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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0:03 387회 0건
늦은 오후의 농도짙은 바나나빛 햇살이 열려진 창을 통해 방안으로 무겁게 걸렸다. 창가 쪽에는, 햇빛이 사각형 창틀의 덧문을 빠져나오면서부터 만들어내는 직각 삼각형꼴의 투명한 공간이 너울대고 있었다. 그 삼각형은 이젤에 받쳐진 커다란 캔버스 쪽으로 낮은 각도로 형성되었다가 벽에 걸린 그림인양 고정되었다. 그 안에서 떠다니는 무수한 먼지입자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누워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답답하게 밀폐된 어두운 방안이었음에도 창가의 햇살은 조명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햇살은 마치 이쪽과 저쪽은 서로 다른 공간이라는 듯 일종의 오브제처럼 오롯이 창쪽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지난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그는 입안이 텁텁하고 머리가 아파왔다. 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이 방이 그녀의 하숙집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몽마르트에 있는 4층짜리 연립주택의 꼭대기 방일테고, 창 밖엔 사암조각으로 촘촘히 포장된 클리시 거리와 테르트르 광장이 보일 것이며, 광장 맞은편 끝쪽으로는 현재 그와 무엇보다도 진하게 관계가 맺어져 있는 빨간 풍차,즉 물랑루즈가 보일 것이다.
그는 눈을 굴려 칙칙한 방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그는 그녀가 세들어 살고 있는 이 4층짜리 건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개미굴처럼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불편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이 건물의 건축방식은 촌스럽고 경박하고 무엇보다 줏대가 없었다. 그것은 건축가들이 아무 이유없이 단지 현대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새 건물을 지으면서 장중했던 예전의 클래식컬한 건축양식들을 마구 뒤섞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소규모 연립주택만 하더라도 볼품없이 생략된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만든 조그맣고 둥근 아치가 현관에 튀어나와 있는가 하면, 지붕은 박공이 거리를 향해 드러나도록 만든 영국식 주택모양이었고, 창틀은 뾰족하게 각을 세운 고딕식 포인티드 아치를 사용했다. 그 말 뜻은 프리스타일로 뒤섞어 버린 이 건물의 건축양식이 완전히 생뚱맞다는 뜻이었다.

파리는 지난 몇십년 동안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제국에 걸맞는 도시 외양을 갖추기 위해 도시구조개혁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스만 남작의 지휘아래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한바탕의 난리법석이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된 이 구조개혁 덕분에 결국 아무 특징없는 무국적,무시대적 건물이 파리에 들어차게 되었다. 가끔 훌륭한 앙피르 스타일의 건물들도 지어졌지만 그녀의 하숙집처럼 후미진 곳까지 그런 건물들이 들어서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구조개혁으로 인해 굽었던 도로는 펴지고 좁았던 길이 넓혀졌으며 도시 곳곳에 녹지가 생겨났다. 무엇보다 하수도가 지하로 재정비 되면서 파리 전역에 지독했던 오물냄새가 사라졌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 오스만의 업적은 거기까지였다. 오스만이 파리의 다양한 건물양식마저 통일하여 군주의 영광을 드러내려 했을 때 우아하고 아름답던 수도는 그 전통을 잃고 기능적이며 기계적인 도시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도시가 지닌 미적 감수성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직업이 화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창가로 가 맑은 공기를 쐬고 싶었다. 방 안이 파스텔 물감처럼 독한 향이 나는 걸쭉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그는 앉아있던 소파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그의 키는 앉아있을 때나 서있을때나 전혀 차이가 없었다. 그의 다리는 불행하게도 11살 때 의자에서 떨어진 이후로 전혀 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귀족으로 태어난 그가 화가가 된 이유였다. 그는 탁자에 놓여있던 싸구려 꼬냑을 병째로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햇빛이 그가 그리던 캔버스 위로 엷게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아직 반도 완성하지 않은 그 그림은 그녀의 나체를 데생한 것이었다. 여러 개의 탁한 선들이 그녀의 신체적 특징을 왜곡시킨 상태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코가 들린 채로 징그러울 만큼 해괴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손과 다리는 신체적인 비례를 완전히 무시한 형태로 너무 크거나 너무 작게 그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데생은 일련의 리듬감이 부여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은 안쓰러울 만큼 창백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선들은 경제적일만큼 단순했다. 그는 묘사보다는 장식에 주목했고 보여지는 현실에 얽매이는 것을 혐오했다. 데생이 끝나면 채색은 유화물감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가 창가로 다가가 간신히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때 거실에 딸린 조그만 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녀도 잠을 깬 모양이었다. 4층에서도 제일 구석에 있는 그녀의 방에서 내려다본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큼지막하게 아래로 흩어지는 쉬폰 스커트에 알록달록하게 퍼 트리밍을 넣은 여인들이 하얀색 양산을 받쳐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 샹들리제 거리 쪽으로 내년 만국박람회에 맞춰 선보일 철골탑이 반쯤 올라간 상태로 특이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귀스타프 에펠이 시공을 맡고 있는 이 탑은 점차 완공이 가까와 질수록 그의 흥미를 부쩍 자극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처럼 그 탑도 이제까지의 탑들과는 달리, 여타의 구질구질한 의미를 배체한채 탑 자체에 충실한 본질적 요소만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파리의 도시 미관을 해칠 것을 염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아주 좋아..그는 건축 중인 탑을 바라보며 병에 입을 대고 독한 꼬냑을 한모금 마셨다. 타는 듯한 열기가 목을 지나 식도로 넘어갔다. 눈물이 핑돌며 뇌세포가 알알이 깨어났다. 그가 거리 반대편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 테르트르 광장을 지나 몽마르트 언덕 위에서는 또 하나의 건축물 즉,사크레쾨르 성당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폴 아바디가 설계한 사크레쾨르는 에펠이 짓는 탑과는 반대로 그가 가장 경멸해 마지 않는 방식으로 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다 지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빈곤한 창의력을 위장하기 위해서 소스들을 뒤섞은 샐러드처럼 여러가지 양식들을 되는대로 버무려댄 천박한 건물이었다. 하얀 아케이드와 박공벽,종탑과 돔이 의미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거기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언덕 위까지 그 무거운 자재들을 운반한 기술정도일 것이다.

그때 내실의 문이 열리며 아무 것도 입지않은 그녀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언제 일어났어요?" 그녀는 물랑루즈에서 일하는 무희답게 길고 곧은 다리와 탄탄한 배,그리고 가는 허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창문으로부터 그녀 쪽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그녀의 몸은 너무나도 많이 관찰하였던 터라 그에게는 아주 익숙하였지만 그럼에도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몸은 그가 데생한 그림 속의 누드와는 매우 달랐다. 그는 자신의 재능이 부여해준 독특한 표현방식대로 전통적인 원근체계를 무시하고 자의적인 기반에서 그녀의 특징들을 잡아내어 그녀를 마치 피곤하고 퉁명스럽고 과장스럽게 부푼 노파의 몸처럼 그려냈지만 일반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그녀는 아뫄리 듀발이 그려낸 비너스처럼 멋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그림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실지로 그녀는 춤과 술과 세속에 찌든 자신을 노파같다고 느끼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을 그린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때 받았던 충격은 정말 신선한 것이었다. 그후로 그녀는 옷을 입기도 하고 때론 벗기도 하며 수시로 그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가감없이 핵심을 찔러대는 그의 재능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나도 좀 전에 일어났어."
"창 밖에 뭐 있어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지."
"그래요? 어제까진 없었는데." 그녀가 자신의 몸이 밖에 노출되는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창가로 다가왔다. 창문 틀에 팔꿈치를 댄 후 몸을 낮춰 그위에 턱을 괸 그녀가 그와 시선의 높이를 대충 맞추고서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부지런한 사람들이라..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리를 약간 벌리고 완전히 쭉 편채로 허리는 거의 직각으로 굽혀 창틀에 기대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화강암처럼 굳세고 늘씬했다. 그는 그녀의 수선화같은 피부색과 유약을 발라구운 영국제 도자기처럼 매끈한 엉덩이,자신이 사용하는 붓털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허리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정말 개미같아 보여요. 그러니 부지런해 보일 수 밖에요." 그의 짙고 부드러운 눈썹이 웃음으로 인해 둥글게 굽어졌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내려다보는 인간들은 다 부지런해 보이겠군. 우리가 개미들을 보듯이."
"그렇겠지요." 그녀가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지 뭐예요. 하느님이 보기엔 우리도 부지런한 사람들 축에 들어갈테니까." 그가 손을 뻗어 바닥을 향해 유선형으로 매달려있는 그녀의 젖을 잡았다.
"맞아. 우리도 부지런한 사람들이지. 비록 퇴폐적이긴 하지만."
"그런가요. 그럼 전통적인 의미에서 부지런한 사람들은 저기들 있겠네요." 그녀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들어 시내 쪽에서 공사 중인 탑을 바라보았다.
"오, 당델리오네 드 세르메." 그가 이례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모두 불렀다. 그것은 그가 그녀의 통찰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당델리오네라는 그녀의 이름은 사자의 이빨이란 의미를 가진 민들레를 일컫는 말이었다.
"저 탑은 다음 세기에 예술의 핵심이 될거야. 내가 보기에 에펠이란 친구는 정말 천재라구."
"오,레이몽 드 툴루즈 로트렉." 그녀 역시 그를 흉내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상큼한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
"당신은 나의 천재적인 불구자라는 것을 잊었어요? 당신도 천재라구요." 그녀의 젖꼭지가 루비처럼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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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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