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들어서자 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정원이라고는 했지만 군데군데 약간 높은 둔덕을 만들어 키가 높은 황금측백나무나 연필향나무를 서너그루씩 심어 그늘을 만들어 놓은 것을 제외한다면 관상수로 보이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대신 이랑을 만들어 각종 야채와 과실수 등을 기르고 있어 오히려 과수원이나 밭에 가까운 정원이었다.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매우 숙련된 솜씨를 지닌 농부인 것이 틀림없었다. 땅은 비옥했고 작물들은 살이 오를대로 올라 있었다.
그녀들은 매실나무와 감나무들 사이로, 징검다리처럼 돌을 놓아 대청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만든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여기서 직접 길러서 음식을 만들어 파나부지?"
디지털퍼머가 꽃양배추와 순무양배추가 통통하게 커져가는 이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떡하냐. 시어머님이 농사를 지으시는 모양인데. 얼굴 좀 타겠다."
"분가하면 되지,이 년아."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놀리자 그녀가 째려보면서 말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니."
"장 담그다 송장 치우지 싶다." 쇼트웨이브가 혀를 내밀었다.
그녀들은 아욱과 고추와 감자, 오이, 우엉이 심겨져 있는 밭을 지나, 석류나무와 모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가 덩굴을 늘어뜨린 그늘을 건너갔다.
"이렇게 과일나무가 많은데 포도를 먹어야 된다는거야?" 쇼트웨이브가 불만이라는 듯이 말했다.
"아니, 꼭 먹어야된다는게 아니라 그게 제일 맛있으니까 달라고 그러래."
"달라는대로 준대?"
"몰라. 안 주면 못 먹는거지,뭐."
"하긴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포도 한송이쯤 안 주실까. 아양 좀 떨어봐. 어머님,포도 좀 먹을께요. 목구멍이 포도청이잖아요." 쇼트웨이브가 말투는 물론 얼굴표정까지 디지털퍼머와 비슷하게 흉내를 내며 말을 하자 디지털퍼머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샘내는 거지. 내가 이 집 며느리 된다니까. 그치."
"겁나게 샘난다,이 년아."
본관에 거의 다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주색과 분홍색, 연한 귤색과 금색을 교묘하게 배합한 화려한 단청이었다. 6층으로 짜여진 공포와 특이하게 휘어져 외부로 빠져나온 살미첨차들이 매우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모양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앙에는 넓은 대청이 있었고 안쪽에는 거의 4미터는 될 듯한 커다란 기둥들이 대들보와 종도리를 주두에 얹어 받치고 있었다. 정면 7칸 중에 대청 3칸을 제외한 좌우 2칸은 큰 창문이 나 있는 벽으로 막혀 있었다. 방으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들이 대청에 다다르자 산들바람이 과실수의 잎들을 쓸면서 상쾌한 페퍼민트향을 실어왔다.
"계세요?"
대청 안을 이리저리 훔쳐보던 디지털퍼머가 크게 소리를 냈다.
"누구시죠?"
생각지도 못했던 가까운 곳에서 대답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녀들은 너무나 깜짝 놀랐다. 소리가 난 곳은 대청마루 옆으로 면한 방이 있는 곳이었는데 자세히 쳐다보니 어둡게 그늘진 기둥 옆에 키가 좀 작은 사람과 큰 사람, 이렇게 두 명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둡지만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명 모두 여성인 듯 싶었다.
"놀래라. 거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디지털퍼머가 소리쳤다.
두 명의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인듯 동시에 한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일정한 보폭에 일정한 속도,치마의 흔들림조차 똑같이 느껴지는 동작이어서 이런 곳이 아니라 수영장에서 봤다면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선수들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체성이었다. 절반쯤 그늘에서 나온 탓에 몸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실내에 떠도는 어둑한 빛에 물들어 유령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램브란트." 쇼트웨이브가 중얼거리자 디지털퍼머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저 두 사람한테 떨어진 조명말야. 램브란트 조명이야. 광량이 적은데도 윤곽이 뚜렷.."
"야,이 년아."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팔을 꼬집으며 속삭였다.
"난 무서워 죽겠는데 자꾸 그런 소리나 할래?" 쇼트웨이브가 어깨를 움츠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지 뭐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 나중에 죽을줄 알아."
"미안."
둘 중에 키가 작은 여성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들은 누구신가?"
매우 카랑카랑 했지만 연륜이 있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말한 쪽을 자세히 쳐다보자 희미한 빛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주름이며 흰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이가 많이 들은 할머니였다. 다른 한쪽은 딸 인듯 싶었는데 중년의 부인처럼 보이는 여성이었다.
"예, 식사 좀 하러 왔어요."
디지털퍼머의 말에 두 명의 여성은 코끼리가 발등이라도 밟은 듯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중년 부인이 할머니의 귀에 대고 뭐라고 얘기하자 할머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가씨들이 원하는 것을 차려드려라."
할머니는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얼음을 지치는 것처럼 바닥을 미끄러지듯이 유영하는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들어오세요."
할머니가 방안으로 사라지자 부인이 대청 중앙으로 나오면서 말을 했는데 그녀 역시 할머니와 비슷한 동작을 보여주었다. 우아하면서도 서둘지 않고 기품이 있었는데, 평범한 인간이 보여주기엔 너무 산들산들거려 오히려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동작이었다.
그녀들은 머뭇거리다가 부인이 기다리고 있자 어쩔 수 없이 툇돌 위에 신을 벗고 대청으로 올라갔다.
"소희야."
부인이 건너편 방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천정이 하도 높아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들은 깜짝 놀라 천정을 밝힌 불빛을 쳐다보았다.
조명기구는 주홍색의 굵은 촛불들이었는데 유리로 된 커버에 씌워진 채 기둥의 2/3 쯤 되는 높은 곳에 설치되어 줄잡아 4,50개쯤 벽을 따라 돌아가며 대청을 밝히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툇보와 단주,그리고 윗층의 골격을 이루는 평주가 서로 복잡하게 직교하면서 입체적인 격자무늬를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여러가지 크기의 격자들이 천정을 생동감있게 구획짓고 있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창방과 평방이 걸려 사이사이로 아주 화려한 포작이 짜올려져 있었는데 적어도 9겹 이상이 겹친 운공과 연봉장식이 치밀한 보석세공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바닥은 적송으로 만든 쪽마루가 대청 전체에 반질반질하게 깔려 있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뒤편 벽 쪽에서 완만한 나선을 그리며 꼬여 있었다.
"저 많은 불이 어떻게 한꺼번에 들어왔지?" 부인이 이끌어준 대로, 순백색의 완초를 사용한 꽃무늬 돗자리에 앉으면서 쇼트웨이브가 나즈막히 물었다.
"글쎄. 촛불처럼 보이는 전구가 아닐까."
"전구같진 않은데..뭔가 불붙이는 기구가 있는거 아냐. 가스라이터 같은거 말야."
"그럼 끌 때는 어떻게 해?"
"그러네. 일일이 사다리타고 올라갈 수도 없고, 어쩌나. 소방호스로 물 뿌리나."
소희라는 사람에게서 대답이 없자, 부인은 쓸데없는 얘기를 주고받는 그녀들을 무시하고 건너편 방으로 사라졌다.
"그나저나 여기가 식당 맞니. 난 좀 이상한 생각이 든다." 둘만 남겨지자 쇼트웨이브가 입을 열었다.
"나두 그래. 식당이 뭐가 이렇게 썰렁해. 밥 먹는 사람도 없고. 메뉴판도 없고."
"아니, 메뉴판은 둘째 치고. 저 천정 좀 봐봐. 응? 무슨 놈의 식당에서 저렇게 높은 천정이 필요해. 안그래? 저 정도면 비행기도 날아들어오겠다,야. 그리고 무슨 마루가 이렇게 넓니. 여기가 격납고니?"
"그리고 난 또 이상했던게, 아까 우리가 식사하러 왔다고 그랬을때 그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거 같지 않았어? 그렇지?"
"그래. 나도 봤어. 왜 놀랐을까. 하도 오랫만에 손님을 받아서 그랬나."
"아니면 오늘이 정기휴일인데 우리가 쳐들어 온건지도 모르지."
"마침 거스름 돈이 떨어졌는데 우리가 사 먹으러 온건지도 몰라."
그녀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조금 있다가 쇼트웨이브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식당이 아닌가봐."
"그럼 밖에 있는 팻말은 뭐야. 마고네 할머니 버섯찌게 말야. 또 이 사람들은 왜 우리를 내쫓지 않지? 아까 그 할머니는 우리가 원하는걸 차려주라고 그랬던거 같은데."
"밥은 준다우."
또다시 바로 옆에서 말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녀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돌아보니 어느새 나왔는지 할머니가 기둥그늘에 조용히 서있는것이 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데도 가지 않고 그곳에 있었던것 같은 모습이었다. 디지털퍼머가 가슴을 부여잡고 울상을 지으며 쇼트웨이브 무릎에 기댔다.
"나 기절하겠어."
"할머니. 놀랬잖아요."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의 어깨를 감싸면서 말했다.
"먹고 싶은걸 말해요." 별다른 감흥없이 할머니가 말했다.
건너편 방에서 부인과 또 한명의 여성이 커다란 교자상을 들고 나왔다. 부인은 그녀들 앞에 교자상을 살며시 내려놓고는 말했다.
"뭘 드시려는지.."
"식사가 되나요?"
"네."
그녀들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버섯찌게 돼요?"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건너편 방으로 들어갔다. 부인과 같이 나온 다른 여성은 가만히 서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희야." 방 안에서 부인이 그 여성을 부르자 그녀는 조용히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쇼트웨이브가 기둥 쪽을 돌아보았는데 그새 할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할머니, 진짜 신출귀몰이네. 정신 사납게."
"조용해. 언제 또 옆에서 나타나실지 몰라." 디지털퍼머가 작은 소리로 말하며 주위를 살폈다.
정원이라고는 했지만 군데군데 약간 높은 둔덕을 만들어 키가 높은 황금측백나무나 연필향나무를 서너그루씩 심어 그늘을 만들어 놓은 것을 제외한다면 관상수로 보이는 것들은 거의 없었다. 대신 이랑을 만들어 각종 야채와 과실수 등을 기르고 있어 오히려 과수원이나 밭에 가까운 정원이었다.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매우 숙련된 솜씨를 지닌 농부인 것이 틀림없었다. 땅은 비옥했고 작물들은 살이 오를대로 올라 있었다.
그녀들은 매실나무와 감나무들 사이로, 징검다리처럼 돌을 놓아 대청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만든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여기서 직접 길러서 음식을 만들어 파나부지?"
디지털퍼머가 꽃양배추와 순무양배추가 통통하게 커져가는 이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떡하냐. 시어머님이 농사를 지으시는 모양인데. 얼굴 좀 타겠다."
"분가하면 되지,이 년아."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놀리자 그녀가 째려보면서 말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니."
"장 담그다 송장 치우지 싶다." 쇼트웨이브가 혀를 내밀었다.
그녀들은 아욱과 고추와 감자, 오이, 우엉이 심겨져 있는 밭을 지나, 석류나무와 모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가 덩굴을 늘어뜨린 그늘을 건너갔다.
"이렇게 과일나무가 많은데 포도를 먹어야 된다는거야?" 쇼트웨이브가 불만이라는 듯이 말했다.
"아니, 꼭 먹어야된다는게 아니라 그게 제일 맛있으니까 달라고 그러래."
"달라는대로 준대?"
"몰라. 안 주면 못 먹는거지,뭐."
"하긴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포도 한송이쯤 안 주실까. 아양 좀 떨어봐. 어머님,포도 좀 먹을께요. 목구멍이 포도청이잖아요." 쇼트웨이브가 말투는 물론 얼굴표정까지 디지털퍼머와 비슷하게 흉내를 내며 말을 하자 디지털퍼머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샘내는 거지. 내가 이 집 며느리 된다니까. 그치."
"겁나게 샘난다,이 년아."
본관에 거의 다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주색과 분홍색, 연한 귤색과 금색을 교묘하게 배합한 화려한 단청이었다. 6층으로 짜여진 공포와 특이하게 휘어져 외부로 빠져나온 살미첨차들이 매우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모양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앙에는 넓은 대청이 있었고 안쪽에는 거의 4미터는 될 듯한 커다란 기둥들이 대들보와 종도리를 주두에 얹어 받치고 있었다. 정면 7칸 중에 대청 3칸을 제외한 좌우 2칸은 큰 창문이 나 있는 벽으로 막혀 있었다. 방으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들이 대청에 다다르자 산들바람이 과실수의 잎들을 쓸면서 상쾌한 페퍼민트향을 실어왔다.
"계세요?"
대청 안을 이리저리 훔쳐보던 디지털퍼머가 크게 소리를 냈다.
"누구시죠?"
생각지도 못했던 가까운 곳에서 대답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녀들은 너무나 깜짝 놀랐다. 소리가 난 곳은 대청마루 옆으로 면한 방이 있는 곳이었는데 자세히 쳐다보니 어둡게 그늘진 기둥 옆에 키가 좀 작은 사람과 큰 사람, 이렇게 두 명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둡지만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명 모두 여성인 듯 싶었다.
"놀래라. 거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디지털퍼머가 소리쳤다.
두 명의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인듯 동시에 한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일정한 보폭에 일정한 속도,치마의 흔들림조차 똑같이 느껴지는 동작이어서 이런 곳이 아니라 수영장에서 봤다면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선수들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체성이었다. 절반쯤 그늘에서 나온 탓에 몸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실내에 떠도는 어둑한 빛에 물들어 유령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램브란트." 쇼트웨이브가 중얼거리자 디지털퍼머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저 두 사람한테 떨어진 조명말야. 램브란트 조명이야. 광량이 적은데도 윤곽이 뚜렷.."
"야,이 년아."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팔을 꼬집으며 속삭였다.
"난 무서워 죽겠는데 자꾸 그런 소리나 할래?" 쇼트웨이브가 어깨를 움츠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지 뭐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 나중에 죽을줄 알아."
"미안."
둘 중에 키가 작은 여성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들은 누구신가?"
매우 카랑카랑 했지만 연륜이 있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말한 쪽을 자세히 쳐다보자 희미한 빛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주름이며 흰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이가 많이 들은 할머니였다. 다른 한쪽은 딸 인듯 싶었는데 중년의 부인처럼 보이는 여성이었다.
"예, 식사 좀 하러 왔어요."
디지털퍼머의 말에 두 명의 여성은 코끼리가 발등이라도 밟은 듯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중년 부인이 할머니의 귀에 대고 뭐라고 얘기하자 할머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가씨들이 원하는 것을 차려드려라."
할머니는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얼음을 지치는 것처럼 바닥을 미끄러지듯이 유영하는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들어오세요."
할머니가 방안으로 사라지자 부인이 대청 중앙으로 나오면서 말을 했는데 그녀 역시 할머니와 비슷한 동작을 보여주었다. 우아하면서도 서둘지 않고 기품이 있었는데, 평범한 인간이 보여주기엔 너무 산들산들거려 오히려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동작이었다.
그녀들은 머뭇거리다가 부인이 기다리고 있자 어쩔 수 없이 툇돌 위에 신을 벗고 대청으로 올라갔다.
"소희야."
부인이 건너편 방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천정이 하도 높아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들은 깜짝 놀라 천정을 밝힌 불빛을 쳐다보았다.
조명기구는 주홍색의 굵은 촛불들이었는데 유리로 된 커버에 씌워진 채 기둥의 2/3 쯤 되는 높은 곳에 설치되어 줄잡아 4,50개쯤 벽을 따라 돌아가며 대청을 밝히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툇보와 단주,그리고 윗층의 골격을 이루는 평주가 서로 복잡하게 직교하면서 입체적인 격자무늬를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여러가지 크기의 격자들이 천정을 생동감있게 구획짓고 있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창방과 평방이 걸려 사이사이로 아주 화려한 포작이 짜올려져 있었는데 적어도 9겹 이상이 겹친 운공과 연봉장식이 치밀한 보석세공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바닥은 적송으로 만든 쪽마루가 대청 전체에 반질반질하게 깔려 있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뒤편 벽 쪽에서 완만한 나선을 그리며 꼬여 있었다.
"저 많은 불이 어떻게 한꺼번에 들어왔지?" 부인이 이끌어준 대로, 순백색의 완초를 사용한 꽃무늬 돗자리에 앉으면서 쇼트웨이브가 나즈막히 물었다.
"글쎄. 촛불처럼 보이는 전구가 아닐까."
"전구같진 않은데..뭔가 불붙이는 기구가 있는거 아냐. 가스라이터 같은거 말야."
"그럼 끌 때는 어떻게 해?"
"그러네. 일일이 사다리타고 올라갈 수도 없고, 어쩌나. 소방호스로 물 뿌리나."
소희라는 사람에게서 대답이 없자, 부인은 쓸데없는 얘기를 주고받는 그녀들을 무시하고 건너편 방으로 사라졌다.
"그나저나 여기가 식당 맞니. 난 좀 이상한 생각이 든다." 둘만 남겨지자 쇼트웨이브가 입을 열었다.
"나두 그래. 식당이 뭐가 이렇게 썰렁해. 밥 먹는 사람도 없고. 메뉴판도 없고."
"아니, 메뉴판은 둘째 치고. 저 천정 좀 봐봐. 응? 무슨 놈의 식당에서 저렇게 높은 천정이 필요해. 안그래? 저 정도면 비행기도 날아들어오겠다,야. 그리고 무슨 마루가 이렇게 넓니. 여기가 격납고니?"
"그리고 난 또 이상했던게, 아까 우리가 식사하러 왔다고 그랬을때 그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거 같지 않았어? 그렇지?"
"그래. 나도 봤어. 왜 놀랐을까. 하도 오랫만에 손님을 받아서 그랬나."
"아니면 오늘이 정기휴일인데 우리가 쳐들어 온건지도 모르지."
"마침 거스름 돈이 떨어졌는데 우리가 사 먹으러 온건지도 몰라."
그녀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조금 있다가 쇼트웨이브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식당이 아닌가봐."
"그럼 밖에 있는 팻말은 뭐야. 마고네 할머니 버섯찌게 말야. 또 이 사람들은 왜 우리를 내쫓지 않지? 아까 그 할머니는 우리가 원하는걸 차려주라고 그랬던거 같은데."
"밥은 준다우."
또다시 바로 옆에서 말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녀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돌아보니 어느새 나왔는지 할머니가 기둥그늘에 조용히 서있는것이 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데도 가지 않고 그곳에 있었던것 같은 모습이었다. 디지털퍼머가 가슴을 부여잡고 울상을 지으며 쇼트웨이브 무릎에 기댔다.
"나 기절하겠어."
"할머니. 놀랬잖아요."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의 어깨를 감싸면서 말했다.
"먹고 싶은걸 말해요." 별다른 감흥없이 할머니가 말했다.
건너편 방에서 부인과 또 한명의 여성이 커다란 교자상을 들고 나왔다. 부인은 그녀들 앞에 교자상을 살며시 내려놓고는 말했다.
"뭘 드시려는지.."
"식사가 되나요?"
"네."
그녀들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버섯찌게 돼요?"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건너편 방으로 들어갔다. 부인과 같이 나온 다른 여성은 가만히 서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희야." 방 안에서 부인이 그 여성을 부르자 그녀는 조용히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쇼트웨이브가 기둥 쪽을 돌아보았는데 그새 할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할머니, 진짜 신출귀몰이네. 정신 사납게."
"조용해. 언제 또 옆에서 나타나실지 몰라." 디지털퍼머가 작은 소리로 말하며 주위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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