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 내 생각엔 케로베르스가 아닌가 싶어."
쇼트웨이브가 트렁크에 싣고 다니던 차량 바디커버를 바닥에 깔고 누워, 혹시나 오일이 새지 않나 차 밑을 살펴보면서, 자기들을 쫓아오던 괴물이 뭐였는지 아느냐는 디지털퍼머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케로베르스? 그게 뭐야?"
"개야."
"개라구?"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디지털퍼머가 반문했다. 그녀는 차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바람이 모두 빠져 해파리처럼 흐늘거리는 에어백을 눈썹가위로 잘라서 떼어내는 중이었다.
"개였단 말이지. 치와와나 푸들처럼. 그럼 우릴보고 반갑다고 꼬리치면서 달려든걸 우리가 착각하고 낭떠러지로 밀어버린거네, 응?"
"물론 확실하진 않아. 내가 이전에 그 놈을 만난 적이 있던 것도 아니구."
쇼트웨이브가 차 밑에서 등을 밀어 빠져나왔다.
"케로베르스는 머리가 셋에다 꼬리는 뱀이고 입에서는 불을 뿜는다고 알려져 있어. 대체로 비슷하지 않았어?"
디지털퍼머가 떼어 낸 에어백을 땅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똑같다, 똑같애. 어느 놈이 보고 가서 소문냈나부다. 그나저나 여기다 쓰레기 버린다고 벌금 물리진 않겠지."
에어백이 터져버린 풍선처럼 펴지면서 누런 황무지 위를 뒹굴었다. 은회색 껍질 위에 세룰리언 블루로 인쇄된 회사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쇼트웨이브가 몸을 일으켜 바닥에 깔려있던 바디커버를 접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일이 새진 않네. 타이어도 괜찮고. 그치만 쇼크업소버는 전부 다 터진거 같애. 캠버나 캐스터, 토우, 킹핀도 죄다 뒤틀렸구."
"대체 뭐라는 거야. 이제 차를 못 탄다는거야, 탈 수 있다는거야?"
"탈 수는 있는데 어금니 꽉 깨물고 타야 된다는거야. 잘못하면 혀 깨무니까."
"걷지만 않아도 감사하지."
차가 일으키는 진동과 소음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심해졌다.
당장 바퀴가 빠져서 굴러가는 걸 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차의 상태가 염려스러워 쇼트웨이브는 속력을 내지 못했다. 앞 유리에 길게 간 금이 단두대처럼 황무지를 위 아래로 두 동강 내고 있었다.
"방향을 제대로 잡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암벽의 숲은 지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다.
"해가 질거 같아."
디지털퍼머가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점차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녀들은 헤드라이트를 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충 여기서 밤을 보내야 할거 같지 않니. 더이상 운전하는건 위험할거 같아."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보며 말했다.
디지털퍼머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검은 물처럼 흘러가는 바깥풍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쇼트웨이브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다가 마침내 아무 것도 없는 벌판 한가운데에 차를 세웠다.
차 안의 전자시계는 6시 7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제는 먹구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는데, 구름 사이로 희미한 잔광만이 거품처럼 끼어있었다. 쇼트웨이브는 시동을 껐다. 시계마저 불빛을 잃자 모든 조명이 죽은 채, 올리브유처럼 끈끈한 어둠이 차갑게 그녀들 주위를 잠식했다.
불빛 하나 없는 완벽한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다는 표현은 적당한 것이 아니었다. 어둠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연기처럼 벌판에서 피어올라 아직은 약하게 빛나는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디지털퍼머는 쇼트웨이브를 돌아보았다. 컬러를 완벽하게 앗아간 채도없는 음영만이 그녀의 윤곽을 어렴풋이 보여줄 뿐이었다. 쇼트웨이브의 커다란 이어링이 마지막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단 한번도 접한 적이 없었던, 풀벌레 소리 하나 없는 제로 데시벨의 적막이 찾아왔다.
"배 안고파?"
쇼트웨이브가 말을 꺼냈다. 고요함이 내리 누르는 중압감은 잠시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은 바다처럼 넓게 사방을 채우고 들어와서는, 아무 것도 침입할 수 없도록 치밀한 표면을 만들어 그녀들을 꼼짝 못하게 가두었다. 그녀들은 구멍 난 나룻배처럼 그 깊은 해저 속으로 침몰해 들어갔다. 고요의 바다엔 심지어 시간마저 얼어붙게 하는 힘이 있었다. 침묵이 귓속을 꽉꽉 채워 고막을 터뜨릴 것 같았다.
"배는 안 고픈데 커피 한잔 마시고 싶어." 힘겹게 디지털퍼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쇼트웨이브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왜 웃어?"
"그냥.." 쇼트웨이브가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나두 그래. 커피 한잔 마시고 싶었어. 내가 웃었던건 입맛이란게 정말 지독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그렇잖아. 한번 길들여 놓으면 죽을 때까지 바꾸기도 힘들고, 이제사 알았지만 죽은 다음에도 우리처럼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거야. 그치? 죽음보다 더 길고 질긴 거였어, 기호라는게 말이야."
한숨을 쉬며 눈가를 찡그리고 쇼트웨이브는 눈썹 끝을 긁었다.
"생각해 봐. 커다란 종이컵에 가득 담긴 따뜻한 카페라떼의 쵸컬릿빛 우유거품. 아니면 컵 밖까지 수북히 쌓아올린 하얀 생크림에 시나몬 가루를 듬뿍 뿌린 차갑고 까만 모카커피. 우리가 같이 테이크 아웃해서 먹던 커피들이었잖아, 응? 죽어서조차 우리를 따라다닐만큼 어느새 영혼까지 맛들여버린 그 미각들, 이미지들. 누가 우리 입맛을 이렇게 만든거지? 우리 뜻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어."
디지털퍼머가 약간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편안히 기댔다. 현기증이 나며 속이 울렁거렸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 것이라도 좋으니까 정말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그녀를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 캬라멜과 바닐라 시럽을 부은 밀크 마키아또 한 모금이 필요했다. 불안함이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벼려 놓았다.
이제 차 안에 있는 물건처럼 가까운 물체 외엔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 역시 아주 희미한 잔광을 제외한다면 거리조차 가늠할 수 없는 흑암의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변화는 점점 속도가 붙어, 디지털퍼머가 보고 있는 사이에도 남은 빛은 급속하게 힘을 잃고 사라져갔다.
디지털퍼머는 손가락을 눈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눈 앞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녀는 거미줄처럼 질긴 불안감이 자신을 칭칭 감아오는 것을 느꼈다. 감소함수를 극한으로 보내 미분하듯이 얼마 남지 않은 빛이 영으로 수렴됐다. 드디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처음으로 디지털퍼머는 죽음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녀의 육체와 의식이 잿더미처럼 스러져 암흑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녀의 존재가 무화되는 것 같은 절대적인 무력감이 뇌세포를 갈갈이 찢어놓았다. 전신이 테프론 테이프처럼 나사에 감겨 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빈틈없이 죄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미친 듯이 숨을 몰아 쉬며 쇼트웨이브 쪽으로, 아니 쇼트웨이브가 있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허우적대며 공간을 움켜쥐었으나, 그곳은 모든 것이 빨려나간 진공처럼 빈 곳일 뿐이었다. 그녀는 마치 가위에 눌린 듯 바위같은 어둠에 짓눌려 몸을 꼼짝할 수조차 없었다. 자신이 존재한다고 느끼게 해줄 쇼트웨이브의 체온이 간절히, 아주 간절히 필요했지만 그것을 어디에서도 얻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자, 디지털퍼머는 극단적인 공포에 휩싸인 나머지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그녀가 막 비명을 지르려고 했을 때 쇼트웨이브가 그녀의 손을 찾아 쥐었다.
"왜그래? 괜찮아?"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손을 와락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 거기 있는거지?"
"그럼 어디 갔을까봐?" 쇼트웨이브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나 너무 무서웠어. 죽는다는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 넌 어디가고 나 혼자 남겨진줄 알았어. 아니, 나 혼자 없어진줄 알았어."
울음섞인 목소리로 디지털퍼머가 두서없이 얘기했다. 쇼트웨이브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손바닥의 피부를 통해 트리플섹 같은 레몬 리큐르처럼 촉촉하게 디지털퍼머의 심장을 적셔왔다. 그녀는 차츰 진정됐고 잔뜩 굳었던 근육들이 긴장과 함께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잠깐 있어봐."
쇼트웨이브가 가방이라도 뒤지는 것처럼 부스럭대더니 이윽고 디지털퍼머의 머리를 더듬어 귓속에 무언가 꽂아넣었다. 소형 헤드폰의 한쪽이었다. 갑자기 운전석 밑에서 반짝하며 새파란 불빛이 들어왔다. 쇼트웨이브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아이리버의 하드디스크 내장형 엠피3 플레이어였다.
그녀가 둥글고 커다란 스위치를 조작하자, 알콜에 떨어뜨린 한방울의 블루베리 파이필링처럼 풀어진 환각적인 재즈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주가 갈색의 크라상처럼 겹겹이 부서져 흘렀다. 디지털퍼머에게도 익숙한 리듬이었다.
"이 노래 많이 들어봤어. 광고에서 쓰였던거 같은데. 그치?"
"그래. 플라이 미 투더문이야. 이 노래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어. 이건 펠리샤 샌더스가 부른 오리지널이구."
꿈을 꾸는 듯한 달콤한 보컬이 들려왔다. 아주 독하면서도 짜릿하게 쏘는 칵테일이 포도당 주사처럼 핏줄 속으로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디지털퍼머는 영어 히어링이 매우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사 한마디 한마디를 모국어처럼 또렷이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원래 제목은 플라이 미 투더문이 아니었어. 인 어더 워즈였지. 다시말해서, 다른 말로 하자면, 한마디로 말해서, 뭐 이런 뜻이지, 응? 하지만 펠리샤 샌더스가 이 노래를 처음 부를 때만 해도 그녀는 그렇게 유명한 가수가 아니어서 그녀에게 앨범제작을 제의하는 레코드 사는 없었어. 그녀는 캬바레에서 이 노래를 불렀대. 그래서 레코드 취입은 다른 가수들이 먼저 했지. 제목도 플라이 미 투더문으로 바꾸고. 그러다가 펠리샤는 1953년 물랑루즈라는 영화에서 삽입곡을 하나 부르게 되는데 이 노래가 대히트를 기록하게 돼. 영화는 툴루즈 로트렉이라는 화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었는데, 펠리샤가 히트를 친 노래는 웨어 이즈 유어 하트라는 노래였어. 그 후 펠리샤는 승승장구 하게 되고, 마침내 플라이 미 투더문을 레코딩하게 되지."
쇼트웨이브가 디제이처럼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가수의 보컬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달을 향해 날아가려는 아스라한 희망이었지만, 화성과 목성에서 수놓아지는 봄을 느껴보려는 천진난만한 소망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가 이루려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고, 그녀의 연인과 함께 도달하려는 신기루 같은 행복의 종극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진실이 되는 그 때, 그녀가 연인에게 고백하고자 하는 사랑의 언어들이었다.
한순간 디지털퍼머의 자아는, 어둠 속에 짙게 포화되는 유혹적인 가사와 리듬에 알알이 분해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들이 보컬의 크리미 비트같은 부드러운 선율을 따라 달을 향해 함께 젖어들었을 때 믿을 수 없는 그 일이 일어났다.
달이 떠오른 것이었다.
붉고 요사스럽고 낯선 달이, 표면에 거칠게 융기한 분화구를 또렷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게 지구에 다가온 달이, 모든 빛을 흡수해 버린 검은 색의 천공 위로 거짓말처럼 떠오른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달은 이미 떠 있었고, 샌더스의 노래가 연화된 버터크림처럼 흐르는 가운데 그녀들이 그 달을 마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연극이 시작되면서 무대의 장막이 열리듯 그녀들의 머리 위에서 두껍게 쳐진 커튼이 열리면서 생긴 일이었다.
인 어더 워즈, 다른 말로 하자면 하늘이 갈라져 열린 것이었다.
쇼트웨이브가 트렁크에 싣고 다니던 차량 바디커버를 바닥에 깔고 누워, 혹시나 오일이 새지 않나 차 밑을 살펴보면서, 자기들을 쫓아오던 괴물이 뭐였는지 아느냐는 디지털퍼머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케로베르스? 그게 뭐야?"
"개야."
"개라구?"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디지털퍼머가 반문했다. 그녀는 차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바람이 모두 빠져 해파리처럼 흐늘거리는 에어백을 눈썹가위로 잘라서 떼어내는 중이었다.
"개였단 말이지. 치와와나 푸들처럼. 그럼 우릴보고 반갑다고 꼬리치면서 달려든걸 우리가 착각하고 낭떠러지로 밀어버린거네, 응?"
"물론 확실하진 않아. 내가 이전에 그 놈을 만난 적이 있던 것도 아니구."
쇼트웨이브가 차 밑에서 등을 밀어 빠져나왔다.
"케로베르스는 머리가 셋에다 꼬리는 뱀이고 입에서는 불을 뿜는다고 알려져 있어. 대체로 비슷하지 않았어?"
디지털퍼머가 떼어 낸 에어백을 땅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똑같다, 똑같애. 어느 놈이 보고 가서 소문냈나부다. 그나저나 여기다 쓰레기 버린다고 벌금 물리진 않겠지."
에어백이 터져버린 풍선처럼 펴지면서 누런 황무지 위를 뒹굴었다. 은회색 껍질 위에 세룰리언 블루로 인쇄된 회사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쇼트웨이브가 몸을 일으켜 바닥에 깔려있던 바디커버를 접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일이 새진 않네. 타이어도 괜찮고. 그치만 쇼크업소버는 전부 다 터진거 같애. 캠버나 캐스터, 토우, 킹핀도 죄다 뒤틀렸구."
"대체 뭐라는 거야. 이제 차를 못 탄다는거야, 탈 수 있다는거야?"
"탈 수는 있는데 어금니 꽉 깨물고 타야 된다는거야. 잘못하면 혀 깨무니까."
"걷지만 않아도 감사하지."
차가 일으키는 진동과 소음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심해졌다.
당장 바퀴가 빠져서 굴러가는 걸 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차의 상태가 염려스러워 쇼트웨이브는 속력을 내지 못했다. 앞 유리에 길게 간 금이 단두대처럼 황무지를 위 아래로 두 동강 내고 있었다.
"방향을 제대로 잡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암벽의 숲은 지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다.
"해가 질거 같아."
디지털퍼머가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점차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녀들은 헤드라이트를 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충 여기서 밤을 보내야 할거 같지 않니. 더이상 운전하는건 위험할거 같아."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보며 말했다.
디지털퍼머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검은 물처럼 흘러가는 바깥풍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쇼트웨이브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다가 마침내 아무 것도 없는 벌판 한가운데에 차를 세웠다.
차 안의 전자시계는 6시 7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제는 먹구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는데, 구름 사이로 희미한 잔광만이 거품처럼 끼어있었다. 쇼트웨이브는 시동을 껐다. 시계마저 불빛을 잃자 모든 조명이 죽은 채, 올리브유처럼 끈끈한 어둠이 차갑게 그녀들 주위를 잠식했다.
불빛 하나 없는 완벽한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다는 표현은 적당한 것이 아니었다. 어둠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연기처럼 벌판에서 피어올라 아직은 약하게 빛나는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디지털퍼머는 쇼트웨이브를 돌아보았다. 컬러를 완벽하게 앗아간 채도없는 음영만이 그녀의 윤곽을 어렴풋이 보여줄 뿐이었다. 쇼트웨이브의 커다란 이어링이 마지막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단 한번도 접한 적이 없었던, 풀벌레 소리 하나 없는 제로 데시벨의 적막이 찾아왔다.
"배 안고파?"
쇼트웨이브가 말을 꺼냈다. 고요함이 내리 누르는 중압감은 잠시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은 바다처럼 넓게 사방을 채우고 들어와서는, 아무 것도 침입할 수 없도록 치밀한 표면을 만들어 그녀들을 꼼짝 못하게 가두었다. 그녀들은 구멍 난 나룻배처럼 그 깊은 해저 속으로 침몰해 들어갔다. 고요의 바다엔 심지어 시간마저 얼어붙게 하는 힘이 있었다. 침묵이 귓속을 꽉꽉 채워 고막을 터뜨릴 것 같았다.
"배는 안 고픈데 커피 한잔 마시고 싶어." 힘겹게 디지털퍼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쇼트웨이브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왜 웃어?"
"그냥.." 쇼트웨이브가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나두 그래. 커피 한잔 마시고 싶었어. 내가 웃었던건 입맛이란게 정말 지독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그렇잖아. 한번 길들여 놓으면 죽을 때까지 바꾸기도 힘들고, 이제사 알았지만 죽은 다음에도 우리처럼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거야. 그치? 죽음보다 더 길고 질긴 거였어, 기호라는게 말이야."
한숨을 쉬며 눈가를 찡그리고 쇼트웨이브는 눈썹 끝을 긁었다.
"생각해 봐. 커다란 종이컵에 가득 담긴 따뜻한 카페라떼의 쵸컬릿빛 우유거품. 아니면 컵 밖까지 수북히 쌓아올린 하얀 생크림에 시나몬 가루를 듬뿍 뿌린 차갑고 까만 모카커피. 우리가 같이 테이크 아웃해서 먹던 커피들이었잖아, 응? 죽어서조차 우리를 따라다닐만큼 어느새 영혼까지 맛들여버린 그 미각들, 이미지들. 누가 우리 입맛을 이렇게 만든거지? 우리 뜻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어."
디지털퍼머가 약간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편안히 기댔다. 현기증이 나며 속이 울렁거렸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 것이라도 좋으니까 정말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그녀를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 캬라멜과 바닐라 시럽을 부은 밀크 마키아또 한 모금이 필요했다. 불안함이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벼려 놓았다.
이제 차 안에 있는 물건처럼 가까운 물체 외엔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 역시 아주 희미한 잔광을 제외한다면 거리조차 가늠할 수 없는 흑암의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변화는 점점 속도가 붙어, 디지털퍼머가 보고 있는 사이에도 남은 빛은 급속하게 힘을 잃고 사라져갔다.
디지털퍼머는 손가락을 눈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눈 앞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녀는 거미줄처럼 질긴 불안감이 자신을 칭칭 감아오는 것을 느꼈다. 감소함수를 극한으로 보내 미분하듯이 얼마 남지 않은 빛이 영으로 수렴됐다. 드디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처음으로 디지털퍼머는 죽음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녀의 육체와 의식이 잿더미처럼 스러져 암흑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녀의 존재가 무화되는 것 같은 절대적인 무력감이 뇌세포를 갈갈이 찢어놓았다. 전신이 테프론 테이프처럼 나사에 감겨 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빈틈없이 죄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미친 듯이 숨을 몰아 쉬며 쇼트웨이브 쪽으로, 아니 쇼트웨이브가 있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허우적대며 공간을 움켜쥐었으나, 그곳은 모든 것이 빨려나간 진공처럼 빈 곳일 뿐이었다. 그녀는 마치 가위에 눌린 듯 바위같은 어둠에 짓눌려 몸을 꼼짝할 수조차 없었다. 자신이 존재한다고 느끼게 해줄 쇼트웨이브의 체온이 간절히, 아주 간절히 필요했지만 그것을 어디에서도 얻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자, 디지털퍼머는 극단적인 공포에 휩싸인 나머지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그녀가 막 비명을 지르려고 했을 때 쇼트웨이브가 그녀의 손을 찾아 쥐었다.
"왜그래? 괜찮아?"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손을 와락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 거기 있는거지?"
"그럼 어디 갔을까봐?" 쇼트웨이브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나 너무 무서웠어. 죽는다는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 넌 어디가고 나 혼자 남겨진줄 알았어. 아니, 나 혼자 없어진줄 알았어."
울음섞인 목소리로 디지털퍼머가 두서없이 얘기했다. 쇼트웨이브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손바닥의 피부를 통해 트리플섹 같은 레몬 리큐르처럼 촉촉하게 디지털퍼머의 심장을 적셔왔다. 그녀는 차츰 진정됐고 잔뜩 굳었던 근육들이 긴장과 함께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잠깐 있어봐."
쇼트웨이브가 가방이라도 뒤지는 것처럼 부스럭대더니 이윽고 디지털퍼머의 머리를 더듬어 귓속에 무언가 꽂아넣었다. 소형 헤드폰의 한쪽이었다. 갑자기 운전석 밑에서 반짝하며 새파란 불빛이 들어왔다. 쇼트웨이브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아이리버의 하드디스크 내장형 엠피3 플레이어였다.
그녀가 둥글고 커다란 스위치를 조작하자, 알콜에 떨어뜨린 한방울의 블루베리 파이필링처럼 풀어진 환각적인 재즈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주가 갈색의 크라상처럼 겹겹이 부서져 흘렀다. 디지털퍼머에게도 익숙한 리듬이었다.
"이 노래 많이 들어봤어. 광고에서 쓰였던거 같은데. 그치?"
"그래. 플라이 미 투더문이야. 이 노래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어. 이건 펠리샤 샌더스가 부른 오리지널이구."
꿈을 꾸는 듯한 달콤한 보컬이 들려왔다. 아주 독하면서도 짜릿하게 쏘는 칵테일이 포도당 주사처럼 핏줄 속으로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디지털퍼머는 영어 히어링이 매우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사 한마디 한마디를 모국어처럼 또렷이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원래 제목은 플라이 미 투더문이 아니었어. 인 어더 워즈였지. 다시말해서, 다른 말로 하자면, 한마디로 말해서, 뭐 이런 뜻이지, 응? 하지만 펠리샤 샌더스가 이 노래를 처음 부를 때만 해도 그녀는 그렇게 유명한 가수가 아니어서 그녀에게 앨범제작을 제의하는 레코드 사는 없었어. 그녀는 캬바레에서 이 노래를 불렀대. 그래서 레코드 취입은 다른 가수들이 먼저 했지. 제목도 플라이 미 투더문으로 바꾸고. 그러다가 펠리샤는 1953년 물랑루즈라는 영화에서 삽입곡을 하나 부르게 되는데 이 노래가 대히트를 기록하게 돼. 영화는 툴루즈 로트렉이라는 화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었는데, 펠리샤가 히트를 친 노래는 웨어 이즈 유어 하트라는 노래였어. 그 후 펠리샤는 승승장구 하게 되고, 마침내 플라이 미 투더문을 레코딩하게 되지."
쇼트웨이브가 디제이처럼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가수의 보컬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달을 향해 날아가려는 아스라한 희망이었지만, 화성과 목성에서 수놓아지는 봄을 느껴보려는 천진난만한 소망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가 이루려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고, 그녀의 연인과 함께 도달하려는 신기루 같은 행복의 종극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진실이 되는 그 때, 그녀가 연인에게 고백하고자 하는 사랑의 언어들이었다.
한순간 디지털퍼머의 자아는, 어둠 속에 짙게 포화되는 유혹적인 가사와 리듬에 알알이 분해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들이 보컬의 크리미 비트같은 부드러운 선율을 따라 달을 향해 함께 젖어들었을 때 믿을 수 없는 그 일이 일어났다.
달이 떠오른 것이었다.
붉고 요사스럽고 낯선 달이, 표면에 거칠게 융기한 분화구를 또렷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게 지구에 다가온 달이, 모든 빛을 흡수해 버린 검은 색의 천공 위로 거짓말처럼 떠오른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달은 이미 떠 있었고, 샌더스의 노래가 연화된 버터크림처럼 흐르는 가운데 그녀들이 그 달을 마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연극이 시작되면서 무대의 장막이 열리듯 그녀들의 머리 위에서 두껍게 쳐진 커튼이 열리면서 생긴 일이었다.
인 어더 워즈, 다른 말로 하자면 하늘이 갈라져 열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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