
타이어가 락이 걸리자 힐앤토를 사용한 악셀링을 시도하면서 그녀는 뒷바퀴를 슬라이딩 시켰다. 차는 곧바로 코너의 탈출방향까지 90도가 넘도록 각도를 미끄러뜨렸으며, 그녀는 코너 회전방향의 반대쪽으로 핸들을 꺾어주는 카운터 스티어링를 사용하며 클립 포인트까지 차를 드리프트 시켰다.
숨막히는 시간이 영원처럼 흘러갔다. 괴물의 머리 중 하나가 길게 목을 뽑고 차창 바로 앞에서 불꽃튀는 숨결을 뿜어댔다. 디지털퍼머가 기절할 듯이 비명을 질렀다. 그 미묘한 찰나 쇼트웨이브는 악셀레이터를 살짝 밟아 타이어의 그립력을 회복시키고 곧바로 카운터 스티어링 된 핸들의 각도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전면적인 악셀링을 통해 그녀들을 가로막았던 앞쪽의 암벽을 탈출하면서 인접한 또다른 암벽을 스치고, 거의 180도에 가까운 유턴을 성공시켰다. 괴물의 입이 창문을 따라 뒤쪽으로 흘러 사라졌다.
괴물은 가볍게 암벽에 부딪혔으나 이제는 그녀들을 추적하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재빠르게 속력을 줄이며 차를 따라 유턴했다.
"꽉 잡아."
쇼트웨이브가 소리쳤다. 얼굴이 하얘진채 거의 기절할 듯 손잡이에 매달려 있던 디지털퍼머가 외쳤다.
"아직도 더 할 짓이 남았어?"
쇼트웨이브가 아까 떠나왔던 낭떠러지를 향해서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괴물이 그녀들을 바짝 쫓아왔다.
"무슨 짓이야?"
디지털퍼머가 소리쳤다. 알피엠은 더욱 더 올라가 6000을 넘어갔다. 쇼트웨이브는 차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출력을 끌어냈다. 그것은 6000 알피엠에서 200마력을 상회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괴물의 추격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괴물은 차 뒤쪽의 범퍼에 가까이 붙었다. 낭떠러지가 시시가각 커져왔다. 쇼트웨이브는 이를 악물었다. 디지털퍼머는 비로서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안전벨트를 당겨매며 소리쳤다.
"다시는 네가 모는 차는 안 탈거야. 이 년아."
순간 낭떠러지가 유리창 앞으로 커다란 입을 벌렸고 차는 먼지만을 남긴 채 절벽 위로 날아올랐다. 괴물도 역시 차의 뒷트렁크를 물기 위해서 도약했으나 자신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낭떠러지를 보고는 마지막 순간에 주춤했다. 하지만 괴물의 발은 이미 지상을 떠난 후였고 그가 온전히 절벽을 건너뛰기엔 그의 몸이 너무나 크고 무거웠다. 괴물은 정점에 도달했다가 이내 그녀들과 표고차를 벌리더니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해 갔다.
끔찍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으나 점차로 멀어져갔고 그 사이 그녀들의 차는 20미터에 가까운 너비를 날아서 건너편에 떨어졌다. 앞 유리창에 금이 가며 차가 쪼개질 것같은 충격이 급습했다. 에어백이 터지면서 그녀들이 쿠션 속으로 파묻혔다. 거인의 손아귀에 움켜 잡히듯 안전벨트에 거칠게 조여지며 그녀들이 비명을 터뜨리는 순간 온 몸의 뼈가 탈구되는 듯한 고통이 불길처럼 그녀들을 휘감았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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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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