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상당히 끔찍한 경우라고 디지털퍼머는 혼자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소맷부리를 내려다 보았다. 디지털퍼머가 생각하는 끔찍한 경우라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 두 가지의 상황이 겹칠 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금슬 좋은 부부가 알고보니 맞바람을 피고 있더라,하는 것이 그런 경우였다. 그녀는 이런 것을 끔찍한 것으로 여겼다. 또는 아름다운 붉은 장미에 반해서 꽃잎을 땄더니 그 뒷면에 진드기가 잔뜩 달라붙어 있다면, 그녀에게 이것은 돌이킬 수 없을만큼 끔찍한 사건일 것이었다. 눈처럼 하얀 커프스에 까만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디지털퍼머에게 그런 불균형은 끔찍할 만큼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소맷부리는 티없이 깨끗한 상태로 깔끔하게 접혀 있었다.
문제는 저 살리에라였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빛의 분자들을 끌어모아 순간적으로 얼려서 만든 것 같은 저 거대 조상의 서늘한 쿨그레이 색감과, 그녀들이 헤매고 다니는 이 거칠고 황량한 벌판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어서 그녀로서는 이제 끔찍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쇼트웨이브가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끔찍하겠지만 참아."
"글쎄, 그게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라서." 디지털퍼머가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지금 끔찍하다고 생각한거 어떻게 알았어?"
쇼트웨이브가 한숨을 쉬었다.
"놀랐다면 미안해. 그냥 내 버릇이었어.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
"긴장하면 독심술 해?"
쇼트웨이브가 웃었다.
"웬 독심술? 아니야. 어렸을 때 에드거 알렌 포의 탐정소설을 읽었어. 오귀스트 뒤팡이라는 탐정이 나오는 단편소설들이었는데 거기 보면 뒤팡이 남의 생각을 추리하는 장면이 나와."
"생각을 추리한다고?"
"그래. 논리적으로 추적하는 거지."
쇼트웨이브가 구덩이를 피해 속력을 줄인 다음 기어를 로우에 놓고 둔덕을 올라갔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야. 네가 살리에라에 대해서 처음 말했던건 나랑 같이 학교 앞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였어. 거기에 살리에라를 본따서 만든 조악한 스테인레스 소금통이 있었지. 네가 미술사 시간에 그 작품을 배웠다고 자랑하던거 생각나?"
"응, 그랬지."
"난 분명히 네가 그 기억을 떠올릴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소금통을 열었을 때 소금은 별로 없고 그 안에 개미들이 버글댔지. 네가 소리질렀잖아. 그래서 더욱 잊어버리지 않았을 거야."
"맞아. 그 생각도 했어." 디지털퍼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웨이터를 부르고 그걸 치워달라고 한 다음에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었어. 어울리지 않는 두 상황이 겹쳤을 때 제일 끔찍하다구. 그러니까 개미들도 끔찍하지 않고 소금통도 끔찍하지 않은데 소금통에서 나온 개미들은 끔찍하다고 말야. 마치 소매에 묻은 때처럼."
디지털퍼머가 그 생각이 나는지 웃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말했니?"
"응, 그랬어. 여기까지 네 생각을 추적하는건 별로 어렵지 않았어. 그 다음에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는 데는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한데, 난 네가 지금 이 상황에서 저 커다랗고 하얀 살리에라를 발견한건 아마도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고 상상했어. 그렇잖아. 아무 것도 없이 온통 모래와 기암괴석 뿐인 이런 벌판에 난데없이 저런 예술작품이 나타나다니 말야. 너라면 절대 이런 걸 좋아하지는 않을테지. 그때 네가 시선을 내려서 소매를 살펴보더라. 아마도 소매가 깨끗한가를 보는 거였겠지. 그래서 난 내 상상이 맞았을 거라고 짐작했어."
"와." 디지털퍼머가 감탄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단하긴 하지만 앞으로 이딴 짓 하지마. 알았어? 왜 남의 머릿속을 캐내고 돌아다니는 거야, 응? 기분나빠. 그 짓도 끔찍해. 이 년아."
쇼트웨이브가 웃었다.
"단지 버릇일 뿐이라니까. 그 소설을 읽고 나서 뒤팡의 방식대로 남의 생각을 추적해보는 버릇이 생겼어. 어렸을 때였으니까 아무거나 다 따라할 때잖아. 그리고 재미도 있구. 어떤 경우는 제대로 맞췄고 어떤 경우는 완전히 엉뚱하게 빗나가곤 했지. 익숙해지니까 점점 맞추기가 쉬워지더라."
쇼트웨이브는 디지털퍼머를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포의 소설에선 이런 얘기를 해주면 상대방이 좋아하거나 신기해하는데 넌 고작 한다는 말이 끔찍하다는 거니?"
"그래. 재미있기도 하지만 끔찍하기도 해. 알아? 말하자면 끔찍하게 재미있어."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볼을 꼬집었다.
그녀들의 시야를 가로막은 마지막 언덕을 넘어서자 곧바로 돌출된 살리에라의 측면이 나왔다. 그것은 백금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받침의 둥근 곡면이었는데 그 두꺼운 토대 위에 두 남녀의 조상이 얹혀져 있었다.
그녀들은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디지털퍼머가 끼고 있는 골무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고 어떤 위험의 징후도 없이 주위는 조용했다.
"내려서 한번 살펴볼까."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어련하시겠어요, 미스 뒤팡. 내려서 조사하셔야죠." 디지털퍼머가 입술을 삐죽였다.
피식 웃으며 쇼트웨이브는 디지털퍼머를 쳐다보고는 차에서 내렸다. 디지털퍼머가 따라서 내렸을때 쇼트웨이브는 두 팔을 둘러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골짜기 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가 서늘했다. 다행히 용암의 강에서 멀리 떨어진 탓인지 이곳까지 유황냄새가 나진 않았다.
"이 조각 말야, 좀 이상해." 디지털퍼머가 가까이 오자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어떤 점이?"
"잠깐 기다려봐." 쇼트웨이브가 차로 돌아가 뒷자석에 쌓여있는 책더미를 뒤졌다.
디지털퍼머는 눈을 돌려 조각을 올려다 보았다. 곱슬머리를 하고 얼굴 가득 턱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조각이 뚫어지게 여자 조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눈동자가 없는 남자 조각의 시선이 그토록 비릿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엔 백금의 차가운 흰색 위로 푸르스름한 프러시안 블루가 유령처럼 떠돌았다. 남자 조각은 여자 조각을 향해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디지털퍼머는 그 남자조각이 이상한 의미를 담은 웃음을 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일듯 말듯한 그 웃음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떤 이상한 열망과 중금속에 오염된 강처럼 매우 불순한 의도를 가진 웃음이었다.
잠시 후 쇼트웨이브는 책 한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책 대출했네, 도서관에서." 디지털퍼머가 말하자 쇼트웨이브가 웃었다.
"대출은 이것아, 내가 관장인데."
쇼트웨이브가 가져온 책은 서양미술전집 중 세번째 권으로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것이었다.
"살리에라를 만든 조각가는 너도 알다시피 벤베누토 첼리니야. 후기 르네상스 예술가지."
그녀는 책의 후반부를 펴 후기 르네상스의 조각품들을 찾았다.
"여네."
쇼트웨이브가 책을 펴서 디지털퍼머에게 내밀었다. 그곳엔 순금으로 만들어진 살리에라가 공중에서 찍은 것처럼 부감처리된 사진으로 실려있었다. 사진 밑에는 < 벤베누토 첼리니, 1539년에서 1543년 사이에 제작 추정, 비엔나 쿤스디스토리셰 박물관, 높이 26센티미터, 넓이 33.5센티미터 > 라고 적혀있었다.
쇼트웨이브가 설명을 시작했다.
"봐, 사진의 이 남자는 넵튠이야. 포세이돈과 동일한 신이지. 삼지창을 들고 있지? 그건 트라이덴트라고 부르는 거야. 폭풍과 해일을 일으켜."
쇼트웨이브가 여자 조각을 짚었다.
"이 여자는 케레스야. 대지와 곡물의 여신이구. 데메테르라고도 불러. 그러니까 원래의 살리에라가 의미하는 바는 해양의 신과 대지의 신이 만나서 소금이 만들어진다는 뜻이야. 염전을 말하는거지, 응? 그도 그럴 것이 살리에라는 소금통이었으니까 말야."
디지털퍼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쇼트웨이브가 슬쩍 웃었다.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너 혹시 은하철도 999에서 나오는 여주인공 알아? 메텔이라는 여자."
"알지, 철이랑 메텔. 유명한 만화잖아."
"그래, 메텔은 케레스랑 관련이 있는 캐릭터야. 아까도 말했듯이 케레스는 데메테르라고도 불리는데, 데메테르는 "데"와 "메테르"가 합쳐진 말이야. 데는 대지라는 뜻이고, 메테르는 어머니라는 뜻이거든. 은하철도 999의 메텔은 이 메테르라는 말에서 따온 거래. 그러니까 철이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거지, 그 여주인공이."
"오호. 별거 다 아셔." 디지털퍼머가 시선을 백금으로 만들어진 살리에라로 옮겼다.
"근데 넌 이 조각에서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쇼트웨이브가 다시 사진을 가리켰다.
"이 삼지창의 각도. 사진에서는 넵튠이 그저 삼지창을 들고 있을 뿐이야. 그렇지?"
"응." 쇼트웨이브가 지적한대로 사진에서 넵튠은 삼지창을 위로 향한채 비껴들고 있어 단지 가지고 다니던 소지품을 들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저 조상의 삼지창을 봐. 저건 케레스를 겨누고 있잖아."
디지털퍼머가 그녀의 앞에 있는 커다란 남자 조상을 올라다 보았다. 과연 백금의 넵튠은 삼지창을 꼬나잡고 찌를 듯 케레스를 겨누고 있었다. 그것은 백금 넵튠의 이상한 웃음과 어우러져 연약해 보이는 케레스를 난폭하게 위협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더 이상한 건 케레스야." 쇼트웨이브가 말을 이었다.
"사진에서 보면 케레스는 왼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있어. 이건 매우 자연스런 자세처럼 보여. 그렇지?"
"그래."
"그런데 저 조상의 케레스를 봐. 완전히 자신의 젖을 붙들고 있어. 움켜잡고 있다구."
다시 디지털퍼머는 백금의 케레스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사진과는 다르게 케레스는 자신의 젖을 잡고 있었는데 그러쥔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발기된 젖꼭지가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점은 이거야. 케레스의 오른손을 봐. 사진의 케레스는 금관 같은 걸 잡고 있어. 그렇지? 그렇지만 저 조상은.."
쇼트웨이브는 잠시 말을 멈췄다. 디지털퍼머는 그녀가 왜 망설이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쇼트웨이브가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자신의 사타구니를 만지는거 같아."
디지털퍼머도 쇼트웨이브의 생각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쇼트웨이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백금의 살리에라에서 넵튠은 삼지창으로 케레스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주 뻔해보였다. 케레스는 그의 강요와 협박에 굴복하여 그가 보는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디지털퍼머가 보기에 케레스는 강요된 자위행위를 즐기지는 못하는것 같았다. 케레스의 얼굴표정은 그것을 멈추게 해달라는 것처럼 애절하게 일그러져 넵튠을 올려다 보는 것이었다. 반면 넵튠은 이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즐기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차에 내려서 처음 저 살리에라를 쳐다봤을때 느꼈던 이상한 감정은, 비단 넵튠의 표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쇼트웨이브처럼 단번에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기묘하게 변형된 조각의 형태가 발산하는 은밀한 성적 흥분을 감지했던 것이었다.
디지털퍼머는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냥 웃어넘겨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예전같으면 이런 점을 민감하게 지적한 쇼트웨이브를 분명 놀려줬을테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이 백금 살리에라가 주는 기묘한 에로티시즘이 너무나 거슬렸다. 아니, 저것을 에로티시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점잖은 표현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것은 파라필리아, 즉 구역질나는 변태성에 가까왔다.
"혹시 저 둘이 부부사이 아니였어?"
"아니. 넵튠의 아내는 따로 있어. 암피트리테라는 바다의 정령이야. 아무리 봐도 저건 말야, 다른 여자를 강간하기 직전의 모습이라구."
"정말 끔찍하다." 디지털퍼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디지털퍼머가 다른 각도에서 보기 위해 살리에라를 받치는 토대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리 와봐."
뒤쪽에서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소리쳐 불렀다.
"왜?"
"여기에 표지판이 있어."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에게 갔다.
"무슨 표지판?"
아무 말 없이 디지털퍼머가 케레스가 앉아있는 바로 밑부분을 가리켰다. 사진의 살리에라에는 그 부분에 세 개의 아치로 구성된 커다란 현관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백금의 살리에라엔 그 부분이 없어지고 대신 월계수 잎으로 장식된 사각형의 표지판이 조각되어 있었다. 거기엔 굵은 화살표와 함께 "제천시"라는 커다란 글씨가 써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서두르면 반나절"이라고 써 있었다.
"이게 뭐야?" 쇼트웨이브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제천시로 도로 나갈 수 있다는거야?"
"그러게. 빨리가면 반나절 안에 제천시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뜻 아냐?" 디지털퍼머가 희망에 설레는 어조로 말했다.
못 믿겠다는 눈길로 얼굴을 찌푸린채 그 표지판을 노려보던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쳐다보았다.
"대체 반나절이 무슨 뜻일까. 왜 정확한 거리를 안 적은거지?"
"여긴 아예 도로가 없으니까 정확한 거리를 모르나 부지. 아니면 우리가 쓰는 도량형이 여기선 쓰이지 않던가."
디지털퍼머의 설명은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어 쇼트웨이브로서는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녀로서도 딱히 어떤 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갈등을 하던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뭐, 사실이건 아니건 어쨌거나 갈 데도 없는데 이쪽으로 가 볼래?"
"응. 가자."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사실이면 좋겠다.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을거 같애."
"나도 그래." 쇼트웨이브가 간절해 보이는 디지털퍼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 반나절이라는 거리가 우리 차의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면 좋겠어."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소맷부리를 내려다 보았다. 디지털퍼머가 생각하는 끔찍한 경우라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 두 가지의 상황이 겹칠 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금슬 좋은 부부가 알고보니 맞바람을 피고 있더라,하는 것이 그런 경우였다. 그녀는 이런 것을 끔찍한 것으로 여겼다. 또는 아름다운 붉은 장미에 반해서 꽃잎을 땄더니 그 뒷면에 진드기가 잔뜩 달라붙어 있다면, 그녀에게 이것은 돌이킬 수 없을만큼 끔찍한 사건일 것이었다. 눈처럼 하얀 커프스에 까만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디지털퍼머에게 그런 불균형은 끔찍할 만큼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소맷부리는 티없이 깨끗한 상태로 깔끔하게 접혀 있었다.
문제는 저 살리에라였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빛의 분자들을 끌어모아 순간적으로 얼려서 만든 것 같은 저 거대 조상의 서늘한 쿨그레이 색감과, 그녀들이 헤매고 다니는 이 거칠고 황량한 벌판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어서 그녀로서는 이제 끔찍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쇼트웨이브가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끔찍하겠지만 참아."
"글쎄, 그게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라서." 디지털퍼머가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지금 끔찍하다고 생각한거 어떻게 알았어?"
쇼트웨이브가 한숨을 쉬었다.
"놀랐다면 미안해. 그냥 내 버릇이었어.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
"긴장하면 독심술 해?"
쇼트웨이브가 웃었다.
"웬 독심술? 아니야. 어렸을 때 에드거 알렌 포의 탐정소설을 읽었어. 오귀스트 뒤팡이라는 탐정이 나오는 단편소설들이었는데 거기 보면 뒤팡이 남의 생각을 추리하는 장면이 나와."
"생각을 추리한다고?"
"그래. 논리적으로 추적하는 거지."
쇼트웨이브가 구덩이를 피해 속력을 줄인 다음 기어를 로우에 놓고 둔덕을 올라갔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야. 네가 살리에라에 대해서 처음 말했던건 나랑 같이 학교 앞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였어. 거기에 살리에라를 본따서 만든 조악한 스테인레스 소금통이 있었지. 네가 미술사 시간에 그 작품을 배웠다고 자랑하던거 생각나?"
"응, 그랬지."
"난 분명히 네가 그 기억을 떠올릴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소금통을 열었을 때 소금은 별로 없고 그 안에 개미들이 버글댔지. 네가 소리질렀잖아. 그래서 더욱 잊어버리지 않았을 거야."
"맞아. 그 생각도 했어." 디지털퍼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웨이터를 부르고 그걸 치워달라고 한 다음에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었어. 어울리지 않는 두 상황이 겹쳤을 때 제일 끔찍하다구. 그러니까 개미들도 끔찍하지 않고 소금통도 끔찍하지 않은데 소금통에서 나온 개미들은 끔찍하다고 말야. 마치 소매에 묻은 때처럼."
디지털퍼머가 그 생각이 나는지 웃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말했니?"
"응, 그랬어. 여기까지 네 생각을 추적하는건 별로 어렵지 않았어. 그 다음에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는 데는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한데, 난 네가 지금 이 상황에서 저 커다랗고 하얀 살리에라를 발견한건 아마도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고 상상했어. 그렇잖아. 아무 것도 없이 온통 모래와 기암괴석 뿐인 이런 벌판에 난데없이 저런 예술작품이 나타나다니 말야. 너라면 절대 이런 걸 좋아하지는 않을테지. 그때 네가 시선을 내려서 소매를 살펴보더라. 아마도 소매가 깨끗한가를 보는 거였겠지. 그래서 난 내 상상이 맞았을 거라고 짐작했어."
"와." 디지털퍼머가 감탄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단하긴 하지만 앞으로 이딴 짓 하지마. 알았어? 왜 남의 머릿속을 캐내고 돌아다니는 거야, 응? 기분나빠. 그 짓도 끔찍해. 이 년아."
쇼트웨이브가 웃었다.
"단지 버릇일 뿐이라니까. 그 소설을 읽고 나서 뒤팡의 방식대로 남의 생각을 추적해보는 버릇이 생겼어. 어렸을 때였으니까 아무거나 다 따라할 때잖아. 그리고 재미도 있구. 어떤 경우는 제대로 맞췄고 어떤 경우는 완전히 엉뚱하게 빗나가곤 했지. 익숙해지니까 점점 맞추기가 쉬워지더라."
쇼트웨이브는 디지털퍼머를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포의 소설에선 이런 얘기를 해주면 상대방이 좋아하거나 신기해하는데 넌 고작 한다는 말이 끔찍하다는 거니?"
"그래. 재미있기도 하지만 끔찍하기도 해. 알아? 말하자면 끔찍하게 재미있어."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볼을 꼬집었다.
그녀들의 시야를 가로막은 마지막 언덕을 넘어서자 곧바로 돌출된 살리에라의 측면이 나왔다. 그것은 백금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받침의 둥근 곡면이었는데 그 두꺼운 토대 위에 두 남녀의 조상이 얹혀져 있었다.
그녀들은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디지털퍼머가 끼고 있는 골무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고 어떤 위험의 징후도 없이 주위는 조용했다.
"내려서 한번 살펴볼까."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어련하시겠어요, 미스 뒤팡. 내려서 조사하셔야죠." 디지털퍼머가 입술을 삐죽였다.
피식 웃으며 쇼트웨이브는 디지털퍼머를 쳐다보고는 차에서 내렸다. 디지털퍼머가 따라서 내렸을때 쇼트웨이브는 두 팔을 둘러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골짜기 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가 서늘했다. 다행히 용암의 강에서 멀리 떨어진 탓인지 이곳까지 유황냄새가 나진 않았다.
"이 조각 말야, 좀 이상해." 디지털퍼머가 가까이 오자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어떤 점이?"
"잠깐 기다려봐." 쇼트웨이브가 차로 돌아가 뒷자석에 쌓여있는 책더미를 뒤졌다.
디지털퍼머는 눈을 돌려 조각을 올려다 보았다. 곱슬머리를 하고 얼굴 가득 턱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조각이 뚫어지게 여자 조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눈동자가 없는 남자 조각의 시선이 그토록 비릿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엔 백금의 차가운 흰색 위로 푸르스름한 프러시안 블루가 유령처럼 떠돌았다. 남자 조각은 여자 조각을 향해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디지털퍼머는 그 남자조각이 이상한 의미를 담은 웃음을 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일듯 말듯한 그 웃음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떤 이상한 열망과 중금속에 오염된 강처럼 매우 불순한 의도를 가진 웃음이었다.
잠시 후 쇼트웨이브는 책 한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책 대출했네, 도서관에서." 디지털퍼머가 말하자 쇼트웨이브가 웃었다.
"대출은 이것아, 내가 관장인데."
쇼트웨이브가 가져온 책은 서양미술전집 중 세번째 권으로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것이었다.
"살리에라를 만든 조각가는 너도 알다시피 벤베누토 첼리니야. 후기 르네상스 예술가지."
그녀는 책의 후반부를 펴 후기 르네상스의 조각품들을 찾았다.
"여네."
쇼트웨이브가 책을 펴서 디지털퍼머에게 내밀었다. 그곳엔 순금으로 만들어진 살리에라가 공중에서 찍은 것처럼 부감처리된 사진으로 실려있었다. 사진 밑에는 < 벤베누토 첼리니, 1539년에서 1543년 사이에 제작 추정, 비엔나 쿤스디스토리셰 박물관, 높이 26센티미터, 넓이 33.5센티미터 > 라고 적혀있었다.
쇼트웨이브가 설명을 시작했다.
"봐, 사진의 이 남자는 넵튠이야. 포세이돈과 동일한 신이지. 삼지창을 들고 있지? 그건 트라이덴트라고 부르는 거야. 폭풍과 해일을 일으켜."
쇼트웨이브가 여자 조각을 짚었다.
"이 여자는 케레스야. 대지와 곡물의 여신이구. 데메테르라고도 불러. 그러니까 원래의 살리에라가 의미하는 바는 해양의 신과 대지의 신이 만나서 소금이 만들어진다는 뜻이야. 염전을 말하는거지, 응? 그도 그럴 것이 살리에라는 소금통이었으니까 말야."
디지털퍼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쇼트웨이브가 슬쩍 웃었다.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너 혹시 은하철도 999에서 나오는 여주인공 알아? 메텔이라는 여자."
"알지, 철이랑 메텔. 유명한 만화잖아."
"그래, 메텔은 케레스랑 관련이 있는 캐릭터야. 아까도 말했듯이 케레스는 데메테르라고도 불리는데, 데메테르는 "데"와 "메테르"가 합쳐진 말이야. 데는 대지라는 뜻이고, 메테르는 어머니라는 뜻이거든. 은하철도 999의 메텔은 이 메테르라는 말에서 따온 거래. 그러니까 철이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거지, 그 여주인공이."
"오호. 별거 다 아셔." 디지털퍼머가 시선을 백금으로 만들어진 살리에라로 옮겼다.
"근데 넌 이 조각에서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쇼트웨이브가 다시 사진을 가리켰다.
"이 삼지창의 각도. 사진에서는 넵튠이 그저 삼지창을 들고 있을 뿐이야. 그렇지?"
"응." 쇼트웨이브가 지적한대로 사진에서 넵튠은 삼지창을 위로 향한채 비껴들고 있어 단지 가지고 다니던 소지품을 들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저 조상의 삼지창을 봐. 저건 케레스를 겨누고 있잖아."
디지털퍼머가 그녀의 앞에 있는 커다란 남자 조상을 올라다 보았다. 과연 백금의 넵튠은 삼지창을 꼬나잡고 찌를 듯 케레스를 겨누고 있었다. 그것은 백금 넵튠의 이상한 웃음과 어우러져 연약해 보이는 케레스를 난폭하게 위협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더 이상한 건 케레스야." 쇼트웨이브가 말을 이었다.
"사진에서 보면 케레스는 왼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있어. 이건 매우 자연스런 자세처럼 보여. 그렇지?"
"그래."
"그런데 저 조상의 케레스를 봐. 완전히 자신의 젖을 붙들고 있어. 움켜잡고 있다구."
다시 디지털퍼머는 백금의 케레스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사진과는 다르게 케레스는 자신의 젖을 잡고 있었는데 그러쥔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발기된 젖꼭지가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점은 이거야. 케레스의 오른손을 봐. 사진의 케레스는 금관 같은 걸 잡고 있어. 그렇지? 그렇지만 저 조상은.."
쇼트웨이브는 잠시 말을 멈췄다. 디지털퍼머는 그녀가 왜 망설이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쇼트웨이브가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자신의 사타구니를 만지는거 같아."
디지털퍼머도 쇼트웨이브의 생각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쇼트웨이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백금의 살리에라에서 넵튠은 삼지창으로 케레스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주 뻔해보였다. 케레스는 그의 강요와 협박에 굴복하여 그가 보는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디지털퍼머가 보기에 케레스는 강요된 자위행위를 즐기지는 못하는것 같았다. 케레스의 얼굴표정은 그것을 멈추게 해달라는 것처럼 애절하게 일그러져 넵튠을 올려다 보는 것이었다. 반면 넵튠은 이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즐기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차에 내려서 처음 저 살리에라를 쳐다봤을때 느꼈던 이상한 감정은, 비단 넵튠의 표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쇼트웨이브처럼 단번에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기묘하게 변형된 조각의 형태가 발산하는 은밀한 성적 흥분을 감지했던 것이었다.
디지털퍼머는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냥 웃어넘겨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예전같으면 이런 점을 민감하게 지적한 쇼트웨이브를 분명 놀려줬을테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이 백금 살리에라가 주는 기묘한 에로티시즘이 너무나 거슬렸다. 아니, 저것을 에로티시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점잖은 표현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것은 파라필리아, 즉 구역질나는 변태성에 가까왔다.
"혹시 저 둘이 부부사이 아니였어?"
"아니. 넵튠의 아내는 따로 있어. 암피트리테라는 바다의 정령이야. 아무리 봐도 저건 말야, 다른 여자를 강간하기 직전의 모습이라구."
"정말 끔찍하다." 디지털퍼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디지털퍼머가 다른 각도에서 보기 위해 살리에라를 받치는 토대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리 와봐."
뒤쪽에서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소리쳐 불렀다.
"왜?"
"여기에 표지판이 있어."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에게 갔다.
"무슨 표지판?"
아무 말 없이 디지털퍼머가 케레스가 앉아있는 바로 밑부분을 가리켰다. 사진의 살리에라에는 그 부분에 세 개의 아치로 구성된 커다란 현관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백금의 살리에라엔 그 부분이 없어지고 대신 월계수 잎으로 장식된 사각형의 표지판이 조각되어 있었다. 거기엔 굵은 화살표와 함께 "제천시"라는 커다란 글씨가 써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서두르면 반나절"이라고 써 있었다.
"이게 뭐야?" 쇼트웨이브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제천시로 도로 나갈 수 있다는거야?"
"그러게. 빨리가면 반나절 안에 제천시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뜻 아냐?" 디지털퍼머가 희망에 설레는 어조로 말했다.
못 믿겠다는 눈길로 얼굴을 찌푸린채 그 표지판을 노려보던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쳐다보았다.
"대체 반나절이 무슨 뜻일까. 왜 정확한 거리를 안 적은거지?"
"여긴 아예 도로가 없으니까 정확한 거리를 모르나 부지. 아니면 우리가 쓰는 도량형이 여기선 쓰이지 않던가."
디지털퍼머의 설명은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어 쇼트웨이브로서는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녀로서도 딱히 어떤 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갈등을 하던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뭐, 사실이건 아니건 어쨌거나 갈 데도 없는데 이쪽으로 가 볼래?"
"응. 가자."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사실이면 좋겠다.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을거 같애."
"나도 그래." 쇼트웨이브가 간절해 보이는 디지털퍼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 반나절이라는 거리가 우리 차의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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