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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0:01 288회 0건
처음엔 검은 하늘에 얇은 진주색의 줄이 세로방향으로 끝없이 그어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줄은 거대한 반구의 천정 중앙을 표지하듯이, 천구를 반으로 가르며 생겨나더니 점차 진한 색깔로 바뀌어갔다. 벚꽃색으로, 다홍색으로, 그리고 완연한 카네이션 핑크색으로 색깔이 변하면서 굵기도 점점 굵고 넓어졌다. 마치 백도를 따라 하늘이 커다란 눈꺼풀을 들어올리려는 것 같았다.
갑작스런 하늘의 변화는 그녀들의 사념을 날려버렸다. 그녀들은 숨을 죽이고 뚫어져라 그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것은 먼 옛날 모세가 한 것처럼 홍해를 갈라치는 것 같기도 하였고, 팽팽히 잡아당긴 넓은 천에 칼을 대 좌우로 틈을 째내는 것 같기도 했으며, 전장에 들어찬 오합지졸의 적 보병들을 정예의 기병부대가 쐐기꼴 모양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하늘을 잔뜩 가렸던 구름들이, 이제 크림슨 빛으로 타오르는 직선에 밀려 보여주지 않던 그 속을 드러내며, 돔의 지붕을 열듯 양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열려진 하늘 동편에 핏빛으로 절여진 붉은 달이 떠 있었다.
마치 충돌이라도 할 듯이 그녀들의 눈 앞으로 확대된 달의 모습에, 그녀들은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난생 처음 보는 그 달은 키클롭스의 커다란 외눈처럼 그녀들을, 그리고 지상의 모든 것을 불길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충격을 받은 섬?한 달의 모습은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음 순간 달빛이 지상에 닿자 말그대로 경악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달빛을 받은 모든 풍경이 이질적인 모습으로 탈태하였다. 다른 공간, 다른 세계가 주름을 펼치듯이 드러나 그녀들을 귀기 흐르는 마법의 풍경 속으로 빠뜨렸다.
그것은 마치 선물을 단단히 감싼 포장지를 잡아 뜯어내자, 감춰져 있던 선물의 내용이 찢어진 포장지 사이로 드러나는 것과 비슷했다. 그것은 그녀들의 눈 앞에서 가속이 붙은 도미노가 전폭적으로 전멸해 가듯, 실시간으로 변해가는 사건이었고, 알 수 없는 이 세계의 정체를 이미지로 폭로하는 극단적인 설명이었다. 흔히 스크래치 기법에서 볼 수 있듯이, 달빛은 날카로운 칼처럼 지상에 드리워진 검은 암막을 긁어내며 그 밑에 숨겨져 있던 두번째 공간의 모습을 비틀어 그녀들의 시야 속으로 뽑아 올린 것이었다.

달빛이 닿는 곳부터 험준한 산등성이와 창처럼 뾰죽한 봉우리, 깎아지른 절벽과 계곡이 생겨났다. 산들은 첩첩이 쌓였고 험한 봉우리 뒤엔 더 커다랗고 웅장한 봉우리가 희미하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름드리 나무들로 무성한 숲과, 안개에 가려 위험해 보이는 늪이 빠르게 자기 영역을 넓혀갔고, 노루귀와 대극, 박조가리 나물과 이름모를 엉겅퀴들이 잔뜩 피어나는 벌판이 말을 달리듯 달빛을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선가 불어내리는 음산하고 차가운 바람이, 변해가는 지형을 전방향으로 쓸어가고 있었다.
그녀들이 있는 곳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달빛이 그녀들을 휩쓸자 그녀들의 차는 체리 가루를 뿌린 듯이 분홍색으로 반짝였다.
그녀들의 귀에 나뉘어 꽂힌 헤드폰에서, 샌더스의 음성이 노래의 마지막 구절인 아이 러브 유를 부드럽게 속삭이더니 쩡하는 고음의 노이즈를 발생시키고는 먹통이 되어 버렸다. 래치업으로 인해 과도한 전류에 휘말린 전자회로처럼, 엠피3 플레이어가 느닷없이 기능을 멈춰버렸고, 그녀들은 바늘로 찌르듯이 귀청을 울리는 오디오 잡음에 고개를 돌리며 자신들도 모르게 헤드폰을 잡아채 빼내버렸다.
그 순간 차는 전조등을 하이빔으로 내쏘면서 난데없이 와이퍼를 고속으로 동작시켰다. 바싹 마른 유리창을 긁는 블레이드의 기괴한 소음이 잔뜩 긴장한 그녀들을 소스라치게 놀라도록 만들었다. 디지털퍼머가 펄쩍 뛸만큼 놀라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배터리의 전원이 들어오면서 차 내부의 모든 조명이 한순간 빛을 발했다. 컴컴한 곳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들의 눈이, 조명이 내뿜는 연두색과 붉은 색, 베이지 색깔이 혼합된 빛의 홍수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채 혼란에 빠졌다. 차는 천식을 앓는 환자처럼 몇번을 쿨럭거리더니 생명이라도 얻은 듯이 강하게 시동이 걸리며,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멈추지 않고 길게 경적을 울려댔다.
알피엠을 계시하는 바늘이 저 혼자 미친 듯이 널을 뛰며 으르렁대자, 쇼트웨이브가 황급히 키를 돌려 온 오프를 반복했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키를 잠그자 차가 일으킨 모든 소동이 잠잠해졌다. 쇼트웨이브는 겁에 질려 의자를 꼭 붙잡고 있는 디지털퍼머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엠피 쇼크야." 쇼트웨이브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뭐라구?"
"저 달빛에 전자기펄스가 섞여 있었다구. 수소폭탄이 터질 때처럼 말야." 쇼트웨이브는 엠피3 플레이어의 전원장치를 계속 눌러댔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감마선같은 광량자들이 산란하면 높은 에너지를 가진 전자들을 만들어. 그걸 콤프턴 효과라고 그래. 그게 대기권 상공에서 흩뿌려진 거야. 그 전자들이 지상에 존재하는 자기장에 잡히면 비대칭적인 전류를 만드는데 그걸 가리켜서 전자기 펄스라고 불러. 이게 서지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거지. 그러면 영향을 받은 전자회로들이 지금처럼 난리를 치는 거야." 몇 번을 더 눌러보던 쇼트웨이브는 포기하고 플레이어와 헤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차는 괜찮은 거야?"
"글쎄. 그렇게 강하지 않은 이엠피 쇼크였다면..차의 전자회로는 기본적으로 이엠피 프로텍트 설계가 되어 있는걸로 아는데 어떨지 모르겠어." 걱정스런 말투로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그녀들이 다시 밖을 바라보았을 때는 그 모든 변화들이 이미 완전히 끝난 후였다. 그녀들은 산등성이를 지르며 기슭으로 굽어 들어가는 호젓한 오솔길에 있었다. 왼쪽 편으로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전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바다처럼 넓은 평원이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달이 붉은 갓을 씌운 전구처럼 빛나며 밤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밝게, 그러나 한편으로 사물을 차분히 응시할 수 없을 정도로 들뜬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잠자긴 다 글렀네." 밖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디지털퍼머가 힘없이 한마디 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어쩜 이렇게 변할 수가 있지." 디지털퍼머가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 좀 봐. 나이가 삼,사백살은 된거 같아."
"그래. 이 곳은 정말 우리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야." 쇼트웨이브가 운전대를 만지작 거리면서 말했다.
"무엇보다 여기는 일관성이 없어. 낮에 그 할머니네 집을 나오면서도 그랬지. 여기는 모든 것이 변하는거 같아. 수시로 말야. 우리가 살던 세상은 안 그랬지. 그 곳은 모든 것이 단단했어.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토대가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생활을 했지. 물론 변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서서히 이루어진 거였어."
그녀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여긴 달라. 여긴 마치 거품같아. 여러 개의 공간이 얽히고 설켜 있다가 약간의 요동만 있으면 기존의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게 튀어나오는거 같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게 내일 아침까지 있을거라고 확신을 못하겠어."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어쩌면 말야. 이런게 더 일반적인 세계의 모습이 아닐까."
"그건 무슨 말이야?"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디지털퍼머는 콧등을 긁었다. 잠시 후 그녀가 말을 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러니까 이 곳에 오기 전까지 단 하나의 세계만 알았어. 그렇잖아. 그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도 몰랐던 거야. 이제 우리가 죽었던 살았던간에 이 곳에 오게 되니까 이전까지의 관념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거야. 내 말은 우리가 새롭게 목격한 이 방식이 일반적으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이면 어떡하냐는 거지. 우리가 이전에 살았던 세계는 대단히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에 불과한 거구 말야, 이렇게 수시로 바뀌고 서로 뒤섞이는 방식이야말로 세상이 존재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라면."
쇼트웨이브는 잠자코 있었다. 또다시 어디선가 바람이 일어 평원의 일부를 쓸어갔다. 길게 자라있던 억새풀들이 한꺼번에 너울댔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쇼트웨이브는 운전대 밑으로 손을 뻗어 잠겨있는 키를 잡았다.
"어쨌거나 우린 이 곳에 익숙해져야 돼. 변화가 이 세계의 존재 방식이라면 당연히 우리도 변해야겠지." 그녀는 디지털퍼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도 좀 해봐. 시동 걸리라구 말야. 노이즈는 다 가라앉은거 같은데..작동을 할까."
그녀가 악셀레이터를 몇 번 밟은 후 키를 돌렸다. 키링키링 대면서 차에 시동이 걸렸다. 디지털퍼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쇼트웨이브는 디지털퍼머를 보고는 약간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잠이 안 온다니까 드라이브나 좀 할까."
"드라이브야 좋지. 그치만 네 차는 거의 폐차 직전인거 같아. 절벽 건너뛰다 작살났지, 이엠핀지 뭔지도 맞았지. 거기다 기름도 얼마 안 남은거 같은데."
한쪽 눈썹을 높이 올리며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기름 떨어지면 그때 세워놓고 자지,뭐. 기름 아끼다가 다음 번 공간이 바뀌었을때 물 속이면 어떡해. 드라이브도 못하잖아."
"아서라, 이 년아. 말이 씨 되는거 몰라."
쇼트웨이브는 기어를 드라이브로 바꾸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오솔길은 폭이 좁았고 완만하게 굽어져 기슭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길에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기슭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산굽이를 꺾어들자 음풍진 계곡 사이에 서너채의 건물들이 서 있는 것이 내려다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것은 제법 규모가 되는 절이었다.
중앙에 대웅전을 비롯해서 좌우 양편으로 극락전과 비로전, 그리고 그것들을 이어주는 긴 행랑이 보였다. 각 건물은 작은 마당이 하나씩 붙어 있었고 3칸 짜리 진여문으로 폐쇄되어 있었다. 선방과 강당을 겸한 승방과 그 맞은편 재가 신도들이 머무는 객사가 촘촘히 들어서 있는 커다란 요사채도 보였다. 절은 경사지에 여러 개의 대석단을 쌓아 계단식으로 터를 마련하여 좁아 보이지만 깊이감이 느껴지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금당의 앞 마당엔 아담한 탑이 2개가 마주 보고 있어 이곳이 통일신라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2탑식 가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절의 입구엔 큼지막한 중문이 서 있었고, 오래된 돌계단이 그 곳에서부터 실질적인 절의 입구인 만세루까지 곧게 이어져 있었다. 중문엔 그녀들이 앉아있는 차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월명사라고 적혀있었다.
현판을 확인하자마자 쇼트웨이브는 벼락에라도 맞은 듯이 크게 몸을 떨었다.
"왜 그래?" 그녀의 반응에 깜짝 놀란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잠시 말을 잃은채 절의 현판을 바라보던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까 너한테 사라진 절에 대한 전설 얘기했던거 기억나?"
"그래. 여자가 죽고 나서 없어졌다는 절 말이지?"
"물론 같은 이름이야 여럿 있을 수 있겠지만, 우연일까? 지금 보이는 저 절이 전설에 나오는 절 이름이랑 똑같아."
디지털퍼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디지털퍼머는 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에 땀이 나는지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아이씨."
디지털퍼머는 마치 투정을 부리듯이 짜증섞인 말을 내뱉고는 좌석 위에 무릎을 세우고 그 안에 머리를 파묻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의 등에 손을 올려놓았다. 손바닥으로 느껴질 만큼 그녀는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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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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